4장. 마음과 시간 3
녹취자 : 오희열
지난 시간에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향해서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배향하게 되고 회개함으로써 전향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써 정향하는 삶을 살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배향은 하나님을 등지는 것이고 전향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고,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회심”이라고 합니다. “회심”은 좁은 의미로는 일생에 한 번, 구원받을 때만 합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이 회심이 계속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회심이라고 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한 번의 회심과, 그 회심이 새로워지는 것,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깊이 은혜를 받으면 없던 것이 생기는게 아니라 예전에 나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로 한 그것이 내 속에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경험입니다.
다음 주 6월 4일에 알리스터 맥그래스 교수가 우리 교회에 옵니다. 아마 그분이 살아서는 우리나라에서 뵙지 못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지금 복음주의의 최대의 석학이시고 우리와는 약간의 입장차이가 있긴 하지만 보수적이고 중도적인 복음주의를 보여주고 어마어마한 글들을 썼습니다. 그분이 오시고 그때 조나단 에드워즈 세미나를 합니다. 우리교회는 장소를 빌려주고 공동주최를 하는 것인데 한 단체에서 그것을 하는데 경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니까 우리가 허리가 휘도록 경비를 보탰는데도 2만원씩 회비를 받습니다. 그런데 책이 35000원어치 책을 드립니다. 여러분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등록을 하고 오셔서 그분의 강의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분, 나, 덴버신학교 정성호교수, 심현찬 목사, 넷이서 발표를 합니다. 제 마지막 발표가 사랑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목회와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그 논물을 쓰느라 며칠 동안 링거를 맞았습니다. 여러분이 올 수 있다면 잊을 수 없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말씀사에서 나온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칭의” 한 권이 제공되고 최근에 제가 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한 권이 제공됩니다. 강의안도 드리고 도시락도 드리니까 회비를 낸 것보다 더 많이 받아가실 수 있습니다. 오셔서 꼭 들으시길 바랍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베르지오(배향, 背向), 컨베르지오(전향, 轉向), 레큐티(정향, 正向)입니다. 돌아오는 것만 아무리 강조해서 복음을 계속 이야기해도 같은 방향으로 똑바로 걸어가지 않는다면 삶이 지탱되지 않습니다. “정향의 삶”이 그래서 대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정향의 삶은 회심의 경험이 반복되면서 매일매일 자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묶는 것입니다.
종교를 영어로 뭐라고 합니까? “religion” 라틴어 “religere”에서 옵니다. 이것은 “묶다”입니다. 언약이라는 것, 히브리 말로 “베리트”라는 것은 아카드어 “바리투”에서 옵니다. 이것은 두 명의 죄수가 있을 때 각각의 죄수의 다리 하나씩을 서로 묶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죄수는 운명 공동체가 됩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삽니다. 이것이 “베리트”의 의미입니다. “religion”, 종교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성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신의 삶을 규율하기 위해서는 그 종교의 가르침이 내 마음을 계속 묶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머릿속에 있는 종교에 대한 앎과 자신의 삶 사이에 분리가 됩니다. 그 마음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묶는 것이 “경건”입니다. 경건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고 이것을 통해서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묶일 수 있습니다. 그때 정향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정향의 삶을 살아갈 때 배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재미없고 속박만 받는 삶이지만 전향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행복한 삶입니다.
제가 어제 교회에서 보여줄 유튜브 영상을 하나 골랐는데 정말 감동적입니다. 일생동안 술과 마약으로 세 번이나 죽을 뻔 하면서 엄마의 사랑을 버렸던 사람이 세계 챔피언의 자리까지 갔다가 엄마가 죽은 후에 통곡하는 영상입니다. 전 세계의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는데 1분 안에 모든 학생들을 다 울렸습니다. 술, 마약, 흡연, 루저들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방탕한 삶, 그것들이 마지막으로 데려가는 곳은 죽음밖에 없다고 하고 자신의 엄마에게 너무나 죄송하다고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한 번밖에 없는 삶의 의미는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미의 최종적 원인이지만 살아가는 것은 나이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의미와 연결될 때 그것이 진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도 이야기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의미를 부여해주기 전까지는 하나의 단어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여한 후에는 그 사랑은 단어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 실제적인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는 이 정향의 삶을 살아갑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이 정향을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도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저는 여기 연설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다 살아본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경험대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 까불고 놀아봐야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나중에는 외로운 고통과 눈물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얻어도 말입니다. 진실하게 안 느껴지십니까? 여러분은 이 학교의 학생이지만 나는 명성도 얻어 봤고 작가로서도 성공했고 많은 것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아침이슬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추론을 하자면,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이 있습니다. 이렇게 배향을 합니다. 여기에 뭐가 필요합니까? 당연히 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붙들고 있는데 뛰쳐나가니까 힘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된 사람이 다시 돌아와서 전향을 한다고 할 때, 저쪽으로 가던 사람이 돌이켜서 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도 당연히 힘이 필요합니다. 올바른 길을 가는 “정향”의 삶을 살기 위해서, 좌우로 흔들릴 수 있고 넘어질 수 있는데 이것을 지탱해주려니까 힘이 필요합니다. 이 “힘”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사랑의 힘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힘이 무엇입니까? The power of love 가 무엇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이야기했지만, 힘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작용하는 현상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물이 있는데 이 사물이 A라는 상태에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B라는 상태로 변합니다. 그러면 힘이라는 것은 A 와 B 사이의 관계입니다. 한 사물이 A상태에 있었는데 어떻게 B라는 상태가 되었는가? 그것에 대한 설명은 “힘”이 거기에 작용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은 자기를 자기로서 지탱하려는 힘과 허물려는 외부의 힘과의 균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물이 있으면 이 사물은 안으로 작용하는 힘 때문에 자기를 지탱하고 외부의 영향을 받아서 이 힘이 이것들을 허물려고 하는 것을 굴복함으로써 A에서 B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것이, 우리가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 다 닳고 낡아서 망가집니다. 그것도 자기를 지탱하는 힘의 와해에 의해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끝은 마지막에 원소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원소도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원소도 열을 가하면 그 원소가 더 단순한 원소로 돌아가거나 혹은 여기에 없는 또 다른 원소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희토류”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원소기호 57번부터 71번까지의 란타넘계 원소 15개, 21번 스칸듐, 39번 이트륨 등 총 17개 원소를 총칭하는 것입니다. 너무 희귀한 원소라서 “희토”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없이는 현재 기술로는 반도체를 만들지 못합니다. 앞으로는 변할 것입니다. 그런 것도 마찬가지로 열을 가하면 그렇게 희귀한 것으로 변합니다. 지구를 보면서 운석이 떨어져서 만들어진 것인지,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인지를 아는 방법은 열을 통해서 측정하는 것입니다. 금 같은 것은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50억 도가 넘는 어마어마한 열에 의해서 금이 형성됩니다. 앞으로 과학기술이 더 발전하게 되면 잘 모르겠지만 지금 현재는 1억 도나 3억 도밖에는 못 올리는데 50억 도까지 올리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금을 만들 수 있는 때가 올 것이고 금값은 떨어질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힘”이라는 것은 결국 사랑의 힘입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창조되었는데 왜 저쪽으로 뛰쳐나가려고 할까? 결국 자기 사랑의 힘입니다. 자기사랑은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모든 질서 안에서 행복해지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행복한 상태로 가려는 것이 자기 사랑입니다. 이기심입니다. 이러는 동안 이 사람은 행복을 찾아가지만 행복은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자기 사랑의 결과는 언제나 비참을 가져옵니다. 그 속에서 충분한 고통을 맛봅니다. 인생의 모든 고통은 행복해지려는 욕망을 갖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 행복이 올바른 행복이 아닐 때 행복에 대한 욕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 멀리 배향의 삶을 살게 됩니다.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넣는 것도 행복해지는 비결 중에 하나이지만 욕심의 크기 자체를 줄이는 것이 행복한 비결입니다.
이 사람이 이쪽으로 돌아옵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힘이 필요합니다. 이 힘은 수요와 설득의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수요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죄인이 되었고 인간 자신은 내버려두면 하나님을 떠난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결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어느 순간에 예수를 믿을 때 그의 영혼에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힘을 수여하시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중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항상 이런 식으로 하시는 게 아니라, 이렇게 돌아온 사람이 정향의 삶을 살기 위해서, 그리고 아까 이야기한 컨베르지오를 좁은 의미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것의 반복된 경험이라고 할 때 그 반복하는 방식이 설득의 방식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성과 믿음에 설득하심으로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설득이 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다시 정향의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제공하십니다. 그 힘은 육체의 힘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도덕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올바른 것을 사랑하고 올바른 것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면 하나님은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 그라티아입니다.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 힘으로 인해 살아갈 수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b. 마음의 방향과 힘
1) 마음에 작용하는 힘으로서의 성령
그 힘의 정체가 성령입니다. 성령님의 힘이 우리의 마음의 힘의 정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첫째로, 마음에 작용하는 힘으로서의 성령의 역사이다. 하나님을 배향하는 인간 존재 안에는 그 큰 힘의 능력을 생각해 보라. 명백한 진리의 빛이 지성에 비취는데도 그것을 거스르는 반역하는 인간을 보면 그 마음에 미치는 영혼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된다(시 78:8, 사 48:4). 마음의 힘은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의 힘이다. 성령은 이처럼 힘을 영혼 안에서 또 다른 힘을 작용함으로써 인간의 마음의 방향을 바꾸거나 작용에 영향을 미치신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마음의 방향을 바꾸신다. 인간의 마음의 방향은 둘 뿐이니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자기를 사랑한다.
그 이외의 것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 이외의 것을 사랑하는 것은 하위적인 것이지 결국은 그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 대신 인간은 하나님이 강력하게 힘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자기를 사랑하며 사는 것은 거의 운명입니다. 우리가 코스모폴리탄을 볼 수 있습니다. 사회 동포주의자들 말입니다. 신앙이 없는데도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산다든지 정치적인 올바름을 위해서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 신학적 철학에서는 자기 사랑이 확대된 것으로 봅니다. 당연히 그런 것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스템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타락한 후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사랑의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영혼의 성향의 힘은 경향성의 크기다. 배향하여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적의가 힘으로 존재한다. 작용하는 반감과 대적도 마음의 방향을 결정짓는 힘이다. 영혼 안에 있는 자기 사랑의 경향성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를 두려는 목적을 지향한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 안에 역사하는 죄의 경향성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살아라.” 하고 말씀하시는데 “싫어!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왜?”, “나는 그게 싫으니까.” 합니다. 항상 말로는 “하나님 같이”라고 하지만 “같이”가 아니라 하나님 위에서 최종적인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교만(슈페르비아)”라고 부릅니다. 교만은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죄가 들어온 것은 지성적으로는 교만 때문이고 의지적으로는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영혼을 변화시켜 사랑으로 돌이키게 하는 성령의 작용은 힘이다. 이 힘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존재 중 참으로 있으신 존재이다. 그리고 이 존재의 본질은 경향성들과 힘이다.
출애굽기 6장14절에 보면, “I am who I am.”이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다.” 번역하기 애매합니다. “나는 … 이다, 계시다”인데 “나는 내가 있는 바로서 이다.” 그러면 철학적으로 볼 때 “나는 있는 바로서 이다.”라고 하는 것인데, 어렵습니까? 여기에서 존재와 존재자의 문제라는 담론으로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 여기 인간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존재합니다. 여기의 인간은 많은 우연적인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집에서 태어난 딸인데 하나는 예쁘게 생겼고 하는 별로입니다. 어떤 사람은 뚱뚱할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고 튼튼할 수도 있습니다. 공부를 잘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습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을 수도 있고 흙수저도 못 물고 태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우연적인 요소가 있는데 모두 “존재자” 속에 포함된 것입니다. 현실 속에 있는 존재자입니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어느 것도 본질은 아닙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하는 그것이 본질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 속에 있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은 얼굴이 예쁘게 있지만 30년이 지나고 나면 다 늙어서 마찬가지가 됩니다. 지금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하지만 아버지도 망하고 자기도 망하면 흙수저보다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공부를 잘한다고 해도 치매에 걸리면 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은 우연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대는 그대이고 그대의 동생은 그대의 동생입니다. 누가 예쁜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동생을 구분하게 하는 본질적인 것, 그러면서도 이렇게 변천하는 것이 아닌 것, 그것이 본질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공통적인 본질도 있을 것입니다. A라는 사람은 B가 아니기 때문에 전혀 독특한 그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본질입니다. 규명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우리는 신학적으로 간단하게 “육체와 영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영혼이 훨씬 본질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영혼이 그 사람을 그 사람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공각기동대 이야기를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인간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들은 존재자와 존재가 다릅니다. 존재자에서 수없이 벗겨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존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존재자와 존재 사이에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양을 가지고 시간 속에서 태어나고 시간 속에서 자기의 무엇을 잃어버리고 변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이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말씀하신 딱 두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4장, “하나님은 영이시다.”라고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나는 내가 있는 바이다.”입니다. 이것도 해석을 두고 엄청나게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미완결형입니다. 히브리어는 시제가 없고 시상만있습니다. 그래서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끝난 것은 과거이고 지속되고 있는 것은 미래든 현제든 과거든 모두 미완결형입니다. 진행형, 미래진행형, 과거진행형, 현재진형형의 구분이 없고 다 미래형으로 씁니다. “나는 나로서 있는 중인 나이다.”부터 시작해서 수없는 해석의 가능성들이 나옵니다. 하나님만이 참된 존재이시고 나머지는 모두 존재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을 보는 마음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면 그것은 범주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이렇게 핫도그를 세던 마음을 가지고 인간의 영혼을 세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그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경향성을 가지신 성령은 곧 힘으로 인간의 마음과 영혼 안에 작용하신다. 성령께서 배향하는 삶을 사는 죄인을 돌이키게 하시는 그 힘은 배향의 본성 안에 있는 인간의 마음의 힘을 능가하는 것이니 그렇지 못하다면 인간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성령의 특별한 은혜의 작용은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인간의 영혼의 경향성을 재창조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추루한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한다. 이 때 인간간의 마음은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자신의 비참에 대한 이식으로 말미암는 정동을 경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회심의 경험이다.
성령의 특별한 은혜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자기에 대한 사랑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마음의 방향을 항구적으로 정향하게 하는 데는 강한 힘이 필요하고, 참회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 깨어짐의 경험은 바로 이러한 힘의 작용에 대한 인간 영혼과 마음의 반응이라고 살 수 있다. 이러한 힘의 작용 안에서 인간은 죄에 대한 사랑과 자기 의에 대하여 본성의 파괴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자기 깨어짐입니다. 이렇게 쓰기도 하고 이렇게 쓰기도 합니다. 둘로 나누어집니다. “자기”, 그리고 “깨어진다.” 라는 단어입니다. 어려서부터 교회 속에서, 특히 개혁주의 교회 속에서 많이 들어오던 용어입니다. “자기가 깨뜨려졌다.”라는 이야기인데 자기 깨어짐이 무엇인지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것이 2005년도의 일입니다. 아직도 도서관에 있을 것입니다. 재밌는 책은 아니지만 철학적 사유에 대해서도 깊은 유익을 줄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기가 아닙니다. “자기”가 항상 나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라는 것은 중립적이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인간의 아가페에 대한 반응으로서 까라따스의 사랑으로 이런 사랑의 질서가 이루어져 있을 때 이 사람이 여기에 있고,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기는 여기서 이야기하는 “자기”가 아닙니다.
신기하게도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도 나오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도 나옵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self love에 대해서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거기서 말하고 하는 뜻들 중에서 긍정적인 뜻이 없는 것은 아닌데 신학적으로, 그리고 기독교 철학적으로 보면 근본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자기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자신을 사랑하면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을 등져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등지지 않고 자기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자기를 사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사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만약,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고자 한다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을 등져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을 등지지 않고 자기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자기를 사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합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는 생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부부 사이만의 고백이 아니라 온 인류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가운데 이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가운데 이 사람은 이미 자기를 사랑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상은, 모든 사람을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게 되고 누구로부터도 사랑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의 상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랑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은 인간 차원에서의 사랑입니다. 알다시피 인간이라는 것은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숭고해 보이던 사랑도 나중에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입증됩니다. 내가 지금은 젊고 예쁘고 능력 있고 아빠가 돈이 많아서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그것이, 진짜 그 사람을 향한 사람일까? 반문해보게 됩니다. “못생기고 아빠가 가난하고 예절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입니까?” 아니, 그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그런 좋은 점 때문에 사랑하는 그것이 항구적인 사랑이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 없이는 못 산다”고 하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말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너 없이 못 살게 하는 그 이유가 1년도 안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랑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인간의 만족은, 처음부터 이 피조물이 하나도 없을 때도 하나님은 사랑이셨습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인간의 세계 속으로 투영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 자신이 거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우주적인 흐름 안에 있는 것,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 사랑 때문에 내가 도구가 되어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이 통로가 되어서 우리 전체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되는 것이고 그 안에서 행복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데서 진정한 행복이 오는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이런 사색들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자기 깨어짐’이라는 것이 무엇에 대한 깨어짐인가? 두 개에 대한 깨어짐입니다. 첫째는 자기 사랑, 두 번째는 자기 의에 대한 깨어짐입니다. 자기 사랑은 하나님 바깥에 있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자기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하나님을 배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배향하고서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만약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것은 본인의 느낌이지 펙트가 아닙니다. 그래서 젊을 때 많은 쾌락을 느낄 수 있는 나이에는 이런 이야기가 가슴에 다가오지 않고 나이가 다 들고 늙어서 즐거운 것이 사라질 때 그때 비로소 이런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됩니다. 자기 사랑에 대해서 깨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의에 대해서 깨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자기 의는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존재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의지하겠습니까? 안 합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는 마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비의존의 마음입니다. 이런 자기 의에 대해서 깨지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한 교훈을 주시면서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갑니다. 그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시간을 정해서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이 기도합니다. “나는 십일조도 드리고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합니다.” 다 펙트입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세리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 고백은, “나는 죄밖에 지은 것이 없습니다.” 하며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이것도 펙트입니다. 놀랍게도 둘 다 펙트인데 하나님은 의롭게 산 바리새인보다는 불의하게 살아온 세리가 더 의롭다는 여김을 받고 내려가게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리새인의 마음 속에서는 이 자기 의가 있어서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진짜로 그렇게 동족들의 세금을 약탈해 먹고 거의 흡혈귀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자기 삶 전체에 의롭다고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세리는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에 대해서 깨뜨려질 때 고통스럽겠습니까,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자기 의에 대해서 깨뜨려질 때는 어떻겠습니까? 나는 그것 하나 믿고 일생을 살았는데 이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자랑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느꼈을 때,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을 느꼈을 때, 당연히 고통이 따릅니다. 자기 깨어짐의 특징은 결국 깊은 회개입니다. 회개 속에서 죄에 대한 지성과 그것을 대하는 감정과 그것을 돌이키는 의지의 총체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깨어짐입니다. “자기 깨어짐”이라는 책을 보시면서 더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으로, 죄에 대한 사랑과 자기 의에 대해 ’본성의 파괴’를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파괴된다, 깨진다는 것은 그릇이 깨지듯이 깨지는 것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어떤 기능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의 기능이, 자기 의에 대한 기능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의 유명한 참회시가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마음”이 나옵니다. “상한 마음”은 “르쉬바르 레브”입니다. 이것은 수동태입니다. “샤바르”는 “깨뜨리다”입니다. “깨뜨려진 마음”입니다. 그리고 “다끄에 레브”, 이것은 “다카”에서 온 것인데 닭다리를 잘라서 요리를 하기 위해 큰 망치로 후려쳐서 그 뼈를 잘근잘근하게 짓이겨서 치킨가스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집이 여기 사당동에 있었습니다. 사당 사거리 태평백화점 앞에 있었는데, 이 동네가 너무나 가난한 빈민촌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너무 허기가 지는데 닭모가지를 오징어포 틀에 넣고 돌립니다. 그러면 뼈고 뭐고 다 산산이 어그러져서 넙적한 고기 패티가 나옵니다. 그것을 밀가루에 묻히고 반죽을 씌워서 기름에 튀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난한 사람이 사먹으면서 고기 맛을 보며 에너지를 충전하던 동네가 이 동네입니다. 닭모가지만 들어간게 아니라 대가리까지 오징어 틀에 들어가서 갈아버립니다. 그렇게 갈려져 나온 것이 “다끄에 레브”입니다. 이것이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얼마나 심하게 짓밟혀졌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전에 가진 형체가 자기 사랑, 자기 의의 형체였는데 이것이 짓이겨져서 형체가 없이 사라지는 것, 이것이 깨어짐입니다. 이런 깨어짐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어두운 우리의 눈이 밝아져서 진리의 빛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참회의 경험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실제화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이러한 힘이 작용하는 크기를 보여준다.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자기 깨어짐의 핵심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내가 지금 배향의 삶을 살고 있는데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을 경험합니다. 내가 여기에 있는데 이렇게 배향의 삶을 살면서 뭔가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행복하게 하는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면서 온갖 공허와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때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할 때 거기에서 전향할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다시 돌아오게 될 마음이 생깁니다. 돌아오게 될 때, 자신에게는 죄가 있는데 자신의 힘으로는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를 짓기는 지었지만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워할 때 복음을 듣습니다. 그러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바라보고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그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사랑이 남아있는 동안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 고통이겠습니까, 고통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고통입니다. 하나님처럼 믿었던 것이 자기 의인데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자신의 삶의 근거가 무너지는 것 같은 공허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당연히 그 속에서 이 사람은 깊은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대 당하셨던 그 깊은 고통을 여기에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현상입니다. 이것을 actualization 이라고 합니다. 실제화,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인데 여기에서 자기가 고통을 받을 때 그 고통 하는 현실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투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가 죄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이렇게 자기 사랑과 자기 의에 대해서 죽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중적인 경험이 일어납니다. actualization 이 그의 고통에 대한 actualization 이고, 그의 life에 대한 actualization 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죄에 대해서 죽을 때,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기고 살아나시는 그 부활의 힘을 자기가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도저히 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어마어마한 시련인데 놀랍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되고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신자가 자기 깨어짐 안에서 경험하는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렇게 죄에 대해서 죽는 것, 이것을 칼빈은 mortification 이라고 하고 부활의 능력으로 현재적으로 자기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Vivification이라고 합니다. Mortification of Sin, Vivification of Grace. 죄의 죽임과 은혜의 살림이 동전의 양면처럼 신자 안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생명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방법입니다. 그 생명은 자기를 지탱하는 힘이고 그 생명이 사람들과의 관계에 나타났을 때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실 재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재 밤낮으로 애쓴” 엄마도 있지만 어제 유튜브를 보니까 자기가 두 살 때 버리고 간 엄마를 추억하는 여성이 나왔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거의 본성에 가까운데 어떻게 그 예쁜 딸을 버리고 자기 길로 갈 수 있을까? 결국 힘이 없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본성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깨어짐에 대한 설명입니다.
2)힘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힘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너무나 긴 담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넘어가겠습니다. 꼭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집에 가셔서 데모클리토스 같은 원자론도 읽어보시고 두루 읽어보십시오.
2. 마음의 전 포괄적 영향
내가 가장 바람직한 내가 되려면 나 아닌 것을 끊임없이 덜어내야 합니다. 더 이상 덜어낼 수 없을 상태가 됐을 때 나는 가장 순일성을 가진 내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들을 덜어내야 합니까? 그 기준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러분과 꼭 같은 공통분모를 가진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과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아무리 나쁜 인간이라도 서로 통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 공통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 없이는 인간이 될 수 없는 그 무엇을 우리에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 그대, 그대, 나, 모두 다릅니다. 혹은 나에게는 원래 없지만 나와 똑같은 쌍둥이를 누가 데려온다고 해도 그는 나와 다릅니다. 동생이 나와 말소리도 똑같고 생김새도 너무 유사하고 몸무게는 나보다 조금 더 나가지만 전혀 딴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대를 만들기 위해서 공통 본성에 플러스하여, 앞에 앉아 있는 학생, 이수연에게만 이수연을 이수연이게 하는 독특한 그 무엇을 준 것입니다. 그 두 개만 본질적인 것입니다. 나머지는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들어와 있으면 있을수록 그대는 한 인간으로서의 순일성도 없고 이수연으로서의 순일성도 모자라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내가 나로 사는데 내 인생 같지 않고 남의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니고 내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닌 느낌을 받는 것은 순일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일생은 당연히 인간에게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을 덜어내고 두 번째는, 나 이수연에게 있어서는 안 될 것을 덜어내는 것입니다. 인간답지 않은 것을 퍼내고 이수연답지 않은 것을 덜어내는 것입니다. 이수연은 김남준일 필요가 없습니다. 김남준은 한 사람으로 족합니다. 내게 어떤 좋은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배워서 이수연답게 만드는 데 이바지할 뿐이지 내 것을 갖다가 그대 속에 집에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는 순간 이수연은 독특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종자의 마지막 희귀종입니다. 유일한 희귀종의 마지막 개체입니다. 여기의 이수연이 끝나면 이수연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니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렇게나 살 수가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중심 속에 있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생각하든지 그대로 전개되지는 않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따라 자기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마음의 배를 타고 세월의 물결을 따라 흘러갑니다. 마음에 생긴대로 수많은 반응을 하면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결과는 자신에게 행복과 불행으로 그대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런 공부는 남을 위한 공부가 아닙니다.
신자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여 정향하고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으로 순일을 회복하게 될 때 그러한 마음의 정향은 그의 온 삶에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신자의 마음은 영혼과 육체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중심부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자인 인간 존재는 존재와 마음 그리고 그 존재의 작용의 결과인 삶이 하나로 되어 있는 통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전향하게 되면 그의 삶은 전포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킨 신자들의 전포괄적인 변화이다. 마음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만나는 곳이며, 따라서 자아의 핵심을 이룬다.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변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그 마음의 변화 때문에 인간 존재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마음은 인간 정체성의 기저가 된다.
하나님이 나를 김남준으로 창조하셨을 때는 창조한 것만 간직하고 있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발전하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수많은 사건들을 겪고 때로는 고통을 당하고 기쁨을 당하면서 자기 자신이 형성되어 갑니다. 어떻게 형성되어갈지에 대한 가능성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보편자인 인간으로서 어떻게 성숙해 가야 할지 가능성도 주셨고 이수연으로서 어떻게 성장해갈 것인가 하는 가능성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보편적 인간성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그리고 나의 인간성이 어떻게 발전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지를 생각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것이고, 개별자로서 자기 자신 한 사람으로서 내가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훈련받으면 마음을 지키며 살 때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에 비전을 가지고 그분의 뜻 안에서 자기 자신이 개별적 인간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가 태어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길로 갈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잠재력들이 굉장한 힘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이 공부면 공부, 예술이면 예술, 문학이면 문학, 학문이면 학문, 체육이면 체육, 이런 것들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삶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렇게 될 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남과 비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로서 태어났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만 그러한 목표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 목표 안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도 인간이지, 동물은 결코 자신이 개답기를 결심하고 개답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음악이 나오면 춤추는 개들을 보고 머리가 좋다고 하는데 철판 위에 개를 올려놓고 그 아래 불을 피웁니다. 철판이 뜨거우니까 개는 발을 들었다 놨다 하고 그때 음악이 나옵니다. 그렇게 춤추는 훈련을 시킵니다. 개는 그 의미를 알고 그렇게 춤을 추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간에게 주신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이 특권을 버리는 것은 스스로 인간이기를 저버리고 짐승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만일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은 쓰레기와 같은 행복입니다.
인간의 이 마음은 도덕적 질서에 속하는 영혼과 물질적 질서 안에 있는 육체가 함께 만나는 곳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 안에서 도덕적 질서를 규정짓는 도덕적 본성과 자연적 질서를 따르는 자연적 본성이 만나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은 영혼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인간의 육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 점에서 마음은 영혼과 육체에 대해 능동성과 수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서 내가 고기를 너무 먹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돈이 없습니다. 고깃간에서 살짝 훔쳐서 먹으려고 하는데 내 마음이 꾸짖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보편적인 본성도 아니고 이수연 너에게 주신 개별적 본성도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고 덜어냅니다. 그런 통제의 역할을 마음이 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학에서 실제로 실험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마쉬멜로우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한국 아이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미국 아이들은 그것 없이는 못 살 것처럼 미칩니다. 구워 먹고 그냥 먹고 별짓 다 합니다. 그런데 마쉬멜로우를 주면서 15분동안 참으면 다음에 줄 때 조금 더 준다고 하고 참은 아이들과 참지 못한 아이들의 통계를 내고 후에 그 아이들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측정했다고 합니다. 잘 참은 아이들은 그렇지 못한 아이들에 비해서 훨씬 더 사회에서 성공했다고 합니다. 자기 통제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환경을 통하여 마음은 어떤 일을 겪으며 또한 영혼의 힘과 경향성들의 상태를 인하여 마음은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성향을 지니게 된다. 이런 점에서 마음은 육체와 영혼에 대해 수동적인 입장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은 영혼과 육체에 대해 능동성도 갖는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제가 세상에서 참 싫어했던 음식이 붕어찜입니다. 민물고기 자체를 냄새나서 싫어합니다.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 방송에서 붕어찜을 맛있게 하는 동네를 취재하면서 리포터가 얼마나 맛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먹고 싶은 욕구를 느꼈습니다. 아직 실행은 하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것을 보여줬을 때 인간은 대개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다른 이성에게 사랑받고 싶다면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발산하면 됩니다. 불가능한 눈빛을 하십니까? 그래서 뭔가 일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발산해야 합니다. 완전히 자기에게 빠지게 하려면 폭발하듯이 발산하는데 쉼 없이 쏟아져 나오면 됩니다. 그리고 그 이성의 마음이 변질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아름다움 하나에만 집중하고 다른 아름다움을 보면 환승연애가 됩니다. 환승연애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순진합니다. 갈아타는 것입니다.
영혼 안에 악한 경향성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선한 것에 대한 정동을 일시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한 예이다.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악한 경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정동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의 반복은 궁극적으로 영혼의 경향성들과 힘들을 바꾸어놓는다는 점에서 마음은 영혼에 대해 능동성을 갖는다. 마음은 스스로 마음에게 명령함으로써 육체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힘을 갖게 된다.
어거스틴이 고민한 것이 이것입니다. “마음 발 더러 가라 하면 가나이다. 손 더러 올리라 하면 올리나이다. 그러나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하면 마음은 듣지 않나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옵나이까?” 하고 스스로 대답합니다. “그것은 내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리가 움직이지 못하는데 마음이, “다리야, 일어나라.”해도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장애 상태에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해서 잘못된 것을 버리라고 명령하는데 듣지 않는 것은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수많은 잘못이 나오게 됩니다.
인간이 육체적인 어떤 습관에 빠지게 되는 것들 중 도덕적인 것과는 상관이 없는 성향들이 있다. 예를 들면, 물을 지나치게 많이 마신다든가 혹은 잠을 덜 자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육체의 이러한 습관화된 욕구에 대해 저항하는 마음의 반복적인 선택은 결국 육체의 경향성들을 바꾸어 놓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마음은 육체에 대해 능동적이다.
예를 들어 육체적인 습관에 빠지는 것은 도덕과 상관이 없는 것이 있다. 물을 많이 마신다든지, 그런데 다른 사람이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면서 자신만 많이 먹는 것은 도덕적 문제가 될 것입니다. 잠을 덜 자는 것, 조용히 자는 시간에 시끄럽게 한다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겠지만 남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물을 많이 먹든지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밥을 많이 먹는 것은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음식에 대한 탐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에 대해서는 탐욕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한잔에 몇십만 원짜리 물을 마신다면 그것도 탐욕일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의 작용은 시간의 순서에 있어서 마음을 통해 산출되는 행위에 앞선다. 그러므로 마음에 머무르는 생각이 아직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그의 삶과 모든 행동에 대해 전 포괄적 성격을 갖는다. 심지어는 영혼에 대해서도 그러한 성격을 갖는다.
결국 그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추적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행동 하나 하나 속에 묻어난 마음을 잘 읽어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알기 전까지는 너무 쉽게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판단의 유보를 하고 평가해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항상 인간의 마음을 겨냥한다. 그래서 그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야져야 하는 마음이며, 세상에 대해 사랑을 끊어야 하는 마음이며, 또한 하나님을 향해 정향하여야 하는 마음으로 등장한다. 그 마음은 순전함을 지켜야 할 마음이며, 흔들리지 말아야 할 마음이며, 또한 사악한 욕망에 점령되지 말아야 할 마음이다. 이렇게 성경이 마음을 겨냥하는 것은 마음이 가지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전 포괄적 영향이다.
어떤 면에서 인간 영혼은 인간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이 마음 안에서 영혼의 신성(divinity)과 육체의 인성(humanity)가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는 참된 마음을 지닌 인간 존재이다. 성도의 영원한 숙제는 이 마음을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 만드시고 중생을 통해 재창조하신 그 상태를 유지하고 그 순일성 안에서 온전해져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자의 싸움터는 자기 밖의 세상이 아니라 보다 우선적으로 자신의 마음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마음 안에서 경험되는 그 상태를 외출적인 삶 속에서 그대로 구현하며 궁극적으로 그것에 모자라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삶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만큼 살고 산만큼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천국 백성의 삶의 특징을 말씀하실 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하셨다. 일생 동안 마음의 중요성을 알고 하나님과 인간을 배우며 자아를 알아가고 진리에 합치하는 여부를 판별하며 마음을 갈고 닦는 일에 전심을 기울여야 한다. 치열한 전투를 치른 군인들이 여가시간에 총기를 분해하고 청소하며 정비하듯이 인간은 전투적인 삶을 수시로 살면서 자신의 마음을 성찰해야 한다. 동물과 구별되는 위대함은 스스로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상적 존재로서 마음을 가진 피조물도 인간뿐이고 그 마음을 자기를 들여다 보는 것도 인간이 가진 특징이다. 이와 닮은 방식으로 보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