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내를 사랑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 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2~28)
녹취자: 허혜숙
여기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서는 다음 달부터 가정의 달입니다. 첫 주에 어린이 주일 그 다음 주에 어버이 주일, 그리고 반드시 부부에 대한 설교를 하게끔 되어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에베소서의 위대한 교리적인 강화를 4장에서 마친 후 5장부터 그러한 위대한 기독교의 교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가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 가정의 문제를 다루면서 특히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말하면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직접 언급함으로써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관계가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직물처럼 씨줄과 날줄로 엮어져서 하나인 것으로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저에게 한 번밖에 설교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본문 28절을 중심으로 ‘네 아내를 사랑하라’를 설교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많은 남편들은 그 앞 절에 나오는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설교를 빼고 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된다는 설교만 하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이 설교할 기회를 한 번밖에 안 주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설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남편에게 명령하기를 ‘자기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에 보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할지니’라는 가르침이 나오는데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교훈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남편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은 아내입니다. 그래서 그가 한 사람을 향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아내와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남편들에게 ‘네 아내를 사랑하라’는 이 계명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 성경이 쓰여 지던 로마시대의 문명으로 돌아가면 사실 아내를 사랑하라는 이 명령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아주 생소하게 들리는 명령이었습니다.
이에 이어서 1세기의 로마 문명으로 돌아가 보면 로마는 방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일찍이 눈떴습니다. 제국을 위해서는 강인한 정신을 가지고 자기의 삶을 헤쳐 나갈 뿐만 아니라 국가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조화롭게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시민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모든 국민이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특히 가정의 교육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당시 이 편지가 쓰여 질 때 로마시대의 여성들의 평균수명이 25세였습니다. 남자도 아마 30세를 크게 넘지 못했을 것입니다. 17세기 청교도 시대에 남자의 평균나이가 34세 정도였고 우리나라에 1940년대 초에 남자의 평균 나이가 40세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 여성들은 임신하고 아이를 낳다가 죽고 하는 여성들이 많았기 때문에 전체적인 평균수명들이 떨어졌습니다. 남자나 여자의 평균수명이 낮았기 때문에 빨리 결혼을 하고 빨리 공부를 하고 빨리 사회활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조혼의 풍속이 예사였습니다.
당시 로마시대에는 여성들의 역할이 한정적이었습니다. 가정은 철저하게 가부장적인 사회였고 남성중심의 가정이었습니다. 로마시대의 가정이 대규모로 이루어진 대가족사회였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을 했지만 최근에 학계의 연구 결과는 전혀 다른 결과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대가족 사회가 로마 모든 사회의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오늘날과 같이 핵가족화 된 가정들을 포함해서 다양한 크기의 가정들이 그 당시에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는 결과입니다. 농촌이냐 도시냐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그 집안의 풍습 문화에 따라서 각기 다른 가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규모가 어떠하든지 간에 가정에 있어서 질서는 사회질서를 교육하는 아주 중요한 장이었고 그래서 철저하게 가정 중심의 가정의 체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서 돈을 벌고 번 돈을 가지고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권은 아내에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가장이 경제권을 가지고 있고 아내는 살림살이에 필요한 돈을 남편에게 받아서 그 한도 내에서 가정을 꾸려가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 여성상은 아이를 잘 낳고 그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며 잘 기르고 철저하게 로마의 질서를 따라 교육을 하고 말이 없고 인내심이 있고 많은 어려운 일들을 묵묵하게 감당해 가는 인고의 여성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상당히 가부장적이고 동양적인 여성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는 아내가 자유롭게 남편과 함께 가정사를 의논하고 살아가지만 철저하게 아내의 활동범위는 집안으로 국한되어 있었고 그 집의 경계를 넘어서 사회에 나가서 무엇인가를 발언하는 것은 남성에게 매우 큰 수치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회학자는 그 당시에 로마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 즉 아내의 지위는 인심이 좋은 노예 주인에게 후하게 대접을 받는 노예정도에 비슷했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아내의 지위가 매우 낮았던 상황 속에서 ‘네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는 ‘아가페테’라고 하는 이 명령은 당시에 매우 충격적인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그리스시대의 전통을 따라서 로마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평민들이 ‘코이네’라고 하는 그리스어 방언을 사용했습니다. 그 그리스가 바로 로마 이전에 세계를 지배했던 헬라제국이었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사랑을 하나로 보지 않고 크게 네 개로 봅니다. 남녀 간에 이루어지는 에로스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필연적인 스톨개의 사랑, 형제들끼리의 사랑인 필리아의 사랑, 그리고 신과 인간의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은 사람이 상대방이 무엇인가 아름답거나 좋은 장점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의 성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자신의 성향에 의해서 사람들을 사랑하는 조건이 없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맹목적 사랑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과장된 말이고 사랑의 원인이 사랑받는 대상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체인 신 안에서 그 인간들을 향한 한없는 긍휼과 자비심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게 되는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 명령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당시에 사회에 비춰서 본다면 아내는 그런 아가페의 사랑의 대상일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을 아내에게 하라고 명령하는데 그 명령도 도가 지나칠 정도이니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흔히 우리는 말합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런 사랑을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매일매일 하면서 살아갑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은 훈련될 필요가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거의 본능적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자신에게 필연적인 것처럼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소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그 당시 로마시대의 불신자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고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물로 깨끗이 씻어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가 된 사람들을 향한 편지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편지였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 다음 사실을 보여줍니다. 너의 아내는 그렇게 한 사람을 한없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없지만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셔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너를 위해 죽으셔서 대신 형벌을 받고 너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처럼 너에게 사랑을 베푸셨으니 그 사랑을 생각하며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을 일깨워서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사랑이 내게로 와서 나를 움직여 나를 움직인 그 사랑이 아내를 사랑하는 동기가 되게 하라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한 사람만 흙으로 창조하시고 또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의 신체의 일부를 취하여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어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한 사람만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조차도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봐라, 남자는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셨고 여자 너는 기껏해야 내 갈비뼈로 만들어진 인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왜? 그래도 처음 나온 생산품 보다 나중에 나온 최신품이 훨씬 품질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원 재료만 보더라도 남자는 흙이고 여자는 고급의 품질을 가진 그 남자의 갈비뼈로 만드셨습니다.
메튜 헨리라고 하는 주석가는 왜 하나님이 온 몸의 지체 중에서 하필이면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남자의 보호를 받도록 품 가까운 곳에서,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남자를 지배하도록 머리의 뼈나 짓밟히도록 다리의 뼈가 아니라 남자의 보호를 받도록, 그리고 사랑을 받도록 품 가까운 곳에서, 심장 가까운 곳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이후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을 그 두 사람의 성적인 결합을 통하여 생산해 내셨습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어떻게 되었을까? 맨 처음 하나님이 하와를 창조하셔서 아담에게로 데리고 나오셨을 때 아담이 하는 말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했는데 무엇 중의 무엇은 히브리 문학에서 가장 좋은 'The best' 'choice'를 말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사랑스러운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고백에서 남녀 사이의 고백이라고 국한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온 인류가 서로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하며 사회가 거대한 하나의 가족처럼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두 번째 대에 이르러 아들들이 태어나고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인 살인이 이루어집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이런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아담이 하와를 향해서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할 것이 아니라 하와가 아담을 향해서도, 아벨이 가인을 향해서도, 가인이 아벨을 향해서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이상이 인간의 죄 때문에 깨트려졌기 때문에 그 깨트려진 이상을 다시 실현하기 위해서 만든 기관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다시 예수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이 됩니다.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를 통하여 다시 만들어졌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을 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한 사람의 불러 그리스도께 접붙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접붙여진 사람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또 다른 지체들을 사랑하는 것이지 지체들의 돈 많음, 얼굴 예쁨, 혹은 너그러움 이런 것들을 보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생각하며 이런 사랑을 나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지체들에게도 주셨기 때문에 그들 모두를 예수 안에 한 몸으로 여기며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게 하고 그 사랑이 계속 확장되어서 마지막에 그 지체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온 인류를 하나의 교회가 곧 하나의 인류가 되게끔 만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교회에서 서로가 서로를 깊이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이고 인간됨의 깊이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만나 결혼을 합니다. 그러면 항상 사랑스럽지는 않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한참 콩 꺼풀이 씌워서 뜨겁게 사랑할 때는 굳이 사랑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절제를 해야 합니다. 한 쪽으로 쏠려서 밤이나 낮이나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없으면 못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는 그런 사랑이 좋을 때도 있지만 오히려 같이 사는 것이 힘들 때도 많습니다. 그 때는 서로 사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 결혼하기 전에는 그렇게 힘들 때는 헤어지면 되지만 이제는 헤어 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그랬습니다. 실제로 통계를 내 보면 결혼 안하고 싱글로 있는 남자들이 5년은 빨리 죽는답니다. 여자들도 5년은 빨리 죽는다고 합니다.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살면 빨리 죽지만 결혼을 한 남자들 가운데는 죽고 싶은 남자들이 많습니다. 어차피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는 이 유장한 기독교의 교리를 4장에 걸쳐서 설명을 한 다음에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위대한 전망을 가지고 교회의 지체가 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는데 이것이 추상적으로 아주 원대한 것이 아니라 ‘지금 네 눈앞에 있는 네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왜? 인류는 어차피 추상명사입니다. 그러나 한 인간은 눈에 보입니다. 매일 매일 그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거나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씻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끊임없이 감당해 나가는 것이 바로 결혼생활이고 교회생활입니다. 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구원하셨다는 점에서는 완전하지만 아직까지도 온전한 교회가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불완전합니다. 그 교회가 흠도 티도 없이 점점 더 온전하게 되어져 가는 것이 하나님의 이상이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사람들은 말합니다. ‘교회가 굉장히 문제가 많다, 혹은 윤리적으로 바르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라고 말합니다. 스펄전이 유명한 일화를 남겼습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스펄전 목사에게 상담을 했습니다. 요즘 교회를 다니려니까 이런 문제도 많고 저런 문제도 많고 그래서 저는 정말 교회를 정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순결한 교회를 찾고 싶습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가 이야기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돌아다니다가 정말 순결한 교회를 찾으면 절대로 거기는 가지 마십시오. 당신이 들어가자마자 불결해 질 것입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편과 아내가 결혼을 해서 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것은 일수불퇴입니다. 그래서 가끔 맘에 안 들고 힘들 때에도 ‘내 복이 그것 뿐이려니’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야지 다른 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똑같이 내가 이 교회에 한 지체가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에는 마치 남편과 아내가 이 자리에서 서약을 하고 결혼을 할 때에 아무의 강요도 없이 내가 이 여자를 아내로 이 남자를 내 남편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에는 내 눈에 띈 장점과 유리한 점만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 존재 자체를 다 받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고 나의 것이 그 사람 것이 되어서 공동운명체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어렵고 힘든l 일이 일어났다고 칩시다.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이 짊어지면서 그런 교회를 온전하기 위해서 피 흘리고 몸부림치는 것 그 자체가 자기가 그리스도와 결혼하여 교회의 한 일원이 되는 것의 의미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매일매일 아내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처음 결혼하기 전에 만나서 처음 사랑이 시작되어 불붙었던 그 마음이 매일매일 솟아난다면 굳이 아내를 사랑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남편들 중 대부분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대부분 노력을 해야지만 겨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내들이 기억을 해 줘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의 그런 노력을 가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 같은 사람을 데리고 한 번 약속 한 것 때문에 끝까지 살아야 되는 남자의 저 불쌍함,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우리 아내에게 매일매일 감사합니다. 36년째 접어드는데 아직도 데리고 살아주는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들이 매일매일 그런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아나고 매일매일 그 사랑이 넘쳐서 살게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젊었을 때 그런 꿈을 꿉니다. 백마 탄 남자가 나타나서 자기를 뜨겁게 사랑해 주는 그런 꿈을 꿉니다. 공주가 아닌 사람들이 대게 그런 꿈을 꿉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꿈을 꿉니다. 백마 탄 남자가 나타났는데 얼굴은 조각상처럼 예쁘고 몸매는 날씬하고 그런 사람인데 허우대만 기생오라비처럼 멀쩡한 것이 아니라 가문도 빵빵하고 사랑 때문에 만났는데 알고 보니까 돈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고, 공부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하고 신앙도 신비할 정도로 깊은 사람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사람은 안 나타납니다.
교회에서 어떤 자매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많은 사람이 그런 꿈을 꾸지만 저는 그런 꿈은 안 꿉니다.’ 너는 무슨 꿈을 꾸느냐? 했더니 자기는 학벌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 돈도 많이 없어도 된답니다. 자기가 많이 벌어놨기 때문에 같이 쓰면 된답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진짜 신앙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이 없더냐? 물었더니 신앙이 좋을 뿐 아니라 자기가 존경할 만한 인격을 가진 사람을 만났으면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30년 연상에서 찾아봐라 있을 것이다, 30년 연상에서 잘 찾아보면 아마 일찍 아내를 보내고 홀로 된 남자들이 있을 테니까 가서 살아라, 아니면 신앙 위인들의 전기나 읽으면서 혼자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디에 그렇게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멀리 떨어져서 가끔 만나면 그런 사람이 있지만 살 부딪히면서 5년 10년 살았는데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존경스럽고 아침이 되면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저절로 무릎이 꿇어지는 남자가 있다면 그것은 선인이지 어떻게 남편이겠습니까? 그리고 설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자기 같은 사람한테 장가를 들겠습니까? 더 좋은 사람 찾아가지.
신앙의 위대함은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어떤 사람이 우위에 있고 한 사람이 끊임없이 자비와 은혜를 베풀면서 너그러움과 관용 자비로운 사랑을 입으면서 끊임없이 수혜자로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아원 원장과 고아의 관계이지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냥 모자라는 인간들이 둘이 만나서 오늘은 내가 은혜가 충만하기 때문에 저 사람을 용서해주고 내일은 내가 조금 까칠해져서 성질을 부리는데 저 사람이 나를 품어주고, 그러다가 둘 다 까칠해져서 한바탕 싸우고 나면 같이 회개하고 그러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정말 내가 주님 앞에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데도 내가 이렇게 한 여자와 만나, 한 남자와 만나 일생을 함께 살아가는 것이 매일매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결혼생활입니다. 부족합니다. 그래서 아내를 그렇게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1년에 한두 번 왔다가니까 영국의 문화는 제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은 지난 세기 동안에 남성들이 여성들한테 너무했습니다. 여자를 발톱의 때만큼도 안 여기고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영국 사람들, 일본사람들, 심지어 아랍권에 있는 사람들, 심지어는 남미 사람들까지 한국에 대한 황당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교회에도 열아홉 살 된 어떤 자매를 만났는데 그 아이의 소원은 한국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한국에 와서 사는 것입니다. 진짜 모든 것을 그만두고 한국에 와서 행복하게 한국에서 삽니다. 이 사람들은 한국에 있는 모든 남자는 모두 배용준이나 도민준 아니면 유시진 같은 사람인 줄 압니다. 솔직히 그 정도 빼어난 미모를 갖고 있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지만 미모는 그만 두더라도 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은 똑같은 성품을 가지고 한 여자를 그렇게 마치 순교적 신앙을 가진 것처럼 한 여자를 떠받들면서 사는 남자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서로 깊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에서 늘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환상을 버려라, 그리고 현실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살아가다가 아내가 무언가 자기에게 섭섭하게 해주면 원래 부부가 그런 것이다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알아주고 너무 따뜻하게 대해주면 아, 예외적인 것이 주어졌구나, 참 놀랍다,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면 그것을 계속 고마워하는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일상적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보통이고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오래도록 기억이 나면서 마음속에 아내는 잊어버렸는데 남편은 원한처럼 마음에 남는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 때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환란이 오고 시련이 옵니다. 뭔가 마음대로 안 되고 힘이 듭니다. 그것을 일반적인 인생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업이 잘 되고 거래가 잘 성사됩니다. 그러면 아, 진짜 놀라운 일이 일어났구나, 진짜 감사하다 그 때 진짜 감사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를 향해서 기대의 수준을 낮춰야 합니다. 그리고 평범하게 받아들이고 무엇인가 뜻대로 안 됐을 때 사람들 살아가는 세상이 다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고 무엇인가 감동을 주었을 때는 아주 기쁘게 생각하고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투지 말아야 되지만 마음이 심각할 정도로 다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고 어차피 같이 살아야 되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어차피 화해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빨리 이루어져야지만 부부사이에 일어나는 작은 일들이 더 깊은 갈등으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자, 아침에 무슨 일이 있어서 언쟁을 하고 다퉜습니다. 그렇잖아도 스트레스 받고 힘든 일이 많은데 아내가 출근하는 남편한테 오장육부를 뒤집어놓고 바가지를 긁는 것입니다. 너무 힘들고 짜증이 나서 자기도 아내에게 아주 세게 야단을 했습니다. 문을 꽝 닫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하고 회사에 가서 근무를 하는데 마음이 편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침 열 시에 판결을 받는데 그날 아침 대판 부부싸움 하고 나온 판사에게 재판을 받는 사람입니다. 매사가 짜증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왔는데 남편이 마음이 편하질 않습니다. 일도 손에 안 잡히고 화가 나서 술이라도 실컷 마시고 들어갈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그냥 들어가지 말고 친구 집에서 자고 갈까? 별 생각이 다 듭니다. 한편 아내는 씩씩거리고 일부러 오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11시가 되어서 큐티 시간이 되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데 될 리가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래도 체면이 있으니까 형식적으로나마‘하나님 죄송합니다.’ 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침에는 자기가 너무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나?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여보, 아침에는 내가 미안했어.’ 하고 한 문장만 오면 다섯 문장으로 자기의 미안한 마음을 사과하려고 그러는데 안 옵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침에 미안해’ 하려고 하는데 쓰다가 보니까 너무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래서 ‘점심은 먹었어?’하려니까 대판 싸우고 나서 밥 먹었냐고 물으려니까 쑥스러워서 핸드폰만 들었다 놨다 합니다. 그 때 좋은 방법은 선물을 하는 것입니다. 그 때 남편은 퇴근을 하고 선물가게로 발을 옮깁니다. 그 때 이 마음에서 두 마음이 싸웁니다. ‘그 인간한테 내가 왜 선물을 해야 하지?,’ 이쪽에서는 ‘그래도 화해해라’그래서 선물을 삽니다.
제가 아내에게 선물을 할 때는 세 경우인데 기념일일 경우, 너무 사랑스러울 경우, 너무 짜증날 경우입니다. 선물을 고르는데 그 때의 선물은 쓸데없는 것을 사야합니다. 그래야지만 그것이 선물입니다. 기껏 골라서 사간 선물이 고무장갑, 하이타이, 그러면 안 됩니다. 골라봅니다. 카드를 긁으면서도 갈등을 합니다. 이것 결국은 내 용돈에서 까야 되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하면서도 긁습니다. 그 다음에 선물을 삽니다. 그것을 샀는데도 마음이 안 풀립니다. 그 날은 포장을 직접 하지 말고 포장가게에 가서 가장 비싼 것으로 화난 만큼 화려한 것으로 포장을 합니다. 그래도 마음이 안 풀립니다. 그러면 가장 화려한 꽃다발을 하나 사서 들어갑니다. 그 때쯤이면 마음이 다스려집니다. ‘딩동’벨을 누릅니다. 아내가 이 인간이 안 오기에 어디 가서 술이나 퍼 마시는가 했는데 일찍 들어온 것입니다. 문을 열자마자 자기가 잘못했다고 이야기 하려고 하는데 문을 열자마자 남편이 ‘여보, 아침에 너무 마음을 아프게 해서 미안해, 진심이 아니었어.’하면서 선물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항상 아내가 잘못했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줘야 됩니다. 그러면 아내가 그것을 받으면서 그 순간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은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침에 자기한테 퍼부은 잔소리에 대한 복수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도저히 함께 살아가기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도 그런 지혜로 극복을 하면서 한 사람을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며 살아가는 그 과정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서 남편과 아내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자기의 마음에는 들지 않고 자기가 원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져서 고통을 받는 그 순간을 통해서 자기 아내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게이지가 어디까지 와있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그것을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 자기의 모습이 이것 밖에 안 된다는 것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왜 붙여주셨냐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라도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구원하셨으니, 내가 이미 그런 사랑을 충분히 입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그 사랑으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한 사람을 그렇게 사랑을 할 차례이다 그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찬송)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그래서 아내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아름다움 때문에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서 전혀 예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은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그 사랑 때문에 다시 한 번 아내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정말 뜨겁게 사랑해서 아내와 결혼을 했는데 아내하고 만나기 전에 제가 사랑에 빠졌고 만나고 일주일 교제하고 난 다음에 결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때 목숨을 걸고 일주일 동안 기도를 했는데 10Kg이 빠졌습니다. 기도는 이 사람을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어쨌든 확신을 가지고 결혼을 했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까 이 사람이 정말 심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연애하고 결혼한 기간이 7개월 정도밖에 안 돼서 짧기는 했지만 내가 전혀 몰랐던 부분을 발견하면서 깜짝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사실 몇 년 동안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살아보고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 앞에 배우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훨씬 쉬워졌습니다. 가끔 교인들은 짓궂은 질문을 많이 합니다. 공개석상에서 손을 들고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도 혹시 부부싸움을 하신 적이 있는지요?’그것은 한 번은 이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도 부부싸움을 하시는데 하물며 우리가 가끔 싸운들 무엇이 문제가 되겠느냐?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때마다 제가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말다툼 한 것이 22년 전입니다. 말다툼이라고 해서 삿대질하고 거품을 문 것이 아니고 티격태격한 것입니다. 그러면 김 남준 목사가 성인이라서 그런가? 그렇지 않습니다. 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결혼하고 철이 들고 나서는 한 번도 내 아내를 보면서 숲속의 잠자는 공주를 꿈꾼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제 아내도 백마 탄 기사를 꿈 꾼 적이 없을 것입니다. 왜? 외모로 보나 몰골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자기 남편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런 것이 필요 없습니다. 왜? 이것이 나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백마 탄 기사는 숲속의 잠자는 공주에게 줘버리고 여러분은 저런 사람들을 남편으로 택했습니다.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어떻게 이렇게 모자라는 인간들로서 각자 남편과 아내로 만나 함께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수한 결점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그 사랑의 관계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매일매일 알아가며 1년 전에 자신이 부끄러워지도록 성숙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가 이제는 소설 속에나 나오는 한 커플이 아니라 그렇게 온 삶을 온 가슴으로 부딪쳐 내며 함께 살았던 사람, 그래서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교회 나와서 은혜를 많이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시는 것은 세계 선교만을 위해서 그것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라는 특별가치는 보편 가치 위에 서는 것입니다. 그 보편적인 가치는 하나님이 한 인간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기대하시는 삶이고 가치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모자라는 남편들이 그 은혜의 최초의 수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초월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남편이 받았을 때 최대의 수혜자가 아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제가 뼈 사이에서 지은 한 아포리즘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지만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들 중에도 인생이 망가지는 사람이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은 망가지지 않습니다. 왜?
(찬송)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사랑하는 그 사람 그 사랑 때문에 자기를 완성해 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왜 그럴까요? 평생 잊어지지 않도록 이 구절을 설명하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아내를 사랑합니다. 사랑받지 못할 만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인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힘들게 만듭니다. 그러면 자연스런 반응은 ‘에이 씨, 제기랄’ 하면서 한 번 언어의 화살이 튀어나가는 것입니다. 그 때에 카타르시스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다가 주님이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가?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는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바꿉니다. 그리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결코 실패하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힘을 달라는 기도는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런 은혜의 힘을 주십니다. 그러면 이 안에서 힘이 솟아납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선하게 말을 하고 사랑을 베풉니다. 아내가 그 혜택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미 아내가 혜택을 받기 전에 더 혜택을 받는 사람은 그런 선을 행한 자기 자신입니다. 이 안에서 이미 혜택을 받은 것입니다.
롱펠로우라는 사람이 세레나데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다 외울 수는 없지만 그런 내용입니다.
어느 날 나는 하늘을 향해 화살 하나를 날렸네
나는 잊어 버렸네
오랜 세월이 지나서 나는 발견 했네
어느 고목나무에 박혀져 있는 화살을
나는 하늘을 향해 노래 한 곡 불렀지
나는 그 노래를 잊었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발견 했네
내 친구의 가슴 속에서 그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은 잊어버려도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서 살아가야 될 삶은 강물처럼 흐르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과업을 위한 삶이 아닙니다. 강물처럼 흐르며 물이 없는 대지를 흐르며 지나갈 때 풀들이 돋아나고 벌레들이 생기고 새들이 날아오고 나무들이 심겨지고 나뭇잎이 피어나고 줄기가지가 뻗어나고 생태계가 형성되면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자연환경이 갖춰져 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주시고 교회가 바로 그것을 주는 하나님의 샘을 전달하는 곳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생명의 물과 생명의 은혜가 쏟아져서 그것을 먹고 마신 사람들이 복수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용서하면서 살고 베풀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사람들에게 자기를 온전히 주어서 베풀면서 삶으로서 자신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사람들에게 펼쳐져 나가게끔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여러분 마음속에 주신 하나님의 혜택을 우리 가족들이 제일 깊이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 집에 가셔서 밤중에 아내가 깊이 잠든 모습을 남편으로서 한 번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예쁘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는 여러 남자를 물리치고 지금의 아내를 차지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도 경쟁할 만한 얼굴이 아닙니다. 남편을 보십시오. 잠자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입니다. 무슨 원한이 있는지 이빨도 갈고 코도 골고 만났을 때는 그래도 훤칠한 얼굴이어서 만났는데 지금은 배는 불뚝 나오고 이마는 벗어지고 개기름도 흐르고, 개기름도 옛날이지 이제는 그것도 골이 깊이 패여서 죽음의 문턱 가까이 있는 사람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몇 사람의 여성 경쟁자를 물리치고 지금 남편을 차지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경쟁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보십시오. 불쌍하지 않습니까? 자기 하나를 바라보고 그 긴 세월을 살아왔는데 가엾지 않습니까? 물론 그 여자가, 그 남자가 남편이나 아내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걸고 살아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은혜가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남편과 아내를 한없이 긍휼히 여기면서 그 힘들고 긴 세월을 나와 함께 인생을 헤치고 살아온 사람이 여기 있구나.
(찬송)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래서 주님 때문에 이렇게 모자라는 사람들이 서로를 기대며 그렇게 거칠고 험한 세월을 함께 살아왔다는 자체로 그의 손을 꼭 붙드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라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남이 갖지 못한 사랑을 받게 하셨고 남이 얻지 못한 은혜를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아내를 자신의 몸과 같이 깊이 사랑함으로서 구원의 유업을 이루어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