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성장과 미래의 역할 2
1880년대 한국교회에 복음이 들어온 이후로 약 130년 정도의 역사를 돌아보면 주님이 주신 은혜도 정말 컸고 또 교회의 주님을 향한 헌신도 정말 뜨거웠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오류도 또한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느 하나를 긍정이냐 부정이냐 흑백논리로 택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순수하고 좋은 것이었지만 이것들을 해석하고, 적용하고. 활용함에 있어서 우리 인간들에게 언제나 오류가 있었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우리에게 물려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을 하면서 앞으로 우리 한국 조국 교회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가 꼽아야 할 것은 개혁주의 신학과 청교도 전통의 부흥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개혁주의는 벌써 옛날에 있었던 개혁주의이고 청교도는 16세기 17세기에 있었던 청교도인데 오늘날의 부흥의 신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들이 조금만 설명을 들어보면 이것이 참된 대안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70년대 80년대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에 급속한 성장을 주셨습니다. 그 때는 교회를 세우면 사람들이 막 몰려왔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고, 한국교회가 아주 특별하기 때문에 받는 그런 특별한 현상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캄보디아나 중국에서도 교회만 세우면 새까맣게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런데 경제성장을 이루게 되고 사람들의 관심사가 물질과 육신의 안일에 기울게 되면서부터 사실은 종교에 대한 관심이 현저하게 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먹고살기 힘들어도 사람들이 종교에 대한 관심이 낮아지고, 너무 살기 좋아도 종교에 대한 관심이 낮아집니다. 그래서 선교학교들은 국민소득 5천불이 기독교에 대한 수용성이 가장 높이 올라가는 한계지점이라고 보고 거기서부터 수용성이 떨어지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들이 바라보는 전망은 유럽이나 미국과 같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미국과 유럽의 차이는 미국은 국가발전을 사회발전보다 앞세우는 나라이고, 유럽은 사회발전을 국가발전보다 앞세우는 나라입니다. 사회와 국가가 무슨 차이이냐면 국가는 전체 통일체로서의 국가이고, 사회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적인 환경입니다. 이것들을 먼저 더 살게 하는 이념이 복지국가의 이념이고, 국가를 더 앞세우는 것이 강대국의 이념입니다. 그래서 일본이나 중국, 미국 같은 나라들이 그런 이념을 택하고 있고, 구라파 같은 나라들이 후자의 이념을 택합니다. 그런데 후자의 이념을 택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는지가 요즘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 금융위기사태 이런 것들이 보면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나라가 잘 살게 되면 사회가 나아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관심사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사람이 심각해지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그런 시기가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앞으로 다가오는 시기에는 우리나라가 점점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삶이 아주 극단적이고, 물질주의 화 되어가고, 그래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아무리 물질주의가 되어 간다고 하더라도 육체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끔 인간이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니까 육체와 물질로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사상을 자꾸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기독교는 그런 점에서 현대적인 포스트모던적인 사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서도 끊임없이 종교다원주의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 누구 몇 사람의 조작이 아니라 사회자체가 강력한 요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앞으로 교회가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전망을 보면 점점 어두워지며 캄캄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에서 더군다나 교회는 점점 세속화 되어가고 탈신학적이 되어가고 목회 자체가 극단적으로 인간중심적이 되어가는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흘러갈 것이냐라고 하는 우려를 우리들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어떻게 보면 교회 성장이 순수한 성령의 역사와 말씀에 의한 성장이라는 측면도 초기에는 있었지만 70년 80년대 급속한 성장 이후로 우리들이 80년 90년을 넘어오면서 사실은 굉장히 많은 부분들을 타협해온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90년대 2천대 와서는 완전히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아주 절박한 마음으로 종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대정신에 물든 삶을 정당화 하고 옹호해 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기독교를 바라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탈 신학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탈 신학의 원인은 목회자 자신이 신학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한 측면도 있지만, 사실 사회 자체가 그런 신학을 강조하고서는 복음이 매력을 끌 수 없고, 교회에 모여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런 신학을 강조해서는 사람들이 교회에 그것들이 마음을 끌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상황이 탈 신학 화를 부추긴 측면도 있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목회자의 잘못이라고만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교회가 흘러오게 되었는데 그렇게 해서 신학을 무시해버리고 나니까 그것이 사실은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 성장에 도움은 되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신학을 포기함으로써 사람들이 교회에 더 많이 오고 사람들을 교회 안에 더 많이 붙잡아 두던 이런 유익 점들이 거의 상쇄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종교에 대한 필요성 같은 것들이 남아있을 경우에는 좀 더 편리하고 자기편 들어주는 종교를 찾았지만 종교에 대한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할 때에는 아무리 편리하게 해 준다하더라도 그것이 그렇게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것입니다. 필요를 느끼는 물건일 경우에는 값이 떨어지면 가서 사고 오르면 안 사다가도 쎄일을 하면 사지만, 원래 필요 없는 물건일 경우에는 아무리 싸게 해준다고 해도 여러분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미국 같은데를 보면 마케팅 교회의 성장은 이미 멈췄습니다.
이제 더 이상 편리하고 나의 기호에 맞다는 이유만으로 교회를 선택하고 그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유효합니다. 이런 유효함들이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갔더니 VIP라고 불러서 뭔가 봤더니 불신자들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러면 교회 안 나올 때는 VIP이고 지금은 뭡니까? 이런 것들이 모두가 ‘너희들이 교회를 필요로 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필요로 한다’라는 성경적인 사상보다는 ‘교회가 너희를 필요로 하고 우리는 복음이라는 상품을 너희에게 팔고 싶다 제발 소비해다오’라는 경영학적이고 상업적인 정신들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비록 용어이긴 하지만 물론 형식은 그런 형식을 내 놓아도 마음속에는 영혼을 향한 뜨거운 눈물이 있어서 하나님이 이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많은 영혼을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상이 일관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교회에 안 나올 때는 VIP이고 지금에 와서는 보통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이런 것들은 너무나 약삭빠른 것입니다. 앞으로는 점점 기독교인들의 수가 줄어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케팅 교회를 추구하던 그런 교회들은 이제 서서히 아주 빠른 속도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머징 교회로 갈아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생각하기를 이제 마케팅 교회가 막을 내렸으니 저 교회들을 어떻게 할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신학이 없기 때문에 목회의 경직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재빠르게 다른 사주를 타고 갈아타는 것입니다. 금이빨 하던 교회가 시종일관 금이빨 하지 않습니다. 발 빼기 해서 효과 있으면 발 빼기로 넘어가고 발 빼기 하다가 새로운 목비틀기로도 넘어갑니다. 허리 아파본 사람들은 목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압니다. 한의원에 가보면 허리 만져보고 목을 비틉니다.
그렇게 해서 다양한 것들이 수없이 나와서 앞으로 더 발전을 할 것입니다. 계속 갈아타는 것입니다. 어차피 신학이 없으면 경직성이 없기 때문에 수시로 변모하기를 마치 낙지가 접시 위에 담으면 넓적하고 컵에 담으면 벌떡 일어서고 동그란 그릇에 담으면 동그란 것처럼 낙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이든지 거기에 맞춰서 자신을 변신시킬 수 있는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변신의 노력들이 교인들을 나름대로 교회에 담고, 담은 교회들을 붙잡아 두는데 어느 정도 사회심리학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공허함은 참 끝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신학교에 가고 거기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배우다가 신앙을 버리게 된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형제 하나가 살고 살고 방황하다가 머리 깎고 중이나 되어야 겠다하고 절에 들어갔습니다. 워낙 성실하니까 절에 올라오는 사람들이 저 분은 승복은 자기가 해주겠노라고 줄을 섰답니다. 어느 날 주지스님이 마을에 내려가서 이러이러한 책좀 사오라고 해서 책을 사다가 왠 설교 테입을 봤답니다.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 열린교회 설교테입입니다. 그 테입을 듣다가 절에서 회심을 했습니다. 산사에서 조용하고 다들 잘 때 밑에다 감추고 귀에 꽂고 듣다가 호세야서를 듣다가 걸렸습니다. 그래서 절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끌고 가서 주지 스님한테 가야 한다하면서 어떻게 된 거냐고 취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님 죄송합니다. 저는 아무래도 교회로 가야겠습니다’ 하면서 내려와서 찾아온 곳이 우리 열린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복음을 열심히 전하면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모든 기준을 포기하고 제멋대로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종교도 자기 마음대로 자기 원하는 대로 조작해서 살면 일시적으로는 편안하겠지만 그것이 진정한 평안일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아닙니다. 인간 자체가 아무리 자기를 지지해 주는 것이 많다 할지라도 인간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존재인데 그 불안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재미있는 것이 경박하기 이를 데 없는 탈사상적인 시대에는 묵직한 사상에 탐닉하는 기이한 사람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해서 진리를 다 팽개쳐버리지만 다시 묵직한 진리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미국에서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해석학도 역사를 보면 실존주의가 들어온 이후로 19세기 비평주의가 들어오고 그 후로 계몽주의가 들어오면서 이성적인 성경해석이 일어나고 성경속의 신비한 사상 같은 것들을 다 뭉개버리고 실존주의가 들어오면서 이제 성경자체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보다는 내가 그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다 이런 식의 성경해석이 오면서 결국 문학으로 흐릅니다. 성경자체를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보면서 문예적인 방법에 의해서 죽 가다가 이제 그런 것들이 한계가 온 것입니다. 아무리 해봐도 답이 안 나오면서 진력이 난 것입니다. 요새 새롭게 돌아가는 것이 ‘신학적 성경해석’이라는 새로운 성서학 형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제각기 성경본문을 보고 경험하는 느낌이나 실존주의적인 깨달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진중한 신학이 있다 그리고 그 줄거리를 따라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라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풍조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보면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고 성경과 개혁신학의 교리와 청교도적인 전통들을 멀리하던 사람들인데도 요새 와서는 다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존파이프 목사님의 열정카운터라는 것에 매년 4-5천명이 모입니다. 엄격한 칼빈주의를 지지하는 수많은 청년들이 그 가르침을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아주 엄격한 개혁신학자가 20세기, 21세기 화려하게 부활을 해서 전 세계적으로 에드워즈 연구의 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엘버트 물러라는 사람은 미국 남친회 신학교에 총장으로 부임을 했는데 실천적인 신학으로 아주 유명하고 찰스 다한 같은 사람이 그 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던 교수였습니다. 엘버트 물러라는 사람이 총장으로 취임을 하면서 자유주의 적인 교수들을 전부 정리를 하고 칼빈주의 전통을 확고하게 세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격려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호응을 했습니다. 엘버트 뮬러를 만난 어느 교수님이 만나고 왔는데 단순히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신봉자가 아니라 많은 책을 통해서 확고한 칼빈주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개혁주의 신학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개혁파 전통주의에 있어서 최고의 조직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세 권의 책이 있는데 그 중의 한 권이 프란시스투에팀의 '변증신학 강요'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굉장히 어려운 책입니다. 그 학교에서 박사과정에서 졸업하는 학생들이 무슨 과목을 전공하든지 그 칼빈주의의 전통 교리서를 달달 외울 정도로 습득을 하고 시험을 봐야지 어느 과목이든지 박사과정을 통과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철저하게 교육을 시키는데 그것이 굉장한 바람을 일으킵니다. 이런 배경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자유를 주면 자율을 누리게 하면 사람이 자유를 느끼는데 그것들이 계속적으로 주어질 때 사람들은 불안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인가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붙들고 살아야 될 어떤 필요성을 인간이 느낍니다. 그럴 때에 이런 현대주의 사상에 물든 기독교는 그런 뿌리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어디에 서있든지 그것은 계속 요동치고 일시적으로 붙들고 있는 것들이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들은 다른 것들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확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삶 전체의 체계를 보여주고 우리들이 공부해야 할 대상, studeo, ergo sum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면 두 번째 물어봅니다. 공부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나는 공부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내가 공부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인데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인 나를 배우기 위해, 공부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런데 이 세 대상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장 잘 알게 되는 것이니 고로 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언제까지 공부해야 합니까?
- 죽은 후에도 공부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공부하는 방법이 여기에서 성경을 놓고 공부하고, 신학 책을 공부하는 점에서는 천국에서 공부한다는 점에서는 천국에서 공부하는 방법은 지상에서 공부하는 방법과는 틀립니다. 그렇지만 그 영원한 나라에서 공부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거기에서도 주님을 아는 지식은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다시 처음부터 studeo, ergo sum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무슨 뜻이냐면 공부하는 것을 통해서만 나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맞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입시공부가 아닙니다. 공부해야 할 대상이 무엇이냐? 뭘 공부해야 하느냐?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인데 이 세 대상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잘 알게 되는 것이니 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하여 공부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는 교제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공부하게 되나니 이 교제가 성경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미래의 한국사회 속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전망을 어둡습니다. 그것을 확신합니다. 그렇지만 개혁주의와 청교도 신앙의 전망을 반드시 어둡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교회처럼 사람들을 많이 힘들게 하는데도 여러분처럼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싫어하고 체계적이고 장중한, 그래서 그 사상 속에 들어가면 내 마음대로 생각할 여지가 전혀 없고 성경의 진리를 따라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그리스도에 대한 커다란 세계 속에 사는 것이 훨훨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숨 막힐 것 같은 부자유일 수 있지만, 주님을 의지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의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속하시고 내 인생에 간섭하시고 나에게 지키며 살 진리를 주셨다는 그 자체가 한없는 속박이 아니라, 그것이 자유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에서 보면 지키며 살게 하시는 말씀을 주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지만 그 성과는 사실 미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항상 어떤 식으로든지 올바르게 진리를 전파하면 어둠 속에서도 그 진리를 붙들고자 하는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을 향해 설교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뜻을 세우고 어려운 설교를 하기로 결심을 했었습니다. 주일 날 오는 사람들 중에 이 설교를 듣고 어려우면 떨어져 나가라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설렁설렁 달라붙어서 교회등록하고 교회 규모를 크게 해 놓으면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힘들게 하는 무기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내 설교의 강력한 비판자인 내 집사람이 ‘여보, 당신 설교 참 잘했는데 여러 사람이 졸더라고 좀 더 쉽게 설교를 하라’고 했습니다. ‘당신 눈에는 조는 사람만 보이는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조는 사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들으면서 눈물 닦는 사람들만 보이더라, 나는 설교할 대 안 듣는 사람들을 겨냥하고 설교하지 않고 듣는 사람만 쳐다보면서 그 사람이 나의 회중이라고 생각하고 설교를 한다’고 했습니다.
어둠속에서도 우리들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환영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복음의 본질을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일은 못 하셨습니다. 그러면 참다운 진리를 전하면 어둠 속에서도 항상 그것을 붙드는 사람이 어디에서든지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소수이면 무슨 문제이고 다수이면 무슨 문제입니까? 어차피 교회의 이상은 큰 교회가 되는 것이 이상이 아니라 그 교회가 참다운 교회가 되어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개혁신학은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부교역자들에게도 항상 이야기 하는데 ‘여러분들이 가서 복지사업이나 문화 사업이나 하려고 하면 피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미 그런 것들은 다른 교회에서 모두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변의 어떤 교회에 신경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어차피 그들의 목회 방향과 저의 목회방향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내 양심 속에는 한 번도 옆에 있는 교회를 가까이 있건 멀리 떨어져 있건 경쟁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우리 교회 근처에 온다고 해서 반대해 본 적이 없고 추호도 마음속으로 저 교회가 있어서 우리 교회가 피해를 입겠구나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가는 길과 내가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참된 개혁신학을 올바로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단순히 예수 믿고 복 받는 단상적인 구도가 아니라 인간이 누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세계와 인간과 자기 자신과 역사와 어떻게 관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참된 기독교 신앙인가 하는 것이 총체적인 얼개를 개혁주의 신학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은 개혁주의 신학이 그 모든 것들을 충분히 다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지난 시절 교부들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고 최근에 개혁파 전통주의 신학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개혁파 전통주의 신학을 하는 이유도 그 자체는 아주 정미한 논리이지만, 사실은 커다란 틀에서 보면 칼빈 이후의 개혁파 전통주의가 제가 말씀드린 개혁신학을 참되게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보다 풍부한 종교주의자들의 개혁파 신학자들보다 그런 개혁주의의 폭넓은 그림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을 가리켜 개혁파 전통주의 신학자들을 개신교 교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부시대나 중세 신학이나 개신교 교부들의 시대나 이런 것들에 대한 관심을 갖는 이유가 바로 그런 큰 그림을 여러분들에게 그려서 죽기 전에 나의 설교사역과 여러분들을 운행하는 사역들을 하나의 커다란 그림의 흔적으로 남겨두고 싶은 것 때문입니다. 무슨 학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떻게 하든지 간에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어떻게 개혁주의 목회와 연결되는 지를 보여주고 싶고 목회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참된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학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 뿌리가 어떤 것인가를 연결시켜주는 도매상 같은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쉽게 말하면 신학자들은 탄광 속에서 광산을 캐는 사람들이라면 목회자들을 그것을 가지고 만들어 쓰는 쇠붙이를 갖다 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할 수 있다면 워낙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가서 광산에서 캐는 것도 도와주고, 캐가지고 갖고 와서 재련소에 와서 녹이는 것도 도와주고, 녹인 것들을 여러 가지 도구로 만들어서 나도 쓰고 남도 나눠주고, 그리고 또 써보다가 불편한 것이 있으면 철공소에 가서 이건 이렇게 만들라고 해보고 그리고 철광석 캐는 데 가서 그 광석은 좋다고 캐는데 이쪽에서는 쓸모가 없으니까 이쪽에서 써보라고 하는 그런 연결 선상에서 그렇게 살다가 죽고 싶은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워낙 역사 속에서 그런 일들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소수였기 때문에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서 개혁파 전통주의 세미나를 올해도 개최하는 것입니다.
이런 개혁신학과 청교도 신앙전통이 다음 세대에 더욱 환영을 받을 것이라는 소망스런 생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증거를 어디에서 보느냐면 등불학교 그렇게 조그마한 아이들이 교리를 배우고 나의 삶에 있어서 교리를 배우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간증하고, 도대체 알 수 없었던 내 삶의 실제적인 문제들이 그런 교리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실제적인 삶에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마치 청년들의 나눔에서 나누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각성을 해야 합니다. 주일학교에서 나누는 교리와 같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 어린아이들이 비뚤어나가지 않고 중고등학교를 지나면서 더 탄탄하게 예배와 기도와 경건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교회에서 탄탄하게 개혁주의 신학으로 훈련을 받고 분명한 세계관을 가지고 이 아이들이 사회에 나갈 때 그 아이들의 미래는 훨씬 기대가 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모든 포스트모더니즘에 물든 사람들을 건져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이기 때문에 너무 괴로워서 견뎌내지 못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아이들이 그런 총체적인 지식을 가지고 성장해서 전파할 때 그렇게 전파되는 기독교 진리의 힘은 우리 시대의 그것보다 훨씬 크지 않겠느냐는 낙관적인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노력들이 결코 헛되지 않는다고 굳게 믿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교육받고 있는 젊고 어린 교역자들을 볼 때 5년 10년이 지난 후에는 나보다 훨씬 나은 교역자가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여태까지 사역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공부도 열심히 시킵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라서 내 교회의 모본들을 보면서 목양을 한다면 이런 개혁신학과 청교도 신학 전통이 다음 세대에 정말 아름다운 하나의 가치가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절대 보편화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편화 되지 않아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어두운 밤바다에 등대 하나만 확실하게 빛나면 길잡이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로 피하는 배들이 생겨나고 그것이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사명입니다. 그러면서 어두운 시대에 교회가 갈 길을 비춰주고 그러면서 살게 되고 우리들이 생각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중생과 회심을 통한 참된 성화의 추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시대의 대안은 개혁신학인데 개혁신학은 정신이 미치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불합리한 신학입니다. 그런 불합리를 뛰어넘는 초 합리의 신학을 받아들이게 만들어 주는 연결 고리는 결국은 신앙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중생과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실 때에 그 때에 그 사람의 마음속에 두 가지의 놀라운 변화를 도입하시는데, 첫째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두 번째는 이신론적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심미안을 넣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게 담겨져 있는 신앙이 개혁신앙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변화 된 사람들은 개혁신앙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개혁신앙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이성으로 그 모든 것들을 파헤치게 될 때에 초합리가 아니라 불합리한 신앙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배경희 목사님이라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부산 쪽에서 설교로 굉장한 영향을 끼쳤고, 여름수련회를 인도하면 약 2만 5천명이 모였습니다. 그 분이 원래 술 만드는 공장에서 술을 맛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분이 공부도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그 분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을 열정적으로 만나고 성경을 깊이 읽었습니다. 주변에서 특히 박윤수 목사님 같은 분이 권했습니다. 목회를 하려면 신학을 해야 한다고 해서 고신에 갔습니다. 그 분이 그 때 고백한 것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그냥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깊이 성경만 읽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믿고, 어떻게 알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을 배웠는데 그 후에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칼빈 신학을 차례로 배우면서 고백하기를 ‘어쩌면 이렇게 놀랍나 칼빈과 자신은 약 500년이 떨어져 있는 사람인데 칼빈이 쌓아올린 신학과 자기가 성경을 읽고 쌓아올린 신학이 너무나 일치하는 것을 알았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성경을 올바르게 읽으면 칼빈주의가 이상하지 않고 아주 탁월한 아름다움으로 개혁주의 신학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없을 때에는 가장 불합리하고 논쟁이 많은 신학이 이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참된 중생과 회심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진정으로 중생하고 회심하여 구원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초려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향하여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을 동시에 가지는 사람이 되도록 그의 영혼에 참된 변화를 갈망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이렇게 교회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중생과 회심이 없이는 구원이 없다’라고 하는 신념을 가르쳐주고, 자신이 진정 참된 회심이 일어났는지 점검하게 해주고, 자라나는 세대가 그런 회심 속에서 신앙을 갖도록 우리들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화를 강조해서 이제 신자가 된 다음에 최고의 행복을 예수 믿기 때문에 받는 복들 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끊임없이 주시는 성령의 은혜와 말씀의 능력 안에서 자신이 예수를 닮아가므로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거기에서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철저한 개혁주의 교리와 신학교육의 중요성입니다. 이러한 철저한 교리교육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교리를 올바로 배우지 않으니까 교리를 배우기 때문에 성경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지 교리의 진술과 성경 자체는 해석학적인 순환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리가 성경을 충실하게 따를수록 성경을 읽을 때 교리를 배우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지고, 교리를 배울 때 불현 듯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교리의 공부가 신자들을 성경으로 이끌어주고, 성경을 친근히 하는 것이 교리에 대한 앎의 욕구를 가져올 수 있도록 계속해서 공부해 나가는 그것이 참다운 교회 생활이고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일 먼저 철저하게 교리교육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보면 성경공부를 안 하는 교회는 거의 없지만 성경공부보다 교리공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경공부도 탄탄한 교리교육이 바탕이 될 때 그 배우는 성경공부들이 신학을 가르쳐줄 수 있는 성경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아마 여러 해 동안 바이블 스터디 한다고 교회에서 끌고 다녔는데 어느 순간에 진리가 자신을 붙들어주지 못하는 한계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들이 성경공부를 하는 모든 것들이 모두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성경공부는 사실 경건주의 전통을 물려받은 성경공부입니다. 경건주의 아래에서 차가운 교리,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고 삶의 실천이 없는 이지 화 된 기독교의 화석화 된 모습에 반발을 느끼면서 교리보다는 삶이라는 기치 아래에서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구제를 하고 선교를 할 때 성경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리보다는 성경의 원문을 읽고 그 의미를 터득한 다음에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이런 방식인데 사실은 후자 쪽에 훨씬 더 강조점이 주어집니다.
경건주의 초기에는 교리도 상당히 있었고 성경해석도 굉장히 건전했었는데 성경은 도구가 되었고 자신이 원하는 내용들을 성경을 통해서 찾아내는 자의적인 성경공부가 된 것입니다. 진리의 힘보다는 성경공부 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많은 것들을 쏟아내는 작업들을 하니까 진리의 말씀이 사람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진리 속에 쏟아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공부 교제도 역시 수준에 미치지 못할 때 더더욱 그런 일이 가중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뼈대가 서 있는 곳에 건축자제가 얹혀 있잖아요? 그런 건축자제에서 뼈대가 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교리교육을 해야 합니다.
조나단 에즈워드가 ‘우리의 모든 삶을 지식의 기반 위에, 모든 지식을 삶으로’라는 기치를 내세웠습니다. 프란시스 튜레틴이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 프란시스 튜레틴은 ‘실천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아는 그 어떠한 지식도 참될 수 없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의해 주장되지 않는 그 어떠한 행위도 올바른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페트로스판 마스트리어트는 그의 이론실천신학에서 ‘교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뒤에 하나가 빠졌다고 말했습니다. ‘In Sprit (성령 안에서)’가 빠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신학이란 무엇이냐? 혹은 교리공부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교리공부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혹은 신학지식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이다. 살기 위한 것이다. 그런 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표가 우리의 모든 삶을 참된 지식의 기반 위에 두어서 우리가 왜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세상을 대하고, 그렇게 자신에 대해서 가족과 교회에 대해서 이러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이러이러한 근거 때문이다 라고 하는 확고한 지식이 있고, 그 다음에 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은 올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교와 세례시의 교리교육을 지금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따라서 입교와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중생과 회심을 확인하고 자신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교리교육을 실시해야 합니다. 교리교육을 받았는데 당연히 잊어버리기 때문에 반복해서 그 교육을 해야 합니다.
청교도들이 핍박과 고난이 가득 찬 시대에 그 교리는 그들에게 커다란 위로였습니다.
그 다음에 어린 아이들에 대한 교리교육을 실시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에 대한 교리교육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엄마, 아빠에게 있습니다. 그 다음은 교회입니다. 아이들이 사물을 알아볼 수 있을 때부터 단순한 그림 같은 것들을 만들어서 유아용 교리 교제를 만들어 가르쳐야 합니다. 태아용 테잎을 만들어 뱃속에서부터 듣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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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의 신앙을 위해 부모가 조기에 교리 교육을 시키도록 유도하여야 합니다. 부모들이 이 중요한 의무를 기피하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인데 하나는 가르쳐야 할 내용이 별로 없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내용은 있는데 자신들이 마음에 감동이 안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감동이 되면 아이들에게 너무나 가르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아이가 사랑스러운데 그것을 아이에게 가르쳐주고 아이가 반응을 할 때 그 행복과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머리만 키우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누구 머리가 그렇게 커졌는지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머리만 너무 커져서 문제를 일으킨 교회가 어디 있는지 내가 가보고 싶습니다. 너무나 지적인 것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교리를 아무리 많이 가르쳐도 평균이하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무지하니까 솔직히 말해서 운전면허 시험 보는 것만큼도 공부를 안 하는 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세례문답 통과하기가 쉽습니까 자동차 운전면허 통과하기가 쉽습니까?
두 번째가 신학교육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신학교육이라는 것은 결국 교리가 성경에서 나오는데 신학 작업을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신학은 그렇게 만들어 낸 교리들을 학문적으로 확대해서 사람들에게 전수시킬 수 있는 지적인 형태로 남겨놓은 것이 신학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교리, 신학, 그리고 개혁주의 적인 삶, 이 네 가지는 떼어놓을 수 없는 연관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교육을 철저히 해야 됩니다.
P49 첫째로, 교회 안에서 신학지식을 함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심화된 교리교육의 일환으로 신학교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교리교육의 문답 집은 대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집 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것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도 미국에 가서 신학교에 가서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학생 중에 한 명이 내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교회에서는 웨스트 민스터 소요리 문답집을 가르칩니까?’ 물었는데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보다 훨씬 이상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기본입니다. 그보다 훨씬 더 이상인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훌륭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교회 역사 속에서 유일한 교리문답은 아닙니다. 또 그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교리문답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한 교리문답들 속에서 전체적으로 채집을 해서 학문적인 형태고 만들어 낸 것이 신학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공부해 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이 약 2년 전에 현대철학사를 훑으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공부했는데 그것은 교리가 아니었잖습니까? 그런데도 그러한 철학적인 이해를 갖고 나니까 우리들이 왜 이렇게 믿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교리 하나 배우는 것 못지않게 더 중요하게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듯이 예를 들자면 60만 톤이 되는 배가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길이가 450m쯤 되고 그 길이는 짧은 길이가 아닙니다. 전심으로 뛰어도 1분 이상 달려야 될 긴 거리입니다. 천천히 걸어도 4km로 걷는다고 할 것 같으면 1km면 15분이고 약 7분 내지 8분을 걸어가야 할 정도로 큰 배입니다. 이쪽 저쪽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나침반을 놓고 북쪽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북쪽으로 간다고 생각하는데 그 큰 배는 남쪽으로 가고 있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북쪽으로 걸어가도 북쪽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배 자체가 남쪽으로 가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맨날 허우적거리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개별적인 의무를 충실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인공위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GPS를 통해서 이 시대가 가고 있는 교회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전체적으로 보고 사상을 이해하는 것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쪽의 강의나 교육도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우리들이 현대의 흐름, 사상, 특별히 현대의 언어 이런 것들을 이해하면서 적절하게 기독교적인 대안도 마련하는 그런 것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중요한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열심히 공과를 준비한다고 하더라도 열을 알고 열을 가르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열을 가르치려면 백을 알아야 합니다. 빙산의 솟아난 부분이 어마어마하게 크지만 가라앉은 부분의 일부분인 것을 아실 것입니다.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은 남한 크기이지만 밑에 있는 부분은 그 덩어리가 일본보다 훨씬 큽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교육에 있어서 가르치는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치기 위해서 필요한 것만을 배우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교사의 자세가 아닙니다. 더 많은 것을 배워서 그 중의 일부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때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역자는 물론이거니와 평신도들 중에서도 교회학교 교사나 구역장, 뿐만 아니라 일대 일 양육교사나 상담자들, 그리고 보다 더 깊이 교리를 배우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이 되는 조직신학과 교회의 역사, 특별히 현대의 사상 이런 것들을 가르쳐서 현대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왜 이 참된 신앙을 반대하고 살아가는지 이런 것들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보면 우리 한 때 그것으로 교회에서 구역공부 한 적이 있는데 헤르만 바빙크의 ‘하나님의 큰 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이 쉽지 않습니다. 대학생들도 어려워서 안 읽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은 맨 처음 이 책이 씌여 질 때에는 농부들이 밭 갈러 나갈 때 수레에 싣고 가서 쉴 때 그늘에서 읽었던 책이랍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공부하는 교제가 어렵다고 하지 말고 어려울수록 이 책이 참 좋은 책이다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열심히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 신앙자체가 지적인 힘을 빼어버리고 모든 것들을 회화화 하고 희화화 하고, 그리고 모든 것들을 소설화하고, 이야기 화 하고 하는 것들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커다란 사상들이 쌓여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학문적인 발전에 이바지 하여야 합니다. 한 시대의 교회의 중요한 사명은 한편으로는 앞선 세대에 남긴 좋은 신학적인 유산들을 성실하게 물려받는 것이고, 자기 시대에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폭넓은 지식을 쌓아가고 그것들을 직접해 나아가서 그 두 개를 연결해서 더 풍성한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풍성할 때 그 시대의 사람들은 더 많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후대에 물려져서 물려진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확산과 폭발력은 굉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잘 보면 외치는 설교는 그 당시에는 신학적인 책보다는 훨씬 감화력이 있고 강력한 효과가 있지만 곧 잊혀지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학문의 형태로 남아서, 그래서 책의 형태로 남아서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전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책으로 쓰지 않고 설교로 썼다면 이렇게 오래도록 보존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의 지식을 보존하는 방법입니다. 지식을 틀 속에 넣어서 보존해야지만 이것이 대중적이진 않더라도 오래도록 전승이 됩니다. 그 틀이라고 하는 것이 학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교회가 다음 세대에 물려지기 위해서 교회가 열심히 외부에서 이루어진 신학적인 활동들, 예를들면 출판, 문서, 그리고 신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학문적인 사역, 그리고 학자들의 학문 활동, 이런 것들을 교회가 성실하게 지원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사실 철물점에서 물건을 사다가 야채를 썰고 밭도 갈고 하는 사람들은 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질렛트라는 면도날 하나 개발하는 데 든 비용이 2천 육백 억이 들었다고 합니다. 칼 다운 칼 하나를 만들기 위해 연구실에서 연구원들이 끊임없는 연구를 합니다. 그런 칼 같은 것을 보면 교회가 선교지에 사람들을 보내서 교회를 세우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하는 데는 자기가 이해하게끔 투자가 되니까 금방 헌신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데 신학자들에게 하는 것은 금방 보이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하찮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유를 하자면 칼을 쓰는 사람한테는 굉장히 칼이 좋다 하지만 저쪽 연구소에서 면도칼 하나 가지고 2천 6백억이 들여서 연구를 하는 동안에 수백 명의 연구 인력들이 그 복잡한 도면을 그리고 그 다음에 소재 분석을 하고 하는 그 모든 과정들은 면도칼로 면도를 하는 사람들이 들여다보면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면도칼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고, 개혁주의 신학과 청교도 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학문을 통해서 어떻게 하든지 이러한 참된 복음신앙을 파수하고 그것들을 굳건히 하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신학자들, 그 다음에 신학을 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격려하고 돕고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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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보편 교회를 위해서 이바지 할 수 있는 훌륭한 신학자들이 때로는 우리가 보기에는 조금 경건한 능력이 부족한 것 같이 보여도 사실 그 두 가지를 모두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 나름대로 교회와 연계를 가지고 자신이 하고 있는 신학 작업에 교회적인 의미를 잘 이해하고 열심히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교회가 격려하고 후원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한국 교회가 공부 한 사람은 좋아하고 하는 사람은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 때문이냐면 공부 하는 사람은 교회가 늘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한 사람은 끝났기 때문에 부담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나무를 심지 않고 열매를 따려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제가 일평생 가장 하고 싶은 사업이 장학사업 입니다. 그것만큼 보람 있는 일이 없습니다. 지금은 사실 교회가 부채가 있어서 어렵지만 형편이 조금만 되면 전 세계에서 공부를 하면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번에 미국에 가서 책 몇 권씩 주고 설교하고 세미나 하고 세 학교를 가면서 밥값이 600만 원정도 나왔는데 정말 눈물을 글썽이면서 좋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트리니티 신학교에 가서 학생들끼리 모이고 저녁 때는 가족들한테 식사를 대접했는데 너무 감탄을 하고 좋아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할 수만 있다면 교회에서 그 사람들이 우리교회에 와서 일하지 않아도 장기적인 비전을 보고 그런 사람들을 잘 길러내고 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을 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엄청난 후원을 받고 편하게 공부를 하고 책을 사보고 하는데 개혁주의 신학을 하는 공부하는 사람들은 후원해 주는 사람들이 없어서 하다가 중도에서 학업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하다가하다가 너무 힘드니까 할 수 없이 교회를 개척하거나 이런 상황이 수시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그런 일들도 너무 중요하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중국에 무안 신학교를 하는데 학생들과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학생이 ‘목사님, 이것은 질문이 아니고 제가 2년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느낀 생각입니다. 목사님은 굉장히 politic하신 것 같습니다’. ‘니가 나를 왜 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느냐?’ 물었습니다. ‘교수님들이 대단하신 분들인데 목사님이 정치력이 대단하시니까 그 분들을 데려온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런 것들도 보면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제 생각에는 제 자신이 교수이니까 교수님들께 잘하고 우리 교회를 좋게 봐주고 잘 따라 주니까 사실 협력해주고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누가 여름에 가서 한 번이야 갈 수 있지만 한 번 가서 3-4일씩 강행군으로 일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면 학생들 때문에 교수들이 자신의 마음이 리바이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학기에는 강사료를 조금 드리지만 그 강사료에서 35%를이 떼어서 장학금을 내놓습니다. 이런 일들이 자기네들이 결정을 해서 드렸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렇게 좋은 신학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미래의 신학자들을 길러내는 일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은 잘 모릅니다. 목회자들이 진실한 사람인데 세속주의라고 제가 말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무슨 소리인지 잘 모릅니다. 굉장히 진실합니다. 목회에 사심도 없고 자기 명예를 위한 마음도 없고, 그런데 신학이 없으니까 인간중심으로 목회를 합니다. 내가 아는 어느 교회에도 전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고급 승용차를 주겠다고 내놨는데 그 목사님도 굉장히 진실한 사람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신학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일깨워주고 가르쳐주는 역할을 비록 그 사람들은 설교에서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키지 못하지만 이론적인 기반 같은 것들을 신학자들이 놔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을 깊이 인정을 하고, 그 사람들을 후원을 하고 협력을 이루면서 교회와, 신학교와, 신학활동 이런 것들이 전부 다 같이 가서 하나의 보편교회 전체로 보고, 지난 시대의 신학들을 물려받고 자기 시대의 신학을 잘 발전시켜서 그것들을 목회의 열매로 남겨서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죽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것을 가지고 또 다음 세대에 문제를 극복하고 다시 신학을 발전시켜서 물려받고 이런 것들이 어느 시대에는 아주 충성스러워서 잘 하던 때가 있었고 어느 시대에는 신학도 찌그러지고 목회도 찌그러져서 후대에 남겨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밑에 애들을 마치 엄마아빠가 가산을 탕진하고 카드 빚만 남겨놓고 죽은 것처럼 굉장히 고달픈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들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년에 한 번씩 교회에서 개혁파 전통주의 신학 세미나를 하는 것 그런 관점에서 봅니다. 좋은 외국에 있는 학자들을 돈이 없으니까 학교에서 못 부릅니다. 그런 것들을 교회가 잘 해서 좋은 학자들을 초청해서 신학교에서 강의하게 해드리는 학교를 위한 커다란 섬김입니다. 한국 학자들이 도전을 받고 그 책들이 소개되고 이렇게 만들어 줘서 학자들이 철저하게 자신의 신학이 교회를 위한 신학이 되고, 교회는 그 신학을 적절하게 활용을 해서 이겨나가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17세기 화란에서 데카르트 주의가 일어나면서 신학을 커다랗게 훼손했습니다. 그 때 신학 안에서도 데카르트를 따르는 칼트시안들이 생겨나 가지고 교회의 건전한 개혁교회의 교리들을 허물어뜨리고 할 때 교회가 일치단결을 했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학자들을 후원해가지고 거대한 칼트시안들의 논쟁을 치러내는 그런 것들이 한 순간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협력관계를 잘 이뤄나가는 것이 보편교회 전체를 바라보면서 교회는 신학교를 욕하고 신학교는 교회를 욕하고 이런 것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목회자는 교수를 무시하고 교수는 목회자를 무시하고 하는 것들은 정말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을 우리들이 해 나가야 된다 하는 말입니다. 무안신학교가 한 사람을 교육시키는데 첫 회에는 천만 원이 들었고 둘째 해는 팔백만원이 들었고 이번에는 육백만원정도 들어 갔습니다. 교인 중에서 생활이 어렵지 않은 사람들이 사명감을 갖고 한 학생이 마지막 선교사역을 할 때까지 후원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너무나 부담들이 무거우니까, 그렇게만 한다면 학교가 하나 뿐만 아니라 여러 개의 신학교를 할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신학교 문제는 점점 개혁신학을 자꾸 버리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외국의 복음주의 권 내에서 상당히 존경받고 유명하던 교수님 몇 분이 진화론을 지지하고 성경의 무오 성을 비판하면서 신학교에서 잘려나가는 가슴 아픈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유주의 신학은 굉장히 거세고 참된 개혁주의 신학을 파수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미국에서는 이런 개혁신앙을 가지고 논문을 써서 통과할 수 있는 학교가 백 학교에서 다섯 밖에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이런 신학들을 잘 돌보면서 건전하게 이런 신학활동들을 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 보편교회 전체를 향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지금 현재에서 목회자들이 갈 길을 잃고 방황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까 이야기 했듯이 마케팅 교회가 성공을 하길래 힘들게 배워가지고 뒤쫓아가봤는데 너무 늦게 깃발을 든 것입니다. 효과가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뭐든지 장사도 첫 번 개시를 해야지 손님을 와락 몰고 여기저기에서 똑같은 가게가 많이 생겼는데 피자집 옛날에 돈 많이 벌었습니다. 은퇴한 사람들이 모두 피자집 하니까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마케팅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점점 물 건너가고 있습니다. 편리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식으로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머징 교회로 다시 갈아탑니다.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변신을 하는데 그 자체가 교회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사실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회 사역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그리고 우리가 주변에 있는 교회들을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아도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설교하면 그 진리를 붙들고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개혁주의 신학과 목회가 어떻게 아름답게 연결이 되어서 그럴 수 있는지를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혁신학으로 목회를 해서 열린 교회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름답게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도처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자라나는 목회자들이 이렇게 해도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질 수 있구나 하면서 그런 도전을 받고 자신도 그 길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모든 이야기들은 너무 비관적이고 이 시대에는 시대의 조류를 좇아야지 개혁신학 가지고는 안 된다 이런 패배론 적인 목소리들이 가득하니까 되는 것이 무엇이고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렇게 되니까 해보지도 않고 사람들이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굉장히 가슴 아픕니다. 내년에 한 번 한국에 있는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모아서 개혁신학과 목회가 어떻게 아름답게 연결을 이루고 열매를 거둘 수 있는지를 뜻이 있으면서 방황하는 젊은 목회자들에게 다만 몇 명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사실은 그 쪽도 그런 것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생각하기에는 다음 세대에는 전체적으로는 비관적이지만 참된 개혁신앙을 추구하고 이러면서 우리들이 자라나는 세대들이 교육한다면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모습의 제가 죽은 이후의 열린교회의 모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좋은 사상을 가진 후배 목회자들이 생겨나고 그들이 늙어갈 때쯤 되면 마치 나무의 씨앗이 떨어져 작은 나무들로 숲을 이루는 모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열이 이런 일들을 감사하고 참된 개혁신앙에 접근할 수 있도록 우리들이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와 문학 21세기에 예견되는 사회가 결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미국이 갔던 길들을 그대로 따르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해 아래 새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회는 지금도 많은 자유를 주어졌지만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할 것이고 가까운 시일 내에 통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통일이 되면 남북의 분단문제가 사실은 지금은 물리적인 분단의 문제이지만, 그 때쯤 되면 현실적인 분단 문제가 될 것입니다. 지금 현재 탈북자들이 남한에 많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 사람들은 북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단절을 한국사회 속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교회가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들을 여러 가지 생각도 우리와 다르고 생활이나 이런 것들이 다르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따뜻하게 품고 그들을 한 민족으로 받아들여서 일치와 화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탈북자들끼리 만든 교회가 있다하면 그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한 교회 안에서 완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동화가 되어서 한 교회 안에서 지체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면서 다음세대에는 그로벌리제이션이 죽 퍼져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대세입니다. 몇 년 안에 일본하고 한국하고 완전히 FTA를 하기를 원하다고 하고 중국하고도 FTA가 체결된다고 합니다. 전 세계가 FTA가 체결되면 이것은 신앙적으로 선교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고유한 특성들이 거의 사라집니다. 아시아권이 거대한 통일이 되면서 그런 속에서 분명히 반발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로칼리제이션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고유한 것을 찾자고 하는 운동들이 이뤄지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들 입장에서는 그로벌라이제이션에 많이 식상해지면 다시 우리의 전통문화 이런 것들을 찾는 운동들이 훨씬 더 강력해 질 가능성이 많을 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다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종교나 이런 것들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런 종교사상과 융합해서 새로운 형태의 어떤 혼합주의를 만들어 내고 그것들을 한식 요리를 보급하듯이 그렇게 보급되어갈 가능성이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이런 모든 상황이 될 것이고 지금보다 훨씬 강한 극단적인 쾌락주의가 유행하게 될 것이라고 보고 FTA가 되고 이렇게 되면 영상산업이나 이런 것들이 점점 더 첨단화 되고 음란문화나 이런 것들에 대한 개방 수준이 훨씬 더 공개적으로 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우리나라의 IT산업들이나 영상산업 휴대폰 이런 것들이 세계에 앞서가는데 선교적으로나 우리 마음에 기쁘게 하는 발전은 아닙니다. 여러분 보시면 지금 쓰리 디 영화를 보시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면 4D, 5D, 6D 이렇게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점점 쾌락주의 문화로 이끌어 갈 것이고 정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점점 더 멀리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이미 문제가 되고 있지만 약물이나 마약 같은 것들은 점점 더 심해 질 것이고 가족구조는 점점 더 심하게 해체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인 특징도 사라지고 교단 같은 것도 의미가 없고 목회자가 신학도 어느 신학을 하느냐가 의미가 없고 어느 교회 브랜드냐가 그런 것들이 만연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앞으로 우리들이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겠느냐 성경과 신학을 더 깊이 연구해야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염두에 두면서 철저하게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뿌리 깊은 신학을 탐구해서 그것들을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어야 되고 꼭 필요한 것이 신학적인 내용으로 설교를 하고 성도들에게 교리를 가르쳐도 이렇게 교인들이 기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는 행복을 느낀다라고 하는 증거들을 우리들이 많은 교회들을 통해서 남겨야 됩니다. 그런 일들을 위해서는 미래의 목회자들의 재교육의 문제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직접 관여하고 있지는 않지만 박사 과정에서 포닥을 해야 됩니다. 사실 코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 사역에 있어서는 포스트세미나리코스가 필요합니다. 3년 동안의 신학교 대학원 과정은 실천과목으로 바꾸지 말고 철저하게 이론 과정으로 충실하게 소화를 하고 포스트세미나리코스를 만들어서 1년 내지 2년 정도 해서 포스트세미나리 코스에서 아주 실제적인 훈련들, 예를들면 전도하는 것, 농어촌을 목회하는 것, 해외 선교하는 것, 중독자들이나 문제성이 있는 사람들을 상담하는 것, 불행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 교회를 조직하는 것, 개척하는 것 등등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학생들이 절대 그런 과정에는 등록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비싼 등록금을 내느니 석사학위를 하나 더 받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교회에서 개설을 하고 거기에서 1년이고 2년이고 그런 목회적인 실무들을 터득한 학생들이 학문과 목회가 어떻게 어우러지는 것을 배우고 헌신적으로 전도하고, 양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탐구하고 하는 것들을 몸에 익혀서 목회사역에 실질적이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 마음 속으로는 지금 하고 있는 레지던트 수업이나 인턴쉽 수업을 그렇게 포스트세미나리 코스로 발전시켜 나간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한 교회가 해도 괜찮고 사상이 유사한 교회들이 좀 묶어서 하면 좋겠고 학교와 연결해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이 있겠지만 좀 더 체계적이고 집중적으로 목회에 대한 훈련을 받고 목회할 수 있는 과정 말하하면 포스트세미나리 과정이 정말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지금까지 저의 판단입니다. 이런 속에서 끊임없이 목회자들이 공부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목회를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열심히 기도를 안 하고 목회를 안 하고 이쪽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책과 담을 쌓게 되고 목회도 병들고 신학교도 사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노력이 교회에 필요합니다.
또 하나는 현대인에 대한 이해입니다. 현대인들이 어떤 사람이냐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선교의 원리는 성육신 하셔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마시고 그렇게 하면서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시면서 당신의 진리를 전하시는 계기로 삼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이 교회가 본질을 양보하고 세속화 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어떤 면에서 현대인들을 더 잘 이해하고 우리와 다른 것을 깊이 용납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들을 수납하는 그런 노력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노력들이 굉장히 절실합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가정에서도 그런 원리가 필요한데 가정복음화가 안 되는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가 희생을 잘 하지 않아서입니다. 대의적이고 본질적인 것은 양보하지 말고 그 대신 작은 일에 있어서는 가족들에게 한없이 양보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주 사소한 것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고 대의적인 것도 양보하지 않으니까 그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것입니다. 현대인과 똑 같은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은 대신 얼마든지 겸손하게 낮은 자리로 내려와서 현대인들을 이해하려고 하고 섬기려고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시대 속에 사는 사람들은 뭔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그것까지도 불쌍히 여기는 선교적인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현대문화에 대한 이해와 소통입니다. 문제는 뭐냐면 우리들이 교리를 배운다고 할 때 어려운 점은 기독교 교리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적인 진술들은 사실은 그리스 철학의 틀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틀이 가장 논리적으로 완전하고 이해할 수 있게끔 전달하는 인류가 발견해 낸 최고의 틀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교부 가운데 시리아의 에프렘이라는 교부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런 식으로 신학진술을 하는 것을 반대를 해서 모든 신학서적을 시로 썼습니다. 그것은 오래 남지 않습니다. 오래 남지 않고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시로 쓰면 해석의 다양성들이 나오게 됩니다. ‘아, 구름이 흘러가는구나,’ 도대체 거기에서 말하는 구름은 뭐냐? 흘러간다는 뜻은 무슨 뜻이냐? 그 때 그 마음은 뭐고, 아프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찔린다는 것은 뭐냐 괴롭다는 거냐? 슬프다는 거냐? 서럽다는 거냐? 수많은 해석을 불러옵니다. 시도는 그럴 듯합니다. 모든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노래여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을 우리가 분석을 해서 그래서 그것을 우리들이 이성으로 조직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무모한 일이고 할 수도 없거니와 할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 그것은 언감생신 무례한 일이다. 이론은 굉장히 아름다운 것이지만 시로 써서 전달을 한다면 의문점이 많을 것입니다. 별로 쓸모없이 잊혀져가고 버리고 마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끝 날까지 이런 식으로 어떻게 하든지 간에 기독교이 진리들은 철학과 사상의 형태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 대신 이것만을 계속 고집하고 이 틀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안하려고 하게 하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통로는 상당부분 제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이 복음주의 역사에서 배웠지만 구 프린스턴의 역사를 되풀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자기 것을 유지하면서도 어떻게 하든지 현대인들과 함께 교통하려고 하는 그런 틀들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봐서 어떻게 하든지 소통의 통로를 딱 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다양한 형태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현대인들과 우리들이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현대인들과의 이해의 소통을 위해서는 언어나 커뮤니케이션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공부해 가면서 보다 더 적실한 언어로 이 현대인들과 소통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패인이라는 철학자가 이야기했습니다. ‘의사소통 원래 안 되게 되어 있는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소통을 잘 되게 해 준다’고 했습니다. 의사소통이 안 되게 되어있는데 외국인을 만났어도 서로 깊은 우정을 느꼈으면 의사소통이 잘 됩니다. 기도생활과 너무나 똑 같습니다. 우리들이 현대인들이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우리가 이해 안 갈 정도로 황당한 행동들을 너무나 많이 하는데 그것들을 인내하면서 잘 받아줘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을 이해하면서 언어의 교통 같은 것들이 생겨나면서 움직여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마지막 끝 날까지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고자 하시는 대로 사용되어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68P 중간에 보면 이를 위해서는 한국 교회가 안으로는 자신이 믿는 바를 더욱 확실히 하고, 밖으로는 효과적으로 한국사회와 세계 선교 환경에 적절히 대처하여야 한다. 교회는 물량적인 성장을 지양하고 성도들이 중생과 회심을 통해 참된 성화의 길을 가도록 목회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탈신학적이고 현실적응에 치우친 목회 방법을 버리고 체계적인 성경연구와 개혁주의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교회와 인간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 속에서 건전한 세계관을 갖도록 성도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정보화 사회에서 지식은 넘쳐나지만 몰지각화의 현상이 심화되는 시대에 교회는 성도들에게 철저한 교리공부와 신학교육을 강조하여 깊이 잇는 기독교 지성을 소유하도록 교육하여야 한다. 교회는 먼저 자신이 전파하여야 할 복음의 내용은 믿을 뿐 아니라 현재적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있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가 우리의 모든 기독교적인 봉사에 함께 하도록 온 마음으로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