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성장과 미래의 역할
(201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한국교회의 성장과 미래의 역할(1) 2010.6.19 교역자스터디 1
2. 한국교회의 성장과 미래의 역할(2) 2010.7.2 교역자스터디 14
3. 한국교회의 성장과 미래의 역할(3) 2010.7.17 교역자스터디 22
1.한국교회의 성장과 미래의 역할 1
Ⅰ. 서론
9p 두 번째 단락부터 양목사가 읽으세요........
-교과 읽음(9p~10p)
Ⅱ. 한국교회의 성장과 유산들
A. 한국교회성장의 요인
-교과 읽음(13p~14p)
B. 한국교회 성장의 배경
-교과 읽음(15p~16p)
사실 평양대부흥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에 대한 담론들은 스펙트럼이 아주 넓어요. 그래서 이제 우리들이 평양대부흥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는 박영규 교수가 연구한 것처럼 우리들이 굉장히 보기 드문 순수한 부흥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인정을 하는데 다만 그것들이 그 이후에 그것들의 결과들을 자신들에게 적용시키는데 있어서는 굉장히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마치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그 종교개혁을 자신 속에 적용하는데 있어서 아주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해서 아주 토마스 뮨조의 극단적인 농민전쟁부터 시작해서 심지어는 가톨릭 안에 있는 그런 어떤 개혁에 이르기까지 그런 다양한 적용들이 존재했던 것처럼 평양대부흥도 그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극단적으로는 이런 부흥의 본질적인 면들을 무시하고 저쪽 극단적으로 신비체험을 강조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보다는 성령의 역사만을 앞세우는 그런 극단적인 신비주의도 사실은 평양대부흥을 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리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표준적인 교회의 부흥운동들,
지금은 돌아가셨는지 모르겠는데 박봉남 박사라고 하버드에서 공부하신 조직신학자인데 그분하고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90이 훨씬 넘으셨겠지요. 그런데 1930년대에 평양에서 신앙생활을 하셨어요. 그래서 여쭈어봤거든요. 1930년대 초기에 어땠는지 여쭈어봤어요. 그때 당신은 그 당시 중학생이었다고 그랬는데 그분 하는 말씀이 굉장히 순수했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어디를 가든지 교회에서 설교가들이 객소리를 한다는 느낌은 못 받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한다고 생각했고 교회가 열정적이고 그랬느냐고 여쭈어보니까 그렇지 않고 예배시간이 아주 순수하고 심지어는 그 당시 설교의 길이까지 내가 물어보았어요. 어느 정도로 설교했느냐고 물어보니까 주일 낮 시간이면 그저 한 35분에서 40분정도를 설교하고 그렇게 긴 설교는 아니었는데……. 그분을 만난 것이 1990년대 초였는데 그렇게 40,50,60,70,80,90년대까지 거치면서 느낌은 굉장히 그때의 교회가 순수했구나! 어느 교회를 가든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려고 설교자들이 애를 썼다는 것이에요. 그런 분위기를 전해주셨어요. 그런 것들도 사실은 평양대부흥 후에 일어났던 것이에요.
특히 이후에 일어난 사경회 운동 그 자체가 결국은 사경사들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핀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살펴서 사람들에게 해석을 해주고 가르쳐줌으로써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씀 중심적인 신앙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거기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극단적으로는 여러분들이 평양대부흥의 사건들의 기록들을 보면 부흥이 일어나고 나서 곧바로 사회개혁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 해 전에도 그것을 가지고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때 읽었던 자료들을 보면 쌀집이 있잖아요. 그때는 저울에 달아서 파는 것은 사실 훨씬 후에 나온 것이고 왜냐하면 쌀이 많이 마른 쌀도 있고 그 다음에 갓 지은 쌀은 습기가 많기 때문에 저울이 없어서도 그랬지만 저울에다 쌀을 달아서 파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옛날 사람들은 생각을 했기 때문에 곡물에 대한 ㎏제가 도입된 것은 1970년대 내가 생각하기에는 정부미가 나오면서 생겨난 것이 아닌가 생각 되요. 그전까지는 전부 다 용량제였어요. 표준원에서 말을 만들어주면 그 말하고 똑같은 규격으로 만들어서 재는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방망이로 이렇게 쫙 밀어요. 밀다가 마지막에 조금 남겨두는데 그게 말하자면 개평이랄까 어쨌든 조금 더 주는 것이죠. 인심이 사나운집은 싹 밀어버리고 조금 단골이면 끝에다가 요만큼이라도 더 남겨두어서 그렇게 하고 그랬죠. 그리고 친척들이 쌀을 사고 팔 때는 그냥 아예 방망이로 밀지 않고 그냥 주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게 평양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 후의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도 보면 항상 쌀을 사다가 쌀독에 넣는데 할머니가 그러시기를 ‘참 이상하다 저 집에서 쌀을 사면 이렇게 항상 쌀독이 조금 떨어지냐?’ 그러셨어요. 알고 보니까 말밑에 판때기 하나를 더 까는 것이에요. 그래서 한말을 팔면 요만큼씩이라고 떨어지니까 그게 여러 말을 파니까 그것을 모아도 꽤 많은 것이 되죠. 그것이 걸리면 커다란 죄요. 굉장히 크게 걸립니다. 크게 걸려도 뇌물을 주고 다 풀려나던 시대였지요. 아마 평양에서도 그랬던 모양이에요. 쌀집 주인이 회심을 한 것이에요. 쌀집에 걸고 나는 몇 년 몇 월부터 시작해서 이제까지 말밑에 판때기를 깔아서 속였다. 그러니까 나는 다 기억을 못하니까 우리 집에서 쌀을 산 사람들은 와라. 그러면 내가 그 과거를 소급해서 다 보상을 해주겠다. 사실은 그 얘기가 지금 우리가 들으면 우습지만 그 당시로써는 그게 한두 달 속인 것이 아닌데 그것을 거꾸로 해서 그것을 배상한다는 것은 마치 삭개오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해주는 그런 사건이었단 말이죠. 그런 것뿐만 아니라 길선주장로의 100불을 사취한 사건에 대한 고백은 그 당시에 100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큰돈이었거든요. 우리 초등학교 때 기와집 한 채가 15만 원 정도밖에 안했어요. 그러니 100불이 60년대보다 더 거꾸로 올라가면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죠. 그런 식의 개혁운동들이 실제로 일어났어요. 술집이 문을 닫는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났어요. 그리고 아마 술, 노름 이런 것들을 강력하게 죄악시하기 시작한 것이 사실은 평양대부흥을 기점으로 해서 일어난 운동들이었어요. 술, 화투, 노름하는 것, 담배 피는 것, 이런 것들을 죄악시하기 시작한 것, 그 다음에 축첩제에 대한 강력한 반대운동, 그 다음에 조혼제에 대한 반대운동, 이런 것들도 사실은 평양대부흥 이후의 평양 부흥이 이런 것을 가르쳐주었다가 보다는 그런 사회적인 악습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그 평양대부흥을 통해서 얻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에요. 초창기에는 어떤 식으로 타협을 했느냐하면 이미 들어온 사람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추가로 얻으면 안 된다. 추가로 얻으면 치리하겠다고 해서 1920년대에 와서는 교회가 상당히 기틀이 잡힙니다.
1920년대에 새문안교회의 당회록을 조사한 어느 교수가 책에다가 그 증거들을 쭉 썼는데 거의 매주일 치리가 있었더라고요. 거의 매주일……. 그런데 그게 어느 정도의 효과를 나타냈는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있지만 치리가 있고 그래서 사건도 다양해요. 돈을 빌리고 아주 악성으로 그 돈을 갚지 않는 악덕 채권자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축첩, 그 다음에 바람피우는 것, 아내를 폭행하는 것, 그런 것에 대해 계속 출교,……. 해서 계속 징계가 주어진 것을 보았어요. 그런 것들도 사실은 평양대부흥 이후에 일어난 일이거든요. 그렇게 스펙트럼이 아주 다양하게 일어나게 되요.
지금 인도네시아 같은 경우에 아직까지 나름대로 1980년대 90년대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이냐 하면 1960년대에 아주 강력한 부흥이 거기에서 일어납니다. 코흐라는 사람이 타오르는 부흥의 불길이라는 책을 썼는데 인도네시아 부흥에 대한 역사인데 1960년대 말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회자로 헌신합니다. 그 사람들이 1970년 1980년대 1990년대에 그 사람들이 거의 사위어져가는 것이에요. 그 후에 부흥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인도네시아가 어렵다고 그러는 것인데 어쨌든 그런 부흥은 수많은 목회자들을 만들어내고 평양 대부흥도 부흥이 있고나서 수많은 전도자들 특히 목회자들을 하나님이 복음이 팽창되는 시기를 염두에 두고 그렇게 해서 그 당시에 아주 강력한 부흥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배출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리고 부흥이 일어날 때에 생겨난 교역자의 질과 그런 것이 없이 생겨난 교역자들의 수적 증가의 질은 비교할 수 없이 현저하게 달라요. 그래서 오늘날은 목회자가 되었는데도 개인적으로 거의 부흥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신학교에 가고 그것이 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기는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이에요. 완전히 종류가 다릅니다. 별종이에요.
지금 중국과 미국에서 차세대 사업으로 중요하게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런 수박씨가 있잖아요? 이것은 여기에서 태어나서 여기에 있는 것인데 이것을 우주로 가지고가서 여기에 없는 전혀 다른 광선이나 전파들을 쏘이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기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종류의 변이가 일어나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부흥을 통해서 다루시는 것이에요. 한번 부흥이 확 쓸고 지나가지 않으면 다음세대에 영적인 거목들은 안 생겨요. 절대 생겨나지 않아요. 학교교육이나 그런 것들을 통해서 절대 그렇게 생겨나는 게 아니에요. 계속 나가겠습니다.
-교과 읽음(16p)
이런 요소들은 말이죠. 교회역사에서 아주 특이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분들은 그때 아직 어려서 몰랐겠지만 기도원운동이 아주 절정에 달했던 때가 나는 1970년대라고 봅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기도원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 사실 물자도 없고 워낙 가난하고 하니까 기도원이라고 해봐야 산에다가 학꼬방처럼 지어놓고 슬레이트나 얹고 그렇지 않으면 아니면 함석지붕이나 얹고 했지 요즘 우리가 가는 그런 수양관을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런 것들을 세웠어요. 그리고 법도 허술했기 때문에 산에다가 지어도 그렇게 큰 문제가 안 되었으니까 나중에는 70년대 들어서 특히 유신이후로 굉장히 심해졌어요. 그래서 기도원들을 철수하고 철거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었는데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여서 어떤 기현상이 일어나느냐하면 지금 있는 성복교회나 그리고 천마산 기도원을 하던 교회들 그 다음에 오산리의 기도원 같은 큼직한 기도원을 가지고 있던 교회들은 기도원의 수입이 교회의 수입보다 더 많았어요. 그래서 기도원에서 돈을 걷어서 교회에 집어넣어서 교회당도 짓고 교회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것이죠. 그리고 교회당에서는 헌금을 안 해도 되는데 기도원에 가서 헌금을 안 한다는 것은 은혜를 못 받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에요. 그런 것들을 막 집어넣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중에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급속하게 타락해요. 사실 돈이 모이면 반드시 타락합니다. 그것을 막는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이냐 하면 투명하게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탐욕을 없애는 것이에요. 그리고 교회의 재정은 어느 정도 공개가 되지만 기도원의 재정은 기도원에 오는 사람들이 고정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떠도는 사람들인데 무엇이 되겠어요. 그리고 때로는 어마어마한 거액의 헌금도 기도원에 내고 그러잖아요. 왠지 교회에 내는 것보다는 기도원에 내는 것이 하나님이 더 주목하실 것 같은 눈여겨 보아주실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죠. 그래서 엄청나게 폭발적인 일이 일어나죠. 할렐루야기도원 같은 데는 듣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냥 돈을 셀 수가 없어서 매일 자루로 담았대요. 생각을 해봐요. 이게 아침 새벽부터 시작해서 밤까지 하루에도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씩 집회를 여는데 매시간 헌금을 했거든요. 생각을 해봐요.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것이죠. 사실은 어떻게 보면 그것이 한국교회를 타락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 것이죠.
그런데 그런 기도원 운동들이 엄청나게 일어나는데 대부분 보면 서양에서의 수도원운동은 현실에서 피하는 그런 종류의 운동이었잖아요? 그래서 기도가 있었다고 하더라고 사실은 그야말로 수도적인 기도였는데 이것이야말로 속세의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기도원을 택하는 것이에요. 세속의 문제를 끌고 가서 거기에서 쏟아놓고 기도를 하면 거기에서 응답을 받고 와서 현실생활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좋게 말하면 기도의 영역들이 넓어진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무엇인가 기독교의 본질로부터 서서히 기도원 운동과 함께 이탈하고 있는 장면들도 사실은 감지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제 사실은 한국교회의 불건전한 은사운동과 이런 것들은 사실은 기도원을 중심으로 많이 퍼졌어요. 왜냐하면 기도원의 어떤 신령함은 응답받는 비율과 그 다음에 은사의 강도에 의해서 사실은 그 기도원의 인기순위가 결정되었거든요. 가서 이렇게 쉬고 오는 이런 개념이 그때는 없었지요. 그러니까 불편하고 그런 자체를 하나의 고행적인 수단으로 생각했으니까 그러니까 한얼산기도원 같은 경우도 초창기에는 밥을 식당에서 안 해주고 들판에다 수없이 개구멍을 만들어놓았어요. 그래서 갈 때에 솥하고 쌀하고 자기가 가지고가서 자기가 알아서 해먹는 것이에요. 나중에 사회가 좀 나아지면서 구내식당도 생기고 그렇게 되었지요. 초창기에는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런 기도원운동들이 사실은 한국교회에 영향을 많이 끼친 것이에요. 그래서 이따가 읽다가도 나오겠지만 좋은 의미에서는 그렇게 기도를 동역화했던 면이 있지만 나쁜 의미에서 보면 그런 것들이 초점이 상당히 빗나간 기도원 운동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감지하게 되는 것이에요.
다음세대는 그것이 어떻게 갈까에 대해서 우리들이 많이 생각하는데 아마 레저와 휴양 이런 것들을 겸비한 쪽으로 더 많이 흘러가지 않을까 생각되고 그런 것을 보면 광림교회 같은 데가 굉장히 뭐랄까 앞을 내다보는 교회라고도 말할 수 있지요. 1985년도에 제천 쪽에 있는 광림수도원에 갔는데 아예 골프장을 기도원 속에다가 넣더라고요. 지금도 굉장히 특이하지만 그 당시로써는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기도원이라고 그랬나? 수양관이라고 그랬나? 그 속에 아예 골프시설을 넣었어요. 미니 골프장인데 조금마한 것이 아니고 꽤 어느 정도 되는 골프장을 같이 지었어요. 그래서 거기에 내려가서 이미 1988년도쯤 되었는데 Full Auto 세탁 시스템이 다 들어갔어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해놨어요. 레저를 중심으로 간다는 것을 굉장히 많이 읽어낸 것이죠.
그런 기도원의 변천사를 보고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 것인지를 읽어보는 것도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에요. 특히 어디야? 오스트레일리아를 갔을 때 특이했던 것은 한참 그런 수양시설로 만들어놓았던 수많은 시설들이 거의 흉물스럽게 방치된 것이었어요. 교회가 쇠퇴하면서 그것을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진 것이죠. 그 다음에.
-교과 읽음(16p~17p)
이 문제도 사실은 1973년의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는 여러분들이 신복음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인 것을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이런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다음에 엑스폴로, 민족복음화 대성회, 등등으로 이어지는 전개과정들이 굉장히 한국교회의 성장에 이바지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실은 기독교신앙의 본질들을 상당히 잃어버리게 되는 그런 과정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잊지말아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저의 기억에는 1960년대 교회부터 저는 기억에 명료하게 있거든요. 그런데 진짜 교회를 세우면 사람들이 몰려왔어요. 분위기가 지금 캄보디아가 똑같아요. 세우면 그냥 몰려오는 것이에요. 특히 애들이 정말 갈 데가 없어서 그런지 우르르 몰려오고 어른들도 그렇게 교회에 많이 나와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데 전도부인들이 있었어요. 전도부인들은 신학교를 다닌 사람들도 있었고 아닌 사람들도 있었는데 예수를 만나고 은혜를 받은 것을 시장바닥 같은데서 벽돌 몇 개 놓고 올라가서 한복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간증을 하는 것이에요. 간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복을 입었어요. 나이는 그저 40대에서 60대정도로 골고루 있었고 아주 젊은 사람들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자기가 6.25때 남편을 잃어버리고 과부가 되어서 힘들게 살았던 이야기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간증을 하면 그 자리에서 예수를 믿겠노라고 결신서를 막 썼어요. 제가 뚜렷이 기억이 나요. 지금의 길음 시장이라고 정릉 가는데 있잖아요. 거기서 공부를 했는데 초등학교 2, 3학년쯤 되었을 때인데 그리고 옆에 있는 젊은 청년이 그 결신서를 받는 것이에요. 그냥 뭐 양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주소와 이름을 적는 것이에요. 그 당시에는 전화도 없었으니까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찾아가서 심방을 하기도 하고 어느 교회로 나오라고 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어요.
그리고 나는 사실은 거기까지는 못 봤어요. 그런데 권사인(?) 운동이라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너무 기쁜데 농어촌아웃리치를 하고 싶은 것이에요. 그런데 그냥은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권사인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장돌뱅이처럼 보따리에 책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언문으로 된 책들을 보급하고 파는 것이에요. 거기의 상당부분이 쪽 복음이나 이런 것들이 많이 담겨있었고 방물장수들에 대한 기억은 내가 가지고 있어요. 방물장수들은 뒤에 사과궤짝들을 몇 개 메고 다니는데 그것을 열어보면 무슨 참빗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가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것들이 거기에 있어요. 종이도 있고 붓도 있고 색경이라고 그랬는데 거울도 있고 칼도 있고 그런 것들을 오밀조밀하게 펼쳐놓으면 동네사람들이 다 모이는데 거기서 예수를 전하는 것이에요. 예수를 전하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고 방물장수만 기억이 나는데 그런 것들로 이제 둔갑을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굉장히 많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그냥 교회만 세우면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에요. 초창기에는 찢어지게 가난했거든요. 왜냐하면 모이는 사람들이야 아까 얘기했듯이 돈 많은 사람들은 잘 안 나왔어요. 지금도 기억에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까 항상 돈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가난한 목회자……. 이렇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1970년대에 사람들은 계속 굉장히 오는데 생활수준은 점점 나아지는 것이에요. 교회의 형편이 나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제 사람들이 목회자의 길도 갈만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1960년대 이화여대에서 앙케트 조사를 했는데 목회자의 순위가 이발사 다음이었대요. 그 당시의 이발사는 가난한 사람의 대명사였거든요. 이발 기구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이발을 해주었는데 그 사람 다음이었대요. 그런데 1974년도에 우리가 100억불 수출을 달성하고 1000불 국민소득이 넘었거든요. 그때의 우리 수준이 지금의 북한 수준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리고 나서 급속도로 잘살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것은 계속된 것이에요. 그것도 사회적인 요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죠. 왜냐하면 잘살게 된다는 것은 결국은 누군가 노동자 계층들이나 노후계층이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는 것이죠. 중국의 저임금같이 그런 것들이 사회적으로 억눌린 것이에요. 그런 억눌린 설움 같은 것들을 교회에 와서 특히 금요기도회 때에 다 쏟아내는 것이에요. 그 당시에 일어났던 금요기도회의 열풍은 우리 모두 100% 영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되고 상당히 사회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에요. 거기서 막 울분 같은 것들을 다 쏟아내고 카타르시스가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나가서 다시 일하고 그러면서 우리도 그 당시에 정부에서 내걸었던 것이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잘살아 보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잖아요. 굉장히 물질적인 것들이었단 말이죠. 그런 것들을 교회에서 신앙이라는 형식으로 받아들여서 그래서 번영주의 신학이 그때 기가 막히게 그 조류를 탄 교회가 말하자면 순복음교회에요. 철학 자체를 그렇게 만들어버렸으니까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이죠. 그래서 막 폭발적인 교회의 성장들이 이루어지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무슨 문제들이 나오느냐하면 교회들이 생겨나는데 그 당시에는 부목사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어요. 목사가 그냥 하는 것이죠. 전도사라는 개념도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심방하고 전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교육전도사라는 개념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어떻게 되죠? 그다음에 이제는 뭐 열심히 공부해서 누구 밑에 들어가서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사업체를 하듯이 교회를 세운다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목회자가 필요하니까 군소신학교들이 막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사실 군소신학교가 문제가 주범이 된 것이 아니라 상황이 군소신학교의 출현을 만들었죠. 군소신학교를 만들어내니까 고등학교를 안 나와도 된다. 중학교를 안 나와도 된다. 초등학교를 안 나와도 된다. 은혜만 받으면 된다는 식으로 하면서 사람들이 신학교에 몰려오고 반지식(?)주의 같은 것들이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깊어진 것이에요. 신학교에 가서 공부 안 해도 된다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대게 신학교 다닐 때 공부 안했던 목사들이에요. 그리고 지금도 안하고 있는 사람들이죠. 그래도 지금 공부를 조금이라도 하고 있고 신학교 다닐 때에 진지하게 공부했던 사람들은 절대 그렇게 가서 이야기 하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들이 막 퍼지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군소신학교가 오히려 대세를 이루게 됩니다. 지금도 통합측 같은 교단은 지방에 내려가잖아요? 그러면 정규코스를 받은 사람들은 마이너리티에요. 저 구석으로 밀려나요. 대세를 전부다 편목한 학생들이나 지방 신학교 출신들이 다 좌지우지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도 이제 총신을 보면서 하나의 거울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무조건 학생 수를 작게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반성들이 또 나오는 것이에요.
그러면서도 이제 아쉬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교회가 좀 일치를 이루어서 그래서 철저하게 지도자들이 제대로 된 목회자들이어야 한다는 사상들이 좀 강력하고 투철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했어요. 그런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그 시기에 교리교육은 완전히 무시됩니다. 이미 그때부터 무시됩니다. 교리라는 것은 결국은 이단시비가 나올 때나 한 번씩 떠오르는 문제였지 지금 기억에도 거의 교리를 안 가르쳤어요. 그러면서 이런 군소신학교의 출현, 그 다음에 교인들 자신이 교리를 안 가르쳐주니까 올바른 목회자와 잘못된 목회자들을 구별해낼 수 있는 Tool 자체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교리교육을 잘 못하게 되면 당장은 유익한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그 대가가 교회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에요.
금요철야가 일반화 된 것은 1970년대 후반이었어요. 교회마다 약간의 차이점은 있는데 후반이에요. 그리고 80년대에 들어와서는 거의 안하는 교회가 없을 정도가 되었지요. 그러다가 그만두기 시작한 것이 언제쯤일까요? 요새? 요새야 거의 금요철야기도회를 안하잖아요. 90년대 중반정도 되지 않을까요. 그때부터 빠져나가기 시작했어요.
C. 한국교회의 유산들
1. 기도 중심의 경건
-교과 읽음(17p~18p)
여기에서도 우리들이 양면성을 보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일단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했고 열렬했다는 것은 우리들이 부인할 수 없어요. 그리고 여러분 아마 그 당시를 기억할 것이에요. 11시에 철야기도가 시작되면 4시가 되어야 끝났어요. 그리고 특히 기도원에서는 매일 철야가 있었어요. 그래서 매일 철야가 있거나 아니면 금요일에는 기도원에서 철야를 잘 안하고 이제 목요일이나 화요일에 했어요. 그것은 교회에서는 금요일에 금요기도를 하니까 그 이외의 날에 와서 그렇게 철야기도를 하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 기억에 3시 4시까지 계속되었고 잠깐 30분이나 한 시간을 쉬었다가 새벽기도 하는 것으로 철야기도를 마쳤거든요. 굉장히 뜨겁고 열렬했고 간절했어요. 그런데 방향이나 이런 것들이 정말 올바르게 자리 잡혀 있었느냐에 대해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죠. 그래서 아무리 뜨거운 기도운동이라도 올바르게 방향이 잡혀지지 않은 것들은 결국 처음에는 작은 차이여도 나중에는 굉장히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렇게 보면 결국은 이런 기도운동이 후에 세월이 흐르면서 굉장히 개인주의화 되었어요.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했다고 그러지만 대부분 반공주의적인 기도운동들이었고 그래서 북한을 적그리스도의 집단으로 보는 그런 어떤 반공주의적인 기도운동들이었어요. 그런 면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 다음에.
2. 성령 중심의 선교
-교과 읽음(18p~19p)
이것이 사실은 제일 커다란 문제였어요. 그러니까 그래서 이제 평양대부흥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들에 굉장히 많이 기초를 하고 있지요. 무슨 뜻이냐 하면 사실 성령에 대한 강조는 역사적으로 보면 굉장히 어렵거든요. 성령에 대한 것들을 강조하게 되면 반드시 이렇게 주관주의에 빠지거나 은사 오용주의 그 다음에 성령의 어떤 내적인 광명, 이런 것들에 대한 강조를 가져오게 되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약화를 가져왔어요.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에도 보면 사실은 조명교리를 올바르게 가르치지 않고는 사실 이 균형을 유지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사실 오늘날 조명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이죠.
사실은 지난번 논문 때에도 이야기를 했고 내가 이야기를 했고 자기 깨어짐에서 내 나름대로 개혁주의적인 의견을 개진했는데 다시 한 번 읽고 정리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조명이라는 것 자체는 인간의 지성에 무엇인가 하나님의 빛이 더해지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조명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신비주의 밖에는 남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게 해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깨달음과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하는지에 대한 탐구들이 제대로 강조되어야하고 그 다음에 성령이 어떻게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고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이 신뢰할만하다는 것들을 가르쳐야되는데 그런 것들이 현저히 약해지는 것이죠.
-교과 읽음(19p)
여기에 불행 중 다행인 것이 뭐냐 하면 평양대부흥의 전통들이 살아남아서 확 깨뜨려져야지만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신학적인 인식이 한국교회에서 아주 분명하게 꽤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왔어요.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회심에 대한 강조는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어요. 제 생각에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회심에 대한 강조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아주 현저히 사라졌어요. 70년대 중반정도까지만 해도 살아있었습니다. 제가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교회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회개하라는 메시지가 70년대 중반까지는 있었어요. 80년대에 접어들면서 거의 완벽하게 사라지더라고요. 그리고 9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회개하면 말리는 분위기였지요. 그래서 이게 잘 들어보세요. 재미있는 게 이렇게 강력한 회심을 강조한 것은 좋았는데 그러다보니까 어떤 것이 되느냐하면 회심과 칭의에 대한 강조에 치우치는 것이에요. 그래서 구원을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종교 개혁안에 있었던 이신칭의의 문제를 마틴 루터도 마찬가지고 존 칼빈도 마찬가지고 사실은 초창기의 중생론은 넓은 의미의 중생론이었지 결코 좁은 의미의 중생론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아주 극단적으로 분류화시키는 일들이 우리의 한국교회의 선교과정에서 나타났던 것이죠. 물론 좁은 의미의 중생론들이 발달되기는 했는데 그것은 사실은 어떤 논쟁적인 구분들이었는데 이제 아까 이야기한 식으로 회심과 칭의에 치우쳐버리니까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이 구원을 보증하신다는 그런 것들이 오히려 부도덕한 삶을 촉진시키고 무율법적인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이에요. 특히 무율법적인 삶을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에요. 그 다음에.
-교과 읽음(10p~20p)
그러니까 1980년대에 일어났던 성경공부, 강해설교, 제자훈련, 이런 것들은 상당히 긍정적인 측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저쪽에서 일어났던 그런 현세적인 구복운동들과 불건전한 신비주의, 이런 것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측면에서 이런 것들 즉 기독교신앙의 전 포괄적인 측면들을 강조하면서 사실은 나온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제 뒤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는 역사를 평가할 때 이러한 80년대에 일어났던 성경공부 운동과 그 다음에 강해설교운동, 교재를 갖다놓고 사실 그때 그런 분위기를 타고 CCC나 네비게이토 등 각양 파라처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런 얘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기존교회에 대해서 굉장히 불만과 반성의 결과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나는 이렇게 해석해요. 뭐냐 하면 이런 운동들이 사실은 빗나가고 잘못된 것들에 대한 대안으로써 주어지긴 했지만 그런 대안 자체가 사실은 개혁주의의 뿌리를 둔 대안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것은 오히려 뒤에서도 이야기하지만 경건주의적인 전통에 뿌리를 박은 그런 종류의 대안들이었다고 보는 것이죠.
그리고 사실은 경건주의 운동은 교리보다는 삶이라는 것을 제시했지만 여기에서는 사실은 교리보다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어요. 교리 자체를 별로 가르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신앙의 본질 자체가 말하자면 실제적인 삶이요, 생활이다. 그런 것들이 되겠지요. 그리고 도슨 트로트만이나 이런 사람들이 1970년대 80년대에 제자훈련이나 이런 것들을 미국에 있는 침례교회 교단들을 중심으로 해서 그런 새로운 운동들이 일어날 때에 그것을 받아들여서 한국에 와서 교리보다는 실제적인 삶과 인격의 성숙 이런 것들로 제시했을 때 그래도 굉장히 신선한 충격이었지요. 그래서 그 당시에 이동원 목사님의 새생활 세미나라든지 옥한흠 목사님의 제자훈련이라든지 그런 것들은 굉장히 신선한 충격이었지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개혁주의적인 전통을 토대로 한 대안이라기보다는 경건주의적인 전통들을 가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잘 들어보세요. 그런 점에서 이제 어떻게 보면 이후의 90년대에 펼쳐지는 급속한 사회성장, 2000년대 오늘날 펼쳐지는 급속한 경제성장, 이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그러면서 나름대로 이제는 어떤 예를 들자면 80년대에 강해설교운동 같은 것도 있었지만 그때 사실은 신학이 강조된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러니까 하도 성경을 설교를 안 하니까 그래도 성경을 설교하자는 운동이었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성경신학운동은 아니었어요. 성경을 설교하자는 운동이었지요. 신학은 강조되지 않았어요. 지금은 강해설교운동도 많이 물러났지만 그런 것이니까 사실은 어떤 현실들이 계속 움직일 때 그때 같이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이지 어떤 뚜렷한 신학적인 관점이나 이런 것들이 성경신학운동이나 성경공부운동 같은데서 전개된 것은 아니었거든요. CCC 성경공부를 비롯해서 많은 성경공부교재들이 개혁신학의 구원론이나 아니면 교회론에 있어서 신학적으로 상당히 심각한 결함들을 내포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그런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공부를 하고나면 오히려 개혁신학에 대해서 친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반감을 갖게 하는 그런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엄격하게 말하면 이후 2000년대에 일어난 어떤 탈신학적인 목회를 예고했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도 올바른 신학운동이 일어나 본적이 없는 것이에요. 그게 문제였던 것이죠. 그래서 그렇게 하고 무슨 강력한 18세기의 경건주의운동처럼 그렇게 강력한 부흥을 동반한 그런 경건운동도 아니었거든요. 별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로 넘어오게 되는 것이에요. 강해설교를 그렇게 강조했는데 지금 그게 무슨 커다란 영향을 한국교회에 미쳤겠어요? 오히려 많은 사회참여운동이나 이런 것들로 넘어가는 한 과정이 되게 되었던 것이죠. 그 다음에.
3. 복음 중심의 신앙
-교과 읽음(20p~21p)
그러니까 뭐냐 하면 복음, 복음 그러는데 복음의 교리에 대한 앎이 없이는 복음 자체에 대한 앎도 온전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그러면 하나의 단순한 복음으로부터 복음의 교리들을 전개해가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가장 중요한 힘이 어디에서 나오느냐하면 신학에서 나오는 것이에요. 신학이라는 제조기에 의해서 복음이 들어가고 그 신학이라는 제조기에 의해서 복음의 교리들이 생산되는 것이에요.
4. 성장 중심의 목회
-교과 읽음(22p)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이 기본적인 심성 자체는 내세적이 아니에요. 낙관적이고 굉장히 현세적이에요. 현세적인데 우리의 신관을 보면 알 수 있잖아요. 뭐냐 하면 이집트의 신관을 보면 오히려 터줏대감도 번영과 관련이 있고 그 다음에 원한 같은 것도 대부분 어디에서 나오느냐하면 현세에서 성공하지 못한, 자기 뜻을 펼치지 못한 것들이 원한이 되어서 내세로 투영이 되고 그리고 그 다음에 그 내세가 자신을 위해서, 신들이 자신을 위해서 복수를 하는 이런 식의 것들은 결국 내세 자체도 강력한 현세주의의 하나의 투영으로 우리들이 보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런 한국인의 심성은 기본적으로 현세중심적인 심성이었는데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런 현세중심적인 심성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이제 기복신앙 자체를 한국인의 심성과만 연결을 지어서는 안 되고 그런 당시의 미묘한 상황과 관련을 지어서 생각해봐야 된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오늘날 일어나는 번영주의와 기복사상 같은 것들은 옛날의 그것과는 훨씬 다른 정신적인 차원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오늘날도 바로 그런 이유죠. 계속하세요.
- 교과 읽음(22p~23p)
여러분 시골에서 처녀들이 서울로 막 무작정 상경하던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1960년대 후반이에요. 그리고 그 다음에 아파트들이 생겨난 것이 1960년대 후반에 최초의 아파트가 여기 청계천, 와우, 그런 곳에 생겨나고 김현옥시장 시절에 돌격 앞으로 해서 막 만들기 시작한 것이거든요. 그 아파트의 건설이 사실 우리나라에 미치는 사회적인 영향은 굉장히 커요. 그래서 뭐냐 하면 완전히 공동체 의식들이 단절되는데 한몫을 하게 하는 것이에요. 사회 자체가 이미 그런 것들이 와해되어가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아파트 같은 것들은 더 심화되고 핵가족제도가 되면서 인간 존재라는 자체를 공동체 속에서 규정하고 내려오던 전통들이 남아있었잖아요. 이런 것들이 도시부터 급속히 무너져 내린 것이죠.
여러분 데이비드 윌즈는 공부 안했지요? 각자 여러분이 읽어보시기 바라고 데이비드 윌즈 같은 사람이 이야기하듯이 도시를 중심으로 생산요소에 다극화 같은 것들이 결국은 상대주의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도시가 산업사회에서 타락하게 되는 요인이 도덕에 대한 가치기준의 질서가 도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래서 예전에는 한 사람이 전부 다 manufacturing을 해서 제품을 생산해 내었는데 다양한 요소들이 들어오게 되니까 이제는 경제를 통해서 누구하나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없다는 암시들이 도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리고 단절되고 그러는데 데이비드 윌즈의 분석은 기가 막힙니다. 데이비드 윌즈는 그 책을 21세기의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생각한대요. ‘끼드딸스데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인데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깊이 인식해야하고 한국하고 똑같아요. 미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그런 도덕의 가치들이 농촌은 천천히 무너지고 그런데 대도시가 무너지고 중소도시로 내려가서 이제 시골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잖아요. 우리도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야겠지요.
그래서 요즘에 아파트보다는 타운하우스가 뜨고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사회 심리학적으로 그렇게 단절하고 살아보니까 재미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community를 이루는 주거공동체들이 새로운 눈길을 끄는데 거기에 자본주의적인 요소가 도입되는 것이죠. 그래서 큰 아파트들 10억, 20억 되는 아파트들을 보면 경비가 철저하지요. 그리고 같은 평수를 가진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컨설트도 하고 원예도 하고 그렇게 노는 것이에요. 그것을 잘 들여다보세요. 그러면 코드가 보인다고요. 그러면 서초동에 있는 15억씩이나 되는 아파트들을 보면 차가 들어오면 경비실에서 감지해서 자기네 집으로 전화벨이 가는 것이에요. 당신 집 차가 주차장에 들어왔다고 그러면서 완전히 차단되는 것이에요. 외부사람들이 접근을 할 수 없어요. 자기네들끼리 사우나도 하고 테니스도 치고 그러면서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그것들에서 가치를 느끼게 되는 것이에요. 가족들과의 연대관계는 무거운 의무들을 내포하지만 그런 관계없는 사람들끼리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은 적절히 자신의 사회적 욕구를 채워주고 의무를 최소화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런 타운하우스가 뜨고 있는 것이죠. 그런 것들이 굉장히 심해지리라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어디에서도 코드가 보이느냐하면 요즘에 옛날에 콘도라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다 회원권을 사던 시대였잖아요. 지금은 한물 간 것이에요. 그것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수련회 갈 때나 쓰는 것이고 지금 저기 평창에 있는 알펜시아나 소노펠리체 이런 고급 프리미엄 리조트들이 개발되는데 상상할 수 없이 비싼 가격이에요. 그 속에서 수준과 신분이 맞는 사람들끼리 이렇게 커뮤니티를 이루면서 여가생활을 즐기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앞으로는 이머징교회가 확실히 뜨게 될 것이에요. 그것은 확실합니다. 그런 것들은 상당히 많은 것들을 채워주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가 나중에 분화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와 부유한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가 될 것 같아요. 교회 자체가 분할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안에서 다시 분화되는 현상들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생각 되요. 그런 것들을 벌써 활용하는 교회들이 있지요. 예를 들면 교회 안에 골프동호회를 만들면 가난한 사람이 거기에 가입할 수 있겠어요? 수시로 외국으로 골프 치러 나가고 그러는데……. 그런 것들이 상당히 각광을 받는 시대가 오게 될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지금부터 한 20년 전에 내가 아는 목사님이고 존경하는 목사님이었는데 다 돌아가셨지요. 자기 일생의 마지막사업이라고 그러면서 그 당시에 300억 규모의 전원주택단지를 만들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다 자연을 찾아 밖으로 나가는 시대니까 300억을 들여서 다세대주택을 짓고 그 당시에 300억이면 굉장히 큰돈이었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 거기에다가 교회당을 짓고 그것을 다 교인들에게 콘도처럼 분양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러 가지 효과가 있는데 교인들의 이탈을 막을 수 있고 그 다음에 다음세대에 여가를 즐기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그랬어요. 사실 그분이 연세가 많으셔서 내가 실망할까봐 말은 안했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목사님 코드를 잘못 읽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에 만족을 안 해요. 지금 양극화현상이 일어나잖아요. 지금 우리가 지난번에 갔던 솔비치 같은 곳에 가면 (교역자들은 간적이 없지만…….) 거기에 있는 펠라지움 한 동에 한 10억 정도 되거든요. 10년 동안에 10억이에요. 10년에 10억이면 정확하게 5억이에요. 5억을 그냥 주는 것이에요. 10억을 맡겨놓는다는 것은 최소한 5억 내지 6억을 그냥 주는 것이에요. 이자를 계산하면 그렇게 되요. 그런데 나중에 10억이 가치가 떨어지는 것까지 계산하면 사실 10억을 맡기면 6억 이상을 그냥 주는 거예요. 그러면 10년 동안 그 사용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6억을 쓰면 일 년에 6천만 원이 나가는 것이에요. 월세 500백만 원짜리를 보증금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관리비를 130만원인가 받잖아요. 그런데 짓자마자 바로 동이 난 것이에요. 프리미엄리조트의 시장은 그래요.
그런데 저 밑에 있는 콘도들은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나오잖아요. 600, 900 막 떨이로 팔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안 옵니다. 그러니까 집의 환경이 이번에 우리가 직원수련회 갔다 온 금호리조트보다 훨씬 환경이 좋은 것이에요. 사실은 환경이 집에 있는 환경보다 좋아야지 진정한 의미의 휴식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수리할 능력도 없어서 계속 쇠락해지는 것이에요. 수리는 절대 안합니다. 걷어서 수리비도 안 나오니까……. 양극화가 확 되는 것이에요. 그러다가 세월이 더 흘러가면 개인이 그런 것들을 소장하고 갖고 싶어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레저와 쾌락 이것이 다음세대에는 레저와 쾌락이 예전에는 이단이 무서웠는데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 이단과 물질주의가 아니라 레저와 쾌락이 차세대에는 교회의 대적이 되는 것이죠. 그 다음에.
-교과 읽음(23p~24p)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2.한국교회의 성장과 미래의 역할 2
녹취자: 김경애
D. 한국교회 성장에 대한 평가
Ⅲ. 21세기 한국교회의 역할
A. 개혁주의 신학과 청교도 전통의 부흥
B. 중생과 회심을 통한 참된 성화의 추구
존 파이퍼 목사님의 교회에서도 회심의 문제, 특히 Baptist들은 철저한 전통이 있거든요. 그런데 굉장히 강조한다고 그래요. 사실은 이것이 강조되지 않으면 사실 목회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에요. 그래서 이 문제가 순수하게 강조의 문제만이 아니라 철저하게 강조만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인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설교와 모든 사역 속에서 이것들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설교말씀을 전하는 자기 자신의 인격을 통해서 중생하고 회심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보여줄 수 있어야 되는 것이에요.
(교과 읽음)
결국 이 중생과 회심이 없으면 목회 자체가 불가능해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개혁주의적인 목회가 잘 안 되는 그것이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개혁주의 목회가 안 되는 그런 측면도 있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사실 개혁주의 목회를 모르기 때문에 개혁주의가 안된다기보다는 개혁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자신 안에, 회중들안에 안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에요. 그 개혁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뭐냐 하면 가장 중요한 것이 중생과 회심이에요. 여러분! 우리들이 자기가 진정으로 회심을 경험해본 사람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도 자기의 회심이 자신의 의지 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아요. 그런데 항상 덧붙이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그렇게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먼저 내 마음을 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인간 스스로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이 회심이 한번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 회심을 통해서 그 회심의 본래의 위치로 돌아갈 수 있는 그 복음을 통한 회개의 영향력이 지속되어야지만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이에요.
(교과 읽음)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면 많은 회중들이 무기력을 느끼는 것이에요. 그러면 ‘건널목으로 건너라.’ 그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에요. ‘건널목으로 건너라.’ 그러고 ‘속이지 마라.’ 그것은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죠.
(교과 읽음)
그러니까 성화를 강조하고 성화를 강조한다는 것이 두 가지로 대변될 수 있겠는데 우선 첫째는 성화의 생활에 대한 교리들을 잘 가르쳐야 되겠지요? 오늘날 성화의 생활을 위해서 가르쳐져야할 교리는 범위가 어마어마하게 넓지 않겠어요? 모든 신자의 모든 삶을 포괄하는 것이니까 개인적인 경건생활부터 시작해서 교회와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가족이나 아니면 심지어 마음을 지키는 모든 것까지 전부 다 성화에 대한 강조겠지요.
(교과 읽음)
교리적인 지식들이 강화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이렇게 성도들이 교회에 왔을 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부러워해야할 덕 있는 생활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그래서 부자가 되고 아니면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그렇게 되는 것이 그것이 교회에 와서 높이 평가받고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처럼 그렇게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지 않겠어요? 그런 가치는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가치이고 그리고 교회에 와서는 오히려 그런 가치와는 다른 것들이 높이 여김을 받는다고 여겨질 때 실제 자신이 세상에 나가서 살 때 방향의 수정이 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세상에서 높이 여김을 받는 사람이 교회에서도 그 이유 때문에 똑같이 높임을 받고 부러움을 산다면 세상과 교회 사이의 균일화가 이루어질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지난번에 누구죠? 누가 조엘 오스틴을 누가 비평을 했는데 간증을 하면서 거기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자동차 딜러였는데 목사님께 기도를 받고 그리고 지침을 따라서 열심히 긍정적인 생활을 했더니 거기에서 뉴욕인가 워싱턴에서 자동차 세일즈맨을 했는데 평소보다 비교도 안 되게 엄청나게 많은 자동차를 팔았다는 것이죠. 그것을 논평한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게 그 사람에게는 간증이 될 수 있었겠지만 자동차를 없는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있는 사람이 사는 것이고 있는 사람은 각기 여태까지 자기가 거래하던 딜러들이 있었을 텐데 그러면 그것을 빼앗긴 사람은 생각해보지 않았느냐? 그러면 결국은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면 그렇게 빼앗긴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냐? 그러면 이 세상에서 일반은총 차원에서 수완이 좋고 기술이 좋아서 그렇게 딜러를 잘해서 그래서 자동차의 판매고를 많이 올리는 사람들은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과 관련해서 무엇이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그런 식으로 비평하는 것도 보았는데…….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좋은 것은 은혜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은 신앙에서 참 바른 태도잖아요? 물 한 모금을 먹더라도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너무 극단화하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항상 그 자체 안에는 모순적인 결과가 오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 다른 가치라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 인간이라는 것이 중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서 눈을 뜨게 되면 거기에서 자기의 정신과 영혼의 양식을 얻게 되는 것이에요. 그 아름다움에 아주 농축된 집적들이 성경이고 교리는 그 아름다운 집적들을 수놓은 것들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아니고는 이 개혁주의적인 교리를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쨌든 그런 참된 성화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된다는 것이죠.
C. 철저한 개혁주의 교리와 신학 교육
(교과 읽음)
복음주의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신복음주의가 등장하면서 복음주의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어요. 그래서 개혁주의라는 말 대신 복음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을 때 사실 개혁주의라는 말 자체도 사실은 그렇게 아주 좁은 의미가 아니었거든요. 넓은 의미에서는 사실 가톨릭이 아닌 것은 다 개혁주의라고 보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용어가 사라지면서 복음주의가 들어오게 될 때에 사실은 그것은 신복음주의가 일어나면서 널리 사용되게 되요. 그런데 그 말속에는 이미 아주 상당한 관용이 들어가 있는 것이죠.
여러분도 아마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들어보았을 것이에요. 우리가 너무 싸우지 말고 사도신경을 고백을 한다면 우리들이 서로를 받아들여주어야 된다는 소리를 들어보았지요? 사실은 사도신경을 부인했던 이단이 역사적으로 거의 없어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낳으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성령을 믿사오며…….’ 이렇게 나오잖아요. 이것은 유니테리언도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고백이고, 그 다음에 아폴리나리우스주의자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이고, 아리우스주의자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에요.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에요. 그 고백 자체가 너무 포괄적이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신조의 일치를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올바로 해석해주느냐 하는 것이 이제 수많은 사도신경 강론을 낳았던 배경이 되는 것이죠. 각자 동상이몽으로 해석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에게 나으시고’ 해도 그분이 하나님과 아주 유사하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사도신경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에요.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정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신 분이라고 설명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복음주의라는 말 자체로 이제 충분하지 않아요. 개혁주의라는 말도 사실은 충분하지 않아요.
(교과 읽음)
그러면 성경공부가 대두된 것이 제가 보기에는 1970년대 파라처치부터 시작되어서 80년대부터 교회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강해설교가 되는데 성경에 대한 관심을 많이 높였다는 점에서 칭찬할만한 일이죠. 그런데 사실 이런 것들이 성경공부라는 그 자체가 정말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그리고 교리를 학습하고 하는 그런 전통적인 개혁주의의 그런 성경학습방법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었느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공부를 교회마다 층차는 있지만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교회들에서 다분히 성경공부라는 그룹의 모임 그 자체를 교회의 그룹 활동을 위한 하나의 매개체 비슷하게 그렇게 사용하려고 했던 측면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을 탐구하고 그렇게 해서 자신을 학습하고 기독교 사상의 체계를 세우고 하는 그런 의미의 개혁주의적인 신학공부를 통한 신학사상의 이해하고는 거리가 멀어요.
요즘에 보니까 몇몇 교회에서는 아주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교회는 경건주의를 지양한다고 아주 명백하게 매뉴페테이션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사실은 역사를 알면 사실 그렇게 못하는 것이죠. 역사를 알면 그렇게 해서 경건주의 운동이 성경을 공부하는 그것은 좋았지만 교리를 버리고 그렇게 생생한 성경의 교훈을 붙잡겠다고 하는 그 결과 결국은 관용주의가 들어오게 되고 그래서 결국은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오게 되고 하는 그런 과정들을 다 겪게 되잖아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는 거울이 되는 것이죠.
(교과 읽음)
그러니까 이게 말이죠. 책임도 교회에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성경의 진리들이 아름다우면 그 진리들을 집적해놓은 교리는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성경이 말하자면 성경 자체가 체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체계가 있는데 그 성경의 아름다운 진리들을 구슬처럼 엮어서 교리를 만들 때 그것이 굉장히 아름답게 느껴지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방식으로 전달되어야지만 감동을 받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사라져버리고 이제 차가운 이론으로만 전달되어질 때 사람들은 성경공부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을 오히려 교리가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청교도들의 대부분의 책들은 전부 다 교리를 풀어서 설교한 내용들이었거든요. 그런 내용들의 설교였단 말이죠. 그런데 이게 실존주의적인 영향에 이르는데 그것은 성경을 잘 해석하기도 전에 적용을 이끌어내는데 성급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은 하나의 거의 수단이 되고 그 다음에 그것과 맞닥트려서 자기가 깨달은바 적용한 것 그런 것들이 강조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사실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것 자체가 힘이 없는 것이에요. 진리 자체가 자기를 움직이는 힘이 없는 것이에요.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움직이고 변화시킨다는 그런 인식 자체가 현저하게 흐려지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교과 읽음)
그러니까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그 다음에 교리를 가르치는 것도 결국은 사상을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한다는 것이에요. 그 사상이 인본주의적인 사상이 아니라 성경적인 사상을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한다는 것이에요. 내가 방배동에서 목회할 때인데 어느 연세 드신 아저씨 한분이 와서 은혜를 받고 있었어요. 이분이 자기를 만나달라는 것이에요. 나중에 만나보니까 목사님이에요. 목사님이 목회를 하다가 목회가 안 되니까 우리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생활을 일 년 가까이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분이 점심을 사주면서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데 한 때 잘 나가던 언론사 간부였어요. 그러다가 퇴직을 하고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목회를 했는데 오늘날의 목회가 너무 세속적이니까 자기는 성경적인 목회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경100독하기’ 그런 운동 있잖아요? 성경을 그 나이에 100독을 했고 3000개의 성경구절을 암송했대요. 여러분 가운데 3000개의 성경을 암송하는 사람이 많겠지요? 아마 300개도 못할걸요. 그런데 결론은 뭐냐 하면 그 사람의 이야기가 ‘그런 운동이 별로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안 되더라는 것이에요. 그렇게 성경만을 가지고 하는 것이……. 그리고 자기가 무엇이 부족한지 모르겠다는 것이에요. 성경을 가지고 하는데 안 된다. 그리고 나중에 자기의 간증을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학이에요. 신학……. 신학이 필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성경을 잘 가르쳐도 그것을 사상으로 뼈대를 세우지 않는 것은 모래로 계속 쌓는 것과 똑같은 것이에요.
(교과 읽음)
똑같은 이야기를 조나단 에드워즈도 이야기를 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모든 삶을 지식의 기반 위에……. 모든 지식을 삶으로…….’ 그런 기치를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해요. ‘네가 왜 그렇게 살아야하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한다.’ 사상이에요. 사상……. ‘네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너의 그 사상이 어떻게 삶으로 나타날지 말할 수 있어야한다.’ 그래서 마스트리히트가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치면서 경건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위선이다.’ 그래서 제가 가만히 보면 많이 가르쳐보잖아요? 그런데 가장 훌륭한 신학적인 전수는 설교에요. 요즘에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평생에 일관된 태도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설교의 방식을 통해서만 기독교의 진리를 전달했어요. 그래서 TV에 나와서도 대담, 토론 이런 것은 거의 응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게 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분의 ‘목사와 설교’에서 그런 사상을 잘 피력했는데 뭐라고 그랬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말하자면 위엄에 굴복하는 정신 속에서 진리는 가장 잘 학습된다.’ 그러니까 이렇게 설교를 들으면서 예배 속에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서 깨달은 교리와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면서 평면적으로 펼쳐놓고 이렇게 공부하면서 배우는 교리 그것은 전혀 다른 지평으로 다가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런 공부의 한계가 그런 것이에요. 그래서 교리학습, 교리학습……. 그러는데 제일 좋은 것은 설교 속에서 교리를 끊임없이 가르쳐서 교리 앞에 그 사람을 굴복시키는 경건의 효과가 예배 속에서 나타날 때 그때 그 교리는 그의 삶과 마음속에 파고들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들입다 책을 놓고 공부하고 하는 그것으로써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에요.
(교과 읽음)
그래서 거기에 보면 나오잖아요? 각주 10번이에요. ‘doctrina est vivendi Deo per Christum’ 그랬잖아요. 내가 보태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in spirit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그것이에요. 그게 내가 보기에는 가장 잘된 신학의 본질 같아요. doctrina est vivendi Deo per Christum in spirit. 그래서 ‘성령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어요.
기뻐하십시오. 피터 팬 마스트리히트의 TPT가 3600P로 되어 있거든요. 번역을 하면 3600페이지 정도 되요. 그래서 번역자를 내가 만났어요. 타드 형제라고 내가 만났는데 1200페이지를 번역해서 출판사에 넘겼답니다. 지금 교열을 보고 있는데 내년 7월경이나 늦어도 12월 안에 1200페이지짜리 마스트리히트가 나옵니다. 물론 영어로 되었겠지요. 아마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이정도의 책을 쓸 사람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대가 됩니다. 굉장한 책입니다. 그 친구가 영어로 그것을 다 번역했는데 이번에 한국학생 하나가 그냥 라틴어에서 직접 한국어로 번역을 하겠다고 도전장을 냈어요. 그래서 어느 정도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타드 형제는 아예 고전학을 전공했어요. 그래서 그 친구가 이번에 번역한 것이 어디에 나오느냐하면 PRTS 쏠리데오 글로리아 인가? 비키 목사님이 하시는 출판사에서 ‘스케치 어쩌고저쩌고’ 하고 나오는데 윌리엄 에임스의 교리문답을 라틴어에서 번역했어요. 내가 선물로 하나를 받아왔는데 아주 고전어를 잘하고 멀로 교수님도 라틴어가 나오면 그 형제한테 confirm을 받을 정도로 그렇게 라틴어를 잘하는데 나하고 이야기가 잘되어서 마스트리히트 전체를 PDP파일로 CD6장에 얻어왔습니다. 지금 제본하고 있는데 기대가 되요. 마스트리히트만 있으면 다른 것은 거의 안 봐도 됩니다. 그것 하나만 평생 외우면서 목회를 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신학 책이에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보면서 아주 독창적이라고 느껴졌던 아주 많은 부분들이 마스트리히트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의 속죄’ 그러면 속죄에 대해서 저 고대의 교부부터 시작해서 당대의 이단들까지 다 섭렵하는 것이에요. 어마어마하게 우리들이 찾기도 힘든 그런 방대한 자료들이 다 머릿속에 있었다고 그래요. 거의 성자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그래요. 이 사람에 대해서 거의 연구가 안 되어 있어요. 안드레아 네일러라는 사람이 예일대학에 있는 교수인데 Neeler 이에요. 그 사람이 마스트리히트라는 책을 작년 10월쯤에 냈어요. 브릴에서 냈는데 브릴출판사에서 냈는데 되게 비싸요. 책 한권에 180,000원이에요. 그 속에서 마스트리히트를 소개했어요. 그런데 다는 아니고 신론 부분을 가지고 신학의 방법론과 그 다음에 교의신학의 진술방식, 그래서 맨 처음에 주석 이그제티카, 도그메티가, 엘렘티카 프렉티카 이렇게 4개로 나눠지는데 그것들이 유래하게 된 것과 그것들의 구성에 대해서 썼는데 탁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스트리히트에 대해서 쓴 최근에 나온 가장 좋은 자료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교과 읽음)
그러니까 두 가지에요. 뭐냐 하면 첫째는 회심한 것이 분명한 것이어야 하고 두 번째는 회심한 것이 확실한데도 아는 내용이 없으면 세례를 주면 안 돼요. 아는 내용이 있어도 회심의 증거가 없으면 세례를 주면 안 돼요. 둘 다 있어야 됩니다. 회심의 확실한 증거와 그 다음에 기독교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 이 두 가지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과 읽음)
잘 들어봐요. 사실은 신학 전반에 대한 지식과 진술된 교리, 예를 들면 인생의 제일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제시되잖아요. 카테키스무스에서 제시되잖아요? 그 개별적인 교리에 대한 지식과 신학 전체를 아는 지식 사이에서 상관성에 대해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해볼 수 있는 사람 있어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이야기에요. 어떤 개별적인 낱개의 교리에 대한 이해의 폭은 그 교리를 일부분으로 하고 있는 전체의 교리 체계에 대한 지식에 영향을 받는 것이에요.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되시죠? 성경을 읽으면서도 발견하게 되잖아요. 성경을 읽을 때 신학교 가기 전에 읽을 때는 그런가보다 하고 읽는데 신학을 공부하고 나서 많은 지식들이 생겨나게 되면 그런 지식이 없었을 때는 이것을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고 성경 구절이 ‘이 구절은 이래서 중요하구나!’ ‘이 구절은 이래서 중요하구나!’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되잖아요? 그 다음에 또 체험적인 요소가 들어오게 되잖아요? ‘하나님이여 나의 마음이 녹나이다.’ 할 때 자기가 녹아보지 않았을 때는 아니 설탕도 아니고 뭐가 녹아? 그렇게 생각하지만 자기의 마음이 진짜 그렇게 녹아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시인이 이 고백을 할 때 절절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잖아요? 그러한 면에서 보면 개별적인 낱개의 교리에 대한 이해의 폭을 그것을 많이 가르친다고 하더라고 그것과 관련된 모든 교리 전체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을 때 그 하나하나의 교리에 대한 이해의 폭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란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요?
또 이런 것도 있지요. 어떤 교리들을 강조하거나 확장해서 해석할 때 그 교리를 계속 확장하면 다른 교리들이 어떻게 영향을 받을지를 아는 사람이 알면서 그것을 확장하는 것과 그것을 모르면서 확장하는 것 사이에는 굉장히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뭐냐 하면 낱개로 된 교리 교육은 굉장히 좋은 방법이지만 그러나 신학 전체를 가르치는 방법과 병행되어야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에요. 그래서 성경 자체를 가르치는 것, 낱개의 교리들을 가르치는 것, 그 다음에 신학 전체의 체계를 가르치는 것, 이 세 가지가 병행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교과 읽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단순한 반복을 하지 말고 두 번째 배울 때는 더 풍부하게 설명을 해주고 더 깊이 있게 설명을 해주어야 해요. 그래서 똑같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가지고도 공부하면서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 이렇게 강의할 수 있다는 것이죠.
(교과 읽음)
똑같아요. 설교를 전달하는 것이나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나 진리의 내용이 있고 그 다음에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선한 의지를 솟구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죠.
3.한국교회의 성장과 미래의 역할 3
녹취자: 김경애
2. 신학교육에 기여함
교과 읽음 (49p~50p)
지난번에도 미국에 갔을 때 교수들도 만나고 목회자들도 만나고 그랬는데 그러면서 개혁신학적인 목회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다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교수들이 그러면 당신네 교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으로 교육을 하느냐고 그래요. ‘그 이상을 해야지 그것만 하면 되겠느냐?’ 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리교육에 관한 것을 쭉 이야기 하니까 굉장히 놀래는 표정이에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나는 당신이 놀라는 것이 정말 놀랍다.’ 그러면서 우리가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친다고 할 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그거 하나를 가르치고 그거 하나에 집착한다고 되겠느냐고 그랬어요. 그것은 최소한일 따름이고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그렇게 신성시하고 엄청나게 생각하지 그것도 교회 역사 속에서 발전해온 신앙고백서중의 하나일 뿐이거든요. 그것보다 아름다운 신앙고백서들이 많이 있고 또 어떤 신앙고백이든지 그 시대와 강조점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최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요. 그런 점에서 어떤 고백은 교회론이 강하고 어떤 것은 구원론이 강한 그런 차이들이 다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많은 다양한 개혁주의 신앙고백 가운데 하나이지 그렇게 절대적으로 신성화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해야 되는 것이고요. 그래서 이제 그것보다 훨씬 더 폭넓게 우리들이 사역을 해야 된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내가 잊어버렸는데 크리스천 투데이에서 읽은 것인데 미국에 있는 교회인데 어느 교회인지 잊어버렸어요. 교회 역사에 있었던 신조를 중요한 신조들을 하나씩 하나씩 School 로 open을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신조를 할 때에 하이델베르크나 아니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웨스트민스터 대개 그 두 개에 고정되어 있잖아요? 도르트신조 같은 것만 해도 안하잖아요. 그런데 이 교회에서는 칼케톤신조부터 하더라고요. 칼케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이렇게 하면서 심지어는 디다케까지 갑니다. 교리의 영역을 저쪽의 보편교회까지 뻗어서 그것은 이제 조심스러운 해설이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더 심화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사에 관한 이런 학습이 교회에 있어서는 꼭 필요해요. 그러니까 장로교인 이면서도 자기가 왜 장로교인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것을 모르고 그냥 신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등등의 이유로 그렇게 해서 교회에 대한 공부나 이런 것들이 필요해요.
그래서 이것이 나의 어떤 정확한 판단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지난 시간부터 우리들이 공부해오면서 제일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교회가 잘 안되고 그러는 이유 중의 하나가 시대적 적실성을 잊어버리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이게 개혁주의라고 자기는 자기대로 간다고 그러고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그런 개혁주의를 하면 안 되지요. 마치 소대장이 ‘돌격!’ 그러면서 달려갔는데 가보니까 자기 혼자밖에 없었다면 그것은 자기가 아무리 전투나 이런 것들을 하는 데에 있어서 무슨 전의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죠. 그러면 무엇인가 좀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현재에 있는 것들을 끌어안고 고민을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현대인이 그렇게 사고방식이 되어있는데 어떻게 자기도 회심하기 전에는 그 현대인중의 한사람이었잖아요? 그런 것을 염두에 깔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에요. 지금 국민소득이 이만불이 좀 넘었는데 우리나라가 밖에 나가보면 나라 안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잘사는 나라입니다. 해외여행도 어마어마하게 많이들 하는데 한참 싱가포르에 많이 갈 때는 싱가포르에 갔다 쏟아 붓는 관광비용이 일 년에 일억$였다고 그래요. 그러니 뭐 다른 나라는 어땠겠어요. 그래서 이제 동남아관광은 거의 줄어든 것 아시죠? 소득수준에 따라서 일본사람들이 맨 처음에 동남아관광을 하다가 서유럽으로 갑니다. 이제 우리나라가 동남아관광에서 서유럽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고 중국 사람들이 이제 동남아관광을 하고 있지요. 그래서 경제발전을 계속 따라오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아마도 한 5년 정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해외 여행하는 이런 것들이 훨씬 일상화될 것이고 중고등학교 수학여행도 외국으로 많이 가잖아요? 이렇게 될 때에 소득수준이 높아지면 더 많은 외국의 문화나 문물을 배우고 싶어 해요.
교과 읽음 (50p)
그래서 이제 교리를 더 깊이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고요. 두 가지라고 보는데 교리를 더 깊이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물론 그 교리 속에는 아까 이야기했듯이 역사도 들어가지요. 미국의 어느 교회를 갔을 때 딱 들어갔더니 ‘나는 왜 장로교인가?’ 라는 책이 앞에 있더라고요. 오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주더라고요. 의식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제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그런 사고방식들이 사실은 탈 교리를 부추기기 때문에 사실은 탈 교단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그런 것이죠. 그래서 교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이런 말을 안 쓰잖아요. Community 그런 말을 많이 쓰잖아요.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런 것들이 현대인의 코드하고 잘 맞는 것이죠. 그래서 사실은 간판을 어떻게 거느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어떤 내용을 가르치느냐하는 것인데 그래서 교리를 잘 가르치고 역사적으로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다른 인접학문들 그래서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학문을 가르쳐야된다는 뜻이 아니라 인접학문에서 발견되는 모든 진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진리인지를 보여주는 것, 세계관이나 이런 것들과 관계 되겠지요? 그렇죠? 그런 교육도 교회 안에서 잘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점에 있어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정말 탁월했지요. 그래서 다양한 철학, 신학, 미학, 그 다음에 역사, 문학, 자연학, 자연과학 이런 것들을 전부 다 관심을 가지고 진술하면서도 중심에 개혁주의적인 신학을 잃지 않았던 이런 자세들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중요하지요. 그래서 미국에서도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도 비판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데 물론 그분의 신학 속에는 그런 가시들이 조금 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확실한 개혁주의적인 신학자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역사상 아마 밀려드는 그 시대의 조류를 끌어안고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싸웠던 사람은 어거스틴 이래 최대의 신학자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을 거의 전부를 읽은 입장에서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 사실은 그런 비판들이 마음에 호소되지 않는 부분들이 참 많아요. 그래서 항상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이 과연 에드워즈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늘 합니다. 굉장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이루어져서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교인들이 정확한 세계관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해요. 그런데 그 세계관이라는 것이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우리는 세계관에 대해서 교육을 시키면 될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세계관을 형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가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에요. 그것 없이는 세계관이 형성이 안 돼요.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그 다음에 성경, 교리, 그 다음에 사회와 학문 이 모든 것들을 볼 수 있는 안목들을 다 가지고 이렇게 해서 개혁주의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상당히 많은 양의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늘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도 늘 중심에서 이것이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성도들이 깊이 감동을 받고 변화를 받아야 되는 그 기본적인 것들을 약화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항상 그런 것들 둘 사이에 균형을 잘 잡아야 되요.
교과 읽음 (50p)
그러니까 교리교육을 강조한다고 그러면 머리만 키우는 것이 아니냐고 그러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항상 물어보는 것이 ‘당신이 어느 교회가 머리가 큰지 얘기해보라!’고 그래요. 있지도 않은 교회를 그렇게 염려해요. 있지도 않은 교회가 될까봐 염려를 하느냐 말이에요. 그것은 하나의 피상적인 것이고 그리고 오늘날은 거의 교회의 입장에서는 지성적인 것들을 포기했지요. 그래서 지난번에 미국에 갔을 때 먼로 교수님을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거기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보면 미국의 교회는 거의 Show라는 것이에요. 예배가 아니라 Show라고 그래요. 그런 현상이 세계적인 현상이에요. 전체적입니다. 영국도 마찬가지에요. 그런 속에서 여러분들이 제 얘기를 잘 들어야 되요. 여러분들이 교리 설교가 굉장히 중요해요. 그것 하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요. 그래서 교리 설교뿐만 아니라 교리 설교 이외에 다양한 형태의 설교들을 해낼 수 있도록 그렇게 자신의 능력을 쌓아 가야되는 것이죠. 그래서 Narrative 설교라든지 그렇게 우리로 말하자면 ‘게으름’이나 그런 류의 생활설교들도 개혁주의적인 신학에서 쭉 풀어낼 수 있어야 되요. 그게 사실 청교도들의 전통이에요. 그래서 청교도들은 너무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설교했지요. 예를 들자면 ‘마음의 평정에 대해서’ 쭉 시리즈로 설교했고요. ‘미움에 대해서’, ‘용서에 대해서’, 꼭 교리적이고 스콜라적인 그런 접근뿐 만이 아니라 그런 다양한류의 설교를 할 수 있어야 되요. 이것은 마치 크기가 다른 그물과 같아요. 예를 들자면 바닷가에 팔뚝만한 고기가 있으면 멸치 잡는 그물로 하면 안 되지요. 다 놓쳐요. 왜냐하면 그물이 느리잖아요. 큼직한 그물로 잡으면 아주 신속하게 잡을 수 있지요. 그런데 고기가 멸치밖에 없다면 그 그물만 가지고 하면 멸치가 잡히겠어요? 주먹 하나가 빠져나갈만한 그물인데 잡혀요? 그럴 때는 빨리 신속하게 작은 것으로 해야 되겠지요. 그리고 만약에 고기가 나타났는데 고래가 나타났다면 그 어떤 그물로도 안 되지요. 그것을 커다란 포경선을 몰고 가서 공격해야 되지 않겠어요? 그렇게 다양한 도구들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교과 읽음 (p50~51)
그런데 지금의 분위기는 그런 식이잖아요. 그러니까 뭔가 이렇게 진리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려고 하는 진지한 지성적인 노력이 성령의 역사를 방해한다고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런 것을 자꾸 포기하려고 그러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자꾸 옳지 않은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면서 큰 능력이 나타날 때 그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에요.
교과 읽음 (p51)
그러니까 이제 교회가 항상 사역을 할 때에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느냐 하면 세 가지의 지평인데 하나님이 한 교회를 주셔서 내가 여기서 이 교회를 위해서 목회를 한다는 것과 자신이 이……. 여기에 교회가 있잖아요? 특정한 시대에 있을 것이 아니에요. 여기에 ‘나’ 라는 사람이 목회자가 되어서 목회를 해요. 이것은 최소한 세 가지 지평을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첫째는 뭐냐 하면 이 개교회적인 것이죠. 개교회에 충실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다음에 목회를 할 때 밖에 나가서 무슨 활동을 한다고 그러면서 교회를 거의 내팽개치고 그렇게 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자기 교회에 충실해야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마치 이렇게 물건을 돌리는 것처럼 사람이 여기에 서서 줄을 잡고 돌리잖아요. 이게 자기 목회가 구심점이 되어야합니다. 목회 자체가 역량이 많이 생기면 좀 더 넓게 활동을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또 활동할 기회도 잘 안주어지지요. 그러니까 자기 목회를 하는 것이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요렇게 그 시대의 보편교회에 충실한 것이에요. 그래서 항상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느냐 하면 개교회주의적인 생각만 가지면 안 되고 ‘나’라는 사람이 나의 시대에 보편교회에 속한 그 많은 그리스도의 몸에 일부로서 우리 교회가 존재한다. 그렇게 해서 이 교회가 그 시대에 보편교회가 하나님 앞에 바르고 더 풍성하게 되는 일에 어떤 식으로든지 이바지 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세 번째 지평이 무엇이냐 하면 이게 시대에요. 과거로부터 들어오고 미래를 향해 가잖아요. 여기는 현재고……. 그러면 뭐냐 하면 사명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풍성하게 해석을 해서 그래서 이러한 유산을 남기는 것이에요. 유산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에요. 이게 사실은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다트 엘로 힘’이 되겠지요. 이런 유산들을 잘 남겨서……. 성경을 해석하는데 그 핵심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다. 그럼 이것은 단순히 성경을 해석한 수많은 자료들만 있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왜냐하면 학문적으로는 탁월한 성과를 가지고 있는 엄청난 업적도 학문적으로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 엄청난 업적도 사실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이 경건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은 휴지조각처럼 버려지는 예가 많이 있는 것이잖아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로 볼 때 그 모든 많은 성경을 해석해놓았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유산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도구이고 진짜 전수되어야 될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다. 그래서 성경의 참된 진리와 그 다음에 경건이 아우러져서 이것들이 이제 실제적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으로써 주어지는 것이거든요. 이렇게 놓고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런 해석이 아주 풍부하던 때도 있었고 그 다음에 신통치 않은 때도 있었고 다양하게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어느 시대건 하나님이 이 불을 끄지 않으셔요. 없는 시대는 항상 없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그 시대 사람들이 교회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풍성해지기도 하고 아주 이렇게 빈약해지기도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기에서 제일 먼저 알아야 될 것은 과거로부터 우리들이 물려받은 그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무엇이냐? 그리고 그것이 어떤 지식의 내용들 속에서 우리에게 전수되었는가 하는 유산들을 이해하고 이것을 여기에서 발전시켜서 여기에다가 물려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한국교회를 보면서도 아쉬운 부분들이 그것이잖아요. 사실 교회의 역사에서 꼭 우리만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사실 한국에서 초대교회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그렇게 헌신적인 삶을 살아왔잖아요? 그리고 신앙의 주장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뚜렷했잖아요. 그런데 뭐냐 하면 그렇게 살아왔던 것은 사실인데 우리에게 남겨진 신학적 유산이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래서 아주 놀랍게 사역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실은 그 시대에 같이 사역했던 사람들은 이해하지만 그것은 기록으로 남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 허공중에서 없어져가는 것이니까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이 남겠어요? 지금은 그래도 설교의 매체가 많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옛날에는 그런 것도 없던 시절에 설교를 하고 지나가면 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도 잊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마지막에 뭐가 남겠어요? 아무것도 안 남는 것이죠. 그러면 또 설교나 이런 것들의 매체가 남았다고 칩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잘 정리해서 남겨두겠지요. 내가 죽은 다음에 누가 그것을 천착을 하고 그것을 듣고 연구를 하고 그러겠어요? 또 몇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하겠어요? 그렇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결국은 무엇인가 신학적인 유산을 남겨놓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신학자들이 먼로교수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인용된 학자만 536명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각자 다 자기 나름대로 책을 쓰고 조직신학을 풀어내고 성경을 해석하고 했던 그것들이 이런 것들을 이해했기 때문에 하는 것들이었단 말이에요. 물론 이제 오늘날에 와서 모든 사람들이 이런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이런 신학적인 지식들이 정리되어서 마지막 때에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언젠가 실현될 가능성이야 적을지 모르지만 그런 얘기를 했어요. 존 오웬의 전집을 누가 전체를 번역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는데 사실 번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거의 없습니다. 많지 않아요. 그리고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야 있겠지만 그것을 정말 전체의 자료의 맥락에서 그것을 정확하게 용어를 설정하면서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언어로 풀어낸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교과 읽음 (p52 ~ 55)
이것도 그래요. 뭐냐 하면 이제 우리 교회가 지금 어쨌든 아이폰 상에서 설교를 들을 수 있게 했는데 지금도 계속해서 개발을 하고 있고 내가 이번에 지시한 것은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는 아이폰용 어플을 만들어서 어플을 치면 열린 교회가 소개되도록 그리고 홈피를 지금 현재는 핸드폰 상에서 볼 수 있는데 아이폰 상에서 볼 수 있는데 좀 그렇지요. 그래서 아이폰용 홈피를 따라 만드는 방향을 연구해보라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을 해서 그래서 어쨌든지 ‘내가 여기 있으니까 너희들은 와라.’ 그러지 말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쨌든 모바일 시대로 접어들어서 저는 이미 벌써 여러 해 전에 예상하고 있던 것인데 앞으로 컴퓨터는 거의 없어집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로 없어지느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지금 데스크톱은 거의 사라지고 노트북이 데스크톱 같은 용도로만 쓰이고요 나머지는 전부 다 핸드폰 상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봐요. 그래서 핸드폰의 크기는 조금 더 커질 것이고 내 생각에는 지금 아이폰 나온 것……. 요번에 나온 것 갤럭시가 아이폰보다 조금 크다고 그러지요? 그것보다도 앞으로는 조금 더 커지지 않겠는가 생각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통신용과 그 다음에 보는 것과 두 개가 분리되었다가 마이크처럼 끼면 배터리 빠지듯이 빠져서 그것으로는 통신정도를 하고……. 아마 전화번호도 찍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58-4463 하고 말하면 그냥 걸리도록 말이죠. 그리고 문자도 아마 굳이 찍지 않고 ‘나 잘 있어!’ 그렇게 말하면 여기서 찍혀서 ‘전송’ 하면 전송이 되게 그런 식으로 될 것이에요. 그렇게 하고 이제 이렇게 보이는 것들은 조금 더 커지려고 하는데 기술상으로는 이것 반만 하게도 핸드폰을 만들 수 있답니다. 그런데 실용성이 없어서 그러겠지요. 이렇게 해서 커질 것이다. 그래서 미래예측이라는 것이 부정확한 것이 핸드폰이 점점 작아질 것이라고 그랬는데 핸드폰이 한참 작아지는 시대가 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다시 커지잖아요. 훨씬 더 커질 것이라고 봐요. 커질 것이라고 보고 그것으로 거의 모든 업무들을 다 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서 교회 설교를 듣고 온다는 것은 전화기를 통해서 교회 설교를 듣고 온다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데스크톱에 앉아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 이렇게 하면 볼 수 있는 것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이제 그쪽을 연구를 더 많이 해서 거기에 맞는 무료 어플를 만들어서 무제한으로 사람들이 다운을 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고 홈피도 아이폰용 홈피를 따로 만들어서 그래서 핸드폰 상에서 교회에 대한 모든 정보들을 볼 수 있게끔 그렇게 해주고 다양한 방법으로 선교적인 전략을 짜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고민들을 계속해서 내용자체는 변하지 않더라도 형식 자체를 다변화해서 그래서 현대인들의 기호에 맞추어서 자기 자신을 제시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아이폰으로 들어가서 설교를 들어보았어요? 들어봤지요? 아주 잘나옵니다. 그것이 되는 교회가 거의 없고 사랑의 교회하고 우리교회가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앞으로 계속 개발하려고 사람들이 노력하겠지요? 그런 면에서 좀 더 앞서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D. 현대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해와 대처
1. 예견되는 21세기의 사회와 문화
교과 읽음 (p55~56)
예를 들자면 이 localization을 잘 못하고 Globalization만 믿었기 때문에 망한 대표적인 기업이 월마트에요.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쫄딱 망했잖아요. 어떻게 되느냐하면 월마트는 이것이거든요. 다량의 제품을 싸게 사들여서 가장 싼값에 보급한다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예를 들자면 편의점은 싸요? 비싸요? 비싸잖아요. 그런데 잘되잖아요. 그것은 기본적인 상식을 깨는 것이에요. 편의점에 가면 모든 물건이 어떤 것은 30%가량 비싸지만 사람들이 가요. 가는 이유는 뭐죠? 여러 가지 물건이 편의하게 소량으로 살 수 있도록 24시간 구비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비싼 줄 알면서도 가서 사는 것이죠. 그러니까 싼데 막 이만큼씩 파는 것이에요. 그런데 주부들은 조금씩 사고 싶은 것이에요. 그러니까 결국은 그런 민첩성에 반응을 못했기 때문에 월마트가 결국은 문을 닫은 것이에요. 그럼 이마트는 그런 점에서 그런 것을 참 잘하죠. 요즘 이마트에서 기획광고를 계속하고 있는 것 있잖아요? 전복을 싸게 판다고 그러고 미국산 소고기, 광어 그런 것을 한꺼번에 수천 톤씩 계약하고 들여와서 진짜로 조금 남기고 파는데 한국 주부들의 심성을 잘 알아서 localization 에 성공한 case가 이마트에요. 그런데 그것을 못했기 때문에 망한 곳이 월마트에요.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요. 참 재미있어요. 그렇죠?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은 세속적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어차피 현대인들이기 때문에 그 구도 속에서 사람들이 움직여요. 그래서 그것을 잘 파악해야 된다는 것이죠.
교과 읽음 (p56)
고도대중소비단계가 한 지금으로부터 따지면 30,000불정도로 보거든요. 30,000불 정도가 고도대중소비단계라고 보는데 이런 소비단계에 오게 되면 사회가 뭐라고 그럴까요? 물질적인 것들을 아주 풍부하게 소비하면서 정신적인 가치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사회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렇게 되면 이제 선교적으로는 훨씬 더 어려워진다고 보는 것이죠. 조금 더 읽어보겠습니다.
교과 읽음 (p56)
이러한 발전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는 사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이번에 미국 LA에 가서 집회를 하면서 어디를 가보시겠느냐고 그래서 나는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신문을 보다가 갑자기 가고 싶어졌어요. ‘여기 가고 싶다.’ 그래서 갔는데 거기가 뭐냐 하면 아이맥스 영화관이에요.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두 편의 영화를 감상했는데 여기 우리나라 63빌딩에 있는 것보다 좀 더 큰 것 같아요. 어마어마하더라고요. 그런데 하나는 바다 속의 세계를 한 것이고 또 하나는 무엇인지 잊어버렸다……. 두 가지였는데……. 애들이 마치 이스터휴가였어요. 아이들이 막 새카맣게 와서 앉았는데 아이들이 입체안경을 쓰고 바다 속에 물고기들이 돌아다니니까 전부다 손을 올려서 잡으려고 그랬어요. 물고기가 잡힐 것 같으니까 말이에요. 거기의 매력에 한번 빠지면 2D는 이제 못 봅니다. 여러분 color TV 나오고 나서 흑백TV 버린 것처럼 못 봅니다. 어휴 뭐 굉장해요. 아바타보다도 영상처리가 더 잘되었더라고요. 그런데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거기에서 발전을 해서 배가 확 지나가며 불보라가 치면 진짜 불이 쏟아지는 그런 것도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4D나 5D로 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지금 LG에서 개발하려고하는 TV가 냄새나는 TV랍니다. 다양한 향료를 넣어서 컴퓨터로 조절을 해서 꽃밭 사이를 걸어가는 장면이 나오면 꽃냄새가 확 나는 것이죠. 부엌의 장면이 나오면 부엌에서 요리하는 냄새가 나는 것이죠. 이런 식으로 하면 5D가 되겠죠. 여러분들이 죽기 전에는 볼 것이에요. 아마 영화관의 형태가 지금과는 상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제 지금은 3D잖아요. 3D는 시각이잖아요? 3D, 4D, 5D, 6D까지 올라가리라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예를 들자면 바람이 확 불면 진짜 바람이 저쪽에서 불고 그러죠. 폭우가 쏟아진다면 그것은 좀 곤란하겠지만 아무튼 굉장히 다른 형태가 될 것이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내 말이 맞는가. 틀리는가. 두고 보십시오. 극장의 화면이 일자로 한 면을 차지하게 되잖아요? 그런 식으로 안 되고 사면 전체가 그리고 영화관의 구조자체가 둥근형태가 되지 않을까 생각 되요. 둥근 형태로써 전체가 다 곡선형태의 화면이 되는 것이에요. 이해 안 돼요? 그런 식으로 될 것이에요. 그리고 아마 지금 이야기하는 이런 한쪽 면에 평면을 세우고 상영되던 이런 방식이 아니라 스크린 자체가 이렇게 둥그렇게 되어있는 상태에서 한꺼번에 화면이 전부 다 나와서 우리가 그 공간에 있는 것 같은 시각적인 효과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그런 효과를 나타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훨씬 더 그렇게 되고 그런 것을 예견한 영화가 있었는데 여러분 잊어버렸을지 모르겠는데 토털리콜이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거기에 보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서 선택을 하는 것이죠. ‘나는 왕이 한번 되보고 싶어.’ 그리고 누르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아니면 ‘마누라를 한 10명쯤 거느리고 싶어.’ 눌러보는 것이에요. 그리고 남편한테 실컷 두드려 맞은 여자는 ‘남편을 반 죽이는 여자가 되고 싶어.’ 누르면 그 안에서 현실에서……. 여기에서 쓴 얘기가 그 얘기거든요. 현실에서 충족하지 못한 욕망들을 거기에서 누리는 것이죠. 그래서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에 구분 점들이 자꾸 사라지는 것이에요. 매트릭스 같은 영화가 바로 그런 것이잖아요. 그런 현상들이 심각하게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fact를 중요시 여기지 않고 이번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여태까지 우리들이 물건을 만들 때 needs를 중요시 여겼어요. 기능적인 필요가 있는가? 그런데 지금은 그것보다는 wants가 중요하다는 것이에요. 감성적인 필요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needs는 기능적으로 내게 있어야 되는 것인데 이것은 옛날시대의 개념이고 지금은 wants 에요. 그래서 그것이 내게 꼭 필요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면 사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쪽이 훨씬 더 구매욕구가 훨씬 더 강한 것이에요. needs 보다는 wants 가 훨씬 더 강한 것이에요. 그것을 심어주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2.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처
교과 읽음 (p56~61)
그러니까 거기에 야합을 하고 그러면 안 되겠지요. 그런데 배우지도 않고 그냥 앙심만 품어요. 내가 만들어낸 표현이에요. 괜히 사실도 모르는 앙심을 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교회가 안 되고 목회가 안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교회를 목회하다가 교회에서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겠어요? 어렵고 힘든 일이 일어나는데 절대 하지 말아야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에 대해서 앙심을 품는 것이에요. 혹은 교인들에 대해서 앙심을 품는 것이에요. 그러면 안 돼요. 그러면 목회가 병들어요. 앙심을 품어놓고 이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다른 사람의 교회가 잘되는 것은 세속적으로 하기 때문이고 자기가 안 되는 것은 워낙 올바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또 다른 사람이 안 되는 것은 워낙 능력이 없기 때문이고 자신이 잘되는 것은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그렇게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에요. 그래서는 안 돼요. 괜히 근거도 없는 앙심을 품고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또 찰떡궁합으로 맞아떨어져서……. 그런 극단에 빠져서는 안 돼요. 냉정하게 해야 돼요. 사실 몇 년 전에 이것을 공부했어요. 여러분 버나드 램의 복음주의 신학의 흐름을 공부하면서 우리가 한번 깊이 은혜를 받았잖아요. 같은 맥락이에요. 그런데 개혁신학을 한다는 사람으로서 그것을 안 해요. 그리고 책도 안 읽고 고민도 안 하고 그래서 마치 그런 것을 모르는 것이 놀라운 경건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눈먼 경건이에요. 눈먼 경건이라고 거기에다가 써놔요. 현대문화에 대한 앙심, 눈먼 경건, 써놔요.
교과 읽음 (p61~62)
몰입은 안 돼요. 몰입되면 안 돼요. 지난번에 메르티드 클라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원뿔을 그리면서 설명해준 적이 있지요? 문화와 제의 관계 그 두 개를 잘 기억해야 되요. 그래서 그것들을 허물어뜨려버리거나 완전히 그냥 하나인 것처럼 해버리거나 아니면 아주 너무 극단적으로 나누거나 그러면 모두 다 나쁜 결과에 도달하게 되요. 그런데 오늘날은 사실은 이원주의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면서 그러면서 사실은 좁은 의미의 예배를 뭉개버리고 삶의 지체로 지평을 넓혀버리는 그런 면이 있거든요. 그래서 일원론을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일원론이든지 이원론이든지 결국은 표현은 어찌되었든지 간에 구조 자체가 그렇게 완전히 종교와 문화가 완전히 나눠지는 것도 잘못된 것이고 두 개가 툭 터져서 하나인 것처럼 이해하는 일원론은 잘못된 일원론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원뿔형의 구조를 가진 일원론이 되어야한다고 지난시간에 이야기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했지요? 그런 관점을 유지해야 해요. 그래서 좁은 의미의 예배는 좁은 의미의 예배대로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에요.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에요. 그 다음에 문화에 몰입해버리는 것은 둘 사이의 간격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로 만들어버리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죠. 원뿔형의 구조를 가지고 그래서 막힌 담이 없이 하나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제의의 우위성을 종교의 우위성을 항상 생각해야 된다고요.
교과 읽음 (p62)
그래서 여러분들이 대중문화들을 절대로 탐닉하고 그것을 맛있어 하면 안 되고 길들여지면 안 되지만 드라마도 가끔씩 봐야 되요. 몰입해서 보아서는 안 되고 ‘아이고 너무 재미있다.’ 그러면서 TV가 끝날 때 입맛을 다실 정도가 되면 안 되고 사역을 하다가 TV앞에 달려갈 정도가 되면 안 되겠지만 코드를 읽어내고 그 다음에 대중문화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는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한 시대에는 고위문화와 하위문화가 있거든요. 고위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요. 그리고 대부분이 하위문화 속에서 살아가는데 그 사람들이 거기서 먹고 마시는 문화에요. 그 속에서 사람들을 건져내야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속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이나 구조 이런 것들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에요.
교과 읽음 (p62)
그럼 그렇게 앙심을 품고 반감을 갖게 되면 그럼 그 교회가 거의 수도원적인 교회가 될 수 있느냐하면 절대 그렇게 안 돼요. 목회자 한 사람은 그렇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막판에 어떻게 되느냐하면 에스라의 상황처럼 되기 쉬운 것이죠. 에스라가 ‘백성들이 이러저러한 죄에 빠졌습니다.’ 그럴 때 충격을 받잖아요. 그게 충격이라는 것이죠. 지도자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에요. 그것을 보고를 받고서야 겨우 알 정도가 되면 안 되죠. 그 당시에 이미 이방혼인이 일반화되어 있었는데 그 보고를 듣고 나서야 겨우 충격을 받을 정도가 되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식의 상황이 되면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렇게 하면 수도원적인 교회가 되느냐하면 그런 게 아니고 겉모습만 그런 것을 주창하고 속은 전부 다 물밑으로 세상과 통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수도원 주위도 보면 요번에도 우리가 가서 보았지만 캐더린 수도원 같은 경우를 비롯해서 사막에 있던 많은 수도원들이 문이 없어요. 문이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하면 문이 있을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오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말이에요. 그러니까 도르래처럼 판때기에다가 사람을 올려놓고 성안에서 잡아당기면 저 안에서 개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에요. 거기서 살다가 거기서 수도하다가 거기서 그냥 죽는 것이죠. 꼭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 밧줄을 타고 내려와서 갖고 가고 수도원 안에서 농사도 짓고 하니까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결국은 뭐냐 하면 이 세속이라는 것은 세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 있는 것이에요. 그게 세속이에요. 그러니까 세속주의의 본산은 세상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에요. 마음 안에서 세속주의가 나오는 것이에요. 수도원에서 아무리 높은 담을 쌓아도 인간의 마음에 담을 쌓을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 안에서 똑같이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죠.
교과 읽음 (p63)
Ⅳ. 결론
교과 읽음 (p67~68)
이런 탈신학적인 목회방법이 현실적응에 치우친 목회의 방법들이 실제로 성도들을 행복하게 해주느냐하면 그렇지 않거든요. 그래서 보면 인간이 워낙 절망의 벼랑 끝에 서게 되면 사실은 하나님과 참된 신앙과 복음 이외에는 그들을 건져줄 것이 없는 것이에요.
교과 읽음 (p68~69)
몰지각이 아니라 몰지혜지요. 자, 그 다음은…….
한국교회의 성장과 미래의 역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