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적 구조를 회복하는 교회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찐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의 무리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그러므로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의 무리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음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의 무리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찌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찌라 내가 그것들을 만민 중에서 끌어내며 열방 중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좋은 꼴로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 위에 두리니 그것들이 거기서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 위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로 누워 있게 할찌라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긴 자를 내가 돌아 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어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찐 자와 강한 자는 내가 멸하고 공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양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의 사이와 수양과 수염소의 사이에 심판하노라 너희가 좋은 꼴 먹은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 마신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살찐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로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내 양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거리가 되지 않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찌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찌라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찌라 내가 그들의 멍엣목을 꺾고 그들로 종을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겠고 그들이 다시는 이방의 노략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땅의 짐승의 삼킨바 되지 아니하고 평안히 거하리니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그들을 위하여 유명한 종식할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찌며 다시는 열국의 수치를 받지 니할찌라 그들이 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며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라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34)
오늘 여러분들에게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하는대 까지 전하는 이것은 오늘 읽은 에스겔서 34장을 전체적으로 해설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허락이 안될것이고 34장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교회의 목양적 구조의 회복이라는 문제를 거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저의 강연을 통해 듣게되는 내용들은 아마 열린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다만 이제까지 쪼가리 쪼가리 들었던 이야기들을 하나로 결집해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게 되면 교회가 어떤식으로 운영되고, 앞으로 교회가 어떤 구조를 가지고 나아가게 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가늠을 하실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우선 우리들이 이 커다란 주제를 다루기전에 왜 이런 주제를 다루어야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필요성부터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오늘날 적어도 조국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혼돈적인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교회의 운영방식을 가지고는 이상하게 선교적인 성과들이 매우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론내리기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랬다고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가 다변화시대에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선교적인 성과가 미미한 것이라고 가볍게 판단을 합니다. 그러면 백번 양보해서 그런 판단이 근거가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러면 그 대응은 뭔가 갈길을 찿았느냐 하면 사실 그것은 아닙니다. 모두들 다가오는 밀레니엄을 준비해야한다, 오늘날은 새로운 시대다, 디지털의 시대다, 또 오늘날에는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 패러다임을 바꿔야한다 라는 이야기들이 무성하지만 그러나 그 이야기들중의 대부분은 다 세상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워들은 것에 불과하고 무엇인가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그리고 실천신학적으로 교회와 오늘날의 상황을 진단하면서 제대로 길을 찿았느냐 하면 사실은 저의 신학적인 판단으로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결국 이런 기존의 교회를 지탱해오던 기존의 운영방식에 대한 급작스러운 회의 그리고 기존의 교회를 이루어왔던 질서들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 내지 부정은 결국에는 해체만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 무엇인가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무엇인가 교회의 제도를 바꿔 나간다기 보다는 각자 자기 소견이 옳은대로, 자기가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대로, 자기가 선교에 도움이 될수 있다고 생각하는대로, 마음대로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마음대로 끌고 가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들여와서 실험하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90년대는 실험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각양 여러가지 방식들이 실험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것들을 보면서 저는 순수하게 생각하지 않는 중요한 이유중에 하나는 한시대에 교회가 이세상에 할수 있는 최대의 봉사는 교회가 참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참다운 모습을 가지고 진실한 신자를 만들어서 이세상에 내보내는 그것이 교회가 이세상을 향한 선교적인 섬김을 다하는 최고의 중요한 섬김입니다. 그런데 이런것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 이 시대에 교회가 무력하고 힘이 없을까, 그리고 성경의 진리에 비춰볼때 오늘날 우리의 교회의 모습이 진정으로 교회가 되었다고 말할수 있는 이러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속에서 성경적인 답을 얻었다기 보다는 그런 교회의 교회되지 못함에 대한 깊은 아픔이나 이런것들에 대한 고민, 그리고 신학적으로 성경에 세우려 했던 교회의 모습과 오늘날에 많이 거쳐오면서 오늘날 타협된 교회의 모습과의 격차를 발견하고 어떻하면 그것을 제대로 회개시킬수 있겠는가 하는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통해서 그런것이 실현되었다기 보다는 성장에 대한 욕구로부터 이런 많은 방편들이 채택되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것 그 자체에는 사실 잘못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어떤것을 성장으로 보느냐에 따라서는 그 성장을 향한 욕구가 아주 불순할 수도 있고 아주 선할수도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적으로 볼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정한 성장이라고 하는것은 어떤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수가 많아지고 하는 그림들이 나옵니다. 허다한 무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님을 믿는 신앙을 고백하면서 점점 사람들이 많아져 가고 교회가 하나님의 사람들로 가득차면 이러한 성장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 어느곳에서도 교회가 그런것들을 추구하면서 나아가는 방향성을 정당하다고 입증해주는 성경구절을 찿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부터 시작해서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정직하게 보면 교회의 성장은 교회가 참된 내용을 갖춘 하나의 결과이지 성장을 추구하기 위해서 교회가 내용을 갖추는 그런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즉 허다한 무리들이 나와서 하나님의 교회에 숫자를 더하고 사람들이 많아지기 전에 반드시 어떤일이 있었는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굴복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노예에 굴복하는 일들이 있기전에 교회는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승복시킬수 있는 능력있는 복음의 진리의 도, 퀘리그마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가 정말 불타는 퀘리그마, 그시대에 이교도와 하나님을 믿지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기독교는 이것이다 라고 말하는 그런 퀘리그마를 가지고 있었을때 그것이 정말 그 속에 있는 사도들과 교인들이 교회가 성장하려면 이런 불타는 복음의 도를 가져야 된다 라고 하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께 구해서 불붙는 복음의 도를 가진것인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정직하게 사도들로부터 선포되는 복음의 도를 듣고 그 말씀에 의해서 영혼의 참된 변화가 일어나는 사람들이 그 참된 변화를 경험하면서 교회의 교회됨을 경험하고 그 교회된 교회속에서 참된 신자의 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 시대속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누려야할 내면적인 질(quality)들을 누리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그들에 의해서 전염되듯이 복음에 영향을 받으면서 그 사람들이 허다하게 많은 수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교회의 믿는 무리들의 숫자가 더해가는 모습을 볼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질적인 성장이냐 양적인 성장이냐 같은 이런 바보스런 논쟁을 해야할 이유가 사도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교회의 성장은 교회가 교회됨을 갈망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정상적인 성장의 경우에는 반드시 영혼의 변화가 동반되고 영혼의 변화가 없는 교회의 성장을 진정으로 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라기 보다는 교회가 올바른 방식으로 만약에 교회되기를 갈망하고 교회가 교회의 어떤 모습을 갖췄을때 교회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가지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참모습으로 돌아가려고 애를쓰고 그러한 본질적인것들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하나님앞에 매달리면서 본질적인 사역에 충실하면 양적으로 성장하겠지만 반드시 질적인 변화를 동반한 성장이 될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심하게 비약해서 말하자면 성도들이 참된 성도가 되어가는 진정한 질적인 변화가 없는 양적인 성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성장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으로 붐비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을 많이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의 일어남으로 인해 유대 종교계 당국자들의 염려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그때 가마리엘이라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대를 비롯해서 거명하면서 그런 사람들이 일어나서 많은 무리들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이 아니기 때문에 잠시후 모두 사라지고 평정이 되었다 이 도가 만약에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이면 사람이 막을수가 없고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세월이 흐르면 사라질 것이라는 그러한 대지로 인격적으로 그 문제를 말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서 볼수있는 바와같이 초대교회에서 강력한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돌아옴으로 이제 예루살렘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찬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하신 예루살렘 교회만 가득찼던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가 메시아다 라고 헛된 주장을 하면서 일으켰던 드다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뒤를 따른 무수한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임이 성령의 역사와는 상관이 없다라고 하는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성장하는 교회를 우리들이 비난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절대로 우리들이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교회의 성장에 대한 욕구가 새로운 방식을 창출하는 구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장에 무엇이 유익할 것인가 라고 생각하면서 무엇인가 성장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양적인 성장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장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일들을 만들어 가려고 하는 이런 방식들은 잘못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조국교회는 70년대부터 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80년대 90년대 이후로 현격하게 교회의 성장에 어려움이 왔습니다. 다시말하면 개척교회를 해도 사람이 모이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깃발만 꽂으면 사람들이 모이던 좋은 60, 70년대 시절은 다 지나가고 이제는 교회당을 모두 꾸며놓고 목이 터지게 부르짖어도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목회자의 자질도 문제가 되겠습니다만 확실히 사회적으로 볼때 사람들속에 종교적인 열망들이 현격하게 식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것들은 또한 60년대 70년대 일어났던 불건전한 부흥 운동들에 대한 신자들의 식상함도 많이 작용을 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교회가 자기의 성장을 위해 여러 가지 구도를 취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마치 공연장처럼 짖기도하고 아니면 파격적으로 교회당 자체의 강단을 모두 치워버리고 매일같이 모여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그런 라이브공연을 하면서 그것이 앞서가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목회관들이 흔들려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들이 정말 이렇게, 과연 그러면 결국은 교회의 성장만 하면 되는 것인가 그리고 오만가지 방법을 가지고 성장이라고 하는 성과를 거두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그 방법대로 교회를 밀고 나가는 것이 결국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문제는 우리들이 정직하게 검토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방법을 체택하고 신학적으로 잘못된 결론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 가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구한다 할것 같으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시면 주실수록 교회는 점점 일그러진 모습을 향해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점에서 볼때 우리들이 이시점에서 한번 이러한 수많은 실험적인 논의들, 이런것들을 가지고 들어오고 있는 오늘날의 실용주의화 되어가는 교회의 목회방식들 그리고 그 방식에 의해서 조석변이로 휘둘리며 뒤바뀌고 있는 교회의 구조에 대한 영향들 우리들이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우리들이 이런 시대에서 정말 하나님 앞에 교회를 바르게 세워야 하는데 어떤 구조로 교회를 세워서 결국은 운영해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원래의 목적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냐 라고하는 것을 시대의 영향, 시대의 사조 그리고 성공을 향한 우리들의 욕망 이런것들로 애워 쌓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면서 진짜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실체를 한번 우리들이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문을 열면서 두 번째로 우리들이 생각해 보고자 하는것은 정말 주님이 이세상에서 계실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기초로 볼때 우리가 교회가 주님이 이세상에 오신 목적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리고 그것을 교회와 관련할 때에 우리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는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10장은 에스겔 34장과 짝을 이루는 목자의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34장에 예언된 목자 다윗의 성취로서 예수님이 나타나시고 나타나신 그 예수님이 스스로 목양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신 것은 당신이 이세상에 오신것은 두가지 목적을 위해서 였는데 하나는 생명을 얻게하고 또하나는 더 풍성히 얻게하기 위해서 이세상에 오셨다고 말하셨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생명은 즉각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고 풍성한 삶이라고 하는것은 영적성장을 통해서 그리스도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런 영광스러운 성도의 삶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전도를 통해서 즉각적으로 구원을 얻는것을 가르키고 두 번째 풍성한 삶은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지속적으로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가면서 얻게되는 성도의 기업에 풍성함을 누리면서 사는 생명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과의 놀라운 친교의 축복이 있고 거기서 자신의 존재와 삶이 그리스도 예수와 점점 닮아가는 성화의 진전도 있습니다.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들이 자신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되는 인정의 축복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들을 풍성한 삶이라고 하는말에 담은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생명을 얻게하고 풍성한 삶을 얻게하기 위해서 너희에게 왔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장면에서도 우리들이 알수있는 사실은 생명이 다른것이고 풍성한 삶이 다른것인 것처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시말하면 구원에 있어서 성화의 문제를 선택처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즉각적인 구원은 점진적인 성화에 의해서 진실성이 입증된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즉각적인 구원의 진실성의 여부는 점진적인 성화의 진실성의 여부에 의해서 입증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자신이 구원 받았다고 아무리 확신하더라도 진지하고 성실한 성화의 노력이 없다면 그의 즉각적인 구원의 가능성은 의심되어도 좋다 라고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가지는 항상 따로 가는것이 아니라 같이 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느곳에서도 짐승처럼 살다 죽는 사람들에 즉각적인 구원의 가치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습니다. 풍성한 삶이 또한 생명도 없이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이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세상이 점점 더 전 삶의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에 부합하는 세상으로 신자들에 의해 변혁되어 가는것은 바로 신자들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진실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는 투쟁하는 노력에 의해서 세워져가는 새로운 문화이며 새로운 사회의 질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앞에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 되었다 할 것 같으면 그는 결코 불의를 강요하고 악하게 살아가도록 자신에게 억압하는 그 구조에 순종하면서 살아 갈 수 없습니다. 두가지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그 구조를 타파하든지 아니면 그 구조를 무력화시키는 삶을 살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 해 드리자면 용기를 내어서 지신에게 불의를 강요하는 그 세력과 더불어 싸우면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든지 아니면 형식은 남아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 자신이 온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루어서 형식은 존재하지만 형식이 존재하지 않는것 같은 그런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화) 요즘에 새벽시간에 저희들이 골롬세서를 보고 있지만 골롬세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노예제도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상전들에게도 노예에게 주인에게 잘하고 순종하도록 말하고 상전들에게도 노예에게 잘 해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아직은 노예제도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그것을 타파할 입장은 안 되었지만 그러나 사도는 복음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면서 사실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신자가 된 사랑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요 형제된 사람들에게서는 그 살인적인 노예의 제도가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없는 것과 마찬가지 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노예의 주인을 변화시켜서 자기의 노예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존귀한 형제로 받아 들이게 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 앞의 고귀한 지체로 받아들이게 하고 예전에 가졌던 자기의 소유라고 하는 생각을 타파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노예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서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고 자신의 한낮 한사람의 소유물이며 그 사람 마음대로 처분될 수 있는 그런 재산과 같은것이라는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사상을 떨쳐버리고 인간의 자존심을 자존감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존감을 회복하게 되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진정한 윤리가 이 노예제도가 있지만 자기가 주인과 더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지만 그는 자기를 형제처럼 대한다고 할지라고 자기는 그 상전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동기에서 주께하듯 섬겨야하는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에는 주인에게 받은 상과 상을 위해서 그리고 주인에게 받을지도 모르는 어떤 징벌과 체벌을 두려워해서 주인을 섬겼지만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 노예로 부름을 받은 자신이 그 시대속에서 주님을 진정으로 만났고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인도 비록 자기의 노예이지만 그 주인을 자기의 형제처럼 사랑하고 주께하듯이 자신의 일들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라고 하는 그런 윤리를 사도로부터 배웠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는 노예제도는 존재하지만 사실상 노예제도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화) 제가 신학교 다닐때 제가 모시고 있었던 선생님이 있었는데 1930년대 유학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1930년대 유학을 간다고 하는것은 사실 하늘이 낸 사람들인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집이 굉장히 부자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토지개혁을 하고 개화되면서 벌써 이미 토지개혁이라고 하는것이 소작인에게 가지고 있던것을 소작인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땅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개혁이 있기전에 벌써 그 목사님은 아버지로부터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받아서 자기 머슴들을 다 해방시켜주고 소작인들에게 자기가 농사짓는 땅을 떼어서 문서 다 넘겨줘서 너희들이 여기서 부쳐먹고 살아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농지개혁이 6.25 전쟁이 나기 육개월전에 토지개혁이 완수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공산화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런일들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 레위기 25장 같은데 비춰보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셨습니다.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계급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한 사람을 감화시키니까 없는것과 같이 되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렇게 사회 구조에 대해서 무언가 항거하고 거슬르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음이 들어가고 정말 변화가 주어지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세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수건에 띠를 두르고 세상에 나아가서 데모를 해서 세상을 바꿀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세상을 바꿔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세상을 위해 할수있는 최고의 봉사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속에서 참된 신자들을 만들어 내는것이 세상을 위해서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봉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우리들이 여기서 크게 세 번째로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라고 하는것이 진정으로 회복되어야 될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자로서 이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시는 목숨을 버리신 고난을 통해서 목양의 길들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이세상에 계실때에는 갈릴리에 계실때는 예루살렘에 안 계셨습니다. 육신을 입고 이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다시말해서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를 사셨지만 당신이 직접 목양하고 돌본 사람들의 숫자는 지극히 제한적 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준비에 지나지 않았고 당신이 이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목박혀 죽으시는 사건을 통해서 수많은 영혼들을 목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제 이세상을 떠나셨는데 어떻게 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이 목양을 하실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 됩니다. 논리는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완성 됩니다. 그리고 이제 누구든지 에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그속에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십니다. 성령이 그 안에 오시고 그안에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세우셔서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실 때 한사람 한사람의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 소위 이야기하는 보이지 않는 교회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물론 보이는 교회속으로도 들어옵니다. 교회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 가운데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를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께 부름을 받아서 영혼을 돌보고 영혼을 위해서 희생하면서 사는것 이외에는 이세상에서 사는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없다라고 하는 그리스도에게 메인 처절한 목양의 부르심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만들어 냅니다. 한사람이 어떻게 목회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사람이 목회자가 되는것은 단지 목회자가 되면 미래에 누릴수 있는 영화나 미래에 목회자가 됨을 통해 얻을수 있는 여러 가지 기회들에 대한 욕심과 기대들을 통해서 목회자로 부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사람은 자기가 먼저 목사가 되기위해서 고민한 사람이 아니라 먼저 한사람의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죽고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안의 구원과 가치를 아주 깊이 인식하고 그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감화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 감화가 너무나 크고 놀라운 나머지 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을 교감하고 이 십자가의 사랑을 인격적으로 체험한 나머지 이제 이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수 많은 사람들을 향한 견딜수 없는 연민의 정을 느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아직까지도 그리스도를 모르고 살아가는 무지한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가슴아픈 마음을 갖도록 만들었고 그영혼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상태를 그대로 방치한채 자기가 무엇인가 인간적인 직업에 종사하면서 살아가는것은 저주를 받을만한 일이라고 생각한 사람들, 그런사람들이 바로 목회자들인 것입니다. 목양이 목회의 소명인 것입니다. 그렇게 한사람 그리스도에게 숙명적으로 메어서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의미를 깨닫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모든 인간의 불의한 삶에 대한 유일한 치료자가 되시고 영원한 행복의 유일한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전제적으로 깊이 체험하고 자신의 모든 인생의 의미는 그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이 복음을 안 사람들에게 참된 신자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그 목적을 이룰수 있다면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도 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목회의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게해서 그리스도 예수께 강하게 사로잡힌 사람들, 그들은 양떼를 돌보고 양떼를 사랑하지만 앙떼들 때문에 목양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보고 그들이 불쌍해서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람때문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목양의 길에 들어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목자되신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양떼들 때문이 아니라 자기를 부르신 그리스도 예수에게 숙명적인 메임을 경험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나눠가지고 주님이 이세상에 계셨더라면 영혼들을 돌보셨을 그 일들을 계승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앙떼들은 어떠합니까? 실제로 한사람이 교회에 나왔다고해서 반드시 목양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그 목회자를 통해서 증거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진정한 영혼의 변화를 경험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앞에 무릎을 꿇는 인격적인 승복이 없이는 그는 결코 목양의 관계속으로 들어 올수가 없습니다. 다시말하면 비슷하게라도 목자가 만난 그 예수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두사람 사이에는 목양의 관계가 성립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켜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이렇게 돌맹이를 쌓아놓고 거기에서 목자가 잠을자고 거기서 쭈구리고 잠을 자고 밤에도 지킵니다. 갈때면 목자가 문을 열어주면 양이 들어가고... 누구든지 그 목자를 통해서 들어가고 양도 그 문을 통해서 들어가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체험이 두사람 사이에 일체감을 갖게하고 두사람 사이에 목양적인 관계가 형성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목양의 관계가 성립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목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이세상에 계셨더라면 양떼들에게 해 주실 그 일들을 계승해 나가고 그리고 양뗴들은 그리스도가 이세상에 계셨더라면 그리스도께 기대할 목양의 기대들을 목회자를 향해서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예수의 목양은 완전하고 그리스도 예수께 감화를 받고 소명을 받은 목회자의 목양은 불완전 합니다. 그러나 그 불완전한 것을 통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사람인 목자를 바라보는 대신에 원 목자이신 우리주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녀가 된 다음에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데 그가 즉각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거듭나기만 하면 저절로 내버려 두면 진실한 신자가 될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못박아서 주신 우리의 거듭남과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그 구원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역동성이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우리를 십자가의 은헤로 구원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은혜와 감격은 오늘 우리들이 진실로 변화된 삶을 살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무엇인가 우리의 삶을 신앙으로 말미암아 변혁시키고 고쳐 나갈수 있는 역동성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체험되고 입증될때에 비로서 우리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 구속의 사건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영적인 침체에 빠져 있을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에 대해서 거의 감격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프라이드 같은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있다고 말을해야 된다는 전제는 있지만 머릿속에 있는 것이지 기슴속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것은 이것입니다. 두가지 측면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절대적으로 목양이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두가지 측면에서 우선 첫째는 마숙하다라는 측면에서 필요합니다. 다시말하면 정상적으로 건강한 신자라 할지라도 일단 방금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거듭나고 나면 물론 그안에 성령이 오시고 성령이 그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그는 판단도 미숙하고 자기안에 새롭게 세워진 질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사는 삶의 적응성에 있어서 아직까지도 많이 배워야 합니다. 그런점에서 미숙하기 때문에 무엇인가 돌봄이 필요하다라고 하는것은 분명하고 또하나는 이제 그렇게해서 정상적으로 성장할 때에 지속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진실한 신자가 영원히 되어 가는 것입니다. 누가 나는 방금 진실한 신자가 되었고 더 이상 진실된 신자가 되는 노력은 나에게 있어 필요치 않을 정도로 나는 완벽한 신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성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때 성장해 나아갈 수록 그는 고도의 목양을 필요로 합니다.
(예화) 육아의 경험을 가지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이들을 낳아보면 낳아 논 것 때문에 그 아이가 저절로 잘 자랄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강아지나 돼지를 낳았을때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강아지나 돼지를 낳았을 경우에는 “이 집 돈 벌었네”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돼지 기르는집 가보니까 돼지 어렸을때 낳아가지고 감기 걸리면 사람들은 마루에 나가서 자고 안방에 이불 펴 놓고 돼지세끼를 오물오물 모아놓고 그렇게 간호를 하면서 돌봅니다. 실화입니다. 동물도 그런 돌봄이 필요한데 사람이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교회에서 저교회로 옮겨 다니는 그런 사람들로 채워지는 교회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몇몇이나 불신자가 그 교회에 들어와서 새롭게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하지 않고 그냥 이교회 저교회 떠돌아 다니는 교인들 수집을 해서 양적인 성장을 이루려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진 교회를 꺠우치는 말은 될수가 있겠지만 그것도 조금만 사려깊게 복음을 생각해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들은 이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니 다 아실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가 진정한 신자가 되지 않으면 그 신자는 불신자보다 더 불행합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냥 살아갑니다. 영적인 침체가 있습니까? 죄와의 분투하는 싸움이 있습니까? 양심의 가책이 있습니까? 그냥 짐슴처럼 늘 돼지처럼 먹고 개처럼 뛰어 놀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소처럼 일하고 말처럼 돌아 다니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되고나면 그 안에 이미 생명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어느정도 신앙의 성장을 경험한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성장하면서 누군가에 의해서 돌봐서 올바른 사람의 신앙으로 세워지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있습니다. 옛날처럼 말처럼 돌아다니고 개처럼 놀고 싶어도 가면 세상이 그 맛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세상하고는 다릅니다. 또다른 질서가 이 안에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다수가 그런 지옥과 같은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오셨다 할 것 같으면 야훼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아프리카 깜둥이나 아니면 인디안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시고 하필이면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고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나타나셨습니까? 다시 말하면 그들이 그렇게 믿고있는 그 신앙은 전혀 하나님께로 돌아온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따르며 생활하고 있는 그 사람들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목메인 음성으로 내 백성이 목자 잃은 양 같이 유리하며 고생한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구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화) 좀 비약인지 모르지만 자동차를 만들어 내는데 자동차가 다 망가진 자동차라해서 말하자면 브레이크를 밟으면 엑셀을 밟은 것처럼 차가 나가고 엑셀을 밟으면 브레이크를 밟은 것처럼 차가 서는 이상한 차가 되었다고 가정을 합시다. 그럴 경우 새로운 차들을 생산해 내는 것도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유익한 일이지만 이미 생산된 차를 빨리 고쳐서 굴러가게 만드는 것이 더 급선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입니다. 차를 만들어 내고 한참 팔아먹고 나서 뭔가 결함이 있다고 생각이 되고 그것이 결정적이라 생각하면 할 수 없이 자동차 만드는 회사가 무릎을 꿇고 리콜이라는 제도에 순응을 합니다. 리콜 걸리면 그 제품에 신뢰를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리콜 되었다라는 것은 뭐냐면 생산 될 때부터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타다가 문제가 된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결함이 있고 메카니즘에 문제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 할것 같으면 오늘날의 신자들 중에 굉장히 많은 숫자가 리콜 대상입니다. 다시 수리해야 합니다. 도대체 뭐냐 말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까?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삽니까? 뭔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봉사 하는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를 오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말하자면 아주 질이 나쁜 신자로 살아가면서, 그런사람들이 더더욱 교회의 실세로 등극을 해서 교회의 구조를 망가트리고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여기서 34장에서 하나님이 질타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때 그런 식으로 교회의 어떤 성장을 재는 그런 평가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나는 정말 이 이야기들은 오늘날 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진정한 가치는 선교에 있지만 그 선교는 선교된 사람들이 진정한 신자로 교회가 길러낼수 있다라는 전제하에서 선교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의미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또하나는 미숙의 관점에서 볼때 목양이 필요하고 또하나는 계속해서 신자들이 성장을 하는데 어렸을 때에는 젓만 주면 됩니다. 태어난지 한달 밖에 안된 아이가 젓병 물려주니 집어 치면서 “먹을것이 젓이 이것밖에 없어?” 이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맨날 젓이야! 엄마도 한번 먹어봐 지긋지긋하지 맨날 젓만 먹으래” 그렇지 않습니다. 우유타서 흔들어서 그냥 같다주면 그것만 먹으면 애들은 만사 OK입니다. 또 요새 우유는 그속에 모두 다 갈아 집어 넣었다고 합니다. 어차피 그렇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아이들이 무슨 방안의 색깔이 이모양이냐는둥, 우리집은 문화가 없다는둥, 아빠가 너무 가부장적이어서 집안 분위기가 삯았다는둥 그런 이야기 안합니다. 왜 우리집은 꽃도 한송이 안 사다 놓는걸 하는 불만 안합니다. 그러나 애들이 자라나면 국민학생만 되보면 그럼 이제 비교를 하면서 우리집에는 뭣도없고 뭐도 없고 하면서 애들이 좀 크고나면 아버지는 어떻고 어머니는 어떻고 다른애들은 어떻고 하면서, 이렇게 비교를 하면서 뒹그러지기 시작합니다. 그때 우유병들고 그애를 쫒아다녀 보십시오. 옛날에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냐고 가져다 줘 보십시오. 누굴 놀리나하고 차버릴 것입니다. “아빠나 먹어”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짜로 묻고 싶은것이 그것입니다. 간난아이들 나눠주고 애기엄마 자매들 살이 쭉쭉빠지고 너무 안 스럽습니다. 너무 불쌍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이 편한 것입니다. 지금은 아프지만 않고 젓만 잘 먹고 똥만 잘누면 만사 OK입니다. 잠만 잘자고... 뭐가 문제가 있습니까? 그냥 자랍니다. 하루에 20그람, 30그람씩 계속 살찌고 쭉쭉 자라고 그러면 됩니다. 그런데 이제 커보면 이제 왜 밤에 일어나서 젓병 타줄때가 그리워 질때가 옵니다. 이 아이가 아주 속을 썩이는데 고단위로 속을 썩이는 것입니다. 내가 이 아이의 프로그램을 못 쫒아 갑니다. 아이는 486이고 나는 286입니다. 아이가 자기의 마음을 설명해줘도 이해가 안갑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통제하고 다루겠는지 설명해 보십시오.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어렵겠는지... 그래서 결국은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어느시점에서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네 인생은 네인생 내인생은 내인생...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부모는 그럴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차라리 자식을 낳지 말았어야 합니다. 낳았으니까 그것을 계속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요즘 엄마들도 고달픕니다. TV에서 강좌 같은것이 나오면 많이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뭘 어떻게 배웁니까? 뭐도 배우고 뭐도 배우고 다 배워야 합니다. 교회 오니까 또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렇게해서 무슨 아이들을 신앙적으로 지도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배워야 합니다. 그러니 부모들도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습니까? 점점 수준이 높은 돌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어린사람이 기껏 고민하는 것은 성수주일의 문제, 십일조 문제, 다 뻔한 이야기입니다. 답이 다 뻔한 것으로 그런것은 교회 나오기 싫을때 어떻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식사기도 밥 먹은 다음에 기도하면 안되나? 그것은 답이 간단합니다. 그렇게해서 자기는 목양을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영적으로 점점 성장한 다음에, 집사된 다음에 영적침체와 고민이 오는 것입니다. 그때 뭘 좀 도와주고 싶어서, 간단하니까, 단추 하나만 누르면 답이 나오니까, 문제가 뭐야 하고 이야기 하는데 “목사님! 나는 왜 십자가의 감격이 없죠?” 이것은 한마디로 대답이 안되는 것입니다. “가져!” 그렇게 이야기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목사님 주님이 내안에 오셨는데, 내가 정말 주님 사랑하는데, 나는 왜 죄에 대해서 계속 실패하죠? 그리스도의 삶이란 이런 것입니까?”하고 물으면 어떤 경우엔 자기도 대답을 못하는 상황이 나올 수 있습니다. “아 그냥 내가 기도해 줄께요. 믿어요 덮어놓고 믿어야지 뭘 그렇게 따져?”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왜 이렇게 감격이 없을까요?” 그러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합니까? 한편의 논문을 써도 답이 안 나올 정도로 방대합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고도의 지식과 판단, 그리고 영적인 경험, 이런것들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성도들이 그러한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 교회가 변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맨날 목사 찿아와서 “목사님 저는 왜 죄에 대해서 매일 지죠?” “김 집사 너무 괴로워 하지 말고 하나님이 다 돌보시니까 기도해 내가 눌러주께” 이렇게 해서 한번은 갔는데 3일 있다 또 오면, 그 다음날 또 오고 또 오면 어떻게 된 것인가 연구하지 않을 수 없을것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서로 수준이 비슷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뭔가 선한 의문이 확 떠오르는 것 같아서 뭔가 저 질문을 물고 늘어지면 영혼의 변화가 일어 나겠구나 생각했는데 그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일 저녁에 회사 사람들 만나고 회식하고 개고기 먹고 그러면 다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싹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 또 자기가 죄에 대해서 실패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이 다시 생겨나게 될지 그것은 하나님만 아시는 것입니다. 언제다시 그런 고민이 생겨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답을 안해줘도 한참 있으면 저절로 답이 필요없이 다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되면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면은 왜그런지 모르지만 은혜를 받아서 열심히 방방 뛰는 때가 옵니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침체에 빠졌다가 은혜를 받고 소생하게 되었냐 하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의 고통스런 경험들이 지적으로 축척이 안되니까 그것들이 계속 반복이 되면서도 과거의 고통스런 경험이 미래를 위한 어떤 자료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훨씬 영적으로 뛰어나고 말씀을 아는 지식이나 이런 면에서 자기를 지도해 줄 수 있는 고도의 양질의 목양이 필요해 집니다.
내가 실제로 묻고 싶은것이 이것입니다. 일반적인 교회에서 한 20년이상 신앙생활하고 교회의 장로님이나 안수집사나 중직쯤 되었다, 그렇게 되어서 담임목사는 은퇴하고 젊은 사람중에서 이제 인사위원회에서 후임 목사를 선정해서 한사람이 왔다 했을때 그사람들이 정말 저 젊은 목사에게 무릎을 꿇고 저분을 영적인 스승으로 모시고 목양을 받겠다는 의지를 갖는다고 하는것은 아주 희귀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해야된다고 생각하는 일은 뭐냐면 경험이 없고 미숙한 목사가 삐뚜로 나가지 않도록 우리가 바로 잡아줘야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비행 청소년 선도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삶에 있어 목양이 필요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정말 정리된 신자이고 완성된 신자이다. 어림도 없습니다. 그런속에서 살아 갑니다. 이러한 상황이 오늘날의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관점에서 볼때 교회가 오늘날 가져야할 가장 회복하여야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가 하면 목양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가 세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집니다. 칼로 자르듯이 나누어 지는 것은 아니지만, 세가지가 겹치기도 하고 중복되기도 합니다. 어느것이 더 우월한 요소가 되느냐에 따라서 나누면 이렇게 세가지로 나눌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교회가 관리형의 구조를 갖는 교회입니다. 여기에서는 교회가 관리형, 교인들을 관리 한다고 합니다. 관리가 뭔지 나는 모르겠지만 교인들이 물건도 아니고 뭘 관리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관리를 해 나가는데 이런 관리형의 교회가 있고 또하나는 사역형의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역형의 교회가 있고 또하나는 목양형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하게 생각하는 변수가 세형태의 교회마다 다릅니다. 관리형의 교회에서는 통제가 제일 중요합니다. 관리 그 자체가 통제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사역형의 교회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효율입니다. 그리고 목양형에서 생각하는 가치는 영혼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그럼 보십시오. 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제가 알고있는 어느 형제가 지금은 담임목사가 됐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선생으로 있었을때 그 형제를 불러서 강의를 맡기려고 찿았습니다. 그런데 한 팔구천명 모이는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한 교구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교구가 얼마인가 했더니 천명쯤 된다고 합니다. 가정수로는 한 오백가정쯤 되고 사람수로는 천명쯤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명을 정말 당신이 돌볼수 있냐고 했더니 교구를 돌보도록 거기에 보냄을 받은 목사 자신이 하는 말이 불가능 하나는 것입니다. 그럼 당신이 하는게 무엇이냐 했더니 관리라고 합니다. 그건 무슨 뜻이냐 했더니 자기가 천명을 어떻게 돌보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하고 여자 전도사 둘인데 아프다는 사람 신방가고 죽은사람 장례지내 주는 것만으로도 일주일이 꽉찬다고 합니다. 그다음에 결혼식 있으면 주례 서 줘야지, 특별행사만을 챙겨도 일주일의 스케쥴이 꽉 찬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런식의 교회 구조를 가졌을때는 벌써 교회가 뭘 기대하고 있었는지를 알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당회가 뭘 기대했냐면 한사람의 목사에게 천명의 교인을 맡겨주면서 기대하는 것은 사람이 죽으면 가서 장례 지내주고 결혼한다하면 결혼식 가서 주례 서주고 병원에 입원했으면 가서 위문해주고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력이 남으면 주일날 교인이 안 나왔으면 왜 안나왔는지 찿아보거나 연락하고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저변에는 무슨 이야기가 있냐면 그런 교회의 당국의 입장에서는 이런 것입니다. 아니 당국이라는말 어법적으로 사용될수 있는 말입니다. 교회의 의사결정을 하는 중심부의 입장은 이런 것입니다. 교인이 주일날 교회에 잘 출석하면 돌볼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인이 나왔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나는 심지어 극단적인 생각으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전 교인이 매주일 빠지지 않고 전부 출석한다면 아마 그 목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하는것은 명백합니다. 사실 신자가 교회의 안녕을 고하고 세상으로 돌아 갔을때는 고민도 끝났을 때입니다. 맘먹고 고무신 거꾸로 신고 세상으로 돌아갔을때는 거의 신앙적인 고민이 끝났을 때입니다. 이제 내마음은 정했습니다. 뒤돌아 서지 않겠네... 그리고 세상을 향해 가버리는데 무슨 고민이 또 있겠습니까? 고민을 하는것은 교회에 나오면서 갈등을 느끼면서 괴로워하면서 신앙이냐 세상이냐 침체냐 회복이냐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괴로워하고 고민하는 동안에는 아직 교회에 나옵니다. 무슨 이야기이냐하면 이런식으로 교회의 구조를 짜는 것은 이미 목양을 포기한것이나 다름이 아닙니다. 또하나 이런 관리형의 교회에서는 교회가 관료화 되어 갑니다. 같은 경우인데 어느 전도사 한사람이 그 교회가 만명정도 모이는 교회인데 전도사로 들어갔는데 어떤 행사 하나를 하려는데 결재 서류에 도장이 16개가 찍히더랍니다. 그런데 한달에 이 16명의 도장을 받을수가 없어서 기안해서 8개쯤 도장 찍다가 중도에 날짜가 벌써 지나서 포기하는 사례도 나온다고 합니다. 이렇게하면 물론 경솔한 결정 때문에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도대체 이러한 관료화된 조직을 가지고 어떻게 변화된 선교환경에 대처해서 나갈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소위 행정학에서 이야기하는 레드테이프현상들이 교회안에 가득차게 됩니다. 그래서 절차 자체를 위한 절차를 밟으면서 교회는 거대한 통제정치의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의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에서 뭔가 하나님을 섬겨볼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거대한 교회의 관료주의화 되어가는 현상에 대해서 아주 염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좌절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관리형의 교회가 관료주의 체제를 면할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목회하는 어느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후임 목사로 가신 분인데 나는 이교회에 와서 공식적인 특별한 문서를 제외하고는 당회장이란 호칭을 써본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전화로 당회장님 계십니까 그러는데 당회도 없는데 당회장 해서 뭘 합니까? 그런데 재미있는것은 장로님들이 자기를 부를때 항상 목사님이라고 부르면 되는데, 목사도 많지도 않은데, 당회장님이라 말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그것이 뭔 뜻인지 몰랐는데 세월이 많이 흐르고 보니까 눈칫밥이 생기고 나니까 당회장님이라 불렀을 때는 자기를 높이는 말이 아니라 ‘아무개 목사 그대 뒤에 당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계속해서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구조 자체가 하나의 딱딱하고 거대한 관료주의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구조속에서 정말 생명력이 있는 교인들이 정말 신앙생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변화 되어가는 이런 아주 복잡한 교회적인 상황속에서 그런식의 행정절차를 가지고 우리들이 어떻게 해나갈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와 관려해서 우리 교인들끼리 모였으니 이야기 하는데 저희는 재직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무슨 교과서가 있는것도 아닌데 목회를 하면서 굉장히 여러번 견디기 힘들 정도의 영혼의 진통을 느끼면서 기도 많이 하면서 만든 제도입니다. 왜 그러냐면 제가 부교역자로 청년들을 사역할때도 그랬고 나중에 목회 할때도 그랬는데 세상에 행정을 완벽하게 해놓을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기가 전문가들이 모여서 위탁경영하는 것도 아니고 재직이라고 모인사람은 어떤 사람은 장사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회사다니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학교 선생인 사람도 있고 행정이나 이런 체제, 체계나 조직 이런것에 전문가가 아닙니다. 누가 한사람 전문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어떻게 다 맡기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 마다 다 의견이 있는데... 그러다 보니 무슨 문제가 나오냐 하면 교회에 와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고 그리고 조금씩 신앙이 눈을 뜨면서 걸음마를 하면서 자라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습니까? 그리고 옛날의 교회에서 집사가 되었다는데 이 교회가 무슨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 교회에서는 집사였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어림도 없다 ‘한 3,4년 더 묵어!’ 하면 누가 교회에 남겠습니까? 그러니까 특별한 하자가 없으면 교리문답 교육시키고 해서 집사 주지 않습니까? 주고나면 이제 재직회를 들어와야 합니다. 재직회에 들어와서 앉아 있으니까 설교 들을때는 기분이 좋았는데 회의 할때 앉아있으니 열받는 것입니다. 돌머리 같은 사람들이 각자 다 자기주장을 이야기하는데 자기도 참신한 아이디어가 있는데 자기도 이야기 하고 싶은데 새로온 사람이라고 아무도 받아주지를 않고 왕따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이씨”하고 뿌리치고 나갔을때 신앙도 뿌리친것입니다. 그게 무슨 낭비 입니까? 왔으면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듣고 은혜롭게 신앙생활 하면서 신앙이 잘 자라는것이 중요한것이지 회의에서 재직회 한번 잘했다고 교회가 개굴창에 갈 교회가 하늘로 올라가는 수가 있습니까? 재직회 한번 잘했다고 교회가 180도 선회를 합니까? 약간의 차이이고 방법론상의 문제이지... 그렇게해서 사람들을 여럿 잃어버렸습니다. 청년때도 그렇습니다. 청년때도 은혜 잘 받고 있다가 월례회 하는 날이면 다 뒤집어 지는 것입니다. “아! 나 이렇게 돌대가리에 수준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줄 알았으면 나는 교회 안왔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나서 세상의 회사에 다닐때 내가 얼마나 일을 잘했는데 하면서 열받아서 나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같이 교회 생활 오래 한 사람들은 그런 열 받은 일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원래 교회는 말도 안되는 일 가지고 허비하는 수가 있다. 그런데 아직 어린 신자들에게는 그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뒤집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하나는 도대체 재직은 몇백명이 되는데 참석은 항상 몇십명입니다. 어느교회는 재직은 1700명인데 150명이상 모여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재직이 1700명인데 150명이상 모여 본 적이 없으니 재직 전체의 십분의 일도 안되고 전체 교인에 비하면 오십분의 일도 안되는데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 한번 회의 하자고 하면 모이기도 힘든 사람들이 모여서 무슨 교회에서 하는일들을 결정을 합니까? 그러니까 빨리 가고 싶으니까 끝나기를 동의 합니다. 안건도 정리가 안됐는데 뭘 끝나기를 동의 합니까? 그렇게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시작해서 3년쯤 되었을때 이런 문제로 같이 고민하던 어떤 목사님께 약간의 힌트를 얻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깊이 정리하면서 그때 만든것이 운영재직회 였습니다. 운영재직회를 만들었는데 방식은 뭐냐면 그때는 안수집사도 없고 장로도 없고 하니까, 그때는 교단 가입도 안했으니까 교인들이 투표를 해서 당신들이 원하는 사람을 골라서 열명이고 몇 명을 세워서 그들에게 재직회의 권한을 위임하고 다른사람은 신앙생활에 전념하자 그리고 그 사람들을 신임하고 2년동안 하게 하고 2년후에는 재신임을 물어서 다른사람을 세우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하고 이렇게 하면서 효율화를 기하자, 당시 22명이 재직이 있었는데 한사람 한사람 의견을 물어서 20명이 동의를 했고 2명이 반대 했습니다. 표결로 하면 20대2인데 못나오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년을 유예 했습니다. 1년동안 기도하면서 연구하면서 교회를 살펴 보면서 내년에 거론하자 해서 그 다음해에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거기있는 재직들이 한사람도 반대하지 않고 모두 목사님 방식대로 하는것이 좋겠습니다 해서 생겨난 것이 운영재직회 였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한달에 한번이고 두달에 한번이고 운영재직회 모이라 하면 그 사람들은 책임이 있으니까 잘 모입니다. 지금도 특별한 일이 없는한 전원 모입니다. 전원 모여서 2시간이 걸리든 3시간이 걸리든 꼼꼼하게 교회 살림들을 집어 나가고 저녁을 먹어가면서까지 밤 늦게까지 토론하면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올바른 것을 다 가려서 동의하고 다음의 계획을 받아주고 이렇게 하면서 통제장치가 나가는 것입니다. 효율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행정이 교인들 모르게 해가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행정에 과다하게 힘을 소비하면서 교회의 일체감을 깨뜨리고 이런 일들을 점점 줄여나가는 체제를 해야지만 이런 관료형 교회가 가지고 있는 어려움을 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관리를 전혀 안하고 관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데 그것들이 최소화되고 마치 물맷돌을 들고 골리앗앞에 나섰던 다윗같이 간편한 차림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사역형의 교회입니다. 교회가 구조 자체가 사역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들어오기만 하면 일단 사역중심으로 사람들을 편성해서 선교하게하고 사회봉사하게하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쪽으로 그런것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짜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효율적으로 사역하는 것은 좋은데 사역을 하는것보다 더 급한것은 자기자신이 영적으로 공급을 받으면서 신자로서 성장하는 일들이 있으면서 유기적으로 사역을 함께 해 나가는 것이지 한번 믿고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발동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영적인 성장이 필요하고 자신은 이제 어느정도 완전한 위치에 갖쳐져 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목양이나 목자의 돌봄이 필요없고 이제는 자기가 완숙한 상태가 되어서 죽을때까지 쏟아 놓으면서 살아야만 된다라는 신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극단적인 사역에 치중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약점은 겉으로 볼때는 교회가 굉장히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 같은데 실제 신자 한사람 한사람을 두드리면서 그들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묻고 영혼의 상태를 헤아릴때는 어려운 점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다음이 우리들이 지향하는 바인데 목양형의 교회입니다. 이 문제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교회가 목양의 기능을 잘 수행해 가는것이 교회가 회복해야할 핵심적인 가치라 하는 것입니다. 성장이나 이런것들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을 보면 한결같이 이 교회가 가져야할 회복해야할 중요한 기능을 무엇으로 꼽고 있냐하면 교사내지는 유모로서의 기능입니다. 교사와 유모로서의 기능 즉 어머니로서의 기능을 교회가 회복할 때 비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는 신자들을 생산해 낼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 같은 경우도 기독교강요에서 본것은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을 교사라고 봤습니다. 잘 가르쳐서 사람들을 깨우치는것 그리고 그들을 잘 돌보는 일에 있어서 성도들의 모범이 되는것 이것이 말하자면 목회자로서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그래서 칼빈 자신이 그것을 실천을 했습니다. 제네바에서 목회하고 난 다음에는 걸출한 작품을 쓰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병자들을 신방하고 교인들을 가르치고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설교하고 하는 교인들의 실제적인 고통하는 삶을 돌보는 일에 많은 시간을 사용했기 때문에 실제적인 논문이나 저술 활동에 종사할 수 있는 시간이 급격하게 줄어든 원인이 그런 목회에 대한 이해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교회가 목양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회복해야 된다고 믿을때 그 기능을 잘 해나가기 위해서는 두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구조입니다. 구조속에 사람이 있는데 구조를 아무리 목양적인 구조를 만들어 준다 할지라도 그 구조속에 있는 사역자가 구조속에 있는 일꾼들이 진짜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목양에 대해 불붙는 가슴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롤 목양 할수 있는 지적인 영적인 경험적인 인격적인 성품적인 능력을 겸비하고 있지 못할 경우에는 구조를 그렇게 만들어 놔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진실하고 헌신적인 사역자들도 많지만 엉터리들도 많습니다. 그런 엉터리 같은 사람들한테 목양적 구조를 간다해서 차라리 오백명 천명 맡겼을때는 병자라도 신방하느라 바쁘게 돌아 다녔지만 한 오십명 맡겨 줘보면 돌볼것이 없습니다. 오십명이 다들 교회 잘 나오는데 말입니다. 자기가 보기에 그런 신자가 없습니다. 말 안해도 주일예배, 주일 저녁예배, 수요예배 다 잘 나오고 십일조 꼭꼭 내는데 그러면 베스트 크리스챤이지 뭘 더 돌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책이나 보고 노는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조만 가지고는 안되고 사람 자신이 그렇게 목양을 할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사람이 그렇게 목양을 할수있게 잘 준비 되었다 하더라도 구조 자체가 목양적인 구조를 안갖추면 사역은 빛을 보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진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그 영혼 한사람 한사람의 문제를 터치해주면서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울 영혼에 대한 사랑도 있고 열정도 있고 지적인 능력도 있고 신학적인 기초도 되어있고 목회적인 역량도 되어있고 모든면에서 준비되어 있다할지라도 그렇게해서 천명씩 맡겨서 월요일은 쉬고 화요일부터 시작해서 토요일까지 시간표를 짜고 돌아다녀도 병원과 병원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이상의 시간이 안난다 할것 같으면 그런 구조속에서는 자기의 목양적인 역량을 펼치기가 힘든 것입니다. 물론 성과를 거두겠지만 아주 미미 합니다. 그런점에서 볼때 목양적인 구조를 가지고 우리들이 지향을 해야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야지만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오늘날의 시대는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 냉대해져 가고 그리고 제멋대로 각기 반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않고 신앙생활을 하는것이 고도의 신앙생활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교회와 관련지어서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럼 이런 목양적인 구조로 간다고 하는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로 교회 자체가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 그 자체가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시대는 지났습니다. 다시말하면 뾰족탑으로 세워서 쓰지도 않는 철탑을 한없이 솟아 올려서 어마어마한 교회당을 짓고 그 앞에 사람이 섰을때 주눅들게 만들어 버리는 카톨릭식의 고딕식 건축양식 같은 것들은 이미 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바가 목양적인 정신 속에서 정신이 투영된 교회의 건축양식이 아니다 라고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것이 이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점점 자기를 억압하는 권위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교회 컨셉 자체가 무엇인가 자기가 그 교회가 거룩하고 굉장히 유별난 사람들이 모이는 집단이라는 인상을 줌으로서 자기가 거기에 한덩어리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하나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많은 상실감을 느끼면서 그것이 교회로 가고싶은 마음을 부채질 할수 없다라고 하는 컨셉으로 가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면에서 볼때 스펄전의 생각에 깊이 동조합니다. 그당시 고딕양식이 굉장히 유행했는데 스펄전은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벌써 백년 훨씬전의 사람이었는데 최근식의 이런 평퍼짐한 지붕을 가진 그런 집회시설을 선호했습니다. 그러니까 스펄전의 타보나클교회가 그런것 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거기 가면은 하도 이상하게 생겨서 물어봤습니다. 경기장도 아니고 저게 무엇이냐? 물어보면 그동네에 안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건물은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입니다. 불신자들이 그렇게 가르켜 줬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건물의 형태나 이런것들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면서 무엇인가 성스러움의 추억을 자극하는 그런식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교회당이 지어져 보면 알겠지만 제 의견이 어느정도 반영이 될지 모르겠지만 저는 교회가 케주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비싼돈 들일것 없습니다. 너무 구태의연합니다. 빨간 벽돌에 까만 매지에다가 시커먼 철탑에다가 붉은 네온사인 들어오는 십자가는 천편일률적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건물을 수백채 수천채 보고 다녔어도 하나도 기억에 남는 교회가 없습니다. 인상깊은 교회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것만 아니라 남부순환로에 두세달이면 하나씩 엄청난 건물이 들어서도 하나도 머릿속에 입력되는 건물이 없습니다. 그것은 특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해서 교회가 유별난 모습으로 지어서 팍 튀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를 지어놨을때 사람들이 그 교회가 별종들이 모이는 장소로 느껴지지 않고 자기도 저곳에 가면 쉼을 얻을수 있을것 같다라는 느낌을 줘야 합니다. 이것이 세속하러 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그런 감각을 줄수 있는 교회의 스타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은 케주얼하고 누구든지 받아 줄것 같은 그야말로 열린교회 일것같은 그런속에 들어 갔을때 메시지는 중요하게 울려 퍼져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아주 선명하고 중요한 메시지들이 선포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타협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원칙을 지키면서 철저하게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꿀수 있게 만드는 복음적이고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요소들을 철저히 유지하지만 그러나 그 포장들을 좀 바꿔야 합니다. 그래서 케주얼 하면서도 이제 여러분 건축위원들이 머리를 싸매면서 고민하고 있읍니다만 딱 지어놓고 보면 여러분들이 “아하!” 그럴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지을수도 있구나! 그런데 참 좋다 이렇게 생각이 들 것입니다. 교회가 지어진 그 모습을 보면 그 교회안에서 어떤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대충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인드를 교회 건축양식에 반영한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아주 케주얼하면서도 절대로 비싸거나 엄청난 외장제를 덕지덕지 붙여 기지고 외벽하는데만 3억씩 들이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뭐하러 그렇게 합니까? 케주얼하고 가볍게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볼때 저 교회는 굉장히 심각하겠다 저 교회에서는 진짜로 성스럽겠구나 하고 들어가보면 메시지의 내용은 극히 캐주얼 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고 캐주얼해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메시지가 울려퍼지고 녹슬지 않은 사도들의 선포가 언제든지 우리의 귀에 들려져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충분한 복음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면에서 교회가 세워질때 저 교회의 세워진 외관적인 자체가 근처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충격적인 모습으로 다가갈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새빨간 빌딩을 짓겠다는것은 아닙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좋은 의미에서 아주 신선하게 집에 가서 눈을 감으면 교회당 건물이 눈에 아른아른하고, 가보고 싶고, 거기에 있고 싶고, 한번 가보면 나오고 싶지 않은 그런 포장을 해야합니다. 그것은 외부의 문제이고 실제로 그 안으로 들어가서 교회가 목양적인 구조를 갖기 위해서는 절대로 이런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뭐냐면 이런 것입니다. 가장 이론적인 교회는 담임목회자 자기가 직접 영혼들을 돌볼수 있을 정도의 사이즈에서 교회가 멈추면, 성장이 멈추면 아마 그런점에 있어서는 좋을 것입니다. 목양을 해보니까 150명이던 시절에 목회자의 양심적으로 모든 교인을 내가 돌보았다 라고 말할수 있는 선이 15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200명이 넘어가니까 힘들기 시작하고 250명이 되니까 어렵다하는 판단이 되고 350명이 넘으니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150명 정도 될 때에는 한사람 한사람을 다 신방하고 한 집안에 대학생이 두명 있으면 그 집을 세 번을 신방했습니다. 엄마 아빠 모여서 신방을 하고 딸 한번 불러서 신방을 하고 아들 한번 불러서 신방을 하고해서 세 번의 신방이 이루어지고 부부의 심각한 갈등이 있을때는 한번 같이 신방을 하고 나중에 쪼개가지고 다시 신방을 했으니까 5번의 신방이 이루어 졌습니다. 그리고 청년들도 불문하고 등록을 하게되면 등록 신방을 하고 연초가 되면 신년 신방을 모두 했는데 신년 신방이 사실은 개개인이 확연 해야 합니다. 보통 한시간 정도 신방을 했고 길게는 3시간 4시간까지 신방을 했습니다. 그것도 만족스럽지 않고 엉뚱한 소리하고 헛소리하고 정리 안되고 오락가락하고 하면 2차신방 3차신방 이렇게해서 6월까지 신방을 했습니다. 하다못해 주민들이 다 알았습니다. 그렇게 돌볼수 있던 그 교회 사이즈의 마지막 사이즈가 150명 시절 이었습니다. 그 후로는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교회가 커가면 어떤 사람 이야기가 150명, 200명 되면 딱 잘라라. 잘라서 그 다음에 줘 버리든지 교회를 분리를 시켜서 독립을 시켜라 하는데 남의 이야기는 원래 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럼 아주 실제로 이야기 합시다. 선착순 150명만 제가 여기서 잘랐습니다. 잘라서 여기는 열린교회 본교에 그냥 남고 뒷줄 잘라가지고 개봉동으로 보내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누가 갈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 뒤에 또 150명 잘라서 과천으로 보내면서 가서 기다리면 누군가가 갈 것입니다 하면 그때 그 사람들이 교회에 남겠습니까? 쉽게 이야기 하면 목회자가 매일 붙들고 성경을 가르쳐주고 눈물로 기도를 해도 목양을 못 받았다고 떠나는 사람도 있지만 일주일에 목회자와 같이 밥 한번 못 먹어보고 통성명을 잘 못했어도 주일날 와서 말씀을 들으면서 그것으로 자기가 충분히 신앙적으로 자기가 힘을 얻어서 전진하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목회자 담임목사 자신이 돌볼수 없으니까 돕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 영혼을 돌볼게 되는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럼 주일학교 학생들을 담임 목사가 못하니까 교사들을 보내서 영혼들을 돌보게 하는 것하고 비슷한 원리 아닙니까? 그렇게 될 때 교회가 필연적으로 나뉘어지게 되는데 나뉘어 지게 될 때에 우리들이 교회가 대교회가 되면서 갖는 가장 결정적이 취약점이 한사람 한사람의 가치가 무시되고 희석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우선 교인들이 많이 오니까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서 교회가 예전과 같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심각하게 생각을 안합니다. 교회가 음식점하고 비슷합니다. 처음에 신장개업 했을때는 한사람이 와서 삼계탕 반마리만 달라고 해도 종업원 둘,셋씩 쫒아오고 고추를 두접시씩 갖다주고 해도 그러다 장사가 잘 되면 아주 하챦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요일도 우리 저녁 먹으러 갔는데 여기 밥 되요 하니까 될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고... 완전 배짱입니다. 그럼 우리 기다리면 먹을수 있습니까? 했더니 기다리실라면 기다리고 가려면 가시고 맘대로 하세요. 어떻게하면 먹을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못 먹을것도 같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비슷하게 되는 것입니다. 음식 맛도 떨어 집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하든지 잘 하려 하다가 사람이 많이 모이면 음식 맛이 떨어 집니다. 교회도 맨 처음에는 그렇지 않습니까? 음식 맛이 그렇다가, 점심시간 밥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서 가치들이 자꾸 그런 인식들이 떨어집니다. 그렇게 하면서 한사람 한사람 개개인적으로 돌보는 그 돌봄이 아주 취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가 커졌을때 제가 대충 생각하기에 35%정도는 그 교회에 아주 정착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럼 뭐냐면 큰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우위가 뭐냐면 재정적으로 능력이 있고 교회의 행정력이나 기획력등이 생겨나기 때문에 작은 교회에서 할 수 없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제시하면서 교인들 한사람 한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교육학적인 리드나 신앙적인 필요성들을 잘 채워줄수 있는 제시를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학교도 많고 성경공부도 다양하고 정신지체아를 돌보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이 있어서 각자가 그런것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30-35%정도는 무엇이든지 가르쳐준대로 배우고 싶어하고 열렬이 따라 다니는 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다니는 것이 실질적으로 이런 틀이 잘 갖춰지지 않고 설교가 탁월하고 은혜가 넘친다면 모르겠지만 평균적인 작은 교회 다니는 것 보다는 큰 교회 다니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자기가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이 개발하고 변화시키려하는 의지와 의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교회가 주는 유익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잘와서 먹는 애들만 나의 애들이 아니라 밥 먹을때면 큰애들한테 그릇까지 뺏끼고 구석에서 오줌싸고 울고있는 애도 내 뱃속에서 난 자식이면 어떻게 합니까? 뭐 하느냐 빨리와서 형들을 물리치고 밥을 쥐어라. 그렇게 마음으로 독려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찿아가서 왜 우는지 하고 의욕이 있는 사람들은 혼자서 진실되게 잘 돌볼수 있는데 그렇게 의욕이 없고 실족한 사람들은 가서 아주 비 효율적입니다. 한사람이 가서 한사람을 붙들고 매달려서 하루종일 한사람을 돌볼수 있을까 말까한 그런 상황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너무 교회가 커지는 가운데 효율을 집중적으로 추구하다 보면 본질적인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계산들을 넘어설수 있는 마인드가 교회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교회가 커질수록 교회가 성장하는 와중에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는 영혼을 꼼꼼하게 돌보고 그 영혼들을 잘 챙겨서 그리스도 예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고 실체를 듣고 일어서서 정상적인 성장을 계속해서 나아갈수 있도록 돕는 사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한국교회가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작으면 300명 많으면 1,000명씩 되는 이런식의 대교구제를 가지고는 그런것들을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목양적인 역량이나 교인들에게 미치는 희망적인 역향력이 그래도 담임목사보다 부교역자들보다 낮지 않겠습니까? 담임목사가 150명 정도에서 한계를 느꼈다 할것 같으면 모든 면에서 볼때 부교역자들의 역량은 150명이 안된다고 보는것이 정상적인 수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 본다면 이런식으로 300명 500명 1000명 이런 식으로 찿아주고 가는것은 말하자면 계속 보험회사에서 고객들을 관리하는식의 그런정도의 차원을 현실적으로 넘어설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양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갈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교회가 점점 커지면서 교회가 커지는 가운데 누릴수 있는 교인들에게 베풀수 있는 많은 혜택들이 있는데 지금 여기서도 제가 마음에 항상 부담을 느끼고 있는것은 정서자폐아나 정신지체아를 위한 기회 교육을 해주고 싶은데 우리 역량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장 전문가도 없을뿐 아니라 몇 명 모일지 모르는 아이 한두명이나 서너명을 위해서 한사람의 전문적인 교육자나 교역자를 초빙하여야 하고 뿐만 아니라 우선 시설을 잘 만들어서 거기서 주방이니 창고니 학습활동이니 심지어는 목욕이니 용변이니하는 모든 문제가 아주 좋은 공간에서 그것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런것은 아무리 애정을 가지고 있어도 100명 200명 모이는 교회에서는 현실적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조사를 하면서 통계를 보니까 그런 사역을 시작하는 교회가 전부 다 3000명 이상되는 교회들에서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재정적으로나 모든면에 있어서 적어도 2000명 이상 3000명 정도 되어야지 그런 시설들을 시작을 하고 그런 사역들을 시작을 하고 5000명, 6000명, 7000명 가면서 그 교회가 자연스럽게 복지관을 건축하는 쪽으로 나가서 그런 고통 받는 사람들을 수용하고 받아 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이들을 가지고 있는 부모들의 입장에서는 사회 교육기관에 맡겨도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끝나고 주일은 자기가 교회에 가야하는데 이 아이에게 누가 희망을 넣어 줄 것인가? 누가 이 아이에게 복음을 넣어 줄 것인가? 부모로서는 가슴에 피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런것들을 결국은 교회가 짊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효율성의 문제 같은것들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효율성이나 투자가치 이런 문제를 가지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제가 주장하는 바는 우선 좋은 사람이 필수적이고 그것이 어느정도 갖춰지게되면 구조적으로 교회가 절대적으로 소교구제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에 가지고 있는 욕심은 교회의 시설과 제정적인 여건이 허락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100명을 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100명이 넘지 않는것을 한교구 한 교회학교로 다 토막을 내서 여러 일들을 하게 해서도 안되고 교구 하나 맡고 중고등부 하나 맡고 그 다음에 새벽기도 차량운전도 하고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는 마음이 갈려서 자신의 사역에 소신껏 헌신하기가 힘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를 맡겨줘서 실패를 해도 그 사역에서 실패임이 입증되고 성과를 거두고 열매를 맺어도 그 사역 하나 맡긴 속에서 성과를 거둘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거기에 교역자들이 매달려서 자신의 모든 헌신과 꿈과 사역의 소망과 열망이 여기에서 볼것이라는 결단을 가지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투자하지 않을 사람은 교역자로 써서는 안됩니다. 목회자와의 인맥이나 이런것들로 인해서 교역자들을 책봉하면 큰일 납니다. 그래서 명료하게 그 사람이 정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양떼들을 위해서 정말 죽도록 충성할 신앙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선봉해야 합니다. 대표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마어마하게 고비용이 되는 것입니다. 죄송한 이야기입니다만 우리 교회에는 아직까지도 교역자들에게 충분한 생활비를 못드리는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느날 제가 조용히 앉아서 교구 하나가 1년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경비가 들어가나 봤더니 그 분들에게 드리는 일년 사례금, 차량유지비, 그분들이 쓰고계신 교구실을 교회 전체의 임대료를 환산해서 평수로 계산한 금액, 교구에서 일년 쓴 신성비와 교역비와 기타 부대비용 모두를 포함하니까 작게들어가는 교구가 2,500만원이고 많이 들어가는 교구는 4,500만원 이었습니다. 평균해서 3,000만원에서 3,500만원이 80명 내지 150명 정도를 목양하는데 일년동안 들어가는 비용입니다. 10개의 교구면 3억 5천만원입니다. 일반적인 지금 교회의 관행에서 보면 이런한 우리들의 사고방식과 목회구도가 모두 이해가 안가는 것입니다. 요즘에 더 좋은 차 타고 다니는 사람 많습니다만 작년에 차를 많이 사서 교구 전도사님들에게 차를 한 대씩 다 드렸습니다. 그래봐야 다마스 이지만... 그런데 중요한것이 지금 일반적인 교회에서 신학교 다니는 전도사님들에게 다마스라도 자기가 전용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쓸수 있는 차와 개인적인 집무실을 주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르치던 학생들도 보면 부목사로 나갔는데도 자기 개인적인 집무실을 가지고 있는 교역자는 거의 없고 어느 정도 교회가 커서 수석 부목사쯤 되면 조그만 방하나 주면 받습니다. 거의 주지 않습니다. 교문서답 큰 방에다가 한 열명 집어넣고 거기서 복잡되면서 생활합니다. 저도 그런 방에 자리를 하나 차지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일년이 지나도 내 집무실 그 교회 사무실에 들어가는 예가 일년에 몇 번 안됩니다. 거기에 뭐하러 가겠습니까? 사람들 바글바글하고 지체들을 만나서 상담을 할 수가 있습니까? 교역자가 무슨 동사무소 서기도 아니고 무슨 사무 볼일이 그렇게 많다고 거기에 앉아서 그것을 하고 있겠습니까? 거의 안 찿아 갔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화) 실제로 제가 어느 교회에서 청년 전도사를 하고 있을때 였는데 청년부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안주어 졌습니다. 그런데 제안이 오기를 삼사십명 모이는데 전도사님 꼭 와서 우리 청년들 좀 돌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고 그 교회 갔습니다. 그때부터 이제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를 안 믿기로 했는데 삼사십명 모인다 하더니 첫날 갔더니 세명 모였습니다. 세명이 모였는데 그것도 청년부실이라고 해서 올라 갔는데 주산 학원처럼 만들어 놨습니다. 조그만 책상에 호떡집 의자 같은것을 놓고 세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라고 신방도 하고 전화도 하고 했는데 안 나옵니다. 운동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였습니다 안 나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 고민을 하는데 참 처량합니다. 여기 이렇게해서 내가 무슨 사역인가 안되겠다 했는데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청년들보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돈을 이만큼 내 놓을 테니까 너희들도 직장에 다니니 헌금 좀 해라해서 돈을 걷으니까 한 이삼백만원이 되었습니다. 또 어떤 형제는 피아노도 사 놓고... 그래서 그 청년들이 있는 공간을 확 뜯어 고쳤습니다. 장판을 가져다 애들 시켜서 마대자루에 퐁퐁을 묻혀서 꺠끗이 닦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커튼을 새로 하고 밑에는 하나에 8000원 짜리 널따란 카펫을 쭉 깔고 피아노가 새로 들어오고 에어컨을 설치하고 창문에 커튼을 달고 촌스러운 예수님 사진 다 떼어버리고 분위기를 깔끔하게 벽지도 새로 바르고 조명도 바꾸고, 그리고 청년들이 사오십명 모일수 있는 공간인데 엠프도 없어 하나 샀습니다. 마이크도 하나 사 놓고 녹음도 되게끔 만들어 놓았습니다. 뒤에는 조그만 탁자를 만들어서 커피포트에 커피도 끓여 놓고 했더니 애들이 한번 와보고 나서 여기 되게 편하고 좋다하면서 땅을 넓직한것 한 열댓개 정도를 사놓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쭉 펴놓아서 식당에서 복당거리면서 난리치듯이 밥을 먹고 식당에서 빨리 탈출하고 싶쟎습니까? 대부분의 교회 식당이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탈출을 하고 밖에 나오니 교회 근처에 다방을 제외하고는 갈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청년들이 올라 오니까 에어컨 시원하게 틀어놓았고 단정한 자매들이 커피 먹고 싶다면 커피 타주고 녹차 마시고 싶다면 녹차 타주고 아이스커피 마시고 싶다면 아이스커피 타주고 다 타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앉아서 이야기하다 보니까 청년부 예배 시간인데 거기에 죽치고 앉아 얻어 먹었으니 예배를 드리고 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한 육십명 모였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만 육십명 모였다면 제가 섭섭합니다. 영혼을 돌보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으니까... 그래서 거기에 꽉 찼습니다. 그래서 모이니까 세명이 모였을떼 30%가 은혜 받는다고 하면 한명이 은혜 받는 것입니다. 100명이 모였을때 30%가 은혜 받으면 30명입니다. 1명이 은혜받아 열심히 전도하해봐야 한명이지만 30명이 은혜받으니 사람들이 열심히 불러오고 섬기고 하면서 공동체도 만들고 재미있게 교회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면 생전 청년부 안나오던 아이들이 대학교 졸업해서 청년부 안 올아오던 아이들이 거기가면 좋다며 하고, 왔다가 놀러왔다 말씀 듣고 펑펑 울고 은혜받는 변화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구조 자체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전도사님들에게 그런것들을 다 이렇게 해줬는데 지금도 생활이나 이런면에 있어서 잘 돌봐 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고나니 어떻게 되었냐 하면 교회 구조 자체가 교회가 커질수록 조직 생리상 최고 책임자는 기초적인 행원들과 가운데 많은 침례계에서 최대한 멀어지고 싶어 하는 것이 조직의 생리입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이런것들을 복음의 정신으로 타파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는 부목사님이 네분이 계신데, 물론 우리 박봉식 목사님이 선임 목사님이시고 그 다음에 목사님이 세분 계셔서 각자 예의를 지키고 자기 역할들을 해 나가지만 교구를 돌보는 영혼을 돌보는 사역에 있어서는 여전도사님들도 부목사님의 통제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랑이 자기가 독자적으로 하나님 앞에 열심히 사역을 해 나가고 담임 목사는 어쩔수 없으니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담임목사와 의논해서 잘 해봐라 힘을 내라 이런식의 구조가 되어야지 부목사 하나 통하고 올라가니까 그 위에 상관이 또 하나 있고, 이런식으로 해서 계속해서 올라갈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시키셔서 하는 일이지만 구조적으로 이런식으로 뒤틀리고 눌리면 성실함을 가지고 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그 교구에서 무슨일이 일어나면 전도사님이라도 목사님들한테 통제를 안 받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교구는 자기가 어떻게 돌보든지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인격과 신앙과 모든 사명을 걸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깊이 일하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잘 모르면 담임목사한테 물어보고 성도들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책임을 져도 하나님 앞에 지고 교회의 구조상 책임을 질 일이 있으면 담임목사 한사람이 책임을 지는 그런 체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출근시간에 전도사님들이 아침에 나오는 전도사님들이 퇴근이고 실제적으로 퇴근은 없습니다. 밤 11시라도 지체들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면 가야 합니다. 그런면에 있어서 목양적인 구조를 갖는 단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또하나는 구조 자체가 교역자 자신이 한 교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그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서 직접 전도하고 그렇게 전도된 사람들 양육하고, 그 양육을 하는데 있어서 자기의 교구의 식구들을 동원해서 돕고, 도운 사람들에 의해서 구역장으로 세우고, 세운 사람들이 또 나가서 전도하게 하고 돌보게 해서 자신들의 교구를 하나의 작은 교회처럼 함께 사랑하면서 그렇게 이끌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명한 책임과 권한이 그에게 주어서 사명감을 가지고 그 일을 하게 해야지 어떨때는 모든 맡기는 것 같다가 어떤때는 들러리 취급을 하고, 그렇게 해서 손길을 뻗치면서 그 조직을 휘들러 놓으면 누구도 하나님 앞에 사명을 감당해 나가지만 누구도 기쁨을 가지고 그 일을 감당해 나갈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면서 보람을 느끼면서 그 일들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가 이야기 하는것은 교회의 어떤 구조들을 가지고 이야기 할때 사람을 보고 뭔가를 생각하면 안되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전도사님들일지라도 자신들이 수시로 영혼들을 돌보고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상아줄을 그러면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무실이 필요 합니다. 집무실이 필요한것은 개개인을 위해서 주어진 집무실이 아니라 거기서 새가족반을 합니다. 교회에 처음온 신자들이 새가족반을 공부할 때 펑펑우는 감격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교회에 정착 할 수가 없습니다. 새가족반에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에 정착한 사람들은 모두 새가족반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깊이 변화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교회에 등록해서 새가족반에서 주님을 못만난 사람들은 시종일관 계속 불안하고 새가족반에서 확실하게 복음의 진수를 깨달은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목회의 경험입니다. 그렇게해서 등록한 신자들의 95% 이상이 정착을 하는 놀라운 일들은 이런식의 소교구제를 통해서 담임교역자 그 사람 자신이 자기의 교구에 등록된 그 영혼들을 통해서 필사의 노력으로 목양을 하고, 그들을 돌보는 그런 상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확실하게 이야기 하기를 제가 확인하고 있는 일반적인 교구의 경우에는 그 교구에 속한 영혼들이 200명 교인이던 시절에 저로부터 받는 목회적인 섬김보다는 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저는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해서 한명을 한명을 자기가 아프다 말하기 전에 그들을 돌봐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진리를 가르치고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책망하고 바르게 잡아서 신앙의 길에 정돈된 가운데 걸어갈 수 있도록 그런 식으로 교회 체제를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런 일들을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투자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교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잘 길러낼때에 교회는 거의 모든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정치인이면 여기서 진실한 신자가 되면 정치적인 구조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 것이고 그가 만약에 예술가라면 예술의 영역에서 십자가의 정신으로 봉사하고 일 할것이고 그가 학교 선생이면 복음을 가지고 영혼들을 섬기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각사람의 삶의 영역은 자기의 영역이지만 진실한 신자가 되면 그 사람의 영역이 다양할수록 다양한 영역들의 복음으로 정복해 갈 수 있는 기초가 마련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영적인 측면에서도 이런 투자들에 대해서 아까워하지 말아야 되는것이 뭐냐면 변화되지 않은 사람 백사람이 헌금하는 것보다는 주님을 만나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 열사람의 헌금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저희들이 일주일에 나오는 헌금을 비교해 보면 역사가 오래된 기존의 교회, 거액의 헌금을 하는 교회를 제외하고는 저희들이 모이는 인원의 약 70% 정도가 더 나와야지만 우리교회의 헌금 정도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헌신도가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사람 한사람을 교회가 잘 돌볼때 그들의 신앙이 헌신으로 이어져서 더구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때 사람들이 헌금을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볼때 저는 하나의 실험적인 정신을 가지고 열린교회의 구조를 짜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말씀 드리지만 큰 교회를 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영혼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계셔서 그들에게 사명감을 주셔서 새로운 곳으로 파송하기 전 까지는 우리들이 상처입은 상태로 교회에 들어오는 영혼들이 우리의 시설이 모자란 다거나 우리의 목양적인 여력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을 상처입은 사람으로 돌아가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 영혼들을 잘 돌보고 그렇게 하는것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명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전도를 안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세워진 이래로 열심히 전도하고 지하실에 있는 교회 시설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전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주 대하는것이 열린교회 신문이고 열린교회 전도지 이니까 사당동에서 열린교회가 제일 큰 교회인지 알았다고 고백할 정도로 열심히 전도 했습니다. 우리는 뭐냐면 이렇게 사람들이 목자잃은 양 같이 유리하고 방황하는 그 사람들만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야 합니다. 그 두 노력은 함께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지 하나를 버리고 선택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식으로 교회에 들어오게 된 그들이 안심하고 편안히 정착을 해서 목회적인 돌봄을 입을수 있고 좋은 신자로 자라갈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가 절대적으로 관료화 되어서는 안되고 철저하게 교역자와 교회행정을 맡아 일해가고 있는 직원들과 교회의 운영을 맡고있는 재직들이 모두 철저한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던 그리스도 예수의 종된 정신을 가슴에 베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당회장은 당회의 종이 되고, 장로는 종로가 되어 교인들을 섬기고 그렇게해서 그리스도의 목양의 정신을 이룰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교회가 이 두가지를 절묘하게 결합을해서 양쪽의 모두 유익을 살린 교회의 목양의 구조에 모델케이스가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모르지만... 교회가 점점 커지면서 역량이 많이 생기니까 커다란 계획을 가지고 사회를 위해서 선교지를 위해서 봉사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런 특수한 계층에서 말하자면 교회가 막대한 투자를 하지 않으면 돌볼수 없는 사람들을 돌볼수 있는 여력을 교회가 갖게 됩니다. 그런 일들은 교회가 커지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이삼백명들의 교회로서는 마음만 있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앞으로 인덕원으로 옮겨가게 되면 정신장애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세우고 그 가족들이 그 교회를 그렇게 고마워 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교회에 정착해서 믿지 않던 가족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우리들이 이런 계산적인 방법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연초에 우리들이 유아부를 잘라서 따로 만들었는데 그때 유아부가 22명 정도 모였습니다. 22명 모이는 그때에 교역자 한분을 모시고 교역자 사례금과 그 기관을 운영하는데 일년이면 들어가는 예산이 이천만원이 넘는데 편성해서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40명 이상으로 늘어 났습니다. 그렇게하니 거기에 교역자들이 전심으로 해서 영혼들을 돌보는데 장년들만 그런 논리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유치부 심지어는 뱃속에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까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순산을 위해 기도하고 자모를 위해 격려하고 하면서 태아에서 죽는 그 순간까지 목양적인 돌봄을 흠뻑 받으면서 복음성가에 나온것처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면 어디가서 그런 사랑을 받을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랑을 하나님 안에서 이외에 어디서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주님이 사랑하신 그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신앙이 좋고 열심히 있는 사람들만 성도들의 사랑을 받고 교역자들의 귀여움을 받을수 있는 교회라고 한다면 정말 주님이 세우실려고 했던 그런 교회가 아닐까요? 능력을 충만히 받았던 당신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들은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찿아가라고 말씀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완악하고 강팍하다고 간단하게 치부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을 헤아리면서 그들에게로 당신의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안에 있는 영혼들 하나하나가 적어도 교역자들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그들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모자라서 돌보지 못하는 일들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흠뻑 사랑하고 돌보고 섬기면서 자기가 충분히, 물론 그렇게 돌보아도 눈물을 머금고 자기가 강팍해져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줬지만 그래도 자기는 이교회가 싫다고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그들의 강팍함 때문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더 많이 울고 그들을 위해서 더 많이 희생하고 더 많이 종되어서 섬겼더라면 아마 그들도 떠나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끝날까지 이런 후회는 교역을 하는 동안에 항상 있을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것 이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도 도전하면서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몸 우리의 건강 우리의 소유 모든 것을 기울이면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어느 한 구석에서 흐느끼는 영혼들 하나하나 돌볼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는 못나오지만 병상으로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 병상세례를 몇군데 주고 있는데 우리교회에 어느날 다른교회에 다니는 자매가 와서 아버님이 병상중에 있는데 병상에서 주님을 영접 하셨는데 잘 가르쳐주고 문답을 하고 세례를 줄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교역자들이 당신이 다니는 교회 있는데 왜 아무 연관도 없는 이 교회에 와서 이야기를 합니까? 자기 다니는 교회에 이야기 했더니 곤란하다고 했답니다. 너무 바쁘니까... 우리 교회는 수요일이고 가끔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어럽게 부탁을 하니 내가 흔쾌이 허락을 했습니다. 그사람이 우리 교회에 나올지 안나올지 모르는 사람인데 가서 문답을 해보고 정말 주님을 영접한 것이 확인이 되니까 목사님이 매주일 세 번인가 네 번인가 가서 병상에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람을 놓고 교리 교육을 가르치고 문답을 해서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는가 확인하고 담임목사니까 가서 세례기까지 들고가서 세례를 주고 왔습니다. 물론 그사람이 우리 교회 나올지 안나올지 모릅니다. 아마 나올 가능성이 많겠지요. 완쾌되고 있다니 나오겠지요. 그렇지만 그 병든 몸으로 우리 교회 나와서 섬기면 얼마나 섬기다 하나님 나라에 가겠습니까? 그런식으로 효율성만 가지고 될수 없는것이 목양이라는 것입니다. 산넘고 물건너서 한 마리의 양떼를 향해서 찿아나갑니까? 그냥 한 마리 죽어버리고 말지 그돈으로 다른 양 한 마리 사는게 났습니다. 그런데 그런식으로 물리적으로 물양적으로 할 수는 없는것이 목양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도 보탬이 될것 같지 않은 영혼이라도 교회에 보탬이 되기위해서 영혼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 자체가 소중하고 주님의 사랑이요 주님의 마음의 기쁨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례를 받을때 온 가족이 모여서 얼마나 기뻐 하는지 모릅니다. 완악하고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던 자기의 부모님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할때 그 자리가 비록 교회가 아니라 병상이긴 하지만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그런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것이 아닙니까? 솔직히 세상에서 대접 많이 받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대접 덜 받아도 됩니다. 세상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떠 받들던 사람은 교회에서 대접 덜 받아도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도 치이고 상처받고 돈도 없고 쓸모도 없어서 자기도 자기가 미워서 버리고 싶은 사람은 교회에 와서 사랑 받아야 합니다. 섬김 받아야 합니다. 상처와 고통으로 응어리 지고 눈물로 디법벅이된 얼어 붙은 그들의 마음을 녹일수 있는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찬송)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 이니라
우리들이 그런 얄팍한 계산들을 초월해야 합니다. 주님이 같이있는 주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까? 며칠후면 빌라도의 뜰에서 예수를 못박게 내어 달라고 외치는 그 무리들을 목양하면서 일생을 사셨어도 예수님의 생애는 실패한 생애가 아닙니다. 그런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저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 하실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것은 교회의 최고의 가치를 어떻게 투자를 하고 어떻게 구제를 만들면 일평역량을 가지고 있는 교역자가 자기의 마음과 모든 것을 다 쏟아서 영혼들을 목양하고 목양할 때 영혼들이 가장 혜택을 받을수 있는 구조가 어떤 구조인가, 그리고 그 구조를 구축하고 그렇게 사역을 해나갈수 있기 위해서 교회는 최대한의 섬김을 다해야 합니다. 제가 일년전부터 100원 지출한 것까지 다 보면서 도장을 찍습니다. 가끔 보면 교역자들이 뭔가를 실수를 하든지 잘못 생각해서 지체들을 데리고 뭘 사먹은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제가 반드시 이야기 합니다. 교역자의 입장에서는 좀 너무하고 치사할수 있겠지만 왜 지체들을 데리고 교회의 돈으로 피자도 사먹고 빵도 사먹고 열린공간에서 쥬스도 사먹나, 심하면 도로 돈 내노라하고 아니면 내가 물어내고 그렇게 하고 도장을 찍습니다. 그러나 목양을 하는것에 있어서 만큼은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교인중에 부산에서 제주에서 돌아 가셨다하면 즉시 교역자 두사람 비행기 태워서 보냅니다. 한번 신방을 하고 돌아오면 경비가 50만원 내지 60만원이 나옵니다. 그러나 경비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지체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견딜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온 교인이 갈수는 없고 담임목회자가 가지 못하는 때도 있지만 교구를 돌보고 있는 교역자가 가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밤에 그 장거리를 차를 운전하면서 갑니까? 그래서 비행기 타고 가라고 합니다. 비행기 타고 가도 됩니까 하는데 비행기 타도 되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니가 지금 놀러가냐? 진실한 마음으로 가서 위로하고 그 영혼의 아픔을 위로해 줘라. 그 청년이 교회에 나와서 일년을 헌금해도 60만원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회사를 경영하는 방식이지 교회를 경영하고 운영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통비로 해서 기름값등등 정말 정신이 없습니다. 교회 돈 어떻게 하나? 그래서 어느날 기도하면서 생각했습니다. 다 필요없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영혼들을 돌보고 심사해라. 그러면 기름은 교회에서 무제한 주겠다. 여러분 어느 정도 인지 아십니까? 제가 지난번 울산인가 포항인가 내려가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목사님께 물어 봤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항상 우리교회 부목사님들에게 잘 못해주는 부담이 있어서... 생활비를 교회에서 얼마나 드리시나요? 실례가 아리다면 제게 좀 가르쳐 주십시오. 130만원을 줍니다. 이거 가슴이 철렁 했습니다. 이교회가 우리보다 훨씬 더 났구나. 그래서 상여금 얼마 주는지 다 물어 봤습니다. 나중에 놀란것이 뭐냐면 그럼 차량은 어떻게 합니까? 130만원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그 속에서 자동차 살 때 교회가 300만원 주고 10만원씩 깍고 보험료 거기서 내고 그리고 거기서 기름값 내고 망가지면 거기서 고치고 사고내면 거기서 물어내고... 그러면 전 사례금의 자동차 유지하지... 그 분이 아주 씁쓸하게 이야기 하는것이 뭐냐면 목사님 사실은 기름값이 염려되어서 먼 곳에 신방을 못갈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천명, 삼천명 모이는 교회가 그런정도의 사고방식을 가집니까? 하루 저녁 하고 그 다음날 새벽 설교를 했는데 70만원을 봉투에 넣었습니다. 얼마가 들어 있는지 몰랐지만 공항에 와서 펴보니 70만원 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할까? 나를 한 삼십만원만 주고 그 다음에 아껴서 그 사람들을 주지 그 사람들이 놀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어느 교회에서는 장부를 만들어 놓고 신방하러 갈 때 간 km수, 시장 갈 때 간 km수를 따로 써서 이쪽은 교회에서 내고 이쪽에서는 본인이 내야되는 도대체 우리는 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사람들이 졸렬할까? 그래서 내가 정리를 했습니다. 그래서 가스니까 얼마 안 들어가니까 그렇지만 많이 썼습니다. 그리고 많은 영혼들에게 신방을 하고 한 2년을 타고나니까 차가 너덜너덜해져서 거덜이 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 새차 사주면 됩니다. 2년동안 10만km씩 타고 돌아 다니면서 지체들을 신방 했으면 그 신방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위로를 받고 깨어나고 변화 받고 은혜를 받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소신껏 일할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그리고 묻는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대들에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서 그대는 주께 하듯이 최선을 다하며 그 영혼들이 잘 되는것이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눈물과 오래 참음과 겸손함으로 그 영혼들을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안된다고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교역자들끼리 신의나 이런것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것은 주님과의 약속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영혼들을 많이 보내 주시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유리하고 아파하는 영혼들을 이 교회에 보내주면 잘 돌봐 주겠지 그런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찬송) 요한의 뜻이 뭐냐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자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나는 청년들이 나보다 더 교구 전도사님들을 존경하는것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마음놓고 존경해도 나는 김 목사님 시샘 안 합니다. 추석날 우리집에는 선물 안가져오고 전도사님에 선물 가져 간것 다 아는데 한번도 섭섭해 본 적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내가 못하는 목양의 부분들을 전도사님들이, 목사님들이 잘 탐방을 해서 그렇게 헌신적으로 살고 정말 어린 유아부를 담당하는 전도사부터 시작해서 부목사님들에 이르기까지 정말 눈물겨울 정도로 헌신적으로 사역을 합니다. 지난번에 통계를 내보니 청년교구와 장년교구의 출석인원이 6개월 마다 50%씩 늘어 났습니다. 50명인데는 6개월후에 75명 그다음에 6개월 후에는 110명으로 계속 늘어 났습니다. 그런 추세는 앞으로도 가속화 되리라 봅니다. 나는 그것이 개개인 하나하나에 대한 돌봄을, 개개인에 대한 돌봄과 투자를 포기한 희생위에서 이루어진 성과라면 나는 온 하나님 앞에 감사할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희생하지 않고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도 소교구제를 지향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비록 어린 영혼들을 돌보고 이름모를 사람들에게 이거리 저거리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존중히 여기고 그들로 하여금 소신껏 이 교회에서 내가 가장 잘 꿈과 보람을 가지고 영혼들을 위해 섬길수 있다라는 자긍심과 기쁨들을 넣어 줄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목양의 길에서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영혼들 하나하나를 지성으로 돌보고 사랑해서 유리하고 방황하면서도 마음에 위로를 얻지 못했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느끼기 힘들었던 지체들이 이곳에서 마지막 인생을 정착하고 변화될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목양하면서 느낀것이 뭐냐면 가끔 보면 완전히 왕창 인생 폐차 직전에 사람이 교회에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눈빛 부터가 무섭습니다. 이미 폐차장까지 갔다온 사람이기 때문에 수 틀리면 막 들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폐차 직전에 갔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 놀랍게 변화 되면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뜨겁게 교회를 사랑하고 예수에게 받은것이 많다고 자랑하는데 거기에 더 보태서 자랑하는 것이 뭐냐면 열린교회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 만난 하나님 이 교회에서 성도들이 어떻게 폐차 직전에 있는 자기와 같은 영혼을 사랑했고 돌보고 자기를 위해서 눈물 흘려 주었고 목회자가 어떻게 자기의 방황하고 유리하는 영혼을 쓸어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씨름했는지 그것을 깊이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목회자들이 정말 목양 일념의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주장하는 것이 한시에 딱 출근시간인데 한시 전에 나오는 교역자들도 많지만 한시에 딱 출근하면 교회에 와서 책도 보지 말라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그런 생각 자체를 모두 뜯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늘 영혼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와서 널려있는 교구실을 한번 들여다 보십시오.. 저녁이고 오후고 깊은 밤이고 항상 전도사님들이고 목사님이 있습니다. 지체와 더불어 상담하고 한두명의 지체를 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책망하고 교훈하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교회에 정말 이세상에서는 쓸모 없다고 인정 되었고 이세상에서는 소용이 없다고 낙인 찍힌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는 자기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번외하고 출석표 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자기가 그렇게 존중히 여김을 받을수 없습니다. 소중한 영혼들이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가끔 와서 돌출 행동하고 이상한 것 해가지고 예배 분위기 이상하게 만드는 사람들도 우리들이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주님을 몰랐으면 그럴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머리에 노랑물 들이고 여기에 귀거리하고 코거리 하고 다니는 청년들도 바지가 골목을 청소하고 다니는 청년들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과도기이니까 그럴수도 있겠다. 저 청년이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얼마나 저 인생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을까 생각을 하면서 한사람 한사람에게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진심으로 사랑해 줄 수 있고 말로만이 아니라 자기가 교회에 들어가면 어디에선가 그런 구조를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자기가 받아 들여 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교회의 공간과 교회의 모든 구조들을 그 한 목표에 맞춰 나가고 교회의 모든 구조들도 그런식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영혼들을 돌보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슴이 없고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눈물과 기도 없이 방법으로 그런 헌신들을 대체할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마땅히 경계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흐르고자 하는 물이 있을때 흐를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면 물은 강한 흐름을 형성하면서 흘러 가듯이 우리의 교회적인 구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항상 가지고 해야 합니다. 열린공간을 만들어 놨을때, 800만원을 들여서 열린공간을 만들었는데 만들면서 여러 가지 교회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어려웠지만 만들어 놓고나서 얼마나 좋습니까? 구조적으로 세마나실이 새가족 안내실인데 여기서 새가족 부원들이 강강수월래 하듯이 애워싸서 세미나실로 가자고 해도 중간에 다 샜습니다. 그리고 가보면 한 10명 모여 있습니다. 여기를 다 하고 나니까 사람들이 호기심으로도 들어오고 사람들이 북적북적 하면서 등록하는 인원들이 대규모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영상을 제작해서 만들고 하는 것들이 근본적으로 영혼들의 눈물이나 탄식, 그 영혼들을 위한 몸부림을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도구는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아직까지 변화 되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왔을때 그들의 상심한 영혼들의 눈 높이에 맞춰서 그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들 모두가 변화되어서 놀랍게 헌신된 신자가 될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우리들은 그들을 끌어안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진실한 신자로 자라기를 위해 기도해주고 한그루의 묘목을 심는 마음으로 물을 뿌리고 덮어주고 비료를 주고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이런 구조로만 만족하지 말고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영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수고하고 영혼들을 위해서 하다 못해 아침에 일찍 나와서 마당을 쓸고 그들에게 인사 한번 하는것 자체도 아주 소중한 섬김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주님의 목양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혹은 아직까지도 그리스도인 조차도 되지 못한 상태에서 흐느끼고 인생의 어두운 밤을 홀로 지내는 곤고한 사람들이 이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밤도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돌봄입니다. 누군가가 흐느끼고 있는 자리에까지 내려가서 그들의 흐르는 눈물을 씻겨주고 조건없이 죄인들을 받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겨운 사랑을 증언해 줄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많이 증언해서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대해서 말해 준다고 할지라도 교회에 와서 구조속에서 그것을 느낄수가 없다고 한다면 그들은 그속에서 깊은 회개를 느끼고 교회에서 신앙을 받아 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응급환자로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교회적인 역량을 집결하고 그들을 위해서 섬기는 것을 보람으로 알 수 있는 그런 교회 구조가 되어 가야 합니다. 이것이 마지막대에 주님의 마음의 눈물을 씻겨 드리는 것이고 고통받는 영혼들의 마음에 흐르고 있는 피를 닦아 주는 길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일평생 동안 그렇게 돌봄을 받은 사람들이 자기도 영혼들을 돌보는 것을 보람으로 삼으면서 이세상 땅 끝까지 퍼져서 주님의 사랑의 목양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