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에 매여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행 20:22).
우리들이 흔히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사실 불순종과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끊임없는 거역은 우리의 많은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지요. 그래서 결국 우리들이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안정되고 평안한 삶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것이에요. 그렇지만 이러한 공식이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생각보다 훨씬 크고 넓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해서 당신의 뜻을 펼치실 때가 있는 것이죠.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 수준에 맞게끔 가르치고 또 나이가 들면 나이에 맞게끔 또 다른 생각들을 가르치는데 또 때로는 이 두 가지가 혼돈을 일으킬 때가 있는 것이죠. 어렸을 때에는 복잡한 것을 안 가르치고 간단한 것만 가르치고 나이가 들면서 설명할 수 없어도 성장하면서 이해하게 될 때까지 우리는 기다리는 것이죠.
오늘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러 가야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유대인들에 의한 큰 핍박이 있을 거라는 것을 성령께서 증거 해주셨고 사도 바울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이 그 길로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면 순종함으로써 그 길을 올라가려는 바울에게 이러한 환란과 시련은 없어야 할 텐데 성령은 순종하라고 요구하시면서도 동시에 네가 순종하면 큰 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증거 해주셨습니다. 이게 순종하면 복 받는다는 간단한 공식을 갖고 있는 수준의 신자에게는 이해가 될 수 없는 것이죠.
그러나 신앙이 깊어진다고 하는 의미는 하나님이 나의 상식과 판단대로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크고 무한히 넓으시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도 역사하시는 것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송할 수 있게 되는 그것이 바로 신앙이 깊어진다고 하는 의미에요.
사도가 오늘 에베소교회에서 온 장로들에게 밀레도라고 하는 곳에서 밀레도라고 하는 곳은 바닷가고 항구도시에요. 그래서 물이 많은 곳인데 거기에서 이제 배를 타고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서 자기의 소회를 밝히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는 고백하기를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나는 무슨 일을 거기서 만날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대답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위대한 사도인데……. 좀 씩씩하게 ‘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만 꼭 승리할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환란과 시련을 물러가게 하시고 그리고 원수들을 발아래 굴복시키실 것이다.’ 이렇게 씩씩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풀죽은 모습으로 ‘내가 무슨 일을 당할지 알지 못한다.’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죠. 오히려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며 이르시기를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증거 하신다. 성령의 증거는 거짓일 수 없지요? 그러니까 결박과 환란이 아주 확실하게 이 바울사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요. 죽은 사람도 살리고 그 병든 사람을 고치는 위대한 능력을 가진 이 사도에게 환란과 결박이 기다려서 그래서 큰 고난을 당하는 것은 왠지 어울리지 않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신자들에게 강할수록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를 하나님이 체득하게 하신 것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의 병은 고치고 능력은 행사했지만 정작 자신의 병은 몸의 가시가 되어서 끊임없이 찔러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했어요. 죽은 자도 살렸으니 아마 베드로처럼 하나님이 마음을 먹기만 하면 산사람도 죽일 수 있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그 큰 능력을 가진 사람이 환란과 결박 앞에서 그저 아무 항거도 못한 채 그냥 결박되고 환란을 당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에요.
사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중성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잘 보여주셨어요. 예수님은 이 땅에 존재했던 모든 하나님의 자녀보다 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 자신이기도 하셨지만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에는 그 큰 능력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엄은 어디로 가셨는지 없어지고 그리고 그대로 그 시련과 환란을 당하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으로서의 모습과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한 인격 안에 같이 있어서 그것들이 삶속에서 교차해서 나타나는 것이에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는 그랬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되는 가운데 언뜻 언뜻 신의 위엄과 큰 능력을 나타냈지만 그것 못지않게 많은 시간 동안은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께서도 자기가 정말 하찮은 힘이 없는 한 인간일 뿐이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과 자비와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신 생애를 사셨던 것이죠.
그래서 주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시는 동안에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육체 속에서 새롭게 경험하심으로 그렇게 우리를 살 깊이 사랑하시며 우리를 주님 앞에 우리 죄를 용서받도록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시기에 적합한 분이 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의 능력과, 사람으로서의 사람의 연약함을 함께 가지셨던 것처럼 또한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에게 이 두 가지를 함께 경험하게 해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비록 예수님처럼 하나님이자 인간은 아닌 순수한 인간일 뿐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한편으로는 성령의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 은혜 안에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매우 강하게 만드셔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것이 믿음으로 나타날 때에는 충만한 믿음으로, 은혜로 나타날 때는 강한 은혜로, 확신으로 나타날 때는 강한 확신으로, 꿋꿋함으로 나타날 때는 흔들리지 않는 꿋꿋함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은 꿋꿋해요. 누가 뭐라고 그래도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어차피 거기 있을 때에 소망이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흔들리지 않아요. 고난이 와도 많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어차피 거기서 주님을 섬길 때에 기대했던 것이 세상의 영광과 번영이 아니었기 때문에 꿋꿋이 서있을 수 있는 것이에요. 그것은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보여주셨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함께 하심으로 드러내 보여주셨던 그의 영광과 그리고 그의 놀라운 은혜,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이 한 가지 속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충만한 믿음, 강한 은혜에 있는 사람일수록 순간순간 하나님이 그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절실하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죠. 산이 높아야지만 골도 깊지 산이 그저 펑퍼짐한 언덕이면 절대로 깊은 골짜기가 나타나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이렇게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고 높은 특성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에게는 하나님이 또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가 하는 것도 절실하게 느끼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이죠.
오늘 사도 바울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바로 그런 것이었어요. 이렇게 이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갈 때에 거기서 환난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하는데 그것을 그대로 감당해야 하는 이러한 힘없는 인간 그리고 그대로 감당할 수밖에 없는 아주 연약한 인간의 이 모습을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절실하게 깨닫게 함으로써,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커다란 시련 앞에서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약해질 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기 말아야 해요. 그런데 인간이 약해지는 것이 두 종류가 있어요. 은혜 밖에서 약해지는 것이 있고 은혜 안에서 약해지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은혜 밖에서 약해지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들고, 의심하게 만들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수를 쓰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믿음을 파괴해요. 그러나 은혜 안에서 약해지는 것은 절대로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않아요. 오히려 은혜 안에서 약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되고 은혜의 소중한 가치를 절실하게 느끼게 해주고 심지어는 이제까지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해주시는 것이죠.
여러분 언제 우리의 기도가 뜨거워지는지 아십니까? 어떤 사람은 ‘문제가 있을 때에 뜨거워집니다.’ 안 그래요. 사람이 어차피 식었는데 문제가 생긴다고 해서 기도가 뜨거워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간절하고 뜨거워질 때에는 우리가 자신만만할 때에는 우리의 기도가 간절해지지 않아요. 오히려 은혜 안에서 약할 때 그때에 우리의 기도는 아주 뜨거워지게 됩니다. 은혜 안에서 약할 때 우리의 기도는 간절해져요. 그래서 오히려 약해질 때 강해지는 것이 우리에게는 아주 많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시시때때로 환난과 시련에 직면하게 하셔서 은혜 안에서 약해지는 비결을 터득하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야지만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죠.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는 남에게는 없는 것이 많아요.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는 남에게 없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는 땅을 파듯이 파면 계속 나와요. 무슨 뜻인지 아세요? 이런 이야기에요. 은혜를 받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좋은 은사가 있어도 그냥 묻혀 있어요.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고나면 주님을 섬기려고 해요. 그러다가 보면 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은사라고 하는 것은 최선을 다할 때에 이것들이 발휘가 되는 것이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최선을 다해서 발휘가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봅시다. 천천히 걸어서 수십 명이 걸어간다면 누가 오래 빨리 달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선착순을 시키면 이제 누가 제일 빠른 사람인지를 파악하게 되는 것이죠. 은혜를 받기 전까지는 (그런데 이 은사는 돈 벌고, 밥 먹고, 오래 물속에 들어가서 숨 안 쉬고 그러는 은사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영적인 은사잖아요!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살아가기 위한 은사잖아요! 그러면 주님을 위해서 열렬하게 살아봐야지만 무슨 은사가 그 사람 속에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에요. 은혜 받기 전에 어느 놈이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삽니까?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 묻혀있던 은사들이 계속 발견이 되요. 그러니까 남이 안 가진 것을 가진 것이죠.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하나님이 많은 것들을 그에게 원래 있는 것들을 캐내는 방식이 아니라 밖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것이죠. 생각해보십시오. 요셉이 주님을 잘 믿었더니 국무총리로까지 높여주셨잖아요. 다니엘이 하나님을 잘 경외했더니 그를 지극히 높여서 바벨론의 임금아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잖아요. 이렇게 하나님이 여러모로 높이시잖아요. 그렇게 가진 것들이 많을수록 주님을 덜 의지할 그런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히려 당신이 은혜를 많이 주신 사람일수록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고 믿음의 비밀을 소유한 사람일수록 남이 알지 못하는 시련과 환란, 그것은 환경적이고 외적인 것일 수도 있고 내적인 시련과 고통일 수도 있어요.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을 통해서 자기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에요.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두 가지를 함께 지닌 채 산 사람이었습니다. 신약에서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했고,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고, 누구보다도 능력이 있었고,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큰 능력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이 사람만큼 벼랑 끝에 많이 세워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도 바울이 자신의 글 속에서 고백을 하였습니다. 뭐라고 고백을 했습니까?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하심이라.’ 사도가 경험했던 하나님의 예수를 부활시키시는 위대한 능력은 복음의 혁혁한 승리 속에서 경험한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경험을 한 것이에요. 오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이렇게 일평생 그가 당해온 고난과 시련의 길이었는데 이 고난과 시련의 길을 걸어가던 이 사람에게 또 무슨 일을 만날지 모르는 큰 시련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면 이제는 한번 피해볼만한데 놀랍게도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자기도 그 길을 가고 싶어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나는 예루살렘으로 가는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럼 무엇이 도대체 이 사람이 결국은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만들었을까? 그것을 오늘 사도가 말하기를 ‘심령의 매임을 받아’라고 말했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사도가 이것을 쓸 때에 머릿속에 있었던 것은 전쟁포로나 혹은 노예들의 모습이었어요. 즉 포로는 한 때는 전쟁터에서 싸우던 군인이었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칼과 무기를 다 빼앗고 그리고 손을 꽁꽁 묶어요. 움직일 수 없게 묶고, 목에도 줄을 매고, 그 목에 맨 줄을 앞에 사람의 목에 매고, 목에 매고, 목에 매고 해서 끌고 가는 것이에요. 긴 줄에 이끌려서 도망을 가서 잡아채면 목가지가 부러지게끔 그렇게 줄에 매여서 끌려가고 그 줄에서 제대로 이끌려가지 않으면 심한 채찍질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순순히 그 줄에 이끌려가는 것이죠. 노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예살이가 싫어도 가족들과 헤어져서 팔려가도 줄에 묶여서 그래서 채찍의 감시를 받으며 끌려가는 것이죠.
여기서 이야기하는 ‘매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 주냐 하면 강제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나는 안하고 싶은데 그런데 강제로 거기에 매여서 달리는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에 끌려가고 있는 모습을 사도 바울이 그려내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도대체 누가 사도 바울보고 강제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했습니까? 환란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성령이 증거 했지 안 올라가면 죽여 버리겠다고 성령이 협박한 적이 없어요. 그는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고백을 했지만 예수님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사울을 만나셔서 ‘네가 이러 이러한 사람이 될 것이다.’ 라고만 말씀하셨지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가 너를 죽여 버리겠다고 예수님이 그렇게 협박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협박을 받고 있는 사람보다도 더 심하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 강제력이 바로 은혜의 힘이었다는 말이죠. 은혜의 힘이었어요. 은혜의 힘…….
자 생각해봅시다. 은혜는 그 자체가 이미 소명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에요. 소명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보십시다. 여러분이 아주 비참한 지경이 되었어요. 모두 망하고 가족도 다 잃고 몸에는 아주 큰 질병이 걸려서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해서 결국 길거리에서 동사당할 위험에 있었는데 어떤 한 사람이 여러분을 아주 극진히 대우해서 간호해주고, 질병을 고쳐주고, 여러분들을 직업을 갖게 만들고, 가정을 이루게 만들고, 모든 것을 베풀어서 은택을 주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렇게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사람이 무엇을 하라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그 사람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누군가로부터 아주 고마운 일을 당해도 그 사람에 대한 의무감이 생겨나는데 하물며 그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고 은혜로 불러주셨을 때에 하나님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셔도 모든 인간들, 모든 여러분들은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무엇이에요?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이제 내가 산 것은 주님의 은혜다. 주님의 은혜에 빚진 사람으로 내가 여기 살아있습니다.’ 라는 고백이에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은혜의 강한 매임이에요. 주님의 은혜에 매임, 그래서 주님의 은혜에 매여서 어떤 사람은 선교사가 되게 하고, 주님의 은혜에 매여서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가 되게 하고, 어떤 성도들은 주님의 은혜에 매여서 교회에서 성도를 위해 봉사하게 하고,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에 매여서 물질로, 주님의 은혜에 매여서 재능으로, 주님의 은혜에 매여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육체의 힘으로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에요. 이 매임이 있을 때 주님을 섬기는 이 일은 너무나 기쁜 일이고 혹시 힘겨운 일이 일어나게 되면 마음은 물같이 녹고 주님을 확 붙들게 되는 것이죠. 주님을 확 붙들게 되요. 그것이 바로 은혜에 매임이에요. 아무것도 주님이 요구하시지 않고 아무것도 주님이 위협과 협박으로 우리에게 강제하신 적이 없는 데…….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감사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주님의 은혜의 줄에 매여서 그 일을 하고 그런 사람이 되고 그 길을 걸어가는 인간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은혜로 붙들어 매시는 것이에요. 이 교회의 위대한 역사는 그냥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엮어져온 것이 아니라 이런 은혜에 강하게 매인 사람들에 의해서 사람들은 바라만 보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고난을 치르면서 그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이에요. 은혜에 매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는 일이 은혜에 붙잡히지 않은 사람들 눈에게는 보이지 않아요. 은혜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할 가치가 있는 그 일이 은혜에 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꼭 그렇게까지 하면서 그 일을 해야 되나?’ 하는 의심이 생기는 것이에요. 은혜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런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이 보이지만 은혜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서는 그것을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일처럼 보이는 것이에요.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에요.
잘 들으세요. 평안하다고 해서 신자로서의 이 삶이 쉬운 것 절대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무게가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쉽지 않아요. 절대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안에 은혜의 강한 매임이 있을 때에는 그 은혜의 힘에 이끌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에요. 분명하게 환란과 결박이 나를 기다린다고 성령이 말씀하셔요.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성에서 동일하게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그 매인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환란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해도 그 일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죠.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에요.
오늘 새벽에 중국에서 나오면서 되게 힘들었어요. 잠을 못 잤으니까 더 힘이 드는데, 오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마음속으로 참 눈물이 나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이렇게 할 일이 많은데 교회에는 어쩌면 그렇게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많을까? 이렇게 많은데…….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하나님을 위해 할 일이 많은데…….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끊임없이 일군들을 부르시는데 그런데 교회 안에는 그림같이 놀고 있는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고생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대부분 은혜에 매여서 주님을 위해서 하는 고생이 아니라 부패한 마음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죄악된 고민들이에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에 매이는 이 일이 너무 필요해요. 선교, 맨 정신으로는 절대 못합니다. 뭐가 씌워서 미친 사람처럼 되어야지만 (한마디로 맛이 좀 가야지만) 그 길을 가는 것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혀 매여서 그 길을 가는 것이에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오래 사는 것이 길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매여서 산 인생의 시간들만이 하나님 앞에 정말 살아있는 날들이에요. 주님의 은혜에 굳게 사로잡혀서 강하게 붙들려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들을 아주 소중하게 사용할 것입니다. 그 은혜에 매여서 그래서 그 은혜에 붙잡힌 사람들이 아니면 갈 수 없는 그 신앙의 길, 섬김의 길을 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환경과 고난이 힘든 것이 아니라 뭐가 부족한 것이에요? 그렇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한 것이에요.
(찬양)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매소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