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안에서 자라가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벧후 3:17-18)
우리들이 늘 보는 일입니다만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잘 믿는 것도 아니고 또 신앙생활을 한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해서 잘 안 믿는 것도 아닙니다. 또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도대체 잘 믿는다는 것은 뭐고 또 잘 못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것도 우리들이 생각해 봐야 될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잘 믿는다.’ 말할 때 그것은 다분히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에 외형적인 열심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이 가만히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 신앙 자체가 없는 사람들은 곤고한 자체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신앙자체가 없는 사람들은 자기가 신앙대로 살지 않는 것에 대한 고통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또 똑같은 죄와 허물이라 할지라도 신앙심이 깊었던 사람들(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그런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은 같은 죄나 허물을 경험해도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고통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죄에 대해서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가를 보면 그가 이전에 얼마나 깊이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갔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봐야 될 것은 그렇게 외형적인 열심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진정으로 고통하고 있는 영혼들을 가지고 있을 적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엊그제도 전화를 한통 받았는데 그분이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괴로운 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주위에서 자기를 너무 열심 있는 사람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아무도 자기 속에 있는 이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것을 인정해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말하자면 자기는 진실로 고통스러워서 고통스럽다고 이야기 하는데 사람들은 그것조차도 믿음이 너무 훌륭하기 때문에 느끼는 고통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죠! 그런데 자기는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이 원초적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고통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가 신앙이 좋다는 기준을 어디다 대놓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평가는 엄청나게 많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신앙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깊어진다라는 의미가 바로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얼마나 이 세상에서 나 좋은 대로 살기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어 하고, 무엇인가 많이 소유하는 것보다는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닮아서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이 내게 얼마나 진정한 소원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면 그가 정말 신앙이 깊어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말 진정한 의미의 신앙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그것을 잘 알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고 그 다음에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욕망, 변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자라가면서도 그렇게 믿으면서도 변화되지 않는 우리의 욕심, 끊임없는 물욕, 거룩해지기보다는 이 세상에서 또 무엇인가를 많이 소유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런 것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버릴 수 있는 이런 담대한 마음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전혀 자라지 않고 있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자라면 고민하는 내용들도 깊어져야 합니다. 신앙이 자라면 자라는 만큼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에 대해서 주님과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이러한 자신의 신앙의 상태나 믿음의 수준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또 자신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제 밤에도 오웬의 기도론을 읽으면서 몇 번씩 가슴깊이 동의가 되고 그리고 정말 ‘아 이렇게 이분이 기도에 대한 이런 생각들을 이미 벌써 우리들이 깨닫기 무려 250년 전에 아니 300년 가까운 세월 전에 이미 벌써 깨닫고 있었구나!’ 하는 것들을 보면서 정말 우리들이 얼마나 아직까지도 무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분에 의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기도할까를 가르쳐주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깨닫게 해주셔야만 우리는 우리의 시점에서 가장 정확한 기도를 우리들이 할 수 있고 또 그 기도를 우리들이 할 때에 성령이 오셔야지만 그 기도하는 우리 자신에게 강력한 힘과 은혜를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분의 이야기도 정확하게 깨닫지 못한 사람의 기도는 방언과 같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기도하지 않아야 될 것도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모든 영역에서 우리의 신앙의 깊이를 그대로 드러내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도 하여금 이런 신앙의 깊이를 더해가는 비결은 오직 두 가지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가장 뿌리가 되고 중요한 것이고 나머지는 이 두 가지의 결과로써 쫒아오는 것이거나 혹은 부수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오늘 이야기하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신앙이 깊어지는 가장 중요한 두 개의 기둥과 같습니다. 하나는 은혜입니다. 은혜가 먼저 나오는 것을 보십시오. 단지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늘도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죽었던 우리들은 불러가지 아니하시고 이 세상에서 살아 남아있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토해 내치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또 미적미적 하면서 결단하지도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방황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기회를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은혜만을 가지고는 우리들이 충분히 하나님 앞에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주관적인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은혜들……. 그런 객관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내안에 역사하게 하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견고하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번 우리에게 주어짐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꿈틀대고 역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그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어야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런 은혜를 불러들입니까? 우리 중에 누가 그런 감격 속에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그런 넘치는 감격……. 거기에는 십자가의 경험이 있고 주님의 성품에 대한 그런 놀라운 체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냉랭하던 사람들을 불같이 뜨겁게 만들고 꺼져가는 연기와 같이 그렇게 사위어가는 사랑에 불을 지릅니다. 그리고 얼음장같이 식어졌던 마음에 용광로와 같은 그러한 열정을 불어넣어서 주님을 위해서 예전에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들도 하게 하시고 그리고 예전에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자신의 한계와 죄의 벽을 뛰어넘고 정복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 은혜를 우리 안에 갖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생각할 때에는 그런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그런 은혜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 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물어보면 금방 알지만 은혜를 지금 받고 있는 사람들도 어떻게 해서 이런 은혜를 받게 되었는지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은혜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왜 어떻게 해서 은혜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기도한다고 말하지요? 누구는 기도하지 않습니까? 은혜가운데 살지 못하는 사람도 기도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에 은혜가운데 산다고 말하는데 그런데 은혜가운데 살지 못하는 사람들도 기도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무엇이 그러한 객관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객관에 머물지 않고 주관적으로 우리에게 적용시켜서 그래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마음이 들게 하고 그리고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정서를 느끼게 하십니다. 새로운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얻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경박하고 어리석은 그런 신앙의 아류를 좇는 것들을 버리고 정말 원래의 복음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그 은혜는 무엇을 통해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오는 통로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그 죽으심에 기초한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곳에는 객관적으로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가 많이 넘쳐도 그 사람의 것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 자신에게 영향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말할 때에 그것은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마음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들, 지금 은혜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 그들 자신은 설명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설명합니다. 그들이 받은 그 은혜는 값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런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통로를 타고 냉랭했던 가슴에 믿음이 들어왔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왔고 역사합니다. 물론 믿음이 사라지고 나면, 불순종이 창궐하고 나면 그런 은혜는 곧 사라져 버리고 우리는 매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낯설어 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함해서 이 기도로 마찬가지로 그런 하나님의 은혜 안에 믿음으로 거할 때에는 기도가 매우 친숙하고 아주 훌륭한데 기도는 이상하게 자연적으로 배우고 습득한 이 능력이 자연적인 방법으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제까지 잘 능력 있게 기도하던 사람이 오늘 기도에 대해서 처음 기도를 배울 때보다도 훨씬 더 낯설어지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믿음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지 않는 한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우리의 말, 우리의 마음, 하나하나 일거수일투족은 곧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로 연결이 되고 그것은 곧바로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살아나게 하는 일과 우리 속에 있는 은혜를 말리는 그 일에 모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창성하게 역사하면 죄는 죽을 것이고 죄가 역사하면 은혜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 가운데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이 밀려오고 십자가의 놀라운 감동이 여러분들에게 밀려와야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녹이고 하나님의 의롭고 공의로우심이 여러분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충성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충성되게 살고 싶어 하는 거룩한 소원이 여러분들 속에 일어나야 하고 그리고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경고하고 책망하시는 음성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은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삶이 여러분들에게 깊은 고통이 되고 아픔이 되고 자극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어떻게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매일 매일 매주 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예배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서 수시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와도 우리 속에 죄는 자랍니다. 그리고 부패한 우리의 본성은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거슬려 살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시인하지만 삶으로는 부인하고 싶어 하고 입술로는 십자가를 말하지만 그러나 자신의 삶으로는 그 십자가를 주님을 위해서 전혀 지지 않으려고 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고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이 은혜를 잃어버린 생활을 하는 동안에 그것들은 마치 비오는 날 대나무 죽순이 자라듯이 힘차고 빠르게 자란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빨리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창성하게 자라서 그래서 결국은 그 뿌리가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신앙 속에 패역함 들을 만들어내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를 통해서 그 모든 부패한 것들에 낫을 대시는 것 가지고는 불가능하고 말이죠. 이제는 생사를 걸고 곡괭이로 그 나무의 둥치를 뽑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병든 상태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데서 부터 고침을 받아서 정상정인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서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리고 얼마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하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가셔서 우리로 하여금 벌거벗고 가난한 모습으로 들판 앞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는 이러한 하나님 앞에 홀로 서있는 그런 단독자로 만드시는지 여러분들은 많은 분들이 그런 것들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받지 않는 것,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그 묵상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인가 주님을 위해서 살기를 원하는 소원을 불러일으키고 주님을 떠나서 정욕에 치우쳐서 잠시 살고 잠시 떠올랐던 불순하고 악한 모든 세력들을 치워 버려주는 일들을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 속에 역사하지 않고 있으면 다시 말해서 은혜가 여러분 안에서 자라고 있지 않으면 여러분 속에서는 불순종과 하나님을 향한 그런 허물들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은혜의 불을 꺼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에는 그렇게 태만하던 사람들이 그 은혜가 사라지고 마음속에 죄와 불순종의 씨앗이 내릴 때 그것을 보호하는 데에는 얼마나 열심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은혜 받았던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이 비참하게 유린되고 그리고 초토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의 영을 잃어버리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은혜의 영을 잃어버립니다.
이런 속에서 굳어져가는 우리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다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 것입니다. 산 것도 죽은 것이고 죽은 것도 때로는 산 것입니다. 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불(주님이 우리 안에 주신 은혜의 불씨) 이것들을 향한 태도는 하나님 자신을 향한 태도와 똑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 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불씨에 대한 그리움을 갖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죽은 자와 방불하게 죄 가운데 있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날들을 고통스럽게 여기고 하루하루 신앙생활 하는 날들을 한 없이 무겁게 느끼던 그런 신앙생활로 우리는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일서 3장 1절에서 요한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보라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여기까지 인도하여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라고……. 아니 이 회상이 언제나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은혜가 없는 것은 신앙생활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안의 신앙생활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의 생명의 기록부에 본다면 식물인간 상태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에 대해서 누차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안됩니다. 나는 주일날이나 수요일이나 어느 때이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였을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를 즉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속에 느끼지 못했으면서도 부족한 것이 없이 쾌활하게 돌아가는 성도들을 보면 마음이 슬퍼집니다. 왜? 만약에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감동시켰으면 주님의 그 은혜 때문에 우리들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릴 것이며 주님의 은혜가 사라졌으면 무엇이 주님의 그 은혜를 사라지게 했는지를 생각하면서 가슴아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을 만한 믿음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예배할 때 주님이 오셔서 역사해주셔서 장엄한 만남을 주실 때도 있고 안 만나 주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정말 정성껏 설교를 준비하고 성령 충만해서 올라간 예배인도자와 설교자가 있어도 그런 일들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회중들이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마음으로 나와도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경우도 있을 수도 있고 그리고 태만하게 나왔는데도 정말 있을 수도 없는 일인데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처럼 신묘막측합니다. 그렇지만 정말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말 은혜를 받을 만한 하나님의 백성들인가 하는 것은 은혜를 주실 때에도 나타나지만 은혜가 그들이 모인자리에 임하지 않을 때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오늘날 우리조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예배 중에서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을 못 만나고 예배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약속이 있고 하나님 앞에 드린 예배가 있는데 우린 왜 하나님을 못 만났을까하고 슬퍼하며 교회 한 구석에서 눈물 흘리는 성도들이 없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우리의 믿음을 저해하는 요인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굉장히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종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만치 정말 너무나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주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그렇게 식물인간과 같은 신앙생활을 계속 할 수 있으리만치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게 하는 그 방해들이 그렇게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보다 귀한 것은 없고 우리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대로 하나님을 찾지 않고 믿음대로 살지 않으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치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다른 것에는 아무 관계가 없고 하나님만이 나의 관심의 대상이고 주님을 바라보고 믿는 것만이 내가 은혜받기 위한 모든 숙제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를 잃어버린 상태로부터 다시 돌아오고 회복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런 은혜가 있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지, 사위어가고 있는지, 완전히 꺼지고 소낙비까지 퍼부어서 정상적인 방법 즉 부싯돌이나 성냥 같은 것으로는 다시 살릴 가능성이 없는 상태로까지 와있는지 우리는 우리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 없이도 나는 살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 나는 당신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시간에는 지식에 관해서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