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속에 사람이 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2-39)
우리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시험이 없을 것처럼 생각하고, 믿음만 좋으면,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모든 어려움이 그저 능력있는 기도 덕분에 모두 물러가 버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제적 삶은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시험을 받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많아도 시험을 받는다 이 얘기죠. 특별히 은혜를 많이 받고,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안 후에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시험을 당하게 되요. 그레서 오늘 이 히브리서에서 보면,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 너희가 빛을 받고 큰 싸움을 이긴 것을 기억하라.
여기서 빛을 받고, 빛을 받은 후에 큰 싸움에 이긴것을 기억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빛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이에요. 빛을 받았다는 것은 복음의 참된 도를 받고 영혼에 커다란 각성이 일어나는 것이예요. 각성이 일어나니까 예전에 몰랐더 하나님 알게 되고 예전에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되고, 예전에 몰랐던 나의 죄를 보게 되고 예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몰랐던 믿음의 길이 어딘가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 큰 빛을 받은 것이예요.
이것은 꼭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의 구워만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도 경험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전혀 믿지 않고 어둠 속에 살다가 일시적으로 찬란한 복음 진리의 빛을 받으면서, 단숨에 참된 신앙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이 빛을 받는 일은 한번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에요.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모든 아는 것이 안개속에 가리워진 것처럼 희미해요. 그리고 참된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지만, 정말 하나님 기뻐하는 인생을 사는 것인지 잘 모르고 살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말씀의 은혜를 주시면서 눈이 확 열리면서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빛이 들어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요즘 건물들은 누전의 위험이 많이 있어서 건물 공사를 했는데 몇시간씩 불이 나가요. 아무 것도 할 수 없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빛이 확 들어와요. 그때 우리 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예요. 이전에보았던 사물도 잠시 어두웠다 다시 보면 새것처럼 보이는데, 전혀 보지 못했다가 하나님 진리의 빛이 들어오면서, 하나님과 자신과, 자기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과, 이런 것들을 선명히 보고, 진리를 보게 될 때에 그 놀라운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죠. 경험해 본 사람만 알 수 있죠. 그렇죠?
저는 이미 오래 전에 구원 받았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제가 구원 받은 것은 명확하게 날짜까지 알 수는 없지만, 제가 보기에 제가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25-6년 전의 일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진리의 밝은 빛은 받은 것은 불과 한 12년 전쯤 일이에요. 그렇게 하나님 진리의 밝은 빛을 받고, 그 밝은 진리의 빛으로 말씀과 하나님과 나 자신과 교회를 보게 되었을 때, 다시는 보지 못했을 때의 그 옛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누가 나에게, 아니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니가 너의 그 밝은 진리의 빛을 보지 못했던 옛생활로 돌아가면, 수많은 행복이 기다리고 있고, 오랫동안 이 세상에 살 수 있고, 이 빛에서 계속 머물면 내가 내일 너를 데리고 가리라, 하신다 해도 나는 후자를 택하지 전자를 택하지는 않겠어요. 그게 하나님 말씀의 빛을 받은 사람들의 삶이에요. 그럼 이게 끝이냐?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오늘 하루도 살아가면서 나는 너무 무지하다. 신앙의 세계에 대해 무지하고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무지할 수 있을까 하는 처절한 슬픔을 느꼈어요. 오늘. 그리고 지금도 간절히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번 더 빛을 주셔서 내가 이 수준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진리의 깊은 세계를 보기 원하는 그 마음이 있어요. 그리고 그 마음은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동안에 계속 되어야 할 마음이예요.
그러면 오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그런 진리의 밝은 빛을 발견하면 우린 행복해 지느냐? 물론 행복해 진다고 말할 수도 있죠. 그러나 시련이 없고 평안한 삶을 살기 때문에 행복해진다고는 말할 수 없는거죠. 성경이 그걸 입증합니다. 아브라함이 어느 날 나타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음성을 들었어요.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 그런 감격적인 은총과 보호의 약속을 들을 후에 아브라함은 많은 시험을 겪었어요.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그렇게 너의 후손을 많게 해주실 것이다, 라는 약속은 그런 많은 시련을 겪은 후에 주셨어요. 은혜 후에 시험이 왔죠? 예수님이 광야에 나아가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혹독하게 당하는 장면도 언제였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하염없이 예수님 위에 부어지는 그 놀라운 은혜 뒤에 시험이 오는 거예요. 그렇죠?
여기 이 사람들도, 사도로부터 편지를 받고 있는 이 히브리 사람들도 그렇게 고난을 큰 싸움, 이때는 어때요 핍박이 많은 때였어요. 히브리서의 이 배경은 말이죠 로마에 의해 조직적인 박해가 부분적으로 가해지고, 이제 전체적인 핍박이 먹구름처럼 일어나고 있는 그 시점에서 쓰여진 서신이에요. 비참하죠. 여긴 아주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요. 뭐라 그랬냐하며 그 핍박을 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고난을 당하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다할 수 없는 아픔과 따돌림과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당하면서, 그렇게 시험을 많이 받은 거예요. 언제? 언제? 빛을 받은 후에. 그러면 우리 여기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죠. 왜 하나님은 꼭 은혜를 주신 후에 시험을 받게 하실까? 왜 하나님의 말씀의 큰 빛을 받은 후에 그 시험이 오게 하실까?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이유를 따지기 전에 논리적으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거에요. 참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자신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어차피 모르니까. 그런데 참된 말씀의 빛을 받으면, 이 길은 걸으면 안 되는 길이고, 이 길은 가도 된다는 기준이 분명해요. 그리고 이 길은 넓어보이고 좋아 보이지만, 한참 걸어가면 말로가 어떻다는 것을 이미 인식할 수 있어요. 파악할 수 있다구요. 이 길은 비록 핍박을 받는 것 같고 고난을 받는 것 같지만, 이 길은 결국 그 끝에서 생명과 영생과 하나님의 인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이거예요. 그걸 다 아는데, 어떻게 상황이 나보고 먼저 보여준 그럴 듯하지만 나중에는 파멸이 있는 그 길을 걸어가라 해서 내가 다 알면서 어떻게 걸어가느냐 이거예요. 저 앞에 절벽이 있는 걸 알면서 캄캄할 때는, 모르고 가서 빠질 수 있지만, 뻔히 아는 데 어떻게 가서 뻔히 그 절벽 끝으로 걸어가느냐 그거죠. 그러니까 밝은 빛이 없을 때는, 확신도 없고 신념도 없어요. 이리저리 흔들리니까 시험이랄 것이 없죠. 그 자체가 시험인 것이죠. 그리고 밝은 빛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거든요. 만약 무지하고 어두움 속에 있는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충동을 느낀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동물들이 일시적으로 생리적인 교미의 충동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야비한 종교적인 충동이라 이것이죠.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사랑일 수 없다는 것이죠. 그저 솟아나는 감정적인 충동이라 이것이죠. 그리고 거기서 한껏 발전한다 그래봐야 감상적인 사랑이지 진실로 인격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거죠.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한테 가서 막 안기고 싶고 한다면 그게 정상적인 사랑입니까? 욕정이지. 사랑은 사랑인데 그건 정욕이죠. 사랑이라는 것을 서로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아무 것도 해주는 것이 없어도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싶은 이해의 터 위에서 감정이 꽃필 때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관계이지. 그렇잖아요.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누군지를 모르고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고 충동적인 주님을 향한 사랑인 것 같은 그런 감정은 믿으면 안 된다 이겁니다. 그건 참사랑이 아니예요.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향한 깨달음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도 없다고 말해도 거의 맞는다 이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 없는데, 신앙의 지조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아무 사람이나 다 좋은데, 지조라는 것이 있겠어요? 어느 임금이라도 나 데려가 밥만 먹여주면 충성하겠다는데, 무슨 지조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내 사랑하는 임금, 그 임금 아래서 땅을 파먹으면서, 따돌림을 당해서 어느 유배지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그 임금을 섬길 수 밖에 없지, 다른 임금님을 섬기면서 호위호식하면서 제상의 자리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 결국 충성 아니예요. 그것이 나라 일을 하는 사람들의 임금을 향한 충성이라구.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사랑이 없는 곳에 무슨 놈의 신앙의 지조가 있겠으며, 사랑이 없는 곳에 무슨 힘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은혜 받은 사람이, 그 은혜 받은 후에 시험을 당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겁니다. 너무나 당연해요. 그리고 그것은 영광스러운 것이에요.
시험을 당할 때 여러분은 항상 이렇게 생각하세요. 아, 이제는 내가 하나님 앞에 쓸모있는, 의미있는 사람이 되었구나. 그래서 레오나드 레이븐힐 이라고 하는 저자는 말하기를 그런 애기를 했어요. 자기는 자기 이름이 지옥의 게시판에 기록되기를 원한대요. 하늘 나라의 생명책에만 기록되지 말고, 우리의 이름이 지옥에 기록되기를 사모하라 이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얼마나 신자가 은혜를 못 받았고 후지면, 마귀도 신경을 안 쓰겠느냐 이거예요. 마귀조차도 신경 쓸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겠느냐 이거예요. 마귀에게 시련을 당하고, 도전을 당하고, 막 참소를 당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것은, 그들에게 여러분이 의미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요.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시련과 도전이 오는 것이에요.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되겠어요. 모든 믿음의 사람이 이런 과정을 통과하는 거라는 거죠. 빛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제가 아까 12년 전에 하나님의 빛을 받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후에 삶은 남들 보기에는, 그저 교수생활하고, 그저 뭐 헐렁헐렁 헐랭이 같이 산 삶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쉼 없는 투쟁이었어요.
눈물 흘림을 며칠 더 당코 행할 길을 다가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실 때 영광 중에 나아가리
정말 그랬어요. 정말,,,,,,저는 한 순간도 앞으로는 저의 앞길에 평탄함이 있고, 정말 신선처럼 보내는 휴식의 때가 있을 거라도 생각하지 않아요. 주님이 오늘 불러 가시건 내일 불러 가시건 이 세상에서의 어떤 안일을 생각하면 계산이 안 된다 이거예요.
하나님 말씀의 깊은 빛이 없었더라면 훨씬 평탄한 삶을 살았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요. 시험이라는 것이 꼭 작은 교회에서 쬐그만 교인수 데리고 지지고 볶으면서 솥단지 냄비 단지 던지면서 싸우고 지지고 볶는 것만 고난이 아니예요. 먹을 것 끼니가 없어 굶는 것만이 고난이 아니예요. 하나님이 당신이 깊은 은혜를 주신 사람들이 시험을 당하는 이유가 얼마나 많은 지는 하나님이 아셔요. 그런 것들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예요. 그러면 그런 것들이 없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으냐......정말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어둠 가운데서 평안하게 살기보다는 빛 가운데서 불 같은 시련을 당하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합니다. 왜? 시련을 이기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삶이고, 그 자체가 목표를 가진 삶이예요. 반드시 그 뒤에는 상급이 있어요. 그리고 우리 위대한 모든 신앙의 선배들이 그 길을 걸어갔어요. 주님의 크신 사랑을 맛보고 주님의 밝은 빛을 받은 모든 우리의 선배들이 혹독한 시련을 수시로 당하면서, 눈물 흘리며 인생의 골짜기를 지났어요.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거예요.
그렇다면 누가 참된 진리의 빛,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기를 사모하겠는가? 물론 육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지 몰라요.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그 질문은 가치가 없는 질문이예요.
우선 첫째는, 그런 하나님의 깊은 말씀의 빛, 진리의 빛을 받고 사는 삶과, 그런 빛이 없이 사는 삶은 단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안 받고 정도 와는 비교될 수 없는 삶이에요. 여러분 이른 아침에, 요즘 제가 집회를 다닐 때 차를 너무 가지고 다니기 힘들어서 전철을 타고 다니는데, 퇴근 시간쯤 되면 막 몸을 부대끼면서......출근 시간에는 심하면 막 사람이 튕겨져 나와요. 그래서 푸시맨이 있다면서. 막 밀어주는. 그리고 또 돈 달라는 사람은 왜 그렇게 많은지. 그렇게 앉지도 못하고, 온통 지쳐 이른 새벽에 출근을 하고 밤 늦게 퇴근을 하는데, 그래봤자, 그 전철 안에는 한 달에 백 만원도 못 받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이거예요. 사는 거 고달파요. 그래도 그 사람들이 실컷 주님이 주는밥 먹고 오뉴월 따뜻한 햇볕 받으면서 양지바른 처마 밑에 배깔고 드러누운 개새끼 부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그거는 비교될 수 있는 삶의 질이 아니에요. 그런 비교를 인간은 안 한다구. 왜? 그건 삶의 질 자체가 비교될 수 있는 차원의 질이 아니니까. 완전히 개의 삶과 인간의 삶은 질적으로 다른 삶이에요. 그러니 하나님 참된 복음의 빛이 우리 삶에 확 들어와서 우리들이 찾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고 주님의 사랑이 무엇이고, 쓰레기와 같은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큰 사랑이 무엇인가 알게될 때, 그때 그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걸 좀 알고 어려움을 가끔 당할까 모르고 어려움을 안 당하면 어떤 게 더 나을까? 이런 비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종류와 차원이 다른 삶이기 때문에 비교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아까 그런 시련이 있는데, 누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사모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이 논박된다 이거죠.
그리고 두 번째, 어쩐 점에서 그런 질문이 말이 안 되냐하면 이 세상에서 거듭나지 못한 인간들의 경우, 슬픔이 있는 곳에는 기쁨이 없어요. 그렇잖아요. 무슨 뜻이냐 하면, 막 길거리 가다가 떨어진 만원 짜리 한 장 주었다고 좋아하다가도 누가 딱 와서 야 오늘 니네 집에 굉장히 재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 하고 쾅하고 때리면 그 기쁨이 다 날라가고, 반대로 아주 기분 나쁜 일이 생겼어. 그런데 잠시 후 더 기쁜 일이 생긴거야. 그러면 그 슬픔이 다 날라가 버려. 그런데 영적 삶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이거예요. 기쁨과 슬픔이 한 인격안에 그대로 공존한다는 것이죠. 어떤 면에서. 신령한 슬픔과 신령한 기쁨 만이 온전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떡해요. 하나님 진리의 참 빛을 받고, 그리고 우리를 시기하는 단 한마디에 강력한 시험을 받고 눈물 흘리고 죽을 것처럼 몸부림 칠 때 슬픔도 있는데, 시험으로 그걸 이기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 시련은 여전히 있는데, 그 시련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주시는 거에요.
여러분 환란 속에서 기뻐해본 적 있어요? 환란 속에서 환란을 능가하는 큰 기쁨. 내가 이 상황 속에서 기뻐할 수가 있는가? 이 상황 속에서 내가 기쁨이 솟아오르는가 하는 경이로운 경험한 적 있어요? 그런게 있다 이겁니다. 그건 바로 환란 속에서 환란을 능가하는 기쁨을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빛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이 계속 어두움 속에서 평안한 사람들 보다는, 시련에도 불구하고 빛 가운데서 살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그런 시험, 빛가운데서 사는 동안, 혹은 은혜 후에 그런 시험이 있다고 할 때 그런 시험을 이기는 비결이 무엇이냐? 그건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하면,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라” 옛날에도 그랬지 않느냐 말씀하는 거죠. 그러면 말이죠 옛날에도 그랬는지 지금 또다시 큰 핍박의 시련, 고난의 시련, 마귀의 시련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당한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그만큼 대단한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핍박하고, 마귀가 너희를 그렇게 시험하는 것이다. 왜? 너희들이 그렇게 큰 시험을 당하는 것은 바로 너희가 하나님의 큰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예요. 시험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세상은 늘 하나님의 찬란한 은혜의 빛을 받은 사람들, 자기에게 수시로 다가오는 이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그 시련보다 더 큰 은혜를 자기에게 주셨고, 당하는 고난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주셨고, 따라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과 시련이 크면 클수록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큰지를 짐작하게 되는 것이에요. 왜? 주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사랑이, 우리가 지금 두려워 떨고 있는 그 시련과 고난보다는 훨씬 크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건 말이죠. 신자가 그런 고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리쳐라 그러지 않고, 참아라 인내하라......그걸 보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강력하게 떠오르는 생각은 왜 하나님께서는 이 신자들이 그렇게 말씀의 큰 빛을 입을 후에 행복한 세계로 이끌지 않으시고, 그런 시험에 직면케 하셔서, 그것도 또 기다려라 기도만 해라, 내가 싹쓸어버려 주겠다 하시지 않고,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참아라, 니가 참아라......도대체 신앙에 있어 그 놀라운 기적적인 특성이라든지, 그런 건 도대체 어디로 갔느냐 이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접근하면 안 되요.
하나님의 진리의 밝은 빛을 받았다고 하는 것과, 우리가 받은 그 진리의 밝기처럼 그렇게 순전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에요. 별개의 문제란 말이에요.
다시 이야기 할 테니 잘 들어보세요. 우리가 그렇게 찬란한 진리의 빛을 받았다고 하는 것과, 우리 자신이 그렇게 찬란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예요. 짐승과 같은 인간에게도 찬란한 빛이 비췰 수 있어요. 찬란한 빛을 받았기 때문에 그 빛으로 우리 자신을 확 보게 되었어도, 우린 아직 빛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에요.
예로 들자면 이런 거 아니예요? 어느 날 정신없이 이 세상에서 자기가 젤 잘 난 줄 알고 멋대로 막 사는 거예요. 그 누가 충고해도 마이동풍이예요. 웃기네.....너나 잘 살아라. 나는 내 갈길로 간다.....그러던 그 인간이 어느날 주님을 만나는 겁니다. 복음 진리의 참된 빛이 비추니까 이제껏 누구 앞에서도 자신을 낮추지 않던 그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정말 끔찍한 죄인임을 알게 된 것이에요.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 줄 알게 된 거예요. 그걸 깊이 깨닫고 나니까 하나님 앞에 한없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잖아요. 그것봐요. 찬란한 빛이 비췄어요. 그런데 아직 형편없이 짐승같이 더러운 인간일 뿐이에요. 대신 뭐가 달라요. 이젠 알게 되었으니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거예요. 바른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찬란한 빛은 비추었지만, 그 빛 아래서 계속 자기를 부인하며 살아감으로써 자기 자신도 그 언젠가는 찬란한 빛과 같은 사람이 될 거야. 그러나 아직은 아니야. 그렇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 속에 붙어 있는 그 찌끼들을 그 시련을 통해서 깨끗이 닦아내는 것이에요. 그러니 참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건 정말 아이러니예요. 이 큰 핍박의 바람이 불어가지고 수많은 사람이 핍박 앞에 변절하잖아요, 변절. 죽음이 두려우니까 대다수의 사람이 변절하고 도망가. 그런데 소수의 사람들이 그 진리를 붙들고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며 고난을 받으며 그 시련 속에서 결국은 다 죽어버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거의 죽었는데, 그 시대 교회 전체가 정결한 신앙으로 돌아가요. 그게 역사적 아이러니야. 그러니까 진리를 따라 산 사람들은 죽은 후에 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어떻게? 지금도 우리 보면 일제시대때, 혹은 공산치하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분들에 관해 읽으면, 그 사람은 지금 죽고 없고, 우리는 그들을 만난 적도 없는데 그 사람처럼 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요. 바로 그것이에요. 교회만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정결하고 깨끗하게 하시는 거예요. 시험을 통해서.....빛 가운데 살고 있는 성도들, 그 시험을 통해서 빛이 찬란한 것처럼 자신들도 그 빛을 좇아 찬란한 사람들로 하나님이 바꾸시는 거예요.
불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고 남겠네
하나님은 한번 빛을 비춰주셨으니까 이런 시험을 이제 네가 당해라 그렇게 내버려 두시질 않아요. 빛이 있는 곳에 누구도 함께 계셔? 진리의 주님도 함께 계셔요. 그래서 시험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막 부어주시는 거예요.
신앙을 지키며 주님이 자신의 영혼에 비춰주신 이 진리의 빛을 따라서 시험을 당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결코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셔요. 아주 가까이 계셔서 그들을 반드시 이기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은혜 뒤에 시험이나 시련이 오는 것을 슬퍼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베드로 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 기뻐하고 기뻐하라. 그리고 그 시험을 당하면서 오히려 주님의 향한 우리의 사랑을 견결하게 하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빛이 왔죠?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받았죠? 시험을 당할 때 시험의 무게를 먼저 생각하지 말고 그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비춰주신 진리의 빛을 먼저 생각하세요. 내가 만약에 그 참된 말씀의 빛이 없었다면 지금 온몸에 무서운 화살을 맞으면서도 어디서 그 화살이 날라오는 지도 몰랐을 텐데 그런 큰 시험을 당하면서 무지 속에서 여전히 살았을 텐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소망을 갖게 하셨고, 이제는 나를 더 정결하게 하시려고,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지만, 사랑하는 나를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더 온전하게 하시려고 이런 시험을 주시는구나 그걸 생각하면서 인내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더 새롭게 하시는 거예요. 온전히 더 새롭게. 그래서 이기게 만드시고, 하나님의 큰 축복 속에서 살도록 주님이 인돼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겠죠. 목사님. 그 진리의 빛만 잔뜩 받고 시험은 없는 그런 인생은 없을까요? 없어요. 그게 정답이에요. 없는데 어떻하냐 이거예요. 없어요.
여러분! 시험을 당할 때마다 주님이 내게 주신 참된 진리의 빛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시험을 당하게 하신 것은 이 시험 속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더 큰 하나님의 진리의 빛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서예요.
이런 시험을 당할 때, 마귀가 사용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하는 느낌을 받게 만드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제 모든 건 우리 손으로 해결해야 된다, 그런 식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거예요. 그건 예수님의 시험에서도 나타났어요. 마귀가 예수님 보고 40일을 금식하고 주리셨을 때에 이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 무슨 뜻이예요. 이제 하나님도 너 안 돌본다. 그냥 니 먹을 거 니가 해결해야 한다, 마귀는 예수님께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단호히 거부했죠. 아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지금 내가 이렇게 주리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이 말씀으로 명령하시기만 하면 그 명령에 의해 내가 살고 또 떡도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고, 모든 걸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시험 속에서 그 유혹을, 심리적으로는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는, 봐라 은총이 살라졌지 않으냐, 두 번째로는 그러니까 니 문제는 니 스스로 해결을 해라, 이걸 유혹하는 거예요. 이 유혹에 순종하면, 반드시 악을 행하게 되요.
그래서 우리는 시험에 닥치게 되었을 때, 주여, 이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를 써요.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그 하나님이 나를 버리실 수 없는 분이신지를 깊이 확인하고 그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면 반드시 그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같이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당한 시험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주님을 잃어버릴 때가 많았고, 빛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 그 은혜의 찬송을 잃어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주님 용서해 주십시요. 하나님 그 어느 때보다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를 정결케 하여 주시옵소서. 새롭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