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설교시리즈Ⅱ
1. 전도설교시리즈Ⅱ 1-어리석은 부자(눅12:13-21) 1996.11.10 주일오전 2
2. 은혜받은 자의 마땅한 소위(왕하7:9) 1997.2.23 주일오전 8
3. 침묵할 수 없는 소식(왕하 7:9下) 1997.3.2 주일오전 18
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7:13-14) 1997.6.8 주일오전 26
5. 그가 찔림은(사53:4-5) 1997.7.20 주일오전 35
6. 이스라엘의 잃은 양을 찾아서(마10:6) 44
7-1) 구원받은 강도(눅23:39-40)2000.8.15 온가족 수련회 새벽 52
7-2) 대속하신 그리스도 2000.8.15 60
8. 영접하는 자에게 구원을(요1:12-3) 2000.8.16 온가족 수련회 새벽 64
1. 전도설교시리즈Ⅱ 1-어리석은 부자(눅12:13-21) 1996.11.10 주일오전
무리 중에 어떤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遺業)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貪心)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譬喩)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所出)이 풍성하매 심중(心中)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穀食)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豫備)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富饒)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3-21)
커다란 빌딩을 유엔 본부에 기증을 했던 미국의 대 재벌인 록펠로우는 해마다 기자들과 회견을 했습니다. 그때마다 기자들은 당대 최고의 재벌이었던 록펠로우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부에 만족하십니까?” 그는 해마다 “아니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기자들은 질문했습니다. “내년에는 더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그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벌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질문했습니다.
엊그제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열 몇 살 짜리 딸아이의 생일 선물에 1억 불 짜리 그 초호화 여객기를 선물했다는 기사입니다. 가만히 계산해 보니 족히 800이나 되었습니다. 도대체 재산이 얼마나 되기에 우리는 생선이나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려야 억 소리가 나는데 800번이나 해야 할 억을 딸아이의 생일 선물에 하나씩 사주면 누가 당할 장사가 있겠는가? 재산이 나온 것을 한참 곱하기 800을 해보니 그는 12조원을 가지고 있는 부르나이 국왕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선물은 중년 부부 재산이 1억 5천 정도 되는 사람의 재산에 비례하면 30만원 짜리 정도 되는 선물을 한 셈이 됩니다. 보통 그저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1억불 짜리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기업체에서는 1억불을 수출하면 탑이나, 상장을 주는 등 야단이지만 그거 일년 치 벌어들여서 딸의 품에 안겨주는 이런 부자들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대접받는 바가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은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재물에 집착하면서 살아 갈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들 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그때에도 이러한 일들이 있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형제 사이에 재산 분쟁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억울하게 빼앗긴 유산을 자기에게 나누어 줄 것을 형에게 요구해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하는 한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분명한 교훈을 우리에게 그림과 같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탐심을 물리칠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 무엇을 보고 살아야 하는 지를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 소유 외에 또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오늘 주님께서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이 사건을 비유로 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는 무엇인가 깊고 그리고 심오한 복음과 인생과 내세에 대한 진리를 말씀하시려고 할 때에는 언제나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다루고자 하시는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고 인생사는 데 있어서 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가르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유는 바로 어리석은 부자라는 비유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있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부자가 아마 농사짓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매우 풍성한 풍년이 들었습니다. 밭에 논에 많은 곡식들을 거두어들이게 되었고 그리고 그 곡식과 그 곡식을 팔아서 나한 많은 물건들이 어떻게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온 집안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가득하게 되었을 그때에 행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이 사람은 그렇게 많은 재산을 가지게 되었을 때에 그는 행복한 것이 아니라 깊은 고민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곡식과 재산을 어디에 둘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창고가 있었지만 금년에 거두어들인 이 모든 수확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규모가 되지 못해 그는 깊이 고민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많은 소유는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과 인생에 대하여 분명한 관계를 가지고 살지 않으면 많은 소유가 우리를 번뇌케 합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오히려 가난하게 살았을 때에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만은 물질이 우리 앞에 있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흐리어지고 전망이 불투명해지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적고 가난하고 어려움이 많았을 때에는 신앙생활을 할 때에 분명했습니다. 여러 가지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목표가 분명하고 생각이 뚜렷했습니다. 주관이 뚜렷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무리 붙들고 매달려도 세상에서는 잃어버릴 것이 없으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믿게 되었습니다. 지위가 높아졌고, 소유도 많아졌고, 많은 기회를 얻게 되었고, 주위에 자기를 따르고 존경하고 혹은 좋아하고 자기와 관계를 맺은 많은 이해관계에 얽혀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종종 신앙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갖지 아니하고 인생에 대한 분명한 가치관을 갖지 아니하면 쉽게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단순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불투명한 생각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유하게 되었지만 이 사람은 번뇌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될 것인가 그는 아마 지혜로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 누구에게 맡길까? 이 일을 돌보게 할까? 창고에 쌓아둘까? 남는 물건은 어떻게 할까? 돈으로 바꿀 것인가? 돈을 어디에 맡길 것인가? 온갖 생각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결론을 내리기를 창고를 크게 짓고 거기에 그 모든 것을 쌓아 두리라고 결정지었습니다.
이 부자는 모든 것들을 왜 쌓아두겠다고 결심을 하면서 자기의 고민을 끝냈습니다. 여러분 그가 많은 물질을 쌓아두려고 했던 것은 그 물질을 통해서 자기의 인생이 안전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열심히 돈을 모으고, 물질을 소유하기 위해서 그렇게 혈안이 되었는가하면, 그것은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인생이 얼마나 불안한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인생이 불안한가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여금 이런 인생의 진실을 알게 하여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생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 피해야할 피난처가 어디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어리석은 부자가 물질을 쌓아 두리라 생각했습니다. 이제껏 그의 인생을 지켜 주는 것은 물질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물질이 그의 삶을 지켜주었고, 물질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인격과는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종처럼 굽실거렸고, 무엇보다도 그는 물질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이전에 자신의 삶 의존해 하면서 그 물질이 자기의 삶을 움직이고 도와주었고 자기의 삶의 진정한 피난처이며 무기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그 물질을 많이 쌓아두면 쌓아둘수록 자기의 인생이 더욱더 안전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이 쌓아두고 그리고 그 물질로 말미암아 자신의 인생을 안전을 도모해 보리라고 결심하는 장면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안전을 누가 보존해 줍니까? 진정한 인생의 보험을 어디에 들고 계십니까? 제가 송추에서 우체국장을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것 때문에 직장을 그만 두게 된 계기입니다. 그때 우체국에 보험이 생겨 얼마나 보험을 했는지 보고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였고, 영업직원도 아니었는데 어디 가서 보험을 해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잘 하고 있었습니다. 동네에 나가서 동네 유지들과 같이 차도 마시면서 복음 대신 보험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자전거 수리점을 하고 있는 한 남자가 마침 우체국에 방문했고, 한 여직원이 열심히 보험의 도리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가장 좋은 보험, 이율이 가장 높은 보험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는 질문했고, 여직원이 생명보험이라고 답을 했습니다. 보험에 대해 설명을 들은 그 남자는 그것을 언제 타게 되는 지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여직원은 사망 시에 돈을 이렇게 많이 탈 수 있게 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 남자는 내가 살아있을 때 어떻게 덕을 볼까해서 자전거포를 하면서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이지 나 죽고 나면 그 돈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무리 이율이 높아도 기분이 나빠서 싫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보험은 어디에 들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모아온 재산에나 지위나 우리가 모아온 재물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성경은 어리석은 부자가 아니라 어리석은 너희들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인생의 진정한 보호자는 하나님 밖에 없고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의 진정한 보호자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세상에 있는 물건이나 재물들이 우리에게 피난처가 되게 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어려울 때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들은 인생에 있어서 근원적인 일들이 아닙니다. 인생이 있어서 봉착하는 근원적인 문제는 돈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 사실을 오늘 성경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부자는 잔뜩 재물을 쌓아둔 후 창고를 크게 짓자하고 창고에 여러 해 쓸 물건을 넣어두겠다고 했습니다. 한 해를 농사 지어 여러 해 쓸 물건이 되었고, 그 여러 해 쓰기 전에 다 쓰기 전에 또 추수를 하게 될 것이며 더 많은 곡식들이 쌓이고, 더 많은 창고를 지어야 하는데 어리석은 부자의 인생관으로 본다면 자신의 인생은 점점 더 안전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하나만 알았지 둘은 알지 못했습니다.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어버린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리석게도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말했던 것입니다. 내 영혼아 이제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두자,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했습니다. 영혼은 먹고 입고 쓰는 것으로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만족을 누리고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처럼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빈 공간을 영혼 속에 두셨습니다. 세상의 즐거움과 먹고 입고 마시고 쓰는 그 일은 잠시 우리로 하여금 영혼 속에서 일어 나는 그 커다란 고통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번뇌를 잠시 잊게 해 줄 수는 있습니다. 마치 그렇게 고통하는 환자에게 몰핀 한 방울이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수술을 경험하신 분은 누구나 알 듯이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날 때 그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처참합니다.
잠시는 인생의 허무를 잊어보고, 잠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그 갈증을 잊을 수는 있을 지 모르지만 그 이후에는 슬픔이 찾아오며, 즐거움이 사라진 후에는 고통이 찾아오며, 유열( ? )이 사라지고 나면 허무함이 가슴에 밀려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이 세상에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만들었을 때에 이미 하나님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칭하여 자주 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그 양은 힘도 없고 자기 스스로 길을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눈이 밝지 못하고, 큰물이 일어나면 헤엄을 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맹수들이 달려들 때에 소리를 지르거나 날아가거나 도망가거나 어떻게 피할 수도 없는 그런 피조물이며,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받으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사람은 하나님 없이도 나 혼자 잘 살수 있다라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 의존의 감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의 도와주심이 아니면 어떻게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좋아하십니다.
오늘 이 어리석은 부자는 전혀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많은 물건을 창고에 가득히 쌓아 두었으니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며 인생의 목표 자체가 즐거움에 있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어리석게도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하나님께서 주장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부자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든 인생들에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그 은혜와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빈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인생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께 다가가고 싶어하고 자기의 죄를 용서받고 싶어하는 갈증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품에서 살아가기를 싫어하고 그 하나님과 관계를 갖으면서 살아가기를 싫어하는 불신앙의 마음 때문에 끊임없이 도망가려고 하는 이 두 마음이 우리 속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경우에는 두 마음 중에서 두 번째 마음이 첫 번째 마음을 이겨 버렸기 때문에 재물로 자신의 인생에 안전성을 도모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에게 그가 잊고 살아왔던 한 가지를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내 영혼아 내가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두었으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있지만 네 영혼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 보라. 네 영혼은 물질로 만족될 수 없는 영혼이다. 먹어도 먹어도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정말 목이 마르면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이나 시원한 콜라를 마십니다. 그러나 갈증이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정말 목마를 때는 설탕이나 타지 않은 시원하고 깨끗한 물만이 갈증을 해결해주고 갈증에 도움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목이 마르기 때문에 먹는 것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결혼하기 오래 전 제 동생이 막 들어오면서 너무 너무 덥다고 펄펄 뛰기에 동생을 시켜서 돈을 주면서 아이스크림을 심부름 시켰는데 바가지를 들고 가서 가득 사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셋이 앉아서 먹고 쌓아놓은 아이스크림의 나무 막대기만 많이 쌓여갔지만 갈증은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설사하고 배만 아팠을 뿐 갈증은 끝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이냐 ?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 세상에 있어서 물질로도 그 어떤 모든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나의 영혼의 그 목마른 갈증을 시원한 생수로 만족함을 얻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시원한 생수는 우리의 갈한 목을 영원히 적셔질 수 있는 생수라고 생각된 사람들은 언제든지 어리석게도 가서 꿀물을 찾거나 혹은 단물을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시원한 생수를 찾고 그리워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괴로우나 슬프나 어려움이 있더라도 꾸준히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 어리석은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밤에 내가 네 영혼을 취하리니 네 재물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마셔도 마셔도 그 채워지지 않는 그 깊은 목마름과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마셔도 채워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것밖에 마실 수 없는 그런 인생들을 향해서 주님 말씀하십니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취하리니” 우리의 영혼이 누구의 소유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앙이 없을 때 몸은 아무 데나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고, 던져버리고 싶은 곳에 던져 버릴 수 있고 심지어는 원하면 스스로 죽을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혼은 하나님께로 취함 바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들어서 우리 속에 넣어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것은 우리의 소유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혼을 다가오고 있는 미래를 결단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입니다.
몇 해전에 대통령과 김일성이 만남을 바로 앞두고 온 나라가 떠들썩했습니다. 머지 않아 통일을 기대했고 북한 고려호텔에 김 대통령이 묵을 방을 예약하고 생수까지 냉장고에 넣어둘 만큼 두 사람이 만나 민족사의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될 무렵 2주를 남겨두고 김일성이 사망했고, 우리는 모두 실망했습니다. 그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기회 때문에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는 왜 죽었습니까? 하나님이 데려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를 하나님이 언제 부르실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밤이라도 주께서 너의 모든 일을 끝내라고 말씀하시면 가는 것입니다. 직장 다닐 때 인생의 진실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숙연한 순간이 있었는데, 하나는 사람이 죽을 때이며, 또 하나는 발령이 났을 때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몇 십 명씩 발령이 나면 열심히 일하다가 갑자기 평생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던 사람들은 좋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만 두려는 이들도 있지만 태도는 엄청나게 바뀌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바로 이렇듯이 하나님이 발령내면 다 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발령장이 이제 이 세상에서 왕래하는 것이라면 주님이 기뻐하시고 그 하시는 일에 대해 움직이면 되지만 그러나 마지막 이 땅에서 받는 너희는 이 땅의 모든 일을 끝내고 내게 오라고 부르시는 마지막 발령장으로 부르실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지혜로운 자는 초상집을 찾는 다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랑과 관계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다는 분명한 인식을 우리가 거기에서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는 삶에 대한 진지한 견해를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부자는 나쁜 일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옥은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영혼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 영원한 내세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해볼 겨를 없이 먹고, 입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모두 소진한 사람들이 모인 지옥은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모인 곳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살면서도 영원한 내세를 그리워하던 사람들이 모인 곳에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앞에 주어진 인생은 기회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구원받지 못했다면, 먹고, 입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안전하다고 믿는 모든 우리의 삶의 보장들이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생명이 있고서야 소유의 의미가 있는 것이며, 생명 없는 소유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많은 재물을 쌓아두고서 하나님을 향하여 부요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위하여 많이 재물을 쓰지 못했다는 것뿐이 아니라 그렇게 그는 많은 재물을 모으고, 한 해에 여러 해 쓸 물건을 모으고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고 이 세상에서는 많은 것들을 모았을 것입니다. 그러기 언제나 골똘히 재물에 대해 생각하고 수입에 대해 생각하고 계산하고 어떻게 하면 수입을 늘리고 지출을 줄여서 보다 더 가치 있는 많은 재물들을 모아서 보다 안전하고 빼앗기지 않도록 자신의 재물을 지킬 것인가 생각한 것처럼 자신의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신의 영생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했더라면 주님이 갑자기 그의 영혼을 취하실 때 조금도 부끄럽거나 혹은 당황함이 없이 “아멘” 하며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준비된 내세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땅의 일에 골몰해서 사는 모든 사람들, 땅의 일에 매여서 사는 모든 사람은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살아있을 동안에 미래에 나의 영혼에 대해 생각하고 오늘 나의 영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누리고 살아가는 물질을 초월하는 영생의 기쁨을 우리에게 소유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가 또한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2. 은혜받은 자의 마땅한 소위(왕하7:9) 1997.2.23 주일오전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所爲)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消息)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罰)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王宮)에 가서 고하자 하고(왕하7:9)
북왕국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나라 가운데 하나가 아람이라는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종종 다메섹으로 불리 우기도 합니다. 이 아람 나라, 다메섹이 자주 북왕국을 침공해서 북왕국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아주 포악하고, 기동성이 있는 민족이었습니다. 바로 지금 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이 나라가 침공을 한 것입니다. 그
그런데 6장으로 되돌아 가보면, 거기에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엘리사가 도단 성을 에워싸고 있는 아람군대들을 인해서 낙망하는 자기 종 게하시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더 많은 천군 천사를 보게 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일들이 있고 나서, 그 군대의 눈을 멀게 만들어서, 그래서 그들을 자기 성으로 유인하였다가, 그래서 한 사람의 선지자가 수많은 군대, 그것도 철천지원수의 군대를 사로잡았다는 소식을 왕이 들었으니, 얼마나 신이 나겠습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가 이상하게도 그 사람들을 먹을 것을 주어서 다 놓아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6장에서 “엘리사의 머리가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가만 두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선지자를 향하여 선지자를 향하여 왕이 이를 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제 그렇게 도망갔던 군대가 나중에 다시 벤하닷이 군사를 이끌고 같이 오게 됩니다. 와서 사마리아 성 북왕국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이 사마리아성을 에워쌉니다. 쉽게 얘기하면은, 엄청난 대군에게 수도가 포위된 것입니다. 포위되고 나면은 제일 커다란 문제는 보급물자가 끊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이야 어떻게 지킨다고 하는데, 먹지 않고 어떻게 살겠습니다. 그러므로 물가가 천장부지로 치솟은 것입니다. 정확하게 그 때 이 세겔이 지금 화폐로 얼마 되는지를 환산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여튼 엄청나게 많은 가격이 치솟은 것입니다. 돈을 주어도 식료품을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국은 어느 상황까지 되었느냐 하면은, ‘오늘은 니 집 애를 삶아 먹고, 내일은 내 집 애를 삶아 먹는 상황’까지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약속을 해 놓고 자기 애를 함께 삶아서 뜯어먹었는데, 그 다음날 배고프니까 “이번에는 네 차례니까 네 아들을 내 놓아라.”고 하니까 약속을 어기고 자기 아들만 삶아 먹고, 그 다음에 그 집 아들은 어디엔가 감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만 억울한 것이 아니냐?” 쉽게 얘기하면, 나도 저 집 애를 먹을 수 있도록 왕이 재판을 해 달라고 하는 상황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기사( ? ) 속에서도 이런 것은 종종 있는 일입니다.
제가 중학교시절에, 한 번, 소설에 “나는 사람의 고기를 먹었노라.”하는 그런 제목이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이 대동아 전쟁 때, 사람을 잡아먹은 이야기를 수기로 쓴 것입니다. 패전을 하고 도망 다니면서, 그것도 천천히 아니라 그 자리에서 집단으로 도망가다가, 너무 지치니까 그 자리에서 잡아 가지고, 그 자리에서 생고기를 뜯어먹은 그 처절한 사연을 적어 놓은 소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소설이 아니라, 실화, 수기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성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밖에, 성문 앞에 네 명의 문둥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규례에 의하면, 이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은 이스라엘 회중에 들어와서 함께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에 걸렸다가 혹시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고, 혹은 기적적으로 치유가 되어도, 반드시 제사장의 검사를 받고, 그리고 예물을 드리고 그리고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회중에 합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종의 의학적인 격리 조치였습니다. 이것이 이제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안에도 못 들어오고, 성밖에 천막이나 이런 것을 쳐 놓고, 그렇게 거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있었는데, 참 성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 모양이니, 성밖에 있는 사람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성안에 들어갈 수도 없거니와, 또 들어가 본들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는 아람 군대가 새카맣게 진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퇴양난이 된 것입니다. 먹을 것을 구하러 가자니 포위되어 있고, 성으로 들어가자니 들어가 봐야 사람들이 들어 보내 줄지도 의문이고, 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성안에서도 서로 사람을 삶아 먹는 판국인데 먹을 것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그 자리에 있자니 굶어 죽을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럴 바에야 우리가 아람 군대로 가자.’ 이 사람들은 아람 군대로 가서 돌격을 한다든지, 특공대로 간다든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가자.’는 것입니다. 여기는 “항복하자.”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냥 들어가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들어가자.”, “아람 군대로 가서 떨어지자.” 그것은 공격을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냥 일단 먹어야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해서도 죽고, 저렇게 해서도 죽을 바에야, 그럼 먹을 것이 있는 아람 군대로 가다가 혹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살리시면 사록, 죽이시면 며칠 일찍 죽는 게 오히려 그래도 낫지 않느냐?’ 고 하면서 아람군대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엄청난 군대가 에워싸고 있었는데, 진은 그대로 있습니다. 진도 있고, 말 우는 소리도 나고, 나귀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도 나고, 보급품도 그대로 쌓여 있고, 모든 것이 전쟁 준비를 갖춰 놓은 모습 그대로인데,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하고, 아무리 뒤져봐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아람 군대가 거기를 에워싸고, 이제 이스라엘 승을 공략하기 위해서 사마리아 성을 에워싸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못 들었는데, 이 아람 군대에게만 들리게 만드셨습니다.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아람 군대에만 들리게 만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해서, 옆 사람이 엿듣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물론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한꺼번에 말씀하실 때도 있었지만, 큰 마병의 소리와 엄청난 군대가 진군하는 소리가 이 아람 군대에게 들린 것입니다. “야, 큰일 났구나. 이것은 틀림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들어오는 소리인데, 이스라엘 백성만을 가지고는 저렇게 엄청난 군대가 동원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말발굽 소리를 들어 봐라.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수시로 뇌물을 바치던 헷사람이나 애굽의 사람들이 우리를 연합해서 치기 위한 거대한 대규모의 구원병을 파견하였구나! 그 나라들이 힘을 합쳐서 연합군이 되어서, 우리를 완전히 쓸어버리기 위해서 달려오는구나.” 그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발굽 소리가 먼 곳에서 마병의 소리가 먼 곳에서 아스라이 들리기 시작하였으면, 그들이 서서히 챙겨서 도망갔을 텐데. 그 말발굽 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나는 소리와 같이 웅장하게 들려 왔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 모든 가지고 온 전쟁물자들을 가지고 가지도 못할 뿐 아니라, 나귀나 말을 타고 가야 할 텐데, 너무나 급한 나머지 나귀는 물론이고, 말까지 버려 두고, 그저 도망을 가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죽을 각오를 하고, 한 덩어리 떡을 위해서 아람군대로 갔는데, 사방이 고요한 것입니다.
가보니까 식당에서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저녁때에 밥을 앉혀 놓고 이제 밥을 막 퍼먹다가 어둠 속에서 이 수많은 대군들이 도망을 간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큰 밥솥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주걱이 반쯤 푸다가 꽃혀 있고, 밥을 퍼서 공기에다가 김치를 놔서 척척 먹다가 반쯤 퍼먹다가 숟가락을 꽃아 놓고 그냥 간 것입니다. 우리 환경에서 이해를 해야지 이해가 빠르지 않겠습니까? 어떤 밥그릇은 국에다가 분명히 밥을 말아먹으려고 밥을 반쯤 푸다가 도망을 가고, 그저 먹다가 숟가락을 팽개치고 도망간 놈…총천연색입니다. 그러나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무엇입니까? 먹을 것. 그리고는 들어가서 그냥 퍼먹은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여러분들은 모르실 것입니다. 알 수가 없지! 한 일주일 금식해 보면 공감이 갈 것입니다. 그까짓 것, 그렇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얼마나 맛있는지... 상상 못할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밥을 다 먹고 나니까 천국에 온 것과 같았습니다. 적군의 진지가 변하여 천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보물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 장막, 저 장막 뒤지니 수많은 보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들을 다 챙겨서 이리 꿈치고, 저리 꿈쳤는데, 그러면서 한참 정신이 팔려서 수많은 장막을 뛰어 돌아다니면서 이 문둥이 넷이서...... 길 닦아 놓으면 문둥이가 지나간다고 하는데 여기는 아람군대가 버리고 가니까 문둥이가 지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천국처럼 다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천국에 온 것과 같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다가 이제 9절의 말씀을 이 사람들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9절을 우리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유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찌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문둥이가 누가 약속한 것도 아닌데 네 사람의 마음에 똑같은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아하, 우리는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 사람만 말하고 사람들이 반박을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먹고 배부르고 보물을 이리저리 꿈 친 다음에 가만히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하는 짓이 옳치 못하다.’ 그러므로 네 문둥이가 동시에 얼굴을 쳐다보면서 ‘맞아, 우리가 하는 짓이 이게 옳지 못하다.’하는 반성이 들게 되었습니다. 왜 그런 반성이 들게 되었습니까?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이 그 동안 굶주리던 것을 이 아람군대의 진지에서 수없이 많이 누리고 있는데, 왜 이들은 먹고 마시고 보물들을 꿈쳐 놓다가, 갑자기 ‘우리의 하는 짓이 옳지 않다.’ 이런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까? 배고팠으니까 먹고, 또 배고팠으니까 마시고, 먹고 마셨으니까 이제 기력을 회복하고 나니 미래에 대한 염려가 떠올라서 그저 버리고 간 그 수많은 보물들을 이 주머니, 저 주머니 집어넣고 여기저기다 감추어 놓게 되었는데, 왜 전쟁에서 버리고 간 물건들을 노획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왜 이들을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여러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봐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들은 이렇게 아람군대, 이 전 같으면 찾아가서 뼈도 못 추리고 고문을 당하거나 참수를 당하였을 이 아람 군대의 진지에 와서, 이렇게 놀랍게 먹고 마실 수 있는 그러한 역사가 일어났던 것은,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위해서 이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이 꿈도 꾸지 못할 때에 어느 날 하나님이 아람 군대들에게 황혼 녘에 나타나셔서, 아마 어두움 가운데서 역사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크고 엄청난 말발굽 소리와 마병들의 함성소리를 듣게 만들어서 순간에 도망가도록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셨음으로 아람군대는 도망갔고, 거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가 먹고 마시고 배부를 수 있는 자리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로 준비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여러분들을 주님께로 불러주시지 않으셨다면 여러분도 언젠가는 하나님을 만나셨겠지만, 그러나 그 때는 심판을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될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죽음과 죄에 대한 형벌 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그 피로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주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함성을 듣고, 우리를 송사하던 마귀는 물러가고 정죄는 사라지고, 그리고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살을 찢으심으로 휘장을 열고, 그리고 피 흘리어 죽으심으로 하나님 앞에 이르는 붉은 피 길을 열어주셔서 누구든지 어떠한 죄인이든지 자기의 의의 신발을 버리고 맨발로 그 길을 걸어오는 정직하고 믿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셔서 주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이 바로 여러분과 제가 받은 은혜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변화를 받기 전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는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밖에 살면서 들어갈 수도 없고,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저 주저앉을 수도 없는 그러한 진퇴양난의 자리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들어갈 수도 없고, 나갈 수도 없고, 주저앉을 수도 없는 아무 것을 선택해도 인생의 해결이 되지 않는 그곳에서 고통하며 우리 영혼이 핍절하여 죽어가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만나주셔서 우리를 복음의 일꾼으로 불러주시고 거룩한 성도로 불러 주셔서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열린 하늘이 나올 때마다 제일 먼저 보는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면도 아니고, 이면에 나오는 제 설교도 아닙니다. 삼면도 삼면을 집필하시는 분께는 죄송하지만 제 관심을 끌지 못하고, 사면의 실린 세 개의 간증이 저는 제일 궁금합니다. 볼 때마다 “어쩌면 열린교회 식구들은 이렇게 글을 잘 쓸까? 이 사람들이 기회만 주어지면은 문단의 수많은 작가들이 숟가락을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어쩌면 이렇게 글을 잘 쓸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글재주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체험은 어눌해도 논리가 있고, 어눌해도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바가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간증하는 사람들이 짜고 하는 것도 아닌데, 모두 이제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 받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곤고한 인생을 살았는가를 약속한 듯이 배경에 깔고 간증을 시작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로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문둥병자들처럼 그렇게 소외당하고, 이제 왔던 길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안 가본 길로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저 주저앉으면서 대충 살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남이 보지 못한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셔서 남이 보지 못한 하나님의 그 크고, 넓은 은혜의 세계와 사랑의 세계를 보게 해 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서 남이 모르는 기쁨을 누리고,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그 은혜는 바로 나로 하여금 순면( ? )과 같은 삶을 살게 하시려고 그렇게 나에게 주셨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놀라운 은혜는 바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고귀하고 놀라운 지를 알아서 언제든지 그 은혜에 묶이고, 그 사랑에 사슬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러한 인생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은혜를 주셨구나.’하고 저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러한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셔서 정말 핍절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여러분을 하나님이 건져내 주셔서, 하나님 앞에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을 만나게 하심으로 여러분들이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고 하나님 앞에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을 만나는 예배 가운데 주님을 만나는 삶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누리게 된 특권이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이 사마리아 성 가운데서 굶어 죽어가며, 오늘은 이 아들을, 내일은 저 아들을 삶아 먹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만도 못하여 성 밖에 격리되어 거하던 문둥병자와 같은 아무 쓸모 없는 우리 인생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여 주셔서 그래서 우리가 주 앞에 나왔을 때에 우리 앞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이 행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남이 알지 못하는 남이 누리지 못한 그 놀라운 기쁨의 세계를 누리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제가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말씀을 읽거나 혹은 성경을 묵상하다가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면 너무 기쁩니다. 시인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주신 기쁨은 탈취물을 나눌 때보다 더 크니이다.” 전쟁을 마치고 탈취물을 나누는 것. 오늘 이 문둥병자들이 들어가서 굶어죽게 된 상황에서, 남겨 두고 간 수많은 밥을 퍼먹고 보물을 챙기는 것보다도 더 큰 기쁨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오늘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이 풍성한 은혜의 세계 속으로 불러 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도 여전히 성 중에서 그렇게 자식들을 삶아먹는 아비규환을 보면서 그 속에서 함께 핍절하며 원망하며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렇게 실패를 숙명처럼 알고 살아가던 인생들일 수밖에 없었을 텐데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은혜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예배하고 진리의 빛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문둥병자들이 이 많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보물들을 자기들의 마음대로 누리다가 어느 한 순간에 ‘과연 이렇게 누리는 것이 옳은가?’자신을 돌아보았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우리의 소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옳습니까? 오늘도, 또 지난주도, 수요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으며, 특별한 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특별히 준비된 말씀으로 자신의 영혼에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뻐하고 만족한 마음으로 돌아갔다가 그 다음 주에 다시 교회에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와서 더 큰 은혜를 받고, 더 큰 만족을 누리며 또 돌아가고, 잘 살다가 또 와서 또 은혜를 받고.... 이 소위가 옳으냐?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문둥이들은 즉각적으로 판단하기를 우리가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옮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많은 보물과, 그리고 배불리 먹은 음식이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자기들만 즐기고 단지 이 속에서 기뻐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결론을 이들은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오늘 우리의 결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에 교회가 서로 사랑하는 양떼들만 가득한 곳이어서, 그래서 세월이 흘러가서 점점 더 단지 모이기만 할뿐이라면, 그 양 우리는 이빨도 빠지고, 이제는 털도 제대로 생산해 낼 수 없는 그러한 늙은 양들의 집합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아무리 기도를 잘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바르고 정직한 태도를 가져서 소금으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단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교회 속에서 누리기만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만 되풀이하고 있다면 그것이 소금창고이지 무슨 교회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기도의 영으로 말씀의 영으로 여러분들이 빛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단지 여러분 홀로 빛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고, 모여있을 때에 늘 선민의식 같은 것이나 느끼면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 교회가 조명 기구 상이지 무슨 교회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소금인 사람도 있고, 소금이 아닌 사람도 있고, 누룩과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밀가루와 같은 사람들이 수없이 들어와서 그 누룩의 영향을 받아서 지속적으로 변화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누룩과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가루와 같은 사람들이 들어오는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거대한 발효 기구통이지 밀가루 반죽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문둥병자가 그렇게 먹고 마시며 감격하다가, 어느 한 순간에 자신들이 누리는 이 모든 기쁨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옳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결론에 도달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이 은혜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만 그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주위에 있는 그 모든 사람들이 이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그들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들도 이 내가 누리고 있는 아름다운 신앙생활과, 내가 누리고 있는 이 풍성한 복음과, 그리고 우리의 심령의 한없는 은혜와 풍부함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알아야지만, 내 인생처럼 바뀔 수 있다는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이 여러분들에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소위가 옳지 않은 것입니다. 문둥이들은 왜 자기의 소위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까? 그들은 우선 오늘이 기쁜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자신들만 먹고 마시는 이 소위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 문둥이들이 아람군대의 진지에 갔는데, 만약에 아람군대가 그들을 잡아서 족치고 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놓아주었다면 그들은 사마리아 성으로 돌아가서 전할 소식이 없었을 것입니다. “적군은 건재하고 있다.”, “나도 안다. 이놈아!” 그 말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리라고 기대할 수도 없고, 또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일들을 보았고, 그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죽어가던 사람들이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굶주린 영혼들이 몇 달을 먹어도 다 먹을 수 없는 곡식들이 쌓여 있는 그 군수물자들을 두고 도망간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남이 보지 못한 은혜를 누렸고, 남이 알지 못하는 참 놀라운 사랑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들 인생이 변화되었고, 그리고 그 말씀과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그 사랑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 때문에 이제 여러분들이 인생을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그것이 은혜였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공로와 여러분들의 어디가 잘나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고, 제가 훌륭해서 제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히려 문둥병자와 같이 더 쓸모 없는 사람, 버려다 주어 쓰면은 성 중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쓸모가 없어서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소외되어서 성밖에서 그렇게 필연적으로 문둥병을 앓다가 죽어갈 수밖에 없는 그 비참한 인생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남이 알지 못하는 사랑을 보게 하셨고, 남에게 허락하지 않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수많은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을 제쳐놓고, 미련하고 못난 나 같은 사람들을 불러서 주님의 놀라운 진리의 말씀과 은혜의 세계를 보이셨습니다. 남에겐 없는 놀라운 기쁨을 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신령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셔서 남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다니고, 남이 맛보지 못한 놀라운 사랑들을 누리며 살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해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그 말없는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다가오도록 만들어 주셨고, 다른 사람들은 깨닫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고귀하고, 넓은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 지를 알기 때문에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갈 수 없는 사랑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 사랑에 붙잡혀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을 맛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소위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늘 가슴에 품고 있는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제가 이 교회를 기업체처럼 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입니다. 지난주에도 전 2천 3백 명 정도 모인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리고 나서 기도하다가 설교하려고 올라와서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 우리 교회가 조금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번도 부러워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많이 모이는 교회도 우리 교회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러워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주간에 계속 가슴에 다가왔던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데, 우리가 이 은혜를 얼마나 전하고 있는가..... 하는 결론이 ‘우리의 소위가 옳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마 여태껏 중에 하나님을 만났던 그 놀라운 은혜를 모두 반납하고, 옛 생활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그럴 순 없다고 매달릴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만나 주시고, 저를 설교자로 세워 주신 이후로 감당할 수 없는, 쉼 없는 고통과,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이제껏 살아왔습니다. 돌이켜보면 정말 쉼 없는 도전을 나 자신으로부터, 혹은 심지어 교회로부터, 심지어 사단으로부터, 내 양심으로부터 그렇게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결코 평탄하지 않았고, 그리고 앞으로는 더더욱 저의 인생이 평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이미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은 내가 힘들어도, 이것은 폭우에 있는 삶입니다. 큰 폭우에 사랑하는 열린교회 식구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제 마음에 직감에 언젠가는 하나님이 저를 하나님이 이 풍랑 이는 바다에서, 역사와 마주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이 시대를 향해서 외치지 않으면 안되는 날들을 주실 것이다. 저는 앞으로의 저의 날들도 행복하고, 즐거울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이렇게 놀랍고 큰 데에는 반드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비록 앞으로 남은 날들이, 그리고 걸어온 날들이 우리가 받은 놀라운 은혜, 그것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더욱 고난을 받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사는 날들이 계속된다 할지라도 저는 그런 생각을 요즘에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더 큰 고난의 인생이 앞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만약에 주님이 만나주시지 않으셨다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 되었겠습니까? 알지도 못하면서 영혼들에게 진리를 말하고, 옳지 않은 것을 가르치면서도 그것이 참 신앙인 것처럼 살아갔을 이 비참하고 연약한 인생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이렇게 만나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가!”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여러분들을 새롭게 하시는 진리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여러분도 똑같이 더움 속에서 동물과 같은 신앙생활을 유지하며 사람들을 원망하고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슴에 칼을 품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면서도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섬기는 것 인줄 알고 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과 같이 무지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끊임없는 반항의 고개를 들면서 살아가는 이 미천하고 불순종하는 우리들을 하나님이 건져 주셔서, 남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보여 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해 주시지 않았던 그 말할 수 없는 진리의 세계들을 우리에게 알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빛 아래서 살아가게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한 번 여러분들이 가서 여러분들이 깨닫게 된 참된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전해 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바로 “아, 그렇구나!”하고 아멘합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은혜를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사랑과 은혜를 주님이 우리에게 맛보게 하셨을 때, 그 기쁨은 바로 이 문둥병자들이 도망간 아람 군대들의 진지에서 굶주렸던 배를 그들이 남기고 간 좋은 식품으로 채우고, 그리고 탈취물을 주머니에 주어 넣는 것 같은 그러한 놀라운 기쁨이었습니다. 그러한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전하지 않고 있는 우리의 소위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있어서 여러분들의 소위를 슬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오늘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많은 삶을 요구하십니다. 역사를 한 번 보십시오. 크게 하나님을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평탄한 인생을 산 사람이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과로로 요절을 하던지, 핍박을 받아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던지, 일평생 대적들에게 시달리면서 고난을 받다가 죽던지, 모두 넘치는 고난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남이 알지 못하는 더 큰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더 많은 삶을 요구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어떻게 그렇게 하고 삽니까? 다른 사람은 개척교회 하나만 해도 정신이 없는데, 언제 그렇게 집회하고, 글을 쓰면서, 글쓰는 것만 매달리는 사람도 한 달에 한 권 내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그렇게 하고 삽니까?” 저는 말합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지요.” 그러나 거기다가 덧붙입니다. “나는 평범하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왜? 남이 알지 못한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보이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참 사랑의 깊이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이 시대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들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저는 뼈가 부스러지도록 그렇게 살아야 되는 사람입니다. 불꽃처럼 순간순간 우리의 삶을 사르며, 남에게 주시지 않았던 이 크고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 그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놀랍고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지금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삶을, 그런 놀라운 은혜를 받아보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과 비교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두 번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그 은혜 못 다 갚겠네
특별한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하나님이 내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저는 언제나 생각하면서 살려고 애를 씁니다. 한 때는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평범한 인생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어느 날 저희 학교 연구실에서 [세례 요한]의 집필을 막 끝냈을 때입니다. 그 책을 친구 목사님에게 붙여 드렸는데, 학교에 한번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제가 보내드린 책 읽었습니까?”, “아 그것을 누가 보내준 것인데 안 읽겠습니까? 참 고맙게 읽었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읽은 소감이 어땠습니까?”그러자 그 목사님은 “야- 그 어디 쫄려서 목사 하겠냐!” 그 말을 듣고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든지… 좀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왜?”, “어떻게 하든지 진한 인생을 살아야 할텐데, 나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하는 말에, “김목사. 그냥 살면 되지 너무 진하게 살면.... 연필도 찐하게 쓰려고 하면 종이가 찢어져. 대충 살어.”, ‘당신은 대충 사십시오. 나는 찐하게 살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그 놀라운 은혜를 어쩌면 우리들을 한사람, 한사람 꼽아 내어서 우리만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나니까 이전에 깨닫지 못했을 때의 인생이 마치 짐승과 같은 생활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빛을 발견할 때에 그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서재에서, 혹은 기도원에서 성경을 혼자 읽다가 그 성경을 품에 앉고 빙글빙글 돌면서 “하나님,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제 무지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고통이 얼마나 크셨습니까? 그런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받고 사람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직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습니까? 혼자 예수 잘 믿는 것처럼 허랑 방탕한 생활을 하고, 짐승과 같이 살아가고, 무지몽매하기가 동물과 같은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사람들을 볼 때, 마음이 불붙지 않습니까? 가슴이 뜨겁지 않습니까? 우리의 심장은 도대체 무엇으로 만든 심장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고, 우리의 심령을 이렇게 새롭게 하셨는데,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보고 즐거워한 것이 아니라,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고, 그것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성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저 주저앉아서 죽을 수도 없는 이 비참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그 진리로 우리를 건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생하게 되었고, 우리는 동물과 같은 생활을 버리고, 이제 빛 가운데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쁘고 놀라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까?
오늘 이 문둥병자들이 자신들의 소위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그 탈취물을 먹고 마시는 기쁨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큰 반성 후에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적군의 진지에서 목에 피를 흘리며 참수나 당하고, 개․돼지처럼 고문을 받고, “너희들이 문둥병자이지만 첩자지!” 하면서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 마땅할 이 자리에서 모두 도망간 진지에서 네 사람의 문둥이가 제왕처럼 그들이 버리고 간 수많은 것들을 먹고 마시며, 그렇게 기뻐하고 있었을 때에, 그들은 이 기쁨 속에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자기들끼리 기뻐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은혜가 너무나 큰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변화, 우리의 영혼에게 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변화는 여러분들과 제가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변화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의 은혜와 깨달음의 은총들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 은혜가 크면 클수록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고 그저 그 진지에서 먹고 마실 것들을 꾸역꾸역 먹으면서 시간에 따라서 예배나 드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소위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문둥이들에게 반성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런 반성을 통해서 기쁨의 소식이 사마리아 성에 전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전해지지 아니하였더라면, 어떻게 할 뻔했습니다. 그들은 지천의 수많은 곡식을 남겨두고도 그 성안에서 자식을 삶아가면서 뜯어먹다가 마지막엔 결국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크면 클수록 이렇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사람들을 데려다가 복음을 듣게 하지 아니하는 우리의 소위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아직까지도 이 예배당에서 여전히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참회하여야 할 회개의 제목이라고 생각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여러분, 여기다가 의자만 놓고 자리를 만들고, 강대상 다 치워버려도 족히 수십 명은 들어와서 앉을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남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은혜를 받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인생이 바꿨노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입다물고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이 복음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애통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가 되지 않는다면 오기 싫어하면 낚시라도 해서 데리고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은혜,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이 말할 수 없는 기쁨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리에 대한 이 놀라운 깨달음과 변화된 인생들 앞에서 이제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소위가 정말 옳은가를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넘치는 주일 예배가 매주 드려지면 그것이 다인가? 모일 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가 드려지고, 우리의 마음이 신령한 은혜와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해 지면은 예수로 충만한 것인가? 이것이 진리고, 이 많은 것들을 앙모하며 받는 것이 정말 옳은 소위인가 우리는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 너무나 훌륭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부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그 은혜의 빚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통해서 이 진리의 빛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여러분들이 있을 그 진노의 자리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진노의 자리에서 나아가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는 그러한 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위가 옳은지 옳지 않은 지 생각해 봅시다. 속히 나아가서 우리들이 받은 이 놀라운 은혜 때문에 모든 원수들은 물러가고, 보라 이제 너희가 은혜 받을 때가 되었노라고, 사람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어찌하든지 영혼들을 불러 들여서 그 복음을 듣게 하고, 싫다면 다시 데려오고, 그래도 싫다하면 다른 이를 불러다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게 하여 우리와 같이 이 놀라운 은혜의 세계에서 새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위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3. 침묵할 수 없는 소식(왕하 7:9下) 1997.3.2 주일오전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왕하7:9下)
지난주에는 아람 군대의 진에 들어간 네 문둥이가 죽을 각오를 하고 들어갔는데 뜻밖에도 하나님이 이적을 베푸셔서 군대가 황혼에( ? ) 모두 도망가고 군수 물자와 각종 먹을 것과 은금을 버려 두고 도망간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둥이들이 들어가서 허기짐을 면하고 지천에 쌓여 있는 양식과 보물들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소위가 선하지 않았다고 고백을 하게 되었는데 소위가 선하지 않은 첫 번째 이유로서 기쁜 소식이 있는 날,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 그날에 자신들이 받은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을 선하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의 소위가 선하지 않은 이유는 그날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놀랍고 기쁜 소식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홀로 먹고 마시는 것이 옳지 않았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우리가 은혜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받은 이 놀라운 은혜를 전하고 있는가 하는 자신의 소위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문둥이가 자기의 소위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게된 두 번째 커다란 이유는 침묵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잠잠하고 있을 것이다.”말하지 않고 “잠잠하고 있도다”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침묵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이 잠잠히 있었겠습니까? 죽음을 눈앞에 둘 정도로 굶주린 이 문둥이들이 아람군대의 진에 들어갔을 때 엄청나게 쌓인 양식과 군수물 창고를 보았을 때 그들이 잠잠했겠습니까? 잠잠했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탄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붙들고 웃고 떠들고 눈물 흘리며 감격하면서 한시도 쉬지 않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쉴새없이 이 장막과 저 장막을 뛰어 다니면서 떠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없는 감사와 감탄의 말을 연발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 한 순간도 입을 다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처음 발견하고는 그것을 보며 감탄하기 위해서 떠드느라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고 그 모든 것을 발견한 후에는 먹느라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진중에서 웃고 떠들고 감탄하는 네 문둥이의 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우리는 잠잠하고 있도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들은 침묵하지 않은 시간이 수없이 흐르는데 자신들의 감탄과 감격의 말들을 해 놓고도 침묵했다고 말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감사하고 눈물을 흘리고 두 손을 높이 들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깨닫고 감화를 받아서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울려 퍼지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노래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 훌륭합니다. 찬양이 살아있고 하나님께 올리는 뜨거운 기도가 살아있고 바칠 수 있는 구별된 물질이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그러한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전파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네 명의 문둥이들이 그 엄청난 양식과 군수물자 앞에 웃고 떠들고 감탄하며 한시도 입을 다물 수 없었지만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것이 그들의 침묵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것 모두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아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교회의 사명을 대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불행한 것은 교회 다니는 모든 성도들이 도무지 밖에 나가서 무엇인가를 전할만한 기쁜 소식을 교회에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신앙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도 세상에 나아가 침묵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책임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을 고치고 우리의 삶이 치유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나아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장 나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고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전심으로 교회를 섬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아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여야 할 의무를 대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여러분에게 외치는 것입니다.
침묵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을 때 문둥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반성을 했을까요? 그들은 먼저 이 반성의 마음이 드는 순간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놀라운 은혜와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고 기다리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교회, 어느 그리스도인들마다 구원받지 못한 가족이나 이웃, 친구들을 만나면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이 기쁜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할 의무를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들은 ‘차차, 천천히, 때가 되면’ 이런 말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사명, 하나님 앞에 불 충성한 것을 미래에 충성되게 살아갈 것이라는 장미빛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심리적으로 보상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문둥이들은 침묵하고 있는 자신들을 깊이 반성할 때 첫 번째는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캄캄한 밤에 꼭 가서 전해야 하나?‘ 그렇다면 왜 자기들은 캄캄한 밤에 그곳까지 왔습니까? 올 때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왔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아람군대에 한번 가보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명을 걸고 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두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심지어 아람군대들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먹고 배부르게 되자 그 캄캄한 밤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올 때는 왔는데 배부르고 보니 가기에는 너무나 두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문둥이들이 밝은 아침을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들도 밝은 아침을 기다립니다. 환경과 여건이 열리고 떠밀려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에 있는 그들을 향한 복음 전파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자연적인 기회가 오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결코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증거하고 전파하여야 할 사명을 감당해 나가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바르지 못한 소위를 정당화 시켜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또 다른 방법으로 여러분을 통하지 않고 구원의 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받고 남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은혜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로서 잠잠한 그 바르지 못한 소위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네 문둥이들을 통해서 이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성안에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기 앉아서 굶어 죽을 수도 없는 안팎으로 버림받은 존재와 같은 이 비참한 존재들이 실로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모든 아람군대들이 도망가고 진지가 텅 비어 있는 그 엄청난 물자가 쌓여있는 그곳에 가서 허기짐을 면할 때 네 문둥이 중에 누가 감히 이 위대한 역사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온 몸이 모두 진물이 흐르고 발가락과 귀가 떨어져 나간 일그러진 죽어 버려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는 존재들인데도 불구하고 그 놀라운 은혜를 먼저 받았습니다. 그랬는데도 그들은 좋은 은혜를 누리면서 돌아가서 그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로 성문밖에 그렇게 우거하고 있던 비참한 문둥이와 같은 자들이 아니었습니까?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께로부터 비치는 은혜와 놀라운 사랑의 빛을 받고 캄캄한 우리의 어두운 영혼 속에 진리의 참 빛이 비치어서 우리의 영혼을 깨울 때에 우리들은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더럽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전에 제일 먼저 인생 길을 걸어가면서 어느 길로 걸어가야 할지 확신할 수 없는 존재들이 된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의 구원의 손으로 우리를 인도해 내셨습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불러들이고 고통의 골짜기에서 안식이 있는 풀밭으로 우리를 이끌어 내셨습니다. 모두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내신 놀라운 은혜의 증거를 갖지 않은 사람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경배를 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문둥이들이 이 놀라운 소식을 전파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처럼 날이 밝을 시간을 기다리고 때가 올 때를 기다리며 누군가 아람군대의 진에 오면 그들을 통해 소식을 전하리라 하고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잠들어 있는 시대에 교회들이 행하던 일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문둥이들은 자신들의 침묵을 철저히 반성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에 대해서 다시 점검을 하고 이 일에 있어서 정말 소위가 올바른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긍휼이 여기셨기 때문에 그 문둥병자 같은 자리에서 감히 그 모습, 그 얼굴로는 들어갈 수 없는 부족한 것을 하나님의 치부로 이끄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우리가 이 기쁜 소식을 증거하는 이 일에 있어서 우리의 소위가 옳은지를 하나님 앞에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감탄하다가 어느 순간에 자신들이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모든 배부름의 기쁨과 수많은 보물들에 둘러 쌓여 있고 이 주머니 저 주머니에 집어넣은 아람군대의 보화들이 갑자기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이 쌓여있는 군수품들 사이에 서서 그들은 갑자기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오늘 날 교회에서 회복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가 복음전파를 위해서 교회에 힘을 모으고 개인 개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 일이 선택적인 사항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들에게는 이런 날이 와야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 오늘은 제가 아무도 데리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지난주간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속에서 살게 하셨는데 단 한시간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어 본 적이 없이 살았는데 어떻게 내가 빈손으로 하나님의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까?”
만약에 이 당연한 성경적인 결론에 리가 반응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많이 부어주신 우리 교회가 이 공간에서 충분히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천사들 사이에서도 연구대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한순간의 말씀으로 각성하여 하나님의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도 모른다고 하는 절박한 각성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왜 그렇게 피묻은 복음을 들고 시련과 고난의 박해를 무릅쓰고 매맞음과 추움과 배고픔과 헐벗음, 그리고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시험과 고난을 당하면서 로마까지 보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물론 사도 바울은 그 일을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즐거울 때만 행했던 것이 아니라 부득불 하여야할 때도 있었습니다. ‘내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 라고 하는 거룩한 각성이 그를 일평생 붙들었기 때문에 불타는 전도자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교회의 돈 통이 넉넉해지고 대지를 사고 건물을 지어서 교회의 부를 키워 나가기 위해서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소명을 따라서 영혼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 영혼들이 구원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도 어둠가운데 있으면서 광명한 하나님의 나라가 새롭게 이 땅에 임하였고 이제는 누구든지 굶주림과 헐벗음과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이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받고 소유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 온 것을 전파하여야 되기 때문에 영혼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영혼들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들은 벌받을 것이라는 두려운 생각이 엄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기쁨이 사라지고 거룩한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벌받을 지도 모른다는 그 두려움은 실제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놀라운 이적으로 이방의 아람군대를 물리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참 목자요,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증거 할 수 있게 되는 그런 날들이 오기를 주님은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행하신 이 일을 온 백성이 알고 찬송하고 당신이 이루어 놓은 그 일에 모든 백성들이 참여하여 은혜의 즐거움을 맛보게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이 벌받을지도 모른다는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이 이들 가운데 행하신 일들이 크고 놀라웠기 때문에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벌받을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별로 없는 것 같고 여러분 속에 왜 예수를 믿고 지금 이 시간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아무런 간증이 없다면 여러분은 복음전파에 대해서 심각한 의무를 느끼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파해야 될 사람이 아니라 다시 들어야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과 만난 간증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말하라고 할 때에 여러분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고백할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지고 있고 여러분을 위해서 행하신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에게는 남다른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받은 바 은혜를 자랑할 때는 자기가 제일 큰 은혜를 받았다고 자랑하면서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그 놀라운 은혜의 소식을 들어야 할 자리에 가서는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외식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은혜를 들어야 할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위대한 일을 행하신 것을 모르고 먹을 것이 지천에 쌓여있고 고기가 썩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쟁의 공포 속에 두려워 떨며 오늘은 너희 집 아이를 삶아먹고 내일은 우리 집 아이를 삶아먹는 이 성중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는 백성을 생각하면 어떻게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바로 여러분의 유창한 간증을 들어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많이 받은 자들에게는 많이 구할 것이요 적게 받은 자들에게는 적게 구할 것이니라” 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예화)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책을 쓰면서 특히 2장을 쓰면서 인생의 태도에 대해 분명하게 정리하게 된 생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똑같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살 아가는 것이 틀리고 은혜를 받았는데도 삶이 견고하지 못하다. 몇 달 전에 하나 님 앞에 은혜를 받으며 감격하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크고 놀라운 간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일평생을 불꽃처럼 살았다. 그들은 순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순교하는 정신으로 살았 다. 죽은 자처럼 살았고 산 자처럼 죽었고 하나님을 섬기되 자기의 살점을 에이 며 뼈를 깎아서 하나님을 섬겼다. 건강한 자도 그렇게 섬기다 갔고 연약한 자는 연약한 대로 섬기다 갔다. 자기가 받은 그 놀라운 은혜를 온 삶으로 이 세상을 향하여 고백하며 전파하는 삶을 살았던 박해 어린 삶. 삶 속에 녹아져 있는 간증 이 있는 고백들, 그런 삶들이 그 사람 속에 불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목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요구합니다. 필요하지만 그 사람의 삶을 보면 그 간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한 간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받고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다 털어 버리고 다음에 와서 다시 부어달라고 말하고 그러면서 심리적으로 ‘내가 어두운 세상 속에서 불꽃처럼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안주시기 때문이라고 하는 숙명론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은혜만큼 외치며 살아야 합니다. 제가 만난 하나님을 자랑하거나 사도 바울이 만난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만난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도망간 아람군대가 물에 빠져 죽었는지 골짜기에 엎드러졌는지는 이들이 전파하여야 할 제목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람군대가 도망간 것은 알았지만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중요한 것은 전쟁은 끝났고 우리가 이겼고 아람군대는 도망갔으며 진지는 비어있고 먹을 것은 지천으로 쌓여 있으며 보물이 가득하니 이제는 와서 이것을 즐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받은 은혜나 성경의 인물이 받은 은혜가 아니라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해 우리가 앎으로 그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직무유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놀랍고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들을 대치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인도하셔서 이 자리에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여러분 스스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고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바라보고 전진하는 것 밖에는 돌아갈 길이 없다고 믿고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여기 서 있습니다. 돌아갈 사람들은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단지 돌아가는 길이 고달프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길에 오기까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큰 일과 놀라운 은혜가 너무나 위대하고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 밖에는 인생의 참된 행복의 보증이 없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각자 놀라운 하나님의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본 간증들을 가지고 얼마나 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의 인생을 하직하고 천사들의 손에 이끌리어 아버지께로 갈 때 높이 들려 올림을 받으면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에 죽어갔던 수많은 영혼들이 지옥에서 울부짖으며 “하나님 어찌하여 일평생을 자기 직무를 유기하며 태만한 세월을 보낸 저 영혼을 구원하시나이까?” 송사한다면 그 장면이 아름다운 장면이 되겠습니까?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한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범죄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려니와 그들이 죽은 피 값을 너희의 손에서 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나 사도나 모든 사람들에게 흐르고 있었던 처절한 부채 의식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이 부채의식에서 자유로와 질 수 없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마 한없이 괴로워하며 오늘은 그 본문이 아니기를 바랬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부채의식을 우리 마음속에 불일듯 다시 일으키사 우리로 하여금 실제로 나아가서 이 문둥이들이 자기의 성으로 돌아가서 이 기쁘고 위대한 소식을 사람들에게 외쳤던 것처럼 그렇게 외칠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의 놀라운 초청, 천사들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던 이 놀라운 은혜,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문둥병자들이 벌받을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이 긴박감을 느꼈을 때 그들은 부채의식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말해야 되는 사람입니다.
(예화) 한 여자가 자기 남편 자랑을 시작하면 세상에 잘난 사람들하고만 사는 사람들로 보인다. 또 남편 흉을 보기 시작하면 봇물(?)이 터지듯이 점심 먹기 전에 남편 자랑하던 것은 잊어버리고 밥 먹고 나면 자신들이 몹쓸 남자하고 살고 있는 것 처럼 말한다. 남자들은 군대시절에 자기가 특권 받은 것과 고생한 이야기를 하면 서 자기가 제일 그랬던 것처럼 말함.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지 않으시고 큰일을 베풀어주시지 않을 때 우리는 얼마나 비참한 자들입니까?
성안에 들어갈 수도 없고 맞아주는 사람도 없고, 성문은 원수의 침입을 대비하여 굳게 닫혀있고 그렇다고 해서 주저앉아 죽을 수도 없는 아무런 도움이 끊어진 것 같은 저주받은 상태였던 것을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놀라운 은혜를 찬송하기에 앞서 제일 먼저 ‘나 같은 죄인’이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증거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그런데 하나님이 위대한 일을 행하셨는가를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의 인생이 비참하고 어리석고 그야말로 칙칙하고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는 것 같은 그런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돼지우리와 같은 곳에서 온갖 돼지의 배설물들을 온몸에 묻히면서 기어다니며 쥐엄 열매나 찾으려고 몸부림치던 인생들이 저와 여러분이었습니다. 그런 인생들을 주님이 불러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용서하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자비의 관으로 우리에게 씌우시고 의와 기쁨으로 주님을 찬송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인생을 살되 그렇게 동물처럼 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어찌하든지 살아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주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살고자 하는 신령한 꿈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렇게 바꾸어 놓으셨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하고 큰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자랑하여야 하는데 그것을 자랑하지 않는 것이 바로 자신들에게 벌로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문둥이들이 맨 처음 모든 아람군대가 도망간 진지를 발견했을 때 감격하기에 앞서 제일먼저 놀라는 일들이 먼저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들은 텅 빈 아람군대의 진지에서 먹을 것을 먼저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고 지나갔다고 하는 위대한 하나님을 먼저 만난 것입니다. 그 후에 떡이 있었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었습니다. 배부른 자 그들은 자기가 만난 하나님이 다시 생각나기 시작했고 하나님이 행하신 이 기쁘고 위대한 일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의 절망과 위기 앞에서 건져내신 그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을 때 그 크고 놀라운 일들을 발견한 이스라엘 당대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홍해 근처에 가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조에게 행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역사를 찬송하고 노래했습니다. 지금까지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이 놀라운 일들을 우리의 혈관에 피가 멈추고 우리의 혀가 굳어질 때까지 쉴새 없이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외치며 나를 위해, 내 백성을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이 크고 놀라운 일들을 전파하고 외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이 놀라운 일들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자랑하며 살도록 하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이들이 벌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이유는 하나님의 행하신 이 놀라운 일들은 온 세계에 널리 퍼져서 역사에 길이 남아 만방의 백성들이 아람군대가 도망간 사건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위대하다는 사실을 송축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일이 있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한가지 이유는 자비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또 한편으로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죽어갈 지경에서 밥을 먹고 배부르게 된 자신들의 처지와 아이를 삶아먹고 양식 때문에 다투고 있는 성중의 비참한 백성들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런 비교가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성안에 있는 수많은 백성들을 죽이는 살인의 공모자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화) 형법 중 자살방조죄, 옆에 서있는 사람이 그 사람과 무슨 사이든지 상관없이 최 선을 다해서 자살을 말려야 하는 의무를 법이 부과하고 있다.
이 문둥이들은 자신의 이 부유한 처지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는 비참한 백성들의 처지를 비교하였습니다. 만약에 그들을 거기서 죽게 내버려둔다면 자신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놀라운 은혜를 받고 은혜가 사랑으로 충만한 주일을 지낼 때 여러분들로부터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의 영적 가난함과 심령의 메마름, 하나님과의 깨뜨려진 관계, 잃어버린 화목 때문에 고통하고 있는 그들의 영혼과 여러분의 부유한 하루를 비교해 보십시오. 누가 누구를 긍휼히 여겨야 되겠습니까?
(예화) 배가 난파되어 간신히 살아난 사람들이 자신들의 처지가 너무 감사해서 자신들 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구해내는 일에 생명을 걸었는데 세월이 많이 흐 른 뒤에는 무섭게 파도가 치고 비바람이 치는 어두운 밤에는 구원해 달라고 몸 부림 치는 그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드는 일은 너무 위험한 일이 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화려한 샹드리에 밑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비참하 고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구출 받았는지를 서로 무용담처럼 자랑하며 축배 를 들고 있을 때 어두운 밤바다에서는 사람을 살려달라는 수많은 물에 빠진 자 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면서 그들을 예수 믿게 하는 일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고 무엇보다 그들을 교회에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한번, 두 번 혹은 서너 번 그 중에는 왔다가 떠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갔다가는 다시 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 누구에게 구원의 때가 이르렀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있는 대로 이 놀라운 소식, 누구든지 오기만 하면 이 군대들조차 도망가고 비어 있는 아람진지와 같은 곳에서 한없이 희락을 누리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위대하고 놀라운 큰일 앞에서 주님을 찬송하며 즐거워 할 수 있다는 이 기쁜 소식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이런 긴박한 징벌에 대한 의식을 느끼면서 그 부채 의식을 가지고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데리고 나오는 이 일에 여러분 자신을 드려서 주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가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삶으로 말입니다.
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7:13-14) 1997.6.8 주일오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여러 모양으로 살아가지만, 그것은 문을 지나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은, 그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너무나 다양하고 직업도 너무나 많고 그리고 또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지만,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인생이 무엇을 하고 살아가든지 둘 중에 하나라고 이렇게 단언하십니다. 좁은 문을 지나서 좁은 길로 걸어가는 사람들과 넓은 문으로 들어가서 넓은 길로 행하는 사람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넓은 문, 커다란 문, 넓은 길 또 함께 가는 사람들이 많은 길을 걸어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눈으로 볼 때 으리으리하고 좋은 문 이곳으로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누구나 다 부러워하고 누구나 다 좋아하는 그러한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문 뒤에 어떤 길이 있고 또 무엇이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려고 들지를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은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의 눈에 좋은 것을 택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이 보기에는 문도 크고 길도 넓지만, 사람이 보기에 좋은 모든 것이 하나님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좋아 보이고, 사람이 보기에는 행복해 보이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해놓고도 그것 때문에 불행해 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예화) 40세정도 된 사람이 골프장에서 볼을 날라다주는 젊은 캐디인 26세밖에 안된 여 인과 가정을 버리고 사랑에 빠졌는데, 그 여인이 괴로워하다가 그가 죽기 전 일 주일 전에 강에 뛰어들어서 투신 자살했고, 그 괴로움과 가책을 이기지 못하던 이 젊은 부자는 무궁화 열차에 뛰어들어서 즉사를 한, 어제 아침 신문에 난 기사 이야기.
보십시오. 이런 것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기본적인 그 틀에 있어서는 꼭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일만 해결되면 참 행복할 텐데.’ 라고 말합니다. ‘이런저런 일만 일어나면 내 인생이 참 행복할 텐데, 이런저런 일만 해결되고 누가 나를 도와주기만 하면은 그리고 내가 이러이러한 자리에 올라가고 내 사업이 이렇게 되기만 하면 행복할 텐데.’ 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이 ‘행복할 텐데.’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아니야. 돈을 많이 벌면 결코 행복해 질 수 없어. 불행해져 넓은 집에 살면 고통스러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지,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행복의 조건이 저 사람에게도 행복의 조건이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불행의 조건이 저 사람에게도 불행의 조건이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판단을 좌우하는 것은 외관입니다. 문이 넓고 화려하고 크고 길이 잘 닦여지고 넓은 길, 그러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걸어가기 때문에 고독하거나 외로워져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언제나 육체의 욕심이 원하는 대로 안목의 정욕을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외로울 것도 없고 고독할 것도 없고 깊이 외로움 속에서 번민하여야 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를 믿기 전 한참 방황할 때 여러 책을 읽으면서 제 마음을 가장 크게 움직였던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가치’였습니다. 어느 철학자가 책 속에서 제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가치 있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인생의 참된 행복은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인생이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묻습니다. 그 가치가 영원을 향해서도 의미가 있습니까?’ 이 질문이 저를 굉장히 흔들리게 만들었습니다. 무엇인가 영원한 것들 그리고 불멸하는 가치에 대한 사랑이나 집착을 가질 때에 갈등도 있고 외로움도 있는 것이지 고통하고 괴로워하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육신의 정욕대로 안목의 정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갈등과 고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그 넓은 길에 언제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기에는 넓고 그리고 눈에 보이기에는 크고 그리고 외로움을 느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친구처럼 그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그 길은 필연코 멸망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멸망에 이르는 길은 문도 크고 길도 아주 넓고 친구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인생의 진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만약에 진심으로 멸망하기를 원한다면 특별히 나쁜 일을 하거나 특별히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태어난 그대로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그리고 듣기에 좋은 교훈을 따라서 그리고 외로움을 버리고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서 인생 길을 생각 없이 걸어가다가 보면 그 편안하게 걸어간 그 길이 필연 멸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인생의 진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사람들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교통하고 하나님과 함께 사귀며 살도록 가족과 같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어놓으셨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자녀를 낳아서 그 자녀가 아버지의 집에서 그 아버지와 함께 먹고 마시며 가족과 같이 생활하기를 원하셔서 하나님이 세상에 인간을 지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창조하셔서 그 유산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배반하고 멀리 떠나서 가출하고 가출했을 뿐만 아니라 가출하며 돌아다니는 생활을 통해서 범죄하고 범죄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아버지를 향하여 욕하고 모욕하고 반역하는 그러한 행동을 일삼으면서 타관을 배회하는 그러한 불량한 자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만드실 때에 원래 의도하셨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인간들을 만들어 놓으셨지만 인간들이 스스로 타락하고 범죄하고 난 다음에서부터는 이제는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을 듣고 감동을 받으면서 살거나 또 우리 안에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속 사람에게 주신 시야로 우리의 인생의 진실을 바라보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를 판단하면서 살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멸망으로 이르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되지만 생명으로 이르기 위해서는 매우 특별한 노력과 자기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넓은 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 오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한 번 들춰 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온통 생명에는 관계가 없고 죽은 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무엇을 먹고 마시고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을 즐길까’ 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행복하지 못합니다.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느끼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병들어 고통 하는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진통제를 맞고 그 기운이 깨고 나면 허무에 몸부림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에 돌아가는 풍조를 보십시오. 가장 파도와 같이 밀려와서 온 땅을 엄습하고 있는 풍조는 세기말적인 향락의 풍조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신은 이제 즐거움입니다. 가난했을 때에는 돈만 많이 주면 언제든지 일한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돈을 많이 줘도 일하지 않습니다.
(예화) 언젠가 자동차를 몰고 오다가 하도 지저분해서 식당 앞에 차를 세우고 마침 식당 앞에 세차를 하는 사람이 있어 세차를 해달라고 하고 차를 세우고 식사하려 고 하는데 세차 하는 사람(세차장 주인)이 근무시간이 5시까지인데 한 2-3분 근 무시간이 경과되었다고 쉬어야된다며 세차를 하지 않겠다고 한 이야기.
그 대신 사람들은 이제 관심이 어디로 모아지고 있냐하면 어떻게 하면 휴일 하루를 멋있게 즐길까 에 있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십만 원을 줄께 와서 주일날 일하라 하면 일하는데 드는 고통이 십만 원어치가 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일날 가서 신나게 노는 것을 희생하는 대가로 십만 원이 충분한가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향락의 풍조가 밀려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향락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오늘 성경이 말하고있는 넓은 문, 커다란 길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는 그 넓은 길을 걸어가는 향락에 빠진 사람들을 우리는 정죄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정죄하는 것은 마치 병에 걸려서 스스로 자신을 추스를 수 없는 사람을 단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일들이 해결되면 행복하고 이런저런 길을 걸어가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이렇게 되었으면 저렇게 되었으면 하는 것은 보다 큰 문, 보다 넓은 길, 보다 많은 친구 그 정도밖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사람들은 모두 무엇이 인간을 진정으로 불행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환경들이 우리의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뿌리는 아닌 것입니다. 만약에 그 뿌리가 제거되지 않는다면, 겉에 나타난 모양과 환경이 아무리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의 불행의 뿌리는 바로 죄에 있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생명으로 가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을 마다하고 멸망으로 달려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 앞에서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고 깊이 생각한다면 결코 우리의 인생이 장난처럼 살다가 죽을 수 없는 인생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검증되지도 못하고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어떤 견해에, 책임질 수 없는 인생의 견해에 우리의 삶을 맡기고 그것을 쫓아가는 삶을 사는 것도 죽음 앞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무디어져 있습니까? 한쪽에서는 사랑하는 친구가 죽어서 살았던 생명이 죽었습니다. 이제는 말할 수 도 없고 이야기할 수 도 없고 함께 악수할 수도 없고 싸울 수도 없고 대화할 수도 없고 함께 놀러갈 수도 없습니다. 이전에는 만져지고 교제를 나누어도( ? ) 나누었는데 죽자 이제 그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 친구를 옆에 뉘어놓고 먹고 마시며 화투를 치는 것이 인간입니다. 도무지 좁은 길에 대해서 생각하려하지 않고 멸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는 멸망을 숙명처럼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이런 길을 자랑삼아서 걸어가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성경은 죽기 위해서 태어난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모닥불에 연기를 피워서 모기를 쫓고 벌레들을 쫓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기도원에 가면 이제는 전기로 만든 해충 퇴치기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만 이천볼트 정도가 흐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벌레들을 유혹하는 밝은 불빛이 있습니다. 벌레들이 그 불빛을 향하여 돌진하다 보면은 철망에 걸리고 걸리는 순간 고압 전류에 감전되어서 몸이 타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원에서는 저녁 내 누워있으면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그겁니다. ‘뿌지직 뿌지직 칙칙 뿌지직 뿌지직’ 큰 거 탈 때는 소리도 더 크게 납니다. 모기는 조그맣게 납니다. 그런데 자기의 동료들이 수없이 돌진해서 지금 새까맣게 타서 한 됫박씩 시체가 쌓이는데 또 돌진하는 겁니다. 죽으라고 돌진하고 거기에 머리를 박고 죽는 겁니다. 어느 기도원에 갔더니 매일 밤 거기에서 떨어지는 것이 두어 되 박 이상씩 된다는 겁니다. 여름 내내 하면 한 가마가 넘을 정도로, 몇 가마가 넘을 정도로 그렇게 벌레들이 죽어 가는 겁니다. 넓은 길로 걸어가는 인생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고 그리고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타난 멸망이라고 하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인간의 안목에 좋은 대로만 살고 사람의 생각에 옳다고 믿는 대로만 살아서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서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있으나 그러나 인간이 진정으로 살아있기 위해서는 속 사람도 살아있어야 됩니다. 속 사람은 죽어있습니다. 그리고 겉 사람이 살아갑니다. 그런 것들이 오늘 예수님께서 경계하시는 넓은 길로 걸어가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 멸망이 의미하는 두 번째 의미입니다. 죽은 후에 받게 되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심판.
어느 집사님이 열심히 전도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전도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목사님 앞에서 펴보니까 전도지 에는 대개 겉에 행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천국에 가시기를 원하십니까? 이런 글들이 적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전도지 표지에는 아주 기분 나쁜 도전적인 말이 씌어있습니다. 지옥으로 가고 싶습니까? 시뻘건 글씨로 씌어있습니다. 공산군 삐라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탁 펼쳐보니까, 여기 지옥으로 가는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펼쳐보니까 백지입니다. 이상해서 다른걸 보니까 백지입니다. 뒤에 조그만 글씨로 씌어져 있는데 ‘당신이 정말 지옥으로 가시기를 원하십니까? 정말 당신이 지옥으로 가고 싶어하시고 멸망 받기를 원하신다면 그냥 그대로 사십시오. 지옥에 가기 위해서 특별히 더 해야할 죄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우리의 인생이 걸어가면서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인생의 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하지 않고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면 그 길은 필연적으로 넓은 길이요, 그리고 그 길은 필연적으로 멸망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불행의 문제를 물질의 부족이라고 말하고 또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성경은 우리 불행의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서 일생을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사시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이 세상의 사람들의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예화) 제작 년에 캐나다로 에어포트 교회를 살펴보기 위해서 가던 길에 옆자리에 학교 선생님인 한국인 자매 한 사람이 라즈니쉬라고 하는 인도 철학자가 이끄는 교의 수련회를 가는 도중이었다. 그러면서 보여주는 수련회 팜플렛은 남녀가 전부 벌 거 벗고 공동생활을 하는 충격적인 그림이었다. 또 그 사람이 인생의 고통의 원 인에 대해서 자기가 나름대로 쭉 얘기를 해서, 죄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자 그 사 람이 인상 쓴 이야기.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죄에 대한 관점이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육신의 소욕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죄라고 하는 것이 성립될 수도 없거니와 또 혹시 죄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지워질 수 있는 상대적인 인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죄가 있기 위해서는 분명한 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 사이에 도덕적인 기준이 무너지게 되어서 사람들은 점점 더 후한무취( ? )한 사람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끔찍한 죄를 범하고 그리고 극악한 악을 범하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죄인이요 범죄자라는 그러한 죄의식을 갖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죄에 대하여 설득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은 인간은 결국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고 그리고 결국은 이러한 넓은 길로 걸어가면서도 자신이 멸망에 이르고있다고 하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였지만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이 범죄한 상태가 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일부는 집행이 되고 일부는 유예되었는데 집행된 형벌은 바로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유예된 형벌은 이제 인생을 산후에 그 인생에 대해서 마지막 영혼의 판결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이 두 가지를 다 멸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푸셔야 됐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흘리신 그 속죄의 피가 오늘 누구든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보고 이제는 누구든지 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이제는 우리가 다시는 멸망의 넓은 길로 걸어가지 못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지은 모든 죄들을 해결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의 형벌을 받고 죽은 것을 믿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초청하시는( ? ) 사랑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로부터 자유롭고 구원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은 한 치 앞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물며 인생에 관한 일에 있어서도 그러하거니와 만져지지도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는 자신의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넓은 길, 넓은 문, 커다란 문,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는 길은 우선 특별한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눈에 원하는 대로 마음이 원하는 대로, 그리고 친구가 많은 그 길을 걸어간, 쉬운 길을 택한 대가는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그 길을 함께 걸어간 사람들이 아무리 많고 그리고 문과 길을 향한 우리의 착각이 아무리 완벽했다고 할지라도 그런 것들은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핑계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눈 어두워지게 만든 것도 결국은 인간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그것 말고 또 다른 인생이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런데 문만 좁은 것이 아니라 그 좁은 문을 지나고 나면 거기에는 여전히 좁은 길이고 그리고 고통스러운 길입니다. 그 길로 들어가는 자들이 복이 있음을 오늘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넓은 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갖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 소수만이 정말 참다운 생명이 있는 길을 걸어가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가지고있는 사고방식에 어울리기 위해서는 이렇게 되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넓은 문이, 커다란 문이 있는데 착각을 하고 그 문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아주 좁고 고통스러운 길이 나와서 결국은 멸망에 이르게 되고 좁은 문을 택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믿음으로 좁은 문을 택했는데 좁은 문을 딱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좁은 문하고는 어울리지 는 크고 넓은 길이 나오고, 넓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외로움과 싸우면서 지독한 고독 속에서 그 길을 걸어가야 되지만, 좁은 문을 일단 들어선 사람들에게는 친구도 많고 어울리는 사람도 많아서 바로 천국과 같은 생활이 시작되는 것, 이렇게 해야만 오늘 우리들에게 대단히 어울리는 복음, 현대인들의 지성에 호소될 수 있는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넓은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기에 좋은 방향으로 불신앙을 택했고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스스로 주인노릇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려고 마음먹고 문을 여니까 거기에는 법도 없고 절제도 없고 마음껏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방황할 여지도 있지만 그러나 자유 할 여지도 많습니다. 그리고 많은 친구도 있습니다. 그 길로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필경에는 멸망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 넓은 길이라고 하는 본문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언젠가 우리가 큰 홍수가 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도로가 유실되었습니다. 고속도로가 밑에가 무너지면서 절단이 났습니다. 밤중에 차를 달리던 사람들이 길이 끊어진 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100km/s, 120km/s ( ? )이 쏜살같이 달렸습니다. 앞차가 막 달리더니 어둠 속에 사라졌습니다. 언덕이기 때문에 사라졌나 하고 뒤차도 열심히 밟았습니다. 또 사라졌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뒤에 오는 모든 차들이 사라집니다. 이 길이 잘못된 길이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지만 내가 알려주고 싶을 때는 이미 나는 땅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수십 미터가 넘는 그 구덩이로 떨어졌습니다. 한 사람도 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다행히 많은 차가 지나가지 않았기에 그렇지 만약에 많은 차들이 고속으로 그 밤중에 달리고 있었더라면 차들이 쌓이고 쌓여서 떨어진 차가 도로 위로 올라올 때가지 사람들은 마구 달렸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넓은 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넓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생명과 구원의 은혜가 있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소수가 복음을 듣습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 중에 아주 적은 수가 중생과 회심을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 새사람이 됩니다. 새사람이 된 사람들 중에 아주 소수만이 끝까지 믿음으로 싸워서 승리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 후반부에 나와 있는 좁은 문, 협착한 길 그리고 사람들이 적다라고 하는 이 의미는 결국은 자기 부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인생에 대한 견해가 옳지 않다, 옳지 않을 수 있다라고 부인하는데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한 진정한 견해를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나의 인생에 대해서 무엇이 진실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귀를 기울이도록 자기의 생각과 사고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앙의 길에 들어서고 나면 그 다음에는 끊임없는 자기 부인의 길을 우리는 걸어야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이 생명도 역시 이중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좁은 길로 들어서는 그 순간 이전에 넓은 길을 걸어가며 자유를 느끼던 때에 도저히 맛볼 수 없었던 생명의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이제는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참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우시고,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위기와 어두움 가운데서 건져내시는 참 하나님의 사랑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체험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말로써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정원을 걸어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가 진실로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이 다 끝난 후에, 우리는 적지만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음 이후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예비하셨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왔던 그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살다가 흙에 묻혀서 돌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제품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려면 공장으로 가서 무슨 재료로 제품을 만드는지를 보면은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흙으로 빚으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후~ 영혼을 불어넣으셔서 육체와 영혼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죽고 나면 원래의 구성 요소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죽어서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가르쳐서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그 문이 좁고 그 길이 협착해서 찾는 이가 매우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여러분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생명에 이르는 그 진실한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진실로 맛볼 수 없습니다. 죄가 많고 고통이 많은 이 세상에서 믿음의 생활을 해 나가면서 늘 승리하도록 우리를 도우시고 생명의 놀라운 은혜를 주시는 그 하나님의 참된 사랑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고 자기가 하고싶어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도록 맞추기 위해서 자기가 하고싶은 일들을 버립니다. 자기의 욕망을 죽입니다.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죄에 대한 소망을 죽입니다. 그리고 자기 행실을 죽이고 날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기대하셨던 삶을 살기 위해서 그렇게 살지 않으려는 자기와 더불어 싸우고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려는 세상의 유혹과 더불어서 투쟁합니다. 부인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현재적인 신앙 생활에서 진정한 생명과 은혜를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자기가 살아가는 삶을 이럴 수밖에 없다고 핑계하고 하나님 앞에 늘 정당화시키고 합리화시키는 이런 것들이 익숙해져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삶은 그 속에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외로워지기 싫어합니다. 많은 친구, 많은 사람과 어울리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혹 여행사에서 여행을 갈 때 독방에다가 혼자 모셔주는 것이 대우해주는 겁니까? 한 이십 명씩 한 방에다가 집어넣어서 재우는 것이 대우해주는 겁니까. 잘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독방에 재워주는 것이 대우해주는 겁니다. 넓은 방은 더 비쌉니다. 그런데 감옥에서는 정 반대입니다. “너 독방!” 하면 사람들이 “할렐루야!” 이렇게 안 합니다. 그것은 죄를 짓고 들어온 사람들 중에서 사고를 하도 많이 치면 독방으로 보내기 때문입니다. ‘6개월 독방’하면은 얼굴이 사색이 됩니다. 왜 그럽니까? 그 넓은 방 혼자 쓰고 시끄럽지도 않고 조용한데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합니까? 고독, 외로움. 여러분, 외로움과 고독이 ( ? )합니까?
일본에서 신종 산업가운데 하나가 한 시간에 삼 만원인가 오 만원씩 내면 가족을 만들어서 주는 겁니다. 외롭게 살아가는 할아버지에게 연극을 하는 겁니다. 손자, 며느리, 아들 만들어주는 겁니다. 한 사람 앞에 얼마씩 패키지가 다 있습니다. 2인 가족, 5인 가족, 8인 가족 다 그 요금이 틀립니다. 그리고 하루를 살아주는 겁니다. 그리고 몇 만 엔을 받는 겁니다. 사는 것이 얼마나 외로우면, 그렇게 해서 시간제 요금을 주고라도 할아버지라는 소리를 듣고싶고 아버님 시아버님이라는 소리를 듣고싶겠습니까.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에서는 죽음을 버리고 생명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외로워져야되는 때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으려고 결심하고 나니까 친구들도 사라졌습니다. 매주 일요일날 놀러 오라고 하는데, 자기들한테는 일요일이지만 나한테는 주일인데 말입니다, 갈 수가 있겠습니까? 외로워지기 싫어하지만 그러나 생명의 길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외로움도 감수해야 됩니다.
이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생명에 이르는 참된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길이 협착하고 좁습니다. 넓은 길로 걸어갈 때는 자유가 있습니다. 술 먹고 휘청거릴 수도 있고 드러누울 수도 있고 그리고 떠돌며 갈 지 자로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허락을 안 합니다. 똑바로 서서 이 길로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요쪽으로 가면은 낭떠러지로 떨어집니다. 이쪽으로 가면 범죄하고 저쪽으로 가면 타락합니다. 이전에는 죄를 물먹듯이 밥먹듯이 간식 먹듯이 늘 먹고 마시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생명이 무엇이고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아니까 이제는 그런 길로 걸어갈 수 가 없는 겁니다. 이전에 행하던 죄를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전에 그렇게도 사랑했던 자유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육신의 안목과 그리고 이생에서 솟아나는 마음에 원하는 정욕대로 내 마음대로 살아갔던 그러한 범죄들이 바로 자유라는 이름 하에 우리를 점점 더 사망의 길로 데려갔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사건은, 이렇게 참 예수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답답해서 그 좁은 길을 어떻게 걸어가나, 고독해서 그 외로운 길을, 아무도 친구도 없는데 어떻게 걸어갈까 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믿음으로 좁은 길에 들어서서 협착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생명을 하나님이 부어주십니다. 좁은 길을 걸어가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생명의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꽃처럼 향기 나는 쾌락과 우리의 온 몸을 짜릿하게 하는 즐거움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생명의 은혜를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소중한 것이 이 세상에는 없고 내가 구원의 은혜보다도 더 값지고 보배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내게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에게 그런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두신 이 생명은 우리 안에 기쁨을 창조합니다. 그러니까 그 기쁨이 고통보다 훨씬 더 커서 그 고통스러운 길도 걸어갈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믿음 생활 하다가 고달프다고 해서 신앙이 미끄러지고 뒤로 물러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말하지만 고통보다 기쁨이 크면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생명의 놀라운 은혜와 기쁨을 맛보게 하시니까 그러니까 좁은 길도 친구가 없는 길도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과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의 사람들의 생각이나 우리의 육신의 안목을 따라서 넓은 길로 걸어가는 사람들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고 하느냐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주님을 찬성하고 노래하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이 생명의 길로 걸어가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좁은 길을 택할 것이냐 넓은 길을 택할 것이냐의 유일한 한 번의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인생은 톨스토이가 말한 바와 같이 대합실과 같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합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화투를 치는 사람, 담배 피고 떠드는 사람, 소주 한 잔 사다놓고 오징어포에다가 귀퉁이에 앉아서 먹는 사람, 젊은 아이들은 뭐 이렇게 박수도 치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피곤한지 신문지 깔아놓고 대합실에서 잡니다. 그러나 모두 벌떡 일어나는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기차가 도착했을 때입니다. 화투판도 집어치고, 술병도 팽개치고, 놀던 놀이도 집어치고 탑니다.
톨스토이는 인생을 대합실에다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그 대합실에서 어떤 사람들은 넓은 길로 이르는 멸망의 열차를 타고 어떤 사람들은 생명의 열차를 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택할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로 살아있는 동안에 주어진 것입니다. 이제 이 인생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서 여러분들의 인생이 단지 이 세상에서 살다가 멸망으로 끝나는 인생이 될 것인지 아니면 영원은 향하여 이어지는 영원을 향해서 의미 있는 인생이 될 것인지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두 길 중에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좁은 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 그가 찔림은(사53:4-5) 1997.7.20 주일오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키셨도다(사53:4-5)
아직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지 삶 자체를 바라보면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과학도 이제는 더 이상 이 우리 앞에 펼쳐진 놀라운 우주에 대한 탐험이 진보되어 가는 것으로 점점 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과학자들조차도 이 세상이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미신처럼 이해되고 고백되는 시기 속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에 화성을 향해서 날아간 탐사선을 통해서 저는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초속 약 15킬로미터씩 약 7개월을 날아가는데 무려 2억 킬로미터를 갔습니다. 그리고 그 탐사선이 화성에서 돌을 채집하고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희미하게 밖에 알 수가 없습니다. 거기서 오래 전에 대서양이나 태평양의 물 같이 많은 물이 흘러간 자리가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물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 우리는 모두 신기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도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그 광대한 우주 가운데 지극히 작은 일부분만을 여행하고 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탐사가 진보되면 진보 될수록 우리는 이 우주, 이 세상은 분명히 만드신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과학자는 이 우주가 우연히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확률은 시계의 부속을 다 분해해서 하나의 통 안에 넣고 하루 종일 흔들어서 그것들이 모두 저절로 붙어서 다시 시계가 되는 것보다도 확률이 적다고 한 말을 저는 기억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믿든지 말듣지 생각하든지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 온 세상을 만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수 천년동안 인간이 우주는 어떻게 존재되었으며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겠는가를 가지고 고민하면 살아왔지만 누구도 답을 내리지 못하던 그 수많은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간단하게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말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르기를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어두움과 죄악 속에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더 좋게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자연의 세계가 신비한지 보시기 바랍니다. 식물은 자기의 쓸 것을 다 쓰고 필요 없다고 내어놓은 산소를 숲 속의 동물들이 마십니다. 또 그들이 마시고 필요 없다라고 내어놓은 이산화탄소를 식물은 자신의 동화 작용에 사용합니다. 이렇게 완벽한 조화 속에서 만든 세상이 만드신 분이 없이 저절로 되었다고 믿는 것은 그야 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점에 대해서 논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분은 온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이 창조한 세계에 대해서 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을 세운 그 사람이 바로 집을 허물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세상,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것처럼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모든 창조를 끝내고 종말로 가져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 이후로 버려 두고 계신 것이 아니라 붙들고 계십니다. 가꾸고 계시고 그 창조의 세계가 질서 속에 운행되어지고 그리고 그 속에서 태어나고 있는 인간들을 굽어살피시면서 그 인간의 길의 하나 하나의 인생의 길을 정하시면서 인도하시며 그리고 그들이 당하는 어려움 속에서 구출하십니다. 또한 그들을 이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인생의 의문을 풀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부터 왔고 무엇으로 말미암아 왔으며 이제 앞으로는 이 인생이 어디로 걸어갈 것이며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결정하는 모든 결정의 전제가 하나님 살아 계시고 그 하나님이 바로 나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점에 있어서는 누구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각 사람이 기뻐하는 바에 따라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거나 배척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하면 우리는 이미 말씀드린 이유 때문이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으면 거기에는 분명히 계획이 있습니다. 무엇을 만들 때 거기에는 반드시 계획이 있습니다. 집을 지을 때는 살고자하는 계획이 있고 수로를 팔 때에는 물이 흘려가게 하려는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를 인간들이 탐사하고 답사 할 수 있도록 탁월한 능력을 주신 하나님이 이 창조 세계에 대해서 계획이 없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사귀시면서 살게 하시려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보다도 지혜로와 보이는 미물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동물들에게는 하나님과 사귈 수 잇는 특권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만 영혼을 불어 넣어주셔서 영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사귀도록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사귀면서 살고 그것에서 오는 기쁨으로 즐거움을 얻도록 만든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한 생애를 원하지만 불행한 것, 그리고 고통 없는 날을 원하지만 그러나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우리 눈앞에 보이는 모든 부정들, 그리고 인간의 질병과 아픔의 궁극적인 원인이 바로 죄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궁핍이나 무지한 것이나 질병이 그 사람을 힘들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많은 환경이 인간의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하는 그러한 죄가 인간을 고통하게 만들고 아파하게 만드는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은 우리와 사귀시려고 이 세상은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더불어 양립 할 수 없고 해결된 죄가 아니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될 수 없습니다. 범죄한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 것이고 그리고 심판은 인간의 2가지 죽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육체의 죽음과 또 하나님과 의 관계의 단절을 인한 영혼의 죽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사는 모든 사람들은 죽어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영혼이 죽어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좋은 것이든지 나쁜 것이든지 속히 지나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 세상에서 범죄하고 악한 일을 한 사람도 속히 지나가지만 선한 일을 한 사람도 속히 지나갑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이 없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속히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로 말미암아 어떤 일들이 오게 되었는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는 오늘 암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었다 라고 말합니다. 그가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구원을 얻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징계를 받으므로 나음을 얻고 채찍에 맞으므로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죄 가운데 있을 때는 평화를 잃어버리고 그 안에서는 병든 사람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바라보는 인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까지 그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고 그리고 병든 사람, 육신이 어떤 모양으로 살든 상관없이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과 평화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 되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여전히 우리 앞에 있고 그리고 그 위에 살고 있는 인생들도 주님이 창조하신 인생입니다. 주님이 창조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사귀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게 주신 이 온 세상과 우주를 우리의 행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가꾸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우리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즐거워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그런 지 의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한 아름다운 세상은 가시와 엉겅퀴로 뒤엉킨 세상이 되었고 하나님을 창조한 세상을 지배하는 질서와 아름다운 균형은 깨트려지고 죄악과 부패와 무질서와 병든 것들이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세상에 고통이 들어오고 그 고통 안에서 살면서 인간은 점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멀어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인간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다음에는 자기의 욕심과 자기의 생각에 따라서 자기 멋대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살았고 자기 욕망이 원하는 대로 자기 인생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결말은 범죄였습니다. 그리고 범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왔습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생각이 하고 무엇을 목표를 하며 살아가든지 성경은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지독한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죄는 단지 형법을 어긴 죄가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어긴 일을 먼저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는 원래 하나님의 목적한 창조의 세계로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으로 돌아오는 일 없이는 그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 가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범죄 했을 뿐 아니라 영적인 어두움이 인간들을 덮었습니다. 분명히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그러한 무지몽매함이 그들의 마음을 뒤덮어버렸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그 하나님에 대해 대적하는 데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가 원하는 길로 걸어간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성경이 주고 있는 그림은 병들어 있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의지대로 할 수 없고 그칠 수 없는 쾌락에 빠지고 유흥을 즐기는 것은 일종의 질병입니다. 자신들도 그것을 그칠 수가 없습니다. 단지 도덕심이 부족하거나 혹은 무법한 시대에 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질병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질병에 처해 있는 인간을 하나님이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공자 없이도 유교는 존재합니다. 어느 철학 교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정한 불교는 부처조차 사라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깨달으면 누구도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석가모니가 없어도 불교는 존재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마호메트 없이도 회교도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기독교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역사상 생긴 종교 가운데 이렇게 철저하게 한 사람에 매인 종교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이 기독교의 중심이십니다.
예전에 같이 신학교 다니던 한 청년이 조금은 자유스러운 교회에 출석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성경 공부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한 젊은 목사라는 사람이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동정녀 탄생을 하였는가 라는 질문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학생들을 다 토론을 하는데 목사라는 사람이 여러분 예수님이 만약 사생아로 태어났다면 여러분은 안 믿을 것입니까? 라는 질문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만히 있는데 그 한 청년이 손을 들고 나는 안 믿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비웃듯이 웃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어떤 예수를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 그 예수가 어떤 분이셨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하는 것, 그분에 대한 믿음 없이는 그리고 그분의 역사적인 존재적인 믿음 없이는 결코 우리의 구원은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철저히 한 사람에게 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인간 구원의 모든 드라마는 한 사람을 중심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이 타락하면서 즉시 하나님께서는 즉시 누군가 우리의 구원자를 보내 주실 것을 말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분이 누구인지 분명해지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점점 분명해져서 예수 그리스도인 것까지 알려집니다. 초대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성도들이 모두 뛰어나가 외친 것이 우리가 바로 나무에 매어 달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였으며 바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 길은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을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얻는 길이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말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고 치료를 가져다주었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러한 복음의 놀라운 능력은 계속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계속됩니까?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평화가 다시 찾아오고 병들어서 자기의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깊이 병든 인간들을 어떻게 치료하셔서 원래 창조의 목적대로 건강한 인간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이러한 놀라운 치료하시는 은혜는 어떠한 공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고난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쌓였던 인간이 범한 죄악과 하나님 앞에 놓인 인간의 많은 불순종들이 하나님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주의 권세로써 인간이 지은 이 많은 죄를 징벌하시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분이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인간을 사랑만 할 뿐 아니라 진노하고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 당신의 의도대로 참된 질서와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범죄하였고 불순종하였습니다. 죄가 들어왔고 고통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세상에서 범죄한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고자 하였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외 없이 이 세상에서 인간을 심판 하셨다면 세상은 이미 불바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구원의 길을 여시고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 예수로 하여금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으로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죄로 가득한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분은 이 인간의 죄 가운데 거할 수 없는 분이셨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들로 말미암아 생긴 고통과 결핍을 맛보셔야 할 이유가 없는 분이셨지만 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해 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원래 하나님과 사귀게 하는 그러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 다시 말하면 사람을 고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33년을 이 세상에 살면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고초와 슬픔을 경험하셨습니다. 결핍과 이별과 고통을 모두 경험하면서 범죄한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살이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이 얼마나 필요한지 단지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주님의 거룩한 인품으로 모두 체험하셨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써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 보다 더 우리의 피부에 와 닿는 그러한 사랑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세상의 인간들과 함께 결핍과 고통 속에 울고 웃으시면서 구원받아야 할 인간들, 그러함에도 죄로 말미암아 깊은 비극과 고통 속에 병든 자로 살아가는 이 인간들, 자신의 힘으로는 저주받은 영혼의 상태를 고칠 수 없는 인간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성취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33년을 사셨습니다. 그 분이 때로는 가르치기도 하셨고 병든 자를 고치기도 하셨고 이적을 행해서 많은 사람들을 먹이시기도 하셨지만 그 모든 섬김의 목표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전 사람들에게 계시된 그의 이름 속에 나타났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니라 ’ 예수 그리스도는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내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주님이 죄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고통과 아픔을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친히 맛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와는 달리 죄는 없으신 분이셨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겪어야 했던 모든 슬픔과 고통을 몸소 겪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시간에도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들도 소망이 없다라고 마다하지 않으시고 죄인들도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선대하시는 이유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사셨던 33년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우리를 그 주님과 형제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이 맛보았던 모든 고통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맛 볼 모든 슬픔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래서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주님이 이 세상에서 주님이 이 세상에서 우리와 같은 생애를 사셨던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릅니다. 그 세상에 모든 아픔을 맛보시고 고통을 맛보신 주님이 또한 우리들이 겪는 고통과 이 세상에서의 슬픔을 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장할 때까지 생업을 가진 한 평범한 인간이었습니다. 해가 뜨면 일터로 가셨을 것이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약간 허무해 보이는 인간사의 종사하신 것은 그러게 허무하고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님의 한 방법이었을 지 모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손에는 일생동안 우리를 섬기며 사시기 위해 애쓴 굳은 살 배긴 손이었고 그 발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다니시고 죄인들을 위해 갈릴리와 유다와 사마리아로 다니신 그 섬김의 발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이적을 행하시며 그리고 선을 행하시면서 후대해 주셨지만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기적과 인격과 놀라운 교훈으로도 우리를 구원하실 수는 없으셨습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우리의 죄 값을 담당하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자신의 몸을 찢으셔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순결한 분이셨습니다. 일평생 아버지를 위해 사신 분이셨고 죄가 있다면 우리를 너무 사랑한 것 밖에는 죄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700년 전에 그 분이 어떠한 생애를 사시고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히실지 명백하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고 우리가 순종하지 않고 불순종한 모습이 그분을 죽기까지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를 때린 것은 사람이었고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로마의 군병이었지만 그러나 고귀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허락한 것은 하나님 마음에 타오르고 있는 우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죄 지은 자가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담당시키지 않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킨 것은 형벌과 고난을 당하게 하신 것은 끓어오르는 진노를 우리에게 담당시키지 않는 그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나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 아버지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제가 처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던 그 20대 초반 제가 경험한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을 살고 그랬는데 인생 자체가 너무 커다란 고통 속에 들어가고 그리고 내가 젊은 시절을 지난다고 하는 것이 버겁고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저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정말 하나님 이외에는 소망이 없는 것을 보이시려고 한없이 고통스러운 그 시간을 보내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하나님 앞에 복음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돌아오고 깨달은 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아주 엄격한 아버지 아래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와 같이 앉을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빨리 모면할 수 있을까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마음이 다가오지 않았는데 신앙이 내 마음에 깊이 들어오고 나니까 깨닫게 된 것은 그 하나님 아버지는 이 세상의 아버지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이 얼마나 큰가, 고통하며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원망을 많이 하였는데 사실은 그것이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고통을 느낄 때 하나님은 나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시면서 긍휼히 여기셨다는 어떤 깨달음이 내 인생 속에 찾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의 모둔 고뇌와 슬픔은 하나님 품안에서만 종식 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가출 할 때에는 집안을 떠나면 행복이 기다릴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러나 결국 진정한 쉴 곳이 집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는 일들이 있고 나서야 우리가 평화를 얻고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을 영접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의 죄 짐을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이제 하나님의 진노는 사라지셨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내어진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하며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창조할 때의 계획대로 살아가도록 여러분들을 불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이전에 행하지 않던 어떤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마땅히 걸어가야 하나 너무나 오랫동안 걸어가지 않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가출 소년 소녀가 집을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형제를 떠났던 그 고단하고 고통스럽던 길을 끝내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서 그 집에서 주님과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그 무엇을 찾아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비참하게 못박고 파멸에 빠뜨리심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우리와 더불어 화평을 누리시기를 원하시고 얼마나 우리와 더불어 정말 화목한 삶을 살기 원하시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눈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에 여러분들을 위해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해 보십시오. 선한 일밖에는 한 일이 없는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를 섬기기 위해 수고하셨던 그 손은 못 박히고 우리를 섬기기 위해 찾아다니시던 그 발이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에 사람들이 수많은 상처를 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그 놀라운 고난, 그분의 받은 형벌의 비참함을 우리는 피하지 말고 직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피 어린 고난과 자기를 모두 찢으신 고난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불타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아들을 찢고 나의 진노를 내 아들에게 부어서라도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니 너희는 이제 나에게 돌아와서 화목하고 내가 너희를 이 세상에 만들어 놓았던 그 참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와서 이제는 너희가 잠시 머물다 가는 세상이 하나님 앞에 형벌을 쌓아 가는 세상, 마셔도 마셔도 목마른 것이 가시지 않는 세상의 물을 마시다가 세상과 함께 멸망당하는 그런 비참한 인생이 되지 말고 너희는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그 화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넘치는 고난은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의 보증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고난 당하신 십자가를 보면서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와 화목하기를 원하시고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그 평화를 다시 회복하고 싶어하는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당신이 창조한 그 세상 하나님이 보시고 아름다웠다 라고 하는 그 세상 그리고 그 가운데 창조한 인간 그리고 그 인간들과 더불어 나누었던 하나님의 아름다운 교제와 그리고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그들과 함께 나누었던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이 우리들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 사랑에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이 이제껏 나를 추격하였고 이제껏 나를 지켜왔습니다. 나로 하여금 수많은 인생은 골짜기를 지나 이곳에 나오게 되었는데 하나님 이것이 우연은 아니었습니다. 몸부림치며 도망하면 도망할수록 하나님은 더 빠른 걸음으로 추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려고 하면 할수록 그럴수록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 왔습니다. 지난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이 피할 수 없는 사랑을 알고 이 감동을 받아 이 사랑에 포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평화를 다시 이루신 하나님, 나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격하고 찬송하면서 매일 매일 살아가도록 우리는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분도 계실 것이고 아직 그 분 밖에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어디서 어떤 인생을 살다 오신 분인지 다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을 그리스도와 평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롤 믿는 것 없이는, 여러분들의 인생은 모두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이런 뜨거운 사랑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러한 사랑을 거절한 사람에게는 불붙는 사랑이 심판으로 바꾸실 경고도 함께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둘 중의 하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화해의 십자가의 손길을 거절하고는 하나님 앞에 살아남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초청과 함께 심판을 음성을 함께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도 우리가 어느 길이 생명의 길인지 알고 선택하기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지속되고 있습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하나님께서는 건져내시고 그 죄가 주홍과 같이 붉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내기 위해 내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그 믿음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공로 없고 의가 없어도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그리고 우리가 죄인이지만 나를 향한 하나님의 그 사랑을 감당할 수 없사오나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놀라운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내가 받아들이는 할 수 없는 죄인을 주여 용서하시고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너무나 나의 죄가 크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의 고난은 가장 극악한 죄를 지은 자를 형벌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고난의 크심은 그가 용서하실 수 있는 죄의 크기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온 이후 의롭게 사는 자와 죄악된 자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하나님께는 순결한 사람도 거룩한 인생도 고결한 사람도, 성결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오며 오직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우리의 죄를 모두 담당하고 자기의 몸을 갈가리 찢은 사랑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담이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우리의 죄악이 가득 찼으나 그 피에 발을 씻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피 공로를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밟고 나아오는 많은 사람들을 받아주시고 용납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은 거대한 임마누엘의 샘이 되었습니다. 그 보혈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수많은 사람이 그 샘에서 손과 발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도 그 보혈의 샘은 결코 더러워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은 이 보혈의 샘에서 우리의 죄로 물든 더러운 마음과 하나님과 거슬러 살았던 우리의 몸과 마음의 모든 죄를 씻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내가 너희를 이렇게 사랑하여 내가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니 너희는 나의 이 사랑을 누리고 나의 이 용서를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진실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6. 이스라엘의 잃은 양을 찾아서(마10: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6)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십자가 사건 이후로 중요한 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은 후에도 당신의 사역을 물리실 열두 사도를 세우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는 10장에서 예수님께서 12사도를 세우시는 그 장면 이전에 먼저 9장 뒷부분에서는 어떠한 동기에서 예수님께서 그 사도들을 세우셨는가 하신 것을 먼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사도들은 이제 그 의미 자체로 말하자면 세상으로 파송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세상을 파송된 자이지만,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제자들을 품에 두시고 부지런히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알게 하셨습니다.
그 후 어느 시간이 오자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신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아포스톨로서 그들을 즉 사도라고 부르십니다. 물론 이들이 사도로 파송되었다고 해서 그 후로는 전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들을 세상의 사도로 세우신 것은 이제 언제까지나 너희가 양육을 받는 자가 아니라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라는 것을 너희들이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이 사도가 본격적으로 사역 속에서 사용되는 것을 봅니다.
그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세상으로 파송된 사도들이 완전한 사람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로 파송 받았지만 그들은 아직도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과 그 속죄의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 죽으신 그 이후에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과 그 부활과 예지가 그리스도의 구속에 어떻게 드러날지를 명료하게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를 세상에 파송하는 것을 보면서, 한 가지 깨닫는데, 하나님께서 미완의 사람에게도 사명을 주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신앙의 성숙과 온전케 되어짐을 인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부단히 전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존재가 모두 되고 나면 그다음에 비로소 사명이 주어질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오늘 이같은 성경을 볼 때에 지지 받지 못합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사명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이 부족하면 니가 무슨 사명이냐고 네 사명은 그저 예수님 잘 믿는 사명이라 말할 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도 불완전한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명을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는 것과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되는 것보다는 존재로서 행하고 행함으로서 어떤 존재가 되어가는 순환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일에 빠져서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지 못하는 일에 중독된 사람이 되어 그런 성장으로 영적 성장으로 인도되는 것은 아닌 것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살피고 주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인해서 끊임없이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면서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라면, 아직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에게 사명이 없고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목할 사실은 이들이 비록 그런 점에서는 깨닫지 못했지만, 이들은 적어도 두가지는 이들의 마음에 갖추어진 사람입니다. 우선 첫째는 잠시 후에 살펴볼 목자잃은 삶 같이 유리하는 영혼에 대한 주님의 연민을 품은 자이며, 둘째, 이들이 사역에 들어서서 세상으로 파송되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놀라운 권능을 받아서 무장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바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세상을 향해 보내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되어야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부르셨을 때에, 사명을 감당하기 원하는 것이고, 사명을 감당하기 원하는 사람에게 그에 여러 가지 부족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권능으로 덧입히셔서 이 세상을 제압하고 문제가 많은 세상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길을 그들에게 전파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세상으로 보냄 받은 자로써 자신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권능으로 온전히 무장되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사도가 만약에 이런 사람들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과 치료 사역과 그휼에 넘치는 말씀 사역들,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삼중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부른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 사도들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이들을 세우셨는지 살펴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명과 직분을 맡길 때에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직분을 맡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당하게 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합니다. 주님이 어떤 동기에서 우리를 부르셨는지를 깨달으면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진정으로 충성된 삶인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12사도를 택하사 사도로 부르시기 전에, 예수님은 목자잃은 양같이 유리하는 영혼들을 보면서 마음에 깊은 감동과 연민을 가지고 이 사도들을 불러 주의 사역을 감당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도를 택하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에 큰 권세를 보여주려 하심이 아니라 그들에게 병과 약한 자를 고치고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변화시키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능력을 주신 동기는 영혼들을 향한 끊임없는 연민이었습니다. 유리하고 고생하는 당시의 백성들을 향한 끓어오르는 연민이 그 동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깊이 가슴에 새겨야할 것은 복음을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 성도들, 특별하게는 이 복음 증거와 전파를 자신의 전체의 사명으로 부름 받은 그러한 특별할 사명자들 누구든지 간에 모든 사람들은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그 동기 자체가 이와 같이 영혼을 향한 한 없는 연민이 그 동기가 되어야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연민, 자신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려 몸부림치나 내동댕이 쳐진 사람들, 괴롭힘을 당하나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자들, 무엇으로도 그들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없고 그들의 불행한 인생의 비극을 막을 수 없는 그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하여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나누어 가진 자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찬 사람이라는 것은 영혼들에 대한 연민의 눈물이 있는가 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내 주변에 무수한 영혼들을 보면서 연민을 느낄 수 없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과는 거리가 먼 자들에 대한 연민이 없는 자는 너무나 불쌍하고 자신이 죽어 있는 영혼을 가진 성도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의 눈물이 흐를 때에, 우리의 눈에는 구원 받지 못한 영혼들을 향한 연민의 눈물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마음 파도스 곧 열정이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핍절한 영혼들에 대한 찢어지는 아픔의 마음을 공동으로 나누어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만이 하나님 앞에 깨어 있는 사람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깨어 있다는 표현을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의무를 다하고 율법적인 의무를 준행하는 것을 보고 한 사람이 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한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풍성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들어 있던 때를 기억하십시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어있었던 때에는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사는 때였고 주님의 마음을 물려받은 때였습니다. 거짓 선지자와 참된 하나님의 선지자 차이는 실력이나 언변의 차이보다는 오히려 그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에 유무에 있습니다. 참 목자와 거짓 목자의 차이도 바로 그것입니다. 참된 목자 선한 목자 안에는 대 목자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흐르고 거짓 목자의 마음 속에서는 주님의 마음을 아랑곳 하지 않는 냉담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그들의 마음속에 이와 같은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백성들을 향한 그칠 수 없는 연민의 마음을 나누어 갖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마음을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지 않다면 그의 마음속에 있는 소리는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주님을 아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핍절한 영혼들의 그리스도 예수의 연민의 마음이 공유됩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이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했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은 바로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파송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아들을 보혈을 받으시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3년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핍절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주님이 흘린 눈물을 먼저 받았습니다. 연민의 눈물을 보시고 그의 피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피를 통해 당신의 외아들이 그렇게 눈물 흘리셨던 주님의 피를 보고 그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작정하였습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도 전수되어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슴속에 흘러야하는 눈물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 있는 육적 그리스도인과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체험했으니, 목자 잃은 양 같은 영혼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자신이 감동받은 것을 위해 삽니다. 세상에 감동된 사람은 세상을 찾고 그것을 위해 살 것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 자들은 그 십자가를 위해 살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혼을 향한 그 연민을 공유한 자들은 어디서든 어떻게든 언제든지 그들을 위해 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정말 주님의 마음을 물려받은 사람입니까? 오늘 우리 시대에는 이스라엘 시대보다 더 유리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때보다 사람은 더 많고 그리고 악하고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가 필요한데 그분을 원하지 않고 주님의 품에 돌아오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죄악을 향해 치닫고 세상을 구축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니, 우리가 아니면 누가 그들을 향한 눈물로 그 예수님의 마음을 적시는 그분을 따를 것입니까?
우리를 돌아봅시다. 우리가 4대 성인 중의 한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우리의 인생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그분과 아무 상관이 없고 그분을 그렇게 진실로 사랑하며 따른 이를 병적인 광신자라고 생각했던 우리들에게 누군가가 그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받치는 사랑을 전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느낄 수 없는 그 사랑을 눈에 보듯이 선히 말해주었습니다. 우리 자신도 도무지 불쌍히 여기지 않는 우리의 영혼을 위해 눈물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억합니다. 저에게는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내 손을 붙들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이외에는 내 인생에 아무 소망이 없다는 것을 미리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떤 헌신된 사람이 내게 예수님을 전해주었다면 아마 나의 방탕하고 방황하던 그 숱한 날들을 보내지 않고도 젊은 시절을 충분히 준비하며 지금보다 고귀하게 주님의 부르심을 위해 쓰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어린 형제자매들처럼 주님의 사랑이 없어서 모두 세월의 흐름에 흘려보냈습니다. 젊고 어린 지체들이 신앙에 서지 않고 여기저기 흔들리고 불순종하는 것을 보면 분노가 생겨나다가도, 저맘때 내가 뭐했지 생각나면 하나님 앞에 죄송합니다. 이 세상에 나만 있고 내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부패한 젊은 이 중에 하나,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좀 더 일찍 누군가 내게 와서 그리스도의 예수의 십자가와 그 눈물과 그 마음을 가르쳐주었다면,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었으니 그분을 꼭 붙들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저같이 불행할 젊은이들이 수두룩합니다. 목회사역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젊은 시절을 회상할 때, 두 가지 뼈아픈 후회를 합니다. 10대 초반이나 후반에 주님을 만나고 주님밖에 모르는 젊은 시절을 보내다가 목회사역을 들어섰더라면, 내 목장의 양무리들에게 좀더 깊은 경건과 신앙의 비밀을 가르쳐 줄 수 있을 텐데, 아직도 주님의 은혜를 아는 천박함을 후회합니다. 또 하나는 더 어렸을 때, 하나님의 사역에 나를 드리기로 작정했다면, 10대 초반부터 20대 중반까지 5에서 10년까지 생명의 위협을 느낄정도로 하나님을 아는 학문을 탐구하는 것에 자신을 헌신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수시로 밀려옵니다. 그래서 주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아직도 주님이 주신 기회가 많이 있는 여기 모인 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어린 시절에 그분을 만난 것에 자만하지 말고, 주님을 더 알기 원하는 그것에 자신을 드림으로 지식을 쌓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셔서 이 세상에 저와 같이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을 알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살아가는 진실한 성도들의 모본을 본적이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마지막 희망이 무엇입니까? 형식적으로 살아가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 조금도 신앙이 무엇인지 진실하게 생각하지 않는 나이롱 신자에게 필요한 우리의 최대한의 섬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의 기를 죽이거나 세 치 혀로 설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영혼의 곤고함을 자신의 영혼의 곤고함처럼 한없이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는 누군가가 그들에게 다가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줄 때, 그들은 돌이킬 기회를 얻을 것입니다.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교사로 섬길 때, 교회에서 영혼들을 섬기는 데, 주일날 교회 한 번 가면 집에 돌아갈 때, 갈기갈기 심령이 찢어지는데, 몇 아이들이 공과 공부 분위기를 흐리고 아이들을 때리고 욕합니다. 야단을 쳐도, 뭘 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루는 공과를 가르치는데, 여러 번 공과를 가르치다가 한없이 울었어요. 새사람 되게 하라고 하나님이 보내주셨는데, 아무리해도 안되고 중보 기도도, 간식을 사 주어도 안되고, 그래서 공과를 하다가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참 진심을 아이들이 알아주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의 진실한 마음은 진실을 보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자기들을 위해 우는 나를 보면서 우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내가 자기들을 향해 눈물 흘리고 울때, 선생이 운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들을 보며 슬퍼한다는 사실을 그 강퍅한 아이들의 마음에 사진이 찍히듯이 팍 찍혔어요. 그 아이들이 그 광경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회개합니다.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기 시작하고 진리에 귀를 기울이는 아이들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영혼의 변화가 진리를 통해 오는 것은 사실이나, 사랑이 동반되지 않은 진리가 무슨 소용이 있나? 그 사랑이라는 것은 주님의 영혼들을 향한 주님의 민망히 마음입니다. 그런 사랑이 아니면, 그들이 유리하고 방황하는 것 때문에 도대체 눈물 흘릴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 정신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정신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그 천사의 말이 무엇인가? 혹시 복음이 아닐까? 그 천사의 말이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대한 놀라운 증언이 아닐까요? 그 천사의 말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 천국에 대해서 증언해주고 구원을 위해 증언해주는 천사의 소리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을까? 전혀 없습니다. 사람의 말보다 얼마나 탁월합니까? 천의 모본의 아름다운 말로 전파되는 복음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를 보면, 많이 알고 공부 많이 한 사람만 쓰신 것이 아니다. 정말 아는 것이 없는 사마리아 여인 같은 사람의 투박한 증언으로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도 식자를 통해서도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의 지식을 가져도, 사랑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자무식자도 영혼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투박한 말로 영혼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합니다.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인간의 영혼을 향한 사랑과 영이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아주 정확하게 비례합니다. 영혼을 향해 냉담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냉담한 사람입니다. 오해하실지도 모르지만, 복음을 전하는 자가 최고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직분에 대한 어떤 상하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영혼을 향한 불타는 사랑이 있을 때, 영혼 이외에 다른 것을 위해 봉사하는 것에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교수직에서 나왔을 때, 몇 사람이 말렸어요. 좋은 말로 죽 하는데,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요새 교수직이 하늘에서 별 따기인데, 당신이 이것을 박차고 가려고 하십니까? 또 하나는 목회가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느냐? 사실 그 이야기는 맞습니다. 성공이라는 말도 우습지만, 거기에서 보람을 찾고 정말 하나님께 쓰임 받는 기쁨을 가지고 사역한다는 것은 누가 장담할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20-30년도 헌금도 못내는 성도들을 사역하다가 죽는 날까지 고생하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 간절히 꿈꾸던 사역이니 보람이 있습니다. 항상 마음 한 구석에서 금요일 오후에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금요일 오후에 운동장에 서 있는 마음이 그렇게 공허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필요했습니다. 섬기면 섬길수록, 신학교 교수도 귀한 직분이지만, 만족이 안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침묵하고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사랑이나 십자가의 은혜를 말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영혼을 위한 사랑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라]는 그 책, 그 책 속에서도 분명하게도 제가 밝혔듯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은 나뉘지 않고, 이는 곧 자신의 영혼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그 형상은 하나님을 닮은 것인데, 그 사람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을 때 그 사랑에 감화되어 살 때만 가능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영이신 그 하나님을 인해서 행복해질 수 있는 그 영혼에 대한 사랑은 나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주님의 마음으로 영혼을 사랑하며 그 사람의 육신도 사랑입니다. 이 마음이 주님의 마음이고, 이 마음을 세상에 나아가는 전도자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 마음이 우리의 가족과 친지들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들이 회복해야할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전도했는가? 하는 성과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태도와 마음으로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해 마음쓰고 섬겼느냐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면서 차라리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영혼에 가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차라리는 오히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너희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어린 양에게로 가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예수님 당시의 맥락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야한다는 우선적인 관심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만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아니지만, 일차적인 약속의 백성들 가운데 오사 그들 가운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그들을 위해 사역하도록 보내졌습니다. 그 복음이 성령강림을 통해 새로운 지평의 사역으로 펼쳐지는데 그것이 이방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방인들보다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 가라고 한 것은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을 멸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이미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 그 예언을 먼저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넘치는 연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힘 닿는 대로 자신의 동족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고 약속의 자손들에게 먼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도 제일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그 사람들에 가슴에 피를 쏟게 하였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들은 복음을 전파하지만, 특별히 주님을 믿다가 낙심하고, 침체된 이들에게 더 많은 애정과 연민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길이를 전해주어야 합니다. 믿다가 낙심한 사람들은 그들은 더 시급하게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영적인 의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아는 사람이고 그들이 맛보다 뒤로 물러갔으니 그들의 죄는 더 큽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그 심판 날이 이르기 전에 주님과 함께 누렸던 이전 날에 기억들을 되살리고 우리가 그들을 위해 더 많이 배려하고 수고해야한다는 것은 부인할 여지가 없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예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냉담해져서 멀리 떠났으나,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먼저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들이 우리의 다시 전하는 복음을 듣고 주님께 돌아올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선교적으로 큰 회개를 경험한 다음에 지속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의 절대적 바램이지만, 그렇게 깊이 깨뜨려졌던 사람이 다시 교회를 버리고 신앙을 버린다 해도 참된 회개는 정말 필요합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쳐보니, 한번 깊이 깨져서 주님의 사랑을 만났던 아이들은 오랫동안 교회를 떠났던 자들은 심방을 가서 간절히 기도해주기만해도 돌아옵니다. 그러나 회심의 경험이 없는 자들은 자기 손등에 떨어지는 선생님의 눈물을 가지고 장난합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교회를 떠났던 아이에게 찾아가 제일 먼저 묻는 말은, “행복하니?”라고 묻습니다. 어두운 그림자가 확 비껴갑니다. 사랑의 때를 회고시켜줍니다. “그때는 하나님 사랑이 느껴졌었지?” 주님 내안에 주님 내 안에 계시고~ 그리고 붙들고 아무데서나 보도블록 위면 어떻습니까?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니?”라고 말해주면 그 아이도 영혼이기에 웁니다. 주님을 떠나 잠시 즐거움이 있는 듯하나, 운동회 끝나고 빈 운동장처럼 아무 것도 없는 행복이 없습니다. 공허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만났다가 떠난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해야합니다. 담배를 피워본 적 없는 사람에게 담배 피게 가르치는 것이 쉬워요? 골초에게 잠깐 끊은 사람에게 담배 피게 가르치는 것이 쉬워요?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부흥회를 수없이 다녔습니다. 부흥회 가면, 설교가 끝나기 전에도 통곡하고,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슬피 우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옛날에 그렇게 깨뜨려져 본 적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95%정도는 그럴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다가 미끄러진 사람들은 겉으로는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우리를 상하게 하며 도움을 거절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흐느끼면서 우리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그들에게 물어봐요. “행복하니?” 비꼬지 말고 물어보세요. 복음 전해 보면, 우리 생각에는 한 번도 교회 나가 본 적 없는 사람이 압도적일 것 같지만 아니에요. 한 번도 교회 안나가거나, 예수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오히려 소수입니다. 믿다가 낙심한 사람들, 신앙을 가지려고 했는데 교회 공동체에게 불신을 갖게 된 사람들, 교회의 부도덕과 비윤리적인 모습 때문에 상심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로 먼저 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정말 그들 가운데 희어져 추수하게 된 곡식들이 많다는 것을 경험이 증거 합니다. 그들에게는 추수할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에 대해, 주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멀리 떨어져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복음의 전파 정말 필요합니다.
요즘은 편지 쓰는 것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전에 전도사가 되기 전에는 편지를 통해 친구들 몇몇을 그리스도께 인도했어요. 요즘 세상에 누가 자신을 염려하면서 편지를 한 페이지를 적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이 메일에 뭐 사가라는 편지는 있어도 없어요. 그런 것 없어요. 광고들 빼고 자기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편지는 없어요. 사람들은 관계에 주려있어요. 관계에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진심으로 염려하면서 한 장의 편지, 한 통의 전화, 한 번의 청취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짤막한 이야기 한 마디가 얼마나 그들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는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눈을 들어 가보지 못한 먼 선교지를 볼 수도 있으나, 눈을 주변으로 돌려 한 때 주님을 믿다가, 주님을 만났으나 불신자와 방불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나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그들의 영혼의 울부짖음을 들어보세요. 그들이 그들 자신의 영혼에 대해 귀를 기울이고, 교회에 데리고 와서 주님의 십자가에 돌아가게 해주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한 번 교회에 와서 한 번 예배에 참여해서 그 결심이 흔들리지 않았던 사람이 있냐고 묻는다면, 다수의 사람이 있습니다. 더 일찍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었다면, 1년 빠르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했을 리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도 한 번 와서 예배에 참석해서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고 지금까지 여기에 있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한 복음의 선포가 있고, 성령님의 축복이 있는 그곳에서는 초막이나 궁궐이나 부럽지 않습니다. 그 한번의 KO가 얼마나 놀랍나요? 여러 번 다니다가 서서히 믿기로 결심했던 사람들의 회심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나와서 정확하게 장렬하게 KO 하나님의 역사를 느끼고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주님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들인 우리가 다 경험해봤지만, 주님을 우리 발로 주님을 떠났지만, 우리 발로 돌아올 수 있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양이 아니고 개지요. 개는 낑낑 거리며 돌아옵니다. 양은 못 돌아옵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안됩니다. 누군가가 가야합니다. 그러나 보내는 분은 주님이지만 가는 이는 우리입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안 사람, 주님을 멀리 떠나 사는 삶이 곤고한 것을 깨달은 사람, 십자가 그늘 이외에 참 안식을 얻을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 십자가 그늘 아래서 쉴 곳을 얻은 사람들이 체험적인 사랑의 증언을 가지고 가서 행복하냐고 묻고, 행복하다면, 더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소개하고, 고통스럽다고 하면, 주님을 떠났기 때문임을 알려주어, 그들의 눈에 비늘을 벚겨 예수님의 참 사랑으로 돌아오게 해주어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일평생 쉬지 말아야할 것이 바로 이 일입니다. 정말 누가 우리에게 주님 전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얼마나 많은 인생의 날들을 무지의 어둠 속에서 보내면서 고통 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그러나 예전에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전도자가 되어야합니다. 그들의 곤고한 영혼의 형편을 깨닫게 해주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하고 그들을 가르치는 그런 사람이 정말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하시렵니까?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에 마음을 아뢰십시오. 여러분의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여러분의 친지들 주님 없어서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분명한 여러분들의 직장의 동료들 사업상 거래 관계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주님이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모두 그리스도의 참된 십자가가 전해지면 여러분보다 훨씬 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섬기며 주님의 영혼들을 섬기지 못한 날들을 속죄하며 그들을 위해 그 일을 위해 해야겠다는 마음을 품는 사람들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려함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생각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혼에 대한 사랑 없음과 주님의 마음 없음을 뉘우치며 주님이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전하며, 교회 가자고 그들의 팔을 붙들어 보십시오. 그들의 뿌리침은 주님 앞에 영광된 모욕입니다. 성공이면, 영광이고, 실패하면,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 진심을 바쳐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 우리를 바쳐서, 주님을 멀리 떠났던 불쌍한 영혼들이 돌아오도록 그들에게 사정을 해서라도 간청하더라도 한 밤중에 떡 한 덩이를 강청하는 사람처럼 우리 주님께 강청하고 그 사람에게 부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실패했더라도 우리 양심의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우리의 기도는 결국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마음을 다해 오늘 이 시간에 그런 필요를 가진 영혼들을 기억하면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이 누구인지 기억하고 그 영혼들에게 꼭 한 번 거절당한다해도 어눌하더라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자고 그들을 전심으로 설득해서 그 영혼이 그 주에 주님을 만나고 회심한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런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1) 구원받은 강도(눅23:39-40)2000.8.15 온가족 수련회 새벽
(눅 23:39-40)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우리를 위해 매달리실 때 일어난 일 중에 하나를 성경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는 양쪽에 강도가 함께 매달렸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교회의 야사에는 여기에 매달린 사람이 디마스와, 게다스 라고 전해 내려옵니다. 두 사람은 어쩌면 일생동안 동료로써 살인과 약탈 그리고 가정 파괴를 일삼는 흉악한 죄인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복음서 중에 어느 곳에는 예수님 곁에 달린 두 강도가 함께 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오늘 여기에는 한 사람은 욕하지만 한사람은 예수님을 욕하는 자기 동료를 꾸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설명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6시간 정도 달려 계셨는데 처음에 이 강도들이 매달렸을 때에는 똑같이 그 예수님을 한 사람은 왼쪽으로 보면서 한 쪽은 오른쪽으로 보면서 욕하는데 있어서 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편에 달린 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중 한사람의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변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돌아가시는 그 모습을 뵈오면서 그 분의 죽음은 자신에 죽음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죠.
오늘 성경에 실린 이 사람의 고백을 보면 제일 먼저 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범죄하고 강도 짓을 하면서라도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보면서 그는 자기들이 이렇게 죽는 것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고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에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으려면은 죄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죄는 단지 불행이나 인간적인 결핍, 가난, 불편함, 불행 그런 것이 아니에요. 죄는 하나님을 향한 적극적인 범죄입니다. 그에게 죄에 대한 생각이 생겨났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생겨났다 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해 상당한 보응을 받거니와” 예전에는 “하나님이 어디 있어? 그저 우리 맘대로 사는 거지?”라고 생각했던 이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보면서 그 분의 죽음과 자신에 죽음을 비교하면서 자기와 자기의 동료가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당하며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먼저 죄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살아 계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지 못하는 모든 것이 죄이며,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부터 나는 그 죄를 물려받았다고 하는 확신, 그 죄가 인간의 모든 불행과 고통에 근본 원인이고 그 죄에 대한 깊은 회계와 우리가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라고 하는 이 신념 없이는 어떤 식으로도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아직 까지도 구원받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구원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여러분들이 먼저 죄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돼야됩니다. 이 강도는 강도였지만 죄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온 그 모든 날들이 죄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어요. 처음에는 예수님을 욕했고 그리고 예수님을 모욕했지만 그러나 십자가에서 자신들과는 전혀 다르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그 분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를 향해 욕하고 자기를 향해 채찍질하고, 자기를 박해하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들이 십자가에서 사람을 원망하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저주를 퍼붙고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조용히 기도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저희는 저희에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평정을 잃지 않는 평안한 모습으로 자기를 죽기까지 내어준 그 악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용서하고 기도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뵈오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들과는 다른 분이시다 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자기와 같은 죄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 갈 수도 있고 데려 가지도 않을 수 있는 메시야 라고 하는 사실을 거기에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오래 교회 다닌다 할지라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구원받지 아니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생명이 있습니까? 정말 구원받았습니까? 복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그 복음이 여러분의 인생과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상과 그리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인간들을 위해서 오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기독교에 익숙해지는 것이 곧 구원받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진지해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내가 왜 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 만약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면 내가 오늘 살아가는 이 삶이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우리가 진정한 구원에 이르고 나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실까? 구원받았으면서도 왜 많은 사람들은 전혀 행복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갈까?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승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모두 한 두 마디로 일 이 분 안으로 간단하게 물건을 팔 듯이 끝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진리이고 도인데 공산주의자가 와서 공산주의가 무엇인가 설명하라 하는데 일분 안에 그 설명을 끝내라할 때 그 설명을 끝낼 수 있겠냐는 것이죠. 그리고 끝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슴에 다가오겠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불교는 석가모니 없이도 존재합니다. 이슬람교는 마호메트 없이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그리스도 없이는 존재 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였다 라고 입증할 수 있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메시야이십니다. 사람이신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감당하고 죽으시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낮고 낮은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지금은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이 아니라 강도와 같이 흉악한 인간들, 우리와 같이 범죄 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죄를 해결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재물로 죽으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십자가에서 약속대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시면서 못 박혀 죽어가고 계신 것이지요.
그 예수 그리스도예요. 나 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구나. 그래서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을 그 순간이 되면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모두 사라지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떠오릅니다. 내 죄를 위해 죽으신 그 예수그리스도 앞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 것입니까?
이 강도는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 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그리스도는 저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서 흉악하게 죽임을 당해야할 이유가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대속의 위대한 진리를 알지는 못했겠지만 그러나 그 예수 그리스도께 간절히 구하면 그 분이 자기의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은 알았어요. 그래서 이 강도는 예수그리스도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 속에 나타난 것이 뭐냐하면 이 내세에 대한 생각이 었습니다. 주님을 모를 때에는 죽는 것을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생각과 꿈이 오직 이 현재에 있어요. 지금 잘 살고 잘 먹고 행복하고 만족을 누리고 그 일을 위해서 때로는 이웃에게 손해를 입히고 이웃을 불행하게 할 준비가 기꺼이 되어 있어요. 근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에 미래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이에요.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세계에서 바라보면 그 죽음 너머에 있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에요.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탈의실로 먼저 나오죠? 탈의실에서 먼저 옷을 입고 바깥 세상으로 나가요. 인생은 마치 탈의실과 같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거죠. 여기서 어떻게 사느냐는 미래에 우리들이 궁극적인 인생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달렸냐 하는 것이죠. 더군다나 이 강도는 일생동안 현저하게 죄를 지으며 살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 세계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 왔을 것입니다. 그때에 이 사람은 자기는 하나님 앞에 형벌 받을 죄 밖에는 지은 것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간절히 도움을 청하면 그분이 자신을 그 형벌을 면하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에요. 이 사람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 믿음에 대해 이렇게 응답 하셨어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그리스도에 이 십자가에 죽으심이 결국은 이 세상에 있는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서 오신 십자가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에요. 강도는 일생동안 선한 일이라고는 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 흉악한 죄인을 낙원에 이르는 첫 열매로 삼으심으로써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모든 죄인들을 구원해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이 순간도 여러분들이 많은 죄를 짖고 남들이 모르는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괴로워하고 있을 지라도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그 분께 은혜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를 자랑하지 않고 우리에게 구원에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는 거예요.
소수이기는 하지만 여러분들 가운데는 아마 아직도 교회 습관적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아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교인은 되어 가고 있지만 참된 신자가 되어 본적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많은 은총과 말씀하시는 그 음성 앞에 따라서 하번도 반응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저는 오늘 그런 분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촉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굳게 믿고 지난 여러분들의 죄를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아무 공로 없는 이 죄인을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하셔서 주님의 자녀 삼아 달라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탄원하십시오. 오늘 그 분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2.대속하신 그리스도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2000년 후인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두 가지 점에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에요. 하나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을 때 죄가 들어 왔습니다. 한 사람의 죄로 인해서 우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와 맺으신 그 약속이 아담 개인에게 맺으신 약속이 아니라 그 후에 태어나게 될 우리 모든 사람에게 대한 약속 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라면 우리는 우리가 순종한 것이 아닌데도 이렇게 죄 많은 세상이 아닌 낙원에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지은 그 범죄가 사실은 개인의 범죄가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을 함께 포함하는 범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고백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범죄 했을 때 우리도 거기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함께. 그런 점에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렇게 죄인으로 태어나니까 우리는 살면서 계속해서 죄를 짖게 됩니다. 인간의 두뇌를 스쳐 가는 생각이 하루에 십만 가지쯤 된다고 하는데 그 십만 가지 중에 1퍼센트만 아니 10퍼센트만 악한 생각이라도 비교적 도덕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한 것 가운데 0.1퍼센트만 실행한다고만 하더라도 열 가지 이상을 범죄 하게 될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인간이 죄를 짖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한편으로는 타고난 부패한 본성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스스로 선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죄를 짖는 것이죠. 이렇게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해 주실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죄로 더럽히는 인간들을 형벌하셔서 그를 죽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히 싫어하시고 그리고 죽게 하심으로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단순히 그렇게만 다루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부터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에게 가르쳐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이 지식의 나무는 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명령을 보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즉각적으로 하나님께서 죽이실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가 그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그는 즉석에서 죽임을 당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살려 두셨어요. 물론 영적으로는 죽음과 방불한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하나님과 늘 교제하고 거룩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이제 죄를 범하고 난 다음에는 이제 하나님을 대면 할 수가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분명히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고, 이 세상을 왕처럼 다스리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담과 하와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다스리라’는 ‘라다’라는 히브리 단어인데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렇게 다스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이제는 그 다스려야 할 세상의 피조물들을 두려워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사실 죽음이 두려운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의 공의대로라 할 것 같으면 방금 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죄를 범한 자를 다루시는 그 한 가지 방법에 의해서 만약에 인간을 다루었다 할 것 같으면 영적으로만 그를 죽은 자 만들지 말고 육신적으로도 그를 완전히 죽여서 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거나 자기의 죄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봉쇄시키셔야 마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는 또 하나의 성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사랑이었습니다. 사랑.. 하나님의 사랑 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인을 아주 불쌍하게 여기는 긍휼, 그리고 죄인인데도 분에 넘치게 대우해 주시는 자비, 그리고 그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오래 참으심. 이 세 가지를 (중간에 테잎 짤림??????) 살려 주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제는 죄로 말미암아서 눈이 어두워 져서 하나님을 찾을 수도 볼 수도 없는 그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리고 인간들을 어떻게 창조하셨고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약속을 어기고 범죄 했으며 어떻게 해서 죄가 들어오게 되어 그 죄가 인간들의 불행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어떻게 우리 인간들을 그 죄 가운데서 건져내시는지 이것을 상세하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수시로 인간에게 오셔서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도 비록 범죄 한 장본인이었지만 이런 하나님의 지식의 빛 아래 있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이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죄와 그리고 사망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는데 인간이 범죄하고 나자마자 그 커다란 해일이 일어나 방파제를 밀치고 바닷물이 밀려들어와서 온 땅을 뒤덮어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죄가 밀려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망의 지배아래 놓여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수많은 종교들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모두 우상으로 바꾸는 거예요. 그런 세상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그 세상이 아닙니다. 그 세상과는 너무 거리가 멀고 그 세상을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과의 계획과는 너무나 상반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세상을 고치고 인간들을 온전히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한 사람을 보내십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통해서 모든 인간이 죄인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우리 모든 사람의 대표가 되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됐거든요. 이번에는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모든 사람들의 대표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아담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이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십니다.
하나님이 죄지은 인간에게 가지고 계시는 태도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그 죄를 형벌하지 않으면 안되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그 죄인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두 마음은 함께 하나님 안에 있고 서로가 상대방을 몰아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범죄 한 인간들이 정녕 죽으리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 자신이 취소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 자신도 당신 자신의 성품과 충돌을 일으키시는 것은 할 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보고 범죄해 보시라 그러면 하나님이 하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자체가 그것을 허락하지 안기 때문에 안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보고 똥그란 삼각형을 그려보라고 그러시면 그릴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데 하나님 성품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에 하셔서는 안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실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성품이 무엇이냐 하면은 범죄한 인간들을 그냥 용서 해 주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일입니다. 반드시 죄를 지으면 그 죄에 대해서 형벌을 받으리라고 하는 이 하나님과의 약속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여 그 범죄한 결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때 인간은 그 심판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죽어버리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간이 지은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셔서 우리 인간을 향해 쏟아 부을 수 있는 모든 진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당시키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이 형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 한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거기에다 푸시는 거예요. 그래서 의로운 공의로운 성품을 만족시키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서 고난 당하실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 없는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어요. 그분은 하나님과 본체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왜? 하나님으로 서는 하실 수 없는 일이 또 하나 있었는데 죽으실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형벌을 받아야 했어요. 그 형벌을 받고 죽기 위해서는 예전의 소나 염소나 양이나 이런 짐승들이 죽음을 당하면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대신 죽으시기 위해서는 죽을 수 있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하나님의 큰사랑입니다.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일을 하셨지요. 병든자를 고치시기도 하시고 죽은자를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기도 하셨고 귀신들을 내어 쫓아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기기도 하셨고 아파하는 자들을 위로하기도 하셨어요. 그러나 그 모든 일은 마지막으로 주님이 해야할 궁극적인 일들을 준비하기 위한 일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제물로 돌아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 찬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셨어요. 삼십 삼 년을 가난과 핍박, 고통과 시련 속에 사시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는 비록 자기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사람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지만 자신의 이 죽음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숨겨져 있다고 하는 사실을 예수님이 아셨습니다. 그 지혜가 무엇 이냐하면은 당신이 그렇게 하나님의 형벌을 받고 십자가에 죽음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수많은 인간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 지혜를 예수님께서 아셨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가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예수 그리스께 퍼 부으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하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습니다. 죄를 지은 자 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자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원수가 되어서 우리를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구원으로까지 우리게 나타내 보여 주실 수가 없었어요.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우리 속에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 대적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했어요.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평화가 없었어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으면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렇게 형벌을 당하시는 것이 바로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묻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 이제 평화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이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죄가 우리 속에 가득하여서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이 질병을 가진 사람이 말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속에 들어있는 더러운 병균이 그 사람이 가는 모든 공간 자체를 더럽히는 것처럼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망가진 사람, 병든 사람들입니다. 죄를 짖고 죄를 행하는데 적극적으로 그 죄를 원하고 선택해서 죄를 많이 짓는 것도 있지만은 그러나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이 사람 자신이 죄인으로 깊이 병들고 그렇게 깊이 물든 죄인이기 때문에 말하자면은 마약을 하는 사람들이 그것이 해롭다고 하는 사실을 알면서도 맞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인간도 그렇게 그 죄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죄를 선택해서 살 수 밖에 없는 망가진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망가진 우리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새 생명을 심으시고 새 사람을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 모든 형벌과 죄에서 구원 받게 하실려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거예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렇게 형벌을 받고 죽임을 당하셔야 할 어떤 일도 행하신 적이 없어요. 주린자를 먹이고 병든자를 고치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가르쳐 주셨고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알려 주셨습니다. 어둠가운데서 빛으로 나아오도록 예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긍휼과 은혜의 넘치는 섬김으로 우리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일생을 사셨어요. 바로 이렇게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거예요. 이제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 자신이 형벌 받을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여러분과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죄 없으신 분이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임을 당하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거예요. 여러분 가운데는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요. 아내에게 남편에게 억지로 이끌려 나오지만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교인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인격적으로 주님이 나의 구주라고 하는 사실이 깊이 믿고 , 그 주님을 마음속에 모시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망설일 필요가 없어요. 오늘 이 순간에 오늘들은 설교를 깊이 기억하세요 내가 죄인인 것과 그리스도예수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아멘 . 그리고 주님의 자녀들 되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7-2) 대속하신 그리스도 2000.8.1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눅53:5)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 이천년후에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시는가 하는것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두가지 점에서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하나는 아담과 하와가 사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을때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한사람의 죄로 인해서 우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와 맺으신 그 약속이 아담 개인에게 맺으신 약속이 아니라 그후에 태어나게될 모든 사람에 대한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라면 우리는 우리가 순종한것도 아닌데도 이렇게 죄많은 세상이 아니라 낙원에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지은 그 범죄가 시실은 개인의 범죄가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을 함께 포함하는 범죄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고백은 뭐냐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범죄했을때 우리도 함께 거기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렇게 죄인으로 태어나니까 우리는 살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인간의 두뇌를 스쳐가는 생각이 하루에 십만가지쯤 된다고 하는데 그 십만가지 중에 1%만, 10%만 악한 생각이라도 비교적 도덕적인 사람입니다. 일만가지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한것 가운데 0.1%만 범죄한다고 하더라도 열가지 이상을 범죄한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인간이 죄를 짓는것은 피할수 없는 일입니다. 한편으로는 타고난 부패한 본성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스스로 선택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해주실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죄로 더럽히는 인간들을 형벌하셔서 죽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히 싫어하시고 그리고 주께 하심으로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단순히 그렇게만 다루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것은 이미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부터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에게 가르쳐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선과 악을 알게하는 이 지식의 나무는 먹지마라.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 그 하나님의 명령, 말씀을 보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즉각적으로 하나님께서 죽이실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가 그 선악과를 따먹었을때에 그는 즉석에서 죽임을 당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즉각적으로 죽이지 않으시고 살려 두셨습니다. 물론 영적으로는 죽음과 방불한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늘 교제하고 거룩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이제 죄를 범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땅을 분명히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그렇게 이세상을 왕처럼 다스리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담과 하와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다스리라 ‘라다’라는 희브리어인데 왕이 나라을 다스릴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렇게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스려야 할 이세상의 피조물들을 두려워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실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의 공의대로 라고 할것 같으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죄 범한 자를 다루시는 한가지 방법에 의해서 만약에 인간을 다루었다 할것 같으면 영적으로만 죽은자 만들지 말고 육신적으로도 그를 완전히 죽여서 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거나 자기의 죄로부터 구원을 받을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봉쇄시키셔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는 또하나의 성품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인간들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은 세가지로 나타나는데 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인을 아주 불쌍하게 여기는 긍휼 그리고 죄인인데도 분에 넘치게 대우해 주시는 자비 그리고 그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오래 참으심 이 세가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죄로 말미암아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찿을수도 볼수도 없는 그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찿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리고 인간들을 어떻게 창조 하셨고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범죄했고 그래서 어떻게 죄가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 죄가 인간들의 불행에 어떻게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어떻게 우리들을 그 죄 가운데서 건져내시는지 상세하게 알려 주십니다. 수시로 인간에게 오셔서...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도 비록 범죄한 장본인 이었지만 이런 하나님의 지식의 빛 아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이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세상에 하나님이 완전히 이세상을 구원해 내기 위해서 더 이상 우리가 죄를 지었을때에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인간이 범죄하고 나서 커다란 해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방파제를 밀치고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서 온 땅을 뒤덥어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죄가 밀려 들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망의 지배아래 놓여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수 많은 종교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모두 우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때의 그 세상이 아닙니다. 그 세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 그 세상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계획과는 너무나 상반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세상을 고치고 인간들을 온전히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한사람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한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서 아담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될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으실때에 우리 모든 사람의 대표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모든 사람의 대표가 되게 하셨습니다. 두 번째 아담으로 이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한 방법이 무엇이었냐 하면 하나님이 죄 지은 인간에게 가지고 있는 태도가 두가지 있는데 하나는 그 죄를 형벌하지 않으면 안되는 마음이 하나님에 있으며 또하나는 그 죄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마음은 함께 하나님 안에 있고 이 두마음은 서로가 상대방을 몰아 낼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범죄한 인간들이 정령 죽으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형벌에 대한 약속을 하나님 자신이 취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이시지만 하나님 자신도 당신 자신의 성품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하실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보고 범죄해 보시라 하면 하나님이 하실수 있겠습니까? 할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자체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안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고 동그란 삼각형을 그려 보시라 하면 그릴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데 하나님의 성품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그 특성 때문에 하셔서는 안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실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것이 뭐냐면 그런 성품이 뭐냐면 범죄한 인간들을 그냥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수 없는 일입니다. 반드시 죄를 지으면 그 죄에 대해서 형벌을 받으리라고 하는 하나님과의 약속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범죄 하였지만 그 범죄한 결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때에는 그 심판을 책임질수 있는 인간이 아닙니다.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감당합니까? 죽어 버리는데 어떻게 감당합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이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간이 지은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셔서 우리 인간을 향해 쏟아 부을수 있는 모든 직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형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을 향한, 범죄한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거기에서 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의로운 성품을 만족 시키십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가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서 고난 당하실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 없는 몸으로 이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본체 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이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서는 하실수 없는 일이 또하나 있었는데 죽으실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를 용서 받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형벌을 받고 죽기 위해서는 예전에 염소나 양이나 이런 짐승들이 죽이면 죽임을 당하는 죄물이 될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 받게 하기 위해서 대신 죽으시기 위해서는 죽을수 있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했습니다. 이 자체가 하나님의 큰 사랑입니다. 우리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세상에 내려 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세상에 오셔서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병든자를 고치기도 하시고 죽은자를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고 귀신들을 내어 쫒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기도 하셨고 아파하는 자들을 위로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은 마지막으로 주님이 해야할 궁극적인 일들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제물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찬송)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이니라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낮고 천한 이세상에 오셔서 33년을 가난과 핍박, 고통과 시련속에 사시다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는 비록 자기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사람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지만 자신의 죽음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아셨습니다. 그 지혜가 무엇인가 하면 당신이 그렇게 형벌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수많은 인간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그 지혜를 예수님이 아셨던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가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 퍼부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하심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습니다. 죄를 지은자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자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가 되어서 우리를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구원으로까지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실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대적하며 살아가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으면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자랑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렇게 십자가 못박혀 형벌을 당하시는 것이 바로 나의 죄때문이라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 평화를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병든 사람들입니다. 죄가 우리속에 가득하여서 병든 사람들입니다. 마치 이 질병을 가진 사람이 말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속에 들어있는 더러운 병균이 그 사람이 가는 공간 전체를 더럽히는 것처럼 우리를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망가진 사람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죄를 짓고 죄를 행하는데 적극적으로 그 죄를 원하고 그 죄를 선택해서 죄를 짓는 경우도 많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사람 자신이 죄인으로 깊이 병들고 죄로 깊이 물든 죄인이기 때문에 말하자면 마약을 하는 사람이 그것이 해롭다는 사실을 알면 먹지 않을수 없는 것처럼 인간도 그렇게 그 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 죄를 선택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망가진 인간으로서 이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망가진 우리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우리속에 새생명을 심으시고 새사람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 모든 형벌과 죄에서 구원받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세상에 오셔서 이렇게 형벌을 받고 죽으심을 당하셔야할 어떤 일도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린자를 먹이고 병든자를 고치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가르쳐 주셨고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알려 주셨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빛으로 나오도록 예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긍휼과 은혜에 넘치는 섬김으로 우리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일평생을 사셨습니다. 바로 이렇게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 자신이 형벌받은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이 바로 여러분과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죄없으신 분이시지만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임을 당하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셨다는 사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모두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기 때문에 이제 내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당신의 자녀 삼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내에게 남편에게 이끌려 억지로 교회에 나오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교인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인격적으로 주님이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깊이 믿고 그 주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이순간에, 오늘 설교에 들은 내용을 깊이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죄인인것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과 그를 믿는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아멘’ 그리고 주님의 자녀가 되시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8. 영접하는 자에게 구원을(요1:12-3) 2000.8.16 온가족 수련회 새벽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에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셨지만 우리들이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주님을 영접해야 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우리의 허물을 지고 십자가의 못 박혀 죽으셨지만 그 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그리고 죽고 다시 부활하고 사신 것을 우리들이 믿는 것 그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면 우리들이 생각하기에는 아~ 우리도 그 분을 위해 할 일이 있구나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못 박혀 죽으셨지만 우리도 그 주님을 믿어야만 되는구나 . 하는 결론에 도달 할 수 있어요. 사실이에요.
그러면 이제 궁금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 나셨어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당해야할 모든 형벌 우리가 범죄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허물이 많음으로 당해야 할 모든 진노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담당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담당하신 그 모든 형벌이 나를 대한 형벌이 되기 위해서는 단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냐?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내가 믿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때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형벌을 당하신 그것이 나를 위한 형벌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믿지 않으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형벌을 당하셔서 우리의 죄를 지고 그리고 하나님께 징벌을 받고 우리의 죄를 위해 하나님께 심판을 당하시고 죽으셨지만 우리가 믿지 아니하면 그 분이 죽으심이 우리를 위한 죽으심이 아니에요. 우리는 여전히 죄인으로 있고 그리고 어제 말씀 드린바와 같이 아담과 하와 안에서 범죄 한 죄와 그리고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지은 모든 죄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여전히 죄인으로 남았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는 선고를 받고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그들의 생명이 이 땅에 연장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죽었지만 그래도 아직 까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거예요. 영적으로는 이미 심판을 받아서 그래서 하나님과 교통 수 없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없는 인간으로 형벌을 받고 다만 하나님께서 주님을 및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좀더 살아 있는데 살아 남아 있는 날 동안에 주님을 믿지 아니하면 결국은 우리가 죽음으로서 하나님 앞에 다시 심판을 받게 되는 받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에게는 영원한 형벌인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 지옥은 죽으면 인간이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지만 그 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어요. 그래서 주님을 믿고 주안에서 죽은 사람들 그리고 주님을 믿지 않고 주 바깥에서 죽은 사람들 모두 죽은 그 이후에는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데 하나는 천국이고 하나는 지옥이에요. 그래서 천국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지옥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아요.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기에 적합하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 시키시는 거예요. 변화되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육신의 몸을 버리고 우리의 영혼이 들어가니까 지금의 우리의 영혼과는 다르죠. 그리고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은 지옥에 불에 견딜 수 있을 만한 사람들로 변화되어서 들어가는 거예요. 그 마지막 날에는 우리를 영원히 형벌에 처하고 영원히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과 믿지 않고 죽은 모든 사람들을 부활 시키셔요. 그때는 다시 우리가 육신에 몸을 입어요. 물론 이런 육신의 몸은 아니죠. 장소에 매이지 않는 그런 특별한 몸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영원한 행복에 영원한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끔 만드시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아주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시각에서 볼 것 같으면은 그것은 하나에 영원으로 이르는 문 이예요. 그리고 영원으로 들어가는 그 입구예요.
그래서 ?????스토이 같은 사람은 말하기를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서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거와 같다. 여름날이면 사람들이 놀러 가기 위해 서 기차를 옛날에는 많이 이용했어요. 그러면은 피서객들이 몰리는 대합실에는 모여 앉아서 기대서, 자면서 ,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 신문지를 깔아놓고 화투를 치는 사람, 기타를 치고 모여 앉아서 노래하는 사람들 , 뭐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각 기 열심을 열중하죠 그죠? 그러나 기차가 곧 도착한다는 역무원에 방송 소리가 나면은 사람들은 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털어 버려요. 그리고 자기가 가는 방향에 기차를 타고 떠나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더 이상 대합실이 필요가 없어요. 우리의 인생이 그런 것이다 이거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잠시 후에는 끝나는 우리의 인생 올 때는 모든 사람이 아빠 엄마 먼저 형과 누나 먼저 내가 먼저 동생이 뒤에 차례 데로 와요. 그러나 갈 때는 그런 순서와는 상관없어요. 자식을 남겨 놓고 부모가 먼저 가기도 하고 그리고 형들이 있는데 동생이 먼저 부름을 받기도 해요. 그래서 우리의 인간은 살아 있다고 말할 것이 없어요. 오늘 살아 있으면 오늘 살아 있는 것예요.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를 몰라요. 그래서 주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도 인생의 덫 없음을 인류에 역사 속에 늘 말해 왔어요. 왜 그렇게 인생이 덫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죽음 넘어에 있는 세계를 말이죠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인생이 덧 없다고 생각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생을 덧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 인생의 시기가 말이죠 미래를 향해서 준비하는 시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지만 이 세상에서 너무나 많은 기대는 갖지 않아요. 물론 우리는 이 세상사는 동안에 사랑해야될 사람도 많고 그리고 사랑 받아야 될 사람들도 많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보람 있는 일도 많고 그리고 주님 섬기며 살아야할 일도 많아요. 그렇지만 그것은 모두 영원한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서 여기에서 살게 하시는 동안에 의미가 있고 중요한 일이라 이거죠.
톨스토이에 책에 보면 톨스토이는 괭장히 커다란 큰 땅을 가지고 있는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면서도 이제 예수님을 믿고 아가페의 사랑에 대해 눈뜨게 되었는데 ...... 이런 일화가 나와요. 그 주인에 집에서 계속해서 고생하며 그 소작을 하며 부쳐먹고 사는 사람들 다 모았어요. 옛날에는 농사지었던 사회에서는 땅을 중심으로 이제 지배받는 사람과 지배하는 사람들이 형성이 되잖아요. 그런데 이제 왜 이제 새벽에 깜깜할 때 모였냐 하면은 지평선에서 해가 떠오를 때부터 시작해서 지평선으로 해가 넘어 갈 때까지 그 시간 동안에 이렇게 돌아서 온 만큼 그 땅을 그 소작인들에게 주기로 한 거예요. 이 중인이. 그러니까 캄캄할 때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해가 딱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출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막 들판을 가로지르면서 뛰는 거예요. 그 중에 한 소작인이 막 뛰어 가면서 그 넓은 들을 보는 거예요. 그런데 조금만 더 뛰면은 내 땅이 조금 더 많아지는 거예요. 적당히 뛰고 돌아오면 될텐데 갈 수 있는데 까지 한 없이 간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해가 뉘엇뉘엇 넘어 가는 때예요. 돌아오지 못하면 한 평에 땅도 없어요. 그래서 해가 떨어지기 전에 이렇게 멀리 돌아온 이 길을 이제 다시 돌아가야 해요. 그러면은 그 엄청나게 원을 그리며 돌아온 그 땅이 이제 자기 땅이 되는 거예요. 꿈을 꾸는 거예요. 나중에는 막 뙤약볕 아래 뛰어가면서 땀이 막 흐르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꿈을 꾸는 거예요. 예전에는 소작 일을 부쳐먹으면서 주인에게 다 뺏기고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며 살았는데 이제 아주 너른 들에 곡식이 가득하게 익은 것을 보면서 기뻐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그 곡식을 팔아서 무엇도 사고 무엇도 사고 부유하게 살아야지 꿈을 꾸는 거예요. 그런데 아직 까지 골인 지점이 보이지 않는 것예요.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지 못하면은 한 평도 얻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막 모든 힘을 다 쏟아서 달리는 거예요. 해가 지평선에 딱 걸렸어요. 밑으로 막 내려가는 거예요. 해가 그게 완전히 땅으로 내려가기 전에 골인해야 되는데 저 멀리서 보이는 거예요. 주인이 저 멀리에서 손을 흔들고 빨리 오라고 기다리고 있어요. 이제 마지막 순간 이예요. 미친 듯 달리는 거예요. 해가 딱 떨어 질 때에 골인지점에 와서 탁 엎드려 졌어요. 죽었어요. 거기서, 그러면서 톨스토이가 그 얘기를 하면서 “이게 인생이다.” 그 사람에 실수는 뭐냐 하면은 자기가 미친 듯이 달려서 큰 원을 그리면 땅을 얻을 수 있다는 그 생각을 꽉 찬 나머지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어요. 지옥에 가는 많은 사람들은 나쁜 일을 했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기보다는 인생을 살면서 한번도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결의가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인생을 살았어요.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든 아니면 나쁜 짖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든 어쨌든 영혼을 돌아볼 기회가 없었어요.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에 비유도 마찬 가지예요. 엄청나게 풍년이 들은 거예요 . 매일 잔치를 하면서 먹어도 재산이 남는 거예요. 그러고 더 큰 풍년이 들었어요. 고민이 되는 거예요. 창고를 짖자. 그리고 가득 쌓아두고 내 영혼아 먹고 마시며 즐기고 즐거워하자 . 그러다 그 날 밤에 하나님이 영혼을 취하시는 거예요. 누구에게나 다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죽고 나면은 어떻게 될까요? 뭐 죽으면 모두 끝이지. 근데 그건 희망 사항이죠. 누구도 죽음 저편으로 건너갔다가 온 사람도 없고, 그리고 건너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를 않아요. 누가 진실되게 죽음 이후에 세상에 대해 가르쳐 줄 사람이 없죠. 근데 그 가르쳐 주실 수 있는 분이 한 분이 계셔요. 하나님 이예요. 왜? 하나님이 그 죽음 이후에 세상도 만드셨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분이 있다. 죽음 이후에 세계가 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지하게 생각을 해야되요.
이 세상에서는 어떤 일이 나빠도 말이죠 그것이 죄라고 할지라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그 일을 동일하게 하게 되면은 처벌 할 수가 없어요. 보세요. 차로를 달리는데 앞에서 차가 천천히 가니까 천천히 가는 정도가 아니라 그 지게차 같은 차 하나가 정신나간 운전수가 1차선으로 들어섰어요. 차로가 두 개인데 하나는 앞에 가고 하나는 뒤로 가면서 그 차 두 개가 1,2차선을 가로막았어요. 그러니까 한 대가 중앙선을 침범해서 그렇게 갔어요. 저기에는 순찰차가 있어요. 딱 잡아요. 근데 하나가 아니라 가는 차마다 거기로 지나가서 수 십대가 행렬을 지어서 달리는 거예요 .봐주죠. 처벌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법에는 그런거 없어요. 하나님이 아니면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도 아닌 건 아닌 거예요. 분명히 그것이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려고 하는데 워낙 많은 사람들이 대모 하듯이 하니까 그러면 내가졌다. 그러시는 법은 없다 . 이거죠. 그 하나님이 죽음이후에 세상을 만들어 놓으신 거예요. 병원에 가서 하얀 국화꽃으로 장식된 어떤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해요. 그들은 죽음과 함께 즉시 어떤 사람은 음부로 어떤 사람은 낙원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에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이런 모든 자신을 바른길로 죽음 이후에 세계를 준비하게 하려고 전해주는 모든 복음을 농담처럼 생각했던 사람들은 거기에서 그것이 사실이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그거 기억하셔야 되요. 사람이 청소년기가 지나고 나면 이른 사람들은 초등하교 때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청소년 시절에 죽음에 대한 무지무지한 공포를 경험해요. 그리고 그때가 지나고 나면 이제는 나이가 들면서 죽음에 대해서 아주 순종하며 모든 것을 받아 드릴 수 있는 체념이 생겨요. 그런데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늘 경험하기 때문에 체념에 지혜가 생길 수 있는데 죽음 이후에 세계에는 어떤 세계인지 이 세상에서는 거의 보지를 못해요. 볼 수가 없죠. 그러니까 죽는 것까지 어떻게 체념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 만은 죽음 이후에 세계에는 전혀 우리에게 적응된 세계가 아니에요. 그리고 거기에는 주를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업는 고통이 계속되는데 ...
바로 이렇게 형벌 받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거예요. 그리고 이제는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자녀들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선행, 우리의 도덕, 우리의 무엇도 필요 없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보면서 아~ 죄 없으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저렇게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것은 바로 나의 죄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이시다 는 사실을 내 마음에 굳게 믿으면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거예요.
첫 날 말씀드린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를 생각해 보세요. 그는 일생동안 선한 일이라고는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 이였어요. 흉악하게 살아온 사람 이였어요. 그런데도 자신이 죄인 인 것과 그리스도께서 구세주 인 것을 믿으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 낙원에 이르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이게 사람의 행위나 선한 노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인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럼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도대체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이냐? 5월 달에 제가 중국에 갔을 때 아주 희한한 것을 봤어요. 뭐 이름도 잊어 버렸는데...강을 막아서 댐을 만들었는데 용경협 이라는 댐 이예요. 협곡인데 진짜 그 실제로 존재할까 했는데 진짜 존재 하더러구요. 양쪽에 계곡인데 말이죠 . 계곡이 이렇게 이어진 계곡이 아니라 이렇게 이어진 계곡 이예요. 그래서 까까지른 듯한 그 산이 300M 정도 되 보이는 이 산이 양쪽에 산이 이렇게 산이 서 있어요. 그리고 그 계곡이 매 수 없이 km가 이어지는 거예요. 강폭은 그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데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거예요. 봉우리가... 올라갈 수 없는 까까지른 듯한 절벽이죠. 거기로 깊은 강이 흐르는 것이죠. 그 댐을 막았어요. 그런데 대단하죠? 양쪽에 봉우리가 있는데 줄을 매 놓고 줄 위로 오토바이가 달리는 거예요.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어요. 이렇게 쳐다보니까 하늘 꼭대기로 장난이 아니라 진짜 오도바이예요. 사람이 거기에 탔어요. 거기에 빨간 깃발을 거기에 꼽고 ...... 그래서 내가 저 위험한 것을 왜 하냐 ? 물었더니 관광객을 위한 서비스래요. 거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머리가 강바닥으로 닿을 것 같애. 그런데 가만히 분석을 해 봤어요. 저게 왜 안전할까 이렇게 보는데 혼자 타는 게 아니라 둘이 탔어요. 한사람은 오도바이를 운전하는데 또 한사람은 오토바이 아래에 그네처럼 매달려서 가는 거예요 . 그 ET 라는 영화에 나오는 그 자전거 같이 말이예요.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밑에 그네처럼 만들어 가지고 한 사람이 계속 발을 흔들면서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에 설명을 들으니까 그 밑에 있는 사람 때문에 그 위에 있는 사람이 완전하데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줄 위로 오토바이가 달리는데 오토바이 바퀴에다 그네처럼 매달았어요. 밑에서 사람이 타니까 그 오토바이를 잡아 땡겨서 그 쇠줄하고 탁탁 붙게 만든다는 거예요. 중심을 잡아가지고. 그래서 수 없이 다녔지만 절대로 안전하다는 거예요. 설명을 듣고 보니까 수학적인 , 물리적인 원리가 있는가 보다 . 완전하다니까 그저 완전한 줄을 믿자. 그런데 거기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가만히 생각하고 설명을 들어보니까 그거 완전하지 않으면 누가 그렇게 하겠어요? 근데 완전하다는 것은 인정이 되는데 나보고 그 밑에 타라고 했으면 탓을까요 안탓을까요? 그걸 왜 타요. 그리고 선교 여행가서 그 떨어져서 죽었다고 신문에 나봐요. 가문에 망신이죠. 자손 대대로 너희 할아버지는 선교지에서 돌아 가셨느니라... 아~ 순교하셨군요. 아니 놀이기구 타다가 강으로 떨어져 죽었
그것은 믿음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믿는다 라고 하는 말은 뭐냐 하면은 그 예수님이 그렇게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을 내가 아멘 하고 그대로 받아드릴 뿐만 아니라 그렇게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이 내 인생에 영향을 주는 중심적인 사실이 되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무엇이냐 하면은 믿는다라는 의미예요. 그래서 오늘 성경도 말하는 것이에요. 영접한다는 것과 믿는다라는 것은 동일하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무리 교회 나오고 기독교 적인 분위기 속에 산다고 하더라도 그가 주님을 믿지 아니하면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어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그 구원을 받는 그 ??와 같아요. 그래서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다 이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믿음을 누구에게 주시냐 하면은 믿을 마음을 갖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이에요. 오늘도 마찬가지 예요.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아 그렇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형벌을 지신 그 많은 고난이 나의 죄를 위함 이였구나 이제 내가 그 분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지. 하나님 제 마음속에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의 못 박혀 죽으신 것이 믿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나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써 주님 안에 주님과 함께 가족관계 속에서 살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 그렇게 할 때 각 사람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이에요. 그렇게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녀됨을 허락 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궁국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가족처럼 살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다 파괴해 버린 것이에요. 가출해 버린 것이에요. 그리고 부모가 없는 자녀처럼 자기 맘대로 인생을 산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이게 권세라는 말을 덧붙이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은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는 것인데 그에게는 많은 특권이 따라요. 그렇지 않겠어요? 우리가 거리를 돌아다니는 불앙아였다가 부자집에 입양 되었다면은 특별한 권세가 우리에게 있듯이 마찬가지예요. 하나님 없이 살던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고 나면은 거기에는 놀라운 권세가 따라요. 그런데 그 권세가 뭐냐?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요.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의 우리의 기도를 들으셔요. 인생의 어려움과 환난이 와도 우리는 하나님과 의논 할 수 있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어요.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죽어도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의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령을 부어 주셔서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들로 그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당신의 마음을 보이시고 사랑하게 하시고 용서하게 하시고 주님을 위해서 살게 하시고 하나님을 위한 보람을 갖게 하시고 그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계시어 그러시면서 우리에게 이젠 우리 혼자 걸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인생임을 깨닫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이 강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 받으셨습니까? 아직까지도 이 수련회 까지 참석했지만 구원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아 아직도 무엇인지 모르는 분들 . 오늘 이 시간에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주님이 강도도 구원하여 자기 자녀 삼으신것처럼 오늘 정직하게 하나님 나는 죽음을 위해서나 삶을 위해서나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죄인인 것과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그리고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분임을 제가 믿습니다. 하나님 나를 받아 주시옵소서 .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도 주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