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녹취자: 백지영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사도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왜 그래야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 복음 전도에 가르쳐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상고해 보았습니다.
오늘 사도는 “내가 너희 가운데에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복음 전파에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고, 그리고 그가 고린도 후서에서 고백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많은 핍박과 환란과 어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과연 이렇게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뜻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 많은 세상 사람들이 과연 허무맹랑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 사실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된다고 하는 미련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 복음은 이 세상 사람들의 지혜에 호소해서 그 사람들의 지적인 동의를 받아내기에는 너무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사도는 자신이 말하듯이 말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식에는 졸(拙)하지 않을지 모르나, 그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도 이 미련한 복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아 죽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구속의 기초를 놓으셨다고 하는 평범한 복음의 사실을, 비록 자기가 지식에는 졸하지 않지만 졸하지 않고 부한 그 지식을 가지고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믿어질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실을 설득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지식에는 졸하지 않을지 모르나 말에는 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 말에 자신이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자신을 고백하였습니다. 과연 그렇게 자기의 어눌한 말과 그리고 이 당시의 사람들의 지혜로서는 이해될 수 없는 미련한 복음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그는 두려워했고 떨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복음 전파에 있어서 결실을 확신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적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십자가에는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을 만한 놀라운 논리와 지식이, 세상 사람들을 그 마음을 움직이고 그 생각을 바꿔놓을 만큼 그렇게 논리와 추론을 통해서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로운 논리가 십자가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나타난 지혜였으나 인간에게는 가리어진 지혜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신령한 사람이 아니라 육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는 가리어진 사람들이었고, 세상의 지혜에 있어서는 드러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는 어리석은 도였습니다. 어느 눈에 말입니까? 이 세상의 지혜의 안목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설득할 수 없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십자가의 도가 그렇게 미련하다면 놀라운 능력이라도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십자가는 물론 능력입니다만 십자가 자신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하나님이면서도 죽음에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구원할 수 없었던 메시아를 보여준다는 이런 역설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은 지혜로운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고 그리고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메시아로서 나무에 달리셔야했다는 그 사실 속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이적을 불러올 수 없는 그런 무능한 메시아를 보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그것으로 설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사도가 안 떨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도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거할 때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면서도 이것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사도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 사실이 사도의 가슴에 체험적으로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고 그리고 내 마음을 찢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여 줄 수는 없지만, 그러나 논리로 입증하고 깨달은 것보다 더 확실하게 그는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속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니까 체험이 없는 복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선조들의 복음이고 교회의 복음이지 여러분의 복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my gospel”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깊이 체험할 때 그때에 우리는 그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체험하게 해 주셔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놀라운 사건이 우리를 움직이고 우리를 육화시켜야 합니다. 복음이 육화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시지만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땅에 낮아지시기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죄 있는 자의 모습으로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와 동일하게 되셨습니다. 그가 비록 하늘에서 내려오신 메시아이시지만 아무도 그가 우리와 다른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낮아지시고 우리와 하나 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우리는 들었고 예수의 복음이지만, 그 복음이 우리 안에 와서 그 복음이 육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내려와서 그래서 그 복음이 우리 안에 우리와 복음이 나눠질 수 없는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약하며 두려워 떨 수밖에 없었을 때에 사도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증하려고 애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지혜 있는 헬라인들을 설득할 수 없고 표적을 구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걸려 넘어지는 유대인들을 이해시킬 수 없었지만, 그러나 바울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그렇게 지혜를 구하고 이적을 구하던 헬라인과 유대인들이 그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변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이 복음을 사람의 지혜로 설득할 수 없는데, 전하는 바울이 설득할 수 없었던 그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설득을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 그리고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어떤 사람들이라도 종이나 자유자나 혹은 로마인이나 그 어떤 사람들이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속죄함을 받지 아니하고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말할 때, 그 십자가를 오히려 말로 지혜로 설복하려고 할 때는 설복되지 않았는데 그 복음을 단지 말했을 때, 이상하게 가능성이 없는 것 같아서 두려워하며 떨었는데 그 지혜롭고 교만하던 헬라인들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자기의 모든 지적인 교만들을 내려놓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 메시아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던 그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그는 표적을 보이려고 애를 쓴 것이 아니라, 단지 십자가의 도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도를 들을 때, 바울은 어떤 표적을 보이기 위해서 애를 쓴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과 그 복음의 의미를 진술하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표적을 구하고 이적을 추구하던 유대인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이제껏 까지 자신들이 허무한 종교에 매여 살아왔음을 깨닫고 구약을 새롭게 보고 복음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고 굳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논리로 설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논리로 설복시키려는 마음을 갖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지적인 설복 하나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사람들 마음 가운데 영접되어지고 그리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때로는 말에 아주 능한 그리스도인들은 말에 아주 어눌하고 논리가 일천한 무신론자들과 논쟁을 해서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의 코를 납작하게 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자기의 주장을 승리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그가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마음에 있는 불신앙, 하나님을 향한 대적입니다. 논리는 그 다음에 생겨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성벽과 같이 굳건히 서 있어서 도무지 나의 말씀 전파를 듣고 믿어줄 것 같지 않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증거해야 합니다. 쉼 없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말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시는 초청을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언제나 복음의 위대한 승리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곳에서는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반대를 받고 어떤 지방에서는 아무 열매를 거두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능력이 없어서 그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조차도 그 복음을 전파할 때 복음을 싫어하는 무리들의 대적을 받고 어떤 지방에서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길을 떠나셔야 했습니다. 이런 일은 그분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기의 그 모든 경험을 말하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아카이로스 유카이로스', ‘좋은 시간에 혹은 나쁜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아주 적합하고 좋은 시간에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에는 너무나 불편하고 환경이 조성돼 있는 것 같지 않은 불편한 시기에도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자기의 지식으로서 그 복음을 설복시킬 수 있는 능력은 없었지만,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복음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지혜가 없고 세상 사람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복음임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의 미련한 복음이 지혜로운 사람들을 굴복시켜서 그 지혜로운 사람들로 하여금 미련한 복음 앞에 자기들이 미련함을 고백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이적이 없는 십자가의 복음 앞에, 이적을 구하고 이적을 행하던 사람들을 무릎을 굻고 엎드리게 만들고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을 준 하나님의 구속의 사건이야말로 최대의 이적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며 복음은 역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사람에게 매이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들을 사용하여 땅 끝까지 줄달음치며 때로는 불을 일으키고 바람을 일으키고 생수를 터뜨렸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고 목마른 사람들을 해갈시키시는 역사를 주었던 것입니다. 한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미련함을 사람들이 규탄할 때, 바로 그 옆에서 어떤 사람들은 터져 나오는 지혜로운 생수의 복음을 마시며 기뻐하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았던 것입니다. 한쪽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의 지혜 없고 미련함을 인하여 모두 그 복음에 걸려 넘어지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식의 부요함이여"하며 복음의 광대한 세계 속에서 입을 벌리고 다물 줄 모르는 신앙의 감격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전파는 우리 손에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복음 전파는 우리 손에 있습니다. 맞습니다. 열매를 맺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는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고 고칠 자를 고치시고 거꾸러뜨릴 자를 거꾸러뜨리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거꾸러트리거나 새롭게 살리시는지 안 살리시는지는 복음이 전파되어 보아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오늘 우리도 이런 신념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세워지기 전전주부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는 요즘보다 더 열심히 했습니다. 한 두 세 시간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아침부터 풀타임으로 나오다시피 하면서 열심히들 했습니다. 그런데 한 육 개월쯤 했을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 전도에 대한 잔잔한 회의가 사람들 마음속에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저에게 말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설교자인 저로서 느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열매가 너무 적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십만 장을 뿌렸는데 열매가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복음을 전해서 우리 교회에 나온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정말 얼마 안됐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이쪽 동네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하나님은 저쪽 동네에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들을 취하시는 것이 중심을 보는 것이 확실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험을 해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장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석 달만 전도하기를 쉬면 그 다음에는 교회에 새로 나오는 사람도 거의 사라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빠져나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추수할 곡식들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그의 도구로 쓰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회의에 우리들이 빠져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한 몇 달 동안 설교로 다시 그런 것들을 다잡은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열매를 거두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인하여 고민하는 일이 오늘 우리의 복음전파를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는 고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매에 대한 고민이 오늘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는 고민은 신령한 고민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고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매한 고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고민, 거룩한 고뇌가 아니라 천박하고 그리고 인간의 태만함을 유발시키는 고민입니다. 사람이 고민하기 시작하면 무기력해집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일평생동안 몇 명을 전도하다 죽을 것입니까? 목표 있습니까? 우리 교회가 몇 명까지 교회가 커지기를 바랍니까? 전 그런 목표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제가 타락해서 그런 목표를 말하거든 여러분들이 저한테 그러지 마시라고 말해달라고 제가 개척한지 한 달 되었을 때 여러분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냥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정성껏 섬기고 예배하고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고 증거하고 그리고 애써서 그 복음을 전파하다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위대한 능력의 복음을 들고 누볐던 그 놀라운 기독교 전파의 전설적인 도시들이 지금은 대부분 어떤지 아십니까? 복음의 꽃이 피었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대부분 회교들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복음의 영광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그랬으면 바울은 실패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각자 시대를 위해서 각자의 몫의 태어진 십자가가 있고 각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따라서 충실하게 살다가 죽으면 끝입니다. 다음에 이 교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쓸데없는 염려 때문에 혈압높일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에 조국의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천국에 가서 생각하십시오. 이 세상에서는 미래에 대한 교회에 대한 염려 때문에 너무 근심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근심하고 좌절하되 신령한 근심을 해서 그 근심을 하고 난 다음에는 내 마음에 다시 불같이 뜨거운 사명감이 일어나고 내 마음 속에 주를 향하고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뜨거운 소망이 복받치는 이런 거룩한 고민에 붙잡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희망이 있나 하면서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런 모든 고민, 그리고 그 고민을 생각도 없이 입에서 쏟아내면서 그런 무기력을 사람들에게 옮기는 이런 행위들은 모두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이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때가 오리라는 것을 아셨고 또 그와 같은 때가 왔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때가 온 것을 알고도 우리를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도 지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한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보고 미련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의 지혜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발 앞에 엎드려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에 나타난 위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오묘한 하나님의 계시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식의 부요함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찬송하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성과에는 상관이 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최선을 다해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지혜를 버리고 십자가에 나타난 신령한 지혜에 눈 뜨게 되는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때마다 더욱더 이 복음이 더 급히, 더 다급하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빨리 증거되어야 한다고 하는 다급한 심령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우리는 이 복음이 더욱더 수많은 사람들에게 빨리 전파되어져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무지한 지혜에서 깨어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묻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인간의 말로는 도저히 설득될 수 없는 무지하던 그 지혜와 그 십자가의 그 무지함이 지혜 없음이, 오히려 지혜 있는 사람들에게 신령한 지혜를 가진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고 능력을 구하던 사람들이 십자가야말로 구원의 능력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그것은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입니까? 바울 자신도 그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그러나 그는 지식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를 보십시오. 그는 복음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치밀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사도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서 이것을 말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그 자체는 지식에 의해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의해서 잘 설명이 되기만 하면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사이에 있는 벽을 무너뜨려서 그 신령한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놀라운 지식의 말로 완전히 설명 되어서 신령한 은혜를 통하지 않고도 인간의 지성으로 이해될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두려웠습니다. 떨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 손에 들리어진 그 십자가의 복음과 표적을 구하고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과 유대인의 그 교만함 앞에 이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말로서 설명을 해서 저들에게 납득시킨다고 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그랬는데도 깨뜨려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부서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특권의식이 강하던 유대인들이 마음의 벽을 허물고 이방인인 헬라인들을 끌어안고 나의 형제라고 부르고 입 맞추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만하던 헬라인들이 자기의 지식을, 지혜를 미련하다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라고 찬미하는 이 깨뜨려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질문은 바로 그것입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왜 그런 일들이 가능하게 되어졌습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 대답은 바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무엇을 하던 때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도로를 밀 때였습니다. 옛날에는 아스팔트가 잘 안 돼 있으니까 비만 오면 길이 파이게 되고 불도저가 한 번씩 땅을 깎아주고 가야지만 원만한 길이 됩니다. 이 불도저도 트랙터, 미는 것 등 여러 종류입니다. 심지어는 티코만한 것도 있습니다. 와 가지고 '부르릉' 하고 미는데 도무지 나가지를 않습니다. 앞에 굉장한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있었습니다. 조금 있다 큰 차가 왔습니다. '부릉' 하더니 연기가 굴뚝에서 시커멓게 나가면서 한번 밀어버리니까 그 바위가 산산이 부서지면서 길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지혜와 논리로 도저히 이해될 수 없었는데 성령이 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 마음 가운데 역사하니까 인간의 미련함의 뿌리가 뽑히고, 인간의 지혜의 뿌리가 뽑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심겨지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전파되어도 그 복음이 인간 그 자체를 변화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그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단지 잘 정리된 지식의 말씀만 가지고는 이런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이 정결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될 때 성령이 나타나셔서 그 마음 가운데 역사하실 때, 그때에 편견이 뽑히고 주의 놀라운 말씀이 가슴 속에 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를 말하라고 하면 믿게 되기까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있지만 이 속에서 일어난 작용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믿음이 심겨진 것이 인간의 논리로 심겨져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그 심겨진 것이 신령한 세계에서 신령한 방법으로 심겨진 것입니다. 설명할 수 있습니까? 설명할 수 없는데 말은 서로 못하지만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예수를 고백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똑같이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러나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오시게 되었는지 그것은 설명할 수 없지만, "내 안에 주님이 계셔서" 하면 다 이해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강한 성령의 나타남과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 말씀 사역에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 자기가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성령 주시기를 즐겨하셨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주시기를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때로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아무 성과를 보지 못하고 그 동리의 귀족들에게 항의를 받고 떠나야 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복음전파에 있어서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 놀라운 성령의 충만함을 다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만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는 비결은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성령의 필요함을 절박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것이 성령이 절박하게 필요하다고 하는 그 느낌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에 자기를 두어야지만 그 결핍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먹고 마시고 놀고 그런 사람에게는 성령의 필요함을 절박하게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성령이 지혜 안 주셔도 오늘은 뭘 먹고 내일은 뭘 입어야 할 지 다 안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하여 수고할 때, 우리는 절박하게 성령의 필요함을 느낍니다.
저는 주일학교를 하면서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요즘들은 금방 했다 또 금방 그만두고 그래서 오죽했으면 전도사들이 주일학교 선생 한다고, 또 청년부 리더 한다고 그러면 손을 꽉 잡고 일 년은 하는 거냐고 다짐을 받을 정도로 되어 버렸으니까 답답한 세상이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저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커다란 고통이었습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내가 지금 성령 충만하지도 못하고 나 자신을 추스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런데 밖에서 살아갈 때는 힘들기는 해도 그래도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절박하게 필요하고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해 주셔야 되겠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주일날 아이들을 가리키려고 보면 그것을 절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절박하게 느낍니다. 내가 성령이 충만하고 정말 은혜가 충만할 때는 아이들이 많이 나오면 많이 나와서 감사합니다. 적게 나오면 적게 나온 것이 도전이 됩니다. 그런데 이게 다 말라버리고 나면 아이들이 많이 나왔을 때는 안심이 되니까 게을러지고 적게 나오면 실망이 되니까 낙담이 돼서 그만두고 싶고, 이렇게 인간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좋지 못한 의미에서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늘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단상에 오를 때마다 심각한 능력의 부족을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 오늘 말씀 참 기가 막혔던 것 같은데, 누구 들으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하다가 보니까 그 사람이 들었으면 참 좋았는데, 세상에 저 생둥생둥 하게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좀 봐. 또 졸기까지 하네." 그러면서 절대적인 능력의 부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건드리고 상처만 내고 오는 게 아니라 말씀이 장사의 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어서 날아가서 '쾅'하고 꽂혀서 도저히 뽑히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꽂히는 심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자기의 수많은 지혜 그리고 계시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이 타의 추종을 부러워할 정도의 그런 놀라운 계시의 세계에 대한 체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끊임없이 자신이나 자기의 지식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위로부터 내리는 능력과 그 성령의 능력을 죽는 날까지 의지했던 그 이유를 하나만 말하라고 간단합니다. 믿음이 뛰어났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이 자기를 붙잡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상황에 자기를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매 순간순간 자기의 힘으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그런 사명과 그리고 소명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위로부터 내리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가 필요하다는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인정과 사람의 칭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이런 신령한 하나님의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향하여 목마른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제법 그리스도의 복음을 많이 전파해서 꽤 여러 사람을 예수 믿게 만들었던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만약에 우리가 애쓰고 수고한 모든 순간들 위에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시고 능력이 나타났더라면 그 우리의 정성을 다한 헌신을 통해 지금 우리들이 거두고 있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열매를 거두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이라는 거룩한 후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나의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이 아니라, 오직 매 순간마다 나를 붙드시고 그리고 내 말을 사용하셔서 저 듣는 사람 마음 가운데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고, 예수가 누구신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못 박혀 죽으심이 어떠한 사랑인지를 알게 하는 성령의 증거하시는 역사가 우리의 복음전파에 항상 동행해 주시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심겨진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이 기가 막히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때 우리는 찬송할 이유가 있습니다. 나도 저럴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성령과 그리고 그 능력으로 내 마음에 이 놀라운 은혜의 복음을 심으셨으니,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이 그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때 우리는 또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나 같은 무능한 죄인을 사용하시고, 바울같이 지식에 부하지도 못하고 그리고 아론과 같이 말에 능하지도 못한 나의 이 어눌한 증언을 통해서 저 사람의 마음속에 구원의 복음을 심으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찬송하고 노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결과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우리 안에 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각한 결핍과 모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사도의 이 고백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이 고백이 옳은지 그른지를 시험해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분명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기로 다짐하는 순수한 복음이 교회에 충만해야 할 것과 그리고 이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복음 자체로 자긍하지 아니하고, 이 복음을 유효하게 하시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우리의 전파하는 복음 전도 속에 늘 동행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교회에 있을 때 그 교회는 바로 은과 금이 없어도 그리스도를 소유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