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성장과 미래의 역할
녹취자: 김은정
여러분들이 이미 공과공부를 통해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복습하는 의미에서 한번 책에 기록되지 않는 내용들까지 그리고 또 이것을 직접적으로 열린 교회라는 현실에 적용까지 생각하면서 강의를 여러분들에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편의상 1챕터 2챕터 즉 한국교회에 성장에 관한 부분은 생략을 하고 바로 21세기 한국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래도 우리가 한번 정리를 해보자면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주신 이 선교적인 부흥은 한국만의 독특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선교의 역사가 전개되어 오면서 상당히 많은 나라들이 이런 괄목할만한 부흥을 경험했고 그리고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의 역사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독특한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단순히 이런 복음을 듣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주 폭발적인 성장을 주시고 그리고 우리 한국이 그동안에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시간 안에 놀라운 근대화를 일구어 냈습니다. 언젠가는 영국에 있는 어떤 유명한 학자가 한국을 와서 방문하고 또 한국학 연구소를 영국에서 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하고 같이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고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는 한국 사람을 만나고 그러면서 자기나라에 대한 자존감이 없는 것을 보고 굉장히 놀랬다. 우리 영국이 300년 동안 겨우 일어낸 업적을 너희나라는 30년 동안 일구어 냈는데도 정작 자신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젊은 분은 기억나지 않겠지만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30년 좀더 지나가서 40년쯤으로 넘어가면 1970년대가 되고 조금만 더 뒤로 당기면 1965년 정도로 올라가면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여러 젊은이들이 상상이 안 갈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북한이 지금 어렵다 그러는데 그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지금 소말리아나 비 아프리카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되십니다.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불과 한 30년 동안에 이렇게 엄청난 업적을 일구어 내고 그리고 우리나라가 이렇게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년으로 GDP가 1조 달라에 육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1200조 정도를 국민이 생산해 내게 되고 그리고 이제 수입과 수출이 거의 1조 달라 가까이 되는 그런 엄청난 위업을 이루게 되어서 전 세계의 200여국이 되는 나라 가운데서 9번째의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 태어나서 그냥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대단한 것이 아니겠지만 엄청난 나라입니다. 이디오피아에서 공부하러 온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국은 정말 대단한 나라이다. 왜냐하면 자기 나라는 민주화도 못 이루고 산업화도 못 이루었는데 짧은 기간 동안에 한국은 결국은 이 두 가지를 해냈구나" 이 두 가지를 다 해낸 나라가 근대 역사에서 별로 없습니다. 지금도 굉장히 대단합니다. 그리스에 갔을 때 그리스 사람에게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니까 "아주 스마트한 나라"라는 겁니다. 한국 가봤냐? 하니 "아니다." 그러면 당신아 한국이 스마트한지 어떻게 아느냐 하니까 "그 나라 사람들이 만든 물건을 보면 알지 않냐? 한국 물건이 스마트하다. 그 나라는 스마트 한 나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탁월하게 엄청난 노력으로 앞서가고 있는 나라입니다. 저는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이 너무 감사하고 그리고 내 마음대로 안 되겠지만 다시 태어나도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은 마음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아마 30년 동안 우리가 겪은 사회적 변화는 상상이 안 갈 겁니다. 그렇게 엄청난 변화, 국민생활도 그렇게 많이 변했기 때문에 교회도 다른 나라와 비교도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에 아주 격렬한 변화를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많은데 긍정적인 면들은 하나님이 놀라운 교회의 성장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확고한 신앙, 그래서 정말로 재미 있는게 번역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내도 새번역 성경이 안 팔립니다. 왜? 이해하기 어려워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원래는 사실은 번역된 성경이 아니라 원본 성경인데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인데 어떻게 두 개를 번역을 하냐? 나도 그런 마음입니다. 하나가 되어서 내려오는 이런 아주 훌륭한 전통을 우리들이 갖고 있게 되었고 그나마 우리에게는 열렬한 기도생활의 뜨거움이 있고 전 세계를 다녀봐도 한국처럼 이렇게 자기의 교회를 사랑하고 충성스럽게 헌신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은 나라가 별로 없습니다. 이런 좋은 것들을 물려받게 되었고 사회적으로는 아주 강력한 경제성장이 있고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지면서 선교에 엄청난 열심을 품게 되어서 잠시 있으면 미국이 파송한 선교사를 능가할 정도로 그렇게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그런 나라가 되었고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많이 드리워졌습니다. 내세중심적인 신앙, 그리고 건전하지 않는 기복신앙 개 교회주의 등등 많은 문제들을 나았고 특별히 요즘 들어서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것도 역시 다른 나라가 빨아드렸던 것처럼 더 급속한 속도로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을 빨아들이고 그리고 사회는 고도의 물질문명을 누리면서 해체되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보면 나라가 잘 살게 된 것은 무슨 뜻이냐면 열심히 일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일한 가운데 희생을 당한 것이 가정입니다. 그래서 이른 새벽 별보고 나아가서 별보고 돌아오기 까지 그렇게 열렬하게 그렇게 말하자면 헌신적으로 일했기 때문에 이 산업화를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혼돈스러운 시대를 우리들이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제적인 부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이제 하나님을 향해 가난해지지 않고 교회를 자신들의 구원 받아야할 필요가 있는 절실한 영적인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자신들이 원하는 자아를 실현하는 수단으로서 신앙을 이용하려고 한다든지 하는 이러한 사상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고 또 이런 속에서 교회는 나름대로 잘못된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종교개혁의 본질을 흐리고 이렇게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무관심이 증폭되고 있고 1985년서부터는 기독교의 인구가 서서히 줄기 시작하고 다른 종교가 좀 늘어난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결함이 있어서 이기도 하지만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과 기독교의 사상들이 충돌을 일으키는 가운데 사람들이 다른 종교로 빨려져 나아가는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종교가 자신의 삶을 실현해 가는데 있어서 도움이 된다면 종교도 괜찮지만 이런 기본적 입장은 이미 서있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 우리들이 혼란스런 시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어느 한 잡지를 보니까 기사가 나오는데 통계를 냈는데 한국교회에서 96%이상의 설교가 성경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려는 노력이 없는 설교가 96%이상이다. 이제 이렇게 놓고 보면 과연 교회에 가서 참된 기독교 신앙의 도리를 깨칠 수 있겠는가 하는 혼란스러운 우려들이 우리들에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이런 복잡한 속에서 21세기에 한국교회는 어떤 식으로 이제 새롭게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제일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면 개혁주의 신학과 청교도 전통의 부흥입니다. 그래서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불확실성의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무엇도 확신하는 것이 없는 그런 시대, 그런 시대를 를 우리가 지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는 이미 교회 속에서 상당히 많이 상실되었고 중요한 것은 성경에 무엇이라고 쓰여져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늘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생활을 보다 더 편리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교회에 도입되는 이유는 그것들을 찾으러 사람들이 세상에 나아가니까 그런 것들을 교회에서 찾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보니까 교회에 문화사역을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꽃꽂이 교실, 무슨 강습회, 무슨 강습회 심지어는 골프교실까지 만드는 교회를 내가 봤는데 이렇게 해서 많은 것들을 교회 안에 끌어드립니다. 그런 것들을 교회 안에 끌어들이는 그것이 사실 현대 문화를 끌어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제 조금 있다가 설명을 드리겠지만 그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이런 식으로 되어가면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신학이 없는 탈 신학적인 목회가 보편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말해서 성경적으로 보면 한 사람을 전도해서 구원하는 이유는 그를 구원받게 만들어서 창조, 구속, 재창조로 이어지는 하나님이 이 세계을 향해 가지고 계신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위해서 우리들이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전도된 사면들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이런 사상을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고 두 가지 안에서 성장해야 되는데 하나님 말씀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 은혜 안에서 성장해 가야합니다. 그것이 지식과 사랑이라 말할 수 있고 이 두 가지의 아름다운 결합을 우리들이 경건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장이 이루어져 가야되겠는데 이제는 그러한 신학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 가기보다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워줌으로써 그래서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교회를 일구어 가고 싶어하는 그런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마다 아주 장중한 신학이 있고 그 신학의 견고한 신학이 서있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 창조, 교회,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 이런 것들을 전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써 개인의 구원을 이해하고 교회의 부흥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런 구도 속에서 설교하고 성도들을 양육하고 그런 목적이 있는 삶에 적합하도록 그렇게 훈련을 해야될 것 아닙니까?
훈련이라고 하더라도 똑같은 훈련이라도 가수를 훈련시키는 것도 훈련이고, 군인을 훈련시키는 것도 훈련일거 아닙니까? 철학자를 훈련시키는 것도 훈련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훈련은 목표가 다르니까 각각 다 다를 것 아닙니까? 군인을 훈련시킨다 그러면 목적 자체가 전투하는 것이니까 강한 체력과 전쟁에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알려주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똑같이 양육 양육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어느 교회는 양육을 안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물어보는 것은 무엇이냐면 그 양육이 무엇을 위한 양육이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 자신을 그냥 교회에 잘 정착시키기 위한 그런 양육이어선 안되겠지요? 양육이라는 것은 결국은 아까 말한대로 창조와 구속, 재창조로 이어지는 그래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 수 없었던 인간을 그 목적으로 돌아가서 이바지하기에 적합하도록 훈련시키는 것 그것이 진정한 양육이라고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거의 사라져 간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개혁신앙을 이야기하느냐? 교회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본질에 가장 근접했던 두 시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사도시대와 종교개혁시대입니다. 청교도는 바로 영국이라고 하는 독특한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구현해 보려고 했던 독특한 운동입니다. 그런 면에서 영적인 많은 유산들을 우리가 선교사들을 통해서 물려받았다는 점에서 이제 이 청교도 신앙은 종교개혁 신앙의 보다 현실적인 적용이라고 우리는 여겨지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하면 이제 종교개혁으로 종교개혁 사상 신학과 청교도 정신으로 전통을 부흥으로 우리가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가 긴 시간 설교를 하고 경건한 예배를 드리고 무엇인가 딱딱해 보이는 것으로 인해 이제 현대인의 입맛에 맞지 않다고 생각을 해서 교회는 한없이 문턱을 낮추고 그리고 세속화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렇지만은 이제는 사람들이 교회에 세상에 있는 것들이 교회에 있다고 하는 것들 때문에 나오는 시대는 이제 지났습니다. 문턱이 낮다고 해서 교회에 쉽게 들어오고 효과를 발휘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미국에 있는 마케팅 교회들은 이런 심리를 잘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하나의 상점이라고 보고 마케팅 원리를 적용해서 사람들이 물건을 구매하는 행동양식을 분석하고 거기에 가장 맞는 종교적인 말하자면 서비스나 혹은 재화들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이용하기 편리한 교회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처음에는 아주 놀라운 열렬한 각광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마케팅 교회라고 하는 것은 단지 교인들을 편의롭게 친절하게 이렇게 대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메시지와 내용까지도 사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보다는 교인들의 필요를 중심으로 해서 맞춰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이러한 교회의 노력에도 충분히 감동을 받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이제 처음에 우리들이 가난할 때에는 고달플 때에는 편안한 것이 좋고 싼 것이 좋지만 그러나 이제 시간이 지나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그 요소들만으로는 우리에게 호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가난할 때에는 어느 식당에서 많이 준다더라 그러면 우르르 갔습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이 준다는 이유 때문에는 가지 않습니다. 또 어떤 때는 맛있다더라 그러면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손님 대접도 못 받고 줄서고 심지어는 밥하는 할머니가 막 욕을 하고 그래도 그것을 즐겁게 생각하면서 가서 쭈그리고 앉아서 찌개라도 한 그릇씩 얻어먹었는데 인제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조금 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맛 있어야될 뿐 아니라 어디를 가든지 사람대접을 받는 식당을 원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필요는 점점 변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태까지 한국교회가 외적인 성장주의를 택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렇게 오면서 결국은 교회는 장중한 개혁신학과 청교도주의 이런 것들은 현대인에게 맞지 않는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이제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는 이러한 것들을 버려야 된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은 교회가 자신이 확신하지 않는 진리를 스스로 붙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진리를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스스로 그 진리를 계속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의 교회들이 세속주의를 택한 모든 교회들이 그렇게 사람으로 넘쳐났습니까? 사실은 세속화의 길을 걸어간 수 백개의 교회 가운데 진짜로 세속화의 덕을 본 교회는 불과 몇 교회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냥 가지고 있는 것들만 잃어버렸지 실제로는 교인들이 모이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결국은 우리들이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는 이런 객관적인 가치 같은 것들을 믿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에 전면적으로 항거하고 도전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지난 몇 년 전에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제가 강연을 했지만은 결국은 각자 각자를 최고의 판단자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각자 각자가 최고의 판단자가 되고 궁극적인 진리는 자신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니까 이 세상은 수많은 각자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무슨 문제가 나오냐면 사회가 굉장히 이기적으로 되어가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갈등하는 정도는 약과고 아예 관심자체가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런 일들이 이웃 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안에도 일어나게 돼서 요번에 일본에서도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백 몇십세를 살아서 세계 최고령자가 있다고 하는데 알고보니까 30년 전에 죽었는데 연금을 계속 받아먹기 위해서 가족들이 신고를 안했는데 100세 넘는 고령자들이 60명이나 70명이 있다는데 대부분이 거짓말일 거라고 신문에서 계속 나와서 일본에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거 가족들이 빈 방에서 죽어가도 가족들이 그것을 모르는 철저한 단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네비나스라는 철학자같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위 '타자의 개념' 같은 것을 개발했습니다. 각자 각자가 자기를 최고의 중심으로 여기고 그것이 만약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면 이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에 대한 해결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신은 인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타자는 인정하는 겁니다. 나는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있는 것이다. 그 타자라고 하는 것은 내 이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을 이어주는 이 객관적인 기준으로서의 하나님을 포기하는 대신 타자성이라고 하는 제 3자를 생각을 해서 그래서 그것을 설정해 놓고 우리 각자 각자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인 타자성도 생각을 해야한다. 그래서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 앞뒤로 좌우로 연관을 맺게끔 타자성이 나를 규정한다고 생각을 해서 남을 배려하는 그러한 이념을 실천해 봄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적인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시도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공동체의 신학도 나오고 등등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보면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이제는 무엇인가 내가 나 혼자가 아니라 전체적인 통합을 이루고 있는 어떤 영적인 세계를 상정하는 겁니다. 그게 뉴에이지 사상 같은 것들로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엇인가 우리 모든 사람 속에 스며들어 있는 어떤 영성의 공동체적인 결집이 있고, 그 공통적인 결집을 통해서 우리는 극단적인 개인주의화에서 오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이러한 고통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런 것들이 종교적으로 잘 반영된 것이 말하자면 오늘날의 신비주의적인 현상들입니다. 그리고 영지주의적인 사상들 이렇게 해서 이머징 처치 같은 것들도 이런 정신을 상당히 많이 자락에 깔고 전개되고 있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무엇을 보여주냐면 인간이 결국은 탕자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의 집에서 사랑을 받고 속박을 받는 그것이 구속이라고 생각을 해서 이제는 무언가 인간에게 "너는 회개해야 한다. 돌이켜야 한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된다." 이런 것들이 다 지겹게만 들렸기 때문에 그런 가치를 다 부인하고 그리고 이제 자기의 자아를 내세우는 삶을 살았지만 그런 삶을 살면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은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사랑 관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겨우 알게 되기 때문에 이런 관계를 모두 부인하고 자기 자신을 매몰시킬 때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처음에는 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굉장히 비관적으로 생각을 많이 했는데 최근 몇 년간에 공부도 하고 실제로 목회를 해보면서 느끼는게 무엇이냐면 사실은 미래의 시대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이제 신앙이 배척받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아마 실제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는 점점 상실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확신이 오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우리가 이렇게 경제적으로 더 좋아지고 현실 만족적인 삶을 살면 살수록 참된 기독교 신앙은 더 절실하게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에 대한 필요가 곧 교회에 대한 필요와 일치하느냐 하는 문제는 의문점으로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참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 참된 기독교의 필요를 사람들에게 채워줄 수 있을 때에 그 기독교에 대한 필요성은 교회에 대한 필요성으로 이어질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절실하게 기독교가 필요한데도 사실은 교회는 필요로 하지 않는 그런 시대가 올 거다 보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냐하면 이제 우리나라도 점점 잘살게 되어서 3만불 4만불이 넘게되면 아마 우리 자녀들의 시대쯤 될 거 아닙니까? 2025년에는 우리나라가 8만 6천불이 된다 해서 굉장히 좋아했던 때가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미국 다음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이다."고 권위있는 기관에서 펀더맨털을 조사한 다음에 미래의 가능성을 예측한 겁니다. 그런데 인제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마냥 좋게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선교적인 관점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좋게 작용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살펴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점점 더 사람들은 절대적인 가치를 부인하고 인간의 자유가 한없이 보장된 사회를 살아가게 될 겁니다. 그때에 우리는 미래에 이런 진리에 반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었을 때 사람들의 방황은 더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해서 인제 우리들이 오히려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전파하고 그리고 성경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개혁주의 신앙과 그리고 우리의 삶 전체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구현하려고 했던 청교도의 전통들을 우리들이 현대의 사회에 맞게끔 우리들이 구현해 나아갈 때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의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하나가 무엇이냐면 지금 현재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안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환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진리를 정말 사모하는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한 마디 외쳐도 그 진리에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미국은 우리나라보다도 훨씬 더 자유가 넘치고 심지어는 이제 엊그제도 보면 동성연애의 결혼을 못하게 하는 것은 위헌이다. 이렇게 해서 동성연애의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조치를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다 일어납니다. 인간의 자유가 한없이 보장되니까 총기난사사건 같은 것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군대 다녀온 사람들은 잘 알지만 군대가 자유스러울 때 사고가 나지 워낙 군기가 엄정하면 그런 사고가 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신이 빠져서 군기가 빠져서 그렇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 속에도 놀랍게도 미국은 종교다원주의를 온 나라에 수출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또 한편에서는 개혁주의의 부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존 파이퍼 목사님에 의해서 주도된 가스펠 포 투게더라는 운동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든 현대판 종교개혁의 사상을 이어받은 현대판 목회자들이 모여서 그 종교개혁의 신앙을 따라 가고자 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서 1년에 한번씩 컨퍼런스를 합니다. 그런데 작년에 모였는데 칠천명이 모였습니다. 미국에서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4천명씩 밖에 안모였는데 칠천명이 모여서 말하자면 그들은 이 시대를 거슬러서 참된 종교개혁적인 정신을 가지고 칼빈주의적인 삶을 살겠다는 젊은이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엘버트 몰러라고 하는 학자가 있는데 이 사람은 남 침례 신학교의 학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남침례 신학교는 한국하고도 관계가 많은데 특별히 실천신학이 아주 발달되어서 특히 설교학 같은 설교, 실천신학 이런 것들이 아주 발달했고 찰스 에드윈 다간이라고 하는 제가 설교사를 3권 책을 1800페이지 정도된 것을 번역한 적이 있는데 찰스 에드윈 다간이 말하자면 강의를 하던 그 학교입니다. 10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설교학 교과서로 쓰이고 있을 정도라고 하니깐 굉장한 사람입니다. 사실은 그 학교가 상당히 칼빈주의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굉장히 많은 비평주의자들이 들어오면서 자유주의화 되어가고 있을 때 엘버트 몰러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그 학교 총장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대대적인 개혁을 일으키면서 자유주의적인 경향의 교수들을 전부다 다 해고하고 그리고 칼빈주의적인 교수들을 영입해서 학교 전체를 칼빈주의 영성이 있는 학교로 철저하게 학생들을 최고의 교육을 시켜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까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사상적으로만 칼빈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 속 자체에 완전히 학문이 가득 있어서 무슨 문제든지 간에 텔레비전에서 아나운서가 질문을 하기만하면 속사포처럼 그 대답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제가 아는 교수 한분이 엘버트 몰러 총장님이 있는 그 집으로 방문을 했답니다. 자기 집에 데려가서 보여주는데 개인 서재가 있는데 장서가 75,000권이랍니다. 그런데 그 책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천재, 수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학문적인 노력을 기울이면서 하는데 그것을 학생들이 놀랍게 따라 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잘 모르지만 우리 교역자들은 알텐데 개혁파 정통주의 역사 속에 3권의 탁월한 조직신학책이 있는데 순수신학 공간이라고 하는 레이든의 학자 4인방이 쓴 책이고 나중에 헤르만 바빙크가 편집을 합니다. 거기서 순수라고 하는 말은 학론파들에게 대항한다라고 하는 뜻에서 순수입니다. 그다음에 있는 책이 마스트리어트라고 하는 사람의 이론실천신학총론이라고 하는 책이 있고, 그다음에 세 번째가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리더로써 역할을 했던 프란시스 트레틴이란 사람의 변증신학 각론이라는 3권으로 된 책인데 역사상 가장 어려운 조직신학 책 중에 하나에 속합니다. 3권의 책을 영어로 되어있는데 미국교수들을 만났는데 자기네들도 읽기가 너무 힘들답니다. 영어가 그렇게 어려운데 이 학교에서는 엘버트 몰러가 총장이 되고 나서 무슨 과목으로 박사를 마치든지 간에 그 3권의 칼빈주의의 조직신학책을 어디를 물어봐도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달달 외우지 않으면 졸업장을 안주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대대적인 개혁을 일으킨 겁니다. 그 제자들이 가서 원래 설교가 강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칼빈주의 신학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 복음을 전하니까 정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영국같은 경우는 교회가 다 죽어가고 있고 모슬렘에게 팔린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975년도에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스펄전 목사님이 목회하던 테그나컬 처치에 갔답니다. 주일인데 40명정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추리닝을 입고 모여서 예배를 드리더랍니다. 빨리 예배를 드리고 나서 게이트볼이라고 할려고 했을 겁니다. 엘버트 몰러라고 하는 분이 그 교회에 부임을 했을 때에는 교인이 30명까지 내려갈 때 부임을 했습니다. 스펄전이 한때에는 6000명씩 목회를 했던 교회였습니다. 이분이 엄청난 칼빈주의자입니다. 어느정도냐면 로이드존스의 추종자들이 너무 칼빈주의라고 비난을 할 정도로 칼빈주의적인 사람입니다. 설교를 굉장히 감화력있게 잘하십니다. 자기 강단을 왠만한 사람에게 절대 안맞기신답니다. 그렇게 해서 영국사람들은 쉽게 회개하고 신자되기 원합니다라고 안그럽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이 목사님이 가셔서 30명밖에 안모이는 그 영국인 교회에 설교하셔서 지금은 1000명이 훨씬 넘는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이번에 제가 영국에 9월 첫주에 가서 그분을 뵈올려고 합니다. 피터 마스터스라고 하는 목사님인데 인제 은퇴하실 때가 다 되었습니다. 무슨이야기를 하려면 사실 포스트모더니즘화 된 것이 영국이나 미국보다는 우리가 덜합니다. 우리는 그래도 아직까지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내려오는 이 유교사상이나 이런 것들은 사실 포스트모더니즘하고 좀 다릅니다. 사실은 사람들이 좋아서 편리해서 그것을 따라가기는 하지만 우리 속에는 아직까지도 무신론자라고 할지라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에 우리들이 뭍어서 갈뿐이지 확고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구라파 사람들은 다릅니다. 확고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들이 이런 진리를 외치고 참된 유일한 기준으로서의 성경의 진리를 외칠 때 돌아온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더 가능성이 많다는 생각을 우리는 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신학적인 가치를 무시하는 오늘날의 교회의 목회는 잘 안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다는 얘기는 무슨 이야기냐면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분명하게 종교개혁의 정신과 청교도 신앙을 외치면 그 속에서 정말 성령의 생생한 역사가 있으면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주님을 믿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몇 년전에 교회성장 연구소에서 계시던 목사님 한분이 와서 저하고 마당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열린교회의 새가족 교재를 이렇게 보여줬습니다. 그게 맨처음에 46000원인가 주고 사야합니다. 지금은 26000원으로 줄어들었는데 그런데 그분이 3번을 물어보는 겁니다. 이 교회에 등록한 사람이 새가족공부를 하기위해서 이 책을 사는데 이것을 교회에서 그냥 주는 게 아니라 본인이 사야합니까? 이것을 3번이나 물어보는 겁니다. 그래서 당연히 교회는 그런 것을 주는 교회가 아니다. 자기가 공부할 것인데 돈주고 사야지 그러는데 또 물어보는 겁니다. 이것을 정말 사람들이 정말 돈주고 삽니까? 산다. 이것을 3번 물어보길래 목사님 왜 그렇게 의심이 많으냐? 목사가 거짓말 하겠느냐? 정말 산다. 이미 벌써 그런 시대는 지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게 사실 솔직히 이야기 해서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고달프지 않습니까? 별로 안그럽니까? 해도 해도 목회자가 잘했다고 박수치는 법이 없고 그리고 맨날 누가 그럽니다. 막 설교를 하는데 목사님이 우리를 죄인처럼 취급하십니까? 그러는데 사실 죄인이지 우리는 그런 취급에 아주 익숙해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열린교회가 이제껏 해서 모이지 않습니까? 저는 양심에 손을 얹고 교회에 사람들을 늘리기 위해서 목회해 본적이 한번도 없고 교인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내 자신이 노력을 해본적도 양심에 부끄럼이없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계속 와서 등록을 하고 모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국에서 개혁주의 목회는 어디까지인가? 열린교회가 성장하는 수준까지가 한국교회의 개혁주의에 가능한 한계점이 될 것이다. 누가 듣기 좋으라 하는 이야기겠지만 그런 이야깁니다. 그것을 보면 교인들의 필요는 똑같은 열린교회가 대구에 있다고 안되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산에 있다고 안되겠습니까? 대전가 있다고 안되겠습니까? 시골에 있다고 안되겠습니까? 어차피 영혼을 가진 인간은 마찬가지인데 물론 사람이 얼마 안되는 시골에서는 3천명, 4천명, 5천명까지는 안되겠지만 그러나 있는대로 사람들이 모여서 그렇게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어디에 있든지 영혼은 마찬가지인데 그러면 지금도 누군가가 그렇게 하면 된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면 벌써 지금에 이런 정도라고 한다면 10년이나 15년 20년 지나고 나면은 완전히 다른 시대입니다. 우리가 6-7년전에 교회를 개척할 때 시대하고는 단연코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음 17년 후에는 더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때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서 무관심해지지만 갈망하는 마음은 그때가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중생과 참된 회심과 그리고 평화를 강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경우를 보면 구원 그 자체를 통일적으로 보았지 이렇게 예수를 믿고 한 순간에 구원을 얻는 칭의의 구원이 따로 있고 그다음에 중생이 따로 있다고 보질 않았습니다. 이 중생 안에 신생이란 개념을 도입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순간부터 시작으로 해서 영화에 이르는 것까지를 하나의 구원으로 본 것입니다. 중생하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로 성화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냐면 이 중생과 회심을 강조하지 않는 겁니다. 지금 이런 개혁주의 부흥을 이루는 대부분의 모든 교회들은 한결같이 이 중생과 회심의 문제를 강조합니다. 지금 파이퍼 목사님 나이가 인제 70이 다 되가시는데 아직까지도 중생과 회심은 그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설교의 주제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고 회심했을 때 비로서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루어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꼬뚫지 않는 송아지 3부자가 감당을 못한다고 하는데 중생이 없고 회심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호소를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 흘릴 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해도 하나님께 겁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 자체가 본질적으로 그 사람안에 생겨나지 않은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회자체가 불가능한 겁니다. 만약에 한다면 그것은 사육이지 그것은 진정한 목회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실 이 중생과 회심의 문제를 힘들어 합니다. 이런 것들을 양보하고 나면 교회의 대세가 중생하지 않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될 때 이 사람들이 교회에서 실권을 쥐고 교회를 움직이게 될 때 교회가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은 너무나 명확관아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교회안에서도 실제로 중생하지 않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사실은 교회의 한 회원이고 토 투스 크리투스에 의해서 우리들이 그를 사랑하지만 그러나 그는 엄밀히 말하여서 교회의 회원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예의 주시해야합니다. 그래서 절대로 교회에서 중심적으로 일할 수 있게 기회를 주면 큰일 나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언젠가 영국에 갔을 때도 내가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자신이 교회 안에서 부목사인데 교인들에게 각군목으로 실제로 두들겨 맞았다고 증언을 해줬습다. 그러니까 세상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으면 교회에서 똥싸고 오줌누고 무슨짓은 못하겠습니까?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들의 신앙에 있어서 중생과 회심의 가치에 대한 강조가 사라져선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9월달 두 번째 주에도 우리들이 어린이 회심집회를 하게 되는데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정말 부모들이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서 그것이 자기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 아이들이 앞으로 무슨 사람이 될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것을 막연하게 생각하고 살면 안되는 겁니다. 특별히 여러분 교인들 중에도 보면 부모님이 다 돌아가실 때가 됬는데 그제야 교회에 와서 "어떻게 하지요? 우리 엄마 예수를 안믿는데요 우리 아빠 영접안했는데요 지금 오늘 빨리 가서 영접 좀 시켜주시면 안돼요?" 하는데 그런 무책임한 행동이 어디있습니까? 자신의 부모들인데 돌아가실 때까지 내버려 뒀다가 물론 신학적으로 죽기 직전에 회심하고 예수를 믿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불충성한 삶이 어디있겠습니까? 자신의 부모들인데.. 그러면 그런 죽음의 날이 오리라는 것을 몰랐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생과 회심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올바릅니까? 항상 잘합니까? 그러지 않습니다. 목회자인 저 부터도 올바르지 못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에 그렇게 중생과 회심의 흔적이 있으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순발력들이 생겨나는데 이게 결국은 중생과 회심이 아니면 안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성화를 강조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럽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성화에 대한 말씀을 들어야합니까? 죽기직전까지 들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선택이 아니라 은혜롭고 계속적인 소명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 외에 다른 곳에서 행복을 얻으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성도들이 모였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깨어지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이 지난 주에도 예배를 드리고 제가 너무 힘들거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면 영상으로 설교를 듣지않습니까? 뒤에서 저 자신의 설교를 듣고 찬송도 따라 부르고 그럽니다. 저는 그 시간이 굉장히 은혜롭습니다. 그런데 그때 시험거리가 있습니다. 무엇이냐면 거기 앉아있으면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마주보게 되는 겁니다. 그게 시험거리입니다. 설교를 할 때는 모르는데 보지 말아야 하는데 어떤 때는 사람들이 안보이게 가려버립니다. 다 보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데 어떤 사람은 졸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잠을 청합니다. 그래서 눈을 먼저 딱 감고 잠들어라 하고 잠을 청하는데 그것은 예배에 대한 중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아주 중대한 모독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정말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시대에는 잠 깨우는 위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막대기가 길다랗고 끝에 솜방망이 같은 것이 달렸습니다. 최근에 가보니까 화란에 있는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설교하기 직전에 사탕까먹는 시간이 있습니다. 모두 사탕하나를 탁 집어넣고 설교를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예배의 순서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뒤로 막대기를 쭉 내밀어서 툭 툭 치는 겁니다. 쳐서 잠을 깨우는 것입니다. 그 위원을 만들까 진지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일주일동안 우리들이 마음과 생각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집니까? 그때에 예배에 나와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씻어내는 겁니다. 정결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일주일 동안에는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에 현혹이 되어서 우리의 마음이 찢어지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갈렸는데 진짜 중생하고 회심한 신자의 영혼은 하나님의 아름다움 때문에 이 마음 속에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설교와 기도, 찬양, 교제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풍부하게 드러날 때 그때에 아름다움을 성도들과 함께 손잡고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가슴에 가득 채워가지고 돌아오는 것이 사실은 주일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 중에 가장 중심적인 시간 중에 와서 눈을 지긋이 감고 아예 잠을 청합니다. 막 앉아 있던 의자에서 뛰어 나가고 싶습니다. 뛰어나가서 자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번 주일날에도 방송실에 연락을 해서 설교중지하라고 그럴려고 내가 전화기를 만졌다 놨다했습니다. 올라가서 잠깐 끄고 졸지 말라고 하고 다시 틀어주려고 그랬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 줄 모릅니다. 설교를 할 때는 내가 설교에 신경 쓰느라고 미처 못 보는데 와서 다 보이니까 정말 걱정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적인 성화가 강조되어야 하고 그래서 우리가 가장 부러워해야할 우리의 신앙의 동료들이 누구냐면 그렇게 늘 깨뜨려짐이 있는 신앙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철저한 개혁주의 교리와 신학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교리는 원래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초대교회에는 교리가 세밀하지 않았고 이제 시기를 지나고 초대교회를 지나면서 이제 교리가 세련되고 정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과정을 거치면서 종교개혁자들에게 와서 그것이 커다란 제 수술을 겪으면서 로마 교황제로 얼룩진 잘못된 교리들을 다 뜯어내고 참되고 성경적인 교부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는 그런 아름다운 교리를 수립함으로써 참된 기독교 신앙으로써 돌아갔는데 교리를 먼저 세운 것이 아니라 성경을 먼저 해석을 함으로써 이렇게 온전한 신앙으로 나가는 지름길인 교리를 세워줬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철저한 교리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 교회에서도 이것들을 지속적으로 전략 수정을 했습니다. 교사들이 되기위한 구역장이 되기위한 조건으로 교리반을 공부했었습니다. 이것이 지난번 학기에 170명이 수강을 했는데 이번에는 200명을 목표로 2학기에 성화반을 안하고 교리반을 다시 개강을 합니다. 제가 직접 강의를 하는데 그래서 이렇게 대형 강좌를 통해서 150명이 모여서 하는게 15섯명이 하는 것만은 못합니다. 그런데 40명이 하는 것보다 150명하는 게 더 낫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대형강좌를 만들어서 교리학교 교육을 모든 사람들이 빠른 시일 내에 거의 마칠 수 있도록 그렇게 독려해야겠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통계를 보니까 장년과 청년 전체의 교인 중에서 교구마다 차이가 있긴 하는데 60%정도가 교리교육을 마쳤고 많이 이수한 교구는 75%까지 육박합니다. 그렇게 퍼센테이지가 낮아진 이유는 최근 1년까지 많은 교인이 등록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뚝 떨어진 것입니다. 이 수요를 빨리 빨리 감당을 하자 이번에 교역자 회의에서도 제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번에 2011년까지는 할 수 없다. 하던 대로 하는데 2012년부터는 교리반을 이수하지 않는 사람은 서리집사도 우리들이 주지 않도록 하자. 그래서 그 안에 빨리 빨리 교리교육을 받게 그래서 열린교회에 와서 새가족 공부를 마치고 나서 1년, 2년 기다리다가 들어온 교리학교를 새가족공부 마치고 그다음에 전도학교, 선교학교 등등 전도학교 정도만 거치고 나면 곧 바로 교리반에 들어와서 루이스 벌콥의 조직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자." 이것이 우리가 이번에 결정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끊임없이 변천하고 사상에 근거가 없는 삶을 살기 때문에 우리들은 더더욱 이 근거가 철저하고 확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교육을 보다 강화를 하고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제가 집필을 해서 교리학교에서 쓸 수 있는 두께가 한 500 페이지 정도되는 책을 써서 그래서 지금 루이서 벌콥 얇은 것은 개작을 해서 주일학교에 내려보내고 어른들은 상세하게 공부를 하자는 것입니다. 요즘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부흥과 개혁사에서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만화로 지금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하기를 내용을 수준을 낮추지 말고 그림만 넣어라. 그렇게 해서 상당히 두꺼운 책이 될 텐데 그래서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전체를 1장을 가지고 와서 내가 이렇게 수정하라고 보냈는데 그것을 가지고 만들어서 그렇게 하면 요즘 초등학생도 독서수준이 굉장히 높고 그리고 열린교회 같은 경우에는 아주 책을 많이 읽히고 교리공부를 철저히 시키고 주일학교에서도 하이델베르크의 교리문답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니까 아이들이 굉장히 교리습득이 빠릅니다. 충분히 그 만화를 읽어내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해서 교리교육 시키는 것을 아래로 끌어내고 여기있는 여러분들은 좀 더 철저한 교제를 가지고 공부를 해서 내 마음에 은퇴하기 전에 내 마음의 소원은 프란시스 트레트닌의 변증신학 강요가 열린교회의 구역장 교리공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철저하게 교리교육를 시켜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구체적인 고백의 내용으로 표현될 수 있도록 이렇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를 올바로 알아야지만 성경묵상도 올바로 되고 설교 한편 한편을 들을 때에 교리를 알고 들으면 전혀 어렵지 않고 커다란 감동이 되는데 모르니까 그게 필요하고 좋은 것이라는 생각도 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음악도 마찬가지 않습니까? 뭐 클래식이나 아니면 클래식 중에서도 교양곡이나 실내악이나 뭐 그런 것들의 원리가 무엇인지 잘 알고 들으면 마음에 감동이 되고 특히 그 노래에 얽힌 사연을 알고 들으면 음악회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손수건을 꺼내더라구요. 그러면 모르면 짜증이 나는 겁니다. 왜 북은 저렇게 치는거야?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진리의 세계도 꼭 같습니다. 여러분 미생물의 세계도 미생물을 알고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 겁니다. 똥도 잘 연구하는 사람들은 똥이 그렇게 예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도 우리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입교와 세례시의 교리교육을 이제껏도 철저히 했지만 앞으로도 더 철저히 하고 그렇게 해서 믿어야 될 내용과 살아야 될 가르침을 잘 습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교리교육을 실시하는 겁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교리학교가 24기 25기까지 나갔다고 그러는데 6기 7기 공부한 사람들이 그 교리를 아직도 이해하고 있겠습니까? 그래서 교리학교 졸업한 사람을 운전면허처럼 유효기간을 두어서 운전면허도 유효기간 지나면 적성검사를 다시해야지 재발급해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교리교육을 교리반을 수강할 때 유효기간을 5년정도 해서 5년 지나면 이 사람 머리에서 다 잊혀졌으니까 다시 재교육해야합니다. 그래서 불러서 연수교육을 해서 다시 교리의 감격에 빠지도록 만들어 다시 또 내보내는 겁니다. 세례교육을 받고, 교리교육을 받고 교리교육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결혼식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이제 나이든 사람들은 더욱더 교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제 하늘나라 갈 날이 가까워오는데 그때에 괜히 치매걸려서 엉뚱한 소리하다가 죽으면 안되지 않습니까? 진리의 도리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이제는 모든 성도들이 죽기 3년 전에 교리반 이수할 것 그게 교회에서 장례식 치를 수 있는 면허증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 예야 목사님 오시면 이 수료증을 보여드리고 장례를 지내달라고 해라 할 정도로 교회에서 교리교육을 이수하지 못한 사람은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교리의 교육을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어린아이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 아이들에게 교리교육을 잘 시키도록 해서 이것은 가정에서 의무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네델란드에 갔더니 거기는 많이 자유주의가 됐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경건한 종교개혁의 전통이 남아있습니다. 원래 화란이란 나라가 맨처음에 루터와 쯔빙글리, 쥬리히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제네바와 칼빈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건전한 개혁신학을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전통이 남아있어서 가 보니까 교회가 예배당만 달랑 있습니다. 나는 정말 부러웠습니다. 교회에 교육공간이 없습니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육은 가정에서 아이들을 가정에서 담당하는 것입니다. 주일날이 아니라 목요일날 오후는 카테키즘 배우러 교회에 가는 날 그래서 부모들이 아이들을 다 실어서 교회에다 갖다줍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목요일날 카테키즘을 가리키는 겁니다. 교리문답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굉장히 부러웠습니다. 그러면 교회교육관 그런 것은 염려 안할 텐데 그런 생각이 들고 ..그래도 어떤 면에는 우리가 훨씬 더 체계적으로 교육을 잘시킬 걸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해서 가정에서 교리교육을 잘 시킬 수 있도록 엄마들에게 철저히 교육을 시키고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가정에서 이수한 어린이 교리반을 만들려고 합니다. 어떻게 가리키라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다 했습니다. 과외를 법적을 못하게 할 때 부모에게 먼저 가리켜서 부모가 가서 학생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처럼 부모에게 어린이 교리반을 이렇게 하라고 잘 가르친 다음에 교재하고 출석부하고 다 줘서 가서 아이에게 하나씩 하나씩 가르키고 그렇게 다 해서 내면 마지막 아이를 테스트해서 교리반 수료증을 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가 열린교회 초등학교를 졸업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통과가 안되면 재수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린이 교리교육, 청소년 교리교육, 청년 교리교육.. 쭉 해서 교리교육이 계속 이어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를 보면 정말 훌륭한 교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니케아 신조, 아나시우스의 신조, 콘스탄티노플 신조, 네델란드 제 1 신앙신조, 도르트레이트 신조,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 제네바 교리문답,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등등 청사에 빛나는 아주 아름다운 교리문답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교리인데 뭐 그렇게 문답들이 많으냐? 하는데 문답들이 각각 틀립니다. 한 시대의 교회가 어떤 상황과 싸웠는가에 따라서 기독교 진리의 면들 중에서 어떤 면들을 특별히 부각시켜서 아름답게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국가와 교회의 강조를 두어서 아주 아름답게 서술해내고 어떤 때에는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참된 교리를 진술합니다. 또 어떤 것은 속죄의 교리에 대해서 설교합니다. 그러니까 교리마다 시대에 따라 완전히 그 강조점이 틀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니케아 신조같은 경우는 무엇 때문에 싸운 것입니까? 다름이 아니라 아리우스가 나타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은 아니시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를 하면서 니케아 신조를 작성을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는 성령이 과연 하나님이실까? 그래서 성령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해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교리 전체를 이해하고 난 다음에는 물결치듯이 다 나타나게 되면 음악적 소향이 있게 되면 국악을 들을 때 클레식을 들을 때 아니면 교양곡을 들을 때 아니면 경음악을 들을 때 각각 그 음악의 아름다움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기본적으로 교리에 대한 이해를 신학에 대한 체계를 세운 다음에는 이제 수시로 니케아 교리학교, 그다음에는 하이델베르그 교리학교, 그다음에는 네델란드 제1 신앙고백서 학교, 웨스트민스트 교리학교 이런 것들을 부정기적으로 이렇게 열어서 그때는 특별히 예를 들자면 믿음을 말미암은 칭의같은 것들을 아주 확장되게 아름답게 한다든지, 교회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하이델베르크 교리 같은 것들은 성도들을 굉장히 위로해주는 교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교리들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비추어진 많은 아름다움 들을 느끼며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정말로 발전을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의 지식들을 끊임없이 함양해야 합니다. 열린교회 다니면서 책읽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대개 고기집에서 온 식구 밥먹고 30만원 낼 때에는 탁 내고 서점에서 책 살 때 이것 15000인데 하면 억!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교회가 또 하나 해야 할 일은 교회 밖으로 신학의 학문적 발전에 이바지 해야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신학은 교회의 건전한 도움이 없이는 절대로 신학은 발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발전하게 될 때 그 신학은 위험한 신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교회가 어떤 도움을 주냐면 아주 경건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신학교에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좋은 신학을 습득하면서 아주 훌륭한 신학교 선생이나 목회자가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신학교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교회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 같은 사람은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도 목사님이었습니다. 분리교회라고 해서 국가교회로 나가고 비성경적인 것을 강요하니까 분리되어 나온 경건한 목사의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훌륭하게 신앙이 성장하고 아주 천재였습니다, 공부를 잘 했습니다. 교단의 깜풍 신학교를 보냈는데 1년을 공부하고 난 다음에는 그 당시 자유주의 학교라 알려진 레이든으로 유학을 갑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굉장히 많은 곤경을 겪고 정치적인 비판을 많이 당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놀라웁니까? 그런 자유주의적인 학교에 가서 전혀 자유주의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경건한 신앙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후일 자신도 자기 자신이 너무 신기했다고 고백을 합니다. 신학교가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자기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거기에 가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잔꾀와 잔재주들을 다 섭렵을 하면서 일생동안 그 자유주의를 가장 잘 알고 비평할 수 있는 신학자로 거목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20세기에 3대 칼빈주의자 중 한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러면서 신앙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철저한 신앙을 잘 경건을 갖춘 신학생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신학교가 올바르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좋은 신학자들이 필요하고 좋은 신학자들에게 자신이 연구한 것을 발표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고 이렇게 해서 개혁주의적인 신앙과 학문 활동을 진작해서 장기적으로는 교회에 널리 널리 영향을 미치게 해주는 그것이 바로 우리 개혁주의 신학의 진작을 위해서 우리들이 해야될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음세대를 보면 훨씬 더 복잡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들이 한 가지만 분명히 하면 됩니다. 무엇이냐면 종교개혁자들이 우리들에게 물려준 참된 신학의 요소를 굳게 붙들고 양보하지 말되 우리 이 시대의 문화를 무시하고 16세기가 되기를 우리시대에 강요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시대와 완전히 단절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16세기 교회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교회를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개혁가들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는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섬겨야 합니다. 절대로 우리의 마음 속에 개혁주의를 한답시고 이 시대의 문화에 대해서 앙심을 품거나 적대시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도할 때에도 그 사람의 죄는 미워하지만 그 사람을 끌어안고 불쌍히 여기려고 해야지 그를 예수 믿게 만들 수 있지 거듭나지도 못한 인간이라고 회개도 못한 인간이라고 그렇게 마음 속으로 앙심을 품으면 복음이 전해질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본질은 양보하지 않되 이 시대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끌어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 시대의 많은 물질 문명 속에 매몰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 세상의 물질을 사랑하는 사람이 돼서는 안되지만은 이 물질 문명에 앙심을 품고 그리고 물질문명을 적대시해선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물질 문명을 깊이 끌어않고 우리가 이 문명 속에 젖어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문화의 좋은 도구들을 사용해서 세상이 세속주의와 인간의 정욕을 자랑하는 많은 것들을 쏟아보내는 대신 우리는 대담하게 그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물질의 문명을 도구로 해서 역으로 우리들은 복음의 가치와 기독교적인 참된 정신들을 어떻게 하든지 맞불을 지으면서 사람들에게 쏟아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이폰 가지고 계신 분 알겠지만 최근에 제가 몇주 전에 아이폰으로 열린교회 홈피를 볼 수는 있는데 글씨가 너무 작지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아이폰용 홈피를 새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플리케이션을 해서 뜨는데 35만원에 다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숙제를 내줬는데 안드로이드폰이 대세를 이루는데 안드로이드폰에 탑재할 수 있는 어플을 개발을 하고 그래서 어디서든지 딱 띄워서 열린교회에 대한 모든 말씀의 정보들을 접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줘야되는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종이를 써서 할 테니까 진리를 알고 싶은 인간들은 여기에 와서 봐라 "이런 식으로 하면 안되고 그러면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면서 우리 모두 올라오라고 하셔야지 왜 당신 자신이 내려오셨겠습니까? 그래서 도성인식의 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내려가서 그런 모든 물질의 문명들을 적극적으로 활용을 해서 우리들이 이런 복음신앙의 가치들이 만들어내야합니다. 우리교회에 벌써 트위터에 가입한 사람이 3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서 벌써 17억의 숫자가 페이스북에 가입한 사람이 5억이 넘는다고 하는데 이런 것들을 통해 세상의 쓰레기같은 정보들이 순식간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히려 그 문명의 이기들을 사용을 해서 이 기독교의 참된 복음과 가치들을 전달해주는 역할들을 해야합니다. 인터넷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덜덜 떨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을 다 부술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을 안합니다. 솔직히 인터넷에서 열린교회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들의 수가 열린교회에 직접 설교를 들은 사람의 수보다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자매는 시어머님이 자기와 아이를 다 재워놓고 인터넷을 보더랍니다. 어는 날에는 인터넷을 켜놓고 계속 눈물을 딱더랍니다. 이 며느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도 그것을 들어보란 소리를 안하더랍니다. 아침밥 먹을 때 어머니 어제 뭐하셨어요? 하니까 너 열린.org 한번 들어가 봐라. 예수 안믿는 사람인데 그것을 듣겠습니까? 누워서 자고 있는데 새벽에 죽어도 잠이 안오더랍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어머니가 해놓은 즐겨찾기를 탁 누르니까 우리 교회 홈피가 뜨더랍니다. 교회 한번도 안나왔는데 그때 설교가 좀 길었습니까? 새벽 1시에 일어났는데 그 자매가 그 밤에 회심을 경험하고 나한테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1년 후에 편지가 왔는데 교회에 잘 출석하고 있다고 편지가 왔습니다. 그러니까 겁낼 것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이 될 때 마다 물질문명의 이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런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 못봤지만 이번에도 인셉션이 나왔는데 교회에서 사람들이 떠들썩하는데 상관이 없습니다. 대신 그런 것들을 우리가 올바로 잘보고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것을 충분히 보게해주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넣어 주어서 그 속에 우리들이 취해야할 것과 버려야 할 것 그리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왜 아바타나 인셉션을 보면서 열광을 하는가? 솔트 이런 것들을 보면서 열광을 하는가? 그것도 다 문명의 코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영화를 볼 때 남자들이 여자에 의해서 두들겨 맞는데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것이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의 문제를 넘어서서 얼마나 우리들이 이 시대에 억눌리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영화들이 계속 나오면 뜨는 겁니다. 그게 심리적으로.. 군대 안갔다 온 사람이 군대 얘기하면 그렇게 귀를 기울이듯이 비슷한 심리입니다. 여자들은 한번도 그렇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앞차기, 옆차기, 돌려차기해서 오징어처럼 뻣게 만드는데 잠재의식 속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 코드를 다 가르쳐 주어서 같은 시대를 살고있는 현대인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살고 있는가를 다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행하는 것이 우리들의 갈길을 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최종적인 것은 교인들을 향해 외치고 책을 쓰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교회가 부채도 갚고 여력이 생기게 되면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일 하는 것 보다 미래의 우리의 자손들을 목회할 수 있는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을 정말 경건과 신학이 갖추어지고 일관된 개혁신앙으로 무장한 그런 통나무 신학교 옛날 미국의 통나무 신학교의 신학생들이나 맨 처음의 전 포괄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세웠던 화란의 자유대학교의 이상 같은 그런 철저한 신학을 가지고 있는 이런 훌륭한 목회자를 양성할 수 있는 신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들의 다음 세대를 위해 필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고민을 하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