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왕궁에서 있었던 일:
게으름의 발전/정욕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잠 21:25)
녹취자: 허혜숙
게으른 자는 욕망에 있어서 부지런합니다. 그래서 그 욕망이 자기를 죽이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게으름에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서 발전합니다.
1. 우리는 외면을 가꾸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영혼을 가꾸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하여 헌신할 수 없다고 말하는 변명이 잘못 된 두 가지 이유는 무엇입니까?(64) (69)
사실 사람이 못 하겠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자기가 하기 싫어서 못 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고 싶으면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경험입니다. 진짜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은 그래도 못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기가 너무너무 하고 싶으면 하고야 맙니다. 보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여성들의 화장시간은 여기에 계신 분들도 대부분 하루 한 시간 이상 화장하시는 분은 없는 것 같아요. 척 보면 압니다. 몇 분 계신 것 같긴 한데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진짜 많이 하는 사람들 얘기를 들으니까 세수부터 메이크업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한 시간 반 정도라고 합니다. 그만두고 그냥 하루 한 시간이라고 칩니다. 여러분들은 ‘나는 30분도 안하는데...’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화장을 하는 사람이 하루 한 시간씩 쓴다면 365일을 하면 365시간이 되고 하루에 8시간 근무하는 것으로 따지면 1년에 45일 이상의 근무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요즘은 하루 8시간도 안 됩니다. 주 52시간을 이야기 하니까 그렇습니다. 프랑스 같은 곳은 더 짧아서 38시간까지 이야기를 하니까 엄청난 시간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화장을 하는 것을 폄하하기 위해 이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고 이야기 하고 싶은 핵심은 가치가 적은 일에 많은 시간을 사용을 하면 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희생되어야 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화장을 하지 말자는 뜻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조금 더 하셔도 좋습니다. 다른 사람 생각도 하셔야 합니다. 우리도 나를 위해 화장을 하는 것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화장을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적은 일에 많은 시간을 쓰면 보다 가치 있는 일이 희생해야 하는 것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는 바빠서 영혼을 돌볼 시간이 없다’ 그 이야기는 ‘못 한다’ 그 이야기입니다. ‘배 째라 나는 그럴 시간이 없다,’ 하나님을 향해서 불순종하는 표현이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이 우리가 해야 할 바를 못 한다고 하더라도 정말 내가 마땅히 그 일을 해야 되는데 내가 게으르다, 혹은 어쩔 수가 없는 상황에서 내가 이 일을 이행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해 지고 죄송한 마음을 갖는 것과 단정적으로 나는 도저히 그럴 시간이 없다 이것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한탕주의적인 은혜를 꿈꾸는 자세는 무엇 때문에 형성된 것입니까?(66-67) (71-72)
. 최선을 다하면 힘이 들기 때문에.
큰 은혜를 받겠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한탕주의적인 은혜라고 하는 것은 일상의 삶이 너무 힘듭니다. 이 사람이 왜 이러고 있을까요? 컴퓨터에서 맞춰보니까 로또에 당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겨운 일상의 삶으로서 차근차근 돈을 모으고 성공하고 이렇게 하는 길을 택하기 보다는 이 길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한 번에 대박의 변화를 꿈꾸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참 미국 사람들이 부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고 또 그런 설교를 많이 하는 교회를 보면서 웨스트민스터 설립 신학자인 그레시안 메이첼 박사가 비판한 글이 있습니다. 그것은‘자녀들을 낳았으면 한 글자 한 글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어서 신앙을 갖게 할 생각은 안 하고 언제 한 번만 부름을 받으면 이 아이가 완전 새 사람이 될텐데’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부모를 향해서 아주 신랄하게 비판을 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지적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부어주실 큰 은혜의 부흥을 우리가 기대를 하면서도 매일매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여야 할 의무를 다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의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큰 부흥을 기대하면서도 매일매일 성도들을 심방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하는 일들은 계속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 것 없이 한탕주의를 꿈꾸는 것은 게으름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사람, 여기에 회색으로 나오면 변질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사라지면서 변질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넘어진 사람입니다. 넘어졌으면 자기가 어디에서 넘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지팡이를 붙들고 빨리 일어날 생각을 해야 되는데 누워서 언젠가 하나님의 큰 은혜가 부어진다면 나는 복음을 전할 것이며, 열렬히 기도할 것이며 구제할 것이며, 또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은혜의 지배의 교리에서 보면 미래에 잘 살 것이라고 하는 보상심리로 오늘 하나님 앞에 잘못 사는 것을 합리화 하려는 본성이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게으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교육할 때에도 항상 게으름을 미워하고 근면하고 부지런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아이를 길러야 합니다. 어렵기는 합니다. 오늘날 시대가 그런 것을 비인간적이라고 보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당연히 이 세상의 문화를 파괴하고 도덕을 파괴하고 신앙을 파괴하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부지런해야 됩니다. 그래서 존 스튜드 목사님이 돌아가셨지만 그 분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세상에 가장 열심히 있는 종교 자가 있다 거기에서는 성직자라고 했는데 종교인이 있다, 그들은 사단이다 설교자들이 놀 때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불신의 씨앗을 뿌리고 다닌다, 졸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휴가도 안 가며 자기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면 우리도 마땅히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간가? 그 가치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무자비한 열심히 아닌, 노예적인 부지런함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각이 열심이어야 한다.’ 그것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쁨입니다. 진정으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3. 게으름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삶의 자세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최선을 다하지 않기를 선택합니까?968)(73)
최선을 다하면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최선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물건을 보더라도 잘 만든 물건은 물론 그 사람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는 노력이 훨씬 더 많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수제품이 비싼 이유가 수제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서 만들기 때문입니다. 공임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인건비가 올라갈수록 그것은 천정부지로 치솟아서 웬만한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제품이 아니면 서민들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격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신문인가 잡지에서 한 번 읽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의자를 만드는 장인이 있다고 합니다. 의자가 균일 가인데 하나에 3천 만 원이라고 합니다. 1년에 딱 열 개를 만든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자가 아니라 독특하게 예술적으로 자신이 디자인을 해서 자기가 직접 만듭니다. 그런데 보면 우리가 사는 집에 갖다 놓으면 재활용 센터에서 갖다 놓은 것 같은 전혀 갖고 싶지 않은 의자인데 돈이 많은 사람들이 1년 전에 그런 의자를 주문을 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최선을 다해서 정성껏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가격이 나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한다고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그 최선을 다할 때 엄청난 에너지가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무슨 일을 마무리를 지을 때에도 대충 마무리를 지을 때와 완벽하게 마무리 지을 때에 그 에너지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선의 것을 만드는 장인들에게는 완벽한 제품을 만드는 자체를 가치로 생각하고 명예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호도 잘못 만들어진 작품은 아낌없이 파괴해서 이 세상에 아예 존재하지 않게끔 만들어버립니다. 그것이 장인의 정신입니다. 그런 정신으로 만드는데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일하면 일을 합니다. 그런데 일을 시켜놓고 나면 뒤에서 치다꺼리 하는 것이 더 힘이 듭니다.
교회에 계셨던 어느 치과 의사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가 6개월을 휴가를 가면서 다른 의사선생님을 불러다 병원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AS를 해 주는데 2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6개월 동안 했는데 기술과 모든 것이 부족했고 그 병원 이름으로 치료를 해줬으니까 그 분이 가버리고 서 자기가 복귀한 후 자기가 2년을 AS를 해 줬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 가지 일을 완전하게 끝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고 일을 하는 모든 것이 누구한테 드리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대만에 갔는데 중국 사람들이 도망을 갈 때 알맹이는 모두 빼가지고 배에 싣고 갔습니다. 군대가 그것을 발견하고 모태통한테 저것을 격파할까요? 물으니까 부셔버리면 그 유물이 바다 속에 묻힐텐데 놔 두어라 언젠가는 우리가 가져오겠지 하고 대만으로 간 것입니다. 대만에 있는 국립박물관에 시설 안에는 도저히 전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돌아가면서 1/4씩 전시를 한다고 합니다. 황제의 외투인데 한 땀 한 땀 만들었는데 최고의 기술자가 그것을 4년 2개월 동안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황제는 그 옷을 한 번 입고 국물이 떨어지거나 무엇인가 때가 묻으면 버리는 것입니다. 황제는 세탁한 옷을 입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왕도 진솔옷만 입습니다. 황제는 세탁해서 옷을 입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42년을 근무하면 정년퇴직이 된다고 치면 딱 그 옷 열 벌을 만들면 죽는 것이고 황제가 4일 입고 그 외투를 벗어버린다면 40일 동안 황제에게 그 옷을 입히기 위해서 42년을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런 마음으로 우리 주님을 섬긴다면 이 세상에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집트에 선교사들 모임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곳에 갔는데 거기에 박물관을 보여주는데 제가 문화적으로 너무 충격을 받은 것이 5천 년 전에 왕궁에서 왕족들이 입던 팬티가 전시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백화점에 내 놓아도 와~ 할 수 있을 정도로 무명으로 잠자리 날개처럼 내의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왕족들이 입고 지냈는데 일기가 더우니까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된 것이었습니다. 그 왕을 섬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게으름의 1단계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건 같지 않은 물건을 생산해 내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허술하게 살아버리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쌓이면서 결국은 이것이 아무도 사 가지 않은 불량제품이 쌓이는 것처럼 결국은 그렇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회사에 가는 것 같고 여기는 성경을 끼고 교회에 가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집안에서 애를 데리고 놀아주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기도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원 밖에 있는 것을 보니까 고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내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느끼는 그 순간 그러한 피곤이 자신의 삶 속에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결국은 직장생활도 무너지고 가정에서도 무너지고 교회생활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힘입니까? 육체적으로는 육체의 힘이 필요하고 우리의 정신을 떠받치며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영혼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힘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는 쉼을 얻고 정신과 영혼은 은혜로 채워짐으로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것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과거를 회고해보면 ‘아, 내가 그 때 그것을 어떻게 감당해 냈을까? 도저히 지금은 엄두도 못 냈을텐데 어떻게 감당해 냈을까?’ 비결이 뭡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체력도 있었지만 정신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은혜는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저앉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다시 일어나야지만 교회도 가정도 직장도 사는 것입니다.
4.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어서 찾아오는 게으름의 형태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왜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됩니까?(69-70)(74-75)
의무를 저버립니다. 왜 그러냐하면 의무를 실현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가 들지만 의무를 팽개쳐 버리는 것은 훨씬 쉬워 보입니다. 자 설명을 들어봅시다. 자,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너무 힘듭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결국 미끄러집니다. 그래서 마땅히 해야 될 것을 의무를 저버립니다. 사실은 자기 의무를 저버리고 나면 아주 잠시는 편안한 것 같지만 그 의무를 저버림으로서 우리는 미끄럼을 타는 것입니다. 미끄럼틀 위에 서 있을 때는 괜찮지만 일단 미끄럼틀에 내려와서 잡고 있던 핸들을 탁 놓으면 빨리 내려갑니다. 그래서 믿음과 사랑 없이 의무만 하는 것은 나쁜 것이지만 그 의무까지 포기해버릴 때 우리는 급속히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5. 게으름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발전된 게으름은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도록 만듭니까?(71)(76-78)
정욕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 때는 다윗이 전쟁을 누비면서 그렇게 자신이 전쟁터에 앞장을 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나라가 부강하게 되자 군사들은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싸우는데 자신은 하나님 앞에 간음의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정욕이 그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식어져서 미끄러지고 나면 이것이 끝이면 좋겠는데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쓰러진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일으켜 세워진 자는 그 다음에는 자기 욕망을 위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고 난 다음에는 무기력이 오고 무기력에서 멈추지 않고 그 다음에 영적인 저항력을 모두 상실한 사람을 세상의 정욕으로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돈, 명예, 성, 권력 이런 것들로 사람을 유혹을 해서 그 때 이 속에서 욕망에 확 솟아납니다. 이 욕망은 주 안에서 통제되지 않은 욕망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것을 정욕이라고 부릅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성적인 잘못 된 욕망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모든 욕망의 총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정한 사랑의 정 이외에는 모두 정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우리를 이렇게 데리고 가서 마지막에 그것을 얻고자 하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결국은 범죄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존 오웬이 이런 말을 합니다. ‘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려면 그 사람의 행동보다 그 사람의 마음에서 솟아나는 욕구를 살펴봐라, 그 사람의 욕구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준다’끝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책을 읽다 보니까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아버지가 항상 자신이 남색에 빠지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나옵니다. 아우렐리우스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습니다. 할아버지가 정말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손자를 아주 훌륭하고 강인한 사람으로 키웁니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가 로마의 황제까지 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남자가 남자랑 성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아주 일반화가 되었었습니다. 오늘날 호모섹스나 동성애 같은 것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늘 나타났던 것입니다. 잠잠했다가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끝없이 자기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라도 못 하시는 것이 있는데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니까 그런 욕망을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만족시켜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으로는 하실 수 없는 일들을 인간이 끊임없이 요구하니까 그것을 인간에게 만족시킬 수 없다고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성화되어서 거룩한 인간이 되어간다고 하는 것은 욕망이 바뀌는 방향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6. 게으름의 단계적 발전을 돕는 비교의식과 지성의 동의입니다. 이것을 거절하기 위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973)(80)
게으른 사람은 혹은 끊임없이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은 항상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힘들고 피곤하니 좀 쉬어도 되겠지?’ 지성이 ‘그래야지’ 하고 동의를 해 주는 것입니다. 이왕 쉬는 것 좀 더 쉬는 것이 좋겠다고 완전히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게으른 자의 정욕이 발동하면서 욕망을 따라 사는 삶으로 발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이런 모든 결과들을 감춘 채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같이 읽읍시다. ‘게으름을 이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지금 당장 부지런한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미루면 미룰수록 게으름과의 싸움을 어려워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게으름은 멈춰있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하는 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