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전하는 동기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주님에 대한 사랑(시18:1) 2005.7.4 새벽예배 1
2.영혼에 대한 사랑(욘4:10-11) 2005.7.5 새벽예배 7
3.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연민(요10:16) 2005.7.6 새벽예배 13
4.사명에 대한 애착(행20:24) 2005.7.7 새벽예배 20
1.주님에 대한 사랑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녹취자 : 김세나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시의 표제에 보면 이 표제는 상당히 신뢰할만한 내용입니다. 다윗이 이 시를 지은 때가 이제 기름부음을 받고 오랫동안 가난하고 고통받고 빚에 시달리고 억눌린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나라를 세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이제 그 다윗으로 하여금 억눌리고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의 목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합해서 그래서 그 사람들을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아주 중요한 말하자면 주춧돌로 삼은 것이죠. 이렇게 하여서 다시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 속에서 이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이제 이 사울과 일행들에게 끊임없이 고통 받으면서 그러면서 이제 많은 시간들을 도망다니고 환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많은 환란과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는 모든 시련과 환란의 고통 가운데서 이제 이 다윗이 결국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승리하게 됩니다. 모두 승리하고 이제 이 사울과 그 원수의 모든 손에서 하나님이 이 다윗을 완전히 건져 주십니다. 바로 그렇게 모든 것을 완전히 승리하게 된 그 날에 하나님께서 지어서 바친 시가 바로 오늘 여기에 나와 있는 이 노래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라고 말이죠. 하나님께서 자신의 힘이 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한 나라를 자신에게 주셔서 목동에 하잘 것 없는 목동에 지나지 않는 자신을 한 나라의 제왕으로 삼으셨을 때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감사의 고백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은 그러한 모든 고백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개인적인 사랑의 고백을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 먼저 드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그 고백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개인적인 사랑의 고백으로 그 위대한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결국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 눈에 보이는 크고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이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마지막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생각나게 하기 위한 한 수단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것이 동기가 되고 이것이 또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고 베푸시는 위대하고 많은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사랑하게 하는 동기가 되고 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많은 신앙의 경험들이 또한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그러한 계기요,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섬김, 그리고 우리의 모든 하나님을 위한 봉사의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많이 섬기고 주님을 위해 수고한다고 해도 사실 너무나 자주 우리의 섬김의 많은 동기들이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되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면서 항상 마음속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섬김의 동기가 되고 또 섬기는 이 일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또 점검하면서 하나님을 섬겨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시대는 많이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이제 이 다윗과 같이 유사한 인물을 신약에 세우십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렸다면 베드로는 이제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첫 번째 목자가 되지 않습니까. 그때에 주님은 그에게 커다란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십니다. 다윗 왕국의 처음 시작이 상처받고 억눌리고 빚지고 원한 맺힌 사람들이 모였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 하신 후에 도래하게 되는 이 교회를 통한 영적인 왕국도 역시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지실 것을 예수님이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나라요. 애통하는 자의 나라요, 또 온유한 자의 나라요.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핍박받는 그런 사람들의 나라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불러 모으셔서 제일 먼저 베드로에게 맡겨 주셨죠. 그때 베드로에게 그 위대한 사명을 맡기면서 제일 먼저 그에게 물으신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네가 정말 이렇게 큰 능력이 있느냐. 아니면 이 많은 사람들을 네가 리드할 수 있느냐. 내가 너의 능력을 한번 시험해 보겠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물으신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이 바로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유일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통해서 영혼을 위해 섬긴 우리들을 향해서 가장 필수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영혼을 향한 사랑이 있기 전에 먼저 그 모든 섬김의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베드로에게 귀한 사명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맡기시면서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사랑하시는지를 세 번이나 확인하셨습니다. 그래서 이후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한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예루살렘, 그 큰 교회를 목회하고 그리고 이후에 이루어지는 성령강림사건과 이후에 선교의 위대한 역사를 지휘해 나갈 수 있는 지도력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의 사역을 감당해나가면서 우리들에게는 지도력이 필요한데, 이 지도력의 가장 중요한 기반은 그 사역자가 개인적으로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다른 데서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가 사랑하는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고 도움을 얻는 것, 그리고 자기가 섬기는 그 하나님에게서 즐거움을 느끼고 그 하나님에게서 행복을 얻고 만족을 얻는 것, 이것이야말로 헌신적인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주의 사람들의 특징이고 섬김의 모든 특징이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격은 자기의 의견이 다른 많은 사람들을 승복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견해는 다르고 방법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는 명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견이 다른 많은 사람이 있을 때에 그것들을 모두 통합해내는 놀라운 힘은 전략적인 협상가나 수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인격, 그리고 교회를 자신의 몸같이 생각하는 아주 고귀한 사랑, 이런 것들에 의해서 지도력이 확립되고, 의견이 다른 많은 사람들을 승복시킬 수 있는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에게 많은 섬김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 섬김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들을 방해하고 혹은 이 섬김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친교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부패하게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라고 우리는 못 박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그 길은 곧 주님을 사랑하는 길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길은 주님을 섬기는 길입니다. 그래서 섬길수록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섬기지 않으면 안 되는 내적인 강력한 욕구를 갖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섬길수록 우리들이 내면이 더욱 새로워져서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할수록 외출적인 우리들의 삶들이 하나님께로 흘러 나아가는 섬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신자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랑 안에는 항상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공경, 그분께 돌리는 경배의 정신들이 바깥에 자신의 삶을 통해서 동일하게 흘러나가기를 원하는 경향성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닮은 경향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성으로 충만한 분이셨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충만한 신성을 창조를 통해서 밖으로 드러나 자기안에 있는 내적질과 그리고 그 외연인 창조의 세계를 통해서 당신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듯이 동일한 경향성이 거듭난 인간들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의 정신들이 가득해지는 영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 반드시 그는 삶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 열매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그러한 진실한 생활들이 거기에 뒤따르게 되는 것이죠.
이 두 가지가 나뉘어진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성경은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소정의 외출적 열매와 삶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이루리라. 열매를 많이 맺으면, 과실을 많이 맺으면 너희가 내 제자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처럼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영혼의 상태가 될 때 우리는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을 살게 되고 그 열매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열매를 통해서 주님과 더 깊은 친교를 나누는 제자가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영혼의 변화가 오면 올수록 삶이 온전해지고 삶이 온전해지면 온전해질수록 영혼의 더 깊은 변화가 와서 소용 돌이 치듯이 그렇게 싶은 주님과의 깊은 교제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우리가 바쁜 와중에 주님을 섬기는 모든 이 섬김에 있어서 이 섬김이 잘못되지 않도록 우리는 많이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섬김이 형식적인 섬김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께 바쳐지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만 바쳐지고 그리고 열매도 별로 없고 마지막에는 마음속에 깊은 상실감과 공허함만 남는 그러한 종류의 섬김은 썩은 나무를 바치는 것과 똑같이 결함이 있는 섬김이라고 말씀 드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인을 보십시오. 이제 오랜 세월 동안 사울의 박해와 핍박 속에서 가슴 아픈 날들을 보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울을 사랑했는데도 불구하고 사울에 의해서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 고난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환란의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 누가 이겼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누구를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당신의 승리와 친교를 보여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사울은 패하시고 다윗을 세우시지 않으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랬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이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생각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이미 왕이 되고 위대하고 큰 일을 이루고 하나님께서 다양한 약속들을 주시기 전에 이미 그 마음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무엇을 행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땅의 왕으로 세우실 그 계획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길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이러한 고백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무엇을 하나님이 명하시든지 행할 만발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자기의 뜻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하게 만들고 자기의 눈에 선하게 여기는 바를 포기하게 만들고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선하신 그것을 향해 무릎을 꿇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그것이 이 시인에게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어서 나타났으니, 바로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을 온 힘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가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합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높은 지위나 많은 섬김,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물질이나 재능, 이런 것들로 하나님의 합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비록 다섯 달란트 맡았던 사람이 아니라 비록 한 달란트 밖에 맡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달란트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되 그 모든 섬김의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그 인격적인 사랑이 될 때, 인격적인 사랑이 그의 모든 섬김과 헌신, 봉사의 이유가 될 때,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받게 되는 많은 시련과 괴로움, 고통, 역경, 장애물, 많은 고난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극복해 나가는 동기가 단순히 그것들을 이루기 위한 목표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고 이것들을 하나님 앞에 이루어야 된다라고 하는 소명감이 기반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오히려 이 사람을 성숙시키시고, 이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모든 일들이 우리의 뜻대로 잘 풀리고 걱정하는 것이 없을 것 같다고 한다면, 우리의 부패한 본성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온전히 섬기고 사랑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일생은 고속도로를 달리고 그리고 파도 하나 없는 그러한 평안한 바다를 쏜 살 같이 지나가는 그러한 인생을 하나님께서 항상 허락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히려 고난의 파도를 넘어가게 하시고 폭풍이 치는 들판을 홀로 지나게 하십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이 세상을 향한 사랑을 끊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만이 그 자신을 사랑하시는 유일하신 분이시며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 외에 또 다른 희망이 없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육신을 향한 사랑을 못 박게 만들고, 육신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듭니다. 그래서 둘은 서로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싸우는 것이니, 주님을 사랑한다고 진실하게 고백하는 이것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이기적인 동기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 섬김을 통해서 영광 받으실 그 주님이 더욱 더 귀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야 할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한 나라를 물려 받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속에 터져 나온 고백이 이것이었습니다. 승리할 때나 번영할 때나 패배할 때나 고난을 받을 때나, 원수들에게 애워 쌓이게 될 때나 가정의 곤고한 일이 있어서 마음의 근심이 떠나지 않을 때나 항상 이 고백이 입술 속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고백속에서 그는 이러한 고난과 시련을 이기면서 주님의 신실한 사람으로 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원칙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겼던 사람,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모든 사람들의 권위는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가르쳐주신 교훈 중의 가장 큰 교훈 중에서 이르시기를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가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둘째가는 계명인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준수될 수 있고, 이 두 계명은 결코 나누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외로, 국내로 아웃리치를 가고 많은 영혼들을 섬깁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혼을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는다면 이 섬김이 무슨 유익이 있겠으며, 그 영혼들을 위해서 어떻게 쓰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영혼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동기가 된다고 할지라도 이 영혼을 향한 그 사랑이 그 영혼을 창조하시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대속제물로 주셔서 화목제물로 드린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는다면 영혼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우리에게 유익을 주겠는지 우리 한번 자신에게 되물어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이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바쁜 모든 섬김의 동기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 되게 하시고, 이 섬김이 시작될 때에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 시작되었듯이 진행되는 가운데도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이 주님께 붙어 있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연합되어야 하도록 기도하여야 하고, 그리고 이 일이 마지막 이루어질 때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그 모든 인격이 주님을 사랑하는 동기가 되어 열매를 맺어서 일만 잘하고 인격이 쓰레기같이 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일이 아름답게 이루어지고 그 속에서 주님을 향한 인격과 아름다운 인품이 우리 안에서 열매 맺도록 그래서 많이 섬기면 섬길수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더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도록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환란과 고난을 통과하고 어려움을 이길 때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자신의 힘이 되었노라고 고백했던 다윗의 고백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더 많이 섬기면 섬길수록 우리가 우리의 인생의 말년에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게 되고 그 인격의 고상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영혼에 대한 사랑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욘 4:10-11)
녹취자 : 김세나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섬기는 모든 동기, 사람들을 섬기는 모든 동기가 사랑이어야 하고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힘을 주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시간에는 두 번째로 우리들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동기는 또한 영혼들을 향한 깊은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듯이 요나는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아서 이제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외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고, 앗수르는 여러분들이 역사속에서 알고 있는 앗시리아였습니다. 북방에 있는 민족으로써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압박하였고, 결국은 이 앗수르에 의해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하게 됩니다. 그러니 철천지 원수였죠. 이런 나라의 정중앙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이 이 땅을 곧 멸하실 것이라는 선고를 하게 하셨으니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이 선지자는 이렇게 멸망할 나라에게 멸망을 경고하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진짜 이 나라를 멸망시키시려는 것이 아니고 뭔가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타지 않고 다시스로 가버렸습니다. 알다시피 그 배가 풍랑을 만나고 물고기에 삼키고 거기에 다시 토해내치고 하는 많은 사명과 불순종, 불순종과 회개, 이 과정을 거쳐서 결국 그는 다시 니느웨로 오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반드시 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니느웨에 와서 이제 반 강제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렇게 외쳤을 때, 그 사람들이 적국에서 온 사람이 그렇게 외치니까 잡아 죽였어야 마땅한데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구약학자들은 이제 이 신화와 같은 사실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었다고 믿는데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무슨 징조가 따라 왔을 거라는 거죠. 그래서 천문학자들의 도움을 받은 결과 이 사람 요나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였을 때, 그 쪽 지방에서 일식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백주대낮에 태양이 삼키워지면서 먹혀들어가듯이 사라지고 하늘이 캄캄해지게 되는 것을 본 이 사람들이 이 요나의 선포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것은 천문학적으로 일식이 규칙적으로 일어나니까 계산을 하면 이 연대가 딱 나온다는 것이죠. 어쨌든 그렇게 해서 백성들이 깊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요나가 그런 상황을 몹시 싫어하게 되면서 하나님 앞ㅊ에 삐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요나의 마음 속에는 이 니느웨를 향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닭달을 하시니까 어쩔 수 없이 갔지만 그곳에 있는 영혼을 향한 깊은 사랑이 없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께서 그 성을 용서하시는 것을 보면서 화를 내면서 그 바깥에 가서 초막을 하나 짓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성이 어떻게 되는지 보고자 하였습니다. 뜨거운 태양 빛이 내려 쬘 때에 하나님은 요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박넝쿨 하나를 자라게 하셔서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 박넝쿨이 뜨겁게 내려 쬐는 태양 빛을 막아서 그늘이 되었습니다. 이 요나는 그것을 매우 즐거워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박넝쿨을 벌레를 먹게 하셔서 모두 제거해 버리게 하시자, 다시 뜨거운 태양 빛이 요나의 머리에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늘을 잃어버린 요나는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읽은 말씀을 하시는 거죠. 네가 심지도 않고 네가 배양하지도 않은 하룻밤에 나서 하룻밤에 사라진 이 박넝쿨 하나를 인해서도 네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고 이렇게 네가 박넝쿨을 아꼈는데 이 성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12만명이요. 육축과 우양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요나에게 없는 마음이 하나님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니느웨 성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애뜻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볼 때에는 이방신이나 섬기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제 멋대로 살아가는 악한 백성들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러하였고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들이 한 없이 사랑스러운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아마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방의 백성들을 이 니느웨 백성처럼 사랑하지 않으실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의 백성들을 이 니느웨처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를 보면 그 구약의 역사는 철저하게 이스라엘 민족 중심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러나 선지자들이 이방의 나라에 대해서도 예언을 하고 이방 나라에 가서 활동을 하고 이처럼 이방 나라에 직접 가서 선교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긍휼에 넘치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최고의 그 나타남이 바로 선교고 전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에 있는 백성들이 쓸모없는 백성,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아가다가 하나님의 큰 심판들을 당하게 될 그러한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실제로 사랑하고 아끼는 피조물들이라는 사실을 이미 구약성경이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신약시대에 와서 봇물 터지듯이 이 세상에 밀려들어오고 사람들에게 이 사랑이 나타났으니 그것이 바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부어진 성령의 역사가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성령의 역사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가 메시야 이심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셨죠. 가슴속에 예수는 메시야 이시고 그 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라고 하는 강력한 복음의 메시지에 사무친 사람들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아직까지도 편견과 무지 속에 있어서 복음이 유대인들의 울타리를 넘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강력하게 개입하셔서 경건한 사람 고넬료와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이셔서 그들로 하여금 서로 만나게 하셔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과 동일하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효시가 되어서 이제 수많은 이방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게 되었으니 이것은 곧 이방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우리 주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죠. 교회의 사명, 신자의 사명은 세상 끝날 까지 영혼을 이렇게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세상 끝 날까지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이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신자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많은 자원과 그 큰 복은 이 일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주님이 주신 것이죠. 바로 이것이 이방에 있는 수많은 백성들을 향한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이 사랑에 눈뜨지 못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안타깝게 여기셔서 이제 이러한 선교를 향한 사명들을 근대에 와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셨습니다. 원래 역사를 보면 이렇게 그 나라가 전체가 기독교 국가가 나고 나면 반드시 부패하고 망합니다. 오히려 나라 안에 기독교를 핍박하고 대적하는 세력이 어느 정도 살아 있어서 교회를 견제할 때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순전한 교회로 남게 되죠. 개인의 삶에 있어서나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나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삶에 너무나 큰 복이 넘치고 고난이 없으면 부패하기 쉽듯이 교회도 그렇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근대에 들어오기 전까지 유럽의 나라들은 모두가 기독교가 된 세상에서 살 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누가 진짜 믿는 사람이냐. 이런 것에 오히려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케리는 영국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셨습니다. 구두를 수선하고 남은 천 조각으로 지구본을 만들고 그것을 가슴에 늘 품고 자면서 이방 선교의 꿈을 꾸었습니다. 이방 선교를 외치자 많은 사람들은 필요하시면 하나님께서 직접 선교하실 껄 하고 비아냥 거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사람에 의해서 이방 선교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고 그래서 오늘날처럼 많은 나라들에게 선교하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시대가 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매우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심판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좌우도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한 가운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리는 이 일보다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어디에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상이나 섬기고 하룻밤에 하나님을 심판을 받아서 모두 쓰러버려야 할 망할 족속들처럼 보였지만 주님의 눈에는 그 백성들이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은 그들에게 누군가가 애틋한 당신의 사랑을 전해주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했다는 것을 주님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해야 할 일은 주님의 마음을 이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로만으로는 이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자의 마음속에는 주님의 마음이 있어야 하고 주님의 마음을 품은 전도자들만이 영혼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이러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 하나님의 그 크고 넓은 사랑을 전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전해줄 주님의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예외없이 전도하는 사람들이었고 선교하는 사람들이었으며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쓰임 받는 전도하는 자, 선교하는 사람들은 모두 주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막대기와 같은 이 요나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크신 역사를 이루고 멸망 받을 니느웨 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축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그 분의 의로운 성품을 외치는대도 요나의 마음 속에는 선교에 대한 부담만 있었을 것이고 사명에 대한 부담만 있었을 뿐이지 그 사명을 받아 회개하게 될 사람들에 대한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영혼을 향한 사랑이 없는 사람을 들어서도 이 큰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찬송받으셔야 하지만 요나는 이 일을 위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약에 요나가 이런 식으로 주님을 전하는 도구가 되지 아니하고 주님과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눈물로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시며 너희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를 받고 멸망으로 치닫는 자들이 되지말고 그 분의 눈물 섞인 음성을 듣고 아버지께 돌아와 하나님께 복 받은 백성이 되라고 눈물로 외쳤더라면 주님이 그 성을 구원하셨을 때 요나는 환희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요나 자신도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 선교하는 자, 전도하는 자의 가슴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것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지만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 그 영혼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가슴에 담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정말 주님의 손에 붙잡힌 전도자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만이 복음을 전파하는 이 일에 있어서 행복을 느낄 수 있고 선교하는 이 일에 있어서 주님의 보람에 참여함으로 행복해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복음의 먼 길을 떠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 발, 발걸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의 마음을 이 세상 끝날에 모든 민족들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직접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이지 아니하시고 먼저 예수의 사랑을 알았던 사람,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달은 사람,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아름다운 마음을 보이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부름을 받았고 주님은 우리가 이 일을 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다시 말씀 드리거니와 우리들이 한 주간 동안 전하는 그 일이 얼마나 큰 일이 되겠습니까. 아마 우리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수많은 사람, 당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하는 수많은 백성들 가운데 일부에게 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국내 아웃리치를 통해서 만나게 될 영혼들이 3600명이나 된다고 하지만,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수만명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 숫자가 가당키나 한 숫자입니까. 우리들이 여러 나라에 가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주님이 전하고 싶어하시는 이방의 무수한 그 백성의 숫자에 비하면 우리들이 만나는 사람들의 수는 지극히 적은 수 일 것이고, 언어도 통하지 아니하고 문화도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우리 갖고 있는 이 복음의 언어를 전달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어디이든지 간에 당신의 마음을 보이시는 곳에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흘러가는 물 위에 떡을 던지는 것 같고, 너른 바다 위에 조약돌을 던지는 것 같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을 뜨겁게 사랑하시는 주님이 있고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열렬한 마음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좇아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우리의 작은 섬김을 사용하셔서 크게 쓰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굳게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멸망 받을 백성들, 복음에서 소외되어서 점점 죽어가고 있는 오지의 수많은 이 땅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로 여기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보여 구원얻을 길을 열고 싶어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대들의 발은 복된 발걸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발걸음 하나하나를 인도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뛰고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실 그 일, 우리 개인이 몇 백년이 지나도 이룰수 없는 일들을 우리 온 교회가 온 힘을 다하여 이 일을 감당할 때에 도처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들, 주님이 사랑하시지만 주님의 마음을 전해주는 자가 없어서 아직까지도 좌우를 분별하지 못한 채 어둠 가운데 있는 그 백성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전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들을 수가 없었고, 들을 수가 없어서 구원 받을 수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우리를 전하는 자로 삼으시고 우리의 우둔한 입술을 열어서 그들의 마음에 주의 음성을 들리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전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천구에서 여러분들의 상이 클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너는 가서 이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유언으로써 주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명령입니다. 여러분들은 수많은 어려움들을 물리치고 색깔이 다른 그 이방인 영혼 앞에 서게 될 때, 주님을 대신해서 그들 앞에 서는 것이며 죽어가는 시골 오지에 우리들이 이 복음을 들고 연약한 그 땅의 백성들의 손목을 잡고 예수의 이 참사랑을 전할 때,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시는 그 곳에 대신 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세상 모두 사랑이 없어 냉랭하고 암탉이 그 병아리들을 날개아래 품은과 같이 당신의 품에 모으기를 너무나도 원하셨지만 누군가가 이 주님의 마음을 전하는 자가 없어서 그들을 당신의 품에 모으실 수 없으셨을 때에, 주님의 사랑을 먼저 안 여러분들이 비록 미약하지만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어쩌면 태어나서 지금처럼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사랑스러워 보인 적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의 깊은 확신을 가지고 이 일에 동참하십시오.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내가 만나는 영혼들에게 그 영혼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내게도 주셔서 주님의 화신이 되어서 그 사랑으로 영혼들에게 그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손목을 붙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주님의 마음을 그대들의 마음속에 부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꿈꾸는 것 같은 위대한 일들이 일어나고 니느웨 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같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도 천사도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3.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연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6)
녹취자 : 김세나
예수님께서 목자와 양의 아름다운 비유를 10장에서 이렇게 하시게 된 동기는 소경을 고쳐주신 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를 보면서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는데 누구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까요. 아니면 이 사람 자신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질병이 하나님의 저주다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렇게 장애 혹은 불구, 특별히 고치기 힘든 질병을 얻게 되었을 때에는 더더욱 그것이 하나님의 저주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 원인은 죄 때문이라고 하는 도식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제껏 제자들이 알고 있고 예측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죄 때문도 아니고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라 이 사람이 이렇게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일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침으로 발라 진흙으로 이겨 그 사람의 눈에 발라주면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하셨고, 이 사람이 주님의 말씀대로 실로암에 가서 씻었더니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더군다나 이 사람은 아주 확실하게 자기를 고쳐주신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이 와서 이제 이 사람에게 와서 네가 이렇게 눈을 뜨게 되었는데 너는 그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물었습니다. 부모에게 먼저 물어봣더니 부모가 그 사람들에게 잘못 대답을 하면 해를 받을까봐 우리 아이가 다 컸으니까 직접 물어보시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직접 가서 물어 보앗더니 직접 하는 이이가 예전에 벌써 당신들에게 그 분이 누구신지를 다 이야기 했는데 지금 나한테 또 물어보는 것을 보니까 당신도 나처럼 그 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펄펄 뛰면서 그런게 아니다. 우리는 모세의 제자일 뿐이지 우리는 그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그리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내가 그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 분이 내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있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 했습니다.
이 소식이 예수님의 귀에 들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 아름다운 요한복음 10장의 목자와 양의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이에요. 그래서 이 비유는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목자와 양의 비유는 바로 이렇게 그가 어떠한 처지에서 태어났던지 간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 분께 가까이 있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양 떼로 묘사 하시면서 그 양들의 축복과 그리고 어떻게 그 양과 양 떼가 하나가 되시는가를 설명해가신 거예요. 그러다가 이 양의 축복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목양의 원리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 마치 삽입구처럼 예수님의 탄식 섞인 음성이 들려오게 됩니다. 내게는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어 그들도 인도하여 내 음성을 듣고 한 목자에게 있어야 할 터인데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의 양떼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지금 데리고 함께 목양을 하며 살아가는 그 양떼만 주님의 양떼가 아니라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또 다른 주님의 양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신자와 불신자 밖에는 없다고 생각이 되지만, 사실 예수님의 눈에는 신자와 불신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불신자에 속해 있지만 그 속에 예수님께서 믿게 하셔서 당신의 자녀를 삼고자 하시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믿지 않는 무리들을 바라보시는 시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 가까이 있으면서 당신의 목양을 받고 당신의 사랑 안에서 사는 이 양 떼들만 당신의 양 떼가 아니라 지금의 비록 당신의 양 떼가 아니라 멀리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모든 양떼들도 주님이 보실 때는 모든 양떼라는 이야기죠.
그런데 사실 실제로 그들의 삶이 어떨지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품을 멀리 떠나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들도 나의 양이다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이 살아가고 있을 삶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주님을 몰랐을 때 살아가던 삶의 모습하고 무엇이 다를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에 우리 주님을 두기를 싫어하고 우상을 섬기거나 혹은 자기의 욕망의 지배를 받으면서 극한 죄악의 달음질치면서 살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의 눈으로 보더라도 그들은 극악한 불신자들이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우리 주님의 눈에는 그들이 당신이 보시기에는 잃어버린 양이다라고 판단이 되시는 거죠. 이게 바로 예수님이 잃어버린 영혼을 바라보는 시야와 우리들이 바라보는 시야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도로 삼으셔서 파송하기 전에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는지, 예수님의 내적인 동기가 마태복음 9장에서 나옵니다. 35절과 36절에서 예수님께서 느끼신 어떠한 마음이 있으셨기 때문에 10장 1절을 제자이던 12명을 사도로 파송하게 됩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저희들이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것을 보시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맛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시는 동기였습니다. 예수님이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하시면서 목자잃은 양같이 고생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보신 그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죄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느 각도에서 그들의 삶을 보았느냐가 문제이죠. 예수님께서는 불신자들 속에 섞여서 죄를 지으며 하나님을 멀리 떠난 채 마음에 우리 주님 두기를 싫어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실 때 그들이 스스로 죄를 선택하고 악을 행할 때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그 도식으로 보신 것이 아니라 저희들에게 누군가가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다가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고 어두운 그 눈을 뜨게 하고 마음의 어두움을 물러나게 하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친절하게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저희들에게 가르쳐주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저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것들을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면서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신 거예요.
(예화)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선도하고 또 연구하는 사람들이 우리 기성세대를 향해서 던지는 아주 중요한 화두가 바로 그거예요. 우리들이 청소년들을 이렇게 볼 때에 우리 마음에 안 차잖아요. 청소년들만 마음에 안 차겠어요? 여러분들도 제 마음에 안 찰 때가 많은 데. 그렇잖아요. 왜 그렇게 어른을 봐도 인사를 안 하고 저럴까. 좀 똑바르게 안녕하세요 인사라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저 애는 왜 저렇게 교회 올 때,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저렇게 올까. 머리는 도대체 뭐 했다고 저렇게 노랑물을 들이고 돌아다닐까. 왜 태도가 저럴까. 어쨌든 눈에 안 차는게 참 많잖아요. 그것을 모두 그 아이들의 책임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우리들이 바라보면서 마지막에는 미운 마음 밖에는 드는 게 없어요. 그러면, 마음에 미움을 품고 있으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시선이 아이들에게 전달될 수가 없죠. 그래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면 아주 아이들이 불량하고 잘못된 태도를 가진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누군가 저 아이들을 껴안고 따뜻하게 가르쳐주고 가정의 참 기쁨과 가치를 일러 주고 그리고 세상이 모두 사악하고 그리고 자기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만 가득한 세상이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자기들을 사랑하고 인정하며 돌보아 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아직 이 세상에 많다는 사실을 저들에게 가르쳐 주기만 하면 그런 태도를 버릴 것 아니에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아이들을 쳐다보면 눈빛이 따뜻해지게 되어 있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들을 그러한 눈빛으로 쳐다보기를 원하죠? 전혀 상관이 없는 모양이네요. 뭘 잘못해도 눈을 똑바로 뜨고 그 따위로 밖에 못하나. 아니면 여태까지 저것도 교인이라고 내가 데리고 가르쳤냐. 아 슬프도다. 이런 태도를 갖기를 원하지 않잖아요. 어렸을 때에 한참 자랄 때 따뜻한 사랑과 칭찬을 받으며 자라야지만 인격과 성격이 굽지 않고 잘 펴져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자신감이 있고 많은 사람을 포용하고 자기와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가정에서의 교육이 엄청나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 굳은 성품들이 잘 펴져서 올바르게 되지 않으면 그러면 여러분들의 자녀를 바르게 교육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펴지고 고쳐지는 경험을 할 때 여러분들의 굽은 어린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가 여러분들이 낳은 자녀들의 마음과 삶의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있게 되는 거예요. 더욱이 아직 결혼하지 않은 형제, 자매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깊이 만나고 부모로부터 받은 잘못된 영향아래의 굽어진 성품들이 이미 어쩔 수 없이 굽어진 성품들이잖아요. 이것들이 말씀 안에서 잘 펴서 온전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결혼할 수 없어요. 그리고 해도 불행해져요. 나는 이것을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해요. 그냥 나이차면 시집, 장가 갈 생각만 하고 맨 날 기도해 달라고만 그러지 연애도 못하면서 말이지. 그러지, 그게 그렇게 그렇게 자신이 고쳐지지 않아서는 그것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목숨을 걸고 해야 할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고침을 받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로부터 그 아름다운 삶이 흘러나와서 그 사람이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그리고 사랑을 받을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굳은 성품으로 살아가고 망가진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실 때, 그들이 선택하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이긴 하지만 누군가가 그들을 목자의 마음으로 따뜻하게 돌보아 주었더라면 저들도 저러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 영혼들도 피해자라는 마음을 주님이 갖고 계셨던 것이에요. 왜 그런 마음을 갖게 될까요. 사랑이 있으니까 그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에요. 사랑이 있으니까. 우리들이 어떤 사람들을 볼 때, 애정이 없으면 저것은 왜 똑같은 밥 먹고 저 따위로 살까. 쟤는 꼭 말을 해도 저런 식으로 할까. 누구하고 같은 나이에 믿었으면서도 어떻게 쟤는 저렇게 행동할까, 이런 마음 밖에는 안 들지만, 우리가 사랑의 마음이 가득 들어서 그 영혼을 깊이 긍휼히 여기게 되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삶의 모든 과정들이 자신에게 아픔으로 다가 오는 거예요. 그래서 한 사람을 사랑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현재적인 어떤 모습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까지도 모두 사랑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걸어올 수 밖에 없었던 삶의 모든 과정까지 다 사랑하고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삶의 모든 과정까지 동시에 모두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진짜 한 사람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에요. 그래서 사랑은 이러한 동시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 증거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난 다음에 우리들이 그 사랑의 관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면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지만 그러나 그 사랑이 지금 이루어진 그 사랑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이 지금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죠. 그리고 이 사랑이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믿어지잖아요. 그래서 찬송이 우리에게 고백하잖아요.
(찬송) 주 예수 내가 알기전 날 먼저 사랑 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구원 했네
그러한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바로 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지금 비록 죄를 짓고 우상을 숭배하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완악한 상황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양 떼들을 본 거죠. 그들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 순간 당신이 사랑해도 그들이 자신들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때조차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자신의 양이라 부르고 계시는 거예요. 부르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러한 무리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간절한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을 인도해 내야겠다 라고 하는 거죠. 어디로부터. 당신을 모르는 그 무지의 어두움으로부터 인도해내시고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원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인도해내시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 아닌 것들을 좇아서 살려고 하는 그 사람들로 가득한 그 죄의 고향으로부터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단 말이죠.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도대체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을 그 분의 마음을 가지고 그 분이 하고 싶었던 일에 종사하는 것, 그것이 주님을 섬기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것, 그래서 나면서부터 소경을 고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으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할지니라. 밤이 오면 우리가 일 할 수 없으리라 말씀하시죠. 나를 보내신 자의 일, 예수님이 보냄을 받은 그 사명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죠. 나를 보냄으로 이루어질 일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것이죠. 그게 하나님을 섬기는 거예요. 그게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진실한 사랑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맨 처음 그 사랑 앞에서 자기가 너무나 더러운 죄인이고, 자기가 그 예수님의 사랑이 분에 넘치는 사랑임을 깊이 자각하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또 다른 이유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이렇게 사랑하시는 대도 자기처럼 이 사랑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는 수많은 영혼들에 대한 슬픔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새가족반에서 너무나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만, 이러한 목자와 양의 이치를 다 배우고 그 은혜를 많이 받은 신자들이 은혜를 깊이 경험하게 될 때,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어둠 속에서 사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이 난다는 거예요. 생각이 난다는 거예요. 이게 주님의 마음이에요.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주님처럼 잃어버린 영혼을 인해서 아파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이 마음이 없는 사람은 주님의 자녀이긴 자녀인데 불효 자식이에요. 아버지의 마음이 가슴에 없는 자식이 그게 효자일수가 있겠습니까. 어머니의 마음이 전혀 담겨지지 않은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공경하면 얼마나 할 수 있겠어요. 부모 공경의 가장 큰 대의는 먼저 그 분의 마음을 자녀인 우리가 자녀의 마음 속에 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부모가 자녀인 나의 위치에 있었더라면 하시고 싶으셨을 일, 또 하실 수 있는 그 일을 우리들이 해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들이 우리를 통해서 대신 만족을 느끼게 해 드리는 것, 그것이 효도에요. 그것이 효도에요.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없다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일지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마음은 지금도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가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한 순간도 당신의 양이 아니라고 생각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탑니다. 저들도 인도하여 내게 있게 하여야 할 터인데, 이미 그 일을 다 하셨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직 못하셨다는 것입니까. 못하셨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를 부르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 안에 내려주시는 그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시고 싶으신 할을 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재편하고 우리의 마음을 새로운 경향성을 심어주는 거죠.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착한 마음이 돼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주님이 내 자리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을 하고 싶은 거예요. 은혜를 받으면 누구든지 이렇게 착하고 갸륵한 사람들이 되요. 그러나 이 은혜를 받지 못하거나 이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그는 누구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되지 못하고 따라서 이런 착한 사람들로 살아갈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잃어버린 영혼을 보면서 그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착한 신자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들을 자신의 양떼라고 생각하면서 아파하고 계시는 거예요. 원래는 당신의 우리 안에 있었는데 나간 양처럼 생각을 하시는 거죠. 그들이 예전에 진짜로 예수님을 믿다가 떠난 사람들인 경우는 두말 할 필요도 없고 한번도 예수님의 품안에 들어와 본적이 없는 사람들도 당신이 구원하시기로 택하신 양들을 예수님이 마치 당신 품에 있다가 떠나간 양처럼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게 주님의 마음이에요. 그게 주님의 마음이에요.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인도하셔서 궁극적으로 어떻게 하고 싶으신 거예요.? 그게 우리가 읽은 성경 맨 뒤편에 나오는데 당신 곁에 두셔서 목자이신 당신의 돌봄 아래 있게 하시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예수님 앞에 뭘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녀를 정말 사랑하는 부모의 기쁨이 어디 있을지 생각해 보세요. 우리들이 연로한 부모님들이 명절에 우리 형제들이 모두 모이면 그렇게 기뻐하시죠. 잡수지 않아도 배부르시고 마시지 않으셔도 취하시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자녀들이 가지고 오는 선물 몇 개 때문에 그렇게 기쁨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슬하의 자녀들이 함께 모여서 당신의 눈 앞에 당신의 돌봄 그 안에 살아가는 그 현장 자체가 그렇게 사랑스러운 거예요. 그게 바로 부모의 마음이에요. 그런데 자식들은 밥도 차리기 전에 빨리 가야 된다 그러죠. 그게 우리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주님을 감짝 놀라게 할만한 어마어마한 일을 하는 것, 또 주님이 예상치도 못했던 큰 일을 해서 주님을 매우 비상하리 만큼 기쁘게 해 드리는 것, 그런 것 아니에요. 사고나 치지 않았으면 좋죠. 오히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뭐냐 하면 당신 안에 살아가는 거예요. 당신 안에 살아가는 거예요. 그 분 가까이에 있으면서 그 분 돌봄을 받으며 그 분의 돌봄을 행복해 하고 그 분의 돌봄 안에 사는 것을 말할 수 없이 기쁘게 여기며 그렇게 그 분께 순종하고 그 분께 동행하며 그 분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 그 것으로서 예수님은 충분하셔요. 이 세상에서 큰 일을 한 사람들을 통해서 많은 영광을 받으시고 작은 일을 한 사람을 통해서는 거의 영광을 받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그 분의 품안에서 그 분의 목자 되심 안에서 그 분의 양 떼인 것을 즐거워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그 신령한 만족 안에서 그 분은 영광을 받으세요. 당신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거죠.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그것을 먼저 배워야 해요. 주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나서 더 이상 기도하고 싶은 제목이 사라지는 것 같은 예수 안에 있는 만족을 배워야 해요. 제가 설교자로 서기 전에 영혼의 깊은 변화를 받은 다음에 어느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그런 기도가 저절로 나왔어요. 주님, 저를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이 제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이러한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내가 주님께 이러한 사랑을 받습니다. 나는 더 이상 필요한게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러한 삶이에요. 그 사랑 때문에 깊이 감사해서 내가 너한테 뭘 해주랴. 소원이 있니, 그렇게 물어봤을 때, 전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그런 고백을 우리에게 원하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이 신령한 만족의 삶이에요. 바로 모든 양 떼들이 주님 품안에서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잃어버린 양 떼가 인도되어, 주님의 목양의 그늘 안에 인도되어 주님의 목양의 그늘 아래 살면서 주님을 인해서 스스로 만족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어떠한 일들이 있어야 하죠?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내 음성을 듣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지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누가 그 음성을 전해 줍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당신 자신이 직접 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셨어요. 심지어는 천사들에게도 이 일을 시키지 않으셔요. 그래서 구원에 관해서 이루어질 위대한 하나님의 지혜는 천사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보다도 뛰어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연구하고 주님께 은혜를 받으면 천사들 못지않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위대한 계획에 대해서 많이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 전도라고 하는 것, 선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것이니까, 예수님의 이 음성을 들려주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예수님의 이 음성을 들은 사람이어야 하겠죠. 그래야지 이 음성을 들려줄 수 있죠. 그래서 참된 전도자, 진정으로 선교를 위해 섬긴 사람들은 모두 그 마음속에 예수 사랑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고, 십자가 사랑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가서 영혼을 당신의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고 그들의 생애에 단 한번이라도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직접 전해 주시기 원하시는 이 음성을 들려주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정말 당신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분은 이 음성이 들리자마자 낚아채듯이 하나님이 그 영혼을 당신의 품으로 인도하시는 거예요.
앞으로 우리가 그 일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음성을 듣기만 하면 주님 앞에 돌아올 수많은 택한 양들이 어두움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들에게 주님의 이 음성을 듣게 할 때까지 주님 모르고 사는 그들의 삶은 계속 될 것입니다. 누가 전하지 않으면 아마 그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들을 어둠 가운데 방황하며 예수의 사랑을 등진 채로 살아갈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그 도구가 되어서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같이 쓸모없는 사람이 그 일을 위해서 도구가 되다니 라는 감격이 여러분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택하셨습니다. 이 음성을 전해주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사명에 대한 애착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10:24)
녹취자 : 김세나
우리는 지난 3일 동안 주님을 섬기는 동기가 무엇이어야 되겠는가. 첫째 날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고, 두 번째 날과 세 번째 날은 그 사랑의 동기가 영혼을 위한 사랑이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둘째 날은 영혼에 대한 사랑이고, 셋째 날은 특별히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섬김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마지막 날은 사명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섬김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20장은 이제 사도바울이 성령의 시키심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사실은 거기에서 어떠한 일을 만나게 될지 알지 못하는 것이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이제 사도바울의 마지막 선교여행이었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이제 사도바울이 앞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마지막으로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 모아서 그래서 자기가 이 소아시아에 들어와서 3년 넘도록 사역을 한 그 섬김을 회고하면서 이제 유언과 같은 설교를 하고 있는 가운데 오늘 이 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 아시아에 들어와서 3년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전하고 모든 눈물과 겸손으로 유대인의 간교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찾고, 주를 섬긴 것. 유익한 것은 공중 앞에서나 그리고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양보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것,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파한 것. 그것을 모두 회고하면서 이렇게 전파하고 살았던 것이 너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이 일에 있어서 모본이 되겠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라, 이제 내가 심령의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데 라고 말하죠. 성경에서 보라라고 하는 이 문법적으로 간투사라고 하는데 이 보라라고 하는 것은 뭔가 매우 중대하고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날 때 도입되는 그러한 간투사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먼저 우리가 읽은 24절 본문을 해설하기 전에 사도가 왜 이렇게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심령의 매임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죠.
좀 더 우리들이 들어가게 되면 이 심령의 매임이라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소명 안에 있었던 신적인 강제력입니다. 은혜는 이러한 강제력을 가져다주는 거죠. 사실 은혜 복음 증거하는 이 일을 마치려 함에는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겠다고 사도바울이 그렇게 이야기 했지만, 언제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았거든요. 또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나는 복음에 빚진 자로다. 부득불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지로다 이야기 그랬는데, 그 이야기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 같은 위기를 느꼈다고 하는 것이거든요. 예수님께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라. 너는 그 이 복음을 전하고 나를 증거하기 위해서 택한 일꾼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너 구원 취소하고 지옥으로 던져 버리겠다, 주님이 그렇게 이 사람을 협박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마치 주님께 그런 협박을 받은 것처럼 아,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내가 복음에 빚진 자다. 빚은 갚지 않으면 법에 의해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죠. 그러니까 빚진 자라고 하는 그 표현은 회피하거나 모면할 수 없는 의무를 지닌 상태를 뜻하는 거죠. 궁금한 것은 바로 그러한 회피하거나 모면할 수 없는 의무를 진 상태, 그것이 바로 오늘 여기에서 말하는 심령에 메인 것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의 출처가 뭐냐 하는 것이죠. 출처가 뭐냐. 어디에서 그런 것이 온 거냐. 어디에서 그것이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결국은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체험하면서 오게된 아주 자연스러운 신적인 강제력이었어요.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소명의 정수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론 다메섹에서 그를 만나셨을 때에 너는 이방인과 임금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가장 정확하게 옮긴 사도바울의 소명 체험에 관한 기사에 보면 이렇게 나오죠.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내게 네게 나타난 것과 장차 네게 나타날 일들의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사도바울이 진술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아주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대해서 서술하는데, 뭐라고 말하냐 하느냐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뭐냐 하면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임금들에게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겠다고는 말씀하셨어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을 어떻게 쓰실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너를 죽여버리겠다라고 하든지 어떠한 협박이나 위협이 예수님이 사도바울을 불러 주신 소명 안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느꼈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 같은 큰 두려움, 그리고 또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급박한 강제력, 자기가 아니면 아무도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처럼 그렇게 안타까워하는 신령한 조바심, 이런 것들이 결국은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을 만나고 그에게 당신이 당신 안에서 예비하신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알게 해주시자 저절로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하는 거죠. 그는 한 때, 자기가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는 그 이방인과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과 같이 살았던 사람입니다. 유대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두 가지 편견이 있었는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메시야 일리가 없을 것이라는 신학적인 편견과 그리고 이방인들은 모두 쓰레기같은 인간들이라고 믿고 구원이 없을 것이라 믿은 심리적인 편견, 민족적인 편견이었어요. 이러한 두 가지 편견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던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러한 신적인 강제력이 생기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경험하고 나니까 이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지 알게 되니까 이 구원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자신의 섬김이 아니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다급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복음 전파의 사명, 영혼들이 우리의 복음 증거가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되는 이 다급한 일이 어떻게 사도바울에게만 주어진 사명이겠습니까. 우리 각자 각자가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어도, 지금도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을 경험하는 사람들 속에 똑같은 작용이 일어납니다. 예수의 복음이 전해지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서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동일한 깨달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고 그 쓰레기같은 죄인의 자리에서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예전에 자신처럼 주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명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영혼에 대한 사랑과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죠. 만일 그렇게 나뉘어지는 사명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실한 사명감이 아니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 없는 사명감,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명감,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연민에 대한 사명감, 이것이 무슨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감일 수가 있겠습니까. 이 사명감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영혼들, 특별히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연민과 나누어지지 않는 그러한 사명감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읽은 본문을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게 함에는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아니하노라. 그런데 그 앞에 그리고로 연결되는 또 하나를 갖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의 달려갈 길과 가 나옵니다. 이것은 나의 달려갈 길이 따로 있고, 그리고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는 것이 따로 있고,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달려갈 길,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즉 은혜의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이거죠. 나의 달려갈 길,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는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런 의미입니다. 사도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자기가 달려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명백하게 고대 로마시대에 있던 마라톤이나 혹은 달리기를 염두해 둔 표현입니다. 달리기를 할 때, 그 달리기를 할 때 달리기에서 달리는 사람에 대한 마지막 평가는 얼마나 우아한 자세로 달리기를 했느냐에 의해서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죠. 또 달리는 길에 손짓과 발짓이 얼마나 현란하고 규칙적이었나 이런 것에 의해서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죠. 달리는 사람은 두 가지에 의해서 평가를 받는데 얼마나 똑바로 달렸는가. 다른 사람의 진로를 방해하지 아니하고 얼마나 자기의 길로 똑바로 달렸는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얼마나 빨리 달렸는가 거기에 의해서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격투기 선수들은 서로를 싸워 때려 눕히는 것이 그들을 그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지만, 달리기는 다른 사람과 싸워서 그를 꺾고 누르고 죽이고 떼리고 죽이는 그것으로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상관하지 않고, 방해가 되지 않는한 자기가 달려갈 길을 올곧게 달려가는 속도에 의해서 평가 받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때로는 우리는 사명을 맡게 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의식을 버려야 하는 것이죠.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는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이고, 가장 더러운 자리는 그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를 버리고 자기가 선택해서 선 자리입니다. 그것은 불결한 자리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 사명이 하나님 앞에서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나는 이 시대에 태어났으니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의 평화에 대해서도 기도해야 하고 도와줘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그리고 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와 백성들, 그리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든 섬김, 우리는 관심을 갖고 그들과 협력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이 내게 주신 고유한 사명의 자리, 즉 어디를 중심으로 이 일을 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고유한 자리를 잘 지키는 신앙 없이는 나머지 모든 섬김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마치 컴퍼스와 같습니다. 중심축을 가운데 놓고 그 다음에 좌우로 휘두르면서 원을 그리게 되듯이 동일하게 우리들에게 세워주신 고유한 자리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시시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셔서 그 고유한 사명을 중심으로 우리의 섬김을 펼치게 하십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기억하면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사도를 보십시오. 다른 사람의 사명과 자신의 사명을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유대인 사도들은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선교하는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언제 한번 넓은 땅 덩어리에 넓게 펼쳐 있는 이방인을 위해 선교하는 이것이 팔레스타인 좁은 지역의 유대인들을 선교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외친 적 있습니까. 열두 사도의 사역에 비하면 양적으로나 그리고 범위적으로 본다면 사도바울의 사역은 비교할 수 없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한 번도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사람의 사명과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것은 나의 달려갈 길이라고 그렇게 개인적으로, 절대적으로 묘사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우위를 느끼거나 그래서 내 사명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깔보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혹은 나는 훨씬 더 잘할 수 있는데, 왜 하나님이 나에게는 이렇게 작은 사명을 맡겨 주셨을까. 왜 나는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는 대신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라고 하셨을까 하며 원 사도들을 보면서 낙심하거나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자신에게 주신 분깃이라고 생각하며 절대적으로 주님이 주신 사명이기 때문에 가장 소중하며 남들이 무슨 소명을 받았는지 다 알수 없지만,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 곧 그리스도 예수께 받은 사명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설명하지 않습니까. 나에게 달려갈 길이 있다. 그런데 그 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이다. 곧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이 일이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각기 세워진 사명의 자리에 있는 것을 무시하거나 하찮게 여기거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또 그들과 비교하면서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조금밖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냐고 투덜댈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참답고 중요한 가치는 사명을 감당하는 내가 내게 주신 사명 때문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게 사명을 맡기신 하나님이 나를 통해 얼마나 만족을 느끼시겠는가 그것이 숙제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 사명의 크기와 상관없이 모두 신령한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명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죠. 누구든지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받은 사명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신령하고 중요한 의무라고 생각하고 기쁨을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가운데 있어야 할 내적인 상태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사명을 자기가 달려가야 할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달리기 하는 선수들이 옆에 있는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거나 혹은 그 자리에 서지 못한 것을 핑계하거나 하지 아니하고 오직 푯대를 향해서 최선을 다해서 빠른 걸음으로 달리기 하듯이 그는 자기의 달려갈 길을 위해서 오직 수고한 것입니다. 다른 것이 또 있다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의 모든 가치를 그 사명을 오직 완수하느냐에 걸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사명이라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마치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 복음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전해졌고 그리고 지금도 우리에게 아직까지도 이 복음을 전파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에게 선교적 부담감의 근원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일을 마칠 수가 있습니까. 이 일을 모두 끝낼 수가 있느냔 말이죠.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마치려 함에는, 무슨 뜻입니까. 결국 이것은 사도바울이 개인적인 고백이에요. 복음 전파하는 일은 세상 끝날까지 그치지 않겠지만, 자신에게는 이 일의 끝이 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이 고백은 죽는 날까지 이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하면 언젠가 하나님이 이 일을 마치게 해 주실텐데, 그 때까지 나는 이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데 이것을 가로막기 위해서 많은 환란과 핍박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지만, 그러나 내게 중요한 것은 이 사명이지 생명이 아니다라는 그러한 고백입니다. 그러한 고백입니다.
우리 인생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몇 마디의 뼈에 살과 가죽을 입히고 액체인 물과 피를 집어 넣어서 이 땅에 살아있게 하신 것이 우리의 육체입니다. 그리고 육체는 쇠하여 갑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던 신령한 사람도 겉 사람은 후패해져 간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렇게 능력이 많은 사도였지만, 오는 백발, 가는 홍한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똑같이 그렇게 쇠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주의 일을 하여야 함이라. 밤이 되리니 그 때는 우리가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의 자리가 있습니다. 거기 서 있는 것도 거기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도 우리들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 있으라고 하는 날 동안, 더 넓게 말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숨쉬게 하시는 동안 주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살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이에요. 언젠가는 이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는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우리에게 주신 달려갈 길을 달려갔는지,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라고 주신 우리의 각자의 사명을 따라 섬겼는지에 대해서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삶이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버리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구원하실 때 베풀어주셨던 은혜의 사명을 기억하고 그 사명을 가지의 목숨보다 사랑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포기하며 살아간 사람들은 하나님이 많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명 때문에 가고 싶은 것을 못 간 사람들, 사명 때문에 먹고 싶은 것을 다 못 먹은 사람들, 사명 때문에 하기 싫은 해야 했던 사람들, 사명 때문에 하기 힘든 그 일을 위해서 헌신 했던 사람들, 사명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했던 사람들, 사명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상황을 견디며 고난을 받아야 했던 많은 사람들, 사명 때문에 생명을 버려야 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날에 주님께서 얼마나 많이 칭찬해 주실까요.
(찬양) 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주의 십자가 붙들겠네
끝까지 가야 합니다. 끝까지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는 우리의 육신의 안락과 평안함 보다는 사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지만, 주님의 그 변함없는 사랑을 가장 풍성하게 느낄 때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땀 흘리고 눈물 흘리고 피 흘릴 때 바로 거기에서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위해서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동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