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에게 경고하라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겔33:7)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에스겔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간곡한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시대 때에 선지자로 소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선지자의 소명을 받았으니 그에게는 죄인들을 하나님 앞에 데려나가는 따뜻한 제사장의 마음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엄중한 음성을 그 땅에 전파하여야하는 선지자적 영성이 아주 훌륭하게 함께 녹아있는 그런 사역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신학적인 깊이나 신령함의 깊이에 있어서 다른 선지자에 뒤지지 않은 예언의 세계를 지녔던 사람이었습니다.
본서의 34장 뒤편으로 넘어가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상태를 보며 탄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많은 양떼들이 유리하고 방황하고 있다고 탄식하는 장면이 나오고, 그들을 돌보고 가르치도록 부름을 받은 종교 지도자의 계급이 타락한 것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탄식도 나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무리들을 돌보지 않는 그 시대의 지도자들을 탄핵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마치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열두제자를 사도로 파송하실 때에 백성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면서 마음 아파하셨던, 그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상태가 바로 여기에 나온 상태라고 우리들이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신약 시대건 구약 시대건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동일하여 그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 받는 상태를 보시면서 아파하십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당신의 간절한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이제 내가 이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누군가는 나의 심판이 가까웠다는 것을 외쳐야하지 않겠느냐!” 그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파수꾼의 예를 드시는 것입니다. 파수꾼의 사명은 성루에 높이 올라가서 먼 지평선 너머에서 다가오는 적군들을 미리 파악하고 경고의 나팔을 불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을 피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파수꾼이 적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아서 그들이 화를 당하게 되었다면 그 책임은 파수꾼에게 돌아가는 것이고, 그렇게 불었는데도 그들이 피하지 않으면 불순종하고 파수꾼의 말을 듣지 않았던 사람들이 재앙을 당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너의 사명도 바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한 성품을 배우게 됩니다. 심판하시기로 정하셨으면 쓸어버리시면 되지 왜 굳이 경고를 하실까? 그렇게 경고를 하시는 이유는 파수꾼이 망루에서 나팔을 부는 심정과 똑같습니다. 많은 적군들이 말발굽을 울리며 먼지를 일으키며 성을 향해 공격을 해오는데, 이 싸움이 만만하게 적군을 물리칠 수 있는 싸움이 아닙니다. 그때에 나팔을 부는 파수꾼의 심정이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성안에 있는 사랑하는 동포, 내 겨레 중에 단 하나도 상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 그리고 그 환난을 어떻게 하든지 이기거나 피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나팔을 부는 것이 파수꾼이잖습니까! 하나님이 심판하시려고 해도 그것을 애달픈 마음으로 당신의 종들에게 심판의 경고의 음성을 그들에게 들려주도록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결국은 이 심판을 실행함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을 멸망시키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바램이요 소망이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이 선지자의 사명은 일차적으로는 오늘날 목회자들이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원래 사도들에 의하여 계승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사명은 바로 이렇게 백성들이 듣기 원하는 음성을 들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백성들이 꼭 들어야할 말씀을 전해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고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삶의 태도를 바꾸도록 그렇게 요구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이었고, 그 사명이 오늘날 목회자에 의해서 계승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라고 하는 말은 의미가 좀 모호합니다. 목회라는 것은 ‘모인 사람들을 친다’는 것인데, 좀 개념이 애매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목회자하면 마음에 들어오는 개념이, 큰 교회의 행정가, 정책 수립자, 리더, 최고 책임자, 군대에서 지휘관 같은 사람, 집단에서의 어른과 같은 사람 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그리고 있는 목회자의 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목사가 누구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외치다 피 뿌리고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땅 끝까지 전파하다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목회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음성을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려주면 하나님 앞에 훌륭하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를 불러주신 분이 교회의 교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교인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아도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사람은 참 하나님의 종일 수 없고, 모든 사람이 돌을 미워하고 돌을 던져도 하나님의 음성을 정직하고 진실하게 증거 한 사람이면 하나님 앞에 큰 자로 인정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목회했느냐, 얼마나 큰 교회를 이루어냈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며 열광을 했느냐에 달려있는 것도 아닙니다. 목회자로서의 길과 가치는 얼마나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그들에게 전달해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경계의 음성을 듣고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삶으로 그들이 돌이키고 변화했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변화한 것보다는 얼마나 그들의 변화를 꿈꾸면서 마땅히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기 원하는 정직한 하나님의 음성을 그들에게 들려주었느냐는 것이 목회자의 길에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II. 파수꾼을 삼으심
그런 사명을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다시 상기시키시고 있습니다. “파수꾼의 사명이 그런 것처럼 너의 사명은 백성들이 듣기 좋아하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음성을 나를 대신해서 들려주는 사람이며, 이것을 잘할 때 너는 훌륭한 종의 길을 간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선지자의 사명은 일차적으로 오늘날 목사들에 의해서 계승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명은 또한 우리 모든 예수 안에 있는 신자들이 이차적으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구원을 얻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히 생령으로 기름 부어서 모든 성도들을 세워주셨는데, 그렇게 세워주신 하나님의 뜻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선지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세워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하기를 “너희는 왕 같은 족속이요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인데 그 이유는 너희를 그 모든 죄 가운데서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시니 너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너희를 빛으로 부르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렇게 이 세상을 향하여 주님의 충실한 파수꾼으로 나팔을 불어야할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가 커다란 하나님의 부흥을 누리면서 예수 하신 일을 뒤이어 이 세상을 고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능력을 크게 받은 사도들이 교회의 전폭적인 기도의 후원을 받으며 충만한 성령의 능력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큰 나팔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거기에서 큰 나팔이 울려 퍼지고 많은 사람들이 울려 퍼지는 율법과 복음의 나팔을 통하여 회심하고 하나님께 돌아간 후에는 흩어진 성도들이 작은 나팔을 불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죄와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내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온 힘을 다해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랬더니 큰 나팔이 울려 퍼질 때에 나타났던 그 크고 놀라운 부흥을 통해 능력을 받은 성도들이 작은 나팔을 불며 골목골목 흩어졌을 때에 큰 나팔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됐습니다.
A.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큰 나팔과 작은 나팔 사이의 소리는 달랐지만 울려 퍼지는 나팔의 소리가 의미하는 바는 다르지 않았으니, 이는 회심하지 않은 자들을 향하여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과 회심한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나팔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먼저 울려 퍼지게 하신 것은 회심치 않은 자들에 대한 심판의 경고 말씀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에 모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모인 사람 중에 정말 회심한 사람이 얼마인가가 문제입니다.
언젠가 한번 꽤 큰 교회에 집회를 갔습니다. 나를 맞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교회를 많이 자랑을 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어느 교회든지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가 잘 되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정말 궁금했습니다. ‘그렇게 자랑을 많이 하는 성도와 교역자들이 섬기는 교회는 사람들이 얼마나 회심을 했을까?’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목사님이 맡고 계시는 부서가 뭡니까?”하고 물어보니 장년부에서 심방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잘 아시겠다 싶어서 “장년 교인들 중 몇 퍼센트나 회심을 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하고 물으니까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져요. “부끄럽습니다. 5프로 미만이라고 생각합니다.”하고 대답을 하셨어요.
우리가 흔히 교회가 부흥한다, 잘 된다 할 때 도대체 그 기준이 뭘까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에 회심하지 못한 사람과 교회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회심하지 않은 사람 중 누가 더 불행한 사람일까요? 아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더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껏 오래 다녀도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말씀 중에도 신기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하나님 떠나 사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에 한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6년을 교회를 떠나 세상을 방황하다가 6년 만에 내 발로 걸어서 서울 변두리의 작은 예배당에 들어갔을 때에 수요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삐걱거리는 풍금 소리에 맞춰서 30명의 성도들이 콘크리트 바닥, 누덕누덕 기운 방석 위에서 톱밥 난로를 때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에 들어가 풍금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주소서
그러니 그 교회에서 여러 날 동안 예배를 드리고 회심하지 못한 사람보다는 그 말씀 듣지 못하고 세상에 있던 내가 더 다행스런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오늘 말하기를 “너는 그들에게 경고의 나팔을 불어라.” 그게 무슨 나팔입니까? 나팔이 다급하게 울려 퍼지면 적군이 이미 성 가까이 돌격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그러면 일어나서 무엇인가 그 전쟁에 대비할 계획을 세워야 하잖아요. 그것을 하게 해주는 것이 경고의 나팔입니다. 이 나팔이 울려 퍼지지 않으면 일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일하고 있을 것이고, 자는 사람들은 그냥 자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적이 공격할 때에 제일 먼저 사람을 보내어 처치하는 군인이 바로 파수를 서는 군인입니다. 파수꾼들이 죽고 나면 성 전체는 눈 먼 장님, 귀머거리가 됩니다. 어차피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도움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두려운 심판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복음을 전하여야할 우리 자신이 뼈저리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그를 향한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B.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가끔 보면 이런 방식대로 복음을 전한답시고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애정은 하나도 없이 하나님의 심판만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까딱 잘못하면 그 사람의 귀에 공갈 협박처럼 들릴 수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조롱하듯이 하는 사람은 준엄한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제대로 전달해주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사람들에게 이 경고의 나팔을 불고, 그 경고의 나팔이 그들의 마음에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는 마치 그들이 회심치 않을 때에 당하여야할 심판과 재앙이 자기가 당하여야 하는 것으로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나의 가족 중에 믿지 아니하는 사람, 나의 자녀 중에 회심치 않은 아이, 나의 친구들 중에서, 이웃들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영혼을 위해 온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당하게 될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을 자신이 충분히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랑의 부족 때문입니다. 지식이 있고 그 위에 사랑이 더하여지면 그 고통이 전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옆에서 아파도 마음이 아프고, 멀리서 아파도 마음이 아프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옛날에 아파도 지금 내 마음이 아프고, 이 다음에 아플 것도 지금 내 마음이 아픕니다. 정말 사랑하면 장소적으로 내 가까이서 보는 데서 아파도 아프고, 나 보지 않는 먼 데서 아파도 아프고! 지금은 다 나았지만 옛날에 그 사람이 아팠던 것 생각하면 아프고, 아직은 안 아프지만 이 다음에 아플 것을 생각하면 지금 아픕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초시간성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시간을 초월합니다. 까리타스 사랑의 초시간적 경험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심판이 지금 당장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이 다음에 일어날 심판이잖아요! 그런데도 그 아픈 고통이 밀려들어 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40년 후에 당하게 될 심판을 예수님이 아셨을 때에 그렇게 마음 아파하시면서 통곡을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통곡하시면서 우셨습니다. 왜? 아프셔서. 40년 후에 당하게 될 그 환란과 고난이, 당하게 될 그 백성들은 모르지만 심판과 관계없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고통이 밀려들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외쳐서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눈물로 알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는 것이 어떻게 복음이 됩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므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복음으로 도망치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 속에서 강렬하고 준엄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실 때에는 사실 그 이면에는 뜨거운 사랑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팔이 의미하는 바가 또 하나가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거입니다. 경고의 나팔이 울려 퍼질 때 너희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라. “경고의 나팔, 회심하지 않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나팔이 울려 퍼졌으나 나는 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 자신을 보호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나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러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 하나님은 그 심판의 폭풍 가운데서 자기를 의지하고, 사랑하고, 간구하는 백성들을 건져내 주십니다. 그 믿음을 보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모든 백성을 멸하려고 하였지만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피하는 라합을 구원하시지 않았습니까!
복음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사람들의 피난처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끔찍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이제 나는 아무 희망이 없고, 살아온 내 인생의 모든 날들이 하나님과 원수 맺고 대적한 순간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이제 하나님의 지엄한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고 생각되어 두 다리에 힘이 다 빠지고 두려움이 엄습하였을 때에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복음의 음성이 우리의 피난처가 됐습니다. 그래서 속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품으로 달려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구원의 음성에 화답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렇게 하나님께로 피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비하신 기이하고 크신 사랑을 전하도록 나팔을 불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진지해지면 듣는 사람들도 복음의 진실성을 의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경고의 나팔을 잘 불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회심하지 않은 지체들이 교회에 많이 있습니다. 꾸역꾸역 교회에 나오지만 선명한 하나님의 복음, 그들의 영혼이 벌거벗은 채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고, 율법의 판단으로는 정죄되어 아무 희망이 없이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되어서 복음이신 우리 주 예수께로 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올곧고 정직한 선포가 없기 때문에 그 많은 세월 동안에 교회에 나와도 회심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그러면서 교회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점점 층이 두텁고 급기야는 그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회심하지 않으면 구원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도 없다고 마음대로 외칠 수가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의 커다란 잘못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교회 안에서는 이 세상의 조류와 타협이 없는 선명한 복음의 선포, 주 예수 크신 복음을 늘 들을 수 있도록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교회 안에서 큰 나팔을 불고, 흩어져서는 우리 모두 작은 나팔을 불어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 당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그 심판에 대해 알지 못하는 당사자보다 이미 알고 있는 내가 더 슬퍼하고, 그 영혼들 하나하나에게 이 복음을 간절히 전해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당하게 될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과 회심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친절한 자비와 용서하시는 사랑에 대해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더 많이 기도해서 교회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져서 영혼만 사랑하고 주님만 사랑하는데 바쳐졌다면 잠시 받을 고난이 두려워 하나님의 말씀에 타협하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냉대와 미움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복음에 이 세상의 사상을 타는 일을 하지 않고 정직하고 선명하게 복음을 담대하게 외쳤더라면 지금 회심치 않은 채로 남아있는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회심치 않고 있는 많은 영혼들은 이미 회심의 강물에 떠밀려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신자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 안에 남아있는 회심하지 않은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만 받쳐지지 않은 것, 교회가 순전함으로 그 영혼들을 위해 자기를 바쳐 기도하지 않은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표이며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온전한 헌신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산지 곳곳에 남겨둔 가나안 원주민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충만하고 하나님께만 헌신되어서 가나안 족속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울부짖어 공통체가 한마음이 되었을 때에는 모두 쫓겨 갔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떨어지고 공동체가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들은 산 아래로 내려와서 이스라엘 언약의 백성들을 더럽혔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 남아있는 회심치 않은 신자들은 철저하게 우리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죄악을 보여주는 것이고,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려고 애를 써도 온전히 하나님만을 추구하지 않고 있는 어두운 일부의 그림자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제 마음에 남아있는 찌끼를 보여주십니다.
III. 회심을 위한 섬김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어떻게 해야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많은 사람들의 회심을 위해 우리의 온 마음과 중심을 다해 깊이 섬기며 헌신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회심의 놀라운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역사이지만 반항하는 인간들을 회심시키시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서 그 사람들이 회심에 이르도록 눈물로 기도해주고, 사랑의 마음으로 어루만져 그들이 참다운 회심에 이를 때까지 인내함으로 기다려주는 것, 그래서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따뜻하고 간절한 부모의 사랑인지를 깨닫게 해주어서 그들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 말고 우리들이 섬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우리 가족 중에, 우리 구역의 식구들 중에, 우리 중에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흘릴 눈물이 없는 우리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렇게 나팔을 불도록 사명을 받았으니 온 마음을 다해서 그들이 참다운 회심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우리의 중심을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을 보시면서 마음 아파하셨던 것처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예수의 분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도 회심하지 않은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에 청년들을 위한 회심 집회를 하게 되는데... 여러분, 너무나 때가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린이들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회심을 경험하고 그때부터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이제껏 살아왔더라면 청년이 된 여러분 자녀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가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그 긴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지금은 굳게끔 뿌리 내린 불신앙과 완고함, 인간의 가증한 교만이 그처럼 무성하게 자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에 회심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자녀가 일찍이 회심했더라면, 여러분들이 은혜가 떨어지고 식을 때에 깊은 밤 교회당에서 밤을 지새우며 부모인 영혼들을 위해 눈물로 섬김의 기도를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왜 청년이 될 때가지 회심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셨습니까? 왜 그러셨습니까?
엄마 무릎에 앉아 옛날이야기를 들어도 진짜인 줄 알고, 동화 이야기를 해주고, 엄마가 호랑이 나오는 이야기를 하면 호랑이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처럼,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믿을 때에 무릎에 놓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회심에 이르게 하지 왜 청년이 될 때까지 내버려 두었습니까? 왜 그러셨습니까? 그런 것 회개해본 적 있으십니까? 초등학교 때만이라도 회심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 칠흑같이 어두운 사춘기, 청소년 시절을 주님 없이 방황하고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중고등부 있을 때 기도하고 아이에게 간절히 권하고, 때로는 아이를 위해 눈물로 금식하고, 수련회에도 매번 보내셔서 회개하게 하지...... 학원 보낸다고 수련회 안보내고, 시험공부 한다고 수련회에 빠지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을 열심히 전해도 그것을 거부하려는 자녀들을 오히려 맞장구를 쳐서 회심에 이르게 하는 기회를 오히려 여러분들이 막았습니다. 아프더라도 들으십시오. 여러분들이 주범입니다. 그때에 정말 내 자녀가 영혼으로 보였다면......
오늘 신문에서 기사를 읽으면서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일본에 있는 초등학생 하나가 공개적으로 편지를 보낸 것 읽어보셨죠! 11일에 학교에서 자살하겠다고. 왜? 친구들이 너무 괴롭혀서 견딜 수가 없다고. 11일에 상황의 변화가 없으면 학교에서 자살하겠다고 교육부 장관과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일본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러분의 자녀도 여러분들이 상상하지 못할 만큼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것은 십분의 일도 안 될 것입니다. 부모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도 마음에 없는 날 동안 그 어둡고 추운 청소년의 골목길에서 얼마나 혼자 많이 울었을까요? 왜 내버려 두셨습니까? 그랬겠지요! 어려서는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초등학교 때를 기다렸겠죠! 초등학교 때는 ‘그래도 믿음의 자녀인데 살다보면 회심하겠지’하다 중고등부 시절이 지났죠! 보세요. 그렇게 믿음의 집안의 자녀인데도 회심하지 않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휙 지나가버렸습니다. 마음 아픈 얘기이긴 하지만 지금은 회심할 확률이 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지난번 어린이 집회 하면서 어느 학생이 한 간증이 내 마음을 지금도 울려요. “목사님, 저는 회심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그것을 꼭 해야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말씀을 듣는 시간 내내 회개하도록 도와달라고 두 손 모아 빌었더니 예수님이 날 만나주셨어요.”라고 했습니다. 잘 들으세요. 이제 머리가 커서 청년쯤 되면 그런 일이 잘 안 일어납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그때에 주님을 깊이 만났더라면 유혹과 방황이 많은 청소년기에 아마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그 고난의 때를 지났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 할 때에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니
정말 놀라워요! 지금도 생각이 나는데, 청소년 집회하는 날, 다 끝나고 내 방에 앉아있는데 어떤 아이들이 찾아와서 “목사님, 저희는 다른 교회에 다니는데 기도를 못 받았어요. 본 교회 아이들만 해주는 줄 알았는데 우리도 기도해 주시면 안돼요?” 그래서 기도를 해주었는데, 그 중 한 아이가 자기를 위해 꼭 기도를 해 달래요. “우리 아빠는 작은 개척 교회를 하시는데 교인들이 아빠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해요. 그리고 교회를 나갔어요.” 그러면서 눈물이 죽 흘러요.
몇 학년이냐고 물어보니 중학교 3학년이래요. 만약 그 아이가 빗나갔으면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친구와 노래방이나 어울려 다니고, 잘못하면 담배나 피고 술이나 먹으면서 탈선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개척교회의 아픔을 자기가 받아들이면서 그 교회 공동체의 아픔을 느끼면서 그렇게 울어요.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생각해 보세요. 왜 그때를 놓쳤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의 자녀는 대학생이 되었고, 직장인이 되었고, 군대에 있고, 시집갈 나이가 되었고, 심지어는 가버렸어요. 이제 어느 정도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포기하고 운명에 맡기고 있죠! 혹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신앙은 어차피 다 제가 하는 것인데, 자기 책임이지” 아닙니다. 유아 세례를 받을 때에 뭐라고 서약을 했습니까? ‘이 아이가 구원을 받는 것을 내가 구원을 받는 것처럼 항무할 것이며 우리의 종교의 도리를 이 아이에게 전심으로 가르치며 이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고 이 아이와 함께 기도하며 우리 신앙의 거룩한 도리를 이 아이에게 가르치기’로 다짐하였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회심에 이르게 하는 말씀을 심고, 회심 이후에 교회의 목양을 통해 진리의 말씀이 심겨지지 않는 동안에 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사상들이 자녀들의 마음속에 꽉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여러분들의 무릎 앞에서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럼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요? 20년 동안이나 이렇게 회심하지 않은 채로 흘러왔습니다.
IV. 결론과 적용
그래서 회개하여야 할 사람은 내 자녀가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그래도 오늘이 제일 빠른 날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를 위해 울어야 합니다. 물려준 재산 없고 훌륭하게 공부시키지 못했어도 내 자식이 주님을 깊이 경외하고 사랑하는 신앙만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그를 드셔서 요긴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섬길 것이고,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오늘이 내 아이의 회심을 위해 기도해야할 가장 좋은 날입니다. 이후에는 더 어려워질 거라고 생각하고 자녀의 회심을 위하여 전심으로 빌어야 합니다. 그리고 섬길 수 있는 그 섬김을 다 하십시오. 그래서 그 과정을 통해 나와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를 고치고, 어머니인 나의 기도가, 아버지인 나의 기도가 내 자녀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시오. 그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경고의 나팔을, 사랑의 음성을 내 마음의 중심을 실어서 그 영혼에게 들려주고 말씀의 씨를 뿌리고 그가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살도록 온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는 부모가 지금이라도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