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잠할 수 없는 소식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왕하 7:9).
I. 본문의 배경
솔로몬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나뉘었습니다. 북쪽은 북왕국 이스라엘, 남쪽은 남유다라고 불리였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북쪽으로는 갈대아 다메섹 혹은 아람이라고도 불리우는 신흥국가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기름진 땅을 얻고자 남쪽으로 수시로 공격을 해 내려왔습니다. 바로 그때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아합 왕의 치세였고 나라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공경심 같은 것들을 모두 상실하고 있었던 영적인 어둠의 때였습니다.
II. 아람 군대의 침공
1. 포위된 사마리아 성
이때 아람 군대가 쳐 내려왔고 수도인 사마리아 성을 포위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으로 들어오는 모든 보급로는 차단되었고 성안에 모여 있던 백성들 속에는 심각한 식량결핍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굶어죽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런 사태가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2. 문둥병자 네 사람
그 고통이 극심하여 사람들이 죽어가던 그때에 성 밖에 살고 있던 문둥이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문둥병은 율법상으로 이스라엘 무리들과 섞여 살 수 없도록 지정된 병이었고 그들은 성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성 밖 별도의 장소에서 기거하며 생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 4명의 문둥이가 있었습니다. 성안에 있는 사람들도 굶어죽을 정도이니 성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성 밖에 있는 비참한 문둥이에게 임한 그 고통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들은 참을 만큼 참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아사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4명의 문둥이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굶어 죽을 상황이 되었는데 성에 들어가 봐야 먹을 것도 없고 성문을 열어줄 리도 없고 마지막 남은 길이란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는 일이다. 만약에 항복을 받아주면 어쨌든 우리가 포로니까 먹을 것은 줄 것이고 목숨은 부지하지 않겠느냐? 혹시 우리 항복을 받아주지 않아서 죽인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죽는 것이나 거기 가서 죽는 것이나 차이가 무엇이 있겠느냐?”
4명의 문둥이들이 아람 군대의 진으로 항복을 하기 위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때는 어둠이 깔리는 시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때에 그들은 다가가면서 누군가가 손 들으라고 고함을 칠 것을 기대했습니다만 아무도 외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진에 도달했을 때에는 그들이 예상치도 못했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들이 잔뜩 있는데 사람이 없었습니다. 많은 물건들 심지어 전투에 쓰는 병기까지 그대로 있는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텅 빈 진지였습니다. 이유인즉슨 황혼이 내리는 그 시간에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셔서 아람군대들을 두렵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지축을 뒤흔드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말발굽소리와 군대들의 함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어마어마한 대군이 몰려오는 말발굽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이 군대는 이스라엘의 군대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왕이 헷족속이나 특별히 그 당시에 최대 강대국이었던 애굽으로 내려가서 애굽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대군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엄습하면 자신들은 모두 죽을 것이라는 큰 두려움이 장수로부터 시작해서 어린 군사들에 이르기까지 한 번에 덮쳤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든 물건을 버려둔 채 맨몸으로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거기에 이 문둥병자들이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한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오래 동안 굶주려 굶어죽기 직전의 사람들이었으니 당연히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먹을 것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지천에 먹을 것들이 널려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혁띠를 풀고 마음껏 그 음식을 퍼 먹었습니다. 그때 행복감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요? 인생이 먹으려고 사냐? 먹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냐? 그러는데 이것은 다 배불렀을 때 일이었습니다.
제가 15-16살 때 쯤 되었을 때입니다. 한참 먹성이 좋을 때였습니다. 학교 갔다 왔는데 돈도 한 푼 없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막 뒤져보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습니다. 뒤져보니까 반찬은 하나도 없고 밥만 있었습니다. 밥을 퍼서 그릇에 담아놓고 뒤져보니 김치밖에 없습니다. 김칫독에서 김치 하나를 꺼내어 머리를 쳤습니다. 생각을 한 것입니다. 먹어야하는데 어떻게 빨리 먹는 방법이 없을까? 천천히 먹다가는 먹는 도중에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그때 기가 막히게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우선 밥을 물에 말고 머리 잘라진 기다란 김치를 위쪽에다가 계속 집어넣고 밑으로 계속 밥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정말 빨리 먹고 기아에서 헤어났습니다. 한 번은 그때도 너무 배고픈데 학교를 갔다 왔는지 어디를 갔다 왔는지 집에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집은 내가 배고플 때마다 아무도 없습니다. 들어갔더니 아무도 없고 할머니도 안 계시고 뒤져보니까 찬밥도 없습니다. 정말 막막합니다. 김치 한 그릇하고 할머니가 쓰시다 남은 밀가루가 반 봉지쯤 남아있었습니다. 제가 수제비, 만두, 칼국수 다 할 줄 압니다. 어느 주부하고 상대해도 이길 자신 있습니다. 특히 수제비는 제가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요리 중 하나입니다. 기존의 방법으로는 그 맛이 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수제비는 손으로 한다고 생각하는데 발로 해야지 제 맛이 납니다. 구체적인 것은 영업 비밀이라서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수제비를 해서 먹으면 차지고 맛있는데 그렇게 할 기운도 없고 그것을 요리할 시간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빨리 먹을 수 있을까 해서 석유곤로를 켜서 양은 냄비에다가 물을 넣고 김치를 넣고 간장을 치고 끓였습니다. 밀가루를 한 공기반쯤 되게 퍼서 물을 반 컵쯤 부어서 손으로 막 문지르니까 덩어리로 뭉쳐진 것을 냄비에 확 쏟아 부었습니다. 끓였더니 정말 맛있었습니다. 잠간 사이에 먹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네 집에 갔다가 밥 차릴 때 시간이 많이 걸리면 짜증이 납니다. 얼른 조금 먹고 끝내지 뭐 그렇게 시간이 걸리나 합니다. 제가 내수동 교회에 있을 때였습니다. 중등부 전도사를 했는데 주일이 끝난 후에 마음이 허전한지 집에 갈 생각들을 하지 않아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먹을래?” 했더니 4-5명의 교사들이 따라 왔습니다. 집에 도착해보니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 있는 지체들에게 “지금부터 시간을 재라. 몇 분 만에 식탁을 차리는지 봐라.” 정확하게 23분 15초 만에 저녁상을 완벽하게 봐서 그들 앞에 차렸습니다. 그것이 제 기록이었습니다.
III. 침묵할 수 없는 소식
이 사람들이 그렇게 밥을 잔뜩 퍼 먹었을 때 무엇이 눈에 들어왔겠습니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옛날에 그랬습니다.
[죄악된 세상을 방황하다가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 죽을 험한 세상이 왜 이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회개의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우리가 십자가 앞으로 나아왔을 때 우리는 이 굶주린 문둥이들과 같았습니다. 그때에 드리는 예배는 어쩜 그렇게 달콤했는지요. 그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쩜 그렇게 꿀 같았는지요. 그때 내 귀에 들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찬양하는 그 소리는 하늘에 울려 퍼지는 멜로디 같지 않았습니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알았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영혼을 담는 껍질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불행이 육체를 위한 자원의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위한 자원의 결핍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 배부르게 됨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배 부르는 영혼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나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만 눈에 들어왔고 그래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그 진리, 영혼의 양식을 먹으며 행복해 하였습니다.
신앙의 타락은 구원을 일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신자의 참된 정체성은 그것,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십자가의 그 놀라운 사랑, 아들을 못 박기까지 나를 위해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목 매이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반이고 원천입니다. 우리가 그랬습니다. 그렇게 배부르고 많이 먹고 났을 때 우린 비로소 이런 좋은 영혼의 양식이 있는데도 핍절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들 자신도 울어줄 수 없었던 그들의 영혼을 위한 눈물이 우리의 눈에서 뜨겁게 흐를 때 우리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이 육체를 위한 자원의 결핍에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영혼이 굶주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표피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번에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을 보면서 난 그 젊은이가 충분히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불쌍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다면 그 젊은이 가슴에 눈 뜨면 보고 싶은 사람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그렇게 인생을 비참하게 끝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영혼이 굶주리고 배고픈 사람들의 불행한 삶입니다. 우리도 한때 그런 사람이었으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영혼의 배부름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2. 부자가 됨
이 문둥병자가 두 번째 한 일은 배부른 후에 온 진을 누비며 보물들을 주머니에 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육신을 위한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들이 부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 육신을 위한 자원은 어느 부분까지는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더 많은 것은 우리에게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몇 만원, 몇 십 만원, 몇 천 만원 필요할지 모르지만 몇 천억, 몇 조 이런 돈이 우리에게 왜 필요하겠습니까? 인간이 육신을 위해 공급할 수 있는 자원을 동원할 그 한계를 넘어선 그런 물질입니다. 그것이 인생을 진정으로 바르게 살아가는 데에는 별로 필요하지 않은 자원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관심은 우리의 영적인 자원, 영혼이 그런 자원을 많이 소유해서 영혼이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의 원인입니다.
제가 직장 다닐 때 아줌마 한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얼마나 예쁘게 신앙생활을 하시는지 모릅니다. 같이 모여 앉아서 예수 믿고 자기가 받은 변화에 대해서 간증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병 나은 이야기고 하고 물질 축복받은 이야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분 차례가 되었는데 수줍게 말하기를 “전 예수 믿었지만 특별히 변화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하나있습니다. 예전에는 지갑에 만 원 정도가 없으면 늘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버스표 한 장만 있어도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때 만 원은 지금의 30만 원 정도의 가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이 부유하게 된 사람의 고백입니다. 물질이 많아도 영혼이 가난하면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물질이 없어 가난해도 영혼이 부유한 사람의 신세를 오히려 그 사람이 지게 됩니다. 왜? 용서해주기 때문입니다. 지위가 높아도 영혼이 가난하면 끊임없이 상처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 비록 지위는 낮아도 영혼이 부자이므로 오히려 그 상처를 인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참된 위로자이시고 주님의 사랑만이 불변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두움에 밝을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사람에게 고통은 육신이 부자일지라도 상처밖에 남겨 주는 것이 없지만 육신이 가난할지라도 영혼이 부자인 사람에게는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그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연마제가 됩니다. 우리가 한때 그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외로울 때는 주님의 품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세상의 사람들이 나를 실망시키고 배신할 때에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육신이 병들고 죽음의 기운이 밀려오면 돌아갈 본향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일깨워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자신에게서 상처와 고통을 주는 사람을 만나면 영혼이 부자였기 때문에 오히려 나를 아프게 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람 영혼 안에 있는 찌르는 고통을 느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확신하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결국은 합력하여서 자신에게 창조 목적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선이 될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복음의 힘, 십자가의 은혜의 능력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난했으나 부자였습니다. 많은 소유 없었으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이런 고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아무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Ⅳ. 우리의 소위를 반성함
1. 침묵하는 죄
문둥이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을 반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소위가 선하지 못하다. 우리가 이렇게 잠잠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뉘우쳤습니다. 그들은 굳게 닫힌 성안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백성들, 두려움에 떨고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동포의 얼굴들이 떠올랐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누가 그들에게 가서 그 소식을 전하라는 의미를 부가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받고 있는 고통이 너무 큰 것이었고 누군가가 가서 말해주기만 하면 달려와서 굶어 죽기 직전의 사람들이 그 널려진 음식을 먹고 가난한 사람들이 흩어진 보물들을 주어 부유하게 될 수 있는 상황인데 그것을 전해주는 사람들이 없어서 그들이 고통을 받으며 죽어간다면 하나님도 벌을 내리실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 언제 예수님이 사도 바울더러 복음 전하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달려갔습니다.
2. 소식을 전파함
문둥병자들이 성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문둥병자들이 문을 열어 달라고 성을 두들겼을 때 사람들이 열어주었을까요? 그런 냉대를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쁜 소식을 그들에게 전해 주어서 그들을 그 두려움과 굶주림 속에서 해방시키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침묵하고 있는 죄를 깊이 반성했습니다. 왜? 오늘은 은혜의 때이고 좋은 소식이 있는 날이다. 그 좋은 소식은 그들을 두려움과 굶주림 속에 몰아넣었던 아람 군대들이 모두 도망가고 배부를 양식과 부자가 될 모든 보화들을 남겨놓고 갔다는 그러니 이제 아무 대가도 치루지 않고 그냥 달려와서 먹고 마시고 소유하기만 하면 된다는 이 기쁜 소식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침묵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끔찍한 죄로 여겨졌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그들 중에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가서 실제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또렷이 들을 수 있도록 전해주지 않으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은 두 가지 방법입니다. 하나는 아름다운 삶으로 그들에게 보이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또한 말로 그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삶을 살아도 들리는 언어의 복음이 없다면 마치 언어 모르는 외국영화를 그림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 아래 선명한 자막이 들어간다면 감동은 더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무리 삶의 아름다운 모범을 강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의 음성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여야 할 우리의 입으로 이 복음을 사람들에게 말하여야 할 필요성이 줄어들지는 않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내 부모 그분들이 나를 향해서는 지극한 사랑을 쏟아 부으며 이 세상에서 둘도 없이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 아버지이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의 불길 속으로 던져집니다. 내일 일수도 있고 오늘 밤일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내, 내 친구, 피를 나눈 내 형제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히 함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어느 날 불현듯 이 세상 생명의 끈을 끊고 죽음의 저편으로 떠내려갑니다. 그때 인간이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두 길밖에는 없습니다. 사마리아 성 안에 갇혀있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은 오직 둘 중에 하나입니다. 뛰어나와 이 기쁜 소식을 듣고 굶주려 죽음을 면하든가 아니면 그 소식을 듣지 못해서 그 성에서 굶어 죽어가든가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4명의 문둥이 아니면 누구도 전할 수 없는 소식이었습니다. 왜? 그들만이 그 소식의 증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 구원 방법이 있습니다. 당신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먼저 안 사람들을 통해서 이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도 많구요. 우리보다 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많구요. 우리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물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서 이 기쁨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람 군대가 도망간 그 현장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4명의 문둥이처럼 인생의 마지막 벼랑 끝에서 손들고 주님 앞에 나아갔던 사람들입니다. 거기서 주님의 십자가의 큰 사랑 그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영생을 맛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자기들이 사랑하는 그 예수를 전하게 하십니다. 전하는 그들의 마음속에 그들이 전해야 할 영혼들을 향한 예수님의 목매는 사랑의 마음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신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문둥병자들이 달려가서 한 일은 모두 도망갔고 거저먹을 양식과 마실 것이 가득 있으니 그 두려움과 공포 속에 죽어가지 말고 이리로 나아오라고 하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침 한마디 때문에 온성의 사람들이 죽음을 면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그렇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할 사람들로 품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뜨겁게 역사할 때 우리는 주님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맘이 식었을 때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할 의무는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때 식어진 우리의 가슴에 다시 그리스도의 뜨거운 보혈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놀라운 사랑, 주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Ⅴ.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이에서 더 큰 사랑은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친구들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바로 그렇게 그들을 위해서 친구처럼 목숨을 버리고 죽으신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는 사랑을 보여주신 그 예수님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그 고단한 인생길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로 우리가 그때 처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눈물 흘리던 그때처럼 우리들의 살아온 날들이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린 날이었더라면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 날들이었다면 우리에게 무거운 부담만으로 남아있는 우리의 가족들은 이미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었을 것이고 무거운 부담만으로 우리에게 남아서 우리의 양심을 누르는 우리의 친구와 이웃들은 이미 복음의 빛 가운데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맨 처음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놀라운 사랑 때문에 주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에 강같이 흐르던 때를 기억하십시오. 조용히 귀를 기울여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 여러분들이 새롭게 느끼는 계기가 될 것이고 나 한사람이 이렇게 주님을 믿고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 속에 나타났으며 나의 나 된 것이 그들의 섬김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한 사람이 영혼을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그때 그 영혼은 가장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봄에 이 아름다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