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사랑의 목회
녹취자 : 오희열
I. 들어가는 말
현대 사회를 보면, 목회자들이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서 있습니다. 후기 산업사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여러분이 인터넷에 들어가서 찾아보십시오. 요즘은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과학 기술의 특이점(singularity)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이점은 과학기술이 발달하다가 어느 지점에 가면 기존의 방식처럼 발전해가는 것이 아니라 수직으로 발전하는 지점이 온다고 보는 것이고 그것을 특이점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과거의 발전 방식 안에서는 미래를 어느 정도 유추를 할 수 있었는데- 축구공과 같이 말입니다- 후자처럼 발전한다면 미래를 예측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이 이렇게 수직으로 상승해버리면 예측이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유발 하라리가 이야기했듯이 예측이 불가능한 사회가 왔습니다. 예전에는 30년 뒤의 사회가 어떨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3년 뒤도 헤아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회가 격변하니까 사람들을 데리고 하는 목회는 무엇을 하는 것인지, 그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설교하고 심방하고 교회에서 행정하면 되던 교회들이, 이제는 인간이 훨씬 더 복잡한 정신 구조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기존방식으로는 목양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다시 한 번 목회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생각해보고 그것을 오늘날 우리의 시대의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적용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한다는 것은 사상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 사상을 따라서 생각하고 사랑하며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 사상이라는 것은 여태까지 있었던 위대한 신학자들, 위대하지 않다고 해도 평범한 신학자들도 이런 사상의 일면들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사상을 가지고 내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자기화”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거기에는 절대로 지식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사상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것은 지식이 없이는 사상이라는 것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지식의 양이 필요합니다. 그런 지식의 양을 습득하고 그것을 자신 속에서 발전시키고 소화시켜서 자기 나름대로의 사상을 가지고 그 사상을 설교와 목회의 모든 속에서 녹여낼 수 있을 때 그것이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의 목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임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이코노미아”(경륜)를 아는 것입니다. 세계는 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는가? 여러분에게 세계가 왜 창조되었는지를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왜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만드셨는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그 답은 자기 답이 아니지 않습니까?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쳐줬기 때문에 그렇게 말은 하지만 심지어 “영광”이 무슨 의미인지도 스스로 잘 모릅니다. 그런 사상을 가지고는 이 엄청난 사상의 조류 속에서 그 사람들에게 인생의 갈 길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나”라는 인간이 여기에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체득된 지식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본받아서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1번의 목적을 이루는 데 가장 훌륭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놓인 삶의 자리는 다 다르고 시대는 계속 변하기 때문에 그런 가운데 어떻게 내가 하나님과 세계를 이해하면서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뿐만 아니라 학문, 삶으로 다시 환원되는 방식으로 사람을 가르치면서 돌봐야 하는 것입니다.
II.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사상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 태어나고 58년에 죽습니다. 세살부터 글을 쓰고 생각하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여섯 살에 자연 철학에 관한 첫 번째 글을 쓰고 여덟 살에 유물론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에세이로 발표합니다. 그리고 열세 살에 예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고 4년 뒤에 수석으로 졸업하여 라틴어로 졸업식 축사를 했습니다. 2년 뒤에 석사를 마치고 2년 뒤에 예일대 교수가 됩니다. 교수가 될 줄 알았는데 교수가 되지 않고 솔로몬 스토다드가 목회하는 교회의 부목사로 들어갑니다. 솔로몬 스토다드는 유명한 목사님이었는데 그분이 돌아가시고 그의 후임자로 거기서 목회를 하다가 나중에는 신학적인 문제로 그 교회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하면 잊히지 않는 것이, 대각성운동이 일어날 때 에드워즈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예전에 CLC(기독문서선교회)에서 나온 책들을 보면 부흥과 관련된 책들이 많았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일생에 대한 탐조등은 대개 부흥에 관하여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부흥에 관련된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런 사람만으로 보기에는 엄청난 인물입니다. 예일판으로 스물여섯 권이 나오고 미 발간을 포함해서 73권인데 나머지 47권 정도의 책들은 책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소량의, 그리고 완성도도 떨어지는 작품들이라서 아직 책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의 사상적 토대, 이 세 권은 꼭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읽는 사람은 말입니다.
첫째로 <천지창조의 목적>입니다. 2부로 되어 있는데 성경을 이용한 논증이 있고 아예 성경으로 호소하지 않으면서 이성으로 논증한 2부가 나옵니다. 이 두 작품은 에드워즈의 모든 사상의 밑바닥, 기초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아마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좋은 소식을 드리자면, 열린교회 홈페이지에 들어오셔서 세미나를 찾아보시면 제가 약 100분 동안 강의한 에드워즈의 천지창조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짝 정신 차려서 들으시면 여러분이 다섯 권의 책을 읽어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을 총신대 대학원 학생들에게 강의한 것입니다. 그것을 들어보시고 제가 쓴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 제 5장쯤에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챕터가 있습니다. 50페이지 정도의 분량입니다. 그것은 엑기스로 제가 정리해서 한국적인 정서로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그 강의를 듣고 그 책을 읽으면 천지창조의 목적에 대해서 아주 확연하게 이해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다시 교회 홈페이지에 가 보시면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주제로 여덟 편으로 설교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왜 천지를 창조하셨는지에 대한 토대가 놓일 것입니다. 성경과 플라톤주의를 가지고 설명을 했는데 신학적인 결함과 철학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저 책을 읽음으로써 열리게 되는 기독교 세계관의 유익이 저 내용을 모르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 이제 나는 에드워즈의 천지창조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감동을 받는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저 논문을 읽기 전과 읽은 후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뻥치는 것 같습니까? 경험한 사람으로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참된 미덕의 본질>입니다. 이 책은 첫 번째 책을 반드시 읽고 나서 읽어야 합니다. 어려운 책입니다. 제가 쓴 “도덕적 통치”를 몇 사람은 읽다가 집어던졌다고 합니다. 저 책은 내 책보다 배는 더 어렵습니다. 두 번째 책을 읽으면서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고 다 이해된다고 하는 분은 평소에 철학 공부를 꽤 하신 분입니다.
이 책은 에드워즈가 사상적으로 깊이가 더해진 후에 쓴 것입니다. 여기 출판년도는 저작년도가 아닙니다. 다행히 이 책은 부흥과 개혁사에서 번역이 되었습니다. 대체로 괜찮게 되었습니다. 원서로 보시면 더 좋습니다. 이것을 읽게 되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게 됩니다. 왜 이 세상에 있는 일반적인 도덕으로는 창조의 목적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일반적인 도덕에서의 윤리적 행동과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그 덕이 어떻게 차이 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제가 저 두 권의 책을 통해서 얻은 유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저는 그 두 권의 책이 부드럽게 이해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그 이전에 어거스틴을 통해서 철학적 훈련이 되어있었고 플라톤 철학 등 때문에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공부하고 나면 놀라운 변화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목회가 허공을 치는 것 같은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책은 <구속사>입니다. 이 책 말고도 읽을 책이 너무 많습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가기 때문에 이 “구속사”에 대해서는 제가 생략하겠습니다.
III. 에드워즈의 목회적 목표
에드워즈의 목회의 목표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두 번째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 줄 수 있는가? 에드워즈에게 이것을 물으면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면 세상이 추하게 보일 것이고 사랑하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객관적으로 보여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어떻게 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 때문에 그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더 많이 펼치면 한 권의 책이 되기 때문에 이 세 가지에 집중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A.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라
에드워즈의 첫 번째 목회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논제를 위해 사랑이 무엇인지,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1.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에드워즈를 흔히 어마어마한 사변적인 신학자라고 평가하는데 제가 보기에 에드워즈는 그렇게 사변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이전 시대의 신학자들, 그리고 17세기, 18세기의 동시대 신학자에 비추어보자면 온건한 철학적 신학자였습니다. 에드워즈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을 실제적으로 하지 않고 기능론적으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설명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라든지, ‘믿음이 있으면 오래 참는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기능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관심은 본질을 분석해서 파헤치는 데 있지 않고 그 개념들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이해해서 실제적으로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지혜를 얻어서 그런 삶을 살아가게 하는 데에 성경의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드워즈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드워즈는 간단하게,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에게 사랑을 물어보면 어떻게 definition 할 수 있느냐? 기록을 하셔도 좋습니다. “사랑은 어떤 한 사물에 정신과 마음이 고착되어 있어서 그것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디” 여기서 “누린다”는 말은, 라틴어로 “프로이”(frui)입니다. 이것의 정확한 번역은 enjoy입니다. 영어에서 기쁘다는 말은 pleasure, happiness, enjoy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지금 말씀드린 순서대로 고차원적입니다. enjoy는 우리나라에서는 좀 저급한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나 영미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못 하는 영어로 미국에서 설교를 했는데 어떤 교인이 나오면서 악수를 청하면서 진지하게 “I really enjoyed your sermon.”이라고 하길래, ‘내 설교가 심각했던 모양이구나. 이 사람이 내 설교를 enjoy했다니…’ 하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최고의 찬사였습니다. 그런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 것이 “누림”입니다. “누림”은 더 이상의 목표가 없는 상태입니다.
요즘에도 원우회 수첩이 나옵니까? 그것을 묵상집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요즘에도 그렇게 보십니까? 거기에 실린 여학생들의 사진을 닳도록 보십니까? 그렇게 묵상하다가 다행히 한 자매와 엮어졌는데 그 자매가, “오빠, 나를 왜 그렇게 사랑해?” 하고 묻는다면 “모른다.”고 대답해야지, “니네 아버지가 부자잖아.”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순간에 사랑이 아니라 이용, 사용이 되 버립니다. 누리는 것은 더 이상의 목표가 없어야 합니다.
어쨌든 에드워즈는 사랑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에드워즈 입장에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동전의 앞뒷면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 좋아하는 것이 사랑인데 그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면서 그 계신 관계의 본질이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부 혼자 계시면 성부는 사랑이실 수가 없습니다. 사랑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계가 필요합니다. 그 삼위의 관계가 사랑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고 성부와 성자의 성령의 관계가 사랑인데 성령 자신이 사랑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부를, 성자를, 삼위일체를 사랑하라는 말은 나오지만 성령을 사랑하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성령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동의어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사랑하라.”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의 그 사랑을 본받아서 모든 것들을 관계하도록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 사랑의 정도가 인간과 같이 아주 고차원적인 사랑부터 시작해서 하찮은 피조물의 어미와 새끼의 관계처럼, 저 밑으로는 생명이 없는 사물들이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함께 연합을 이루면서 어떤 물질을 만드는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본뜨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사랑의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것은 에드워즈의 독창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미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모든 것들을 휘돌고 하나님 자신 속으로 회기하게 됩니다. 그 흐름 속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랑의 시작이 하나님께로부터 되었지만 사랑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라고 보았고 여기에서 양립주의(compatibleism)를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뭔가를 도덕적인 결정, 예정을 하신 것은 결정된 것이지만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이 두 가지의 모순된 명제가 절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 양립주의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기본적인 입장은 양립주의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해도 하나님의 예상이나 예정을 빗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자유롭게 예정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행해도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결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결정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이 하나님의 결정과 양립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2.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가?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가? 이것이 <참된 미덕>의 초판본입니다. 에드워즈의 덕 이론입니다. “덕”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이 “덕”의 개념은 연구해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설교 속에서 이 “덕”을 설교하지 않고는 설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설교자들 중에서 대다수가 이런 면에서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윤리적인 설교를 합니다. 그것은 교인들에게 엄청난 지적인 혼란을 가져옵니다. 오늘날의 설교가 “아침마당”과 비슷한 분위기가 아닙니까? 사상적인 골격과 신학적으로 불타는 기둥이 없고 누가 들어도 기분 나빠할 수 없는, 들으면 기분이 좋은 이야기들로 이루어집니다. 그런 곳에서 복음은 최악의 환경을 만납니다. 말로는 복음을 이야기하지만 복음은 그런 환경에서 잘 자랄 수 없습니다. “덕”에 대한 공부를 꼭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이 “덕”이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이 “덕”에 대해서도 기능론적으로 설명합니다. 제가 설명을 드리자면, 적으셔도 좋습니다. 이 “덕”은 ‘지성적 피조물이 가지고 있는 타자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영혼의 힘’입니다. 지성적 피조물이 가지고 있는, 타자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영혼의 힘(power)입니다. 그것이 “덕”입니다. 라틴어에서는 “비루투스”라고 썼습니다. “비루투스”에서 “비르”는 “남자”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비루투스는 ‘힘’이라는 뜻입니다. 희랍어로 “아레테”라는 단어입니다. 에드워즈의 “덕” 개념은, “덕”에 대해서는 플라톤의 “국가론”, “국가론”은 공부할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돈을 들여서라도 학원에 가서 공부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신학적인 생각들이 엄청나게 달라질 것입니다. 어떻게 설교해야만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지 의식이 생겨날 것입니다.
저는 1년 반 동안 “국가론”을 공부를 했는데 거기에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질문들을 다 합니다. “국가론”의 주제 역시 “무엇이 덕스러운 것인가?” 그리고 부차적으로 “무엇이 선한 것인가?” 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도 결국은 “덕”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덕”의 개념을 진술해가면서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따라서 아주 상세하게 <신학대전>에서 설명합니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그 계열이 아닙니다. 오히려 에드워즈의 “덕” 개념은 플라톤과 같이 훨씬 더 직관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보다는 칼빈주의의 덕 개념을 훨씬 더 따르고 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가 설명하는 바에 의하면, “미덕이란 무엇인가?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탁월한 것이다. 그 탁월한 것은 인간의 이성이 인식하지 못한다.” 이런 논리입니다. 에드워즈는 이 “덕” 개념을 인간의 성향(disposition), 의지(disposition)와 관련하여 말합니다. will과 volition은 서로 다릅니다. will은 의지이고 volition은 의지행사입니다. 에드워즈는 will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volition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disposition, volition, heart와 관련해서 덕을 설명합니다. 덕스러운 사람은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게 되고 이런 식으로 의지를 행하사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7세기의 청교도들이 가장 천착했던 주제가 바로 이런 마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가?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미덕-덕과 동일한 단어입니다-을 마음의 작용과 특성, 그것으로부터 진행되는 행위들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면 보편적 견해로부터 동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보편적 견해는 아퀴나스와 그 이전의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이라기 보다는 플라톤적으로 덕의 개념을 진술합니다. 그리고 이 에드워즈는 그 개념을 물려받습니다. 그 뿌리를 찾아가면 플라톤의 덕 개념이 되는데, 아마도 이 세상에 존재했던 순수 철학자들 가운데 계시 없이 계시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아마 플라톤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면 플라톤주의와 신약 성경이 기록되기 전부터 그 이후까지 신플라톤주의가 유행하던 시대였고, 오리겐 같은 사람도 신 플라톤주의자였습니다. 약간 신비적인 사상을 가진 신 플라톤주의자였습니다. 그런 플로티누스 같은 사람들의 신플라톤주의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굉장히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성경에 나온 사상들이 당대를 휩쓸었던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은 순수한 산물이라기보다는 많은 신학자들이 당대에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소통하고 있는 공기와 같은 사상이 신플라톤주의였기 때문에 자신이 신플라톤주의에 동조해서 말하기보다는 그 기류를 이용해서 기독교를 전달하기 위한 통로로 많이 사용합니다. 실제로 오리겐 같은 사람은 신플라톤주의의 플로티누스 같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엔네아데스 같은 책에서 많은 신학적인 것을 얻는데 그 흔적이 가장 강력하게 남아있는 책 중에 하나가 오리겐의 “원리에 관하여”입니다. 정통 신앙적으로는 큰 가치를 가진 책이 아니지만 역사적으로는 굉장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 책입니다.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말로도 번역이 있습니다. 무슨 책을 보셨습니까? 가서 책 표지라도 만져보시고 목차라도 읽어보십시오.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보편적 견해로부터 떨어지면 안 되니까 역사적으로 이루어졌던 덕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떠나서 상상하며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담론에 대한 층차가 워낙 두텁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중요한 용어가 하나 나옵니다. 아주 어려운 용어입니다. 이것을 번역하기 위해서 부흥과개혁사에서 한참을 씨름했습니다. Being in general 입니다. 이것이 철학에서는 “존재 일반”이라고 쓰이는 단어입니다. “존재 일반”이라는 개념은, 어떤 개별적인 사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볼펜, 책, 사람, 하다못해 동물, 풀, 흙, 수없이 많은 사물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물로 존재하지만 이것을 궁극의 사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플라스틱만 봐도 이것이 만들어진 출처를 생각해보면 이것이 궁극의 사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 모든 실존하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실재해 있는 이 모든 것들의 기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존하는 모든 것들은 그 기반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을 “존재 일반”이라고 합니다. 조금 어렵습니다. 철학자들은 신을 이야기하지 않으니까 “존재 일반”이라고 부르는데 우리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입니다.
“대상 일반”(Object in general)은 크기, 부피, 길이, 높이, 이런 것을 “대상 일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참된 미덕이라는 것은, 존재 일반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총신을 뜨겁게 사랑한다고 합시다. 그 총신을 사랑하는 것이 누군가 총신과 같지 않은 사람을 미워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그 총신에 대한 사랑은 존재 일반에 대한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그릴 수가 없는데, 사랑이라는 서로 관계입니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데 누가 그 사랑이 올바른 사랑이라고 확정해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수많은 피조물들, 만약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산발적으로 사랑합니다. 사랑하다가 미워하고 집어치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일 수도 있고 사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이 그런 식으로 사랑이 이루어져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려고 했던 세상이 아닌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상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좌파를 신봉하고 우파를 신봉하는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답이 무엇이냐? 모든 것들은 서로를 사랑하되 그 서로를 사랑하게 하는 원인, 근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각 존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하나님 사랑에 모든 사랑의 관계가 귀속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인류를 지으시려고 했던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에서 하얀 것을 사랑이라고 하고 파란 것을 사물이라고 하고 어떤 것을 가치라고 합시다. 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고 이 사람이 이 가치를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이런 것들이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 지는 우리가 제대로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설정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사람이 만약 이렇게 사랑하고 이 물질을 사랑하고 이 가치를 사랑하는데 통제를 받지 않는 방식이라면 이 사람이 이런 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기보다는 잘못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십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가 연애를 합니다. 서로 막 좋아합니다. 그런데 정욕과 혈기로만 좋아합니다. 미래에 이 여자와 장기적인 관계를 갖고 사욕을 꿈꾸는 것은 다 다른 곳에서 나오는 이야기이고 속에서는 젊음의 열정만 - 물론 폭행을 하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은혜를 깊이 받고 나니까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사랑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 가운데 있는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이런 것을 규율해주는 것이,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면 사랑 그 자체가 질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라는 것을 사랑하게 되고 “이것을 사랑하지 말아라.”고 하시면 그것을 버릴 용기가 생겨납니다. 용기는 사랑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규모가 없이 자의적으로 사랑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통제가 됩니다. 이 모든 질서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질서대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사람이 사랑의 원을 그리며 확장하면서 자기가 사랑합니다. 자기가 주인 삼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서 이 깃발을 꺾고 하나님 사랑 속으로 자기가 편입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 속으로 들어갑니다. 일본 사람이 그렇게 미운데 하나님이 선교사로 가라고 하시면 죽어도 미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모든 도덕적인 질서들이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B.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라
그러면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줌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여러분이 집에 가서 TV 를 켰는데 먹방이 나옵니다. 이 음식을 얼마나 특별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면서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으면 그 방송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는데 먹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아주 심해지면 인천까지라도 가서 그것을 먹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와 똑같은 원리로, 아름다움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일이 시험이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부해야합니다. 그런데 전도사인데도 게임기 앞에서 계속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공부보다는 게임이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에 시험보기 전날에 그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극단적인 예입니까?
제가 신대원을 다닐 때, 시간을 무지 아끼는 사람이라 여기서 신혼이지만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여기에서 생활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주일을 생활해보고 여기에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3년 동안 출퇴근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많은 학생들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좋은 것인데 노는 것이 더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에 좋은 것 보다는 아름다운 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민은 어떻게 좋은 것이 아름다워 보이고 악한 것이 나빠 보일 수 있느냐, 어떻게 그렇게 해 줄 수 있느냐가 인간의 중요한 숙제입니다. 결국 아름다운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아름다운가, 어떻게 아름다운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냐? 하나님이 모든 아름다움의 원천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흉내 낸 것입니다. 만일 여기에 동네 아이들이 BTS 분장을 하고 와서 노래를 하고 있는데 진짜 BTS가 거기에 왔다고 하면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그 아름다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모르고 세상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옆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발견하고 그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사랑 안에서만 가치를 갖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사람은 잃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갖고 싶은 것이 없는 사람은 어차피 잃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잃어도 원통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아름다운 분이신데 하나님의 그 객관적인 아름다움을 우리로 하여금 주관적으로 그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봅니다. 지식과 미감능력과 성령의 역사입니다. 첫째는 지식입니다.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소래교회가 있는데 소래가 무엇인지 모르고 소라를 생각하며 오는 사람은 형태도 없이 여기에 이런 건물을 지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타나서 교회의 역사를 설명해주고 소래교회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가르쳐주면 그것을 듣고 건물 앞에 섰을 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건물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일매일 잊지 말고 기도할 것이, 지식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모든 지식, 그 자체를 종착역으로 삼지 말고 그 모든 지식을 사용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특히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설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설교를 들을 기회가 별로 없지만 가끔 설교를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아름다운 하나님을 저렇게 재미없게 설교할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처럼 같은 목회자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평신도들은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그런 것들이 전달되는 것이 지식입니다. 지식의 사람이 되게 하고 그 지식을 감동적을 전달할 수 있는 말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언어가 아주 탁월해야 합니다. 꼬이지 말고 생생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식, 그 다음으로는 미감능력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능력,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써 객관적인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지식과 미감능력이 도구가 되고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 (이 문단은 뒤에서 나와야 하는 설교임-편집자주)
1.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조나단 에드워즈는 아름다움을 이렇게 규정합니다. consents agreement or union of being to be. ‘존재에 대한 존재의 일치, 어울림, 혹은 연합.’ 사물과 사물, 이것과 이것이 서로 어울린다는 뜻입니다. 더 좋은 것은 전체와의 조화입니다. 지금부터 말하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지 보십시오. 해변, 푸른 하늘, 소나무, 풀밭, 물새. 어울리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하나가 서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계들이 어떤 일치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요소가 많으면 많을수록 많은 것들이 서로서로에게 놀라운 일치를 보일 때 그 광경은 어마어마하게 장엄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물이 수백, 수천 개가 있습니다. 이것들이 서로서로가 어떤 이유 때문에 어떤 일치를 이룹니다. 그런데 이것이 몇 개의 사물들 간에는 일치를 이루고 조화를 이룬다고 할지라도 이 전체가 어울리기 위해서는 하나 하나의 사물이,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도 하나님과(의 어떤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신발과 바지는 어울립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올 때 팔 없는 민소매를 입고 와서 강의를 한다고 하면 바지와 민소매도 어울리지 않고 이 강의하는 장소와 민소매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자와 등판과 좌석의 색깔이 어울린다고 해도 바닥과 맞지 않고 벽과 바닥이 맞는다고 해도 천정이 맞지 않으면 이것들은 아주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게 됩니다. 건축가는 그런 모든 건축의 요소들이 어떻게 서로 서로 연관을 이루고 마지막에는 전체가 연관을 이룰 것인지를 연구하는 것이 디자인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더 큰 규모로 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실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의 의도를 잘 드러내게 될 때 이 자체가 코스모스가 됩니다. “코스모스”는 “질서”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함의를 생각해 보십시오. 둘이 죽고못살고 서로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집력을 가지고 강도짓을 합니다. 그러면 두 사이의 연합과 일치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아주 흉물스러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두 사람으로 만족이 안 되서 다른 사람까지 포섭을 해서 네 사람이 되고, 그 다음엔 열여섯 사람이 되고 그 다음에는 256명이 되고, 이것이 커지면 커질수록 거대한 악이 되고 추함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설교를 함으로 구축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냐는 것입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에드워즈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 이야깁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흙으로 만들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에게서 창조하십니다. 이것을 남자들은 남존여비 사상의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더구나 성경에는 “너를 위해 돕는 배필을 지으리니”라고 되어 있어서 남자는 사수이고 여자는 조사수처럼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만 흙으로 만드신 이유는 우열 때문이 아니라 둘이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고 말씀하셨는데 한 몸입니다. 그것이 나중에 교회론이 됩니다. 둘이 한 몸인데 아담과 하와가 서로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면 만일 아담과 하와 사이에 죄가 들어오지 않고 첫 번째 아들이 태어났다면 그 고백을 부부 사이에만 공유했겠습니까, 셋이서 공유했겠습니까? 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 살과 뼈지만 아들 너는 다른 족속이라고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똑같이 그 고백을 공유했을 것입니다. 죄가 안 들어왔더라면 모든 인류는 서로를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로 여기면서 살아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꿈꾸셨던 인류 사회가 그런 인류 사회입니다. 그 인류 사회가 죄에 의해서 깨어진 것입니다.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같은 사회가 되었을 때 어떤 사회가 되었을 지를 도덕률, 율법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겉모습을 보여준 것이 율법입니다. 그것이 신약으로 넘어와서 원래 하나님이 원하셨던 인류 사회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묶으시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인 죽음을 통해서 그분 안에서 교회를 만드시고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하나의 몸이 되게 하심으로써,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몸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서로를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로 여기면서 미래에 이루어질 사회를 선취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성경신학적인 개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죄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완벽한 사람의 상태로 돌아갔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연합이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죄와 은혜가 함께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무관심과 갈등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면서 우리는 이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자기가 깨뜨려진 만큼 남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하게 됩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사회가 어떤 사랑의 사회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만드시려는 사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헤르만 리덜보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썩어 없어지는 한 알이 밀알일 뿐이고 마지막에는 이것들이 사라지면서 사랑의 사회를 만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에드워즈의 이야기인데,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나라를 단언하기를 어거스틴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나라”라고 본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름다움 때문인데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이야기한 것으로 ‘존재에 대한 존재의 일치, 어울림, 연합’, 다시 말해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존재에 대한 마음의 연합이나 지향성은 존재한 사물들 가운데 발견되는 최고, 최상, 제일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존재, 존재라는 것은 사람, 사람 사이에 일치를 이루고 어울리고 연합되고 서로를 사랑하는 지향성들은 최고의 아름다움입니다. 조건은 그 개별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어야 합니다. 각자가 하나님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자들의 근본인 존재는 하나님 자신 뿐입니다. 왜?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있는 모든 것들은 소멸하고 없어집니다. 그리고 불멸하는 것들은 스스로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멸하도록 지정하시고 불멸하게 하시기 때문에 불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그런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존재는 하나님 자신뿐입니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그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은 참된 존재이며 원천적인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유사성”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데 그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그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서 사물 너머에서 그것들을 아름답게 만들고 아름다운 관계를 지어놓으신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생각하게 하시려고 그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가끔 여러분은 아주 지순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사람을 보면서, “저런 사람에게 은혜를 주셔서 저런 사람이 되게 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실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그런 목적을 위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름다움에 대한 에드워즈의 사유입니다. 이것은 제가 일부만 보여드린 것이고 아주 풍부하게 설명합니다. 그런 것은 도덕 신학으로 가는 양탄자입니다. 도덕신학이라는 것은 도덕철학을 다시 생각하시면 됩니다. 도덕철학은, 우리의 이런 도덕의 근거, 어떤 방식으로 비도덕적인 사람이 도덕적이 되는가? 그것을 다루는 것이 도덕철학입니다. 도덕신학은 바로 그런 내용을 다루는 것입니다.
개별적 사물의 아름다움은 관계의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은 두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개별사물이 완전해야합니다. 두 번째는 그것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들 사이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때 정말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름답게 만드는 조건은 두 개 입니다. 개별적 사물의 완전성, 보편적 질서에서의 완전성, 어울림입니다.
한 사물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어떤 사물도 단일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 무언가로 구성(composition)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물의 복합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이것이 펜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포인터입니다. 여기에는 이미 여러 개의 기능을 하는 부품들이 모여서 이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부품들 사이의 관계가 완전하고 작동이 완벽할 때 이것은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과 함께 이런 것이 이렇게 있을 때 아름답게 되는 것은, 개별사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분석하고 들어가 보면 또 다른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고 부품을 분석하면 또 다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닌 모든 사물들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물들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속에 있는 구성하는 요소들 간에 관계와 결합을 통해서 이 사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하나님에 대한 의존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관계가 아름답고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아름다울 때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을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나님에 대해 적용해보자면, 첫째는 위격의 완전성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위격으로서 셋이 합체가 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한 위격으로 완전성을 가지고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완전하실 뿐만 아니라 성부는 성자와 성령과 가장 탁월하게 어울립니다. 그래서 보편적인 질서의 완전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부는 성령과 성자와 함께 삼위일체로 계심으로써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고 성자,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사랑을 받으심으로 그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명제가 나옵니다. 만물이 창조되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생겨나기 전에도 하나님은 이미 사랑이었지, 인간을 창조하심으로 사랑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아름다움을 우리가 보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은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주 쉬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incarnation)은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점, 클라이맥스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찬양하는 이유입니다. 좀 더 깊은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에드워즈는 이 점을 대단히 강조합니다. 에드워즈는 성경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의 보고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많이 묻어있는데 성경이 그렇게 아름다움의 보고이며 진수인 이유를, 에드워즈는 성경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무지개빛처럼 쏟아낸 것들을 성경이 가지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계기가 되어서 자연세계 속에는 희미하게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 특별계시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자연계시 속에서 비치는 하나님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알 수 없습니다.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그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는 인식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당나라 시인 진장이 이야기했듯이, “앞에 있는 사람은 오는 사람을 볼 수 없고 뒤에 있는 사람은 옛 사람을 볼 수 없구나. 천지의 유유함을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구나.” 자신에게 눈물을 펑펑 쏟아지게 만든 외로움과 자기를 그렇게 초라하게 만드는 그 숭고함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웅장하면서 숭고해보이기 까지 하면서 때로는 처절할 정도로 아름다워 보이는 그 처연한 광경들이, 나를 왜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는 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은 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인간이 모르기 때문에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눈물이 쏟아지면서 저녁노을이 질 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 같은 초라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경험들이 17세기 미학이 성립하는 동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서 에드워즈, 그리고 어거스틴과 터툴리안도 마찬가지인데 아무리 무지한 인간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보는 것”입니다. 무지한 인간이라도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지한 사람들도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각적인 사람의 몸을 입혀서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그 감각에 집중하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생애를 통해서, 행동과 모든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어두운 밤하늘에 폭죽처럼 찬란하게 쏟아지게 만든 것, 그것이 “구속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인지, 얼마나 사랑이신 하나님이신지를 생생하게 인간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눈부시게 드러나고 구속사의 정점이 바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육신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광경을 통해서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당신의 사랑의 찬란한 빛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삼겹살을 싸들고 산 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성경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아까 언급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표적인 세 작품, 물론 고린도전서 13장 강해도 들어가지만 구속사에 나오는 핵심이 바로 지금 제가 이야기한 것입니다. 구속사 자체가 구속사이기 때문에 구속사가 최고가 아니라 구속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아주 탁월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빛이 폭포수처럼 쏟아부어진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에 압도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2. 무엇이 아름다운가?
무엇이 아름다운가?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 에드워즈는 원형적 아름다움과 모형적 아름다움을 진술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시고 원천이시다” 원형적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은 우리 신학적으로 설명하자면 거룩하심에 대한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Holiness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런 중요한 신학적인 단어들에 대해서 체험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웅장한 설교를 할 수 있게 하는 조건입니다. 거룩하심은,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속된 것과 구별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존재적 초월성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존재적 초월성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의식하지 않을 때는 인간이 굉장히 영원히 살 것처럼,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사람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비극적인 일을 만나거나 어마어마한 재앙을 만나게 되면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의 첫 번째 경험은 자신이 얼마나 하찮고 미천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에드워즈는 원래 그 당시의 사조를 따라서 알미니우스주의자였습니다. 그 똑똑한 지성인이 칼빈주의자가 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일대를 다닐 때 말을 타고 산책을 하게 됩니다. 그 숲길에서 아주 초월적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에 압도됩니다. 그가 말에서 내려와 엎드려서 통곡을 합니다. 그때의 고백에 의하면 자기 자신이 그렇게 미천한 존재일 수가 없고 더러운 존재일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디모데전서 1장 17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세에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그는 칼빈주의자로 전향하게 됩니다. 에드워즈의 신학이 칼빈주의냐고 말할 때는 많은 이야기가 있고 에드워즈가 전통적인 신학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에드워즈에게 비난이 일어나는데 그 비난 가운데 70~80%는 정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칼빈에 대해서는 많이 읽었을지 모르지만 에드워즈를 깊이 읽지 않고 피상적으로 판단하여 비난하는 경우가 70% 이상입니다. 예를 들자면 많이 있는데 시간이 없습니다. 에드워즈는 그런 면에서 대체적으로 칼빈주의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사실 에드워즈에게 칼빈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신학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보편신학의 기초위에서 역사적인 신학을 모두 통합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신학을 추구해나갔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 칼빈이 중요했을 수는 있지만 그렇게 결정적인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이 칼빈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동의했을 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약간의 결함을 가지고 있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에드워즈의 신학을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비평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존재론적인 미천함을 느낄 때 자신이 아주 티끌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도덕적인 완전성을 느낄 때는 하나님 앞에 미천한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하고 나면 아주 겸비해지게 되고 회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 거룩함을 경험한 깊이만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나옵니다. “영적 감각”… 시간이 많이 되어 빨리 넘어가야겠습니다. 자연적 아름다움과 도덕적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자연세계의 아름다움과 도덕적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뜻합니다.
C. 사랑의 감화
1.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가?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 “정동”이론입니다. 아름다움과 사랑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지식, 미감능력, 성령의 역사라고 했는데, 이 미감능력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미감능력은 중생을 통해서 부여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연인으로서는 그 탁월함을 알 수가 없습니다. 밑에 나오는 영적인 총명은 영적인 오성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새로운 감각이고 성령에 의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영적인 총명은 영적인 아름다움을 직관해서 볼 수 있는 성질을 가진 기능이고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으로 인한 즐거움과 기쁨은 이성의 추론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영적인 오성, 직관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이미 인간 안에 존재하고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중생과 함께 주어지고 회심 속에서 이것들이 실제로 자신이 의식할 수 있도록 활동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감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떤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진짜 재수가 좋았다고 이야기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사건을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여기 나오는 건물은 에드워즈가 노샘프턴 교회를 떠나서 인디언 선교사로 봉사며 머물던 사택입니다. 사랑의 감화를 불러일으키는데 어떻게 불러일으키느냐? 에드워즈는 사변적 지식과 실천적인 지식이 있다고 보았는데 실천적인 지식은 쓸모있는 지식이라기보다는 영적지식이고 초월적으로 사물을 알고 영적이고 경험적인 결과를 자신에게 적용한 지식이고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획득하여 자기화 된 지식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이런 것이 전달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실천적인 지식을 주는 원인이 됩니다. 여기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동이론라는 것이 나옵니다.
정동이론은 아주 복잡한 지성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거두절미하고 설명하자면, 여기 까만 것은 돌멩이 입니다. 큰 돌멩이가 위에서 호수로 떨어집니다. 호수에 떨어지면 물결이 일어납니다. 그것처럼 우리 마음의 호수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떨어지면 그것이 출렁거리면서 우리의 정을 흔듭니다. 이것이 Affection 입니다. 그것이 사랑일 때 이 정동은 엄밀하게 말하면 애호의 정동과 오혐의 정동이 있습니다. 애호의 정동은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면 감정이 출렁거리면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추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 정나미가 떨어지면서 미움이 출렁거립니다. 이것을 에드워즈는 사물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우리의 마음에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이것이 우리에게 그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발생시켜서 우리 속에서 그것이 지속적인 성향이 되게 만드는지를 아주 탁월한 방식으로 설명했습니다. 어떤 청교도들 조차도 이런 식으로 완벽하게 설명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감정론>은 읽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쉬운 책은 아닙니다. 비판할 부분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가이드를 받으면서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에드워즈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명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대한 경험은 반드시 은혜로운 정동을 가지고 온다.” 정동은 밖에 있는 아름다운 것이 우리에게 전달되어서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게 만드는 내적인 조건이 정동입니다. 에드워즈의 조건대로라면, 여러분이 설교할 때 하나님에 관해서 아름다운 것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전달하야 합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아주 명확하게 전달해야 하고 전달받은 사람의 마음속에 떨어져서 정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신령한 경험이 일어나고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은혜로운 정서를 불러일으킬 때 그때 그는 그 설교를 듣고 나서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들을 하나님이 성령으로 역사하심으로 이 일들이 가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온 사람이 가장 훌륭한 설교자입니다. 그것을 가장 아름답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 그가 설명할 때 성령이 역사하시는 사람, 그것입니다. 나중에 책에서 읽어보십시오.
2. 왜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는가?
마지막으로, 왜 하나님이 아닌 것을 사랑하는가? 에드워즈는 이것을 이기심이라고 보았습니다. 사실 이것은 너무 간단한 분석입니다. 이에 비해서 어거스틴은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지성적인 요인과 의지적인 요인입니다. 지성적인 요인은 “수페르비아”, 교만입니다. 교만 때문에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게 된다. 교만은 하나님의 판단보다는 자신의 판단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와가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먹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판단보다는 내 판단이 더 옳다고 생각하고 범죄를 합니다. 의지적인 요인은 자기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 지성적이고 의지적인 요인에 의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을 에드워즈는 뭉뚱그려서 이기심이라고 했습니다.
에드워즈는 selfishness, 이기심이 사적인 사랑, 사적인 정동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랑의 동기와 마지막 수혜자가 자기 자신입니다. 사랑이 목표하고 있는 것이 자기 만족입니다. 어거스틴은 사회적인 사랑이 있고 사적인 사랑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회적 사랑은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라틴어로, “아마레 데움”, “하나님을 사랑함” 인데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레 데오”(탈격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하나님이 “네 이웃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니까 내가 그냥 그 사랑을 받기만 했다면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지 못했을 것인데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그 사랑 속으로 불러들이십니다. 그것이 사회적 사랑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성경 속에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즘 “자기애”에 대해서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어떤 대담한 설교자는 설교시간에 자기를 사랑하라고 설교를 하기도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담하게 설교합니다. 당연히 논리는 없습니다. 거기에 무슨 논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자애”라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자애의 가르침이 필요 없는 이유는, 에드워즈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자신이 가장 완벽하게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만 누구에게도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 것. 이것이 완벽한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어떠한 나쁜 사람이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누구에게 사랑을 받지 않아도 외롭지 않은 사람,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이 사랑의 덕을 완성한 사람입니다. 마지막 문장이 이해되십니까? 이 세상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만 아무에게도 사랑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한 사람, 이것이 에드워즈가 말한 사랑의 이상입니다.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애가 필요없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라는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어디에 나옵니까?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 이렇게 소극적으로 이야기하지 “네가 사랑을 받아야 한다.” 이런 말은 성경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완벽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IV. 에드워즈에게서 배우다
에드워즈의 신앙은 사랑의 신앙입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모든 인류를 포함하고 마지막에 하나님께로 회기하는 우주적인 사랑 안에 인류를 두게 하는 것이 성경적 이상이라고 보여준 것입니다.
지식의 신앙입니다. 에드워즈의 신학은 이런 이론입니다. “정확한 지식을 전달해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의 전달 없이는 아무 데도 성령의 역사는 없다.” 오히려 그보다 100년 앞서 살았던 존 오웬 같은 분의 경우는 철저한 개혁주의자입니다. 존 오웬은 아예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 없이, 말씀의 깨달음이 없이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신뢰할 수 없다.” 더 심하게 이야기해서 “그것은 마귀의 역사이다.”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영의 역사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개혁주의의 성경론입니다. 성경을 축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신사도주의 같은 것들이 올바르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듯 아름다움의 신학입니다. 인간이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에 즐거워하면서 마지막에 죽는 것입니다.
정동의 신학입니다. 지난주에 어떤 목회자가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천국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이 성장한다고 목사님께서 설명하셨는데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다른 것 같습니다. 천국에서도 우리의 지식과 사랑은 영원히 성장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천국이 어떻게 기쁨의 나라가 되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게 됩니다. 매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보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Everyday, 매일매일, Day by day.
조화의 신학입니다. 마지막에 에드워즈의 이런 신학들은 다변화되는 시대에, 서로 이해관계가 얽히는 이런 시대에, 질시와 반목이 유행하는 시대에 그 사람들이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에드워즈의 신학은 오늘날에 적용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