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 1
녹취자 : 김미현
이렇게 바쁘신데 저를 불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강의를 드리려고 하는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아마 들어보신 분들이 대부분이실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신학자, 철학자, 교육학자, 문학가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람이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 운동, 역사적으로 1740년부터 있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 운동과 관련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들 중 특별히 영적인 부흥에 관한 이야기들이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특히 이분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이미 1975년 이전에 철학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 사람이 부분적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알려졌지만 그 때 철학자로서 알려졌고 그러다가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로마서 강해를 우리나라에 소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로이드존스 목사님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쳤던 유명한 멘토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을 이분이 극찬하기를 ‘청교도들을 알프스 산맥이라고 부르고 종교개혁자들을 히말라야 산맥이라고 부른다면 (루터와 칼빈 같은 사람들입니다.) 자기는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산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할 정도로 극도의 칭송을 아끼지 않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분이 1740년부터 미국에서 일어나는 유명한 제 1차 대각성 운동으로 이어지는 그 운동의 주도자였기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 할 때에는 항상 그의 대각성 운동, 영적인 부흥, 커다란 성령의 역사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소개가 되었고 그래서 교파를 막론하고 칼빈주의적인 장로교회에서 부터 시작해서 순복음교회에 이르기까지 아주 폭넓은 관심을 가지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알려졌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의 세계는 워낙 방대합니다. 거의 지금 현재 예일 대학에서 나온 책으로만 8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이 28권정도 되고 아직 발간되지 않은 미간행 원고까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모두 읽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제가 한 20년 동안 이 책을 읽었는데 서너권 빼놓고 모두 읽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분량과 필체, 300년이 넘는 간격이 있는 영어,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는데 커다란 장벽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알려진 것보다 폭넓은 그런 가능성과 적응성을 가진 인물이라는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왜 조나단 에드워즈가 오늘날에 와서 각광을 받게 되었는가?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 지금 현재 전 세계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연구 붐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국, 미국은 물론이고 캐나다, 영국, 구라파, 유럽, 루마니아, 심지어 한국, 일본, 중국에서도 조차 그리고 저쪽 세르비아나 러시아 같은 데서도 조나단 에드워즈의 연구 붐이 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오늘 오후에도 계속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을 펼쳐보면서 더 연구를 하겠습니다만 조나단 에드워즈가 오늘날 이처럼 폭넓은 재조명을 받으면서 연구의 부흥이 일어나는 이유는 오늘날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전통적으로 도식화되어 왔던 신학들이 한계를 가지고 있는 데에 비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은 이런 현대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무엇인가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런 한 예가 오늘날 21세기에 들어와서 신학자들은 거대한 회전을 하면서 60년대 70년대에는 성령론과 교회론을 중심으로, 80년까지 90년대에 와서는 성경론을 중심으로 문예적 해석들이 각광을 받게 되었는데 2000년대에 와서는 신학의 커다란 관심사가 신론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신론 중에서도 세 위격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한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가 하는 삼위일체 문제로 관심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교회 안에서, 사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끊임없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문제,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질서에 대한 믿음 보다는 개별적인 자유에 대한 갈망들이 폭발하고 분출하면서 사회에서 수많은 갈등들이 분출이 되는데 교회는 이러한 현실의 문제에 대해서 어떤 답을 가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아직 여러분이 살고 계신 중국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중국은 17세기, 18세기까지 만해도 서양 사람들에게 유토피아였습니다. 서양에서 중국을 바라볼 때에는 ‘이 나라는 모든 백성이 철학을 하는 나라이고, 황제는 철학자 중의 철학자이고, 모든 나라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은 예이다.’ 이렇게 구라파에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들으시면 놀라시겠지만 중국 사상이 유럽에 이미 일찍 알려졌고, 17세기 후반에 와서는 중국에 있는 거의 모든 철학서들이 영어로 번역이 되고 구라파 사람들이 읽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시경, 역경, 논어, 주역, 춘추 다 읽었습니다. 그래서 물론 그것을 비판도 하지만, 그러나 이제 괴테나 아담스미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철학자들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중국 철학에 심취하게 되었고 이것이 서양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심지어는 넬스 보어가 1927년에 수립했던 양자역학에 관한 새로운 발견도 사실은 주역을 연구하면서 쾌거를 이루어내게 됩니다. 그러던 사회였는데 지금 보면 급격한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을 하면서 사회에서 한국이 예전에 겪었던 똑같은 내용들을 국가적으로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각개 각층마다 욕구가 분출하고 여기에서 수많은 갈등들이 생겨나고 그 동안에 잠재되어 있던 인종간의 문제들도 표면화 되어서 쿤밍에서 본 것 같은 그런 급격한 과격한 테러들이 일어나고 아직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항공기 납치와 폭발사고 같은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중국의 현실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에 대해서 목사인 우리들의 의무는 신학을 하는 사람들의 의무는 기독교와 성경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그리고 어떠한 해결책이 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는가? 그 답을 가지고 우리가 정치가가 아니니까 그것을 폭압적인 방식으로 사회에 적용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그러한 완전한 모든 사람들 속에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도록 성도들을 가르치고 훈련하고 배운 대로 성도들이 사회에 나가서 살게 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로 설명을 드리면 ‘조나단 에드워즈를 우리가 귀중한 시간에 네 시간이나 걸쳐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의 네 시간 동안의 강의는 적어도 20년 동안 조나단 에드워즈를 연구하고 또 조나단 에드워즈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과 소통하고 그런 속에서 학문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같은 목회자로서 어떻게 이 사회를 하나님 나라가 오게 할 수 있는가라는 실천적인 관점에서 고민한 내용들을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마 여러분이 20-30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네 시간 동안의 강의를 듣는 것이 훨씬 더 커다란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과 현대 사회에 대한 전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단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에드워즈는 1709년 10월 5일에 코네티컷 이스트윈저에서 티모시 에드워즈와 스토다드 에드워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스토다드 에드워즈가 어머니인데 이분의 아버지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솔로만 스토다드라고 하는 당시 미국의 거물 목회자였습니다. 그 다음 보시면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태어난 생가이고 지금은 이것보다 약간 수리가 되긴 했는데 제가 갔다 왔는데 있습니다. 지금은 조나단 에드워즈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저 집을 사서 살고 있고 푯말에만 조나단 에드워즈가 살던 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1703년생인데 13살 때 당시 코네티컷 대학 나중에 이 대학이 예일대학이 되는데 여기에 입학합니다. 그리고 엘리샤 윌리엄스라는 사람의 지도를 받는데 이 사람은 천재, 수재였습니다. 3살 때부터 자기의 생각하는 바를 글로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섯 살 때 곤충에 관한 작은 에세이를 쓰고, 8살 때에는 유물론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 밝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히브리어, 희랍어, 특별히 라틴어를 아주 잘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 언어를 아주 능숙하게 하는 가운데 열세 살에 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정확히 4년 후에 학사 과정을 마쳤는데 수석으로 졸업을 합니다. 그리고 졸업식 대표로 연설을 했는데 그냥 영어가 아니라 라틴어로 연설을 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21년에 대학원에 들어가고 깊은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원래 이 사람이 알미니우스 주의자였습니다. 그러다 건강이 안 좋아서 말을 타고 산책을 하다가 영광의 하나님을 만나는 깊은 경험을 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고 거룩하시며 자기는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것을 체험하면서 그러면서 칼빈주의자로 돌아서게 됩니다. 22년에 맨하탄 장로교회에서 목회를 하기 시작하고 여기 나오는 리졸루션, 영적일기, 미셀러니, (아주 중요한 작품입니다.) 이런 작품들을 저술하게 됩니다. 이런 저술들은 한 번에 끝난 것이 아니라 몇 십 년 동안 계속 씁니다. 일기도 매일매일 쓴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깨달음이 있을 때 하나 쓰고 몇 달 있다 하나 쓰고 하면서 일평생 씁니다. 그리고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교수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가 약관 20살이었습니다. 그리고 26년, 그 후에 메사추세츠 노스햄튼 교회의 부목사로 초빙을 받습니다. 여기가 이제 솔로몬 스토다드, 외할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였습니다. 27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1927년에 세라 피에르 폰트와 결혼을 합니다. 세라 피에르 폰트는 영국 미국의 유명한 청교도 지도자인 토마스 후커 엄청나게 유명한 집안의 증손녀였고 제임스 피에르 폰트의 딸이었는데 아주 경건한 자매였고 제가 기억으로는 19살 에드워즈가 13살 자매에게 청혼을 합니다. 그래서 아주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시무했던 노스햄튼 교회입니다.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이런 책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에서 노스햄튼 교회에서 20여년 목회하다 떠나게 됩니다. 떠나게 된 사건은 신학적인 문제였는데 당시에 노스햄튼 교회는 동부에게 제일 큰 교회였고 에드워즈 목사님에게 최고의 사례를 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성찬의 문제, 조나단 에드워즈는 진실로 자신이 회심하고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성찬을 받으면 안 된다. 그런데 솔로몬 스토다드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던 관행은 그냥 예수 믿는 집안의 아이이면 회심이 불분명해도 반쯤은 언약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언약에 기초해서 성찬을 주어도 된다. 이런 견해가 실행되어 왔었는데 에드워즈가 이것을 거부하면서 교인들과 갈등관계에 접어들게 되고 결국 조나단 에드워즈가 20여년 만에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아이가 11명이나 있었기 때문에 생계도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지만 인디언 선교회에 들어가서 인디언들을 선교하는 일에 헌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오늘로 말하자면 프린스턴, 지금 뉴저지의 프린스턴 대학의 초대 총장으로 초청을 받습니다. 처음에 거절하다가 나중에 가게 됩니다. 가신지 얼마 안 되서 당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천연두 예방 접종을 당신 스스로 시범적으로 맞습니다. 그것이 부작용을 일으켜서 결국은 아깝게 56세라는 나이에 돌아가시게 됩니다. 너무 사랑했는지 그 부인도 같은 해에 필라델피아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여기 왜 등장하느냐하면 이 분이 원래 의사였는데 소명을 받고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설교자로 들어가시게 됩니다. 이분은 신학공부를 안하셨습니다. 스스로 목사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강해를 이분이 1979년도인가 1980년도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직전부터 로마서강해가 우리나라에 나오게 됩니다. 우리나라에 오신 적은 없고 그러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통해서 책들이 많이 알려지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한국에 소개되었습니다. 이것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입니다.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우리나라에 알려지게 된 것은 다분히 다른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영적인 각성과 부흥, 이런 것들을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면모 중에서 아주 지극히 작은 한 부분, 우리가 좋아하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부분만 아주 확대해서 알려져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죄인을 집어삼킬 듯이 폭발적으로 설교하는 사람, 성령의 역사, 부흥, 거리의 설교자들이나 이런 사람들을 양산해낸 부흥의 원조, 이런 식으로만 소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사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체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리차드 백스터입니다. 우리나라에 리차드 백스터라는 사람이 소개가 되었고 회심, 성도의 영원한 안식, 청교도의 소망, 이런 책들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키드민스터에서 목회를 하신 분인데 굉장히 고결한 분이셨습니다. 신학사상은 칼빈주의가 아니라 알미니우스주의자였지만 이분은 사실 당시에 대학을 나오지 못한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열심히 독학을 하셔서 당대의 신학자들과 논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성도의 영원한 안식, 특히 참된 목자, 청교도의 소망 이런 등등의 책들로 널리 알려졌는데 그것으로만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리차드 백스터에 대한 인상은 열렬하게 부지런히 살고 회개를 외치고, 부흥을 설교하는 이런 분으로만 알려졌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은 지금 현재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들로는 그것밖에 안 나왔지만 영어로는 디렉토리라고 하는 네 권으로 된 프락티칼 떼올로지라고 하는 네 권으로 된 목회백서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책들이 있고 그 책만 읽어보아도 굉장한 성경에 깊이가 있는 주석가이고 목회의 실천적인 문제부터 시작해서 철학적인 문제까지 깊이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특히 이분은 사상적으로도 굉장히 깊은 철학적인 깊이를 가지고 있어서 17세기 청교도들과 철학을 이야기함에 있어서도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하는 인물입니다. 특히 르네상스 이후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 캄페말라의 영향을 받아서 새로운 방식으로 신학을 전개한 깊이 있는 철학적 신학을 추구했던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무시되고 어느 한 부분만 부각된 것이 마치 리차드 백스터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그렇게 전달되어 있기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깊은 전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느냐하면 저는 사실 조나단 에드워즈를 잘 몰랐고,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통해서 책을 읽으면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알게 되었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적 배경이 영국의 청교도라는 것,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믿으려고 했던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이런 정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그 당시에는 제가 신학대학원을 막 졸업한 때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고 해서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이 도서관에 가보니까 배너 오브 트루스라고 하는 영국의 출판사에서 아주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두 권으로 되어서 에드워즈의 모든 저작들을 묶어놓은 책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인터넷 아마존에 들어가면 아주 싼 값에 살 수 있습니다. 15만원이면 살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볼 수가 없습니다. 돋보기를 써야 볼 정도로 깨알같이 작은 글씨입니다. 처음에 두 권을 샀습니다. 사서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기 시작했는데 저 역시 그 때는 학문이 일천했던 수준이어서 일단 조나단 에드워즈를 보면서 그때 저는 청교도와 부흥 이런 것들에 깊이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관련된 부분을 찾았습니다. ‘1740년대에 어떻게 부흥이 일어났고 그 부흥이 일어난 것과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역이 어떤 관계에 있었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 부흥을 어떻게 어거해 갔는가?’ 그런 것들이 관심사였습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들이 쓰여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몇 가지 책을 소개하면 놀라운 회심이야기, 우리말로도 번역되었습니다. 놀라운 회심의 표지, 부흥에 관하여, 이런 몇 몇 권의 책들이 그 당시에는 번역이 안 되었을 때인데 그 때 거기 나오는 기록들을 보면서 ‘어쩜 이렇게 내가 경험한 부흥과 너무나 똑같고 어떤 면에서는 1907년에 평양에 일어났던 부흥과 너무 유사한 부흥이 1740년대 미국에서 일어났구나.’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마음이 많이 뛰었고 그 다음부터 조나단 에드워즈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의 책 속에서 많이 인용했습니다. 예일 대학에 가서 교수들과 만나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누구인지 알게 된 것은 사실은 나의 영향도 굉장히 크다. 왜냐하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로마서 강해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말씀 하셨지만 그 후에 내가 그것을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 중에서 특별히 부흥과 이것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내가 이후에 쓴 모든 책에서 거의 한 번도 빠짐없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인용했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이나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었던 일화들을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제 책이 약 50권 이상 나왔고 200만권 이상이 팔렸기 때문에 적어도 200만 명이상이 나의 책을 통해서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인물을 알고 스토리를 이해했기 때문에 그 책을 보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과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들을 읽었던 독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정말 이제 그 후에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 개척하기 전에는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강의하고 외부에 활동을 다니고 하느라고 조나단 에드워즈를 전체적으로 첨착 할 엄두를 못 내었습니다. 그러다 목회를 하고 목회가 어느 정도 안정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기 시작했고 20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예일대에서 나온 책을 기준으로 28권이고 그것이 700페이지만 쳐도 15000페이지 이상 되는 저작인데 그중에서 제가 생각하기에 서너 권정도 빼놓고 거의 모든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이후로 저의 목회와 생애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조나단 에드워즈를 생각할 때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거스틴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저에게 가장 커다란 신학적인 영향을 주었던 스승이 넷이 있는데 첫 번째 사람이 존 칼빈, 두 번째가 어거스틴, 존 오웬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 이 네 분이 나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어쨌든 저는 그 네 분이 남기신 저작들이 어마어마하지만 모두 읽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대부분은 읽었습니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양의 방대한 자료들을. 이것이 예일 판에서 나온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입니다. 이것은 현재 한 세트에 300만 원쯤 되는데 별로 깎아주지도 않습니다. 비쌉니다. 그런데 이것은 왜 옛날판본과 다르냐하면 50년대부터 시작해서 비평본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비평본이라는 것은 써놓은 것을 그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해설을 붙이고 글자 하나하나를 대조하면서 원래 그가 손으로 갈겨쓴 것과 비교하면서 차이가 있는지 없는지 사본 비평까지 하면서 밑에 표시를 다 붙여 놓은 것을 우리가 비평본이라고 부르는데 그런 비평 작업들을 했습니다. 온라인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센터를 치고 들어가면 한 번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작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책으로 출판되지 않은 작품들이 다수 남아있는데 그것은 저작으로서의 가치가 별로 없는 막 메모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연락을 해보니 이것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에 대한 출판은 끝났다고 얘기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 전집이 있습니다. 온라인으로는 73권인데 그 중에서 26권인데 사실은 몇 권이 1, 2로 나오기 때문에 실제 권수는 28권입니다. 엄청난 볼륨의 책입니다. 이 책이 저에게 준 영향은 굉장한 것이었고 이 시간에 다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저에게 여태까지 배운 많은 신학들이 얼마나 하찮은 지식들이었는가 하는 것을 열어준 우주적인 신학을 나에게 보여 준 그런 작품의 세계였습니다. 여러분은 그래도 굉장히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8권 같은 것이 윤리학적인 저술들인데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감히 누가 번역해 낼 엄두를 못 냈는데 부흥과 개혁사에서 번역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작은 책들로도 번역이 나오고 해서 상당히 많은 자료들이 나왔습니다. 물론 어렵습니다. 철학적인 책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공부 하신다면 여러분의 신학과 사역이 엄청난 깊이를 더하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를 별로 읽지 않은 상태에서 여기저기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 나오는 이야기들, 사람들의 칭찬이나 이런 것들을 읽을 때에는 그냥 가슴이 벅차기만 했지만 막상 이제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의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서 그 긴 세월을 탐구하다보니까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와의 아주 놀라운 사랑하게 되는 사건도 있었지만 조나단 에드워즈와 내가 원래 가지고 있고 이제껏 내가 배워온 신학 사이에 어떤 갈등 같은 것들도 동시에 경험이 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굉장히 많은 내용들이 있지만 이것들을 모두 소개해드릴 수는 없고 몇 가지면 여러분에게 간추려서 말씀을 드려보려고 합니다.
우선 조나단 에드워즈의 작품을 설명하기 이전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살았던 시대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계몽주의 시대였습니다. 계몽주의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Enlightenment'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어두움에 빛이 비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계몽주의자들이 계몽주의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자기 시대를 기점으로 해서 시대를 둘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시대는 계몽이 된 시대이고, 그 다음에 자기 시대 이전은 미몽의 시대라고 보는 것입니다. 미몽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지와 오류, 편견 따위 등등으로 명백히 알아야 할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치와 사물, 우주의 체계 등등에 대해서 판단할 때에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따라서 인간에게 바르지 않은 가치를 강요해서 인간의 존엄성과 본성에는 어긋나는 삶을 살게 하였던 시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계몽주의는 18세기입니다. 그래서 계몽주의는 정확하게 18세기, 그러니까 1700년대 이후를 가리켜서 계몽주의 시대라고 얘기하지만 이 계몽주의의 개벽을 알린 사람은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이미 17세기에 소위 얘기하는 인류역사의 유명한 “꼬기또 에르고숨”(cogito ergo sum)이라는 유명한 명제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던짐으로서 계몽주의의 새 시대를 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꼬기또 에르고숨”(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 명제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기에 그 한마디의 명제로 한 시대가 미몽의 시대 또 한 시대가 계몽시대라고 구분지어질 수 있느냐?’ 이런 의문을 우리가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잠깐 역사를 되돌아가보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맨 처음 초대 교회가 있고 그 다음에 사도들의 시대가 끝나고 속사도 시대에 접어들게 됩니다. 속사도 시대가 끝나게 되면 로마의 정치적인 박해가 끝나고 사상적인 박해가 시작되는 2세기에 접어들게 되고 이 때 로마의 박해는 정치적이 아니라 사상을 가지고 박해하면서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들이 날조라는 것을 말하자면 만천하에 공개함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선교적인 열정을 불식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흠뻑 먹고 아주 고도의 지성을 지닌 천재들을 예수 믿는 사람이 되게끔 회심시키셔서 그들이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사상적인 박해를 받고 있는 기독교의 변증을 위해서 헌신하게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오리겐, 키프리아누스, 테르툴리아누스, 이레네우스,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 때부터 기독교가 아주 정교한 학문적인 작업을 통해서 커다란 사상의 체계를 세워가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받들고 믿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인 내용들이 구체화 되어서 학문으로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때가 이때였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4세기, 5세기경에 이제껏 본적이 없는 아주 걸출한 인물 하나가 나오게 됐는데 이분은 정말 천재였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어거스틴이라는 인물입니다. 일찍이 마니교에 빠져서 방탕한 세월을 보냈던 이 사람이 결국은 회심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이 사람이 플라톤의 사상으로 단련되고 익숙해진 이 사람 속에 그리스도를 통한 회심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자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유대 역사를 바라보는 새 눈이 열렸던 사도 바울처럼 사울처럼 똑같이 이 세계의 역사와 구속의 역사가 한 번에 전개되고 그러면서 이 사람이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을 쏟아내게 됩니다. 약 260권 정도의 책을 쏟아냅니다. 31살에 회심해서 76세경에 죽을 때까지 마지막 신국론을 쓸 때까지 약 260권의 책을 쓰게 됩니다. 분량은 어마어마한 분량입니다. 이 사람이 태어나고 이 사람과 함께 중세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때는 이미 기독교가 공인이 되었고 그러던 시대였고 동 서방 교회의 분열이 있었고 그리고 이제 이 사람 사상이 중세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12세기에 그 사이에 이제 유명한 신학자들이 등장을 하게 됩니다. 안셀무스, 피터 롬바르두스, 힐러리, 이런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을 하게 되고 12세기에 이제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는 신학자가 등장을 하게 되고 이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용해서 기독교 철학 전체를 가지고 하나님과 우주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을 내놓음으로서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의 완성적인 형태를 보여줍니다. 모든 이교도와 세상의 철학 사상에 대항할 수 있는 그런 체계들을 갖추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사용된 것이 스콜라주의라고 하는 것이고, 스콜라주의시대가 끝나고 나서 13세기에 사상적인 엄청난 붕괴의 시대를 접어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10세기에 있었던 십자군 전쟁과 관련이 되고 십자군 전쟁에서 이 사람들이 가서 개, 돼지만도 못한 이슬람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기들보다 훨씬 아름다운 문명과 문화를 구가하면서 산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 원인이 무엇인가 했더니 자신들이 못 읽게 금지해서 폐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초로 화려한 학문을 쌓아 그것을 기독교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12세기 화려한 스콜라주의 신학이 서게 되고 그것이 끝나면서 각종 로마의 극단적인 부패 현상들이 12세기 말, 13세기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13세기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카톨릭 안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입니다. 수도원 운동이라든지 이런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여러분이 잘 아는 아시시의 프란시스 운동, 이런 운동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운동이 결국은 성공했더라면 종교개혁이 안 일어났을 텐데 실패합니다. 실패하고 교회는 점점 부패해지게 되고 그러면서 14세기에 피렌체를 중심으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메디치와 메디치의 가문, 거기서 불과 몇 십 년 동안에 30명에 달하는 세계 역사에서 내로라하는 최고의 천재들이 폭발하듯이 쏟아져 나오면서 문학과 예술, 공예, 건축, 이런 것에 있어서 신기원을 이루게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을 움직인 중심적인 사상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에 대한 교회의 부당한 속박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 그래서 인간은 그 당시에 이제 피코 델라 미란돌라라는 유명한 사상가가 있었는데 엄청난 부자고 귀족이었는데 평생 공부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26살인가 29살에는 세계 모든 학문을 자신은 통달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종교를 막론하고 모든 철학자들은 모여라. 나와 논쟁하자.’ 그럴 정도의 패기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남긴 유명한 자료 가운데 ‘인간존엄성에 관한 연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 아담을 창조하실 때 무엇도 미리 결정하시거나 제한해 놓지 않으셨다. 세계는 창조되었고, 세계는 아담에게 맡겨졌고, 아담은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종교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무신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하면서도 부당한 종교적인 박해와 인간에 대한 억압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가져다준다. 그런 사상이 먼저 문학, 그 때 대표적인 사람이 단테입니다. 단테나 보카치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표현되고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 이런 화가들에 의해서 부르넬리스키 같은 건축가들에 의해서 이런 인본주의가 구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술로 번진 운동은 이제 이 피렌체에 어마어마한 부, 그 당시에 피렌체에서 만드는 돈이 유럽의 기초통화였습니다. 그러니까 피렌체는 대부업을 통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고 그 사람들이 메디치 가문에서 헌신적으로 자신들이 번 돈을 피렌체를 위해서 사용합니다. 피렌체는 flower, 꽃이라는 뜻입니다. 어마어마한 예술가들을 불러서 충분히 돈을 주면서 소신껏 예술 활동을 하게 함으로서 인류 사회에 길이 남는 어마어마한 작품들이 생산이 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은 메디치 가문과 잘 지내지 못해서 결국 프랑스에 살게 됩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렇게 하면서 이제 어마어마한 말하자면 예술과 문학의 발전을 이루어내는데 그 모든 예술과 문화의 발전의 핵심에 무엇이 있었느냐하면 ‘이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리고 신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신은 인간의 자율과 자유, 존엄을 해치는 포악스러운 신일 수 없고, 더욱이 믿는 것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잡아다가 창으로 찔러 죽이고 불로 고문을 하는 그런 무지막지한 더러운 신은 아니다.’ 그런 사상입니다. 이러한 르네상스 사상이 예술에서 분출되고 시작되었다가 이제 이것이 구체적으로 학문적인 형태로 사상으로 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이것들이 이탈리아 북부를 중심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남부에서는 예술이 일어나고 그 예술이 퍼져나가면서 정신들이 소개되면서 북부에서는 그것을 분석하면서 구체적으로 지적인 작업을 통해서 이것이 의미하는바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이론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이때에 대학들이 하버드와 같은 대학입니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사조를 가리켜서 우리들이 인문주의라고 부릅니다. 13세기에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그리고 14세기 말에서부터 인문주의 운동이 번지는 것입니다. 인문주의도 이야기하면 길지만 인문주의의 특징은 인문주의라고 하는 것이 휴머니즘입니다. 그러면 인간주의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휴먼,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이제 휴머니즘의 사상을 가지고 인간이 모든 사물들의 중심에 오는 이런 시대가 있었는가 하고 돌아보니까 그 때가 그리스 시대입니다. 그리스가 폴리스로 머물러있던 시대였습니다. 그 때에 이 사람들이 인간적인 존엄성을 인정받고 살았던 시대였습니다. 중세까지 미술, 그림이라고 하는 것도 별로 없고, 있어도 천사들 모양이거나 아니면 성경에 나온 인물들이 검은 옷을 입고 있거나 성경이 나오거나 했습니다. 르네상스가 되니까 갑자기 벗은 사람들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옷 다 벗고 튀어나오면 우리는 포르노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사람들이 그렇게 관능적인 그런 사람들이었구나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면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르네상스 이전까지는 인간이 무엇의 중심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고 인간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그림에 있어서도 주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상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인간이 중심입니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꼬기또 에르고숨(cogito ergo sum)이라고 얘기한 것은 꼬기따레라고 하는 말은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의심한다는 말입니다. 생각하되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비판적으로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것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확실한 것이 하나 있는데 나라고 하는 사람이 지금 무엇인가를 의심하고 있다는 이 사실이다. 이것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 그것이 이제 데카르트의 명제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모든 것은 다 의심스러운데 마지막에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의심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니까 나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인문주의의 근대적인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제 계몽주의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계몽주의가 이루어지고 그 계몽주의가 발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인문주의가 이루어지고 인문주의가 이루어진 다음에 그것을 흠뻑 물을 먹고 먹은 많은 수도사들과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 물을 다 먹고 눈을 떠서 보니까 교회가 너무 개판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배의 모습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당시 인문주의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기독교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인문주의를 받아들여서 새로운 사고를 갖게 된 사람들과 아예 이참에 하나님의 존재를 마음속에 지워버리고 인문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 인문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거기에 심취한 모든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종교개혁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다 이런 충분한 사상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 때에 계몽주의 사상을 가지고 카톨릭과 대항했던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에라스무스 같은 사람입니다. 루터도 바로 그런 계몽주의, 기독교 인문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칼빈이나 블링거, 쯔빙글리 할 것 없이 당대 걸출했던 모든 종교개혁의 지도적 인물들이 이 인문주의를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계시다. 기독교가 잘못 되었다.’가 아니라 로마 카톨릭 교회가 오늘날 누리고 전행을 휘두르고 있는 이 많은 권위들이 얼마나 하나님이 의도 하시지 않은 그들 마음대로 만들어낸 근거가 없는 권위였는가를 깨닫습니다. 그것에 대해 거부하는 운동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1517년에 비텐베르그의 95개 조항을 통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종교개혁이 결국은 16세기에 시작되어서 1517년에 시작되어서 거의 다 마무리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17세기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 때 17세기 중반에 오면서 데카르트라는 인물이 나타나고 이제는 기독교 인문주의에 만족하지 않는 보다 레디컬 한 극단적인 계몽주의가 일어나게 됩니다. 인간이 모든 사고와 가치판단의 중심이다. 그래서 이 인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상이 확고하게 생기기 시작하면서 그러면서 펼쳐지면서 18세기의 계몽주의 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더욱이 18세기에는 이미 이제 과학이 상당히 발전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는 인간이 무엇을 발견해도 사실 신뢰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데카르트 이후로 인간의 이성이 믿을만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서부터는 자신들이 발견한 과학과 학문에 대한 사실들을 인정하게 되고 여기에 엄청난 기폭제역할을 했던 사람이 뉴턴입니다. 뉴턴이라는 사람이 아이작 뉴턴이라는 사람이 천재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사과가 떨어지는 사건을 보면서 만류인력의 법칙을 찾아냅니다. 이 사람이 사실은 미분과 적분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라이프니츠라는 사람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먼저 발견하고 발표를 안 하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발표하니까 ‘내 것 베꼈다.’ 하고 싸웠는데 알고 보니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 이 사람은 이 사람대로 찾았습니다. 뉴턴이 괄목할만한 책을 한 권 쓰게 됩니다. 자연세계의 수학적 원리라는 책입니다.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자연현상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은 정확한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고 이것은 수학적으로 모두 설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 때 받은 인류의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당장 의심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왜 갑자기 천둥이 치고 번개가 올까? 하나님이 진노하셨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음전기와 양전기가 일정량이 만나서 번개를 일으키는 것이고 소리가 나는 것이고 구름이 모이고 얼마큼의 구름이 모이니까 얼마큼의 비가 떨어지고 물방울의 크기가 얼마이니까 떨어지는 속도가 얼마이고 한 시간 평균 얼마가 내리니까 지면에 얼마가 쌓이고 모두 수학적으로 계산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머리가 확 열리면서 어마어마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계몽이라고 얘기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생입니다. 이런 일들이 이미 대륙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학문 활동을 하던 20년대쯤에는 이미 벌써 계몽주의가 무르익어서 영국에는 이미 산업혁명이 시작되어서 엄청난 과학의 발전을 이루면서 시골 뉴잉글랜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문명의 건설을 추진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이러한 사상들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하나님은 없거나 저 하늘에 계실 뿐이다. 인간은 절대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이다. 인간에게 행복한 것이 선한 것이고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나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에 의해서도 속박 받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성령님이 역사해 주시지 않으면 착한 일을 할 수 없고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런 사상이 모든 학문과 종교, 그리고 심지어는 성경해석에까지 광범위하게 쓰나미처럼 밀려와서 그래서 누구도 여기에 항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영향력이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던 시대였고 거기에서 수많은 미국의 학문과 지성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올곧은 신앙을 고수해왔던 사람들조차도 이 깃발을 내려놓고 당시의 현대사상에 굴복하며 성경의 진리와 현대적인 사상의 조류들을 타협시킬 수 있는 길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었던 절체절명의 시기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