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3.12 중국 성도
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2
녹취자: 김미영
그 다음의 책이 에드워즈의 과학책과의 관한 책입니다. 이 책은 원제목이 Scientific and Philosophical Writings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이게 Scientific and Philosophical 그러니까 우리들이 과학과 철학에 대한 이야기구나 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사실 그 당시에 philosophy of science 라고 하는 것은 과학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다만 과학적인 사실들을 신학자로서 발견해내고 발견한 그것을 신학적으로 해석을 해내는 작업들을 한 것입니다.
에드워즈 당시에 말하자면 뉴턴주의는 새로운 신세대의 학문적인 사조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뉴턴주의는 과학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과학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영향을 주어서 우리들이 발견하는 어떤 사실들이 사회적 사실이든지 자연적 사실이든지간에 원인과 결과의 아주 긴밀한 인과관계로 이어져있고 그것들은 엄정한 학문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예전에 신비하게 미지의 영역으로 가려져 있던 많은 부분들이 사실 이제 뉴턴주의를 통해서 인간이 탐구하면 명백한 사실로써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파악될 수 있다고 하는 자신감들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이와 같은 계몽주의 내지는 과학주의 사고에 맞서서 그런 과학주의가 일반적이 되면 일반적이 될수록 하나님이 이 세계 안에 역사하시고 개입하실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고 생각하던 당시의 사람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과학적으로 인간들이 발견한 사실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을 가함으로써 과학적인 인간의 발견과 이 세계 안에서의 하나님의 존재가 모순된 명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과학철학은 자연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자연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고 뛰어난 관찰자였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자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능력, 충만한 아름다움,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드러내신다는 신학적인 확신을 가진 것입니다.
이제 동영상 하나를 보겠습니다. 원래는 동영상인데 천둥과 번개가 잉글랜드의 평지에서는 굉장히 많이 치고 토네이도 같은 것들도 불잖아요? 그런 자연현상을 보면서 에드워즈가 그런 고백을 합니다. 일기 속에서 이랬습니다. ‘나는 자연의 모든 역사 중 천둥과 번개만큼 그렇게 달콤한 것은 없다. 나는 천둥을 몹시 무서워하는 사람이었고, 뇌우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공포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로 그것이 즐거움이 되었다. 나는 뇌우가 시작되면 하나님을 느낀다. 그래서 그런 때에는 구름에 시선을 고정하고 번개의 연주를 보면서 장엄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천둥 음성을 듣는 기회를 가지곤 한다. 그것은 종종 나를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에 대한 달콤한 묵상으로 인도하는 엄청난 즐거움이 된다.’
회심하기 전까지는 이러한 현상들을 굉장히 무서워했는데 회심하고 난 다음에는 자연의 세계 속에서의 이런 기이한 현상들이 모두 하나님이 만물위에 얼마나 높고 뛰어난 분이신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신지를 전달해주는 하나의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연의 세계 속에서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큰 유익이요 즐거움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소위 이야기하는 우주적 미학의 신학은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장 풍부하게 자기의 신학을 통해서 펼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알고 있는 찬송가
(찬양)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 알 수 있어요
그런 것들은 바로 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연의 이 세계 자체가 하나님이 당신을 보여주는 그림책 같다는 사상을 노래한 것이고 에드워즈는 자신의 생애에서 자연의 경애와 신비 속에서 이런 하나님의 존재 감격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사실은 이런 희미한 흔적들이 자연주의자들 속에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장쟈크 루소라고 하는 사람은 자연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교육학서인 『에밀』에서 어린아이에게 선과 악에 대해서 하루 종일 가르쳐주는 것보다 이 자연의 세계를 한 시간 동안을 쉬게 함으로써 이 아이들은 선과 악에 대한 좋은 이해를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선 그 루소에 대한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오늘날 우리들이 자연 세계에 대한 모든 설명은 다윈을 비롯한 진화론자에게 내어줘 버리고 그래서 결국은 진화론에 세뇌된 아이들이 마지막에 이 세계 과학을 배우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어떠한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도 유사하게 그런 생각을 뉴턴의 영향을 받으면서 했던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에드워즈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Scientific and Philosophical Writings에는 이렇게 길게 쓰여진 하나의 책이 아니라 조각조각 곤충을 관찰하면서, 물방울을 관찰하면서 나오는 해석들로 단편적으로 이루어진. 그런데 저한테는 아주 흥미진진한 책이었습니다. 아마 거의 안 읽는 책일 것입니다.
그 다음 책이 18세기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제8권이 뭐냐 하면 윤리학에 대한 책입니다. Ethical Writings라고 해서 8권이 저렇게 한 권으로 나오게 됩니다. 여기에 나오는 책이 크게 3가지인데 첫째가 천지창조의 목적, 참된 미덕의 본질,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나오는 책이 고린도전서 13장 강해, 사랑과 그 열매, 그 세권을 묶어서 제8권으로 나옵니다. 거기에 두 편의 논문과 한편의 한 시리즈의 설교가 실려 있습니다. 우선 이 두 논문은 에드워즈를 아주 유명하게 만들어 주었고, 에드워즈를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논문입니다.
첫 번째 천지창조의 목적은 짧은 시간에 설명할 수 없지만 대충 내용이 이런 얘기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될까?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 하실 일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슨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을까? 인간의 창조의 목적은 세계를 창조한 목적에 수렴되고, 인간 각자의 각자가 태어난 목적은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에 수렴 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신 삼위의 목적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지음 받았고 인간 행복은 그 진정한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데서 성취된다.”라고 하는 것이 이 논문의 요약입니다.
이 논문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첫째는 이성적인 논증으로, 2부는 신학적인 논증으로 나옵니다. 이성적인 논증에서는 의도적으로 성경구절을 다 빼버리고 순수한 이성으로써 천지창조의 목적을 논했고, 이것은 이제 많은 철학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만든 것이고, 2부에서는 똑같은 내용을 성경을 이용해서 설명했는데 이것은 기독교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매우 어려운 논문이지만 이 논문은 아주 탁월한 논문이었고, 저에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계획, 우리가 신앙 속에서 배웠던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두껍지도 않습니다. 얇은 작품입니다. 그리고 우리말로 부흥과 개혁사에서 나온 존 파이퍼 책속에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어렵습니다. 철학적인 논문입니다. 그렇지만 매우 중요한 논문이고 유익합니다. 이것가지고 교회에서 한 여덟 번에 걸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것만 가지고도 몇 시간 해야 될 정도로 분량이 많은 내용인데 조금만 더 설명하자면 이런 내용입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에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있고, 인간을 창조했을 때에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아담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 그러시잖아요? 다스린다고 하는 그 단어가 왕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심과 모두 인간의 밥으로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 파괴하고 파먹으면서 그렇게 토색질하면서 살라고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이 사람으로 창조된 목적과 세계가 세계로 창조된 목적 사이에 일정한 목적 연관이 있어서 세계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람으로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고, 인간은 세계가 세계로 창조된 것에 이바지함으로써 인간 때문에 세계는 세계다워지고, 세계는 인간 때문에 세계다워지고, 인간은 자기 앞에 있는 이 세계와 함께 교류하면서 참으로 인간다워지는,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인간이 가꿈으로써 더 아름다워지고, 그 아름다워진 세계 안에서 인간은 더 행복해지도록 그리고 그 사람과 세계를 통해 하나님은 가장 많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이러한 삼각적인 구도 속에서 세계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결국은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되고 도덕의 기본적인 질서의 기초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우리는 동양철학을 많이 못 했기 때문에 누가 동양철학에 대해서, 특히 중국철학에 대해서 뭘 물어보면 울렁증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상식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동양철학에서는 모든 도덕의 근거가 ‘타오’, ‘도’ 로 집약이 됩니다. 우리들이 흔히 ‘도덕’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럼 이 도는 뭐냐 하면 객관적으로 있는 길입니다. 'the way', ‘덕’은 뭐냐 하면 인간 영혼의 힘입니다. 도는 도이고 그 도인 진리에 인간이 합치하려고 하는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힘이 덕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우리들이 도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사람에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고 기준만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거기에 자신을 합치시키려고 하는 내적인 순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타오’, ‘도’가 도대체 뭐냐? 도가 여기 있다고 말 할 수 있으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를 이야기하는데 도가 이거라고 규정할 수 있으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게 뭔지를 모르는 겁니다.
키케로라는 사람이 로마 역사에 있어서 아주 유명한 윤리학 책을 하나 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선과 악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Finibus'라고 불리는 책입니다. 언젠가 한 번 책을 찾아보니까 선과 악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책이 딱 나옵니다. 하버드에서 나온 클래시컬 라이브러리 속에 나오는 한 권인데 그런데 한참 도덕의 궁극적인 근거를 철학에서 뭐로 말하나 어디에서 그것을 발견을 못했으니까 그래서 너무 기쁜 나머지 미국에 주문을 해서 하여튼 책이 일주일 만에 왔습니다. 돈과 상관없이 빨리 보내달라고 해서. 오자마자 읽었습니다. 이쪽은 라틴어로 되어 있고 이쪽은 영어로 되어있는데. 다 읽고 나서 마지막 내 반응은 ‘에이 이게 뭐야’ 중국 철학에서는 ‘도’라고 이야기 하는데 키케로는 뭐라고 얘기했냐면 ‘인간본성’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책 전체에서 인간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합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이 세상 인류의 모든 철학은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이 모든 선과 악을 구별하는데 그게 뭐냐 라고 말하면 항상 이 세상의 철학은 ‘글쎄’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대표적인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당시 사회에서 죽도록 미움을 받았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당시 철학자들과 정치가들이 보기에는 아주 깐죽깐죽 거려서 사람 속을 파 놓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미움을 받아서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얼마든지 사람도 매수할 수 있고 도망칠 수 있으니까 “도망치면 됩니다.” “싫다. 내가 여기서 독배를 마시고 죽겠다. 악법도 법이다.” 그랬다는데 그게 소크라테스가 직접 그런 말을 한 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독재정권이 그런 걸 일부러 그 속에 집어넣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대화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법을 지키면서 선하게 살아야 됩니까?” 그것이 중요한 질문이잖아요? 법을 지키며 선하게 살아야 된다. 왜 인간이 꼭 그래야 됩니까? 그러나 그렇게 철저하게 법을 이야기하고 그 법대로 선하게 살아야 되겠다는 걸 강조하던 소크라테스가 갑자기 “나도 잘 몰라.” 그런데 정말인지 어쩐지 모르지만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사후의 세계가 있대. 이게 부도덕하고 악을 행하며 산 사람들에게는 아주 고달픈 심판이 기다리고 있고 올바르게 산 사람들에게는 낙원이 있대.” 결국 마지막에 선과 악의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자기도 모르는 종교적인, 소위 얘기하는 뮤토스, 신화의 세계 속으로 넘어와 버렸던 것입니다. 왜? 인간의 이성으로써 그 근원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철학에서 보여주지 못한 그것을 성경과 신학의 관점에서 그 기준이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의 의지와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증합니다.
나는 이 논문을 통해서 아주 커다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것과 쌍둥이의 논문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참된 미덕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떤 사람이 착한 행동이나 나쁜 행동을 하면 그것이 정말 덕 있는 행동이냐 아니냐는 평가를 따르게 되는데 그 평가가 천지창조의 목적에 이바지 하는 것은 'virtue', ‘미덕’이라고 부르고, 거기에 거스르는 것은 'vice', ‘악덕’이 됩니다. 그럼 그 미덕의 본질이 뭐냐?
이 두 번째 논문은 첫 번째 논문보다 더 어렵습니다.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철학을 전공하신 분들이라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마 책을 한글로 번역한 책을 놓고도 줄을 치면서 읽어도 장수를 넘기기가 굉장히 힘이 들 겁니다. 그런데 그건 어차피 자신이 평소에 철학적인 근력 운동이 안 되가지고 이해 못하는데 다른 철학책을 이해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근력을 계속 키워야 합니다. 안 키워버리면 그 다음에 설교집이나 예화집 이외에는 아무것도 못 읽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나눠준 주기도문 책조차도 벌써 어렵다고 투덜거리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그것도 어려우면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독교 본질에서 그걸 파헤치는 것입니다. 핵심이 뭐냐 하면 미덕처럼 보이는 게 곧 참된 미덕입니다. 참된 미덕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형성되는 중심점, 여기로부터 나오는 사랑의 윤리에 의해 형성되는 덕이고, 이와 비슷한 게 있는데 이런 것 입니다. 사랑 때문에 희생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남을 희생시킵니다. 사랑 때문에 사랑을 죽이고, 그런데 그건 좀 추해보이잖아요 국가를 위해서 누군가를 희생하고 장렬하게 자기가 죽어. 그건 아름다워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똑같이 사람 죽였는데 ‘이 돈 내 돈이야 임마 이 돈 니 돈이야 내 돈이야’ 그러고 싸우다가 강도 둘이서 돈을 분배하는 문제를 놓고 A가 B를 찔러 죽인 것도 살인이고 사람을 죽인 것이고,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도 죽인 건데 이것은 살인의 의미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한 사람은 말하자면 의사라는 칭호를 받고 한 사람은 살인범이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선의 혜택을 보는 사람의 범위와 관련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아주 좁아들면 좁아들수록 그 행동은 사랑이 원인이 되긴 하지만 아주 추한 사랑이 되는 거고, 이 범위가 넓고 넓으면 넓을수록 아주 숭고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드워즈의 이야기는 뭐냐 하면 그것을 아무리 확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사랑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만약에 일치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 나냐 하면 굳이 구원이 필요가 없고 중생이나 회개가 필요가 없습니다. 이기심을 파괴해서 계속 사회 동포 인류애적인 사랑을 가지면 하나님 사랑과 일치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아니다 원래 이 논문이 왜 나왔냐 하면 원죄론에 대해 논쟁을 하다가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원죄론에 대해서 논쟁을 하는데 그 당시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을 배격하고 그리고 얼마든지 인간의 자발적인 공로로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중생하지 못한 자의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들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의를 이루기에 얼마나 모자라는지를 논리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이 두 논문을 쓴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진정한 선이라고 하는 것은 충신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선이어야 하고 거기에서 비롯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선이어야 하는데 누구도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 없이는 진정한 미덕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상태를 여기서 논증한 것입니다. 우리말로 번역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읽어 보세요. 값도 쌉니다. 부흥과 개혁사에 한국에 들어가면 불과 6,7천원이면 살 수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책은 얇아도 어렵습니다. 사실 이런 거 한 권만 가지고 공부를 해야 됩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주욱 공부를 하면 머리가 터지면서 ‘아 이게 이런 거구나’ 이 책을 깨우치게 됩니다.
여러분 인간의 머리는 근육하고 똑같습니다. 중국의 어린아이들을 보면 서커스 하는데 매달려 가지고 허리가 원형으로 휘면서 자기 발로 머리를 막 피아노 치잖아요 집에서 한 번 해 보세요 안 되면 사모님한테 도와 달라 그래야 돼요. 허리를 분질러야 됩니다. 회복이 안 됩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근육은 계속해서 사용을 해야지만 근육이 운동이 되듯이 어느 날 사용 안 하는 것을 강제로 하면 뚝 소리가 나면서 인대가 끊어지거나 뼈가 아작이 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제 일반적으로 생활할 때 거의 운동을 안 하잖아요. 밥 먹고 숨 쉬기 하고 이런 정도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만 하려고 해도 벌써 두두두둑 소리가 납니다.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읽을 때 다 이해되는 책만 읽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책은 가장 좋은 방법이 뭐냐 하면 90% 이해되는데 10%는 아리까리 하면서 모르겠다는 책을 읽어야 됩니다. 그런 책을 섞어서 읽어야 됩니다. 읽고 나서도 20% 줄을 쳤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선생님을 찾아 물어보고 사람들한테 찾아서 물어보고 하면서 깨우친 다음에 ‘아 그거였구나’ 그러면 업그레이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책을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고 선교를 하고 이러다 보면 학교 다닐 때 레포트 안내면 혼나니까 할 수 없이 하지만 지금은 감독자도 없잖아요? 소파에 누워서 편하게 읽을 책만 읽는 겁니다.
『게으름』이나 그런 책들, 이런 책들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요새 『서른 통』이란 책을 썼는데 정신없이 팔립니다. 서른 살에 아프고 그리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 이런 책입니다. 하여튼 정신없이 팔립니다. 그런데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은 잘 안 팔립니다. 안 팔릴 줄 압니다. 왜냐면 읽으려면 계속해서 머리의 근육을 잡아 당겨야 합니다. 이게 너무 힘든 겁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책을 계속, 이런 책들을 사서 읽어야 됩니다. 읽으면 무슨 소리인지 모르거든요 덮으면서 낙심을 하는 겁니다. 그게 첫 번째 유익입니다. 이 출판사에서 그런 식으로 책을 팔아줘야지만 이 책을 계속 찍을 수 있습니다. 안 읽더라도 사서. 무조건 사세요 그래서 그냥 읽으세요 그래서 과감하게 도전을 해서 읽고. 주기도문이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읽을 수 있으면 이런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쓴 사람도 있는데 읽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고린도전서 13장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에드워즈가 쓴 이 책이 한글로도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분량이 450페이지 정도 됩니다. 설교집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책은 의도적으로 읽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도 안 읽었습니다. 왜 안 읽었느냐? 제가 고린도전서 13장을 서른세 번의 설교를 했습니다. 나의 독자적인 힘으로 고린도전서 13장을 완성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에드워즈를 읽으면 그게 입력이 돼서 결국은 에드워즈를 못 벗어날 것 같아서 워낙 탁월하신 분이시니까 의도적으로 에드워즈의 책을 안 읽고 서른세 번에 걸쳐서 평균 시간은 70분에서 90분 사이로 설교를 해서 이제 녹취를 했는데 연구하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 분량이 1000페이지입니다. 내년 쯤 그 책을 완성하고 싶다 한 1년 써서. 1000페이지면 조나단 에드워즈가 써 낸 책의 갑절의 분량입니다. 그렇게 해서 고린도전서 13장을.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는 제가 교회 역사에서 최근에 한 백년 동안의 책들 중에서 고린도전서를 1000페이지로 쓴 책을 아직 못 찾았습니다. 모든 문헌을 찾은 건 아니지만. 그러나 있고 없고 상관없이 지금 순수 원고가 900페이지 정도 되니까 좀 보태서 좀 더 쓰면서 확장이 되면 한 1200페이지 정도 되겠죠? 그래서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고 고린도전서 13장을 딱 내놓고 그 다음에 에드워즈의 책을 보면서 반성을 하겠다 그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의 세 번째 책은 안 읽었습니다. 더 이상 할 게 없습니다.
그 다음에 삼위일체론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21권의 이름이 『삼위일체, 은혜, 그리고 신앙론』이라는 제목이 붙은 책입니다. 이 책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는 길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삼위일체론에 대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중요한 생각, 이 때 까지 사람들이 흔히 했던 생각과는 조금 다른 생각들이 덧붙여져 있고, 칭의, 은혜 등등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론이 성령론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의 신론 진술의 대부분이 성령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의 관심은 이미 중세시대이후로 초대교회로부터 써내려왔던 삼위일체론을 전면적으로 다시 쓰는 데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에드워즈는 에드워즈의 이 삼위일체론은 당시 17세기부터 내려온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신론진술에 비하면 그리 탁월한 내용은 보이지 않습니다. 깊이 면에서도 그들의 저작에 미치지 못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진술을 보면 여기에 나오는 아우스티누스, 11세기에서 12세기에 사실 기독교 역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조직 신학의 기초를 놓았던 피터 롬바르드, 이 사람은 명제집이라는 유명한 책을 쓰는데 우리로 말하자면 신학 명제집입니다. 더 이상 논쟁될 필요가 없는 신학의 명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런 식의 명제입니다.
이 사람 이후로부터는 모든 신학자들이 신학자로 데뷔할 때 명제집에 대한 해설을 쓰는 것으로 데뷔를 할 정도였으니까 피터 롬바르드 교수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 기롤라모 잔키우스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17세기 때의 사람입니다. 아주 정교한 철학적 신학을 구가했던 사람이고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도 중요한 축적가운데 하나였고, 개신교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 가운데 가장 세밀한 신학으로 정치한 신학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 다음에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 17세기 18세기 때 유명한 신학자인 동시에 철학자이고 아주 경건한 학자였습니다. 콕세이우스는 여러분이 잘 아는 개신교의 언약신학을 도입한 17세기의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삼위일체론으로부터 다양한 내용들을 차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접근 방식은 이렇게 나뉘어지는데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은 세 위격이신 성부 성자 성령이 사실은 하나다 이런 뜻인데 이 하나는 몸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여기서 일체라고 할 때 저 체는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의미 합니다. 그럼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은 위격에 있어서는 셋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신 하나님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의 가장 어려운 점은 어떻게 하나이신 분이 셋일 수 있는가 혹은 셋인 분이 어떻게 하나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함에 있어서 서방교회는 일체에서 먼저 시작해서 삼위로 이동합니다. 즉 하나님이 하나의 신적 본질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그 본질의 변화가 없이 어떻게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는가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서방 교회 방식이고, 이 방식이 오늘날 우리가 물려받고 있는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방식입니다.
그런데 동방교회에서는 다른 설명 방식을 택했습니다. 여러분이 혹시 성지순례에 가 보면 꼭 들르게 되는 것이 이스탄불입니다. 이스탄불에 가 보면 소피아 성당이 있습니다. 천정을 쳐다보면 재밌는 게 뭐냐면 수많은 원형으로 창문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배당도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의 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8개. 무슨 말이냐면 교회가 지체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래서 이것을 장미나 포도로 표현을 합니다. 이것은 어디에서 오냐면 동방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에서 옵니다. 동방교회의 관심은 일치성이 아니라 다양성입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각 다른 분인 것처럼 우리에게 계시된다. 그런데 세 하나님이라고는 말 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각각 다른 세 위격의 하나님이 일체이실 수 있느냐 바로 그게 페리코레시스. 성부, 성자, 성령이시지만 이 성부, 성자, 성령을 각각 서로 다르지 않게 만드는 페리코레시스. 원래 교통,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각각 다른 분처럼 보이지만 이 속을 채우고 있는 하나님의 본질이 이 속에 있는 고리와 같은 것들을 통해 모두 공유되고 있다. 그래서 세 하나님처럼 보여도 사실은 한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동방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방식이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대체로 학자들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전통적인 서방교회의 삼위일체 설명방식 보다는 동방교회의 설명방식을 풍부하게 받아들여서 하늘에서 하나님이 셋이면서 아름다움 하나를 이루신 것처럼 이 지상에서는 수많은 교회들이 하나를 이루고 다양한 인류와 민족들이 하나를 이루고 남자와 여자와 종과 자유자와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하나를 이루며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봅니다.
28페이지를 넘겨보십시오. 에드워즈의 신학이 사람, 질서, 관계를 중시하는 특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아마도 그는 삼위일체에 있어서 서방교회보다는 동방교회의 접근에 마음이 끌렸을 것이다. 그러나 접근 방식은 달라도 하나님의 존재를 위격들과의 관계에서 보고 그 안에서 신적 본질의 통일성뿐 아니라 사랑을 추론하려고 했던 것은 동방교부들만의 전통이 아니라 신학적 원천인 어거스틴의 전통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하나임 보다는 셋임을 강조함으로써 세계와 인간 안에 이루어지는 모든 관계를 삼위일체의 모형으로 설명함에 있어서 유리한 입각점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의 관계 중심적인 삼위일체론은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서 세 위격간의 관계를 설명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피조세계와 맺으시는 관계, 피조물이 서로에 대해서 맺는 관계를 설명하는 기초가 된다. 에드워즈의 신학에서 피조물은 하나님의 언어다. 마치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생각이 언어로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 안에 있는 관념이 피조물들로 나타난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삼위일체론에 입각해 우주를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인간과 인간, 자연 사물까지 하나의 연관을 이루는 질서로써 제시했다. 세 위격의 교통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본 에드워즈의 접근은 동일하게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교회, 교회와 신자, 신자와 신자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도 적용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삼위일체론은 만물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그것들과 관계를 맺으시며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는지를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 그림을 보십시오. 이 설명을 들으시면 여러분이 이제껏 생각했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어떻게 생각 하냐면, 특히 개신교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 착했거나 혹은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기억하셔서 내게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나를 사랑 하신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극대화 하다 보면 무슨 문제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가 마치 자기 개인을 위한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은 것은 나처럼 믿음이 없었거나 혹은 순종하지 않았거나, 어쨌든 그런 것은 잘 몰라도 나는 우리 하나님께 특별히 예쁨을 받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이러한 개념들을 깹니다. 그리고 에드워즈가 말하는 이 개념이 훨씬 성경적인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셔서 하나님이 사랑해야 할 대상이 없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사랑이셨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할 때는 사랑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없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하면 하나님이 세계의 모든 만물이 하나도 없을 때조차도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셔서 서로를 사랑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셨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이 아들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아들에게 부어진 이 사랑은 아들의 신부인 교회에 부어지게 됩니다. 교회에 부어진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모든 지체의 연결을 이루고 있는 각 개인에게 부어져서 결국은 교회에 하나님이 우리 개인에게 주신 사랑은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해 베푸신 사랑의 분여입니다.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럼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 사랑이 나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교회에 주신 사랑이기 때문에 이 사랑이 교회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처음부터 공동체에게 부어지고 그 사랑으로써 공동체를 섬겨서 하나님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어주신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명은 저 멀리 오는 성경에 이미 나타나 있지만 특히 에베소서 같은 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후에 역사적으로는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라는 사람입니다. 베르나르라고도 얘기하기도 하고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라고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아주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특히 칼빈에게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그 사람이 교회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명할 때 신랑과 신부의 유비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건 이미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그걸 설명한 것을 칼빈이 발전을 시키고 그렇게 발전된 것들을 맥락 속에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계승하면서 왔습니다. 사실 이것 하나만 제대로 이해하면 교회가 그렇게 물고 뜯고 싸우고 교인들이 비난하고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짐승들의 집단입니다. 물고 뜯어 가지고 입술에 피가 흥건한 가운데 돌로 죽이는 일은 불행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저에게는 커다란 신학적인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럼 이제 『신앙정동론』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책 가운데 가장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고 호불호를 막론하고 다양한 평가가 교차했던 책 중 한 권이 『Religious Affections』이라고 하는 책일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의 이름을 번역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affection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영어에서 affection이라고 하면 흔히 정서라고도 번역이 되어 있고 혹은 사랑이라고도 번역이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신앙정서론』, 『신앙과 정서』 이런 말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음 번역이 되었고 그 후에는 부흥과 개혁사에서 『신앙감정론』이라고 번역이 됐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affection이라는 뒤에 나와 있는 이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되면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 매우 망설여지게 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제가 단어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게 ‘정동’이라는 단어입니다. 정은 여러분이 한자에서 얘기하는 정 ‘정’(情)과 움직일 ‘동’(動), 이 affection이 무슨 뜻이냐 하면 원래 라틴어에서 ‘아펙투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라틴어에서 ‘아펙투스’는 어떤거냐 하면 affection이라는 것이 영향이라는 뜻도 있잖아요? 이렇게 생각 하시면 됩니다. 잔잔한 호수위에 돌멩이가 퉁 떨어집니다. 돌멩이가 떨어지면서 풍덩 하면서 물기둥이 솟아오른다고 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파문을 그리게 되죠? 이 파문이 일어나는 걸 가리켜서 ‘아펙투스’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해되죠? 그러니까 이것은 ‘감정’ 그러면 고정된 상태잖아요? 그게 아니라 마음이 출렁거려서 움직이는 마음의 변화 자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무슨 뜻이냐 하면 religious affection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종교적인 정동입니다. 종교적인 정동들. 그런데 우리는 종교가 여러 개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 영어의 religion이라는 말은 라틴어 ‘릴리가레’에서 옵니다. ‘릴리가레’는 무슨 뜻이냐 하면 ‘반복하다’ 혹은 ‘묶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bind. 그래서 종교는 뭔가 계속해서 그 종교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의 이치에 묶는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 그래서 이것을 우리들이 religious라는 영어를 번역할 때에는 ‘종교적인’ 이라고 번역을 안 하고 ‘신앙적인’ 이라고 번역을 하면 거의 98% 맞는 것입니다. 종종 종교적이라고도 번역이 되고 ‘경건한’ 이라고 번역을 해도 됩니다. 그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에서 우리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이 변화가 실제의 인격이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갖잖아요? 어떤 선한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실현으로 옮기기 전에 먼저 정동이 일어나죠? 여러분이 선교를 결심하기 전에 수많은 선교의 정동을 경험했기 때문에 선교에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동이 선한 것을 향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도 마음속에 끊임없이 정동이 일어남으로써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의 정의, 하나님을 향해 혹은 세상을 향해 어떻게 정이 출렁거리며 일어나는가 그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책은 제가 두 번을 읽었는데 이 책은 개인적으로는 나는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너무 정론적이고 어려운 주제를 평이한 설교로 설명을 하려고 하다 보니까 모호한 것도 많고 정확하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오히려 저런 주제를 조나단 에드워즈가 설교가 아니라 아예 글로 직접 쓰거나 아니면 천지창조의 목적이나 참된 미덕의 본질처럼 그렇게 논문으로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이 책은 매우 중요하고 이 책을 조나단 에드워즈가 쓰게 된 것이 43살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신학적으로 상당히 성숙하고 무르익었을 때에 이 책을 썼고 이때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국제적인 인물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뉴잉글랜드가 벽지고 외딴 곳이긴 했지만 유럽 무대에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내면서 그 쪽에서 엄격한 칼빈주의적 성경적 사상을 따라서 목회를 하려고 하였던 사람들과 교류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스코틀랜드에서 아주 탁월한 4명의 목회자가 있었는데 글라스고우의 맥로린, 캠버스랭의 맥컬럭, 킬시스의 로브, 에든버러의 어스킨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음에 길레스피, 존 윌리슨 이런 사람과도 연관이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과의 연결을 이루면서 심지어 조나단 에드워즈가 아까 오전에 설명했죠? 노스햄턴 교회를 떠났을 때에 쉽게 얘기해서 해임이 되었을 때에 사실은 스코틀랜드에서 청빙을 받습니다. 그런데 에드워즈가 안 갑니다. 왜냐면 자기가 여기서 이렇게 목회를 하던 것이 거기에서 과연 맞을까? 라는 깊은 고민 등등을 생각하면서 결국은 안 갑니다. 미국에 남게 됩니다.
이 책이 쓰여지게 된 동기는 사상사적으로 17세기와 18세기에 영국에서 존 로크의 경험주의 운동의 하나의 후산물로서 경험주의 운동의 한 영향으로써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를 중심으로 아주 커다란 학문적인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게 소위 얘기하는 스콜리아 아우구스티니아 모데르나 라는 운동입니다. 새로운 어거스틴학의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17, 18세기에 다시 부흥했던 신플라톤주의 운동과도 관련이 됩니다. 이 때의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의 학자들의 계몽주의 이후의 관심사가 윤리로 접어들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제 르네상스를 거쳐서 인문주의, 인문주의를 거쳐서 종교개혁, 종교개혁 이후에 다시 계몽주의로 들어와서 문제가 되었던 게 뭐냐 하면 그런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할 근거가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찾아 낸 것이 뭐냐 하면 여러 가지 사조가 일어나게 되는데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사조가 일어나는데, 극단적 무신론적 사조가 일어납니다. 여기에서는 신 그런 거 없다 그리고 인간이 필연적으로 추구해야 할 그런 도덕적인 가치 없다 인간은 자유다 이런 사상이 퍼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모두 어떠한 도덕이나 이런 것도 다 부정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두 번째 부류들이 나오게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결국 도덕의 근거는 인간이 사회를 만들면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서로의 행복을 담보하기 위한 타협이, 협정이 도덕의 근거다 라는 사상이 나오게 됩니다. 그것이 유명한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존 로크 사회 계약론, 이런 것들입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던 프랑스에서 이런 사회 계약론 사상들이 활짝 꽃이 피게 됩니다. 그 사람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은 혁명이 아닙니다. 왜? 신의 허락을 받고 인민과 나라 사이에 계약이 맺어졌습니다. “우리 인민은 왕의 통치에 복종할 것이니 왕은 인민에게 선한 정치를 펼쳐 행복하게 하라.” 그런데 그 약속을 인민이 파괴한 게 아니라 정부와 왕이 파괴합니다. 인간에게는 신성불가침한 존엄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파괴하고 약속을 파괴해 인민을 불행에 몰아넣은 사람들을 징벌하고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하여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정부를 다시 세울 수 있는 권리는 하나님이 직접 부여하신 권리이기 때문에 천부적인 신으로부터 받은 천부적인 권리이기 때문에 보댕 같은 사람이 왕권신수설을 얘기 했을 때에 그 때에 이쪽에서는 반대로 민권신수설을 얘기합니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권리이기 때문에 이것은 폭력적인 무력이나 범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의 부류의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기독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기독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저 멀리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놓고 그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렇게 이렇게 살라고 하는 규율과 규범을 인간의 이성 속에 주었기 때문에 그 보편적인 선을 추구하면서 살아야지만 세상은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까 이제 윤리가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고 그럼 예전에는 교회와 종교의 억압을 통해서 담보하였던 윤리가 이제는 인간이 자율적으로 그 윤리를 행해야 하는 윤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과연 그것을 충족시켜 줄 것인가 하는 것은 처음에는 낙관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낙관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왜 그런 겁니까?
18세기 이전에 이미 15세기부터 유럽의 가난했던 나라들이 도저히 살 수 없으니까 목숨을 걸고 바다로 나갑니다. 떨어 죽든지 뭔가 새로운 좋은 땅을 발견하든지 그리고 뛰쳐나갑니다. 그렇게 뛰쳐나간 나라들이 모두 부자가 된 나라입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독일 이런 나라들이 모두 부강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18세기에 영국에서 최초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18세기의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빛나는 과학의 전초기지였습니다. 특히 여러분이 역사시간에 배운 공업지대로 알려진 맨체스터나 이런 지역은 당시의 첨단 공화학을 달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양자역학이나 이런 것들도 맨체스터대학에서부터 벌써 연구가 시작이 됩니다. 그러면서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전을 합니다. 특히 예전에는 수력이나 풍력 이런 것들 아니면 에너지원이 없었는데 모터, 발동기를 발명하고 나서부터 어디든지 그걸 이동해서 거기서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업혁명의 폭발적인 발전이었습니다. 특히 증기기관차의 발전은 어마어마한 물동량들을 실어 나를 수 있게 만들어서 경제의 변혁을 가져온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되죠? 잘 사는 사람들은 자본가가 되어 가지고 어마어마하게 잘 삽니다. 못 사는 사람들은 겨우 입에 풀 칠 할 돈을 받기 위해서 도시에 와서 노동을 하는데 도시에는 이미 피폐해진 농촌을 버리고 도시에 와서 노동력을 공급하려는 사람들로 넘치게 되고 그들이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의 돈을 받고 일을 하는데 그보다 싼 가격에 노동력을 제공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자본과 계급과 노동자 계급으로 나뉘어져서 억압과 착취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루에 열여덟 시간 이상씩 살인적인 노동을 시키면서 겨우 입에 풀칠을 했습니다. 자본가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법니다. 이런 상황이 되다 보니까. 사람들에게 궁금한 게 떠올랐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게 하는데 결국은 인간이 자율적으로 그렇게 선택을 해서 행하는데 도대체 인간의 마음 안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런 도덕적인 결정이 이루어질까 라는 궁금증이 들게 된 겁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소위 얘기하는 Moral aestheticism, 도덕적 심미주의라는 것을 착안하게 됩니다.
이미 예전에 플라톤이 고민했던 바입니다. 플라톤이 이런 고민을 합니다. 참 이상하다 왜 사람들은 선한 것 보다는 아름다운 것에 더 마음이 끌릴까? 여기서 아름답다는 건 진짜로 아름답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아름답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애들이, 본분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거잖아요? 지금 중국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장래가 보장되고 좋잖아요. 그런데 이놈이 공부할 시간에 공부를 안 하고 게임을 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공부하는 것은 선한 것이지만 예뻐 보이지는 않고 게임 하는 것은 나쁜 것이지만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임을 하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면서 최초로 본격적인 심미학적인 관심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또 역사적으로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어떻게 재미있냐면 예전에는 하나님이 딱 중심이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 주위를 돌고 있는 수많은 패러다임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생의 비밀과 해결은 하나님에게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하나님을 치워버리고 인간을 중간에다 딱 놓은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도 모든 다른 사물들과 함께 돌아가는 패러다임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딱 넣었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자기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의 덩어리 속에서 수시로 선과 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는 그런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접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관심사는 무엇이냐 하면 도대체 우리라는 인간은 누구인가? 그리고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여기를 열고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하이든이 이야기 했듯이 하나님만큼이나 불가해 합니다. 들여다보니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이 무지하게 발달하는데 이 심리학은 일반 학문처럼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 속에서 뭔가를 입증해 나가는 논리적인 학문이 아니고 심리학은 100%의 임상입니다. 진단해 보고 한참을 차지하려는 것으로 줄을 세웁니다. 그래서 최근에 내가 이야기를 들으니까 웬만하면 정신과에서는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서 뭔가 사람이 좀 이상하면 정신병으로 분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이백 몇 가지까지 정리가 됐고, 그 중에는 모든 게 너무 정상인 사람이 걸리는 정상 증후군이라는 게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그럴 수 없는데 모든 면에서 너무 정상이라는 겁니다. 정신병이라는 겁니다. 혼란스럽습니다. 너무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엊그제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도 이제 자주 봅니다. 요즘 팔로어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혜민 스님 같은 사람. 어쩌면 그렇게 글을 잘 쓰는지 모릅니다. 누가 읽어도 기분이 안 나쁘고 무릎을 치게 만듭니다. 아 그거구나.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 그냥 거기까지입니다. 그냥 거기까지입니다. 감동을 받습니다. 뭐냐면 이제는 이렇게 인간을 놓고 너는 회개하고 사장되어야 한다. 이런 거는 현대인들에게 너무 폭압적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는 김용옥씨입니다. 사상은 제가 동의를 안 하는데 그분처럼 정말 책을 많이 읽고 모든 지식을 삶으로 연결시키려는 철학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깊이 존중을 합니다. 그분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인간이 최고다. 우리는 힘을 믿는다. 도덕도 믿는다. 나라도 믿는다. 그러나 만약에 그 인간을 인간의 중심성을 대치하는 것이라면 하나님도 죽여 버리고 나라도 죽여 버리는, 도덕도 죽여 버려야 된다. 그게 바로 오늘날의 사상을 대언합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교회에서 히트 친 것 중 세상에서도 히트 친 곡이 딱 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러한 사상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15초짜리 광고 카피에까지 좌악 깔려서 그 코드가 딱 맞을 때 사람들에게는 울컥하는 감동을 줍니다. 그 중 대표적인 카피 하나가 ‘생각대로 T’ SK. ‘네가 무엇을 원하든지 그대로 해’ 그런 것들이 현대 사상을 주도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다가 교회가 좌악 감염이 된 겁니다. 그래서 완벽하게 사라진 게 뭐냐 하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메시지가 완벽하게 사라집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성령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이요 그리고 그 대적하는 인간이 진정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나는데 하나는 자기를 사랑하는 인간이 깨져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이웃을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자기 사랑에 대해 관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성경은 자기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안에서 이미 하나님께 충분히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다시 사랑을 해서 그 인간을 사랑받게 하라고 명령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모순입니다.
두 번째 생겨나는 게 뭐냐 하면 회개하고 거듭남으로써 눈이 떠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 하면 예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어디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교회의 제도 속에서.
내 친구 목사 하나는 미국에서 목회 하는데 가니까 성찬을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이랑 막 먹더랍니다. 이거는 안 된다.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성찬에 참여하면 안 된다 그랬더니 성찬식이 끝나고 나서 권사 하나가 씩씩 거리며 ‘목사님 우리 남편이 사회적으로 당신만 못 합니까? 공부를 당신만 못 했습니까? 돈이 당신만 못 합니까?’ 그 다음 말이 더 재미있습니다. ‘그까짓 빵하고 포도주가 몇 푼이나 한다고 우리 남편보고 먹지마라 그럽니까? 남편이 상처 받아서 교회 안 나온다고 합니다. 당신 어떡하시렵니까?’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러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정말 변화 되는 데에는 그 떡 한 조각과 포도주 한 잔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 벌레 같은 나를 위해 왜 죽으셨나? 이 인식이 거듭남과 함께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정동은 신자 안에 일어나는 정동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당시에 17세기와 18세기에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의 도덕 심미주의자들이 도덕 행동이 어떻게 결정이 되는지를 심리학적으로 분석을 한 이론의 틀을 빌어서 지식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일어나는 은혜의 정동, 그것이 그 사람을 바꾸고 선한 결정을 하게 하는 것이 어떻게 연관 관계에 있는지를 완벽한 기독교적인 용어로 설명을 해냅니다. 그것을 연구해보면 정말 감탄을 하게 됩니다. 설교를 할 때 설교자가 마치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온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 주는 장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밑의 그림을 보시면 에드워즈의 신앙정동론이라고 나오죠? 정동론은 뭔지 설명을 드렸죠? 그런데 여기에 기본적으로는 성경입니다. 어쨌든 에드워즈의 관심은 성경 속에서 이 모든 이론의 근거를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성경을 해석하면서 이루어지는 해석 활동을 통해서 정동이론을 만들어 내는데, 에드워즈는 누구입니까? 1722년 개인적으로 부흥을 경험했고, 1736년도에 그가 목회하던 교회에 큰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고 1740년도 41년도부터 1745년도까지는 미국 동부 전체를 휩쓸고 지나가는 제1차 대각성운동이 진행이 됩니다. 그런데서 영적부흥에 대한 경험을 주었고, 그리고 학문적으로는 신플라톤주의,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새로운 아우구스티누스 주의 운동,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었던 도덕심미주의, 이 모든 학문들이 이 경험과 함께 성경을 토대로 해서 에드워즈의 신앙정동론이 탄생하게 됩니다.
말만 들어도 소용없고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을 사서 일단 읽어야 됩니다. 어렵습니다. 어려운데 그래도 그냥 읽는 사람보다는 제 설명을 듣고 읽으시는 분들은 훨씬 쉽습니다. 좀 더 쉽게 읽으려면 1판에서 나온 전집을 사서 아마 그 앞부분에 해설이 되어 있을 겁니다. 앞부분의 해설을 다 읽으신 후에 하나씩 하나씩 성경을 펴 놓고 신앙정동론을 읽어 보세요. 이해가 잘 안되겠죠? 그런 바탕이 되면 이런 것들에 대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해가 빨라지고, 그런 것들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이해는 좀 떨어지고 그렇게 되겠죠? 이게 신앙정동론입니다.
이안 머레이라고 하는 목사님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 교회의 부목사를 오래 했던 사람이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전기 생애와 후기 생애를 거의 800페이지를 쓴 전기 작가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에 대해서도 썼습니다. 이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20세 때에 읽었는데 별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읽으니까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준 책이다. 그러니까 책을 읽는 사람이 어떤 심적인 상태냐에 따라서 이런 이해도 좌우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오늘 다 못 할 것 같아서 다음에 한 번 더 만나기로 하고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기도)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고 도와 주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일치를 이루며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 가도록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묶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다음에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그리고 내가 가능한 가장 최소 공약수에 다시 방문하여 이후의 강의를 완성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