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과 사상 7
녹취자: 정윤미
에드워즈의 약 28권정도 되는 저작 중에서 6번째 책이 Philosophy of Science라고 하는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이것은 과학 철학이라는 뜻인데 사실 오늘날 우리들이 Philosophy of Science나까 우리들이 문자적으로 과학 철학이라고 이렇게 번역을 하지만 18세기 문맥에서는 이것이 그냥 과학입니다. 그것을 philosophy라고 그렇게 붙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굳이 과학철학이라고 번역한 이유는 이 저술을 쓴 에드워즈의 목표자체가 과학을 사람들에게 과학적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쓴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과학을 해석하기 위해서 사실은 이 Philosophy of Science을 쓴 것입니다. 그러면 공교롭게 오늘날 우리들이 과학철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과학철학이라고 탁 치면 어마 어마한 글들이 막 쏟아져 나옵니다. 그래서 이제 이 과학철학이 사실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그리고 20세기에 와서 과학철학들이 상당한 각광을 받습니다. 과학 철학의 그 기본적인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과학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한 해석학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이제 굉장히 긴 시간의 설명이 필요한데 제가 이렇게 하면 이거 몇 장 가지고 와서 이틀 동안 8시간했는데에도 못하고 그냥 갔다고 그럴까봐 그래서 목표는 이것을 끝까지 다 해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혹시 주어진다면 여기에 강의 들었던 사람들이 모이면 에드워즈에 대한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해도 그동안에도 책을 열심히 읽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1년 후에 나를 만나다고 목표를 하고 10000page를 목표로 하고 그리고 책을 읽고 에드워즈와 지금 내가 여태까지 이런 책 좋습니다. 이런 책 좋습니다. 설명한 해준 책만 지금 여러분에게 가르쳐준 책이 10000page가 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읽고 그다음에 만나면 아주 깊이 있는 토론이 가능해집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렇게 성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참 좋지 않지 않나요?
나는 그래서 우리 열린 교회를 내가 39살 때에 무엇도 모르고 교회를 7명이 지하실에서 개척해서 오늘날까지 오게 되었는데 목회 초창기에는 학교의 교수를 겸직했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학교에 사표내고 그리고 이제 목회만 하면서부터 사실은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장기에는 집회 다니고 그러다가 이게 그것도 이제 너무 많이 하는 것은 좀 그렇다. 정리하고 그때서 부터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늘 했지마는 그러나 이제 본격적으로 그때부터 공부하면서 신학교하고 인연을 다 끊었습니다. 사실은 교수로 와달라는 그 초청도 있었는데 그런데 내가 다 거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궁핍해도 학교를 딱 그만두고 교회로 돌아가니깐 월급이 1/3로 줄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거기에서 만족하면서 나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너무 너무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이 함께 설교를 들으면서 여기까지 자라왔습니다.
우리는 봄 가을에 한 번씩 가는데 어디를 가느냐하면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때에 주일날 오후예배를 드리지 않고 1234부 예배가 있는데 123부만 예배 딱 드리고 그다음에 이제 광고를 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특강을 한다. 갈사람 모여라 그러면 신청을 막합니다. 그러면 한 1500명 정도 기도원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기도원에 가면 원형극장처럼 산에다가 사람들을 쫙 앉히고 무대가 있습니다. 꽉 차면 2200명 들어가는 그 야외무대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아직 안했지만 무엇 한다고 하면 이것을 전부다 이제 연구실에서 전부 프레젠테이션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화면도 만들고 그림도 만들고 그다음에 다하고 이런 것은 책으로 예쁘게 만들어가지고 가지고 가서 한권씩 다 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후에 일찍 올라가서 그다음에 이제 산책하고 같이 모여서 교제하고 저녁을 맛있게 기도원에서 합니다. 그래서 저녁을 일지감치 먹고 6시 30분부터 찬양을 하면서 7시쯤이면 약간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에 그때부터 강의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쉬지 않고 한 2시간 30분정도 그러면 나는 나대로 막 이렇게 천천히 친절하게 안하고 막 빨리 강의가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나대로 강의하면 여기에는 계속 화면에 그 강의하는 내용들이 뜨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과학 철학하면 과학철학이 무엇인가부터 좍 뜨는 것입니다. 도울 김용옥씨가 TV에서 강의할 때 보면 밑에 자막 계속 띄우듯이 그런 식으로 만들어가지고 다 설명할 수 없으니까 띄우는 것입니다. 2차 대전이 일어났는데 그러면 2차 대전 사진이 뜨고 윈스턴 처칠하면 윈스턴 처칠의 사진이 뜨고 교인들은 재미있겠지요. 나는 안보이지만 나는 여기에 놓고 강의를 쭉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강의를 듣고 그다음에 열렬하게 기도하고. 그리고 돌아와서 그 책가지고 그 다음 주일날 공과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그러면서 계속해서 그러니깐 설교시간에 모든 내용들을 다 다룰 수가 없으니까 설교시간에 하기 어려운 철학사 사상사 그리고 현대문화에 대한 해석 이런 것들을 이제 거기에서는 알기 쉽게 이렇게 안하고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지적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공격적으로 한 2시간 반 동안 퍼부어 붙고 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잘 모르면 그다음에 교역자들을 모아 놓고 그다음에 배운 내용을 다시 좍 정리해서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교역자들이 그 다음 주 일 날 구역장들을 모아 놓고 좍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구역장들이 구역에 내려가서 그리고 온 교인들 자기 구역식구 또 가르치는 것입니다. 구역장이 되려면 상당히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대학을 나와야 되는 것은 아닌데 그런 학력하고 상관없이 교회에서 일정한 수준의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그다음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인들은 도전을 받아가지고 자기가 라틴어 공부를 시작해가지고 원전을 읽겠다고 하는 교인들도 나오고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까지 하면 담임목사가 신비감이 너무 없어집니다.
과학에 대한 이야기 인데 조금만 이야기하겠습니다. 14세기 이때에 지난 시간에 이야기 한 것처럼 르네상스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요전에는 13세기에 아주 중요한 사건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 사건이 무엇이냐 하면 그때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이 가톨릭 시대였는데 소위 이야기 하는 가톨릭 리포메이션이라는 것이 일어납니다. 기독교가 너무 타락하고 혼란스러우니까 여기에서 그 가톨릭 안에서 자체적인 반성이 일어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종교개혁이 무엇 크리니스 수도원 도미니크 수도회라던 지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아시시 프란시스 그 사람은 물론 12세기 사람이지만 아시시 프란시스라든지 이란사람들에 의해서 대대적인 수도원 운동들이 일어나고 개혁운동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역사가들은 그 개혁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가스펠 복음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역사가 흐르면서 여러 가지 기독교의 오류와 잘못된 가르침들이 섞여서 원래 우리들이 가졌던 순수한 신앙을 사도적인 신앙을 잃어버렸다. 그런 것들을 어떻게 하면 다시 복구할 수 있겠는가? 사도적 신앙이라기보다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신앙을 잃어 버렸다. 그래서 성경에 구약과 신약의 많은 책들 중에서 놀랍게 이 13세기의 가톨릭 리포메이션에는 사 복음서에 집중하게 됩니다. 여기에 나온 각색되지 않은 예수의 인격과 삶 여기에서 청빈이라는 맥락을 읽어 내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금욕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철저한 헌신 그리고 사랑 이런 코드들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핑계대지 말고 복음서에 나오는 대로 하라. 그러니까 네 본토 친척 자식 뭐 이런 것들을 다 버려라 그러면 진짜 버려라 그리고 너의 손이 만약에 너를 죄를 짓게 한다면 그 손을 잘라버려라 그 문자적으로 실행할 정도로 그렇게 철저하게 예수를 따르자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거대한 신학운동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도 우리에게 매우 커다란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구호는 얼마나 훌륭한 것인가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자 그래서 마리아 수도회 같은 곳 그다음에 그런 어떤 가난한 자들의 그 공동체 이런 곳들이 이름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서로 청빈과 금욕과 헌신과 사랑을 경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금욕을 하면서 그러면서 예수의 순수한 가르침을 따라서 살 자라고 하니까 자연히 이것은 약간은 타계적인 신앙을 내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런 운동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 운동이 성공했다면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이 개혁운동이 결국은 실패합니다. 실패의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실패합니다. 여기에 하나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커다란 교훈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사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복음서 속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자 교리와 이 신학의 방대한 껍질들을 벗고 그리고 순수한 가르침으로 살 자라고 하는 구호는 좋지만 이것이 사상과 체계를 갖춘 탄탄한 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공을 못합니다. 그리고 타락이 가속화 됩니다. 종교개혁시대에 와서는 어느 정도로 타락이 심하게 되었느냐하면 문제가 되었던 면죄부 사건이 어떻게 되었냐하면 교황청에서 이만한 영역을 정해서 면죄부를 팔수 있는 전매권을 주었습니다. 얼마를 만들어서 팔던지 그것은 상관이 없고 그 대신 그 권한을 굉장한 돈을 주고 사야 되었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어 은행에서 빌리고 그래서 그것을 막대한 돈을 교황청에다가 내고 본전을 뽑아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막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도 면죄부도 맨 처음 독일에서 만들 때에는 그 color로 예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팔려니까 그다음에는 아무렇게나 그려가지고 그렇게 해가지고 비싼 것부터 싼 것까지 막 파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부패와 타락을 다 보면서 이제 교회가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에 그때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면서 결국은 사상적으로 이 13세기가 사실은 중세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실은 기존에서 이미 중세를 지탱해 왔던 사상적인 질서의 대대적인 균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게 여러분 고등학교 다닐 때 에 배웠던 유명한 유명론 실제론 논쟁이라는 것 기억나실 것입니다. 유명론 실제론 관념론 이런 논쟁이 여기에서 벌어집니다. 이때부터 이미 데카르트 적인 어제께 말씀드린 데카르트 적인 존재론과 결별한 인식론적인 사유로의 대대적인 전환이 이미 여기에서 예고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상이 13세기 이런 균열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다가 14세기에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그래서 장화같이 생긴 이탈리아에서 이제 남쪽에서는 예술운동이 북쪽에서는 인문운동이 일어나면서 인문주의가 사실은 유럽에 영향을 미치면서 여기에서 지성사에 대대적인 변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14세기에 르네상스가 일어나면서 여기서 이제 예술적 르네상스와 그 다음에 인문적 르네상스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인문주의고 이것이 결국은 피렌체를 중심으로 하는 예술에 폭발하는 듯한 예술의 그것입니다.
예술을 예를 들어보자면 피렌체가 그 당시에는 플로렌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기롤 라모 사몰로 놀라라는 그 설교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신비주의자라고 알려졌는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진정한 그 종교개혁이전의 설교 가였습니다. 이 사람을 마틴 루터가 아주 존경하고 제가 그래서 기롤 라모 사몰로 놀라라는 책도 썼습니다. 지금 아마 나올 겁니다. 아마 인터넷에 두드려 보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굉장히 감동적인 일화입니다. 이런 코드를 알고 피렌체를 가서 보면 눈물 없이는 피렌체를 걷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상념을 하게 됩니다. 인류의 그 문화와 지성사 그다음에 기독교 신앙 순교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냐 하면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변화가 일어나야 하면 옛날의 그림을 보면 대개 그림이 무시되었지만 르네상스이전의 그림을 보면 대개 사람이 아니라 천사들 이런 그림들이 이제 널리 성경의 인물 이런 것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항상 사람은 부각해서 그 사람을 클로즈업해서 그리는 것은 거의 금기시 되었습니다. 그러데 르네상스에 오면서 인간 자체에 대한 그 인간을 클로즈업 시켜서 그리는 그림들이 유행하게 되고 그 다음에 옷을 벗겨서 그리고 그 대표적인 작품이 다비드상입니다. 다윗이 물맷돌 들고 있는 다윗 그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을 보세요.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그러는 것입니다. 아 다윗이 물맷돌을 들고 믿음으로 골리앗과 싸우는 그것을 나타내고 있구나 틀렸습니다. 그 저자는 그런 것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그 다윗의 예쁜 몸매 탁 보면 그 옛날에 만든 작품인데 지금도 이렇게 보며는 근육이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을 쳐다보는 것 자체가 르네상스이후에 일이지 이전에는 인간을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육체 속에서 무언가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단테 같은 사람은 베아트리체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베아트리체도 실제적으로 그림이 남아있는데 똑같이 그렸는지 예쁘게 그렸는지는 모르지만 그림으로만 본다면 꽤 예쁜 자매인지 아줌마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예쁜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소위 이야기하는 상열지사 남녀가 함께 만나서 즐거워하고 인간 그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이 르네상스 이전까지는 죄악시 되었습니다. 우리도 기억이 나는 것이 우리 어렸을 때 초등학교 때에만 해도 노골적으로 여자의 외모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굉장히 금기시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천박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요즈음은 안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기는 한국 문화로 따지면 여기도 시골과 같습니다.
(예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남녀가 선을 보고 오면 그러면 여자는 질문이 다양하다고 합니다. 무엇이라고 물어보냐 하면 “그 남자 몇 살이야 직업이 무엇이냐?” 그다음에 “뭐 학교는 어디 나왔어? 가정은 어때? 성격은 좋아?” 그런데요. 남자는 친구가 선을 보고 오면 똑같대요. 첫 번째 질문은 “그 여자 예뻐?” 두 번째 질문도 “그 여자 예뻐?” 세 번째 질문도 “그 여자 예뻐?” 네 번째 질문도 “그 여자 예뻐?”입니다.
한국에 한번 그 여자가 살인을 했나 사기를 쳤나 그리고 하여튼 큰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을 다니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찍혔습니다. 신상 털기를 해가지고 인터넷에 막 떴습니다. 그런데 그 범죄자에게 팬클럽이 생겼습니다. 수많은 네티즌들이 그 여자 용서해주고 살려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살려주어야 되냐고 하니까 “예쁘니까.” 참 우리는 소외감 느낍니다. 그런 식으로 인간의 신체를 보기 시작하는 것 이것은 이전의 문맥으로 보면 상상도 못하는 일들이었고 엄청나 변화가 일어났고 그리고 이때에 마사토 지오바니 등 많은 예술가들이 나오는데 이때에 처음으로 원근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원근법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렇게 유리창이 있고 여기에는 이렇게 문이 있고 이러한 원근법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이것은 무엇을 보여 주냐 하면 평면으로 그냥 소위이야기 하는 3d가 아닌 2d로 그리면 그냥 위에서 내려다 본 것이 아니면 정면에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근법은 어느 관점에서 딱 서서 바라보는 관점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 본 것일까요? 그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자기 각도에서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이 그림의 내용만 주체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어느 각도에서 서서 이 그림을 그렸는가 하는 작가 자체가 주체성을 갖고 이 그림 속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런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르네상스가 인문주의인데 이 인문주의가 다시 둘로 나눕니다. 이게 세쿨라(secular 인문주의(세속적 인문주의)와 크리스천 인문주의로 나누어집니다. 크리스천 인문주의가 영향을 미치면서 15세기에 수많은 가톨릭 사제들 가톨릭의 사상에 회의를 품던 수많은 젊은 지성인들을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이 됩니다. 실제로 칼빈이 파리에서 공부했던 파리 콜레주 지금으로 말하면 중학교 정도수준입니다. 그리고 올레앙에서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그때에 만났던 유명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 떼따플라 든지 디오타드라 든지 이런 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특히 떼따플 같은 사람은 아주 인문주의에 철저히 감동을 받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면서 르네상스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을 갖게 됩니다. 핵심만 요약하면 이 르네상스가 기본적으로 교회를 올바르게 하자는 신앙운동은 아니었는데 이 르네상스에서 첫 시간에 설명했듯이 이게 레네나스끼멘토라는 데서 왔다고 했는데 라스끼멘토가 탄생입니다. 라스코라고 하는 그 단어에서 나온 것에 라틴에서 라스코가 “낳다. 태어나다. be get”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이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냐 하면 이 사림들이 꿈에 그리고 있는 것들이 무엇이냐 하면 저기 그리스 시대에 police시대에 있었던 그 인간의 자유로운 인간성의 창달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 그리스가 이렇게 마케도니아에 의해서 제국이 통일되고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서 헬레니즘제국이 된 다음에는 그런 질서들이 많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폴리스시대에 있었던 노예라고 할지라도 이 주인의 소유물처럼 여겨서 그를 짓밟을 권한이 없습니다.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헷소도스라고 하는 저자의 그 작품에 보면 어떤 이야기가 나오나 하면 이런 이야기다 나옵니다.
(예화) 주인이 일기를 쓴 것입니다. “우리 집 노예는 대개 게으르다. 가서 밭 좀 갈 으라고 아침부터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이 자식이 말을 안 듣는다. 아이고, 내 팔자야. 할 수 없이 내가 밭 갈러 간다. 아이 더럽다.” 이런 내용도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만큼 노예가 있어도 노예를 함부로 억압하고 짓밟을 수 없던 사회였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플라톤이 쓴 대화록 중에 하나를 보면 아버지가 노예를 죽었습니다. 그 아버지를 법정에 고소하러 가는 사람하고 소크라테스하고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크라테스가 “너는 어떻게 아버지를 고소하러 할 수 갈 수 있느냐 하니까?” 정의가 잘못되었다. 왜? 노예라고 해서 아버지가 죽이면 안 된다. 그러면 네가 아버지를 고발해 가지고 교도소에 쳐 넣으면 그것은 정의냐? 무엇이 옳은 것이냐 하는 것을 가지고 논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그 당시에 충분히 그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그런 운동이 일어나면서 소위 말하는 인간성의 재발견이라는 것이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인간성의 재발견이라는 것이 세속적 인문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이 볼 때에는 이것이 이러한 르네상스가 지향하는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각도에서 보면 이 인간성을 지배하고 말살하고 짓밟은 장본인이 교회에요. 그런데 원래 성경이 그리는 교회는 인간을 그렇게 짓밟고 말살하게 안 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냐 하면 기독교가 비 성경적이 된 것 만큼 참된 인간성을 짓밟고 억압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벗겨내고 그릇된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참된 교회를 세우고 참된 인간으로 돌아가서 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첩경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사람들이 여기에서 화두를 삼는 것 다시 말하면 교회를 올바른 곳으로 돌려야 되겠다고 생각할 때에 화두를 삼아 왔던 것은 무엇이냐 apostolic church(사도적인 교회)이며 그러면서 이 사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학사상에 주목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15세기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에서의 교회개혁의 이상과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교회개혁의 이상이 거의 유사했지만 방법에 있어서 이것은 복음으로 직행했고 여기에서는 사도들을 통해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다시 보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그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제임스 파커가 쓴 책 중에서 ”기독교 휴머니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이 두꺼운데 그 요지가 무엇이냐 하면 기독교만이 진정한 휴머니즘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휴머니즘과 기독교가 완전히 대치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기독교만이 진정한 휴머니즘을 보장한다. 기독교만이 진정한 휴머니즘을 보장한다.” 그런데 이런 모든 사상들이 결국은 어디에서 나오나 하면 이런 사상이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모든 자유로운 사상의 거두를 만나게 되는데 이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위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천재라고 생각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제가 칼빈을 존경하지만 천재라고 생각 안했습니다. 지금도 조나단 에드워즈가 아주 탁월한 사람이긴 하지만 다들 천재라고 부르지만 나는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위에서 섭섭하실지 모르겠지만 뭐 사람의 판단은 각각 다르니깐 존 오웬도 위대한 신학자이긴 하지만 나는 읽으면서 이 사람이 천재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천재에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특히 존오웬은 십대에 너무 공부를 해서 거의 죽을 지경에 까지 가서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공부를 해야 돼 어느 정도까지 해야되느냐하면 건강에 위협이 올 때가지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공부하다가 실려 가야 됩니다. 왜 웃습니까? 건강에 위협이 올 때까지 스펄젼이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죽도록 일하십시오. 그러다가 진짜 죽게 되면 살려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래서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죽도록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진짜 죽을 것 같다. 그러면 들것에 실려 가면서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또 살려주십니다. 그러면 또 죽도록 공부해야 합니다. 또 살려주시면 또 공부하고 그러다 언젠가는 응답이 안 되고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 책을 읽으면서도 참 탁월한 분이다. 오죽했으면 제가 외국에 학자들이 오시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나는 이 교회의 담임목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존 오웬 목사님이 담임목사고 나는 부목사다. 우리 담임목사님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럴 정도로 내가 존중하고 그리고 우리 교회에는 존 오웬 파크도 있고 칼빈파크도 있고 조나단 에드워드의 파크도 있고 크지는 않고 조그만큼만 있습니다. 이번에 아우구스티누스 파크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제일 돈을 많이 들여서 크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예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딱 무릎을 끊고 아 이 사람은 천재구나 그렇게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단 한사람입니다. 단 하사람 그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모든 신학자들이 강과 같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모든 강이 흘러들어가서 만나는 거대한 바다입니다. 모든 신학자는 그 사람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품안에 들어오면 한없이 배를 저어가도 여전히 아우구스티누스 품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유명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아우구스티누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도 비판하는 방법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은 자기 품으로 모두 끌어들여서 비판하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여서 그래서 결국은 자기 사상 안에서 놀도록 끌어들였습니다.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250권의 책을 썼습니다. 할 수 있으면 다 읽어야 합니다. 정말 위대한 사람입니다. 먹을 것이 많으면 부담이 안 되지만 공부할 것이 많으면 부담이 됩니다. 그런데 정말 위대한 인물입니다. 지금 여태까지 말씀드린 모든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착한 학생들입니다. 그 정도 수준입니다. 이 과학 철학도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사실은 상당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심지어는 철학 역사 미학 심리학의 시조입니다. 그리고 기호학까지 만들었습니다. 기호학 아우구스티누스의 기호학은 아주 유명합니다. 그런 아주 다방면에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인문주의가 이런 점에서 기독교가 르네상스를 받아들이면서 참된 인간성의 회복인데 일체의 제약이 없는 완전한 자유는 결국은 인간에게 구속일 뿐이다. 그러면 결국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이것이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보면 헤겔의 철학에서 보면 인간은 거대한 보편 속에 있는 기계와 같은 한 존재일 뿐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보면 인간은 타자와는 아무상관이 없이 던져진 개보노펠 화이트라고 합니다. 휙 던져진 것입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왜 내가 여기 태어났냐? 그런 것 묻지마라. 모른다. 꼭 내가 필연적으로 있어야 되느냐 아니 그러면 왜 태어났냐? 우연히 무슨 목적을 위해서 태어났나? 그런 것 없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마지막에 무엇이냐 하면 인간은 완전한 자유다. 무엇이 선이고 악이고 스스로 결정한다. 자신의 인생의 목적은 합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찾아가는 것이다. 그 목적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인간은 무제한의 자유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데 그 자유는 무시무시한 자유다. 왜? 그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 우주 속에 탁 내동댕이쳐졌는데 너무 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밖에 인간은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과 철학에 의하면 인간은 이렇게 나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냐하면 가치망이라고 부릅니다. network of value 가치망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에 무엇이 사물을 여기에다가 나야지만 이쪽으로는 무엇이 있고 이쪽으로는 무엇이 있고 이쪽으로는 무엇이 있고 이쪽으로는 무엇이 있고를 보면서 이것이 어떤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누구냐? 라고 할 때에 그 규정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인간이 누구냐?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 그런데 어렵습니다. 기독교만이 이것을 확실하게 설명해 준다는 겁니다. 기독교만이 이것을 확실하게 설명해 줍니다. 그래서 어느 철학자가 키케로의 책한 권을 극찬을 하면서 자기는 그것을 보면서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급히 미국으로 연락해서 총알같이 보내라고 해서 한 3일 만에 책이 왔습니다. 그 책이름이 무엇이냐 하면 키케로의 “선과 악의 궁극적 목적” 이라고 하는 긴 제목의 책입니다. 디피니부스 말로름앤보로름이라는 책인데 그래서 오자마자 읽기 시작을 했습니다. 한 이틀인가에 다 읽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실망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인간의 참된 행복이 무엇이냐 목표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끊임없이 자기를 합치시키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야 휴면 내처라고 하는데 그런데 책이 끝날 때까지 그 휴면 내처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설명을 안 한 것입니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인데 그러니깐 불명의 존재 불명의 대상을 목적으로 정해놓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이것입니다. 여러분 요새 각광을 받고 있는 철학자 한사람이 있는데 엠마누엘 레비나스라는 사람인데 프랑스 철학자입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쳐보면 그러면 한글로 번역된 책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몇 권사서 보면 그런데 쉽지는 않지만 그렇지만 어렵지도 않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지 지난번에 한국에서 유명한 원로 철학교수와 만나서 이야기를 했는데 엠마누엘 레비나스에 대해서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해서 나는 그랬습니다. 하나님 없는 아퀴나스 주의자 하나님을 배재해 버리려는 아퀴나스적인 사유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타자 남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너의 존재는 네가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있다는 사실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타자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타자에 대한 배려는 곧 너에 대한 배려다. 하나님이 모두 타자라는 단어로 말하자면 융합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철저히 부인하는 것. 그리고 그 신의 얼굴이 타자 속에 나타나 있다. 타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네 자신에게 스스로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너의 존재의 의미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찾아라.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배재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정확하게 말하면 타자와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결국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는 타자를 생각할 수 없고 타자를 존중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관념이 없이는 타자에 대한 관계를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타자에 대한 생각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을 아주 정교하게 풀어낸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칼빈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이제 성경에 보면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나옵니다. 그것이 두 단어로 나오는데 챌램이라는 단어와 그 다음에 데무트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형상과 모양이라는 이것이 대개 같은 말에 반복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나로 이마고라고 통합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놓고도 이제 논쟁이 많고 어떤 사람들이 이것을 외형적인 모양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하는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구약의 현현시대 신의 현현이라는 것들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런 것들은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아닙니다. 어쨌든 이것을 어떻게 설명을 하냐하면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을 닮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성들입니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하냐 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사람을 사랑해야 된다. 그러니까 하나만 지키면 안 되고 둘 지켜야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써 가능하다고 하는 명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칼빈이 어떻게 설명하나 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가장 닮은 것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들이 연애를 한다고 치면 사랑에 빠졌습니다.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이민을 갔던지 죽던지 어디를 갔던지 그러면 그 사람과 연관을 이루고 있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클 것입니다. 같이 갔던 찻집 아니면 같이 보던 영화 아니면 같이 마시던 차 아니면 주고 간 선물 등등에 대한 생각들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은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은 인간 안에 남아있는 이마고데이에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지만 이 인간의 흔적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하나님을 닮은 흔적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이 나누어지면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고 설명을 합니다. 아주 정교하게 설명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훨씬 도사와 같은 언어로 풀어냅니다. 무엇이라고 하면 요한복음 주석에서 설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당신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거기에 형제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거기에 하나님 말고 누가 계시겠습니까? 이해됩니까? 가슴에 와 닿습니까? 그래야 아우구스티누스를 좀 더 배울 수 있습니다. 더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랑은 정의를 완성한다. 더 심한 이야기를 합니다. “최고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것이 정의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데 그 말씀이 진짜 같습니까? 거짓말 같습니까? 솔직히 우리끼리 이야기 이니까 잘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덧붙여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everything,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진리가 그 사람 안에 충만하게 거할 때에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는 것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매님이 나를 성도로써 목사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합니다. 너무 너무 사랑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들어주고 싶어 그런데 어느 날 와서 나대신 죽어 주십시오. 아니면 당신 재산을 다 나한테 넘기시고 당신은 호주를 떠나십시오 이렇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음 푹 놓고 그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해라 네가 내안에 거하면 나의 말의 너희 안에 거하면 네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일 거다. 그것이 사랑의 원리이고 이것이 사랑의 합치성입니다. 너무 자식을 사랑하면 엄마가 엄마의 인생의 목표가 없어집니다. 자식 잘되는 그 안에서 자신도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엄마가 그렇지 않으면 계모입니다. 진짜 엄마는 그 안에서 녹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목사는 교회 안에서 주님이 충분히 행복하시면 그것으로 자신도 행복해지는 사람이 진정한 목사입니다. 이 원칙이 적용되면 문제가 될 것 없습니다. 동의가 됩니까?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다가 곁가지로 많이 나왔는데 어쨌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이야기 하다가 과학철학과 연결하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런 가치망 속에서 인간의 존재가 누구인가 하는 것들이 가슴속에서 확연하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이 계시고 좌우로는 사람들이 있고 이 아래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선량한 관리자로써 돌보야 하는 그런 목자와 같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느냐? 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되다가 계속와요 오는 것입니다. 르네상스 지나가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던 Enlightenment(계몽주의)들어옵니다. 더 짧고 붙여야 됩니다. 계몽주의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계몽주의가 들어오고 이신론이 들어오고 그 다음에 이 세계는 과학적인 질서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무엇이냐 하면 계몽주의도 레디칼(radical)이 있고 마더레이트가 있습니다. 첫째 무엇이냐 하면 레디칼입니다. 레디칼니즘 극단적인 계몽주의에서는 이미 지금 현대사상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모든 의미와 가치를 이런 것들을 묻는 모든 연결들을 다 끊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현대 사상이 이미 여기서부터 배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온건한 마더레이트한 그 입장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는 무엇이냐 하면 이 과학적으로 모든 것들이 움직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논리적으로 학문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상위의 가치의 세계가 있어서 거기에서 인간의 보편 타탕한 그 도덕의 원칙이라든지 아니면 인간이 살아야할 어떤 절대적인 도덕률 가치율 이런 것들이 존재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이야기 하는 common sense morality(공통 도덕 감각)이라고 나타납니다. 이것은 신테레시스(Synteresis)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로 나타났습니다. 여기는 아주 목소리가 작았고 이것이 아주 굵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것들이 쭉 오다가 그러다가 이것들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19세기에 소위 이야기하는 프레드리 니체라는 사람이 등장을 하면서 이런 보편적인 가치와 실제 이런 것들에 대한 철저한 결별을 선언하고 이 사람이 위버멘쉬이라는 개념을 내세워요.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위버멘쉬 우리들이 초인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초인 그것이 아니라 극복인 입니다. 극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인간은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한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할 운명에 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로 실존주의 철학이 들어오면서부터 이런 모든 것들은 다 이런 그 레디칼니즘이 이제 굵은 목소리가 되었고 이것은 작은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어떻게 되었냐하면 소위이야기 하는 메타담론이라고 그러지 않나요? 선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이런 것들은 인간의 과학적사고로 해명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학문의 대상도 안 되고 이것은 토론의 탁상에 올려놓을 자격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냐하면 이런 것들이 채워지며 그러면서 사상적으로 여러분 아까 예술사 적으로 끊어졌지만 이제 계몽주의가 일어가고 경험주의 일어나고 이제 낭만주의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모든 사유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전통적으로 인간의 이성 이것이 제일 위에 있고 그 다음에 인간의 감정이 여기에 있다고 봤고 그 다음에 제일 낮은 위치에 인간의 의지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이 전통적인 인간관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벌써 11세기경에 오면서부터 이것이 위협을 받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인간의 의지가 훨씬 더 인간에게서 더 중요한 요소라고 내세웠던 사람이 두스투코투스 같은 사람이 이것을 내세운 것입니다. 이것이 주지론 그 다음에 주정론 주의론 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요것은 좀 늦게 논의 되었지만 이것이 우선이냐 이것이 우선이야 계속해서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그러다가 그다음에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고 뭐 그런 것이 다 필요가 없으니깐 여기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인간의 이성이 가장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신앙의 통제를 받는 즉 다시 말해서 계시와 은총아래에 있는 인간의 이성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것들이 이미 은총이라는 것이 제거되어버리고 계시라고 하는 것이 부인되어 버렸기 때문에 나를 만드는 이 이성이 최고의 가치 판단의 주체라고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진리라고 하는 것 자체에 진리를 무엇이라고 하냐하면 베리따스(veritas)라고 하는데 진리이며 truth입니다. 이것은 희랍어로 알레데이아라고 하는데 레데이아는 감춰진 것이고 알레데이아는 안 감추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그냥 노출된 그런 듯이고 여기에서 테오리아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부인 할 수 없도록 스스로 명백하게 들어나는 것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인간 밖에 있고 진리에 대해서 인간은 수동적이라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은총으로 무지한 인간에게 빛을 비추어주셔서 그래서 이 눈을 열려서 이 진리를 보게 해주면 거기에서 올바른 판단이 오고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이 전통적인 견해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견해인데 이것을 부인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 최고의 위치에 차지한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런 극복인의 개념 같은 것들이 나오게 되는데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 모든 인류가 잊혀질 수 없는 두 가지 커다란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입니다. 1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인간의 이성은 스스로 선을 찾아갈 수 있다고 하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신뢰가 산산이 부서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하냐하면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인간이 너는 믿을 수가 없다. 너는 보좌에서 내려와라 너를 믿어서는 되는 일이 없다. 끌어 내려요 이성을 끌어내리면 그다음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실 감정과 의지는 하나입니다. 이미 감정이 싫은 쪽으로 움직이면 안하겠다는 의지이고 좋은 쪽으로 감정이 움직이면 이미 하겠다는 의지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감정은 사실은 의지와 일치된다고 사실 보았고 그렇게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도 인간을 이성과 지성과 의지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유구한 전통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이성한테 너 내려와 임마 너는 이제 그럴 가치가 없어 내려와 그리고 그 다음에 여기에 형체 불명의 무엇을 올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지와 감정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어떻게 되요. 이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가치 판단을 이미 다 부인하고 버렸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행한다고 해서 그것을 나쁘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고 저것을 행한다고 해서 나쁘다고 이야기 할 수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런 것이 있다면 한사람이 각자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니까 사회에 무슨 나쁜 역할을 주느냐 이웃에 행복에 무엇을 주느냐에 따라서 약간의 귀속적인 판단을 받을 뿐이지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철학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크레타인의 역설 이라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크레타인의 역설을 들어보셨습니까?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옛날부터 그런데 크레타인이 명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이 맞아도 말이 안 되고 틀려도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이 사람이 크레타 인이야 그럼 맞는 이야기를 한 것인데 그리고 크레타인은 거짓말 장이라는 명제가 성립을 안 한 것입니다. 이 자체가 틀리다는 것을 이 케이스가 입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라는 말이 틀려요. 그러면 명제자체가 거짓말이니까 명제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이 너 이성은 믿을 수 없다 내려와라 그래요 이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성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신뢰할 수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하면 이렇게 가다가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여기에서 다다이즘 허무주의 같은 수많은 사상들이 여기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 묻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그쪽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이때에 이 어간에서 아주 중요한 철학자 한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천재라고 부릅니다. 그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사람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태어나서 철학자의 길을 가면서도 버트란트 러셀 밑에서 일했습니다. 버트란트 러셀에게 가서 굉장히 부자였고 돈도 많은 사람이었는데 세속과 상관없고 결혼도 안하고 그냥 공부만 하던 사람이었는데 내가 철학자로서 역량이 되는지 한번 좀 읽어 봐달라고 논문을 하나 보냈는데 막 그런데 무릎을 치면서 당신은 다른 것은 하지 말고 철학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버트란트 러셀하고 도움을 받으면서 철학을 시작했지만 나중에 버트란트 러셀 관계가 틀어지고 스승이 자기 사상을 잘 이해를 못한다고 이렇게 생각할 정도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철학의 대전환을 가지고 왔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여태까지는 선이 무엇이냐 절대가치가 무엇이냐 이런 것은 논쟁했는데 그것다 쓸데없는 것이다. 결국은 마지막에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언어다. 언어 모든 인간에게 일어나는 철학적 혼란의 주범은 언어다 그러면서 이제 언어의 불완전성 문제를 지적을 하면서 2권의 유명한 책을 씁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논리철학 논고와 그다음에 2권의 책을 쓰는데 한권의 책을 써놓고 이 사람이 논리적 철학적 논고라는 책을 쓰고 이것으로써 인류의 역사의 모든 철학의 문제를 풀었다고 종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요만한 책입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그리고 시골에 초등학교로 갑니다. 그러다가 거기에 있으면서 자기의 모순을 발견하면서 다시 복귀하면서 다시 2번째 철학을 쓰는데 철학논고라는 책을 씁니다. 어쨌든 이 책을 쓰고 나서 그것이 이제 그 철학의 커다란 방향 전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제 옛날처럼 인간은 어디에서 왔고 이런 철학적인 사유와 담론을 다 버려버리고 그리고 언어와 그다음에 논리 그것들을 수학 화하는 소위 진리 함수표라고 하는 것이 나오는데 그러한 함수표에 의해서 거짓과 참을 가려내는 의사소통 역할을 하는 이치를 철학의 임무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과학 철학하고 어떻게 연결이 되냐 하면 이런 식으로 되어가고 나니까 그 다음에 철학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뭔가 의미를 묻고 그다음에 인간의 기원이 무엇이고 신은 누구고 그래서 인간은 피조물과 어떤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윤리적인 담론을 이끌어내고 이래야 되는 것인데 철학이 윤리적 결론을 이끌어 내는 방법으로서 철학을 하는 것은 이것은 아주 학문에 있어서 매춘행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윤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제 생각이 바뀌어서 철학에 있어서 도덕이라는 문제는 그냥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지 그것을 무엇을 철학이 그것을 밝혀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철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들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철학은 전통적인 관심사들을 다 멀리하고 그리고 그렇게 언어와 사실에 대한 분석으로 집중을 하게 되는데 과학 철학이 바로 그렇게 과학에서 일어나는 과학적인 현상들을 이런 것들을 가지고 설명하고 그런 어떤 개체적인 성격으로 파편적인 학문으로 전락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의 과학 철학은 그 과학적 분석을 우주적인 지평 속에서 기독교신학적인 의미로 밝히는 작업을 해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의 과학은 단순한 과학책이 아니라 과학에 대한 신학적 해석 물론 거기에는 우리들이 지금 조나단 에드워즈 이후 300년이 과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들이 신뢰할 수 없는 부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같은 비전문가가 봐도 이것은 틀렸다라고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당시에 수준에서 과학지식을 과학을 그냥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그것에 섭취되어서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이 속출하던 시대에 그 과학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재해석 해내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과학 속에 있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을 그런 용기를 신학자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당대에 밀물처럼 밀려오는 이 거대한 뉴튼니즘의 사상에 맞서서 이 뉴트니즘을 사용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창조세계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게 했다고 하는 이 사실자체가 여러분들의 가슴을 뛰게 하지 않나요. 이것을 보면서 가슴이 뛰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