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과 사상 8
녹취자 : 홍연주
8페이지를 보시면 자연학에 대한 에드워즈의 관심이 나옵니다. 인용문 하나 읽어보겠습니다.
“자연의 모든 역사들 중에서 천둥과 번개만큼 나에게 그렇게 달콤한 것은 없다. 이전에 아무것도 나에게 그렇게 끔찍한 것은 없었다. 나는 천둥 때문에 극도로 공포에 휩싸이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뇌우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을 때 공포가 나를 강타하곤 하였다. 그러나 지금 반대로 그것이 나를 즐겁게 하였다. 나는 뇌우가 시작되면 하나님을 느꼈다. 그래서 구름에 시선을 고정하고 번개의 연주를 보고 하나님의 음성인 장엄하고 두려운 천둥소리를 듣는 기회를 갖곤 하였다. 이것은 종종 즐거움을 능가하여 나로 하여금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우신 나의 하나님에 대한 달콤함으로 나를 인도한다. 그래서 그것을 보느라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이는 나의 묵상들을 노래하는 것이 나의 생각들을 독백으로 말하고 노래하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나에게 언제나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주 굉장히 아름답죠? 에드워즈의 작품을 보면 스윗(sweet)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스윗(sweet) 스윗트니스(sweetness). 요즘 사람들은 그런 거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얼마나 풍부한 체험 속에서 살았는지 보게 됩니다. 계속해서 읽어보겠습니다.
“회심하기 전까지는 그토록 두렵고 무서웠던 자연의 변화 앞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우주에 가득 찬 임재를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교육에 있어 결핍하고 있는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태도는 physica – logica - ethica의 상관관계 속에서 가르치던 그리스적 사유의 방식을 반영한 것이다. 예일판 제6권 전집이 다루고 있는데 이 책을 숙독하면서 나는 뉴턴주의에 대한 에드워즈의 해석들 중 어떤 것은 이상하기도하고 과학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내용들이 있었다. 그러나 자연과학에서 발견한 사실들을 신학으로 연결시키는 그의 시도를 보면서 학문 방식에 대해 많은 암시를 받았다. 만약 내가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하여 자연학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그의 과학 철학에 대한 신학적 해석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천문학과 생물학, 의학에 대해 공부할 계획을 세운 것도 아비첸나(Avicenna)의 작품들과 함께 (아비첸나는 이슬람 신학자입니다. 이 사람이 매우 기독교에 중요한 영향을 끼쳐요. 인터넷을 검색해보세요. 아비첸나와 함께 아베로에즈(Averroes)라는 사람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세요. 알가잘리(al Ghazali), 알파라비(al Farabi) 이런 사람도 검색 해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노력을 하세요.) 에드워즈의 과학철학이 그들을 보면서 받은 도전 때문 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일 년 동안 가정교사의 도움으로 천문학을 공부했는데 신학을 이해하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진짜 일 년 동안 제가 천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신학에 있어서 풀리지 않던 많은 의문들을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풀 수 있었습니다. 그건 다음 기회에 봅시다.
윤리학. 8권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책입니다. 그래서 이 책이 한글로 번역되 나왔다고 하는 것은 정말 축복입니다. 빨리 가셔서 사시고 돈이 없으시면 다른 책을 팔아서 사십시오. 이것은 설명을 했기 때문에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서 『천지창조의 목적』, 『참된 미덕의 본질』 마지막에 『사랑과 그 열매』 3권으로 되어있는데 세 책이 한 권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사랑과 그 열매 (The Charity and its Fruits)는 고린도 전서 13장을 설교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이것을 14번 설교를 해서 한글로 번역 된 것이 450페이지정도 나옵니다.
사실 내가 에드워즈의 책을 거의 읽었는데 이건 안 읽었습니다. 일부러 안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독자적으로 고린도전서 13장에 대한 해석을 하고 책을 내고 그 다음에 내가 읽겠다. 해서 아직 안 읽고 있습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인용문이나 이런 것들은 다른데서 봤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읽지는 않았습니다. 아직도 안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제가 고린도전서 13장을 30번에 걸쳐했습니다. 2년 걸렸습니다. 30회에 걸쳐했고 그것이 지금 원고가 마련되어있어 그것을 가지고 책을 금년에 쓰는 것이 목표인데 900내지 1000페이지 정도입니다. 그래서 써 놓고 출판을 한 다음에 보려고 합니다.
내 원고를 설교로 들었던 학생이 조나단 에드워즈하고 비교를 하면서 자기가 읽노라고 얘기를 하는데 가끔 와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너무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심취했던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사랑의 신학, 영원의 신학, 시간 그 다음 18세기에 있었던 조나단 에드워즈 정동이론 18세기 영국 경험주의자들이 중요한 원천이 됩니다. 저도 그 자료를 읽었습니다. 주의 깊게 봤고 200여권정도 어렵게 구해서 제본을 해서 가지고 있는데, 그랬기 때문에 그런데서 오는 소스가 겹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저대로 한번 해보고 싶고 나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를 금년에 쓰려고 하는 것입니다. 금년에 안 되면 내년 말 까지 라도 해서 서두르지 않고 1000페이지정도 고린도전서 13장에 대한 해설을 내놓고 싶다 라는 그런 입장입니다.
그다음에 삼위일체론으로 넘어갑니다. 21권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어려운 내용인데 에드워즈의 『Trinity, Grace, and Faith』 21권에서 삼위일체 칭의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에드워즈의 칭의론으로 들어가면 독특한 칭의론이 나오고 이것들이 굉장히 복잡한 논쟁들을 불러오는데 시간이 너무 갔으니까 간단하게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삼위일체는 신론 해석이 삼위일체의 주종을 이루는데 솔직히 나의 느낌으로는 18세기 개혁파정통 주의자들의 신론 진술에 비하면 그렇게 탁월해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어의 진술의 정교함 깊이 면에서 미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기롤라모 잔키우스(Girolamo Zanchius), 마스트리히트(Petrus Van Mastricht), 코케이우스(Johannes Cocceius) 이런 사람들의 삼위일체론으로부터 다양한 내용들을 차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이 성명론 중심의 해석을 따랐다고 여겨졌는데 이것은 에드워즈의 독창적인 것 이라기보다는 이미 있었던 삼위일체 안에서의 사랑의 해석문제 그것을 성령의 초점에 맞춰서 해결 한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교회 에서는 전통적으로 삼위일체를 이야기하면서 소위 얘기하는 셋을 먼저 이야기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이야기하고, 유니티가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존재하신다면 이 분이 삼위일체라고 할 때 체는 몸을 가르키는게 아니라 본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 위격인데 하나의 본질을 가지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부 성자 성령이신 이 분이 어떻게 한 하나님이실 수 있느냐. 이것을 가지고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이론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이게 교통, 통로, 유통 이런 의미를 가집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위격은 다르지만 이 안에 페리코레시스가 이루진다. 페리코레시스가 이루지는 내용이 뭐냐하면 하나님으로서의 신적 본질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삼위를 먼저 설명하고 페르코레시스의 이론을 통해서 삼위이시지만 하나의 신적 본질을 소유한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이것이 동방교회의 전통이고 서방교회에서는 한 하나님으로 설명하고 하나의 신적 본질인데 셋으로 삼위에 의해서 공유된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은 성부 성자 성령이 어느 위를 배제하고 사역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주되게 간섭하시는 사역이 있는데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개별적으로 역사하신다고 보는 것입니다.
(서판설명)
어느 위가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사역에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 중 한 위가 주도적으로 관여하는 모양으로 하나님이 구속의 경륜을 이루어 가신다고 보는 것입니다. 존 오웬은 이것을 발전시켜 위격들과의 교통이라고 하는 독특한 교리를 우리들에게 제시를 합니다. 그게 존 오웬 전집 제 2권에 나오는 커미니언위캇 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그 책을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도 성부와 성자 성령과 각각 교통한다. 그래서 성부는 하나님의 사랑 성자는 은혜 성령은 위로를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면서 우리가 만약에 충만한 사랑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지만 특별히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통이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 그다음에 은혜를 많이 느끼고 있으면 그것은 성자와의 주도적인 교제다 이런 식으로 설명 합니다. 청교도의 라인 안에 있는 건전한 신학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보고 깜짝 놀라 이단 아니냐 하는데 이단 아니고 자기네들이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이단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 신앙 정동론이 등장합니다. 신앙 감정론이라고 부흥과 개혁사 에서 번역을 했습니다. 정동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강의하고 설교하다 단어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정동, Affection 이라고 하는데 번역하기 굉장히 어려운 단어입니다. Affection이 그냥 감정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고 특별히 사랑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은 감정을 나타낸다기보다는 감정의 움직임입니다.
예를 들자면 수면이 잔잔한데 누가 돌맹이를 던집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결이 치다가 잔잔해집니다. 감정이 이렇게 움직이는 것 이것을 정동, Affection이라고 합니다. 영어에서 Affectionate라고 하면 열렬한 요즘은 잘 쓰지 않습니다. 감정이 이 안에서 계속 출렁이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감정의 움직임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어펙션(Affection)이라 하는 것은 영혼의 활발한 활동이다, 영혼의 활발하게 움직이는 움직임이 바로 이것이 감정이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이 왜 이렇게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중요한가 하면 배경이 어떻게 되느냐하면 신앙 감정론이 에드워즈가 1736, 1740년대에 커다란 부흥이 일어나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기독교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었던 사람들이 신앙을 갖기도 하고 각성을 하고 예수를 제대로 믿겠다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1년 동안 세례를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극적으로 주님을 만났는데 이들이 진짜 회심인가 하는 것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열렬함과 강렬함 가지고는 판단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1년 동안을 두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줍니다.
그러면 결국 무슨 얘기냐 하면 신앙 감정론 이라는 것 자체가 참으로 성령이 진리를 가지고 역사하셔서 움직인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참된 감정인가 아니면 일반적인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과연 어디에 속하는 것인가를 분별할 수 잇도록 하는 것이 이게 신앙 감정론을 쓴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사실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책입니다. 철학적인 책은 아닌데 내 생각엔 차라리 어렵게 썼더라면 쉽게 이해 될 수 있는 책인데, 쉽게 설교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들을 내포하는 책이다 라고 생각이 되어 집니다. 그러나 신앙의 체험이 깊어지고 말씀의 이해가 넓어지게 되면 이 책은 아주 커다란 유익을 주고 이 책과 함께 짝을 이루는 책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책입니다. 이 두 개를 같이 읽으면 아주 좋습니다.
그 다음에 신앙 정동론을 얘기하면 긴데 신앙 정동론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18세기 영국철학의 영향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18세기에 영국에 경험주의가 선풍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했습니다. 경험주의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영국 경험주의가 있었습니다. 경험주의가 내려오면서 경험주의를 주도했던 사람들이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이었지만 이 사람들은 우리들이 의미하는 그런 고전적인 의미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아니었습니다. 이신론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뭔가 보편적인 가치 도덕 근거를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경험주의가 신학 쪽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면서 소위 이야기 하는 스콜라 아우구스티나 모데르나 라는 운동이 일어납니다. 뭐라고 번역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오늘날의 아우구스티누스의 학문 근대적인 어거스틴학의 부활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경험주의가 옥스퍼드와 켐브리지에서 그 당시에 플라톤 주의, 네오 플라톤, 신 플라톤 주의의 부활이 화려하게 이루어집니다. 플라톤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초창기에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복음 이전에 예비한 선구자라고 얘기할 정도로 존경합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을 그대로 따랐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중요한 점에 있어서 일치를 이루었던 것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철학계안에 불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운동이 신학에 영향을 미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학문에 부흥을 가져옵니다. 그때 기독교 사상가들의 관심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소위 얘기하는 Moral aestheticism 번역하면 도덕심미주의. 무슨 뜻이냐 하면 결국 인간은 좋아하는 것을 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어떤 조건이 인간의 마음속에 좋다 라는 느낌을 주어서 도덕적으로 그것을 결정하게 하는가 라는 것이 말하자면 탐구하는 것이 이 시대 사람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여기서 나온 이론이 정동이론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있으면 인간이 정신 속에서 뭔가를 바라보고 인식할 것 아니겠습니까? 지식에 대한 대상을 보았을 때 이것이 어떤 예쁜걸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하면 이 지식을 인식했을 때 이게 결국은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킬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이것이 사물의 대상에 대해 가지고 온 인식과 인식 속에서 느끼는 도덕적인 미감이 함께 작동하면서 이것이 감정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업적이었습니다. 경험주의자들의 경우에는 인간이 백색 서판의 상태에서 학습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런 논리가 뭐가 문제냐 하면 인간이 대상물이 없어도 상상을 하지 않습니까? 상상을 하면 신 사과 생각을 하면 침도 나고, 나한테 고통을 주었던 사람을 생각하면 30년 전의 일인데도 속에서 복수심이 일어나고, 40년 전에 죽은 사람인데도 꿈을 꾸면 그리워서 눈물이 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은 대상이 없는데도 인간의 마음이 끊임없이 창조적인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실은 경험주의에서 설명이 안 되는 것이 없는데 에드워즈는 이것들을 18세기에 정동이론을 차용해서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진리를 알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이 모든 인간의 마음의 구조를 설명하는데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정동이론이 풍부하게 실려 있는 게 사실은 신앙감정론이 아닙니다. 신앙감정론에는 그렇게 자세히 실렸다고 말할 수 없고 오히려 미셀러니에 들어가면 흩어져 있습니다. 흩어진 것들 중에서 이것들을 모아 보면 거기엔 아주 깊게 이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가 나와 있고 실제로 레이드나 샤프츠베리 이런 사람들의 원작들이 인용이 되면서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자료들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이용해 정동의 구조들 신앙정동론의 가장 중요한 명제가 무엇이냐 하면 신령한 경험은 은혜로운 정동의 원인이다. 신령한 경험은 신비체험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경험 경험은 은혜로운 감정의 움직임을 가져오는데 그 은혜로운 정동의 결과가 사랑이다. 사랑의 성향이 계속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줄 알고 마음이 끊임없이 사랑에 정동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건 어느 날 난 완성됐다라고 말 할 수 없고 매일매일 그런 은혜 속에서 살아야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것들을 아주 정교하게 펼친 것이지요. 아마 역사상 그렇게 상세하게 설명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아주 탁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신앙감정론 만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에드워즈의 작품 속에 흩어져있는 여러 저작들을 봐야합니다.
자유의지론. 이것은 고통을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밑에 각주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11페이지 자유의지론 셋째 줄에 나옵니다. Philip F. Gura 에 “Edwards and American literature” 이 책을 읽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술 취한 미치광이가 쓴 책으로 묘사했는데 이 사람이 에드워즈 전체 사상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서 그랬다면 나는 제발 에드워즈가 자유의지론에서 개혁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그런 의지론과 다른 이론을 말하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에서 혼란을 느낀 사람이다. 생략하겠습니다. 이것은 얘기를 아주 많이 하고 머리에 쥐가 나도록 철학이야기를 해야 이해되는 부분입니다. 넘어가겠습니다.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번역되어있는 책이 있는데 오히려 읽으면 원서보다 더 어렵습니다. 이것을 번역할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작품입니다.
원죄론. 아까 말씀드렸듯이 존 테일러(John Taylor)라고 하는 알미니우스 주의자가 있는데 이 사람은 인간의 자유, 인간을 성선설의 입장에서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다. 이런 강조하는 반 칼빈주의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영국교회를 공격하고 있었는데 이런 사상을 뉴잉들랜드에서 아주 급히 받아들였습니다. 왜 이런 사상들이 잘 빨아들이 듯이 흡수되냐 하면 인간을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존재로 보는게 싫은 것입니다. 독립적인 존재로 보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해석을 내놓고 싶어 하고 인간을 하나님의 은총, 구속, 회개, 중생 이런것이 없으면 희망이 없는 존재로 보는 자체가 자신들의 시대의 정신에 안 맞는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모든 판단의 주체가 됐는데 그렇게 인간을 깎아내리면 안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상들이 누룩처럼 번져갑니다. 그래서 원죄론을 쓰게 됩니다. 원죄론을 쓴 것이 성공적인 디팬스가 됐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에드워즈 말년에는 이런 사상들이 누룩처럼 번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프리덤 오브 윌도 마찬가지입니다. 초판을 썼는데 270권 밖에 팔리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칼빈주의적인 설명에 이미 염증을 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책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이 사람이 쓴 개인적인 편지와 서신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꼭 참고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책속에서 다 못한 이야기들에 대한 설명들이 나옵니다.
설교집. 사실 사람들이 제일 무시하는 것이 설교집입니다. 하지만 설교집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에드워즈의 신학과 철학, 사상, 성경 이 모든 것들이 다 융해되어 융합되어 마지막에 사람들과 소통 할 수 있는 형태로 장엄하게 작성되어 나온 것입니다. 설교의 내용이 아주 논리적이고 탄탄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이해가 안가면 몇 편 만 이라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소 듣던 설교와는 완전 다른 설교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느 설교를 펴도 깊습니다. 깊이가 있고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설교집이 꽤 많습니다.
오히려 설교집 만 잘 읽어도 에드워즈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설교집을 제일 잘 읽지 않습니다. 누구하고 이야기 할 때 프리덤오브윌, 릴리져스어펙션, 미셀러니 읽었다고 하면 말발이 서지만 설교집 읽었다 하면... 그런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 보이려고 읽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진짜 많이 읽고 이해한 사람들은 잘난 척 하지 않습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입니다. 저는 항상 후학들을 만나면 에드워즈의 설교를 많이 읽어라, 칼빈도 설교를 많이 읽어라, 아우구스티누스도 설교를 많이 읽어라. 그때 그 사람이 무슨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가장 잘 알게 된다. 그렇게 소개를 합니다.
13페이지에 보면 에드워즈의 설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갑시다. “에드워즈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장 소홀하게 생각하는 장르 하나가 설교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그의 모든 사상의 집약이다. 그는 지금처럼 파편적으로 신학을 해석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통합적인 신학을 가지고 설교를 하던 사람이었다. 에드워즈는 다른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경진리를 진술함에 있어서 두 가지 가르침의 방식 모두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논쟁적 방식이었고 하나는 대중적 혹은 교과적 방식이었다”.
그래서 학자들과 논쟁 할 때는 첫 번째 방법을 사용하고 교인들에게 설교 할 때에는 두 번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칼을 날카롭게 세워서 분석하고 쪼개고, 두 번째는 모든 논리를 뭉툭하게 만들어서 모든 것을 끌어안는 통합적인 방식으로 진리를 전달했던 것입니다. 전자의 목표는 지성의 굴복에 있었고 후자의 목표는 마음을 감동시켜서 그 말씀대로 살게 하는 대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나누어졌습니다. 이런 방식들이 사실은 종교개혁 일세대인 안드레아스 휘페리우스가 이미 사용하던 방법이었습니다.
“이는 휘페리우스(Hyperius) 같은 초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인정된 바였다. 그들에게 논쟁적 방식의 목적은 이론을 통한 설득이었고 대중적 방식은 감화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물론 이론의 설득에 감화의 목적이 전혀 배제되지 않았고 감화를 위해 이론이 배제되지도 않았다. 다만 대중적 방식은 논리의 날을 뭉툭하게 하고 수사학을 동원하여 청중을 감화시켜 그렇게 살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반면 논쟁적인 방식에는 변증법적인 간결함과 단순성을 추구하는 스콜라주의 방법론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나는 에드워즈의 연구자들에게 그의 설교집을 많이 읽도록 조언한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집을 많이 읽으며 묵상하는 것은, 다양한 학문 분야에 대한 그의 해석들이 어떻게 성경 계시를 드러내는 일에 이바지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2번 “에드워즈와 내가 이처럼 사랑에 빠졌지만 항상 좋은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치 연애하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지만, 가끔 갈등할 때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에드워즈는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으며 탐구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비판도 많이 받고 있다. 나는 그러한 비판들을 접하면서 에드워즈의 철학이나 신학이 어떤 부분에서는 그것이 과연 성경적이며 개혁신학의 정통을 따른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을 때도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천지 창조에 대한 에드워즈의 지나친 플라톤적 해석,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존재 확장을 말하는 panentheism (내재신론),
(파넨데이즘은 하나님이 모든 만물 안에 계시다. 이것은 범신론의 일종입니다. 우리는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세계에 안계시다. 하나님이 세계 안에 계시다. 이것도 안 됩니다. 이 세계가 하나님이다. 이것이 범신론. 하나님이 이 세계 안에 계시다. 이것은 내재신론. 하나님은 이 세계 안에 없다. 이것이 이신론입니다. 우리의 입장은 어떠해야 되느냐. 그런 것들을 보면서 의문을 품기도 했다 라는 것입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나에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지만, 여러 문제들은 또 다른 신학 탐구를 통해서 해답을 찾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위대한 사상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은 물론 다른 여러 학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에드워즈와 나 사이에 있었던 하나의 학문적 갈등이 해결될 때마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 다시 불일 듯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나는 에드워즈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그의 사상의 원천이 되는 저자들을 병행하여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깨닫게 되었다.”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탐구가 나의 목회에 준 영향은 지대하다. 그는 이론적 사변과 실천적 목회가 밀접히 연결된 학문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그가 나의 목회에 미친 영향은 나의 학문에 끼친 영향과 분리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저작들을 오랜 기간 숙독하면서 나는 사상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고, 이는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관계없이 어떤 식으로든지 목회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그 많은 내용들을 여기에 다 기록할 수는 없다. 에드워즈가 나의 목회에 준 가장 큰 영향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로 회심 목회의 중요성이다. 에드워즈를 공부하기 이전에도 나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믿는 칼빈주의자였다. 그러나 에드워즈를 공부하면서 이런 신념은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특히 에드워즈는 오늘날 널리 유포되어 있는 좁은 의미의 중생론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중생론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는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신학적 유산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우리들이 회심 중생 성화 나누지 않습니까. 소위 얘기하면 존머레이 이후에 구원 서정에 관한 이야기잖아요. 사실은 정통적인 견해는 아니에요. 원래 있었던 것은 구원을 아주 넓은 의미로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칼빈 같은 경우도 인간이 회개해서 마지막에 영화의 상태에 도달하는 모든 과정을 하나의 구원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존머레이 같은 사람이 구원 서정을 아홉 가지로 상세하게 세분화 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서 나타나냐 하면 도르트회의 이후에 나타납니다.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이 칼빈주의 교리들을 곡해하면서 새로운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는 교리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비판으로서 도르트회의가 소집이 되고 거기서 알미니우스 교리와 학문파의 교리들이 정죄당하고 그리고 소위 얘기하는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 하는 것 튤립이라고 하는 것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전적타락, 무조건적인구원, 제한적 속죄, 저항 할 수 없는 은혜, 이것은 해석을 굉장히 조심해야합니다. 2008년도쯤 도르트레이트에 갔을 때 도날드시네마(Donald Sinnema)라는 학자가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 사람은 일평생 도르트회의만 연구한 사람입니다. 도르트회의의 세계적인 권위자입니다. 도르트회의에서 얘기하는 저항할 수 없는 이라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의미하는 의미에서의 저항할 수 없는 이라는 것은 사실 도르트회의 의 의견이 아니다 라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의지를 꺾고 저항 할 수 없게 하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들어가면 의지의 자유문제 하나님의 결정의 문제 복잡한 신학적인 담론들이 물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론에서는 자칫하면 회심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경시되기 쉬운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점에 있어서 균형은 이뤘다.”
이것에 대해 가장 반대하는 사람 중 하나가 피터 마스터스라고 하는 목사님입니다. 영국에 스펄전이 목회하던 교회에서 목회하고 계시는 목사님이십니다. 지금 그분이 그 곳에서 40년째 목회하고 계신데 제 작년에 만났습니다. 그 분이 부임할 때 교회에 40명밖에 안모였습니다. 그때 한국 목사님이 한번 주일날 그 교회에 어떻게 예배를 드리나 보러 갔더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츄리닝을 입고 와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랬는데 이 분이 그 교회에 부임하셔서 열정적으로 사역하셨고, 제가 보기에는 근본주의 계열의 하이퍼캠퍼니스트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킬 정도입니다. 철저하게 칼빈주의입니다.
그 분하고 대화를 했는데 그분이 철저하게 비판하는 두 사람을 예로 드는데 버나더렘, 존머레이(john murray) 두 사람을 공격하는데 초반에는 듣고 있었습니다. 버나더렘은 왜 공격하냐하면 소위 말하는 영적해석을 기브업했다. 영해 스피리쳐인터프리테이션인데,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영국청교도들의 전통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주장하면서 신학적 문자적 역사적 해석을 정리한 사람이 버나더렘이다 라고하는데. 사실 버나더렘만 그 얘길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분은 그렇게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두 번째는 존머레이가 비판을 받았다. 중생과 회심에 관해 나중에 내 의견을 얘기했습니다. 목사님이 얘기하는 존머레이와 이런 사람들이 잘못한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인 맥락을 가지고 이야기 해야지 역사적으로 왜 존머레이가 중생을 협의로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맥락은 다 제거해버리고 그가 이렇게 중생을 좁은 의미로 정의 해버렸기 때문에 구원의 문제를 결국은 하나님의 동력적인 사역에 의해서 구원받는다 라고 해서 주권을 강조한 것은 좋았는데 그러면 인간이 회개하고 믿어야할 책임과 모든 것들을 날려버려서 구원을 숙명론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비판의 요지입니다.
사실 그런 비판은 우리들이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게 자유주의자의 공격이 아니라 아주 극단적 칼빈주의자로서 그런 비판을 했기 때문에 귀담아 들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 얘기가 목사님과 같은 시각을 갖는 것은 좋은데 문맥을 고려해야한다. 그러면서 도르트회의때 했던 얘기를 하면서 왜 광의로 전통적으로 이해해오던 중생의 개념이 칼빈이 니게네라치오 라는 중생의 의미로 쓸 때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이해하는 중생의 의미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전체를 포괄하는 신생의 의미로 사용하여야합니다. 그가 그렇게 넓은 의미로 사용되던 것이 보편적인 사용이었는데 도르트회의 학자들이 세분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맥락은 그것은 중생에 있어서 이것이 인간의 힘이 중생에 영향을 미친다고 이야기하게 되면 구원론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라 인간의 자력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되면 신학 전체가 뒤틀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비비워필드 같은 사람이 이 중생론 이야말로 개혁신학에 있어서 지도리라고 했습니다. 피벗 혹은 힌지 이러한 힌지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서판 설명)
“둘째로 설교 사역의 중요성이다. 에드워즈를 숙독하기 전 청교도들의 신학을 접하면서 설교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지만, 에드워즈를 통해 설교 사역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특히 학문적인 지식들이 어떻게 설교 속에서 유기적으로 연관을 이루며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데 이바지해야 하는지를 그의 설교들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 내게는 그의 설교를 읽는 것이 매우 큰 즐거움이었는데 이는 그의 사변적인 철학과 신학에 대한 논의들에서 배운 지식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하나님을 증거 하는 실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의 설교는 그의 신학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들었다. 에드워즈의 설교를 접하기 전에는 성경을 묵상하고 교인들에게 감동을 끼치는 설교를 지향하였다면 에드워즈에 대한 탐구가 깊어질수록 한 편의 설교가 사상을 설교하는 내용이 되도록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에드워즈의 설교 방식은 교부들이 추구하던 논문식 설교의 강점을 일깨워주었다.”
어느 설교를 읽어도 에드워즈의 설교는 논문입니다.
“셋째로 신앙 교육의 중요성이다. 에드워즈를 통하여 내가 배운 것은 목사란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살고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목사로서 살아가는 것도 사실은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또한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살기 위한 것인데 이것이 바로 에드워즈가 정의하였던 신학의 의미였다. 설교나 교육의 방식을 결정하는 학문을 형상이라고 한다면 그 형상으로 빚어서 성도들에게 전달하여야 할 내용이 질료이다. 이 질료는 성경의 가르침과 그것에 대한 목회자의 체험이다. 따라서 신학이라는 형상은 학문으로부터 나오지만, 전달하여야 할 질료는 신앙으로부터 나온다.”
이런 얘기입니다. 한 사람이 어떤 빵을 맛있게 구워야 할 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형상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재료가 있어야 합니다. 그 재료가 성경에 대한 지식, 목회자의 경험 이라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로부터 배운 것은 하나님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아름답게 전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너무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매가 선을 보고 왔는데 그 남자가 너무 준수하고 멋있습니다. 좀 어땠어 라고 물어볼 때 그냥 남자대. 키가 멀대 처럼 크고 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얼굴을 탐크루즈 같이 생겼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아름답게 설명을 해서 한번 보고 싶게 만들어야지.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빵을 팔아도 저런 식으로 팔면 안사겠다. 어때요? 물으면 배고프면 시장이 반찬이죠. 라고 하면 그럼 누가 사겠어요. 남의 말 하듯이 합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주일학교 학생의 유명한 간증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해주고 전도사님이 설교시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다고 말할 때 그 사랑이 안 느껴졌는데, 선생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이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하고 눈물을 흘릴 때에 모든 것이 믿어졌어요.... 이해되세요?. 말없이 조용히 처다 보며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셔 눈물만 흘려도 저 사람에게는 믿어지는 것입니다. 설교를 해서 녹화를 하고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듣고 본인이 감동을 받겠는지.. 진짜 하나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눈을 지그시 감으면 연인의 얼굴이 떠올라.. 그런 것이 있냐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밤이 정말 맛있다고 줬는데 까지도 않고 혀에서 굴리며 아무 맛도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나에게 목회란 지성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생활 속에서 그 아름다움을 따라 사는 법을 배우며, 신학의 도움을 받아 그것에 형상을 부여하여 성도들이 보기에 아름답고 이해하기에 쉽도록 전달하는 것이다. 목회자인 나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풍부해진다면 전달할 질료가 풍부해질 것이며, 거기에 탁월한 학문이 갖추어져 있다면 그 질료들은 성도들을 위한 양식이 될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나로 하여금 나의 신앙과 목회를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연결선 상에서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유명한 말을 합니다. 어록 중에 하나입니다. 직역하면 ‘삶의 방식 가르침의 풍부함’ 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삶의 방식이 가르침의 풍부함을 결정한다. 전도를 열렬하게 하는 목사는 전도 설교 할 때 가장 힘이 나고 가르침이 풍부해 지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는 목사가 가장 잘 하는 설교는 성도들 보고 기도 안 해서 어떻게 살겠냐고 할 것입니다. 가르침의 풍부함. ‘내 가르침이 빈약한 것은 삶의 방식이 잘못된 것이구나.’
일본 바둑 역사에 보면 토혈국 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바둑 두는 기사 둘이 나오는데 한 사람이 집니다. 한 사람이 졌습니다 하고 무릎을 꿇더니 바둑판에 엎어져 피를 토하고 절명합니다. 혀를 깨물고 죽은게 아니라 이런 사람에게 바둑을 졌다는 것에 한없는 치욕을 느끼고 원통한 마음에 바둑판에 엎어져 그 자리에서 피를 분수처럼 뿜고 절명을 합니다. 오락을 하다가도 지니까 피를 토하고 엎어져 죽어버리는데 하나님이 바둑만 못해서 되겠습니까? 한번 기도해보셨습니까? ‘하나님 나를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든지 죽이시든지, 나를 살게 하시려면 깨닫게 하시고 깨달음을 주시지 않으시려면 짐승 같은 나를 살리지 마시고 나를 데려가시옵소서. 그것이 이 세상이 청결하게 되는 길입니다.’ 이렇게 기도해보셨습니까?
공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침에 도를 깨닫고 저녁에 죽어도 좋다. 도가 모르는 사람도 그렇게 말하는데 하나님이 누군지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열정이 없습니다. 이정도 강의를 쏟아 놨으면 여러분 마음에 불이 붙어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정복해보리라. ‘높아봐야 하늘아래 뫼지’라고 생각하며 영어와 한글로 된 에드워드 책을 집을 팔아서라도 사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다 놓고 베고 잠이 들더라도 일단 사야하지 않겠습니까. 5년 전 전 세계에 나온 조나단 에드워즈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전부다 찾아보니 130권이었습니다. 한꺼번에 샀습니다. 사고 싶은 열망이 생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져 라도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넷째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심이다. 에드워즈로부터 배운 것은 하나님이 온 우주와 세계의 중심이시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것을 인정하며 생각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에드워즈를 숙독하면서 마치 아우구스티누스의 존재와 가치의 질서에 대한 사상을 다시 확인 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만큼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그에 못지않은 열심을 가지고 세계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하였고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그렇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인간의 내면세계로 부터 인격 그리고 그의 실제적인 행동, 그것들이 천지 창조의 목적과 관련하여 갖는 의미들을 설명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대한 열망을 갖게 하였고, 더욱이 지상세계 너머에 있는 영원한 나라에서의 점증하는 영광의 교리는 미래에 대한 소망과 나의 목회 사역이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행복해하며 살 수 있는 christian hedonism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결론.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천 년 교회사에 있어서 사도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와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나는 이제껏 에드워즈를 사랑하며 탐구해 왔고 앞으로도 죽는 날까지 탐구할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의 신학에서 작은 결함이나 혹은 모순들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일 들이 있다고 해서 에드워즈에와 나의 결혼 생활이 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에드워즈의 장점만을 보고 그와 결혼했다면 그런 결점은 용서할 수 없는 이혼의 사유가 될 것이지만 에드워즈 때문이 아니라 에드워즈 안에서 발견한 하나님 때문에 그의 사상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의 신학은 하나님의 신학도 아니고 지복자의 신학도 아니었다. 그의 신학은 그저 유한한 인간이 발견한 순례자의 신학일 뿐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러한 작은 오류와 결함들이 발견될 때 기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에드워즈의 맹종적 추종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나에게 기독교 신앙과 신학 함에 있어 지성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사상은 신적 지혜를 발견하는 것이었고 의지는 신적 사랑에 감화된 윤리였다. 나는 에드워즈의 모든 해석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신학이 예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성경적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에드워즈가 개혁신학자였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답한다. ‘그는 개혁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21세기의 개혁신학자가 아니라 18세기의 개혁신학자였고 자기 시대에 충실한 개혁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에드워즈의 결점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21세기에 사는 당신도 18세기의 개혁신학자는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에드워즈의 신학의 도움으로, 위대한 세 명의 스승과 한 원천인 개혁과 정통주의에게서 채워지지 못했던 지식의 간격들을 훌륭하게 채워갈 수 있었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전재들과 아름다움이 연결을 이루며 천상으로부터 지상까지, 영원 전으로부터 영원까지 달음질치는 그 찬란한 그물망 위에 계신 탁월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리고 나와 이웃 심지어 자연의 모든 사물들, 그리고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까지 그 그물망 안에 있으며 거기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이 사랑으로 연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은 사멸할 육체를 지닌 유한한 존재이지만, 영혼으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그분의 창조 목적에 참여하면서 산다는 이유 때문에 우주적인 의미를 가진 존재이다. 요즈음도 나는 매주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지 않는 날이 거의 없다. 그리고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고백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은 참 예쁘다.’“
질문 있으면 하시기 바랍니다.
Q
A : 그의 작품 속에서 아직 그것은 못 읽었습니다. 오히려 만유내재신론자는 화이트헤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김용옥씨가 그 사람에게서 배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 캐톨릭 쪽에서 아주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떼이아르드 샤르뎅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Q
A : 그것은 에드워즈 얘기가 아니고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입니다. 사회적 삼위일체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를 쓰지 않습니까. 삼위일체에서 하나님의 성부 성자 성령과의 관계를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로서는 비유로 들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이야기하는 심리적 유비를 사용합니다. 그때 나오는 것이 사람 사랑하는 자 사랑 받는 자. 그런 유비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랑 사랑하는 자 사랑 받는 자. 사랑하는 자는 성부 사랑 받는 자는 성자 사랑은 성령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성부 하나님을 사랑하라 성자를 사랑하라는 나오는데 성령을 사랑하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성령을 사랑하라고 말하면 사랑을 사랑하라는 자기 모순적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을 그대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지식, 여러 가지를 사용합니다. 지식, 의지, 지식의 대상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서 삼위일체 유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일단 읽어야합니다. 해석에서도 1960~70년대 까지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떻게 하든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성적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해보려고 했다는 것이 사실은 지배적인 견해였는데 60년대 이후 학계의 연구 결과는 그런 해석은 거의 지지하지 않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를 쓰게 된 이유는 영혼의 훈련을 위해 그것을 썼다고 합니다. 교회 성도들에게 이것을 가르치면서 교인들이 생각을 하지 않으니 생각의 근육을 잡아당겨 사유의 훈련이 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 그런 것들을 가르쳤다 라는 이론이 훨씬 더 폭 넓은 인정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Q
A : 역사적으로 테오시스 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어로 데이피케이션이라고 합니다. 신화의 교류입니다. 동방교회에서 나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신화는 신화인데 이 신화가 베드로서에 보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라고 나옵니다. 그 성품에 참여 한다 라고 할 때 이 참여가 무엇을 의미하냐는 것입니다. 메데시스라는 단어인데 그리스 철학에서 보면 메데시스는 융화가 되어 한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그리스의 메데시스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아주 거룩하게 된다고 칩시다. 인간이 정결하고 거룩하게 되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하고 영광스런 모습이 되겠죠? 그럼 지금 타락한 인간에도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그때가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완전하고 증폭된 형태로 우리에게 발산이 되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신화라고 말 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관점 자체가 땅에서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이 죄와 오염에 젖어있는 상태인데 여기에서 벗어나서 인간이 어떤 고등한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영화의 상태에 도달한다고 합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변화산에서 나타났던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엄청 충격을 받고 놀라지 않습니까. 인간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화로 봐야지 인간이 아무리 고양하게 된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신적인 본질과 인간이 아무리 거룩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은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무한한 격차를 넘어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들을 그렇게 해석하고 싶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뉴에이지 주의자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바타라는 영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코드와 맞다는 것입니다. 2000년 마다 별자리가 움직인다고 보는 것입니다. 현재 2000년부터 시작해서 4000년 까지 소위 얘기하는 천문학적으로 아쿠아리우스 자리입니다. 물병자리. 이 시대는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성품들이 고도화 되어서 신과 접촉을 하고 신과 일체를 이룸으로서 인간이 신화에서 신의 일부였다가 떨어져 나와 인간이 된 인간이 본래성을 회복하고 신의 위치로 돌아가 모든 신과 일체를 이루는데 이 신이 곧 세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판명이 되서 파문을 당했던 스피노자 사상입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의 코드가 이런 것입니다. 아바타에서 마지막에 밀림을 공격하고 결국은 주인공이 쓰러져 죽지 않습니까? 그때 많은 사람이 모여 애화를 부르면 찬송을 부르잖아요. 그 애화가 히브리어의 하바입니다. 하바는 살아있다. 생명 이런 뜻입니다. 여기서 하와가 나오는 것입니다. 애화가 모음만 바꿔 형상화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기도를 하니까 명주실이 내려와 나무와 흙을 감싸면서 하나를 이룹니다. 이것이 뉴에이지 코드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신성을 알아보고 신이 내려와서 우리 안에 있는 신성이 물질세계 속에 얽매어 있는 것을 해방하여 자기의 신성을 다시 하늘로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인간도 신적이 존재가 되어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자율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인간이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떨쳐버릴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인간인 자신이 선악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인간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주체자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신과의 일체라는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코드에 맞춰 나오는 모든 문화 이런 것들이 엄청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사람의 마음을 왜 그렇게 잡아끄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애브라함 메슬로라는 사람이 있는데 심리학자입니다. 동기화에 관한 책에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고상한 욕구는 자아실현입니다. 맨 처음 생리적인 욕구부터 시작해서 먹고 입고 안전 사회적 요구 맨 끝에는 자아실현입니다. 자아실현은 내가 마음에 꿈꾸고 있는 것들을 모두 실현해 보는 것. 그 속에서 한없는 희열을 느끼는 것. 그게 바로 자기 안에 있는 꿈들을 실현해서 신이 창조의 세계를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주체의식 속에서 자기가 만든 결과를 보면서 스스로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독립된 존재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블랙스완이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자아를 온전히 실현 하는 것. 그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 자신입니다.
Q
A : 성도입니다. 천사는 아닙니다.
Q
A : 저는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에 동의를 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무천년설이 훨씬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천년설은 지지하는 사람이 소수입니다. 에드워즈는 자기 시대에서 후천년에 대한 꿈을 꾸었을지 모르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동의하지 않고 상세한 것은 깊이 연구해보지 않았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종들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열심히 연구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정말 견고한 진리와 지식위에 기반을 세우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도들을 섬길 수 있도록 축복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