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
녹취자 : 오희열
오늘 제가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아주 테크니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어떤 특정 주제가 아니라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이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신학과 목회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우리 신앙의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가 하는 것을,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을 경험을 토대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테크니컬 스칼라는 아니지만 예일판에서 나온 26권정도로 되어 있는 책을 설교집 몇 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통독하였습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다양한 2차 자료들을 제가 많은 부분 수집해서 제 나름대로 공부해 오던 차에 여러분에게 에드워즈라는 산맥 전체를 소개해드릴 의도를 가지고 오늘 이 강의에 서게 된 것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서론, 에드워즈와 한국교회, 에드워즈와의 사랑, 미셀러니부터 설교집까지의 갈등, 다른 학문들의 도움, 미학적 신학, 존재의 본질, 정동론, 뉴턴주의,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 등등을 여기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가 쭉 나옵니다만 생략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고 노스햄턴, 에드워즈가 시무했던 교회입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책들과 설교집을 출판한 경력들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가 우리나라 신학계에 알려진 것은 마틴 로이든 존스 목사님의 책들이 널리 읽히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우리에게 알려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쓴 로마서 강해 같은 곳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야기들이 계속 나왔고, 사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소개한 조나단 에드워즈는 극히 부분적이었고, 제가 영국에 가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로이든 존스 목사님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 전체에 대해서 공정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question을 가지고 있고, 또 저의 그런 의문에 동의해주는 학자들도 만났습니다. 이분에 대한 소개는 마치 리차드 벡스터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키드민스터의 목회자로서 우리에게 실천적인 책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도의 영원한 안식”, “회심”, 리폼드 패스터” 이런 것들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굉장한 신학자 였습니다. 그가 쓴 많은 신학 저작들이 사실 17세기 개혁파 정통파주의 역사에서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는 그런 무게 있는 책들을 많이 저술했고 형이상학에도 아주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토마스 카파넬라 라는 이태리의 철학자의 사상을 받았느냐 말았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많은 논란들이 있지만 아무튼 이 사람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도 아주 부분적으로 알려졌듯이 로이든 존스 목사님에 의해 소개된 조나단 에드워즈도 부흥운동가, 부흥설교가,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 특이한 부흥의 체험,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알려졌는데 사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것보다 훨씬 더 종합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에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제가 제일 먼저 접한 것은 역시 “진리의 깃발”사에서 나온 두 권으로 된 깨알같은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읽기에 굉장히 힘들었고 그 당시에 저의 지적인 수준이나 여러가지로도 그것을 끝까지 다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이 예일에서 26권으로 나왔고 온라인으로는 73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그 후에 다시 이 책들을 공부해 나가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가지고 있는 사상적인 매력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고 특히 저는 쭉 개혁신학을 공부하면서 자랐습니다만 교부들이나 중세의 신학자들, 또 계몽주의 철학자들, 그리고 17세기 정통주의자들, 어거스틴이나 이런 사람들을 공부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 속에 사실은 우리들이 사전에 가져야할 굉장히 많은 이해를 필요로 하는 학문의 분과와 신학자들이 있다는 사실, 아주 신학이 통합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깊이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그 전에 제가 어거스틴에 대해서 깊이 매력을 느끼면서 거의 심취했던 적이 있는데 그것이 사실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굉장히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제일 먼저 여러가지 책들을 많이 읽었지만 저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던 책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미셀러니(Miscellanies)”였습니다. “미셀러니”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작심을 하고 쓴 책이 아니라 일생을 걸쳐서 그때그때 떠오르는 신학적이고 학문적인 단상들을 적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도 굉장히 다양하고 성경에 대한 가벼운 묵상부터 시작해서 때로는 아주 치열한 변증을 다루는 부분까지, 그것도 역사, 철학, 문학, 과학, 예술, 심지어는 동양철학까지 다루고 있는 그런 부분들을 미셀러니에서 싣고 있는데, 네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책 네 권을 완독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가지고 있는 사상의 깊이를 실감하게 되었고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어떤 책을 읽든지 조나단 에드워즈가 다루고 있는 그 주제에 관련된 미셀러니들을 함께 읽어야만 사실은 그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이 미셀러니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일일이 이것을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한 번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주 탁월한, 때로는 우리를 좀 힘들게 하는 아주 깊이 있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물론 어떤 것은 어렵지만 그러나 사전 지식이 좀 있다면 그렇게 어렵지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록이 되고 화면에 나오고 있는 이 부분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직접 기록한, 필서한 그 흔적입니다. 예일 대학교 바이네커 라이브러리에 보관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사람이 메모의 사람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지팡이로 된 통에 잉크와 필기도구를 가지고 다니면서 자기가 필요한 것들을 항상 기록했듯이 조나단 에드워즈도 기록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록을 하고 그 기록한 것을 잃어버릴까봐 핀으로 옷에 잔뜩 붙이고 다니다가 집에 돌아오면 아내가 그것을 다 빼서 메모지를 모아서 정돈을 해 주고 그것을 가지고 자기가 미셀러니 같은 글을 쓰는데 사용을 했고 그런 글들을 나중에 확장해서 좀 더 완성된 글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책 중에 하나가 “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이라는 “구속사”에 관한 책입니다. 이 책은 구속의 역사를, “미셀러니”가 에드워즈의 사상이 무엇인지를 보는 눈을 저에게 열어주었다면 그 사상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을 제게 열어준 것이 이 “구속사”였습니다. 에드워즈의 역사 서술은 그의 전집 속에 두 개가 실려 있는데 “구속사”와 “구속사 저술을 위한 노트”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성경시대를 넘어서서 종교개혁을 지나서, 대개 구속사는 성경에서 끝나는데 이분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 시대를 지나서 에드워즈 당시까지의 세속역사를 해석하고 이 후에 있을 적그리스도의 몰락과 천상교회가지 다룸으로써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을 잇는 하나의 거대한 역사 신학서가 되었습니다. 에드워즈의 역사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이미 유세비우스나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시도되었던 바입니다. 어거스틴의 “신국론”에서 많은 통찰을 얻었다고 여겨지고 실제로 어거스틴의 “신국론”과의 유사점들을 에드워즈의 역사서술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나 펠라기우스주의, 도나투스주의에 대항해서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정통적인 신앙을 수호하려고 했다면, 에드워즈는 소키누스주의, 아리우스주의, 그리고 아르미니우스주의나 이신론 같은 그 시대의 정신에 맞서서 이런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구속사”라는 책을 존 오웬이 쓴 그 명한 “Theologoumena Pantodapa”, “Biblical Theology”(성경적 신학)라고 변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이 원래 라틴어로 쓰여 있는데 꽤 두껍습니다. 굉장히 지루한 책인데, 어쨌든 그 두 책을 비교해보면서 받은 느낌은, 강물이 흐를 때 존 오웬의 성경적 신학이 경비행기를 타고 강을 쭉 돌면서 구속의 역사를 보여준 것이라고 한다면, 에드워즈의 구속사는 큰 배를 타고 거대한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면서 구속역사를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칼 투르만이 제시한 바와 같이 존 오웬은 자신의 “Biblical Theology”에서 하나님의 언약과 보편교회의 기독론을 가지고 그 이야기를 계속 끌어갔습니다. 그러나 역사와 언약을 해석함에 있어서 존 오웬은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과 그리스도 위격에 관한 보편적 교회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직에 관한 중세의 논의들을 창조과 구속의 본질에 대한 개신교적 통찰로 연결시키고 있다면 에드워즈는 “구속사”에서 성경자체의 진술을 따라 언약들을 근거로 하나님의 경륜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경륜의 시대적인 다양성과 함께 모든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우주적 완성으로서의 하나님의 구속, 이것이 “구속사”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실제로 에드워즈에 있어서 성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전달해주는 진수, essence 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진수적인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전달해 줄 때 가장 중요한 소재가 구속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 그리고 그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인데 이 두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다트 엘로힘”이 전달되고 그리고 이 구약의 하나님의 아는 지식이라는 “다트 엘로힘”은 신약시대에서 “크리스토컬 로지컬 컨버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전향됩니다. 그래서 이제 신약시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즌 이것을 확대해서 해석을 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이 세상에 전달하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바로 당신의 구속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경전체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구속사역을 통해서 전달하는 책”이라고 정의를 한 것입니다. 그가 이런 똑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알아듣는 언어로 치환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 묻어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름다우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흔적을 갖지 않은 피조물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피조물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인간의 지성의 타락과 파괴 때문에 원래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을 인간이 공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하는 지시에 있어서 구속주로서의 지식, 창조주로서의 지식의 순서는 정확하게 칼빈의 논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창조주에 대한 지식이 먼저이지만 그것은 희미하고 구속주를 통해서 창조에 관한 지식을 재해석함으로써 그런 하나님이 온 세상과 맺고 계신 관계와 그 모든 피조물 속에 녹아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구속사역이 이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될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점에 있어서 구속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러한 철학적인 사상의 토대들을 아주 친절하게 우리에게 설명을 해 주고 있고 제 개인적으로는 존 오웬의 “Biblical Theology”보다는 훨씬 쉬웠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는 과학철학인데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책 중에서 제 6권입니다. “Scientific and Philosophical Writings”라는 제 6권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과학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관측하고 자연을 관찰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고 그런 습성들이 신학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이 자연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한, 오늘날로 말하자면 과학철학적인 시도들을 신학적 입장에서 감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그 당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시대에 학문적 화두로 굉장히 많이 떠올랐던 것이 뉴터니즘입니다. 뉴턴의 출현, 뉴턴에 의해서 정리된 과학에 대한 지식들이 당시에 세계관과 인생관을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가 쓴 책 중에 “프린키피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자연법칙의 수학적 원리들에 관하여”라는 책입니다. 이 책이 아마 1000년의 역사를 움직인 10권의 책 가운데 하나로 들어가는 것으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어렵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이 6권을, 6개월 정도 걸렸는데 꼼꼼히 이 책을 읽었습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과 우리가 벌써 400년 정도의 간격이 있고 그 동안에 과학이 굉장히 많이 발달한 시대에 우리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에드워즈의 그런 해석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도 많이 있고, 신학을 떠나서 그냥 과학적인 입장에서도 도저히 동의하기 어려운 해석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들이 그 시대의 문맥에서 이러한 과학 철학서들을 쓰게 되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해석입니다. 세계에 대한 해석은 이렇게 뉴턴이 나타나서 자연의 많은 법칙들과 현상들을 가지고 그 속에서 법칙들을 찾아내고 찾아낸 것들을 수학으로 환치하여서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을 해석해 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이 세계라고 하는 것이 아주 단순한 기계로 되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치면 하나님이 화 나셨나보다.’ 이런 생각들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기독교 신앙에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계에는 법칙이 존재할 뿐,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효과라고 믿던 많은 현상들이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고 그러한 유럽의 지성적인 정신에 상당히 많은 미국 사람들이 설득되고 있던 그 시절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러한 것들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을 내 놓음으로써 말하자면 뉴턴주의를 극복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과학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 당시 뉴잉글랜드에서 새로운 사상인 뉴턴주의를 가장 잘 이해했던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 세상에는 많은 자연 현상들이 있지만 그것은 법칙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법칙들이 아주 엄밀한 규칙을 따라서 실행되는 것이 자연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시키는 것은 힘이다.” 라고 얘기했을 때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힘이 바로 하나님이 거기 계신 효과이다.” 라고 하면서 에너지 같은 것들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유는 자연학(physica), 논리학(logica), 윤리학(ethica), 자연 현상 속에서 논리를 찾고 그 논리를 다시 윤리적인 삶에 적용하는 전형적인 정신들을 보여준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 매우 어려운 책이었고 약간 기괴하기도 한 책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윤리학입니다. 윤리학은 제 8권인데, 그 유명한 천지창조의 목적, 참된 미덕의 본질,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 “사랑과 그 열매” 라는 설교들의 모음이 함께 딸려 있습니다. 저는 에드워즈의 책을 거의 다 읽었지만 고린도전서 13장은 읽지 않았습니다. 제가 고린도전서 13장을 책을 내기 전까지는 읽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한글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도 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번 에드워즈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고린도전서 13장에 대한 책을 지금 초고를 써 놓았는데 그 책을 출판하고 그 다음에 그 책을 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8권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다행히 부흥과 개혁사에서 번역되어 있는데 번역본을 가지고 읽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특히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천지창조의 목적”과 “참된 미덕의 본질”, 이것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천지창조의 목적은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꼭 이해해야 하고 그 천지창조의 커다란 목적의 틀 안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덕론, 미덕의 본질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헤르만 바빙크 같은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러한 덕 이론을 비판했지만 제가 보기에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러한 덕 이론과 천지창조의 목적, 천지창조의 목적이 두 개의 논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늘날 중요한 이유는 오늘날은 프레드리히 니체의 이후로 객관적인 도덕원리, 도덕적 근거에 대한 심각한 회의주의가 유포되었고 그것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달라스 윌라드가 이야기 한 것처럼 사람들이 진리라고 이야기하면 “누구의 진리?”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젊은 사람들이 진리를 이야기할 때, “누구의 진리?”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니체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달라스 윌라드는 이야기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결국 이런 모든 객관적인 진리들이 거부되고 있는 그 대에 선과 악이 무엇이고 그 판단 기준이 무엇이고 성경이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고 명령하는 그 이론적인 토대와 근거가 무엇인지를 천지창조의 목적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사실 천지창조의 목적을 이렇게 기술한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개혁자들 중에서도 이런 서술들을 했고 우르시무스 같은 사람은 아예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글을 써서 그 천지창조의 목적을 에드워즈와 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진술을 하면서 사실 우리 모든 윤리의 토대들에 대한 담론들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이런 철학적인 기반들이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설교하거나 변증할 때 근본적인 토대에 공격을 받으면 사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변증해야할지 잘 알지 못하는데 그런 점에서 선교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라도 이런 토대들은 우리가 이해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이것을 깊이 이해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이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흥미롭게 본 책은 “삼위일체에 대해서”였습니다. 여기에는 삼위일체만 나온 것이 아니라 이 책에는 “삼위일체, 은혜, 그리고 신앙론”, 이것을 21권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다루고 있는 많은 주제들 가운데 아주 토론에 중요한 제목이 되는 내용 중의 하나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에 대한 접근 방식이 전통적으로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서방교회의 전통은 먼저 하나의 신적인 본질로 접근을 해서 위격의 다양성에 대한 논의로 들어갑니다. 동방교회의 전통은 “threeness”, 하나님이 삼위라는 사실에서 시작해서 그 셋인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의 동일한 신적 본질이실 수 있느냐는 것을 페리코레시스 이론 같은 것을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이 그렇게 장중하고 길지는 않습니다. 짧습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삼위일체론을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진술할 요량으로 삼위일체론을 저술한 것이 아니라 이제껏 이루어지고 있었던 삼위일체의 논의에 대해서 무엇인가 자기가 보태고 싶었던 생각들을 삼위일체에서 진술한 것입니다. 그것 하나를 가지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에 대한 생각이 전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재구성해 내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의 입각점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논의는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집니다. 스투드 베이커 같은 교수는, 저는 물론 그의 논문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그분은 많은 사람들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의 전개가 동방교회의 사고방식을 따라서 전개되었다고 말을 하지만 스투드 베이커 같은 학자는 그게 아니라 사실은 엄밀하게 서방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삼위일체론이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해서 진술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논의들이 있는데 사실 논란이 여지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의 많은 사상을 종합해서 볼 때 조나단 에드워즈는 아마도 하나의 신적 본질로부터 삼위일체를 시작하는 서방교회의 전통보다는 삼위의 서로 다름으로부터 시작하는 동방교회적인 전통에 훨씬 어울리는 사고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우리는 평가할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미학, 신학,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가지고 있는 덕론, 이 모든 것들은 아주 관계적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창작물이라기보다는 오랜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축적된, 그리고 철학사에 있어서 축적된 담론들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 있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주요 원천 중에 한 사람인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와 어거스틴의 관계를 설명하라고 하면 나는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거스틴의 충실한 학생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만 ,어거스틴이 살던 시대와 조나단 에드워즈가 살았던 시대에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시대에 충실한 방식으로 어거스틴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통합적이 고 우주적인 성격을 구현해서 물밀듯이 밀려들어오고 있는 계몽주의 사상을 극복하고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신관과 세계관을 세우고자 했던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어거스틴과 다소 구별된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시면 삼위일체에 대한 접근 방식이 나옵니다. 서방교회에서는 일체에서 삼위로, 동방교회는 삼위에서 페리코레시스의 이론으로 한 신적 본질의 근거를 설명하며 일체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삼위일체와 사랑을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삼위이시고,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이 이미 그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가 있기 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함께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개사로 이어지는 명제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해야할 대상이 없던 그때에도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이실 수 있는가를 이런 식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아들을 사랑하시고, 신랑인 아들은 그의 신부인 교회를 사랑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에게 부어지고 아들에게 부어진 사랑은 아들과 혼인하여 한 몸이 된 신부에게 넘치게 되고 그 결과로서 우리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사랑의 한 형식은 이후에 모든 교회들이 그 속에서 본받아야 할 사랑이고 그래서 모든 신부인 교회 속에 함께 접붙여져 있는 사람들이 이 사랑에 참여함으로 함께 사랑으로써 윤리를 성취해 갈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석을 하기 때문에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은 절대로 사색적이고 사변일변도의 신학이 아니라 오늘날과 같이 다양성의 시대에 아주 강력한 적응력을 가진 하나의 신학적인 주제인 동시에 매우 실천적인 주제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신앙정동론”인데, “Religious Affections” 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거스틴의 인식론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신앙 정동론을 이해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작품 중 이 신앙정동론, Religious Affections 은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작품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이 Religious Affections 을 “신앙정동론”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여기 Affection 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어려운 단어인데, 에드워즈의 설명에 의하면 이런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이런 비유를 든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이 연상을 하시도록 설명을 하겠습니다. 잔잔한 호수가 있는데 저 높은 꼭대기에 헬리콥터가 떠 있습니다. 그 헬리콥터에서 승용차만한 바위를 떨어뜨렸습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쉭 하고 떨어집니다. 물에 떨어지면 출렁하고 물결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물결은 파장을 만들 것입니다. 파장을 이루며 가는데 그 파장이 점점 감소할 것입니다. 그것을 인식론으로 가지고 와서 설명을 하면, 인간의 정서, 감정이 균형 있는 상태, 자극받지 않는 상태인데 거기에 바위가 떨어지는 것처럼 어떤 사물에 대한 인식이 떨어집니다. 특히 어떤 미학적인 인식이 떨어지게 됩니다. 미학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떨어졌을 때, 인식이 들어왔을 때 인식에 의해서 마음속에 감정이 출렁거리게 됩니다. 이것을 저는 정동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정”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좋아하는 것이면 “애호의 정동”이 일어날 것이고 미워하는 것이면 “혐오의 정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인식론적으로 설명을 하고 미학적으로 설명을 해서 어떻게 인간의 마음속에 진리에 대한 인식이 우리에게 거룩한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하는 것을 원리적으로 아주 아름답게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잘 이해하면 설교학적으로, 목회적으로 우리 개인의 경건에 있어서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론이라고 생각을 하고 여러분에게 이 책에 대한 숙독을 깊이 권합니다.
이 신앙정동론은 에드워즈가 43세에 출판한 작품이고 이때 에드워즈의 신학이 상당히 무르익고 있었고 에드워즈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과 학문적이고 선교적인 교류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에드워즈는 당시 영국에서도 이미 그의 학문과 탁월한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서 많은 청교도 목회자들에게 정평이 나 있었고, 그래서 스코틀랜드의 예를 들자면 그 중에 탁월했던 네 명의 복음주의 목회자, 글라스고우의 존 맥로린, 캠버스랭의 윌리엄 맥컬럭, 킬시스의 제임스 로브, 에든버러의 존 어스킨, 그리고 던디의 존 윌슨, 카녹의 그 유명한 토마스 길레스피 같은 사람들이 함께 교류하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에드워즈가 필요로 하는 책들을 이 사람들이 공급해주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러한 신앙정동론은 사실 그 당시에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있었던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소위 “스콜라 모데르나 아우구스티니아” 라고 하는 어거스틴에 대한 학문을 회복하는 중요한 운동들이 있었고 이것들은 더 큰 갈래로 소위 얘기하는 신플라톤주의 운동의 맥락 속에서 있고 이것이 영국의 경험주의 맥락 이런 것들과 함께 역사적으로 교차를 합니다. 그런 가운데 경험주의, 네오플라토니즘의 운동, 어거스틴학의 재부흥운동, 이런 것들과 맞물리면서 영국의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이러한 정동이론에 천착하면서 많은 연구들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 샤프쯔 베리, 컷스워드 같은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작품들이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해서 참고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특히 컷스워드나 샤프쯔 베리에 대한 이야기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 속에서도 거론이 됩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정리해보자면 이런 식의 그림이 성립이 됩니다. 에드워즈의 신앙정동론은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성경에 나오는 신앙이론들이 중심이 되고 여기에 부흥에 대한 자신의 영적인 경험, 그리고 신플라톤주의적 해석, 새로운 아우구스티스주의 운동, 그리고 당시에 있었던 도덕심리주의적인 이런 자료들, 이런 것들이 부분적으로 참고가 되면서 에드워즈의 신앙정동론이 이룩되었다고 저는 평가합니다.
그 다음으로 자유의지론입니다. 이 책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물 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저작이고 이것이 제 1권에 올라와 있습니다. “Freedom of Will”이라고 합니다. 마크 트웨인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술 취한 미치광이가 쓴 책이라고 하고 던져버릴 정도로 그렇게 어려운 책입니다. 그리고 저는 솔직히 이 책을 두 번을 읽었는데 아직도 이 책을 정확하게 무엇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이해가 부족한 입장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매우 어려운 책입니다. 그리고 학자들은 각자 그 책을 이해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해했다고 이야기 한 것이 원래 책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어렵고 특히 자유의지론에 있어서 결정론적인 입장을 대변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가지고 학계에서는 많은 논쟁들이 있는데 솔직히 저는 아직도 무엇인가를 확정해서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보다 훨씬 어렵고 더구나 영어에 350년이 넘는 시간의 간격이 있기 때문에 더 매우 어렵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책을 보면서 뭔가 어쨌든 인간의 의지, 하나님의 작정,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 이런 것들에 대해서 도대체 나름대로 어떤 입장을 정하지 않고는 이것을 어떻게 할 수 없지 않는가 하고, 한동안 저도 이 문제를 가지고 신앙적으로 고민을 하면서 문제를 풀어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들을 잠깐 말씀 드리면, 잔키우스, 유니우스, 고마루스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이런 세 사람의 자유에 대한 견해들을 책들을 정리해서 간략하게 요약해서 여러분에게 보여드리자면 대개 이런 것입니다. 잔키우스는 자유선택이 곧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단일하게 설명을 합니다. 유니우스는 설명이 다릅니다. 유니우스는 자유선택과 자유의지는 다른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자유의지는 지성과 의지로 이루어지는데 지성은 아직까지도 자유롭지만 의지는 무능 때문에 사실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고 설명을 합니다. 고마루스는 타락 전, 타락 후 모두 의지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외적으로 자연적으로는 아직까지 인간이 자유롭지만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는 무능하다고 설명을 합니다.
에드워즈의 원죄론의 표제가 지금 화면에 나오고 있는데, 이 원죄론은 쉽지 않은 책입니다. 더구나 이 책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원죄가 무엇인지를 조직신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쓴 책이 아니라 존 테일러라는 1694년부터 1761년까지 살았던 영국의 비국교도이자 설교자인 신학자,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선천적 도덕성을 강조하면서 칼빈주의에 도전했던 가르침으로 영국교회를 공격했던 인물입니다. 이러한 반칼빈주의적인 가르침에 대한 반박으로서 이 원죄론을 기술했기 때문에 사실 통일적인 기술이 아니라 존 테일러의 언급들을 비판하면서 쓴 것 입니다. 이것들이 원죄론, 미덕의 본질, 천지창조의 목적, 세 가지가 이 목적을 위해서 쓰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이 원죄론에서 인류가 아담의 죄책과 오염의 본성을 전가 받았고 이런 모든 것들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경험에 의해서도 인간의 부패와 타락한 본성을 증명하기 때문에 이것이 성경의 진술과 일치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에드워즈의 이 원죄론이 아까 말씀드린 이러한 논쟁적인 동기와 목표에서 저술되었기 때문에 깊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체계적으로 원죄를 다루고 있지는 못합니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존 오웬의 제 12권에 “Vindiciæ Evangelicæ”라는 “복음의 변증”이라는 책이 있는데 존 오웬의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이 당시 영국교회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극단적 소키누스주의자, 존 비들이 펴낸 요리문답서, 발렌티누스 스말키우스의 요리문답서, 라코비안 요리문답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런 것들을 반복하면서 전쟁했던 논쟁서였습니다. 거기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분의 위격, 본성을 부인했던 저들의 논지를 격파하고자 하는데 집중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오웬의 논박은 깊이 있고 통렬한 것이었지만 체계적인 내용이 아니었던 것처럼 원죄론도 바로 존 오웬의 제12권과 유사한 맥락 속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체계적으로 원죄를 공부하기 위해서 원죄론을 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교집입니다. 사람들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집을 아마 에드워즈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가장 소홀히 하는 장르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집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적인 논쟁서를 읽으면서 이해가 잘 안 되었던 것들이 설교집을 읽으면서 아주 가지런하게 되는 경험들을 많이 하게 되었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는 어디를 펼쳐보아도 반복이 거의 없고, 어디를 펼쳐보아도 깊이 있다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 당시 설교를 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지성이나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을 사람들의 지적인 수준들을 가늠하게 해준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적인 저술들과 설교에 관련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는 논쟁서들을 기록하는 방식과 설교를 전개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뚜렷하게 다른 접근을 시도했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도날드 시네마라는 학자에 따르면 신학을 진술함에 있어서 종교개혁 후에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여기 화면에 나오는 논쟁적인 방식과 대중적인 방식, 소위 “modus docendi”의 구분입니다. 논쟁적인 방식들은 그 대상이 신학자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스콜라주의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자신의 논지를 가지고 변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논쟁적인 방식은 굉장히 논쟁적인 저술들을 낳았습니다. 이에 비해서 그런 신학자들이고 설교자인 사람들이 대중들을 상대로 가르칠 때에는 아주 다른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스콜라주의적인 방식이라기보다는 가톨릭 한 방식으로, 웅변적이고 교화적인 방식을 사용해서 논리의 칼날을 대개 무디게 하고 논쟁적일 때 많이 나누었던 것들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학자가 아닌 청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단순하고 교화적인 방식으로 하고 논쟁이 아니라 교훈을 주기 위한 방식으로 책을 쓰거나 설교를 했고 대상들도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니라 성도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은혜를 받고 삶에 열매를 맺도록 그렇게 하면서 이것들을 진술해 나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지금 여기까지 강의를 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26권 전체를 여러분에게 부분적으로나마 보여드리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뒤에 나오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나 사이의 갈등이나 그것들을 다시 극복하고 조나단 에드워즈를 사랑하게 된 내용들은 이미 그 책의 원고에 상세하게 기록 되어 있으니까 집에 가서 여러분이 차분하게 읽어보신다면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의도들이 어렵지 않게 여러분에게 전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약 3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는데 정리해서 말씀을 다시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추가로 여러분에게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나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한 학생이 신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수님 한 분이 들어오셔서 신학교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충고를 했습니다. “이 책 저 책 읽으면서 얕은 물에서 첨벙거리면서 놀지 말고 한 사람을 파라. 그러면 너희들이 훌륭한 목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그 충고가 가슴에 깊이 찔렸기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를 선택하고 평생 읽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존 파이퍼 입니다. 19세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 어떤 사람이 목회자에게 물었답니다. “제가 방금 예수를 믿었는데 저는 정말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목회자가 대답하기를, “성경과 존 오웬, 에드워즈 이외에는 다 읽을 때까지 아무것도 읽지 않기로 다짐하십시오. 그러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존 오웬과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들은 깊이 인정을 받은 책입니다.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에 심취해서 20년을 지냈고 저와 에드워즈는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그렇지만 누가 저에게 에드워즈주의자냐고 물으면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제가 칼빈을 매우 사랑하고 저작들을 많이 읽었지만 누가 나에게 칼빈주의자냐고 묻는다면 저는 “Absolutely Not!”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천국에 가서 만나고 싶은 사람은 칼빈도 아니고 에드워즈도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주님 이외에 만나고 싶은 첫 번째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책을 읽었지만 어느 책을 읽어도 이 사람이 천재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제가 존경하는 존 오웬도 매우 뛰어나신 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천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두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위대한 지성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은 천재입니다.”그리고 6개월 동안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누구이고 김남준은 누구이기에 한 사람에게는 이런 탁월한 지성을 주시고 나는 겨우겨우 노력을 해야만 간신히 이해하는 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까?” 들려온 응답은, “네 은혜가 족하다.” 저희 교회에는 어거스틴 파크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어거스틴을 훌륭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를 어거스틴주의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아니라고 말하고 에드워즈주의자냐고 물어도 당연히 아니라고 말하고, 오웬을 일평생 그렇게 존경했고 외국에서 온 학자들에게도 “내가 목회를 할 때 항상 오웬 목사님이 담임목사이고 내가 부목사라고 생각하며 목회를 하려고 애를 썼다.”고 얘기 합니다. 그렇지만 오웬주의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합니다.
마지막 1분을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저는 똑같이, 내 책과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follower를 원하지 않는다. 내 책을 읽고 은혜를 받았으면 거침없이 쓰레기통에 던지고 발로 밟아버려라. 그리고 당신의 삶을 살아라. 그것은 모두 한 번 밟고 일어서는 자료일 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난 인류가 1000억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천연기념물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나도 그런 1000억중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모든 인류와 함께 존재의 목적을 공유하지만 인간 나 김남준으로서의 존재의 목적은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 앞에서의 삶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따라 삽니다. 칼빈이 위대하고 개혁파 정통주의가 위해하고 일평생 제가 그 자료를 모으는데 헌신하며 살았지만 나는 그것을 떠받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발로 밟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존경해마지않는 위대한 어거스틴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살아야할 삶은 어거스틴의 삶도 아니고 에드워즈의 삶도 아니고 그 모든 것도 아니고 진짜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은 그런 모든 것들을 선물로 주셨던 역사 속에서 태어난 우리가 한 인간 실존으로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물으며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의 진정한 주체성이 된 자로서 발걸음을 옮기고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장중한 삶이라고 생각을 하고, 에드워즈가 이 자리에 마지막 강연을 하러 온다고 해도 그는 아마 말했을 것입니다. “나의 사상을 배우려고 하지 말고 나를 만나주신 주님께로 가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에드워즈의 컨퍼런스에 참여하면 참여할수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정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적인 주체성이 있는 삶을 살기를 갈망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