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하나님, 너무 자서 죄송해요’:
게으름과 잠(1)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잠 19:15)
녹취자: 김경애
게으름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잠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잠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본문을 읽겠습니다.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옛날 성경에는 ‘해태한’ 이라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풀어진다는 것과 태만하다고 할 때 태(怠)자가 겹쳐진 것입니다. 게으름이 배어들기 가장 좋은 것 중의 하나가 앞 시간에는 우리가 부주의에 대해서 배웠는데 왜 부주의하다고 했습니까?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힘드니까 쉬운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섬길 때 주의 깊음으로 섬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장에서도 주의 깊은 사람들이 실수를 덜합니다. 실수를 덜 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한 평가를 받을 수 없지만 어쨌든 많이 잘해도 실수가 잦은 사람은 불안해서 뭔가 큰일을 맡길 수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게으름이 배어들기 가장 좋은 것 중의 하나가 잠입니다.
이 책을 쓸 때보다 정확하게 설교할 때가 아마 2003년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책은 2003년이나 2004년도쯤 나왔을 것 같고 설교는 1년 전쯤에 했을 것 같고 분명히 여기서 했습니다. 오후예배 때 그때는 아직 제가 에너지가 있었으니까 오전에 3번인가 설교하고 오후설교를 또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후에는 ‘게으름’, ‘친구’, 등등 실제적인 설교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 보다는 제가 많은 질병을 겪고 건강을 잃고 연약해지면서 지금은 기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데 조금은 긍휼한 마음이 좀 더해졌습니다. 그래서 게으름을 피워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체질적으로 도저히 잠을 일정시간 자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래야 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은 주님만이 명확하게 면도칼처럼 가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빙자해서 충분히 잠을 줄일 수 있는데 안 줄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다 계산할 때 그때 주님이 다 알아서 계산해 주실 것입니다.
1. 게으름이 배어들기 가장 좋은 곳은 어디입니까?
잠입니다. 왜냐하면 잠은 합리화하기 쉬운 육체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몸이 힘드니까 좀 자도 되겠지.’ 하며 눕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잠깐 동안의 낮잠은 우리 건강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런데 그 권고를 듣고 따라 해보려고 하는데 두 시간 내지 세 시간을 퍼 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밤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또 잡니다. 그 사람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낮잠은 정말 건강에 도움이 될까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물론 잘 먹고 잘 자는데 무슨 건강에 해롭겠습니까? 그렇지만 정신적인 건강에도 그것이 좋을까? 여러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까? 아침까지 늦게 자고 일어나면 해가 중천에 떴을 때 그 야릇한 기분을 느껴보셨습니까? 약간 수치스럽기도 하고 시간이 아깝기도 한 그런 느낌 그것을 안 느껴보셨다면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조금 더 자도 되겠지?’ 하면서 일어나려다가 거꾸로 누웠습니다. 자, 획일화할 수 없는 기준입니다. 체력적으로 체질적으로 매우 약하게 태어나서 그래서 잠을 안잘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라고는 말을 못하겠는데 소수의 인원이 수련회를 갔는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아침에 같이 밥을 먹는데 잠자느라고 못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수들이 수련회를 갔을 때도 그런 교수들이 있습니다.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아니 어른들이 거기에 계신데 조금 덜자고 내려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장로님들과 수련회를 갔는데 몸이 한참 힘들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도저히 아침에 못 일어나겠는 것입니다. 문자를 보냈습니다. ‘장로님들 장로님들끼리 가서 식사하고 오십시오. 저는 더 누워야겠습니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누워서 눈만 감아도 수면의 50% 정도는 활력에 보충이 된답니다. 못 일어나겠습니다. 그때 비로소 ‘이럴 수도 있구나!’ 그리고 옛날의 사람들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래서 도저히 못 일어났구나!’ 그리고 예전에 사람들에 대해서 박하게 말씀으로 몰아붙였던 것에 대하서 조금 회개까지는 아니지만 그러나 내가 좀 더 사랑의 마음을 품고 얼마든지 할 수 있었는데 기준을 나와 같이 강력한 체력과 마음만 먹으면 잠을 줄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을 기준으로 모든 사람을 보고 못하는 것은 결국은 의지가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던 것에 대해서 마음 한구석이 싸했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식으로 변명하는 사람은 ‘저 속에 분명히 무엇이 들었을 거야!’ 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조금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많아졌습니다.
그 다음 남보다 적게 자도 생활에 지장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은 별로 안 좋은 곳에 계시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평생 4시간을 잤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웬만한 사람이 그렇게 4시간씩 자면 과로사를 하든지 아니면 급작스럽게 질병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익혀진 것입니다. 잠이 오는 경우가 경험상으로 두 가지인데 물론 그냥 잠이 오는 일반적인 잠도 있지만 피로가 누적되었기 때문에 더 많은 수면을 몸이 요구하는 경우가 있고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잠을 자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력이 소진되어서 그냥 까부라져서 잠밖에 못자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잠을 아무리 자도 해소가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서 링거라도 맞고 그리고 우선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이런 사람은 소화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소화가 너무 잘되면서 이렇게 잠이 오는 경우는 기력이 소진된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소화가 잘 안됩니다. 그래서 많이 먹지를 못합니다. 그런데도 어쨌든 너무 과한 음식이나 소화하기 어려운 음식을 피하고 이 잠은 소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소화를 잘 시킬 수 있는 음식을 섭취하면서 영양분을 섭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몸이 회복되는 것만큼 운동을 하고 해서 전체적으로 이 기력을 다시 UP해야 합니다. 돈이 있으면 보약을 지어먹던지 그것도 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기력이 소진되었을 때는 휴식과 영양보충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해결해야지 이런 상태가 되었는데 계속 밀어붙이면 잘못됩니다.
우리 동창 목사님 가운데 총신대 교수로 계셨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연락을 받지 못했는데 갑자기 신문에 났습니다. 뭐냐 하면 이 양반이 물론 나보다 약간 어리기는 하지만 교회에 가서 작정철야기도를 했답니다. 그런데 1,000일을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것을 누군가가 강하게 말렸어야 합니다. 그 정도 되면 함부로 금식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1,000일을 철야를 하는데 그것이 말이 됩니까? 굉장히 건장하신 분이었는데 뇌졸중으로 한 번에 쓰러지셨습니다. 그래서 인지기능까지 사라진 것입니다. 사람들도 못 알아보고……. 그런데 조금씩 회복되는데 문병을 갔습니다. 내가 이렇게 붙들고 말을 건네는데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사모님이 ‘이분이 누군지 알아요?’ 그러니까 ‘김 남 준’ 입이 움직입니다. 나는 기억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해주고 왔는데 그런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게으름의 문제에서 예외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은 문제 2번입니다. 문제 1번은 넘어가는데 일 분단이 읽어보겠습니다.
2. 수면의 문제는 획일화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수면 생활에 대해 가져야 할 원칙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과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보면 이렇게 업무, 음식, 교제, 잠, 섬김 이 모든 것을 같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직장에 가서 주보를 만들고 심방전화나 돌리고 새가족에게 편지나 쓰고 있으면 내가 직장상사라면 나는 당장 자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업무시간 끝나고 집에 가서 하든지 그리고 회사에서 그런 기계를 가지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업무로 부름을 받았으면 그 업무에 충실해서 고용자가 여러분들에게 임금을 지불한 것보다는 이익이 남게끔 해주어야지 그것이 직업윤리입니다.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은 우리의 입맛은 어거스틴에 따르면 우리를 홀리는 것입니다. 입맛이 떨어지면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먹기 싫습니다. 그러면 몸이 점점 야위어갑니다. 입맛이 돕니다. 이것은 건강에 필요한 만큼만 먹어야 하는데 항상 이 혀끝에서 이 야로를 부리면서 더 많이, 더 맛있는 것으로 두 가지 음식에 탐욕을 부립니다. 더 맛있는 것과 더 많은 것으로 양적인 탐욕과 질적인 탐욕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계속해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과하면 어떻게 됩니까? 비만이 오고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당연합니다. 교제도 무엇입니까? 이것도 너무 지나치게 교제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살림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것도 아닙니다.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섬김을 적당히 하라는 이것은 질적으로 적당히 하라는 것이 아니라 시간 사용에 있어서 적당히 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은 교회에 바글바글 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나는 할 일이 끝났으면 빨리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왜? 집에 가서 살림하고, 가서 가정도 돌보고, 공부도 하고 그래야 합니다. 우리교회에는 그런 사람 없는데 청년들이 방학 때 만날 모여서 새우깡 놓고 기타 치면서 그게 뭡니까? 그게. 그러다가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섬기는 시간에 와서 열심히 섬기고 딱 끊고 돌아가서 공부에 열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과를 내야 합니다. 그래야 경쟁에서 이깁니다. 그런 똑같은 원리가 잠에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6시간밖에 안자는데 내가 8시간밖에 잘 수 없을 때에는 그렇게 자고도 충분히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은 생존을 위한 두 시간이 아니라 자기가 자의적으로 자기가 편하기 위해서 더 자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많이 자는 것이 싫은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누구든지 늘어지게 자며 다 좋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고 싶은 것보다 1시간 덜자고 일어나면 몸이 찌뿌드드하고 이 속에서 몸이 말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하는 것 아닙니까?
3. 잠언 19장 15절에 사용된 깊은 잠은 창세기 2장에서 어떤 용례로 사용되었습니까? 이를 토대로 알 수 있는 게으름이 가져다주는 잠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타르데마’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죽음같이 깊은 잠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되느냐 하면 그냥 자연적으로 잠든 것이 아니라 잠드는 주사를 놔서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지는 그런 특별한 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이게 히브리 원문에는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잠을 떨어뜨리시니’ 라고 나옵니다. 깊이 잠이 드는 것입니다. 깊은 잠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우리를 지속적인 잠으로 떨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것을 얼마만큼이 우리의 건강을 위한 것이고 얼마만큼이 우리의 정욕인가 하는 것을 구분해내는 것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보면 신앙의 의무를 회피할 때 우리들이 가장 쉽게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이 몸이 안 좋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제로 그럴 경우에는 몸을 너무 다그치지 말고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왜? 1회용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방식으로 익숙해질 경우에는 충성스러운 삶이 불가능합니다. ‘게으르면서도 충성된 종아!’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부지런한 것이 육체의 부지런함이 아니라 정신과 우리 전인격과 존재의 부지런함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날들은 재깍재깍 하며 지나갑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살기로 이미 계획되어 있습니다. 그럼 결국은 그 정해진 기간을 어떤 품질의 삶을 사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고 두 번째는 시간은 정해진 것이니까 결국 우리가 어떻게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면서 사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럽니다. 자기도 젊은 시절에는 엄청나게 목회에 헌신하다가 건강을 다 잃어버리고 암에 걸리셨습니다. 그분이 자기의 생활방식을 후회하는 글을 쓰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는 젊은 시절에 휘필드가 이야기한 썩어서 죽기보다는 닳아서 죽겠다는 말에 저처럼 너무 감동을 받으셨고 그것이 사실은 내 삶을 움직인 하나의 명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분의 말씀 가운데 의하면 절대로 닳아서 죽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건강을 돌보지 않으니까 닳아서 죽으면 좋은데 그것이 아니라 각종 질병으로 나타나서 반신불수가 되고 중풍에 걸리거나 아니면 과로로 쓰러져서 뇌사상태로 가거나 아니면 암에 걸려서 사역을 못 하게 되거나 하는데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 어떻게 닳아서 죽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정신은 우리들이 본받아야 하겠지만 그 적용을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젊은 날이었습니다. ‘아이고, 핑계도 많네!’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프고 나서 정말 동의가 되었습니다.
잠의 원인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잠은 현실을 도피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인생의 너무 괴로운 날에는 잠이 위로입니다. 왜? 망각의 시간으로 들어가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잠시 떠나니까 물론 꿈을 꾸어서 새로운 현실 같은 꿈을 만날 수도 있지만 그럴 때 꾸는 꿈은 별로 좋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잠에 빠져듭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사실은 육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즉 영혼의 상태에서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예리하게 진단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첫 만남에서 그 사람이 다시 만나야 될 사람이지를 결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애의 많은 시간들을 쓸모없는 대화와 다른 일에 빠져 낭비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까지는 못합니다. 한번 만남에서 ‘저 사람 호감이 간다. 싫다.’ 그렇게는 하지만 ‘내 생애 다시는 너를 못 만난다.’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한 시간 안에 결정했답니다. 일평생 이 사람을 다시 만날지 안 만날지를……. 그것에 대해서는 부지런히 살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감동이 되는데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어떻든 엄청나게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60년간을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그가 말을 타고 다니면서 설교한 기록은 당시에 기네스북에 올라갈 정도의 기록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통계가 나왔었는데 1년에 설교한 것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정확한 숫자가 기억나지 않는데 2,000편 3,000편 되는 설교를 1년에 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거의 5번에서 많으면 10번 가까이 한 것입니다. 그 체력이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정말 불행한 가정생활을 하셨습니다. 사모님 이름이 바제일 이었는데 이분이 집회를 하고 돌아오면 집에 들어오자마자 머리채를 휘어잡고 이 하얀 머리카락이 한웅 쿰씩 빠졌답니다. 그런 속에서도 꿋꿋이 자기의 길을 가셨습니다. 사모님을 천국에서 만나셨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4. 잠언 19장 15절에 사용된 ‘해태함’의 원어적인 의미는 ‘민첩함이 결핍된 것’입니다. 해태함이 가져다주는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 사람은 어떻습니까? 우선 육체적으로 굶주릴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기발한 발상이 있는 사람이 아닌 한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맨 처음에 소주병이 항상 오프너로 따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절에 지금부터 50년이 넘는 시절인데 오프너를 누가 집집마다 가지고 있습니까? 소주를 가지고 오면 어떻게 합니까? 남자들이 이빨로 따는 것입니다. 수저로 따는 것도 다 나중에 나온 것이고 다 이빨로 땄습니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워낙 술꾼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빨이 너무 힘든 것입니다. 하루에 한 두병이어야지 열병씩 따려니까 이빨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만날 술 먹고 집에서 행패나 부리고 자는 사람인데 이것을 편리하게 먹을 방법이 없을까 하고 자기가 발명해냈는데 돌려서 따는 플라스틱 꼭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로소주회사에서 당시 1970년대 초에 병 하나에 1원씩 받았습니다. 돈을 계산해 보십시오. 그 당시에 억이라고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숫자인데 로열티를 받았습니다. 자, 그렇게 게으르면서도 기발한 발상이 있어서 돈을 버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해태한 사람’ 우리말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태만함 사람은 무엇을 해도 안 됩니다. 음식점을 하면 지저분하고 맛이 없어서 안갑니다. 여러분 음식점에서 음식 하는 사람들을 보면 진짜 잘되는 집은 소스 하나를 내리기 위해서 30시간씩 헌신하고 심지어 두 시간 세 시간씩 가스불앞에 서서 그것을 저으면서 엑기스를 만듭니다. 그래서 거기서 명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으릅니다. 그런데 무슨 좋은 결과가 있겠습니까? 육체적으로 굶주리고 영적으로도 굶주린 것입니다. 은혜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됩니다. 직장 할 일 다 하고 가정일 다 하면서 기도생활 해야 합니다. 성경공부 해야 합니다. 구역원들 가르쳐야 합니다. 구역원들 일일이 챙겨야 합니다. 또 아프다는 사람이 있으면 뭐라도 사가지고 가서 위로하고 굶니 먹니 하는 사람 있으면 가서 구제하고 말로 위로하고 나는 힘들어도 어쨌든 그런 일들을 해내야 합니다. 그것이 부지런하지 않고 해낼 수 있는 일인지 한번 보십시오. 엄청나게 부지런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해태하다는 것은 민첩함이 결핍된 것입니다. 빨리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됩니까? 분명한 목표의식 아래 생기는 재빠른 반응이 민첩함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선한 것을 지향합니다. 악에는 민첩하지 않고 둔한 게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민첩하다. 새로 나오는 게임을 단시간에 섭렵하고 몰입해서 그것을 터득하고 거기에 빠져든다. 나는 제일 불쌍한 사람이 게임에 빠져드는 사람입니다. 젊은이들은 완전히 그 젊음의 기세를 꺾어버리는 것이고 나이 든 분들이 거기에 몰두하는 것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빈털터리가 됩니다. 그런 것은 처음부터 그런 즐거움을 맛보면 안 됩니다. ‘그러면 목사님 해봤습니까?’ 그러는데 교회를 하기 전이니까 1991년도인가 1992년도에 친척집에 가서 도시건설이라는 게임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얼마나 몰입도가 높은지 6시간을 컴퓨터 앞에 몰입해서 게임을 했습니다.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하면 안 되겠구나!’ 그 다음부터는 게임에 손을 안 댔습니다. 손을 대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지금 게임은 그때 게임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아십니까? 우리나라 게임할 때 러시아에서 오케스트라를 사서 작곡까지 해서 배경음악을 까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나라의 게임을 당할 나라가 많지 않습니다. 그 대신 중독성이 어마어마하게 강합니다. 중국에서는 벌써 그것을 치료하는 것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산업이 안 생길 수 없으니까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하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기 때문에 육적으로 민첩함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육적으로 굶주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쟁사회에서 밀려나는 것입니다. 꼭 경쟁에서 이겨야 하느냐 그것은 먹고 살만한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녁거리가 없고 내일 아침에 애들이 먹을 밥이 없는데…….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있습니까?’ 그러면 그냥 그렇게 사세요.
5. 구원받은 신자의 분명한 목표는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어떻게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부패한 옛 본성과의 끊임없는 투쟁이 필요하고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야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 이것들은 모두 마귀의 세력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스토트 목사님이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종교자가 있다. 그것은 사탄이다. 기독교인들은 설교자는 게으른 적이 있어도 사탄은 자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끊임없이 인간의 마음에 거짓을 뿌린다. 누가 그보다 부지런할 수 있겠는가?” 가슴이 엄청나게 찔립니다. 그렇습니까? 물론 그는 특수한 영적인 존재지만 우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니까 쉬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삶의 긴장을 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게으름 이라는 책은 현대의 정신인, 욜로 같은 정신, 소확행 등등 이런 것에 전면적으로 도전장을 내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삶의 이런 분야에서 이미 승리한 사람들이 이런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과 경쟁이 안 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떻게 치열하게 해서 성공 했는가 에는 감동을 덜 받고 ‘그렇게 열심히 살지만 말고 쉬어라. 그리고 한번밖에 없는 인생이니 당신이 즐거워하는 것도 해라.’ 그런 말에만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말을 계속 따라가면 그 사람은 계속 승자로 남고 그만 못한 사람은 결국은 그나마도 노력을 안 하니까 경쟁사회에서 패배자로 남는 것입니다. 그렇게 꼭 경쟁을 해야 하느냐? 하는데 그것은 현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 속에서 어떤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을 찾아가는 모든 성도들의 삶속에서 나태함과 게으름을 충분히 용납하는 모습을 성경에서 읽어낼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세상은 그들의 가치관대로 살게 두고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주는 가치관대로 살면서 그 사람들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좋은 결과를 산출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고린도후서 10장 4절을 읽고 끝내겠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렇게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최선을 다해서 산 사람들만이 이렇게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만날 코가 비뚤어지게 자면서 “우리의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의 능력은 부지런한 모든 사람의 능력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이 신령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