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 창조의 목적
녹취자 : 양일구
우리의 모든 삶, 사역, 신학은 그 자체가 천지창조의 목적과 직접적으로 연관됩니다. 그래서 천지창조의 목적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으면, 마치 궁극적으로 싸우는 목적을 모르는 군인들이 전쟁을 하는 것 같은 형국이 될 것입니다.
A. 아르케(arche)를 바라보는 과학과 철학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무슨 이유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셨을까에 대해서 과학과 철학은 두 가지의 설명을 합니다. 첫 째는 하나님도 세계가 필요하셨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으로서는 부족한 분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의 “자충족성”에 문제가 제기가 됩니다. 헤겔(Hegel 1770-1831)은 이 문제를 세계 자체가 하나님의 본질을 함께 나누어 가지고 있는 세계로서 완성되어 간다는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정신학으로 넘어가면, 세계도, 하나님도, 함께 완성되어 간다는 개념으로 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자충족성에 문제가 제기 됩니다.
또 하나의 해석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에게 뭔가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 자신의 효과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서 아주 훌륭하게 설명한 신학자가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제 8권은 “Ethical Writings”이라고 하는데, 윤리적인 작품들로 모아져 있습니다. "Ethical Writings"에는 천지 창조의 목적과 참된 미덕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논문이 실려있습니다. 반드시 공부하고 넘어가야 될 부분입니다. 제가 이 논물을 대하면서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뿌리가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신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천지창조의 목적은 1부와 2부로 되어있는데, 1부에서는 순수하게 이성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이 왜 천지를 창조하셨고, 천지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2부에서는 성경에 입각해서 신학적으로 이 문제를 다룹니다. 1부는 철학적 접근이고, 2부는 신학적 접근이라고 보면 됩니다. 신학에서 성경을 통해 입증하는 진리와 철학에서 인간의 사변을 통해서 도달하는 진리가 사실은 꼭 같아야지만 정상적으로 올바로 신학을 한 것이고, 철학을 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 이성이 타락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해내갈 수 없게 됩니다. 설령 백번 양보해서 인간의 이성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할지라고 계시가 필요 없이 이성만으로 과연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진리를 찾아갈 수 있는가 라는 것은 대답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서 죄가 들어오기 전에 아담의 상태에서는 이성만 필요했겠습니까, 아니면 신앙만 필요했겠습니까, 아니면 이성과 신앙 모두 필요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두 개의 인식능력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지성으로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인데, 하나는 이성이고 하나는 신앙입니다. 신앙으로서는 계시를 믿고, 이성으로서는 추론해 갈 수 있는 계시를 통해서 사물을 인식해가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신철학이 참된 철학이라면, 신학에 증거와 일치해야 합니다. 이것을 “Double Truth” 이론이라고 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에 정통 개신교 스콜라주의가 창궐하면서 이중 진리론들이 제기 되었습니다. 대게 이것은 철학자들에 의해서 제기 되었는데, 신학을 통해서 발견하는 진리와 철학을 통해서 발견하는 진리가 틀리다고 주장합니다. 우린 사실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쪽에서는 순수하게 이성적인 논리로 천지창조의 목적을 찾아가고, 다른 한 쪽에서는 신학적인 논증을 통해서 천지창조의 목적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향이론
에드워즈 신학의 강점 중 하나는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를 아주 역동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에 있어서 성향이론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사물에는 성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쇠는 무겁고 왠만한 충격에 깨지지 않는 성향을 갖고 있고, 유리는 투명하고 자기를 통해서 다른 사물을 보게하는 성향이 있고, 충격과 열에 약한 특성이 있습니다. 휘발류는 공기 중에서 빨리 승화하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물에는 여러 가지 성향이 있습니다. 성향, 경향성 이런 것들이 사물의 본질이라고 본 것입니다. 예전에는 사물의 Essence가 따로 있고, Essence 중에서 성향이나 힘 같은 것은 한 요소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경험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오히려 사물은 본질 자체가 힘이고, 경향성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참 존재이신데, 즉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베라 에세”, 참 존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철학적으로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 “에흐야 아쉐르 에흐야“라고 나오는데, ”에흐야”는 “I am”, “아쉐르”는 “who” 관계 대명사이고, “에흐야”는 다시 “I am”입니다. 이것은 영어로 “I am who I am” 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는 시제가 많지 않습니다. 완결형과 미완결형만 존재합니다. 미완결형은 미래도 될 수 있고, 현재도 될 수 있고, 진행형도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I am what I'm being” “나는 지금 존재하고 있는 바 나다“ 라고 해석합니다. 결국 하나님 자신은 존재하시는 분이시고, 다른 하나님 이외의 모든 존재물들은 자기의 존재의 원인을 자기 밖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에도 당신 존재의 원인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크기와 부피, 길이와 높이를 가지고, 혹은 색깔을 가지고 사물이 존재하는데, 그러나 이런 사물들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원이라는 관점으로 놓고 보면, 1초에 사라지던지 백만년 뒤에 사라지던지, 그것은 무한대와 비교할 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참으로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존재하는 것은 참으로 존재한다는 이유가 아니라, 또 다른 이유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들의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들이라면, 그래서 본질이 있다면, 하나님에게도 본질이 있지 않겠는가,
B. 본질과 속성의 담론
하나님의 효과
존재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으로 본질과 속성의 담론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창조와 관련 지어서 하나님의 본질은 힘이며, 경향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당신 자신은 불변하시지만 당신이 계신 효과를 이 세상에 나타내심에 있어서는 불변하시는 분이 아니라, 끊임 없이 활동하시고 변화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이 태양의 햇빛을 받으면서 살아 있고 기동하고 열매 맺고 번식합니다. 태양은 한번도 지구를 방문한 적이 없지만, 태양의 빛이 효과가 지구에 미쳐서 식물들이 자라고, 동물들이 생활하고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합니다. 하나님 자신은 불변하시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의 효과는 태양의 효과처럼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자신의 효과를 끊임 없이 방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효과 때문에 이 세계가 창조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치 태양이 자신의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것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듯이, 하나님이 존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통제하실 수 없는 효과의 경향성으로 인해 지구가 창조되었다고 보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창조 자체가 하나님의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된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그것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계신 효과를 피조 세계 속에 나타내시지만 하나님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생겨난 세계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의지와 지성을 가지고 당신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시간의 개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처음 창조 될 때, 완전한 세계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하나님이 세계 없이 하나님 혼자 계시던 때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질문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공간과 시간의 개념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가 있으므로 그 존재가 소멸하거나 증진되는 것으로 측정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재가 없다면 시간의 개념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늙거나 쇠하거나 변모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니 안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만을 가지고 시간이 도입될 수 없으니까, 시간은 모든 세계의 창조와 함께 도입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창조와 함께 시간이 도입되었다면, 그 때가 어느 때가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홀로 계시던 때가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 하나님이 창조하셨든 언제라고 하는 물음 자체가 성립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창조의 완전함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완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빛이 잇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히브리어로 “와이아레 키 토브“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셨더니 ”와이아레 엘로힘 키 토브”, 키 이하의 문장은 결과적인 결과의 “아프터시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셨는데, 모든 것들이 좋은 것들을 보셨다. 거기에 쓰여진 “토브”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영어로 “Good“ 선함을 의미합니다. 이 "Good"은 하나님의 존재의 특성을 들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된 모든 세계가 완전하고,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셨다 라고 하는 것은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선이지만, 존재론적인 측면에서는 탁월함이 되고, 미학적인 측면에서는 아름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세계를 밝은 눈으로 잘 관찰하면, 죄가 들어왔는데도 하나님의 존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노래를 지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 알 수 있어요”
하나의 세계라고 하는 존재를 어느 각도에서 보았느냐에 따라 각기 표현 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완전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완전하지 않았다면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에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완전했다고 하면,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두어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완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땅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면 손을 안대고 정복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불안전했기 때문에 창조된 세계는 점점 더 완전한 것으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하면,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이 완전하지 않다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이 19세기에 와서 화란을 중심으로 격렬한 논쟁의 테마가 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이렇게 설명하면 아주 명쾌하게 설명이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완전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세계는 손을 대고, 가꾸고 돌보면, 완전히 또 다른 완전으로 이행할 수 있는, 그렇다고 해서 예전의 완전이 불완전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완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세계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몇 일전에 우리 교회 자매가 아기를 낳았는데 너무 이쁘다고 합니다. 그 아기는 아기로서 완전합니다. 이 아이가 4살 쯤 돼서 뒤뚱거리며 엄마, 아빠를 이야기 합니다. 그 때도 너무 이쁘고 4살에 맞게 완전합니다. 19살이 되어서 여성의 미를 풍기며 나타났습니다. 이 때 역시 이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면 각각 스테이지마다 완전성을 갖고 있으면서, 아이가 성장하며, 스테이지에 적합한 완전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작은 묘목은 불완전한 나무고, 큰 나무는 완전한 나무라고 말할 수 있겟습니까, 씨앗이나 싹이나 나무나 나중에 고목이 되었으나 모두 완전한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계를 선하고 완전하게 창조하셨지만 만약에 그 자체가 최고이지 더 이상 좋아질 수 없다면,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시는 대신에 손대지 말고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하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정복한다”라고 하는 의미는 말을 타고 전쟁을 하면서 나라를 정복을 하는 그런 종류의 정복이 아닙니다. 이 정복은 “카슈아”라는 단어인데,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개척입니다. 창조된 땅과 산이 완전한 상태 그대로 있습니다. 거기에 나무를 심고, 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민둥산으로 있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개척하라는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다스리다“라는 단어는 ”라다“라는 단어인데,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폭군처럼 약탈하고 지배하고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백성들을 학대하는 그런 종류의 다스림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를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임금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군인의 본분, 관리들의 본분, 아내들의 본분, 남편의 본분, 상전은 노예에게, 노예는 상전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 질서를 잡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피붙이처럼 여기며 질서를 놓아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양성으로서의 하나님
성경에서 하나님은 언어적으로 히브리어에서 남성으로, 신약에서도 하나님은 남성으로 나오십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양성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할 때, 그 아버지를 우리 나라의 근엄한 아버지상을 그리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아버지 상이 아닙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을 때 동구밭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다리는 것은 원래 어머니가 합니다. 그런 것이 바로 성경의 특성입니다. 하나님의 구성은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 하는 남성우월주의의 질서 속에서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는 양성이 모두 있습니다. 그래서 남성성과 여성성이 시간 세계 속에서 분광이 되어서 나타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십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남자를 흙으로 만드시고 거기에서 갈비대를 통해서 여자를 만드십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 하나가 시간 세계 속에서 분광되어서 남자와 여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이 함께 어울려서 양성의 조화를 이루게 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의 양태를 본뜨게 되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여성 호르몬은 여성에게 있는 호르몬인데, 남성에게서도 여성 호르몬이 나오고, 여성에서도 남성 호르몬이 나옵니다. 여성이 남성 호르몬이 많게 되면 여드름 같은 것이 막 돋습니다. 남자가 여성 호르몬이 많게 되면, 비유를 잘 맞춥니다. 여성 호르몬이 많으면 머리카락이 덜 빠집니다. 대게 가부장적이고 폼 잡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머리가 많습니다. 이렇게 자연의 세계 속에도 하나님의 존재의 양태가 깃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에 의해서 같이 살게 되어있습니다.
남성은 끊임없이 불같이 열정을 갖고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고, 안정적인 것보다는 가보지 못한 곳에 가보고, 해보지 않은 것을 해보며 자기 만족을 누리고, 여성은 있는 것이라도 잘 가꾸며 살고 싶어합니다. 남성은 전진하고, 여성은 디에서 정복된 것들을 잘 다스리면서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들어내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선은 현실태와 가능태로서의 선이 있습니다.
현실태와 가능태로서의 선
현실태와 가능태라는 것은 철학에서 어떤 사물들이 자기 자신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을 기분으로 해서, 현실태는 액츄얼리티 즉, 지금 밖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꽃은 현실태로서 활짝 피어 있는 것입니다. 가능태는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작은 꽃 봉우리가 있다면, 그러면 그것은 활짝 핀 꽃의 현실태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대, 이 세계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 입어서 정복하고 다스림으로서 더 선해지고, 더 아름답고, 더 탁월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 이 세계가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단,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인간이 스스로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창조될 때부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노동이 첨가되면 더 아름답게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사물 속에다가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가능태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힘 입어 노동을 할 대 하나님이 주신 가능태로서의 아름다움을 현실태로 꽃 피우게 할 수 있습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겠습니까,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여전히 빨개 벗고 과일이나 따먹고 놀았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개혁주의적인 창조관이 아닙니다. 하나 더 묻겠습니다. 아담이 짐승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아담에게로 이끌어오니까 하나씩 이름을 붙였습니다,하나님께서 주신 지성이 그 사물들을 보는 순간 적합한 이름을 짓는 것이 그들이 이름 없이 돌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아름답게 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것은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죄된 욕망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부터 내성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사랑은 필연입니다, 사랑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거기에서 이제 무엇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이 선과 악의 갈림길이 됩니다. 사랑하지 말아야 될 것을 사랑하면 악으로 빠지는 것이고, 사랑할 것을 사랑하면,
선으로 흐르게 됩니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사랑하면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문명과 지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천천히 성장해 온 것이 아닙니다. 한 순간에 발휘되면서 엄청난 폭발적인 가능성이 솟아난 것입니다. 건물 짓는 것을 보면,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기둥으로 세워서 지은 건물의 약점은 하나의 기둥이 무너지면 모두 함께 무너집니다. 역학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그렇게 않하고 아예 가장자리를 든든하게 세워서 위에다가 기둥 없이 철판을 치고 콘크리트를 쳐서 전체를 하나의 스판을 만들어서 버티게 합니다. 그러면 성을 작은 거라도 하나 지을려고 하면, 역학적인 계산, 수학적인 계산, 물리학, 구조, 미학, 디자인 이런 것들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건물을 지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하는 능력이 “아키텍처”입니다. 그것이 건축입니다. 희랍어에서는 아르케(arche)는 원리이고, “텍쳐”는 기술입니다. 여러 가지 기술이 한꺼번에 모여서 조화를 이루며 건물을 만드는 기술의 아버지를 가르켜서 아키택처라고 부릅니다.
인간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주신 지성적인 능력은 굉장한 것입니다. 다만, 지성이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무능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자연적인 인간의 능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수학의 세계, 천문학의 세계에 들어가보면 인간의 능력에 대해서 혀를 내두를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미 발견해 놓은 이론들을 들어도 뭔 말인지 잘 모를 정도입니다. 그럴 정도로 인간의 지성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가능태로 있는 아름답고 선하게 될 수 있는 이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을 통해서 인간이 노동을 감의하게 될 때,(여기에는 인간의 정신적인 부분도 포함함) 세계는 더 아름다움으로 찬란하게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천지창조의 목적
우리들이 인간의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럴 때, 웨스트민스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가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영화롭게 해드려서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신다면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실수 있습니니까, 인간에게 적선을 받아서 겨우 영화로울 수 있다면 인간의 도움 없이 하나님은 비참하다는 의미입니까, 이것이 천창조의 목적으로 설명이 됩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은 그 자체는 하나님이 당신이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창조하신 세계를 지금도 붙들고 계시고 움직이시고, 당신의 지성적인 능력을 닮은 인간을 대리자로 두셔서, 그의 영혼과 정신과 육체에 끊임없는 해택을 베푸시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섬김을 통해서 창조 세계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보다 아름답게 되어질 수 있는 가능성들을 꽃피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선사한다고 보기 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을 받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지성, 하나님을 닮은 것을 가지고 행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에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하나의 존재들도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이것을 아키텍처처럼 어느 하나의 최종적인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천지 창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성부에 의해,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창조되는데, 창조된 모든 세계는 서로 영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지 당신 이외에 모든 피조물들에게 신적인 자신의 본질을 나누어주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십니다.
예를 들자면, 헤겔의 “판 엔 데이즘”, 범죄신론이라고도 하고, 내재신론이라고도 하는데, 판데이즘은 범신론입니다. 모든 물과 신이 한 덩어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불교와 동양사상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범죄신론은 다릅니다. 만물 안에 신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만물 안에 신이 있는데 사실 이러한 고백은 우리도 합니다. 하나님이 안계신 곳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이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편재성입니다. 그러면 편재하시는 하나님이 어디서 발견됩니까? 모든 곳에? 그러면 모든 곳 어디에 어떤 양태로 계십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 어디에나 계신다는 말이 당신의 신적 본질을 이 세상 어디에나 흩어놓으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판 엔 데이즘”은 바로 이런데서 약점을 갖습니다. 모든 만물 속에 하나님이 계신데, 자신의 본질을 분리시켜서 나누어진 형태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개혁신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내재성(임마넨띠아)과 초월성(트랜스켄덴띠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은 인간의 육체에 대한 영혼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내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머리 두개골부터 열어서 관수와 골수를 쪼개서 그 속에서 영혼을 발견하려고 해도 영혼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본질은 육체의 본질 속에 섞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든 세계 안에 안계신 곳이 없으시면서 동시에 아무데도 안계신 것입니다. 안계신 곳 없는 것은 내재성이고, 아무데도 안계신 것은 초월성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초창기 신학, 즉 초대 교부들이나 종교개혁자들까지 하나님의 존재의 특성 가운데 초월성이 굉장히 강조 됩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이 인간의 세계 속에는 섞이실 수 없다는 초월성이 강조되었습니다. 초월성만 강조하면 현실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어떻게 하든지 강조하고 싶은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기류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과정신학 같은데서는 하나님이 세계 안에 계시는데, 이 세계가 점점 더 완전한 세계가 되어가는 것 처럼, 하나님도 점점 더 완전한 하나님이 되어가신다라고까지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초월성과 내재성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성령 안에서 창조됩니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해석은 창세기 1: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이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더라”라고 말씀하시는데, 뒷 부분 “수면 위에 운행하시더라”가 “로크 엘도힘 메라 헤테트 알프네 하마힘”입니다. 그러면 “마임”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물”인데, 히브리에서는 출렁거리는 물만 마임이라고 부르지 않고, 기체 상태의 수증기도 마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마임이 질료의 상태였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칼빈도 계승하고 있습니다. 즉, 두 번 창조를 말하는 것인데, 질료를 창조하시고, 그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시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질료의 창조는 무로부터의 유의 창조로서 “바라”를 사용하고, 바라를 통해서 존재하게 된 질료에 형상을 부여해서 각양 사물로 만드는 것은 “아사”나 혹은 “야차”를 사용합니다.
이렇게 창조의 세계가 만들어지게 되는데 한 성령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쓰여지는 “메라 헤페트”라는 단어가 우리말 성경에서 “운행하다”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사실은 운행이 아니라, 어떤 새 집 같은 것들이 있으면 새 둥지 위에서 큰 새가 날개를 펴고 나풀거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운행되는 수면보다 운행하는 성령이 훨씬 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성령 안에서 하나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질료에 형상을 부여해서 무언인가 만들어졌을 때, 그것들은 결국 성령 안에서 창조된 것으로써 또 다른 성령 안에서 창조된 것과 영적인 연결 관계를 갖게 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되는 해석은 영적인 연결 관계를 갖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 자신의 신적 본질을 피조물 속에 분여하셨다고 해석하면 안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교통을 한다고 할지라도 신적 본질을 나누어 가짐으로서 하나님의 교통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매개로 인간은 인간의 존재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존재인데 신적 본질의 섞임 없이 교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양성론과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 공존하지만, 물이라는 신성에 포도주라는 인성을 섞은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 속에 빛이 비추는 것처럼 섞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적인 본질은 인성에 의해서 전혀 침범받지 않은 채, 손상되지 않은 채 존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손상당하지 않으시면서, 질적으로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성령 안에서 연결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하나하나의 존재들이 하나님이 설계하신 전체적인 설계도를 따라서, 마치 비행기 안에 있는 수백만개의 부품 하나하나가 연결이 되어서 땅을 박차고 하늘을 오르는 비행기처럼,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하나의 피조물들이 작용과 존재에 있어서 어울리며 하나의 최종적인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향해 가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인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발 아래 구르는 돌맹이와 똑같은 처지이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 안에서 창조의 목적을 세계와 자신과 하나님이라는 삼각 구도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됩니다. 지금은 죄가 들어와서 영혼 자체를 어둡게 만들어서 총명을 가려버렸습니다. 지성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과 동떨어진 작용이 아니라, 영혼의 가장 우수한 기능 중 하나입니다. 영혼 자체가 어두움에 가리워져 있으니까 지성이라는 활동 자체로 눈이 멀어서 종속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감각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유추해서 원인과 결과를 잇는 본성적인 작용에 속한 것들은 자연적인 능력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것들을 판단하는 것,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지식들을 얻는 것들은 완전히 뭉개져 버려서 지성이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렷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그를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돕지 않으시면 인간이 스스로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 밖에 있는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두 개의 인식능력, 신앙과 이성 중에서 신앙은 완전히 뭉개져버리고 이성은 상당부분 살아 있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성은 사물들을 만들고 문명을 일구는 역할들을 해낼 수 있는데 이 문명이 어디로 가야될지는 신앙이 정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뭉개져버렸으니 기껏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인 것 처럼 생각하고 문명을 일구면서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이 세계를 건설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날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하나님 없는 문명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굉장히 어두운 그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찬란한 과학 기술 보다는 갈 바를 아는 들풀 한포기의 아름다움이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유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의 의무는 자기와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시고 창조세계가 왜 존재하며 자기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창조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인간의 가중 중요한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이 끈이 짤라저 버려서 자기를 온 우주의 중심이며 자기의 행복이 모든 가치의 최고점이라고 생각하면서 각자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오늘 날 포스트모더니즘은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을 신격화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입니다. 진리는 무엇인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바꾸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는 나에 의해 창조된다고 봅니다. 이러한 창조 목적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인 성찰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탈신학적인 현상들을 보십시오. 이제 창조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게 된다면, 인간은 창조 목적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니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의 실현에 있어서 인간은 보다 직접적이고 능동적인 관련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액티브” 하시고, 인간은 “액티브” 하고 “패시브”한 면을 갖고 있고, 자연의 모든 만물들은 “패시브”합니다. 지금도 모든 피조물들이 탄식하면서 구속의 날을 기다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땅이 도움을 주었습니까, 말리지 않았을 뿐이지, 아니, 땅에게 말릴 능력이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의 타락 때문에 모든 피조 세계가 함께 흐느끼고 탄식하면서 구속의 날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저주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 이것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과의 창조 목적에 있어서 수동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세계가 완성되는 그 날에 인간의 완성과 함께 모든 창조 세계는 다시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 역시 패시브합니다. 바로 이것이 피조물 된 세계의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의 중보로 인한 창조이 목적
세계는 맨 처음 창조될 때, 그리스도를 중보로 해서 창조됩니다. 그러니까 중보의 개념은 구속에서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세계가 창조됩니다.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세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세계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머리라고 하는 것은 머리와 몸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는 한정성을 가지고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머리와 몸은 사실 본질적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우리 인간과 피조 세계가 몸이라는 것은, 머리이신 신적 본질을 함께 공유하면서 그의 몸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우리가 몸이라는 것이 주로 나타내는 것은 이분의 생명과 통치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존재의 효과가 인간과 모든 피조 세계에 미치고, 머리가 명령하면 몸에 장애가 있지 않는 한 머리에 의해서 움직이듯이, 인간과 모든 피조 세계가 통치자이신 그리스도 옛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이런 모든 질서와 상호교통들이 깨져버립니다. 깨뜨려지는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인간의 노동을 통해서 들어내시고, 그래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신성에 충만한 나타나심이 이 피조 세계 속에 가득해지는 그것을 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지속됩니다. 그래서 구속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어오게 된 이 모든 세상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깨뜨려지지만, 그 깨뜨려진 세계를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으십니다. 그래서 먼저 인간들을 모으십니다. 왜냐하면 자연 피조물들은 어차피 수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는 머리가 되시는데 그것은 잠정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목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완성과 함께 모든 창조 세계의 머리가 되셔서 당신의 신적 본질을 나누어주시지 않으신 채로 인간과 모든 피조 세계와 영적인 관계를 갖고, 당신의 주권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끔 통치하tu서 당신의 영광을 들어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종말과 함께 모든 피조물들의 머리가 되시는 것을 가르켜서 “리카프 탈 라치오”라고 합니다. 영어로 “리프틸레이션”인데, 우리 말로는 “총괄갱신”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사실 “다시 머리되심”입니다. “리”,는 “다시”이고, 카프투스(카투스)는 라틴어에서 “머리”입니다. 이것을 이레니우스가 리카프탈라치오의 교리라고 세웁니다. 그래서 우주적인 계획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머리 되셨으나, 구속의 완성을 통해서 다시 머리가 되심으로 창조의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통치하시고, 그 통치 안에서 인간이 끊임없이 섬기며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찬란한 영광이 들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동은 새 하늘과 세 땅에서도 지속됩니다. 인간의 노동 그 자체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노동이 고통과 쓰라림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에, 죄의 결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결론적으로는 천국도 섬기기 위해서 가는 것이고 이것이 인간의 행복입니다. 그러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집니다. 그러한 전망 가운데에서 인간은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고, 자신이 받은 구원을 통해서 어떻게 이 세상의 창조의 목적을 인간들에게 다시 복음을 전해서, 그들을 그리스도께 접붙여, 그의 영혼 속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흘러들어가게 해서 그들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지으신 천지창조의 목적의 구도 속에서 이해하며 자기의 위치를 정확하게 정립하고, 거기서 자기를 사용하시고자 하시는 그 뜻에 따라 살아가고, 다른 사람을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도록 돕는 것, 그 일을 함에 있어서 종말론적인 위대한 전망을 가지고 살라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안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에 대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선교는 그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고, 끊어진 하나님과의 생명을 이어주어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신학 교육은 이러한 이치를 인간의 지성에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의 위대한 창조 목적의 비전을 따라 살 수 있는 실제적인 방안과 길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가르쳐주고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목회는 그것을 적용해서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생명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법도대로 순종하며 삶의 모든 지평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게 사람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선악간의 판단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천지창조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여유 있는 사람들의 스콜라적인 담론이 아닙니다. 비젼을 따라 살아가라고 맣은 사람들이 말하는데, 오늘 날 “비젼”이나, “네 안에 있는 무한한 잠재력”, 이런 것들은 사실 포스트모더니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창조 목적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으니까 “죄”에 대한 설교가 사라지게 되고, “네 안의 있는 가능성을 일깨우지 못하는 것”,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밖히셨는데 아직도 허접하게 절망 가운데 허덕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죄라고 봅니다.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목적을 따라 모든 것이 죄입니다.
회심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 “컨베르지오”인데, 결국은 창조 목적이 아닌 것이 그 자체가 악이고, 창조의 목적으로 가는 것이 선입니다. 가던 길을 돌이켜 서서 다시 방향을 정하고 가는 것이 회심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 우리가 아무리 회중들에게 잘 가르쳐도 창조목적을 거스르는 사람들은 절대로 창조 목적을 향해 돌아오지 않습니다. 돌아오기 위해서는 본성적인 변화, 그리고 가치관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믿음 그 자체가 영혼의 성향의 변화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가져다 주는 것이 중생과 회심입니다. 오늘 날 미래에 대해서 강구하는 수 많은 전망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회심이 없는 것은 사상누각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심오하게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의지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중생하고 회심하여 그리스도만을 바라고만 사는 사람으로 바뀌는 혁신적인 변화가 없이는 누구든 창조의 목적대로 살 수 없습니다.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잘되시는 것을 보며 만족하는 것, 이것은 회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오늘 날은 회심이 점점 보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점점 커져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을 갖는 것은 하나님이 오늘 날 교회에 해주셔야 할 의무뿐입니다. 그리고 해택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가고자하는 인생의 목표를 전익격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고자 하는 인생의 목표에 주님께도 지원을 받으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입니다. 자아를 신격화하고 자아 실현을 인간 존재의 목적이라고 봅니다. 그런 설교들이 오늘 날 난무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날은 칼빈주의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저는 이 논문을 읽으면서 몇 일동안 신학적이고, 철학적으로 깊은 충격을 느꼈습니다. 그 이후에 속편으로 이어지는 “The nature of true virtue” 참된 미덕의 본질이라는 책인데, 이 책은 상당한 철학적 사견으로 이어지지만, 이해하게 된다면 엄청난 지적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거기서는 오늘 나르이 휴머니즘과 도덕주의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철학적으로 논변해 냅니다. 이 책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휴머니즘과 도덕주의를 거대한 악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왜 여기에 살아있고, 왜 신학을 하고, 왜 성경을 읽고, 무엇을 기대하고 목회를 해야하는가”를 천지창조의 목적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분명하게 천지창조의 목적에 대해서 정립하며, 한걸음 한걸음 살아가야지만 인생의 낭비가 없습니다.
질문
질문 1
가능태로서의 인간은 범죄함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능태로서의 인간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심으로 완성되는데, 그 가능태에서의 세계가 단순히 구속받은 한 인간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답 1
아닙니다. 인간의 가능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죽이고 산다고 할지라도 완전에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들이 영화에 이르게 됩니다. 그 때에 모든 것이 완성됩니다. 그래도 그 완전을 향해 가려고 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들이 시간과 공간 세계 속에서 아루어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질문 2
총제적인 부흥사역의 개념으로 보아도 되는 것입니까?
답 2
복음 그 자체가 모든 계획을 보여주는 유일한 계시이니까, 안에서 모든 답이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밖에서 답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오늘 날 서구사회의 문명입니다. 어떻습니까? 방향을 찾을 수가 업습니다. 오늘 날 미국을 보십시오, 신앙을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니 답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방황이 결국은 객관적인 진리를 모더니즘 속에서는 인정을 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애서는 “객관적인 진리라는 것은 없다”라고 보고, 그런 것을 찾으려는 담론 자체를 거부해버립니다. 그래서 샤르트르라는 사람은 모든 것을 우연으로 봅니다. 우리가 여기 왜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냥 있는 것이다. 잉여의 존재이고, 연분의 존재이고, 없어도 되는데 있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필연성은 결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샤르트르는 “행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도 그런 담론 자체가 웃긴 이야기라고 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성 그 자체를 멸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성을 멸시하는 것 자체가 이성의 판단에 의해서 이성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것은 욕망과 자기 자신의 생각이 주체가 됩니다. 이런 것들이 광고 카피에 수두룩하게 나옵니다. “튀는 내가 좋다”, “내 맘대로 살아볼꺼야” 이런 것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이키 “불가능은 없다”, 리바이스 “난 나야” 등) 인간은 그렇게 절대 기준을 내팽겨치고 나면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것 같지만, 사실은 불행해집니다. 인간의 극도의 자유주의가 주어진 그곳에 신비한 종교, 폭압적인 이단들이 이상하게 인기를 끌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이 예속되기를 갈망하는 특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가 고백 했듯이,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열렬히 찾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집요하게 뿌리치며 도망가는 존재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입니다.
질문 3
가능태로서의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이 가진 지성을 개발해 나아가야 합니까?
답 3
당연하죠. 그러니까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이 세계를 완전하게 되돌려놓을 수도 없고, (하나님은 그런걸 기대하시지도 않으시지만) 하나님이 주신 신앙과 공간의 세계 안에서 창조의 목적에 근접하는 세계가 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셔서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진리와 성령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천지창조조의 목적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뚜렷한 인식과 그렇게 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불붙는 열정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없습니다.
질문 4
천지창조의 목적은 결국 무천년설이라고 정의해도 되는 것입니까?
답 4
이것은 무천년설과 관계가 없습니다. 제가 설명한 천지창조의 목적은 천년왕국설 중에 무천년설과만 관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체계 안에서 포괄적입니다. 어던 식으로 보든지 간에 그것은 각자의 견해이고, 창조 창조의 목적은 그 자체로의 목적을 갖습니다. 전천년설을 통하든, 무천년설을 통하든, 후천년설을 통하든, 무엇을 갖다 넣든지 간에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은 이전 단계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끼워넣든지 간에 상관이 없습니다. 점점 부흥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느냐, 아니면 갑자기 대환란이 일어나 사람들이 깨어나서 다시 부흥이 일어나느냐, 이런 것들은 왕국설에 따라 다르지만, 그러나 이것은 전체적으로 무엇이 들어느냐의 중간 단계의 문제입니다. 제가 말하는 천지창조의 목적의 구도를 왕국설들이 흔들 수는 없습니다.
질문 5
성경에서 “만유 아래 계신다” 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어떤 조화를 갖습니까?
답 5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에 있어서 머리가 되신 것 처럼 또한 그리스도는 세계를 구속함에 있어서도 마지막에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세계가 완전히 완성되고 나면, 두 세계, 즉 천상과 지상의 모든 세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엡 1장에 나옵니다. 만물을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함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통일”이라는 단어가 아마 “카펠레오”라는 단어인데, 그것이 라틴어로 “리카프탈라치오”입니다. “다시 머리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해서 두 세계 가 완전히 이루어지고, 탁월하신 그리스도가 모든 천상과 지상에 있는 만물위에 가장 뛰어난 하나님의 본체로서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보든지 간에 천지창조의 목적은 하나니 자신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구속을 통해 이 세계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완성된 세계는 고정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세계가 “그레이데이션” 됩니다.
질문 6
현장에서 목회를 하며 영적인 문제들을 많이 느낍니다. 목사님께서 보시는 한국교회에 대한 전망과 문제는 무엇입니까?
답 6
한국교회를 보면서 많은 염려를 합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아무도 신학적으로 문제가 될 설교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탈사상화 즉 설교를 해도 그 안에 기독교 고유의 사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날 인기 끄는 설교는, 묵직하게 사상을 다룬 설교는 사람들이 싫어하고, 오프라윈프리 쇼 같은, 아침 마당 같은, 잔잔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설교를 선호합니다. 누구도 잘못했다라고 말하지 않고 “너도 피해자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설교, 회개하고 죄인이라는 원색적인 복음의 메시지보다는 어떻게 살든지,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받아달라고 사정하시는 분이니 그 분이 너를 사랑하실 수 있게 허락하라는 설교, 무엇인가 이 땅에 있는 것을 부인하고 인간 안에 있는 죄성을 들어내서 그리스도가 그 몸에서 존귀하게 되려는데에서 가치를 찾기보다는, 신앙의 덕을 입어서 이 세상에서 번영을 이루려하는 설교, 이런 설교가 인기를 끕니다. 이것은 이전에 있었던 기복주의와는 틀립니다. 이제는 예수 믿으면 밥 주고, 돈 주고, 떡 준다고 그래도 모이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직접준다고 해도 모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오늘 날 시대는 “어떻게 인간이 밥만 먹고 살 수 있는가?”라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정신적인 위안으로 삼습니다. 자신을 바르게 함과 책망과 의로 교육해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 자신는 사라져도 그리스도는 존귀하게 되게 하려는 진리에 입각한 신앙이 아니라, 이 세상이 성공과 번영, 자기 실현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쪽으로 가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비젼”입니다. 성경적으로 비젼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비젼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받은 비젼일텐데 오늘 날은 자기가 꿈꾸는 비젼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강요하는 그런 종류의 비젼입니다. “영성”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이고, 인간에게 네 안에 있는 잠재력을 100% 발휘하라는 등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오늘 날 교회가 깊이 물들어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한번쯤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날 한국교회에 물들어 있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문제도 있습니다. 감리교, 장로교, 천주교, 성결교 등 모든 교파가 싸우지 않고 지낸다고 좋은 시대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장로교가 장로교답지 않고, 감리교가 감리교답지 않으니까 싸울 일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서로 사랑하고 잘 살라는 말씀을 인용해서 각 교단이 가진 전통과 신학적 체계들을 수호하고 변증하는 것을 모두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한마디로 성도들을 모아놓고 물탄 죽만 계속 먹이는 꼴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세상에 물들 뿐, 이길 수는 없습니다.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 교회의 도덕적인 수준의 심각한 저하입니다. (크리스챤의 이혼과 동성애 등)
“기독교의 진리는 이것이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빚어진 가장 작은 피조물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넘치는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에게 주셨고, 그러면서 그 사랑에 감격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며 사는 것, 자기는 잊혀지고 그분이 기억되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게 해야 하는데, 오늘 날은 그렇게 설교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너무너무 고통스럽고 괴롭습니다. 저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말씀드리는데 오늘 날의 인기 있는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늘어나고,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줄어들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설교를 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제가 “죄 죽임의 교리”를 설교하는 기간 동안에 50%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전혀 상관없이 교인이 계속 늘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달콤한 말을 듣기를 원하지만, 진짜 진리를 알고 싶어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런 설교를 듣고 하나님을 만나면서 진짜 교회다운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최악의 경우에 교인들이 쫒아내기 밖에 더 하겠습니까, 오히려 할렐루야입니다. 진리를 설교했기 때문에 핍박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오늘 날 시대에 진리를 설교했다고 핍박받는 것이 가능합니까, 이런 일은 하나님이 정말 그 사람을 복 주시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껏 해야 차가 없어져서 대중교통 이용할 것이고, 지금 사는 집에서 좀 더 조그마한 집으로 이사하겠지만 사는데 아무런 지장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두렵습니까, 주님 있으면 하나도 힘들지 않습니다. 행복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설교하십시오. 모든 사람이 자기를 버려도 주님이 인정해 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무데나 가서 십자가 세우고 설교하면 하나님이 사람들을 안보내 주시겠습니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진리를 말할 수 밖에 없고, 여호와의 진리를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