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 질의응답
녹취자 : 조원정
(질문)
(답변) 어려움은 내가 못나서 어려움이지 내가 그것을 했기 때문에 어려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땅에 존재하는 어느 목회자도 경쟁상대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함께 사랑해야 할 동료이지 가까운 동네에 있다고 나와 비슷한 길을 걷는다고 그렇게 경쟁상대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신학적인 설교를 하고 목회를 하니 어려움은 사람들이 은혜가 있다고 하니 많이 옵니다. 그런데 반이 또 갑니다. 초창기에 제가 개척하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주일 설교가 평균이 100분이었습니다. 예배를 다 합치면 130분 정도 해서 예배가 끝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다가 사람들이 막 쓰러지고 그랬습니다. 은혜를 받아서 쓰러진 것이 아니라 지하실에서 공기가 잘 안통해가지고 호흡곤란으로 쓰러진 것입니다. 에드워즈와 저의 차이점, 그렇지만 저는 즐거웠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렇게 설교했기 때문에 성도들이 형성되었고 제가 일 년에 네 번 정도 교회에서 부흥회를 합니다. 한번은 밖에 나가서 하고 한번은 새벽에만 하고 두 번은 새벽과 밤을 하는데 20년을 했으니까 80번을 했는데 한 번도 외부강사가 안 왔습니다. 나도 원하지 않고 교인들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부담이 되면서도 좋은 것은 언제나 교인들은 신학적 충격을 원합니다. 그러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7년 전에는 새해 신년 사경회 할 때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론을 가지고 사경회를 닷새 동안 설교준비를 했는데 원고를 천매를 써놓고 설교를 했습니다. 3일 만에 천매를 썼습니다. 아우그스티누스의 박사 논문 8권을 읽고 사경회 원고를 썼습니다. 부담이 저에게 항상 있지만 즐겁습니다. 고달프지만 나를 자극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20년 동안 작년 12월 15일 현재 5215편을 설교를 했고 원고 없이 설교하기 때문에 설교를 모두 텍스트 해서 원고지 4천 만매 정도 가지고 있는데 은퇴하고 난 다음에 한 권 한 권 책으로 내는 것이 저의 과업이 될 것입니다. 한 번도 힘든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만약에 이런 식으로 목회를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고달팠을까는 생각은 여러 번 했습니다.
(질문)
(답변) 질문의 요지가 뭔가 하면, 사실 이 강의를 여기서 처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인들에게 한 강의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드린 주기도문이라는 책은 두 달 전쯤 우리 구역예배 공과 교재였습니다. 이제 끝냈습니다. 저 학생이 하는 이야기는 오늘 포스터모더니즘 시대이기 때문에 아주 감각적인 시대여서 생각을 안 하려고 합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너무 사는 것이 괴로우니까 선배한테 물어봤습니다. “선배 인생이 도대체 뭐야” 선배가 하는 말이 “네이버 쳐봐” 그래서 삶이 무엇인가 쳐 봤더니 삶은 계란, 이렇게 나왔더랍니다. 이렇게 생각을 안 하는 시대에 저희 교회에서 설교를 듣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뭔가 하면 움직이지 마라, 시선은 고정하라, 졸지 마라, 정신은 쇠락하라, 그리고 집중하라 입니다.
논리를 따라서 요즘은 50분에서 70분, 길면 80분까지 가지만 그런 정도의 설교를 논리적으로 따라오는 자체가 굉장히 버거운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교인이 어린이 빼고 한 3300~3400명 정도 모이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따라 오는 것은 아닙니다. 몇 명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세는 따라 옵니다. 주기도문 오늘 저녁에 나눠 드리겠지만 우리 교회는 책 필요 없고 목차만 놓고 사람들을 모아 놓고 목차만 가지고 전체 내용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오백 명 정도 됩니다. 그 사람들은 일 년에 신학 책을 평균 네 권정도 정독을 합니다. 왜냐하면 공과공부 교재가 4권 내지 6권입니다. 10년 되었으면 40권을 읽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기의 신학적인 실력이 쌓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논리를 싫어하는 것 같지만 그런 논리 없이 살아가는 삶이 너무 피곤한 것은 사실입니다. 지칩니다. 그러다 보면 논리적으로 도대체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욕망이 성도들에게 다 있고 심지어는 요만한 꼬맹이들까지 그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제가 모던 리포메이션이라는 미국 잡지에도 제가 그것을 기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브릿지에서 두 아이가 싸우고 있었습니다. 세 살짜리 네 살짜리 여자하고 남자하고, 막 싸우다가 한 아이가 물었습니다. 남자애가 “야 왜 우리가 이렇게 싸우는지 알아?” 여자애가 “네가 잘못했잖아, 네가 먼저 나를 괴롭혔기 때문에 싸우는 거잖아” “아니야” “그러면 왜 싸우는데?” “너와 나의 마음속에 새까만게 있어서 싸우는 거야” 이것이 칼빈의 전적 타락의 교리를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너무 재밌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교육을 장년에다만 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까지도 교회학교에서 시킵니다.
유치원에서 일어났던 실제의 일입니다. 선생님이 크리스챤입니다. 부모들이 뭐라고 하던지 기독교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워낙 유치원을 잘하는 곳이라 학부모들이 거기 보내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애들이 모입니다. 선생님이 천국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6세 된 아이가 “야 천국이 저렇게 좋은 거야? 나 엄마한테 보내달라고 해야지” 엄마가 돈이 많아서 뭐든지 해줍니다. 불신자입니다. 옆에 있는 애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아 천국이 저렇게 좋구나, 나 착한 일 많이 해서 천당 가야지” 얘는 알미니우스적인 교파에 속한 것입니다. 또 한 아이는 “나는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아직 어려서 천당 못간데” 이것은 구원파입니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다음에 한 아이가 모두를 정리해 줍니다.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해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야, 엄마가 너 보내 줄 수도 없고 네가 착한 일 한다고 천국 못가, 그리고 네가 아무리 어려도 천국 갈 수 있어, 믿음은 오직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가는 거야” 이건 칼빈주의입니다. 우리 교회 유치부 학생이었습니다.
1학년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옆에 있는 짝에게 전도했습니다. “너 교회 가자” 이 친구가 대답이 걸작입니다. “야 내가 평생 교회에 안 다녔는데” 평생이라 해봤자 8년인데 왜 내가 널 따라서 교회를 가야 되냐는 것입니다. “너와 나는 모두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해" 그 얘기를 들으니까 얘는 이해를 못했는데 집에 와서 그 얘기를 하니까 엄마가 얘가 천지창조의 목적을 이해하고 있나, 물론 이 엄마는 천지창조에 대한 설교도 여덟 번이나 들었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천지창조의 목적도 읽었습니다. 그것을 읽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교인들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천지창조의 목적을 철학적으로 물어봤습니다. 엄마 고백이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릴수록 철학을 잘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결론을 아멘하고 받아들입니다. 머리를 안 굴립니다. 나이가 들게 되면 머리를 굴리게 되면 에이 그것 거짓말 아니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래서 결국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해가 되는데, 이런 요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할 수 있는 근육이 발달 되지 않았는데 어떡합니까? 그래서 아이폰 가지고 다니면서 이러면 안 됩니다. 그런 것 내려놓고 꼭 필요한 것만 써야 됩니다. 그리고 사색하는 능력을 기르고 어차피 교인들이 이 시대에 교육을 그렇게 받아서 그 모양이 되었는데 투덜 거려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학교 보고 AS해달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초등학교 가서 교육을 다시 하라고 하겠습니까? 어차피 그렇게 된 것 소용이 없습니다. 할 수 없이 교회에서 그런 근육을 강화시켜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리를 통해서, 때로는 철학적인 강의를 통해서, 철학을 강의한 적은 없지만 이런 강의를 통해서 책을 권장하고 질문도 하고 어려운 책도 읽게 해서 근육을 계속 운동해서 키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지겹게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매우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따라가고 처음 믿는 사람들은 구역장이 그렇게 해주면 그런가 보구나 해서 책도 보고 인터넷도 보고 하면서 설교를 따라 오는 것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쉽습니다.
(질문)
(답변) 우선 학교를 하고 싶은 의욕은 있었습니다. 우리교회가 기독교 학교 설립을 위한 대안학교 연구위원을 만들어서 1년 동안 조사를 했습니다. 마지막 결론은 나의 사역의 짐이 너무 과중해서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 어렵겠다고 생각했고 할 만한 가치는 넉넉히 있는데 그렇게 결론이 났습니다. 고전 교육은 매우 필요한데 교회에서 그리스 신화나 읽히면서 고전 교육을 시키는 것은 어려움이 많다고 보고 그러나 우리는 교회학교에서 등불학교라고 만들어가지고 아이들에게 다방면의 교육들을 입체적으로 시키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일 년에 두 번씩 계속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심한 아이들에게 성경과 거듭난 과학자가 쓴 과학책을 들려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뉴턴주의와 다윈(?) 환상에서 깨어나게, 그것을 극복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교회에서는 간접적인 교육을 시키고 가정에서는 철저하게 교육을 시키고 그것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교리 교육을 착실하게 시켜야 된다고 말씀드립니다.
(질문)
(답변) 단절하는 것은 기독교적 관점이 아니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관점입니다. 나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닥읽”입니다. 어떻게 할까? 백날 어떻게 할까 해봐야 어떻게 할까? 입니다. 닥치고 읽어라, 한권이라도, 그리고 과감하게 맞서라, 오늘날 우리들이 하고 있는 신학공부가 어려움에 처했다는 것이 그런 점입니다. 예전에는 종합적인 세계관을 가진 인간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학문의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확고한 세계관을 가지고 그 세계관 속에서 지식들을 쌓아가면서 자기의 능력 닿는 만큼 이 세상의 풍조와 잘못된 사조에 대해서 저항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용기와 이론으로 강력한 논지로 주장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모르는 것입니다. 작년에도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컨버케이션에서도 설교를 했는데 개혁주의 실컷 가르쳐 놓으니까 예리한 칼을 갈아서 복음주의 목을 콱 찌르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주의도 잘 못 할 수 있으니까 고쳐져야 됩니다. 그러나 복음주의보다 심각한 적이 많습니다. 이교주의, 무신론, 세속주의 이런 것들이 많습니다. 거기 가서 한번 붙어야 되는데 쟤네들은 큰 칼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는 요만한 칼을 가지고 있는데 싸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독서량과 사색과 논리는 엄청납니다. 깔짝깔짝하고 한 구석에서만 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끼리 통용되는 이론 가지고만 이야기 하니까 밖에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 하는지 이해도 못할뿐더러 우리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해도 저쪽에서 말이 안 통하는 것입니다. 버나드래미라는 신학자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할 때에는 성경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신학을 하지만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계몽주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학문의 논리를 이용해야 한다. 그래야 저 사람들하고 교통이 가능하다. 전달에 있어서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사고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
(답변) 첫 번째 질문에 답하면 저의 소원은 아직 말 못하고 젖꼭지 빠는 아이부터 시작을 해서 곧 돌아가실 할머니까지 각각 다른 교재를 만들고 통일된 커리큘럼을 만드는 것이 저의 목표인데 아직은 그 정도까지는 안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출판부가 있고 필요한 교재 중에 3분의 1정도는 기존에 나와 있는 좋은 교재를 쓰고 3분의 2정도는 우리가 자체 제작을 해서 사용을 합니다. 커리큘럼은 물론 되어있고 성경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종합적인 교육을 위해서 등불학교 같은 것을 만들어서 거기서 세계관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커리큘럼들을 소화해서 우리들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학교 교역자는 한 부서에 집중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학교 학생이 1400~1500명 정도 모이는데 교회학교 교역자가 지금 현재 열네 명, 열다섯 명 정도 되고 디렉터로는 경험이 있고 경력이 있는 사람이 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친다고 할 때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을 따로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변화를 받고 은혜를 받는 것과 지적인 것들이 정리된 것과 같이 가야 됩니다. 세계관은 결코 머리에서 머리로 전달되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쉬운 내용에서부터 매우 어려운 내용까지도 학생들에게 교육 시키려는 의지는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교리학교 같은 것들을 철저하게 학생들에게 해서 유아세례교육 같은 것을 받을 때에는 회심을 입증하고 완벽하게 카테키데노스를 외우지 아니하면 세례를 안 줍니다. 유아세례도 안 줍니다. 유아세례는 처음에 교회에 들어오면 여러 가지 과정을 하고 2년 정도 지나면 교리반을 공부해서 거기에서 조직신학을 서론부터 종말론까지 제가 직접 강의를 해서 한꺼번에 배우고 매주 시험을 봐서 90점 이상을 받아야지만 수료가 됩니다. 그것을 해야지만 교사로서의 자격을 줍니다. 그 사람 모두가 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합니다. 좀 기다렸다가 여러 가지 과정을 신약, 구약하다가 결정적으로 교리반에 어드벤스포스트잇이 됩니다. 그러면 라틴어에서 직역한 기독교 강요 2400페이지를 가지고 한학기 동안 공부를 하고 사이드 리딩이 한 3000페이지 정도 됩니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모든 스케줄을 전폐하고 그것에 전념하게 됩니다. 읽으면서 강의를 듣고 설교를 듣고 리포트를 쓰고 해서 정신없는 나날을 보냅니다. 매주 시험을 봐서 중간고사도 보고 기말고사도 봐서 마지막에 기독교 강요 2400페이지에 대한 시험점수가 최소한 85점 이상이 나와야지만 이수가 되고 이수를 해야지만 선일렉션에 노미네이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수집사나 권사나 되면 기본적인 신학지식이 형성이 되어서 신학적인 논란이나 분란은 안 일어납니다. 아직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정도 되면 학생들이나 아무나 놓고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자유롭게 가르칠 수 있고 얼마나 요새 머리가 좋은지 우리 교인 중 90%가 대학 졸업자인데 철학 뭐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머리 더 좋습니다. 찾아서 읽고 가르치고 얼마든지 잘 합니다. 기독교 교육을 함에 있어서 아직 부족한 것이 많은데 어쨌든 본질에 충실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질문)
(답변) 영적으로 미성숙하게 되면 자기가 지식을 갖고 있으면 교만해지고 그러는데 방지책은 계속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 지식이 은혜의 물에 잠기게 되면 절대 교만해질 수 없고 또 하나는 자기가 많이 안다고 했지만 자기 위에 있는 장로님이나 구역장님들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대게 겸손한 것을 보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많이 배우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항상 저는 강조하는데 지식은 교만하게 하나니 그 지식이 하나님의 사랑의 물에 잠길 때 그때 진정한 지식이 될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그런 공부만 중요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공부보다도 훨씬 더 중요시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입니다. 예배 속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때 뭘 알았다고 말하면 말할수록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말씀드리면 실화입니다. 40대 중반에 있는 자매였는데 세상적으로 말하면 굉장히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입니다. 연봉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받고 어느 전문가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구역장이 맨날 전화해서 구역예배 좀 나오라 하니까 직장 핑계 대고 안 나간 것입니다. 자기는 우리 교회가 예배 시간도 너무 길고 오기 싫었는데 남편이 아무 교회도 적응을 못했는데 이상하게 이 교회 가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었는데 뭐가 통한 모양입니다. 부인이 어떡하면 이 교회를 떠날까 생각을 하다가 마침 이사를 갈 일이 생겼습니다. 잘 됐다. 직장을 잠시 쉬고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또 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매일 일 년 반 동안 전화를 해서 구역 예배를 나오라고 전화를 했으니까 이 사람들은 나를 생각하기에 나를 믿음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내가 저들만큼 믿음이 없을까봐, 이 사람들은 매일 모여서 공부한다고 뭔가 지적으로 교만에 빠져 있는 모양인데 내가 한번 가서 코를 납작하게 해 주리라. 왜냐하면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했고 하니까, 우리 교회 도서관이 있습니다. 퓨리탄 라이브러리라고 있는데 퓨리탄 라이브러리에 가서 무슨 책을 읽고 코를 납작하게 해줄까, 가만히 보니까 목사님이나 교인들이 칼빈, 칼빈 노래를 하니까 옳지 잘됐다, 저기 칼빈이 있네, 내기 읽고 가서 첫 번째 구역예배에서 화려하게 내가 뭔가를 보여주어서 저들을 납작하게 해 주리라하며 칼빈을 읽기 시작을 했습니다. 칼빈의 미가서 강해, 하박국서, 이런 설교집을 읽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칼빈을 읽다가 눈물 펑펑 흘리며 회심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습니다. 왜냐하면 칼빈은 굉장히 무서운 설교자였습니다. 칼날 같은 설교자였고 과격한 말도 많이 나왔고 저 사람은 맨날 교회 와서 나에 대해서 안 좋은 인상을 가졌는데 도대체 왜 저렇게 설교시간에 화를 내나,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우리를 죄인처럼 보면서 쥐 잡듯이 잡나했는데 칼빈의 책을 읽고 회개하고 나서 깨달은 것은 칼빈에 비하면 우리 목사님은 너무 소프트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 책을 읽고 설교를 듣기 시작하면서부터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를 이야기 할 때 신약성경에 두 희랍어 단어가 나오는데 멜로마이라는 단어와 메타노에이라는 단어입니다. 메토멜로마이는 거기서 멜라꼬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감정적으로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후회했을 때 그 단어가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메타노에오는 메타 + 노에오에서 온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회개하다고 되어 있지만 원래의 주된 의미는 사상이 변화입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신학적 회심입니다. 신학적으로 쾅하는 빛을 발견하고 확 돌아서서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계속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고 또는 신앙이 식어지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지식에서 완전히 멀어지지는 못합니다. 다시 돌아옵니다. 신학에서 자라게 됩니다. 열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경건하게 살면서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녀들 앞에 신학 책을 놓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탄탄하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저의 목회 사역의 목표는 기독교적인 실천을 우연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크리스천 싱크로 만들어서 독자적으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역사와 자연의 모든 세계에 대해서 적절한 견해를 가지고 한 인간으로서 내가 오늘 살아가는 학생으로서의 삶이, 주부로서의 오늘 삶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목적을 완성해가는 거기에 종말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너무 즐겁고 행복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마지막 희망이 있다면 두 가지인데 매일매일 그리스도를 나 자신이 닮아가는 것, 하나의 소원은 제가 11년 후에 은퇴하는데 마지막 설교하는 순간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때 가장 오래 설교를 들은 사람은 31년 동안 저의 설교를 들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때에 성경을 펴고 본문을 읽었을 때에 무슨 설교가 전개될지 예상 할 수 없는 설교자가 되는 것, 그렇게 하면서 살다가 하나님 허락하시는 날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다가 가는 것이 그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