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1
녹취자: 김경애
여러분들이 교리반을 시작하면서 아마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에 대해서 공부한 것이 기억날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서론부터 다시 해봅시다.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그중에서 우리가 지금 배우는 것은 구원론의 끝부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맨 처음 서론을 배웠는데 무엇이 나왔습니까? 종교, 계시, 성경 놀랍게 기억하십니다. 하나님론에서는 무엇이 나왔습니까?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가?’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인간론이 나왔습니다. 원시상태의 인간, 타락 전의 인간, 타락 후의 인간, 은혜언약 안에 있는 인간으로 나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기독론이 나왔는데 ‘예수님은 누구신가?’ ‘무슨 일을 하셨는가?’ 무슨 일의 중심은 속죄였습니다. 그리고 누구신가에서는 삼직에 대해서 나오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양성론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구원론으로 왔습니다. 우리가 구원론을 공부하면서 우리가 18장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일반적 작용이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일반은총과 일반계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일반은총은 어떤 것입니까? 일반계시라고 할 때 일반계시라고도 말하고 혹은 자연계시라고도 말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연계시는 계시의 매개체를 기준으로 할 때 자연, 본성, 이런 것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자연계시라고 부르고 그리고 반대말은 당연히 초자연계시가 됩니다. 일반계시라는 말은 계시에 대한 접근성을 기준으로 볼 때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이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반계시라고 불렀고 특별계시는 특별한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계시라고 불렀는데 일반계시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수 없고 특별계시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나 일반계시를 이해할 때 특별계시에 대한 이해는 풍성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러면 그것을 구원과 관련할 때에는 계시만이 아니라 계시는 인간밖에 있는 것이고 그 계시가 그림을 그리자면 계시가 여기에 있다면 이 객관적인 것이 인간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작용할 것입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우리들이 은혜 혹은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일반은총의 성질은 성령의 일반적인 작용이다. 그래서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을 완전히 방향을 바꾸는 그런 갱신이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입니다. 인간이 예를 들자면 앨버트 슈바이처 같은 사람은 어렸을 때 고기를 무척 좋아해서 친구와 싸웠습니다. 친구를 흠씬 두들겨 팼습니다. 슈바이처가 목사의 아들이었는데 친구가 하는 말이 ‘나도 너처럼 목사의 아들이 되어서 고기를 많이 먹으면 너 정도는 이길 수 있어.’ 이것이 어린 슈바이처에게 비수처럼 꽂힌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린나이에 육식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의 소위 이야기하는 생의 외경사상 같은 것이 사실 어릴 때부터 그런 단초가 생겼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런 것은 신앙과는 특별히 관계없는데 커다란 방향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 것들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런 것들은 인간의 본성 자체를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본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거슬러서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이것은 근본적인 변화이지만 고기를 먹다가 안 먹는다든지 아니면 절대로 공중목욕탕에 안 간다든지 아니면 안티에이징 화장품은 죽어도 안 쓴다든지 염색을 절대로 안한다든지 아니면 자신의 몸매에 대해서 아무 신경을 안 쓴다든지 신경을 쓰다가 다시 치워버리는 그런 것들입니다. 옛날에 독일 총리가 135㎏인가 140㎏ 가까이 나간 총리인가 장관인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어느 날 놀랍게 75㎏ 정도가 되어서 나타났는데 피눈물 나는 다이어트를 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나중에 먹는 것을 못 먹으니까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고 집어치우고 다시 자신이 살찐 대로 살겠다고 결심하여 턴하여 왔다 갔다 하는데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향한 본성의 변화가 아니라 그냥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성향의 변화입니다 그런 뜻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본성이냐 반대냐? 그것을 바꾸어 놓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지만 일반은총이 도덕적인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그런 반성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이런 작용도 누가 하시는 것입니까?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성령이 그렇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영향을 받으면서 도덕적인 선으로 돌아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반대로 나가는 것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은 다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으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일반적인 축복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풍년을 주시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먹고 죄를 지을 텐데도 하나님이 곡식의 열매를 맺게 하셔서 먹고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순종할 때 힘을 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당연히 무엇을 먹었으니까 나왔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무엇을 먹었습니까? 만나를 먹었습니다. 어제는 만나를 먹고 힘을 내고 불을 펴놓고 이방신에게 제사하고 간음을 행하는데도 정확하게 그 다음날 아침에 만나가 내리는 것입니다. ‘너희가 어제는 개판으로 살았으니까 만나를 주지 않는다.’ 하나님을 그러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일반은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햇빛을 주십니다. 그리고 심고, 열매를 맺고 거두게끔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죄인에게 진짜 나쁜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살며 숨 쉬고 기동하며 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신실하게 잘 믿는 사람을 데려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반은총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는 것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가지는 한계는 무엇이냐 하면 죄인으로 하여금 영적 선을 행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중요합니다. Spiritual Good. 혹은 Spiritual Goodness입니다. 그러면 영적 선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어떤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모두 선입니다. 그런데 마음속으로 ‘이렇게 내가 베풀어주면 저 사람이 내 똘마니가 되겠지?’ 그러면서 베푸는 것은 동기 자체가 자기 이익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런 것은 영적 선이 아닙니다. 심지어 ‘이렇게 하면 인류가 행복해지겠지?’ 하는 것도 영적 선이 아닙니다. 영적 선의 조건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그런 동기에서 우러나오는 선 그것이 영적 선입니다. 그 선은 오직 거듭난 신자만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런 일반은총의 한계는 이런 것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그렇게 선한 일을 행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믿음과 회개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할 수 없습니다. 일반은총은 그냥 그야말로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적, 시민적, 도덕적, 종교생활의 외면에 영향을 줍니다. 예를 들어보면 예전에는 거리에 나가면 담배꽁초하고 연기 때문에 살 수 없었습니다. 음식점에서 다 담배를 피우고 심지어 버스 안이 담배연기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흡연권은 혐연권에 우선했습니다. 흡연권은 담배를 필 수 있는 권리이고 혐연권은 담배연기를 싫어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항상 흡연의 자유 권리가 담배연기를 안 마실 권리보다 항상 위에 있었습니다. 법이 항상 담배 피는 사람의 편이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지금은 공사지만 막대한 전매청의 수익 그것이 다 국고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들어오면 담배를 전혀 모르는 친구들에게 전매청에서 싼값으로 거의 거저 담배를 주어서 담배에 인을 박히게 만들고 돌아와서 담배를 못 끊으니 잠재적 고객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부에서 규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때는 국민의 건강에 대해서 국가 1도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담배를 피우고 폐가 엉망진창이 되면 그것이 전부 건강보험공단 돈이 소진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니라고 하는데 자기모순입니다. 그것을 만들어 내고 KT&G에서 그것을 가져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홍삼을 팔면서 건강해지라고 그러고 담배를 팔면서 빨리 죽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건강보험공단에서는 돈이 고갈되니까 담배에 해골을 그려놓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일어나는데 지금은 안 핍니다. 왜요? 지금은 담배를 피다가 걸리면 바로 과태료를 물립니다. 못 피게 되어 있습니다. 지정된 장소가 아니면 피어도 괜찮았는데 지금은 지정된 장소 아니면 못 핍니다. 법으로 강제하니까 이것이 시민적 생활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회의 법과 시스템이 철저하게 되어있으면 숙명여고 같은 말도 안 되는 사태는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것이 솔직히 말해서 학교입니까? 미국 같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미국에서 저런 일이 일어나면 IVY리그의 대학을 비롯해서 수십 개의 대학이 향후 10년간 숙명여고 출신은 입학생을 안 받는다고 하고 딱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쫄망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발 나게 뛰어나도 그 학교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IVY리그에서 Exclude됩니다. 이것은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합니다. 왜? 다 비슷합니다. 학종부인가 무엇인가 그것이 믿을 만합니까? 솔직히 이야기해서 태반은 옛날 같으면 요즘은 김영란법 때문에 덜하다고는 하지만 옛날 같으면 다 봉투 갖다 주고 밥 사 먹이면서 선생들이 그것을 써준 것 아닙니까? 물론 그중에는 양심적인 교사가 분명히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교회에도 교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그 교사들은 안 그럽니다. 김영란 법이 생기기 전부터 안 받던 사람이 많습니다. 나도 대학교수로 있었지만 안 받았습니다. 대학에 누가 돈을 갖다 주지는 않지만 선물보따리를 가져옵니다. 다 돌려보냈습니다. 보십시오. 그런 선생님들이 있지만 그러나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어마어마한 학생들이 수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 학생들이 모두 그랬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공정하고 깨끗하다고 아무도 그렇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라입니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것을 산출해 내는 방식 자체가 교육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 학부모들이 저렇게 난리를 치면서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은 우리들이 박수를 쳐주어야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저분들이 수고하면서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일반은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라의 시스템이 똑바로 되어있으면 저럴 수 없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삼바사건에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저것은 엘론 사태와 비슷합니다. 감형 없는 징역 25년입니다. 30년 이렇게 때렸습니다. 아직도 감옥에 삽니다. 아예 선고할 때 ‘절대로 감형이 없는’ 그리고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수많은 공인회계사와 엄청난 회계 법인들이 거기에 연루되어서 그 말도 되지 않는 분식회계를 승인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빛을 현저히 거스르면서 사는 것입니다. 양심에 털 난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부정한 회개라는 것을 전문가들이 알았을 텐데 왜 그것을 정상적인 회개라고 도장을 찍어 주었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왜요? 돈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삼성을 존경해서?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돈입니다. 그러면 민주주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응징을 해서 회계 법인을 파산해 버리고 영구히 공인회계사 자격을 박탈하고 일단 오만 원 내지 십만 원씩 쳐서 감옥 속에서 종신하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라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좋은 나라일수록 모두 하나님을 믿고 복지담당자들이 가난한 사람들 때문에 펑펑 울면서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사람만 복지담당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이런 일반은총의 일반계시의 빛 일반은총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서 나라가 이루어져가야 하는 것입니다. 깊은 신앙심 그것은 별다른 문제이고 공적인 영역에서는 정직함과 청렴함, 일반계시의 빛 아래서 살아가는 일반은총에 대한 순종, 이런 가치들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에 대해서 교회가 길거리로 나가서 삼바를 타도하라고 외칠 수 없지만 개인은 입장을 분명하게 하고 소리를 내야하는 것입니다. 잘못되었다고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첫 시간부터 열을 받았습니다. 쌓였나 봅니다.
그래서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차이는 무엇이냐 하면 일반은총은 외면적 변화만을 가져오고 특별은총은 영적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을 일반은총은 사랑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양심, 역사, 법, 정의 이런 것들에 합치되는 삶을 살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방법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에 호소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항력적입니다. 호소하는데 ‘그런데 그런 것 필요 없어. 양심이 어디 있느냐고? 나, 전당포에 맡겼다. 나는 지금 양심보다는 지금 당장 돈이 중요하다.’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계 법인들이 말도 안 되는 불법행위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만 문제겠습니까? 기가 막힌 일이지만 법관이 돈을 받아서 감옥 가는 것을 우리 눈으로 똑바로 보지 않았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의 사법농단사태 이런 것들은 일반계시의 빛을 현저히 어긴 것이고 어긴 만큼 형벌은 가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비례의 원칙을 정확하게 구현해내는 나라가 정의로운 나라입니다. 뭐냐 하면 가항력적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반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호소하고 역사해도 ‘싫어!’ 그렇게 거부하면서 살 수 있기 때문에 수많은 상식을 벗어난 범죄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나라는 이런 빛들이 잘 들어와서 사회의 시스템상 그런 잘못을 할 수 없는 그런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여성이라고 무시당하는 일이 없고 신학공부 시간이니까 이런 이야기해도 될 것입니다. 이번에 아일랜드에서 법원에서 판결이 나서 아일랜드가 데모에 휩싸였습니다. 여성이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법원이 피고 무죄판결을 내렸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에 여성이 끈 팬티를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어로 Thong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길거리에 수많은 여성들이 나와서 Thong talks nothing. Thong은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Yes means yes no means no. 내가 봐도 그 판결은 진짜 거지같은 판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엄청난 남성주의가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판결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성들이 피해 받지 않는 사회, 그러나 또 이번 이수역사건에서 난 것처럼 남성이 남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부당하게 대우받지도 않는, 서로가 서로를 깊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해 주고 인격적인 존재로 존중해 주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기도하고 신앙에만 호소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영원히 예수를 믿지 않을 사람은 우리나라에도 많습니다. 그 사람들도 지키고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제도와 법과 사회의 시스템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를 자책하고 기도하지만 그러나 우리 자신이 정의롭고 공정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옳지 않은 일을 우리들이 하나도 하지 않는 완벽한 삶을 살 수 없겠지만 최소한 의식 속에서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하고 이것은 사회가 아니라고 이야기할 때는 아주 분명하게 이것은 아니라고 자기가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반은총의 빛 아래서 특히 사회를 향해서는 그런 포용적 정의와 교정적 정의가 필요한데 포용적 정의는 가엾이 여기고 안아주는 것이 사랑이라면 교정적 정의는 잘못된 것을 정확하게 이 사회를 우리들이 개선하면서 사는 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사회를 일반은총의 빛 아래 두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것은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영적이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역사해서 인간본성의 성질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항하며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한번 특별은총을 주시려고 마음을 먹고 구원하시려고 마음을 먹으면 인간이 여기에 항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반은총을 어떤 도구들로 일반은총을 베푸시느냐 하면 일반은총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계시의 빛인데 이것은 어떻게 비칩니까?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데 그럴 수 없는데 이번에 오천 팔백 몇 십만 원을 신호들 앞에서 주워서 집에 조용히 삼일 동안 보관했다가 걸렸습니다. 점유이탈물 횡령죄입니다. 그것은 형사 처분을 받습니다. 여러분들이 땅에 떨어진 돈을 주웠다. 혹은 수표를 주웠다. 아니면 돈을 뭉치를 주었다면 엄밀하게 말하면 100원짜리를 주워서 포켓에 넣어도 점유이탈물횡령죄입니다. 그곳에 가만히 두거나 아니면 경찰에 갖다 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갖다가 구제함에 넣어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본인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있는데 점유상태에서 이탈된 물건입니다. 그래서 실효적으로 점유권이 행사되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여전히 법적인 주인은 잃어버린 사람 것입니다.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것의 금액이 클 경우에는 벌이 가볍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육천만원을 쓰지 않았는데 기소되었습니다. 입건되었습니다. 기소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느냐 하면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 속에는 남의 것이 아니고 주인을 찾을 수 없다면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 것이 아니면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 것이면 자기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얼마나 은혜를 받고 와서 신학 공부하는 사람들이겠습니까? 제가 직장을 다니면서 야간신학교를 다녔는데 회사카메라 310,000원짜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채플 시간에 두고 왔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 다음시간에 가보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있기는 무엇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외부사람이 들어와서 가져갔거나 아니면 학생들 중에 한명이 가져갔을 것인데 외부사람이 거기에 들어와서 가져갔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영원히 못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달에 제가 물어냈습니다. 당시 제 석 달 치 월급이 되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런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것이 아닌 것은 영원히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거기에 돈다발이 떨어져 있어도 일주일 후에 가도 거기에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것이 아닌데 왜 가지고 가겠습니까? 동의하지 않으십니다. 절대로 주우면 안 됩니다. 놔두셔야 범죄에 연루되지 않습니다. 그냥 놔두십시오. 돈다발을 가지고 갔는데 며칠 있다가 썼는데 불행히도 위조지폐였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새로운 사실을 터득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보십니다.
두 번째는 여론입니다. 자기는 양심에는 걸리지 않지만 많은 사람에게 비난을 받을 것 같습니다. 여태껏 쌓아왔던 평판이 나빠질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이 죄를 짓지 못하도록 억제해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정치입니다. 정치가 올바로 되면 이것만큼 범죄를 효과적으로 줄이는데 이바지하는 수단이 있을까? 할 정도로 기가 막힙니다. 정치가들이 뜻을 세우고 깨끗이 정치를 하려고 하면 됩니다. 저는 경제적으로 화폐 폐지론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모릅니까? 핸드폰이든지 무엇이든지 리어카에서 무 2단을 사도 다 전자로 결제하자는 주의입니다. 그래서 번 사람의 돈도 100% 노출되고 판 사람의 돈도 100% 노출되어 정확하게 세금을 매기자는 것입니다. 왜 오만 원짜리 만들 때 나는 반대했는데 내가 반대해봐야 누가 듣는 사람도 없지만 반대했습니다. 왜? 싱가포르에는 한 다발 100장에 지금도 거의 일억 가까운 지폐가 있습니다. 지금도 현존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왜? 독재국가이지만 나라가 투명합니다. 우리나라는 안 됩니다. 왜? 이렇게 투명하지 않는 나라에서 어떻게 됩니까? 오만 원 권이 생산되면 50% 정도가 없어집니다. 배추밭 무밭에 묻어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만약에 정당한 돈이면 그렇게 묻어 놓겠습니까? 다 구린 돈입니다. 얼마나 편합니까? 예전에는 일억을 담으려면 만 원짜리 다발 100개를 쇼핑백에 들고 갔는데 이제는 박카스박스 하나에 일억이 딱 들어가는 것입니다. 뇌물을 주고받기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의 고액권 화폐를 만들어 내면 오만원이라고 해봐야 50달러도 안됩니다. 미국에는 100달러짜리가 나오고 캐나다에는 1000달러짜리 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 됩니다. 왜? 사회가 투명합니다. 정치가 티미하니까 공정성이 보장되지 않으니까 지금 고3애들을 가진 엄마들의 억장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저런 식으로 진학을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해 아래 새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치를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화폐폐지론자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투명하게 그리고 정직한 사람에게 세금을 때려 매겨서 피해자로 만들지 말고 누구도 그 세금을 피해가지 못하게 세율을 낮추고 하면 전체적인 세금을 거두는 것은 거의 비슷하게 그렇게 해야 하고 세금을 잘못 낸다든지 탈세를 하면 그 사회에서 미국 같으면 매장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바람을 피웠다면 ‘돈이 많고 얼굴도 잘생기고 멋있는데’ 그런데 탈세를 했다면 ‘죽여!’ 그러는 것입니다. 영원히 추방! 그래서 우리는 개인적인 선뿐만이 아니라 공적인 이익에 대해서 민감한 정신을 가지고 내가 여기에 있음으로 이 사회 전체가 조금씩 나아지는 역할을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깨끗하고 공정하려고 애를 써야합니다. 밤에 슬그머니 주차장에서 차를 박아놓고 범퍼를 찌그러트리고 도망가고 그렇게 끝났으면 좋은데 CCTV에 찍혀서 개망신 당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뒤에 무슨 교회라고 써 붙여 놨습니다. 스티커를 붙여놓고 다니니까 무슨 교회라고 나옵니다. 뒤에 물고기표시까지 해놨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주여! 내가 왜 이렇게 열을 받습니까? 쌓인 것이 많습니다.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질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차를 박든지 무엇을 잘못했으면 깨끗하게 법이 정하는 책임을 지겠다는 의식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특별은총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반계시의 빛이 아주 분명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속 다르고 겉 다른 사람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신적 형벌과 보상입니다. 무신론자인데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 그러다가 벌 받는다.’ 그럽니다. 누가? 누가 벌을 줍니까? 인간의 모든 의식 속에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형벌을 받을 것이고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의식이 살아있는데 이런 것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일반은총을 확산시키시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까? 정말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특별은총 일변도로 나가서 회개하고 열렬히 기도하는 것만 최고이고 나머지 삶은 상관이 없는 그런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일반은총의 방법은 아까 나온 4가지를 다 설명했습니다. 일반계시의 빛, 정치, 그래서 악한 영향을 억제하고 선한 질서와 예절을 촉진하기 위해 제정함. 하나님이 그런 제도를 정치라는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사람들은 정치를 해야 합니다. 안하면 어떻게 됩니까?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능력이 되는데도 이렇게 사회에서 사회적 부르심에 응하지 않는 사람의 통치자가 되지 않는 사람의 재앙은 자기보다 열등한 인간에게 지배를 받는 것이다.’
율법과 조화되는 곳에서 중요한 수단이 됨. 현세에서도 인간의 죄악을 벌하고 율법과 외면적으로 일치한 행위에 상급을 주십니다. 절대 탄로 나지 않았을 것 같은 꿀꺽한 사건들이 이상한 계기에 밖으로 다 드러납니다. 결국은 쫓겨 다니고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들이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그럴 수 있는 힘을 신앙을 통해서 공급을 받고 그때 우리의 신앙이 내, 외면이 일치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거부해야 합니다. 성폭력에 대해서만 그렇게 쓰지 말고 우리가 말할 때 NO means no, yes means yes.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 하면 ‘예’할 것이오. ‘아니오. 하면 아닐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일반은총을 통해서 무슨 효과가 나타나느냐 설명이 너무 깁니다. 그림으로 그려준 것입니다. 그러면 일반은총에 무슨 효과가 나타나느냐? 형의 집행유예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손목이 부러진다든지 벼락을 맞는다든지 하나님이 바로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반은총 때문에 형의 집행을 유예하시는 것입니다. 돼지를 잘 돌보고 잘 먹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먹으려고 합니다. 먹으려고 클래식음악도 틀어주고 합니다. 일본 고베에서 키우는 소는 한 마리에 일억 오천만 원에서 이억 원이라고 합니다. 우유로 목욕하고, 클래식을 틀어주고, 유기농 사료를 먹이고, 심신이 편안한 환경으로 만들어 주고, 자연의 소리도 들려주고 합니다. 왜? 좋은 스테이크 재료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형의 집행을 유예하십니다. 죄에 대한 제재를 보면서 벌을 받고 다 들통 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내가 아무리 먹고 싶어도 먹으면 안 되는 뇌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형량이 막 올라갑니다. 일억 원 이상 받으면 무시무시하게 5년 이상 중형이 떨어집니다. 이명박 씨가 볼 때는 ‘사람을 죽인 사람도 이 십몇 년 받았는데 저렇게 받았을까?’ 하는데 금액으로 환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의 뇌물을 받은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법이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충분한가 하면 뭐가 충분합니까? 최근에 어느 회장 하나는 증권을 조작하고 사기를 쳐서 5,000억 원을 꿀꺽했습니다. 불과 2년, 3년 살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결국은 끝났습니다. 그 수많은 돈을 빼앗긴 사람들이 자살한 사람도 있고 가정이 완전히 무너지고 가정이 파탄난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는 잘 다닙니다. 이런 것을 내버려두는 사회가 이게 정말 정상적인 사회냐고 묻고 싶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분노를 느껴야 합니다. 칼바르트가 이야기 했습니다. ‘한손에는 신문을 한손에는 성경을’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기도제목을 찾아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어떤 삶을 살지 말아야 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자, 교리반이 실천적입니까? 이론적입니까? 얼마나 실천적입니까?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뚜렷하지는 않지만 진리, 도덕, 종교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진리, 도덕, 종교 이런 것들이 조화가 이룬 상태는 왠지 우리에게 안전함과 편안함을 주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편하지 않게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의를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불의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은 너무 그 결말이 다릅니다. 전두환 대통령 일당이 쿠데타 식으로 일으켜서 정권을 탈취했습니다. 그때 순종하지 않고 항거했던 사람들은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습니다. 고문도 무지하게 받았습니다.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죄인처럼 지냈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국민적인 영웅이 되고 거기에 붙어서 먹고 살면서 호가 호의하던 사람들은 고개도 들 수 없이 다니고 자손들이 ‘우리 아버지가 박 아무개다. 정 아무개다.’ 감히 이야기하지도 못할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며 세상적인 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연적인 축복을 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누군가를 미워하면 미워한 사람에게 벌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손해는 미워한 자기 자신이 먼저 보는 것입니다. 미워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잘 사는데 그 미움을 간직하고 한을 품었던 사람을 빨리 죽는 것입니다. 그것도 눈을 못 감으면서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실제로 결혼을 하지 않으면 남자가 빨리 죽는답니다. 그런데 결혼한 남자 중에는 죽고 싶은 사람이 많답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쪽은 사랑이 없어서 죽고 이쪽은 미워서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살고 그러니까 사는 것처럼 죽는 것이 좋으냐 아니면 죽는 것처럼 사는 것이 좋으냐?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입니다. 심오한 논리가 이해갑니까? 최근에 누가 그러는데 아내와 다투었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쳐줄까? 네 그럽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세 번만 이야기해라. ‘나는 없다. 나는 없다. 나는 없다.’ 그러면 무슨 낙으로 삽니까?
(찬양)
시시때때로 주 만 봅니다.
웃으면서 이야기 하지만 웃는 게 아닙니다. 최고의 덕스러운 삶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 그것이 최고의 덕스러운 상태입니다. ‘쯔다우마’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중국말로 ‘알아듣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책에 없습니다. 내가 발견한 것입니다. 최고의 덕스러운 삶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나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이 최고의 덕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I am nothing. I am nobody.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 무엇에 만족하면 됩니까? 자신과 온 우주를 감싸고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만족하며 사는 것입니다. 한 과도 못 끝냈습니다. 다 나왔습니다.
그 다음 부르심과 중생입니다. 구원의 여정이라고 하는데 여정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씁니다. 여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원의 서정이라고도 이야기 합니다. 구원의 순서와 차례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봅니까? 불신앙의 상태인데 여기에서 부르심이 있습니다. 혹은 소명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그 소명을 받으면 그 소명을 유효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부르심이 있고, 우리를 중생하게 하고, 주님이 의롭다 칭하시고, 그리고 회개와 믿음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성화의 길을 가고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주시고 견인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에 영화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순서 부르심, 중생, 칭의, 회심, 성화, 견인, 영화 이렇게 나오는데 이순서가 시간적인 순서라기보다는 논리적인 순서입니다. 동시에 혹은 뚝 떨어지게 일어날 수도 있으나 논리적으로 볼 때는 이런 순서대로 구원이 주어지고 그 구원이 완성되어 가고 마지막에 성취되어 가고 마지막에 그 구원이 완성되어 갑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부르심부터 보면 부르심을 읽어보겠습니다. 뒤에 있는 큰 글씨를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을 받도록 죄인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 Definition입니다. 정의입니다. 그래서 내적인 부르심이 이 안에 있다면 외적인 부르심은 밖에 있습니다. 외적인 부르심은 무엇이냐 하면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를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를 지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당신들은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죄에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고 여러분들을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실 것입니다.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바로 그런 것을 들을 때 이것이 외적인 부르심입니다. 귀를 통해서 혹은 눈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받을 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듣습니다. 그것을 듣도록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외적 부르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사람의 자연생활에만 영향을 줍니다. 만약에 그것을 듣고 자기가 뭔가를 깊이 느꼈다면 그러면 ‘진짜 우리가 죄인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이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나는 가보지 않았지만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 가면 큰 예수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상이 있는 그 인근에 범죄율이 뚝 떨어진답니다. 나쁜 짓을 하다가 쳐다보면 예수님이 보고 계신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예수님이 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생활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은 무엇이냐 하며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임합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돌이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 부르심은 외적 부르심을 효과 있게 하는 것입니다. 외적 부르심을 통해서 그것이 내적 부르심으로 전달될 때 그때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외적 부르심, 외적 부르심의 요소, 복음적 사실과 복음적 개념을 제시해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을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 적적한데 교회에 갑시다.’ 이것은 부르심이 안 됩니다. 신자의 의무는 이 부르심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듣고 내적 부르심으로 갈지 안 갈지는 그것은 그 사람의 문제이고 우리는 듣든지 안 듣든지 복음을 전해야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초청, 용서와 구원의 약속, 이런 것들이 갖추어져 있어야지만 제대로 된 외적 부르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 부르심은 우주적인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듣는 모든 자에게 차별이 없이 주어지고 시대, 민족, 계급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제한되지 않고 전해지고 택한 자뿐만 아니라 유기된 자에게도 온다. 진정한 부르심은 하나님은 죄인을 참된 신앙으로 부르심. 그리고 죄인을 부르시는 초청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심.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시고 하나님의 진실성과 성실성에서 이 부르심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부르심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은 듣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올바르게 그 내용을 갖추어서 전달될 때 그것은 정말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죄인을 신앙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을 거절하면 그의 죄가 누적됩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외적 부르심의 의의.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택한 자들을 모으시기 위해서 지정하셨다. 죄인을 위한 축복이며 죄인을 정죄할 때 그는 심판받을 만한 사람이 된다. 왜? 부르셨으니까 거기에 응답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습니다. 미군이 히로시마를 폭격할 때 기습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전날, 그 전전날부터 미군기가 높이 떠서 어마어마한 양의 삐라를 뿌렸습니다. ‘며칠 몇 시에 매우 심각한 폭격이 있을 테니 반경 몇 ㎞밖으로 피신하라.’ 충분히 주었습니다. 그것을 받고 사태의 시급성을 느꼈던 사람들은 도피를 했겠습니까? 안했겠습니까? 당연히 도피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를 겁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계속 있었던 사람들은 화마에서 피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북한의 핵문제는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하나의 폭탄이 한 도시를 기체로 날려버립니다.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아직 심각성을 못 느끼십니까? 심각합니다. 모든 나라가 마지막으로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며 SLBM입니다. 핵잠수함에다가 어디로 탐지할 수 없게 다니다가 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양쪽에 6발씩 12발, 심하게는 12발씩 24발까지도 있습니다. 그것을 몇 백 미터 아래서 혹은 천 미터 아래에서 뚜껑을 열고 발사하면 거기에서 미사일이 올라가서 한 도시를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잠수함을 몇 십 척씩 띄워놓고 그것이 강대국의 마지막 보험입니다. 본토가 공격당해도 그 나라를 확실하게 멸망시킬 수 있는 핵무장을 바다 속에 깔아놓고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게 만들어서 그래서 건들지 못하게 만드는 보험입니다. 그러니까 미국으로서는 북한이 저렇게까지 발전할 때에는 굉장히 사태를 심각하게 본 것입니다. 그 앞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런 폭탄이 그보다는 세지 않았겠지만 전 세계에서 이렇게 어마어마한 핵폭탄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고 1200기가 남한에 깔려있다고 하는데 그러니 북한이 위협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통보할 때 도망가면 사는데 안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공의를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인간이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요구를 멸시하는 것이므로 죄가 증가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내적 부르심’ 이것도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마음에까지 영향을 주어서 영혼을 변화시키는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말씀이 죄인을 구원에 이르게 하도록 적용된 부르심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는 부르심입니다. 후에 취소되지 않는 부르심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인간은 드디어 죄를 깊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으면서 새로운 삶의 길을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하는 성향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의 특징은 무엇이냐 하며 첫째 도덕적 설득의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 이런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방식으로 내적인 부르심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무의식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 속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에 의해 계몽된 오성, 즉 인간의 깨달음 여기에 역사하셔서 의지가 그 깨달음의 인식을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감화시키신다. 어제 금요기도회에 나오셨던 분들은 설교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할 때 지성에는 빛을, 감정에는 감동을, 의지에는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한 목적을 향하게 한다. 선택 자를 인도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회복하게 하고 그 다음에 축복과 자유, 화평 이런 것들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에 이르게 함. 이런 목적입니다.
중생. 읽어보겠습니다.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 속에 심어주고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을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행위.’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을 인간에게 주십니다. 중생이라는 것이 위로부터 태어났다는 뜻도 되고 한번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났다는 뜻도 됩니다. 한번 태어난 것은 육체로 태어난 것이고 두 번째 태어난 것은 영혼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점에서 우리들이 그것을 중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그래서 전인격적으로 미칩니다. 그리고 즉각적인 변화입니다. 중생함으로써 영적인 사망의 상태에서 생명으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의식이 아니라 잠재의식 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밀한 사역이고 인간은 지각할 수 없고 나타난 결과로써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호흡의 고통을 느끼고 자기가 살아있는 것을 지각하게 되듯이 그렇게 새로운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결과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중생한 줄을 알게 됩니다.
중생의 주체. 중생케 하시는 주체는 당연히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독점적인 성령의 사역이고 인간의 협력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이야기할 때 인간의 영혼이 죽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해도 인간이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그 영혼을 먼저 살려내야지만 그 영혼이 진리에 대해서 깨닫고 반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논리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과 그 다음에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고 주님이 의롭다고 칭하시는 것들이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논리의 순서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설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사역의 도구로 사용될 수 없는 독창적인 사역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듭나라’ 고 우리에게 명령하지 않고 ‘회개하라’ 고 명령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회개는 거듭난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의 필요성은 인간은 원래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고 교제를 즐거워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영적 생명을 부여받아야 하는데 이 생명이 주어지는 것을 우리들이 중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생하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데 그러면 주님이 중생을 안 시켰는데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믿을 수 있겠느냐는 반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음에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르심과 중생의 순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옷감 장사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는 한 여자가 있는데 말을 듣고 있을 때(이것은 외적 부르심이고),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엄밀한 의미에서의 중생이고)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시니라(내적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그렇습니다. 내적 부르심이 있고 때로는 이 두개가 일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중생이 있고 그리고 내적인 부르심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내적 부르심이 유효하게 될 때 여기에 회개와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회심과 믿음이 나옵니다. 회심은 이렇게 쓰는데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심이 무엇인지 읽어보겠습니다. ‘중생 받은 자가 의식생활 가운데서 믿음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행위.’ 이것이 회심입니다. Definition 은 외워야 합니다. 회심에 있어서 인간은 협동 받도록 요청받는다. 중생은 하나님이 혼자 하시지만 회심은 이제 우리에게 죄에 대해 회개하고 믿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의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중생시키지 않으시면 회개할 수 없고 그리고 또 예수를 믿을 수 없는데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지 않은 것이 어떻게 우리 책임일까? 우리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그런데 사실 이 문제는 신비한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교리를 세울 때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면 그러면 결국은 그 구원은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의 공로로 얻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서 얻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대답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믿게끔 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거듭나게 해주셨기 때문에 죽어있는 사람은 속에서 박수를 치고 따귀를 때려도 모릅니다. 살려내니까 아픈 것도, 더운 것, 추운 것을 느끼듯이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살려내시니까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회개하고 뉘우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실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 치고 거듭나지 않는 사람이 없고, 거듭난 사람은 반드시 회심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사실 이 두 가지는 하나 때문에 하나가 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상 논리적으로는 구분되지만 이것이 하나라는 사실을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어도 믿고 회개한 우리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우리를 거듭나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반응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순간적인 변화이고, 의식적인 생활 가운데서 일어나는 변화이고, 회심은 모든 성인에게 반드시 필요하고, 회심이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서 현저한 전환점으로 나타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어떤 모양으로 했느냐? 믿어서 어떤 행동으로 나타났느냐? 그것이 획일적인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이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모양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확고한 것은 이 회심을 통해서 의식 속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회심에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회심은 이렇게 두 가지 요소로 나눠집니다. 그것은 죄에 대해서는 회개하고 누구 앞에? 당연히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회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이 두 가지가 회심의 두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눠지지 않고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하나가 있는 곳에 하나가 항상 따라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회개한 만큼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게 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에 대한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회심의 종류. 국민적 회심은 국민 전체가 회개하는 것입니다. 일시적 회심은 마음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일시적으로 회개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전정한 회심은 이런 사람들이 하는 것인데 구원에 이르는 회심이고 반복적 회심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을 받을 때에 경험했던 죄에 대한 회개와 믿음이 그대로 반복적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회심의 경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심은 좁은 의미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첫 번째 단 한 번의 회심이 회심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 회심의 경험이 새로워지는 것도 회심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좁은 의미의 고유한 회심은 구원에 이르는 첫 번째 회심이고 넓은 의미에서는 그 회심이 우리 안에 반복되는 것 이것이 넓은 의미에서의 회심입니다. 그러면 회심은 처음 구원의 은혜를 받는 것이고 그 다음에 반복적인 회심은 그 받은 구원의 은혜가 우리 속에서 새로 경험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항상 언제나 죄에 대한 깊은 회개와 예수께 대한 깊은 믿음과 신뢰를 가져다줍니다.
회개의 요소는 지적요소, 생각의 변화, 과거의 생활이 죄였음을 인식함. 감정적 요소는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고 하나님을 반역한 죄를 슬퍼함. 의지적 요소는 목적이 변화되고 죄에서 떠나는 내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고 용서와 거룩함을 추구하는 성향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것입니다. 어느 날 예배당에 혼자 기도하러 왔습니다. 형편이 곤궁한데 기도하려고 앉았는데 지갑이 떨어졌습니다. 보니까 오만 원짜리가 한 장 들어있습니다. 신용카드까지는 감히 쓸 생각을 못하는데 이름을 보니까 김남준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면 내가 곤궁한 형편을 면할 텐데……. 이것은 목사님 지갑인데…….’ 지적인 요소가 채워지는 것입니다. ‘저 돈이면 무엇을 할 수 있는데…….’ 두 번째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에이’ 그러면서 집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똑같이 어느 순간에 집에 가져다놓고 돈을 쓰려고 하는데 지갑이 눈에 들어오면서 ‘이것 목사님 지갑인데’(지적요소) ‘이것을 내가 왜 가져왔지? 죄인데…….’ 슬퍼하는 것입니다. ‘제자리에 갖다놓아야지.’ 가지고 와서 제자리에 놓고 감으로써 회개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그러니까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이 왜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이 죄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혹은 알아도 그것이 가슴에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하면 저 사람이 나에게 한없이 잘해주는 것은 지적으로 알겠습니다. 저만한 남자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그리고 잘못한 것을 지적해보라고 해도 없습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마음이 안갑니다. 그러면 결혼에 이릅니까? 안 이릅니까? 안갑니다. 내일은 헤어질망정 오늘은 마음에 움직이는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엄마가 가란다고 그것도 한번이지 싫은 것을 왜 합니까? 똑같이 이런 이유 때문에 회개가 성립을 잘하지 않는 것입니다. 첫째는 잘 모릅니다. 많이 가르쳐 주어서 죄인 줄은 압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회개하고 싶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 슬픈 생각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감정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감정이 안 움직이니까 제자리에 갖다놓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까? 우선 말씀의 찬란한 빛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까지 도달하도록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동시켜서 없던 의지가 생겨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The Power of Love. 사랑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자는 약합니다. 엄마는 강합니다. 여자는 희생하지 않습니다. 엄마는 희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의 힘으로 그렇습니다. 그 사랑이 엄마를 감동시켜서 자식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의 회개의 개념은 고해성사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회개의 개념을 형식화합니다. 통회. 생득적인 죄가 아닌……. 생득적 죄가 무엇입니까? 원죄가 아닌 개인적인 과실에 대해 슬퍼하고 죄의 형벌에 대한 공포심의 표현으로써 통회라는 것을 합니다. 형식입니다. 고백을 합니다. 어떻게? 망이 쳐있어서 안 보이는 박스에 숨어있는 사제에게 자기의 은밀한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놀라운 효과가 있습니다. 인간이 뭔가를 털어놓으면 마음에 카타르시스와 해방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람에게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리해서 그 사람을 용서해 주는데 보석을 내리는 것입니다. ‘네 죄는 너무 크다. 성지순례를 갔다 와라.’ 지금은 성지순례도 아닙니다. 호텔에서 묵으면서 비행기를 타고 리무진을 타고 다니는데 옛날에는 성지순례를 한다고 하면 수많은 이교도의 땅들을 지나서 맹수와 도적의 위험을 거쳐서 가야하는데 목숨을 건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을 해야지만 너는 용서받을 정도로 큰 죄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고행을 좀 해라.’ 또는 작은 것은 ‘금식을 해라.’ 그렇게 함으로써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보충해서 자기의 죄를 대가를 치름으로써 속죄를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구원론에서 보면 너무 웃기는 것입니다. 속죄는 누구만 해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만 해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종류는 역사적 믿음, 일시적 믿음이 있습니다. 역사적 믿음은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일시적인 믿음도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적적 믿음은 구원에 이를 수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역사적 믿음은 무엇이냐 하며 그냥 도덕적, 영적인 반응이 없이 성경의 진리를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귀도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마귀도 믿고 떠드느니라.’ 라고 야고보서에 나옵니다. 일시적 믿음은 이것은 양심의 자극이나 양심의 흥분으로 종교적인 진리를 받았지만 중생한 마음이 아닙니다. 참된 것처럼 보이지만 영속적인 성질이 본성 안에 심겨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욱하고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보겠다고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왜? 마음에 잠시 자극을 받았을 뿐이지 영혼 자체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이적적 믿음 이적이 자신에 의해, 자신을 위해 행해질 수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동반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마음과 중생한 생명에 뿌리를 내리고 성령에 의해 마음에 일어나는 복음 진리에 대한 확신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실한 신뢰입니다.
믿음에는 똑같이 회개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와 구원의 약속입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약속입니다. 이 두 가지가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은 지적요소,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약속에 대한 확실한 지식, 복음의 기본적인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감정적 요소는 (찬동)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게 되고 의지의 요소는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입니다. 자기를 온전히 던지고 자신을 그리스도께 내어드리는 것 이것이 믿음의 요소입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여기에 산이 있고 여기에 산이 있습니다. 중국을 갔더니 여기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300미터 되는 낭떠러지이고 밑에는 강입니다. 여기는 절벽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오토바이가 끈에 묶여있어서 오토바이가 가는 것이 아니라 끈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신기해 보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짜로 여러분 보셨습니다. 천길 쯤 되는 낭떠러지 위에 줄이 있는데 장대 하나 들고 걸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떨어지면 확실하게 죽습니다.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습니다. 장대를 들고 거기를 걷습니다. 그 사람이 그것을 천 번 정도 했는데 항상 성공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똑같은 사람이 거기를 걷는다고 할 때 여러분은 그 사람이 안전하게 건너갈 것이라고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여러분에게 뒤에 업히라고 하면 업힙니까? 안 업힙니까? 그것은 성경적으로 보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Trust가 없는 것입니다. 의뢰의 요소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적인 동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확률에 대한 믿음입니다. 확률적으로 천 번을 했는데 안 떨어졌으니까 이번에도 안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진짜 믿음인지는 ‘뒤에 업혀봐’ 할 때 아무도 거기에 안 업히는 것입니다. 왜? 확률적으로는 믿지만 자기를 맡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확신입니다. 확신이라는 말에 두 가지가 있는데 Condition이라는 단어를 쓰고 Assurance라는 말을 씁니다. 다릅니다. Condition은 믿음은 믿음인데 확신은 확신인데 죄에 대한 확신입니다. ‘내가 확실히 죄인이구나!’ 그래야지만 진정한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Assurance는 확신인데 이것은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확신입니다. 그런데 이 Assurance는 믿음을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항상 이 사람이 있고 하트가 있으면 이 마음 안에서 똑같은 정도로 Assurance가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내려가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침체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은혜로부터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비슷한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올라간 것은 무엇입니까? 은혜 충만한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드는 것입니다. 그 확신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확신이 들 때 우리는 담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확신이 사라지면 우리는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기가 죽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도 못합니다. 확신이 있으면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데 뭐가 두렵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미국에서 목회를 너무 잘하셨는데 기도를 하는데 한국을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Tenured 종신계약에 사인을 하라고 가져왔답니다. 미국교회에서는 굉장히 큰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3년에 한 번씩 재신임투표를 해서 목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 교인이 ‘종신하십시오.’ 프러포즈하려고 가져왔습니다. 굉장히 큰 영광입니다. 그런데 사인을 하지 않고 기도를 해보니까 하나님이 한국에 가라고 하시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한국에 와보니까 자기가 갈 때 집을 팔아도 전세를 구할 수 없도록 방값이 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저히 못 가겠구나 하며 가족들이 모여서 자기가 한국에 갔다 온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에 못 돌아갈 것 같다고 이야기 하는데 4살짜리 꼬마가 가족예배시간에 딱 한마디를 하더랍니다. ‘아빠 하나님이 도와주셔도 못가는 거야?’ 그 말에 온가족이 회개한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지식적으로는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를 돕는다는 것을 아는데 무엇이 없는 것입니까? Assurance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히 도전을 못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이 Assurance가 넘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지상에 있는 나라보다 훨씬 위대한 나라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Assurance입니다. 잠깐 한 것 같지만 세 과를 끝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