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구원
(1996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6년 4월 2일-6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한 사람의 죄Ⅰ(창 3:1-16, 롬 5:12) 1996.4.2 십자가 사경회 오전 1
2. 한 사람의 죄 Ⅱ(창 3:17-24, 롬 5:12 1996.4.3 십자가 사경회 오전 17
3.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속죄 (사 53:4-6, 롬 5:18) 1996.4.4 십자가 사경회 오전 27
4. 구원의 길 (민 21:8-9, 롬 10:9-10) 1996.4.5 십자가 사경회 오전 40
5. 십자가 아래에서의 삶 (갈 2:20) 1996.4.6 십자가 사경회 오전 51
1. 한사람의 죄Ⅰ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 3:1-16)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십자가 사경회를 계획 할 때 아침 시간을 할까 말까하고 많이 망설였습니다. 우선 올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1월은 방학이기 때문에 학생들도 많이 나오고 했었는데 이제 다들 직장 다니고 하셔서 그래서 일단 몇 분이 오든지 간에 오히려 저녁 때 못 나오는 분들도 있기 때문에 언젠가 한번 두고두고 복음의 도리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되서 아침 시간에 강좌를 열었습니다. 오늘 이 첫 시간에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셔야 했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읽어드린 로마서에 보면 “한 사람이 죄를 범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 죄가 들어왔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두 번째 읽은 이 창세기 3장을 염두에 두고 사도가 로마서 5장을 적어 내려간 것입니다. 성경에는 한 사람이 죄를 범한 것을 장마철에 영화 같은데서 보면 물이 제방에 가득 차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한번 일산인가 어디에서 댐이 터졌습니다. 물이 꽉 찼습니다. 그래서 찰랑찰랑하게 물이 흐르던 그 제방 둑이 무너지고 나니까 일순간에 그 엄청난 물의 양이 무너진 제방 둑을 밀치면서 확 쏟아져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묘사할 때 쓰는 단어가 이 희랍어에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죄를 범하니까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서 단번에 어마어마한 죄의 세력들이 물이 밀치듯이 깨트리면서 그러면서 큰 물결이 되어서 단번에 엄청난 힘으로 세상으로 들어와서 세상 전체를 죄로 뒤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실감이 나십니까? 놀랍지 않으십니까? 사실 물이 갇혀서 뚝 안에서 흐리고 있을 때에는 무섭지도 않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 저는 종종 제방이 터지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단단한 제방인데 이상하게 단숨에 터져 버리고 물이 밀려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제방 둑이 있고 물이 가득 차면 그 물은 항상 지면보다 높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펑하고 터져 버리면 그 다음에는 그 물이 어마어마한 힘으로 밀려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방 둑이 터졌을 때에도 그렇게 터져 버리면 그 다음에는 그 물이 어마 어마한 힘으로 밀려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방 둑이 터졌을 때도 그렇게 엄청난 물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한 사람이 죄를 범하니까 그 죄가 엄청난 물결이 되어서 단숨에 그 한 사람을 통하여서 휙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상을 가득 채워 버립니다. 그렇게 죄가 세상에 채워 버렸을 때 그 죄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모든 세상을 철저하게 파괴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렇게 끔직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까? 우선 이 끔직한 일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전에 먼저 한 사건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죄에 뿌리가 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부조화와 모든 슬픔, 우리는 이런 것들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많은 세상에서 그 죄와 더불어 친구와 같이 사귀면서 그렇게 긴 세월을 살아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비록 죄 없는 세상에 살아 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생각을 해 보면 이 세상에 모든 궁극적인 슬픔과 고통의 모든 원인이 죄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의 모든 고통과 그 모든 아픔의 원인이 사람들은 때로는 궁핍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 가난한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지금도 온 가족이 한 달에 4만 원 이하의 생활비로 생활하고 있는 그 비참한 난민들이 세상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분명히 불행이 많고 고통이 많습니다.
언젠가 한번 신문지상에서 르완다 난민을 위해서 옥수수로 죽을 쒀서 큰 드럼통에 다가 유엔에서 갖다 준 옥수수 죽을 쑤고 그리고 거기다가 약을 집어넣었습니다. 그것이 비타민이었습니다. 정상적인 곡물로는 사람들의 배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멀겋게 죽을 쒀서 그 다음에 국제 적십자사에서 보낸 비타민을 큰 드럼통에다가 한 바가지씩 들어부어서 그래서 그것 끊여서 한 사발씩 주는 것입니다. 확실히 궁핍은 우리의 커다란 고통에 원인이 됩니다. 돈이 없으면 여러분 당장 인생은 고통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궁핍은 우리로 하여금 큰 고통에 빠지게 만듭니다. 질병도 가난이라고 하는 환경에서 자라라는 독버섯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 때로는 인간들과의 관계가 우리의 고통의 원인이 될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그 사람 때문에 행복해져야 할 관계에 놓여 있는데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즐거움이 되어야 되는데 그 사람의 이름만 들먹여도 속에서 쓴물이 쏟아 날 정도로 이 갈리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부모가 자식을 향해 자식이 부모를 향해, 혹은 아내가 남편을 향해 남편이 아내를 향해, 혹은 형제를 향해, 이렇게 인간이 큰 인간에게 커다란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조상들은 인복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복이 있고 인덕이 있는 사람들은 어디가든지 형통하다 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형통하게 되는 것이 인간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물질의 궁핍, 인간관계, 이런 것들뿐만 아니라 또 열악한 환경은 우리에게 커다란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고통을 받고 그리고 아픈 가운데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각기 다른 곳에서 이제껏 살아왔습니다마는 우리 중에는 아마 고생을 많이 한분도 계실 것입니다. 저도 고생을 하면서 자란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너무나 비참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그런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습니다마는 지금으로부터 한 이십년 전만 해도 정말 하루에 열여섯 시간 이상씩 노동을 하고도 생계비 이하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비참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손이 잘려 나가기도 하고 혹은 발이 잘려다가기도 하는 그런 재해를 당하면서 급기야는 참다 참다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자살을 하는 투쟁가로 변신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정말 비참할 정도로 살아갑니다.
저는 지금도 옛날 오래 전에 초등학교 다닐 때 가끔 가 봤던 방직 공장을 기억합니다. 그 나이 어린 소녀들이 그 방직 공장 틀에 매달려서 옷감을 짜는 모양을 말입니다. 옷감을 짜는데 그게 다 전자동 기계가 아니라 기계가 하고 지나가면 한 번씩 뭐를 이렇게 저렇게 움직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밤새도록 앉아서, 만약에 그게 한번이나 두 번 건너뛰게 되면 잘못된 피륙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 앉아서 졸리면서도 자기 허벅지를 꼬집어 가면서 그렇게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자리도 없어 가지고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은 우리의 커다란 인생을 고통스럽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물론 우리의 인생에 고통의 원인이 되는데 우리는 항상 뿌리를 먼저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뿌리 아니면 그 뿌리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지 않으면 그 위에 있는 것들은 잘라내도 또 돋아나고 잘라내도 또 돋아는 순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물질적인 궁핍이나 열악한 자연환경이나 혹은 인간관계나 이런 것들이 만약에 우리의 인생에 고통에 궁극적인 원이라고 한다면 그런 문제들이 없는 곳에는 불행이 없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볼 수 있는 모든 죄악들을 말입니다.
(예화) 제가 어렸을 때 집이 철거를 당해 가지고 그래서 가지고 어느 날 새벽에 식구들이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참 별 경험을 다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아파트 입주권이 아니라 대토를 준다고 그랬습니다. 토지를 주는 것입니다. 시유지를 가니까 구청 사람들이 와서 하얀 줄을 죽죽 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한 칸이 한 사람의 것입니다. 그때 참 어리숙한 시절이었습니다. 빨리 가서 아무데나 하나 보따리 풀어 놓는 그 자리가 자기네 자리가 되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거기에는 길도 그려져 있고 집터도 그려져 있으니까 깊 옆에 좋은 데로 가야지만 나중에라도 팔기 조흘 것 아닙니까? 그때 여덟 평, 아주 작은 크기입니다. 그래서 온 식구가 새벽 네 시에 통행금지가 풀리자 마다 보따리를 짊어지고 갔습니다. 가서는 이제 그 터주에서 그래도 우리가 보기에 가장 좋아 보이는 터에다가 짐을 다 풀어놓고 고개를 들어 드러누워 보니까 하늘에 별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 가서 이제 그 터를 하나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옆에 터는 또 하나 돈을 주고 샀습니다. 미리, 두 터를 잡아가지고 거기 이젠 텐트를 치고 거기다가 짐들을 드려 놓고 그리고 이젠 다른 사람들이 올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에 집들이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재미있었습니다. 집을 4일 만에 하나씩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집이 아니라 그냥 일개미입니다. 브로크 사다가 그냥 쌓아서 문짝 하나 갖다 놓고 그냥 위에다 천막 치고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어디서 일어났느냐 하면 동네가 다 들어서고 나서 일어났습니다. 야! 저는 어렸을 때 가난하게 살았으니까 문화주택에서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이건 완전히 서부 개척 시대였습니다. 밤이면 양쪽에 집들이 죽 한 이 삼백 여 채가 들어서는 것입니다. 이젠 버스를 타려면 30분을 걸어서 나와야 되는 그런, 전기도 처음에는 안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낮에는 그래도 괜찮아. 다들 밥 벌어 먹으려고 나가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저녁때가 되면 난리입니다. 눈을 의심했습니다. 저녁때만 되면 쇠파이프를 들고 난동을 부리면서 뛰어가는 사람, 칼을 들고 죽이겠다고 쫓아가는 사람, 살려 달라고 도망가는 사람, 술 먹고 싸우는 사람, 별의 별 사람들이 온 천지였습니다. 가난한 동네에 그런 커다란 죄악들이 언제든지 독버섯처럼 자랍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독버섯처럼 자랍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가 없습니다. 오만큼만 건드리면 폭발하는 것입니다. 왜 이젠 인생 막 갈 때까지 간 사람들이라 이것입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벌어 가지고 와서는 그 다음엔 저녁 때 와서 또 술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정생활도 아주 무질서합니다. 하수도도 없어 가지고 가운데 도랑을 파고 그냥 물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더러운 동네에 살면서 그 속에서 그러한 가난 때문에 생겨나는 무수한 죄악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확실히 가난은 죄악을 많이 만들에 냅니다.
지금도 미국에 가면 대낮에 경찰도 들어가지 못하는 할렘가가 있습니다. 건물은 멀쩡합니다. 그런데 무서워서 대낮에도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못하는 곳입니다. 가난한 곳입니다. 마약과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가난은 물론 그렇게 많은 죄악을 조장합니다. 그것이 만약에 죄의 뿌리라 할 것 같으면 부유한 곳에서는 죄가 일어나지 말아야죠. 그러나 부유한 곳에서는 부유한 사람들 나름대로 더 치밀하고 비겁하고 잔인한 죄악들이 말하자면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먹을 휘두르고 폭력이지만 한쪽에서는 제도와 법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고상한 사람들 속에 감추어진 더 끔직한 죄악들을 발견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난한 사람들이 짓는 범죄는 오히려 원초적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이 자기의 행복을 지키고 자기만이 이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짓는 범죄는 훨씬 더 고등합니다. 그리고 더 야비하고 지능적입니다. 인간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뭘 발견하게 되느냐 하면 가난이라든지 혹은 궁핍이라든지 혹은 인간관계라든지 혹은 열악한 삶의 환경이라든지 이 모든 것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한 요수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죄의 뿌리는 결코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뿌리가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범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에 두면 확실히 인간은 적게 범죄 할 것입니다. 인간을 범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에 두면 확실히 인간은 적게 범죄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나 부정직하다고 합니다. 미국 사람은 정직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사람들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정직하고 싶어서 정직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직해지도록 만든 자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많이 사람이 탄 차를 지나가는 도로를 우리나라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인간들이 우리나라 사람은 그래도 차타고 가다가 전용 차선에 들어가면 안 되는데 들어 갈 때는 그냥 들어가잖습니까? 한 차 들어가면 따라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전용 차선을 엄격하게 단속을 하니까 어떻게 했냐하면 인형을 큰 것을 만들어 가지고 빵 모자를 큰 걸 하난 씌워 가지고 그리고 달리더라는 것입니다.
호텔에서 한국 사람이 며칠 묶고 그 다음에 가난하던 시절이니까 수건이 너무 좋아서 수건하고 뭐하고 몇 개 가지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나중에 다시 미국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컴퓨터로 조회해 보더니 다음부터는 호텔에서 수건 가지고 오지 말라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정직하지 않을 수 없게끔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말입니다. 정직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살면 우리는 적게 범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문제가 되는 죄는 그런 것이 아리라 뿌리입니다. 그 뿌리를 오늘 우리가 여기서 3장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이 세상에 창조해 놓으신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 두셨다는 이야기는 여러분 너무나 잘 알 것입니다. 에덴동산입니다. 사람들은 어디라고 말하지마는 그러나 우리는 어딘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디라고 말하지마는 그러나 우리는 어딘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 땅위에 어딘가 에덴동산에 우리를 두셨습니다. 그 동산이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끔 우리는 외국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관광지를 볼 적마다 감탄을 하는데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주님이 보실 때에 심히 좋았더라 한 그 땅이었습니다. 거기에 사람들을 두셨습니다. 거기에는 우선 고통이 없고 먹고 사는 무제와 입는 문제 때문에 사람이 고민해야 하는 이러한 일들이 없었습니다. 완전한 만족이 잇는 그 낙원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3장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다음에 하나님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를 하나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먹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선악과라고 하는 나무입니다. 이 선악과라는 말이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과 악을 경험하므로 그 두 가지를 알게 하는 나무라는 것입니다. 그런 나무를 동산 한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이 죽으리라는 말은 아담과 하와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죽음을 본적도 없고 죽음을 경험해 본적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둔 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비웃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인간이 불행하다면 그 불행의 원인이 죄 때문이라면 그 죄의 창시자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왜 하나님이 동산 나무에 실과를 두셨는가, 하나님이 그것을 거기에 두시지 않았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했을 리가 없고 인간이 계명을 범하지 않았으면 죄 지었을 리가 없고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면 죄의 세력이 이 세상에 들어왔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이 낙원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며 행복한 삶을 살지 않았겠는가?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는 하실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안하시는 일을 정해 놓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은 안하기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왜 그걸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두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죄를 이렇게 두실까요? 좌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방해가 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하는 사람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시는 데 왜 하나님이 이 불행의 원인인 죄를 궁극적으로 없애시지 아니하실까? 이런 것들, 왜 하나님이 모든 걸 하실 수 있는데 꼭 누가 가서 복음을 전해야지만 비로소 그 사람이 예수 믿게 만드셨을까요. 그러기 때문에 어떻습니까? 사람이 가서 전하지 않은 곳에는 그 사람들이 저절로 예수를 알고 구원을 받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못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만들어 놓으실 때 모든 사람들 속에 자유롭게 자신이 어떤 도덕을 따라서 살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만약에 그렇지 안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실 권리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순종하며 살아가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충성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다음에 충성되게 산 사람은 상을 주고 방탕하게 산 사람들은 벌을 준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사람들을 상주고 벌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속에 스스로 자유롭게 자기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의지를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자유의지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아담과 하와에게도 공히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두 가지 가능성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면서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의지도 주셨고 한편으로는 그렇지 못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항하며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도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마음이 바로 바로 우리의 모든 인격이 거처하는 좌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우리가 어떤 마음인가에 따라서 우리의 의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마음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는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듯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 일을 위해서 우리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기뻐합니다. 그런 일들이 가능해 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 죄 가운데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고 싶다는 쪽으로 우리의 의지가 돌아가게 되면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거룩함 이런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기에 적합하지 않은 그런 모습들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유 의지를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동산 중앙에 나무를 세워 두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실과가 매달려있었습니다. 그 실과가 무슨 마술적인 성분을 가진 실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일반적인 과일이었습니다. 어떤 과일인지 알 수 없지만 그냥 일반적이었습니다. 그걸 거기다 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에다가 계명을 부여 하셨습니다. 그것을 따 먹는 날에는 죽는다.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그런 올무를 그 좋은 에덴동산 한 가운데다 두셨을 것 같습니까? 그것도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다가 그것을 두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악과를 보면서 날마다 자기가 누구인가를 하나님 앞에서 생각나도록 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정확하게 말하면 선악과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은혜였습니다. 은혜, 왜 그것이 은혜가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일 수가 있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이런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맨 처음 창조되었을 때 죄가 없으니까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완전한 인간이었지만 안전한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이 있다 할지라도 이 속에 있는 신의 성품이 그를 타락하게 하거나 죄 가운데 빠지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그것은 불가능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의 이성에 있어서 환전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완전하고 깨끗한 인간이었지만 그러나 안전한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처음에 범죄 하기 이전에 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죄를 몰랐기 때문에 그 인간성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같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동시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이 있다 할지라도 이 속에 있는 신의 성품이 그를 타락하게 하거나 죄 가운데 빠지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불가능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의 이성에 있어서 완전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하고 깨끗한 인간이었지만 그러나 안전한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든지 인간이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그런 존재였단 말입니다. 그런 존재였는데 에덴의 동산에 그를 두셨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동산의 아름다운 그 피조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인간에게 위탁한 것입니다.
피어있는 꽃이나 아니면 나무 같은 모든 것들 전부다 다 이 인간에게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에덴동산에서는 자연으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는다든가 아니면 자연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고통을 받는다든가 그런 것들이 있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낙원이 아닙니다.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두셨습니다. 그들이 다 돌아다닙니다. 어디를 보아도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 피조 세계 속에서는 자기가 왕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너희가 이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실 때에 그 다스리라고 하는 말이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이 피조 세계는 인간을 위해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맨 마지막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주와 그 다음엔 만물을 모두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육축까지 창조하신 모든 것이 결국은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난 자리를 마련해 놓으시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이 모든 창조세계의 면류관에 비해 모두 창조하신 다음에 마지막으로 창조의 끝마무리로 그 창조된 세계에서 면류관을 씌웠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창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렇게 하찮게 취급 받으면서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 너무 너무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인간 그 자체를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인간을 하찮게 여기며 살아가는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은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복음에 충만하게 되고 주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한 곳마다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들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라지고 그리고 인간의 강포와 포악이 난무할 때 인간은 단지 하나님 앞에 뿐만 아니라 인간 앞에 아무것도 아니어서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꺾어 버려도 좋고 짓밟아 버려도 좋고 죽여 버려도 좋은 그런 하찮은 존재로 취급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나중이고 하나님이 그렇게 소중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그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인간을 통해서 그 세상을 다스려 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도 인간이 막 돌아다니면서 환경을 파괴하면 하나님이 놔두시는 것입니다. 파괴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인간이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디를 돌아다녀도 자기가 하나님과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모든 동산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 동산을 다스리는 실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말을 잘 들립니다. 동물들은 전부다 내게로 나아오라. 내가 너희에게 이름을 붙여 주리라. 그러니까 동산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짝을 지어서 아담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나씩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짝을 지어서 아담 앞으로 나아 왔습니다. 아담이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동산 중앙에 있는 딱 하나만 아담과 하와는 생각에 잠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무였는데 그것을 먹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볼 때에는 못 먹게 하는 무엇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다고 그랬습니다. 탐스럽고 보암직하고 먹음직스럽다 그 과실은 틀림없이 동산에 있는 그 탐스러운 과실 중에 하나였습니다. 거기 서 있는 것입니다. 생각에 잠기는 것입니다. 한번 잘 묵상해 보십시오. 무슨 생각에 잠기게 되었을까요? 돌아다니다가 부족한 것 없이 살다가 그 다음에 동산 중앙에 서서 선악과를 보는 그 순간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하나있다. 그것은 우리가 먹을 수 없다. 저 나무는 우리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이 얼마나 다른 존재인가 하는 것을 거기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이라고 합니다. 신앙의 출발은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나무를 보면서 이것을 건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십니다. 결국 이 나무를 통해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나는 질적으로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러면서 생각이 파문처럼 번져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산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리고 하나님이 동산의 주인이시고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과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었습니다. 이것을 딱 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무슨 손해가 되는 것입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수많은 과실이 동산에 있는데 그것 하나 따먹었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무슨 오해가 오겠습니까? 손해가 된다면 또 하나 만드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계명이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그 행위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금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에 그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제방 둑이 터진 것처럼 세상으로 밀려 들어와서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계명이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그 행위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금지하신 계명이 있는데 그 계명을 인간이 어긴 것입니다. 그것을 어길 때에 그것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창조주의 주권에 대한 반역으로 치부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커다란 진노를 산 것입니다. 그것은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에 지갑이 있습니다. 똑같이 만든 지갑입니다. 그런데 하나는 내 지갑이고 하나는 다른 사람의 지갑입니다. 똑같은 액수의 돈이 들어 있습니다. 내 지갑은 하루에 몇 번씩 넣다 꺼냈다 합니다. 그리고 가져가서 열고 돈을 마구 씁니다. 그랬는데 남의 지갑을 그렇게 훔쳐서 썼습니다. 자기 지갑하고 내용물이 똑같습니다. 그래서 썼습니다. 똑같은 지갑인데 내 지갑을 수없이 꺼내서 돈을 쓰고 가져 갈 때에는 똑같은 지갑인데 내 마음속에 하나님과 관계에 심각한 막힘이 온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잠자리를 하고 관계를 가져도 그 사람이 만약에 자기의 남편이나 아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일 경우에는 커다란 고통과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왜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기에다가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계명을 말입니다. 그렇게 부여하신 다음에 그 금지하신 것을 인간이 실행에 옮겨서 그것을 따 먹을 때 그때에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입니다. 반역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따먹기 이전에 벌써 무엇이 내안에 있어야 하며 그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불순종하며 복종하는 대신 반항하며 살려고 하는 그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곧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으려고 하는 마음, 이것이 죄를 짓게 하는 궁극적인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많을 것들을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한 수많은 실과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금하신 한 개의 나무, 그 나무의 실과를 굳이 눈에 들어 왔고 그 눈에 가득 찼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불가해한 성격입니다. 인간 속에 깃들여 있는 죄의 본성입니다. 처음에는 완전한 인간이었지만 한번 마음이 끌려서 타락을 하고 두니까 그 다음에는 것이 박차고 죄의 세력이 들어 왔습니다. 기회다 하고 들어 온 것입니다. 들어오고 온 세상에 죄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3장에서 저주를 받은 이후부터 4장에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4장에서부터 펼쳐지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결국은 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불행들이 성경의 역사를 점철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장, 22장 계시록에 와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때 그것이 바로 죄의 문제를 종식시키고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이렇게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하나님에게는 반역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일단 자기의 주권이 침해받고 있고 인간이 자기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서는 가차 없이 이 인간들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제 이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전에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아담아 내가 어디에 있느냐”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9절에서 여호와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그러자 10절에서 아담이“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죄가 들어오게 된 다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숨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음성이 범죄 하기 이전에는 언제나 들을 수 있었던 음성이었고 그 음성이 듣고는 숨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벗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악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만 있을 때에는 악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악이 들어오고 나니까 선과 악의 구분이 생겨나고 악을 알게 되니까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를 구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별하고 아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과 같아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아담을 제일 먼저 부르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하와가 있는데 왜 하나님은 아담을 먼저 부르셨을까요? 그 이유는 처음에 이 계명을 주실 때에 계명을 받았던 대표가 바로 아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담을 하나님이 부르시자 아담은 아주 쉽게 하와에게 자기의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그 묘사가 12절에 말합니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실과를 따서 내게 줬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범죄 하게 된 원인은 두 원인이 있었는데 첫 원인은 하나님이었고 두 번째 원인은 네,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이 말은 하나님이 안 주셨다면 그 다음엔 함께 하셔서 주셨다고 그 여자가 내 여자가 아니었다면, 마지막으로 주님이 그렇게 주셨어도 이 여자가 안 따먹었다면 내가 먹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을 비판하기 전에 가만히 보면 아담의 이 말 중에는 하나도 거짓말 한 것이 없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것으로는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아담이 맡고 있는 것은 이 커다란 책임이었습니다. 그것은 동산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산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이것은 누구에도 핑계할 수 없는 이 모든 태어날 인류의 후손의 대표자로서 그 아담에게 모든 이 에덴동산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담이 하나님이 함께 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주셨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마지막으로 결단을 하고 이 선악과를 먹느냐 안 먹느냐 하는 것은 본인에게 속한 문제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죄를 핑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이 오늘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죄를 택할 것이냐 하나님을 택할 것이냐 하는 결단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아담이 이렇게 선악과를 따 먹었다고 말을 하자 하나님께서 다시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어찌해서 아담이 말한 것처럼 했느냐 뱀을 핑계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뱀부터 차례차례 심판하시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이 아담이 하와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한때 하나님이 하와를 만들어 주셨을 때 그 하와를 가리켜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이 살이라”(창 2:23)고 말했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게 되자 인간과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이제 오늘 한 가지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린 인간관계에서 오는 인간의 모든 고통과 불안과 슬픔이 사실은 그 인간관계 때문이 아니라 이미 파괴된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파괴된 인간과의 관계에서 온다는 사실을 이미 우리는 여기서 확인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가 없는 인간과의 관계의 파괴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유지하며 그 하나님의 참된 사랑 안에서 살아갈 때는 오히려 그렇게 깨트려지고 고통이 되는 관계를 치료하는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니까, 나 한사람이 변하니까. 그 다음에 나와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변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들어 주신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은 나쁜 일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다가 아마도 그때는 공해도 없었겠지만 과일 표면을 깨끗이 닦으면서 한입 먹어 보라고 줄 때에 그 장면에서 아담은 하와로부터 사랑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고 나니까 즉시 사랑의 대상인 이 여인이 증오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인도하셔서 부부가 되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동산에서 물론 그땐 외로움이 없었겠지만 그러나 동산에서 아담이 홀로 독처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아 보이지 않아서 하와를 만드실 때 그가 자기의 갈비뼈를 취해서 걸어 나오고 있을 때 아담의 입장에서 얼마나 환상적이었겠습니까? 환상, 그런 환상을 젊은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결혼하기 전에 한 번씩 사랑하면서 그 환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완전히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기억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조각조각 흩어지는 것입니다. 파경이라고 말합니다. 거울이 꽝하고 깨지는 파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한 결론을 중간에 얻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 깨트려진 인간관계에 있다 그리고 자기 주위에 있는 잘못된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다고 믿는데 사실은 그 근본적인 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깨트려진 하나님과의 관계에, 죄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치유된 사람들은 이상하게 놀라운 마력이 있습니다. 마력이라면 좀 이상하지만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신비한 힘이 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이상하게 나의 잘못되고 깨트려진 관계들이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고쳐지는 것입니다. 변화되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많이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는 순간에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에 사람들은 자기 혼자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니까 자기를 불행하게 한 사람이 와서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고 여전히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데에도 용서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사람과의 불행한 인간관계가 나를 불행으로 몰아가지를 않습니다.
오늘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사실은 자신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힘들이 내게 밀려와서 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이런 놀라운 힘과 능력을 우리에게 발휘하는 것입니다. 깨트려진 하나님과의 관계는 반드시 인간과의 관계로 반영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뿌리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을 때 아담은 여자를, 여자는 뱀을 이야기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왜 쓸데없이 핑계하느냐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요구대로 뱀부터 차례대로 징계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우리 같았으면 이렇게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한 여자가 내게 줌으로 먹었나이다.” “쓸데없는 소리마라 나쁜 놈이다.” 그리고 한방에 날리셔야 맞는데 하나님이 “그래.” 그리고 하와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너“는 왜 그랬니?” “저 뱀이 나를 괴므로 그가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와에게도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내가 언제 너보고 뱀의 말을 들으라고 했느냐? 내 말을 들으라고 했지.” 말씀하시지 않고 뱀에게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뱀을 향해서는 묻지 않으셨습니다. “뱀아. 네가 어찌하여 하와를 꾀었느냐?”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이 바로 뱀 그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굉장히 혐오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뱀탕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르지만 그런데 요즘 보면 외국에서 굉장히 기분 나쁜 것은 파충류를 기르는 것이 취미라고 합니다. 집에다가 어항을 만들어 놓고 어항 속에다가 뱀 같은 것을 넣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른다고 합니다.
옛날의 사람들은 뱀을 냉방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침대 밑에다 뱀을 많이 넣고 침대를 높이 만들어 놓고 침대를 숭숭 뚫어 놓으면 이 뱀이 냉혈 동물이어서 한기가 몸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즐긴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런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아이들 장난감으로도 그런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이 뱀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만든 동산에 다 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단이 이 뱀을 자기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택함을 받아 가지고 사단의 도구가 되어서 인간에게 접근해 온 것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3장1절에 보면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1-3) 그러니까 뱀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나약함을 잘 아는 존재였습니다. 이렇게 접근해 옵니다. 하나님이 이 나무 먹지 말라 하셨으니 물어보면 그러면 더 이상 얘기 할 것이 없으니까 “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 하면서 이 나무를 동산의 모든 나무 실과에 포함시켰습니다. 포함되어서 안 되는 나무였는데도 말입니다. 이젠 말거리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하는 말이 아니야 다 먹으라고 말씀하셨는데 중앙에 잇는 나무는 하면서 만지지도 말라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죽을까 하노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정녕 죽는다.”라고 전혀 착오 없이 반드시 죽고야 만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미 이렇게 말하면서 하와의 마음은 이미 이 과일로 가까이 다가가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격적으로 대화하는 것 자체가 바로 범죄입니다. 이것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된 사악한 마음의 속삭임, 죄에 대한 유혹과 더불어 이렇게 변론하고 대화하고 오랫동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범죄 하는 현장에서 뿌리치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야기를 해 봐야 결국은 지게 됩니다. 계속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그러다가 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담과 하와를 징벌하기 전에 먼저 죄의 원흉인 이 뱀부터 징계하는 것입니다. 그 징계는 결국은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서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 이렇게 된 것을 보니까 결국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육축과 이 당의 모든 짐승들이 함께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 저주 중에서 더 큰 저주를 받아서 비참하게 흙을 먹는데 15절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렇게 되고 다음에 나오는 것이 여자에게 16절을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이 16절의 그 징벌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잉태하는 고통이라는 것이 에덴동산에서 아이를 낳은 일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타락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없으면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했겠습니까? 아이를 낳아야지 아이는 계속 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기 전에 이미 인간이 타락해 버렸습니다. 아이를 낳는데 고통을 더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무통 분만이면 거기 낙원입니까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고통이 있다면 거기는 낙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크게 더하리라는 말이 히브리말로 ‘라반데’라는 말인데 ‘위에다가 고통을 추가로 얹어 준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한 번에 물 붓듯이 없는 곳에다가 확 부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남자라도 잘 모르지만 하여튼 얼마나 여성들이 아이를 낳을 때 치르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을 대 통증이 없이 아이를 가볍게 낳는 사람은 정상이 아닙니다. 어디 아픈 사람입니다. 비정사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큰 고통, 그래서 고통을 한꺼번에 물 붓듯이 확 인간의 육체에 쏟아 붓는 그런 일들을 일생 동안에 수없이 되풀이 하다가 죽어야 하는 그러한 징벌을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내리신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깨달으면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가서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그 다음에 고통과 수고가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더 재미있는 것은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이것은 남편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 자체는 징벌이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읽을 때 어떻게 읽어야 되느냐하면 “너는 남편을 원하고” 이렇게 읽으면 안 되고 “너는 남편을 원하나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이렇게 읽어야 됩니다.
끊임없이 사랑하는데 그 대가는 비참한 지배입니다. 여러분 역사 이래로 예외적인 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대부분 부계 사회가 이뤄진 것도 이런 예언의 성취입니다. 여성들은 요즘에나 많이 틀려졌지만 남성 하나에 생명을 걸고 목을 매었습니다. 남편이 먼저 죽으면 미망인,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부끄러운 여자라는 뜻입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똑같은 피조물인데, 그런데 그렇게 합니다. 부인이 죽으면 남자를 ‘미망 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부인이 죽으면 그것이 아닙니다. 부인이 죽으면 자유의 몸입니다. 그래서 누가 지난번에 어느 교회에 갔더니 나이 많은 여 전도사님이 초상 이야기를 하면서 “목사님 옛날에는 화장실 가서 웃었대요. 부인지 죽으면 새장가를 궁리하면서, 그러다가 60년에 와서는 병풍 뒤에서 웃다가 요즘은 앉은자리에서 신문으로 입만 가리고 웃는대요.” 인간이 남편을 그렇게 사랑하고 그 하나에 모든 것을 매었는데 그러나 역사적으로 여자들은 남자들에 의해서 물건과 같이 취급을 받으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토록 자기의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그 아름다운 사람들을 이렇게 끔찍한 죄로 징벌하시는 것을 보면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같이 타락하고 죄 많은 인간들도 자식을 낳아 놓고 애를 낳는데 보는 사람마다 “애가 안 닮았네. 아빠 하나도 안 닮았네.” 보는 사람마다 두 번은 듣지만 기분 나쁠 것입니다. “속 빼 닮았네.” 그러면 기분이 좋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에 아직까지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인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하고 너무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드디어 이제 대화의 상대가 생긴 것입니다. 인간이 비록 불완전하지만 그러나 얘기가 통하는 것입니다. 아주 갓 난 어린아이와 같이 이야기를 해보면 이야기가 통하는 때가 있듯이 그렇게 인간과 얘기가 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로움을 느끼시지 않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그렇게 자기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은 인간이 에덴동산에 두니까 에덴동산을 자기가 알아서 이렇게 다스리고 가꾸어 나갑니다. 그런데 그게 당신이 하시고 싶으신 대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 얼마나 그 인간이 기특했겠습니까? 우리는 낳은 어린아이들이 자라나서 자기 손으로 운동화를 신고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해도 앙증맞고 귀여워 보이는데 그런데 그 인간을 최초로 만드셨는데 자기의 형상을 닮을 그 인간이 말입니다. 당신처럼 세상을 다스려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얼마나 기쁘면 온 우주를 하나님이 창조하셨지만 하나님의 눈은 어디로 향했습니다. 에덴동산을 향해, 물도 없고 공기도 없고 생물도 없는 수 억 개의 별 보다도 오직 이 지구, 거기에 잇는 작은 한 동산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누가 있기 때문에 당신이 형상으로 만든 인간이 거기에, 참 하나님을 알기 전까지는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인생인가 하는 긍정적이고 분명한 자아상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인간이 하나님께서 지금, 어떻게 내가 남편을 사랑할 것인지는 말하자면 비참한 지배입니다. 짓밟힘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북어하고 여자는 패야 맛이자. 여자는 사흘도리로 안 맞으면 여우가 된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이야기 입니까? 지금 동물들을 대해서도 그렇게는 안합니다. 동물들도 그렇게 때리면 이젠 동물 학대 법이 제정되어서 당장 붙잡혀 갑니다. 그것이 바로 죄에 대한 비참한 결과입니다.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고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며 하와가 창조된 그 자체가 바로 인간이 홀로 거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좋지 못해서 만들어 졌기 때문에 두 사람이 있을 때, 한 사람이 있을 때 보다 훨씬 행복해지는 세상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데도 그 대가를 비참한 지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속박을 받으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불행의 원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깨트려진 관계들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랑하는 인간이 이러한 비참한 심판을 선고하고 나면 어떤 불행한 그림이 이 세상에 펼쳐질까 하는 것을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아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되냐면 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끓어오르는 하나님의 사람의 불을 단숨에 끄게 만들어 주는 우리를 향해 한없이 가슴 저미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던 그 하나님의 심판의 왕으로 만들어 버려서 우리를 아낌없이 비참하게 짓밟히도록 버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의 경우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그 다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17절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 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여러분 그러한 비참함은 여성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닙니다. 남편들에게도 해당된 것입니다. 남성들의 그 비참함을 보세요. 그 비참함을 한번 깊이 음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화) 11시 20분의 전동차를 타 보십시오. 그리고 앉아 보십시오. 막차. 그리고 앉아서 보면 사람들이 전부다 죽 고개가 좌우로 쓰려져 있습니다. 남성들입니다. 자가용 없이 전철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니까 쾌 넉넉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 일 것입니다. 그리고 가방이나 서류 팩 하나를 들거나 거기다 거의 다 보면 졸고 있는데 아이가 평안함 가운데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얼굴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사업에서 시달리고 그 다음에는 잠들어 있는 이 얼굴 자체가 인상이 푹 절인 오이지 같이 이렇게 들어가 보면서 쭉 갑니다. 깨어 있을 때에는 그래도 좀 낳습니다. 그런데 잠들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표정에 반영되는 것입니다. 한 번 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집의 아빠가 그런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저녁에 집에 가서 밤늦게 피곤하게 돌아온 다음에 누워 자는 모습을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보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습니다. “아이고 참 이 화상이 내 화상이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이렇게 살아갈까? 그렇기 때문에 가만히 드려다 보면 잠은 안 오지 전동차는 가다가 가끔 섭니다. 이리 저리 흔들리면서 정말 절고 절었습니다. 우거지상이 오이지 절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한 번 가서 보십시오. 피로회복제 선전을 했는데 ‘아빠의 휴일’ 이렇게 해 놓고 아이가 아빠의 휴일이라는 이 제목으로 그림을 그려 오라고 하니까 네모하나 크게 그리고 밑에다 발만 크게 그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우리 아빠는 휴일만 되는 머리 꼭대기까지 이불 뒤집어쓰고 발만 내 놓고 잠만 잡니다. 그런데 그 이불은 “여보 이제 일어나” 그리고 확 걷으니까 새우처럼 쪼그라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밥 벌어 먹고 살아가는 남성들의 자화상 입니다. 그것이 다 낙원을 잃어버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땅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래서 땅과 인간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땅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이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모든 창조의 세계에 심각한 영향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땅 자체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도 지금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인간들을 완전히 구속하실 그 완전한 구속의 날을 흐느끼면서 마지막 심판 날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땅을 저주하니까 이 모든 열매들이 맺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말하였느냐 하면 “너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일평생을 몸부림치면서 사는데 그 사는 결국이 그렇게 일평생 몸부림치고 치고 살았냐하면 결국은 먹고 살기 위해서 몸부림 친 것입니다. 인간의 허무함입니다.
수많은 세월을 몸부림치며 살았지만 그 몸부림들이 가져 온 것은 겨우 먹고 사는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처음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된 사람의 눈에는 얼마나 낯선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겨우 한 조각의 식물을 위함이 그것이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땅에 창조하실 때에 그러한 것이 그렇게 물질을 위해서 사는 일이 중요한 일이었다고 할 것 같은 면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처음부터 그렇게 먹을 것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으로 만드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다음에 제일 먼저 아담에서 주신 그 명령이 바로 첫 번째 명령이 “너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하나님이 창조한 온 세상을 다스리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것은 노동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을 하지 않고는 이런 명령을 수행해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이 창조의 세계를 제왕처럼 다스리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노동이 이번에는 겨우 자신이 먹고 사는 일을 위해서 고통가운데 살아야 지만 겨우 생존이 가능한 바뀐 것입니다. 그 다음서부터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가 하면 인간이 이 세상에서 처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그 목적 그러니까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정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면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인간에게 노동의 명령을 부여 하셨는데 이것들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대신에 인간들은 자신이 먹고 사는 문제에 골몰한 나머니 원래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를 받았을 때에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마땅히 살아가야 했던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일들이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더 하나님께 범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그 죄의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원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도하셨던 목적대로는 더 살아가기 어려운 존재로 되어 버리도록 계속해서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도록 인간이 더욱더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데 이것이 인간의 불행을 더 재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놀라운 죄의 영향력이 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후에는 어떻게 그 죄가 놀라운 뿌리와 영향력을 가지고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다음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한 사람의 죄 2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 3:17-24)
녹취자 : 오희열
결국 그 죄는 엄청난 파괴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신앙의 깊이가 무엇이냐고 할 때 그것을 잴 수 있는 것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만 정말 신앙의 깊이가 무엇이냐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얼마나 두려워하는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려움의 의미는 파괴적인 의미의 두려움이 있고 건설적인 의미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파괴적인 의미의 두려움은 두렵기 때문에 무언가를 못 하는 것입니다. 건설적인 의미의 두려움은 두렵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더 드려질만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어떤 두려움이겠습니까? 천국에서는 하나님에 대한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방종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까? 또 하나님이 두려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어떤 문제와 관련지어서 그 하나님을 우리가 깊이 받아들이게 됩니까?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도만큼만 죄를 무서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영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일기나 글이나 설교에 깊이 들어가 보면 그 설교 전체와 자기의 영적인 삶의 고민을 지배하고 있는 커다란 주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 커다란 주제가 바로 죄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해지려고 하는데 거룩해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죄 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은데 그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것도 죄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이제 나중에 보면 알게 되는데 피해 다녀야하는 이유는 결국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영성은 참된 영성이 아닙니다.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이 수많은 그릇된 영성운동들을 보십시오. 그 안에 공통적으로 내지하고 있는 커다란 결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심오한 각성입니다. 죄에 대한 깊은 두려움입니다.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
죄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각성이 없기 때문에 영성운동 한 가운데는 그리스도가 계셔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 예수가 이 땅에 오셔야 했던 그 기초는 인간의 죄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담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 앞에서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아담은 피해자였습니다. 정작 원흉은 사단이었고 일차적인 책임은 하와에게 있었고 원인 제공을 하와에게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아담이 범죄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들은 인간 세계에서는 중요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차 사고가 한 번 났었는데 이야기를 하다가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앞차가 ‘붕~’ 하고 가는데 그 차가 갑자기 옆으로 확 끼어들었습니다. 그 차를 피하기 위해서 내가 핸들을 확 꺾었는데 내 차가 그 차는 피했지만 내 옆에 있던 차를 박아버렸습니다. 그러면 누구 잘못입니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비록 그 차는 부딪치지 않았지만 그 차를 내가 피하려다가 옆 차를 박았으니 그 차가 원인제공을 했다, 더 재밌는 것은, 차를 타고 가다가 어떤 사람은 창문을 열고 담배꽁초를 휙 던졌습니다. 차가 고속으로 달리는데 그 불똥이 휙 날아와서 다른 차의 운전자 눈앞으로 날아왔습니다. 물론 유리창은 있지만 말입니다. 이 사람이 놀라서 그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뒷 차와 추돌하고 말았습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보험회사 직원의 말이 재밌습니다. “아저씨, 보험회사 약관에는 ‘원인제공’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무조건 최종적으로 박은 사람이 책임입니다.” 그것은 우리끼리 쓰는 용어이지 ‘원인제공’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는 것이라고 물었더니 보험 회사끼리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놓으면 매일 시비만 하다가 볼 일을 못 본다고 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에게 할 말이 참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네가 어찌하여 금한 실과를 먹었느냐?” 라고 하시니까 하나님 앞에 대들지 않습니까? 그건 아담도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신 것은 하와가 아니라 아담이었습니다. 하와가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아담과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하와를 포함해서 태어날 모든 인류의 조상에 대표자로서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이게 고전적인 폭압적인 의미에서의 다스림이 아니라 잘 가르치고, 돌보고, 그렇게 해서 한 가정을 어거해 나갈 수 있는 권세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신성한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가족들이 타락하는 것은 80% 이상은 가장의 책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청교도들이 옛날에 즐겨 생각하던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 가정의 목사고, 엄마는 그 가정의 전도사라는 것 입니다. 그런데 그 질서가 깨뜨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오셔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아담은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하와가 그것을 따 먹으려고 했을 때, 먹어도 좋다고 먹자고 이야기 했을 때 그는 즉시 하나님이 음성이 생각나야 했습니다. “안 된다. 먹지마라. 먹으면 정령 죽을 것이니라.” 라는 말이 생각나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불순종의 시발이었습니다. 하와에게는 본 것이 시발이었지만 아담에게는 들은 것이 시발이었습니다. 그리고 불순종으로 그를 데리고 간 것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 내리신 그 징벌이 너무 혹독하다는 인상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낙원에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얼마나 혹독할지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원과 이 세상과의 삶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 종종 아주 부자였던 사람이 완전히 몰락할 때 그때 그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60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데, 망해서 부도가 나고 다 파산하니까 자살을 해 버렸습니다. 죽은 후에 유산을 정리해보니까 그 빚을 갚고도 20억이 남더랍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런 일을 가지고 왜 죽나? 우리는 지금 2천만 원도 없는데 살아서 빚 갚고 남은 20억을 은행에 넣어두면 한 달에 이자가 2천만 원 가까이 나오고 떵떵거리면서 살 텐데….” 하겠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그 삶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완전한 낙원에서 죽음을 모르고 사는 이 아담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그리고 그 다음에는 죽도록 수고하는데 그 땅에서 열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시와 엉겅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시와 엉겅퀴가 날 뿐만 아니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창 3:19) 하시면서 “먹는다”는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시는 것이 저주의 시작입니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운명이 규정지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왜 하나님이 저주를 하시면서 먹는다는 이야기를 계속 하실까? ‘고생을 쌔가 빠지게 하겠구나.’ 하는 그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고 고생을 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여러분, 만약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에덴동산에 노동이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고난 주간에는 말을 하지 않기로 하셨습니까? 어떻습니까?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있었습니다. 자, 타락하기 전에 아담이 노동을 시작합니다. 어떤 노동입니까? 많은 짐승들을 불러서 이름을 지어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시간이 걸렸겠습니까? 하나씩 불러서 목이 긴 놈은 기린, 코끼리는 코가 기니가 코끼리라고 하고, 이렇게 하나씩 이름을 지어주는데 얼마나 많은 노동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노동과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노동의 차이는, 우리는 오늘날의 노동 속에서 불만족을 느낍니다. 그리고 고통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때는 노동을 해도 항상 기쁜 것입니다. 감사하고 즐거운 것입니다. 그런데 ‘먹는다’는 이야기를 계속 하시는 이유는 노동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신령한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았던 사람의 삶과 모든 관심이 자기 입에 들어갈 한 조각의 식물을 위해서 쏟아 부어지지 않으면 안 될 육적인 운명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이 예언이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주위의 남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마음속에 먹고 사는 문제가 가득차서 복음이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예언이 그대로 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와가 죄의 원흉인 것 같은데 정작 커다란 심판은 이 아담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가만 보면 어떤 교회도 남자가 여자보다 많은 곳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모든 교회들에는 여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여인들이 훨씬 더 많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회심하는 것도 여성들이 빨리 회심합니다. 물론 토라지고 변심도 잘 하지만 회심도 빠릅니다. 집회에 가서 사력을 다해 말씀을 전하면 그 말씀에 감격하면서 회개하고 손들고 오는 사람은 여자 다섯이면 남자 하나 나올까 말까 합니다. 우선 모이는 인원이 5대 1도 안 됩니다. 여러분, 이 예언이 그대로 임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이 세상을 생존해서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가시와 엉겅퀴 밖에 나지 않는 삶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실히 일한다고 모두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받으면서 최선을 다 했는데도 성공하는 사람보다는 실패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결국 이 남자는 땅의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운명 지어 지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강력한 형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종종 동물원에 가서 이런 것을 느낍니다. 20여 년 전의 일인데 한 번은 대구에 내려갔는데 창경원에서는 큰 그물을 쳐 놓고 그 안에서 새들이 돌아다니게 하는데 대구의 달성공원을 가보니까 연못을 만들어 놓고 노천에 두루미, 학 같은 멋있는 새들을 그냥 풀어 놓았습니다. ‘신기하네. 저게 안 날아가나?’ 생각하고 안내판을 읽어보니까 날개 밑에 특수한 고무를 끼워놓아서 날개 짓까지는 하더라도 날아가지는 못하게 한 것입니다. 어린 마음에도 섬찟 했습니다. 새들의 각선미가 달랐습니다. 날지도 않고 계속 뛰어다니면서 먹이를 먹어서 다리가 굵어졌습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너무 슬퍼보였습니다. 새장에 갇혀있어도 답답한데 훨훨 날아다녀야 학으로서의 기품이 있는 것인데 거기 주저앉아서 시간 맞춰서 주는 사료나 주워 먹는 것을 보니 너무 비참했습니다. 호랑이나 사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하나님과 함께 교통하며 그와 함께 동행 하며 그가 맡겨주신 이 온 우주를 지배하고 다스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나님을 대신해서 온 세상을 다스려 나가도록 제왕처럼 부름을 받은 이 인간이 한 조각의 떡을 위해서 엎드러져서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하다가, 하다가 안 되는 사람은 떡을 벌어먹다가 안 되어서 원통하니까 피를 토하고 죽습니다. 그 장면을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셨을 때 의도하셨던 목적과 그가 그렇게 저주를 받고 살아가는 이 현실을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이렇게 비교하면 우리는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형벌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언젠가 신문에 일생동안 사람이 얼마나 먹고 살다가 죽는지가 나왔습니다. 참 재밌었습니다. 쌀 몇 가마,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면 소는 평균 한 마리 반을 먹고 돼지는 여섯 마리인가 몇 마리, 배추를 트럭으로 몇 트럭을 먹는다고 나옵니다. 이런 것을 떨이로 한꺼번에 사버리면 얼마쯤 되겠습니까? 몇 천만 원어치나 먹고 죽겠습니까? 그것을 위해서 이른 새벽부터 깊은 밤이 될 때까지 몸부림치면서 땀과 더불어 씨름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과로사로 죽기도 하고 심장병으로 죽기도 하고 직업병으로 자리에 누워서 생명을 잃어버리고 자리를 보전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때로는 사람을 모함하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감옥에 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람을 창조하시고 제왕처럼 다스리고 통치하도록 부르신 인간이 저주받은 후에 살아가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워낙 조상 때부터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너무나 당연하다고 그렇게 살아가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원래 어떻게 부르셨는지를 생각하면 오늘날 살아가는 이 삶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비참한 삶인지를 깊이,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명령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입니다. 하나님이 흙에서 사람을 만드신 후에 뭐라고 부르셨습니까? 첫 번째 사람을 뭐라고 부르셨습니까? ‘아담’이라는 이름을 누가 붙여주었습니까? 하나님께서 흙에서 사람을 취해서 아담을 만드신 후에 그를 ‘아담’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 아담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왔는지 사람들이 두 가지로 해석을 하는데 하나는 ‘에돔’이라는 말에서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아다마’에서 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돔’은 ‘붉다’라는 뜻이고 ‘아다마’는 ‘땅’, ‘흙’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흙으로 만들어진 그 사람을 흙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담’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만들어 놓으신 후에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까 ‘생령’,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사람을 흙에서 취하였은즉 ‘아담’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다시 “너는 흙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존귀하게 하실 때에만 인간은 존귀한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아서 “후~”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살아있는 사람을 만드셨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아담’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가 범죄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니까 그는 다시 ‘흙’이 되고 만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울고 웃고 즐거워하고 미워하고 분노하고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7년이 걸린다고도 합니다.
학생들과 백제의 유적터를 답사를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을 보면서 깊은 상념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거기 사람들 말로는 분묘를 그대로 가져다가 복원해 놓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분묘인데 사람은 하나도 없고 맨 윗부분에 머리카락만 있습니다. 몇 백 년이 지났는데 머리카락이 그렇게 안 썩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손마디가 있는 곳에 반지가 있습니다. 그것만 남겨놓고 나머지 몸은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다 썩은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속에서 단 한 번의 죄에 대해서 이 형벌이 너무 가혹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한 번 딱 따먹고, 그것도 따서 딱 한 입 먹었는데 말입니다. 옛날에 주일학교 다닐 때 선생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말을 설명하시면서 “너희들 손을 벌려봐, 여기를 만져봐. 아이들은 없으니까 선생님을 만져봐. 여기 툭 튀어나왔지? 이게 바로 선악과를 먹다가 하나님이 ‘이놈!’ 하시니까 ‘컥!’하면서 걸린 거야. 아이 때에는 없지만 너희들도 커지면 아담처럼 생겨날 테니 두고 봐라.”하셨습니다. 어릴 때는 그게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목에 있는 것과 선악과를 깊이 연관시켜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완전히 한 개를 다 먹지도 못 했을 텐데 그 형벌이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천하가 다 주님의 것인데, 하나 새로 만드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악과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이 부여하신 계명입니다. 그 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날은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태도를 바꾸셨습니까? 옛날에는 죄에 대해서 엄격하셨지만 요즘은 세태가 하도 죄를 잘 짓는 세대니까 좀 느슨해지시고 법이 많이 바뀌어서 “옛날에는 그랬지만 요즘은 대충 넘어간단다.” 하십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고 말합니다.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세세무궁토록 같으신 하나님, 지금도 죄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를 보면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안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그냥 살아가지 모르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아니, 그럼 하나님, 그때그때 심판하시지 하나님을 안 믿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을 저렇게 내버려두십니까?” 만약에 그때그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 이 세상에 인간의 씨는 말라버립니다. 용서 받은 예수 믿는 사람들 이외에는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구약성경을 펴 보십시오. 껌뻑하면 “쳐 죽일지니라”, “쳐 죽일지니라”, 무서워서 성경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두 가지 은총이 하나님에게 있었는데, 하나는 특별한 은총과 일반적인 은총이 남아있었는데 특별한 은총이 사라졌어도, 일반적인 은총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를 다스려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에도, 비를 내리시고, 오곡백과가 있게 하시고, 그리고 여름이면 적당히 기후를 조절하셔서 홍수를 막아주시기도 하고, 추운 겨울에는 춥게 하셔서 나무속에 있는 벌레를 죽이시고, 또 봄이 오면 새싹이 돋게 하시고, 그리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런 은혜가 하나님의 심판을 유보한 것입니다. 근데 결국은 잠시 있다가 지나가는 인생이 사라지고 나면 그 다음에 사람들은 이 아담이 받았던 것과 비교가 안 되는 더 궁극적인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아담이 이렇게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렇게 심판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축복의 동산에서 추방당합니다. 우리는 아담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선악과를 언제 먹어서 맛을 보기라도 했습니까? 아담은 그래도 맛이나 보고 징벌을 받았지만 우리는 만져봤습니까? 맛을 봤습니까? 한 입 먹어보라고 줘 봤습니까? 우리는 먹어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는 것도 경험하지 못했는데 우리는 아담이 받았던 이 형별을 그대로 답습하며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두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편을 사랑하는데 대가는 혹독한 지배입니다. 그리고 남자는 땀을 흘리도록 고생을 하는데, 마지막 남는 것이라고는 자기가 먹고 ,식구들이 먹고 사는 것 이외에는 남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인생을 많이 살아도 도무지 신령해지거나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더 죄에 찌들고 타락해집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얼굴을 어린 아이에서 부터 시작해서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면 나이가 먹을수록, 정말 고상해지고 품격이 있어지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점점 나이가 먹을수록 오이지처럼 얼굴이 찌들어 가면서 그 주름 갈피갈피에 탐욕과 욕망과 죄악들이 찌들어버립니다. 여기에는 해당되는 분들이 안 계시니까 제가 이야기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신앙에 눈을 뜨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제일 도달하기 싫은 때가 머리 벗겨지고 배 나온 50대 초반입니다.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정결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외에는 자라면서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의 얼굴이 거룩해져 가고 천진해 가는 이런 변화들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이 죄와 욕망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게 정말 힘든 일입니다. 너무너무 힘든 일입니다.
우리가 언제 그것을 먹어봤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왜 똑같은 형벌을 감당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이 교리 자체, 소위 말하는 원죄의 교리 자체를 부정하려는 이단들이 수없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성품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원죄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고 그 죄가 들어온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왕 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전해졌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 한 사람 때문에 인간 세상 속에 죄가 밀물처럼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사건 하나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영광에 이를 수 없도록 죄인이 된 것 사이에는 떼어 놓을 수없는 관계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 우리는 먹어보지도 못했는데 그 전설 속에 있는 것 같은 선악과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 죄의 멍에를 지고 형벌의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가? 저도 사실은 이것을 가지고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가장 많이 했던 때가 신대원 1학년 때입니다. 당연한 교리로 받아들였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며 고민을 많이 했는데 아무리 책을 찾아봐도 그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무조건 아담이 우리의 대표자였기 때문에 그가 범죄했고 그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모두 거기에 참여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해는 합니다. 그런데 실감나게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하며 가슴에 와 닿아야 하는데 다 찾아봐도 그 이상의 설명은 없었습니다. 설교집도 찾아보니까 이런 식으로 예를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빚을 지고 파산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식들이 똑같이 빚쟁이가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 그렇지는 않습니다. 법적으로 아버지 빚은 아버지 빚이고 내 빚은 내 빚입니다. 어떤 설교집을 보니까 아주 가깝게 예를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반역을 도모했습니다. 어린 자식은 아버지가 반역을 하는지 쿠데타를 일으키는지 몰랐습니다. 어느 날 그 쿠데타가 실패했습니다. 역적으로 몰려서 가족 모두 귀양살이를 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상당히 근접했습니다.
그 부분을 묵상하다가 한 가지 결론을 얻은 것이 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놓고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험이 시한부적인 시험인가 영원히 계속되는 시험인가를 말할 때 대부분의 조직신학자들은 이것을 영원한 시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한부적인 시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과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가 안 지키는가를 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시한을 정해놓고 거기에 선악과를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따 먹었습니다. 거기서 해산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어제 했습니다만 해산을 했습니다. 해산을 하지 않고서는 생육하고 번성할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우리도 아마 거기서 태어나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추를 해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니까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그 원죄가 우리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담과 하와가 그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따 먹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영적인 축복과 그 낙원의 놀라운 축복 속에서 살아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한 적이 없는데 우리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 축복의 낙원에 들여보냈을 것처럼 똑같이 아담이 불순종했기 때문에 그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형벌이 우리에게 미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담이 서 있을 때 그 아담은 이 세상 역사 속에서 다시는 되풀이 될 수 없는 대표자로서 하나님 앞에 선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담입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 앞에 범죄했기 때문에 그 죄를 물려받게 된 것입니다. 두 가지를 함께 물려받게 되는데 하나는 원죄를 물려받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모든 사람, 육체적으로 번성하는 모든 사람 속에는 그 죄가 유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행동으로 짓는 죄가 어떻게 육체의 특징도 아닌데 그렇게 유전될 수 있을까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에서 한 때 등장했던 이단적인 교파 가운데 하나가 구원파라는 것인데 거기에서 주장하는 교리 중에 하나는 인간의 영혼은 범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은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죄를 범하는 영혼에게는 고통이 있을 것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죄의 그 행위 자체가 깊은 마음과 인격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경향에서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는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유전되는 것입니다. 조금만 마음을 열고 설명을 들어보면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유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선천적인 특질만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특질도 유전이 된다고 합니다. 운동신경이 발달한 아버지의 씨를 받아서 태어난 아기는 운동을 잘 합니다. 운동신경이 잘 발달합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이를 낳으면 머리가 좋습니다. 이렇게 후천적인 특질도 유전이 된다면 하물며 우리의 영혼 속에 새겨진 특질이 신비한 방법으로 우리의 영혼 속에 투사되어서 그것이 유전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순리적인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원죄를 물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죄의 경향성, 쉽게 말하자면 악입니다. 죄는 내면적인 본질적인 것이고 악은 거기서 비롯된 행동과 삶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악하게 살려고 하는 경향성이 함께 유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아담과 하와가 동침해서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그들이 어디서 죽음을 보았겠습니까? 죽음을 아직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가르쳐 준 적이 없고 본 적이 없는데 살인을 할 의사가 생겨났는가 말입니다. 그것도 아우를 쳐서 죽여 버릴 수 있는 악한 경향성이 생겨난 것입니다. 자, 더 재밌는 것은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인 이유입니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살인 같은 포악한 죄악이 어디에서 비롯되느냐고 말할 때 대개 욕망과 욕망이 충돌해서 일어납니다. 돈을 빼앗고 재물을 빼앗고 그러기 위해서 사람들은 살인을 하고 사람들을 불행 가운데 몰아넣습니다. 그런데 이 가인과 아벨의 경우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이 안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를 하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새롭게 제사를 드려야지 왜 하나님 앞에 열납된 제사를 드린 아벨을 죽입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이 결국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속 자체에서 타락한 아담의 성품이 가인에게 물려져서 그 타락한 성품을 가지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죄 가운데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 강력한 경향성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성들이 4장부터 계속해서 지배하는 것입니다.
(예화) 저를 가르쳐주신 교수님이셨는데 어느 대학에 교목으로 계실 때 입니다. 교수들은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사람들입니다. 하도 예수를 안 믿으니까 한 번 성경을 읽어보고 이야기를 하라고 했더니 나중에 그 교수가 와서 이야기하기를, “나는 성경이라고 해서 뭐 좀 좋은 얘기가 쓰여 있는 줄 알았더니 당신들은 그런 책을 읽는 것 입니까? 이게 까만 가죽에 이렇게 인쇄를 해서 통용되지 현대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고 하면 금서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세상에 더러워서 읽지를 못하겠습니다.”, “뭐가 그렇게 더럽습니까?” 창세기를 읽었는데 거기에 딸이 아버지와 동침해서 아이를 낳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후에 롯에게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 것이 나오고 온갖 더러운 이야기는 다 나오는데 구역질나서 다 못 읽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의 대답이, “그게 당신의 모습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성경 전체의 파노라마는 죄와의 싸움입니다. 1장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즉각적으로 순종합니다. “빛이 있으라”, “생육하고 번성하라”, “동산을 다스려라” 모든 것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하나님이 명하셔도 그 명령에 불순종하는 세력들이 점점 더 세력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 우두머리가 사단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면서 이 세상 자체가 그 죄로 말미암아서 단번에 제방 둑이 무너지는 것처럼 밀려들어와서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죄가 창일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이 믿음의 사람을 만드시는 장면입니다. 한 사람을 만드시는, 한 사람을 택하시는, 한 가정을 택하시는, 한 민족을 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속에 신앙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신앙이 들어간 모든 가정, 모든 사람, 모든 백성들 속에는 강력한 욕망이 생겨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앞에 순종하면서 살고 싶다는 욕망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점점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사단에게 팔려버린 그 나라에서 두 번째 또 다른 의미의 반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려는 백성과 하나님께 거스르며 살려고 하는 백성들, 심지어는 한 하나님의 백성의 인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신앙과 불순종하며 살려는 죄악이 치열한 투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 투쟁의 대 파노라마가 성경의 모든 역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순종과 불순종의 모든 갈등을 최종적으로 종식시키신 나라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때까지 계속 이 투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불순종하며 사는 세력이 강력하게 역사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불순종이 판치는 하나님에 반역하는 역사를 대대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한 분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분이 오셔서 이 불순종의 세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잠시 후에 보도록 하고, 그렇게 된 후에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놓고 해석들이 아주 구구합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왜? 가죽옷을 지어 입히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가죽을 남겨야 했고 가죽을 주기 위해서는 누군가 한 생명이 죽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한 생명이 죽을 것을 지켜보는,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장면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너무 그렇게 깊이 해석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여기서 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이유가 한 생명을 죽여야 했다고 하면서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가죽 옷이어야 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나무 잎사귀의 옷이나 풀로 만든 옷 가지고는 안 되고 튼튼한 가죽으로 만든 옷을 이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준 사실은 은총의 표징이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자연세계를 통해서 이제는 해를 받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것도 물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들의 생명을 보존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이지만 결국 심판의 맥락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전에는 자연으로부터 해를 받는다든지 하는 일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이 인간의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습니까, 아니면 자연에 인간이 복종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습니까? 둑이나 몇 미터 막아놓고 우리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자연은 웃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도 아래를 내려다보면 땅이 그렇게 넓은데 마을이 모여 있는 곳은 정해져 있습니다. 복닥복닥하게 모여 삽니다. 누군가 몇 년 전에 저에게 말했습니다. “교수님, 지금도 우리나라 땅 한 평에 100원짜리가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나는 믿을 수 없다.” 왜? 방배동 땅 한 평에 1천만 원이 넘는데 누가 믿겠습니까? “지금도 100원 짜리 땅이 있습니다.”, “어디?”, “저 강원도, 올라가지도 못하는 산꼭대기의 땅.” 그리고 1년에 100원만 내면 한 평을 빌려주는 땅이 아직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땅이 아직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는 사람이 살지를 않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은 대개 요렇게 파지고 가운데 강이 흐르고 양쪽에 산이 있는 그런 곳에만 모여 삽니다. 우리나라에서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모든 나라에서 그렇게 삽니다. 자연에 순종하며 순응하며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 합니다. 오히려 자연으로부터 말없이 폭력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가 이미 여기서 예고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뭐 그런 것이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튼튼한 옷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으로부터 받는 재앙으로부터 인간이 보호받아야할 처지에 놓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연과의 조화도 깨뜨려 졌습니다. 이제는 그 에덴동산에서 두려워하며, 자기가 즐겨 눕던 생명수 강물을 두려워하고 함께 뛰놀던 짐승들과 동물들도 두려워하고 창조될 때 동년배였던 절벽과 이런 것들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가야하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이렇게 자연과의 조화도 무참하게 깨어져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영구히 그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 추방해내신 이유는 22절에 나오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으니 그가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여기서 나오는 것이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이유는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을까봐 염려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고 여러 가지 해석들을 합니다만 설득력 있는 해석 가운데 하나는 생명나무 실과는 영생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실과가 무엇인지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만약 이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으면 회복될 수 없는 저주의 상태에서 영생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그들을 추방시키신 것은 하나님의 진노인 동시에 제2의 구속을 바라본 하나님 비상 행동이었다고 해석하는 것 저는 가장 근접해있지 않은가 생각해봅니다. 어쨌든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토지를 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24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 –이것은 천사들입니다- 천사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고 하셨는데 이 화염검은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칼의 불’ 이라고 나옵니다. 칼 모양으로 빙빙 도는 그런 검이 아니라 검 모양으로 생긴 칼의 불입니다. 그런 것들을 두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저는 잘 알 수 없지만 아마 번뜩이는 칼날, 그것과 함께 심판을 상징하는 불의 의미가 결합된 것이 아닌가 보여 집니다. 어쨌든 그 에덴동산은 차단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인간들은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없는 인간의 죄와의 씨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곳에서 죄가 그 사람들을 지배하며 영원을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이 땅을 위해서 신령한 하나님과 사귀며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 한 조각의 식물을 위해서 일생을 보내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제왕처럼 이 세상을 다스리고 피조세계를 다스려야 할 인간이 왜소한 인간이 되어서 자연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그런 비참한 존재가 되어버린 사실이 바로 이 3장 이후로부터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맺자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신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원래 지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신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는 단지 죄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께 위로를 받고 필연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죄 속에 살아가면서도 면죄부를 받는 구원의 티켓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로 예수를 믿게 만들어 주신 이것은 원래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해 놓으신 그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인생을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놓은 세상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다시 예수 믿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는 자신의 인생과 세상을 보는 눈들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현실 도피적으로 이원론적인 세상관을 가지고 신앙이 이 세상에서 도피처처럼 생각하며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창세기 3장을 통해서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소망이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바로 하나님에게는 더 원대한 계획을 백성들을 통해서 펼쳐 보이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죄와 더불어 숙명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오셔서 어떤 일을 하셨고 그 피로 구속을 얻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의 전망을 얻게 되었는지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속죄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4-6)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지난 시간에는 죄와 죄가 가져다 준 끔찍한 형벌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사실 중요한 것은 아담과 하와가 형벌을 받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두 시간에 걸쳐서 살펴본 바는 거의 대부분이 육적인 차원에서의 형벌이었습니다. 죽음을 모르는 인간이 죽는다는 그 자체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말씀이 우선 우리에게 다가와야지만 느껴지니까 다가오게 하려고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TV상이나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랑하는 사람이 한 순간 싸늘한 시체가 되어서 누어있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때 대화하고 먹고 교제하고 웃고 울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차가운 시체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때로 기절하거나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됩니다. 차가운 시체가 되어서 싸늘하게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980원 어치 비료의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그 죽음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한 번 보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도 사실 어마어마한 형벌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두 시간에 걸쳐서 아주 상세하게 죄로 말미암아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징벌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더 커다란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창조될 때 철저하게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에 완전한 단절이 온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여러분들이 이해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범죄하고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됨으로 말미암아 느꼈던 그 영혼의 엄청난 고통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추측 할 뿐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충만하게 생활하다가 갑자기 침체에 접어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 훌륭한 예가 되기 위해서는 다윗과 같이 어떤 한 순간에 갑자기 범죄 하는 것입니다. 그때 서서히 익숙해진 침체가 아니라 어느 한 순간에 어떤 잘못으로 인해서 갑자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가 높은 수준의 영적인 삶을 유지해 나가면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 작은 것에도 우리를 싫어하시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못 느끼는 이유는 영적인 삶이 무디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냥 무지몰각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니까 하나님의 분노도 모르고 하나님께서 물 붇듯 부으시는 그 사랑을 모르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두어 가시는 것도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몰각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있어서 예민한 영적이 상태를 유지할 때는 그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을 누리면서 살아가다가 아주 작은 죄,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로 죄를 범하지 않고 마음만 살짝 움직였는데도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과 친밀히 나누던 교제에 금이 가는 것을 발견합니다.
(예화:새벽 기도회 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젖었던 마음이 오천원짜리가 떨어진 것을 발견함으로 식어버렸다는 한 여신도의 이야기)
하나님과 정말 충만한 교제를 누리다가 확 침체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기도해도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는 것 같고 무릎을 꿇어도 다리만 아픕니다. 소리를 질러도 목만 아프고 금식을 해도 배만 고픕니다. 아무것도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몸부림칠 때 그것은 고통입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무한대로 확장시켜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느낀 기쁨도 무한대로 하나님과의 단절도 무한대로 한 번 확장시켜 보십시오. 그것을 아담과 하와가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육적인 죽음이라든지 땀을 흘려야지만 식물을 먹을 수 있다든지 하는 것은 그 고통에 비하면 징계도 아닙니다.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끝내셨으면 성경도 필요 없고 오늘 우리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랬으면 인간은 범죄 한 영혼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그렇게 허무하게 살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삶은 인생이 아닙니다. 동물이 태어나서 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화:예수 안 믿는 인간은 뭐 만든 기계일 뿐이라는 어떤 이의 이야기)태어나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으면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땀을 흘리며 곡식을 먹고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밭을 일구며 곡식을 먹고살다 죽는 것이나 짐승이 산을 헤매며 먹을 것을 구하며 살다가 죽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타락한 인간을 버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새롭게 제기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제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이고 한시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나오는 제사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사건을 풍부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오랜 세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제사의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가 어떻게 오시고 무엇을 하시고 어떤 효과를 가져 오시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무엇을 누리게 될지를 풍부하게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과 관련지어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약속’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구약’ 혹은 ‘신약’이라고 부릅니다. 그 말은 대게 두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신’ 혹은 ‘구’라는 말과 ‘약’이라는 말입니다. 그 ‘약’은 약속은 약속인데 일방적으로 하는 약속이 아니라 둘 사이에 서로 주고받는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있는 약속, 법적인 대상이 있는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더 정확한 말로 표현하면 ‘계약’입니다. 그런데 그 계약은 오늘날 우리가 집을 팔거나 물건을 사고팔면서 사용되는 의미의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이의 약속이며 그 약속은 항상 피로서 맺어지는 맹약인 것입니다.
피와 약속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율법을 받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 때도 ‘피’가 있었습니다. 율법을 모세가 낭독하면 모든 백성이 ‘아멘. 아멘.’하고 제사장이 피를 뿌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약속이 맺어지는데 언제든지 피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피가 의미하는 것은 생명이라고 말하는데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생명이기 보다 생명을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서 그것도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 그리고 당신의 계획을 우리에게 알려주실 때 알려주시는 것은 당신의 것이지만 알아듣는 것은 우리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풍부한 방법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자면 이러한 성경의 이야기를 유치부 어린이에게 이야기한다면 알아듣는 어린이도 물론 있겠지만 자 못 알아듣는 어린이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치부 어린이에게 제대로 설교하기 위해서는 내용은 똑같지만 그들이 무슨 말을 잘 쓰나? 내가 사용하는 이 설교의 어휘가 그들이 사용하는 것인가 안 사용하는 것인가? 아이들에게 천국에 관한 비유를 들면서 어른 사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아이들이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을 예로 들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면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떠한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공부하면서 그 아이들에게 알맞은 방식으로 옷을 입혀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당신이 우리에게 전해주시고 싶으신 진리를 전달하시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이 언약에 관한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짐승들을 쪼개놓으니까 하나님께서 불로 나타나셔서 그 짐승 사이를 태우고 지나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 시대 사람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언약을 맺는 풍습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한 사람의 왕이 나타나서 넓은 땅을 정복하여 나라를 통일하고는 자기가 그 땅을 정복할 때까지 애를 쓰며 수고했던 신하들에 땅을 떼어 주면서 그 신하들과 함께 약속을 맺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만나서 나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이 땅을 정복하는 일에 힘을 합쳐서 형제처럼 함께 싸웠다. 그러므로 이 백성들을 다스리게 해주겠다. 그러나 너는 이 땅을 다스리면서 세금을 걷어 나에게 세금의 몇 퍼센트를 내고 나만을 위해 충성하고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군대를 동원해서 나를 도와주도록 한다.” 등의 약조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서 그것을 들고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못 믿을 것은 인간의 마음인지라 땅을 떼어준 그가 충성을 할지 창칼을 들고 반역을 할 지 알 수 없으므로 둘이서 그 약속한 언약문서를 들고 예식을 하는 것입니다. 황소와 같이 큰 짐승을 머리부터 다리까지 반도막으로 갈라놓습니다. 4-500kg 나가는 황소를 머리부터 쪼개어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도록 갈라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마디로 피바다일 것입니다. 엄청난 피가 뿌려져 있고 엄청난 냄새가 날 것입니다. 그 질퍽질퍽한 피의 길을 둘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수많은 증인들이 둘러서서 두 사람이 언약문서를 들고 피의 길을 걸어가는 광경을 모두 증인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문서 세 부를 만들어 한 부씩 가지고 있고 한 부는 신당에 보관합니다. 이것이 그 당시 중동지방 사람들의 풍속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언약문서를 들고 피의 길을 저벅저벅 걸어가면서, 처참하게 죽은 짐승의 시체 사이를 걸어가면서 우리 둘 중의 누가 이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면 신이 우리를 이렇게 쪼개 버리기를 동의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약을 어기는 자에게는 죽음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약속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자신을 묶어 메는 것입니다. 속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이 언약의 주인이 되실 것을 알려주시기 전에 먼저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6:4)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데 아브라함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에서 살 때 그 사회 자체가 수많은 신들이 있는 다신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이 집은 무슨 신을 저 집은 무슨 신을 믿는, 신들이 풍부한 가운데서 자기 아버지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서 이 아브라함이 만났던 신, 거기서 발견한 신들은 변덕이 심한 신들이어서 도무지 믿을 수가 없고 토라지기 잘하고 갑자기 인간을 향해서 성을 내다가는 헤헤거리는 저급한 신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에게 “나는 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위하여 땅을 주고 네 자손을 많게 하고 열국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고” 등의 수없는 말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에게는 이것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탕발림처럼 느껴졌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들의 말은 의래 조금 깎아서 들어야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들의 신용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여 주냐면 “고기를 쪼개서 벌려 놓아라.” 짐승을 쪼개서 벌려 놓으니까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주신 다음에 하나님 홀로 그 사이를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 불경스러운 이야기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비록 만군의 여호와고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고 나보다 능력 있는 이 세상의 존재가 없지만 내가 내 스스로 너희에게 맹세하는데 네게 준 약속을 내가 만약 어기면 내가 이렇게 짐승이 네 앞에 쪼개진 것과 같이 내가 스스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약속대로 애굽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부터 시작해서 율법이 주어질 때마다 피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피는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하나님도 그렇게 약속하셨고 우리도 그렇게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을 것이라고 단단히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것과 제사가 어떤 관계가 있냐하면, 이미 인간 자체가 아담과 하와 시절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에게 주셨던 언약을 파기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과 파기된 약속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그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나올 때마다 그 언약식에서 치렀던 것과 똑같은 예식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짐승을 죽이는 것입니다. 죽이는 것은 결국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인간들이 어긴 그 죄에 대한 대가, 다시 말해서 언약을 맺을 때에 누군가가 언약을 어기면 그 당사자가 그렇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는 그 약속을 그대로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당해져야 하는데 인간에게 당해지면 인간을 창조한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아니라 짐승에게 그 진노를 부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짐승을 처참하게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언약을 어긴 대가를 짐승을 통해 지불하게 하시고 그것을 토대로 잠시 하나님과의 교제의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 속에 흐르고 있는 모든 제사의 의미입니다.
인간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해결하셔야 하는 문제는 진노입니다. 진노를 푸는 것을 가리켜서 좀 더 어려운 말로 ‘유화’라고 합니다. 진노가 다 풀리고 나야지만 관계의 회복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인간이 나아갈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린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진노를 풀어드리기 위해서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형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물 그 자체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은 언제든지 임시방편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과 잠시 교제할 때 그 인간들이 신앙을 가지고 있는 한, 그렇게 자기가 가지고 온 그 짐승이 징벌을 받아서 처참하게 피 흘리고 쪼개지는 광경을 보면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처참하게 몸부림치면서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식어지고 나면 그냥 장난처럼 끌고 와서 때려죽이고 내 죄는 속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양이 자기를 대신해서 처참하게 죽어 가는데 껌 씹으면서 졸면서 제사라고 드렸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속에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요소가 무엇이냐면 그 예배 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 느끼는 참회의식입니다. 그래서 예배 시작 전에는 와서 우선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고 그 앞에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그 좁힐 수 없는 사이에서 자신의 몸을 버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죽어 가는 짐승 사이에서 울부짖던 참회자의 마음이 되어서 깨뜨려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가장 훌륭한 제사는 시편 51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죄인이라는 깊은 참회함이 없는 예배, 이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깊이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 처참하게 죽어 가는 짐승을 보면서 ‘정말 그러지 말아야지’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때 일이고 나오면 하나님과는 결별해도 죄와는 헤어질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와서 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든지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렇게 믿음으로 속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3장에서 하나님께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을 향해 베푸신 은혜치고는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우리의 죄를 없게 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 인간이 자기가 지은 모든 죄를 생각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생각한 죄는 속죄함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생각하지 못한 죄들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그 모든 죄의 문제를 끝내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죽어주셔야 했는데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처음에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이 한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들어왔고 그 사람은 불완전한 상태에 있었지만 완전한 인간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로는 완전한 인간이 태어나질 않는 것입니다. 그 완전한 인간이 타락해서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오게 되었으니까 그 죄와 사망의 문제를 종식하기 위해서는 처음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과 같은 사람이 제물이 되어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타락과 죄가 들어온 이후로부터는 그런 인간이 태어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죄 없는 한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저는 처음 예수를 믿고 나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 하나님은 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에 있어서 오해받을 일을 하셨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일어난 이후로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문제, 자유주의 신학뿐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 돌아가시던 그 시대에 그런 문헌들이 벌써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생아다. 어떻게 인간이 남녀의 동침이 없이 생성될 수 있느냐’는 것을 이미 예수님이 돌아가신 그 직전부터 기독교를 모해하고자 하는 자들에 의해서 이의가 제기된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를 믿을 때 왜 하나님은 그렇게 오해가 많은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오게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은 자연적인 생육법이 아니라 흙으로 지으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그런 신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에 나게 하셨더라면 누구도 그런 오해를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는 참사람이어야 하셨습니다. 그 참사람이 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시는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셔서 완전한 제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시다가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많이 있지만 그 일들은 결국 한 가지 일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3.3.3으로 묘사 될 수 있습니다. 삼십년 동안 준비하시고 삼년동안 공생애 사역을 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셔야 했는가에 대한 이유는 충분히 이해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십자가의 죽음이어야 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의 종교적인 의미를 풍부하게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표를 보면 즉시 기독교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나 혹은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이 십자가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죄인을 사형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인간은 사형시키는 굉장히 다양한 방법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의 방법이었겠는가? 모양이 아름다워서 십자가도 아니고, 이 십자가라는 사형 방법을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기에 매달려 죽이시는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사용하신 이유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죽을 수 있는 방법 가운데 가장 처참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십자가라는 책을 쓰면서 사실은 십자가 죽음에 대한 것을 상세하게 써놓은 책들은 없지만 아주 많이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정교한 방법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한계에 도달하게 되면 생명이 사라지게 됩니다. 생명이 사라지게 되면 고통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습니다. 경험한 사람은 없지만 어느 의사가 기고한 글에 보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게 죽는 방법이 목메어 죽는 것이랍니다. 약물을 사용하는 방법 말고는. 왜냐하면 처음에는 갑갑하고 죽을 것 같은데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환각효과가 있답니다. 그래서 옛날에 어느 어린 학생이 대들보에 밧줄을 매놓고 거기 매달려서 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환각 효과를 노리면서 그 방법을 종종 쓰다가 도가 지나쳐서 매달려서 죽은 것이지요. 총으로 죽인다든지 그 악명 높았던 프랑스의 단두대도 모두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죽음의 특성은 생명이 남아있는 동안에는 지불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끝까지 지불하다가, 죽는 것과 고통이 한꺼번에 끝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기록에 보니까 이 십자가의 예수님은 여섯 시간 만에 돌아가셨는데 핏줄을 피해가도록 못을 박은 경우에는 삼일씩 매달린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 삼일을 매달려서 온몸으로 늘어지면서 찢어지는 손을 나무에 매달고 고통을 겪는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피가 빠져나가면서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심한 두통과 갈증입니다. 때로 내부에 출혈이 일어난 경우가 있습니다. 교통사고나 어떤 사고로 장 파열이 일어난 경우 겉은 멀쩡한데 계속 식은땀을 흘리면서 물을 찾을 경우 그때 물을 주면 죽습니다. 출혈이 되게 되면 타는 것 같은 목마름이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죽어 가시면서 극한 목마름과 두통으로 고통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군인들 사이에는 십자가라는 말 자체를 하는 것이 실례였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에. 그래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어도 그렇게 죽이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택한 이유였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처참한 고난으로 죽이시기를 원하셨을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죄를 속하셔야 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모두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범죄하고 타락한 것에 대한 진노를 푸셔야 했습니다. 그 부들부들 떠는 진노를 하나님이 푸셔야 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꼭 진노를 푸셔야하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심각하게 자기의 주권에 도전하고 당신의 계명을 어긴 인간을 내버려둔다면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사도들도 분명하게 우리에게 못 박는 것은 범죄 한 영혼에게는 반드시 고통이 있으리라하는 것입니다. 이런 공의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은 죄에 대한 형벌을 해결해 주셨다는 것이지 죄로 말미암는 고통까지도 해결해 주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해야 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범죄 하면 하나님께서 한 순간에 구원을 취소하시고 하나님의 형벌로 우리를 데려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사망 가운데 집어던지시지 않으십니다. 형벌의 문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나 범죄 한 자에게는 그 고통을 이 세상에서 대가로 받는 것입니다. 율법과 같이 단숨에 돌로 쳐서 죽이시지는 않지만, 그 형벌은 유보하였을지라도 영혼에 대한 형벌은 유보하셨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과 죄 범한 영혼에게 고통을 주시지 않는 것과는 다른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범하면 반드시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고통의 대가를 충분하게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잃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하나님의 공의는 죄지은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범죄 하면 그 영혼에게 고통이 따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그 심령 속에 평화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몸부림치는 이 싸움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다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당신의 소유 삼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삶만을 가지고도 만족을 안 하십니다. 생활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만 가지고 만족을 안 하십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모든 것까지를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그래서 칼빈이 십계명을 해설해 나가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가 범죄 하기 위해서 유혹을 받지 않는 일은 이 세상에 있을 수가 없다” 이 세상 자체가 그런 유혹이 판치고 죄가 가득한 세상이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죄의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사실 죄의 유혹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칼빈이 하는 얘기는 유혹을 받을 때마다 우리가 그 유혹에 굴복하면 비록 범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것인 우리의 마음을 죄를 향해 내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즉시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읽으면서 역시 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모든 십계명의 문제를 그런 식으로 풀어 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으로 삼고 싶어 하는 영역이 단지 외관으로 드러난 우리의 삶이 아니라 마음 모든 것까지 당신의 것으로 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 열망이 어떻게 반영되었습니까? 율법에서 이미 반영되었습니다. “너희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순서를 보십시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과.” 결국 목숨이 하나님 앞에 가장 바치기 쉽다는 것입니다. 가장 바치기 어려운 것부터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대한 인식은 외형으로부터 내면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내면으로부터 외면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들이 절기를 지키고 나를 믿는다고 하고 짐승을 데리고 와서 하나님의 성소를 피로 물들게 한다고 할지라도 너희는 나를 버렸다. 너희의 마음이 나를 떠나갔으니까 그 모든 외형적인 일을 행해도 너희는 나를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신앙에 있어서 이 모든 갈등은 그 이해의 차이를 하나님과 함께 좁히지 못하는데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예화) 제가 교회를 시작해서 6개월인가 되었을 때 깊은 한계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하러 올라가면 설교자가 숨이 턱 막힐 때가 있습니다. 설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힙니다. 무언의 소리가 들려오는데 ‘도대체 얼마큼까지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말인가.’하는 항변입니다. 그때 사실은 설교자로서 다가오는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이쯤에서 설교의 강도를 늦추고 이 신앙의 고삐를 풀어야 한다.’라는 유혹입니다. 저는 이년이 넘는 기간에 목회를 해오면서 그때가 제게는 가장 커다란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돌파구를 주셨는데 그때 나온 시리즈가 ‘마음을 다하여’ 시리즈입니다. 제가 그런 항거에 대해서 깊은 동의까지는 몰라도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너희가 과연 나를 찾았느냐?” “마음을 다하여 너희가 나를 찾았느냐?” “이렇게 일 년에 몇 번씩 사경회나 열고 사람들이 목사의 지시에 따라서 모이기만 하면 그것이 나를 찾은 것이냐?”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반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시리즈를 전개해 나가면서 그 딜레마에서 탈출해 나왔습니다. 그 후로는 그렇게 심각한 지경까지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음까지도 모두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 드리든지 말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신앙에는 회색지대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선명한 대비, 신앙과 불신앙의 날카로운 대조만이 있는 것이지 중간지대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사가 한 얘기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 속에서도 말하는 것은 “너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라.” 말해놓고 그 다음에 나오는 조건 절이 “네가 만일 하나님을 버리면” 그 얘기는 “네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라 그렇게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그 뜻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모든 것들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할 수 없는 그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의 끓어오르시는 그 진노,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아갈 때도 우리의 옛 성품이 계속 죽습니다. 그러나 옛 성품과 오해되기 쉬운 그런 성품 하나가 신앙이 깊어질수록 더 뚜렷하게 솟아오르는데 그것이 바로 분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말씀을 여러분들이 너무 확대해서 여러분들 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렇게 미화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아주 특이한 분노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거룩한 분노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시면서 느끼셨던 분노,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받는 현장을 향한 그 타오르는 분노,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화:지금은 나오지 않는 한 성도가 사람들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즐거움을 찾으려고 하는 것으로 인해 분노가 솟아올랐다는 이야기)
이런 유사한 것들이 바로 의로운 분노입니다. 이것도 물론 거룩한 인격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하지만 그런 분노는 바울에게도 있었고 모세에게는 더더욱 있었습니다. 이런 거룩한 분노가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죄인인데도 그런 것을 느끼는데, 사람들이 죄를 지어서 우리에게 입힌 손해가 없는데도 우리가 그런 것들을 느끼는데, 전능하시고 완전한 하나님께서,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기를 향해 도전하는 것(죄는 하나님을 버리는 것) 당신이 만드신 백성들이 당신을 버리는 것을 볼 때 어떠셨겠습니까? 그렇게 당신을 버리면서 당신을 향해 도전하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서 느끼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푸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당한 하나님의 권리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처참한 사형의 방법인 십자가가 채택된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십자가에 죽으신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을 가장 잘 보여 줍니다. 십자가의 형벌과 구원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상징은 그 자체가 저주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렇게 십자가가 구원을 상징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시냐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만 달린 것이라는 사실을 인간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다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유화 되는 것입니다. 유화의 ‘유’라는 말은 부드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죄인들을 향해서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뭔가 나에게 잘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징벌했습니다. 한 대 때리고 분이 안 풀려서 두 대, 세 대를 때렸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까 피가 터져서 흐르는 것입니다. 그 때 어떤 마음이 듭니까? 갑자기 분노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예화: 고등학교 때 선생님께 많이 맞는 두 종류의 아이들)
그렇게 때렸을 때 갑자기 피가 터지면 진노가 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생각해도 우리 중심으로만 생각하는데 하나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입자에서는 어떻게 하든지 이 진노를 푸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가장 처참한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진노가 풀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비로소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서 이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를 푸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문제에 대해서 항상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회개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제가 이러이러한 죄를 졌사옵나이다. 저도 할 수 없이 죄를 졌지만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이올시다. 차후에는 비슷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겠사오니 이번만 특별히 선처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아멘.”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우선 하나님께서 나 때문에 진노하셨다는 이유로 아파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참하게 죽으셨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푸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죽으심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는데 ‘속상’이라고 하는 요소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타락한 죄악을 속죄해주시는데 그 안이 두 개의 요소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유화와 속상입니다. 속상은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팔린다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사망에게로 팔리는 것입니다. 사단의 세력들에게로 팔려 가는 것입니다. 그 팔려간 사람을 다시 사오기 위해서는 비용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비용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제물’이라고 하는 이런 복잡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대속제물로 드리셨으니” 그러니까 대속이라는 것은 대신 갖다놓고 그것을 대가로 주고 다른 것을 취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속제물입니다. 그래서 ‘대속제물’ 혹은 ‘속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비유로 들었지만 노예 시장에 가서 내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돈을 주고 그 노예를 사오는 것입니다. 돈은 노예가 갖는 것이 아닙니다. 노예도 언젠가는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 때문에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팔려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그 노예를 자기의 소유기 때문에 거저 놔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돈을 지불하고 노예를 끌어와서 내 소유가 된 후 자유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때 지불한 그 돈을 속전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대속제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죄에 대한 대가로 그렇게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하나 현실적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죄 지은 것의 대가는 무엇을 지불해야 됩니까? 예수의 생명을 지불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에 대한 대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의 그것이 오늘 후에도 지을 모든 죄를 위해서 속하신 것이니까, 오늘날 우리도 죄를 지으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면 오늘 내가 범죄 하면서 누리는 이 잠깐의 만족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가 그 비용으로 죽음을 지불하셔야 된다는 평범한 메시지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높은 신앙의 수준과 고도의 영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꼬치꼬치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번 우리 청교도 신앙 강좌에서도 들었던 것 기억하십니까? 꼬치꼬치 따지기를 좋아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진 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 문제가 단순히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죄의 문제와 연관이 되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 안 기뻐하시는 일인가, 이것을 행해도 죄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인 것입니다. 무지몰각하게 대충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큰 죄도 막 짓는데 그까지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고도의 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은 순간순간 그릇된 교훈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때 그 교훈의 틀 속에서 수많은 범죄를 낳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의 참된 생명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까다롭고 복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죄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 하니까 심각한 것입니다.
(예화: 한 교역자가 십자가 책이 너무 심각하고 무겁다고 한 이야기 )
죄 문제는 언제나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죄에 대한 설교를 그렇게 듣고 싶어 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사람들일수록 죄에 대한 설교를 듣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거룩함이란 뭔가를 더함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죄를 빼내야지만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보태 가지고는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빼내야 됩니다. 거룩함이라는 말 자체가 갈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속되고 죄악된 것들을 계속 빼내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거룩한 것이 남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한 것들이 남아 있고는 거기다가 아무리 다양한 것들을 갖다 부어도 신령하게 되거나 거룩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집요하게 죄에 대해서 설교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시고 죽으신 역사적인 사실이 토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의 죽음은 그야말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토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집을 짓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시대 이전서부터 소위 보편구원론자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모든 사람은 신앙과 상관없이 구원받기에 충분하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 사람들이 어떤 생각과 어떤 믿음과 어떤 종교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모두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이러한 이상한 복음에 대한 해석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나타난 사랑이 물이 바다를 덮는 것같이 어마어마하게 큰 것이어서 그 사랑이 너무나 크고 인간의 죄는 그 사랑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것이 되어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구속의 놀라운 사랑을 칭송하는 것처럼 들리는 신앙으로 생각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이 잘 사용하는 비유는, “한 컵의 더러운 오물이 있다고 치자. 그것은 물론 틀림없이 더러운 것이다. 그러나 이 한 컵의 어려운 오물이 한 바가지의 생수에 부어졌다면 먹을 수 없을 정도의 더러운 물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물이 비록 오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물이 태평양 바다와 같다면 한 컵의 오물을 붇는 것이 그 바다의 정결함에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예수의 사랑과 인간의 타락을 비유해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하게 성경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새로운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옛 언약의 종식인 것과 동시에 십자가를 중심으로 새 언약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십자가에 옮겨 놓으시고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이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푸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주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죄는 온 인류의 죄가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의 죄입니까? 온 인류의 죄가 아니라 온 인류 가운데 구속받을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판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구약에서 약속되고 있는 그 심판의 약속이 그대로 미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두 번째 사망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진노는 아직 풀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하는 구속의 역사적인 이 사건 위에 신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속하시고 온갖 저주를 담당하시고 죽으셨지만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 사실이 나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내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피 이야기가 수 없이 쏟아져 나오다가 갑자기 그 이야기가 딱 끝나고 신약으로 들어오게 되면 피라는 용어와 맞먹는 다른 단어가 계속 쏟아져 나오는데 그것이 믿음입니다. 피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이유는 언젠가는 하나님이 진노를 이렇게 담당하고 유화와 속상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심판을 구약이 내다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완전히 성취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피 흘릴 일이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려서 영원한 속죄 제사로 하나님 앞에 드린 것입니다. 더 이상 제사가 필요 없게 됩니다. 이제 완전한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의 자리에 참여하여 속죄를 받기 위해서는 이렇게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일을 믿는 것이 가장 커다란 요소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계속 피 이야기를 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다음에 -사실 어떻게 보면 복음서 속에도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복음서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후에- 사도들의 설교 속에서 편지 속에서 믿음에 대한 언급이 수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이 믿음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까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은 그들이 믿음이라고 말할 때 그 믿음은 기초가 놓여있기 때문에 믿음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 믿음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구속을 이루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이 역사적인 사건이 있기 때문에 그 사건에 때한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게 될 때에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사건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때를 구약에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며 환영하며 즐거워하며 꿈꾸며 그리워하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속죄의 제물이 필요 없고 그 다음부터 요구되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 가운데 빠졌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믿고 진실하게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만남의 기회를 새롭게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나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영혼의 심판의 형벌을 하나님께서 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진노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부터 계속해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약 성경을 넘기면서 “믿으면 구원받는다.” 믿음이 만사를 이루는 것처럼 이렇게 쉽게 “믿기만 하십시오.” 이렇게 간단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기 전까지 하나님에게는 이미 그렇게 믿으면 모든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를 놓기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은 그렇게 순간에 이루어지고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만족, 유화, 그리고 그 죄 값을 지불하는 속상, 이런 모든 것들이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그 예언을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니까 그 다음에 우리의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떻게 믿는 것이 믿는 것이며 그 믿음은 우리의 삶하고는 어떠한 관계가 있습니까? 내일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4. 구원의 길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 21:8-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두 시간에 걸쳐서는 죄의 문제에 관해서 말씀을 드렸고, 지난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구원의 근거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역사적인 사실의 토대 위에서 구원의 조건이 되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해 드리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간이 되면 우리의 구원의 조건이 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십자가 아래서 살아가는 삶 이 두 가지 주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시간이 안 되면 한 주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죄는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커다란 좌절과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에 창조하신 그 목적대로 살아갈 수 없는 불구의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그런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죄의 문제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끝난 것이냐 아니 전혀 끝나지 않았습니다. 죄의 형벌의 문제는 끝났고 죄를 이길 수 능력을 하나님이 주셔서 끊임없이 주셔서 살아가지만 죄의 문제는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 이 시간에는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말씀 가운데 성경 전체의 요절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절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구원에 관한 말씀을 하신 다음에 그 말씀의 같은 맥락 안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냐 하면은 광야에서 구리 뱀이 높이 들린 것과 같이 내가 또한 들려야 하리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오늘 읽어 드린 민수기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호르산에서 에돔을 둘러서 이제 진행하도록 일정이 잡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여정이. 그런데 그 길이 엄청나게 험하였습니다. 에돔을 향해서 거쳐 가게 되면 싸움이 일어나게 되니까 그 싸움을 피하게 위해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는데 그 길이 너무 험악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원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불 뱀을 보내셨습니다. 그 불 뱀이 도대체 뭐냐 대개 성경 해석자들이 이 두 가지로 해석해 놓았는데 그 불이 의미하는 것이 붉은 색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붉은 색이 의미하는 것은 뱀의 외관이 붉은 색을 띄고 있기 때문에 불 뱀이라고 불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뱀의 외관과는 상관이 없이 일단 그 뱀에게 물리고 나면 물린 상처로부터 불붙는 것 같은 고통이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불 뱀이라고 한다. 이렇게 두 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그 뱀이 어떤 뱀을 의미하는 건지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뱀이 아니라 그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고충을 받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사건이 자기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 예언적인 사건이 되었다는 점을 우리가 중시하고자 하는 것이죠. 그 불 뱀을 하나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원망 때문에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리가 붓고 열이 나면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뱀에 물린 것 못 보셨습니까?
제가 송추에 있을 때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계셨는데 이분의 사택이 초등학교에 붙어있습니다. 아침에 학교 시작하기 전에 새벽에 일치감치 일어나서 풀숲에 산책을 나갔습니다. 근데 슬리퍼를 신고 산책을 나갔는데 따끔! 아프지도 않고 따끔했는데 보니까 뱀이 가더래요. 설마 했는데 그게 독사였습니다. 근대 혼절할 정도로 부어 오는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아픈 사람이 빨리 해독제를 맞아야 되는데 작은 병원은 해독제가 없대요. 그래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한대에 50만원주고 맞았습니다. 그것을 두 대를 맞으니까 붓기가 내려 가드래요. 못 맞으면 죽는 거죠. 하루 안에 죽었습니다. 그렇게 물려 가지고 혈관을 통해서 독이 퍼졌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심각하게 죽어가는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모세가 나타나는데, 약을 가지고 나타나나 했더니 여기를 쳐다보면 산다. 그게 뭡니까? “창대에 구리 뱀을 매달아서 높이 쳐들면서 이거 보면 산다.” 라고 했는데 누구 놀리는 것입니까? 그게 모세이고 성경의 기록이니까 웃음이 안 나지 아파서 죽겠다고 데굴데굴 구르는데 장대에 구리줄 하나 감아서 이거 쳐다보면 산다. 근데 놀라운 역사는 진짜 그것을 본 사람은 살았습니다. 이것이 결국 의미하는 것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셔서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라보았다는 것은 믿음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게 발음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믿습니다. 하는 분은 대개 안 믿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믿어지는 사람은 그렇게 세게 안합니다. 믿어지는데 뭐 그리 쇳소리를 내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 믿어지니까 자기 암시를 주고 최면을 거는 것입니다. 영혼의 시선을 응시하는 것. 바라보는 것. 여러분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정말 정상적으로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구리 뱀을 쳐다봤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모세가 장황하게 설명을 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하시더라. 그랬을 때 그 말이 이 사람의 마음 가운데 깊이 다가와서 구리 뱀을 쳐다볼 때 어떻게 쳐다봤겠습니까? 힐끗 쳐다 본 것이 아니라 그 구리 뱀이 어떻게 해서 내 죽어가는 이 몸을 치료하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내가 그것을 쳐다보는 것이 나로 하여금 살게 한다고 생각했을 때 어떻게 쳐다봤겠습니까? 자신의 마음과 영혼의 온 체중을 실어서 바라 본 것입니다. 다른 아무 것 봐도 붙잡아도 치료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예화) 한번 원자력 병원에 갔는데 암에 걸린 환자들이 잔뜩 누워있습니다. 거기 가서 보면 건강한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누워서 저는 조용히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쭉 듣는데 암의 특효약이 새로 발견이 되었다고 합니다. 암의 특효약이 발견 되었는데 독일제라고 합니다. 한 앰플에 1500만원이라고 합니다. 한번 주사바늘을 찔러 넣는 게 천오백만원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그거 어디서 좀 구할 수 없을까. 아픈 사람들의 소원은 그 까짓 것 재산이 소원이 아닙니다. 오직 치료에만 소망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제2, 제3의 치료책이 있었다면 그 놋뱀을 쳐다보는 사건이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근데 그것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래서 쳐다본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쳐다본 것을 믿음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묵상을 해서 민수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쳐다보는 것이 흘끗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 로마서10장을 풀어 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죄 때문이고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그리스도 예수의 역사적인 죽음입니다. 그럼 구원의 조건은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되는데 믿음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믿음이 무엇이냐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조건으로 삼으신 것에 대해 잠깐 언급을 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방법이 하나님께서 후에 고안해낸 방법이 아니라 이미 처음부터 그러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나타난 많은 믿음의 성도들은 앞으로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바라보며 구원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도 이 믿음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취급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신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된 것을 믿음으로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 사실은 첫 시간과 둘째 시간에 계속되었던 죄의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주어진 하나님의 저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제일 먼저 뱀에게 행해지는데 뱀에게 내려진 저주는 여자의 후손이 너를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그의 발뒤꿈치를 물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여자의 후손이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고 발뒤꿈치를 문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사단의 세력이란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후로부터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아담부터 시작해서 모든 후손들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약속의 실현을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아담이 구원을 받았을 것 같습니까? 못 받을 것 같습니까? 가서 만나보면 알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을 거라고 봅니다. 특히 칼빈 같은 경우에는 분명하게 그렇게 봅니다. 그 이유는 그가 그렇게 범죄 했지만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계시를 받고 있었던,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분명히 여자의 몸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인데 그 아이가 자신들이 저주와 형벌을 받고 즉시 에덴동산의 모든 축복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거기에서 경험하게 된 죄로 말미암은 비참한 무질서와 고통, 거기로부터 회복되어야겠다는 갈망을 아담이나 하와만큼 간절하게 가졌을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낙원을 누렸던 사람들입니다. 그 낙원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교제를 경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타락으로 말미암은 심판의 고통을 가장 뼈저리게 느꼈던 사람은 그 당사자였습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한없는 계시의 은혜와 낙원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니까 그들이 범죄 했을 때 그 모든 사람위에 뛰어난 고통을 느꼈던 것은 하나님의 공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서 거기서부터 끊임없이 기다리던 것이 있었습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여자의 후손이 태어날 텐데 그 여자의 후손이 우리의 구원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어렴풋이 압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들에게 유일한 소망이란 사실도 압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그러한 삶을 믿음으로 보셨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계속해서 그 출현을 기다리는데 그리스도 예수가 오셔서 그 일들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은 자기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면서 믿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되었습니다. 신약시대 성도들은 이미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믿음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 구원에 대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전반부를 먼저 보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 여기서 이야기하는 입으로 주라고 시인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당연히 순서적으로 먼저 오고 믿어지는 것이 나중에 온다고 하는 시간적인 순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이미 마음과 영혼의 변화로부터 시작된 고백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고백인데 개인적인 고백이 아니라 공적인 고백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에는 별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이 편지가 쓰일 시대에 당시 로마사회, 유대인 사회가 기독교를 철저하게 박해하던 때로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공적으로 고백을 한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내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 하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그 믿음에 대한 고백이 공적인 고백입니다. 그것이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고백인데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공적인 성격을 띤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심리적인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내 죄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했다는 사실을 내가 내면의 변화를 통해 마음으로 믿고 그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시인하며 고백하는 것은 이미 마음속에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깊이 믿어진 그 결과로 우러나오는 고백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이 믿음이 삶과 분리되는 것 같은 삶의 신앙고백이 없는 입술의 신앙고백을 성경은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이 교리만큼 우리들에게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미 이런 일들은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지 얼마 안 된지 부터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온 편지가 야고보서입니다. 믿음과 행위가 나뉠 수 있냐고 반문을 하는 것입니다. 행위가 없는 그 믿음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했으니까 야고보 선생이 볼 때에 이미 교회 속에도 그런 식으로 잘못된 믿음에 대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입술의 고백, 말로 믿는다고 말하면서 삶은 전혀 믿는 사람의 삶 같지 않은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믿음이 아니라고 통박하는 장면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과 행위가 두 가지가 있는데 두 가지의 기울기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니까 야고보 사도가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자체는 떨어뜨려서 생각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영원 속에 진정한 변화가 동반될 때 신앙의 고백이 가능해집니다.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 마태복음 5장에서 거론하고 있는 팔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부터 시작해서 8가지로 나오는 모든 팔복들이 삶을 흉내 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의 변화가 온 사람들은 이런 삶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끊임없이 강조한 것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내게 붙어있으면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워놓은 나무에 사과를 매달아 놓는다고 해서 사과나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 자체가 사과나무이면 필연적으로 사과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비료를 많이 주고 거름을 주고 물을 자주 주고 햇빛이 잘 들면 제때에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는 그럴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 자체의 변화가 오지 않으면 정말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들이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구원받지 못했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 살 때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은 이상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실 때 자주 하셨던 말씀이 따라서 그 열매의 비유입니다. 그 이야기는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본질이 변화되고 새로워지면 그 변화된 내면의 세계가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다르게 살아가지 않을 수 없도록 우리를 만들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능력을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공급을 받는 영적인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거듭나기 전에는 영적인 삶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영혼 자체가 죽어있기 때문에 죽은 사람에게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삶이란 살아 있고 끊임없이 오늘을 살아도 내일 살아날 수 있는 힘을 끊임없이 공급받고 사는 사람에게 삶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기 전에 먼저 일어나야 할 일은 영혼의 변화입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영혼을 살려주시고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신이 영적인 변화를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입술로 삶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잘 넘겨보면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와는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다른 것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 겨우 할 수 있는 일은 주일날 겨우 예배드리는 것이 초신자의 일이고 교회에서 훈련을 많이 받고 교육을 많이 받으면 헌금을 하고 수요예배도 나오고 더 훈련을 받으면 전도도 하고 예수를 위한 훌륭한 일꾼이 되는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를 믿자마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을 기억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사건의 체험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사도들과 그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듣고 회심한 사람들의 이어지는 전도활동들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진정한 이 신앙고백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는 그 일은 우리의 영혼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에 은밀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때로는 커다란 회개를 동반해서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은밀히 시작되어서 급격하게 회개 없이도 우리가 변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 날짜를 대라고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도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태신앙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언제 변화되었는지 모르지만 지금 변화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가 급격한 회개를 동반한 자기가 분명히 거듭난 순간과 크게 회심한 순간이 일치하는 영적인 변화를 경험한 경우이든지 누구든 알 수 없게끔 은밀하게 눈떠보니 어느날 내가 거듭나 있게 된 경험을 하게 되었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이 문제입니다. 지금 그 상태가 문제가 됩니다. 나는 급격하게 큰 회개를 경험해서 거듭났기 때문에 어느 날을 내 인생에서 잃어버릴 날이라고 날짜를 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지금이 문제입니다. 마음속으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고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아멘하고 입술로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신 것을 고백하며 살고 싶어 하는 마음과 그런 경향이 내 마음속에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회개가 아니라 무엇을 경험하였다고 해도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이 지식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인격에 있어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깊이 동의되고 자신의 인생의 가치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재발견 되지 않은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타락하고 교회가 세속화될수록 구원의 커트라인이 계속 낮아집니다. 막판에는 오기만 하면 교회만 들어오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것도 힘들어서 “함에 돈만 집어넣으면 땡그랑 하는 순간 구원을 얻는다.” “사제가 세례를 주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인간이 구원받고 못 받는 모든 권한을 교회가 가지고 있다.” “넌 안 돼.”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에서 잘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톨릭이 가지고 있는 교리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풍요함을 누리던 시대일수록 구원의 커트라인이 높아집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신자의 영적인 삶, 생활에 변화와 질들을 실제로 목회현장, 신앙생활 속에서 체험하고 있기에 성경을 깎을 필요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구원의 커트라인을 가지고 아무리 장난을 쳐도 하나님은 상관이 없습니다.
(예화) 여러 해 전에 어느 은행이 한번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통장을 갖고 은행에 가니까 “이런 돈 우리 은행에 들어온 적이 없는데요.” 하면서 돈을 안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연필로 긁어서 통장에 써주고 돈은 은행에 안 넣고 자기 주머니에 넣었던 것입니다. 가짜 통장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구원받았다 생각하고 위로받으면서 사는 것이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을 못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생각을 아무리 자기 암시적으로 가져도 그 사람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교회는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합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자기가 뭘 믿는지도 모릅니다. 나도 세례를 받았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세례 받고 3년 뒤였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가장 커다란 죄악은 이 세례를 남발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지금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믿음이란 영적인 변화 없이는 이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영적인 변화를 통해 참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내가 거듭남의 순간을 의식하든 못하든 지금 내가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 예수를 체험하고 있는가. 나의 믿음이 그 체험에 기초하고 있는가. 나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하는 것들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심리학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마음의 변화, 내면의 변화로부터 우러나오는 믿음입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믿음은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는 생각들을 믿음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생각입니다. 삶을 의탁할 수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났는가? 되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단편적인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의미는 지난 3시간에 걸쳐서 말씀드린 그 모든 것을 받아 들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셔야 했던 그 이유가 되는 모든 죄. 그 죄에 대한 인간의 비참함. 그리고 이어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행동. 그리고 우리는 공로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우리 마음에 깊이 믿을 때 그 때에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내 마음속에 믿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는 사실은 엄청난 가치 체계에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을 혼돈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믿고 알고 있어도 우리가 죄와 더불어서 싸울 수 있는 힘이 떨어지거나 우리가 믿고 알아도 행하려고 애를 써도 못 미치는 경우가 있는 게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내 개인적인 인생의 문제와 관련시켜서 예수를 받아들일 때 의미하는 것은 상황 자체에 대한 가치의 대변동을 의미합니다. 어떤 변동이냐면 이전에는 내가 하나님의 존재도 믿지 않았습니다. 근데 복음을 듣고 보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죄의 문제가 인생에 있어서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소식을 먼저 들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노아래 놓여있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들어야 합니다. 오늘날 복음전도사역에 열매가 부진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먼저 자신이 얼마나 처참한 죄인이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형벌인지 심각하게 사람들이 느껴야지 예수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이 복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구원받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사람들이 예수가 너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면 “아니 뭐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하냐고 괜찮다고 해. 난 괜찮아. 다른 사람이나 위해 많이 돌아가시라고 그래.” 그것은 그렇게 살아갈 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 어떤 진노 가운데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너무나 오래도록 그 죄로 말미암는 형벌을 맛보면서 살았기 때문에 인생은 그런 거려니 하면서 패배와 실패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깊이 익숙해져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힘을 다해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래도 못깨닫는 다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갈 데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깨닫게 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세상 밖이든 가장 중요한 것이 구원에 이르려면 하나님 앞에 깨닫는 것이고 깨닫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도 없고 영적인 변화도 없는 것입니다.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절대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깊이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이러한가를 깊이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의 신앙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한번 불 떼 주면 와르르 끓다가 끝나고 나면 제풀에 식어지는 그런 삶을 반복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편견과 무지로 가득차서 무지를 자랑거리 삼는 사람들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모른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른다고 하는 것으로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생각을 하고 ‘과연 내가 믿는 신앙이 이러한가?’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여기서 중요한 것을 하나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말하는데 고백과 삶이 일치하지 않고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데 오랜 생활 교회를 다니면서도 분명히 예수로 말미암는 그런 분명한 가치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고 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끊임없이 거듭난 이후에 신앙생활하면서 계속 깨닫고 깨뜨려져야 합니다.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도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 오른쪽 다리를 보면 길이 3cm정도 되는 깊은 상처가 있습니다. 어제도 그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정확히 30년 전에 생긴 상처입니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그 자전거를 타고 철조망에 엎어졌습니다. 철조망 뾰족한 가시에 반바지를 입고 여름에 방학 때 시골 가서 자전거를 배우는데 오른쪽 다리가 푹 파였습니다. 지금도 3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앞도 기억이 안 나고 뒤도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사건만은 분명히 기억이 납니다. 구원을 받을 때 복음을 듣고 우리가 믿을 때 커다란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신지에 대한 깊은 신앙적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복음이 깊이 새겨집니다. 그래서 참다운 부흥이 일어났을 때 회심한 사람들이 다시 타락하는 비율이 아주 낮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에 대해 지식적인 동의를 가지고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된 사건이 내면의 영적인 세계 속에서 마음의 변화와 함께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에 대한 체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느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났는데 얼마 안됐습니다. 성경의 내용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이 내 마음에 깊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 소망 없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이러한 정서의 변화를 영혼의 변화는 반드시 동반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체험을 통해 얻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경험헌다는 것과 일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상적으로 구주로 영접하고 믿고 나면 이전에는 가지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정서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 정서가 있는지 여러분에게 있는지 한번 점검해보십시오.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구원받은 증거는 아니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고 예수를 내면의 변화를 통해 영접하게 되었을 때 반드시 정서적인 변화가 뒤따릅니다. 그래서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찬양)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그런데 우리게 흔히 생각하던 그런 심리적인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면 ‘믿음이라는 것도 간단한 게 아니네.’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면 왜 그렇게 구약의 성도들이 그리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사도들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이 사실을 그야말로 good news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첫째 시간과 셋째 시간에 들었던 구역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께로 나아갔는가 하는 것들을 다시 한 번 회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그들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율법이 자기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울과 같을 사람이 그런 사람이죠. 그런데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그 율법이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점점 죄 가운데로 사로잡아 오는 것입니다. 왜. 율법의 유익은 원래부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두 가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가볍게 쭉 읽으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냐면 아 지켰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죠. 그래서 예수님이 부자인 젊은 관원이 다가왔을 때 선한 선생님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니까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답변하셨습니다. 십계명을 행하라. 그러니까 갑자기 희색이 얼굴에 돌았습니다. 아 그건 내 전공이라 이거죠. 지켰다 이렇게 생각했죠. 그러나 그거는 자기 생각입니다. 우리 이번에 십계명에 대한 강해를 계속 듣고 있죠. 나는 1계명을 지켰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십계명까지 마찬가지 에요 보면서 뭘 깨닫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계속 깨들으면서 마지막에는 도저히 지키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그 십계명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누구를 붙들겠습니까?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이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다시 십자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들어올 때 마음은 어떠합니까? 주님 이 십계명을 내가 내 육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하고 그리스도 예수께 갔더니 그리스도 예수를 내가 믿고 내 의로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고 예수여 나를 도와달라고 하였더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피로 내 죄를 속해주셨습니다. 그 속함을 받고 보니까 내가 이제는 어떡하든지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데 어떤 표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보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열가지 계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번에 돌아오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예수의 한없는 은혜를 받은 내가 어떠하면 내 인생의 더러운 부분과 모난 부분을 깎아서 나를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내가 살아 드릴 수 있을까 생각을 하면서 주 예수여 내 정성을 받으시옵소서. 하면서 십계명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십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할 때에 이전에 우리의 육체는 그것이 불가능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니까 우리가 그 분께로부터 깊은 영적인 자원을 공급받을 때 그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들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을 언제나 지키는 것 이거는 지키기 위해서 우리들이 계속 노력을 해야 되지만 그러나 그 십계명을 완전히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 우리의 심령에 진정한 부흥의 변화가 일어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주기도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주기도문이 오늘은 중간에 기도는 빼 버리고 주문이 됐습니다. 주님이 주기도문 알려주실 때 마칠 때에 그거 빨리 외우고 끝나라고 식사 앞에 두고 주기도문 할 때는 빨리 하고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주기도문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자기의 언어로 기도 될 수 있으면 그 사람은 이미 아주 커다란 영적인 변화를 받은 사람입니다.
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믿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심리적인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성도들이 그렇게 이것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이러한 소식을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고 말씀하셨던 이유는 바로 아까 말씀 드린 그 이유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아무 공로 없어도 우리의 영혼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예수 그분의 십자가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내 영혼으로 깊이 응시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수많은 생각과 사상의 쓰레기 더미에 묻혀있는 것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십자가가. 그런데 하나님 앞에 정죄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죄가 몰고 온 엄청난 사망과 고통가운데 세월 속에서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 중에 단 하나도 기여하지 못하고 풀과 같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보면서 애통해하면서 자기의 소망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행동이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응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절박하게 필요하다고 마음으로 깊이 느끼고 그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소망이 없다고 바라본 것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 불 뱀에 물려서 죽어가던 사람들에게 장대에 매달린 구리 뱀을 보고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구원했습니다. 구리 뱀을 쳐다본 그들의 행동이 구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구원했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이 오늘날도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근데 보십시오. 사람들이 과연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습니다만 사람들이 정말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인생의 아무 희망이 없다. 내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내가 누리고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모든 꿈이 아무 의미가 없고 헛된 것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느낄 정도로 자신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절박해 지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상의 불신자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분명하게 세상에서 불림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오는 이 분명한 신유의 절차가 믿음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결핍되어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 벌리면 복잡하니까 여기서 그러면 일단 중간 정리를 합시다. 그러면 만약에 우리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라면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먼저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생각이 안 나면 가르쳐 달라고 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성경을 통해서 죄지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고 그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많은 축복을 앗아가고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인간이 어떠한 자유를 누리고 만족가운데 살아가는지 이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인간의 지위와 들어온 후에 인간의 지위에 이 엄격한 차이를 깨닫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 없이는 신앙이 출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깊이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깨닫게 될 때에 결국은 그리스도예수께서 자기를 위해서 죽으셔서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것이 캄캄한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흥함을 얻기 전에 폐함을 얻는 것이 먼저 일어나는 것입니다. 소망을 갖기 전에 좌절이 일들이 먼저 일어나야 된단 말입니다. 그리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우리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고백할 때에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떨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고 이 십자가는 부활과 때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것과 다시 오실 것과 때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과 떼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 주신 여러 가지 모습가운데 한 부분을 우리가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앞에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당신만이 나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에 끌어 드리려고 하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쭉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장엄한 역사적인 사건들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 그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다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릴 위해 죽었다는 사실 하나님의 진노가 풀렸다는 사실 앞으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 우리가 그를 위해 살아야 된다는 사실 이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딸려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성경전체가 딸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진실로 받아들이고 고백한 사람들은 당연히 그 다음에 나타나는 반응은 무엇이냐 하면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욕망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는 의사가 아니니까 모르겠습니다만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는 음식을 섭취하고 싶은 욕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탯줄을 통해서 공급됩니다. 그러나 일단 아이가 몸 밖으로 나오고 나면 태어난 지 30분도 안됐는데 젓꼭지를 주면은 빨아대기 시작합니다. 배고프면 울기 시작합니다. 줘서 배가 부르면 만족하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이 없는데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거듭났다고 말하는데 근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거듭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어야할 영적인 본성은 없었습니다. 영적인 본성이 아기가 났는데 계속 자는 것입니다. 우유를 한 달씩 안 줬는데 우유도 안 먹고 변도 안보고 계속 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는 게 아니라 죽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다. 영적인 본성이 출생과 함께 나타나야 되잖습니까? 본성이 보이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이거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거듭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또 하나는 우리 속에 있는 영적인 본성은 끊임없이 자극하고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본성이 말하자면 기력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갈망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남아 있는 건 사실인데 그 남아있는 것이 속 깊이 너무나 깊이 묻혀 있어 가지고 그것이 자극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언제가 콩인가 뭐를 심었는데 딴 집은 다 났는데 우리 집은 안나. 왜 너무 깊이 묻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영적인 본성이 있기는 있습니다. 영원히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그런 영적인 본성이 있기는 있는데. 죄로 말미암아 너무나 깊이 묻혀 가지고 그 다음에는 이 속에서 그 영적인 본성이 숨을 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에 대한 관심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도 없이 넉넉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도 그런 삶이 가능합니다. 그게 바로 마귀가 원하는 삶입니다. 마귀는 이미 거듭난 사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거듭나기 전까지는 거기서 막 방해공작을 하면서 어떻게 힘을 써보는데 거듭난 사람은 다시 거듭나지 않은 사람으로 돌려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나기만 하고 싹을 말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를 맺을 수 없도록 형식적인 신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무력을 영적인 고사를 경험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게 바로 에스겔이 환상 속에서의 골짜기에서 본 마른 뼈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참다운 기쁨과 희락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렇게 매일매일 살아갑니다. 살아가면서 쌓이는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 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 살아가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계속 죄지으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대가를 지불하게 하십니다. 인생이 곤고한 것입니다. 편한 할 때는 타락하고 싶은 인간의 본성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고 범죄가 계속 쌓이고 나니까 하나님이 징벌하고 나니까 이번에는 징벌 받느라고 바빠서 하나님을 믿을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의 육체의 옛 행실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상황은 끝나고 우리의 인생은 휘장이 내려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게 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이 나를 만드시는 것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세상을 만들어 놓으실 때에 하나님이 가지셨던 그러한 목적에 합당하게 살도록 우리를 바꿔놓으신 것입니다.
자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나도 세상이 낙원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전처럼 땅을 정복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나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 이제 여러분들 아프리카 밀림 속에 들어가서 “애들아. 내가 너희 이름 다시 지어 줄 테니까 두 놈씩 내 앞으로 나와라.” 호랑이가 무서워서 “안 나와요 잘못하면 물려요 안 나와요.” 순종하지를 않습니다. 자연이 그러니까 처음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에덴동산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주신 주권으로 이 창조 세계를 통치하고 지배해 가는 것은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두 번째 구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게 뭐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게 되면 갑자기 딴 세상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이전에는 다 동무였고 친구였고 그리고 내 이웃이었고 타락의 벗이었는데 그리고 우리들과 함께 동거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세상의 타락한 죄인들이었는데 거듭나고 보니까 죄 많은 이 세상이 내 집이 아니라는 사실이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이전에 즐겁던 것이 즐거워지지 않습니다. 영혼의 입맛이 변했습니다. 단숨에 변해버렸습니다. 뭐가 문제입니다. 지하실이라도 교회 가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나오는 것입니다. 주일은 주일이니까 나오고 수요일은 수요예배니까 나오고 금요일은 기도회 있으니까 나오고 목요일은 수요일하고 금요일 사이에 있으니까 나오고 입맛이 변하는 것입니다. 저는 돈만 보면 돈만 주머니에 있으면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데 재미가 없습니다. ‘나 세상 자랑 버렸네.’ 입맛이 변한 것입니다. 그게 새로 태어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입맛이 변했습니다. 그러니까 거듭난 그 순간에 우리는 갑자기 딴 세상에 와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하고 살아갈까 근데 저렇게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가 왕년에 부러워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내가 저 사람처럼 끗발 날릴 수만 있다면 인생의 반 토막만 살고 죽어도 원이 없겠네.’ 그랬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구한테 물어봤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이 세계에서 절세의 미인이 된다는 조건으로 한 달만 이 세상에 살게 해준다면?” 하고 선택하라니까 “아멘” 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못생긴 상태로 이렇게 초라하게 사느니 멋있게 한 달 살다가 죽는 게 낫다. 그랬습니다. 이 세상에 부러운 사람은 자기처럼 코가 납작하지 않고 오뚝한 사람 자기처럼 가난하지 않고 돈 많은 사람 자기처럼 무식하지 않고 공부 많이 한 사람 교양 높은 사람 부러워했는데 이제는 그런 사람이 하나도 안 부럽습니다. 저녁예배 때 생선냄새가 풀풀 풍기는 일 바지를 입고 교회 나와도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마음이 드려진 그 신실한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자기의 사모함이 되는 것입니다. 입맛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입맛이 바뀌는데 이것들이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해서 생각할 때 이것이 계속해서 유지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우리는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성화라고 하는 또 다른 문제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고 그 다음에 마음으로 믿으면 뭘 믿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다시 살리신 것을 믿으면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이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기 만하고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은 그러면은 우리의 구원은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리스도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은 신 것이 사망의 왕 노릇하고 있는 사단의 정권아래서 죽어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 사건이 무엇이었냐고 하면 그 죽음에서 부활한 사건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수많은 성인들의 죽음과 다름이 없습니다. 살아나신 것입니다.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어떤 일들이 일어 나냐 하면 사단의 나라에 커다란 파괴가 오는 것입니다. 그 파괴가 뭐냐면 이제는 사망이 왕 노릇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에게 “너 죽는다.” 그러면은 꼼짝도 못했습니다. “죽는구나. 근데 그 죽음의 권한은 나에게 있다.” 생명을 걷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죄의 원흉인 사단의 세력입니다. 왜? 죽음자체가 죄의 삯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데 어느 날 너 죽는다.” 하고 최고의 비장의 카드를 꺼내는데 “죽이려면 죽여. 죽여도 다시 살 수 있어. 예수가 다시 살아 나셨는걸! 할렐루야!”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죽음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죽이려고 위협을 하면은 꼼짝 못하던 사람들이 “내가 죽으면 주와 함께 다시 살리라.” 그러면서 사단의 나라에 덤벼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도 사망의 카드가지고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십자가사죄의 사실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카드가 통용이 안 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듭나지 못했을 때에 우리의 삶을 철저히 지배했습니다. 본질상 너희는 진노의 아들이었고 그가 우리의 왕 노릇 했다는 것입니다. 왕이 어떤 사람입니까? 옛날에 왕은 오늘날 대통령 천명을 합쳐놔도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왕은 나라가 자기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 집안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가라.” 그러면 다 가야 되는 사람이 왕입니다. 천하에 모든 백성이 왕의 것입니다. “너 오늘부터 내 집에서 종살이해 해야 돼.” 왜? 왕이니까 모든 것이 그 왕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을 다스렸던 사람이 왕입니다. 그 지배 하에서 운명처럼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되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치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고 나니까 사단의 모든 협박은 망명정부의 지배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했는데 망한 나라가 벽보를 붙이면서 “저놈 잡아라!” 그거 뭐 하겠습니까? 누가 그거를 따라주겠느냐 말입니다. 아무의미가 없는 행동입니다. 세상에서 왕의 지배를 받던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살린 것을 믿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이제는 하나님의 위해서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의 종신입니다. 우리의 죽음의 끝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를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모든 사람들은 죽어도 다시 살겠고 하는 언약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정말 초월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사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의 모든 슬픔을 끝내고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깐 후면 온다고 여기 80년 후에 만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때까지 있는 사람이면 아마 신문에 나는 사람일 것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쉽게 순식간에 지나가는 생입니다. 근대 우리가 후패에 가는 겉 사람에 대해서 낙심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예수가 우리를 살리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5. 십자가 아래에서의 삶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제 드디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믿음을 통하여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이 은혜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께 무슨 기쁨을 드리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십니다. 그렇게 마음으로 깊이 믿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형벌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이미 값이 지불된 것으로 보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간의 구원 방법을 만들어 놓은 동기를 성경은 “하나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이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과연 어떠한 문제들을 안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선 오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씀의 이 “내”입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나는“바로 이 세상에 율법의 요구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쓰이고 애를 쓰린 자신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믿는 순간에 못 박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율법과 관련하여서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불행히도 이런 율법 속에서 살아 본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장면을 깊이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는 좀 더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사도처럼 이렇게 진지하게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까? 하고 고민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도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을 하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혹은 어떠한 사실이 어떠한 사건이 자기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위협하고 생명을 걸고 자신의 생명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때론 생각이 깊고 학식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배불리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의탁할 수 있는 사상을 구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철학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종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그런 것들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여기 활동에 빠지거나 취미 활동에 빠지거나 심하면 타락한 행동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의 인생의 모든 몸부림은 자신을 죄로 말미암아 허무하게 된 이 인생의 고통가운데서 자신을 구원해보려는 영혼의 몸부림 이였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면 해줘질 수 없는 이 공허한 번민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맺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채워질 수 있다는 사실은 몰랐던 때에도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다른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살아가고 있거나 더 많이 배웠거나 독특한 철학을 가지고 인생을 산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들 이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다른 방면으로 빗나간 열심과 잘못된 방법으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노력하던 방법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그 순간에 이렇게 모든 인생을 행복하고 자신을 무의미한 인생의 나락으로부터 구원해 내기 위한 인간적인 자신의 모든 노력과 수고와 세상의 사상과 철학과 모든 것들이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어디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사건을 대면하는 동안에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런 일들이 자신의 인생을 구원할 것이라는 생각도 안 들고 그러한 사상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 거기에 조종을 받으면서 살고 싶은 인생의 모든 사모함도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관심에 대상이 아니고 그런 것들에 안주해서 살아가고픈 마음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사건을 새롭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자신이 못 박힌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풍성해지는 비결입니다. 간곡히 부탁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의 영적인 성숙은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목사와 방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도가 과연 그러한지를 생각하고 우리 인생의 수많은 질문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대답을 주는지에 대해서 베뢰아 사람들처럼 성경을 깊이 상고하는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철학자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생각을 안 하려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커다란 적입니다. 아무리 유능한 군인이라 할지라도 어두움 속에서 훌륭한 싸움을 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단은 우리를 “무자”라는 어둠으로 데려가서 우리의 구원이 거의 의미가 없도록 만들어 주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은 변화된 영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받아들이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가장 커다란 축복이 있었는데 그것은 ‘죄 사함’이었습니다.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과거와 앞으로 지을 죄를 모두 사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속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단지 속죄만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그 진노로 말미암아 자기가 받아야할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 성취되었습니다.
그런 후에 즉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와 살게 되신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들 속에 있는 신비입니다. 이제는 그들의 인생을 주장하고 움직이는 원동력이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에게 죄 사함 뿐만 아니라 죄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아무 힘이 없는 우리에게 가져다가 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듭나기만 하면 우리 안에 성령이 오십니다. 이 속에서 영적인 본성을 창조하시고 인격으로 존재하시므로 불쾌한 것과 유쾌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한 삶을 살면 안에 계신 그 분이 기뻐하시고, 영이 기쁘니까, 육체도 기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잘못된 일들을 행하며 살 때에는 안에 계신 성령이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이 슬퍼하시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끊임없이 살아가게 만드는 영적인 자원과 능력들을 공급받는 일에 있어서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실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의 손에 죄 사함의 면죄부를 나눠주시고 끝내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은 타락과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될 때 가졌던 원래의 목적대로 살 수 없는 그 인간을 다른 방식으로 되돌려 놓아서 다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의 목적과 부합한 인생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면 옛날에 아담과 하와가 세상을 다스렸던 방법과는 다른 신령한 방법으로 우리는 세상을 다스려 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타락했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거듭나면 죄의 지배를 받는 이 세상에서 죄를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하고 이제는 죽음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사단의 세력의 사주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에 따라 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기쁨을 느끼고 거룩해 지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에 사단의 재배 안에 돌아오게 하고 그가 다시 나와 손잡고 사단의 나라에 함께 대항합니다. 그리고 죄를 미워하고 사단의 세력에 불복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누룩처럼 번져 가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원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우리를 동아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이 세상을 여전히 타락한 가운데 있지만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우리를 이 땅에 창조해내신 보람을 느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누군가 “이렇게 그렇게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물으면 왜 소망을 가지고 사는지 분명한 이유를 말해 주어라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요구하는 자체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우리에겐 삶의 분명한 목표가 복원됩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왜 사느냐 묻거든 우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산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건 고백이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에 관한 분명한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많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속하고 완전한 자유와 기쁨과 창조하실 때의 완전한 목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돌려놓기를 원하시는 그분의 원대한 계획이 있고 재물도 이미 드려졌고 누구든지 나와서 그분을 믿기만 하면 이것은 놀라운 신앙과 은혜 안에 있음을 이런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 외에는 인생의 참된 목적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깨닫고 알았지만 우리에게 또 다른 문제는 현실입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습니다. 사도는 십자가에 한번 못 박힌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쓰인 못 박혔다는 의미의 헬라어는 현재 완료형입니다. 옛날에 못 박혔지만 그것이 이 순간 자기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끊임없는 영적인 삶에서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영적인 예민한 감각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감동을 받기 위해서는 영적인 삶이 하나님 앞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삶의 비밀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신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을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낼 수 없습니다.
죄와 구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