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에 합당한 열배
(199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5월 9일
목 차
1. 형식적인 신앙에 대한 경고(눅 3:7) 1998.3.29 주일오전 1
2. 형식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는 길(눅 3:8) 1998.4.5 주일오전 12
3. 회심치 않는 자들에게 주는 경고(눅 3:9) 1998.4.19 주일오전 23
4. 말씀 안에서 무너지라(눅 3:11-14) 1998.4.26 주일오전 34
1.형식적인 신앙에 대한 경고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눅3:7)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 오시는 앞길을 예비할 여호와의 사자가 등장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도 예언하였고 말라기도 예언하였습니다. 그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에 앞서서 세례 요한 이라고 하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도록 부름 받은 외치는 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세례 요한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예언되었습니다. 짧은 생애를 살다간 자였지만 그는 진실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외침은 광야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의 외침은 공허하고 방향이 없는 외침이 아니라 분명한 하나의 목표를 가진 외침 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외침의 하나의 목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오시는 그 앞길을 예비하기 위한 외침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의 왕이 행차를 하게 되면 왕이 가기 전에 제일먼저 외치는 자가 지나가게 됩니다. “*년 *월 *시에 왕이 이곳을 행차하신다”고 외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어서 공병대가 뒤따라오게 됩니다. 그래서 높은 언덕은 두들겨 부셔서 낮추고 파여진 웅덩이에는 흑을 부어서 평평하게 만듭니다. 그런 이유는 왕이 마차를 타고 지나갈 때에 덜컹거리지 않게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찾아 오셔서 그의 인생을 바꿔 놓으시고 삶을 고쳐 놓으십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준비된 사람의 마음에 찾아가시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의 마음에는 오시지 않는 것입니다. 준비된 사람의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마귀도 아무 마음에나 들어가지 않습니다. 준비된 마음이여 야지만 들어갑니다. 마귀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준비된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면 어떻게 예수 오시는 길이 예비 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광야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 이 음성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비로소 이제껏 까지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회개하고 참회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삶을 뉘우치고 참회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됨으로 이 사람들의 마음이 평탄한 길이 되고 그 마음을 통해서 주님이 오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세례요한의 말씀 선포를 통해서 입증이 되었습니다. 그가 광야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 말씀은 자기가 지어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면서 아버지 앞에 자신을 준비하던 세례요한에게 어느 날 하늘로부터 거룩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는 말씀입니다. 말라기 이래로 400여 년 가까운 시기 동안 하늘은 닫히고 하나님의 음성을 갖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세례요한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나자 그가 또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만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부어 주셔서 그로 하여금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위탁받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충실하게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준 하나님의 음성을 가지고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그런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해야 된다고 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첫 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는 것인가? 그들은 자기 내가 하나님의 나라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이 세례요한의 말씀을 통해 충격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오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지 되는데 애통하면서 회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축복처럼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커다란 탱크가 모든 사람을 깔아 눕힐 것처럼 다가오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축복이요 영광이요, 말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재앙이요 커다란 심판이요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운 각성과 회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세례를 받으러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세례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아주 분명한 성경의 진리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에게 오시기를 원하시고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셔도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에게 오시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높은 산과 깊이 폐인 웅덩이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 것입니다. 죄가 씻겨지고 회개해서 자신의 마음이 정결케 된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만약에 참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다면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의 정성이 부족하거나 여러분들의 연륜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찢는 진실한 회개가 결핍된 죽어있는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장난이 아닙니다. 참된 회개 없이 5년 10년 신앙생활하고 나서 마지막에 여러분들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불리워 지는 그 쓰레기 같은 명칭하나와 직장에 취직하거나 학교에 들어 갈 때에 종교란을 기독교라고 매꾸는 것 그리고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마음이 부드러워 지고 어린아이와 같아지기는커녕 복음에 면역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만성이 되어서 그렇게 강퍅해 질대로 강퍅해진 돌 같은 마음, 그리고 교회에 와서는 교회에 가면을 쓰고 세상에 가서는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가면을 쓰고 사는 이중인격이 재고품처럼 남은 것 말고 교회 생활이 여러분들에게 가져다 준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가득 차는 것은 교회의 재앙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끊임없이 번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정직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정직한 진리의 말씀 앞에서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해도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가 나는 진정으로 거듭났는가? 그리고 나는 진정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들의 오시는 그 오심이 나에게 정말 축복이 될 것인가? 하는 그 문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 할 수 없는 번 민을 거룩한 고민을 그에게 안겨주지 아니하면 그 교회는 똑같이 죽은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생활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가난하고 목마름 마음으로 교회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참회하는 심령이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격적으로 그에게 찾아오셔서 자기를 만나 주시는 놀라운 경험들을 잃어 버린 체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배 드리는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거만하고 교만한 사람들로 조국의 교회가 가득 차고 있는지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온 사람들의 자세가 그것이 무엇입니까? 영화를 관람하러 온 것입니까? 민방위 교육을 받으러 온 것입니까? 누가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 온 것입니까? 그들이 대면하고 있는 분 예배 시간에 만나기를 원하는 분이 지존하신 만군의 여호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배나 때우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 찬 예배 속에 하나님을 만나는 참회의 경험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일주일은 자기 멋대로 살아가고 일주일에 한시간 예배는 하나님의 뜻을 쫓아 예배를 드리자니 그 시간이 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로 가득 찬 곳에 무슨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오고 싶어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 없는 여러분들에게 생명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기쁨과 참된 거룩한 환희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갖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님은 기쁨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이 좋은 것들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죄, 그리고 참회가 없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세례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일찍이 웬만한 사람이 성취 할 수 없었던 종교 지도자로서의 놀라운 성공 이였습니다.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것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신도시나 아파트 단지가 아내였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그런 주택가가 아니였습니다. 광야에서 그는 외로운 외침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고 그리고 내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된다는 열렬한 울부짖음이 하나님의 음성이 되었고 그 음성이 세례요한에 의해서 정직하게 전달되었습니다. 수 백년 만에 들린 진실한 하나님의 때묻지 않은 외침은 수많은 사람들을 깨웠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꿈은 사람이 많이 모이거나 교회가 커지는 것이 우리의 꿈이 될 수 없습니다. 작아지는 것은 더더욱 우리의 꿈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가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가치는 언제든지 우리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교회에 들어오기만 하면 정직한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직한 복음을 듣고 참 하나님이 누구 신가 하는 것을 오해 없이 깨달을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으며 그 사랑을 입고 구원받은 내가 누구이고 그러한 십자가의 용서하심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침된 예수의 생명을 가진 우리의 신앙생활이 무엇이고 거짓된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교회에 들어서면 교회에서 만큼은 정직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 이 성공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무리가 세례를 받기 위해서 나아 왔습니다. 세례요한이 도대체 누구 었습니까? 요즘으로 말하면 유학을 하고 온 사람이었습니까? 명문 대학을 나온 사람이었습니까? 주목받는 스승에게서 사사를 받은 사람이었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 손에 유명한 교개 인사의 초청장이 들려 있었습니까? 돈 많은 사람들 교회를 짓기 위해서 땅 대주고 건물 대주는 전주들이 뒤에 도사리고 있었습니까? 그는 동료도 없고 동지도 없고 혈혈단신으로 나타났습니다. 명문가문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제사장의 집안에서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그 당신의 예루살렘에만 일 만팔 천명의 제사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옷은 약대 털옷을 입었고 그리고 그가 먹은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 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문화 생활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습니다. 그의 모습 속에서 무슨 놀라운 권위를 발견할 수 있었겠습니까? 세상 적으로 그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세리들과 군인들과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까지 세례를 받기 위해서 세례요한 앞으로 걸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언제 그렇게 온순해 진적이 있습니까? 이리로 가라면 이리 가고 줄을 서라면 줄을 서고 다소곳이 어린아이와 같이 세례주기를 기다리던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군인들은 강포 했고, 세리들은 간교했고, 종교지도자들은 사악했습니다. 그들은 누구의 말도 쉽게 듣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포악한 사람들이 이제 자신의 포악한 행동을 버리고 요한 앞에서 조용히 세례를 받을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 한없이 줄로 늘어서 있는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성공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이 세례요한은 그렇게 세례 받기 위해서 나아오는 회개한 것처럼 보이는 많은 무리를 향해서 충격적인 말로 그들에게 도전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더러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하고 외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례요한의 설교를 듣고 찔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음이 음직이지 않고서야 그 사람들이 그렇게 호락호락 명문가문의 사람도 아니고, 무슨 정치적인 권세를 가진 사람도 아닌, 그렇다고 유명한 학자도 아닌 이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 세례를 받겠다고 줄을 설 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그들을 향해서 정확하게 그들의 마음을 지적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말했습니다. 겉모습은 회개한 것처럼 보이고 그리고 가장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처럼 보이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내면의 세계는 달라진 것이 조금도 없는 그 현실을 이제 이 세례요한은 지적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이 2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만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안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례요한과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고 그와 같은 하나님의 분명하고 정직한 복음과 판단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겉보기에는 멀쩡한 신앙생활을 5년 10년 20년 계획해 오고 나서 마지막으로 그의 영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속 사람은 얼마나 새로워 졌습니까? 겉 사람이 교회생활에 익숙해지고 교회의 에티켓에 밝아지는 것만큼 그의 내면의 세계도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은 정결케 하시는 내면의 정화 없이 인생을 살아가고 나면 마지막에 쌓이는 것은 마음속에 쌓아놓은 죄와 하나님의 진노밖에는 남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런 비극적인 삶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우리에게 참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한결같이 치우쳐서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뿐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참 진실입니다.
도대체 오늘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도무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깊은 두려움을 느껴던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무엇인가 우리의 삶은 잘못됐고 우리가 놓여있는 이 자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자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존심을 버리고 세례를 받기 위해서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우리를 포함한 많은 교인들을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바뀌고 있습니까? 여러 분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예수 장이라고 불러주고 심지어는 교회에 미쳤다고 말해주지만 정말 하나님에게 미칠 만큼 그렇게 영혼에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교회에 오래 다니면서 참된 회개를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만성이 되고 복음에 면역이 되는 비정상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복음을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내면의 세계는 조금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그런 상황이 되면서도 그런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진노의 대상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신앙생활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할 것이 정말 있는 삶을 살아가십니까? 하나님 앞에 정말 마음을 바쳐서 기도를 하면서 살아갑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 데로 살게 해달라는 그런 진리에 대한 목마른 결단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까? 교회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애정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런 모든 삶으로부터 멀어져서 그렇게 겉껍질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정말 하나님 때문에 못 떠나고 있는 것입니까? 마치 자기의 내면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만큼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 누구를 향해서도 허락 할 수 없다고 각오를 한 것처럼 그저 하나님은 내가 주일날 찾아가서 헌금 한번 넣어 드리는 것만으로 대단히 만족해 하셔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배부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룩 송아지가 태어났습니다. 송아지가 얼룩소면 엄마소는 얼룩소입니다. 할아버지 소도 얼룩소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 얼룩 송아가지 저절로 변해서 양지 바른 곳에 너무나 오래 묶어 두었기 때문에 누렁소로 변하는 것을 봤습니까? 표범이 색깔이 변하여 오래 되었더니 하얀 양털과 같이 되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자신의 신앙생활과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여러분의 내면의 세계가 잘못 되었다고 깨닫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여러분은 죽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지금 형식적인 신자이면 그렇게 형식적인 신자로서 살다가 형식적인 신자로 죽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확신이 없고 끌러 나오듯이 신앙 생활하는 생활이면 여러분은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어도 여러분들은 그렇게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우리의 이 겉모습에 드러난 세례 받으러 나오는 것과 같은 신앙생활이 정말 우리의 내면 속으로부터 울어난 신앙 생활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나올 때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가 있이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주님을 뵈옵고자 할 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그들의 마음에 진정한 소원이 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있다금 “이렇게 믿으면 안돼는 데 잘 믿는 길이 없을까.. 나도 참 신자가 되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들은 주일날 생각하고 주일 저녁에 들어가서 TV를 켜면 모두 잊혀지는 생각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세례요한이 예수 그리스도 오시는 앞길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부름을 받았을 때 이 세례요한이 예수 오시는 앞길을 사람들의 마음에 예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은 얼마나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지고 세례요한의 사역을 지켜 보셨겠습니까? 내가 얼마후면 내 아들을 이 세상에 드러내게 할텐데 아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받아드리는 사람들에게는 그토록 하나님이 갈망하시는 구원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데 과연 내 백성들이 예수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세례요한의 선포를 듣고 그 세례요한의 말씀 선포 앞에서 마음을 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참된 신앙생활은 우리의 겉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가 두렵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혹은 너무나 오래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주일이면은 교회에 나오고 예배 드리러 걸어나오는 그런 껍데기의 신앙생활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얼마나 정성껏 이들이 줄을 서서 요한에게 세례 받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무엇을 말하든지 거기에 순종하고 복종하고 아멘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이였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 안되어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의 내면의 세계가 변화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뱀을 본능적으로 싫어하지만 뱀을 가만 보면 그 뱀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뱀의 빛깔은 꼭 컬러프린터 해 놓은 것 같지 살아있는 짐승의 겉 표면이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색이 그렇게 예뻐도 사람들이 뱀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이빨에 무서운 독이 있기 때문입니다. 뱀 껍질과 같이 그렇게 그럴듯한 교회생활, 사람들이 보고 우리를 목사라고, 집사라고, 교사라고 부르고 하는 그럴듯한 겉껍질, 확실히 그의 생활은 안 믿는 사람들과 다릅니다. 그런데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삶의 전 영역이 아니라 종교와 관련된 행위의 영역뿐입니다. 교회에 가는 것 빼놓고는 달라진 것이 없고 헌금 하 는것 이외에는 바뀐 것이 없고, 언어가 약간 기독교적이라고 하는 것 이외에는 바뀐 것이 없습니다. 또 세속적인 생각이 그대로 차 있고 가슴속에 있는 것들이 다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내면의 진실한 변화가 없이도 겉모습은 얼마든지 뱀 껍질처럼 이렇게 예뻐질 수 있습니다. 고쳐질 수 있습니다. 바뀌어 집니다.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처음에 와서 언젠가 설교를 하는데 한참 설교를 하는데 “질문이 있습니다.” 그릅니다. 그래서 좀 조용히 하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직 한번도 못 봤습니다. “목사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런 사람을 한번도 못 봤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는 그런 생각이 이러 나도 말씀을 받아 드리지 못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게 만든 것은 내면의 행동이라기 보다는 오래 교회에 다니니까 내가 이렇게 손을 들고 질문이 있습니다. 하면은 저 사람이 나를 바보라고 하겠지 하는 이런 예의가 그 사람들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내면의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겉모습은 얼마든지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그럴 듯하게 바뀌어 세상의 사람들과 나뉘어 질 수 있고 구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지 여러분들이 외면만 바뀌는 것을 원하시지 안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의 내면의 세계가 여러분들의 외면의 세계와 같이 동일한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머리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부터 들어가서 여러분들의 가슴도 변화 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상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사고들이 파괴되고 마지막에는 우리의 영혼 속으로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피묻은 복음의 손길이 내려가서 우리 속에 이전에 사랑하는 것들을 이제는 버리게 만들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만들고 이전에는 세상의 명예를 위해서 살았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그의 사랑에 빚진 자가 되어서 사는 그런 변화된 삶으로 움직일 수 있는 변화된 내면의 세계, 이것이 하나님의 참다운 성도가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얼굴이 검은 흑인이 아무리 세수를 해도 그 얼굴을 희게 할 수 없습니다. 표범이 아무리 비누로 닦아도 그 털 색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내면의 진정한 변화는 우리의 내면의 문을 부수고 들어오시지 아니하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우리의 문을 두드리시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 피묻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감화를 받음으로서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세례 요한을 통해서 말씀하심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례를 받고 말로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런 신앙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자체가 완전히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전에 자랑하고 이전에 좋아하던 것들을 버리고 이제는 새롭게 변화된 사람으로 새로운 것들을 사랑하고 새로운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변화가 없이 단지 하나님의 진노를 모면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기 위해 나아오는 이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진노의 대상 이였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서 좋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마음이 없는 교회생활에 익숙해지는 것만큼 당신의 자녀들을 향해서 슬퍼하시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여러분자신이 진정으로 내면의 세계에 참다운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알고 주님이 바꾸어 주시는 내면의 세계 속에서 우러나온 신앙생활이 겉으로 고백되는 신앙생활과 내면의 신앙생활이 하나된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속 사람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신앙생활을 집어 치워도 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집어치우게 되면 그게 바로 배교입니다. 신앙을 버리는 것입니다. 껍질이라도 남아 있으면 이렇게 라도 가끔 그 껍질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집어 치워버리고 주일날 억지로 라도 교회에 나오지 않고 노래방에 가면 니나노밖에는 배우는 것이 없습니다. 먹고 마시다가 하나님 앞에 인생을 마침 하는 것 이외에 무슨 기대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속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누가 너희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그는 다시 한번 도전했습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의 말씀을 듣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고분고분히 종교 지도자의 명예를 버리고 체면을 버리고 군병으로서, 혹은 세리로서의 모든 사회적인 신분을 버리고 세례요한 앞에 세례를 받기 위해서 겸손하게 나왔던 그 모습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생명 되신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하나된 삶을 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노가 무서워서 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오늘 이렇게 아픈 마음을 가지고 진노하십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여러분들을 징계하시고 슬퍼하시고 마음 아파하시고 가끔 여러분들을 때려 주시는 한 여러분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버린 자식은 아무도 돌보지 않습니다. 로마서 1장을 보면 정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무엇인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정욕과 자기의 욕심대로 살도록 하나님이 방치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왜 이미 그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로 예정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백성들은 주님이 아끼는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다양한 감정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하나님이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또는 내거 너를 용서하노라, 또는 나는 너의 길의 징계하노라. 이렇게 무서운 하나님의 음성도 들려옵니다. 이것은 모두 바뀌어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관심을 갖고 계신가하는 반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나아 오면서도 자기의 내면의 세계는 진정으로 고침 받기를 거절하는 이 모습을 보면서 세례요한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바꿔 말하면 그렇게 자기의 내면의 세계는 고치지 않고 겉 생활만 하나님 믿는 사람답게 세례를 받아보려고 하는 이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들의 내면의 세계가 진정으로 변화되는 것 이였습니다. 그들의 속 사람이 참 변화를 경험하고 새 사람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 이였습니까? 그렇게 새 사람이 되고 나면 하나님이 얻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내면의 세계가 진정으로 변화될 때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십니다. 주님이 원하셨던 것은 그렇게 참된 내면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된 생명을 누리는 신앙생활, 그래서 마음속에서 우려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람으로 삶을 표현하고 삶을 표현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하신 분이 신지를 느끼는 그런 합일된 신앙 생활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진정한 참회로 말미암는 내면의 변화를 통해서 가능해 집니다.
자 보십시오. 우리가 내적으로 진정으로 변화되면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에 말할 수 없는 커다란 힘을 공급해 줍니다. 주님을 섬기지 않는 시간보다 주님을 섬길 때 우리는 힘이 납니다. 하늘의 신령한 기쁨이 하늘의 참다운 은혜가 우리에게 커다란 활력소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면의 진정한 변화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는 예배 장소는 말은 안 하지만 온통 소원이 속히 끝나는 것일 것입니다. 내면으로 변화되지 않은 사람의 고백은 그 사람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내면의 참다운 회개를 경험하지 못해서 하나님과의 생명이 말라버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는 그 일이 그의 영혼을 더욱 곤 고하고 힘들게 만들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가 진정으로 내면의 세계가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수없이 들었지만 귀만 반들반들해지고 십자가의 복음을 수없이 보았지만 눈꺼풀만 반들반들 해지고 도무지 감각이상의 것을 뛰어넘지 못하는 영혼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이 만성이 된 신앙생활 속에서 생명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고틍의 마음이 오늘 이 분노하는 세례요한의 심정 속에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주 예수 대문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잡가 두니 못 들어오시네
나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 굳게 닫아두니 한없는 내 죄라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었고 변화 될 수도 없었고 고쳐 질 수 없던 그 여러분들의 깊은 내면의 세계가 그 변화되는 참된 비결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손에 있습니다. 그 피묻은 손이 여러분들의 내면의 세계를 만지고 지나가시면 모두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나아온다고 고백하는 신앙의 행위가 주님의 마음의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에 큰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마음에 커다란 즐거움이 되도록 여러분들의 겉으로 드러난 신앙생활에 어울리는 그런 속 사람의 진정한 변화됨을 하나님은 목말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 없이는 우리는 결코 살았다고 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무거운 심령을 안고 예배당에 나왔다가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영혼들을 바라보십니다. 목회자의 죄 많은 인간의 마음이 무거운 마음으로 교회에 나왔다가 그 무거움을 그대로 안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 마음이 아프다면 여러분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주님의 자녀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면의 세계를 진정으로 풀어헤치고 그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참으로 변화되기만 하면 하나님이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되시고 또한 주님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것처럼 주님 앞에서 우리도 말할 수 없는 즐거움에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부르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제 사순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절기에 한복판을 지나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우리의 영혼들에 대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까?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모두 찢어서 우리를 위해서 떡으로 주시고 자기의 피를 모두 쏟아서 우리에게 음료로 주신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그럴듯한 예수쟁이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 주신 것은 몸만이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그분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바쳐졌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바쳐진 그것은 남김없이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오. 그 십자가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였는지, 그 십자가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를 위해 남김없이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남기신 것이 없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바치셨습니다. 우리를 그럴듯한 그리스도인 위선적인 신자 만들려고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찢으시고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장난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우리의 삶도 농담일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오늘도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이 벅찬 십자가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계시겠습니까? 가슴팍을 찢어 갈비뼈를 훑어 마음에 있는 그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하시는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실 것입니다. 죄와 회개 할 줄 모르는 내면의 참다운 반응이 없는 무디어진 신앙생활이 쌓이면 쌓일수록 하나님의 마음에는 안타까움이 더해가고 돌이키지 않는 신앙생활이 계속 될 수록 하나님의 진노의 불은 뜨거워만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같은 하나님의 진노에 하나님의 선포를 보면서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그렇게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끓어오르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면서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참다운 신앙생활을 향해 가지셨던 그 열망이 얼마나 뜨거운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가 정직한 신자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제발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하십시오.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주님은 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제게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정직하게 말하십시오. 생명이 없는 대도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기도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면서 건강한 척 그렇게 위선을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그럴듯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람들에게 비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여러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그런 진실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변화를 주셔서 생명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 생명이 심겨지고 하나님이 누구 신지 모르는 무지한 마음에 진리의 횃불을 밝히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얼마나 오래 참으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얼마나 온유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견디셨습니까? 여러분들이 참된 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내면의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알고 그 십자가의 사랑에 녹아지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때로는 매를 드셨습니다. 때로는 여러분들의 인생에 권고하고 여러분 시련과 환난의 비바람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놀랍게 강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약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강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환난을 뚫었습니다. 고난을 이겼습니다. 어려움과 시련을 견디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것도 여러분들의 힘으로이기고 견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교차하는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진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에 불붙고 있어서 차마 내 백성은 어찌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한 인격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세례요한의 이 선포는 신경질적인 선포가 아닙니다. 단순히 겁을 주고 협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쓰레기 같은 자식들이라고 외치는 모욕적인 선포가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이 인격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졌고 하나님의 마음은 죄에 대한 불붙는 진노와 그렇게 변화되지 않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들을 향한 주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진노의 상태로 어우러져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이 아닙니까? 참된 영성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을 알고 주님의 그 눈빛을 읽는 것이야말로 참된 영성의 핵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주님 데로 나는 나 데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원하시는 데로하고 싶은 데로 이런 신앙 생활을 얼마나 오래 하면서 허위와 위선이 가득 찬 가짜 그리스도인의 행세를 하고 나여야 하고 다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건지신 것은 이런 위선자나 이중 인격자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 어두운 세상에 십자가의 참 생명과 사랑이 없는 이 마르고 고통 하는 시대에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빛 앞에 살아가는 것밖에는 아무 소원이 없는 것을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서 고백시키시려고 하나님이 어두운 세상에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여러분들을 불러서 주님의 사랑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패역을 고치시고 연약한 곳에서 여러분들을 일으키셔서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다. 주님과의 관계 참다운 내면의 진정한 변화를 외면 한체 살아간 참다운 하나님의 요구를 거절하고 우리의 마음이 원하는 데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쁨을 누렸습니까? 얼마나 많은 소유를 얻게 되었고 신앙을 팔아먹은 대가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치부하게 되었습니까? 남는 것은 모두 지푸라기와 같은 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손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의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사면을 두루 살피시면서 누군가 이렇게 예수의 생명에 목마른 사람, 변화되지 않는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진정한 변화가 찾아와서 하나님이 그토록 불붙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생명의 자리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오늘도 찾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에 들어 오게된 이후로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잘난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세례요한과 같이 훌륭한 문벌의 사람도 아니고 혹은 많은 훌륭한 수많은 사람들의 칭송과 추앙을 받을만한 그런 지위를 누린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래도 유일한 자랑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같이 쓸모 없는 인생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뜨겁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우리와 같이 흉악한 죄인들도 하나님 앞에 주님을 믿으면 소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도구가 되게 하신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주님은 우리들의 속 사람이 정말 새롭게 변화되어서 참 신자가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불붙는 마음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하나님의 마음을 불붙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불붙어서 그 불붙는 마음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참 신자가 되도록 안타깝게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 이 말씀 앞에서 무엇을 결단해야 합니까. 언제까지 우리들이 옛 생활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그 손길을 거절하면서 그렇게 곤고하고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삶을 살아서 세상에서는 맛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 하나님 앞에서는 빛을 잃어버린 등불이 되겠습니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삶은 그런 삶 일수 없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이러한 생명의 변화를 여러분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어린아이와 같이 진실하게 참회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참회하고 진실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숙명처럼 끌어안고 살아왔던 일평생에 인생의 고통이 되었던 이 무거운 내면의 세계를 하나님이 바꾸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고, 그리스도의 권능인 것입니다.
2. 형식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 나는 길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3:8)
지난 시간에 우리는 거짓된 신앙생활이 왜 생기게 되고 그리고 그 위선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생활이 하나님께 얼마나 커다란 고통을 주는가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명제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만일 하나님 앞에 진실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속으로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5년 10년 혹은 20년씩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들의 양심이 증거하고 우리가 증거하고 세상 사람들이 증거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교회에 나와서 그럴듯한 예배를 드리고 남들이 보기에 예수 믿는 사람 같은 모습을 해서 주일날 발걸음을 교회로 옮기고 헌금을 한다고 해서 그가 참다운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신자는 참 신앙이 그 속에 들어 갈 때 참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 신앙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가 정말 가식적이고 외식적이고 그리고 거짓에 가득찬 신앙생활을 미워하는 마음 없이는 누구도 진실에 도달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죄 많은 사람들이 그 죄로 말미암아 자신의 양심이 억압을 받고 또 죄가 가져다주는 비참한 결과들로 말미암아서 삶이 고통에 에워 쌓일 때 그래서 곤고와 쇠사슬이 그의 인생을 두르고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것과 같은 그런 처량하고 고통스러운 날들이 계속 될 때 그에게는 하나님 밖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진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그의 죄와 허물에 관계없이 받아 주셔서 그들을 주님이 새사람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의 사람,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 자기의 가식되고 위선적인 신앙생활, 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을 하면서 삶은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이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을 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거짓된 신앙을 미워하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도 참된 신앙에 도달 할 수 없습니다. 참된 것을 찾기 위해서는 거짓된 것을 가려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해가 거듭해 갈수록 우리가 그럴듯한 신앙생활 교회에 다니는 이러한 모습 남들이 볼 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별명처럼 쫓아다니는 이런 우리의 표식 이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벗어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가 많아도 진실한 사람들은 용납하십니다. 그래서 진실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참된 것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죄가 있을 찌라도 그들을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하나님께서 그의 진리의 말씀으로 고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펴 볼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만 이 외식과 거짓으로 가득찬 신앙을 버리고 진실한 신자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먼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강조합니다. 먼저 요한은 그렇게 세례 받으러 나오는 많은 무리들, 세례는 원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들의 마음속에 회개한 표징으로 회개한 사람, 그래서 주님이 죄를 씻어주신 표징으로서 주님이 그들에게 세례를 주신 것입니다. 세례는 표고 세례 이면에 있는 진정한 실체가 되는 하나님 앞에 깊은 회개와 참회를 통해서 그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그를 받아들이는 길을 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보증하는 의미에서 세례를 세례요한이 준 것입니다. 실체는 간 곳이 없고 껍질만 덮어쓰기 위해서 나아 오는 이 수많은 이들을 보면서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회개를 얼마나 많이 듣고 있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우리들이 회개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정결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일수록 작은 죄에도 회개하는 회개의 영이 그의 신앙생활을 지배합니다 만은 죄가 가득차고 패역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회개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의롭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회개할 것이 없을 정도로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죄로부터 완전히 멀어질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되는 비결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참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정결하게 회개하고 아버지 앞에 뉘우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 앞에 빚진 것과 같습니다. 돈을 꿔다 쓰면서도 갚으면서 계속 빚을 쓰면 적어도 파산 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전혀 갚지 않고 빚만 지면 나중에는 파산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회개를 잊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최근에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혹은 다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여러분 자신이 정말 죄인이며 그리고 내가 이렇게 오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를 다녀도 참 생명이 내 안에 없는 메마른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바로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고 여러분들이 앉았던 자리를 회개의 눈물, 참회의 눈물로 적셔 본 적이 언제 입니까? 그렇게 회개를 잃어 버리고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분들은 급속하게 형식만을 배우고 위선만을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아집이 깨뜨려지고 자기의 편견과 자기의 죄악이 진정으로 참회될 때 거기서 생명이 쏟아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은 이렇게 자기의 단단한 아집과 거짓과 위선과 거짓말로 가득 찬 우리의 신앙생활을 진정으로 참회할 때 거기에 예수의 생명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회개하고 자신이 깨뜨려진 자 그의 마음 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에 있어서의 최고의 자세는 여러분들이 많이 봉사하거나 많은 돈을 교회에 기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여러분들을 볼 때 반듯한 신앙생활을 한다하고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해주는 것이 참된 신자의 표지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신자의 참된 표징은 종교인이 되는 것이 참된 표지가 아니라 상한 마음, 깨뜨려진 심령,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자신의 죄를 인해서 아파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지나가다가 어디에 크게 부딪쳐서 넘어지는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옆구리나 모서리에 부딪치면 멍이 들고 피가 납니다. 그래서 약을 발라 피를 멈추고 멍이 살아집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피도 그치고 멍도 사라졌는데 여러 달 동안 한 번 부딪쳤던 자리는 누르기만 하면 자지려지게 아픕니다. 그 옆에 부위는 아무리 눌러도 아프지 않지만 그 부위는 살짝만 눌러도 자지러지게 아픕니다.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을 주님이 하나님의 참 진리를 가지고 누르실 때 그 속에 깊이 있는 자신의 죄악이 자극을 받으면서 “아 아프다.” 하나님이 정말 위대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생각만 해도 아프고, 왜? 그런 위대하신 분 앞에 쓰레기와 같은 내 인생이 이렇게 밖에 살아가지 못하는구나, 그런 위대하신 하나님 그분의 자녀로 부름 받은 내가 왜 이렇게 밖에 살아 갈 수 없는가 하는 그런 마음, 주님이 섬기며 살되 왜 나에게는 이렇게 열매가 없을까 좋으신 주님을 우리는 왜 이렇게 밖에 섬길 수가 없을까 하는 것에 대한 아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해도 아픕니다. 하나님의 큰사랑을 생각하면 그런 큰사랑을 받은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크게 살아야 하는데 특별한 사랑을 받고 왜 이렇게 특별하지 못하게 살수밖에 없을까 하면서 거기를 하나님이 누를 때 아파하는 그 심령 그 사람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마음이 가난한 자요, 또 애통하는 자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예배에 나올 때 그런 마음이 살아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감당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나를 어둠 속에서 죄악가운데서 형벌 발을 가운데서 건져주신 그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생각할 때에 아픈 마음,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누르고 양심을 누를 때에 아프고 고통스러운 상한 심령, 이것이 참된 신자의 거룩한 표지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도 여러분에게는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리고 하나님의 마음이 여러분의 심령을 눌러도 여러분들은 자극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말해도 그 사랑에 감동 받지 않고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말해도 겁먹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강해져 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강해져 가는 동안에 내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은 약해져가고 내가 일어나는 동안에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엎어지시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삶을 배우고 패배함으로 말미암아 승리를 배우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참된 사랑의 복음 앞에 자기가 무너지고 패배하는 것을 배우는 그곳에 진정으로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참 좋으신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그 앞에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죄인이요, 쓸데없는 가치 없는 지푸라기와 같고 벌래와 같은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곳에 하나님을 향한 감동이 있고 예수의 사랑에 대한 존귀한 찬송이 있습니다.
오늘날 이 죄악으로 가득 찬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 죄를 물먹든지 마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임에도 불구하고 주일날 교회 오는 것 이외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시가 나지 않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의 생명을 죄와 함께 아울러 소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죄를 버리자니 죄가 가져다주는 즐거움과 사랑이 너무나 크고 옛 생활로부터 떠나가자니 옛 생활을 버리고 난 다음에 어떤 삶이 펼쳐 질 지에 대한 두려움이 그런 생활로부터 나를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으로 생각해 본 것이 내가 좀더 그럴듯한 그리스도인이 되자는 것입니다. 주일을 착실히 지키고, 연보를 잘 하고 십일조를 하고, 또 교회에서 이것저것 직분을 맡아서 봉사를 하고 그런 동안에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삶을 살아가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보상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점점 종교적이 되어가고 마음은 점점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황폐한 죄인들의 가슴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급기야 가슴은 악마의 나라고 겉모습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 인 것처럼 살아가는 위선의 탈을 쓰게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사람들이 오늘 세례요한이 회개하라고 선포했을 때 두려워 떨면서 세리요 죄인이요 또 군인들이요 많은 백성들이 세례를 받게 해 달라고 걸어나오는 이 광경을 보면서 나는 결단코 이 시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의롭고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세례요한에 의해서 욕을 먹고 있는 이 사람들이 사실은 오늘날 평균적인 사람들 보단 훨씬 나은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인간의 의로 본다면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최소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 받지는 못했어도 최소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죄를 짖고 거짓된 생활을 해 나가면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두려움이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을 보십시오. 이제는 두려움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방종을 위한 사랑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냉담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아 시대에 예레미아야 너는 예루살렘 사방을 다니면서 나를 찾는 자가 있는가 한번 살펴보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 시대를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다니는 것 이외에는 우리의 내면적으로나 우리의 삶에 있어서나 믿지 않는 사람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 안에서 자라고 있는 가축들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돼지우리에서 자란 돼지나 교회당 뒤뜰에서 자란 돼지나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회개를 잊어버리고 살아간 이 시대를 보시면서 마음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해서 마음 아파하고 우리의 외식적이고 거짓된 생활을 위해서 마음 아파하지 않는 그곳에는 성령의 아파하심이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 아파하심이 어느 분량까지 가득 차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보내실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사실이고 그리고 또 교회적으로도 사실이고 또 국가적으로 사실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 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상하고 깨뜨려진 마음을 가지고 죄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예민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 이외에는 참 신앙이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화) 한 교수님의 교회에서 장사지내러 가는 동안 일어난 3번의 사고.
이것은 교회적으로도 만찬가지고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적인 삶 속에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구나,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기뻐하시는 구나,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주님께서 붙드시는구나 하는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참된 증거들이 없으면 여러분들의 삶, 교회의 삶 모두는 주님을 슬프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냥 간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두고 보시는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데 무언가 오늘날의 환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십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일로 인해서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죽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깨달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나라 한 가운데에는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교회가운데는 잠들어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런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이런 두려움을 기초로 하고 그런 두려움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게 하는 수단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진정한 회개의 은혜가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상한 마음이 되고 깨뜨려진 심령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사람들도 용서하시고 고쳐 주십니다. 치료하고 그들에게 새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정말 주님 아니면은 살수 없다라고 하는 진실에 도달해서 거짓된 허위와 위선의 껍질을 벗어버릴 수 있게 만드는 참된 회개를 보고 하나님이 진노를 은혜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이 회개의 영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얼마나 오만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하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예수의 생명을 맛 볼 수 없습니다. 샘솟는 거룩한 은혜와 그리고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거룩한 기쁨은 모두 자기를 부인하고 아버지 앞에 참회하는 진실한 회개를 통해서만 획득 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회개한다는 이 말은 희랍어로 ‘매타노이아’입니다. 두 번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 할 때는 다 내가 잘난 것 같고 다 내가 옳은 것 같습니다. 잘된 것은 다 나 때문이고 못된 것은 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나를 불행하게 하는 누구누구 어떤 상황 어떤 여건이 나의 모든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전의 생각하고는 완전히 다른 생각이 우리에게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니야 내가 이렇게 고통 하는 것은 사실은 누구 때문이 아니라 벌받는 것이지, 혹은 이전에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이 이것을 이런 것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구나 라고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 할 때에는 놀랍게 우리의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회개할 때는 우리의 생각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공연히 미워하던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고 원망하고 한을 품고 살던 자신의 삶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십니다. 그것은 회개의 영을 유지하며 살아갈 때 우리들이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이것입니다.
자 회개하지 않는 사이에 우후죽순처럼 자라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죄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한번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과 생생한 교제를 누리면서 그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적은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무나 소수의 사람들 많이 그런 은혜를 누리면서 생활해 나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런 은혜를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우리는 이런 생활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에 있어서 인색하신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인색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참된 회개의 영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을 얼마나 급속하게 죄가 가시덤불과 같이 자라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지고 죄의 풀들은 쏟아나기 시작합니다. 덤불을 이루고 울창하게 우거지는 동안에 열매를 맺는 참된 신앙의 곡식들은 사라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실로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정확하게 자기 자신의 삶을 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그리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 사이에 차이가 얼마나 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고 그것 때문에 얼마나 우리에게 죄가 쌓여가고 있는가에 눈을 떠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생명을 넣어주신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주님이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그래서 자기의 몸을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주님과 화목한 그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생명이 있고 세상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이 그 안에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의 독특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제물이나 명예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보다도 더욱 커다란 기쁨의 원천이 여러분들 안에 있습니까? 예수의 생명, 참된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 안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단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 지금 죄와 슬픔이 많은 이 세상에 사랑 있는 우리의 최고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 어떻게 죽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죄와 슬픔으로 가득차고 온갖 연약함에 둘러 쌓여있고 어디를 돌아봐도 너무나 쉽게 거짓된 그리스도인들로서 살아 갈 수 있는 무한한 길들이 열려있는 이 가식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어떻게 이 세상을 진실하고 올바르게 살아서 주님의 구원의 부합하는 삶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최고의 관심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주님께로 부어지는 생명의 은혜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기 위해서는 제일먼저 여러분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점에서 하나님 앞에 잘못되었으며 빚나갔는가를 하나님 앞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그럴듯한 신앙생활 이면에 감추어진 냄새나는 더럽고 부패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픈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죄를 찌르고 여러분들의 마을을 찔러서 여러분들의 양심을 일깨우고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는 고통스러운 설교를 많이 듣고 그 앞에 여러분들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야지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종교적인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을 우리 안에 가진 참되고 진실한 성도가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우리들이 짐승처럼 살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우리들이 이 세상의 사람들처럼 살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구원의 은혜, 택하심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지불하셨던 그 희생의 공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오늘서부터 종료 주일이 시작되고 이번 주에는 고난주간을 지내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몸 버려 생명을 주셨을 때 주님의 마음은 빼어 놓고 단지 주님의 몸만 우리를 위해서 주셨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형식과 겉치레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마음 중심으로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야 할 지를 주님이 남김없이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지 만은 죄의 멍에 안에서 죽음과 벗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어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못 밖아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자기의 몸을 갈갈이 찢어 화목 제물로 자신을 죽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죽게 하심이 아니요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전에 살았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당신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감동을 입고 그 사랑의 놀라운 감화를 받아서 주님의 그 빛 앞에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하시고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한다는 의미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가고 생각해온 모든 것들이, 정확히 말해서 자신의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이 비할 데 없는 사랑 앞에서 얼마나 비참한 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삶이 비록 절대적으로 죄악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니 내가 그 하나님 앞에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 답게 살기 전까지는 자신의 마음에 평안과 자유함이 없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새벽마다 기도할 때 제 마음에 많이 주시는 감동이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인가?”하는 마음입니다. 제가 한 10 여년 전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쯤 외국에 가서 자기의 자랑을 위해 학위나 하나 따와서 어느 신학교에 걸터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대화를 많이 하고 보면 아직까지도 많이 배웠으나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복음을 전하러 다녀보면 소망이 없는 커다란 구렁 통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럴듯한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은데 왜 하나님이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그 어두운 어둠 속에서 건져 주셔서 참된 복음을 맛보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주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감격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나에게 알려 주셨을까? 이런 것을 생각하면 왜 하필이면 나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를 적마다 동시에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그런 놀라운 은혜를 주셨을까 한번도 내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내게 은혜를 주셨을 거라고 결론을 내려 본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 한가지는 오직 그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알고 있는 것 한가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나를 선택하셔서 그런 하나님의 남다른 은혜를 주셔서 그 복음 안에 참 은혜의 자유를 얻게 하셨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한가지 분명하게 아는 것은 있습니다. 특별하게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특별한 삶을 살아야 할텐데 이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크신 은혜와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 삶, 그 사이에 엄청난 격차, 주님이 주신 은혜는 그렇게 큰데 이 큰 은혜를 받은 내가 왜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할까 주님의 마음에 기쁨과 큰 영광을 돌이키기는커녕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는가 하는 것이 나의 마음에 밀려올 때 그곳에는 언제나 아픔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회의 영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십자가에서 여러분들을 위해 못 박히신 것은 주님이 남김없이 자신의 마음과 몸과 온 영혼을 실어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 앞에서 자신을 태워 바치신 것입니다. 그런 특별한 사랑을 우리가 어떤 가치가 있었기에 우리에게 바치셨을까요? 주님이 그런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셔서 우리에게 기대하셨던 바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왜 많은 사람들 가운데 여러분들을 건져서 복음의 빛 가운데로 불러 드리셨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왜 하필이면 여러분이었는지 여러분들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이런 주님의 마음을 우리도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파하시는 그곳에서 우리도 아파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곳에서 우리도 기뻐하고 주님이 안타까워하시는 그 자리에서 우리도 안타까워하는 그런 신앙생활이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거기에는 참회가 있고 회개가 있습니다. 회개의 깊이에 어울리는 참된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의지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뢰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방패가 되고 성산이 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바로 우리가 이렇게 언제나 참회하면서 주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고 나의 짐을 주님께 내어놓고 잘못된 길로 가다가도 회개하며 다시 돌아와서 주님과 함께 손을 붙잡고 걸어가는 신앙생활, 그래서 넘을 수 없는 산도 주님 때문에 넘고 이길 수 없는 고난도 주님 때문에 이겨서 그래서 우리 안에 살아있는 것이 예수 시라는 것을 보여주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을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불러 주셨습니다. 회개 없는 신앙생활이 믿음의 이런 아름다운 특권들을 모두 아사가 버리고 우리의 신앙생활 그 자체를 마치 먼지 나는 신작로 길을 뜨거운 태양 볕 아래 맨발로 걸어가는 것과 같은 건조하고 황량한 신앙생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신앙은 콘크리트 덩이가 가득한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벤츠도 있고, 흐르는 물 아름다운 새 소리가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면 살아 갈 수 있는 거룩한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신앙의 비밀을 소유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들은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은 상하고 깨뜨려진 심령입니다.
여러분들은 특별히 예배와 관련해서 이런 회개의 영을 유지하고 발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직도 아버지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영화상영을 보는 것과 같은 태도, 민방위 교육을 받거나 정신 교육을 받는 것과 같은 태도로 교회에 나오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심령 깊은 곳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겠으며 정결한 마음속에 비취는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받고 그 자신이 참된 변화를 경험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주님의 임재와 존전 앞에서는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신비와 두려움의 감정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회의 영, 회개하게 하는 하나님의 진실한 성령의 역사는 이렇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참 신자가 되기를 원하고 거짓된 껍질을 뒤집어쓴 들을 혐오하고 미워하고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자들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울어 나오는 신자되기를 원합니다. “참 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그러나 어느 길이 참된 신앙의 길인지 내가 알 수 없고 알아도 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예수여 주님이 저를 낳으셨으니 주님이 저를 이 어두움과 죄악 속에서, 이 무감각 속에서 건져 주셔서 생명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저를 도와 주시 옵소서.” 여러분들이 참 신자되기를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보다도 기뻐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참 신자되기를 원합니다. 이때 여러분들은 비로소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할 것이며 정함이 없는 여러분들의 마음은 확장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바람의 나는 겨와 같이 신앙이 뭔지 도대체 참다운 믿음이 무엇인지 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지 그 은혜와 사랑을 받은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 아무 것도 모르던 사람들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는 진실한 소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런 생명의 놀라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오늘 요한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나무가 심겨졌습니다. 잘 심겨졌는지 안 심겨졌는지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그러면 됐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 이유, 그래서 마치 참된 회개와 열매가 분리되는 것과 같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회개라고 하는 것은 순간에라도 가능하지만 삶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여기에는 감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 인격적인 위탁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소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진실한 믿음이 거기에 뒤따라 와야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는데는 눈물이 필요하지만 회개한 후 삶을 살아가는 대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가 정말 예수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고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무엇으로 확인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삶입니다. 예수 믿고 여러분들이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여전히 탈세하고 사기 치고 거짓말하고 이런 방식으로 여러분들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회개의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그 뒤편에서 세례 요한은 어떻게 해야하냐고 하면서 걸어나오는 세리와 군인들에게 단순하게 답합니다. “너희는 이제 정한 세금이외에는 더 많이 받지 마라.” 당시에는 세금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향해서 유대인들 중에서 세금 장이를 꼽아서 이 동네는 어마, 라고 정해 놓고 그 이상 받아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너희의 삶이 바로 회개하지 않은 삶 하나님과 관계가 없이 살아가는 삶이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일반적으로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그러면 안된 다는 것입니다. 또 군인들이 포악하고 강포한 것은 그 당시에 흔히 있는 일 있었습니다. 온순한 군인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너희는 그렇게 사람들을 겁주고 포악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친절하고 강한 군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이러한 세상의 풍조와 불의 여기에 여러분들이 편승하여 함께 따라가는 신앙생활이 되어서는 이 세상에서는 환영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그 대가로 여러분들은 생명을 양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서 애쓰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서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신자는 노력하지 않아도 많이 생겨나지만 참된 신자는 끊임없이 세상을 본받지 않으려고 하는 부단한 거룩한 투쟁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들을 열매 맺는 백성으로 삼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들을 이 세상에 남겨 두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맺힌 열매를 보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시려고 주님이 이 세상에 은혜 받은 사람들로서 남겨 두신 것입니다. 맺히는 것이 포악과 강포와 탐욕과 정용의 열매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을 향해서 우리가 참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열매가 우리의 삶 속에 전혀 맺히고 있지 않다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은 이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 그것이 이들에게는 없었습니다.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있었고 그 심판을 모면해 보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지녀야할 그런 거룩한 삶의 표증들이 없었던 것입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으면 안돼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요한은 말했습니다. 너희가 속으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이렇게 생각하지 말라 무슨 뜻입니까? 당시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인 자만심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긍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이방인들은 단지 지옥을 위한 땔감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었습니다. 곧 오넬리오와 같이 매우 경건하고 착한 이방인들은 아마 천국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발을 닦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그릇된 자부심에 대해서 오늘이 요한은 쐐기를 박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보고 하는 말이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요즘으로 말하자면 “너희가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너희가 구원 얻었으니 이제 천국은 따놓은 당산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예수님은 나만 사랑하신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우리의 죄는 모두 용서 받았다고 생각하는 건 좋은데 주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다고 생각하는 것도 좋은데 그렇기 때문에 내가 더욱 거룩하게 살고 그 사랑에 더욱 보답하는 삶을 사고 그 사랑을 더욱더 그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다른 삶을 살아서 주님이 내 인생을 보실 때 열매 맺은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어떻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하는 것이 하나님도 우리를 어쩌지 못할 꺼야 라는 사고 방식이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 하는 생각이 “내가 개판치며 살아도 나는 구원받을 꺼야”와 같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똑같은 것입니다.
헛된 자만심, 반석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기초하지 않는 헛된 자만심들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참된 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확신과 또 하는 떨림 사이에 긴장을 유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놀라운 사랑을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셔서 나 같은 죄인을 주님이 살려 주셨어, 주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내게 주신 이 구원을 걷어 가시지 않으실 거야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 주님을 위해서 살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 주님이 나에게 놀라운 구원을 주시고 나에게 이렇게 놀라운 영생을 주셨는데 내가 살아가는 삶이 영생주신 주님, 날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인생이 어쩌나 하는 확신과 떨림 사이에 긴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자신의 마음을 감찰하고 자신의 삶을 분투하고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자신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수많은 의지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점검하고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는 그런 신앙생활을 우리들이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헛된 자만심을 버리십시오. 10년 예수 믿은 것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 동안 배운 것은 요령밖에 없지 않습니까? 20년 5년 교회에서 높은 직분에 올라간 것도 자랑하지 마십시오. 제가 보기에는 교회 섬기는 요령밖에는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이 한국 교회에 너무나 많습니다. 오히려 처음 교회에 올 때에는 순결하던 사람들이 교회에 오래 다니면서 때묻은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지 않습니까? 아버지 앞에 나올 때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에 감격하던 어린아이와 같이 깨어지고 상한 그 신앙의 본질을 잊어버리는 대신에 기껏 배운 것은 교회에서 거드름 떨고 사람들에게 높이 여김을 받는 것들을 우리들이 배워 오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고 당신과의 생명이 있는 교제 속으로 들어오기를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헛된 자만심들을 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신앙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이 인정해 주시는 삶을 살까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까, 하는 이러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은 대단한 것이지만 이것을 통해서 요한이 말하고 싶어했던 것은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그래 것은 대단하다. 그러나 잊지 마라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너희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삼으신 것은 너희 자신이 잘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너희가 알아야 한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오늘 요한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믿음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의 의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땅을 준 것은 너희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백성들이 너무나 피폐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이 땅을 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신 그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들의 남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있습니까? 그러면 더 낮아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더욱 무릎을 꿇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거들먹거리며 살도록 내버려두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주님의 특별한 은혜를 남다르게 받은 사람들은 그런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 주님의 그 은혜가 오늘 나로 하여금 나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하고 더 겸비한 삶을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이 시간에도 이렇게 거짓된 외식과 허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 들이 자기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는 이 현실을 보시면서 마음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이런 위선과 허위의 껍질을 헛된 자만심과 그리고 거짓된 그 교만을 내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참된 삶을 살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안에 있는 참 예수의 생명이 무엇이고 주님이 정말 진실한 신자들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들이 깨달아 알고 그것을 우리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면 이 세상에 아무 소망도 없습니다. 철학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키에르케고르가 명성을 드날리던 때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그에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선생님 당신은 이 시대의 최고의 철학자이십니다. 당신은 우리들이 고민하는 문제 보다 훨씬 큰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실 것입니다. 선생님 당신의 인생의 최고의 숙제는 무엇입니까?” 거창한 것을 기대하고 물어보는 자에게 키에르케고르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저의 평생의 숙제는 오직 하나입니다. 어떻게 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 철학도 그리고 나의 모든 지식과 경험도 그것을 대답하는데 쓰여져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을 주님이 바라보실 때 그런 참된 신자들이 됐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3. 회심치 않는 자 들에게 주는 경고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눅 3:9)
어디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여러해 전에 어린이 공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옮겨다 심은지 얼마 안돼 보이는 사람 키 만한 어린 복숭아나무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꼭 엄지손톱 만한 예쁜 복숭아 열매들이 달려있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모자를 쓰고 수건을 두른 아주머니들이 공원을 온통 돌아다니면서 그 열매가 맺혀있는 조금한 열매가지들을 다 잘라 버리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지에 맺혀있는 작은 열매들을 전부 손으로 휼터서 따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보기 좋은 복숭아 열매를 땁니까?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이렇게 해야 지만 이 나무가 보호가 됩니다. 자라지도 않은 나무가 열매를 맺느냐고 고생을 하다보면 나무의 힘을 모두 빼앗아가서 결국은 정상적인 발육이 어려워진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무 가지를 잘라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똑같은 칼을 댄다고 하더라도 그런 의도로 나무 가지에 칼을 대고 적당한 때에 열매를 맺지 않은 열매에 칼을 대고 가지를 쳐주는 것은 아직까지도 농부에게 그 나무에 대한 애착이 그리고 기대와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나무가 도저히 열매를 맺을 가망성이 없다고 판단이 되었을 때에는 이제 나무 가지에 닿았던 칼 대신에 뿌리 위에 도끼가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이 뿌리는 주인의 모든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곳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비가 안와서 물을 줄 때에도 물을 나무 가지 위에 붓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일 먼저 뿌리가 해택을 받습니다. 또 그 나무에 거름을 줄 때에도 주위를 두루 파서 거름을 주고 기름진 비료를 주면 그 해택을 제일 먼저 받는 곳은 뿌리입니다. 아무리 그 나무를 골고루 자라게 하고 싶어도 비료를 갔다가 나무 잎사귀에 바르거나 거름을 꽃 위에 뿌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뿌리가 모든 해택을 받습니다. 또 이제 땅속에 공기를 잘 스며들게 해서 뿌리가 썩지 않도록 해 주기 위해서도 역시 시원하게 되는 그 해택을 뿌리가 받습니다. 도저히 뿌리가 뻗어 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지력을 모두 잃어버리면 기꺼이 좋은 기름진 흙을 사다가 트럭이나 구루마에 실고 와서 땅을 껍질을 벗겨 내고 바꾸어 줄지언정 역시 모든 관심은 뿌리에게 가있습니다. 농부가 그렇게 뿌리에다가 그렇게 정을 쏟고 관심을 쏟고 사랑을 쏟다가 그 사랑은 어디 가버리고 도끼를 들고 그 뿌리를 향해 다가 올 때에는 이제 그 나무에 대한 모든 소망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동안에는 뿌리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뿌리만 튼튼하면 그까지 바람이 불어서 가지 굵은 것 몇 가지 꺾어 져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나무가 뿌려져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톱으로 잘라놓고 몇 해가 지나면 다시 새순이 쏟아 그루터기에서 예전보다 더 싱싱한 나무가 뻗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제 이 나무가 도저히 희망이 없다고 생각될 때 뿌리에 도끼가 놓이게 되면 그 다 음부터는 이제는 이 농부에게 있어서 이 나무의 뿌리는 사랑의 대상 이라기 보다는 애물단지가 되고 제거하지 않으면 안될 미운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배 밭이 많은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그것을 잘 압니다. 배 밭 같은 것을 갈아엎어 버리고 새롭게 다른 건물을 허가 받고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는 도끼가지고도 해결이 되지 않아 하루에 몇십 만원씩 가는 포크레인을 불러서 나무뿌리 하나 하나를 파냅니다. 그러니 농부에게 있어서 그 나무 뿌리는 없으면은 얼마나 좋을 나무 뿌리 이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까 사람들이 요즘으로 말하자면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감동을 받고,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신분도 뿌리치고 세례요한은 사실 무슨 유학을 나오거나 화려한 경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고 아직 그 이름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요단 강변으로 와서 그저 약대 털옷을 걸치고 수염은 더부룩하게 났을 그 사람이 투박하게 외치는 그 하나님의 선포 앞에서 이제 쭉 줄을 서서 겸손한 마음으로 세례를 받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장면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세례요한은 말하는 것입니다. 도끼에 나무 뿌리에 놓였다 이제는 더 이상 장난을 치지 마라 하나님의 진노가 너희 위에 임했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걸어올 때 마음속으로 “세례만 받고 나면 내가 이제 술도 먹고 담배도 피고 옛날 하던 짓 다 할꺼다" 라고 하면서 세례를 받으러 나오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세례를 받으러 나왔을 때는 뭐라고 말하든지 다 순종할 마음도 있었고 어느 정도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그런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정말 너희가 좋은 나무가 되어서 열매가 맺지 않으면 하나님이 너희를 찍어 버리신다고 선포를 한겁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돌배나무에다가 신고를 거기다 실로 묶어서 몇 게 걸어 놓은 다고 해서 그 돌배나무가 참배 나무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근본적인 회심입니다.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넓은 의미로서는 인간이 회개하고 뉘우치는 모든 것을 가르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구원에 이르도록 한번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하나님과 상관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영적으로 죽은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면서 자기의 지난 죄를 깊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으면서 그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 생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근본적으로 우리가 정말 구원에 이르도록 회심한 사람인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구원에 이르도록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인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가던 길 우리의 옛 생활 옛 성향을 떠난 사람들인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다가 보면 우리들이 시험에 들거나 어려움을 만나면은 우리가 잠시 뒤로 물러가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잠시 침체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그런 정도를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는데 힘이 없는 것이냐 아니면 우리의 거듭되는 이 실패하는 신앙생활이 우리가 새 사람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그런 현상이냐 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돌이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뉴욕 집회 때 만난 한 독실한 불교 신자가 하나님을 만나 목회자의 소명을 느꼈 지만 제대로 목회자의 길을 가지 않을 바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다 자네정말 그 길을 가려나 책을 읽고 통회 자복한 이야기.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 형제가 그렇게 주님 만가고 기쁘고 좋지만 자기도 말합니다. 그 동안은 감사를 잃어버리고 기쁨도 없고 그렇게 침체된 신앙생활을 했다 이겁니다. 그러나 그 형제가 침체되었고 아무리 교회에 다닐 맛이 나지 않아도 다시 불교로 돌아 갈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의 삶을 살아가게 만들던 그 악하고 부패한 경향성으로부터 결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별하고 나면 옛날에 죄악 된 경향이 우리에게 영향은 끼칩니다. 그래서 술을 끊었는데도 어쩌나 몇 년이 지났는데도 술이 먹고싶고 그럴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로 돌아 갈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해도 이제는 뒤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 앞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진하고 앞으로 달려나갈 푯대가 없는 사람들은 100% 뒤에 푯대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뒤에 푯대가 있어야 지만 앞에도 푯대가 있습니다.
뒤에 푯대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악된 삶, 나의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삶, 비록 내가 그럴듯하게 교회에 다니고 그럴듯하게 예수 믿는 사람처럼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것이고 내 속 사람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 이었고 내 속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접 부쳐 주신 것과 같은 그런 진정한 신비한 생명의 연합이 없었다는 사실을 깊이 뉘우치고 아버지 앞에 깨닫는 회심이라고 하는 이전의 푯대가 없기 때문에 달려 가야할 푯대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 와서도 마치 우울하고 불행한 사람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성질과 기질과 옛사람은 여전히 세상에 속해있습니다. 속되게 살아 가야지만 신나고 타락해야 지만 기분이 좋고 신이 나는데 예배 시간만큼은 막 살수 없고 예배 시간만큼은 그렇게 행동 할 수 없기 때문에 우울하고 불행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천당에 가면 안됩니다. 천당이 얼마나 재미가 없겠습니까? 술도 없고 담배도 없고, 신나는 일도 없고 쾌락도 없고,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고 예배하고 그러다가 끝나면은 생명수 실과를 따먹고 그 다음에 그 물을 마시고 하는데 그 사람들이 그곳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곳이 천국입니다. 자기 경향성하고 이곳하고 딱 들어 맞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회심의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 난 정말 예수님께 접 붙혀진 사람입니까? 하나님 나는 정말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까?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많은 실패는 은혜 생활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내가 새 사람이 안된 옛 사람 그대로 이기 때문입니까?” 하고 하나님에게 물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회심하지 않고 정말 하나님 앞에 속 사람이 새로워져서 예수께 접 붙혀지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이 주일을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십일조를 하고 헌금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물론 교회야 돈이 들어와 좋지만 그러나 자기의 영혼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해서 교회가 원하는 대로 이런 봉사 저런 봉사를 하고 오늘은 이런 것 하지 말라고 그랬지 저런 것 하지 말라고 그랬지, 고치기도 힘들겠지만 혹 고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천하의 미인이 죽었습니다. 얼굴 맛사지를 깨끗이 하고 그림같이 예쁘게 화장도 했습니다. 아주 예쁜 드레스를 입혀 놓았고 바로 식장에 들어와도 좋을 정도로 예쁘게 만들어 놓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뭐합니까? 코에서는 물이 나오고 귀에서도 물이 나와서 썩은 냄새가 나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살아 있을 때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겠지만 시체 입에서 썩은 물이 줄줄 흐르는데 거기에 누가 입을 맞추고 싶겠습니까? 마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 접 붙혀지는 진정한 회심이 없이 하나님 앞에 무지 무각하게 살아가면서 이것저것 자기를 가꿔 보려고 하는 사람은 마치 그렇게 시체가 구멍에서 썩은 물이 흐르는데 아름다운 화운데이션이나 루즈를 바르면서 왕자와 같은 사람이 입 맞춰 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것을 통해서 감동을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반복되는 실패가 내가 정말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실패인지 아니면 거듭났지만 은혜 생활을 못해서 생겨나는 실패인지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 생활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실패라면 여러분들은 깊이 회개하고 게으른 삶을 청산해야 되는 것입니다.
전도해야 된다고 하면 전도에 관한 책을 읽는 것으로서 때우고 기도를 해야 된다고 하면 기도에 관한 설교를 듣거나 강의를 듣는 것으로 때우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된다 그러면 거룩한 삶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을 받으며 때우고 그렇게 하니까 아름다운 이야기 수없이 들어도 자기는 그 더러운 모습이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졌기 때문에 만약에 거듭된 실패를 계속하고 있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게으름을 타파하고 하나님 앞에 죽을 각오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 은혜생활은 장난 처럼 하고 승리는 장엄하게 맛보려고 하니 그 심보가 누구의 심보인지는 다 알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승리하고 이기는 사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소수인지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환경에 굴복하고 패배에 복종하면서 실패를 운명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 대수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 생활을 회복하지 않고 서는 결코 승리하는 신앙 생활을 해 나갈 수 없습니다. 육신이 원하고 몸이 원하는 데로 살아가다가 마지막에 영은 죽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 생활을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누구라도 죄를 이길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삶을 살아 갈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은혜 생활을 하지 않으면 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에 대해서 배우는 것과 우리가 거룩해 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은혜 생활을 못하면은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마음이 갈급 해서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만약에 내가 회심을 했는데도 계속해서 신앙생활에 실패를 하고 있다 면은 여러분들은 무너진 은혜생활을 점검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죄를 이기고 승리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을 그리스도 예순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회심할 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 생활을 하지 안으니까 우리가 또 죽은 자처럼 옛날 사람처럼 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셨는데도 은혜와 능력은 땅에 다 붙어 놓고 패배를 친구 삶고 실패를 동무 삼아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뭘 하든지 그 사람이 정말 자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은혜를 잊었는데 말이지요. 간단합니다. 열심히 나와서 은혜를 받고 예배에 참석을 잘 해야 합니다.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세월이 많이 흐른다고 예수 믿는 방법이 바뀝니까? 또 무슨 새 방법이 나왔다고 그래도 다 쓸데없는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반짝하다 다 사라지는 유행입니다. 천국 길은 옛길입니다. 옛날에 그 수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그 길입니다. 신앙에 무슨 지름길이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누구는 능력 받아 거저 일어나고 누구는 은혜를 많이 받았으니 힘들이지 않고 잘 하겠지? 다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은혜가 많으면 고난도 많고 고난이 많으면 하나님의 위로도 많습니다. 분량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배에 나와야 된다.’ 그러면 예배에 나와야 합니다. 예배 생활도 나 무너지고 말씀 생활, 기도생활도 다 무너지고 그러면서 어떻게 승리하는 길이 없습니까? 물으면 대답은 간단합니다. “없다” 이렇게 대답하면 됩니다 그런 방법이 있으면 왜 믿음의 선조들이 눈물 흘림을 몇 칠 당하고 행할 길을 행하다가 왜 이렇게 찬송을 했겠습니까? 나는 찾았다 눈물도 없고 신나게 달려가는 그저 누워만 있으면 저절로 안마가 되는 기계처럼 그렇게 거룩해 지는 방법도 있고 승리하는 비결도 있다 나는 그런 프로그램을 찾았다고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천국은 똑똑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 되겠지요.
예배생활이 무너져 보세요. 늘 말씀을 드리지만 3번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교회는 매일 와야 하는 데 할 수 없이 일주일에 4번 밖에 못 오는 것입니다. 집에 가서 교회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는 것이 아니라 교회 와서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시간을 아껴서 우리가 얼마나 잘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영혼이 핍절해 지는 것입니다. 기도생활 해야 되지 않아요. 여러분 인간은 본성을 거스려서 무엇을 하기가 그렇게 힘든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 안 하면서 사는 것은 노력을 안 해도 되지만 기도하는 것은 노력을 해야 됩니다. 기도 안 하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싶어하는 자기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런 자기가 있으면 기도 안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피나는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이러다가 내가 큰일나지 하고 옛날에 하나님 떠나서 죽어라 고생하던 생각을 하고 “지금은 그때보다 낫다 건강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지” 하는 마음을 먹고 정신 차려 살면 하나님이 왜 승리를 안 주시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그 능력을 힘입어서 살아 갈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를 당신에게 접붙혀 주셨는데 그래서 우리에게 생명의 수액을 먹으면서 살 수 있게끔 그렇게 만들어 주셨는데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농부가 가지를 가져다가 접을 붙힐 때 그 가지를 잘라버릴 라면 뭐하러 접을 붙이겠습니까? 접을 붙일 때는 그 가지가 수액을 먹고 아름답게 자라나기 위해서 접을 붙여 놓은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우리의 속 사람이 새로워 졌는데도 우리가 은혜 생활을 하지 못해서 우리가 계속 실패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돌이켜 서서 은혜 생활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아무런 회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예배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깨달은 대로 실천하며 살려 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간직하며 살아 갈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반대로 진짜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는 실패 그리고 무엇인가 이렇게 하나님을 오래 믿어도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말았는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 때는 있는 것 같기도 하다가 없는 때가 더 많은 이런식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거듭나지 못했구나 그리고 내 옛사람의 본성이 새로워 진 것이 아니구나 나의 교회생활 이라고 하는 것은 죽은 시체가 코에서 국물이 줄줄 나오는데 그곳에다 여태까지 분을 바른 격이구나 이것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쳐서 주님, 나를 새 사람을 만들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의 본성이 완전히 새로워져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좋은 나무가 되어야지 좋은 열매가 맺히지 나무 자체가 잘못되고 나쁜 나무인데 그 나무에 어떻게 좋은 열매가 맺을 수 있겠는지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우리들이 진정으로 회심하지 못했다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두려운 심판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예수를 믿을 듯 말 듯 믿을 듯 말 듯 그러다 죽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정한 회심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막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서 1년 52주 예배를 드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끝날 시간을 기다립니까? 여러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오늘도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 내 본분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내게 주신 본분이 있는데 그렇게 못 살았으면 참회하는 마음이 들어야 할 것이고 살았으면 감사하는 마음이 들고 졌으면 가슴아픈 고통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겼으면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나오면서도 도대체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모르면 당신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생각하고 회심하지 않는 것은 단지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 아니라 회심하지 않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대들고 하나님을 훼방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우리를 위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그 은혜와 사랑을 감사해도 시원치 않은데 그런 구원의 복음을 늘 들으면서도 그것을 그저 지나가는 소리로만 듣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떻고 내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내가 이렇게 계속 예수를 믿으면 이 모습을 보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실까? 내가 이런 식으로 계속 믿으면 마지막으로 내 영혼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런 진지한 생각 없이 교회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훼방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놀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장난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에 미래가 달려있고 우리의 인생 전체가 걸려 있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으면 우리의 인생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정확하게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분 바르고 입술을 바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죽었던 우리가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 앞에 내 속 사람이 새로와 지고 그리스도 예수께 온전히 접붙인바 되어서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이 이야기지요. 그런 회심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떠한 잘못을 하다가 회개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회심하고 또 은혜가 떨어진 사람들은 회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을 정말 제대로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끔 식당이나 호텔, 혹은 실내 장식을 만들어 놓은 그런 가게를 가보면 장식용으로 구부러진 유리 거울을 만들어 놓은 곳이 있습니다. 어떤 거울 앞에 서면 길어 보이기도 하고 어떤 거울 앞에 서면 뚱보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거울 앞에서는 사람의 몸집은 뚱뚱한데 얼굴은 손톱 만해 보이는 거울도 본적이 있습니다. 거울을 구부러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의 정확한 실체를 그 거울을 통해 파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거울은 우리의 옷차림을 매 만지거나 화장을 하라고 만들어 놓은 거울이 아니라 그냥 폼으로 만들어 놓은 거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거울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파문이 일어나는 호수와 같아서 거기에 호수 주위 있는 나무와 숲이 정확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렇게 모릅니다. 곳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그런 위태한 상황에 있으면서도 평안하다고 노래 부르고 웃고 마실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불쾌해 하고 있는데도 나는 부유하다, 부유하여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 신앙적으로는 다 거덜나서 이제는 차압 잡히기 직전인데도 “아, 나 같은 사람 없지.” 이러는 것이 인간 이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철저하고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아, 난 정말 괜찮아 정말 쓸만해” 이러는 동안에는 그 사람 쓸만하다고 줄러줄 존재는 마귀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해 주시는 그런 변화의 은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깨닫게 하심, 이런 것이 없이는 어떤 식으로도 하나님 앞에 새로워 질 수 없음을 하나님 앞에서 깊게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결국은 자기의 모습을 정확히 보아서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해 주시고 나를 변 화시켜 주셔야 한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식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자기 자신이 자기를 볼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모두 잃어 버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다른 도움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 다른 도움은 하나님의 말씀의 도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는 사람 앞에 나아온 많은 사람들도 사실은 자신이 이렇게 세례나 받으려고 하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세례만 받아 봐라 나는 이제 끝이다. 세례만 받고 나면 내가 옛날에 하던 짓 다시 다 해야지.” 그러진 않았을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무언가 진지함이 있고 하나님이 진노가 두렵다 새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누구나 다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그런 진지한 태도로 나와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했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진노의 설교를 들었을 때 이들은 깊은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옛날에 새리 노릇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 괴롭히고 힘없는 사람들을 고통을 준 것, 생각났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간단하게 말합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다.”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봐야 하나님의 진노는 뿌리 위에 있다. 이제는 너희들과의 관계는 끝장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하면 너희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 올 때에 그런 식으로 나아 와서는 안 된다 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크고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변화되어서 새 사람이 되지 않으면 결국은 내가 무엇을 하든지 심지어는 이렇게 겸손하게 세례를 받으러 나아 와도 하나님이 만족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중심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 붙인 바 되어서 전에는 여러분들이 야망과 욕망과 육체의 욕심과 자기의 힘대로 자기의 의지대로 자기 멋대로 살아갔지만 그러나 이제 변화된 다음에는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살아가고 여러분들에게 접 붙인 바 된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고 여러분들을 인도하시는 그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되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을 만드신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시체가 아닙니다. 시체가 무엇을 바르느냐가 무슨 상관이 있는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오늘 성경이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기 위해서는 자기를 믿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어도 괜찮아, 뭐 그렇게 복잡하냐 그냥 교회 나가면 되는 것이지, 내가 언제 교회 안 나간 적 있냐? 그냥 교회에 나가면 되는 거지.” 천국은 예배 구경하다 온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거듭난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천국은 예배를 구경하다 온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거듭난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러면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살펴보고 그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어떤 모습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는 때에 여러분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이 깊이 회개할 때에는 어떤 때야 하면은 자기의 정확한 모습을 보았을 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런 자극을 주시고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3년 5년 10년 그렇게 신앙생활 하면서 마음이 녹는 것 같이 신앙생활을 한 적은 없지만 놀러가고 싶은 곳도 못 가고 그 좋은 술과 담배도 못하고 나뿐 짓도 될 수 있으면 안하고, 그리고 교회에 그래도 꾸준히 나왔는데 마지막 때에 기껏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 “너는 계속 교회생활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시체 위에 분 바르는 격 밖에 더 되느냐? 너는 너의 코에서 흐르는 네 시체의 국물을 보라.”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 교회생활이 얼마나 억울하냐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믿고 이렇게 걸어가면 이것이 옳은 길인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 가면 이것이 정말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법대로 믿음 생활을 해서 결국 이 길로 걸어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되지 않습니까? 세월이 흘러가도 마음은 돌같이 더 굳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그런 삶을 살면 결국은 오늘 세례 요한으로부터 선포되는 이 음성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깊이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얼굴이 눈에 익는 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구원받고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취 보아서 자신의 실패가 정말 새 사람이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단지 은혜를 잃어 버렸기 때문인지 깊이 생각하면서 거기에 합당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이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속에 있던지 간에 하나님께선 그들을 회심케 하시는 방법을 어두운 영혼에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비춰서 새 사람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원하는 것은 여러분보고 갑자가 교회를 뛰쳐나가거나 교회를 불지르거나 지체들과 대판 싸우게 하는 것을 사단이 시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먹혀들 리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사단은 끊임없이 여러분들을 흐리멍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에 물 타고 술에 술 탄 것 같이 흐리멍덩하게 꿈꾸는 것 같기도 하고 잠자는 것 같기도 하게 만들어서 결국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정확한 이해가 없게 만들어서 판단 할 수 없게끔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안개 속에 휩싸여 신앙생활 하시는 분은 여러분들 가운데도 분명히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묻어 두자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참된 것을 말해서 당신이 서있는 반석이 그리스도냐? 자기 의냐? 당신이 정말 하나님을 믿는 올바른 길로 걸어가고 있냐? 자꾸 이야기를 하고 따지면 뭐가 이렇게 어렵냐? 뭐가 그렇게 어렵냐. 좀 쉽게, 간단하게... 쉬운 길은 넓은 길이고 좁은 길은 어려운 길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놀라운 부흥이 요단 강변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흥의 물결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수많은 가짜를 이 세례요한은 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말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를 위해서 다시 부활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겉만 번드르르한 그래서 열매맺는 것도 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속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진정한 변화요. 이 일이 바로 우리가 새 사람되는 비결이고, 이 일이 바로 우리가 좋은 나무와 같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름다운 열매를 가득 맺히실 때 하나님이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교회 나오고 신앙생활에 겉모습을 가졌으면서도 이렇게 진정으로 회심하지 못하고 겉모습만 그럴듯하고 끊임없이 자기에게 속아서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보시는 것입니다. 마음 아파하시고 그들에게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주시지만 그 기회가 지나가면 하나님의 마음 아픈 것은 진노로 바뀝니다. 그곳에서 보면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으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 사람이 정말 새로워져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워져 우리가 열매 맺는 백성들이 될 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제자가 되리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열린 교회라고 하는 포도원에 심어 놓으신 것은 이제 끊임없이 주님이 우리에게 땅을 파고 밭을 가라서 우리에게 시시 때때로 비료도 주시고 물도 주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너무나 햇볕이 뜨거우면 그늘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지극정성으로 보호하시는 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보시기 위한 소망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열매를 가득 맺으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땅 팔 때만 한 평에 얼마 그렇게 파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가 많이 맺혀 있는 밭, 열매가 많이 맺혀 있는 산, 그것도 한 평에 얼마씩 팝니다. 땅 갚은 오 백원 밖에 안 하는데 열매가 가득한 과일나무가 맺혀있는 것은 한 평에 몇 천원이 갈 수도 있습니다. 결국 땅 값은 나무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포도원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갖다가 여러분을 묘목으로 심어 놓은 때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묘목으로 여러분을 캐다가 심어 놓으셨습니다. 물고 비료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안 주신 적이 있습니까? 안 주셨다고 담대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분이 여기 계십니까? 열매 맺는 백성 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얼마나 공을 드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우리를 옛 삶, 옛 경향성을 돌이켜 회심한 새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시시 때때로 우리를 자극하시고 시시 때때로 우리에게 도전을 주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 하셔서 얼마나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하셨습니까? 옛 삶의 가지를 치시고 그래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얼마나 하나님이 우리를 바꿔 놓으시려고 하셨습니까? 그런데도 1년 2년 3년 4년이 지났는데 여러분들의 신앙의 나무는 어떻게 되가고 있습니까? 드디어 묘목이 뿌리를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건장한 나무가 되어서 줄기 가지가 쭉쭉 뻗어 오르고 이 포도원에 심겨지기 전에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귀한 열매들을 맺어서 하나님이 이 포도원에 심겨진 여러분들을 볼 때 옛날에는 묘목이었는데 지금은 거목처럼 자라는 구나 그렇게 칭찬 할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니면 묘목으로 심길 때 어떻게 자라 보려고 파란 싹을 내보다가 이제는 죽어가기 직전에, 주님이 뽑기 직전에 누렇게 바래가고 비비꼬인 나무가 되어가고 있습니까? 거름을 부어 주니까 그 거름을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 거름 때문에 뿌리가 썩어 들어가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잘못해 주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공을 드리시고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열매 맺는 나무가 될 수 있다면 아들까지도 아깝게 여기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셔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깊이 열린 교회의 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6개월 1년 혹은 2년 3년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깊이 깨닫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이 포도원에 심긴 여러분들의 신앙을 한번 환상 속에서라도 하나님이 한번 보여주시기라도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은혜 생활을 잘해서 아름답게 자라는 사람들은 얼마나 큰 위로를 받겠습니까? “하나님 눈물 골짜기를 걸어가고 시련의 비바람이 열린 교회에 왔다고 머진 것은 아니였지만은 그러나 하나님 이렇게 고난받는 가운데서도 묘목과 같은 나의 신앙이 이렇게 자라고 열매를 맺어서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데 주님이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그 열매를 보고 기뻐하시니 감사합니다.”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얻겠습니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반대로 자신의 모습을 깊이 하나님 앞에 반성해야 합니다. 3년 4년 교회를 나가도 변화가 없고 처음에 묘목이였을 때는 그래도 떡잎이라도 있었는데 그것 마저 다 시들어 가 이제는 비비틀려서 죽기 직전에 그렇게 정성을 드려 물을 주어도 결국 살지 않으려고 죽을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면서 불신앙으로 일관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묘목, 같이 심겨진 묘목은 거목이 되어 가는데 자신은 뗄감으로 쓰기에도 적합하지 않는 힘겹게 생존해 있는 그 모습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면 그 사람은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나는 이것이 반드신 하나님이 계시를 주시고 신령한 은사를 주셔야만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한번 하나님 앞에 일주일만 기도해도 금방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 보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데 감히 그 기도를 하는게 쉽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 사람에게는 모르는 게 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일주일만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내 모습이 어떻습니까? 주님, 주님이 보시기에 내 모습이 괴로우면 그 괴로움 저에게 주십시오.” “하나님 저를 그저 적당히 하시려고 하지 말고 다 벗겨서 보여 주십시오. 그대로 인정하겠습니다.” 간절히 일주일만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안 알려 주실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왜냐하면 주제 파악을 해야지 신앙생활이 되니까 말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그럴듯한 말과 모습을 가지고 얼른다고 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들의 뿌리가 마음으로부터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경외하고 주님과 함께 친해하고 싶어하는 것이 동기가 되어서 거기에서 마음의 뿌리를 박고 우러나오는 애정 어린 신앙생활을 애정 어린 믿음생활을 하나님 앞에 드릴 때 그것이 곳 우리의 믿음 생활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라고 하나님이 늘 우리에게 이런 경고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깊이 깨닫고 이제 이 봄에 부지런히 깨닫고 변화 받아서, 여름에 부지런히 수고해서 가을에 몇 년 동안 못 맺은 열매 정말 아름답게 맺어서 주님이 보시기에도 “야! 이 나무가 몇 년 동안 열매를 못 맺던 그 나무인가” 하고 하나님을 깜짝 놀라게 해들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말씀 안에서 무너지라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거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3:11-14)
언젠가 재개발 지구에서 일어나는 철거 현장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대개 재개발은 판자 집들이 가득 들어선 곳을 밀어 버리고 그 곳에다가 아파트를 세우고 큰길을 내는 그런 작업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재개발에는 잘못된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동내 사는 사람들을 다 내 보내고 집을 짓는 것까지는 좋은 일입니다. 판자 집에서 불이 나면 소방차도 못 들어갑니다. 그런 것을 다 헐고 예쁜 집을 지어서 나누어준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개딱지 같은 하꼬방을 헐어 버리고 그곳에 40평 35평과 같은 커다란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아파트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그 아파트를 짓기 위해서 판자집을 다 허물면서 입주권이라고 하나씩 주며 보상하는데 그 동네가 자신의 동네가 아니라 강북사람이 강남으로 가고 강남 사람이 서울 변두리고 가고 합니다. 자신의 집이 그 곳이니 밥을 먹고살아도 그 곳에서 살아 먹고 가게를 해도 그 곳에서 할텐데, 구루마를 끌고 구두를 닦아도 그 곳에서 할텐데 이 동네서 살던 사람을 저쪽에 집을 주고 이 동네에는 돈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니까 철거현장은 피 튀기는 전쟁과 똑 같습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잘못된 것 같습니다. 다 헐어버리고 큰 아파트를 짓지 말고 작게 열평 정도를 지어서 그래서 그곳에 돈을 조금만 내고 들어 갈 수 있게 해주면 자기네 집을 허물어도 그렇게 피 튀기게 싸우진 않을 텐데 옛날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헐라고 해도 헐지 않습니다. 계속 독촉장이 날아오면 도저히 못 버티면 한사람 두 사람씩 나아갑니다. 끝까지 버티고 있으면 결국은 철거반이 와서 불도저로 미는데 그 철거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공무원 중에 철거반 소속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돌아다니며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돈을 주고 고용하는 것이니까 그 사람들은 살벌하지요. 트랙터를 밀고 그냥 집으로 들이 닥치지요. 할머니 한 분이 버티고 서서 이놈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 집은 못 민다. 철거반이 생각하기에 이런 사람들이 골치 아픈 사람들일 것입니다.
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저렇게 자기의 집에 집착을 할까? 물론 자신의 집이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차피 아파트 입주권이 나왔으니까 그 딱지라도 팔면 그 돈 가지면 사실 아무리 후진 집에 가도 그 집보다는 나은 집에 가서 전세라도 살고 안되면 월세라도 살수 있을 텐데 그 집이 그렇게 생명 주고 바꿀 집이 되겠는가? 뭐 아파트 한 채라든지 맨션이라도 생명을 주고 바꿀 정도가 아닌데 저런 움막집을 생명을 주고 바꿀 정도가 되겠는가 그런데 생명을 내 놓고 지킨다 이것입니다. 그 집에 살지 않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은 집이 얼마 짜리이냐, 그것도 집이냐, 그곳에 살 바에야 차라리 양로원에 가는 게 낫지. 이것은 그 집에 살지 않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지 그곳에서 사는 그 할머니는 그곳에서 손주들을 데리고 아들 며느리 단칸방에서 복닥거리고 살았지만 그러나 여기서 산 것이 한 두 번 산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살아왔고 땅거미가 지고 나면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 하여도 그저 그 움막으로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안식이었습니다. 그것을 허물겠다고 덤벼드니 이 할머니가 기거불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제가 왜 갑자기 철거하는 이야기를 합니까?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이제 이 요한이 세례 받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들을 홀딱 벗겨 버렸습니다. “너희들이 내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은 것처럼 하고 세례를 받으려 나오지만 그러나 너희들 속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너희들은 정말 회개하고 아버지 앞에서 뉘우치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들이 아니라 너희들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의 심판을 세례라고 하는 종교적인 의식을 통해서 한번 피해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잘 못 되었다. 너희가 헛된 자만심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종교적인 자만심을 버리기 전에는 너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답게 변화될 수가 없다.” 우리는 여기서 세례요한의 선포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까? 폼잡고 허세 부리고 하는 곳에는 진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아무리 많이 하고 교회 생활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생명이 우리 안에 부어지고 우리의 속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접 붙여질 때에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신자가 되는 것이지 아무리 갖다놓고 우리를 그럴듯한 교회 생활로 다듬어주고 크리스천 에티켓을 갖추게 하고 그럴듯한 말을 몇 가지 익히고 한다고 해서 우리가 진정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이런 진정한 내면의 변화가 없는 외면의 가식적인 신앙생활은 마치 죽어있는 시체 얼굴에 화장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화장을 하면 뭐 합니까? 멀리서 보면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지만 그가 누가 있는 곳은 관이고 그리고 잠시 후에는 그 아름답던 얼굴 여기저기에서 시체의 국물이 흐르는데 그 아름다운 화장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참된 내면의 변화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살아 있는 사람들이 갖는 향기로운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죽은 시체가 있는 곳에는 잠시는 아름다워 보여도 향수로도 막을 수 없는 악취가 진동을 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런 것에 쐬기를 박으면서 요한이 선포한 것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 그러니까 이젠 더 이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무, 교회에 나오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사실상은 하나님을 향해 회심하지 못한 무리들에 대해서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더 이상 땅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이젠 그것을 찍어서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백성들이 도망 갈 수 있는데 까지 도망을 갔고 이제 그 길을 도끼를 가지고 이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세례 요한이 막아 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례요한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헛된 외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얻으려는 이런 태도와 분노를 피해 보려는 사행심 어린 태도, 그리고 거짓과 허세, 위선을 가지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악을 감추려하는 이 헛된 태도에 대해서 경종을 울린 것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행하여야 하리이까?” 이것은 지금 요한과 말장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행하여야 하리이까? 이제는 세례도 소용이 없다고 하니 이젠 무엇을 행해야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다메섹을 가는 도중 예수님을 만났던 그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 앞에 놀랍게 회개하던 이스라엘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이 대표적인 회개의 두 기사는 우리에게 같은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선포하기 시작할 때 유대인들이 그 설교를 듣고 가슴에 깊은 찔림을 경험하면서 그들이 고백했던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찌 할꼬.”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을 필요가 있습니까? 그들은 구약을 배웠고,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고 그 종교적인 의식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를 통해 선포되는 분명한 메시지를 듣게 되자 그들은 이제 우리가 어찌 할꼬 라고 탄식하며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물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바로 자기의 아집 아까 예화도 말씀 드린 것과 같은 자기가 늘 거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생활하던 자기의 아집이라는 집이 무너지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렇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사도 바울의 회심도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 가는 길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뵈었을 때에 “주여 내가 무엇을 행하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일평생 사람들에게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메섹으로 가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그들을 징벌하기 위해서 대 제사장의 공문을 청해서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확신에 넘치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회개하게 되면 자기가 확신하던 많은 것들이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신이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복된 회개가 가져다주는 표징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무너짐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이런 진정한 무너짐이 한번쯤 있었습니까? 지금도 여러분들은 이런 무너짐을 경험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의 참 사랑을 입고 이제껏 까지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신앙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결국 그 신앙을 쫒아서 우리들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에 대해서 사랑으로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짝사랑으로 끝나게 한다면 우리와 하나님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그곳에는 반드시 자신의 죄악된 상태를 깊이 회개하고 이전에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몰랐었던 자신의 삶에 대한 총체적인 회개와 그런 삶과 그런 사고 방식으로부터의 탈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 집 없으면 못 살았지만 그러나 알고 보면 5.6만원이면 살 수 있는 룩빙으로 뒤집어엎어서 각목 몇 개 못 박아 얻어 놓은 바람이 불면 날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움막과 같은 집이었습니다. 그 집이 이제까지는 최고인줄 알고 살았지만 그러나 여러분 세상에는 그런 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가 부셔지고 나면 더 아름다운 것들이 창조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일평생 우리의 아집과 우리의 편견 우리 마음 먹은 대로 우리 마음에 내키는 데로 우리 뜻대로 살아가고 싶어하던 그런 자기 중심적인 신앙의 태도를 전혀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 할 수 없을 것이고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에게 부음 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요한은 바로 이런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갖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안에서 절망할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셔서 결례를 받으러 성전으로 올라가실 때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온 마리아를 보면서 아기 예수에 대해서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 아이는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해서 세움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먼저 우리를 패배하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그곳에는 언제나 자기의 세계가 패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아는 그 곳에는 자기 무너짐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너지지 아니하고는 새로운 것들이 건축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서기 위해서는 반석 위에 서지 않은 모든 것들은 모조리 부서지고 박살이 나야 하는 것입니다. 깨뜨려지지 않은 곳에 새로운 것이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합니다.
한번 보십시오. 불이 나고 소방차 하나 들어 설 수 없게 세워진 무질서한 판자집이 언제가 보면 다 없어지고 시원스럽게 길이 뚫리고 좋은 아파트들이 들어섭니다. 물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거기 못 들어온 것은 마음이 아픈 것이지만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시원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 일이 있기 전에 먼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사람살던 집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부서져서 맨땅이 되는 일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새로운 집들이 지어지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움막을 두고 그 움막 위에다는 2충 3층을 올릴 수도 없고 그 곳에다는 벽돌을 쌓을 수도 없습니다. 일단은 모든 것들을 부수어 버리는 것이 가장 커다란 일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린 다음에 아예 땅을 새로 파서 기초부터 새롭게 놓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나님 앞에 주님의 참 사랑과 은혜를 알았으면 이제 변화된 삶을 살아야 되겠는데 변화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속 사람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속 사람이 진정으로 변화되고 새로워지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인생도 결코 새로워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바로 오늘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 라고 하는 이 말은 바로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직설적인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 이 시간에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어린아이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아지지 않고서는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천국은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언제나 순결하고 깨끗하고 고집과 아집이 없이 순전하여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이끌려 가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기 때문에 그분께만 순종할 각오가 되어 있는 마음,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서 쉽게 감동을 받고 하나님을 향해서 단순한 믿음으로 그 아버지와의 관계를 붙들고 살아가는 그런 마음, 어린아이들이 부모가 하룻밤만 자리를 비워도 아이들이 자지러지게 우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없이 살수 없고 하나님 없이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낼 수 없다고 믿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적인 마음,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인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마음 깊이 자신이 이미 신앙생활을 오래 해온 사람들은 자기의 그럴듯하게 해온 신앙생활의 경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지나간 헌신을 자랑하거나 혹은 자기가 쌓아 올린 신앙의 업적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배워온 많은 성경 지식에 대한 자만함 때문에 오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오래 전에 만난 하나님의 추억이나 먹고사는 불쌍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어린아이와 같아지지 않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농노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십니까? 토기장이가 패달을 밟으면 부지런히 돌아가는 그 도구를 가르쳐서 우리는 농노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만드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다랗게 떡 가래처럼 진흙을 말고 그 진흙을 갈아서 토기 모양으로 일단 만든 다음에 농노를 부지런히 돌리고 양손에 물을 묻히면서 이 토기장이는 그야말로 그 두 손을 가지고 토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에 따라서 그 토기가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가 결정됩니다. 물을 흠벅 먹은 그 찰흙도기가 농노 위에 얹혀져 부지런히 돌아가면서 손끝 하나에 놀아나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손가락을 깊이 밀면서 그 농노를 돌리면 반듯하던 토기의 허리가 잘록해 지면서 물병으로 변해 갑니다. 저는 가끔 그 광경을 보면서 정말 신비한 느낌을 받곤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토기장이의 손끝에서 놀아 나는 것 같이 토기장이의 손이 밀면 잘록한 허리가 만들어지고 그리고 잡아당기면 아우가 벌어지는 그런 모습의 다양한 토기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 왜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손에 의해 잘 만들어지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인격과 마주하면서 절망해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곳에서 순종을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망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꺼내서 연못 같은데다 던집니다. 그리고 그런 흙덩어리와 함께 들어온 것들을 새로 쓰기 위해 바지를 벗고 들어가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 형체가 모두 없어질 때까지 밟습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진흙으로 만든 다음 다지 그런 과정을 밟아서 만들아 갑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주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한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은 우리 인생을 향한 가장 아름답고 놀라운 계획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뜨려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신뢰가 없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주님이 너는 이렇게 살라고 말씀하시지만 주님이 제 인생에 대해서 뭘 아십니까? 그래도 제 인생 길은 이제껏 걸어 왔듯이 제 인생에 대해서는 제가 도사입니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도사가 걸어온 길이 왜 그렇습니까? 왜 그런 식의 인생을 계속 되풀이하며 살아가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을 해야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에게는 평안히 있지만 주님 앞에 강퍅하고 자신이 아버지 앞에 깨뜨려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평안히 없고 곤고한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나와서 진정으로 깨뜨려 지고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승복해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그분께 우리의 인생을 맡겨 드리고 헌신된 삶을 사는 사람 이외에는 얼굴에 자유에 평안히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아 있는데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아가 살아 있는데 몸이야 아무리 교회에 나오고 아무리 그럴듯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진정한 자유와 평안히 주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교회 밖보다 우울해 보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열린교회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저쪽 닫힌 교회에 가면은 예배를 드릴 때 사람들이 그렇게 우울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골난 사람 같습니다. 한번만 건드리면 대판 싸울 사람처럼 인상을 쓰고 또 인상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난데 아예 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고 나면 얼굴이 활짝 핍니다. 그렇게 행복해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교회 문밖은 자기의 세상이고 이 교회 안에는 하나님 세상이니까, 자기 뜻대로 살다가 하나님 세상에 들어오니까 우울하고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적성에 맞지 않는 겁니다. 꼼짝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일주일 동안은 내 가 맘대로 휘두르며 살았는데 여기 와서 주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하고 뭐라고 그러시든지 아멘 해라 하니까...... 세상에서는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이 노멘만 연발하며 살았는데 그런 사람이 견딜 수 없어 하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자기가 깨뜨려지고 잘 부수어져서 하나님의 사랑이 늘 마음속에 있고 주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는 그런 은혜가 있고 주님과의 교통이 있고 빈들에서나 직장에서나 화장실에서는 공부하는 도서실에서나 전철에서나 하나님과 늘 예배의 관계가 살아 있으리 만치 그렇게 자기가 깨뜨려지고 부수어졌던 사람들은 교회에 왔을 때 제 세상을 만난 겁니다. 여기가 바로, 이 분위기가 바로 그렇게 세상 속에서 그리워하던 그 분위기니까 예배를 드릴 때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 겁니다. 그럼 나아갈 때는 우울해 보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나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게 생명을 주셔서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을 지키며 살아 갈 수 있는 생명을 내게 주시고 문제가 많은 세상을 내게 주셨으니 참 감사하다는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 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을 우리들이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믿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볼 때 부러워할까요 아니면 안 부러워할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요한의 설교를 들었던 이 사람들은 깊이 자기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물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되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가장 복된 사람은 이렇게 자기가 무너진 사람입니다. 주님은 마음이 이렇게 무너진 사람들을 홀로 보내시는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너지는 것에 가장 마음이 약하신 분이십니다. 마음이 무너지면 죄도 용서해 주시고 허물도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값지고 좋은 것을 주시고 싶어하십니다. 그럴듯한 헌신 그럴듯한 위선 남 보기에 홈 잡는 신앙생활로 하나님 앞에 받아 낼 수 없었던 가장 좋은 선물과 은사와 은혜를 깨뜨려진 심령은 아버지 앞에서 받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위선과 거짓과 허위를 내버리고 진실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두드리시지 도끼를 가지고 갈비뼈를 부수고 들어오시지 안으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인격적으로 말씀하실 때 여러분들이 아버지 앞에 깨뜨려지고 상한 심령이 되는 진정한 변화의 축복은 여러분들이 할 수 있으면 여러분들의 마음을 기울여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거시는 기대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사람이 자식을 낳아도 그 아이에 대해서 거는 기대가 있을 것 아닙니까? 자식에 대한 아무런 꿈이 없이 그저 잘먹고 잘 자라는 것 밖에 없다면 그것은 돼지를 기르는 사람들의 기대이지 자식에게 거는 기대가 아닙니다. 조금 못 먹어도 똑바른 사고와 지식이 박히고 인격이 바로 되어서 그래서 그 녀석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닙니까? 그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진정으로 깨뜨려진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책임을 지시는 분이 십니다. 인간들 중에 못된 인간은 자식을 낳아 놓고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만 하나님은 절대 그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낳은 자녀들은 책임을 지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책임을 지는 것이 싫다고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왜? 책임을 지시니까 주님이 계속 찾아오셔서 인생에 간섭을 하시는 겁니다. 또 뜻을 갖고 계신 겁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잘 믿고 살지 않으면 그건 뭡니까? 동물적인 생활이 아닙니까? 동물이야 우리에게 누워 자고 우리는 아파트에서 누워 잔다는 것의 차이이고 동물은 걸어 다니고 우리는 차를 타고 다니는 차이이지 뭐가 다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를 믿고 여러분들을 자녀로 만들어 놓으셨을 때 여러분들이 깨뜨려지는 심령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거시는 기대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을 해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거시는 기대가 무엇일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실까 생각해 보시고 그럼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대조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두 개를 대조 해보고 나서 여러분들은 비로소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바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깨뜨려진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우리의 불순종의 차이를 아는 일 주님의 기대와 우리의 현실을 아는 일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가난한 신앙의 상태를 깨닫고 대조하는 일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비참한 죄인들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는 종종 우리가 이제껏 까지 살아왔던 삶이 잘못되었고 그리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아버지 앞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 묻는 자기 무너짐의 시간들이 우리들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이고 우리가 신앙생활 해 나가는 것이 아버지 앞에 그 거룩한 주님의 성품에 어울리는 신앙생활인지를 깊이 뉘우치고 자기가 깨뜨려지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뜨려지는 마음은 늘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이고 늘 하나님을 의뢰하며 사는 이런 마음은 반드시 변화된 삶을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무엇을 행하여야 하리이까 이렇게 물으니까 세례요한이 핑핑 돌리지 않고 아주 간단하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무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준다. 옷이 두벌 있지? 헐벗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이 있지? 그러면 굶은 사람과 함께 나누어 먹어라 너는 세리이지? 다른 일보다도 세금을 걷을 때 법적으로 걷도록 되어 있는 세금만을 걷어라. 군인들은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면 늘 강포하여 폭력으로 사람들에게 겁을 주었지 너희는 그러지 말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거짓된 이득을 위해서 백성들을 박해하거나 백성들을 고소하는 그런 권력을 남용해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들을 하지 말고 얼마가 되든지 너희들이 받는 월급으로 족한 줄 알고 살아라” 하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그 당시 일반화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 세례요한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당시와 같이 헐벗고 굶주리던 때에 내일을 위해서 양식을 준비하고 입을 것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부지런해서 물질을 모아 놓은 사람들은 다소 평안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고통받게 되어있는 것은 사회의 생활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그런 법칙들이 이 세례요한이 볼 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군인들의 경우 권력이 있으면 자기의 권력을 사용하고 자기의 권력을 가지고 적당히 자기가 보호를 받고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예는 세리입니다. 당시에는 로마가 세금을 걷을 때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을 통해서 세금을 걷었습니다. 한 동리를 정해놓고 그 동리에서 얼마만큼의 세금을 바쳐라 라고만 명령하지 얼마를 걷어라 라고는 명령하지 않습니다. 얼마를 걷든지 그것은 세리의 자유였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로마에 받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걷어서 나머지는 자신들이 소유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세리는 부자의 대명사였습니다. 월급이 없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라고 쐐기를 박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지기 위해서는 너희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구제를 해야 한다든지 밥을 나눠 먹어야 한다든지 촌지를 받지 말아야 한다든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너희들 중에 이런 부패와 이런 잘못된 것들이 행해지고 그리고 그런 것들이 일반화되어 있지만은 그러나 너희들이 정말 주님을 만나고 너희들의 내면의 세계가 진정으로 변화된 인간들이라면 너희들은 이러한 그릇된 부도덕한 삶을 청산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결론으로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회심한 사람들의 참된 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하는 곳에는 진정한 회개의 표지가 있습니다. 그 표지는 사랑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무너지는 진정한 참회가 있는 그곳에는 그것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곳에서는 사랑이 흐르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단단한 아집의 껍질을 깨뜨리고 나면 그 속에 내용물이 쏟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단단한 아집이 깨뜨려지고 나면 그 속에서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 바치지 않았던 진정한 사랑이 액체가 되어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바치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걷 모양만 가지고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옥합이 깨뜨려질 때 비로써 향기가 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향기를 통해서 세상은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향기를 통해서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예화) 향기를 통해 치료하는 방법 (아로마테라피)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향기를 통해서 치료하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그럴듯하고 화려하고 복잡합니다. 그런데 도무지 아무리 맡아보아도 향기가 나지 않는 것은 자가가 아버지 앞에서 깨뜨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 찬송을 들고 11시 5분에(늦게) 교회에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자기네들하고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똑 같이 사기치고 촌지받고, 온갖 부패를 다 하고 세상이 그런 것이지 그런 마음을 먹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수없이 있어도 세상을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죽이 맞아서 세상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세상을 고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고치게 하셨는데 우리가 고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오히려 더 부패하게 하는 도구로 쓰여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의의 병기로 자신을 드리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죄를 대신해 돌아가셨는데 의의 병기로 자신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불의의 병기로 우리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는 것을 가로막는 도구다 된다는 말입니다. 전쟁 용어로 이것을 표현하자면 우리는 이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고 진정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자기 깨어짐과 무너짐이 있는 그곳에 참된 예수 믿는 사람의 인격과 향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 믿는 사람의 인격과 참다운 향기를 피어내는 그런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반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가 반응하지 못할 때야 많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에 반응하지 않으실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지난번에 필라델피아에 가서 오랜만에 아주 감격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기도를 했는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아시죠” 그렇게 기도했는데 순간적으로 제 마음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 내가 널 알지, 내가 어떻게 널 모르겠느냐” 그러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제 인생의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스쳐갔습니다.
하나님 나를 알고 계시듯
우리도 주를 알리......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면 주님은 반응하시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그런데 하늘에서는 “니 마음대로 해라.” 그런 식으로 음성이 들려 올리 없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래 니가 날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널 더욱 사랑한다.” 깨뜨려진 마음이 될 때에 비로소 이런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이런 교제가 없이는 우리들은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유혹이 많고 어려움이 많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이겨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연약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가 하다가도 부지런히 세상을 향해 줄달음 치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어제 밤에도 누가 늦게 울면서 전화로 연락을 했습니다. “목사님 일년 전에 우리 교회에 집회 오신 것 아시지요?” 너희 교회가 어느 교회이냐고 물었습니다. “00교회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때 그 집회가 다 끝나고 나의 젊음이 모두 하나님께만 바쳐지기 위해서 어떻게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되겠냐고 물었던 자매입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 그 자매가 생각이 났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러면서 자신의 범죄한 이야기를 쭉 털어놓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삶 전체를 하나님께 다 바치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는데도 그런 죄에 빠져서 허우적거립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정답은 무엇이냐 하면 매일 아버지 앞에 깨뜨려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손에 붙잡혀 사는 것 말고는 정답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논에다가 물을 데고 모를 심지 않습니까? 그럼 그 모가 자랍니다. 그 같은 논에다 오래도록 벼를 심어 먹으면 이 땅이 더 이상은 벼에게 줄게 없게 됩니다. 그 곳에다 화학 비료를 넣으면 땅이 더 황폐해 집니다. 그럼 땅이 도저히 곡식을 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시는 줄 아십니까? 그럼 포크레인을 가져와 땅의 한 50cm두께를 거두어 냅니다. 그 까만 흙을 걷어 내어 먼데다 버리고 다른 산에서 흙을 사다가 그 곳에 부습니다. 그렇게 해 놓고 그 곳에다 물을 놓고 다시 이듬해에 그곳에다 벼를 심습니다. 그러면 좋은 벼를 내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뜨려져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우리의 마음은 매우 부드러워져서 무슨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뿌리워 지든지 아름답게 결실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깨뜨려지고 우리의 마음이 녹아지지 않고 남아 있으면 그 마음은 점점 모질고 단단해 지어서 나중에는 콘크리트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뿌리고 그래도 도저히 그의 마음 밭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질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격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신앙생활을 하면서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5년이나 10년 후에도 이 교회를 나오시겠지요. 어느 교회를 가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후의 신앙생활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마르고 또 마르고 비틀어져서 그냥 예배 시간에 한없이 우울하고 고통스러워 보이고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예배 빨리 끝나는 것”. 그러면서 고뇌에 찌들은 얼굴을 하고 그렇게 인상을 바가지로 쓰고 앉았다가 성경을 일주일 동안 한번도 들쳐 보지도 않는 것 들고 돌아가는 그 피곤에 지친 그리스도인, 완전히 패배한 그리스도인으로 여러분들이 그렇게 화석화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이제 전에는 우리의 마음이 돌 같았고 아버지 앞에서 진정한 깨뜨려 짐이 무엇인지를 몰랐지만 그러나 주님의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그리고 우리의 돌과 같은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고 길가와 같은 마음이 깊이 파여져 그래서 기경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져서 이전에는 실패를 숙명처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세우고 생명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변화되어서 하나님 앞에 다시금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에 접 붙혀진 자들에게 나타나는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그 안에 깃들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는 기름진 땅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우리자신이 근본적으로 고쳐지고 변화되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향기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이 정말 주님 보시기에 슬픈 그런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으로 여러분들을 찾아 오셔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정말 이렇게 깨뜨려 지어서 이제것 까지 신앙생활을 잘못 해온 것들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이제는 내가 어떻게 믿어야지 되겠습니까? 하나님 이제는 제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지만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 되겠습니까? 하나님 나의 영혼의 곤궁함이 어디로부터 말미암았습니까? 내 안에 있는 이 고통스런 아집들을 한번 보여 지시고 내가 그 앞에서 정말 깨뜨려 지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셉 얼라인’ 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인에게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앞에 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리차드 백스터’라는 청교도는 형식의 문제를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이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회심하시든지 멸망해 버리시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없이 사랑하시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런 놀라운 사랑은 우리가 깨뜨려 질 때 더 크고 놀랍게 나타나서 우리의 삶의 질을 거룩하게 만들고 우리가 깨어지기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보도록 만들어 줍니다.”
병아리가 어떻게 알을 깨고 나오는지 아세요? 자기가 깨고 나옵니다. 28일 동안 기다리고 있으면 톡톡 깨고 나옵니다. 알속에서 생명이 있으니까 의식이 있지 않습니까? 그 속에서는 하얀 껍질이 세상의 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쭈그리고 앉아서 사는 것이 자신의 인생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을 깨고 나와 보니까 밖에는 놀라운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벌고 있고 꽃도 있고 큰 사람들도 있고 모의도 주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 속에 갇혀 있는 병아리와 같습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무엇인지 못 알아듣는 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고 사람들이 감격적인 신앙생활을 해도 자신의 신앙 속에 그런 것이 없으니까 신앙생활이 뭐냐 라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주일마다 시계추처럼 성경책을 끼고 교회에 갔다가 축도하기 전에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심을 하고 변화를 받고 보면 그럼 그 곳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고 우리의 건조해 보이고 달걀 속에 쌓여 있었던 것과 같은 그런 세계가 열려 지면서 신앙의 세계가 얼마나 넓고 광대한 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회심한 사람들이 그렇게 성경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계가 너무 넓으니까 아이들이 철들기 시작하면서 하는 말 “엄마 저건 뭐야, 엄마 이건 뭐야” 자꾸 물어 보듯이 계속해서 새로운 세계를 보니까 지적인 호기심이 생겨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회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구원의 기회를 놀랍도록 활용해서 이 땅에 있는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을 돌리는 그런 인생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분들이 이런 변화를 경험하고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