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과 회심
(200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거듭나셨습니까?(요3:3) 2002.9.29 주일오전 1
2. 회심해야 합니다(눅12:19-21) 2002.10.6 주일오전 16
3.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눅16:19-31) 2002.10.13 주일오전 29
4. 회심하든지, 멸망하든지(겔33:11上) 2002.10.20 주일오전 42
5. 옛날 신앙을 자랑치 말라(겔33:12) 2002.10.27 주일오전 57
6. 회심하는 자의 죄를 잊으시는 하나님(겔33:14-16) 2002.11.3 주일오전 68
7. 회심치 않는 자의 변명과 실상(겔33:17-20) 2002.11.10 주일오전 81
8. 회심의 나팔소리가 울리면(겔33:1-5) 2002.11.24 주일오전 92
9. 회심의 나팔소리가 들리지 않으면(겔33:6) 2002.12.1 주일오전 106
10. 회심치 않은 자를 향한 경고(겔33:7-9) 2002.12.15 주일오전 122
1. 거듭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어떤 물건이 구성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인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공장에 가서 그 물건이 만들어지는 생산공정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를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를 보면 인간이 어떤 구성으로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삼라만상들을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는데 인간은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지를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손수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훅! 불어넣으심으로 산 사람이 되게 하셨고 우리는 그렇게 산 사람의 후손이 된 것입니다.
흙은 우리의 육신을 만드는 재료가 되었고 그 육신 속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은 영혼을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것이니 그 영혼과 육체가 만남으로서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 살아있는 사람은 그래서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고 주님이 정해주신 본분을 따라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는 그런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결국은 인간은 ‘육신’이라고 일컫는 겉 사람과 ‘영혼’이라고 일컫는 속 사람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겉 사람은 인간의 생명이 다하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리고 속 사람은 하늘로부터 취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 태어난 사람은 죽음을 보지 않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서 타락하게 되었고 그 죄에 대한 형벌로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쓸어버리셔서 육신도 멸하고 영혼도 멸하여야 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의미가 없어질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없는 이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사람이 없는 이 세상이 하나님께 무슨 기쁨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똑같이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 자신의 성품을 나누어주셔서 인간을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유일한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영이신 하나님과 영혼을 사람 속에 심김 바 된 그 사람이 교제를 나누면서 가족관계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인간이 없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의미가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그들을 즉시 멸하셔야 했지만 영혼은 죽었으나 육신의 생명은 남겨두셔서 계속해서 죽기 전에 자손을 남기고 죽고 또 그 자손들이 죽기 전에 또 다른 자손을 남기고 조상들이 만들어놓은 문명을 누리며 살고 그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만드셔서 후에 그 많은 사람들은 죄 가운데 거저 죽지 아니하고 예수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서 잠시라도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사람구실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런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사람은 태어날 때 겉 사람은 이렇게 살아있지만 속 사람 중에서 일부 인간의 몸을 움직이면서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기능들을 제외한 속 사람은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고 그 영혼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다가 어느 순간에 죽고 그리고 죽은 후에 하나님은 그의 살았던 삶을 따라서 심판하심으로 그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후에 무슨 세계가 있겠느냐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후에는 반드시 세계가 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말하기를 천국과 지옥이 있다 없다 말하기 전에 반드시 그것은 존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 너무나 불공평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더럽고 야비하게 인생을 살면서도 평안하게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를 위해 분투하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하게 살다가 불행하게 죽는 사람도 있고 악하게 살면서 형통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의 도덕적 불공평을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죽은 후에는 반드시 천국과 지옥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철학자들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양심이 죽은 후에는 반드시 사후에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앙 안에서 평안하게 인생을 마치는 사람과 죄 가운데 살다가 죽음이 두려워서 몸부림치며 인생을 하직하는 두 종류의 사람을 모두 보았습니다. 특별히 이 세상을 죄악 가운데 살고 죽음 이후에 영원한 세상을 위해서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살아간 사람들은 그 인생의 말로가 너무 비참합니다. 즉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단숨에 절명을 하면 그럴 기회가 없지만 질병이나 서서히 죽어 가는 어떤 고통 속에서 인생의 종말을 맞이할 때는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그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죽으려고 기를 쓴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죽으려고’ 라는 말은 목적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라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죽기 위해서 기를 쓴다는 것이 아니라 죽을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의 마음에는 두 가지가 나오는데 하나는 죽음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입니다. 만약에 사후의 세계가 없다면 그가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이제껏 살아온 인생도 행복하고 즐거운 날보다는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면서 괴로움을 당한 날들이 훨씬 많은데 사후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죽을 때 사람들이 죽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토록 몸부림을 치면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는 사람에게 있어서 또 하나 나타나는 현상은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막 몸부림을 치면서 씨름할 때, 죽을 때는 이상하게 사람들이 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되는가 하면 힘이 강해집니다. 그게 자기 자신의 양심이 죽은 이후의 세계가 너무 두렵기 때문에 그 생명의 끈을 놓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붙드는 것입니다. 막 씨름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몸부림을 치는 가운데 여기에서 땀이 쏟아 나옵니다. 땀이 나오고 난 다음에는 이 속에 있는 육체의 진액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것은 땀이 아닙니다. 만져보면 번들번들한 기름 같은 게 막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죽는 것입니다.
그런 것 이외에도 영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저는 몇 사람들의 죽음에 관한 증언을 들으면서 죽을 때 극도의 공포 속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잡으려고 온다라고 하는 비명을 지르면서 임종을 한 여러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마지막 죽는 그 순간에 그 사람이 거듭나지 않았지만 영적으로 예민해져서 사후에 자신의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그런 영적인 존재들을 뚜렷하게 느끼면서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며 그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지옥이 없고 사후의 세계가 없다면 저는 복음도 믿지 않겠습니다. 만약에 죽은 이후의 세계가 없다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오늘 현세에서 맛보는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 같은 것도 모두 다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이 사람을 죽도록 정하셨고 죽은 이후에는 사후의 세계가 있어서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며 죽은 사람들에게는 영생의 소망이 있지만 주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영혼의 심판이 예비 되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태어날 때에 모두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이 죽은 상태에 있는 영혼들은 죽은 상태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서 어떤 영혼의 중대한 변화가 뒤따르지 않으면 죽은 상태에서 그들이 행할 수 있는 것은 죄를 지으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신이 인생의 최고인지 알고 그렇게 살아가다가 진노를 쌓아가다가 결국은 마지막에 죽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에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 마음의 뿌리, 더 깊이 들어가면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그것이 뿌리가 되어서 맺히는 열매가 바로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그 삶과 어울리는 마음이 있게 마련이고 그런 마음에 어울리는 영혼의 상태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출생이 첫 번째 출생이고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두 번째 출생인데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우리들이 거듭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니고데모 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또 관원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대한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지체가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자신이 분명하게 종교지도자이고 권세도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이 행하시고 가르치시는 것을 보니까 자기의 동료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기꾼일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하나님이 당신을 보내시지 않으셨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변화시키는 그런 놀라운 일들을 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 비슷한 것을 예수님께 고백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너 참 사람을 잘 봤다 이렇게 말씀하셔야 하는데 예수님은 아무 관심도 없고 뭐라 하셨는가 하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진리인지 희랍어로 아멘 아멘 레고 쏘이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중요한 진리를 예수님이 도입하신 것입니다. 네가 나를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고 말하고 내가 베푸는 이적에 대해서 봉사에 대해서 설교에 대해서 호의를 가지고 그리고 나를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추켜세우지만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네가 아무리 나에 대해서 호감을 가져도 네 영혼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따라서 너는 아무리 종교지도자로 살아도, 성경을 가까이 끼고 살아도 네 영혼은 지옥에 간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사람들은 거듭나야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영혼이 다시 태어나서 살아있는 영혼이 될 때 살아있는 육체와 살아있는 영혼이 만나서 비로소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사람을 맨 처음 빚으실 때에 산 육체에 산 영혼을 집어넣어서 산 사람이 되게 하신 것 같은 사람이 되고 그렇게 거듭남으로서만 그 사람이 비로소 하나님이 맨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사람에게 기대하셨던 삶을 살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시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럼 목사님, 이 세상에는 거듭난 사람은 소수이고 거듭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데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두시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과 그들의 후손으로 하여금 구원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살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두뇌와 지혜를 가지고 문명을 건설하면서 나갑니다. 그런데 이 문명과 문명을 건설해나가는 이것은 반드시 선한 쪽으로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질병을 발견하게 하고 그 병리적인 이치를 파악해서 병든 자를 고칠 수 있는 기회는 주님이 주셨지만 그런 지혜의 발전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지식들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데도 활용을 하고 괴롭히는 데도 활용을 하고 아니면 나쁜 약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면서 재산을 늘려 가는 방법들을 터득하면서 인류의 문명을 어두운 그늘이 사라지지 않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경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간이 거듭난 영혼이 되어야지 만 진정으로 구원 얻은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오늘 이 시간에 예배에 나왔지만 예배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 마음에 아무런 감화도 없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되겠다든지 진리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돌아가겠다든지 아무 의식이 없이 팔짱끼고 눈을 감은 채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식으로 교회를 수없이 다녀도 여러분들은 죽으면 확실히 지옥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 나오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거듭난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또 인간으로 할 도리를 하면서 산다고 생각하고 사회에서도 사람들에게 욕먹지 않는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영혼이 거듭나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의 착하고 도덕적인 생활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분명히 지옥의 불길 속에 던져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윤리적인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이 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을 이 세상에 내버려두신 것은 거듭날 기회를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사람이 교회에 있는 사람이든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든지 이것은 하나님이 네 죽은 영혼을 거듭나라고 주시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예수님 안에서 거듭나기를 깊이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식물들이 줄기 가지가 자라고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마지막에 열매를 맺을 때에는 그런 열매를 맺게 하는 뿌리가 땅속에 있고 또 뿌리가 살아있는 한 반드시 그 열매를 맺게 되듯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거듭나지 않고 죽어 있는 영혼의 상태에서 맺히는 분명한 열매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이 스스로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세 개의 잣대를 여러분들에게 제공하고 싶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증거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갖추고 있으면 그 사람은 교회 출석하고 있든지 혹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든지 목사에게 주례를 받고 결혼을 했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는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거듭나지 않은 영혼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 맺는 삶의 열매가 어떤 것일까요? 우선 첫째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마음도 가슴에 품지 않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살인하고 도둑질하고 간음을 해서 경찰서에 지명수배 되는 것이 죄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죄는 창조주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그리고 온 세상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의 온 인생은 자기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서 선택된 삶인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없이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그 삶이 바로 가장 흉악한 죄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질문이 대두될 것입니다. 거듭났는데도 나는 자기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는데 거듭났다고 하는 판단이 첫째는 틀렸을 가능성이 많고, 두 번째는 진짜 거듭난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자기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은 일시적입니다. 그래서 자기 만족을 위해서 살고 그렇게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삶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런 경향이 지배적입니다. 그런데 거듭난 사람에게는 그런 욕심에 이끌려서 하나님을 잠깐 버리고 자기 만족을 택하기 위해서 죄를 짓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일시적이어서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면 반드시 후회를 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 이것이 탐나서 이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주님을 버렸습니다. 신앙을 배반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내버려두면 언젠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을 버리고 이것을 대신 얻은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는 즐거움은 이제 만족을 자기에게 더 이상 주지 않고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자신의 영혼의 고통을 더 크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회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누구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의 인생의 모든 관심사가 여러분 자신의 만족에 있고 가끔 하나님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가끔 불쌍한 이웃들에 대해서도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저 고기 먹다가 속이 역겨우니까 토장 국이 생각나는 것처럼 가끔 여러분들의 양심에 들려오는 생각이라면 그것이 여러분들을 거듭난 사람이라고 입증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여러분들이 살아간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지배적인 마음의 경향이 여러분 자신을 만족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순종하지 않고 불순종하고 자기 육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심지어는 죄이고 잘못이고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욕망에 이끌려서 자기 만족을 위해서만 살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확실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면서도 어느 순간에 가끔이라도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이런 모든 죄, 하나님 없이 내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에 이제 난 진력이 났습니다. 나는 내가 이제껏 까지 가졌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는 회개조차도 여러분들에게 없다면 여러분들은 거듭나지 않은 것이 아주 분명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영혼은 생명이 없는 영혼입니다.
왜 교회에 나와 계십니까? 교회에 나와있는 극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저는 목회자의 양심으로 거듭남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 여럿 만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왜 여기에 나와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본성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왜 여러분들이 원수인데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리에 나와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삶으로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원수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면서 오늘 가증하게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배 시간에 일어났다 앉았다 합니까? 여러분들의 본성은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는데 그 본성에 대해서는 어떤 변화도 허락하지 않으면서 오늘 여러분은 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서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정말 자기 기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직시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비참한 느낌이 들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여러분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자로서 여러분들에게 촉구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본성 상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다면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거듭나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원수입니다. 여러분들의 본성은 그분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이 예배당에서 뛰쳐나가야 합니다. 그분을 경배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분을 주라고 부르시면 그분은 여러분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주라고 부르느냐, 더럽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지금 참회해야 합니다. 거듭나지 못하고 교회에 드나들면서 지옥의 문 앞에 여러분들의 영혼이 다가가 있다고 생각하고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힘차게 설교하고 있지만 다음주에도 여러분들이 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어떤 교수는 죽었습니다. 학문적으로 유능했고 명망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죽은 그 시신의 양복 주머니에서는 일년 뒤의 강의 스케줄까지 모두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어제 약속하고 수첩에 일정을 적어놓으면서도 내일은 자기가 이 수첩을 펼쳐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물론 다음주에도 저는 설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래에 대한 어떤 확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확률일 뿐입니다. 지난주에도 살아 있었고 미국까지도 갔었는데도 다시 왔습니다. 작년에도 설교했고 그리고 지지난 주에도 설교했기 때문에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다음주에도 설교할 것입니다. 그러나 습관과 같이 익숙해진 이 확률이 어느 순간에 송두리째 날라 가고 우리는 죽음으로 빨려 가는 것입니다. 준비되었습니까? 도대체 그게 뭡니까?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렸는데 죽는 그 순간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이를 갈며 슬피 울며 지옥으로 끌려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교회에 다니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교회에 가지 못했던 사람들, 정직하게 들려주는 복음이 없어서 회개하고 거듭날 기회가 없었던 많은 사람들은 지옥에서 여러분들을 너무나 불쌍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여러분들 중의 어떤 분들은 한달 두 달, 심지어는 다섯 달 여섯 달, 일년 이년을 가족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전 도대체 왜 여러분들이 왜 교회에 나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거듭나지도 않았고 본성 상 일주일동안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처럼 살았는데 그 하나님 앞에 침 뱉을 때는 언제고 주일날 11시면 가증하게도 나와서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까? 자기 기만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거듭난 것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거듭났다면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기도할 때 왜 그렇게 아파하고 웁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는 자기를 위해서 살고 싶고 자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신앙이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 두 사이에 끼어서 괴로워하다가 마지막에 하나님 내가 포기합니다. 내가 아프더라도 주님이 기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신앙의 눈물을 닦고 일어서는 그게 거듭난 사람의 표입니다. 아니 일년 이년 삼 년이 지나가도록 자기 깨어짐이라는 것이 없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가슴아프게 해드렸다는 것 때문에 자기가 고통 할 줄 모르는 돌맹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거듭난 사람이라고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거듭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교회에 와서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봉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무려 20년 전이었습니다. 그때에 제가 알고 있는 직장 동료 가운데 한사람이 낚시에 광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친구 아무 아무개가 있는데 이번에 낚시 동호회에다 백 만원을 기탁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백 만원이면 당시에 제 월급을 6개월 정도 모아야 하는 돈이었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보통 큰돈이 아니었습니다. 갈비탕 한 그릇에 불과 한 3-40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백 만원이라는 돈은 굉장히 상상할 수 없는 큰돈이었습니다. 결혼을 치를 수 있을 정도의 큰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신앙이 없으면 그런 희생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낚시라고 하는 취미 하나로 그 사람은 그렇게 희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이런 저런 일로 봉사한다고 해서 그것이 여러분들이 거듭난 것을 입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한 사기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경계하는 사람이 교회 등록하면서 열심히 일하면서 목사님을 도와드리겠다는 사람들을 제가 경계합니다. 저는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고 목양을 받아서 신자가 될 사람이 필요합니다. 내가 왜 자기 같은 사람을 동지로 쓰겠습니까? 아니 거듭나고 신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많은데 와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교회 와서 말씀 듣고 변화될 생각은 안하고 자기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내가 뭐 좀 도와드리겠습니다 하는 그런 사람들이 정말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여러분들이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니고데모라고 하는 이 사람,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창피할 정도로 복음의 진리를 들으면서 무안을 당했습니다.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습니까? 세속적인 직업을 다 버렸고 종교지도자의 길을 택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유대인의 관원이었으니 종교적인 판단을 내리는 종교와 정치의 권력을 가진 유대인의 대의 기구에 회원이었습니다. 그런 명망 있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가 얼마나 종교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연구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의 일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그가 거듭난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우리 자신의 본성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와서 지배적인 성향의 변화를 가져와서 예전에 자기만 만족하면 된다라고 하는 그런 하나님 없는 삶을 살던 사람을 바꾸어놓아서 그로 하여금 이제는 자기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그렇게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두 번째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또 다른 표적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원수가 된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명백한 증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만큼 세상을 사랑할 수 없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니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면서 살아갈 수 없는 이치와 똑같다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거듭난 사람들도 세상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의 눈이 어두워서 욕심을 부릴 수도 있고 명예욕의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거듭난 사람들은 계속해서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반드시 후회하고 뉘우칩니다.
우리 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학교에 안가고 도망가는 게 참 유행이었습니다. 요즘은 안 그런 것 같은데 제 친구 중 하나는 학교에 간다고 가방을 들고 나와서 공납금을 받아서 인천에 가는 기차를 친구와 탔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지 인천에 가는 기차를 탔는데 돈까지 가지고 갔으니까 그것으로 표를 사서 타면 되는데 하필이면 석탄 차를 몰래 탔습니다. 그래서 인천에 내려서 그 돈으로 옛날에는 실내 축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오락실입니다. 오락하고 술 담배는 안 하니까 과자를 사먹고 실컷 돌아다니면서 놀며 이틀을 그렇게 지냈는데 집안에서 학교에서 발칵 뒤집히고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런 경우에 대부분 일주일이 못 가서 애들이 제 발로 들어옵니다. 얼굴이 새카매서 동네 어구에 어슬렁거리고 다니다가 부모에게 이끌려서 옵니다, 제 친구도 그렇게 해서 부모의 손에 이끌려서 들어왔습니다. 얼굴이 새카맣게 석탄에 절어서 가뜩이나 검은 얼굴에 그것을 발라서 그렇게 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그럴까요? 처음에 공납금을 손에 넣고 집을 뛰쳐나갈 때는 이것 가지고 뭐도 하고 뭐도 하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 흥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마음의 평화가 깨지고 엄마 아빠 말씀 들으면서 착실하게 학교 다니던 일이 생각이 나서 결국은 자기가 그렇게 싫었던 그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출하는 청소년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집이 힘들어서 도망 나가지만 밖은 더 힘들다.
그런 것입니다. 신자도 세상을 잠깐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한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는데 지속적으로 그 세상을 사랑하고 그 세상과 함께 짝하며 살수 있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면서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여러분들이 세상을 그렇게 사랑해서 예배 끝나자마자 교회 마당에 나가서 핸드폰 켜서 주가가 오르고 내리는 그것을 두들기고 앉아있습니까? 아직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 앞에 신실한 신앙을 갖는 것보다 머리나 얼굴에 치장하는 장신구 같은 것들을 더 사랑하고 여러분들의 육신의 안락한 것들을 더 사랑하고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신앙의 정절도 잠시 짓밟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절대로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부부가 결혼을 해서 한 가정을 이루고 가는 사람들이 일평생 마르고 닿도록 불같이 뜨거운 가슴으로 아내와 남편만 사랑합니까? 그런 사람들은 없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간단하게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순간 순간 유혹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정말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단지 유혹일 뿐이지 거기에 굴복해서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돌리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신자도 세상 사랑할 때 있습니다. 여러분 돈이 싫습니까? 얼굴 예뻐지는 게 싫습니까? 지위가 높아지는 게 여러분 짜증나는 것입니까? 여러분도 그것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그게 다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그것들이 좋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최고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버려야지 만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좋은 것을 버리는 대신에 덜 좋은 것을 버립니다. 그게 거듭난 사람의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은 누구를 사랑합니까? 1년 365일 예배를 규칙적으로 드리면서도 그러면서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전혀 감동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 죄악 가운데 살다가 자기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죄 가운데 살지만 하나님은 자기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박으시기까지 자기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단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확실합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한번은 광화문을 나갔는데 차가 안가는 것입니다. 하도 기가 막혀서 차에서 걸어나와서 왜 차가 안가나 하고 보니 신호등이 몇 번 바뀌었는데 차 한대가 안 움직이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운전사가 잠이 들었습니다. 잠이 들었는데 사람들이 와서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니까 경찰이 와서 깨워도 안 일어납니다. 술을 먹고 곤드래가 되어서 자는 것입니다. 내가 똑똑히 봤는데 경찰 둘이 와서 팔짱을 껴서 운전석에서 끌어냈는데도 계속 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없이 경찰이 그 차를 빼고 그 다음에 차가 소통이 되었습니다. 잠이 깊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그 사람을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잠이 들었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스팔트에 눕혀놓으니까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잠이 깊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잠이 깊이 들면 툭툭 쳐도 안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안 일어나는 것은 그것은 잠이 깊이 든 게 아니라 죽은 것입니다.
마음이 굳어지면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해도 덜 감동 받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해도 그 은혜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느낄 수 없다면 그 사람이 거듭난 사람일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회개하고 거듭나게 되면 제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게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옛날에는 저렇게 설교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짜증만 났습니다. 빨리 끝나고 가야지 되는데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오늘 1부 예배 시간에도 한 8명의 사람이 자기는 거듭나고 싶다고 일어났습니다.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거듭나게 되면 아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전에는 도대체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나오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지 했는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깨달아집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세상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너무 헛된 것이고 허무한 것이라고 생각이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오 예수님 내가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 큰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울며 돌아옵니다
주님 손과 발 못 박혔고 머리에 가시관 박히셨네
내 모든 죄와 허물 위해 말없이 피 흘려주셨네
오 예수님 나의 손잡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 구주가 되옵소서
거듭나고 나면 아주 놀랍게 예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아! 지루하기만 예배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왜 전에는 죽었기 때문에 아무리 흔들어도 안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제 거듭나니까 말을 하면 들리고 두들기면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발견하면 눈물이 흐르고 아프면 하나님 앞에 괴롭다고 호소할 수 있는 영혼의 감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만 극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설교가 시작되자마자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사람이 일부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여러분들의 영혼의 거듭남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자리에 지금 계시는데 그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창조하셨고 그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들을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흠 없고 죄 없는 자기의 아들을 여러분들을 위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분을 알지 못한 때에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자기의 몸을 가르시고 피 흘려 죽으셨는데 이 자리가 어느 안전이라고 여러분들이 그런 태도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도 여러분의 영혼이 안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느 날 여러분들은 그렇게 방자하게 예배드린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준엄한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한두 번 예배에 늦을 수 있지만 상습적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무슨 민방위 집회처럼 생각하고 예배에 늦게 나오는 사람들, 그런 일을 여러분들이 6개월씩 1년씩 계속 하고도 여러분들이 정말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거듭났는데 왜 여러분들 마음속에는 거듭난 사람의 가장 확실한 표인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까? 그게 정말 거듭난 것이라고 확신합니까? 사교클럽을 드나들 듯이 그렇게 예배에 참석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눈물을 흘릴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두려워할 줄도 모르는 사람을 성경에서 언제 거듭난 사람이라고 불러주었습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예배 시간에 주여 주여 라고 부르면 주님께서는 네가 어찌해서 나를 주라고 부르느냐 가증하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주시는 것 원하지 않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니고데모가 예수님 최고라고 칭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듣기 싫다. 이런 태도로 예수님께서 대꾸하셨습니다. 네가 아무리 입바르게 칭찬해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네 영혼은 죽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너는 지옥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언제까지 목회자와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린아이처럼 긍휼히 여기고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까?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세 번째로 또 하나의 확실한 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영혼을 고치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이 자기 만족을 위해서 잠시 살수도 있고 세상 사랑에 눈이 멀어서 신앙을 잠시 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너무 괴로워할 때 주님은 그들을 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고치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시고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들을 보내어서 그들의 영혼의 질병을 드러내시고 고치십니다. 그때 거듭난 사람들은 잠시 그것을 거부할 수 있지만 결국 무릎을 꿇고 그렇습니다. 주님 제 영혼은 병들었고 주님을 떠나 있는 동안에 더러워졌습니다. 저를 고쳐주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습니다. 항상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닐 수 있지만 오랫동안 은혜를 못 받다가도 어느 순간에 깊이 하나님의 말씀에 깨달음이 오면 회개하고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이 고치시기 때문에 망가진 것을 고칠 때는 아프니까 하나님 앞에 신음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자기를 아프게 하지만 결국은 자기를 치료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영혼을 하나님이 치료하시고 고치신다 라고 하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분명히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확인이 안되면 제가 명단을 불러드릴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거듭나지 않지 않았습니까? 나는 당신이 정말 깨트려진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일시적인 마음의 굳음이 아니라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마음은 돌 같고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도 거절하고 있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영혼을 고치려고 하나님께서 무수히 노력하고 애를 쓰셨지만 여러분들은 철저하게 거절했습니다. 주님의 끊임없는 음성을 외면했고 의심할 수 없게 명백하게 여러분들에게 상황을 통해서 들려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눈물로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여러분들의 영혼을 고치기 위해서 무엇인가 섬기고 싶어하는 목회자들의 간절한 섬김을 차갑게 거절하고 교만히 행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여러분들의 영혼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는 상표가 되어버렸습니다. 거듭났다면 어떻게 그렇게 신자로서 냉담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의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여러분의 영혼의 운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신교육하는 것처럼 들을 수 있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 오른손을 꺼내 시계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들이 예배 후에 이루어질 세상에 대한 염려와 생각으로 하나님이 계신 이 존 전에서 그렇게 여러분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그런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이런 생활이 상습화되어 있는 여러분들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주일 날 예배에 와서 달랑 예배드리고 일주일 동안 한번도 성경 읽지 않고 한번도 진지하게 기도한 적 없고 한번도 목회자를 위해 하나님께 아뢰지 않고 주일 저녁은 물론 구역예배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고 성경공부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고 여러분들이 거듭난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말 그럴 수 있습니까? 그렇게 민방위 교육받는 것처럼 예배드리고 나가고 일주일 동안 하나님 없이 죄짓고 살다가 뻔뻔스러운 얼굴로 예배 시작한지 20분이 넘어서 어슬렁어슬렁 들어와서 축도하기 전에 빠져나가는 그런 신앙생활, 그게 신자의 신앙생활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엇 때문에 그런 식으로 교회를 다니는지 나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싫으면 세상으로 가십시오. 만약에 여러분들 속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어지고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도 없고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들 좋은 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여러분들의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예배시간에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고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 칭하고 있습니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성경이 언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주었습니까? 교회 등록된 것은 행정적인 편의를 위해서 여러분들의 이름이 교회 등록되었을 뿐이지 천국의 생명 책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돌보고 치료하려고 애를 썼지만 여러분들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회심하지 않은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압니까? 거듭나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여러분들을 보는 목회자의 마음을 여러분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들이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지체들의 피맺힌 통곡의 눈물을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습니까?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죄 가운데 살아가고 하나님의 형상을 버러지와 같은 우상과 바꾸면서 주님을 배역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돌이킬 줄 모르는 그 죄인들의 완고함을 인내하시되 끝까지 참으시며 모욕적인 침 뱉음에도 불구하고 다가가셔서 그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그들을 회개로 돌이킬 날을 기다리시는 주님의 그 사랑의 마음을 여러분들이 티끌만큼이나 이해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거듭나지 않고 죽으면, 회개하지 않고 죽으면 여러분들은 지옥 불 중에서도 더 치열하게 타오르는 곳으로 끌려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 기회가 없었지만 여러분들에게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힘닿는 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산너머 죽음의 진실을 가르치려고 애썼고 주님이 주신 목회자의 양심을 따라 복음만을 설교하기 위해서 애썼습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서 충분히 울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거듭났고 주님을 만난 지체들의 눈물 흘리는 은혜의 감격의 간증이 있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는 그런 중생의 은혜에서 멀어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들의 어두운 영혼에는 빛을 주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의 은혜가 저들의 완고함을 이기시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하나님이 저 영혼들을 버려 두시렵니까?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치료의 손길을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자신이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를 확실히 여러분들이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크게 세 번째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아래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이 세상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두 번째는 죽은 이후에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거듭나지 않고 그래서 경건하게 살아가야 할 의무도 지지 않고 신실한 신자가 교회를 위해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도 안 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찔려하며 가슴아파하는 거듭난 사람들이 경험하는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도살할 날들을 위해서 사육되고 있는 짐승처럼 여러분들은 육체의 만족을 위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분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거듭날 기회를 거절하면서 살았으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결코 여러분들의 양심을 편안히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곤고하고 괴로울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고 이 교회 저 교회 유명한 교회 설교의 맛이나 보려고 돌아다니며 영혼의 참된 변화를 회피하는 여러분들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결코 평탄하게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버리시기로 작정했더라면 그렇게 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로 계획하고 계시다면 여러분들이 거듭나지 않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아무리 육신의 만족을 위해 살고 세상을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의 치료를 거부하면서 살아도 아프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혼의 치료를 거부해도 여러분들은 만족을 얻을 수 없어서 헐떡이는 짐승처럼 거리를 헤맬 것이며, 세상을 뜨겁게 사랑해도 세상은 여러분을 치사하게 배신할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아픔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회피해도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찔리는 것보다 더 깊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살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는 끊임없는 번민과 갈등과 미움과 분쟁이 그치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들의 직장 생활은 늘 불안할 것이고, 여러분들이 무슨 사업을 하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금전적으로 많은 위기를 만나게 될 것이며 하나님 없이 살아온 여러분들의 삶에 대해서 경종을 울리시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없이 마냥 끝까지 번영하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믿고 자랑하고 육체의 정욕을 위해서 쓰는 여러분들의 건강도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나는 아직 젊고 그리고 이 세상에 즐길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 여러분들에게 인생의 곤고함이 무엇인지 보여주셔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젊음에도 불구하고 삶과 죽음을 오가는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시달리도록 하나님이 만드실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잘 해봐야 평안한 짐승처럼 이 세상에서 살다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최후의 심판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끊임없는 번민과 영혼의 괴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주님의 성품을 깊이 묵상하면서 많은 은혜를 경험하는 중에 오늘 아침에도 많이 하나님 앞에 가슴에 찔렸던 것이 있습니다. 너무 너무 힘이 듭니다. 정말 너무 너무 힘이 듭니다. 장사 집에 우리 친구 목사님이 왔는데 한시간 넘게 대화를 하면서 그랬습니다. 야, 나는 정말 목사도 싫고 그리고 성공한 목회자도 싫고 나는 정말 신자가 되고 싶다. 정말 좋은 신자가 되고 싶은데 그게 너무 너무 힘들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마음을 지키면서 살고 싶은데 순간 순간 밀려오는 마음의 요동함이 너무 너무 힘이 듭니다.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마음을 지키면서 주님 앞에 좋은 신자가 되고 싶은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5-6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아빠의 큰 잠바를 입고 모진 바람이 부는 벌판에서 옷 벗겨지지 않으려고 붙드는 것처럼 너무 힘이 듭니다. 그 바람이 너무나 무섭고 붙들고 있는 고사리 같은 손에 비해서 그 큰 옷을 파고들면서 부는 그 바람이 너무나 몸을 날려버릴 것처럼 힘이 듭니다. 그래서 하나님, 제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제가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렇지만 하나님 내가 신자가 되는 길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워도 그래도 이 세상에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쉽습니다. 주님을 믿고 거듭나서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십자가 지고 살아가는 이것이 죄인으로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여러분들에게 그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심판 후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은혜는 다만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이 받는 기회입니다. 지옥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그곳은 은혜와는 관계가 없는 곳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네 번째로 거듭나지 못한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선 첫째 기도해야 합니다. 내일 말고 다음에 말고 지금 즉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마치 죽음의 그 순간의 벼랑에 이른 사람처럼 거기서 무릎을 꿇고 지금 당장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내 영혼은 죽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죽어 있는 영혼을 싸고 있는 더러운 껍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나는 거듭나고 싶습니다. 내가 거듭남을 위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사오니 하나님 나를 용서해주시고 나를 거듭나게 해주십시오. 예수의 공로를 의지해서 기도하오니 주님 내가 거듭나기를 원합니다. 내게 중생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거듭나지도 못한 처지에 인생을 위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꿈들은 임종의 순간을 맞이하며 죽어 가는 여인이 화장품을 찾는 것같이 어리석은 것이고 임종의 마지막 순간에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 가는 남정네가 술잔을 향해 손을 뻗는 것처럼 미련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죽었는데 그까짓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주님, 저 거듭나고 싶습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십시오.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복음의 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불치의 병에 걸렸고 여러분들의 이웃이 그 질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약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집에 한밤중이라도 달려가서 문을 두드리며 나를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겠습니까? 무릎을 꿇고 평생 당신의 종이라도 되겠으니 내게 그 약을 주어서 먹고 새 생명을 얻게 해달라고 매달리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그런 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곳입니다.
수많은 교역자들과 여러분들을 섬기는 구역장들과 먼저 주님을 믿은 지체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정직하게 그분들에게 부탁하십시오. 목사님, 내게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주십시오. 오늘 설교를 듣고 보니까 나는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내 영혼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내게 어떻게 믿어야 할지 가르쳐주십시오. 마치 사도 바울과 그 일행에게 애처롭게 호소하며 어찌하여야 내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던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준 것처럼 내게도 가르쳐달라고, 그 사람이 누구든지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리고 구원의 도리를 배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은 지속적으로 여러분들이 죽은 이후에 이루어질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예배에 참여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해서, 지속적으로 말씀을 배우면서 그러면서 매순간 지금 주님이 내 영혼을 거두신다면 나는 정말 주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정말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의지하는가. 묻는 그 태도를 가지고 주님 앞에 거듭나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그 기도가 거절당한 사람은 역사상 한사람도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회심해야 합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9-21)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청탁을 받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께서 유산을 남겨놓고 죽으셨는데 형이 그 재산을 많이 차지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동생은 예수님에게 형보고 이야기해서 그 유산을 좀더 나누어주도록 부탁했습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지만 우선 첫째는 형이 그 재산을 독식했기 때문에 그 부당함을 해결해달라고 예수님께 와서 그렇게 간청했을 가능성이 있고, 또 하나는 율법대로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동생이 그 율법대로 말고 자기에게 좀더 많은 몫이 돌아오도록 예수님께 청탁을 넣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아마도 우리의 심중에는 후자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즉 이 형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형과 동생 모두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따랐던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그런 관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 청탁을 넣은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를 재산이나 나누는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그러면서 이 사람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예수님의 태도를 어떻게 보면 일관성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을 우리에게 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정말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그렇게 이 세상에 일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사셨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서 떡과 물고기를 기적으로 축사하셔서 기적적으로 그것을 많게 하셔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고 심지어는 질병에 걸려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에게 나는 영혼을 고치는 의사지 육신을 고치는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헌대를 만지시면서 친절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삶에 깊이 개입하셔서 우리의 삶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셨던 것에 비쳐본다면 예수님의 이 태도는 어떻게 보면 이해하기 힘든 일관성이 없는 태도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왜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이 문제를 처리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은 소유에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이 형이나 형의 재산을 나누어달라고 간청하는 동생이나 똑같이 아직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 재산을 나누는 문제가 중요한 문제였을지 모르지만 이 사람 안에 있는 재물을 향한 탐심이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커다란 불 신앙의 장애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꾸짖으시면서 어리석은 부자의 그 유명한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알다시피 부자가 있었는데 그 부자는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고 그해도 농사가 잘되어서 수많은 곡식을 거두어들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자기가 땀을 흘리면서 농사를 지은 것이라기보다는 당시의 관습으로 볼 때는 소작인들이 거두어서 가져온 소작료나 하인들이 농사를 지어서 가지고온 수확물이었습니다. 고민이 생겼습니다. 창고는 작은데 엄청나게 많은 곡식을 거두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고민 끝에 결단을 하고 창고를 크게 짓기로 하고 거기에 물건을 잔뜩 쌓아둔 다음에 자신의 영혼에게 “이제 내 영혼아 먹고 마시자 즐거워하자” 이랬더니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오늘밤 네 영혼을 취하리니 그러면 그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러면서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을 향해 부요 하지 못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가리켜서 “어리석은 자여”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이 부자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사람은 어느 모로 보든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소위 이야기하는 재테크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경영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경영이 확대되면서 자기가 경영자로서 무엇을 준비해야되는지 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사업상의 위기에 대처해야하는지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골똘히 생각했고 그래서 많은 땅들을 잘 경영해서 수많은 곡식을 거두어들였고 그리고 그 추수가 예상밖에 수확을 거두게 되자 그는 다시 아이디어를 짜내서 창고를 헐고 개축해서 그래서 많은 곡식을 바꾸어서 많은 물건을 쌓아놓고 그리고 그것들을 보존하고 또 내년에도 그런 삶을 살아갈 미래에 대한 계획들을 차근차근 하였습니다. 어느 모로 보든지 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규정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이 어리석은 자였을까요?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이 사람이 어리석은 자로 지적이 되었는데 첫째는 그 영혼이 무엇으로 만족을 누릴 수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죽음이 임박 하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 수고하다가 영혼을 돌볼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세 가지들을 차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이 사람이 어리석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잘 살고 부를 경영하고 그리고 자기의 집안을 다스려나가는 그런 세상 적인 일들에 있어서 어리석었던 것이 아니라 신령하고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관한 비밀에 있어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리석은 첫 번째 이유는 영혼이 무엇으로 참다운 만족을 누리는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이제 여러 해 쓸 수 있는 물건을 쌓아두었으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에 대한 전적인 오해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피조물을 창조하시되 오직 인간에게만 영혼을 불어넣으시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모든 피조물에게는 없는 독특한 특징을 갖게 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영혼을 가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부랑무식하고 그리고 교육받지 못하고 그리고 심지어는 정신적인 장애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도록 지은바 되었고 죄가 들어오기 전에 처음 조상들은 그 충만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았습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고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영적인 특징들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속하심으로 다시 하나님과 화해하고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영혼은 결코 좋은 것을 먹고 훌륭한 것을 입고 아름다운 지위를 누리고 부를 소유하는 것으로서 만족을 누릴 수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잠깐만 생각만 해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세상에는 정말 아름다운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소위 이야기해서 높은 국민소득을 누리고 사회복지제도가 잘된 나라에서 아주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렇게 평안한 나라에서 완벽한 복지제도를 누리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되는데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갔던 ‘퍼스’라고 하는 오스트리아의 도시도 예외가 아닙니다.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도시의 어느 곳에서든지 간에 훌륭한 공원이고 정말 아름다운 곳에 서면 달력에나 나올 듯한 그런 아름다운 그림으로 가득 찬 나라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있고 물이 있고 바다가 있고 강이 보이고 푸른 하늘이 있고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풀밭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량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70% 이상이 마약 복용자입니다. 길거리에 가면 어디나 쉽게 구두닦이 같은 아이들에게서 마약을 살수가 있고 공원에 가면 아예 화장실에 ‘마약을 한 주사기는 여기다 버리시오’ 남자 화장실에 써 있는 것을 아주 똑똑히 봤습니다. 아예 문맹자를 위해서 마약 하는 주사기를 노란 바탕에 검은 색으로 그려서 거기다 새겨 났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도시, 그 완벽한 복지제도를 구가하는 그 도시에서 해마다 청소년들이 죽는 자살율이 전 세계의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그런 영혼의 곤고한 고통을 이겨보기 위해서 돈을 열심히 벌어서 모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 나라에서 먹여 살리니까. 그래서 차 사고 집사고 보트를 사는 게 일입니다. 그리고 여름이든지 겨울이든지 시간만 나면 윗통 다 벗고 그 보트를 타고 망망대해를 돌아다니며 미친 듯이 스포츠에 열중하고 건강을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그 아름다운 환경에서 하나님 없이 죽어갑니다. 향락에 물들고 인터넷 어디를 들어가든지 간에 모든 타락한 성문화에 개방되어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속 사람은 결코 이 세상에 있는 육신의 것으로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잠시 영혼의 고통을 잊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영혼의 만족을 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리 적으로 볼 때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예수님을 향한 절대 의존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참된 회개와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회심은 아주 자기가 깊이 깨트려지는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회심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성년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모든 사람들에게는 회심이 없는 거듭남의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그 회심의 정도와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그 회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죄에 대한 진실한 애통함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믿음, 이것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또 하나의 회심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겠으니 이 회심은 넓은 의미의 회심입니다. 아까 말한 것이 구원에 이르는 회심이라면 이번에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넓은 의미의 회심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종류의 회심입니다. 이미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항상 깨어서 빛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종종 죄 가운데 빠져 들어가고 불결과 무지한 생활로 다시 돌아가는 동물적인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보다 잠시 세상을 더 사랑해서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보다는 자신의 육신의 만족을 추구하느라고 잠시 신앙의 길에서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면서도 그는 여전히 핍절한 영혼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회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회심도 역시 똑같이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지은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회개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다라고 하는 예수님에 대한 절대 의존적인 믿음을 통해서 그것이 바로 회심의 요소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전에 무기력하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더러웠던 삶을 버리고 영적인 생기에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구원 얻을 기회가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거듭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며 그리고 거듭나지 못했을 때 자신의 미래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거듭나고 말고 할 자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담대하게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거듭나지 못한 채 나오고 있는 여러분들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왜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여러분들은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교회의 신자로 등록은 되어 있지만 지옥의 자식입니다. 여러분들의 아버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입니다. 여러분들은 본성 상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으며 여러분들은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의 속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저항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속이고 여러분들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할 것입니다. 즉시 거듭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든지 아니면 여러분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마음으로 이 예배당을 박차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에 나와서 이처럼 복음을 듣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미구에 여러분들이 받아야 할 거듭나지 못한 자의 심판을 가중시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은 거듭날 기회가 많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은 더 혹독하게 형벌 하십니다. 전혀 복음을 듣지 못하고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보다도 더 준엄하게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기회 있는 대로 정직한 복음을 진실하게 말하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심판에 대해서 설교했고 주님이 세우신 설교자의 양심을 따라서 흔들림이 없이 여러분들의 영혼의 유익한 것을 말하기 위해서 추호도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친구를 잃어버린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리고 교회의 위기가 오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진리의 복음을 선포하였고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복음을 들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듣지 못했다면 여러분들이 거절한 것이지 제가 전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오늘 이 시간에도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력한 태도로 교회에 나왔습니다. 아무 기대도 없이 혹시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 깨질지도 모르는 가정의 평화 때문에, 그리고 이렇게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 다음 주에 임할지도 모르는 어떤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양심의 위로를 얻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나왔으나 그러나 예배가 끝나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더더욱 양심으로 괴로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에 나오십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복음이 참된 것이면 여러분은 무릎을 꿇고 통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이 복음이 거짓이면 여러분들은 다시 일어나서 세상으로 걸어나가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 뜻대로 열심히 사십시오. 그 대신 하나님 없이 산 날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거듭나고 회심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지옥의 자식이면서도 교회 출석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종교 생활에 실상이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의 영혼의 만족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얼마 안 되는 제물을 얻기 위해서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모두 바친 나머지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바칠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수고의 떡을 먹으면서도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번영하는 그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좀더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곳을 보고, 좋은 옷을 입고, 남들이 갖지 않는 예쁜 장신구들을 갖고, 남들이 짓지 않은 보다 넓은 집에서 안락한 삶을 살기 위해서 얼마나 마음을 쫓고 사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은 어리석은 부자처럼 내 영혼아 넓은 집, 좋은 차, 예쁜 옷, 그리고 많은 음식, 그리고 많은 돈, 그리고 많은 명예가 내게 있으니 너는 평안히 이것을 누리고 즐거워 하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서는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잘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의 영혼은 불행하게도 죽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의 뚜껑을 열어보면 거기에는 수의를 두른 나사로의 시체가 삼일이 지나서 썩어서 냄새가 나는 것처럼 여러분들의 영혼은 죽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펄펄 나는 송장냄새를 풍기며 오늘도 교회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생활을 1, 2년 지나도록 정직한 하나님의 복음과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뉘우치지 않으려고 하는 여러분들의 그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정면 적인 도전이며 배교에 가까운 하나님을 향한 반역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반듯이 둘 중의 하나 여러분들에게 일어나게 할 것입니다. 그런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든지 아니면 그 죄에 대해서 어느 순간 불현듯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은혜 받을 만한 이 때에 여러분들의 죄를 진실로 뉘우치고 여러분들의 영혼이 죽은 그 상태를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고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정말 거듭나고 싶습니다. 주님 나를 살려주십시오. 내가 주님의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내 안에 있는 이 더러움과 그리고 죄악들을 씻어달라고 매달리며 십자가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입니다. 아! 나는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저 사람들과는 달리 거듭났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오랜 동안 신앙생활 하면서 다양한 신앙의 간증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이제는 모범적이고 착실한 교회 생활을 하고 있고 제직까지 되었으니 나는 이제 저 말씀에 지적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복된 사람이 아닌가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회심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더 많이 회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전자에 말한 사람들과는 달리 한때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십자가의 크신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깊이 애통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외는 생사간에 아무 소망이 없다라고 하는 것을 치열하게 느끼고 예수의 복음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이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주님을 만났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주님 없이 살았던 때 구원받았다 라고 하는 믿음, 그것도 진실한 믿음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어째든 가짜로 판명될지도 모르는 구원의 티켓 한 장을 가슴에 품고 곤고한 삶을 살 때 구원받은 자녀처럼 행복했습니까? 예수님의 구원을 인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었습니까? 그래서 그 주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고 주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습니까? 육신의 것으로 영혼의 만족을 주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은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이제는 비통한 마음으로 전신에 문둥병이 든 사람처럼 절망감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었으니 그때 그 형국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가면서 죽어 가는 가운데 모세의 장대 끝에 매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는 그 마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그것을 믿음으로 보시고 여러분들을 그 비참한 영혼의 어두움 가운데서 건지셨습니다. 그래서 주님 없이 살았던 수많은 날들을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참회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구원해주신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욕보이면서 살았던 지나간 자신의 삶에 대해서 깊이 애통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짐했습니다.
이제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여러분들은 죄악에 찌들었던 짐승과 같은 얼굴을 벗어버리고 여러분들의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빛났습니다. 그리고 정말 오래간만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영혼의 만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랜 신앙의 경력을 접어두고 한사람의 어린아이 같은 신자로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그 십자가를 부둥켜안고 울면서 왜 이 벌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까? 통곡하며 이제는 빛 가운데 살면서 내 모든 소유를 잃어버려도 주님과 동행하겠다 라고 하는 결의 속에서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주일마다 하나님을 향한 은혜의 기대가 있었고 그리고 봉사하는 손에는 힘이 솟았습니다. 곤고한 지체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고 진리의 말씀으로 일주일을 살수 있는 영혼을 충만하게 채워서 돌아갈 때에는 복권에 당첨된 사람보다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생애가 어떻게 하든지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 수만 있다면 어떻게 살든지 남은 생애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섭리되어지든지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변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린아이처럼 진실 되게 회개하고 세상 사랑하는 것을 주님 앞에 뉘우치면서 세상에 대해서 자기를 못박고 자기에 대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을 못박았을 때에 여러분들은 주님의 마음에 참을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많은 축복을 주셨습니다. 실직 상태에서 헤매던 사람에게는 직장을, 무너진 그 사업은 다시 기초를 세우고 일어서도록,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기적적인 은혜로 건강을 주셨습니다. 가야할 길을 물으며 하나님 앞에 망망한 가운데 매달리던 사람에게는 대낮에 햇볕과 같이 분명하고도 명쾌하게 갈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는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확신으로 불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분들은 변했습니다. 죄 가운데 있을 때나 복음 안으로 돌아왔을 때나 여러분들을 향한 주님이 불변하셨지만 여러분들은 많이 변했습니다. 나는 오늘도 여러분들을 봅니다. 예배시간에 15분을 늦게 와서 어두운 구석을 찾아가 팔짱을 끼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여러분들은 과거의 그 어린아이 같은 아름다운 회심은 어디로 갔으며 진리의 빛 아래서 살게 된 것을 이 세상에 모든 보물을 얻은 것보다도 더 행복하게 느끼고 좋아하던 그 밝은 아침 햇살과 같이 빛나던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은 어디로 갔습니까? 한번 집에 가서 거울에 여러분들의 얼굴을 비쳐보십시오. 그때 그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인생의 고뇌와 죄의 무게가 여러분들의 얼굴에 가득합니다. 그리고 깊이 미끄러져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주님의 말씀을 거의 놓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이 손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여러분들은 두 번 범죄 하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죄 가운데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한번쯤 흔들어 깨우고 다시 잠들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까? 여러분들 중에 태반은 지난주간에 단 한 장도 성경을 읽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태반은 지난주간 동안에 단 십분도 무릎을 꿇고 자기의 중심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은 주님 앞에 진실 된 마음으로 자기의 죄를 지난 한 주간 동안에 한번도 뉘우쳐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배드리는 순간에도 온갖 관심은 몇 시에 예배가 끝날 것인가에 쏠려 있습니다.
그러고도 여러분들이 회심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여러분들이 거듭나지 아니한 막대 먹은 불신자들과 무엇이 다를 수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입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진실하게 주님을 믿을 때만 방탕한 길로 갈 때나 혹은 주님을 거역할 때라도 저는 여러분들의 목자이고 여러분들은 주님이 저에게 맡겨주신 양떼들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참된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도록 애썼습니다. 많은 사역자들과 함께 보다 쉽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칠 수 있도록 밤늦도록 고민하고 의논했습니다. 귀한 성도들의 헌금을 사용하면서 좋은 교육의 공간을 짓고 그리고 철저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리고 사역자들은 눈물로 기도하며 자신에게 가르침을 받을 영혼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렇게 한때 회심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 없는 삶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눈곱만큼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회개하고 말씀에 대한 어느 정도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분들이 우월한 신자라는 자만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진리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거절하는 것을 요즘은 설교가 잘 안 들어오네 이러면서 여러분들은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누가 설교를 안 들어오게 했습니까? 누가 여러분들에게 설교가 들리지 않게 만들었습니까? 설교자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귀를 막으셨습니까? 지체들 중 누가 여러분들 마음에 설교를 듣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까? 무엇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그런 마음이 되었습니까? 설교를 듣기 위해서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서 교회당을 지었고 그리고 예전과 다름없이 정직하게 여러분들의 영혼에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말씀이 너무 딱딱하다고 해서 곱게 갈아서 죽을 써서 그릇에 담아서 핍절한 영혼을 가진 여러분들에게 공부들을 통해서 넣어주려고 했지만 여러분들이 그 그릇을 차버렸습니다. 잘 받아먹고 성장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의외로 그 말씀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이런 저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먹을 것이 없어서 광야를 유리 하는 이리처럼 가난하고 핍절한 삶을 살 것입니다.
설교자의 눈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보면 여러분들의 영혼이 보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의 축복으로 제법 안락한 삶을 어느 정도 누리게 되었고 그리고 어느 정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는 훨씬 안정된 삶을 좋은 직장을 다니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비 아프리카의 난민처럼 눈은 쾡 들어가고 볼은 튀어나오고 온몸은 피골이 상접해서 음식을 받아먹을 기운도 없어서 누워있는 아사 직전의 영혼이 아닌지 한번 정직하게 여러분의 영혼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나 육신에 있는 것으로 여러분의 영혼에 만족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까? 예배가 몇 시에 끝나는 것이 화제 거리입니까, 아니면 그 예배 시간에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했노라고 하는 것이 화제 거리입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더욱이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설교가 길어지고 예배가 늦어지면 신경질을 내면서 교회에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정말 그렇게 주님의 사랑을 알았던 사람, 그래서 예수 의지하지 않고 살지 않는 것이 얼마나 인생의 비극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사람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모두 버리고 연령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직분에도 불문하고 신앙의 경력에도 불문하고 어린아이처럼 나는 예수를 못박은 죄인에 불과합니다. 왜 이 쓸모 없는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생명을 주셨습니까? 뉘우치던 그 어린아이와 같은 참회의 순간들을 기억할수록 저는 눈물이 흐릅니다. 무엇이 바뀐 게 있기에 여러분이 또 다른 회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영혼을 위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쥐꼬리만환 수고도 하지 않으려는 대티한 삶입니다.
진실한 성도들이 새벽기도에 나와서 자기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동안 여러분들은 자는 것밖에 한 일이 더 있습니까? 수많은 사역자들이 땀을 흘리며 여러분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심방 하는 동안에 여러분들이 정말 교역자들이 자기가 교회에 나오지 않아서 심방 한 것에 대해서 죄송스럽고 황송한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교역자들이 무엇 하러 여러분들을 심방 하러 다닙니까? 교통비를 얻기 위해서입니까? 헌금을 얻기 위해서입니까? 왜 그렇게 교회에 나와야지 된다고 생각합니까? 왜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교회를 결석하고 신앙 안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인해서 교역자들이 그렇게 안타까워하고 여러분들의 집으로 직장으로 찾아다니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더더욱 제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여러분 중에 깊이 은혜를 받고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살겠다고 그리고 이 교회가 내 인생에 마지막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다짐하고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나온 사람들의 변심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서 뼈를 묻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회심하지 못한 그대들을 끌어안고 일평생 이 교회에서 여러분들과 무덤에 갈 때까지 목회 할 마음이 없습니다. 제가 왜 회심하지도 않는, 회심할 의지도 없는 새카만 옛날에 하나님을 믿고 은혜 받은 것을 가보처럼 붙들고 교만하게 신앙생활 하는 여러분들의 뼈를 이 교회에 묻어주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저를 여러분과 함께 사이좋게 살게 하려고 여기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영혼에 제가 필요하기 때문에 갈곳이 많은데도 하나님이 여기에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부르시는 동안에는 이곳에서 죽기를 사모하고 그리고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잠시 후 떠날 사람이 아니라 영원히 여기에 묻힐 사람처럼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고 여러분의 영혼을 섬기게 하시려고 여기에 보내셨습니다. 저의 보람은 매달 여러분이 건네주는 몇 푼의 사례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어나는 교인과 좋은 승용차에 저의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넓은 사택과 그리고 호화 찬란한 호화 가구에 저의 미래가 그리고 저의 영광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저를 부르실 때에 제가 주님 앞에 가서 회심치 않았던 여러분들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해야 되겠습니까? 밤마다 기도하고 새벽마다 울었고 기회 나는 대로 주의 복음을 전했고 내 마음을 녹인 예수의 사랑을 그 사람들에게 눈물로 전했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 제 눈에는 눈물이 샘솟듯 솟을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이름은 제 마음에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될 것입니다. 아! 나는 왜 태어나서 그 교회에 보냄을 받았을까? 이 세상에는 한 마디의 이 복음 앞에 회심하기를 원하는 사모하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나님은 나를 강퍅한 사람들이 모인 그곳에서 오랫동안 수고했지만 적은 열매밖에 거두지 못하게 하셨을까? 후회할 것입니다.
신앙이 장난입니까? 예수의 복음이 농담입니까? 어떻게 예배 시간에 졸 수가 있습니까? 엄위하신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데 어떻게 여러분들이 허공을 쳐다보며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있고 여러분들의 영혼에 중대한 운명에 대해서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여러분들에게 호소하시는데 어떻게 여러분들이 시계를 들여다보고 예배 시간이 끝나기를 고대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고도 여러분들의 영혼에 행복한 날들이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너무 잃어버렸습니다. 어린아이같이 눈물이 있는 은혜의 감격, 예배의 감격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고 그리고 예배가 마친 후에도 주먹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예수께서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으니 나도 이 사명의 자리에 서서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살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사람들이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마치 재미없는 한편의 영화를 감상하고 나온 사람처럼 무 덤덤하게 설교자의 손을 잡으며 수고했다고 말하는 여러분들의 눈빛을 통해서 저는 여러분들의 종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느낍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의 영혼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셨습니까? 아프리카 난민처럼 비참하게 핍절해 있는 여러분들의 영혼을 보십시오. 그 영혼은 여러분들의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생활로 사는 영혼이 아닙니다. 과거의 간증 몇 개 가지고 그 영혼이 살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영혼은 양식이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그 영혼을 돌봐주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자신의 영혼은 여러분들이 아니면 누가 돌보겠으며 여러분들이 돌볼 능력이 없어서 주님의 일군들이 돌보면 그 치료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결코 진실한 성도가 될 수 없고 후에 이 교회에서 진실한 성도들이 수없이 생겨나면 여러분들은 그 진실한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반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정말 수시로 절망합니다. 수시로 낙담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무 덤덤한 그 세대가 예전에는 이 세상을 가리키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주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들의 형제로 여러분들의 목자로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돌아오십시오. 정말 돌아오십시오.
두 번째는 이 사람이 어리석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죽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죽음을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입니다. 곡식을 많이 추수하는 것도, 창고를 짓는 것도, 그리고 영혼에 만족을 누리며 즐거워하는 것도 계획에 있었지만 그러나 한가지가 없었습니다. 죽는 것이 계획에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내가 언제쯤 죽을까? 젊은 사람은 4-50년을 계산할 것이고 나이가 드신 분들은 1-20년을 계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추측일 뿐이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불러 가실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주께서 여러분들의 영혼을 다시 부르실 때에 그 직전에 주님 앞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 여러분들의 영혼이 어떤 상태가 되어 있어야 하겠습니까? 순결하고 건강한 신부처럼 아름다운 행실로 옷 입고 주께서 우리의 육신의 껍질을 벗으신 다음에 우리를 부르실 때에 아멘 주 예수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감격적으로 달려가서 신랑 되신 예수님의 품에 안길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아프리카의 난민처럼 피골이 상접해서 ‘내 사랑하는 자녀야’ 하고 부를 때 ‘주여 내 영혼은 너무나 피골이 상접해서 일어설 기운조차 없사옵나이다.’ 그렇게 고백해야 되겠습니까? 죽음은 정말 가까이 있습니다. 죽음과 삶 사이에는 마치 한 장의 얇은 헝겊에 의해서 쳐진 휘장과 같습니다. 어느 날 불현듯 그 휘장이 갈라지고 죽음이 삶을 삼키고 나면 우리는 어느 한순간에 주님 앞에 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매일 죽음의 정신 앞에서 삶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지금 여러분들이 주님이 불러 가시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정말, 그리고 여러분들이 오늘 정말 주님이 부르시면 여러분들은 정직하게 말해서 오! 주님 내 인생에 최고의 거룩한 때에 주님이 오셨다니 지금 주님이 오신 것이 제게는 다행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느 한순간에 죽음은 불현듯 다가오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살았던 모든 삶은 그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주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그리고 죽음의 이 순간이 흰 이빨을 드러내고 나를 삼키려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인해서 정말 감사하며 죽음의 파도가 밀려오는 그 앞에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찬송할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자신의 영혼을 돌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부요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을 위해 이 재물을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면 여러분이 누구의 사람인가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마음도 있느니라”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힘닿는 대로 열심히 벌어서 남 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벌어서 그래서 여러분 쓸 것 남겨놓고 나머지는 남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보다 더 가치 있고 보람있는 일, 나는 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하고는 있고 그 일을 위해서 필요할 때 여러분의 재물을 쓸 수 있는 그것이 여러분들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놓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 치사합니다. 그리고 그 재물을 움켜쥐고 야비하게 하나님의 것인데도 자기의 것 인양 움켜쥐고 정말 치졸한 삶을 살아갑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은 은과 함께 망할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더 깊은 뜻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특별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부정축재를 하거나 아니면 근로자를 갈취하거나 아니면 부정한 방법으로 자금을 모아서 악한 부자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런 악한 부자라는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금 지옥에 갈 위기에 놓였습니다.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이유는 그 사람이 죄인이었고 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돌보기에는 육신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너무나 바빴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말 여러분 가운데 은혜 많이 받은 사람들 가운데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 경건의 생활이 전무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성실하게 나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예배 시간에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옛날에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경험을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이 이야기할 기회도 주지 않고 자랑을 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큰 하나님을 만났는지 자랑합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북에 두고 온 땅문서를 자랑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그대들의 영혼이 핍절해 있는데 옛날에 큰 하나님을 만난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옛날에 큰 하나님을 만났다면 천사들이 지금 거렁뱅이와 같은 영적 삶을 살고 있는 여러분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목사님은 아직 직장이라는 것, 사업이라고 하는 것을 몰라서 그러십니다. 압니다. 나도 여러분처럼 직장생활을 해봤고 사업도 해봤습니다. 여러분들이 겪는 인생 고 나도 겪어봤고 눈물을 흘리며 한쪽에 빵을 먹으며 고픈 배를 부여안고 잠든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꼭두새벽이면 사업장으로 달려가고 밤이 늦어야 집에 돌아오는데 쓰러져 자기가 바쁩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합니다. 잠을 줄이십시오. 그리고 그래도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토요일 밤늦게까지 일했습니다. 잠이 안 오는 약을 먹고 와서라도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직업이나 사업이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헌신짝처럼 과감하게 벗어버리십시오.
최근에 우리 교역자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어느 형제가 연봉 5,500만원이 넘는 직장에 다니다가 구조가 너무 불결하고 죄지을 수밖에 없고 불결하고 신앙생활에 전념할 수 없는 그런 직장이기 때문에 과감하게 집어 던져버리고 2,500만원도 채 안 되는 직장으로 전직을 했다고 해서 내가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습니다. 거기서 그 문화를 개혁하고 그곳과 더불어 싸워서 변혁을 시키든지 거기서 자기의 신앙을 지킬 수 없으면 버리는 것입니다. 그까짓 것 5,500만원이 뭐가 중요합니까? 아니 고깃국 먹을 것 미역국 먹으면서 살면 되고, 좋은 메이커 옷 입을 것 좀더 메이커 없는 옷 입고, 훌륭한 구두 신을 것 좀 싼 구두 신고 다니면 되는 것 아닙니까? 넓은 집에서 살 것 좁은 집에서 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미친 듯이 일에 끌려 다니면서 그렇게 살아서 성공하면 돈 몇 푼 손에 쥐고 그 다음에 죽은 영혼을 여러분들이 맞딱드리 게 될 것입니다. 그 삶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그런 삶을 살겠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심하고 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왜 그렇게 어리석습니까? 그게 여러분들의 모습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이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과감하게 버리고 그리고 신앙생활하고 남는 시간에 돈벌어야 하고 신앙생활하고 남는 시간에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대로 살면서 주님과 동행해달라고 기도하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 신자의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이 부자는 그럴 여력이 없었습니다. 육신을 돌보는 일에 자신의 모든 시간을 소진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두 빠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돌볼 기회가 없었고 결국은 회심치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하시렵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여러분들의 영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돌아보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밖에는 없고 그리고 그 너머의 세계는 여러분들에게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정말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의 자녀라면 깊이 회심해서 이제는 처음 사랑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빛 가운데 살아가는 진실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그 피로 속죄함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애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 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19-31)
오늘 제가 읽은 이 본문은 흔히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하여야 할 것은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교부 시대 이후 많은 사람들이 비유가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믿어왔다는 사실입니다. 교부 가운데 테르틀니아누스를 비롯해서 많은 초대 교부들이 이 이야기의 사실적 실제성을 의심하지 않았고 특별히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나사로’ 라는 사람의 분명한 이름은 이런 이야기의 사실성을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도입할 때에 복음서가 흔히 사용했던 보도 방식은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쳐 가라사대’ ‘비유로 이르시기를’ ‘이와 같이 비유로 말씀하시니’ 라고 하는 소개문들이 비유 이야기 앞부분이나 뒷부분에 거의 반듯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시면서 해설자의 비유라는 보도도 없고 또 예수님 자신의 언급에서도 비유라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부자와 그리고 이름이 알려진 나사로 라고 하는 두 사람의 있었던 실제의 이야기를 다루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잊혀져가고 있는 지옥과 천국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과학의 많은 발달과 눈부신 기술의 진보는 이제 인간이 이 우주의 궁극적인 주인이고 그리고 이 세상의 참된 가치는 인간의 행복에 있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은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며 그리고 눈부신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진보로 말미암아 이제 성경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진리들은 과학적 사고방식이 없었던 사람들의 미개한 신앙의 유산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회 현상은 이미 성경에 오래 전에 예고된 바이고 이것은 과학과 기술이 진보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들이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믿으면서 하나님앞에 교만해져가고 있는 증거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많은 기술이 진보하고 과학이 발달했다고 할지라도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이 창조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규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물론이고 이 세상에 생명이 있는 어떤 물체도 인간은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서 인간들의 경험을 능가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증거하고 또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이 부자와 나사로는 한 집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식구가 아니라 부자의 대문에서 헌데를 앓으며 밥을 빌어먹는 거지였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지금도 중동지방에 가면 의리 의리한 저택의 부자들 문간에는 예외 없이 거지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그 거지를 자신의 그 저택의 대문 앞에 살게 하는 것을 부자로서의 마지막 남은 자비심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째든 한 부자가 나오는데 이 부자는 엄청나게 돈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자색 옷, 그리고 고운 베옷은 모두 지체 높은 집안의 사람들이 돈을 값비싸게 주고 사서 입는 옷이었습니다. 서민들이 만져볼 수도 거금을 주고 산 옷을 입고 살다가 한두 번 잔치하는 일이야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이 사람은 날마다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 잔치도 아주 호화로운 잔치였습니다. 그의 대문에는 대가 집에서 온 수많은 손님들의 고급 수레들이 즐비하였을 것이고 날마다 저택에서는 풍악이 울리고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졌습니다. 거물급 인사들이 드나들고 그래서 그 집은 더더욱 그 동리에서 유명한 집이 되었을 것입니다. 연회가 성대하고 잔치 상이 휘어질 것처럼 그렇게 사치스러우면 사치스러울수록 그들은 행복했고 그들이 행복하면 행복해할수록 더욱 대조를 이루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나사로라 이름하는 거지였습니다. 그는 부자 집 그 문간에서 빌어먹고 사는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두 사람에게 똑같이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기록되고 있지 않지만 어쩌면 이 두 사람은 같은 날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한 사람은 장례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장사 지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부자는 죽었을 때 수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왔습니다. 살았을 때 그 위엄과 영화를 죽으면서도 동시에 누렸습니다.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하고 저명인사들이 와서 조문을 낭독하고 내노라 하는 집안의 거물급들이 와서 헌화하고 분향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장례식이 커다란 규모로 진행되고 있을 때 나사로는 아마 시체조차 치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 동리에 인정 많은 동리 사람들이나 그 집 하인들, 아니면 관청의 청소부가 와서 행려자 시체로 분류해서 끌고 가서 쓰레기처럼 화장해버리든지 나그네 묘지에 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는 그 순간까지는 그렇게 부자와 거지 나사로 사이에 좁힐 수 없는 엄청난 격차가 있었지만 죽음은 두 사람에게 똑같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그 휘장 뒤에서는 휘장 밖에 있는 산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장사 지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천사에게 받들렸다는 이야기가 없고, 나사로는 장사지냈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천사들에게 받들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는 부유하게 살아서 모자라는 게 없는 영화를 누렸지만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고 나사로는 다행히 빌어먹으면서 사는 거지였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라 하는 그 이름이 그의 신앙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혹은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이 나사로 라는 말이 바로 구약에서는 ‘엘리에셀’이라고 불린 이름입니다.
그는 비록 부자의 문간에서 빌어먹고 사는 저주받은 처지였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부자에게 그 죽음은 얼마나 애통한 것이었을까요? 먹고 연락할 수 있는 수많은 물질들이 남아 있고 자기를 열렬히 따르는 수많은 부하들이 있고 그리고 하인들이 있고 사교계의 친구들이 있는데 그는 그 많은 향락할 수 있는 기회들을 버려 두고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서 죽음 너머로 끌려 왔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에게는 이 날이 얼마나 행복한 날이었을까요? 지상에서 그는 어떤 기쁨도 없었고 오직 고통밖에 모르고 산 그런 생애였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영혼까지 고통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영혼은 그의 부자 집에서 거지로서 빌어먹는 신세였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을 수시로 경험하며 비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이요, 그리고 가난으로부터 탈출하는 날이며, 그리고 억압받는 삶으로부터 풀려나는 날이었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이 부자가 악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았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마음씨 좋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일 수도 있고 합법적으로 사업을 해서 재산을 축적한 신흥재산가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이 사람이 악한 사람이다, 악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가 부자 집 대문에서 빌어먹었습니다. 온 몸에 헌데가 나서 개가 와서 핥아줄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 거지가 그 부자 집 대문을 기어다니면서 선행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은 이 두 사람이 죽음 이후에 경험하게 되는 이 엄청난 운명의 차이가 그 사람이 선하고 악하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사람인가, 믿지 않았던 사람인가 두 신앙의 차이가 두 사람의 운명을 이처럼 엄청나게 갈라놓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두 사람은 죽어서 각기 자기의 곳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의 품, 그것은 곧 낙원이었고 그곳은 곧 천국으로 통하는 입구였고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대기장소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역시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되며 음부에 떨어져 슬피 고통하고 있는 이 부자가 있었던 장소는 음부로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대합실 내지는 입구이며 지옥의 고통을 또한 동시에 맛보면서 살아야 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천국에 대해서는 존재의 가능성을 상당히 많이 열어두고 있지만 지옥의 실제에 대해서는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괴기 영화에나 나오는 미신처럼 생각하고 세월이 점점 흐르고 과학이 발달되면서 그런 것들은 점점 인간의 현대적인 지성에 거스르는 원시적인 이야기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 중 누군가가 지옥이 없다는 사실을 저에게 입증할 수 있다면 저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겠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지옥이 없다면 지옥이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천국에 관한 약속도 저는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말씀을 믿을 수 없다면 저는 성경을 신뢰할 수 없고 성경을 신뢰할 수 없다면 저는 하나님의 존재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믿든지 말든지 우리의 태도와는 관계없이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고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이 이렇게 눈에 보이는 세계만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앞서간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위기와 역경을 당할 때마다 천국의 복락을 생각하며 고난 속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켰습니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천국에서 재회할 것을 꿈꾸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칼의 죽음을 당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같은 극렬한 시험과 순교의 순간에도 이 복음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많은 경건한 사람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많은 죄인들이 지옥의 불길을 생각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했고 그렇게 회개하고 구원을 얻은 많은 사람들은 그 지옥의 뜨거운 불길을 기억하면서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들의 앞길을 가로막아 섰습니다. 자신의 가족들에게 그 길을 막아서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복음을 전했고 자신의 모든 몸을 살라서라도 그들에게 죽음 이후의 이 놀라운 진실을 보이고 싶어했습니다. 모세가 그러했고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오늘 이 부자는 부자라서 지옥에 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쁜 일을 해서 지옥에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현세의 삶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죽음 이후에 더 긴 삶을 준비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는 그 많은 진리들을 외면했고 성경은 명백히 우리에게 선포되고 있는 엄숙한 진리들 앞에서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그리고 어디로부터 말미암았고 그리고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는 여기서 모세와 선지자들이라고 하는 구약 성경들도 가까이 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혼을 향해서 말씀하시고 자신의 인생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이 그 속에 담겼다 라고 하는 인식 없이 성경을 대했습니다. 그는 너무나 부주의했고 그 부주의는 현실을 살아가는 그 일에 몰두한 나머지 자신의 현세보다도 더 긴 내세의 운명을 준비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잔치 집보다는 초상집에서 얻는 교훈이 더 많습니다. 요즘은 그럴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만 목사가 되기 전에 교회 초상을 열심히 따라다니면서 할 수만 있으면 제가 꼭 해보는 일이 하나님이 데리고 가신 성도들 가까이 가서 그 시신을 꼭 한번 안아보는 것이 제가 종종 하는 일이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였는데 하나는 그 성도를 향한 마지막 사랑을 진심으로 표현하고 싶고, 또 하나는 그렇게 굳어져 있는 시체를 끌어안고 있는 동안에 제가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것과 죽는 것이 이렇게 종이 한 장 차이로구나. 그리고 영원의 안목에서 보면 이 땅에 살아있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보다 더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옷을 갈아입는 탈의실 정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말하기를 ‘인생이란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는 대합실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휴가철에 간이역에 앉아서 술도 마시고, 누워서 자기도 하고, 화투도 치고, 기타를 치고 노래부르기도 하고, 그리고 만화책을 보기도하지만 어느 순간에 자기가 가고자 하는 행선지로 가는 열차가 도착하면 삽시간에 손에 든 티켓을 들고 개찰구를 빠져나갑니다. 왁자지껄하던 대합실에는 아무도 없고 마시다 버린 소주병과 미처 치우고 가지 못한 널려진 신문과 그리고 과자부스러기들만 가득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길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죽으면 천국에 가서 영광스런 그 아침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할 자신이 여러분들에게 있으십니까? 성경은 회개하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문은 닫혀진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국의 대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아무든 들어 오라. 그리고 들어가 보니까 들어온 천국 대문 뒤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회개한 자들만 들어오는 곳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지옥에 대해서는 성경이 풍부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묘사는 모두 상징적일 수밖에 없고 실제로 그것을 모두 묘사한다고 해도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세계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아니라 현세의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달나라를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 달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그를 정확하게 이해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풍부하게 설명하시면서 동일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반복해주셨는데 어두움, 불꽃, 귀신, 고통, 하나님과의 단절, 심판, 두려움 그런 것이 어두운 지옥에 그림자입니다.
그곳은 죄를 범한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주님을 잘 믿으며 느꼈던 그 하나님의 진하고 뜨거운 사랑만큼이나 더 처절한 하나님의 공의가 다스리는 곳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 다시 한번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가르치거나 혹은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음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주고 그들을 위해서 적선하면 천국으로 그들을 보낼 수 있다는 허황 된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새칸(?) 찬스는 없습니다. 오직 단 한번 살았을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거듭났는가 안 났는가에 따라서 그가 천국으로 가기도 하고 지옥으로 가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생애 가운데 여러 차례 걸쳐서 천국의 아름다운 복락과 함께 지옥의 불붙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은 그런 내세에 대한 경고를 가슴에 새기고 살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께 구원받도록 택정 되지 않은 사람들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 성을 심판할 때 그 심판의 소식을 알리는 롯의 이야기를 농담처럼 들었던 롯의 사위들처럼 하나님의 진리를 조롱할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한가지는 죽은 이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그것은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저는 천국과 지옥을 누군가가 있다 없다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지옥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죄인으로 살아가다가 깊이 뉘우치고 주님을 영접해서 지난날 주님 없이 살았던 삶을 진실하게 회개하는 뉘우치는 죄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죄를 그렇게 사랑하는 데도 주님 때문에 버렸습니다. 세상이 좋은데도 세상에서 짓는 자기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라고 하는 가슴아픈 소식을 듣고 깊이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매순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서 목양을 받으면서 헛되고 거짓된 것을 버리고 진실 되게 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래서 그들은 때로는 그렇기 때문에 부자가 될 기회를 놓치기도 하고 이 세상에서 많은 친구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예전에는 넓은 길로 걸어가면서 많은 친구와 어울리며 걸어가던 즐거운 인생 길이었는데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살기로 결심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니까 이제는 그에게는 좁은 길 밖에 남은 길이 없습니다. 가시밭길과 같은 그 길을 걸어가고 길이 협착하고 그리고 수많은 위험들이 도사리는 순례의 길입니다.
오늘 이 부자처럼 일생동안 부자로 떵떵거리고 선한 일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이 이렇게 평안하게 꽃 무덤에 안치되는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여기에서 이 세상을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예수님 믿기 전에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던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이 세상의 존재하는 이 도덕적인 모순을 어떠한 논리로도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인가? 그렇게 바르게 착하게 살려고 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고 억압되고 악랄한 놈들에게 착취를 당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그리고 이 세상에 많은 법과 그리고 질서와 기회들이 이상하게 약자의 편이 아니라 악한 강자의 편입니다. 시편 73편의 기자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렇게 살던 사람들은 죽을 때라도 비참하게 죽겠지 그랬더니 아닙니다. 죽는 순간에도 꽃에 쌓여서 평안하게 죽어갑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만약에 신이 있다면 나는 더더욱 그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도덕적인 모순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그런 무능한 신을 내가 믿어서 뭐하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간단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도덕적인 모순이 있다고 투덜대지만 그러나 좀더 있어봐라. 너희에게는 목숨 붙어서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생애 전부이지만 나 여호와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었노라.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죄인들로 태어났고 결별할 수 없이 죄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지옥으로 보내셔도 우리는 어찌할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의로운 삶과 선한 공로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그 보혈의 피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고 그래서 죽음 이후에도 이 지옥의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하나님이 자기의 사람들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은 했지만 한번도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자기는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죄 가운데 살아온 악한 사람이라는 것과, 주님의 형상으로 주님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도록 만들어주셨지만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다는 사실과,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 그 신성한 의무를 버리고 세상만을 사랑하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왜 천국으로 보내셔야 합니까?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그리고 삶의 형식은 겨우 신앙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속 사람이 전혀 변화되지 않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참사랑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엄중한 주님의 심판에 대해서 두려워할 줄도 모르는 막대 먹은 인간을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천국에 보내셔야 합니까? 그럴 의무가 하나님에게 있습니까?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고백하고 그리고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오늘 이 시간에도 그 피묻은 손으로 내 마음을 두드리면서 그러면서 내가 너에게 들어가게 해달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라. 그러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이 간절한 초청, 그래서 그분이 자기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과 그분이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면서 사는 막대 먹은 자기와 같은 인간을 위해서 그 죄 값을 모두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깨닫고 자기가 죄인인 것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당한 그 피 어린 고난이 내가 받을 형벌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주 앞에 용서해달라고 매달리지 않은 죄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두 개의 길을 말하고 있는데 회개하든지 아니면 멸망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든지 중간에 길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말할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 착실히 나왔습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그렇게 교회 착실히 나온 것은 단지 여러분들이 신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뿐이고 그것이 여러분들을 저절로 신자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조 시대에 복음을 듣고 죽어가지 못한 사람들보다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복음의 엄중한 경고를 농담처럼 듣고 그렇게 살아간 많은 날들을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날들을 가진 사람들은 더 엄중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듣는 동안 여러분들은 아마 이런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분명히 성경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그랬다는 데 내 죄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훨씬 크지 않을까? 저렇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정말 우리를 희망으로 인도하는 것일까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담과 하와 이래로 마귀의 속삭임이었습니다. 지옥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사람들 중에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은 잘못된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믿어야 할 진실한 믿음의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지옥에 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오늘 불붙는 그 지옥의 한가운데 이 부자가 얼마나 괴로워했으면 한가지 소원을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나사로의 손끝에 서늘한 물을 묻혀서 내 입술에 대어주십시오. 그곳은 육체가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영혼의 극렬한 고통을 받는 곳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너무 너무 괴로워서 머리를 쥐어뜯고 그 머리통이 깨어지도록 벽에 박으면서 대굴대굴 구르며 괴로워하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것을 무한대로 확장시켜서 생각하시며 거기가 지옥이라고 믿으시면 됩니다. 결코 타지도 않고 결코 죽지도 않고 그리고 견디기 힘든 고통이 그의 전존재 속에 밀려오는 그런 정말 괴로운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은 믿지 않는 가족의 모습 속에서 불탈 그들의 미래를 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파합니다.
(예화: 20년 전에 청량리 역 근처의 나이트 클럽에서 놀던 어느 자매의 동생이 신실하 게 하나님을 섬기는데 그 형제가 기도하는 가운데 불길 속에 있는 자신의 누나를 보고 몸부림치며 기도했는데 그 형제의 기도로 그 자매가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 는 이야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앞서 살다간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데 자신을 다 드렸습니까? 왜 그렇게 복음 전하는 일에 자신의 재산은 물론 자신의 생명도 그리고 자신의 물질도 그리고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는 기회까지 버리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그렇게 애쓰고 수고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은 남이 못 본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남이 못 본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고 동시에 남이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심판도 보았습니다. 자신들의 혈육인 그들이 주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고 이렇게 사랑하는 내 가족과 그리고 내 교우들이 지옥의 불길 속에서 고통을 받는 것을 생각하는 것도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래서 19세기의 복음 전도자 챨스 피니는 어느 날 맨하탄 거리에서 주저앉아서 땅을 치며 어린아이처럼 통곡하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오! 하나님 이 영혼들을 어찌합니까? 이들이 모두 지옥으로 가고 있는데 나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정말 그렇게 믿음의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래서 이 세상에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보다도 더 소중한 일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하든지 복음을 전하고 싶어했고 복음 전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어했습니다. 재산도 드리고 때로는 자신의 생명도 드려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싶어했습니다. 임박한 지옥의 심판을 면하고 그리고 영생의 소망을 누리도록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농담처럼 생각하며 웃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은 고뇌하면서 눈물로 그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이 부자는 지옥에 가서야 비로소 자신이 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를 깨달았고 그리고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자기의 가족들이 어떻게 하면 여기에 오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는 너무나 늦은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남아 있는 가족들을 즉시 생각했고 그리고 그 정답은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이 나사로를 빨리 우리 집으로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지옥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이 나사로가 자기 하인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불붙는 고통의 장소에 왔지만 내 형제들에게는 죽음 이후의 이 진실을 나사로로 하여금 증언하게 하셔서 회개하고 여기서 나와 재회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저희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해결할 것이다. 여기서 모세와 선지자들이라는 것은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글, 선지자의 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성경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아닙니다. 나도 그런 성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이니 이 죽은 나사로를 보내셔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증거 해주신다면 우리 가족들이 믿을 것입니다 했더니 결국은 그 아브라함이 그 요구를 듣지 아니하고 대답한 것이 저희들에게 성경이 있으니 성경을 믿을 것이고 만약에 믿지 아니하면 이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죽은 이후의 세계를 증언해준다고 할지라도 믿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면서 어찌할 수 없다는 이야기로 우울하게 이 이야기의 막을 내립니다.
보십시오. 이 사람에게 필요했던 것은 회개였습니다. 부자였기 때문에, 악했기 때문에, 못된 짓을 했기 때문에, 그리고 나사로에게 밥상을 떨어진 밥 찌꺼기를 주었기 때문에 지옥에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회개였습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고 그 죄의 비참함이 어떤 것인지를 깊이 인식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 몹쓸 고난을,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주님이 당하신 고난 이 죄인을 위함이니
범죄한 날 위해 주 욕을 보셨네
나 무엇으로서 그 은혜 보답하리이까
거룩하신 주 예수 사랑 놀랍고도 크도다
내 평생 사는 동안 주 위해 살리라
주님에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회개는 이제껏 까지 걸어가던 이 죄의 길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먼저 무엇이 죄인지 분명히 깨닫고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지어진 흙덩어리에 불과하고 그리고 그렇게 초라한 몸에 하나님이 자신의 생기를 불어넣어서 영혼을 부여해주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아름다운 주님의 사람인데 창조주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리고 주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며 주님을 멸시하며 살았던 이 죄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깊이 아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 잘못한 것이 없는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그분은 우리에게 섬김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섬기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주님 없이 죄와 어두움의 그늘 아래서 지옥으로 걸어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시려고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우리에게 생명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믿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들이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깊이 가슴아파하고 고집대로 살던 내 인생이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짐승같이 망나니 같이 살았습니다. 진실로 뉘우치고 그리고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기의 길을 돌이키는 그게 회개입니다.
부자는 고운 베옷과 그리고 자색 옷 날마다 베풀어지는 화려한 연회의 즐거움 때문에 영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운명의 시간들을 놓쳤고 그는 이 지옥의 불길 속에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거듭났습니까? 정말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리고 생명 되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에 모셨습니까? 그 주님이 여러분 안에 계십니까? 그래서 그분께 사랑 받고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도 그분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목자들은 여러분의 회심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고 여러분이 변화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 앞에 밤을 새며 매달리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회심한 증거가 보이지 않아서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왜 남들은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서 그렇게 아파하고 다른 사람들은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의 영혼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하는데 정작 주님의 심판을 눈앞에 두고 있는 여러분들은 조금도 여러분 자신의 거듭나지 못한 회심하지 못한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가슴아파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같이 무딘 사람들, 우리같이 거칠고 사랑이 없는 사람들도 심판에 이를 영혼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눈물이 흐르고 무엇인가 도움을 주기 위해서 안타깝고 정말 회개할 수만 있다면 주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래서 십자가를 모르고 주님을 믿으면서도 그 믿음의 대의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사랑하고 그분이 자신의 인생에 전부인 것처럼 그분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신앙의 대의인지 모르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완전한 사랑이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무엇을 한 것이 있습니까?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무엇을 준 것이 있고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렸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들이 없었다면 존귀하신 그분이 왜 이 더러운 땅에 내려오셔야 되겠습니까? 통곡과 눈물로 일생을 사셨을 때 그분의 마음에는 용서받아야 할 죄인들이 전부였고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못박도록 내어주셨을 때에도 당신에게는 고통이었지만 당신의 죽음 너머에서 태어날 수많은 생명의 씨앗들을 보시면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그 형벌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렇게 사랑하신 주님이 회심하지 않은 영혼들을 바라보시면서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들을 위해 흘려 죽으신 예수의 피를 헛것으로 만드는 완고한 죄인들을 보실 때에 주님의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홀로 어찌할 수 없어서 당신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셔서 사람들이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 울지 않을 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울게 하시고 자기의 영혼들로 인해서 가슴을 찢으며 아파하지 않을 때 오히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임할 심판을 인하여 두려워 떨며 주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심으로 그들에게 구원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버리시면서 여러분들에게 간절하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돌이켜서 어린아이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느니라” 어린아이 같아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주님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예수님의 그 사랑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행복해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이 나를 이렇게 많이 사랑하셨는데 나는 주님을 너무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서 주님 앞에 미안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그렇게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생명까지 모두 주셨는데 나는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어서 마음 아파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회개하고 어린아이처럼 돌이키는 사람의 마음에 가득 차게 되는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되어서 예수님의 손을 꼭 붙들고 놓으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공원에서 엄마의 손을 놓친 어린아이가 입술이 새파래지도록 울면서 과자도 버리고 장남감도 버리고 애처롭게 우는 그 모습처럼 내 인생에는 예수님이 전부이고 그리고 내가 모든 것을 양보해도 예수님을 붙잡은 이 손은 놓을 수가 없습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그래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그래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전혀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지만 세상 사랑하지 아니하고 주님만 사랑하면서 위기의 순간에 무릎을 꿇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고난의 순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신앙으로 인내하는 그 마음, 그렇게 돌이키는 것이 어린아이같이 되는 마음입니다. 불쌍하게 고통받는 형제를 보면서 자신의 옥 합을 깨트리는 마음, 그리고 미력이나마 어떻게 하든지 주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가시는 그 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이 바로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된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마음이 되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오랫동안 여러분들을 기다리셨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간절한 음성을 여러분들에게 들려주시기도 많이 했고 때로는 하나님이 폭풍과 같은 시련을 주셔서 손들고 하나님, 인생은 제 힘으로 살 수 없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무릎을 꿇게 하시고 싶어서 환난과 시련도 주셨습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런 환경에도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신적인 괴로움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마음의 평안이 없이 고통 하는 사람으로 맛보게 하심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그리워하게 만들게 하시고 싶어하셨습니다. 그것도 안되어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내셔서 그들조차도 울어주지 않는 그 영혼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에 호소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 다수는 정말 세월이 많이 지나서 목자인 저의 마음에도 어쩌면 여러분들이 죽을 때까지도 회심하지도 않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패배감을 목자인 저에게 심어준 사람이 다수 있습니다. 예배가 끝나는 시간마다 문 앞에서 잡는 그 손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 나는 이 사람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수없이 많은 시간동안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확신하건 데 이 사람은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거짓말이라도 이 사람의 영혼이 주님의 생명 책에 기록되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러나 목자의 양심으로 이 사람은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도 눈물을 흘리고 가족들도 눈물을 흘리지만 도대체 그 사람들인 여러분들의 마음은 무엇으로 만들어진 마음입니까?
저는 정말 간절히 보고 싶습니다. 강철과 같은 심장을 가지고 살아가던 그 사람들의 가슴을 주의 거룩한 사랑의 창으로 뚫으셔서 피 쏟아지는 그 통곡으로 자기의 지난날들을 깊이 회개하고 황폐하기 그지없던 그 죄인들의 마음에 예수의 생명의 강물이 흘러 들어갈 수만 있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구원의 모든 길을 여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싶어하시는데 여러분들은 왜 회심하지 않습니까? 왜 자기를 죄를 뉘우치고 진실로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며 주님의 참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까? 왜 멸망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고 왜 지옥으로 가는 수많은 성경의 진리들을 농담처럼 여기며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갔던 그 심판의 길로 달려가려고 합니까?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는 없어도 생명이 있는 날까지 여기에서 복음의 진실을 외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결코 지옥에 가서 설교자가 이 지옥의 진실과 천국의 참다운 행복을 가르쳐주는 정직한 복음이 없었기 때문에 주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없었노라고 변명할 수 없도록 나는 여기서 주님의 증언을 따라서 여러분들에게 참된 복음의 진실을 죽는 순간까지 외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껏 여러분들이 돌 같은 가슴을 안고 강철과 같은 얼굴로 하나님 앞에 완고하게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이 순간도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순간 진실 되게 회개하고 그리고 나의 이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주님이 저를 위해 죽으셨고 그리고 저는 주님의 그 십자가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라고 여러분들이 진실로 뉘우치기만 하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지나간 모든 죄를 용서해주실 것이고 그리고 지나간 모든 죄를 여러분들에게 모두 다 사해주셔서 다시는 기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더러운 여러분들을 그의 순결한 품에 뜨겁게 안아주실 것이며 남루한 이 세상에 더러운 도덕의 옷과 그리고 쓸데없는 자기 의에 더러운 것을 벗어버리고 예수의 순결한 새 옷으로 입혀주셔서 새사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죄인들을 향해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지만 영원히 기다리시는 분은 아닙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인내가 끝날 때 복음도 그치고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여기에서 외쳤던 한 설교자의 농담과 같은 설교가 사실은 진실이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깨닫게 될 것이고 오늘 제가 왜 여러분들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설교했는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집을 멀리 떠난 자식을 밤마다 호롱불을 켜놓고 사릿문을 열고 기다리신 어머니처럼 그렇게 기다리십니다. 당신 손으로 때리셨지만 당신 손으로 치셨지만 그러나 당신 손으로 싸매어 주시고 싶어하고 당신 손으로 낫게 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서 죽지 않고 당신의 은혜 앞에서 살게 하시려고 오늘도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을 보내어 여러분들을 회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루지 마십시오.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죄인인 것과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심한 적이 없는 것과 주님을 진실 되게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리고 자기의 죄를 진실하게 뉘우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십시오. 그분이 여러분들이 당해야 할 지옥의 형벌을 대신 당하신 것과 그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을 믿으면서 이제는 정말 예수님만 사랑하며 살겠노라고, 주께서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날 동안에 예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사랑하면서 살겠노라고 다짐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하고 용서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지나간 날은 어쩔 수 없었어도 여러분들의 남은 날이라도 잘 살아서 전에는 여러분들의 삶을 보면서 주님이 너무 마음 아파하셨지만 이제 앞으로는 여러분들의 인생을 보시면서 기쁨을 이기시지 못하도록 그렇게 목숨이 붙어 있는 날 동안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 전하면서 사는 그런 성도들 되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회심하든지, 멸망하든지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에스겔 선지자는 주전 570년경의 사람입니다. 때는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로의 포로로 끌려가고 그리고 정말 비참하게 나라가 망가졌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와 함께 가장 비극적인 시대에 주의 말씀을 외쳤던 사람이었고 그 외친 예언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뼈저린 광경을 눈물을 삼키며 지켜보아야 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선지자는 이런 이야기를 앞부분에서 합니다. 만약에 전쟁이 일어나는데 적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만약에 파수꾼이 전파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백성들이 그 칼에 망했다면 그 파수꾼이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에 그 파수꾼이 적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올바르게 경고했는데도 그 백성들이 경고를 무시하고 방심하다가 칼에 맞게 되었다면 그들은 죽어 마땅하다. 그것을 말씀하시면서 예레미야나 이 에스겔이나 이런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신 것이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과 같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나팔을 듣고 정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면 생명을 얻는 기회가 주어지지만 돌이키지 아니할 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11절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인데 거기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악인은 반듯이 죽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죽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는 것을 원하시니까 그들은 돌이키면 하나님 앞에서 살수 있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서는 세 가지 교리를 언급할 수 있는데 첫째는 악인은 반드시 죽는다 라고 하는 교리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교리이고, 세 번째는 살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 세 번째 교리입니다.
우선 첫 번째 교리는 ‘악인은 반드시 죽는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악인은 이방의 백성들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로 불렸던 이스라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볼 것 같으면 그들이 혈통으로는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거기서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불 신앙으로 자꾸 빠져서 나갑니다. 그리고 피는 이방인의 피를 받았지만 정말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육신의 피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할례를 받음으로 이스라엘 백성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닫혀져 있는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혈통이 이스라엘인에도 신앙이 없는 사람이 빠져서 세상으로 나가고 혈통이 이스라엘이 아닌 사람인데도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어서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정복에 영웅 갈렙과 같은 사람은 가나안 원주민 출신 자손이었습니다. 정통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그런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신앙을 고백하고 이스라엘 백성 속으로 들어가서 유다 지파로 분류가 되어서 거기서 가나안 정복의 위대한 대업을 이루는 주님의 충성스러운 일군이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다닌다 라고 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형식적인 이스라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일단 교회에 들어오고 교회에서 출석하고 등록이 되어 있으면 일단은 여러분들이 분명히 구원받았으며 또 구원받지 못했다면 반드시 그를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 보내셔서 신앙생활을 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좋은 신자가 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에 이르게 하면서 섬겨나가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주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교회는 이스라엘과 같아서 이것은 그냥 교회일 뿐이지 여기에는 참 신자와 아직 참 신자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 있고 그리고 그들은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으면서도 결국은 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회심하고 거듭나지 못함으로 다시 세상으로 빠져나가고 그리고 지금 교회에 있지 아니한 이방의 사람이지만 어느 순간에 전도를 받고 주님을 고백하고 교회 속으로 들어와서 참 신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모형과 아주 유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안에도 악인과 의로운 사람이 섞여 있고, 교회 안에도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고, 참된 신자와 거짓된 신자가 섞여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와 세상을 사랑하는 신자가 섞여 있습니다. 그 섞여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향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는 악인은 반드시 죽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제가 이제 어떻게 악인은 죽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사람을 교회 안에 있을 때 악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의로울 것이 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죄인, 혹은 악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악인은 정말 악을 행하면서 사는 사람, 고집스러운 죄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악인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첫째는 회개하고 거듭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본성이 시키는 대로 악의 길을 걸어가는 회심치 못한 악인이 있을 것이고, 두 번째는 한 때는 주님을 영접하고 회심했지만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 진실 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 가운데 굳어져서 주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악한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는 그런 종류의 악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두 종류 다 반드시 죽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거듭나지 않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죽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과 은혜의 맛을 예전에도 본적이 없고 지금도 보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세상 사람과 다름이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교회에 다니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기 때문에 그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세상 사람처럼 마음놓고 이 세상에서 방탕하고 타락하며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막가는 사람처럼 방탕하게 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가르침을 성경은 우리에게 주고 있지 않습니다. 멸망 받을 수 없게 되어 있는 죄인들에게도 자기의 죄에 대한 유감이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정도는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갔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빌라도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어느 정도의 두려움이 있었고 세례 요한의 목을 친 헤롯에게도 세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아서 두려워하면서 그의 말씀에 청종했던 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던 가룟 유다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람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았고 악한 일을 했지만 예수님이 마지막 당하는 고난에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가 무지한 자의 피를 팔았도다 하면서 은 삼십을 써보지도 못하고 그것을 던져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아가서 목매어 떨어져 배가 터져 죽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무엇인가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가끔 무엇인가 마음에 느끼는 게 어느 정도 있고 설교를 들으면서 아! 참 좋다. 분위기가 아! 참 좋다. 편안하다. 그런 정도를 경험하는 것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절대 아닙니다. 지옥에는 시종일관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악의 길을 걸어가다가 불에 떨어진 사람도 많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가다가 들어가지 못해서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도 수없이 많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분명히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말씀드릴 때 교회는 그 사실을 열심히 확인하려고 했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분명하게 확인하지 못해서 회심도 하지 않은 채 여러분들이 집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구원이 없는데도 여러분들이 권찰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구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이 일 저 일로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살아있습니까? 예수의 생명이 있습니까? 따라서 하나님 앞에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교회에서 어떻게 대우하든지 어떻게 상관하든지 간에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알아주든지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주님은 그를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습니다. 무엇인가 종교적인 일들은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마음을 바치는 일은 못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번뇌하고 고통 하는 자신의 영혼을 매만져주시는 그런 따뜻한 사랑과 위로 같은 것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이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있을 동안에 교회 아무리 다녀도 그는 하나님의 어떤 사랑도 느낄 수 없고 죽은 영혼이기 때문에 그는 절대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만족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이 생명을 마친 다음에 반드시 죽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모두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악인임으로 그가 죽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 이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닙니다. 신자들은 이 죽음을 통해서 이 죄 많고 슬픔이 많은 세상에서 옮겨져 그리스도 예수의 완전한 사랑의 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구원의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육체의 죽음은 한없이 두려워하지만 그것은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끔찍한 질병과 그리고 말로 옮기기에도 가슴아픈 사고나 그리고 고통스러운 어려움을 통해서 죽어 가는 육신의 생명의 끊어짐은 그 후에 벌어질 영혼에 죽음의 경험에 비하면 그것은 예고편에 불과하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죽음에 대해서 초연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살만큼 살았는데 언제 죽든지 한번 가는 것이 인생인데,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육신이 죽는 것은 죽는 것이지만 그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육신의 죽음에는 그렇게 초연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 죄인들 그 누구도 죽음 이후에 일어날 하나님의 끔찍한 지옥의 형벌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렇게 초연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 날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고 그리고 믿지 않을 형벌들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농담처럼 여겨졌던 기독교의 가르침이 진실인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누구도 여러분들에게 증언해주지 않았던 죽음 이후의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심판 받는 여러분들 앞에서 손을 씻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랜 세월동안 이곳에서 복음의 진리를 들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진실이 무엇이고 그리고 왜 우리들이 회개해야 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어떤 심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치떨리는 것인지를 여러분들은 모두 들었고 그리고 듣고 있고 앞으로 또한 들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거기에 앉아서 말씀을 들을 뿐이지만 저는 외칩니다. 저는 심지어 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면서도 내가 세우고 그리고 내가 개척한 교회인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기 때문에 그것이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정면 적으로 나를 찾아와서 저를 대항했던 여러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사람들의 대항이 두려웠더라면 제가 이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들이나를 향해 돌을 던지고 교회를 떠나도 나는 죄인들과 함께 희희 낙낙하면서 교회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앞으로 모두 떠나고 빈 교회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을 그리워할지도 모르는 회심하고자 하는 한 죄인을 위해서 빈 예배당에서 진리가 선포되고 있는 것이 훨씬 소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역사를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러시아의 망국사를 보셨습니까? 1919년에 코카스서 공산당이 재정 러시아를 집어삼킬 때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바늘을 쳐들며 여기에 천사가 몇 마리나 올라갈까? 축도 할 때는 각도가 몇 도쯤 되면 제일 좋을까? 귀족들은 신발에 다이아몬드를 박고 드레스를 질질 끌고 교회에 나왔고 교회의 목회자들은 노예들이 상전에게 순종하라고 되어 있으니까 잘 복종해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그 억눌렸던 모든 노동자들이 망치와 도끼를 들고일어나서 제일 먼저 때려죽인 것이 귀족들과 성직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가 된 것입니다.
항상 죄인들을 향해서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바는 그가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죽음 그 이후에는 그 악인이 반드시 한번 더 죽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어서 이 죽음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단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여러분들이 오늘 굳은 얼굴로 교회당을 나서지만 내일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지옥에서는 돌이킬 길이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제 이의 기회가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입니다. 한번도 더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죽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날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돌보았던 양떼들 중에 지옥에서 슬피 우는 영혼들이 발견된다면 제가 있는 그 천국이 어떻게 천국이 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회심하기 싫으면 저를 위해서 회심해주기를 부탁드립니다. 만약에 제가 그리스도 예수의 품에 안겨서 그 부자처럼 고통 하는 여러분들을 본다면 그 품에서 제가 어떻게 안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거기가 어떻게 천국이 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영적인 죽음은 육체의 죽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엄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진실로 회개하고 거듭나야 하고 회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거듭나지 않은 불신자가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마지막 남은 가능성은 신자일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성경은 거듭난 악인에 대해서 많이 말합니다. 물론 그들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처럼 완고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강퍅해지고 은혜로부터 아주 멀어지게 되면 하나님을 향해서 대적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지속적으로 악에 빠지게 되면 그는 신기하게도 거의 회개하지 아니한 불신자만큼이나 악한 사람의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 한가지는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악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버려 두지 않고 반드시 그들을 죽게 하신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교리요, 그리고 진리입니다.
오늘 기억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나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요즘 외쳐지고 있는 저 중생의 설교와 회심의 설교와는 나는 관계가 없다. 그리고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것이오, 심판이 있다고 할지라도 로마서 8장은 말하기를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여러분들에게 나는 두 가지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첫째는 여러분들의 구원의 여부는 여러분들의 확신에 달린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하나님의 판단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고 굳게 믿는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변화 받고 구원받은 영혼이 아니라면 여러분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구원받은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을 기억해보십시오.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그때 구원받지 못할 자들을 가려내셨습니다. 그때 그쪽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항의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 우리가 주님을 불렀고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섬기고 그렇게 살았는데 그 무슨 말씀입니까? 그때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희랍어 성경에는 ‘에그노니’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시제로 부정 과거입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는 알았는데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서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모른 것이 아니라 좋은 일할 때나 나쁜 일 할 때나 선지자 노릇할 때나 병 고칠 때나 나태할 때나 열심히 할 때나 그것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확신하고 있는 그 외줄 하나를 붙들고 나는 구원받았다. 왜냐하면 나는 확신하기 때문에, 성경은 그런 교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확신만 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확신하지 않을 수 없는 증거가 그 안에 그밖에 있습니다. 그 사람의 믿음은 단지 심리적인 확신이 아니라 자기 안에 계신 인격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고, 그 신뢰로 토대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솟아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모두 진실인 것 같고 주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분인 것 같고 그분을 위해서는 자신의 행복쯤은 버려도 좋을 것 같다라고 하는 신뢰의 마음이 생겨나고 그 마음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경향이 되는 그것이 그 사람이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만약 여러분들이 구원받은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여러분들은 회심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한번 더 회심하면 무슨 문제가 생깁니까? 한번 더 회개하면 그것이 무슨 손해가 납니까? 만약에 옛날에 어떤 일들이 있었고 지금 희미하게 구원받았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외줄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다시 한번 회개하고 정말 주님은 저에게 너무나 필요하고 그리고 저는 정말 주님의 자녀로 살고 싶습니다 라고 여러분들이 진실로 돌이키면 여러분들은 두 겹줄을 잡고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가 진짜로 구원받은 사람이고 죽음 이후에 두 번째 심판이 없는 확실하게 주님의 책에 기록된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그에게도 역시 반드시 죽음이 있습니다. 왜 악인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났지만 지속적으로 악을 행하고 지속적으로 불순종하고 같은 죄에 끊임없이 넘어지면서도 하나님 앞에 가슴을 찢고 통회할 줄 모르는 그 사람은 오늘 성경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 악인입니다. 그래서 그는 반드시 죽습니다.
그 죽음이 어떻게 일어날까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그에게 가리워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의 마음은 돌 같습니다. 봄에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생명이 있는 나무들은 싹이 나고 잎이 돋습니다만 죽어 있는 나무는 그 단비로 인해서 더 깊이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악한 마음이 더 굳어지고 진리를 증언하고 그에 망가진 영혼의 상태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그들의 영혼은 더 곤고하고 그들의 영혼은 더 괴로워합니다.
생명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장로라면 생명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교역자라면 생명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집사고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교회 생활하고 모태 신앙으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뭔 상관이 있습니까? 생명이 없는데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왜 하나님 앞에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왜 자꾸 나보고 살아있는 동안에 죽음과 같은 삶을 살 것이라고 경고 하실까! 나는 그래도 교회 꾸준히 나오고 장로고 집사고 이런 일들로 섬기고 그렇게 살아가는데 왜 나를 하나님이 그렇게 죽음을 본다고 말씀하실까! 물론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회심치 못하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혁대 풀러놓고 한번 마음껏 죄지어본 적이 있습니까? 힘들 것입니다. 아무리 회심치 못했어도, 그리고 교회 언저리를 돌고 떠나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이 교회 떠나면 마음에 드는 다른 교회를 또 찾을 것입니다. 또 다른 교회 마음에 안 들어서 이 교회 왔고요. 앞으로도 그 일들은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것을 여러분들의 공로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이 바로 악인입니다. 여러분들의 그런 공로만 생각하지 말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 교회 출석하지만 목양도 안 받고 설교도 안 듣고 예배에 마음도 드리지 않고 교인의 의무를 태만히 하며 그렇게 방종하게 살아간 신앙생활 때문에 받았던 교회의 고통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회심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는 뻔뻔스런 삶 속에서 나는 완전히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이 아니라고 여러분들은 스스로 위로하지만 회심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 강퍅한 삶을 인해서 당신의 종들에게 입혔던 마음의 깊은 상처들을 여러분들은 기억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듣고 진실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될 기회를 찾기는커녕 교회에 단점이나 찾아내고 사역자들 뒤나 캐면서 이런 저런 비난이나 늘어놓으면서 교회를 허무는 그런 방종한 삶에 대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편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수많은 진리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사소한 교회의 모순에는 눈에 불을 켜고 마음에 반감을 갖는 그런 식의 삶이 회심한 자의 삶이라고 봅니까? 그런 자의 삶이 바로 악인의 삶이고 그는 살아있고 그는 교회에 있으나 그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교회를 떠나서 이 교회를 왔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생명을 누리는 것은 단지 이 교회에 왔다는 것만으로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고치고 정말 악인의 길에서 돌이켜 서지 않으면 여러분들에게는 칠흑과 같은 어두움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의 감격에서 살고 거룩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맛본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은 그것과는 상관없이 칠흑과 같은 어두움을 헤매며 진리의 말씀이 선포될수록 여러분들은 그 진리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 악을 쌓을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심각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교회 생활에 익숙해져서 자신이 무엇인가 신앙생활에 도가 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트려지는 의를 지향하는 마음에는 관심이 없고 제법 자신이 선생이 된 것처럼 많이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만 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로 변화 받을 줄 모르는 그런 무딘 심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악인이 도대체 누가 악인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죄인으로 그리고 갈 곳 없는 상처받은 양으로 주님 앞에 나와서 그 보배 피로 씻음을 받고 그리고 정말 오래간만에 강퍅했던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녹아지고 변화되는 그런 은혜를 경험하고 살아갈 때는 여러분들은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 얼굴은 천사처럼 빛났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마음에는 주님이 전부였고 그래서 세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배고픈 아이가 엄마의 젖가슴을 파고드는 것처럼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섭취하는데 열심을 가졌고 그리고 여러분의 입에서는 찬송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은 허리를 굽혀 교회를 섬겼고 여러분들이 가진 아름다운 것은 모두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바치고 섬겼고 심지어는 섬길 것이 없는 것을 인해서 아파했습니다. 주님의 착한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지난 주 예배에도 저는 예배 중에 두 지체를 봤습니다. 깊이 졸고 있는 지체들을 봤습니다. 그들은 2년 전에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눈빛으로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면 이제껏 까지 살았던 이 핍절한 삶을 숙명처럼 물려받지 않고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살수 있을까요? 사석에서나 공적 예배에서나 몸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말씀을 찾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아마 어쩌면 이제 저 설교자도 밑천이 거의 드러났고 더 이상 내가 감동 받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증거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악인의 생각입니다.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주셨던 말씀은 항상 같은 말씀을 되풀이해서 주셨습니다. 평생에 듣던 말씀, 평생에 듣던 말씀 우리 주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여러분들에게 그런 말씀의 갈급함이 있습니까? 예배에서 듣고 테이프 가져가서 듣고 집회에 가니까 쫓아와서 또 듣고 나는 그런 것 안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있으면 마음에 부담이 됩니다. 쫓아오면 항상 앞에 앉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왜 테이프는 또 사 가지고 가는지, 차에 가서 듣고 자기 남편에게 주고, 동생에게 주고 그러나 어느 순간에 차갑게 식어 냉담해졌습니다. 지체들이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리는데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돌덩어리와 같은 지체를 보면서 예배 중 내내 울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렇게 악합니다.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그게 죽음이지 뭡니까? 그렇게 하고 자신 속에 있는 그 수많은 허물과 죄는 그 밝은 말씀의 빛 앞에서도 도저히 회개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교회에 무슨 엄청난 비리가 있는 것처럼 찾아내고 뭐가 있겠습니까? 내가 그런 것들을 두려워했더라면 여러분 앞에 서 있겠습니까? 그것이 사악한 삶입니다. 그 삶이 생명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집사라고 불려지면 생명이 있습니까? 장로라고 불려지면 생명이 있습니까? 목사라고 불려지면 생명이 있습니까? 저절로 생명이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거룩으로 가는 길을 위해서 충성되게 살지 않으면 그가 깨달은 많은 진리들은 그를 심판 할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 중에 대다수는 회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중 대다수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회개가 무엇인지, 우리의 죄와 악함을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것이 무엇인지 안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돌이키지 않고 계속 걸어가면 과거에 하나님과 나누었던 사랑의 추억은 오늘날 여러분들 속에 계속되고 있는 악함을 더 확연하게 증거 할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현재적으로 죽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도저히 기도할 수 없는 사람, 여러분, 그렇게 새벽기도 하라고 그래도 새벽기도 안 합니다. 심지어 여러분들 가운데는 집사가 되고 교회의 일군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기도 안 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여러분들 장로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심지어 교역자가 되었어도 새벽기도에 안 나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역자는 제가 혼냅니다.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제가 혼냅니다. 그렇지만 교인들은 그렇게 혼낼 수 없습니다.
찔리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정말 회심의 표징이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고 내가 오늘날 살아가는 이 무지 무각하고 무감각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못박는 것이라고 하는 뼈저린 고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악한 길을 버리고 끊임없이 주님께 속하는 회심한 자의 진실한 표징을 보여주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거의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삶, 교회를 돌보고 영혼들을 섬겨야 할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고 교회를 이끌어가야 할 중차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연약한 교인만큼도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 삶이 정말 회심이 필요하지 않는 삶이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주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실 때 정말 여러분들은 요한이 그러했던 것처럼 발꿈치를 들고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분의 품에 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의 삶이 죽은 자의 삶입니다. 옛날에 하나님을 많이 만난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들을 만나주시는 것은 몇 년 후에 오늘을 자랑하게 하려고 오늘 만나주시는 것이 아니라 몇 년 후에도 변함없이 벧엘에서 만난 그 하나님 붙들고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불러주신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지냈습니다. 외치는 것은 외치지만 여러분들이 굳어진 길에서 돌이켜 서는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악인이 반드시 죽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진실로 하나님 앞에 회심하지 않는 한 그는 죽음과 같은 고통스러운 삶이 계속될 것입니다.
두 번째 교리는 하나님은 그들이 죽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은 죄에 대한 마음과 죄인에 대한 마음이 다르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교리입니다. 우리들이 자녀들을 길러보지 않습니까? 자녀들이 정말 속을 썩일 때가 있습니다. 너무 괴롭고 아픕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내가 저 녀석을 왜 낳았을까? 나이 들어서 저 녀석 낳아 내가 왜 마음 고생을 할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잠들었는데 그날 밤에 아이가 온 몸이 불덩어리처럼 열이 오르며 아프다고 신음을 하면 잘되었다. 이제 죽는가보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달려갑니다. 펄펄 끓어오르는 열을 손으로 재보면서 그때 부모의 마음은 어떤 마음을 갖는지 아십니까? 애야, 너의 고통스러운 밤을 내가 대신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이 아이가 거기에서 완쾌하고 일어나서 다시 부모인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할지라도 어째든 그 밤은 불쌍한 아이가 편안히 잠들기를 원합니다. 이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죄는 정말 미워하십니다. 아주 분노하시도록 미워하고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짓이기실 정도로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그렇게 너무 미워하십니다. 그런데 죄인은 너무 사랑하십니다.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험악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와
그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회심한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도 사랑합니다. 정말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뜻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중에 그 누구도 곤고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그런 하나님은 아닙니다. 여러분들 중에 누구도 심판에 이르는 삶을 살기를 그런 결과가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구역장으로 교역자로 집사로 영혼들을 돌봅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어떻게 하든지 사랑하려고 애를 쓰고, 어떻게 하든지 품에 안고 부화시키듯이 그렇게 변화되기를 그렇게 원하는데도 그가 돌이키지 않을 때는 어느 한순간에 낙담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에이씨, 나도 할만큼 했어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마음이 아니십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탕자의 비유입니다.
보십시오. 재산을 나누어달라고 당돌하게 아버지 앞에 대들 때에도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돌아오지도 않을 것처럼 먼길을 떠났는데도 아버지는 가지고 가는 돈이 아니라 떠나는 아들을 보며 가슴아파하며 사랑했습니다. 먼 나라에서 허랑 방탕하게 산다고 할 때에도 마음졸이면서 사랑했고 흉년이 들고 자기 아들이 돼지우리를 기어다니며 쥐엄 열매를 찾는다고 하는 소식을 들을 때 아버지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돌아올 때도 사랑했고 돌아온 이후에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의 품에 돌아와 눈물을 흘리며 죄의 용서를 빌고 그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그는 결코 아버지의 사랑을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곤고한 삶을 사는 것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것 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의 죄는 너무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슨 행복을 빼앗아 가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소원은 나와 함께 살자. 너 내 안에 있고 나는 네 안에 있어서 그래서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자녀가 되고, 그렇게 내 아들이 흘린 그 십자가 그늘 아래서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하늘의 모든 부요한 것을 누리면서 살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이 악인들을 멸망시키기를 원하셨다면 왜 그분이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을까요? 정말 악인이 죽는 것을 하나님이 보고 싶으셨다면 왜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사람의 형체를 입어 종의 모양으로 나타나게 하시고 그 사랑하는 아들을 그렇게 죄와 고통이 많은 세상에 살게 하셨을까요?
여러분들은 아들을 요즘 같은 좋은 군대 보내놓고도 소포로 부쳐온 옷 붙들고 펑펑 울 것입니다. 집에서 곱게 자란 내 아들 군대에 가서 얼마나 고생할까! 요즘은 고생 별로 안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영광으로 가득 찬 하늘나라에서 천하고 천한 사람의 몸을 그 아들이 입으시고 죄와 그리고 치욕과 멸시가 있는 이 세상에 내려가실 때 그 뒷모습을 보시면서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주님이 당하신 고난 이 죄인을 위함이니
범죄한 날 위해 주 욕을 보셨네
많은 욕을 보셨습니다. 주님이 악인이 죽는 것을 원하셨다면 왜 그렇게 하셔야 했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원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그분을 세상에 보내시고 전혀 죄 없이 당신을 사랑하기만 한 아들인데도 우리의 죄 값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짓이겨지는 죽음을 당하도록 피로 물들이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십니까? 우리를 주님 앞에 살게 하시려고 아들은 죽이셨고, 우리를 부요 하게 하려고 아들은 가난하게 하셨으며, 우리에게 천국의 영생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아들은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사랑하십니다. 사람이 포기한 사람도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오늘 새벽에도 이어진 저의 간절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제 기도대로 제가 살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 설교를 듣고 회심하고 얼마나 큰 교회가 되는 것인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여러분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너무 그런 힘이 없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주님을 거스르고 대적해도 사랑하고 심지어는 여러분들이 저를 미워하고 교회를 욕해도 사랑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매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이 없으면 죄인인 여러분들은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악인이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면 일평생을 강도 짓만 하면서 살아온 흉악한 죄인이 마지막 순간에 염치도 없이 자기 좀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닦아 놓은 낙원에 이르는 그 첫 번째 길을 흉악한 강도와 손잡고 건너갔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종종 여러분들이 하나님은 날 미워하시나 봐 나는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고 하나님 눈 밖에 났나봐. 생각 될 때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을 그 죄에서 돌이키기까지 호세아서 5장 마지막 절에 있는 것처럼 “내가 나의 곳에 돌아가 거기서 기다리리니” 하신 말씀처럼 여러분들이 마음을 찢고 진실로 참회하며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그런 분노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럼 마지막 세 번째 교리. 죄인이 어떻게 하면 다시 살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돌이키고 떠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계속 하고 있는 강퍅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는 말할 수 없는 죄입니다. 여러분들이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 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아니하는 그 죄를 면할 수 없고, 여러분들이 비록 주께서 여러분들에게 엄중하게 말씀하시는 몇 가지 가르침들을 준수하면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주의 모든 말씀을 순종하고 전심으로 어린아이처럼 그 진리의 말씀 안에서 주님 섬기며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셔’라고 하는 경건한 감독은 마지막에 죽으면서 이런 유언을 남기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오! 하나님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마땅히 행하여야할 하나님의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였던 게으름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참회로 자신의 인생을 마치고 눈을 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원하는 신앙생활은 살기 싫은 부부가 애들 생각하면서 어거지로 서로 먼저 죽기를 바라면서 이어가는 그런 뼈다귀만 남은 가정생활, 그런 결혼생활 같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어주기를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예전에 주님을 만나고 그 은혜 속에서 살던 때가 여러분들의 경험 속에 있다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두움의 날들이 물러가고 진리의 복음이 우리의 영혼의 어두운 휘장을 찢을 때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숙명적이리 만치 길고 지루한 어두움의 날들이 사라지고 주님이 이 땅에 내려오셨을 때,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오셨을 때, 그때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 같지 않았습니까? 그때 우리들이 어떻게 그 하나님을 뜨겁게 연애하고, 어떻게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그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하고, 어떻게 주님의 그 사랑에 보답하며 살기를 원하는 착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졌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저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신학을 하고 신학교에 교수가 되었습니다만 저는 아직 어린아이와 같았고 어두움 속에 있었습니다. 그 어두움 속에서 견디기 힘든 날 동안을 기도로 몸부림치고 칠흑과 같은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내며 어느 날 광명한 햇볕과 같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무지하기 그지없는 저의 눈을 뜨게 해주셨고 그리고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들을 비쳐주셨습니다. 저는 그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얼마를 살든지 이렇게 나를 이 어두움 가운데서 빛으로 불러내신 주님을 사랑하며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날 동안에 목자 잃은 양같이 곤고하고 고생하고 유리 하는 영혼들을 위해서 가시고기가 자기의 새끼를 위해서 자기를 모두 죽인 것처럼 그렇게 한 마리의 가시고기가 되어서 그래서 양떼들을 위해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이후로 시종일관 그렇게 그 찬란한 진리의 빛 앞에서 녹아졌던 그 마음대로 살았다고 하나님 앞에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오늘도 날마다 죽으며 날마다 참회하며 그리고 뉘우치며 좀더 주께로 가까이 다가가고 싶고 있지도 않지만 지위와 명예를 주고서라도 우리 주님께 더 많이 발견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힘닿는 대로 주님을 섬기고 여러분들을 돌볼 따름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가책이 있습니다.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이 목장에 건강하지 않는 양떼들이 있다고 생각될 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마음을 완악하게 세우기로 다짐하고 목회자인 제가 위기를 느낄 정도로 완고하게 살아가는 죄인들을 만날 때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픕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할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주님의 사랑을 몰랐던 사람들은 그 사랑을 몰라서 완고하고 그리고 완악하게 살아가지만 주님의 그 큰사랑을 알고 그 십자가의 사랑에 가슴을 찢으며 아파하고 마음이 녹던 사람들이 저렇게 완고해지는 것을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 어떤 때는 그 사람이 죽든지 내가 죽든지 둘 중에 하나가 죽으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할 적이 있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그 영혼을 향해서 정직하게 외쳐지는 이 설교가 그에게 얼마나 커다란 고통을 주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정직하게 마음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영적 생명을 앗아가고 여러분들이 생명 없는 삶을 유지하게 만드는 그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죄가 아닙니까? 무엇이 여러분들의 삶을 무기력하게 하고 여러분들의 삶에 생명을 앗아가서 예전에 감격했던 하나님을 이제는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예배 시간에 졸기나 하고 공상이나 다른 생각으로 채우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항거합니까? 불순종 아닙니까? 거기에 부족해서 여러분들이 대접이나 받으려고 하고 교회에서 높임이나 받으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돌이키는 자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어떻게 하든지 그 죄인을 다루고 싶어하시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진실 되게 참회할 때 그때 하나님은 그가 이전에 지은 모든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십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여러분들이 안다면 제 설교를 듣지 않을 것입니다. 또 내가 만약에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안다면 나는 여러분 바라보며 설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는 모두 지독한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고 죄 가운데 살던 흉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단정한 자녀가 되고 이제 그 막다른 죄의 길로 걸어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돌이켰습니다. 한때 돌이켰고 그 죄의 길에서 떠났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이제는 단정한 주의 자녀가 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여러분들의 눈물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주님을 위해 땀흘리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더 간절한 소원은 제가 피 흘리고 예수 따라감으로 예수님을 이렇게 믿는 것이라고 여러분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완전하지 않지만 날마다 싸웁니다. 다 잘하지 않지만 그래서 날마다 아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정말 돌이키면 용서해주십니다. 너무나 주님을 오래 믿었기 때문에 예수의 생명이 없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입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백발이 다 되도록 노 사도의 삶을 살면서도 그의 마음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가 용솟음쳤고 그렇게 오래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늙을수록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서도 그의 눈은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빛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날마다 돌이키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 생명을 유지하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이 십자가는 구원받지 못한 이 세상을 위한 십자가만이 아닙니다. 오늘도 눈을 들어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굳어지게 하는 세상이나 여러분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는 죄에 대한 욕심을 주목하지 말고 오늘 눈을 들어서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이 여러분들에게 생명 주시려고 무엇하셨습니까? 그분이 여러분들에게 생명 주시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버리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멸시와 욕을 받으시고 우리의 지은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한 몸에 받으시고 짓이긴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이 우리에게 생명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언제나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주님도 아시기 때문에 어느 한순간에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그 은혜 앞에서,
이 벌래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어느 한순간에 죄 때문에 죽음이 자기를 에워 쌓은 것을 보면서 깊이 뉘우치며 빈손 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는 참회 자들을 애타도록 기다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니 이는 곧 돌이키는 자를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그날이 언제든지 간에 하여튼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고 나면 내가 참회했는데도 사람은 내 잘못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가슴에 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를 판단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자를 누가 정죄하리요. 그렇습니다. 사람이 그러면 어떻습니까? 누가 사람이 다 나를 좋다고 하겠습니까? 싫다고도 할 것입니다. 싫다고 하면 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그래서 참회하고 나면 항상 느끼는 것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정결해집니다. 그리고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잠시 세상에 한눈팔고 육체의 욕심에 이끌려서 쓸데없는 일에 몰두했다가도 그렇게 진실 되게 참회하고 나면, 그렇게 돌이키고 나면 정말 예수님만 섬기며 살고 싶어합니다. 정말 눈물을 사발에 받아서 날 위해 고난 당하신 그분의 이마에 흐르는 피를 씻어드리고 정말 내 머리카락을 다 잘라서 밤새도록 신발을 삼아서 그분의 벗으신 발에 신겨드리고 하다가 안되면 살가죽이라도 벗겨서 말려서 고운 바늘을 홍포를 지어서 그분의 몸에 입혀드리고 싶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생명이 회심과 함께 그의 마음속에 다시 역사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삶과 죽음 사이의 엄중한 진리를 여러분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여러분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특별히 여러분들이 거듭난 적이 없다면 깊이 회개하고 오늘 주님 영접하셔야 합니다. 내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긴가 민가 하는 사람들은 두 번 주님 영접하면 뭔 상관이 있습니까? 오늘 영접하고 확실하게 난 이제부터 주님의 자녀로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신자가 되기를 원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예전에 많이 받았다면 지금 더 잘 살아야 합니다. 사소한 것, 이 세상의 욕망을 버리고 지체들의 결점을 보는 일을 버리고 눈을 들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빛 아래서 여러분들이 그 생명을 오늘도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깊이 명심하면서 어린아이처럼 돌이켜 주께로 돌아오는 신자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옛날 신앙을 자랑치 말라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 하는 날에는 그 의가 구원치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 하는 날에는 그 의로 인하여는 살지 못하리라”(겔33:12)
지난주에 이어서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본문 이하로 읽어지는 이 보도는 단지 심판에 대한 경고라기보다는 심판하시면서 정작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지난주에 설교할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마음,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악인의 명망이 아니라 그들이 돌이켜 살기를 원하신다 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설명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죄 가운데 멸망하기를 원하셔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당신께로 다시 돌아와 당신 앞에서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그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절실하게 원하신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을 듣고 깊이 깨닫고 자기를 돌이키는 진리의 말씀에 대한 정직한 반응이 없이는 그가 결코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그 계획에 참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선지자는 말하기를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면서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이 자신의 선택에 달린 문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요지는 이런 것입니다. 만약에 의인이 있는데 오랫동안 좋은 신앙생활을 한 의로운 생활을 해온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범죄 하면 옛날에 행한 의로운 삶 때문에 오늘 멸망을 면치 못할 것이오, 오랜 동안 죄악을 지으면서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오늘 돌이키면 과거의 죄악이 그를 멸망하게 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우선 전체적인 조망을 하자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신앙의 현재성입니다. 즉 과거의 신앙도 중요하고 그 사람이 미래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도 중요하지만 그 두 가지는 그가 현재 그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현재적인 신앙보다는 중요하지가 않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가룟 유다 다음으로 철저하게 실패했던 사람 베드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저주하면서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실패한 사람으로서 어두움 가운데 있는 베드로를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실패한 그 베드로를 주님이 찾아오셔서 물으셨던 그 질문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의 과거나 실패한 처지에서도 미래에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장엄하게 살아야되겠다 라고 하는 위대한 꿈이 예수님께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예전에 사랑했는가 그것도 아니고 앞으로 네가 나를 사랑할래 도 아니었습니다. “Do you love”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이처럼 현재가 중요했습니다.
죄 많은 여인이 식사하시는 예수님께 나와서 향유를 부은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아무 말도 없이 식사하시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떨어진 눈물을 풋미역 같이 기다란 머리로 황망히 훔쳐내며 주님 앞에 향유를 드렸던 그 여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 여인이 그렇게 눈물을 흐리며 주님 앞에 사랑을 고백했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저 여자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적인 신앙입니다.
그런데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돌이키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교묘한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랫동안 신앙생활 해오면서 주님 앞에 열심히 살아온 지난날들에 대한 의에 대한 자부심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뿌리가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자신은 신앙의 온갖 경험을 다 겪어봤으며 그리고 자기도 한때는 주님을 위해서 뜨겁게 헌신하고 섬겼고 지금 비록 과거처럼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사소한 문제일 뿐이고 살아온 나의 삶의 발자취를 볼 때에 나는 주님의 사람이 틀림없다 라고 스스로 과거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는 것입니다.
의인이 왜 범죄 하게 됩니까? 또 범죄 한 상태에서 그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나오는 이 ‘범죄’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패샤’ 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파샤’ 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그 ‘파샤’라는 동사는 죄 중에서도 하나님이 이렇게 규율을 정해놓으셨는데 그것을 어긴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불순종을, 그래서 뉴 인터내셔냘 버전이라고 하는 영어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디스오비던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불순종이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죄 중에서도 불순종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하자면 의인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만약에 불순종하면 그가 의를 행했다고 할지라도 그가 불순종하면 그 의가 그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조금만 생각이 있다면 즉시 이런 교리적인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하지 못할 것이오 라는 이야기는 도대체 그럼 무슨 뜻인가? 그러면 신자들이 의로운 삶을 살아오다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하면 그 구원이 취소되어서 다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다는 뜻인가. 이런 교리적인 질문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번 받은 구원이 영원히 취소되지 않는다는 소위 성도의 견인교리와는 어떻게 연관이 되는 것인가. 여러분들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대답은 이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구원은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영혼의 구원과는 좀 거리가 먼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영혼의 구원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이 죄 가운데 거하면서 불순종할 때 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그에게 커다란 시련이나 고통을 허락하시는 심판을 행하시는데 그때에 그가 아무리 과거에 의로운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이 거기서 그를 건져주시지 아니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의 결과로서 하나님 앞에 받는 징계적인 의미가 있는 이 심판에서 자기의 백성들이 아무리 과거에 의로운 삶을 살았어도 지금 불순종하면 그를 구원해주시지 않겠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에 표명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통해서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의로운 행동을 하면서 신앙생활 해왔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고 마음을 지키면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필요가 적다라고 할 수 없도록 만드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들 안에 있는 많은 태만함의 그 뿌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는 안전함, 그리고 여러분들 마음 안에 있는 여러분들의 불순종을 하찮게 여기는 굳어진 그런 마음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올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세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과 그리고 뒤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외친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유대인들은 두 가지 점에서 이분들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다니 이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다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하는 점에서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오면 기뻐할지니 라고 말해야 되는데 왜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오는데 회개하라고 명령함으로서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축복이 아니라 자기들을 깔아 죽이기 위한 거대한 바퀴가 굴러오는 것처럼 그렇게 위험을 경고하는 메시지를 자신들에게 주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죄인들이고 그들보다도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자처럼 살아가던 악한 사람들조차도 그 메시지를 깊이 이해하고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키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단지 육적인 이스라엘의 껍데기뿐이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왕국으로서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성령의 역사로 오는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이들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이고 영적인 이스라엘이 진정한 이스라엘이지 육적인 이스라엘 할례의 표를 간직한 이스라엘 그 자체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교인이면 모두 교인입니까? 유서 깊은 신앙의 집안에서 태어나고 신앙의 뿌리가 깊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은데 기억하십시오. 조상의 가문이 그대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적인 신앙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전에 아무리 교회에서 충성하고 예전에 여러분들이 아무리 뜨겁게 주님을 만나서 폭포수처럼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준 흔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집을 몇 번씩 팔아서 여러분들이 건축헌금을 드린 경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오늘 여러분들이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심판하십니다.
오늘날 여러분들 가운데는 암암리에 이런 자부심들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정리가 된 사람이다. 적어도 나는 젊은 시절에 뜨겁게 주님을 만났고 그리고 예수 한 분을 위해서 살아왔다. 지금은 비록 내가 이렇게 살아가지만 미래에는 내가 위대한 헌신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다. 이런 저런 교회에 직분을 맡아서 나는 교회 목사인데, 나는 교회 장로인데, 이 교회에서 잔뼈가 굵었는데, 나는 이 교회 집사고 어려서부터 이 교회 다녔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과 헌신에 있어서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을 받아서 내가 영혼을 돌보는 구역장까지 되었는데 등등의 헛된 자부심들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오늘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의 정직한 삶을 성찰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목양 받기에는 내가 이미 목양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성숙했다고 생각하고 든든히 서 있다고 생각하는 하늘을 찌르는 그 교만과 그리고 마치 신앙의 세계는 자신 혼자 다 섭렵한 것처럼 모르는 것이 없이 매사에 선생노릇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속에 있는 이 자부심, 그것이 그 사람을 망가트리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입니다.
지금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뛰어난 신앙의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칩시다. 지금 여러분들이 그런 불붙는 선조들의 신앙을 재현하고 있습니까? 좋습니다. 옛날에 깊이 깨트려져서 복음을 만나고 정리되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고 칩시다. 지금 여러분들은 어린아이처럼 그 복음의 진수를 경험하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살아있는 영적 생활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전에 그 뛰어난 헌신으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았다고 칩시다. 지금 여러분들이 열렬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어린아이처럼 그 하나님의 일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헌신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린아이처럼 참회하며 주님을 손잡고 자기의 죄를 빌고 그리고 일평생 가난이 오든지 시련이 오든지 심지어는 몹쓸 병에 걸린다고 할지라도 내가 주님을 놓지 않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겠습니다. 그런 신앙의 고백을 하던 착한 성도였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그렇게 주일이 기다려집니까?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어린아이처럼 아무 것도 필요 없고 이 쓸데없는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는 목사의 허울도 벗어버렸고 장로의 껍질도 벗어버리고 신앙이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 외투도 벗어버렸습니다. 오로지 진실과 사랑하나로 매시간 자기를 벗겨주시는 그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며 우리 자신을 고백했습니다. 참회의 눈물이 있고 예배의 감격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여기가 극장입니까? 왜 예배 시간에 늦게 옵니까? 어느 날 여러분, 예배가 시작되고 정문이 닫히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한번 그 밖에서 한번 이렇게 하나님이 내가 오만하게 신앙생활을 해도 언제든지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안 받아주시는 때도 있다라는 때도 한번 경험해보시기 바랍니다. 지존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여러분,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지각하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이게 예배입니까? 정말 하나님이 민방위교육 참석하는 것처럼 그렇게 건들거리고 나오는 오만 방자한 여러분들의 태도를 하나님이 계속해서 두고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들이 누구를 위해서 이 교회를 나오는 것입니까?
저는 여러분들에게 회심하라는 저의 외침을 듣고 그것이 싫어서 여러분들이 교회를 떠나면 저는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차라리 길거리에 흩어져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뭡니까? 왜 예배 시간마다 늦게 나옵니까? 여기가 민방위교육 장소입니까? 여기가 영화관입니까? 상영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까? 도대체 여러분들은 누구를 예배하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들입니까? 이것이 정말 회심한 사람들이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사람들의 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러고도 지난날에 주님을 만난 것들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만난 신앙의 경험들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오늘날 여러분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에 있어서 무수한 불순종들을 당연하고 그리고 이런 것들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으며 과거에 주님을 위해서 내가 자신을 드렸던 아름다운 헌신에 비하면 오늘날에 이 불순종과 패역함은 사소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해를 하여야 한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정말 여러분들이 성경을 통해서 배운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보내신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이해하는 성도들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오늘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과거에 어떤 화려한 전력에 빛나는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오늘을 보고 싶으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 순결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악함과 더러움을 인해서 괴로워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깨끗해져서 그분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싶은 것, 그런 마음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이전에 핍박 자요 포행자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스데반과 같은 사람이 예수를 위해 피 뿌리고 죽어가던 그때에 그는 핍박 자요 포행자로 살았습니다. 너무나 긴 세월동안 그는 예수를 위해 살았습니다.
저는 그분을 깊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만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순교하시기까지 그분의 생애는 땀을 흘리고 피 쏟고 눈물로 범벅된 가운데 주님을 섬기며 산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슴에 새겼던 것은 로마의 선교를 위해 헌신했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성밖으로 내동댕이쳐지고 수많은 재판관들 앞에서 치열한 심문을 받고 그런 것 한번도 과거를 회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오직 죄수의 몸이 되어서 이제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 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그가 회상한 것은 나는 핍박자요 포행자였노라 그것을 회상했습니다. 과거의 의로운 삶을 회상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다 용서해주신 것, 그래서 지금은 문제도 되지 않는 것, 그것을 회상했습니다. 주님이 아무리 나를 용서하시고 주님이나를 아무리 사해주셨어도 나는 잊을 수가 없노라. 나는 이전에 핍박 자요 포행자였노라 자기의 의로움이 아니라 불의함을 회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흉악한 죄인이오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회상하면서 무엇을 다졌는지 아십니까? 현재적 신앙을 다졌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은 사도도 아니오, 이방인의 선교의 아버지도 아니오, 주님의 큰 일군도 아니오, 나는 핍박자요 단지 포행자였고 주님을 거슬려 대항하던 못된 인간이었기 때문에 이제 나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라는 고백 속에서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에 잘 산 것 우리 회상하지 맙시다. 모두 잃어버리고 오직 하나 우리가 주님을 믿기 이전에 얼마나 주님을 거슬리던 악랄하고 야비한 죄인들이었는지 그리고 주님의 그 큰 구원의 사랑을 받고도 얼마나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돌같이 굳어진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며 살아왔는지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의 성장을 갈망하는 사람도 아니고 큰 교회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잘 모르시겠지만 이다음에 천국에 가시면 제가 이 점에 있어서 얼마나 정직했는지를 여러분들이 알게 되실 것입니다. 저는 큰 교회를 꿈꾸는 목회자가 아닙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이름 없는 시골에 교인들 몇 명 돌보면서 착한 목자로 살수만 있게 주님이 그것을 원하신다면 내일이라도 보따리를 싸고 떠나고 싶은 마음입니다. 제가 마음속으로 박봉진 목사님을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여러분들은 모르실 것입니다.
저는 교회 다시 개척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보다 더 어두운 사람들, 그리고 돌봐주는 사람들이 없어서 유리하고 방황하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다만 곤고한 영혼들이 몰려오니까 교회도 짓고 좌석도 늘리고 그렇게 하면서 일이니까 할 수 없이 따라가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요즘에 와서 제 자신의 사역과 삶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한 교회는 한 목회자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관계를 보여주는 청사진인데 나는 여러분들의 삶을 이렇게 보면서 오늘 새벽에도 그런 명상을 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그 교회가 아니다. 내가 젊은 날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황무지에 깃발을 꽂을 때 내가 꿈꾸던 그 교회가 아니다. 정말 아닙니다. 정말 제가 꿈꾸던 교회는 이런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이제 저는 비로소 아주 마음 깊이 이제 정말 여러분과 맞서서 싸우지 않으면 이 교회가 결코 미래의 건강을 보장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마치 칼날이 허공을 가르면서 소리날 때 가슴에 사무치도록 밀려오는 그런 서러울 정도의 큰 아픔이 제 마음속에 예리하게 느껴집니다.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생명 없이 굳어지는 신자들의 삶을 보면서 좌절하는 것입니다.
제 소원이 무엇입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커다란 사택을 구했습니까? 많은 사례비를 제가 여러분들에게 원했습니까? 제가 정말 보고싶은 것은 여러분들의 좋은 신앙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 흘릴 줄 알고, 그렇게 자기를 구원해주신 십자가의 사랑에 사무쳐서 무엇이든지 기쁨으로 섬기며 살아가고 자기를 위해 기도하고 자기를 위해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자들에게 순종하면서 참된 신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 그것이 제가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은 제가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저를 통해서 당신의 마음을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목양 받기에는 자신이 너무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하늘을 찌르는 것 같은 영적인 교만, 논리도 없이 뭉개버리면서 불순종의 삶을 계속하는 그 악한 삶, 오래 전에 예수를 믿고 그렇게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지 않는 그 인색한 삶, 자기를 위해서는 넉넉히 물질을 쓰면서도 고통받는 이웃이나 교회를 위해서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그 구두쇠와 같은 삶, 이런 것들은 어떤 식으로 변명을 하든지 간에 회심치 않은 자의 표징이지 성숙한 자의 표징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이 어느 날 심각하게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예배 시간에 눈물을 흘리고 참회하는 사람들이 같은 사람들이 똑같은 참회를 계속하고 하나님 앞에 깨트려질 줄 모르는 사람들은 오히려 정직하고 진실한 복음이 전해지는 그 날에 마음이 더욱 굳어지는 것을 발견하면서 저는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서 한없는 고통을 느낍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교회를 개척했을 때 이런 교회를 내가 보고 싶어서 교회를 개척했을까 생각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그 신앙의 날들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옛날에 하나님 앞에 헌신을 많이 해서 그래서 오늘 어떻다는 것입니까? 옛날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생애 적으로 고꾸라져서 변화를 받아서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의 경험 자체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주님을 크게 만났다면 그게 무슨 여러분의 공로입니까? 여러분들이 전쟁을 해서 얻은 탈취 물입니까? 여러분들이 그것을 자랑하고 자부심을 느낄만한 그 무엇을 여러분들이 거기에 보태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정직하고 그리고 더 진실해져서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마음을 지키며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배우기를 힘쓰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지 그것이 정말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인격적인 표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어린 청소년들까지 목회자가 새벽기도 안 한다고 안타까워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새벽기도에 나오고 기도하는 청소년들이 있는데 전혀 기도하지 않고 어쩌다 일주일에 한번 대예배 기도라도 순서가 다가오면 훈계하듯이 거기서 장황 설을 늘어놓는 그런 기도자의 그런 가식적인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실 것 같습니까? 그런 기도가 여러분, 예배에 오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고 계십니까? 정말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없는, 그래서 정말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고 자신의 삶이 정말 하나님 앞에 너무 수치스러울 뿐이다라고 할 것 같으면 둘 중에 하나 그 예배 시간에 모든 회중을 대표해서 정직하게 눈물로 참회하든지 아니면 내 삶이 너무나 방종하고 은혜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거룩한 예배를 수종드는 일을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사양을 해야지 어디라고 덤벙덤벙 올라와서 말도 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조차도 없고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이 많은 사람들에게 뭔가를 가르쳐야겠다는 그런 지적인 오만으로 가득 찬 그런 기도로 거룩한 하나님의 예배를 흠집 내는 것에 대해서 정말 여러분 회개한 적이 있습니까? 과거의 의로운 모든 삶에 대한 자부심,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보십시오. 과거에 의로운 행위를 하고 그렇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오늘 불순종 가운데 있으면 그 과거의 의로운 삶이 그를 구원할 수 없고 이미 그를 징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확정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연단의 심판은 정해졌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신앙생활 하시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 사람을 보탠다고 해서 교회가 여러분 감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회심하지 못한 성도들이 모인 교회의 인해전술로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진심으로 사무치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영광을 인해서 가슴 저미는 아픔으로 주님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주님이 임해주시기를 갈망하며 그렇게 기도하기조차 부적절한 자기 자신의 더러운 죄들을 깊이 뉘우치며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나라는 오는 것입니다.
나는 이 교회에 뿌리내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교회를 개척할 때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교회가 제가 목회자로 만나는 첫 교회이고 마지막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소원은 제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뿌리내리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뿌리내리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도 뿌리내리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고 깊이 회개하고 어린아이처럼 반응하며 주님의 목양을 받으면서 진리 가운데 살든지 아니면 교회를 통해 영혼의 유익을 얻을 수 없으면 훨훨 떠나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거의 내 설교를 듣지 않고 목양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날이 오면 예고도 없이 훨훨 떠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보다 더 목마른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 사랑 전하고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큰 교회 목회자로 좋은 사택에서 사례금 많이 받고 비싼 차 타고 다니다가 죽었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눈을 들어보십시오.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 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주기만 하면 흐느끼듯이 그분의 품에 쓰러질 익은 곡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진리의 낫을 대기만 하면 잘라져서 추수하는 우리의 품에 안길 익은 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이 주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안다면 어마나 행복해할까요. 아마 여러분들이 옛날에 그런 것처럼 녹는 마음으로 어떻게 하든지 좋으신 주님을 위해 살고 싶어할 것입니다. 길거리에 돌처럼 굴러다니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들판에 잡초처럼 버려진 것이 주의 일입니다.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가고 싶습니다. 정말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살아있는 날 동안에 우리의 입에 혀가 굳고 우리의 혈관의 피가 식을 때까지 그렇게 주님을 필요로 하는 영혼들에게 그들에게 다가가서 섬기다가 그들 가운데 안겨서 죽는 그것이 정말 우리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교회 창립 9주년을 맞으면서 하나님 앞에 중대한 결심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교회의 사람으로 교인들이 세운 목회자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살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교회의 중직에 오를 수 없습니다. 나는 생명을 걸고 주님의 이 분부를 지킬 것입니다. 회심치 않은 사람은 그 누구도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없도록 제가 온몸을 다 던져서 막을 것입니다 오직 정직하고 진실한 신자들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교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고 그리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주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세워 가는 것이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거듭남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세례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의로운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지금 불의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불순종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이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예전에 의로운 삶을 살았지만 지금 불순종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 환난을 만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아직 견딜만하다고 생각되시면 그 환난은 강도를 더할 것이고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설교는 최후통첩이 될 것입니다. 환난과 시련이 꼭 우리의 삶의 환경을 에워싸고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전에 여러분들이 아무리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지금 여러분들이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여러분의 영혼은 지금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예전처럼 가슴에 다가와서 달고 달아서 송이 꿀처럼 느껴집니까? 고난이 오거나 시련이 와도,
주 내 마음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두려워하지 않고 내 안에 계신 그 주님을 의뢰할 든든한 평강이 여러분들을 사로잡고 있습니까? 모두 구원을 필요로 하는 여러분들의 영적인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버리십시오. 지난 신앙생활에 잘한 것들에 대한 자부심들을 철저히 버리고 오직 두 가지만 생각하십시오. 내가 죄인이오, 흉악한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주님이 그 죄를 용서해주셔서 새사람으로 만드신 그 은혜만을 기억하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참회가 있는 삶을 살기를 예수의 아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 악인이 있다 치자. 그 악인이 죄의 길에서 돌이키면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달을 수 있는 첫 번째 사실은 악인은 반드시 엎드러진다는 것입니다. 즉 패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회개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든든히 서있는 것 같으나 그러나 어느 날 홀연히 무너져 내립니다. 든든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에 홀연히 무너져 내리고 무너져 내릴 때 그 멸망의 비참함은 서 있을 때 영광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은 성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다가 마지막에 버린 사람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대표적인 한사람이 구약에서는 사울이었고 신약에서는 가룟 유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사람으로 얼마나 겸손했는지 모릅니다. 그를 기름 붓고자 선지자가 왔을 때 자기 같은 사람이 어떻게 기름부음을 감당할 수 있을까 피해 다니면서 숨었던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왕국의 시대를 처음 여는 위대한 인물이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후일 그가 교만해지자 말로가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당신의 성령을 거두시고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신이 그에게 임했고 정신병자로 최후를 마쳤습니다.
가룟 유다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달콤하게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깊이 이해하였으며 모든 병든 것과 약한 것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영적인 권세를 다른 사도들과 함께 받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파송을 받은 사도 중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물질에 대한 사랑에 눈이 어두워서 예수님을 버렸을 때 결국은 그렇게 뇌물로 받은 예수님을 판돈조차도 쓰지 못하고 목매어서 땅에 떨어져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와서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것이 악인의 최후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악인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루셔서 그들로 하여금 낭패를 보게 하시고 구원받지 못했는데도 여전히 회심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영혼까지도 멸망에 던져버리시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끝까지 뉘우치고 참회해서 불순종의 길로부터 돌아서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영혼은 구원하시되 그 육신은 징계를 당하게 하심으로 심지어는 그 영혼이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것과 같이 부끄럽게 만드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악인은 반드시 엎드러진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이나 악인의 번성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압니다.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며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그렇게 주님께로부터 영적인 생명을 공급받으며 교통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행복을 삼습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면 벤 풀이 마름과 같이 번성했던 악인은 간 곳이 없고 그 악인의 번성함에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비참함으로 악인이 엎드러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불행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들은 이 세상의 번영과 영화에 헛된 것을 알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정말 바르게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악인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엎드러지기를 원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고 우리의 일생동안 잘 믿은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걸어왔는지 우리의 신앙의 마지막이 악인으로서 엎드러지는 것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발견되는 두 번째 교리는 그 악인이 돌이키면 그 악이 그 사람을 엎드러뜨리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의에 대한 사상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두 번 반복하겠으니 잘 새겨들으십시오. 한사람의 신자가 아무리 완벽에 가까운 의로운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 의는 진실한 참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그 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한사람의 신자가 아무리 의로운 삶을 살려고 애를 썼다고 할지라도 그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 쌓아올린 그 의는 그리스도 앞에서 진실한 참회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덧입는 그 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순종의 길을 계속 걸어가는 사람은 불의한데 그 불의가 예전에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았던 그 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것이고 악인이 죄만 지으면서 일평생을 살았지만 주님 앞에 진실한 참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 덧입게 되는 그 의가 그 불의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처럼 입증해주고 있는 한 예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실 때에 회개했던 한 강도의 모습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처형될 정도였으니까 당시로 말하자면 그는 정말 커다란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마 죄를 지으면서 짐승처럼 살아온 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필이면 그 경건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일생동안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 그 강도와 손을 붙들고 낙원에 이르는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의가 과거에 살아왔던 불의한 삶보다 훨씬 컸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의로움을 덧입고 그 흉악한 강도가 주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었습니까? 십자가에서 그 강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진실한 회개가 있었습니다.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그래서 예수님이 그를 용서해주시고 주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난 날 불순종하며 죄악 가운데 살았다고 할지라도 오늘 진실하게 참회하면 의롭게 살면서 회개하지 않은 그 사람들보다 훨씬 하나님이 사랑을 많이 받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이렇게 당신을 멀리 떠난 죄인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에 불을 지펴서 당신께로 돌아오시게 하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주님을 원망할 수 없고 심지어는 우리들이 심판을 받고 환난을 당해도 주님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에게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는 죄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마음으로 내가 간절히 여러분들에게 권합니다. 진실하게 참회하고 주님께 돌아가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회심하는 자의 죄를 잊으시는 하나님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법과 의대로 행하여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물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 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 찌라 그의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정녕 살리라 이는 법과 의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라”
신앙의 현재성에 대해서 힘주어서 말한 다음에 선지자는 계속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기록된 14-16절까지의 말씀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예전에 의를 믿으면서 오늘 악을 행할 때 주님이 그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는 메시지로 인해서 그들이 낙망하지 않도록 죄인들의 돌이킴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14절부터 16절을 읽으면서 무엇인가 마음에 석연치 않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교리 가운데 하나님의 불변하심이나 혹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교리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죄 가운데 행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너는 그 죄 때문에 정녕 죽을 것이다. 이렇게 선고를 하셨는데 잠시 후에 하나님이 너는 다시 산다. 그리고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고를 번복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과 같지 아니하다는 사실이 성경 여러 곳에서 증거 되고 있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특별히 자기의 글 속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자기가 말씀하신 것을 식언하지 않으신다 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불변하심이나 혹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교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서는 이렇게 하나님이 잠깐 사이에 이렇게 저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며 당신의 뜻을 바꾸시면서 금방 죽을 것이라고 하는 죄인을 살리시기도 하고 살 것이고 말씀하셨던 그 의인을 죄로 말미암아 죽게도 하신다고 말씀하셔서 이런 아름다운 교리들에 대해서 오해를 빚을 여지를 남겨두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이런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무엇인가 하나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 부분을 부각시키는 문학적인 형태를 취합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통해서 강조하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자주 말을 바꾸시기도 하는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으신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에 죄인들의 돌이키는 회개가 얼마나 커다란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가 하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함이고, 이것들을 통해서 또한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키기고 싶으셨던 것은 하도 많은 그들의 죄악을 인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심판을 확정하셨다고 할지라도 기회는 여전히 남아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심으로서 그 엄중한 심판 속에서 당돌하게 그 심판을 감당해서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죄악 된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 피할 길이 열려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돌이킴에 대해서 설명을 하시고 계십니다. 즉 도저히 회피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사망의 심판을 뒤집을 수 있는 그 비결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시기를 하나님 앞에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이키기만 하면 심판이 확정된 사람에게도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얻을 수 있고 사망이 확정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서 그 죄의 사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은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죄 가운데서 태어났고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죄를 자신 속에 가진 불순종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의 자손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죄를 마음에 간직하고 태어난 그 사람들은 예외 없이 그 죄의 뿌리 속에서 악의 열매들을 거두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거스르고 주님을 모르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된다라고 하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보여주셨지만 죄인들은 눈이 어두워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이 세상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데 그것이 주님을 거스르는 가장 큰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온 세상과 우주의 주인인지 알고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 근본이신 하나님을 몰라보고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죄를 지으면서 자기의 욕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 그 삶이 바로 죄이며 그 죄로부터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망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죄 가운데서 죽음과 함께 태어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지금 죽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한번 정하신 그 육체의 죽음 이후에는 지옥의 불붙는 형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동의하든지 동의하지 않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고 그 죄인들은 이런 하나님의 엄위 하신 심판에 대해서 동의할 자격도 없고 하나님의 판단은 그 죄인들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살아간 죄인들은 마지막 날에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고 그리고 그 형벌의 대가는 지옥 형벌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없이 자기의 마음에 원하는 대로 자신을 이 세상에서 최고인지 알고 하나님도 몰라보고 주님도 섬기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간 그 삶의 마지막 대가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형벌로 던져진다는 점에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부분적으로 이미 구원을 얻은 신자들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서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약에 계속해서 죄 가운데 거하고 진실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의 삶에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삶들, 그 속에 깃드는 독특한 불안과 고통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는 교회에 나와도 양심의 위로를 얻지 못할 것이며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뒤따라오는 하나님의 그 풍성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경험 없이 살아갈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섬기다가 죄와 함께 죽어가지만 신자는 주님의 생명도 알고 은혜도 알았습니다. 그 구원이 무엇인지도 알았고 복음이 무엇인지도 깨달았지만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살았기 때문에 그는 사실상 죽은 사망과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거듭나서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군사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본분이지만 그는 죄악 된 자신의 마음에 고용된 용병처럼 살아가기를 좋아합니다. 진실한 신자들,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말씀과 그 은혜에 순종하고자 살아가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동안에 그 나일론 신자들은 자기들의 배를 섬기면서 살아갑니다. 그가 주일 예배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서, 그가 베푸는 몇 푼의 헌금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자신도 신자라는 사실을 사람과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기 위한 최소한의 양심입니다. 그가 무엇을 행하든지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행하는 것이 없는 사람으로서 살아갑니다. 그는 빛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지만 여전히 어두움 속에서 이중간첩과 같은 삶을 살기를 좋아하고 돌이키지 않는 자들이 누리며 살아가는 세상의 달콤한 유혹과 자신의 즐거움에 심취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이중 인격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해지기 위해서 무엇인가 고난과 희생을 감수해야된다고 하는 복음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하나님보다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회심치 않은 사람들의 대표적인 본이고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정적인 회심이 없이 이런 식의 삶을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무디어진 마음의 양심과 죽음과 방불한 어두움이 그의 신앙생활 속에 깃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돌이키도록 간절히 설득하고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귀틀집을 짓고 움막에서 살던 때보다 수백 층 고층 빌딩이 올라가고 사이버 시대를 살게 되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읽고 있는 이 성경은 무려 25-600전 경에 쓰여진 글입니다. 25-600년 전에 우리 나라는 역사라고 불릴 만한 변변한 기록도 별로 없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래도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다가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발달한 문명을 살고 좋은 옷을 입고 큰집에 살고 무슨 이런 저런 직함을 가지고 사는 것은 그 모두 껍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국민소득 삼만 불 되는 것이 이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소원입니까? 우리 모두 복지국가가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정말 잘먹고 잘사는 나라가 되는 것이 주님의 간절한 바램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진정한 바램, 주님의 간절한 바램은 여러분들이 죄에서 진실로 돌이켜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사랑을 많이 받으며 그렇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을 이 세상에 사람답게 살게 하심으로 받고 싶으셨던 그 기쁨이 우리의 처음 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좌절되었는데 거듭나게 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때 못 받으셨던 기쁨을 한번 받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신자되어야 할 이유이고 신자다운 참 신자가 되어야 할 요구,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은 자기로부터 멀리 떠나간 그 자식들을 애처로운 음성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집을 나간 자식을 두고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집을 떠나간 자식들을 인해서 마음 아파하는 부모의 심정이 되어본 적이 있습니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집을 나간 자식들을 미친 듯이 눈물을 흘리며 찾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간절한 자식을 찾으시는 고백과 눈물로 이어진 책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당신과의 아름다운 연합이 끊어지고 불순종 속에서 살아가면서 당신과의 생명적인 관계를 상실한 비참하고 그리고 불행한 죄인들을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도 그 죄인들을 찾으십니다. 집나간 자식을 찾아 나서는 그 부모의 통곡하는 마음, 그 자식을 찾는 아비의 흐느끼는 마음이 마지막에 그 자식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집을 나간 자식을 빨리 찾아와서 빨리 직장에 보내서 돈 많이 벌어서 효도 받고 싶어서 그 집나간 자식 생각에 눈이 짓무르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돌아와 돌아와 집을 마음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와
그냥 같이 있고 싶은 것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은 같이 있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려는 여러분들을 회심시켜서 당신의 품으로 불러들인 다음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통해 얼마나 많은 영광을 받을 것 같습니까?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주님 없이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회개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면 일생동안 흔들리지 않는 발걸음으로 예수만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옛날에도 회개했고 그래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나 같은 죄인 살려주신 그 예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고 예전에 불순종하던 삶을 모두 보혈의 강물에 떠내려보내고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주님만을 위해서 살겠노라고 다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가고 그 진실한 회개와 아름다운 고백들은 빛이 바랬습니다. 그리고 죄악은 우리를 삼키고 우리의 영혼은 다시 방황했습니다. 그 가운데 주님 없는 삶의 재미를 맛보았고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회심하지 않은 상태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과거도 그러했으니 앞으로도 우리는 그렇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것입니다. 오늘 진심으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오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이 삶은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삶입니다. 지금은 위험하지 않은 것 같고 안전하며 오히려 주님께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가서 주님께 우리의 인생을 맡긴 것이 불안해 보이는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주님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엄마 아빠 없이 아이가 벼랑 끝에서 뛰어다니는 것처럼 위험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연약한 존재이고 창조될 때부터 주님께 기대어 살도록 창조된 갈대와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부터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기대고 주님의 손을 붙들고 그분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분의 은혜 안에서 그분의 도움을 힘입으면서 살수밖에 없는 의존적인 존재로 주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주님 없이 살수 있겠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돌이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몇 달 동안, 혹은 몇 해 동안이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분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오늘은 제발 마음을 열고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의 초청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장난이 아니고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을 통해서 주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나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수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이면서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지 않는 그런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 앞에 돌이킨 자의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로 말하는데 우선 첫째는 죄를 떠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법과 의를 따라 사는 것이고, 세 번째는 자비를 베푸는 것이며, 마지막 네 번째는 순종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회심한 자의 표징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선 첫째는 돌이킨 자에게는 죄를 떠난 마음이 있습니다. 죄는 구체적으로 돈을 훔치고 간음을 하고 탈세를 하고 폭행을 하고 살인을 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며 악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죄는 그런 악의 뿌리입니다. 그러니까 그 뿌리는 하나님과 생명적인 연합을 가지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영적인 생명과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악을 행하고 싶어하는 경향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반역하는 마음과 주님께 순종하지 않으려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요구대로 살지 못하는 그 무능력함을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죄는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악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까?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악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가 가만히 있으면 그가 악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말을 보고 그의 글을 보고 그가 행동하는 것을 그리고 그의 생활을 보면서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화: 직장생활 하실 때 동료 직원 중 한사람이 오토바이를 타는 것을 좋아하는데 교 통사고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자신이 오토바이로 사람을 치고 뺑소니를 쳐서 근 처에 숨었지만 경찰들이 숨어 있는 자신을 찾지 못하고 갔다며 그 사람이 죽었을 지도 모른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는 이야기)
그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마음속에 있는 악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그 사람은 거기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이야기 거리로 한 것입니다. 지금 같았으면 내가 당장 고발했을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어디에 있어! 그런데 그렇게 마음속에 있는 악을 그렇게 보여준 것입니다.
죄도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게 아닌데 죄가 있으면 죄가 마음속에 있는 것이 자꾸 악으로 드러납니다. 거기로부터 떠난 것이 회심한 사람의 표징입니다. 이제껏 까지 만약에 여러분들이 술 먹고 노름하고 난봉피우고 나쁜 짓을 하면서 습관적으로 살아왔다면 거기로부터 돌이켜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그 죄에서 떠날 수 없고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들에게 사망을 선고하십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계속 영적인 죽음 가운데 있다가 육체도 죽고 그 영혼도 지옥의 형벌에 던져지기 때문에 죽음이 선고된 것이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신자라고 하면 그렇게 계속되는 불순종 속에서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면 지금 이미 사망이 여러분들의 영혼에 가득합니다. 기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고난과 위기를 만났는데도 ‘주 여호와는 내 편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라는 담대함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어떠한 영혼의 유익도 철저히 여러분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것이 사망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죽음입니다.
신자들에게서 제일 불행한 일,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할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무엇일까요? 가난한 것, 아닙니다. 고생을 많이 하는 것,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나는 것, 아닙니다. 시련과 그리고 고난이 폭풍처럼 몰아닥치고 이 세상에 많은 친구들에게 버림을 당해서 벌판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것 같고 온 길도 알 수 없고 갈 길도 알 수 없는 흑암과 같은 풍랑 속에서 별빛조차 없는 어두운 밤바다를 항해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동만 할 수 있다면 살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침묵하지 않고 말씀해주시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폭풍도 지날 수 있고 어두운 흑암 속도 항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니까요.
우리의 인생 길은 어차피 그분을 영접하고 신자가 되기로 결심한 다음부터 모험적인 삶이 아니었습니까?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는데도 그분이 가라면 자지러질 듯이 울면서도 그분의 손을 잡고 순종하니까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는데 주님께 복종하니까 나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길, 마치 병아리가 알속에서 그밖에 있는 세상을 볼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길을 주님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덧 눈에 보이는 대로만 살지 않고 눈에 안보여도 주님의 말씀이 가라면 가고 주님의 말씀이 거기에 멈추라면 멈출 수 있는 그런 신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신자는 누구일까요? 기도할 수 있는 사람,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의 손이 자신의 마음을 정결케 하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인생의 길을 모를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리고 길을 알면서도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데 무릎을 꿇고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며 은혜를 구하면 순종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시는 그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죄를 떠나지 않고는 이런 삶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분입니까? 그런데 손이 범죄 하면 너희 손을 도끼로 찍어버려라. 눈이 범죄 하면 눈을 빼버려라. 예수님이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말씀하셨던 것은 결국은 예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를 아무리 많이 사랑하시고 우리 같은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셔도 우리들이 죄를 떠나지 아니하고는 그 사랑을 알 수도 없고 그 사랑을 뼈저리게 소유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죄는 질병과 같습니다. 누구도 여러분들을 수술대 위에 눕혀놓고 여러분들의 암을 도려내는 의사가 여러분들의 몸을 가르고 칼로 여러분들의 폐부 속을 헤집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피들을 쏟아내고 살들을 잘라내는 것을 보며 가혹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병든 환자가 어떤 치료를 받아야 하는가는 환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왜 요즘은 계속해서 지루하게 죄의 깨어짐, 무슨 회개 무슨 이런 설교만 계속하나. 성경에 그런 진리밖에 없나. 아! 진부하다. 매일 듣는 이야기가 십자가 앞에서 깨어져라, 뭐 무슨 회개하라, 그것 밖에는 진리가 없나, 좀 실질적이고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고 들으면 기분 좋은 이야기만 해주면 안되나.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병들어서 도려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아스피린을 달라고 해서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고쳐져야지, 죄에서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제가 계속해서 죄에 대해서 설교하기 때문에 제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럼 받아들이지 말고 하나님께 가서 여쭈어보십시오. 하나님, 죄에서 안 떠나도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죄에서 떠나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주님 자신을 충만하게 주셔서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에서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지요? 하고 물어보십시오. 그래서 내 말이 싫으면 내 말을 듣지 말고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가장 뚜렷한 표징은 죄에 대한 미움과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이제껏 까지 지었던 죄에서 떠나서 그래서 정말 그 죄로부터 이제는 멀어지고 그 죄를 혐오하며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랑을 받으면서 살고자 하는 마음, 이것이 회심하는 사람의 표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회고해보십시오. 회심의 표징이 뚜렷하고 그리고 여러분들 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고 그분과의 사귐에서 오는 은혜가 있었던 때에는 항상 작은 죄에도 괴로워했습니다. 바람에 이는 잎새에도 괴로워했다던 윤동주 시인처럼 하나님 앞에서 작은 죄에도 괴로워하고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그 주님의 마음을 나의 작은 유익으로 말미암는 죄로 아프게 해드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깊이 아파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착한 마음이 남아 있습니까? 연약함과 그리고 자신의 허물을 인해서 잠깐 잘못하고도 깊이 뉘우치며 나의 허물과 죄 때문에 주님의 마음이 아파하시는 것을 인해서 죄송해하고 그것 때문에 더 많이 아파하면서 주님의 마음에 어떤 위로를 드리고 싶어서 황망해하는 그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마음, 이것이 회심한 자의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한사람 그리스도인의 삶은 흐르는 강물과 같은 것입니다. 메마른 들판을 강이 지나가면 토끼가 와서 물을 먹고 가기도 하고 어부들이 와서 그 강에서 고기를 잡아서 끼니를 잇기도 하고 수많은 풀꽃들이 그 강변에서 돋아나기도 합니다. 강에 오는 사람도 있고 그 강에서 헤엄치는 사람도 있고 다시 돌아오지 않고 그 강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이나를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좋아하는가 좋아하지 않는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뜨겁게 와서 내 생애의 강속에서 헤엄을 치는 사람도 있고 침 뱉고 밟고 돌아가서 다시는 내 삶의 강으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지를 흐르는 강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냥 고요히 흐를 뿐입니다. 이게 신자의 삶입니다. 죄를 떠나지 않고는 흐르는 강물처럼 그런 삶을 살아서 곤고하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한 사발의 생수가 되고 상처난 사람들에게 한번 발라주는 포도주와 같은 그런 생을 살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모두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심치 않은 채 죄 가운데 살아가는 동안에 아파하시는 그 주님의 마음, 집을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것처럼 눈이 짓무르도록 가슴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드리고 능력이 좀 없어도 착하게 살아가야 하고 영력이 좀 떨어져도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많은 돈과 재물을 주님 앞에 못 바쳐도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진 재물도 많지 않고 남보다 뛰어난 출중한 재능도 없지만 너무나 착해서 할 수 없이 죄를 짓고는 자신의 죄 때문에 아파하시는 우리 주님 때문에 그 죄의 즐거움을 황망히 버리고 하나님, 저 때문에 너무 아프시지요? 죄송해요.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면서 주님의 마음을 쓰러드릴 수 있는,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돈 좀 없으면 어떻습니까? 그래요. 능력이 없어서 귀신 못 내어쫓고 오대양 육대주 다니면서 수많은 사람을 회심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안 주셔서 없는데 어떻습니까?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안 주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입고 먹고 마시고 누리고 오늘 사람다운 품위를 누리면서 살게 하신 것이 모두 주님의 은혜가 아닌가요? 주님이 주시는 포도주 먹고 이방 신을 섬기러가고 주님이 주신 떡을 먹고 힘을 내어서 타락하고 그 힘을 내어서 주님 거스르며 살았는데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섬김이오, 주님이 우리를 향한 요구입니다.
두 번째는 법과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미슈파트 베’ ‘째데카’ 라고 되어 있습니다. 미슈파트는 재판, 공의를 의미하는 것이고, 째데카는 의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의 의로운 행동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심한 사람들은 공평하고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부도덕함과 그리고 부 정직은 이미 이 세상에서 이름이 나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정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이 공정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공직에 상당히 많이 들어섰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때 예수 믿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예수 믿는 고관대작들이 줄줄이 늘어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안 믿는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비아냥거렸는지 아십니까? 예수 믿는 놈들끼리는 안 되는 게 없고 지들끼리 다 해 처먹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무엇인가 이 사회에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계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공직자이든지 아니면 공직자가 아니라 직장에 다니시는 분들이든지 누구든지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그 사람들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권력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진짜 회심한 사람들의 가치는 예수 믿는 사람들 한편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옳은 사람은 옳고 그른 사람은 그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단을 이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권한을 주신 것이고, 주님이 그런 질서의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서 공의로운 일들을 하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에게 그런 권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공정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여러분들이 그래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 공무원들에게 청탁이나 하고 교인들 청탁해서 무슨 이익이나 보고하는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부정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고관대작에 앉아서 잘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높은 지위에 올랐기 때문에 사회가 정결하게 되고 정의가 물같이 공법이 하수같이 그렇게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대사 속에서 나라가 왜곡되고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그 부정과 그 부패 한복판에는 반드시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뻔뻔스럽게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고도 참회의 눈빛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정권이 바뀌면 한자리 챙겨서, 한밑천 챙겨서 자손만대 잘먹고 사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반드시 그 악이 끝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신자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를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뚜렷하게 양심을 가지고 살고 정직하게 불이익을 당하고 때로는 죽음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정직하게 이 세상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외톨이가 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 한 분이 내편이면 충분하다라고 하는 용기를 가지고 그렇게 정직하고 공평하게 살아가는 것, 그래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 일을 하지 않아도 그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면 나는 행하면서 살겠다 라고 하는 그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전의식 적인 삶을 보여주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신자들입니다.
왜, 모이면 매일 하는 이야기가 세상이 다 그래. 혼자만 튈 필요가 뭐가 있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는데,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통용이 되는데, 그런 식으로 살아서 이 세상이 변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이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하여야 할 대표적인 두 가지 일은 눈물과 땀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하더라도 정직하게 분투하면서 그리고 정직하게 의롭게 살아가야 하고 그리고 많이 땀을 흘려야 합니다. 어쩌면 피를 흘릴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변하지 않는 그 세상을 보고 많이 울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세상을 변화시켜달라고 아무리 펑펑 울면서 기도하면 뭐합니까? 자기가 이 세상에 나아가서 오늘 선지자가 말하는 대로 법과 의를 따라 살지 않는데 눈물을 흘리는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한번 정직하게 그런 삶에 있어서 모범을 보이고 그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희생을 당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매달려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회심한 자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로 살기 위해서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용감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이 진리를 위해서 내가 사람들로부터 다 외톨이가 되어도 주님이 내편이시면 나는 족하다. 직장을 잃어버리고 내 사업이 위기를 만나고 내가 가지고 있었던 재산들을 잃어버리고 알거지가 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편에 선 마지막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그 마지막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회심한 사람들의 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여기에 보면 탈취물과 억탈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당물과 억탈물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전당물은 돈을 빌려주기 위해서 저당으로 잡힌 것이고, 억탈물은 히브리 성경에 의하면 훔쳐온 물건입니다. 우월한 지위나 권력을 이용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온 그런 물건들을 억탈물들이라고 부릅니다. 빼앗아온 물건을 돌려주는 것, 그것은 좀 덜한데 저당물은 합법적이 아닙니까? 돈을 빌려주고 그 빚에 대한 보증으로 잡아놓은 물건입니다. 합법적이지요. 그러나 정말 회심한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어느 교인이 간증을 하는 가운데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다고, 왜 그런가 했더니 500만원을 하나님이 거저 주셨다고 했기에 물었더니 어떤 사람이 5000만원 짜리 자기 집을 사려고 와서 500만원 계약금을 주고 사정이 생겨서 도저히 돈이 안되어 자기 집을 살수가 없게 되어서 결국은 그 돈 500만원이 자기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완전히 공돈이고 그래서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오늘 드렸다고 했습니다.
어느 교회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땅을 업자에게 팔았습니다. 계약금을 6억을 받았습니다. 회사가 사정이 생겨서 도저히 계약을 이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푼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자기가 그 계약금을 가지고 다른데 가서 집을 샀는데 그 사람이 계약을 불이행해서 나도 그 계약을 불이행하게 되었다면 반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법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그런 세상의 계약의 원리보다도 더 중요한 사랑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억탈물도 돌려주고 전당물도 돌려주어라 이게 진짜 회개한 사람의 삶입니다. 왜 그렇게 전당물을 돌려줄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회개한 사람의 삶의 목표는 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런 면에 있어서 좀 상식을 깨트리는 파격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 자비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회심하는 자의 삶의 표징입니다.
보십시오. 오늘날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이 범죄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합니까? 모두 그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악한 욕망들의 노예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마음을 지키면서 마음을 여러분들의 노예로 만들지 않으면 여러분 자신이 그 마음의 노예가 됩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 마음을 지배하지 않으면 마음이 여러분들을 지배해서 마지막으로는 그리스도의 군사로 살아가야 할 사람이 자기 마음의 졸병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똘마니가 되어서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 속에 없는데 여러분들의 마음에 솟아나는 생각이 무엇이겠는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온갖 죄와 더러움과 악한 욕망과 불결과 불 신앙과 불순종과 타락과 재물에 대한 욕심과 명예에 대한 욕망과 부 정직과 이런 것들이 뭉개 구름 같이 피어올라서 여러분들의 삶을 망쳐버리고 여러분들의 영적 삶을 고사시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래서 자비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깊이 정말 깊이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여러분 속에 사라진 아가페의 삶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얼마나 현실적이고 얼마나 영악하고 그리고 얼마나 이기적이고 그리고 재물에 대한 집착이 강한가 하는 것을 깊이 회개하고 그런 욕망 때문에 잃어버린 사랑의 원리들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탐욕을 버리고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많이 섬기고 그리고 내게 주신 많은 물질들이 주님께로부터 내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그 물질로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진실하고 진실하게 자신의 삶의 모든 방향에 있어서 자기가 재물을 사랑하고 물질의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삶의 동기 그 자체가 주님을 향해서 다 비운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돈을 벌어도 주님을 위해서 벌고 써도 남을 위해서 쓰고 지위가 올라가도 단지 섬기는 머슴으로 자기들을 세워주셨다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움켜쥐고 자비를 베풀 줄 모르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마음은 악한 마음이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정말 핍절하고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언제나 주님께서 원하실 때에 자비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물질로 다른 사람을 섬기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그 물질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단지 그것을 잠시 맡아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지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일납니다. 여러분들에게 있는 그 물질은 언젠가 여러분들의 목을 찌르는 칼이 될 것이고 여러분들의 영혼을 죽이는 독약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부하려는 자들은 모두 부패한 욕망에 떨어지게 되고 그리고 물러가서 침륜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참된 기쁨을 그래서 이런 외형적인데 두면 안됩니다.
여러분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친구들 만나서 자존심 상할 때 있을 것입니다. 왜 상합니까? 저 자식, 나보다 더 큰집에 살고, 저 양복 외제 옷 입고, 학교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도 못했던 여자애가 지금은 더 잘살고 그런 것 때문에 자존심 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짜 우리가 무엇 때문에 자존심을 상해야 할지 생각해보십시오. 회심한 성도들은 결코 그런 것 비교하면서 자존심 상하지 않습니다. 회심한 성도들은 거룩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아!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깨트려지면서 살아왔는데 내게는 왜 이렇게 사랑이 없을까? 저 사람은 어쩜 저렇게 너그럽고 주님의 자비로운 마음이 저 사람의 인격 속에 있어서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을 품어 안고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자들을 사랑으로 갚으며 그리고 욕심도 없이 자기의 물질을 나누어주며 그렇게 살수 있을까? 그런 것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순종입니다. 생명의 율례를 따라서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회심한 사람의 마지막 결정적인 표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깨트려지지 않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 없는 삶을 낳고 굳어진 마음은 불순종을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만드는 강력한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말 회심한 사람으로서 순종의 삶을 살아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 불순종하는 것을 마치 죽 떠먹은 자리에 표 안 난다는 생각으로 서슴지 않고 불순종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영혼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애쓰고 그래서 자신의 인생 그 자체가 주님 앞에 극상품 포도열매가 되기를 원하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을 오늘날과 같이 불 신앙과 불순종이 팽배한 때에는 하나님이 찾는 마음이 더 간절해지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은 이렇게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의지하고 순종하며 그분의 손을 붙들고 그분을 사랑하면서 사는 성도들로 자라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 회심치 않는 자의 변명과 실상
“그래도 네 민족은 말하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 도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길이 공평치 아니하니라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 죄악을 지으면 그가 그 가운데서 죽을 것이고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법과 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인하여 살리라 그러나 너희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 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의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하시니라”
회개하는 악인들을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선언이 있고 난 다음에 우리들이 읽은 이 18절부터 20절 사이에서 선지자는 앞에 이야기한 내용을 간추리면서 네 가지로 자기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17절 상반 절에 회개치 아니한 자들의 변명이 나옵니다. 두 번째는 회개치 아니한 자들의 실상에 17절 하반 절에서 다루고 세 번째로는 의인과 죄인의 회개를 다루는 앞에서 나오는 교리의 반복이, 회심의 교리의 반복이 19절에서 나오고, 마지막 네 번째로는 20절에 나오는 것인데 회심치 않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회심치 않는 자들의 변명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어떤 길, 아무리 예전에 의롭게 살았어도 그가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행하면 그를 심판하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그 방법이 의롭지 않다. 그리고 죄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한다고 해서 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그런 길이 옳지 않다 라고 이들은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는 그 부분은 히브리어로 말하자면 물건 같은 것을 저울에 달아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겠다고 그랬다고 그랬는데 그것을 자기 생각의 저울에 한번 달아보니까 틀렸더라. 이것이 회심치 않는 자들의 변명입니다. 회심치 않는 사람들은 변명이 많습니다. 불신자들이 예수 믿지 않는 이유도 많지만 구원받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채 살아가는 무지막지한 죄인들의 변명도 또 굉장히 많습니다. 그들은 한번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직하게 무릎을 꿇고 주님은 옳고 저는 잘못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제 생각이 아니라 저를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라고 한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회심치 않는 이유는 아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아! 나는 요즘 너무 사는 게 복잡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틈이 없다네. 당신도 만약에 나처럼 사업이 위기에 몰리고 어려움이 겹쳐봐. 아마 신앙에 대해서 신경 쓸 시간이 없을 꺼야. 이런 경우는 세상의 염려와 관심 때문에 자신의 영혼의 위험을 직시하지 못하는 게으른 형입니다.
또 두 번째는 이런 형태도 있습니다. 목사님이 회개하라고, 회개 안 하면 죽을 것처럼 설교하지만 그거야 자기 이야기지,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설교하는 것 아니잖아. 성경에는 꼭 그렇게 우울한 진리만 있는 것은 아닐텐데, 내가 저 설교 앞에서 결단할 필요가 있을까? 아마 저 설교하고 성경은 차이가 많이 날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말씀 회피형입니다. 그들은 마치 절구에 놓고 마늘을 빻을 때 끝까지 찧어지지 않고 귀퉁이를 굴러다니는 마늘과 같아서 한번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 주님의 말씀은 진실하고 그리고 저의 변명은 정말 변명에 불과합니다. 무엇이든지 하다못해 어린아이의 입을 통해서라도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 진리의 빛으로 나를 비추셔서 내 모습이 드러나면 내가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상황 핑계형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교회의 이일 저 일에 마음이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왜 이렇게 체재가 이따위로 되어 있을까? 교회가 도대체 뭐야! 행정일 하는 게 어째 이 모양일까? 그리고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불친절하고 되 먹지가 않았을까? 요즘 목사님이 우리에게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왜 교회에 가면 점심시간마다 밥이 떨어지는 것일까? 화장실은 왜 그리 더러울까? 교육실은 왜 그렇게 또 좁고 유아 실에 왜 도대체 아기도 안 가진 사람이 왜 밥 들고 들어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밥을 먹는 것일까? 이렇게 복잡한 상황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하게 서지 않는 사람, 상황을 핑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한번 이런 반문을 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들에게 아주 중대한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건강진단을 받았는데 이제 위중해져서 암 말기라서 며칠 못산다는 말입니다. 그 소식을 갖고 왔을 때 여러분들은 아! 지금 이 사람아 사람이 죽고 사는 게 문제야 지금 상황이 이렇게 복잡한데 그게 마음에 들어오겠어. 다음에 해. 그런데 다음에 보고할 때는 벌써 죽은 다음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한 소식을 들고 왔다고 할 것 같으면 상황하고 아무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뭐라는 것이야. 내 건강에 대해서 의사가 뭐라고 해. 죽는데 산데, 그 다음에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 다음 사람이 왔는데 당신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데 살수 있는 처방이 있답니다. 그리고 들고 왔으면 야, 이 사람아 지금 생명 건지는 게 문제야 내가 지금 마음이 다 상하고 이런 사람들과 부딪혀서 기분이 나쁜데. 다음에 해. 다음에 하면 살길이 없습니다. 두 사람들의 보고를 여러분들은 상황의 핑계를 대거나 이유를 대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여러분들은 받아들일 것이고 살길을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백 번 양보합시다. 다 사실이라고 합시다. 점심때 밥도 떨어지고 교회의 체재도 너절하고 화장실도 지저분하고 또 만나는 사람들이 마음을 상하게 하고 사업도 잘 안되고 직장의 어려움도 있고 가정의 부부관계도 어렵고 가정생활에 짜증나는 일도 있다고 칩시다. 그것이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한번 접어보십시오. 아무렴 어때. 죽고 사는 것 아닌데 그리고 신앙생활 하려면 한번 그런 것 접어볼 필요도 있습니다. 사업이 안되어도 하나님 손에 맡기고 아! 죽기보다 더 하겠어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그렇게 생각을 해보고 교회에 와서 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도, 화장실이 지저분하면 아, 그래 오줌누려고 교회에 왔나. 말씀 들으려고 왔지.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얼마나 화장실이 더러우면 그럴까 하는데 아니 깨끗합니다. 가봐요. 호텔같이 깨끗하게 해놓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마음 상했다는 소식 듣고 그 날밤에 깨끗하게 해놓았습니다. 평일도 그런 상태를 유지해서 호텔처럼 그렇게 만들라고 내가 지시했습니다. 그렇지만 오줌누려고 교회에 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고 접어보십시오.
점심시간에 밥이 떨어졌다. 그러면 안되지, 그래서 많이 남아서 쓰레기통에 버려도 많이 해라.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까 많이 해라. 내가 매일 지시합니다. 그런데도 어떤 때는 밥이 떨어집니다. 교인이 너무 많이 와서, 그럼 접을 수 있잖아. 아, 밥이 문제야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한끼 좀 굶으면 어때.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잖아요. 직원들이 불친절하고 교역자들이 마음에 안 들어도 한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래. 사람이 뭐 별거겠어. 완전한 사람이 있겠어. 그래도 내가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면 되지, 좀 그렇게 중요한 것에다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세상에 어디를 가면, 죽을 때가 된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이 여러분 한사람을 왕처럼 떠받들면서 수종들 날은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한테도 인간이 안 그렇게 하는데 인간에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왕들도 그런 것 못 누렸습니다.
그리고 생각하지마. 저 사람은 왜 매일 나를 볼 때마다 인상을 저렇게 쓸까? 저 못생긴 사람은 왜 매일 내 앞에 나타날까? 왜 교회에 오기만 하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은 계속 졸면서 내 어깨에 기댈까?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좀 전공 법으로(?) 나가십시오. 아무렴 어때. 그래서 우리들이 정말 회개할 때가 되면 핑계가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할말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한 여자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눈물을 많이 흘리고 식사하시는 예수님에게 향유 옥 합을 깨트려서 부었던 그 여자, 지금 시가로 이천만원이 넘는 향유를 식사하시는 예수님께 부어버렸던 죄인이었던 그 여자, 대사가 한마디도 안 나옵니다. 오직 뭐만 있는가 하면 진실한 회개만 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는가 하면 “저의 많은 죄가 용서하여졌으니 이는 저가 나를 사랑함이니라” 그 여자 주위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아니 저 푼수도 없는 여편네 말이지 그거 왜 붓는 거야,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말이지, 그런데 이 여자는 그것보다 이게 낫다고 변론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 말 없이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자기 죄를 용서해주시는 예수님밖에 안보였습니다. 그래서 눈물로 예수님 앞에 흘리고 긴 머리카락으로 황망히 그 눈물을 닦고 향유를 예수님께 부으며 그렇게 예수님 섬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심치 않은 채 불순종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백화점입니다. 너무 물건이 많습니다. 그래서 꿈도 잘 꿉니다. 그런데 모두 다 총천연색 개꿈입니다. 왜 평소에 생각이 많으면 꿈을 많이 꿉니다. 그러니까 맨 말도 되지 않는 꿈, 지저분한 사고가 정돈이 안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하기 직전에 회개한 직후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단순합니다.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주 내 마음에 늘 계시고 나 주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주님 앞에 갔을 때 너 왜 회심도 안하고 계속해서 불순종하면서 살았니? 그러셨을 때 여러분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여기서는 변명이 통합니다. 더군다나 또 변명하면서 같은 변명을 가진 동지들을 규합합니다. 그래서 비회심자 노조를 만든다고 칩시다. 그게 하나님 앞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서 자기가 회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변명을 많이 늘어놓으니까 사람들이 그래 네가 참 어렵구나. 위로해달라고 하는데, 그래 네가 참 어렵구나. 아무리 그렇게 이야기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해주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래. 너는 안되었구나.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어야 합니다. 회심치 못한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으면 그래. 정말 안되었구나 정말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회심할 수 있겠니 정말 안되었어. 그러나 넌 죽어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너는 왜 회심하지 않고 왜 불순종하면서 뜨듯 미지근하게 그렇게 살았니 그럴 때 여기서는 변명이 통합니다. 그때 주님 앞에 가서 하나님 말도 마세요. 화장실도 더럽고 밥도 제때 안주고 직원들은 불친절하고 설교는 너무 길고 그래서 내가 회심 안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아마 여기서 사니까 그렇게 변명하지 하나님 앞에 가면 아마 입도 못 열 것입니다. 그 영광의 광채 앞에,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왜 회심도 안하고 그렇게 회심하도록 내가 나의 종을 보내어서 너희에게 설교하게 했거늘 왜 회심하지 않았는가 그럼 그때 여러분, 아, 하나님 말도 마십시오, 사업은 꼬이지요. 직장은 힘들지요, 가정은 불화하지요. 제가 그런 상황인데.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어떻게 영혼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겠습니까? 그런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핑계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 다 버리고, 그래서 신앙은 가끔 다 버리고 황량한 벌판 앞에서는 순간들이 있어야 합니다. 종종. 빈들에 홀로 서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주님이 벌판에서 홀로 기도하셨던 것처럼 하나님 한 분 앞에서 주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 앞에서 모든 거짓과 가식, 허위 그리고 쓸데없는 이유와 핑계 이런 것들을 다 벗어버리고 찬란한 그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 서서 그래서 고독한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아주 고독하게,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만족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업도 잘되고 신앙을 신경 쓰지 못하게 하는 물질의 문제도 해소되고 그리고 교회도 잘하고 싶습니다. 제 중심에는 정말 그렇습니다. 안 그런 사람 없겠지만, 정말 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불편함이 없고 나도 참 잘살고 싶습니다. 정말 그래서 여러분들이 최소한 저의 인격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회피하지 않는 그런 정도의 사람이 정말 되고 싶습니다. 다 그렇게 되고 싶고 또 그렇게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그런 것을 모두 인정하면서 여러분들에게 그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고 그렇게 되도록 기도할 뿐이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회개하고 순종의 삶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진수는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능력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사랑이고 뛰어난 지식보다 도 더 값진 것은 진실해지고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핑계대지 말고, 나는 정말 회심하지 않는 여러분들 지금도 말씀에 집중하지 않고 있는 소수의 여러분들이 단 한번만이라도 마음을 실어서 그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깊이 청취하고 그리고 주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인 것과 그리고 자기의 불순종을 인해서 주님이 마음 아파하신 것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핑계되어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로는 회심치 못한 자들의 실상입니다. 핑계는 그렇게 댔지만 그러나 실상은 무엇이었는가 하니 그들의 길이 공평치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삶을 저울에 이렇게 달아보시니까 옳지 않다. 공평치 않다 딱 판단이 난 것입니다. 이것은 실수일 수도 없고 착각일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짐승처럼 살다가 죽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살수밖에 없었던 눈물겨운 사연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동정은 동정이고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내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회심의 촉구가 옳지 않은 길이라고 너희들이 말하지만 그 옳은 길이 옳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너희들의 길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여기 주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단수로 되어 있는데 여기 백성들의 길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데라킹’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얼마나 여러 갈래 길로 걸어가면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깨닫는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일까? 가방 싸들고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하는데 심지어는 요즘에는 돈 내고 가서 성경공부를 하는데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무엇인가 하면 성경은 그렇게 한다고 해서 깨달아지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순종하고 실천해보는 가운데 그 참된 의미가 가장 잘 파악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불순종하고 불 경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풍부한 진리의 말씀을 소유하고 그 진리의 말씀에 유익을 누리면서 살아간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통로가 되었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호수로 아무리 물을 많이 줘도 호수가 물을 먹는 것이 아니라 호수는 단지 물을 전달해줄 뿐이고 그 호수로 뿌려지는 잔디밭에 있는 그 식물들이 그 물을 먹으면서 흠뻑 물을 먹고 자라고 만개 하는 것처럼 전달해줄 수는 있어도 그 말씀에 유익을 누리면서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삶 전체를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순전히 모순 투성이며 그리고 그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기가 아주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청교도 ‘헬리스크가’도 말하기를 기독교 신앙은 그 진리를 실천하는 동안에 그 참된 의미가 가장 잘 파악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꼭 전도하라고 그러면 전도에 관한 책을 읽고, 기도하라고 그러면 기도에 관한 책을 읽고, 성화라 하면 성화에 관한 책을 읽다가 끝납니다. 그렇게 해서는 성화도 기도도 전도도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성화에 대해서 가장 잘 알기 위해서는 거룩해지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하나님 앞에 죄와 싸우고 순종하면서 살아감으로서 성화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요즘에 캠퍼스 신방을 계속 했는데 얼마나 예쁘고 착하지 모릅니다. 집이 멀리 있는 학생들이 고단한데도 새벽에 버스 타고 전철 타고 그 먼길을 와서 새벽기도를 합니다. 그 어린 학생들이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렇게 해보니까 기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많이 배워봐야 모두 지구를 도는 인공위성이 한번도 지구와 만난 적이 없듯이 기도에 대한 생각만 머리 속에 돌아다니는데 그런데 간절히 기도해서 기도의 맞을 보고 나면 그러면 기도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의 변화가 있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여러분 자신이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주는 평가나 생각, 이런 것들로 인해서 우쭐하거나 보람을 느끼거나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세움을 받는 것을 신앙생활에 보람으로 느끼고 살아가는 것은 정말 아주 유치한 신앙생활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맛보는 만족이 없으면 사람 앞에서 세움을 받는 것, 거기에 목숨을 걸고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기도 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고통받기도 하고 그렇게 하는지 그것은 결국은 세상에서 많은 탐욕들을 교회 속으로 가지고 들어온 것 말고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 실상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불순종하는 삶을 계속 변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달아보면서 이것은 옳지 않다 요즘 시대에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치우쳤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 일방적이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 비인격적이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내 취향이 아니다. 그렇게 판단하고 그렇게 달아보고 그렇게 평가했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인간이 자기 의견을 말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판단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판단 앞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평가받는 실상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묻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의 실상은 무엇입니까? 가진 것 없고 교회에 가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실상은 정말 보배와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으로 예수 의지하고 주님만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실상입니까? 아니면 교회에서는 우리들을 교회 오래 다닌 사람이라고 추켜세우고 예수에 미친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인정해주어도 실상은 마음에 죄악 된 경향과 그 다음에 더러운 자기 아집과 그 다음에 탐욕, 그리고 수틀리면 신앙이고 뭐고 다 뒤집어 엎어버리는 막대 먹은 본성을 따라서 사는 것이 여러분들의 실상인지 한번 여러분들이 깊이 여러분 자신의 실상을 한번 비추어보십시오. 무엇입니까? 아니면 회심을 한 것도 아니고 안한 것도 아니고 그것은 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꾸역꾸역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마지못해서 이어가는 그런 신앙생활입니까? 실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해야 할 가장 간절한 기도의 제목은 나를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보게 해주시는 것을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것보다도 더 먼저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내 모습을 보여주시옵소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상은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은 이 껍데기가 아닙니다.
교회를 몇 년을 다녔고 대대로 예수님의 집안이고 신앙의 뿌리가 있고 뿌리는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가지입니다. 가지에 열매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뿌리를 보려고 농부가 나무를 심는 것은 아닙니다. 곡식 심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뿌리가 아니라 열매입니다. 그러면 실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직하게 보고 하나님 앞에 보여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 깨어짐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가 왜 깨어집니까? 아! 오늘은 화요일이니까 오늘 불같이 깨어져야지 되겠다. 수요일이니까 수수하게 깨트려져야지, 목요일이니까 목석 같았던 마음이 깨트려지고, 금요일이니까 쇠 덩어리 같은 마음이 깨트려지고, 토요일이니까 토할 듯이 깨트려지자. 개인이 끝장내겠다고 해서 깨트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리스도인의 영성에 있어서 자기 깨어짐이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언뜻 언뜻 찬란하게 비취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 없이는 이 세상에 누구도 깨트려질 수 없습니다. 어차피 누구도 완전히 옳은 사람은 없습니다. 어차피 누구도 완벽하게 주님을 닮은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주 실감나는 비유하나를 들겠습니다. 여기가 캄캄합니다. 불이 나갔습니다. 그 상황에서 여기를 아마 헤쳐서 입구까지 나가려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막 부딪히고 넘어지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좋은 것은 항상 환하게 비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허락이 안되면 형광등 하나라도 깜박거리는 게 낫습니다. 깜빡하면 한번 보여지고 다시 어두워져서 한 두 발짝 옮겨놓으면 잘못 걸어가서 반짝 하고 다시 비치면 바른 길로 돌아와. 그런 것 아닙니까? 자기 깨어짐이 없는 것은 캄캄한 별빛조차 없는 어두운 밤에 가시덤불이 가득한 밀림을 지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깨어짐이라는 게 어떻게 나오는 것입니까? 그 사람에게 은혜가 살아 있어서 주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의 빛으로 자기 실상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 이게 내 모습이구나. 다른 사람들은 칭찬합니다. 아! 당신처럼 헌신된 사람이 어디에 있어. 이 세상에서 당신같이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당신의 신앙의 관록을 생각해봐라. 수십 년 동안 교회를 섬기고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가르침을 받으면서 감화를 받지 않았는가. 그렇게 우리를 인정해줘도 중요한 것은 실상입니다. 실상을 딱 보면서 하나님 앞에 초라한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아닙니다. 시인이 오죽했으면 나는 벌레입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기의 실상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회심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실상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실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형식적인 신앙의 웃옷을 벗고 가식적인 신앙의 외투를 벗어 던지고 마지막에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내복마저 벗어버리면 그때 드러나는 그 속살이 무엇입니까? 넘어지고 쓰러지면서도 그래도 어린아이처럼 회개한 마음으로 부족하지만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그리고 당나귀가 와서 짖어도 주님의 말씀이면 그 진리 앞에서 자기를 깊이 돌이키고자 하는 그렇게 회심한 자의 마음인가, 아니면 그 거짓과 위선의 껍질과 형식적인 신앙 생활의 겉옷들은 자수를 놓고 금색 은색 실을 놓아서 화려하지만 벗고 나면 완전히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불순종하면서 살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살더라도 내 자신의 욕망과 습관적인 삶을 포기할 수 없다라고 하는 강퍅한 죄인의 피묻은 가슴입니다. 그래서 실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껍데기가 바뀌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생활에 깊은 이 속의 우리의 영혼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챨스 스미녹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그의 영혼에 내리시는 축복이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축복들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를 통해서 오지만 영혼에 내리시는 축복은 하나님이 직접 만져주셔야지 만 가능한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정직하게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정말 정직하고 진실해져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이 지상에서 사셨던 것처럼 그렇게 정직하고 진실해져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삶이 어땠습니까? 그분의 별명이 진리였습니다. 그분의 별명이 말씀이었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도 주님의 말씀 때문이었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도 당신 자신의 고백처럼 아버지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생애였습니다. 그런 생애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가치 없는 것들에 대한 관심을 꺾고 그리고 거짓과 위선의 옷을 벗고 그리고 좀 정직하고 진실해집시다. 그래서 주님이 보여주신 그 말씀에 빛으로 보여주신 우리의 실상을 그대로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무릎을 꿇고 주님, 저는 주님의 말씀의 빛 앞에 비추어진 이 모습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이제껏 까지는 회심하지 않고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나의 죄 된 생활을 하나님 말씀을 향해 트집잡고 사람 핑계 대고 환경을 원망하면서 그렇게 구실을 붙이면서 살아왔지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를 용서해주시옵소서. 그렇게 회심하고 그리고 다시 하나님 사랑하며 사는 것, 그게 회심입니다.
세 번째, 앞에 나온 회심의 교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즉 의인이 많은 의를 행하며 살아왔더라도 그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인해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며 죄악 가운데 살아온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진실하게 회개하고 의와 그 법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그들을 회개를 보시고 그들의 지난 죄를 용서하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미 앞에서 선지자가 반복한 교리입니다. 다시 상기시키는 이 이유는 이 교리를 너희들이 아무리 달아보고 그럴 리가 개인의 생각일거야. 선지자 한사람의 느낌이겠지. 그렇게 너희들이 판단하고 달아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에게는 위로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뭐가 필요한지는 하나님이 아십니다. 저는 병원하고 약국에 가면 의사와 약사들이 저를 참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특히 약국에 가면 저를 좋아합니다. 약국에 가서 환자들이 약 좀 지어주세요. 증세가 어떻습니까? 기침이 나오고 목이 붓고 그리고 콧물이 나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약사가 약을 지어드릴까요? 아니면 그냥 드릴까요? 그것을 왜 환자에게 물어보는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리고 그 다음에 또 하루치만 지어주세요. 하루 먹어야 될지 이틀을 먹어야될지는 약사가 판단하는 것이지 그래서 나는 항상 그랬습니다. 이렇게 아픕니다. 그럼 어떻게 해드릴까요? 그때는 저는 모르니까 선생님이 판단해서 해주십시오.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약값 때문에 약사로서 소신을 꺽지 마시고 왜 싼 약을 넣어야 되니까 천 오 백원에 맞추려면 그렇게 하지 마시고 소신껏 지어주십시오. 그러면 항상 우리 집 사람이 가면 하루치 지어주는데 내가 가면 삼일 치를 지어줍니다. 항상 약이 남습니다. 그래도 한번도 내가 거기서 끼어 든 적이 없습니다. 삼일 치 드셔야 되겠습니다 하면 갖고 와서 다 안 먹는 한이 있어도 삼일 약을 지어서 옵니다. 아니 수술하려고 수술대 올라간 사람이 칼 말고 가위로 째십시오. 그게 뭐 하는 것입니까? 뭐가 필요한지, 그게 얼마나 웃기는 것인지. 그러니까 선지자들 중에서 가짜 선지자들의 결정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앞에 받은 말씀이 없는데 자기 생각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상황이 이러니까 이런 것을 원하겠다. 백성이 마음이 이러니까 이런 게 좋겠구나. 그리고 생각하고 설교한 사람들이 가짜 선지자들입니다. 진짜 선지자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있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그들에게 전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 앞에 소망을 건 사람, 우리 주님 앞에 희망을 걸고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희망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심판의 말씀 속에서도 위로를 얻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입니까? 하박국 선지자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감람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어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리라 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말씀인데 그곳에서 놀라운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한번 이 교리를 그들에게 상기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리의 요약은 이것입니다. 현재적 신앙이 중요하다. 과거에 네가 아무리 나 잘 믿었어도 지금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살면 생명 없다. 기도하면 나는 안 들을 것이고 네가 입을 벌려도 나는 너에게 말씀을 주지 않을 것이며 네가 아무리 손을 더듬고 찾아도 나의 길을 알 수 없을 것이며 네가 아무리 허기지고 거꾸러져도 세상을 이길 힘을 너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게 회심치 않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끝까지 회심치 않는 사람들의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경은 10, 11, 12절에도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고 하는가. 돌이키고 도 돌이 키라.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이 회심하지 않은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심판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 마음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다루시는 방법대로 다루십니다. 아마 하나님의 이런 심판은 그들이 가장 강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무너트림으로서 자만심을 꺾으시든지, 가장 사랑하고 애착하는 것들을 잃어버리게 하심으로서 그것들을 하나님보다 사랑한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보다 더 신뢰하고 믿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게 만드실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의 심판을 무섭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생각해보려면 주님의 창조의 위대한 능력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온 천지와 만물을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말씀 한마디로 이 세상에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그 말씀으로 이 세상에 모든 만물들을 붙들고 계십니다. 인간의 판단과 인간의 모든 평가에 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판단대로 독립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행하십니다. 누구의 간섭과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는 반드시 관철시키고 인간의 어떤 불순종과 죄악도 하나님의 그 의지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세상을 창조하고 지금도 다스리고 붙들고 계십니다.
주님이 곤고하고 어려운 길에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은혜를 구했을 때 어떻게 그렇게 큰 능력과 팔로 우리를 죄악의 어두움에서 구하고 시련과 고난의 웅덩이에서 우리를 이끌어내셨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우리들이 경험했을 때 우리들은 할말을 잃어버렸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를 감동시켰지만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죄와 진노의 자리에서 은총과 사랑의 자리로 우리를 업어 나르신 하나님의 그 큰 능력에 우리는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보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를 고치고 새롭게 해놓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이런 사랑과 도우심은 계속 되었습니다. 언제나 그 사랑과 도우심은 계속 되었고 우리가 하나님께 불성실할 때도 그분은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성실하심으로 우리를 대하셨습니다.
오래 전에 전도사 생활할 때 뭔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는데도 도무지 기도를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무겁게 2-3시간을 기도하고 계단을 내려오고 있을 때 제 마음속에서 아주 선명하게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떨리는 음성이었습니다. 아들아. 내가 너에게 안준 것이 무엇이냐. 저는 그때 계단에 내려오다가 복도에 엎드려서 울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안 주신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정말 그 말씀이 딱 맞습니다. 안 주신 것이 없습니다. 모든지, 구원의 은혜가 필요할 때 자기 아들까지 못박아서 구원의 재물로 주신 주님이 무엇을 아끼실 리가 없습니다. 정말 안 주신 것이 없습니다. 건강이 필요해서 기도하면 쇠락한 건강을 주시고 심지어는 커다란 학교의 시험을 앞두고 기도하면 기가 막히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너무 가난하고 어려워서 장학금을 구하면 예기치 않게 장학금을 넘치도록 주시기도 하고 논문을 쓰면서 힘이 들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남들이 이년을 써도 못쓰는 논문을 두세 달에 쓰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도 했습니다. 집이 필요하면 집을 주셨고 차가 필요하면 차를 주시고 자녀가 필요하면 자녀도 주시고 하여튼 그 복도에 엎드려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혼자 그 새벽에 울었습니다. 사람이 지나 다니는 복도인데 거기에 엎드려서 구르면서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난 게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이 지금 내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아파하시면 그렇게 피붙이같이 사랑하신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지 않으 실까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안 주신 것이 있습니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자기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은사로 주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선고하신 것은 여러분들을 돌이키게 하시기 위한 것이지 그 경고와 심판의 선고를 통해서 경고 받은 여러분들의 삶에 그 두려운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서 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최후 통첩에 대해서 여러 번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러분들 중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말 두려운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들의 삶을 봅니다. 회심하지 않은 저 완고한 영혼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 그리고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 진노,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말 이 시리즈가 최후 통첩일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과 동일한 마음입니다. 저는 그 최후의 통첩이 정말 그 통첩이 이루어지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간절히 원하고 간절히 원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그 마지막 통첩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그리고 앗수르의 최후 통첩을 받고 아버지의 집에 올라가서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며 은혜를 달라고 간구 했던 히스기야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이제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정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심판을 심각하게 외치는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백성들이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 그 사랑을 받으며 주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여러분들이 회개 많이 하면 여러분들에게 생명을 달라고 그러십니까? 많이 뉘우치면 여러분보고 선교사 나가라고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아닙니다.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참 사람이 되는 것,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그 인간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그 사람의 본분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간절하고 애절하고 절박한 소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추상같은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 타오르는 불길과 같은, 충천하는 화염과 같은 하나님의 분노 속에서도 사실은 하나님은 징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그 심판을 표지판 삼아서 인간들을 돌이키게 하고 싶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우리들은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심하지 않은 죄인들은 어쩌면 그 마음이 돌같이 굳어졌는데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이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에 구속의 사랑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노예로 여러분들의 영혼을 섬기는 자된 저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불순종과 완고함으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날들을 더러운 웃옷을 벗어버리듯이 팽개치고 그리고 정말 진실하게 회개하고 빛 가운데서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여러분들끼리 서로 깊이 기대고 사랑하고 우애하며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그 자체가 우리 주님의 마음에 정말 참을 수 없는 위로가 되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어두운 세상 어디에 흩어져서 무엇을 하며 살든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서 주님이 그 마음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그런 존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보석처럼, 기도하겠습니다.
8. 회심의 나팔소리가 울리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고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 중에 하나를 택하여 파수꾼을 삼은 그 사람이 칼이 그 땅에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나팔소리를 듣고도 경비를 하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그가 경비를 하였던들 자기 생명을 보존하였을 것이나 나팔소리를 듣고도 경비를 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1절부터 6절까지는 본격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돌이킴에 대한 메시지가 나오기 전에 서론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이키라고 외치는 선지자의 목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는 부분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비유를 들어서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라마다 마을마다 전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 싶어하는 것은 언제나 있는 일인데 그 일을 위해서 파수꾼을 세우고 그의 임무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경계하는 일인데 그 경계에 그를 세워서 전쟁이 일어나는지를 살피다가 전쟁이 일어나는 조짐이 나타나면 나팔을 부는 게 그의 사명이고 그 나팔소리를 들었는데도 그들이 만약에 그 나팔소리대로 경비를 하지 않고 그래서 전쟁이 나게 되면 그들이 그 칼에 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전쟁이 났는데도 그 나팔을 제대로 불지 않아서 백성들이 피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백성들도 망할 뿐 아니라 나팔을 불지 않은 그 파수꾼도 피를 흘려야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서론적인 권고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돌이킴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살펴볼 부분은 이제 파수꾼이 나팔을 불지 않았을 때는 다음주에 살펴보고 파수꾼이 나팔을 불었을 때를 1절서부터 5절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크게 세 가지의 교리를 만나게 됩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세워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너희들 중에 파수꾼을 세워서 망을 보게 하고 그를 통해서 적군이 쳐들어오는지를 살피는 것처럼 나는 나의 종을 세워서 너희들의 영혼에 파수꾼으로 삼고 그로 하여금 너희의 영혼에 엄습하는 위험과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감지하게 해서 그래서 나팔을 불게 한다. 그 나팔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것이다. 그것을 듣고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 파수꾼에게는 책임이 없고 돌이키지 않고 불순종한 너희들이 그 결과를 당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오는지를 감지하는 파수꾼은 사람들이 세웠지만 그러나 당신의 백성들에게 다가오는 영혼의 위험과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뽑아서 세운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일하십니다.
우리 모두 각 사람 각 사람을 하나님이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 각 사람 각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갈망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하면서 성경을 읽으면 그 성경 속에는 죄인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길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각자 각자가 흩어져서 신앙생활 하는 것으로 우리를 경면(?)하시지 않고 예수를 믿고 거듭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 중에 한 지체가 되었으니 그 지체끼리 모두 모여서 함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갔고 각자 각자가 온전한 신앙생활을 해나가도록 서로를 격려하고 목양을 받으면서 진정한 신자가 되어가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경면(?)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아주 매우 분명하고 그리고 죄인들에게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되는지 명백한 교훈을 주지만 그러나 죄인들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으로 성경을 펴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됐고 성경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도 어떤 때는 성경을 펴면 말씀이 잘 읽히고 깨달아지고 어떤 때는 성경을 펴도 거의 몇 시간 성경을 읽어도 아무 것도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그런 시간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각자가 성경 하나 들고 신앙생활 하게끔 그렇게 만드시지 않고 그들이 모여서 당신이 세운 종들에게 목양을 받고 그리고 당신이 세운 종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지 않을 때조차도 돌봄을 받거나 교훈을 받으면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향하도록 그렇게 만들어주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오늘날은 목사가 무엇 하는 사람인가 할 때 교회라고 하는 하나의 커다란 종교적인 조직에 실무를 맡아서 처리하는 사람 정도로 그렇게 이해되고 있는 것이 실정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종교의 직업화 현상이라고 할까요. 그런 맥락에서 목사를 한 전문가로 보지만 그렇지만 교회라고 하는 어떤 조직을 이끌어 가는 그 속에 있는 실무자다, 혹은 담임 목사인 경우에는 그 교회를 이끌어 가는 행정적인 리더다 그런 정도로 조직에 리더다 하는 그런 정도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이제 교회가 옛날에 단순했던 시대와는 달리 이제 건물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고 또 인적인 자원과 물적인 자원들을 결합해서 그래서 모인 성도들이 잘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돌보고 또 전도하고 거기서 훈련을 시키고 그래서 그 사람들을 또 사역하게 하고 이렇게 해나간다는 면에서 국가 자체가 교회였던 구약 시대나 혹은 교회라고 하는 건물이 거의 필요 없이 박해를 받으면서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예배를 드리며 살아가던 그런 신약 시대하고는 좀 다른 그런 상황이라고 우리는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이제 좋은 점은 이렇게 안정된 교회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렇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 오늘날 교회에 이런 조직이 안되어 있고 오늘은 평촌 문화회관에서 모이고 다음주에는 호계동 뒷산에 넓은 공터에서 모이고 그 다음주에는 과천 문화회관에서 모이고 그 다음주에는 서커스단이 쳐놓은 천막 속에서 잠시 빌려서 모인다고 할 것 같으면 시설을 유지하는 경비야 안 들겠지만 얼마나 신앙생활이 불안정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점에 있어서는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막대한 재정이 들어가고, 재정도 재정인데 그것들을 관리해나가는데 보통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지금 교역자들이 22명이고 직원이 13-4명쯤 되는데 그러면 40명 가까운 사람인데 쉴새없이 일합니다. 평일 날 여러분들 한번 와서 보면 쉴새 없이 일합니다. 안 하면 어떻게 되는가, 안 해도 됩니다. 뭐 담임목사 하나하고 청소하는 사찰 하나 달랑 지키고 부 목사님이나 한 두 사람이 있다고 해서 교회가 안 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 대신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에서 그냥 마치 우르르 모였다가 흩어지는 부흥회 참석하는 인파 같은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부흥회 많이 참석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됩니까? 한두 번 돌이키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목양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목사의 일이 엄청나게 늘어나는 것입니다. 이게 장난이 아닙니다. 정말로 많습니다. 저는 6시간 이상 자는 적이 거의 없습니다. 6시간만 자면 할아버지입니다. 5시간, 늘 잠이 부족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일이 많습니다. 일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물론 안 하면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열심히 돌보고 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이제 목사라는 사람이 하는 일은 마치 회사를 경영하는 전무나 이런 사람들이 하는 일, 전무도 안돼, 부장쯤 될까? 별의별 것들을 전부다 간섭을 하면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를 한 일주일 떠나서 어디 다른 지방에 집회를 나가고 그러면 오히려 편합니다. 왜냐하면 설교만 하면 되니까. 마당이 더러워서 신경 쓸 일없고, 교회 문짝이 부서졌어도 그거 뭐 우리 교회 문짝이 아닌데 부서지거나 말거나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쓰겠습니까? 색깔이 좀 안 맞아도 신경쓸 것 없고 다마가 끊어졌어도 설교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신경쓸 것 없습니다. 그러면서 일상적인 일들을 그래도 해나가야 합니다. 그것을 안 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내버려둔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에 들어가면 복도서부터 지저분합니다. 화장실서부터, 그것은 직원들 욕하는데 목사가 게을러서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네 집에 가서도 청소를 하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왜 자기가 빗자루를 드는 것은 사명이 아니지만 자기가 전체적인 책임자인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타일러서 고쳐나야 합니다. 그것도 안 하고 어떻게 밥을 먹고사는지, 설교에 기이한 능력이 나타나서 수많은 사람이 거꾸러지는 것은 자기가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은 꼼지락거리면서 해야지 그게 충성이지 아! 이것은 너무 시시한 일이니까 말씀과 기도에 전무 한다. 말씀과 기도에 전무해서 그래 얼마나 능력이 나타났는지, 다 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러다가 보니까 이제 어떻게 되는가 하면 도대체 여러분들 생각에는 목사가 뭐 하는 사람인가. 어떨 때는 사찰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동사무소 직원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또 무슨 회사 사장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새벽기도 나와달라고 애원할 때보면 영업사원 같기도 하고 그래도 다 해야 합니다. 지혜롭고 충성되게 열심히 해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동안에 목회자라는 사람에게서 잊혀져가고 있는 한 직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는 선지자의 후예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목사가 누구냐 라고 말할 때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피 뿌리고 죽어가던 선지자들과, 진리를 외치고 죽어가던 선지자들과, 그리고 주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고난을 받았던 사도들의 후예라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구약 시대에 혹은 신약 시대에 똑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해주는 기능을 교회에 두신 것입니다. 다만 신약 시대에는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하나님이 말씀해주셔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제 성경이 모두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 성경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과 그리고 그 성경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을 당신의 종들을 통로 삼아서 각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심으로서 그들을 돌이키게 하고 바른 길을 걸어가게 하는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 일상적인 모든 사명보다 더 뛰어난 사명입니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목회자는 주일날 한번 올라와서 설교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그 섬김 하나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것을 잘한다고 칩시다. 헌금을 많이 거두고 그것을 기가 막히게 경영해서 그래서 커피 숍도 만들고 놀이동산도 만들고 노인 복지센터도 만들고 수영장도 만들고 어느 교회처럼 무슨 사우나도 만들고 그런다고 칩시다. 그것 아무리 잘해도 화장실도 예쁘게 청소해놓고 뭐 다 했다고 칩시다. 그래도 영혼들이 변화되고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그 환경이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줌 누다가 회심하는 사람 봤습니까? 커피 마시다가 뉘우치며 회개하는 사람을 봤습니까? 놀이동산에서 아이들이 뛰어 놀다가 거기서 주님 영접합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한 가지 목적에 기여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에 전념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하나의 방법과 통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사명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입니다.
특별히 회심치 못한 자들은 위험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에 경고도 없이 심판하시는 적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심판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이전에 자기의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경고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런 연후에 그들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회자의 가장 커다란 직무는 그런 하나님의 음성과 마음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가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음성을 듣고도, 나팔소리를 듣고도 전쟁에 대비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여러분의 모든 신앙생활을 목회자가 책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책임을 진다고 할 것 같으면 지옥에는 목사들만 모이면 끝이 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말을 끌어다가 개울까지는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그러나 물을 먹이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오늘 우리 앞에서 기도하신 집사님도 그 말씀이 홍수와 같이 쏟아지는데 변화되지 않는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고백을 하셨는데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이 도와줄 수 없는 영역이 사실은 신앙생활에 많습니다. 무조건 섬기기만 하면 그 사람의 신앙이 저절로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너무 모르고 기계 부속품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기계도 사람이 못 고치는 게 있는데 사람 자신이 영혼을 가진 하나님 앞에 독립적인 존재인데 그가 어떻게 다른 사람이 무조건 돌보기만 하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신앙에 대해서는 각자가 최종적인 책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각자가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결국 최종적으로는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신앙생활 하든지 여러분 마음입니다. 누구도 여러분들에게 신앙생활을 강요할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한가지는 분명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당신이 기뻐하는 종들을 세우셔서 우둔해서 깨닫지 못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정확한 생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정확한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의 일차적인 직무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가장 커다란 자격은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가, 그리고 얼마나 리더십이 있어서 교회를 잘 이끌어 가는가, 성품이 좋아서 사람들과 얼마나 잘 어울리고 그리고 얼마나 따뜻해서 사랑이 많은가. 이것은 모두 부수적인 것입니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자격은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실 수 있고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지 만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세우셔서 당신의 뜻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실 때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당신의 음성과 그리고 돌이키지 않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설교자를 통해서 그 말씀으로 도성인신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볼 수 있는 설교자를 통해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들려주시고 보여주시는 그 일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돌보시는 방식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축복은 자신이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자기의 입맛대로가 아니라 정직하게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들려주는 것, 그래서 그 말씀에 거울에 자기를 더러우면 더러운 대로 깨끗하면 깨끗한 대로 비추어볼 수 있는 객관적인 거울을 갖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행복이고 그것이 만약에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사실상 무신론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팔소리를 듣고 피하고 피하지 않는 것은 각자의 자유이지만 그러나 그 나팔소리가 들려야 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성경을 통해 여러분들이 그 나팔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유지하며 살도록 기도해야 하고, 국가적으로는 온 조국교회가 교인들이 어느 교회에 가든지 정직하게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이 조국의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입니다.
교회적으로는 여러분들이 몸담고 있는 이 교회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정직한 말씀이 울려 퍼지고 그래서 그 말씀이 나 자신을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놓을 수 있는 그런 말씀의 거울이 되도록 여러분들이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주님의 마음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사람은 비상하리 만치 신령한 사람이어야 하고 그리고 교인들은 그런 일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설교자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그러면서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말재주를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반드시 실패하도록 만드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설교자가 자신의 가장 고유한 직무인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위협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게 전하고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잘 간수하였다가 하나님의 마음을 찍어서 와서 말씀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도록 여러분들은 설교자가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일을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의 삶에 생수의 근원이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물들이 솟아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온 삶이 두루 적셔집니다.
설교자의 마음은 어떤 면에서 궁극적인 생수 되신 주님의 말씀이 흘러나오는 통로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설교자를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 인간적으로 아부하고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구역질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감정이나 쓸데없는 일로 설교자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거나 말씀에 전념하지 못하도록 가리우거나 미혹케 하거나 이렇게 하는 것은 마치 물이 나오는 샘터를 더러운 막대기로 휘젓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러니까 설교자는 점차 성화 되면서 막대기가 아니라 쇠꼬챙이를 가지고 와서 찔러도 요동도 하지 않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약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어째든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막 쏟아져서 나가는 것이 느껴지고 어떤 때는 차가운 냉기가 감도는 것을 느끼는데 어떤 때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미리 예감하는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설교하기 직전까지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예측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든지 간에 항상 그래서 저는 제 마음을 생각하기를 제 마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그 마음이 여러분의 것이지만 제 마음은 제 마음이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세워서 당신의 음성을 전달하게 하시고 자기의 마음을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그 음성을 듣고 그리고 그것을 무시하거나 아무렇게나 생각해버리는 일상적으로 생각해버리는 그런 삶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그 하나님의 말씀에 나팔소리가 자신의 양심 속에 울려 퍼지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안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싫어해도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어느 시대든 하나님이 말씀이 없이 버려 두신 시대는 없습니다. 시대가 악하고 타락할수록 하나님은 강력한 말씀을 지닌 능력의 종들을 보내십니다. 예를 들자면 아합의 시대에는 소문난 악한 시대였고 이세벨과 더불어 아합이 바알을 노골적으로 섬기던 배교의 시대였습니다. 내버려두셨습니까? 아닙니다. 구약에서 가장 걸출한 선지자 중에 하나인 엘리야와 그리고 그의 제자 엘리사 능력의 종들을 보내셔서 그 시대를 향해 말씀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아합이 어떻게 하려고 했습니까? 자기 시대에 올바른 예언을 하는 선지자를 향해 어떻게 이를 갈았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는데 그 목이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나를 저주할지라. 그러면서 선지자들의 생명을 노렸습니다. 그들이 뭘 잘못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해주었는데 그 나팔소리를 듣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진리가 들리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왜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에게는 불 켜는 것이 싫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들리고 있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신 마음들이 느껴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을 인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하나님의 환희와 죄 가운데 있을 때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슴이 찢어지는 그 근심과, 여러분들이 무지 가운데 행하면서 주님이 마음에도 없이 살아가는 그 핍절한 삶을 바라보시면서 가슴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저림이 여러분들에게 느껴집니까?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 앞에 빼앗기지 말고 간직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영향을 받는 삶입니다. 그것이 없이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깊은 은혜와 말씀에 대해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반응하는 그 자세가 없는 신앙생활은 본질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하나님의 말씀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삶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세상에서 선거 유세를 해도 집어치워, 집어치워 하면서 돌 던지는 사람이 있고 아무개를 뽑아주자, 뽑아주자 하는 두 패로 나뉘는데 아니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설교자 멱살을 잡고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하든지 아니면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말씀하시는 주님은 옳고 저는 틀렸습니다 하고 바뀌든지 둘 중에 하나지 어떻게 민방위 교육받고 나온 사람처럼 똑같아질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예 듣기라도 싫어했습니다. 듣기라도 싫어했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그래도 무엇인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라고 하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리고 저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왜 내가 싫으니까, 그런 반응이라도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차든지 덥든지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적대감보다도 더 치사하고 하나님 앞에 모욕적인 것은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신경 쓰지 않는 무관심, 그것은 만약에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데 거기에 대드는 것이 불 신앙이라면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실상의 무신론입니다. 교회 안에 이 실천적인 무신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또 하나님을 ‘주’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그런 것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내가 어떻게 네 주냐. 네가 실천적으로 무신론의 삶을 사는데 내가 어떻게 네 주가 되겠느냐. 말씀하실 때 그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에 대해서 신경을 쓴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를 느끼면서 그 의지 앞에 자기의 의지를 꺾어 본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살아온 그 하나님이 자기의 필요에 따라서 자기의 주가 되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 말씀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어서 벌떡 일어나서 삼분의 일 이상이 교회 밖을 뛰쳐나가도 저는 낙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히려 감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이기 때문에 불 신앙하는 사람이 저렇게 자기의 태도를 분명히 하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진리를 전할 때 환영만 받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렇게 말한다면 예수님도 실패한 설교자입니다.
우리를 절망시키는 것은 뭐라고 해도 신경 쓰지 않는 사실상 사상적 무신론자들입니다. 왜 반응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말씀에 대해서 반응을 하고 사람이 말을 해도 대꾸를 하는 것이 인격적인데 하나님이 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많은 시간동안에 들려주셔도 때로는 분노하시며 말씀하시고, 때로는 가슴아파하시면서 권고하시고, 때로는 흐느끼시면서 그들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날 그렇게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그 신앙생활이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 생활이 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합니다.
나는 정말 무엇 하러 교회에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하는 인식 속에서 그 말씀 앞에서 무엇인가 반응하는 것, 이것은 그가 의롭게 살고 불의 하게 살고 그 삶의 현주소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고한 도덕적인 사람보다는 하나님에 의해서 꺾이는 상한 심령을 가진 죄인들을 훨씬 더 가까이 하시는 분이십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세우셔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그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셔서 그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끼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흔히 은혜 받는다는 말 많이 하는데 은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전수 받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마음은 홀로 떠돌아다니는 마음이 아니고 당신의 말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머님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그렇게 공부 좀 한다고 서울에 올라가서 기숙사도 못 들어가고 자취방에서 혹은 고시 원에서 그렇게 쪽 방에서 생활하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하면서 어렵게 공부를 하는데 대학원까지 다니면 몇 년을 될지도 모르는 기간동안 어머니 마음이 늘 아픕니다. 그래서 그 어머님이 편지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날씨가 벌써 싸늘하고 눈발이 날리는데 어떻게 지내니? 이 에미는 아침이나 밤이나 네 생각에 배게 잎을 적신다. 나는 이렇게 따뜻한 구들에 누어서 있는데 그 쪽방에서 꼬부리고 공부하면서 새우잠을 잘 너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그렇게 어머니가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가 그만 뭘 하다가 눈을 다쳐서 편지를 직접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친구가 왔습니다. 너희 엄마에게 편지가 왔다. 그래. 한번 읽어봐라. 이 친구가 사랑하는 아들아, 날씨가 춥데, 눈발이 흩날린 데, 너희 엄마는 따뜻한 구들에서 푹 잔데, 눈물이 난데, 그게 감동이 전해오겠습니까?
신자가 하나님의 마음이 그 안에 없으면 그는 죽어도 신자의 삶을 살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당신의 마음을 전달받는 이 신앙생활이 여러분들에게 계속해서 유지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우리는 하나님은 그 경고의 나팔을 듣고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목회자가 그 임무 자체는 여러분의 영혼을 자신의 것처럼 생각하고 가슴아파하며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고 어떤 악랄한 죄인도 하나님 앞에 찍혀서 소망이 없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악한 날보다는 돌이킬 날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돌봐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신앙은 개개인의 책임입니다. 거기에는 뭐가 필요한가 하면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이키는 반응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늘 잘살지는 못합니다. 주님 앞에 순결해지려고 애를 쓰지만 불결해질 때가 왜 없습니까? 신자 안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정욕이 공전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자기를 위해서 서슴없이 하나님의 보좌도 짓밟고 올라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죄 된 성품에 의외성 때문에 인간은 순식간이라도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그리고 주님을 거스를 수 있는 존재입니다. 다만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애를 쓰고 분투할 뿐이지 인간에게는 언제든지 잘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럴 때에는 자기를 정확하게 비쳐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로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천기를 분별하고 일기 예보를 하는 사람들처럼 이제 이 시리즈가 끝나고 나면 무엇을 설교할까?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기를 원하실까? 성도들이 내게 무엇을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어야 하는가,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중요한 응답이어야 합니다.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은 가끔 그랬습니다. 말씀이 쭉 선포될 때 그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는데 자기는 요즘 그런 말씀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무엇과 똑같은가 하면 길을 걸어가다가 빨간 불이 켜지는데 나는 지금 파란 불이 필요해 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걸어가는 사람이 신호등불대로 움직여야지 거기서 나는 파란 불이 필요해 그리고 등을 떼서 파란 불을 달면 되겠습니까?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백성들이 돌이키는 것이었습니다. 나팔소리를 울려 퍼지게 하는 것, 다급한 마음으로 임박한 적들에 침공을 알리며 나팔을 부는 것은 이제 파수꾼이 하여야 할 일이었습니다. 여기 ‘검’이라고 나오는데 히브리말로 헤렙인데 이것은 전쟁의 재유법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실 때 제일 잘 사용하셨던 것이 전쟁이었습니다. 칼이 바로 전쟁을 의미하는 그런 재유법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오랫동안 망을 봤는데 별일이 없었습니다. 전쟁이 프로그램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어느 날 그날도 별일 없겠지 하고 망을 보고 있는데 멀리 보니까 뿌옇게 연기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저게 무슨 바람인가 생각했는데 나중에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함성소리가 나고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데 이것은 대군이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때에 나팔부는 마음이 어땠을까요? 놀이하듯이 나팔을 불수 없을 것입니다. 다급한 마음에 가슴은 뛰고 그리고 심장이 터져라 나팔을 불기 시작할 것이고 그리고 엄습한 두려움에 파수군의 눈에는 눈물이 흐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파수꾼의 가장 중요한 직무입니다. 그러나 그런 적군의 공격과 더불어서 싸우는 것은 파수꾼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나팔소리를 들은 모든 성내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일에 종사하고 있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밥하던 사람도 있고, 빵을 굽던 사람도 있고, 시장 보던 사람도 있고, 목욕하던 사람도 있고, 부부싸움 하던 사람도 있고, 자빠져 자던 사람도 있고 별사람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팔소리가 들리면 어떻게 합니까?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미국이 기습적으로 나카사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싣고 가서 떨어트려서 15만 명을 죽였다 그러면서 어느 일본 사람이 쓴 수필에 보니까 그것은 마치 벌이 쏘고 핵무기를 가지고 전쟁을 막아보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고 그렇게 하는데 그것은 다 쓸데없는 이야기고 그렇지 않았으면 자기들은 150만도 더 죽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보면 핵 폭탄 투하가 있기 일주일 전에 미군 비행기가 떴습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양의 삐라를 뿌렸습니다. 두 곳에, 거의 시민들이 다 받아볼 수 있을 정도로 삐라를 뿌렸습니다. 그 삐라에 뭐라고 쓰여 있는가 하면 지금 날짜는 정확히 잊어버렸는데 8월7일로 제가 기억합니다. 아마 정확할 것입니다. 8월7일 오전 8시까지 이 도시에서 떠나라. 50킬로인지 200킬로인가 지금 생각이 나지 않는데 그 키로 수만큼 떠나라 그래야만 여러분들은 안전합니다. 물론 핵 폭탄이 떨어트릴 것이라고 하는 말은 안 했습니다. 떠나라, 그렇게 해야지 만 여러분들이 살수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보는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양코쟁이들 큰소리 치는구나. 공갈 협박이다 하며 찢어버렸고 어떤 사람들은 아니다. 이거 뭐가 있다. 그리고 황급히 보따리를 쌌습니다. 그리고 도시를 떠났습니다. 떠난 사람만 살았습니다. 문제는 어느 곳에서도 우리의 삶을 다른 사람이 대신 돌이켜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설교자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것은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마음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실 때에 그 말씀에 대해서 옳다거나 아니면 틀렸다거나 무엇인가를 반응을 해야 하는데 무관심한 상태 속에서 아무 반응이 없이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에 무신론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하나님 자신을 아는 지식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한 우상을 섬기는 것이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멘 하고 말하면서 자신이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으면 큰 위로와 격려를 얻을 것이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못하면 깊이 뉘우치고 최소한 주님이 옳고 나는 잘못했습니다. 주님께 돌이키기를 원하는데 나는 돌아갈 힘도 없습니다. 믿기를 원하는데 믿음도 내 마음대로 안됩니다. 나의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주시옵소서 라고 말하든지 아니면 틀렸다 라고 말하고 벌떡 일어나서 집에 가든지 둘 중에 하나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앉아서 손목시계를 만지면서 오늘은 몇 시에 끝날까 하며 기다리는 것이 그게 신앙생활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누가 여러분들에게 그런 신앙생활을 강요합니까? 그것은 하나의 교회 생활의 한 노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령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지 않는 그 예배 생활과 교회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얻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영혼을 향해서 주님이 끊임없이 말씀해주시고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길을 끝없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놓치고 상실한 채 무관심한 방관자처럼 마치 예배를 재미없는 민방위 교육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스포츠 신문 얼굴에 덮고 잠자는 사람처럼 심령으로 몸은 교회에 나왔어도 마음은 침대에 뒹굴다가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이야기가 들려올 때 가슴이 뜁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 가슴이 뜁니다.
어느 소설인지 영화인지 기억이 안 나는데 숲에서 사자 새끼를 데리고 와서 길렀습니다. 그래서 가축처럼 예쁘게 잘 자랐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 어느 날 이 사자는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한번도 그렇게 소리를 내본 적이 없는 데 어떤 큰 사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음성 하나에 잠자고 있던 그 사자의 야수적인 성격이 일깨어지면서 그래서 주인의 품을 떠나서 숲 속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면 이렇게 잠자던 자신의 양심이 깨어나고 그리고 주님께 속한 사람들만이 감지할 수 있었던 마음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주님을 떠나서 불순종하며 막대 먹은 삶을 살아도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시기만 하면 그 하나님의 품이 서럽도록 그리워지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자기의 욕심대로 살았지만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그 허망함에 주님의 그 품이 너무 그리워지는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긴 날 동안 아무런 반응도 없이 마치 망부석에게 외치는 것처럼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 긴 세월동안 물건을 파는 약장수였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당장 집어치우라고 말하든지 사주고 말지 둘 중에 하나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경고의 나팔을 부는 것은 설교자의 책임이지만 돌이키는 것은 설교자의 몫이 아니라 말씀을 들은 주님의 백성들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 돌이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이 돌이켜서 하나님이 무슨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돌이켜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얻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에는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이 보호해주실 수도 있고, 당신이 사랑해주실 수도 있고, 당신이 그들을 돌봐주실 수도 있는데도 당신의 품을 멀리 떠나서 그 완고함으로 미혹이 되어서 하나님이 돌보실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가장 커다란 고통입니다.
저는 개구리 소년들 이야기가 나왔을 때 몇 번 눈물이 나왔습니다. 벌써 이미 새카맣게 옛날 일이지만 눈에 선합니다. 그 애들이 얼마나 집에 돌아가고 싶었겠습니까? 엄마에게 얼마나 가고 싶었겠습니까?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 범인을 꼭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애들이 얼마나 가고 싶고 무서웠겠습니까? 그 밤에 산에서, 결국은 수없이 얻어맞아서 죽은 것으로 잠정적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는데 인간이 아닙니다. 그 아이들이 얼마나 가고 싶었겠습니까? 그 부모의 가슴이 지금 무덤을 파헤치면서 두 번 찢어발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는 그들을 사랑해. 돌볼 수도 있습니다. 보호해줄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론가 멀리 가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들 가슴이 지어지겠습니까? 아마 지금도 잠자면 그 산 속에서 얻어맞아 죽어 가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얼굴에 흐르던 눈물과 핏자국들이 그 부모의 마음에 선할 것입니다. 그 마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그 뉴스를 몇 번 보면서 진짜 하나님의 마음이 그런 마음이겠구나. 우리가 그렇게 맞아죽어야 할 이유가 없고 그렇게 굶주려야 할 이유가 없고 그렇게 추위에 떨고 그렇게 두려워하면서 공포에 떨 그럴 이유가 없는데 우리는 모두 가출해서 하나님을 떠나서 사니까 그런 공포와 두려움, 양심의 부 자유와 견디기 힘든 외로움 이런 것들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목자 없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 삶은 모두 여러분 자신이 택한 삶입니다.
주님이 뭘 원하십니까? 존 오웬이 말하기를 죄인은 항상 자기 자신의 양심에 가장 예민하게 하나님을 느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돌이키지는 않고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부패와 변화되지 않은 여러분의 모습을 늘 깨닫는 것, 양심이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 거기서 그치면 그것은 하나의 고도의 위선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프면 돌아와야 합니다. 변화되지 않으면 주님께 더 많이 매달리면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희생적인 사랑을 생각하면서 집을 떠난 우리들을 회심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부르시는 그 주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깊이 헤아리고 그리고 범죄 한 손을 올려놓고 도끼로 자르는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가던 길에 깃발을 꺾고 돌이켜 설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원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 같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간절히 기대하시는 것 같습니까?
내가 천천의 수양과 범죄를 주께 드릴까
내 몸에 열매로서 주께 바칠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내게 원하신 것은
뭡니까? 주님께로 돌아오고 뜨겁게 회심하고 주님만 사랑하면서 살면 여러분의 전 재산을 팔아서 바치라고 그러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들이 주님을 너무 뜨겁게 사랑하면 여러분들의 자식을 순교자가 되라고 불러주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천 천의 수양과 번 제가 아니고 여러분들의 몸에 열매인 여러분들의 자식들이 신학교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입니다. 당신의 피로 사신 당신의 사람들, 당신의 지체들인 그대들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가는 그 핍절하고 고통받는 삶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하나님은 여러분들 자신들이 당신에게 접붙여 있기를 원하고 그 연합 속에서 주님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여러분들이 주님의 마음에 즐거움이 되는 그 연합된 동행의 삶을 살아가기를 하나님께서 너무나 간절히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완고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떠나간 영적인 죽은 생활밖에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교회에 나와도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생명이 없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죄를 이길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여러 가지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에 대한 핑계를 대고 수많은 이유로 자신의 생활을 정당화해서 많은 지체들의 동의를 얻어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동의해주시지 않으면 그는 지금 헛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깊이 한번이라도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무엇이든지 주님이 말씀해주시옵소서 주님은 다 옳고 저는 다 잘못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습니다. 고백을 해야 합니다.
의무감에서 형식적으로 늘 예배에 나오고 있는 지체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몇 사람에게 제가 아주 파격적인 제의를 했습니다. 말했습니다. 당신 일주일에 세 번식 예배에 나오는데 다 집어치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수요일 날도 억지로 나오지 말고 집에 일찍 들어가서 발 닦고 쉬고 오후예배, 구역예배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들어가서 텔레비전보고 싶으면 보고 목욕하고 자라. 회사 일도 바쁘다며, 그런데 한번 예배에 나와도 좋으니까 좀 사모하는 마음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라. 신문이나 만지작거리며 예배 드리지 말고, 저 뒤에 간신히 예배 시간 20분씩 늦게 와서 쭈그리고 앉았다가 잡는 사람도 없는데 빠져나가듯이 그렇게 하지 말고 좀 떳떳하게 와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라.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듣다가 아닌 것 같으면 벌떡 일어나서 다른 데로 가라. 그렇게 이야기한 사람 중에서 순종한 사람 중에서 변화가 안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동일한 것을 요구하고 싶습니다. 그 수많은 예배의 참석, 꾸역꾸역 나오는 교회 생활 그게 무엇입니까? 한번도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고, 그의 말씀이 부은 적도 없고, 그 마음이 전수된 적도 없는 그런 예배 생활을 통해서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오늘 말씀하십니다. 나팔을 울리는 것은 설교자의 책임이지만 그것을 듣고 돌이키는 것은 이제 우리 자신의 책임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해주십니다. 이렇게 돌이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돌이키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아주 명백한 것입니다. 적군이 엄습하는 것은 그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엄습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노한 적군들이 칼을 휘두르며 말발굽을 울리며 성에 들이닥쳤을 때 그 나팔소리를 듣고도 전쟁을 준비하지 않았던 사람들, 잠자던 사람들은 잠자던 상태에서 죽을 것이고 술을 마시던 사람은 주점에서 객사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전쟁이 아닙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돌이켜 살기를 원하시는데 여러분들이 만약에 거듭남에 이르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어떻게 하실지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단지 교회에 출석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없고, 자기를 위해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눈물도 없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신앙적인 의지도 없는데 하나님이 왜 그 사람을 구원하셔야 합니까? 하나님에게 그런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서 자기의 죄로 인해서 멸망을 받아야 마땅한데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사랑하셔서 그들을 그 죄가 있는 데도 그 죄를 없는 것처럼 여기시고 구원해주시기로 하나님이 특별히 작정하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분명히 여러분들이 만약에 주님을 영접하고 거듭나지 않았다면 이제껏 들은 설교와 복음에 대한 증언을 통해서도 여러분들은 이미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기회를 제공받았습니다. 깊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돌이켜 구원에 이르는 지혜로운 백성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고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는 부분적인 배교의 삶을 여러분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면 돌이키셔야 합니다. 돌이키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의 영혼에는 생명이 없고 그리고 돌이키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어떤 감격도 마음에 느끼지 못한 채 성찬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양심에 괴로움을 경험하고 고난의 주간이 다가올 적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자신의 신앙에 중심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이 들어오지 않는 차가운 십자가 신앙의 흔적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삶이 하나님이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놓으셨을 때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삶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받았는데도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어느 순간에 반드시 여러분들의 삶을 흔들어서라도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여러분들의 영혼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보다 중하고 여러분들의 명예보다도 귀하고 또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영광보다도 심지어는 여러분의 육신의 생명보다도 하나님에게는 더 소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돌이키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지체 몇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신앙으로 잘 살다가 마지막에 아름답게 주님의 품으로 간 지체도 있습니다. 얼마나 더 살고 싶어했는지 모릅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내 인생 가운데 단 5년이라도 떼어주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런 지체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했던 날들을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임종을 맞이하던 지체들에게 히스기야처럼 하나님이 단 1년만이라도 생명을 주셨다면 아니 그것은 너무 과하고 일주일만이라도 건강과 생명을 주셨다면 하루하루의 삶을 얼마나 잘 살려고 애를 썼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날들은 속히 지나가고 그들은 갔고 우리는 남았습니다. 살아있다는 사실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말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심한 강도가 주님의 손에 이끌려 낙원으로 올라가면서 얼마나 많이 지상을 바라보았을까요? 그런 놀라운 사랑과 뜨거운 은혜를 입었는데도 그래서 죄밖에 지은 것이 없고 불의밖에 행한 것이 없는데도 그 십자가에서 주님을 믿으니까 주님이 용서해주셔서 이렇게 낙원에 이르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그는 이제 마지막에 회개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단 한시간도 주님을 위해서 산 날이 없었습니다. 만약에 낙원으로 올라가는 강도에게 하루라도 더 살게 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그리고 목이 터져라 예수의 사랑을 외치고 자기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전파하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앞에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 회심의 나팔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러나 파수꾼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하므로 그 중에 한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바 되려니와 그 죄를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
이어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의 사명을 상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을 향한 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향해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즉 파수꾼이 전쟁이 임함을 보고 정확하게 나팔을 불었는데도 그들이 경비하지 아니하므로 그들이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책임이고 그리고 만약에 파수꾼이 전쟁이 임하는 것을 보고도 제때 나팔을 불지 않아서 그 백성들이 망하게 되었다면 그 백성들은 죄 가운데서 망하게 되거니와 그것을 정확하게 전달해주지 않은 선지자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선지자들만 들어야 할 말씀이 아니라 백성들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지 만 선지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리고 선지자가 외치는 경고의 음성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두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는 선지자의 사명의 중대함과 그 책임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두 번째는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선지자의 사명에 대해서 그 사명의 막중한 책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파수꾼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므로 그 백성들이 그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면 그들이 죽는 것은 죽는 것이지만 그 죄는 나팔을 불지 아니한 파수꾼에게서 찾겠다는 말씀입니다.
세 살 먹은 어린아이라도 이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오해할 이유는 없습니다. 정확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에서 칼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이 칼로 묘사된 것은 하나님이 너무나 자주 당신이 그 백성들을 심판하실 때에 전쟁을 사용하셨기 때문에 제유법 적으로 칼이라고 묘사한 것이고 파수꾼은 선지자이고 그리고 그 파수꾼의 경고의 나팔소리는 선지자의 외침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항상 들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최고의 행복입니다.
우선 가장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다. 1611년에 영국에서 최초로 킹 제임스 역본이 나왔습니다. ‘제임스’라고 하는 왕이 학자들을 시켜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희랍어와 그리고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을 했고 특별히 구약 히브리어의 번역은 영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한번쯤은 짚고 넘어갈 정도로 그런 영문학사의 업적이기도 합니다. 제일 처음 그 책이 번역되어서 그래서 책으로 나오게 되었을 때 그때 그 성경의 값이 얼마였는가 하면 인플레를 계산하면 4억 2천만원 정도 했다고 합니다. 성경 한 권에, 그러니까 평범한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그 전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사본들의 시대가 나오니까 이제 성경이 본격적으로 찍히기 전인 더 옛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부자들이 양피지에 기록된 성경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아마 전체를 보관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고 일부를 보관하고 있었고 전체를 가지고 한다면 아마 작은 트럭으로 하나 가득 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성경이었기 때문에 사도들도 전도를 할 때 성경을 손에 들고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같은데 보면 성경 어딘가, 시편 어딘가 일렀으되, 그러니까 읽기는 읽었는데 이게 어디에 나오는지 잘 생각이 안 났습니다. 그렇게 기억에 의존하면서 설교하고 또 성경도 기록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뭐 굉장한 것입니다.
그러다 그 후에 ‘코덱스’ 라고 하는 것이 나오는데 그것은 성경을 가죽 같은데 필사를 해서 이렇게 책처럼 묶어놓은 것인데 그것도 한 권에 모두 묶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사본들의 시대에는 성경을 직접 대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돈 만원만 들고 나가면 성경을 마음껏 살수 있고 아무리 비싸도 한 이만 원이나 삼만 원만 들고 나가면 가죽으로 되었고 해설까지 다 되어 있고 불편할까봐 뒤에다 찬송가까지 달아놓은 그런 책을 살수 있습니다. 작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작은 것, 길쭉한 것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길쭉하게, 글씨가 작다고 하니까 글씨가 주먹만한 큰 글씨로, 또 부피가 두껍다고 하니까 수입 지를 써서 얄팍하게 뭐 입맛대로 수많은 성경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많이 읽었습니까? 그래서 집에 성경 안보는 것 있으면 다 가지고 오십시오. 그렇게 놔두면 뭐합니까? 갖다가 저기 선교지에 보내든지 어디든지 보내게, 지금 들고 계신 성경도 안 읽으려면 다 갖다 놓으십시오. 다 보내버리게.
그렇게 해서 성경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게 몇 백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면 그 사람들은 상상도 못하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대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 그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최고의 축복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이 예배시간을 통해서 정확하게 자기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해석해주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이런 깨달음이 있다라고 하는 것이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누군가 하면 참된 신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정직하게 들려지고 그래서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이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길이 무엇이고 하는 것을 정확하게 깨달으려고 하는 그런 사람, 깨달으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것이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축복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선지자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는 단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율법, 즉 모세의 오경을 그 모세의 시대와는 다른 시대의 상황 속에 어떻게 적용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오늘 우리의 관심은 지금 예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사셨을까? 그렇지만 그때 사람들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지금 모세가 우리 가운데 있었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살았을까? 그것을 추적해내는 작업들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능가하는 놀라운 복음의 비밀들을 보여주시기도 했고 또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록된 성경의 해석을 뛰어넘는 새로운 계시를 첨가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어째든 선지자들의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선포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당연히 선지자들은 당시대의 백성들의 삶이나 마음을 보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에 가깝게 다가갔는지 하나님의 징벌로 다가가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 다가갈 때에는 그들 가운데 있는 죄의 증후들을 들추어내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그들에게 전해줌으로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얻게끔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이 세상에 두셨을 때 홀로 내버려두신 것이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간다라고 하는 것은 거의 기적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거듭났어도 역시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거듭남과 함께 인간에게 있는 영적인 어두움과 무지가 완전히 벗겨진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어두움은 다분히 영적인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어두움이고 무지는 인간의 태만을 통해서 자기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그런 영적인 무지와 어두움이 주님을 모를 때에는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빛이 전혀 없이 어두움과 무지로 가득 찬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는 거룩한 것을 인해서 고민할 수도 없고 신령한 것을 위해서 살수도 없고 더더군다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목적을 따라서 살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빛을 비추어주셔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자기가 죄인인 것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것과 그리고 자신이 이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할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영적 어두움이 어느 정도 물러나게 되었고 그리고 무지로부터 깨어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전에 죄 된 상태에 있을 때에 비하면 엄청난 진전이었지만 그러나 이제 앞으로 살아가야 할 참 신자의 삶, 앞으로 되어야 할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회복한 참 사람, 진실한 사람,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사람으로 변해가기 위해서는 그것은 아주 적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거듭났어도 여전히 영적인 것들에 대한 무지가 있습니다. 본성상 영적인 것들을 싫어하고 그리고 죄 가운데 있기를 즐겨함으로서 영혼의 어두움을 하나님이 한번 벗기셨지만 그러나 여전히 어두움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정말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말할 때 여러분들이 자신이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지를 보고 오늘 큰 경고를 여러분들이 받아야 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그런데 대게 그런데 해당되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또 잘 안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들어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제일 제 마음속에 고통스러운가 하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주님을 깊이 만났는데 지금 불순종하고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그런 죄인들보다 더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누군가 하면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생각의 채에 거른 사람들,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상에 채가 있습니다 틀이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전해지면 자신의 영혼을 개방해서 그 말씀이 들어와 자기를 변화시키도록 자기를 허락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주시면 자기의 사상의 채를 바쳐서 자기의 사상에 맞는 것은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뱉어버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존 오웬의 표현에 의하면 부분적인 배교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배교라고는 안 했습니다. 부분적으로 배교적인 신앙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자기의 인생관과 사상에 맞는 것이 있으면 열광을 하고 그것을 막 강조합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이면 그것을 자기의 삶 속에 스며들지 못하도록 거부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는가 하면 논리가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을 때 유대인과 종교지도자들이 뭐라고 물었는가 하면 누가 너에게 이런 복음을 전하라는 권세를 주었는가.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자신도 거절할 수 없는데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불연속성이 있다고 보고 그리고 예수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그것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면 참 좋은데 자기 사상의 채를 놓고 자기 생각에 맞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말씀이 들려올 때는 졸던지 아니면 속으로 화를 내든지 신경질을 내든지 그렇게 하고 또 자기 사상에 맞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는 아주 은혜를 받는데 은혜를 받는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인정을 해주는 것입니다. 아! 그래 맞아. 그렇지, 그럼 그렇게 해야지,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해야지, 이런 태도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자기 사상에 맞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리고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저 목회자가 전해주는 말씀, 즉 설교 사이에 차이가 있을 것이고 따라서 저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저 사람의 개인적인 생각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자의 오류를 극대화하여 그것은 저 사람의 신앙적인 성향 내지는 신앙적인 하나의 칼라지 결코 성경에 기록된 그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영혼의 참된 변화가 없습니다. 물론 들으면서 아! 그렇구나. 참 그렇게 해야지. 참 인간 사는 도리가 그게 아닌데. 이런 깨달음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명사 특강을 들으면서도 있을 수 있는 현상이고 길거리에서 약장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건강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나같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그런 감동 같은 것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 빛이라기보다는 한 빛, 진리라기보다는 인생의 어떤 일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뭐 어디서든지 우리가 그런 것을 구할 수가 없겠습니까? 어디서든지 삼류 코미디에서도 인생에 관한 진실들은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있는데 영혼 깊은 곳에서의 변화, 즉 자기 열심은 있지만 하나님이 오셔서 그 영혼을 만지시고 그리고 깨트리시고 변화시키시고 그래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친밀함과 연합을 보여주시는 이런 영혼의 진실한 변화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이런 사람들이 어떤가 하면 관심 자체가 인본주의적입니다. 인본주의적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인간이 최고다 하고 사는 것 그것이 인본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본주의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무신론적인 인본주의가 있고 유신론적인 인본주의가 있습니다. 무신론적인 인본주의는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인가 인간밖에 존재하는 게 뭐가 있나.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이 최고다, 그리고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러면서 인간의 행복이 최고고 인간이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모든 것이 인간 중심으로 움직인다라고 하는 것이 무신론적인 인본주의라면 유신론적인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하나님이 참조하셨다는 것도 인정하고 예수님이 자기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다만 그렇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자기 자신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자가 모두 이기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특히 유신론적인 인본주의자들 중에는 이타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은 항상 이 세상의 평화, 사람들이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 고통 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 이웃을 위한 염려, 어떻게 하면 봉사하며 살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아무리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그것들만이 그의 관심의 전부다 라면 그는 유신론적인 인본주의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는 즉시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입술로만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 안에서는 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리며 열렬하게 믿는다고 해도 실제로 세상에 나아가면 다 사기 치고 나쁜 짓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고 자기들만 먹고살고 떵떵거리고 고통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가고 그렇게 하는 것 돌아보지 않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가 아닙니까? 그런데 관심을 갖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람을 향해 관심을 갖고 고통 하는 이웃이나 자신의 행복이나 이런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화목하게 지내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가는 이런 삶에 대해서 모두 관심을 갖는 것이 모두 인본주의가 아니라 유신론적인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차이점은 유신론적인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도 인정하지만 그러나 사람들에 대해서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본주의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런 분명한 영광에 대한 갈망이 있기 때문에 그 신앙을 토대로 해서 인간의 행복도 생각하고 고통받는 이웃에 대해서 염려도 하고 선교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이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신본주의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까처럼 그런 신본주의 적인 사고와 삶은 영혼의 참된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살 때 모두 이기주의자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성향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모두가 예수 믿기 전에 소문난 이기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지나친 이기주의는 하나의 질병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변해서 영혼의 참된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사무친 열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자기의 삶 구석구석에 짓밟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가슴아파할 수 있고 온 땅에 가득히 여호와의 이름이 존귀히 받지 못하는 것을 인해서 아파할 수 있습니까? 영혼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 그런 갈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교회에서도 가장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데 가로막는 사람이 바로 죄인들이 아닙니다. 이렇게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기가 변화되지 않은 사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상의 채에 하나님의 말씀을 쳐서 그래서 자기가 동의한 것만 받아들인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영혼의 어떤 변화도 없습니다. 사소한 변화는 있을지 모르지만 영혼의 성향이 바뀐다든지 그래서 그 자신 속에 있는 아집과 이기심 그리고 편견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참 생명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역사 하는 그런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선지자는 바로 이런 일들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보면 항상 선지자들은 설교자들은 교회 밖에서 불신자들에게 핍박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참된 진리의 말씀에 맛을 안 사람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혼의 참된 변화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혼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 자신은 말씀을 너무나 많이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변화될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해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영혼이 죽어 있는 상태에 있다라고 하는 훌륭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결코 총체적인 순종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가 살아온 인생관, 그리고 자기가 바라보는 삶에 대한 견해, 그리고 어줍지 않은 자기 자신의 신학적인 안목을 가지고 교회와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항상 굽어 있고 하나님의 참 생명으로부터 멀어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곳에 자기를 세우기보다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내적 성향에 맡는 상황에 자기를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저는 신앙생활 하면서 재산도 팔고 힘에 넘치도록 일을 하면서도 사실 영혼은 거의 죽어있는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정말 커다란 고통이오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정직하고 순수한 말씀을 듣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순수한 선포 앞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의 껍질들이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씀으로 하여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거짓된 생각의 틀과 자기 자신의 유신론적인 인본주의적 편견들을 파기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를 개방하는 것 이외에 그들에게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속에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해 언제나 좋다고 말씀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언제나 그렇게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순종하고 바르게 충성하고 마음을 지키며 흠 없이 티없이 살아갑니까?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애쓰고 힘쓸 뿐이지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렇게 완전하다 이제는 내가 모든 것을 이루었다 내가 붙잡았다 그 상태에 도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끝 날까지 점도 없고 흠도 없고 그리고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로 나타나기를 힘쓰면서 살뿐이지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하실 필요가 없을 정도의 완벽한 삶을 사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경고 음성을 듣고 자신의 죄에 대한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의 지적을 거절하며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온전한 신자가 될 수 있으며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아에 대한 집착이고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자기의 생각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의 사상을 높이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깨트려지기보다는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기 자신이 인정을 받는 것이 훌륭한 신앙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동안에 그는 내적인 참된 생명을 잃어갑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험은 우리의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비침을 받기만 하면 성경 다음으로 훌륭한 자료입니다.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길지 않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분들이 한결같이 똑같은 영혼의 상태를 가지고 살아오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생기가 넘치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력에 넘치던 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생명 속에 충만하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과의 만남의 감격이 있고 경건의 능력이 있어서 죄에 대해서 지금처럼 쉽게 지지 않고 항거하고 그리고 불의에 대해서 담대하게 자신의 신앙을 확실히 하던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는 어떤 때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자주 책망을 받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양심을 아주 쉽게 정확하게 그리고 아주 아프게 찔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무엄한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이라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불순종하면 그 성령님이 자신의 양심과 영혼을 예민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적해주실 때 정확하게 그 죄를 지적 받고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들을 때 즉각적으로 깨닫고 아파하면서 회개하던 그런 신앙의 세계가 있었을 때에는 작은 죄에 대해서도 예민했었는데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가면서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커다란 아주 명백한 죄를 지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단이 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죄를 죄라고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그 죄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 성도들을 향한 사단의 영원한 전략입니다.
그렇게 되었는데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자기 사상의 채에 걸러서 자기 비위에 맞는 하나님의 말씀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죄에 대해서 예민하게 느낄 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열심히 있는 기도생활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깨닫고 깊이 깨트려지며 아파하고 그래서 자기가 자아가 부서지는 그런 경험들은 없습니다. 항상, 그래서 본성이 새로워지는 대신 이 겉모습이 기독교 신앙의 분위기의 옷을 입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말 불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웬만큼 누가 이야기를 해도 모두다 아는 내용이고 모두 들어본 이야기고 모두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자기 자신이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또 가르치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 처음 시발이 어디부터 시작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직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이 깨트려지지 않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정말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고 반응하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리고 그 말씀의 영향을 받는 자세들이 결핍된 것이 계속 쌓이면서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도전입니다. 이 일들을 개선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 바로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설교자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설교자가 하나님 앞에 충성되다라고 하는 말에 일차적인 의미는 그가 얼마나 많이 땀흘리며 수고하는가, 목회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희생하는가, 그가 얼마나 자주 자기의 집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렸는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목회자의 충성됨은 얼마나 그가 모든 고난과 핍박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외쳤는가. 그래서 설교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을 때에 그 외친 설교의 결과로서 맺히는 열매 때문에 하나님 앞에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고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감 없이 외치는 그 행위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보상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많은 교인들이 백잘치듯이(?) 교회에 모이는 모든 것이 다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확신하건대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많은 교인들이 교회 마당을 밟고 드나들지만 지옥에서 만날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회심을 했습니까? 거듭났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의 표가 있습니까? 정말 죄인들의 본성이 새로워져서 적대감을 가졌던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하나님의 거룩과 그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거듭난 자,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징표가 그들에게 없는데 그들이 어떻게 천국에서 만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편견에 사로잡혀서 자기의 생각에 맞는 하나님의 말씀만 받아들이면서 산 사람들이 머리 속에서 그려낸 그 하나님이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정말 하나님일 수 있습니까? 그들은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영적인 우상숭배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사고와 사상에 가감 없이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된 그 하나님, 그 고유하고 독특한 하나님을 우리들이 받아들이고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을 섬길 때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헌신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일생을 주를 섬겼다고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섬김을 전혀 받지 않으신 그런 경우도 나옵니다. 마태복음 7장을 기억해보십시오. 거기에 보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그리고 이런 저런 일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르노라 말씀하셨습니다. 뿌리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같은 세대에는 더더욱 최고의 가치가 하나님의 정직한 말씀, 그리고 순수하고 깨끗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서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성공, 교회의 성장 이런 것과는 바꿀 수 없는 가치입니다. 어느 시대든 모든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을 회개시키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정직하고 순수한 말씀은 그 듣는 사람들 안에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들추어내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 섞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전하게 살아가면서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건전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부도덕하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죄 가운데 살아가지만 그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죄 된 상태에서 고통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 사람들이 볼 때는 그것을 그렇게 복잡하게 나누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나눕니다. 너 주일 예배에 잘 나오는구나. 십일조도 잘 내는구나. 교회에 와서 열심히 봉사하는구나. 한 교회에 오래 다녔구나. 넌 하나님 편, 너는 예배도 가끔 빠지고 뭘 시켜도 뺀질대고 안하고 그리고 요즘 소문난 죄를 짓고 있다며, 너는 이쪽 그리고 이렇게 둘로 딱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그렇게 주일 잘 지키고 형식에 있어서 조금도 문제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주일도 못나오고 심지어는 소문난 죄 가운데 거하면서도 그가 죄가 좋아서 거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노예가 되어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참 생명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이 아까 전자에 말한 사람들이었고 예수님 시대에 창녀와 세리들이 바로 그런 후자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를 보고 찾아가시고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눈에 보이는 외적인 종교 생활을 보고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 독특한 통찰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말씀을 전할 때 그들 내면에 세계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게끔 만드셔서 그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셨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셔서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신앙생활을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하시는 신앙생활입니까? 영적인 무지와 영적인 어두움과 무지에 가득하게 살면서도 도무지 자기 자신의 영적인 참된 변화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고 결국 그런 동안에 그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 냄새나고 부패한 재물처럼 되어버린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거절하고 자기 식대로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믿겠다고 고집하는 그런 삶,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시작하고 창립하고 8년이 지났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이지만 저는 성품이 모질고 악한 사람이지만 항상 마음속에 주님이 주신 영혼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돌봐야한다라고 하는 이 사실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저와 여러분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저하고 기껏 있어봐야 짧으면 1-2년 길어봐야 몇 년, 생사고락을 같이한다고 해봐야 한 3-40년 될 것입니다. 몇 사람이나 3-40년까지 저와 이 교회에 남아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후에 우리 다시 만날 일이 없습니다. 천국에서 만나지만 그때 무슨 우리가 천국에서 다시 열린 교회 세울 일이 있습니까? 필요 없습니다. 그때는 새로운 차원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다시 부부가 만나서 세 집 하나 얻어서 다시 살림 꾸릴 줄 압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천국에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여러분들이 사랑스럽고 여러분들이 제가 좋아도 스치고 지나가는 인연입니다. 뭐 내일이라도 안 보려면 서로 헤어지면 안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 나라에 가면 모든 것보다도 햇빛같이 찬란한 우리 주님의 임재의 영광 아래서 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정말 변화된 사람들이 아니면 어떻게 그 나라에 들어가겠습니까? 그 나라에 소속된 사람들이라면 그 나라에 뭔가 표를 나타내 보여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항상 옳습니까? 우리가 항상 바르게 생각합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은 꼭 필요하고 그 책망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꼭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즘 우리가 필요한 설교는 위로하고 감싸주어야 하는 것인데 목사님이 방향을 잘못 잡으신 것 같다고, 걱정됩니다. 그렇게 잘 알면 한 교회 하셔도 됩니다. 분명한 사실 한가지는 하나님이 정말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주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 정직한 들림이 있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진실하고 정직하게 반응할 때 그때 우리들이 참 신자가 되어갈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영혼에 진실한 변화를 경험하고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갈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심판에 대한 경고를 듣기까지 그들이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적은 없었습니다. 주님은 심판하시기 전에 오래도록 기다리십니다. 그건 우리가 개인적인 신앙의 경험에 있어서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우리들이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깊이 회개하게 되면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진작 회개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셨고 오래 전부터 나를 이렇게 일깨우고 싶어하셨다는 것을 그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젼 목사님도 말하기를 하나님이 독재자처럼 느껴졌을 때는 죄를 아무리 지면서도 가슴아프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까 자기가 죄를 지으면서 산 것이 그렇게 가슴아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가슴아파하는 것이 벌써 오래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을 회개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일리는 무엇을 통해 나타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계속 주심으로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깨닫게 하시고 승복시키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이 노력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실로 지루하리 만치 긴 세월동안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향해서 권고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들려주는 것이 선지자의 직무였고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설교자의 임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항상 여러분들의 목회자가 여러분 자신의 편에 서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서 때로는 그것이 자신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편에 서서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경고의 나팔이 되기를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계속 힘써야 할 의무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성경은 만약에 그런 정직한 선포를 듣고 백성들이 돌이켰다 라고 하면 그건 다행이지만 경고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백성이 망하게 되었다 라고 하면 그의 멸망당한 그 죄에 대해서 그 대가를 선지자 네가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말이 됩니까? 지금 하나님 앞에 나팔소리를 듣지 못해서 멸망을 받고 죽은 백성은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을 계속 불순종하고 그렇게 수없이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도 안 듣고 안 듣고 결국은 멸망의 길로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도 그들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멸망하려니와 자기 죄로 인하여 제한바 되려니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죄 가운데서 심판을 당하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측면에서 볼 때 어떤 문제도 없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자기의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선지자로 세우셨습니까? 쉽게 말하면 당신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신앙의 사람들을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물론 그들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박국처럼 회의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요나처럼 꾀를 부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처럼 눈물을 많이 흘리는 사람도 있었고 에스겔처럼 비전을 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쉽게 낙담하는 장면들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강한 사람도 아니었고 온전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적으로 볼 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사람들이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아모스서에서는 “나의 사랑하는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될 일을 그 선지자들에게 미리 보여주시고 선지자들이 하는 최고의 직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일이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빼어놓을 수 없는 두 가지 직무입니다. 하나가 아닙니다. 두 가지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일이 선지자의 고유한 직무였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런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도 하고 미래에 될 위대한 일들을 하나님이 알려주시기도 했고 임박한 심판을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대신해서 선지자에게 들려주시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친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들려주시는 법이 있습니까? 한 시대가 어려움이 다가오면 그 모든 일들을 그 모든 사람들이 깨닫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당신이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당신 가까이 두시고 그리고 당신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살게 하심으로 그 교재의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 하나님의 말씀 이런 것들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청년 지체가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두 가지 질문을 받았는데 상담을 다 하고 이제 영혼의 어두움이 어느 정도 물러가고 마음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눈물을 닦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어려울 때 목사님이 이렇게 상담해주시는데 -옛날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은 상담할 게 있으면 누구를 찾아갑니까?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널 찾아가랴? 내가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또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우리는 이렇게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이 자라는데 목사님은 누구 설교도 잘 안 들으시면서 어떻게 그렇게 설교하실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매일 듣는다. 그것이 없으면 선지자로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하고도 이야기하고 그럴 때 있는데 사실 그렇게 목회자가 되고 나면 목양을 받을 목자를 찾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나마 부분적으로 얼마 전에 돌아가신 김희보 목사님이나 이런 분들 저는 마음으로 스승으로 생각하면서 그렇게 위로를 받고 하지만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택하신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그렇게 당신의 성품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에 은혜를 주시고 하는 일에 있어서 특별히 은혜를 베푸시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지 만 여러분들이 말씀에 은혜를 받을 수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내가 부족할 때도 그렇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들을 느낄 때가 참 많습니다. 어째든지 간에 선지자들은 당신의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보면 네가 나팔을 안 불어서 온 백성이 만약에 죽는다면 너 심판 받아 마땅하다.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데 그게 아니고 여기서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너를 심판하시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두 번째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볼 때 과거는 조금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 기억이 안 나고 나쁜 것은 또 기억이 또렷하게 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 사람의 현재만 들어옵니다. 너 신앙이 좋기 때문에 교회에 유익하다. 너 말썽만 매일 부리고 우리 교회에 부담을 준다. 너 돈도 많고 신앙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싹싹하고 봉사도 잘 하고, 너 고집 세고 그리고 헌금도 잘 안하고 성질은 개떡같고 불복종하고 이렇게 우리는 그렇게 한 사람의 현재의 모습에만 집중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고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죄인들이 고쳐졌을 때 하나님 앞에 어떻게 영광을 돌리고 살 수 있는지를 한번에 보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강퍅해져서 그 거룩한 사람 스데반이 순교할 때 가편 투표를 하고 옷을 찢던 사울,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혈기 충천한 그 청년의 모습 속에서 미구에 하나님의 큰 영광을 위해서 가슴 저미는 열망을 가지고 그렇게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고 자랑하며 살 사도를 하나님이 보시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사랑하신 것은 틀림없지만 영혼의 가치에 있어서 선지자의 영혼이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더라면 돌이킬 백성들이 경고를 듣지 못하고 죽어갈 때에 그 돌이키지 못할 때 죽어 가는 불쌍한 한 영혼의 가치를 능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집단적으로 다루시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다루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벨론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그런 멸망을 당하게 하셨을 때에 거기에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까요?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에 주님의 마음에 그렇게 합당하고 그렇게 거룩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하게 하신 그 후에 계속되는 역사를 보면 그 속에는 항상 뭐가 있는가 하면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종자 씨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심판의 경고를 통해서 돌이키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부흥이 일어난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세상이 다 썩어 가는 가운데서도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도 하나님이 집단적으로 다루시면서 집단적으로 그 죄를 하나님께서 취급하시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개인적으로도 또 다루십니다. 이 두 가지가 항상 역사 속에서 함께 흘러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우주적인 교회를 한꺼번에 바라보시면서 다루시기도 하시고 그리고 또 여러분들의 이 열린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다루시기도 하시고 여러분 가정을 바라보시고 다루시기도 하고 여러분들 개인을 보면서 다루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이 이미 주어졌고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실현되었습니다. 에스겔이 소명을 받았을 때는 이미 포로로 끌려간 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적으로 그렇게 하나님이 다루셨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중에 남은 자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보이시고 선지자를 소명하시기도 하시고 그 선지자의 음성을 듣고 돌이키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시기도 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지금은 비록 하나님의 나라에 별 도움이 안되고 부족하게 살아가고 심지어는 죄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임함을 가로막는 거치는 돌처럼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있지만 그러나 인생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한사람의 돌이킴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죄 가운데 있는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서 심판을 선고하시는 것은 단지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 경고를 듣고 한사람 한사람이 돌이키기를 너무나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버림을 받아서 내동댕이쳐졌다 라는 그런 느낌을 받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느끼는 자기 인식일 뿐이고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더 멀리 떠났기 때문에 더 안타깝게 찾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느낄 수 없어도 그것은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진실입니다.
오늘 선지자가 왜 이렇게 엄중하게 회심치 않은 자들을 향해 경고하고 그리고 급박하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처럼 죄인들을 향해서 준엄하게 경계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수심을 보여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심판하심으로 그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자신의 불쾌감을 풀게 하시기 위해서 선지자가 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그들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이야기할 때 빨리 해라. 안 하면 맞는다. 그때에 목표가 그 아이를 때리는 것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 경고를 통해서 저 아이를 바른 길로 가게 하는 것이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당신의 외아들이 피로 값 주고 산 우리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지만 불순종과 죄 가운데서 돌이키지 아니함으로 당신의 영광을 가리는 그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오늘 깊이 경고하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무엇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까?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바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과 동행하며 언제든지 여러분 마음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여러분 자신이 삶의 모든 동기와 방식들이 여러분들이 진실로 사랑하는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을 즐거워하기 위한 것이 그런 삶의 동기와 가치가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는 소원은 그것은 곧 우리의 행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미 앞서간 신앙의 많은 선조들이 일평생 눈물을 흘리며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하나님 앞에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찬송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냉담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향해서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버리지는 않지만 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지도 않는 하나님을 향해서 전적으로 배교하지는 않지만 뜨듯 미지근한 여러분들의 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기대를 갖고 계시다면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삶에 있어서 순전하게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지도 않는 들은 믿으시겠습니까? 한사람 한사람을 향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간절하게 사랑하시고 여러분들이 돌이키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진노에 불길은 여러분들 한사람 한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불길에 또 다른 표현이고 주님보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치열한 질투는 여러분들의 영혼 하나 하나를 향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독점적인 사랑의 욕구에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오늘도 진실로 회개하고 그리고 돌이켜 서기를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예수님을 멀리 떠나서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고 그 은혜의 교제로부터 멀리 떨어져감으로서 우리가 주님 앞에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참된 진리의 말씀,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앞에 변화되는 삶을 거부함으로서 주님 앞에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저의 신앙의 취향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있습니까?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회심하여야 한다라고 하는 이 사상을 내 자신의 목회적인 철학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로 여러분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고 여러분들에게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될 의무가 여러분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보십시오. 선지자는 하나님께 그렇게 사랑 받던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한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 돌이키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경고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돌이킬 수 없었다면 그 한 영혼이 멸망당하고 그 한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픔과 고통이 얼마나 크셨으면 그 한사람의 희생에 대한 죄의 값을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선지자에게서 찾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수없이 씨름해봐도 항상 공식처럼 나오는 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 없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에 참된 즐거움은 우리의 죄를 정직하게 뉘우치고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과 그리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의 참 사랑, 그 은혜의 진실한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도 여기에 나오는 이 가상적인 한사람의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여러분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깊이 돌이켜서 그 생명으로 돌아오고 그래서 우리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님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당신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을 인해서 기뻐하시고 온 땅은 그렇게 하나님께 사랑 받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는 그 일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지금 그 사랑을 느낄 수 없으면 옛날의 사랑을 기억해보시고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 살아가고 있는데도 예수님이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을 것이라고 믿었던 세상도 없고 나도 없었던 그 믿음, 그래서 예수의 사랑 안에서 안식을 얻었던 그 믿음을 다시 한번 여러분의 마음에 불러 일으켜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착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불순종하고 주님 거스르고 대들고 불평하고 한없이 은혜를 베푸시고 끝없이 사랑해주셔도 한번도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감격으로 감사할 줄 몰랐던 그 악한 삶을 접고 그리고 하나님이 왜 나처럼 쓸데없는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시고 그리고 지금도 당신의 그 진노로 쓸어버리지 않고 돌이키라 돌이키라.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 강퍅해져서 스스로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을 때 회초리로 우리의 종아리를 때리면서도 돌이키고 돌이키기를 원하셨던 그 아버지의 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이 지나간 세월은 어쩔 수가 없었어도 이제라도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돌아와 돌아와 마음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와
그래서 오늘도 주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통해서 볼 수 없는 당신의 마음을 죄인들에게 보이시고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주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통해 알리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채 변화지 않고 일생을 살아가기를 힘써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소문난 죄인이라도 그들을 막보지 아니하고 주님이 자기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기억하며 그 부채의식을 가지고 완악한 자도 끌어안고 기다리고 무지하기 그지없고 영혼의 어두움과 결별하기를 싫어하는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죄인도 끌어안고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을 기억하고 영혼을 사랑하고 죄인들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죄인 된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인내하셨는지를 기억하면서 해산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화목케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12월과 함께 깊이 회개하고 거룩한 땅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2003년에는 그 아름다운 땅에는 이 불순종과 완악함의 마수들이 뻗칠 수 없도록 깊은 회개와 회심으로 모두 그 죄의 집요한 추격들을 잘라내고 깊이 회개하고 우리 자신이 새로워져서 그래서 남은 한달 동안 충성스럽게 주를 위해서 살고 새해를 맞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 회심치 않은 자를 향한 경고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찌어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겔33:7-9)
파수군의 비유를 앞에서 모두 설명하신 후에 하나님은 정작 말씀하고 싶으셨던 본론을 선지자에게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지자 에스겔 선지자로 세우는 것이 마치 파수꾼을 섬기는 목적과 꼭 같아서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그들에게 경고하는 것이었음을 밝혀주는 것이었습니다. 7절서부터 9절 사이에 나오는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로 집약이 됩니다. 하나는 경고이고, 또 하나는 경고를 돌이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우리들이 살펴볼 것은 경고입니다. 우리들은 이 경고라고 하는 것이 위험을 알리는 표지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인정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에게 위험을 알리는 방식으로 이 경고를 사용하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입고 그 은혜를 많이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에게는 이런 경고가 꼭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이런 경고가 꼭 필요합니다.
이미 앞서서 주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경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향한 경고이고, 또 하나는 구원받은 사람을 향한 경고입니다. 둘 다 회심치 못한 사람들을 향한 경고이지만 그 회심이 전혀 구원에 이른 적이 없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와 그리고 또 하나는 구원받았지만 다시 한번 회심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한 경고로 이렇게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경고하는 사명은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 하는 사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많이 경험하고 당신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그런 경고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면 목숨을 부지하지만 그런 경고의 음성을 제대로 발하지 못하면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선지자에게 상기시키시면서 그 경고의 사명의 엄중함을 선지자에게 생각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회심을 통해서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은 성경이 풍부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집안에 태어나서 어린 시절부터 자기가 차마 의식하지도 못하던 때부터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언제 거듭났는지도 모르게 어느 순간에 보니까 자기가 너무나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해.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자기의 죄로부터 깊이 돌이키고 똑 부러지게 회심한 경험은 생각이 안 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일단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안에 있는 회원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런 은혜 언약 안에 있으면서 신앙을 거스르고 배역하는 일들을 하지 않고 그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하나님과의 영적 생활을 그들을 유지해가고 있는 한 그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이 세상에서 경건한 생활도 아니고 불순종하면서 이 세상에서 죄를 먹고 마시며 교회도 다니지 않고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회심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순간에 아무런 의식도 없이 참 신자가되는 그런 일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적으로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의식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죄에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을 믿고 참된 신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회심을 통해서 자신의 죄, 하나님 없이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고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어 살아온 모든 삶들을 진실 되게 회개하고 그리고 그 죄의 비참함으로부터 자기를 건져내실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지 않는 한 그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회심 없이는 구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 하나님이 창조해놓으셨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이 누구의 손에 의해서 창조되었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렇게 창조된 인간의 처지가 어떤 처지이고 인간이 하나님의 손에서 창조되었을 때 본래 부여받았던 아름다운 지위가 무엇인지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회개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에 나와서 세례를 받고 그리고 교회에 나와서 기독교 예식으로 결혼을 하고 기독교에서 예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그렇게 하고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이고 이 믿음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그 믿음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자신의 삶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으면 자신의 삶 전체로서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했다 라고 하는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뉘우치는 그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자기를 그 죄에서 구원해내실 분이 없다라고 하는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의지의 믿음이 없이는 누구도 회심할 수 없고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경고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나와서 하나님 앞에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가르침을 받는 것은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이 세상에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이 주일날 인간의 도리가 무엇이고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그 인생의 참된 도를 듣는 사람들은 수백 명중에 몇 사람뿐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복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교회에 나와서 이런저런 봉사를 하고 여러분들이 기독교 적인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여러분들이 예수 없이 살수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회심하고 거듭나고 그래서 주님의 자녀가 되어서 예수의 생명을 여러분들이 소유하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의 교회생활은 모두 쓸모 없는 행동들입니다.
한사람이 교회에 출석한다라고 하는 것은 단지 정직한 하나님의 복음, 그리고 회심치 못한 자들을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를 정직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만 그에게 있어서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이 진실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자신의 인생에 참된 소망이 없는 것을 알고 십자가를 붙들며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참 생명을 받아들일 때 그때에 그의 교회 생활은 정말 복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회가 이처럼 경고의 나팔을 불기를 원하십니다. 나팔을 부는 방식은 각기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편지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로, 어떤 사람들은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경고의 나팔로, 어떤 사람들은 우렁차게 외치는 함성 소리로 그 경고를 발할 것이지만 어떻게 하든지 간에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 경고와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에 널리 널리 전파되어서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분명히 그 경고에 음성을 일생을 지내는 동안에 반드시 듣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회심시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갖고 예전에 사랑하지 않았던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인간이 창조된 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경고의 나팔을 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천하에 구원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으니 모두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는 이 일은 교회가 해야될 일이지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를 믿어서 구원에 이르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러분들 중에 바울과 같이 하늘에서 나는 천둥소리 같은 음성을 듣고 회심에 이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모두 사람들을 통해서, 천사도 아니고 평범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의 나팔소리를 들었고 그 나팔 소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고 그분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희망도 없다라고 하는 경고의 음성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나팔을 불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죄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운 일은 그 교회에 나왔을 때 정직하고 진실한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참된 도리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하셨으며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은 죄인들을 어떻게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에게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구원 주로 가라고 명령하셨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도 하나님이 어떠한 애달픈 마음과 뜨거운 눈물로 당신을 멀리 떠나서 불순종과 죄 가운데 살면서 회심의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어떻게 간절한 사랑으로 찾고 계신지를 들려주는 것 그것이 교회가 이 세상의 죄인들을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인생의 일리는 배울 수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없었던 몽매한 죄인들이 교회에 나왔을 때는 하늘을 가르고 울려 퍼지는 정직한 복음의 선포와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십자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거 받음으로서 그들이 인생에 관한 다양하고 어리석은 견해들을 버리고 자기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오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심하지 아니하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지옥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라고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교회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모여 앉아서 먹고 마시고 그리고 이런저런 일로 사교적인 즐거움에 빠지는 것이 교회의 본분일 수는 없고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그런 선행을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일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회적인 기관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경고의 음성을 지닌 무서운 진리의 공동체라고 하는 곳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과 인간과 그리고 심판에 관한 진실을 이 교회에 와서는 들을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가장 교회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와 함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 중에 거듭나지 아니하고 아직 회심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참 신자가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곳에서 이렇게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여러분들이 핑계하고 하나님 앞에 변명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싶었지만 주님이 누구인지를 정직하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리고 나에게 정말로 죄에 대한 진실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이 생명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다면 내가 믿을 것이지만 누구도 나에게 이 회심의 교리를 심각하게 전해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변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분들이 적나라하게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태어났으며 그리고 그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무엇이고 그리고 그 죄인들이 자기의 죄 가운데서 죽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경고의 음성이 무엇이고 그 경고를 듣고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어디인지를 주님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가르쳐 주셨다는 사실을 모두 듣고 난 후에는 여러분들이 핑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과 그리고 죄인들이 회개하여 할 필요를 정직하게 가르쳐주시고 그리고 그런 회심의 비밀을 먼저 체험한 목회자들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어떻게 죄인들이 그 회심을 통해서 거룩한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를 정직하게 선포해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달린 것입니다.
보십시오. 만약에 오늘 여러분들이 주님의 심판하시는 저울에 달아보셨을 때 여러분들이 정말 구원받은 알곡이 아니라 쭉정이라면 오늘 이 좋은 공휴일에 이 황금 같은 시간에 이 예배당에 와서 두 시간이 넘는 예배를 드리고 가는 것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주님의 생명이 있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교회에 익숙해질 수 있고 누구보다도 교회에 대해서 잘 알 수 있고 예배에 참석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회심한 사람들에게는 예배 속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감동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의 삶 전체를 뒤흔들어 놓아서 그 속에 생명을 심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보지 못합니다. 잠시 감동은 받지만 곧 잊어버리고 마치 길가에 떨어지거나 돌짝 밭에 떨어진 씨앗과 혹은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 뿌려진 씨앗 같아서 잠시 무엇이 되는 가 싶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회심치 못한 사람들의 신앙입니다.
가끔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린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진실로 회심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느 순간에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그것이 곧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서 회심한 사람이고 죄에 대해서 정직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여러분들 속에 소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의 목을 잘랐던 헤롯도 한때는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으며 번뇌하고 괴로워하고 그를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했고 그를 무서워했습니다. 만약에 이것보다도 더 시급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과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은 물론이고 우리의 모든 인생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지난 한 주 동안도 열심히 노력해서 돈벌고 애쓰면서 살았습니다.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나고 이런 저런 즐거움을 누리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여러분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섬겼습니다만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들이 만약에 회심치 못하고 거듭나지 아니하였다면 그런 섬김과 그런 인생의 수고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은 속히 지나가니 바람과 같이 지나가고 젊고 즐거운 때는 장마철의 햇볕과 같아서 잠시 후 먹구름과 같은 노년이 찾아오면 우리의 인생에는 위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부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회심하고 확실하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만이 부를 수 있는 주님에 대한 호칭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 아버지는 여러분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남의 아버지입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그럼 오늘 한번 정직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여러분들은 회심했습니까? 그리고 정말 거듭났습니까? 정말 이 세상을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세상에 태어난 벌레와 같이, 더러운 괴물과 같이 더러운 죄인들이었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신 은혜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속죄해주셨기 때문에 그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정직하게 뉘우치고 하나님 거스르면서 주님을 대적하며 살았던 그 옛 삶을 깊이 가슴 아파하고 주님을 믿지 않으며 살아왔던 모든 인생의 날들이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계획과는 상관이 없는 죄악 된 삶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했는지 여러분들은 물어봐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역사 하실 때에 가져다주는 첫 번째 영향력은 그 인간을 진지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고민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라리처럼 교회에 건성으로 다니던 사람들이 성령 받기 전까지는 심각해지지 않습니다. 그냥 까불면서 날라리처럼 교회에 건들건들 거리면서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기 시작하면 이제 그는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정말 구원받았는가. 그리고 내가 지금 이렇게 예수님 믿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왜 나는 주님을 믿는데 마음속에 성경에서 말하는 그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참된 기쁨이 없는가 이런 것을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고는 누구도 진지하지 않습니다. 그냥 까불면서 신앙생활 합니다. 천방지축으로, 그리고 교만하고 하나님 앞에 꺾어 본적이 없고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자기가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절망해본 적이 없으니까 하나님도 아주 우습게 보고 그렇게 하면서 자기가 인생의 최고 주인인 것처럼 까불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 앞에 적선하는 듯한 심정으로 주일날 한번씩 와서 예배드려주는 것입니다.
정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었습니까? 정말 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신의 목자가 되신 그분을 마음속에 받아들였습니까? 목양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깨트려져 본적이 있습니까? 자신의 죄를 향해서 깊이 애통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죄와 더러움들을 뉘우치고 성결하고 의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희생의 길을 걸어본 적이 있습니까? 쥐꼬리만큼도 안 되는 사람의 지식과 그리고 인간의 식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재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교만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의 말씀도 마음에 들면 삼키고 마음에 안 들면 뱉어버리는 부분적인 배교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를 걸고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살고 죽는 것은 두 번째 문제입니다. 지금 제가 죽었다 칩시다. 여러분들은 깜짝 놀랄 것입니다. 목회자가 어느 날 죽어버렸으니까 이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3-40년 후에 죽을 사람이 좀 앞당겨서 죽은 것에 불과합니다. 죽음도 환난도 시련도 마귀도 핍박도 고난도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구속의 영원함을 죽음도 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들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교회는 많이 다녔고 복음에 관해서는 수없이 들었지만 단 한번도 피묻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흉악한 죄인이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물과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것은 바로 나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고 예수 죽인 것을 인해서 깊이 가슴아파하며 주님 앞에 회개하고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 진실한 회심을 통해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오래 살고 잘 살고 많은 소유를 가지고 부귀를 누리고 수많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좋은 평판 속에서 명예롭게 이 세상을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이것보다도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없는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지 못한 교회는 나오지만 영혼이 거듭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회심한 적이 없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아직 여러분들 가운데 다수가 있다는 사실을 저는 굳게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만약에 구원받지 못한 채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에 다다랐을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섰을 때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변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내가 만약에 그렇게 정직한 복음을 들었더라면 회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나에게 나를 향한 눈물겨운 하나님의 사랑을 들려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무엇으로 변명하시렵니까?
설교자를 통해서 정직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수시로 접했고 성경 공부를 통해서 참으로 우리가 죄인인 것과 그 죄인들이 진실로 뉘우치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그의 형식적인 교회 생활이 쓸데없는 뇌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정직하게 여러분들은 배웠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 드리며 진심으로 회심하고 그리고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내가 이제껏 예수를 믿었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예수를 영접할 수 있을까? 내가 집사가 되었고 수 없는 세월동안 내가 교회를 다녔는데 어떻게 창피하게 지금 하나님 앞에 나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고 예수여 내 마음에 오셔서 나를 영접하시고 주의 자녀로 삼아주십시오. 내가 어떻게 기도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내가 예수 잘 믿는 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오늘 정직하게 물어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신자가 되시렵니까?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맞는 신자가 되시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구원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의 영혼을 향해서 견딜 수 없는 통증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찾으시고 그리고 돌아오라고 간절한 음성으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회심하지 아니하면 망할 것이라고 멸망할 것이고 엄중하게 경고하신 것은 단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만 주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눈물과 땀으로 마지막에는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예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당신을 거스르는 사람들도 너무 너무 사랑하시고 의로운 사람들뿐만 아니라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도 사랑하셨지만 그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이 당신의 입을 벌려서 직접 주님을 믿지 못하고 회심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 받을 지옥에 준엄한 형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셨고 귀신들과 꺼지지 않은 불꽃과 어두움 속에서 슬피 울고 이를 갈며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는 것이 회심치 않은 자들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께서 생생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것은 진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회심치 아니하였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고 진실로 회심하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사망을 무서워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관심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영혼을 보십시오.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도무지 성장이라고 없는 여러분들 중에 상당수는 영적 침체가 이니라 거듭난 적이 없기 때문에 자라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어떻게 성장할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상상 임신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이를 너무나 갖고 싶은 나머지 아이를 갖지도 않았는데 상상 속에서 임신한 것처럼 느낄 때 나타나는 아이를 가진 임신의 증후군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혹시 그런 종류의 신자가 아닙니까? 회심에 관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서 구원의 은혜에 관해서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거듭나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귀에 더디기가 앉도록 들어서 상상 속에서 여러분들이 회심한 신자인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종교적인 증후군 속에 여러분들이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수가 떠밀려 가는 나라가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고 자신의 그 형벌 받을 그 끔찍한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깊이 믿고 자신이 죄인이지만 이렇게 뉘우치고 회개하고 믿는 순간에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함으로서 우리는 회심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가식과 허위와 위선의 껍질들을 버리고 오늘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오랫동안 교회에 다녀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래된 교인의 명예를 쓰고 그 잘난 명함을 들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지금 그 껍질들을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신자도 아니고 집사도 아니고 오래 믿은 교인도 아니고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겨온 일군도 아니고 나는 죄인일 뿐입니다. 나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정말 그렇게 주님 앞에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우리의 참 소망이 없다고 믿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께 여러분들의 인생 전체를 내어드리는 그 회심의 경험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빕니다.
작게 두 번째로는 이 회심은 거듭나지 않은 불신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제나 사랑하셨습니다. 애굽에 있을 때나 광야를 지날 때나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나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다고 해서 항상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마음에 기뻤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이 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생각해보시면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렇게 자녀를 낳으면 그 자식이 언제나 그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부모는 항상 그 자식을 사랑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말을 잘 들을 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괴롭게 하여도 자식에 대한 깊은 염려와 사랑은 부모의 마음속에 어김없이 흐릅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안 들어서 때리다가도,
(예화: 어느 아버지가 화가 나서 아들을 때려 고막이 터져서 아들이 아버지 모르게 용 돈을 모아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았는데 후에 그 사실을 안 아버지가 마음 아 파 괴로워하며 하는 이야기가 자신의 고막을 뜯어서 붙여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는 이야기)
저도 말을 안 들어서 요즘은 때리지 않지만 초등학교 다닐 때 회초리로 그냥 매질을 합니다. 때릴 때는 몰랐는데 새벽녘에 반바지 입고 종아리에 멍든 채 엎드려 있는 것을 보면 가슴이 쓰립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할 때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말을 안 듣고 까불 때도 하나님은 항상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항상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때가 있었고 어떤 때에는 우리들이 자식을 낳은 것이 후회가 되듯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근심덩어리가 되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주셨습니다. 이제껏 까지 우리를 인도해오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잘못하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날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그리고 날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매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고 우리들이 무지몽매할 때에는 뜻하지 않게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셔서 우리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하나씩, 하나씩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어떤 것은 기도 응답을 통해 받았고 어떤 것들은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꼭 필요할 줄 알고 구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우리가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그런 사랑과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 하나님 혼자 우리를 사랑하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항상 우리를 어떻게 하면 변화시키셔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그런 존재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어렸을 때 어떻게 하면 하나님 덕분에 잘 먹고 잘 살아서 한번 떵떵거려볼까 그렇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저희들에게 은혜를 많이 주어서 진리의 말씀으로 성령의 은혜로 저희들을 새롭게 해주어서 그래서 정말 나를 사랑하고 나를 따르며 나만을 높여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런 자식이 되게 할까? 그때 그 기쁨이 하나님에게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그런 생각해보십시오. 자식이 너무 너무 자랑스러운데 그런 때 있습니다. 뭐 하여튼 어째든 부모를 영광스럽게 했을 때,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렇게 될 때, 그래서 자식을 키운 보람을 깊이 느끼게 될 때 그때 그 부모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지 9달 반 동안에 그 자식 배속에 넣고 고생한 기억, 그 다음에 젖먹이고 고생하고, 병원에 안고 뛰고, 돈 없는데 공부 가르치고 그런 고생스러운 생각 하나도 생각이 안 납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 자식이 키 크고 밥 먹고 멀대처럼 키만 자라는 것 가지고 여러분들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한 짓이나 하고 돌아다니고 건들거리는 것 보면서 여러분은 그래도 난 참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다. 17년 길러서 85킬로에다 1미터80짜리 만들어 났으니까 참 뭐 진짜 보람이 있다. 그것은 양돈장에 사육사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돼지 길러서 근수 달아서 팔아먹는 양돈장에 사욕사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만족을 못 드릴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주님이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내가 너를 어떻게 낳아서 너를 어떻게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먹이고 입히며 영혼의 은혜를 주어서 너를 길렀는데 너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경고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도 아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프면 하나님의 마음도 아프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괴로우면 하나님의 마음도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경고를 통해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영원히 하나님을 떠나고 짐승처럼 살아가는 것보다는 회심하고 새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죄가 한번 회개함으로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자녀가 된 후에도 죄도 짓고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함 때문에 강퍅함도 생겨납니다. 그리고 은혜 안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가 뭔가 잘못하고 있을 때 쉿! 이렇게만 말씀하셔도 즉시 잘못을 고치는데 이제 오랫동안 불순종 가운데서 살아가면 이놈! 하고 말씀하셔도 왠 놈 그러면서 자기 갈 길로 갑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경고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흔히 ‘경고’ 그러면 사업이 망하고 암이 걸리고 아니면 무슨 교통사고가 나서 사경을 헤매고 사형선고를 받고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뭐라고 했는가 하면 “말로 경고하여...” 하나님은 할 수 있으면 자기의 백성들을 인격적으로 권고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환난을 만난다고 해서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 속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새사람이 된 것이지 결코 환난을 만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새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듣지 못한 채 환난과 시련을 많이 만나면 정신병자같이 멍한 상태가 되거나 마음이 독하고 더 표독해져서 하나님을 향해서 대드는 그런 무지막지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경고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에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와 유혹은 있고 우리 안에 거룩해져야 할 부패한 성품들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회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정말 회개하고 주님을 믿은 이후로 주님을 향해서 어떤 사랑을 갖고 살아왔는지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생애는 분명히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리고 그 사랑에 목숨을 걸던 때도 있었고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에 냉담해져서 그래서 주님께 불순종하려고 이를 악물고 거만하게 살았던 때도 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성경이 이야기하는 회심한 사람, 회심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그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가 정말 형식적인 신자일 수 있습니까? 마음의 중심은 하나님 앞에 드린 적이 없고 겉모습만 번드르르하게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릴 때는 신자인 것처럼 행세하고 세상에 나아가서는 세상의 사람들보다도 더 악하게 부도덕하게 살아가는 그런 이중인격자의 위선 된 삶을 정말 회심한 신자의 삶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까? 세상에 대해서는 더 많이 알고 싶어하고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는 쥐꼬리만큼도 모르고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만 자신의 영혼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단 한시간도 투자할 줄 모르는 육적인 사람, 육적인 신앙생활을 정말 회심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그런 정직한 신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죄와 불순종 가운데 있어서 회심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살아있는 교제의 생활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인들이 기도할 때 어떻게 찾아오셔서 그 영혼을 위로하시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의 더러운 부분들을 치료하시고 그리고 그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의 어두운 곳을 비추셔서 우리로 하여금 새 삶을 살게 하는지 영적인 교제의 달콤함과 그 즐거움이 사라져버린 사람들은 다시 한번 깊이 회심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할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진실한 신앙이 그 안에 없으면 이 긴 설교와 자세한 교리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어느 지체가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죄 죽임의 교리를 다 듣고 나서 한 일년정도 흐른 뒤였는데 목사님, 내 안에 있는 죄를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잘 배웠습니다. 어떻게 해야된다고 그러니? 죄는 처음에 떠오를 때가 가장 처치하기 쉽기 때문에 마음에 다른 생각이 떠오르거나 죄악이 떠오르면 즉시 그것을 처치해야지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마치 더러운 짐승을 죽이듯이 그렇게 죽여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처음에 그 진리를 알았을 때는 너무 기뻐서 아! 내가 이제 보니까 왜 그렇게 죄에 대해서 졌는지 이제 알았다. 이제는 내가 더 이상 죄에 대해서 휘두르지 않고 이제 이 죄를 죽일 수 있다. 그리고 이제껏 내가 이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수시로 죄에 지고 그리고 회심하지 못한 자처럼 살았구나. 그래서 너무 기뻤습니다.
그때 제가 이제 묘사한 게 있는데 “영으로서 육체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로마서 8장 13절에 나옵니다. 그때 그 죽인다는 것이 영어의 ‘kill’입니다. 죽인다는 것은 그냥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처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생생하게 비유를 들었습니다. 밤중에 숲 속에 들어가서 텐트를 치고 여름에 정글에서 잠이 들었는데 자다가 한밤중에 어둑어둑한데 뭐가 자꾸 몸에 치근대는 것 같아서 눈을 떠보니까 거의 이만한 구렁이가 텐트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들어왔는데 이놈이 몸 꼬리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긴 놈이 들어온 것입니다. 입을 한번 벌리면 머리 정도는 족히 들어갈 것 같은 그런 큰놈이 들어왔는데 이게 내 몸 위를 이렇게 지나갔는데 머리가 옆에 내 가슴 쪽에 머리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움직일 수가 없는데 움직이면 이제 이게 칭칭 감고 자기를 물어버릴 것이니까 그러면 소리도 못 내고 죽을 게 뻔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순간적인 무서움 속에 공포에 질린 상태에서 손을 살며시 움직여보니까 간밤에 만일을 위해서 넣어둔 아주 예리한 단검이 손에 딱 잡혔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살짝 꺼냈습니다. 아직 뱀이 눈치를 못 챘습니다. 그때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그거 가지고 비늘을 한번 툭툭 건드려보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아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들고 그리고 정확하게 정수리를 겨냥해서 누워 있으니까 두 번 찌를 틈도 없으니까 한번에 진짜 머리통부터 꿰뚫어서 그래서 입천장과 혀를 지나서 아예 땅바닥에 그 칼이 꽂힐 정도가 되어야지 만 자기가 살아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막 찌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체의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처음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아! 그랬구나 생각되었는데 요즘은 죄를 그렇게 죽이고 싶지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떤 교리가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게 지식의 한계입니다. 그 교리가 죄를 죽이는 법은 가르쳐줄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죄와 더불어서 싸우고 싶지 않고 그 죄를 끌어안고 살고 싶은 경우에는 그 교리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치 전쟁하기 싫은 군인에게는 최신 병기다, 한 방에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다고 어깨에 계속 지어주는 신 병기가 무거운 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도 정말 진실로 회개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지 않으면 많은 지식과 그리고 영혼의 변화도 없이 쌓여 가는 이 많은 지식과 신앙생활의 껍질, 이런 것들이 결코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영혼을 새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이미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회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미 다 경험해본 사실이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깊이 회개를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참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깊은 회개 뒤에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우리의 영혼 속에 밀려들어옵니다.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 은혜와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냉담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처방은 깊은 회개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회개하고,
그러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껍질과 이 외모를 보지 말고 버리고 내 안에 정말 예수의 생명이 있는가. 그리고 내가 지금도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정말 그 은혜 안에 거하면서 사는가. 그것을 깊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내게 너무나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고 내가 지금 있는 모습과 살아가는 삶 중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만 있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고쳐서라도 새사람이 되어서 주님의 마음에 나를 구원하신 보람을 드리고 싶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이 믿는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은 사람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도 이렇게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듭된 경고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그가 돌이켜서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그는 급속히 자기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상실을 경험할 것이며 주님이 그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으로 자기를 구원해주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은 그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그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방인처럼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들도 깊이 회개하고 예수님의 이 놀라운 사랑 속으로 들어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고의 말씀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 돌이킴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정적인 체험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깨달은 것이 없는데 멍하게 무엇인가를 해보고자 결단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구나 하고 지식으로 자기를 채우고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돌이킴은 인간의 지성과 인간의 감정과 의지가 모두 포함된 전인격적인 돌이킴이며 전 삶에 걸친 방향전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직까지도 주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지만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여러분들이 얼마나 처음에 많이 변했는지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 세상의 부와 그리고 아름다움과 명예와 재산과 이런 것들이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된 뒤에는 이 세상에서 싫어버린 바 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었던 많은 신앙 밖에서 품었던 소망은 우리에게 이제 더 이상 소망이 안되고 그리고 소원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내가 정말 예수님을 잘 믿는 어린아이처럼 진실한 신자가 될 수 있을까? 돈 많이 벌어서 끝 발 날리는 인생이 못된다고 할지라도 내가 주님이 보실 때 사랑스러운 자녀가 되고 주님의 사랑이 항상 내 마음에 있어서,
주 내 마음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변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죄악이 들어오고 불순종이 일상화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찮게 여기고 주님이 주신 은혜의 수단들을 우습게 여기는 동안에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의지가 다시 옛 삶으로 많이 돌아가서 때묻은 신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돌이킴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이키라고 애처롭게 부르시는 하나님의 이 간절한 탄원 뒤에는 돌아온 자를 위해서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그 무한한 축복이 있습니다. 역사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깊이 회개하고 돌아온 적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늘은 열렸고 그리고 하늘에서는 풍악이 울렸고 그리고 더 할 수 없는 하늘의 은총들이 열려진 하늘을 통해서 소낙비처럼 쏟아져 부어졌습니다. 마른 뼈와 같은 사람들이 군대처럼 다시 살아났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버지의 생생한 사랑이 물 붓듯 쏟아졌습니다.
여러분, 이런 영혼의 놀라운 축복들을 예비하신 하나님이 돌이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죄인들이 죄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죄로부터 맛본 달콤함의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죄에 대한 사랑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사랑하던 죄로부터 떠나고 나면 자신이 외톨이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부르시고 돌이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외침에는 결코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가서 영혼에 하나님이 축복을 베푸실 때에 맛보았던 그 즐거움이 죄의 즐거움보다 더 하찮은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증거 해 줄 사람이 있습니까? 죄 가운데 살 때는 죄의 즐거움이 다인 줄 알았는데 예수의 사랑을 맛보고 나니까 죄를 통해 맛보는 즐거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하나님의 물 붓듯 크신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우리 앞서간 수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탕자를 맞아주어서 아버지의 집에 품꾼으로나 살면 굶주리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병든 몸으로 지친 육신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 아들을 기다리시던 아버지가 맞아서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 끼우고 새 신을 신기고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기뻐 잔치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여러분들을 맞아주시고 싶어하십니다.
괴로움과 죄가 많고 오래 살아도 참된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이 허무한 세상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시고 그리고 우리들이 사랑해도사랑해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단 한 분의 영원하신 분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죄로부터 돌이켜서 하나님의 참 생명을 누리며 그 사랑 안에서 사는 정말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거듭남과 회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