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2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게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마 6:9-14)
녹취자: 백지영
주기도문 중에서 다섯 번째 기도를 가지고 세 번째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로써 다섯 번째 기도의 제목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지난 시간에 들었던 이야기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죄사함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속에서 죄를 피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런 완전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죄사함을 구함에 있어서 담보적인 기도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여주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그러한 담보적인 무서운 기도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용서에 반드시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용서하지 못하는 해악으로 말미암아 받는 영혼의 고통은 훨씬 크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이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마음은 자기에게 선을 베푸는 자는 쉽게 잊어버립니다. 커다란 은혜를 입고도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고 손해를 입히는 자는 비록 그들이 입힌 손해와 악이 이만큼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잊지 않는 것이 죄인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한다고 하는 말은 이러한 죄인의 성품을 자기가 거슬려서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인간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한없이 은혜를 입고도 고마운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한없이 많은 사랑을 입고도 그것이 감사하고 귀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죄 지은 것, 그리고 자기에게 누군가가 해를 입힌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용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때 우리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죄인 된 우리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달은 사람일수록 이런 용서하는 일에 주의 크신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도 하나님의 법칙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용서하실 때 반드시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서야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온 천지만물을 말씀 하나로 창조하셨습니다. “거기 있어라! 빛이여 생겨나라!” 이렇게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어졌습니다. 이루어졌습니다. 그 하나님이 하늘 높은 곳에서 “인간의 모든 죄야, 용서받아져라.”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능히 우리의 죄는 사해졌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법칙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어 희생을 치루시고 그리고 우리는 비록 값없이 죄 사함을 얻었지만 하나님은 더 이상 치룰 수 없는 대가를 지불시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비로소 우리를 용서하셨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사람들을 용서해주고자 할 때 마음에 밀려오는 이 끊임없는 고통을 당하게 될 때마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결단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어떠한 고난과 아픔을 겪으셨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가 끊임없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심 같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가르치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용서하고 나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받은 마음의 상처와 그리고 고통을 어디로부터 보상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이 미움은 정욕과 꼭 같은 것입니다. 꼭 같다기 보다는 미움 그것 자체가 정욕입니다. 한번 정욕에 불이 당기면 그것이 가슴에 피어오르고 그리고 성령이 우리의 심령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세포 구석구석을 장악하시듯이 정욕에 한번 불이 붙으면 그 정욕이 혈관 구석구석까지 파고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이성도 마비되고 상식도 없어지고 오직 그것 하나만 보이는 것입니다.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그 목표, 그것 하나이외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욕입니다. 그런데 이 미움이 그 정욕에 속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정욕이 일어나는 것과 미움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모릅니다. 어느 한 순간의 시선으로 말미암아 마음속에 정욕이 불 일 듯 일어납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가 그렇게 범죄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일평생을 신실하게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고 그분의 손에 붙잡혀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하나님께서 거기서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라와 같은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인생의 광야를 지날 때도 하나님 한 분 때문에 할렐루야 노래를 부르며 누가 그를 기름 부어서 왕위에 오르게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왕이 되었지만 그는 자기의 왕관을 수시로 벗어서 “참되고 진정한 왕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산책을 하다가 어느 여인이 벌거벗고 목욕하는 장면이 보였습니다. 순간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순간에 다윗이 그 벌거벗고 목욕하는 여인을 보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는 아마 결코 범죄 하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았을 때 그 여인의 모습이 화살과 같이 다윗의 마음에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맹렬한 독을 뿜어냈습니다. 그리고 그를 장악해버렸습니다. 그의 모든 생각과 그리고 이성과 감정과 급기야는 의지까지 모두 장악해버렸습니다. 그는 잠시 미쳤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하나님을 만났고,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인생 가운데 살아계심을 보여주었고, 그리하여 자기가 어떻게 목동으로부터 오늘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한 진리를 담당하는 왕으로서 세움을 입게 되었는지를 그는 잊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욕입니다. 미움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일어난 끔찍한 살인사건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출발이 어디였습니까? 뉴 그랜저를 타고 다니는 것이 눈이 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움의 출발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엄청난 사건을 함께 겪어야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수많은 형제를 보아도 움직이지 않던 마음이 한 순간에 얼굴이 별로 잘 생기지도 못한 이상한 형제를 쳐다보았는데 그 순간 눈빛이 얼어붙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시선에 자기의 마음에 꽂히고 그리고 무럭무럭 사랑이 자라고 결혼에 골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움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커다란 이익 때문에 그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로 들어가 보면 아주 작은 것이 그것이 마음에 와서 꽂힌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상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꽂힐 때는 작게 탁 꽂혔는데 그것이 한없이 마음속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자라는 것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자라는 것입니다. 정말 누룩이 부푸는 것처럼 그렇게 부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혀끝에까지 미움과 독이 가득 차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정신과 마음을 다 침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워하는 사람들 보면 만나면 미워서 치가 떨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정상적인 사고가 스톱한 것입니다. 정욕처럼 그렇게 불붙어서 우리를 장악하는 것입니다. 미움에 사로잡히면 그 다음에 그 미움은 어떻게 되어야지만 그가 비로소 만족할 수 있느냐 하면, 그 미움이 복받쳐서 자기의 몸과 인격과 세포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나면 제일 먼저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워하는 대상을 살인하고, 두 번째 하나님의 율법을 불 지르고, 세 번째 자기를 파멸시켜야지만 비로소 그 미움의 불길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미워하면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시고, 그리고 오늘 이 주기도문에서 보여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얼마나 중요한 기도이면 주님이 주기도문 다 가르쳐주신 다음에 마지막에, 너희가 너희에게 죄지은 자들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천부께서도 너희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다섯 번째 기도제목으로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습니다. 그런데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상실감 때문에 용서를 못하는 것입니다. 상실감이라는 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내가 용서를 한다 그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그렇게 용서를 하고 나면 남는 것은 내 마음에 상처와 고통밖에 없는데, 상처와 고통이 생각날 때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고 그래서 분노하고 그를 미워하고 이를 악물고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그 미움의 지배를 받을 때에 잠시 그 상처와 고통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증오하고 미워하면 잠시 그 아픔과 상처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를 하고 나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받았던 마음의 상처와 그 고통을 누가 보상해 주느냐, 그때에 죄인들은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것보다는 미워하고 복수를 꿈꾸는 데에서 마치 자기의 고통이 보상되는 것 같은 그런 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느냐?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서로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심같이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용서하신 그 방식을 그대로 본받아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는 그 방법이 하나님이 당신에게 죄지은 우리를 용서하는 것과 똑같은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움직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죄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사실 때문인데, 하나는 우리 자신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커다란 빚을 진 인간이었는지를 잊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얼마나 커다란 빚을 지고 하나님 앞에 그 죄의 빚 때문에 소망이 없는 인간이었는지를 잊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불러주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에게 빚진 자를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받는 그 고통스러운 해악은 지금도 여러분들 가운데 충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배웠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열심히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왜 그렇게 기도하고 있느냐 물으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기도 이전에, 우리가 아무리 많이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또 주의 나라와 그의 이름과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를 원하는 소원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끊임없이 용서하는 일에 영원히 익숙해 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헌신된 삶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쌓여진 그 높은 장벽을 뛰어넘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박집사도 천당갈까요?” “당연하지. 박집사도 하나님을 믿었는데 천당 못가겠어?” 그러니까 김집사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박집사가 거기에 있는데 거기가 어떻게 천국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오히려 세상 속에 있는 사람들은 미움을 푸는 방법이 세속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잘 푸는 것 같습니다. 막걸리 한번 먹고 같이 한번 웃고 나면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믿는 자녀로서 이런 것들이 너무 약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이 없고 자기를 중심으로 모든 일을 해석하고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같이 그렇게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받는 해로움은 말할 수 없이 많지만 그러나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여러분을 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 이런 것이 이 세상에서는 너무나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죄인의 세계에서는 이런 일들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사회는 우리에게 그런 것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강요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보십시오. 주님은 우선 진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말로는 내가 다 용서하고 봐 주마하고 그리고 뒤에 가서 이빨을 깨물고 나쁜 놈, 못된 자식, 이런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용서는 진정한 용서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진정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용서는 한번이 아니라 수없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지난 일주일 동안 살았던 우리의 모든 잘못된 삶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가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리고 주님을 향한 경외심이 없이 살아온 형식적인 신앙의 모든 날들을 인하여 고통하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매일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매일 진심으로 다가오셔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런 사람을 세상에서는 바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에 있어서 이러한 모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끊임없이 진심으로 자기를 찾고 자기에게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의 죄가 억만 죄악이요, 그 죄가 주홍과 같이 붉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용서하셨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돌을 던지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 침 뱉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베드로를 비롯한 열한 사도의 복음 선포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자들이 되었음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인 것입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오직 사랑으로 다가오시고,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주의 거룩한 영으로 그들을 능하게 하시고, 그의 진리의 말씀으로 그들을 양육하시고, 그 품에 안아서 식탁에 함께 하게 하시고 그렇게 교제와 사랑을 나누었던 제자가 자기의 곁을 떠나 그리고 목숨이 아까워서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는 순간에 버렸지만 회개하고 돌아와서 십자가 아래 섰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진심으로 용서하며 자기의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진심이셨습니다. 우리에게 축복해 주실 때도 진심입니다. 우리를 책망하실 때도 진심입니다. 우리를 훈련시키실 때도 주님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장난처럼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진지하십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며 그러한 죄 사함의 간구를 할 때마다 주님이 진심으로 우리를 용서해주셨습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진심으로 용서해주시니까 나 같은 죄인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그 죄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용서하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이렇게 용서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교회 속에 참된 용서가 없다면 어떤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므로 그도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우리 각자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예배하기를 원하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서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은 사람이 되었는데, 그러나 내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아무 공로 없이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용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값없이 주신 용서가 왜 다른 사람에게도 허락되었는지에 대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뛰어난 교회일수록 이런 일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를 보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사단이 건강한 교회를 병들게 만들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서로를 용서하지 못할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불을 보듯 뻔한 것입니다. 그 용서하지 못할 때 미움이 불길처럼 가슴에 타오르고 그래서 사랑하던 사람이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을 잘 죽이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땅히 사랑을 받고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될 텐데 그것이 무너지고 나면, 단지 사무적인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받아야 할 사랑의 관계가 되지 못할 때에 오는 그 상실감이 미움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모든 문제에 대해서 확실한 해결을 알려드릴 테니까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가정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서 온전히 가정이 다 불타버리고 집은 있는데 가정은 없습니다. 냉기만 감돌고 그리고 같이 잠자리에 들어도 마음속으로는 칼을 품고 잠드는 이런 속에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한다면 여러분들이 잘못된 것입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해 보기를 원합니까? 입증해 보십시오. 그러나 굉장한 인생의 고통과 수고비가 들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 자기 아픔만 생각하지 말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 가족과 교회와 이웃과 형제와 부모와 그 모든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부여안고 눈물을 흘린다고 할지라도 그 눈물은 하나님 앞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말씀을 드립니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긍휼과 그 놀라운 사랑은 우리의 고통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순종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고통을 당하며 우리 자신의 심령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플 때,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흐르는 눈물을 보석처럼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완악한 마음이 무너지는 것은 싫어하고 자기의 죄악을 그냥 부둥켜안고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그 자기의 아성을 무너뜨리지 못해서, 무너뜨릴 수 없어서 그것을 붙들고 말씀이 그것이 파괴 되어가는 일들이 싫어서 그것을 붙들고 눈물을 흘릴 때, 그것은 하나님 앞에 우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와서 형제여, 내가 당신을 긍휼히 여긴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 안하십니다. “얘야, 그 눈물은 용서를 받기 위한 눈물이 아니라 나를 향해 불순종의 눈물이다”. 그런 눈물은 가롯 유다에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되 진심으로 용서해야 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용서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더라도 용서해야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들이 오늘도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지난주일 죄송하다고 한 그 기도제목이 반복되고 있지 않습니까? 금년에는 하면서 이를 악물었던 그 결심과 기도제목들이 오늘도 반복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한 번의 기회만 주었다면 우리는 모두 소망 없는 사람들입니다. 일곱 번의 기회를 주셨어도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진심으로 다가오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해 주십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을 보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가정에서 정상적으로 부모의 온전한 사랑과 그리고 부모의 경계와 그리고 그의 견책과 책망을 말씀에 입각해서 받은 모든 아이들은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향한 극도의 미움과 아니면 마치 자식이 자기 인생의 장애물이나 되는 것 같은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자식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자녀의 영혼에 영향을 주고 자녀는 또 자기 자녀에게 영향을 줍니다. 한 번의 매듭을 풀지 못한 미움이 삼대 사대를 가는 것입니다.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어머니를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한 것이 철천지한이라는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은 용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솔직하고 직선적으로 말했고 그럴 기회를 찾았을 뿐이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가 깨어져버린 가정에서 이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자식들이 많습니다.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내가 그분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철천지한으로 여깁니다. 그러니까 가출하고 사라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하나님이 어디가면 하나님이 안계십니까? 인생에 있어서 고통스러운 문제를 우리들이 피하려고만 한다면 짐승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왜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를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이 나를 이토록 하나 될 수 없는 부모와 또 자식과 또 남편과 그리고 내 형제와 이 한 곳에 두셨을까? 그리고 그 속에서 누군가가 그 매듭을 풀어가야 합니다.
그 매듭을 푸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진심으로 그것을 용서할 때 비로소 가정과 교회와 그 모든 것들이 진심으로 용서하는 그것이 매듭이 됩니다. 모두 그 관계 속에서 자기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본 것 같고 미움을 본 것 같지만 그러나 믿을 수 없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부모싸움도 상담을 하고 부모와 자식들 관계의 상담을 하게 되는데, 그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그 사람이 일방적으로 당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있어서, 그러니까 목회자들은 쉽게 마음이 동요되면 안 됩니다, 상대방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중간에서 누가 농간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사단이 농간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야, 너만큼 피해를 당한 사람이 없다. 넌 일방적으로 당했다. 너 혼자 당했다. 네가 최대한 피해자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속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삶의 수렁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은 교회 나와서, “하나님 아버지 용서해 주시옵소서.” 입바르게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모두 가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인 삶 속에서 능력과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와 그 은혜가 나타나지 않고, 예수를 5년, 10년 믿어도 성령이 무엇인지, 기쁨이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인정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만 봐 준다 그런 이야기 자꾸 하면 안 됩니다. 계속 봐주어야 합니다. 교육상, 계속 봐주마고 하면 계속 개길까봐 한번만 봐 준다고 말하더라도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언제든지 진심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화) 신학교 특강 시간에 어떤 목사님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양력을 보니까 공부도 별로 한 것도 없고 후줄근하고 노인입니다.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는데 추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강의를 했는데 진짜 별 볼일 없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는데 옆에서 ‘그것도 강의라고’ 학생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2년이 흘렀는데, 이 학생이 신학교에서 은혜를 크게 받고 그리고 나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는데 이것이 생각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경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노(老) 목사님 뒤에서, 그 귀에다 대고 들으라하고 그것도 강의라고 하나 그런 그 죄가 자기 마음속에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는데 나중에는 기도해도 해도 마음이 자유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께 편지를 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사실은 언제 언제 목사님 강의하고 나가실 때 그것도 강의라고 하나 그러면서 목사님을 경멸했던 그 신학생인데,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답장이 왔는데, 뭐라고 왔는지 아십니까? “용서했습니다. 그 다음 주는 잊었습니다. 그 다음 주는 (39)” 언제? 그 비난을 받던 그 순간에 즉시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잊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용서를 한 사람은 용서하니까 이미 잊었고, 영원히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서 새까맣게 그것을 잊어버리고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그런데 미워한 그 사람은 2년이 지나도록 영혼의 무디어진 감각이 소생이 되고 제정신으로 돌아오니까 비로소 그때에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죄악이었는지 알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그것보다 더 커다란 위험들을 우리들에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혀끝에서 독이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독설을 막 퍼붓잖습니까?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러한 미움이 우리들에게 주는 그 상처와 고통이 얼마나 큰가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가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 미워하는 것을 통해서.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중독을 시킵니다.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랑은 완전한 용서입니다. 그러니까 부분적인 용서가 아니라, 내 화와 진노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완전하게 용서하고 마지막에는 사랑에 이르기 까지 용서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우리는 죄 사함을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나와서 “하나님,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럴 때, 우리가 그 기도하는 기도가 하나님이 우리가 그렇게 기도안하면 진노를 하시고 그래서 물질을 앗아가고, 건강을 해치고, 직장을 떨어뜨리게 하시고, 사업을 망하게 하시고 생명을 거두어가시고 그러리라고 하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금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용서 안 받고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야 되는데, 그것은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구하는 것은 단지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피해서가 아니라, 그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구하는 궁극적인 기도의 목표는 용서받은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 내가 네 죄를 용서노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마음에 밀려오는 그 충만한 사랑, 완전한 구원의 기쁨, 그 놀라운 은혜, 소망, 회복, 그리고 이것은 또한 우리의 바램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바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은 그렇게 용서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 사랑이,
(찬양)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죄 사함을 구할 때마다 그 죄사함을 통해 보여주시는 보다 완전한 사랑, 보다 완전한 교제, 완전한 영적인 회복, 그 충만함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용서해달라고 그러면 거만하게, “알았어. 그만해. 됐어. 내가 용서하겠어. 그 대신 내 앞에 다시 나타나지마.”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자기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복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하는 그것은 하나님의 복수를 받을까봐 무서워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까? “알았어. 그만해. 이제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마. 끝났어. 내가 용서해 줄께. 그 대신 더 이상 내 눈 앞에 나타나지마.” 그것은 용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복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나 용서했어. 더 붙잡고 따지면 뭐해? 그냥 내가 없는 것으로 하지.” 이것이 용서하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참된 용서는 그러면 무엇이냐? 참된 용서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었던 관계가 용서로 말미암아 회복되고, 진정으로 관계가 회복되고, 또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이 기도의 마지막 실천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던 방법들을 보십시오. 그가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는 내가 너의 얼굴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마치 바로가 모세를 향하여, “이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라. 내가 너를 용서하거니와 네 얼굴을 내게 보이는 날에는 죽고 다시 살지 못하리라.”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해주셨습니까? 그가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지옥에 보내도록 한 결정을 취소하겠다고 하신 후에 우리와의 관계를 끊으셨습니까? 우리를 피하셨습니까? 우리를 그 후에 고아와 같이 버려두셨습니까? 우리 주위에는 포기한 관계들이 너무 많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포기하고, “구제불능이다. 끝이다. 이제 제발 상관만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형제들과의 관계를 그렇게 포기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이제 우리가 형제라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너는 너, 나는 나 그렇게 살아갑니다. 부부간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남편은 남편의 일을 찾아서, 아내는 아내의 일을 찾아서 그리고 저녁때 만나서 밥 먹고 헤어집니다. 교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속에서 “사랑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관계를 아예 포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포기는 신앙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 샬롬을 만드는 자들이여! 복이 있도다.” 우리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깨지고 완전히 조각나버리고, 포기되어버리고 이제 폐기처분 되어져야 할 관계, 폐기처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죽어주었으면 하는 그 욕망, 그것이 지나치면 살인을 몸에 옮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움은 곧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의 죄와 살인의 죄가 완전히 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미워하면 이미 살인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어도 마음속에서는 이미 죽일 기회를 넘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샬롬을 만드는 자들이여 복이 있도다.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이외에 누가 그 샬롬을 만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끊어진 부모와의 관계, 부서진 자식과의 관계, 완전히 조각난 부부의 관계, 교회 속에서 상처 난 수많은 관계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누가 그들 가운데 샬롬을 만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피를 나누고, 함께 살고, 매일 함께 예배드리는 관계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에 나아가서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의 용서를 받는 것만이 여러분에게 참된 소망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도 실행하지 못한 그 복음의 진리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미 그러한 사랑이 안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들을 때, 만약에 이 설교에 해당하는 여러분들이 있다면 모두가 제 설교에 공감을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저 말씀대로 나는 왜 살지 못할까 고민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만약에 이 설교를 들으면서 웃기네 하는 생각이 여러분 속에 든다면 여러분은 거듭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의 사랑이 여러분 속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는 다시는 내가 너를 보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신 것만으로 충분치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신 것만으로 충분치 아니하기 때문에, 용서를 받고 눈물을 흘리는 우리 곁에 찾아 오셔서 죄 사함을 선언하고 휙 떠나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계셔서 그 눈에 눈물을 씻기고, 우리를 안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와 계속해서 교제하시고 사랑하고 계심을 매일 매일 말씀과 기도와 예배와 교제 속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곁을 영원히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는 사실까지도 약속해 주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용서도 이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용서를 변함없이 인치는 가장 확실한 보증입니다. 용서가 참된 것이라면 용서해준 그들과의 관계가 용서에서 그치면 그것은 완전한 용서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용서를 통해서 배우게 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더 깊이 관계를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계를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살아가노라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과는 관계를 끊게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맺게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관계라면 그것을 포기하고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용서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신 그 용서의 사랑이 우리 속에 밀려오면 용서하겠다고, 내게 그런 능력을 주시면 용서하겠다고 하는 그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죄인의 핑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능력주노니 용서하고, 능력이 없는 동안에는 기다려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용서하라. 그러시면서 참된 용서의 실천에 옮기려고 몸부림칠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로 부터 부어지는, 이 용서가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가 없고 정말 하나님께서 내 마음 속에 이 용서를 불어넣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용서라는 수표에 찍힌 지급을 보증하는 도장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용서는 보증수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원하든 원하지 않던 이제껏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여러분에게 고통을 주고 여러분이 미워할만한 사람들은 수없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가 사단의 사신이 되어서 여러분 속에 미움을 불어넣고 그래서 용서할 수 없게 만들고 그래서 여러분의 영적인 삶을 방해한다면 우리는 한 번도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상을 향해 울부짖으면서 제발 좀 나를 내버려달라고 소리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늘 그렇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기도하는 자기도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셔서 그가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는가,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나는 정말 공로 없고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용서에 완전히 빚진 인생이 바로 그 빚 덩어리가 바로 나라는 그리고 내게 죄짓는 자가 생길 적마다 그 빚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갚을 수 있는 기회와 달란트를 주신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미움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아주 오래된 것이라면 이미 그것은 여러분의 삶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입니다. 다가와서 깊이 영적으로 누르고 있습니다. 부르짖어도 응답이 되는 기쁨과 즐거움이 없고 하나님 앞에 하소연해도 마음이 그 은혜로 충만해지는 기쁨과 감격이 없는 그러한 삶, 그러한 생활, 그러한 것들이 여러분에게 누적되어 간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이름만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용서의 매듭을 풀게 될 때에 그것은 전염병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모든 미움의 매듭을 풀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미움의 매듭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불에 탄 삼과 같이 끊어지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내가 오늘은 가만 두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만났는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다 제가 잘못했다며 진심으로 용서를 구할 때 무슨 생각이 납니까? “아니다. 정말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한 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변화되어질 때 자기가 그토록 받기를 원했던 그 사랑이 거기로부터 솟아 나와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죄인의 마음이 강퍅하고 완악해지면 우리가 사랑으로 한두 번 두드려도 문이 열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설혹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와서 용서를 빌 때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이미 그들의 용서의 간청이 없을 때에도 용서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용서해 달라고 그러니까 주님이 용서해 주셨습니까? 만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고 그리고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믿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확증하심을 주님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그 용서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럽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마음인지 모릅니다. 그 마음을 여러분들이 내려놓고 버리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한 아무리 큰 사랑을 이야기해도 하나님은 그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목표는 빗나가기 시작합니다.
우리 힘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기질과 상관없이 신앙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기도 안 하는 사람들은 용서를 깊이 못합니다.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육신에 사로잡힌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 육신이 그렇게 용서하도록 자기를 내버려두지 않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영적인 사람들만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마지막에 그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외치다가 죽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설교도 끝나기 전에 돌멩이를 던져가지고 피가 터져가지고 돌무더기 위에서 드러누워서 쓰러져 자게 되었습니다. 그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무슨 의미입니까? 나는 이미 용서했고, 이제 하나님이 용서해주실 차례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었습니까? “사람들이 스데반을 보매 성령이 충만하고 그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나더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만이 완전한 용서를 실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뒤집으면 무슨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고 마음속에 칼을 품고 살아가니까, 그렇게 부흥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속에 밀려오기를 원한다고 철야를 하고 금식을 해도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았던 은혜가 한 번의 미움으로 말미암아서 왕창 다 바가지가 깨어지고 쏟아져버립니다. 그러면서 그런 어리석은 삶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고통을 주고, 가정에 상처를 주고, 가족에게 아픔을 주고 그리고 형제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희생을 하고 샬롬의 매듭을 풀어주지 않으면 그렇게 서로를 미워하고 살아가는 그 사람들이 소망이 있습니까? 어떻게 구출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주일 날도 나오고, 저녁 때도 새벽기도도 나오고, 말씀대로 살고 싶다고 그러고 세상의 명예와 모든 것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마음의 각오와 결심을 하는데도, 그 미움으로 말미암아 사슬이 되어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위에 있는 하나님을 잘 알지도 못하고, 믿어도 신통치 않게 믿는 사람들이 자기의 힘으로 그 미움과 원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와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런 용서의 매듭을 풀기 위해서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그 문제가 많은 사람들 곁에 두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속에서 용서의 샬롬을 실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이야기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이 우리를 위해 값없이 흘려주신 것이고 우리가 그 주님을 찾기도 전에 주님이 먼저 오셔서,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먼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가 우리를 먼저 찾아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 샬롬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가족과 교회와 그리고 그 이웃 속에서 그것을 세워보려고 몸부림치면서 살 때 저절로 됩니까? 저절로 안 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아프실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버리셨고 땅에서는 인간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하며 신음하고 죽어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그 용서의 사랑을 실천할 때 금방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이 먼저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매일 기도할 때마다 말하는 주님을 위해 살게 하옵소서, 멸시와 천대를 주님을 위해서 받게 하옵소서 간구하는 그것입니다. 먼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맨발로 토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아프리카 땅을 누비다가 뱀에 물려야지만 그것이 고난이고, 식인종들에게 잡혀서 창에 찔려야만 그것이 고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오늘의 삶의 이 현주소에서 도무지 내가 용서할 수 없어 하는 내 속사람의 부패하고 이 더러운 죄악의 욕망을 끊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가 우리를 진심으로 완전히 용서함 같이 그렇게 우리가 고통을 삼키고 그들을 용서하고 그 사랑을 그들에게 부어줄 때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참된 사랑의 깊이를 더 알게 되고 그 사랑을 인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압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미움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고 오래되고 그 부피가 엄청나서 여러분 앞에 이미 넘기를 포기한 엄청난 산과 같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을 명하면 옮기어 저리로 사라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도 옮기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그 자리에 내가 서 있을 때 나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고통 하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기고, 사랑으로 손잡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주님을 경배하는 세상이 될 때, 그것이 바로 평화를 만드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주님이 꿈꾸었던 세계가 바로 그런 세계였습니다. 도무지 자기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에게 주의 사랑을 입은 자녀를 보내서 샬롬을 만들게 하시고, 그래서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켜서 빛으로, 빛으로 나아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이런 아름다운 세상, 우리가 죄를 진 사람들을 끊임없이 용서해서 그 용서와 사랑이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번져서 이제는 죄와 미움과 원망이 자리할 수 없는 그런 천국의 모형들이 교회와 가정과 그리고 여러분의 이웃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실천해 갈 때 우리는 비로소 전심으로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손의 모든 열매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