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 6:9-13)
녹취자 ;정윤미
두 시간에 걸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그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기도의 뒷부분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셨는데, 그 앞에 예수그리스도께서 단서를 붙이시기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함같이” 이 부분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두 시간에 걸쳐서 계속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는 결코 이 세상에서 일용할 양식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매일 끊임없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그 죄 사함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오직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임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매 식탁에서, 하루에 세 번씩 베풀어지는 식탁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에 의하여 공궤를 받으며, 살아가는 은혜를 누리며, 그것 때문에 살아있는 인생이라는 겸비함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식탁의 기도를 진심으로 드린다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달아 알고 교만해 질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죄지으면서 살아갈 때, 그 죄 사함을 하나님 앞에 받으면서 또한 영적으로도 우리는 도무지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들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언제나 용서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부르셔서 교제케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혹시 죄 때문에 우리에게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을 새로운 용서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죄 사함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것과 함께,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단서를 붙이면, 마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그렇게 용서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 기도보다 무서운 기도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만약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여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다루는 것과 같이 그렇게 나를 다루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서원기도 비슷한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외우는 이 주기도문 속에서 매일 매일 우리 스스로를 얽어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우리가 이 기도가 우리의 삶속에서 역사하기 위해서 어떻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이 말씀을 받아들여야 되겠는지를 살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라고 말했습니다. 헬라어원문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을 그리고 복수로 나옵니다. 우선, 이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서로 죄를 지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서로 죄를 지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 기도를 이 세상의 불신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불신자들에게는 이 기도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 배와 그물을 버리고, 아내와 부모와 직업을 버린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 말씀이었음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하여 하나님 앞에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생업도 버리고, 자녀도 버리고, 아내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 속에서도, 서로 서로를 향하여 죄 짓는 일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적으로 사느냐 안 사느냐 하는 것과 정말 내가 하나님을 믿으므로 그렇게 헌신적인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서 죄 없이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는 일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곧 의미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에서도 예수그리스도는 서로가 서로에게 죄짓는 일들이 없어지는 그러한 일들을, 그러한 상황을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기대하시기 전에 먼저 그러한 일들이, 죄짓는 일들이 우리가운데 있을 것임을 예상하며, 우리에게 이 기도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배와 그물을 버리고, 아내와 처자를 버리고, 자식들을 버리고, 그리고 고향을 버리고 예수의 뒤를 따랐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생애를 걸어가실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누가 제일 큰 자인지를 따지며, 서로 다투었고, 그 나라에서 그리스도 좌우편에 앉는 자리를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빚을 지고, 죄를 짓는 그러한 일들이 없을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받아들여져야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에 걸려서 넘어지고, 사람으로 말미암아 실족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어리석은 것이고, 자기기만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거룩한 교회라도, 완전한 공동체, 모순이 없는 세상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가 말하기를 교회의 타락을 지적하면서 좀 더 완전한 교회를 소개시켜달라고 부탁하는 형제를 향해서, 스펄전 목사는 말했습니다. 그런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혹시 그런 교회를 찾거든, 형제는 절대 그 교회에 가지 마십시오. 왜요?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형제가 들어가면서부터 그 교회가 불안전해지고, 모순이 가득찰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죄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죄는 분리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루라도 이 기도가 필요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루라도 그 기도 할 필요가 없는 그런 완전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그자체가 이미 용서받아야 할 죄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렇다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능히 그렇다는 사실을 기억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서로를 향하여 죄 짓지 않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자신에 대해서 자기가 아무런 잘못이 없고, 자기는 정도를 걸어가고 있고, 자기는 가장 의롭고 그리고 나야말로 교회 생활의 모범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의 생각입니다. 죄의 잣대는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죄의 잣대는 세상의 율법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죄의 잣대는 완전하고 거룩하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죄 없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고, 그리고, 거듭난 뒤에도 그 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게끔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사모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을 사모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았을 때 죄를 떠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미워합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은혜가 우리의 마음과 삶을 주장할 때 우리는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께 속하길 사모하고, 죄 된 생각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도 곧 우리는 그것을 미워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로 돌아가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또다시 우리가 미워하는 죄짓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세상에서는 우리는 완전히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거듭나고, 그리고, 거듭난 이후로 우리는 계속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은혜로 또 시련을 통해서 깨달음으로 그리고, 기도로 우리는 늘 우리의 죄 된 성품을 죽이면서, 거룩해 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붙잡으면서, 말씀으로 새로워지고, 은혜를 체험하며, 성령 안에서 다듬어져 가는 그러한 고뇌가 있고, 연단이 있고, 훈련이 있는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는 신앙의 연조가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 찬송가만 들고 덜렁덜렁 주일에나 와서 연보 궤에 헌금 뎅그렁 집어넣고, 그리고, 그것도 예배라고 드리고 까닥 거리고 졸다가 가는 것은 20년 30년 신앙생활해도 연조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연조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경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연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로 그리고, 많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붙들며, 그 관계 속에서 연단을 받으며, 살아온 그 시절을 가르쳐서 연조라고 말하는 것이지, 껍데기만 건들건들 돌아다니는 것이 그것이 무슨 연조입니까? 그러나 앞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렇게 진실한 신앙의 삶을 산 사람은 10년을 그렇게 산사람과 1년을 그렇게 산 사람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너무 가혹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로 말미암아, 너무나 쉽게 우리의 몸과 마음이 더렵혀졌습니다. 환란을 만나고, 그 환란 속에서 인생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고, 말씀을 하찮게 여겼던 우리의 불신앙을 돌이커서 그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그 안에서 연단 받고, 그러면서 우리의 삶이 세월이 흐를수록 거룩해져 가는, 점점 거룩해져 가는 예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결국 마지막에 때가 되어서 꼴깍하고 죽는데, 천국에 들어가서 살기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습니다. 천국을 들어가기에는 그 삶과 인격과 그 모든 속사람이 너무너무 불결하고 더러워서 도무지 그 천국에 들어가서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단을 받고, 거룩해 졌는데도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대통령이 주최하는 그 아름답고 고귀한 만찬에 청소부들이 입고 다니는 옷을 입고 들어가려고 하는 것 보다 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해요.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의 힘을 의지해서 거룩하게 할 수 없었던, 이 땅에서 거룩하게 될 수 없었던 그 부분을 로마서는 가리켜서 말하기를 “주께서 부르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시느니라”. 마지막에는 거룩하게 영화롭게 하나님 자신이 만들어서 그래서 죽음 직전에 우리를 그렇게 거룩하게 만드셔서 그래서 천국으로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빚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거룩해 지려고 노력을 해도, 죄를 줄이고, 그 죄로부터 벗어나려는 삶을 살려고 애를 쓸 수는 있지만, 그러나 완전히 무죄한 삶을 살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향하여서도 이렇게 죄짓는 일들을, 이렇게 우리는 행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저 혼자 의롭다고 말하고, 자기같이 잘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떠들고 다니는 못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소리 크고, 떠들기 좋아하고, 따지기 잘하는 사람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모든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형제 눈에 있는 티를 보며, 자기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서로를 향하여 죄의 빚을 지는 일이 없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은 죄도, 우리가 우리에게 지은 죄도 또한 빚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누가 그것을 받아냅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아낸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짓는 일이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이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죄짓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서로절대 죄짓지 말아서, 완전한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을 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분부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이 세상에서는 그런 일들이 불가능한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는 이러한 일들에 대한 해결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따라해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게 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피할 수 없이 서로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에서 이 공동체를 거룩하게 하는 대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그 기도를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에 담보로 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복음의 깊이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주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때에, 그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기억 할 것입니다. 시인은 ”죄의 손이 나를 누르오니, 내가 견딜 수가 없나이다“ 말했습니다. 죄는 마치 하나님의 힘센 손이 우리의 목을 누르는 것과 같이 그렇게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나의 죄를 인하여 내 뼈가 녹사오며 그리고, 내 심장이 떨리나이다“ 한 그 끔직한 시인의 그 고통을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에, 그렇게 끔찍하고 엄청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성도들은 이 기도에 놀랄 뿐 아니라, 또한 그렇게 죄 사함의 약속 앞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용서해주는 것이 담보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인해서 더 크게 놀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주기도문을, 주기도문이 아니라, 주문처럼 외우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이래도 성경의 모든 본문가운데 주기도문처럼, 고난을 많이 당한 본문이 없다고 루터는 말했습니다. 끊임없이 생각도 없이, 중얼거리고 읽혀짐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그 참뜻이 짓밟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기도문의 이 다섯 번째에서 우리는 마치 심장이 멎는 것과 같은 그러한 복음의 진리를 보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했던 것과 같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이 자기에게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주는 사는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주기도문을 외울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밥상에서 대판거리 싸우고도, 예배시간 마칠 때에 주기도문을 외우라고하면 잘도 외옵니다.
(예화) 미국에서 노회를 하는 가운데 목사님들이 의견 충돌을 일으켜서, 급기야는 험악한 소리가 오고 갔습니다. 결국 사태는 복잡하게 되어서 정회를 선언하고 그리고 그다음에 “주기도문으로 마치겠습니다.” 했는데, 아무도 주기도문을 외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것처럼, 우리를 또한 죄지은 것으로 인하여, 저주하옵소서. 여러분 이러한 모든 일에 대한 해결은 이 세상에 완전한 곳은 없습니다. 왜 그래요, 그 자신이 자기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생들이 너무나 교만하고, 자기 자신의 위치를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말할 때, 그는 잠시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나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가 도둑질한 죄를 지적할 때에, 그는, 지금 그 시간에 도둑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렇게 바리새인 쪽으로 보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의 무게를 달 때에, 그렇게 비난하는 우리의 속에 있는 죄의 무게가 비난받는 자의 죄의 무게 보다 큰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진실로 여러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것, 이것 밖에는 하나님의 교회와 공동체를 완전하게 할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죄는 전염병과 같아서, 퍼지고 퍼집니다. 악한 소문은 날개를 단 새와 같아서, 이집에서 저 집에서, 저 마음에서 이 마음으로 날아다니며, 악한 사술과 독을 퍼트립니다. 그러나 나에게 죄 지은 자를 내가 용서할 때에, 더 이상 그 죄의 소문과 악한 악담이 교회 안에서 더 퍼지는 것을 막아줍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공동체가 거룩해지고 완전해지고, 그리고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에 대한 해결이 서로를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런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하나님 말고 도대체 이 세상에 죄를 사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예수께서 “네 죄가 사하여 졌다”, 그렇게 명하셨을 때에, 바리새인들은 속으로 의논하며 수군거리기를 “참람하도다. 하나님이외에 누가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반문했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에게 정말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줄 권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근데, 여기에 대한 대답은 ‘있다’ 입니다.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이렇게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심으로서, 우리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권세를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된다는 역설적인 이야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다고 할지라고, 엄격히 제한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뿐, 우리는 우리에게 죄의 빚을 진 그 사람들만 용서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죄지은 자를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죄지은 자를 우리가 용서해줄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 사람을 용서하기 전에 우리가 용서해 주려는 사람의 잘못이 우리에게 대한 죄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학교에서 일어난 일인데, 그 신학생이 좀 못되었습니다. 차를 아마 잘못 세워놓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뭐 그러지 말라든지, 아니면, 거기에 써 붙여 놓으면 그러면 되는데, 발길로 새 차를 차가지고 찌그러뜨려 놓고, 열쇠로 북북 그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게 했으면 문제가 안되었을 텐데, 그런데 그게 누군지도 다 알게끔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차 주인이 그 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 차를 와서 이렇게 들여다보니깐, 차 잠깐 세워놨는데, 어떤 놈이 와서 구둣발로 옆문을 차가지고 찌그러트려 놓고, 그 새 차를 열쇠로 북북 그어버린 것입니다. 차가지고 있는 사람은 알지만, 얼마나 속상하겠습니다. 더군다나 새 차인데, 그래가지고 한참 열이 받치고 있는데, 그래도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꾹꾹 참아가지고, 어느 놈이 그랬는지 얼굴이나 보고 그러지 말라고 그리고 가야 되겠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온 것입니다. 와가지고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한테 말하기를 어떤 놈이 내차를 갖고 와서 구둣발로 차버렸다고, 아 말을 안 할 때는 괜찮았는데, 그 말을 하고 나니까, 아까 받쳤던 그 열이 다시 벋쳐오른 것입니다. 생각이 되가지고, 막 침을 튀면서, 아 나쁜 놈들이라고, 내 새 차를 발길로 차고, 못으로 그어버렸다고, 나쁜 놈들이라고, 근데, 그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무엇이라고 했냐하면, “목사님, 무엇을 그런 것을 가지고 그러십니까? 다 용서해주십시오. 뭐 그리스도의 사랑이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둘이서 대판거리 싸웠습니다. 왜 자기가 나서가지고, 그 사람은 이제 용서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데, 옆에서 이 사람이 먼저 용서했으니,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목사님이 무엇을 그런 것을 가지고 그러십니까? 다 예수님이 용서하고 그랬는데, 용서해 주십시오. 멱살 잡고 뺨을 치고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 인가 그것을 봐야 됩니다. 그 범위 안에서 우리는 용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명예가 손해가 났는가, 우리의 물질이 상함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상처와 고통이 있는가? 피해가 없으면, 용서할 권한이 없습니다. 피해가 없으면 용서할 권한이 없습니다. 분명하게 우리에게 명예나 물질이나, 마음의 상처나, 고통이나 아픔이나, 이런 것들에 대한 피해가 분명할 때에 우리는 그 사람을 용서할 권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두 사람이 있지만, 한사람이 일방적으로 죄의 빚을 진 것이 아니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럴 경우에 어떻게 됩니까? 한사람이 한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용서해야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논리가 내가 가해자가 아니면, 피해자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들여다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분명히 피해자인 줄 알았는데, 가해자를 용서하고 나면, 가해자가 이야기하기를 가해자도 나를 용서한다고 말하는데, 가해자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해자도 피해를 받은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결코 자기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언제나 내가 가해자가 아니므로, 나는 피해자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중에 대화를 하다보면, 내가 일방적인 가해자가 아니고, 또 일방적인 피해자도 아니고, 피해도 받으면서, 또 가해를 주는 그런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가운데 자식으로 말미암아 부모가 상처를 받고, 형제로 말미암아, 또 형제가 상처를 받고 그러는데, 그 가만히 보면, 아버지가 자식으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사람은 자식을 찾아서 물어보면, 자식에게는 반드시 아버지가 준 상처가 있습니다.
예화)내가 아는 분도 그런 분이 있습니다, 자녀가 조금 이지적으로 모자랍니다. 그래서 부모가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언제나 가슴에 피멍이 들어있는 것 같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하고 이야기를 해보면, 내가 원래는 안 그랬는데, 그런데 아버지가 나를 공부 할 시간에 소설책 읽는다고 막 때리고, 학대하고 해가지고, 내가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계속 남아있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상대적이던지 절대적이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에게 일단 명예와 물질과 마음의 상처와 고통의 피해가 있다면, 그 피해의 범위 안에서 그 사람을 용서해 줄 권세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다른 사람이 와서, 한 번도 자기에게 죄의 빚을 지지 않으면, 자기는 이런 권세를 한 번도 행사를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그래서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부분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부분들까지도 죄 사함을 받기위해서 기도해야 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영원을 구원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신을 돌로 치는 무리들을 그는 이미 용서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기도 전에 이미 돌이 날아올 때 그들을 용서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용서한다는 기도는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용서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며, 자기의 힘으로 용서해 줄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죄까지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며, 그리고 용서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 죄 사함을 달라고 기도하는 이 죄 사함의 기도에 있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준 것은 담보적인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헬라어 성경을 보면, 우리가 앞으로 우리에게 죄짓는 사람들을 용서해 줄 것처럼, 지금 내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그렇게 말하지 않고, 그리고, 두 번째 지금 내가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것을 사람들이 나에게 죄지은 것을 용서해 주는 것처럼, 지금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말하지도 않고, 우리가 또한 이미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버린 것처럼, 그러니까, 옛날에 용서한 그것처럼, 오늘 우리를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미 용서하는 삶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계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옛날에 용서해 준 것을 기초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의 빚을 진 자들을 이미 용서해 주셨으니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사하여 우리에게 은혜로운 회복을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 한 번의 죄 사함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살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는 하나님하고 화목했는데, 이번 주에는 왠지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진 것 같고, 지난주에는 충만했는데, 이번 주에는 죄로 말미암아서 그렇지 못합니다. 심경이 괴롭고, 마음이 고통스럽고,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이 피곤해요. 한 번의 죄로 되나요, 안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일 매순간마다, 이 기도를 드리면서, 매일 매일 하늘로부터 내리는 영혼의 맛나와 같이 그렇게 죄 사함을 사모하며 사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죄 사함을 받지 않고는 우리의 영혼의 억눌림 때문에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죄를 그때그때 처리하지 못하고,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 두는 것입니다. 죄 위에 죄가, 그 죄 위에 또 죄가 죄 위에 또 죄가 계속 쌓이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혼자 스스로 지고가기 무거운 엄청난 짐이 됩니다. 결국은 영혼이 눌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때도 잠시 끼여야지만 목욕탕가면 씻겨지지, 그것이 겨울 내내 한 번도 목욕을 안 해가지고, 때 위에 때, 그 때 위에 또 때, 때때가 돼버리면, 그다음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은 애들을 목욕탕에 한번 데리고 가면, 본전을 뽑고 옵니다. 심지어는 돌멩이로 문지릅니다. 그렇게 하면서 왕 때를 벗겨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심령은 점점 무감각해지고, 무거워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의 짐을 지고 곤고한 것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보입니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우리는 우리가 죄지은 것들을 하나님께서 매일 매일 용서해 주시지 아니하고는, 영혼의 억눌림 때문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한번 용서한 것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얼마나 용서해 주어야 되겠습니다, 일곱 번 용서해 주어야 되겠습니까? “ 그것은 율법을 뛰어넘는 엄청난 발상이었습니다. 죄지은 자들은 즉결 처분을 받는 것이 도리였는데, 그 죄지은 자를 7번 용서해 준다는 것은 그 제자의 사고방식에서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일흔 번을 7번씩 용서해라, 그이야기는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 언제나 너희는 그 권세를 행사하여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매일 죄 사함을 간구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이미 용서했는지를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처럼, 우리는 일용할 죄 사함을 하나님께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매일 같이 우리에게 일용할 죄 사함을 주셔야지 만, 살 수 있듯이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도 우리의 죄 사함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우리가 기도할 때에 그 응답이 없고, 그래서 죄의 문제가 처리되지 못하고, 우리에게 있을 때에, 고통스럽고, 어떻게 살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그러한 부자유함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용서는 좋은 일이나 반듯이 거저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마지막으로 말씀으로 드리고, 다음번에 계속하겠습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러나 이 용서에는 반듯이 희생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이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결심하셨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거저 용서해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희생이 따랐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는 그 희생을 치르고서야 우리를 용서해 주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죄인의 마음은 이것입니다. 자기에게 선을 베푼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큰 은혜를 사람들로부터 입고도, 저 잘라서 그렇게 된 것으로 잊어버리기가 일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우리에게 섭섭함과 서운함을 안겨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고 손해를 입힌 사람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게끔 그렇게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큰 집채만큼 우리에게 선을 베풀어 주었던 사람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감사를 잘해야 합니다. 대부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커다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해서 고마워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죄 사함을 향해서 인색합니다. 아주 이것은 법칙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자비합니다. 마치 상사에게 아부를 잘하는 사람이 부하 직원에게 무자비하듯이 이 신앙의 세계에서도 그런 법칙이 통합니다. 자기에게 선을 베푼 사람은 쉽게 잊어버리고,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데, 악행을 하고 손해를 입히는 사람은 영원히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용서하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죄인의 성품을 거스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차라리 용서할 바에야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낫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독약을 먹는 것처럼 그렇게 고통스러울 때가 있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면, 무슨 일인들 못할까, 아닙니다. 세상에는 죽을 각오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니까, 죽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이 세상에는 너무 너무 많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죄인의 성품은 자기에게 손해를 입힌 자는 아주 사소한 것을 입혔는데에도, 그것이 마치 요만한 암세포가 자라가지고 단단한 덩어리가 되어버리듯이 가슴에 배겨가지고, 영원히 잊어버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인의 성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할 때에는 여기에 반듯이 희생이 따릅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왜 그래요. 항상 고통이 없는 용서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희생을 치르심으로 써 이렇게 참된 용서에는 아픈 희생이 따른 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값없이 죄 사함을 얻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값없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지불할 능력이 없는 그 부채를 누구로부터 받아내셨습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받아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값없이 죄 사함을 얻었고, 용서를 얻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지불할 수 없는 그 대가를 그리스도를 통해 받고 나서야 우리를 용서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희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목에서 언제나 이 세상 사람들 속에 통하는 생각이나 상식이나 그리고, 예리한 마음이나, 이 세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일을 보지 말고, 높이 서있는 말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봐야 합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우리를 거저 용서하셨으나,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용서를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사 희생의 대가를 치르셨던 그 복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용서하시는 그리스도를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깊이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예수의 그 피의 샘에 자기의 몸을 담그었던 그 사람들은 결코 이렇게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자기의 영혼과 가정과 교회에 고통을 주는 그러한 사람의 길을 걸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용서에는 항상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용서에는 항상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죄지은 것을 마음속에 고통이 되어, 그 고통이 느껴질 적마다, 한 번씩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금니로 씹는 것입니다. 그래, 너 잘 되냐 두고 보자, 그따위로 해봐라, 요시 내가 한번 언젠가 끝장을 볼 거야, 그리고, 늘 씹으면서 마음을 삭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떠올려가지고 나쁜 놈, 이를 악물어 보면, 그것이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용서하라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이제 그것도 없어진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제는 머리에 떠올려서 이 나쁜 놈, 요 못된 놈 이렇게 하면서 씹을 것도 이제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나는 아직 이 가슴에 상처가 남아있고, 그 사람이 주는 고통이 있고, 그 사람이 안겨준 아픔이 있는데, 나는 가끔 떠올려서 그 사람을 증오하고 미워할 수 있는 그 마지막 위안까지도 하나님께서 포기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그 희생이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지점에서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나면, 그동안 받았던 내 마음의 상처와 고통과 내 물질적인 손해와 그리고 내가 경험하였던 이 엄청난 명예의 훼손을 누가 보상해 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보상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때에 죄인은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것 보다는 사람을 미워하고 복수를 꿈꾸는데서, 마치 자기의 고통이 보상되는 것 같은 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오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찬양)
1.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내 주 예수 여전히 날 부르사
그 참되신 사랑을 베푸시나니
내 형제여 주님을 곧 따르라
주 널 위해 비네 주 널 위해 비네
주 널 위해 비네 네 항상 비시네
3. 무거운 짐 지고 애타는 인생
주 예수께 돌아와 곧 쉬어라
내 주 예수 너희를 돌보실 때에
참 복락과 안위가 넘치겠네
주 널 위해 비네, 주 널 위해 비네
주 널 위해 비네 항상 비시네
(찬송가 290장 1절, 3절)
그러나 그렇게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마음에 두고 이를 악물고 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그러면, 그것이 잠시는 자기에게 위로가 되는 것 같고, 보상이 되는 것 같으나, 그러나 그것은 전적인 오해입니다.
(예화) 옛날에 보면, 우리 시집살이 많이 하고, 남편으로부터 고통을 받은 그 옛날의 우리 조상들이 가만히 보면 나이가 먹으면, 다 병에 걸립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서양의학에서는 발견도 안 되는 마음의 병, 화병입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를 악물고, 시집살이를 하고, 남편으로부터 그 부당한 대접을 받으면서, 그렇게 못볼 꼴을 보면서, 아무런 복수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참았습니다. 그냥 꾹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내를 하며는 다른 사람은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해를 안 볼지 모르지만, 그다음에 자기가 피해를 보게 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으냐. 하면, 용서하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인데, 용서하지 못하므로 받는 그 고통과 해악은 영혼의 고통은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의 마음 보다 우리의 영혼에 느껴지는 고통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감각해서 그렇지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우선 무엇이냐 하면, 용서하지 않는 그 마음은 실제로 그런 일을 행하거나 안하거나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모두 복수를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손으로 칼을 들고 그 문으로 걸어가서 그 사람의 목에 칼을 겨눈 다고해서 그것이 복수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을 축복하지 않는 것은 축복하려는 마음이 없는 그것은 마치 그 사람들에게 축복이 임하기를 싫어하는 마음과 같은 것처럼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모두 복수를 꿈꾸는 마음입니다. 다만, 용기가 없기 때문에 자기 손으로 그 복수를 실행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의 복수를 받기를 원하고. 팔자로 말미암아서, 그가 고통의 복수를 당하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과 다른 환경으로 말미암아서, 그가 고통을 당하기를 원하는 그런 식의 우회적인 복수를 꿈꾸고 있을 따름이지, 모두 복수를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속으로 항상 잘되나 보자, 그 이야기는 못되는 것을 보고 싶다는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잘되나 보자, 그것은 못되는 것을 꼭 보고야 말겠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신앙과 이성의 절제를 뛰어넘으면, 그러면 그 미움과 원망이 복수가 되어가지고, 그 다음에 그 사람을 직접적으로 헤치는 대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그 복수를 실행에 옮기든지 안 옮기든지 그것은 관계가 없이 이미 그 마음에서 복수를 꿈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수를 위해서 누군가의 손을 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운명의 손을 혹은 상황의 손을 혹은 여건의 손을 그렇게 빌려서 복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 적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저 원수들은 나를 인해서 아하 아하 하는 자이나니, 내가 수렁에 빠졌을 때 저들은 나를 비웃고, 내가 고통의 늪에 빠졌을 때 저희들은 아하 아하 하며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반듯이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은 반듯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 나는 그 사람을 싫어 할 뿐이지, 나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벌써 그 사람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가 이루어지게 하신 그 사람을 왜 내게 보내어서 나에게 죄의 빚을 지게끔 하였는가? 그것이 누구입니까? 바로 아담의 태도 아닙니까? “네가 어찌하여 먹었느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한 이 여자가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미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런 하나님을 향한 강한 원망을 내포하기 때문에 자기가 그 복수심에 불타고, 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함으로써, 자기의 고통이 보상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 고통이 영혼의 커다란 멍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장합니다. 우리에게 뿌려진 사람에 대한 미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그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우리 속에 뿌려진 씨가 되어서 자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픔뿐이었는데 다음에는 미움으로 바뀌고, 그것이 나중에는 뿌리가 내리고, 튼튼한 나무가 되어서, 이제는 도무지 웬만한 것으로는 뽑히지 않을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의 쓴 뿌리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없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사단이 효과적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무언가 생명과 기쁨으로 나아가 보려고 좀 이렇게 하려면, 그 뿌리만 흔들거리면 우리는 그 인생자체가 다 뒤집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지러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듯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향한 원망과 하나님을 원망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언제나 감사하고 찬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과 환경을 향해서도 늘 감사하고 찬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정말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이, 수십 년이 지나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에 고통이 되는 그러한 한 맺힌 아픔을 남기고 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영혼의 짐이 되는 것입니다. 우선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그 속에 내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에요. 아버지를 그렇게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은 왜 하나님은 나를 하필이면, 이 집안에 태어나게 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왜 내 아버지의 아들이어야 하는가? 어찌하여 내가 이놈을 내속으로 낳았던고? 누구를 향한 원망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거기에 개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연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만났지만,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함께 자녀가 되었지만, 그래서 그 만남은 하나님이 주신 만남이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바로 이렇게 허물 많고 죄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향한 그 미움이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내포하는데, 이것은 성령을 슬프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슬프게 하니까, 결국은 자기의 말로는 하나님과 관계회복을 끊임없이 꿈꾸고 애를 쓴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배가 먼 바다를 나가려고 막 시동을 걸고 그렇게 물결을 파도치게 만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닻줄을 끊어야 합니다. 미움과 원망의 그 닻줄을 끊어야 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문제가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언제나 그 문제에 오늘 말씀처럼 직면하면은 그러면 가슴이 찔리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늘 그것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배에 올라가서 발동을 걸고, 그리고 아무리 시동을 걸고, 바다위로 헤엄쳐 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그러나, 닻줄을 끊기 전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여러분들이 밤에 잘 때에 혹은 고통스럽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 누구누구의 이름을 떠올리고, 지금은 이 세상에 살지도 않는 사람들조차 얼굴을 떠올리면서, 그리고, 복수심이 가득차서 어금니를 깨물면서 미워하고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잠시 끊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것이 얼마나 사악한 것인가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리라”,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사람들 속에서의 그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부부싸움하고 교회 와서 엎드리면 모두 다 헛것입니다. 성경은 기도가 막힌다고 말합니다. 대판거리 싸우고 누구를 미워하고 와서 눈물이 쏟아지는데, 하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끊기 전까지는 눈물이 한없이 흘렀는데, 아버지 이름을 부르면, 그 눈물이 딱 멎습니다. 영적인 교제의 세계와 우리의 감정의 세계가 일치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을 절대적으로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우리가 우리의 삶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각으로 거룩하고 그리고 용서하시기를 즐겨하시는 그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희생이 싫기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해드리는 것을 자기가 고통 받는 것보다 훨씬 즐겁게 선택하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됩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속에 파고들어서, 그것이 뿌리를 내리며 자라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사소한 그것이 세월이 흘러서는 그 자체에 사로잡혀서 우리의 인생의 모양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깊이 미워하며 원망과 한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과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건강을 누리면서 살지도 못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그 증오심은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용서하지 못한 그 죄는 점점 더 깊은 뿌리를 내려서, 나중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려워지니까, 더 용서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소용돌이처럼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때요? 그렇게 미워하고 용서 안 되는 데도, 가끔 충만해지면, 가끔이라도 용서 할 텐데 그것이 아니라, 그렇게 용서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고, 슬프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려워지고, 어려워지니까 또 더 용서할 수가 없고, 더 용서 못하니까, 관계가 더 어려워지고, 더 어려워지니까, 또 용서 못하고 하면서 계속해서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갈 때까지요? 폭발할 때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은 어느 시점에 하나님께서 참다 참다 안 되니깐, 그 죄의 끔찍함을 하나님께서 들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말하자면, 뒤집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집회 다니면서 가끔 그 귀신에게 눌려서 거꾸러지는 사람들을 가끔 보면, 그 공통점이 무엇이냐 하면, 그런 것입니다. 원망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것입니다. 반듯이 마음속에 누군가 끔찍하게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타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자리야 말로 사단이 돗자리를 펴고 앉기에 가장 좋아 하는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냥 잘 살다가 가난하게 살고, 물질적인 고통을 받고, 시련을 받고 이러는 것은 사람들이 좀 처음에 힘들지만,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익숙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견딥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에 대한 그 미움과 그로 말미암아서 말하자면, 그 용서하지 못하는 그 죄의 깊은 뿌리는 우리의 신경, 그 영혼의 신경의 깊은 곳에 가 닿아있어서 입니다. 그 덩치 큰 사람이 허리에 약간의 통증이 있는데, 그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을 그런 식으로 급소를 찌르면서, 우리의 심령을 막 녹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해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은 고통을 받고, 그리고, 우리는 그 고통 때문에 또 더 깊은 죄 가운데로 들어가는 이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우매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의 인생을 괴롭히고 자기의 모든 영적인 삶을 파산으로 몰고 가는지 모른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예수그리스도께서 용서의 교훈을 알려주셨던 것은 단순히 사랑을 실천하며 살라고 하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건강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말하자면, 그렇게 매일 매일 용서하는 그런 삶이 너무너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보셨기 때문에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화) 지금은 그런 돈 없습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 가난하던 시절에 할머니가 달러돈에 시달리는 것을 가끔 본적이 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 달러라고 그래서 미국 돈을 가지고 사람들이 돈놀이를 하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루에 100분의 1씩 늘어나는 것입니다. 100만원을 빌리면, 하루자고 일어나면, 이자가 10,000원입니다. 석 달 만에 100% 이자이니까,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법에서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 이자를 떼어 먹어도, 법정에서 물어주라고 이야기를 안 할 정도로 그런 고리입니다. 1년이면, 네 배로 변하는 것입니다. 백만 원을 빌렸으면, 1년 후에 갚으려면, 500만원을 갚아야 하는 그런 고리대금업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입니다. 한참, 그 옛날에 계 많이 하고 해서, 경제 질서가 문란하고 할 때에 파산 신고하는 사람을 우리 동네에서 여러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빌려다가 이자 갚고 생활비 하고 나니까, 다음에 이자 줄때에 또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또 빌려다가 주르륵 이자주고, 또 먹고 나니까, 또 이자줄 돈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입니다. 삶의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까? 헤어날 수 있습니까? 불가능 합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견딜 수 있을 때 까지는 견디는 것입니다. 왜, 자기의 명예가 있고, 그리고, 가족들의 눈이 있고, 말하자면, 집안에 명예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때까지 다 꾸어서 얻어다가 그것을 갚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100만원 빌려 쓰고, 한 달 후에 30만원 갚기 위해서, 30만원 이자를 빌리면, 그 30만원에 대한 이자가 한 달에 3,000원씩 늘어나서, 그 다음 달에 또 10만원 이자를 또 치는 것입니다. 그 30만원이 그러면서, 이리 메치고, 저리 메치는 것입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결국에 감당할 수 없사오니, 그러면서 파산선고를 합니다. 그러면, 형무소 들어가거나, 야반도주 하고, 집 다 팔아가지고 빚다 청산하고 끝내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계속 우리들이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고, 그 짊을 지면서 계속 살면 언젠가는 그렇게 파산선고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쪼기는 그 인생을 살려고 하십니까? 그렇게 물리적으로 파산되지 않을 정도에 까지 가서 결국은 마지막에 그렇게 모두다 파산당하고, 하나님 앞에 체면도 없고, 얼굴도 없고, 인생의 막장까지 가서 하나님 앞에 손들고 옵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까? 하나님 아버지하고 줄다리기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패역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죄가 그 용서하지 못하는 죄가, 미움을 낳고, 미움이 증오의 죄를 낳기 전에 그래서 그 사람자체가 이미 한 맺히고, 증오에 맺힌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떻게 그 인격 속에 깃들 수가 없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고, 용서함 같이 사랑하라, 그리고, 용서하고, 나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고, 그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데, 예수를 바라보고 그러면서 용서할 때에 우리의 영혼은 자유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무거운 짐 없이 우리의 인생을 살아야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속에 지니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를,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때마다, 하나님 내가 오늘 나에게 끔찍하게 죄의 빚을 진 그 사람을 아살하게 용서해 준 것 같이 주님이 오늘도 나의 죄를 그렇게 용서해 주시옵소서. 내가 그와의 관계가 회복된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나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끔직하고 그 불가능한 일을 우리 속에서 행 할 수 있게끔 살아가느냐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