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2)
녹취자: 백지영
지난 시간에는 우선 이 주기도문을 잘 가르쳐야 된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기독교 신앙을 세우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먼저 나눴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주기도문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열심히 공부를 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말씀드린 것은 이 주기도문을 4부로 나눌 때 두 번째 부분 하나님을 위한 간구에 대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래서 제가 잠간 동안에 어제 말씀 드린 내용들을 반복을 하고 오늘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이 주기도문이야말로 기독교신앙 전체를 이해하게 하는 웅장한 골격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은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이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목회사역을 할 때 어떤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지 그리고 어떤 세상이 되기를 원하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나 많은 목회자들이 그런 그림이 없이 사역을 합니다. 그냥 설교하고, 예배드리고 또 일하고 설교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을 하면서 마지막에 그것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분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목표를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매일매일 기도하셨던 그 내용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도 목회와 선교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런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어제 오늘 공부한 내용 중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이 정말 중국 땅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중국을 넘어서 세계에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매일 매일 현실에 코를 박고 살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생각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독교사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지하게 여러분이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목회적으로 고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기도문은 그냥 많은 가르칠 거리 중에 하나가 절대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의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내용을 매일 매일 수도 없이 기도하시고 눈물로 기도하시고 마지막에 이 기도제목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매일 기도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목회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어디를 따라간다는 것입니까? 어떤 마음이 되어야지만 예수님께 합당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남겨주신 주기도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생명적인 이야기입니다. 저는 23년 동안 개척교회를 해서 이제껏 목회를 했습니다. 23년 동안 저는 주기도문 전체를 한 15번 내지 18번에 걸쳐서 두 번을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으로 3400명의 교인들이 한 다섯 달 동안 매주 공부하면서 주기도문을 익혔습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해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기도문을 눈물로 가르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르치는 여러분의 교인들도 예수님의 마음을 나누어가진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아멘’ 해보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예수님의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전해 줄 수 있겠습니까? 주기도문입니다. 이것이 어제 말씀드린 첫 번째였습니다.
두 번째,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기도문을 잘 모릅니다. 여러분 중에 주기도문을 진지하게 설교하기 위해서 장시간 동안 탐구하신 분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난 주기도문을 교회에서 십 주 이상 연속으로 설교한 적이 있다.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그러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공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원래 알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한국에서만 주기도문에 관해서 나온 책을 모으면 이만큼쯤 됩니다. 만약에 영어까지 합친다면 저 끝에서부터 여기까지 올 것입니다. 책을 이렇게 쌓아 놓아도 제 키로 세배 이상은 될 것입니다. 세계에 있는 영어 주기도문을 모으면. 중국어로는 몇 권이나 번역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중국어로 된 것이라도 열심히 읽으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중국어로 번역을 하는 것입니다. 팔려고 번역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번역하는 것입니다. 공부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어제 무슨 말씀을 드렸습니까? 혼자 공부하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그리고 똑같이 교인들이 공부하는 것처럼 한번 모였을 때 한 과씩 혹은 두 과씩 관련된 책을 읽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의견도 나누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서로 질문하고 대답도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한 권을 충분히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모르는 것이 있으면 또 다른 책을 읽으면서 보충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6개월 동안 공부했다고 칩시다. 이 책을 여러 번 읽었을 것이고 또 다른 책들도 여러 권 혹은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읽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깨닫게 된 내용을 모두 여기에다가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새카맣게 말입니다. 그래서 이 책 한권만 가지면 이 책 자체가 참고서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이게 만약 모자란다고 하면 옆에다가 종이를 풀로 붙이면 될 것입니다. 어쨌든 이 한권이면 모든 것이 다 들어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실제로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 나도 잘 모르는 문제를 교인들이 질문을 하면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아이고 시간이 다 됐네요. 다음 시간에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가서 열심히 다시 공부를 해 가지고 와서 대답을 해 주는 것입니다. 잘 모르면 선생한테 전화를 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잘 적어서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또 질문을 합니다. “지금은 공부해야 되니까 끝날 때 질문 하십시오.” 이렇게 지혜롭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끝날 때 손을 들고 질문을 하겠지요. “아, 오늘 시간이 너무 많이 갔네요. 다음 시간에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질문한 것하고 답 한 것을 다 여기다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번 가르쳤습니다. 그 다음에는 얼마나 쉬울까요? 거듭할수록 여러분의 주기도문에 대한 가르침은 탄탄하고 풍부해져 갈 것입니다.
배우기 싫어하는 100명을 놓고 가르치는 것보다는 배우려고 하는 사람 한 사람을 놓고 가르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그리고 가르칠 때는 그냥 지식에서 지식으로 넘어가도록 절대 그렇게 가르치면 안 됩니다. 자, 사람들을 모읍니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주기도문은 매우 특별하다 어떻게 주기도문을 배우면서 기도를 안 하겠느냐? 그러니까 주기도문 배우는 동안은 너희가 매주 한 시간이상씩 기도한다고 약속하라, 그리고 모였을 때도 서로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하자.”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금요일 밤에 산으로 올라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흩어져서. “예수님이 금요일 날 그렇게 기도하셨다. 너희도 기도하라. 밤이 새도록.” 한국교회도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충격 받을 것입니다. 어떤 일어날지 여러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 사람들 변화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한 6개월 정도 가르치고 나면 이 사람들이 “아, 기독교신앙이라는 것이 전체적으로 이런 것이구나.” 그런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살아야 되는 것이구나.”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게 어제 가르쳐드린 두 번째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먼저 기도한 것이 첫 번째 파트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기도의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만 여러분에게 강의를 해도 하루 종일 해야 될 정도로 엄청난 내용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그 책의 일부를 읽으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2부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위한 간구가 세 개가 나옵니다. 첫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것이 2부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간구가 세 가지가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위한 기도가 나옵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내용이 아니라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들이 이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고 할 때 일용할 양식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성찬에서 받는 떡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 자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옵시며” 이렇게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것은 영혼을 위한 영적 양식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육신적인 양식, 실제로 먹는 밥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영적이고 육적인 양식 모두를 가리킨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이 해석 모두 다 일리는 있지만 정확한 해석은 아닙니다. 그러면 가장 좋은 해석은 무엇이냐, 여기서 말하는 양식을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아주 좁게 해석을 했습니다. 이 떡의 의미를. 일용할 양식의 이미를. 그러나 종교개혁과 함께 이 일용할 양식에 대한 의미를 훨씬 넓게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런 그림을 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머리 하얀 할아버지가 안경을 벗어놓고 빵 한 덩어리를 놓고 경건하게 기도하는 그 가난한 모습 말입니다. 옆에는 성경책이 있고. 보신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아주 유명한 그림입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용할 양식이라고 하는 것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한 덩어리의 빵과 우유한 잔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경우에는 빵이 주식이니까 빵하고 그 다음에 콩국, 한국은 밥하고 국 이런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마르틴 루터는 이것을 해석하면서 훨씬 더 변화된 시각을 보여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빵하고 물만 먹으면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육신의 생명은 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육받을 기회를 못 제공을 받는다면 정말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안 됩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어떻게 이해를 했느냐 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음식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으로 하여금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교육, 문화, 이 모든 것을 누리는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의미 있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 일용할 양식 속에는 우리가 먹는 빵과 우유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교육 그 다음에 문화의 혜택 이런 것들이 모두 들어간다. 그렇지만 다이아반지는 보석은 들어가지 않는다.”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한 40년 전으로 한국사회를 거슬러 올라가면 목회자가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부패와 타락의 상징이었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다. 더욱이 목회자가 소나타를 타고 다니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고 엄청난 타락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소나타 한 대가 큰 집 한 채 값이었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때는 국민소득이 5백 불이었는데 지금은 3만 불이 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회가 어떻게 부유해지냐에 따라서 사실은 일용할 양식의 수준은 변한다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잠자리, 교육, 문화생활, 의복 이런 것들이 이 일용할 양식 속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일용할 양식을 너무 폭넓게 생각하거나 너무 좁게 생각하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10년 전에 중국에 있는 식당 하나가 우리에게 커다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식당 이야기였습니다. 북경에 있었던 식당으로 기억합니다. 한 사람의 식사비가 4천 900만원입니다. 한국 돈으로. 한 사람 점심 값이 25만 위안. 실제 그 음식점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신문에 났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식당에 가려면 한 달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준비하는데 한 달이 걸립니다. 그 코스가 무엇인지 상세하게 나왔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맨 처음 나오는 게 샤오마이 두 개와 녹차가 나옵니다. 그것이 만5천 위안입니다. 그리고 아홉 번 정도의 코스를 거칩니다. 마지막에 가장 중요한 요리가 나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사람 앞에 잉어 백 마리를 잡습니다. 잉어를 잡아서 살을 먹는 것이 아니라 수염 두 개를 자릅니다. 그러면 백 마리를 잡았으니까 수염이 200개가 됩니다. 그것을 요리해서 한 사람 접시에 담는 것입니다. 그것이 25만 위안입니다. 한 사람 앞에.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 요리를 독일 사람이 12명이 같이 요리를 먹고 그리고 300만 위안을 점심값으로 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서태후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여자가 먹는 식탁에 매일 매 끼니마다 올라오는 빵만 32종류였다고 합니다. 중국 역사에 약 600명의 황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먹는 것에 아주 탁월한 감각을 지녔던 황제 중 한 사람이 수양제였습니다. 이 사람 밑에 새로운 음식 재료를 구하러 다니는 사람만 450명이 있었습니다. 온 나라에 외국까지 그 식자재를 구하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매일 황제를 위해서 2.5톤의 식자재로 요리를 했습니다. 그럼 황제가 그것을 어떻게 다 먹을까요? 자기는 조금만 먹고 다 도시락을 쌉니다.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냅니다. 이것이 바로 도시락 정치였습니다. 황제에게서 보낸 음식이 오면 절을 하고 그리고 황제가 자기를 이렇게 눈물겹게 생각한다는 것에 감격을 하면서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먹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측근들을 관리했습니다. 로마는 어떻습니까? 로마는 어땠을까요? 어마어마합니다. 로마는 음식을 만들어서 연회에 저쪽에서부터 이렇게 매고 돌아다녔습니다. 너무 새로운 음식이 먹고 싶은데 배가 부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음식을 먹고 씹습니다. 그리고 국물만 삼키고 나머지는 통에다가 뱉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장실에 가서 손가락을 깊이 집어넣고 다 토해냅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음식의 역사를 보면 인간이 얼마나 허무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중국 역사책에 사람을 먹은 기록이 나오는 것 아십니까? 사람 부위마다 고기 이름이 다 정해져 있었습니다. 가장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던 고기는 네 살에서 다섯 살 된 아이의 고기였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도 아닙니다. 중국 이야기 하나 더 해 보겠습니다. 옛날부터 돼지고기는 중국 사람이 좋아하던 요리였습니다.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돈 많은 사람이 돼지새끼를 낳자마자 젊고 아기를 가진 엄마에게 그 돼지를 맡깁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줄 젖을 돼지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당한 크기로 자랐을 때 탁 잡아다 먹습니다. 그때의 고기 맛은 일반적으로 기른 돼지와는 완전히 다른 맛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중국 요리에서 이러한 미식사(美食史)의 이야기를 하면 오늘 아홉시까지 이야기해도 다 못합니다. 딱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제가 제일 중국 요리 중 좋아하는 요리가 베이징 카우야입니다. 하우츠.(好吃) 그런데 그 역사를 보면 청나라 때 베이징 카우야가 시작이 됩니다. 한국에도 베이징 카우야 하는 집이 있습니다. 부 하우츠.(不好吃) 맛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맛있게 하는 게 무언지 아십니까? 태어나자마자 움직일 수 없는 좁은 통로에 벽을 쌓고 거기에서 움직이지 못한 상태에서 오리를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운동을 하면 근육이 발달되고 기름은 기름으로 고기는 고기로 분리 가 되는데 못 움직이니까 기름이 사이사이 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껍데기가 탄탄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살을 찌웁니다. 못 움직이게 하고 그리고 잡아 죽이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유명한 베이징 카우야의 맛이 나오는 것입니다.
불란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프와그라입니다. 거위의 간입니다. 엄청 비쌉니다. 고급 요리에 나오는 식자재입니다. 그런데 그냥 거위를 잡아서 간을 꺼내면 맛이 없습니다. 이 거위를 막 괴롭힙니다. 고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위가 화가 납니다. 그래서 거기서 아드레날린이 나옵니다. 그것이 간에 뱁니다. 그리고 간이 붓습니다. 그때 탁 잡습니다. 그리고 꺼냅니다. 그게 프랑스 음식입니다. 프랑스 왕실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음식을 요구했습니다. 도저히 요리사가 더 이상의 새로운 요리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주방에서 목을 매달아서 자살을 했습니다. 그런 잔혹한 역사가 유럽, 한국, 중국, 일본 어느 나라나 다 있습니다.
한국이야기를 딱 하나만 해 보겠습니다. 한국 사람도 개를 먹습니다. 지금도 많이 먹습니다. 요새는 그냥 개를 잡습니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고기가 맛이 없다고 합니다. 죽기 전에 개를 막 괴롭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을 매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이지 않습니다. 여기다 개를 놓고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서 막대기로 계속 때립니다. 마지막에 때려서 죽여 버립니다. 그럴 때 그 고기가 맛있는 고기가 된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너무나 확대해서 음식의 쾌락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비인간적인 것들을 항상 가져왔습니다. 그러면 음식에 대한 태도는 어때야 합니까? 역사적으로 세 가지 견해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음식을 먹으면서 ‘아, 맛있다.’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식은 맛이 없게 만들어 먹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잘 아는 아시시의 프란시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일단 밥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재를 한 움큼 가지고 밥 위에다가 재를 뿌렸습니다. 음식의 맛을 다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견해가 아닙니다. 두 번째가 아까 말한 것처럼 한 없이 음식의 도락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때 인간은 말하자면 쾌락에 빠지는 식도락적인 타락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적인 견해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적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맛이 없으면 그 음식을 잘 안 먹게 됩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난 그런 적이 없나 늘 많이 먹어서 문제다 그런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는 살이 쪄도 골고루 찌는데 나이가 들면 배만 나옵니다. 건강해도 매우 안 좋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음식에 절적한 맛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먹으면서 기뻐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에 항상 절제와 자기 통제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방탕하지 말고 적절하게 절제하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결국 중국의 그 일인당 4천9백만 원짜리 음식은 당국에서 폐지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일용할 양식’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들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적절한 영양가가 있고 맛이 있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 그 다음에 우리의 몸을 활기를 유지하게 하는 음료, 중국에 상해나 북경 첸두 이런 큰 도시는 지금 공기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맑은 공기도 일용할 양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나한 사람들 거의 교육 못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이 계속해서 대를 물려 내려갑니다. 일용할 양식을 잘 못 먹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그 일용할 양식을 다 먹을 수 있을까? 아무 문제없습니다. 지금 현재 인류가 가지고 있는 농업생산능력이 지금 지구인구보다 두 배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120억. 그런데 지금 잘 안 되고 있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탐욕에 의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곡물들이 골고루 분배가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기 1킬로를 먹기 위해서는 곡물 12킬로가 소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부유한 나라의 가축들이 먹어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세계 곡물 시장은 정유시장하고 비슷합니다. 과학적으로 통계를 내서 공급 값이 떨어질 것 같으면 곡물을 심지 않으면서 계속 곡물 값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속에서 우리들은 아주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먹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웃을 생각해야 합니다. 밥이 없어서 굶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못 받은 것입니다. 빵 한 덩어리 물 한통 주고 우리는 할 일을 다 했다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다운 교육을 못 받는 사람이 있다면 교육받는 사회가 되도록 우리는 기도하고 도와야 합니다. 문화의 혜택을 못 받는 사람들에게는 최소한 우리들이 누리는 문화의 일부분이라도 향유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이 개선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기도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였습니다. 이것도 상당히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장에 걸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을 말하자면 이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한 것같이 우리의 죄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죄가 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데 그 기도하는 사람이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면, “우리가 이미 다른 사람들의 죄도 용서해 주었으니까 우리의 죄도 용서해 주십시오.”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도를 뒤집어 보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만약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죄도 용서하지 마십시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주기도문 중에서 이 기도가 제일 무서운 기도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신 적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 자신 있게 이렇게 기도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하나님, 내가 만약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한 사람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면 저의 죄도 용서하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우리에게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주기도문은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니까 꼭 그래야 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도들이 함께 나누어야 할 것이 두 개가 있습니다. 용서와 베풂입니다. 용서는 자신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남에게 지은 죄도 하나님께 지은 죄도 자기는 용서할 자격이 없습니다. 용서할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인가 피해를 입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은 내가 잘못했지만 그러나 내일은 이 사람이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할 때마다 잘못한 사람을 우리의 마음에서 칼로 베어버린다고 생각해 봅시다. 일 년이 지나가서 여기는 모두 피바다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이 사람이 잘못했을 때 내가 용서해 줍니다. 그런데 다음에는 내가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용서를 받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이 사람이 나를 용서하는 것도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용서를 나누는 공동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두 번째가 베풂입니다. 그것은 바로 물질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풂으로써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한국에 맨 처음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 엄청나게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 무리는 통화통색하는 무리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통은 통(通), 화는 화폐할 때 화(貨), 색은 색(色),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아십니까? 세상에서는 돈을 서로 뺏으려고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서로 돈을 나눠주려고 합니다. 이것이 통화(通貨)입니다. 그 당시의 한국은 남자와 여자가 엄격해서 남녀가 일곱 살이 되면 같은 좌석에서 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 할머니는 17살에 우리 할아버지와 결혼을 하셨습니다. 남편이 누구인지 얼굴을 한 달 후에 확인을 했다고 합니다. 차마 고개를 못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남녀가 막 섞이더라, 그게 통색입니다. 한국에서 남녀가 평등하게 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의 영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 죄를 용서하고 물질을 나눔으로써 하나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삶입니다. 그때에 순수한 그리스도인, 그 순수한 그것은 수천 년이 지나가도 썩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의 믿음을 금에다가 비유합니다. “금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라.” 성경에 보면 위대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교회 역사에도 하나님이 훌륭하게 쓰신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고난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불같은 시련을 당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2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일곱 명이 지하실에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5천명이 되었습니다. 20년 전부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저를 모를 때였습니다. 그래서 출판사에서 책을 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제 글을 잡지에서 보시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네 출판사 직원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김 목사가 글이 괜찮으니까 책을 한 권 내줘라.” 그래서 원고를 써가지고 주었습니다. 책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15일마다 3000권씩 책을 찍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 온 목회자들이 그 책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 저는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한 70권 정도의 책을 썼습니다. 200만권의 책을 독자들이 샀습니다. 1만권의 책은 트럭에 하나 가득 실었을 때의 양이 1만권입니다. 그 트럭이 200대가 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저는 교수입니다. 저는 한국을 떠나서 한 달 이상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유학을 해 본 적은 더 더욱 없습니다. 저 혼자 공부했습니다. 그래도 외국에 있는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학문적인 교제를 나눕니다. 부러워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저 사람은 교회를 해서도 5000천명 목회를 하고 책을 써서 200만권을 팔았다고 말입니다. 사람이 열권정도 책을 쓰고 나면 다 내용이 없어서 이제 책을 그만 쓰거나 사람들이 책을 보면서 ‘아, 그 내용이 그 내용이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2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내 책이 나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사서 읽는 사람들이 1만 명쯤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1만 명 정도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어느 날 하루는 우리 후배가 와서 나를 부럽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는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께 내 생명을 거두어 주십사고 기도를 한 적이 있느냐?” 내가 물었습니다. 대답을 안 합니다. 내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있다. 나는 6개월 동안을 기도했다. 죽여주십시오.” 저녁에 잠잘 때 기도했습니다. 아침에 눈 뜨지 말게 해 달라고. 물에 떠 있는 백조를 보면 우아해 보입니다. 그러나 물속에서는 발에서 불이 나도록 발을 움직여야 합니다. 보이는 겉모습이 모두가 아닙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누가 모두 알겠습니까?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 교회 역사에 나오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시련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남이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시련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이 혹시 수 형제를 알고 계십니까? 중국 지도자 수, 윈 형제의 스승입니다. 그 형제를 만났습니다. 나이가 많이 드셨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설교하셨습니다. 그리고 숙소에 모셨습니다. 편지를 저녁에 써놓고 가셨습니다. “고난을 잘 이기는 사람들이 됩시다.”
그래서 여러분이 목회하다가 시련을 당할 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시련을 안 당할 때 이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 시련이 없을까? 왜 모든 게 다 잘 되갈까? 왜 핍박이 없을까? 이상하다. 그런 게 있어야 하는데. 곧 오겠지. 지금 평안한 것은 태풍의 눈일 거야.” 늘 그것을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기꺼이 죽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핍박이든지 사고든지 과로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너무 사랑하면 안 됩니다. 심지어 자기 교회도 너무 사랑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 교회를 마치 자기 소유물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세운 교회인데. 내가 여기서 얼마나 많은 충성을 했는데. 내 집 내 땅 다 팔아서 여기 바쳤는데.” 그렇게 생각할 바에야 차라리 안 하는 게 낫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이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특히 중국과 같은 상황 속에서는 더더욱 순교의 각오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금보다 더 귀하다
제가 북경에 설교하러 갔습니다. 거기서 굉장히 큰 강와시 교회라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연세가 많이 드신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너무 연로하신데다 약간 중풍기가 있어서 말도 잘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제가 한국에 돌아와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이 분이 젊었을 때에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소명을 받아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아내도 예수를 믿었습니다. 아이들도 예수를 믿었습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가 잘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화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잡혀 갔습니다. 26년을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노동하며 살았습니다. 가족들하고 연락도 안 됐었습니다. 그런데 석방이 됐습니다. 26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고생을 했으니 다 늙었습니다. 그래서 기다리던 고향으로 달려갔습니다. 고향에 가보니까 자기 아내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미쳤습니다. 그리고 아들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공산당이 돼버렸습니다. 한 아이도 정신이상자가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동네 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교회는 이미 다 부서져서 없어졌습니다. 자기 살던 집에도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이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래도 네가 나를 사랑할래?” 그 사람은 마당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통곡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하나님만 섬기다가 고난을 받았는데 가족이 완전히 다 파괴가 돼 버렸습니다. 그때 고백했습니다. “오, 주님 그래도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여러분은 목회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 “내가 열심히 목회를 잘 하면 성도들이 나를 존경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 자손들을 훌륭한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노후에 나를 건강하게 하시고 부자가 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전혀 그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변절하고 나쁜 짓 하고 교인들 속이고 그러는데도 부자가 되고 자손들은 잘 되고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핍박받고 고난 받고 어쩌면 감옥에서 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언제나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우 아이 주.(我爱主)”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시험이 무서워서 피하는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고난 받기 싫어서 수 쓰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두 감당하기 원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 때문에 이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내가...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3-24) 자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매 순간 죽을 각오를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주기도문적인 삶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기도가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이 “악”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적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시험에 든 사람들은 대부분 악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악에 빠지지 않는 것은 우리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붙들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에 빠진 것은 우리의 책임이지만 악에 빠지지 않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덕분입니다. 그런데 시험에 든 많은 사람들은 악에 빠지기 매우 쉽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시험을 당했다하더라도 악에 빠지지는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찬송가 있습니다. “환란과 핍박 중에서 성도는 신앙 지켰네.” 고난 속에서 기도를 하는 찬양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이런 가사도 나옵니다. “양심은 자유 얻었네.” 고난을 많이 받는데 양심은 자유롭습니다. 왜냐하면 악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면서도 양심은 자유롭습니다. “사람은 나를 잘못 판단하고 나라의 법은 나를 박해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움 없이 살았습니다.”라는 고백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도자의 위대한 힘입니다. 물론 우리 중에는 완전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매일 매일 불순종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최소한 우리의 양심이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그러한 약에 빠지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도자가 그런 삶을 살 때 교인들에게 힘차게 이 주기도문을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기도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송영(誦詠)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해서 받으시는 영광,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궁극적이 목표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매일 매일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적인 삶입니다.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합니다. 주기도문을 가르치십시오. 이 책이 필요하면 제가 저자이지만 허락을 하겠습니다. 복사해서 쓰십시오. 중국에서 이 책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 책을 찍는 것은 불법입니다. 한국에서 찍어놓고 조금씩 중국에 가져옵니다. 이 책이 중국에서 출판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조금씩 혹시 여러분이 원하면 우리가 이 책을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냥 가르치십시오. 눈물로 가르치십시오. 여러분이 먼저 살고, 먼저 기도하고, 먼저 그렇게 울고, 그리고 교인들에게 가르치십시오. 기도하면서 가르치십시오. 기도에 관해서만 가르치지 말고 기도자체를 하도록 가르치십시오. “너희들 기도 많이 해라.” 그렇게 말하지 말고 “우리 같이 기도하자. 모여라. 우리 모두 밤새워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자. 예수님이 그 밤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면서 가르치십시오. 고난이 올 때 시련이 닥칠 때 마음이 곤고하고 괴로울 때 여러분의 위로는 무엇입니까? 좋은 음식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아름다운 곳을 보는 것이 위로가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찬양)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주는 모든 괴로움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제가 젊었을 때 아주 좋아하던 찬송가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어둔 밤중에 교회 한 구석에서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내 마음을 다 몰라도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지막으로 한 말씀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한 목회자가 많은 성도들 앞에서 짧은 연설로 마음을 뒤흔들어 놓기 위해서는 그 진리를 붙들고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몸부림치며 살았어야 됩니다. 나는 이것을 “토혈(吐血)의 목회”라고 말합니다. 토혈의 목회입니다. 피를 토하듯 목회를 해야 합니다.
(예화) 일본 에도 시대 때의 이야기입니다. 양쪽 중요한 가문의 대표들이 나와서 바둑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양쪽 가문의 명예가 걸린 대회였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졌습니다. 끝난 다음에 이 사람이 자기가 진 게 너무 원통했습니다. 그리고는 바둑 판 위에 피를 토하고 그 자리에서 절명을 했습니다. 그 기보(碁譜)가 아직도 전해 내려옵니다. 토혈국이라고 합니다.
오락을 하다가 졌는데 너무 원통해서 자기 가문의 명예를 떨어뜨린 것이 너무 원통해서 피를 토하고 죽어버렸습니다. 우리의 복음 사역이 바둑만 못합니까? 제가 연변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제 책을 조선족들은 읽을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족 지도자들이 몰래 25명이 모였습니다.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뭔가 내 이야기를 들으려고 눈이 반짝반짝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야기를 해보십시오.”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둑을 두다가 졌을 때 자기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것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우리의 강단에 피가 묻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자리에 피가 묻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저한테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느 목회자가 말했습니다. 10일 동안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너무 괴로워서.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주님은 어떻게 살았나요?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죽으셨나요? 그냥 설렁 설렁하시다가 가셨나요? 매일 매일 당신의 하루하루를 피로 쓰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복종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 놀라워서, 그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난 그냥 살 수가 없다고 한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이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20세기에 전 세계에서 예수 이름 때문에 순교한 사람이 3천만 명입니다. 지금도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중국의 선배들도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그 피가 흘러서 여러분을 세운 것입니다. 한국 선교사들이 여러분을 세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조상의 피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에서 지금도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목회해야 되겠습니까? 만약에 우리의 이 강대가 피에 젖어 있다면 우리의 기도자리가 피에 젖어 있다면 그래서 우리의 설교가 피가 묻어 있다면 지금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수많은 영혼들이 옛날에 살아났을 것입니다. 20년 전부터 제가 중국에 다녔습니다. 그때 중국의 목회자들은 눈물이 있었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순수했습니다.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를 보는 것 같습니다. 훨씬 대단했었습니다. “난 죽어도 좋다.”라는 이 결기가 느껴져야 합니다. 그게 주기도문의 삶입니다. 먼저 여기에 여러분의 피를 토하십시오. 그리고 그 피를 가르치십시오. 여러분이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난 굳게 믿습니다. 많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눈물을 흘리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보다는 천국을 바라보십시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