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녹취자: 김경애, 김명진
오늘 이 시간에는 주기도문 중에서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관한 기도를 가르쳐주신 후에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 알려주셨습니다. 그 첫 번째 가르침의 기도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새로운 인상을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늘나라의 일을 구하며 살아야할 것 같은데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매일 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어야만 겨우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세 가지 간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나라가 임하는 것,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중의 첫 번째가 양식을 위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양식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양식으로 번역된 것이 희랍어로 ‘히락토스’ 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원래 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그냥 우리들이 일용하는 떡이 아니라 성찬에 제공되는 떡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예수님 자신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영적인 양식을 의미했다고 해석했습니다. 오리게네스나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위대한 교부들도 이런 견해를 따랐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육신적인 양식 곧 꼭 우리가 먹는 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영적이고 육적인 것 두 가지 모두를 가리키는 양식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해석은 이것이 양식이라고 표현되었지만 이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기본적인 조건들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의 삶을 위한 양식과 필수한 모든 것들이다. 곧 음식과 의복과 신발, 집, 정원, 경작지, 가축, 돈, 재산, 좋은 배우자, 아이들, 그리고 착한 식구들, 강직하고 신실한 통치자들, 건강과 품격, 영예, 좋은 친구, 신실한 이웃까지 포함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양식이라는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조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양식이라고 표현된 이 말은 일종의 제유법적인 표현입니다. 즉 어떤 하나의 물건을 통해서 전시대에 의미를 전달하는 그런 화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여야하기 때문에 저축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벌 욕심을 버려야하고 일용할 양식으로만 만족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이 생명을 유지할 정도의 식품만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상의 좋은 옷과 먹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이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종류의 해석은 성경구절을 전적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다니던 교회에 어떤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식으로 주기도문을 해석했습니다. 버는 대로 모두 다 남을 위해서 쓰기도 하고 자기를 위해서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저축하는 것을 죄악이라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저축하면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경제생활이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자매가 월급날이 되면 자꾸 사람들에게 돈을 꾸러 다녔습니다. 그리고는 돈을 제대로 갚지 못했습니다. 이런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육체적으로 기본적인 인간적인 생활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굶주리며 살아갑니까?’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이 지구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뜻은 조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잘못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북한은 지난 몇 년 동안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1993년도 2005년도에는 약 200백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죽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2010년을 기준으로 북한에서 모자라는 양식이 135만 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남한에서 남는 식량이 150만 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둘이 서로 사이좋게 형제처럼 생각하고 살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식을 한반도에 주신 것입니다. 지금 2006년을 기준으로 세계인구가 65억을 넘었습니다. 그런데 1984년도 UN농업식량기구에 의하면 그 당시에 120억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곡식을 생산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겨우 입에 풀질만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2400~2700Kcal 씩 충분히 먹고도 남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와 돼지입니다. 이 소와 돼지가 인간이 먹어야할 식량을 먹어치우는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생산된 곡식의 57%가 가축의 사료로 사용됩니다. 사육장에서 1㎏의 고기를 먹기 위해서 약 9㎏에서 12㎏의 사료를 먹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6㎏ 내지 7㎏가 곡물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부유한 선진농업국에서는 식량을 무기처럼 사용합니다. 금융시장에서 축적된 거대한 자본들이 곡물시장에 개입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곡물을 매점매석함으로써 국제곡물가격을 조작하고 시장을 교란시켜서 양식이 모자라게 만드는 것입니다. 심지어 가난한 나라에서는 많은 나라들이 엄청나게 식량을 원조해주어도 그것을 백성들에게 주지 않고 자신들이 챙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서 살이 쪄서 돼지처럼 죽어가고 한쪽에서는 굶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부의 80%를 오직 10%의 사람들이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90%의 인구가 20%의 부를 서로 나누어가지면서 사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부의 불균형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난생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미국경제는 한창 호황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주 좋은 호텔은 아니고 웬만한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거기서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른 아침인데도 차려진 음식들이 우리나라 특급호텔의 저녁 뷔페식당 못지않게 너무 풍성했습니다. 싱싱한 과일, 좋은 고기, 동서양을 넘나드는 다양한 요리와 후식의 디저트까지 엄청나게 많은 음식들이 차려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충격적인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 음식이 대부분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커다란 케이크를 한두 번 찍어 먹었는데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쪽만 살짝 먹었던 두툼한 스테이크, 한 두입 먹었을 뿐인 커다란 수박이 모두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캐터링 업체가 와서 가든에서 파티를 하게끔 식사가 차려졌습니다. 바비큐 파티였습니다. 파티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 직원들이 그 위에 있던 음식은 물론이고 접시, 포크, 칼 같은 것을 모두 한꺼번에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입니다. 너무 아까워서 왜 이러느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이런 것을 다 분리하기 위해 사람들을 쓰면 인건비가 너무 많이 나가기 때문에 다 갖다버리고 중국제를 쓴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순간에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 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나라에 비해서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인구도 1/25 정도밖에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버려지는 쓰레기가 1년에 25조원입니다. 어마어마한 양이 버려지는 것입니다 중국도 쓰레기 값을 계산하면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최소한 20배를 계산해서 500조원이 되지 않겠습니까? 미국은 더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쪽에서 흥청망청 소비하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선가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굶주림으로 죽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비록 불신자나 혹은 이교도들이라고 할지라도 굶주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비참한 인간들이 없도록 이 세상을 위해서 노력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진리는 우리를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나만 잘 먹고 살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1차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형제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2차적으로는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인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예수 믿는 사람들 속에 이렇게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고통을 받고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히는 사람들이 없도록 서로 돌아보아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물질, 건강, 젊음, 생명까지도 주님이 여러분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재능까지도 주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위해 사용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굶주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남이지만 예수님에게는 같은 당신의 자녀들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영역을 넘어서야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와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심지어는 우리의 적국에 속한 백성들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들이 주리면 먹여야하고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힌 채 살아가면 그렇지 않도록 도와주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출애굽기 16장에 나오는 만나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출애굽기 16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전에는 전혀 알 수 없었던 방법으로 먹을 것을 공급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만나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새벽에 만나를 먹으러 들판으로 나아갔고 거기서 하루 먹을 양식을 거둬들일 수 있었습니다. 아무 때나 나가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른 새벽에 나가야했습니다. 매일 매일 만나를 구하러 들판에 나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매일 매일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간다는 신앙을 가지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순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할 줄 아시느니라.’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지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염려는 주님을 믿지 못하는 행동이지만 기도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필요도 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먹고 입는 문제만이 아니라 영혼의 안식, 교육을 받을 기회, 문화적인 누림, 함께 교제하는 친구들, 이 모든 것들을 알고계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우리들이 당신의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모든 것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가르쳐드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렇게 마음을 모아서 간절히 기도할 때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이 모든 염려로부터 오히려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염려하고 있습니까? 이런 염려는 여러분이 물질의 부족이나 이런 것들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격적인 관계가 와해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소명이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염려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한 것 모든 것을 하나님이 꼭 들어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염려하지 않는 비결입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이러한 간절한 기도는 우리가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적인 것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성도들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기도를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가장 많이 우리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도 이렇게 고난 속에서 주님을 우러르며 살았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라고 말입니다. 이 기도는 개인적인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지평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먹고사는 문제는 우리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굶주리는 사람이 없어야합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인간다운 삶을 사는데 있어서 그것이 채워지지 못해서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을 도와야합니다.
요새 한국에서는 경제적인 형편에서는 조금 나아졌지만 정신적인 소외와 고독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나라에서 일정한 돈을 주기 때문에 굶어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두운 방에 자기 혼자 살고 몸은 불편합니다. 자식들도 멀리 떠나서 찾아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사람은 일용할 양식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물론 먹을 것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다운 삶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을 찾아가서 말을 따뜻하게 말을 건네주고 그와 교제해주는 것 자체가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2005년을 기준으로 전 세계의 10세미만의 아동이 5초에 한명씩 굶어죽는다고 합니다. 비타민A의 부족으로 시력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3분에 한명씩 생겨난다고 합니다. 당시 세계인구의 1/7에 해당하는 약 8억5천만 명이 심각한 영양실조의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는 해마다 전 세계에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2억 5천만 명이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만4세의 아이가 만5살이 되었을 때 살아있는 아이가 4명에서 3명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4살에서 5살 사이의 아이 중 4명 중 한명이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2004년 8월에 이라크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 들어간 비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전광판이 맨해튼 타임스퀘어에 세워졌습니다. 25일 수요일에 1345억 달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일억7천7백만 달러씩 늘어났습니다. 740만 달러에 이르는 액수입니다. 미국은 매달 4000억 원의 전쟁비용을 지출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더 심각한 통계를 내놓습니다. 이렇게 전쟁으로 유가가 치솟아서 1500억 달러 이상을 지불해야했다고 했습니다.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16,000명의 부상자들을 평생 동안 치료하고 재활하는데 쓸 돈이 25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봅니다. 전쟁으로 인해 소실된 전투력을 복구하는데 약 1천억 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는 결국 이라크 전쟁의 대가로 미국인들이 한해 평균 2천억 달러라는 거액의 청구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2000년도를 기준으로 전 세계의 일 년 동안 군비 총 지출액은 7800억 달러입니다. 이 돈은 전 세계에서 가난한 45개국의 부채를 모두 탕감해주고 전 세계의 빈곤을 모두 없애고 에이즈치료와 예방주사를 보급하고 영양실조를 없애고 모든 난민들을 정착시키고 남을 정도의 액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쓰는 어마어마한 돈들이 결국은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행복과 편안함만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고통을 받고 있고 여러분의 이웃들이 어떻게 일용할 양식을 결핍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를 아셔야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역할인 것입니다. 나라가 발전할수록 빈부의 격차는 심각한 사회갈등을 불러옵니다. 국가가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망가진 세상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재물로 고쳐가는 것입니다. 단지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선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망가지고 일그러진 이 세상을 고치고 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과 관련해서 여러분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음식의 맛을 즐기는 것에 대한 적절한 입장입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입니다. 특히 4세기 이후에 생겨난 수도원운동은 그리스도인들을 극도의 금욕과 절제 속에서 살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의 복음의 정신은 아닙니다. 그리스철학과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금욕주의자들은 우리의 육체는 아주 나쁜 것이고 영혼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금욕주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서 맛을 느끼고 행복해하는 것 자체를 죄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음식을 맛있게 조리하는 것이 인간을 타락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고기는 그대로 물에 삶아서 맛없게 먹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곡식은 심지어 아예 조리하지 않고 날로 그냥 씹어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성경적인 견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철학과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금욕주의자들은 우리의 육체는 아주 나쁜 것이고 영혼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금욕주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서 맛을 느끼고 행복해하는 것 자체를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음식을 맛있게 요리하는 것이 인간을 타락으로 인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고기는 그냥 그대로 물에 삶아서 맛없게 먹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곡식은 아예 조리하지 말고 날 것을 씹어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성경적인 견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즐기면서 우리의 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기분이 우울할 때 초콜렛이나 바나나를 먹으면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들어있는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의 생성을 돕는 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맛이 없다면 사람들이 과연 음식을 잘 섭취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프란시스코의 아시시에 프란시스코라는 수도사는 이렇게 행동했습니다. 음식이 나오면 깡통에서 재를 꺼내서 음식에 뿌렸습니다. 왜냐하면 음식의 맛을 다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증거가 나옵니다. 여러분은 선지자 엘리야를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떡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곡식이 아니었습니다. 음식을 먹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견해는 잘못 된 견해입니다.
그러나 또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극단적 방탕주의입니다. 음식을 먹으며 맛을 즐기는 것은 인간의 권리이고 행복이기 때문에 마음껏 즐겨도 좋다는 것입니다. 십년 전에 한국에 중국에 있는 식당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한 끼 식사가 30만 위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국 분들은 이 이야기를 하니까 잘 모르셨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주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9번이나 10번에 나오는 중국의 코스요리였습니다. 맨 첫 번째 나오는 것이 만두 두 개와 녹차가 한 잔 나왔습니다. 그것이 만 오천 위안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독일사람 12명이 와서 함께 그 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한 끼 식사에 360만 위안을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가 막혔던 것은 마지막 이야기였습니다. 마지막 나온 최고의 요리가 잉어요리였습니다. 한 사람 앞에 잉어 200마리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있는 수염 두 개를 잘라서 수염 200개로 요리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이런 식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이런 것은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식사일 수 없습니다. 몇 해 전 한국의 한 호텔에서도 6명이 함께 먹는 10만 위안짜리 식사가 나왔습니다. 그것도 한국에서는 놀라운 액수였습니다. 도대체 한 끼에 천 오백만원짜리 식사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아주 비싼 음식을 먹었다고 칩시다. 15초 즐깁니다. 입안에서 씹을 동안에만 맛있지 뱃속에 들어가면 싼 것이든지 비싼 것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몇 초 동안의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 그렇게 어마어마한 돈을 쓰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방탕한 것은 오래전부터 인간의 치명적인 죄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성적으로 탐닉한다, 사람을 때리고 싶은 것을 맘껏 한다는 것은 죄가 구성이 됩니다. 그러나 너무 비싼 밥을 사먹었다고 해서 경찰이 잡아가는 법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궁금하실 것입니다. 아까 그 30만 위안짜리 식사가 있는 식당이 지금까지 존재하는지 말입니다. 없어졌습니다. 중국 정부에서 폐업시켜버렸습니다. 여러분은 가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섭섭하시겠습니다.
음식에 대한 탐닉은 인간이 빠지기 쉬운 아주 쉬운 방탕한 것입니다. 첫째는 양에 대한 탐닉입니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살이 찝니다. 거울을 보면 너무 싫습니다. 그런데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계속 먹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먹습니다. 그리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토해버립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가운데 여러분 중에 가책을 느끼는 분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나쁜 것입니다. 제가 한창 살이 쪘을 때 지금보다 16kg이 더 나갔습니다. 모든 것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당뇨, 혈관, 혈압 다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16kg을 뺐습니다.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모든 건강은 죄의 상태를 보라고 했습니다.
중국 역사의 황제가 608명이었다고 합니다. 오래 산 사람이 몇 명되지 않고 모두 일찍 죽었습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이냐면 여자와 술, 음식, 세 가지 때문입니다. 운동은 하지 않고 계속 퍼먹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죽어갑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미각을 너무 맛있는 것을 찾으면 결국은 인간에게 파멸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무엇인가 아주 비인간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냅니다.
제가 중국에 처음 와서 들었던 잊혀지지 않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외계인이 중국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북경을 찾아왔습니다. 그랬더니 북경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너희 나라 주석은 누구니?”, 그리고 외계인이 상해에 갔더니 “너희 나라에서 무엇을 갖다가 팔면 장사가 잘 되겠니?”, 그리고 이 외계인이 마지막으로 광동을 갔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고 요리를 했다고 합니다. ‘외계인이 무슨 맛일까?’
저는 중국에 와서 대접 받는 음식 중 제일 맛있는 것이 베이징카오야 입니다. 여러분 이게 언제 생겨난 것인지 아십니까? 주후 6세기 남북조 시대에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먹는 이런 북경 오리요리 같은 요리방법은 명나라가 남경을 수도로 정한 다음에 생겨난 요리법이라고 합니다. 민가에서 오리를 요리해 먹는 방식에 화덕을 굽는 과정을 더하면서 생긴 방식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베이징에는 19세기 때 말 청나라 때 개정한 친시더가 있습니다. 십여 년 전에 그 식당을 방문했습니다. 그때까지 손님들이 먹은 오리가 1억 마리를 돌파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1억이 얼마나 큰 숫자인 줄 아십니까? 스무 살 때부터 세기 시작해서 60세까지 세어도 다 세지 못하고 죽는 수가 1억이라는 수입니다. 그런데 그 맛있는 오리 뒤에는 아주 비인간적인 사육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리가 새끼를 까면 그 새끼를 즉시 아주 좁은 통로에 기릅니다. 움직이지 못하게 키웁니다. 운동을 하면 살은 살대로 기름은 기름대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움직이지 못하니까 기름이 많이 끼면서 맛있는 오리가 됩니다.
제가 청나라시대의 음식문화에 대한 책에서 읽은 글입니다. 돼지고기 요리를 아주 즐겨하는 부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부자들은 돼지 새끼를 낳자마자 젊은 엄마에게 모유를 주어서 먹이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돼지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그것을 잡아서 먹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어졌습니다만 여름이면 개를 잡아서 영양을 보충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도 시골에서 개를 잡을 때 목을 매달거나 칼로 찌르는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개가 맛이 없다고 합니다. 좁은 골목에 개를 몰아 놓고 사람들이 때려서 죽입니다. 그래야 고기가 맛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인간의 탐욕이라는 것이 끝이 없다고 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가 거위간입니다. 그것도 그냥 거위를 잡아서 간을 빼는 것이 아닙니다. 거위를 죽이기 전에 마구 찔러서 고통을 끝없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위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몸에서 아드레날린을 쏟아 냅니다. 그리고 간이 붓게 됩니다. 그때에 잡아서 간을 꺼내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동물들을 괴롭힐까요? 좀 더 맛있게 먹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 수 있겠습니까? 동물을 죽여서 그 음식을 먹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는 동물도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적인 입장은 무엇일까요? 극단적인 금욕주의도 아니고 방탕주의도 아닙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음식을 즐거워 할 수 있는 인간의 경험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만을 하나님이 먹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음식을 먹을 때에 어떤 맛을 느끼는 것을 죄악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음식이 우리에게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에 먹어야 한다는 것은 올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한 덩어리의 빵과 한 사발의 죽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그 수많은 양념들이나 향신료, 기호품들이 다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그것을 먹고 기뻐하는 것만을 위해서도 기꺼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누리는 것은 건강을 해치지 않는 한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건강이 아주 나빠졌을 때 한 끼 식사만 아주 맛있게 하고 나도 힘이 솟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지나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즐기는 것을 절제 하는 것입니다. 음식의 맛을 즐기는 것은 자유이지만 지나치게 탐심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조금만 지나치면 건강을 해치게 되고 조금만 자유로워지면 방탕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욕심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밤늦게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가다 보면 사람들이 길거리에 죽 앉아서 맥주를 마십니다. 그리고 거기에 닭을 튀긴 것들이 한바구니 있습니다. 그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치맥’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쌓아 놓고 먹습니다. 핵심을 말씀드리면 미친 짓입니다. 그 밤에, 그 맥주를, 그 칼로리 높은 것을 먹고, 튀긴 닭을 뱃속에 잔뜩 집어넣고 잡니다.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립니다. 닭의 귀신이 나타나서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속에서 음식이 소화를 다 하지 못했기 때문에 썩습니다. 그래서 가스가 되어서 나옵니다. 그리고 피 속에 스며들어서 온 몸을 돌아다니면서 그 가스를 퍼뜨립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속이 붓고, 얼굴이 붓고 머리가 터지도록 아픕니다. 그리고 심각한 것은 배가 이만큼 나오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언제 나오나? 점점 커집니다. 잘못된 생활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죄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좋은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오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습관이 되면 그 시간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맥주는 잘 마시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더울 때 시원한 콜라 한잔과 맛있게 따끈따끈하게 구운 치킨을 먹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젊은이들은 “음, 맛있어.” 그 순간에는 너무 즐겁습니다. 그러나 아침에는 늘 후회합니다.
그래서 식생활의 방탕으로 미끄러지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저에게 묻습니다. “목사님, 저는 체질적으로 고기가 없으면 못 살아요. 그런데 의사선생님은 먹지 말래요. 어떻게 해요?”, 그래서 저는 괜찮다고 합니다. 그 대신 딱 4개만 먹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젓가락을 놓고 “아, 많이 먹었다. 충분히 먹었다. 나는 또 먹고 싶으면 내일 먹을 거야.”하고 딱 내려놓는 것입니다. 접시를 밀어 놓습니다. 그리고 야채를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문제는 결심입니다. 신앙생활과 너무 똑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고 싶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도 너무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것을 했을 때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생길까, 그리고 이것이 나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줄까’ 그러고 나면 너무 하고 싶지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만 둡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먹고 싶다고 맛있으니까 하고 퍼먹으면 그것은 진정으로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음식을 먹으면 나에게 어떤 결과가 올까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매우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또 하나의 도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시며”라는 기도는 “우리가 기꺼이 노동을 하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나 스스로 노동을 해서 벌수도 있고 능력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구제를 통해서라도 받을 수 있습니다.
옛날 러시아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입니다. 저의 선배 한 사람이 러시아에서 선교사로 활동을 했습니다. 러시아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 한 명이 매일매일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너무 가난합니다. 저에게 돈이 필요합니다. 저 좀 도와주세요. 하나님 52루블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라고 엉엉 울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며칠을 기도했는데도 이상하게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누군가 문을 두드렸는데 누군가하고 문을 열었더니 KGB경찰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지갑에서 52루블을 꺼내서 줬습니다. “내가 여기를 순찰하면서 들어보니까 네가 매일 울면서 52불을 달라고 네 하나님께 기도를 하던데, 여기 동네가 내 구역이야. 내 구역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이 정부에 들어가면 내가 문책을 당한단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 대신 줄 테니까 이제 제발 기도 좀 하지 마라.” 하나님이 이런 방법으로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몸과 노력을 사용해서 자기에게 필요한 양식을 스스로 노동으로 얻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주변에는 일평생 다른 사람의 도움이 아니면 양식이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교회와 국가는 열심히 돌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노동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그 고통을 감당하면서 도움을 받지 말고 스스로 조달을 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자신이 충분히 벌 수 있으면서도 그 고통이 싫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영혼의 활력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진취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얻어먹는 맛있는 음식보다는 내가 스스로 노동해서 벌어먹는 아주 간단한 음식이 훨씬 더 맛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모범을 보여준 바와 같이”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오히려 노동 후 남은 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훨씬 더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열심히 노동하고 정당하게 물질을 얻을 때에 우리가 먹고 남은 것이 이웃에게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넘쳐서 교회로, 교회에서 넘쳐서 또 다른 교회로, 또 다른 교회에서 넘쳐서 불신자들과 이교도들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사는 존재인 것입니다. 결핍 속에 있을 때에는 염려와 근심 때문에 속을 썩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풍요롭게 해주실 때는 방탕과 탐욕으로 마음을 더럽힙니다. 그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는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만 그런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이웃들이 그럴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 각자에게 다른 능력과 다른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언제나 승리한 사람이 있으면 패배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진정한 인간의 사랑은 그런 경쟁에서 진 사람을 멸시하며 짓밟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긴 사람이 쓰러진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래서 우리의 이웃들을 돌아봅시다. 그리고 소명을 느낍시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법시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시다. 돈을 벌어서 남을 줍시다. 많이 배워서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해줍시다.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그 재능으로 없는 사람들을 섬깁시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