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맺어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2-2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아마도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는 현실적인 가장 큰 조건 가운데 하나는 결혼일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행복하려고 결혼을 하지 불행해지려고 결혼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결혼 때문에 불행해졌노라고 고백을 합니다. 기차가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철로를 필요로 하듯이 결혼이라고 하는 기차도 결혼의 원리라는 철로 위에서 달릴 때에 지정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결혼 제도를 제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남녀를 창조하셔서 첫 번 결혼식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류의 결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이 첫 번째 결혼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은 아주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II. 결혼과 사랑의 원리
우리는 바로 그 속에서 결혼의 가장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부부가 사랑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결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리를 사랑으로 삼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면 결혼과 사랑의 원리가 어떤 것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첫 번째 가정을 만드시기 위해 행하신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창조인데 남녀를 먼저 창조하신 것입니다.
A. 한 몸으로 창조됨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한 몸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셔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첫 번째 사람을 만드십니다. 여기에서 흙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아파르’()인데 사실은 ‘먼지’나 ‘티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인간의 육체가 원래 존귀한 것이 아니라 티끌과 같은 것으로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의 육체는 원래의 형태였던 흙이나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아담을 흙으로 빚으신 후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창조 행동입니다. ‘후’ 하는 창조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을 만드셨고, 그 영혼을 육체와 결합시키심으로써 한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배필인 여자를 지으실 때에는 또 다른 흙이나 먼지로 육체를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두 번째 사람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남자를 잠들게 하심으로 그의 갈비뼈를 취하여 그것을 재료로 여자를 만드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놓고 하나님이 남성을 먼저 창조하셨고 우월하게 창조하신 증거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왜냐하면 남자는 기껏해야 흙 혹은 먼지로 창조되었지만 여자는 그것보다 훨씬 고급 재료인 인간의 살과 뼈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이 한번 남자를 창조하시고 상당한 시간이 흐르게 한 후 여자를 만드셨으니 남자라는 시제품에 이어서 여자라는 정품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래도 새로 만든 제품이 옛날에 나온 제품보다 훨씬 더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우스갯소리를 해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완성적인 존재다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남자의 몸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로 만드셨는데 이는 부부가 원래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남녀는 일정한 연령에 이르게 되면 결국은 자신의 본래의 한 몸을 찾아가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이성을 찾아가는 인간의 감정입니다.
하나님이 사지백체에 많은 살과 뼈가 있는데 하필이면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창조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매튜 헨리라는 주석가는 이 부분을 그림같이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남자를 짓밟고 지배하도록 머리의 뼈도 아니고, 지배 받고 짓밟히도록 발의 뼈도 아닌 남자의 보호를 받도록 품 가까운 곳에서,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결국 하나님이 그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 여자를 이끌어 아담에게로 데려오셨을 때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표현은 히브리 문학에서 대치할 수 없는 최고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하와의 창조는 아담의 분신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한 몸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는 즉시 알아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였으니 이는 그 여자를 향한 남성의 고백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남성을 향한 그 여자의 고백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B. 사랑으로 맺어짐
결혼은 이처럼 하나님이 만드신 한 짝이 한 짝을 찾아가는 것인데 이것은 사랑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관계,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남편과 아내를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지성으로 이해하고, 의지로써 그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이해하며 다스리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습니다. 그러나 인간 불순종함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충만한 사랑이 고갈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관계도 깨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는 자신의 몸과 뼈 중 가장 소중한 존재였던 이 아내가 죄가 들어온 후에는 함께 있게 하셔서 괴로운 존재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는 이처럼 깨졌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혼인의 원리를 지속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부부들이 함께 혼인하여 자손을 낳고, 그 자손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세계를 가득 채우게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 우리 눈앞에 펼쳐진 불행한 부부의 모습은 죄의 비참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타락하였고 인간 속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마는 이 사랑의 원리는 여전히 결혼 속에서 지속됩니다. 그래서 이 원리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행복하고 복된 가정을 이루지만 그 원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정은 비극과 불행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도 그것이 올바른 사랑인 것만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차고 이성을 알 때가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서로 사랑을 하기 위해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그냥 저절로 되는 사랑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에 있어서 사랑의 원리라고 하는 것은 단지 그렇게 되는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에 있어서 사랑은 결혼이 성립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립하고 난 후 그 결혼 생활을 지속함에 있어서도 여전히 그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결혼에 있어서 사랑의 원리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사랑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사랑이지만 결혼한 후에는 사랑이 될 때도 있지만 해야 할 때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서로 사랑하고 깊이 서로를 의지하는 관계를 일평생 동안 지속해 가야 하는데 그것은 언제나 끊임없는 자기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결혼할 때에 추호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결혼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소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 되기 때문에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혼을 하고 난 후 일생동안 서로 사랑하며 끝까지 서로를 만났기 때문에 행복했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일까요?
어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고 계셨습니다. 부부는 금슬이 매우 좋지 않았고,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상처를 많이 입었습니다. 이혼은 할 수 없고 해서 그냥 힘들게 살았는데 마침 할아버지가 죽었습니다. 할머니는 ‘이제야 이 모든 멍에를 벗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구나.’ 안도의 숨을 쉬며 슬프지 않은 마음으로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장례예식이 모두 끝나고 이제 그 관을 밧줄로 매어서 아들과 아들의 친구들이 들고 장례식장을 떠날 때의 일이었습니다. 조심해서 관을 들었어야 되는데 좀 덤벙대고 관을 들고 나가다가 관 모서리가 기둥에 쿵하고 부딪혔습니다. 이 충격으로 할아버지는 깨어났고 그 후로 10년을 더 살았답니다. 할머니는 참 힘든 10년의 세월을 추가로 보내야 했고, 10년 후에 할아버지가 정말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두 번째 장례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장례식 절차를 모두 끝내고 관을 들고 장례식장을 떠나려고 할 때 할머니가 외쳤습니다. “기둥! 기둥! 기둥을 조심해라!”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남편이 아침에 허겁지겁 출근을 했는데 아내가 청소를 하다가 보니 떨어져 있는 남편의 지갑을 발견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이 인간이 나 몰래 돈을 얼마나 꿍쳐가지고 다닐까? 혹시 지갑 구석에 꼬깃꼬깃한 100만 원짜리 수표라도 몇 장 가지고 다니는 걸까?’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지갑을 딱 폈는데 젊은 여자 한 사람이 활짝 웃는 사진이 들어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그 사진의 주인공은 젊었을 때의 본인 사진이었던 것입니다. ‘아니, 이 무뚝뚝한 사람이 내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니다니…….’ 아내는 감동을 했습니다. 남편에게 지갑을 두고 갔노라고 문자를 하고 난 후 저녁상을 잘 차려놓고 남편을 기다렸습니다. 함께 맛있게 밥을 먹고 후식까지 다 먹은 후 아내는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내 사진 가지고 다녀?’ ‘그럼’ ‘언제부터 내 사진을 가지고 다녔어?’ ‘결혼하고 한 1-2년 지났을 때부터 줄곧 가지고 다녔지’ ‘그래? 내 사진을 보기는 해?’ ‘당연하지. 하루에도 몇 번씩 지갑을 열고 한참 당신의 얼굴을 쳐다보지.’ 거기에서 끝냈어야 아내의 마음에 감동의 파도가 밀려 왔을 덴데 아내는 더 큰 쓰나미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날 쳐다볼 때 어떤 마음이 들어?’ ‘당신의 사진을 쳐다보면 힘이 솟아나.’ ‘어떻게?’ ‘사업이 안 되거나 거래처가 속을 썩일 때, 동업자가 배신할 때,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당신 사진을 보며 생각하지. 이 여자도 데리고 15년을 살았는데 내가 무엇을 못 감당하랴.’
가끔 남편의 결점을 지적하면서 흉을 보는 아내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모자라는 부분을 들춰내며 흉을 보는 남편들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대부분의 경우에 말합니다. ‘이보게. 자네 아내가 그것까지 완벽했으면 왜 자네 같은 사람한테 시집을 왔겠나? 훨씬 좋은 사람한테 갔겠지.’ 또 똑같이 아내에게도 말합니다. ‘그것까지 완전한 남자였으면 당신보다 훨씬 괜찮은 여자에게 장가를 갔을겁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서 완성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의 어떤 결함을 볼 때 만약에 그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있다면 그 평가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그 수많은 남자들 가운데 내가 이 남자를 택했을까? 그때는 내가 잠시 정신 줄을 놓았나봐.’라고 생각하며 자신에게 호감을 보였던 수많은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 실제 살아본 남자는 지금 있는 남편 밖에 없습니다. 떠나간 그 사람도 실제로 살게 된다면 지금의 남편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텐데 우리들은 늘 그렇게 비교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드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넘치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편이나 아내에게서 어떤 결점을 발견하게 되면 ‘아, 이 사람과 살아보니까 이런 결점이 있구나. 저런 모자라는 점을 보충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이 여자의 남편으로, 이 남자의 아내로 부르셨구나.’ 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참 인간의 도리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완전한 인간이 없습니다. 한 남자가 아주 탁월한 미모의 여성을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고 칩시다. 세기의 미모를 자랑하던 탁월한 미녀들의 결혼 생활은 대부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인 즉 이렇습니다. 숨을 막힐 정도로 예쁘게 생긴 미녀들은 자라면서 누구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머리를 숙여본 적이 없어서 자존감이 매우 높습니다. 또 그런 여자를 선택할 용기를 가진 남성쯤 되면 그 사람도 물질이 있든지, 재능이 있든지, 얼굴이 예쁘든지, 능력이 있든지 상당부분을 갖췄기 때문에 도전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구혼을 하여 결혼을 한 이 여자의 높은 자존감과 누구에게도 눌리지 않으며 살아온 성장 과정들이 그 남자를 지배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만들고, 누구에게든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결혼의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또 어떤 남자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그러면 구제해 주는 셈 치고 진짜 못 생긴 여자에게 장가를 가면 행복하겠구나.’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쁘지 않은 여자는 살아오면서 늘 존재감이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치이고 살았기 때문에 마음에 상처도 많고 선의도 선의로 해석을 못하며 오해도 많이 하고 고집도 아주 셉니다. 결국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이유는 아주 한정돼 있지만, 불행해 질 수 있는 이유는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모두 나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가 들어와서 망가진 인간의 모습이고, 그 망가진 모습이 숨김없이 모두 드러나게 되는 관계가 바로 부부관계입니다. 부부관계가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관계라면 한 30년쯤은 숨기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부는 살을 맞대고 24시간 말과 행동과 모든 것을 보면서 함께 살기 때문에 서로에게 자신을 숨기거나 감출수가 없습니다. 정상적인 부부 관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남녀가 서로 만나서 사랑을 하고 한 가정을 이루어 봄으로써,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어떠한 완성도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가장 잘 가늠하게 됩니다. 결혼과 함께 맺어지는 시댁, 그리고 처가와의 관계, 거기서 사은품처럼 따라온 많은 또 다른 관계들, 그 속에서 태어나는 자녀들, 그들과 맺는 관계,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라고 하는 이 인간 존재가 누구인지를 꺼풀처럼 모두 벗기며 숨길 수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니 한 사람의 사람됨만큼 남편이 되고, 또 그만큼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고, 자식이 되면서 우리는 일평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C. 완성으로 나아감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남에게 베푸는 것 같지만 남에게 베푸는 그 사랑이 메아리처럼 휘돌아 자기 자신에게로 회귀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희생하며 사랑할 때에 최고의 수혜자는 그렇게 사랑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국 참된 사랑은 항상 자기 부인과 죽음을 동반하는 사랑입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사랑하는 것은 자기 사랑이지 남을 향한 사랑이 아닙니다. 도저히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지점까지 왔을 때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랑이 필요한, 때로는 그렇게 사랑을 해줘도 그것이 사랑인지도 모르는 그 불쌍한 사람을 향하여 베푸는 그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고, 그래서 모든 사랑다운 사랑에는 항상 아픔을 동반하게 마련입니다. 한 인간의 사랑함은 인간 자신을 넘어설 수 없고, 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된 것만큼만 사랑하는 것이니 그 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깊이 있게 완성하는 것은 한 인간이 사람으로서 완성되어 가는 과정과 동일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아마도 짧으면 7년, 한 10년 전쯤 가정 시리즈를 설교하다가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후 젊은 부부가 아이 하나를 뒤에 태우고 집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투덜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우리 목사님은 왜 그런 설교를 하시는 거야. 우리 믿는 사람 중에 이혼을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것도 주일 예배에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를 저렇게 힘차게 설교 하시다니. 아, 정말 오늘 예배 힘들었어.’ 그러자 옆에 있는 아내가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생각한 적이 없지만 나는 많이 생각했거든.’ 결혼생활에 있어서 행복하다 하는 이 느낌은 다분히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입니다. 남편은 부족함이 없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루어가고 있다고 믿어도 아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고, 정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결국 결혼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불찰은 이 사랑의 원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목숨을 건 사랑입니다.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경우에만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이 여자를, 이 남편을 나의 배우자로 주셨으니 내가 이 여자를, 이 남자를 끝까지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내가 받은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원리를 따르는 믿음입니다.
아프지 않은 사랑이란 없습니다. 상처뿐인 인생을 살아온 사람의 마음속에는 누군가로부터 절실하게 사랑을 받은 기억이 마음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은 항상 아픔을 동반한 사랑이었고, 그 사랑 때문에 자기 자신이 매일매일 죽는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게 부모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고, 아내일 수도 있고, 친구일수도 있고, 동료일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랑은 말과 혀로 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독생자를 주셨고, 그 독생자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임을 당하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아 태어나신 인간 예수의 죽음이었고, 그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영혼에 참 생명을 주기 위한 죽음이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편지는 피로 쓰인 편지였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모든 종류의 인간 사랑은 결국은 희생과 끊임없는 자기 부인을 동반해야 되는 사랑임을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부족을 깨닫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끝까지 사랑하려고 몸부림쳐 볼 때에는 비로소 그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런 사랑을 하기에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과 끊임없는 자기완성의 길을 택함으로써 그는 한 사람으로써 인간성을 완성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남을 사랑하며 완성되어 가는 인간성의 최고의 수혜자는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깨달으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모자라는 존재인지를 스스로 자각 하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은 비로소 그렇게 아내와 남편을 사랑할 진정한 용기와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가 선포되던 어느 해 주일이었습니다. 한 부인이 설교를 들으며 주님을 깊이 만나 회심을 하였습니다. 불신자였던 그가 교회를 찾아서 우연히 예배당에 들어와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라는 설교를 들으며 회개를 했고, 그녀는 남편과의 이혼을 앞두고 있는 사실상 별거 상태의 주부였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고 남편을 불렀습니다. 남편은 또 이혼을 재촉하는 줄 알고 아내 앞에 서 있었고, 아내는 처음으로 남편 앞에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더니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남편도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이제껏 우리의 불행한 결혼 생활이 모두 당신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알고 보니까 내가 잘못한 거였어. 여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그리고 아내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그 얘기를 들으며 설마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그걸 이제야 알았냐? 바보야. 우리 불행한 결혼 생활의 모든 원인은 오직 너 때문이었지.’ 이 말 대신 오히려 남편은 함께 울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빌 수 있는 힘, 다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때 사랑하게 하는 힘은 우리 자신에게서 자가 발전되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났도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사랑을 의지하지 않고는 우리가 누구도 끝까지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과는 다른 어떤 사람과 함께 살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같이 하며, 그를 끝까지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어떻게 쉬운 일일 수 있겠습니까? 그는 내가 아니고 나는 그가 아닌데 그것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일도 우리에게는 쉽지 않는데 하물며 남을 사랑하는 그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 수 있겠으며 더욱이 끊임없이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준 경우에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정말 죽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살려고 태어난 것이고,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남편과 아내를 마주 대하며 또 나와 관련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인생이 그게 우리 앞에 놓인 삶이니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나와 하나님께 앞에 예배드리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께로부터 오는 끊임없는 사랑과 은혜를 받으면서 우리는 비로소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아가고 거기에서 오는 밝은 지식의 빛으로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깨닫습니다. 자신의 부족을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서 배우게 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동안에 우리가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인간으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혼인제도의 지혜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이런 길은 남편과 아내에게 결코 쉬운 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는, 그리고 다시 일어나 함께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우리를 통해 인간의 도리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불완전한 인간이 또 다른 불완전한 인간을 향해 완전한 사랑을 꿈꾸며 함께 살아가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말씀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는 부모의 모습을 배우며 아이들은 그 사랑의 원천이 신앙에서 온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고 남편을 끝까지 용납하며 사랑하는 것은 곧 자신의 인생에 대한 예의입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길이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 자신이 ‘이미 이 남자를 사랑했다, 혹은 이 여자를 사랑했다’라고 자신하는 대신 온전한 사랑을 위해 그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끊임없이 하나님께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열고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할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우리 자신을 버리고 그 사랑으로 남편과 아내, 이웃과 형제들을 사랑하며,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인간으로 태어난 소명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 성공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을 자랑할 수 없으니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크기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아내와 남편을 사랑함에 있어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어 달라고 매달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