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사랑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녹취자: 문미경
오늘 본문의 말씀에 담고 있는 성경은 골로새서입니다. 골로새서에는 우주적인 기독론이 담겨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타락한 세상을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어떻게 성도들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매일 매일의 삶은 그저 한 사람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이 세계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는 일에 이바지해야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가정의 질서와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이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정을 통해서 사회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질서가 필요하고 또 사랑도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덕목을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과 괴롭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삼십오 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다 설명할 수 없고 오늘 읽은 성경의 절반인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까지만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라고 나옵니다. ‘사랑하라’ 라고 우리말 성경에 번역된 이 말씀이 원래의 신약성경에 기록된 언어 희랍어에는 ‘아가페테’라고 나옵니다. 즉 ‘아가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 라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는 가정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성경이 기록됐던 로마시대의 사회와 아내의 위치에 대해 잠깐 생각을 해보는 것이 좋을 겁입니다. 당시 이 성경이 기록되었던 로마 시대에는 이 거대한 로마제국이 하나하나의 가정을 단위로 해서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려 이루어진 국가였습니다. 로마는 한 국가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가정의 질서와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가정의 질서를 세우는 일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전통적인 연구에서 로마 사회는 많은 가족들이 모여 함께 생활하는 대가족적인 공동체로 이루어진 사회라 생각했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로마사회는 그렇게 획일적이지 않고 작은 가족을 단위로 하고 남녀의 사랑을 매우 중시하는 그런 요소들도 많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사회가 남존여비의 사회였음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남성은 힘과 권력으로 가족의 질서를 잡고 공동체를 규율하고 그래서 아내와 자녀들을 복종시키고 특별히 자녀들을 시민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건전한 사람으로 교육시키는 일에 대한 책임을 아내와 함께 맡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역할은 소극적이기 때문에 조용히 침묵할 줄 알고 가사에 전념하고 겸손하고 순결을 지키는 것이 아내의 덕목이라 여겨졌고, 아내의 활동영역은 집 안이었기 때문에 울타리 밖에 공공장소에 나아가 얼굴을 보이고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남편에게 매우 수치스런 일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오늘날 학회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당시 로마시대의 로마사람의 평균수명이 25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빨리빨리 시집가고 빨리빨리 아이 낳고 빨리빨리 죽던 사회였습니다. 특별히 여성들은 그 피해의 당사자들이었는데 특별히 가임기에 있는 여성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로마의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이 그러한 것보다는 훨씬 더 여러 번 결혼을 하고 다른 여자와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로마는 위대한 정치적인 업적을 이루었지만 문화적으로는 헬라헬라 즉, 헬라스 혹은 헬레니즘에 영향을 받던 사회였습니다. 우리말로는 사랑이라는 말이 하나밖에 없지만 희랍사람들에게는 이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 네 가지나 되었습니다. 남녀 간의 뜨거운 이성적인 사랑은 에로스라고 불렀고, 형제간의 우애는 필리아라고 불렀습니다. 부모자식간의 천륜적인 사랑과 정을 스톨게라고 불렀고 아가페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이것은 인간에 대한 신의 무제한적인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당시 로마사회의 문맥에서 보면 남편에게 아내는 결코 아가페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시 남편들은 아내를 얕잡아보고 위협하고 자신의 힘과 권력으로 강박해서 자기의 수하에 복종시키고 가정에 머물며 가정에 헌신하는 여자로 만드는 것이 남편의 덕목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는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면서 바로 이 무한히 조건 없이 베푸는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으로써 자기 아내를 사랑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당시 로마의 질서에 대한 항거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통용되고 있던 아내와 남편 사이의 비성경적인 복종의 질서에 대한 하나의 복음적인 반항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남자들은 말합니다. ‘봐라 바로 앞 절에 보면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나오지 않느냐, 그러니까 너희들이 남편들에게 복종하여야 하지만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입니다. 반면에 아내들은 반대의견을 합니다. ‘사랑을 해줘봐라 복종 안 할 여자가 어디 있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남편들에게 여자를 복종하라고 명령하고 있고 그 뒤편으로 내려가 보면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우리말로 보면 복종은 훨씬 더 노예적이고 강제적인 것처럼 보이고 순종은 인격적이고 자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의미의 번역이 바뀐 겁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는 이 명령은 ‘아꾸오’라는 단어인데 잔 말 말고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이해하던지 못하던지 노예가 주인에게 복종하듯이 그렇게 자녀들은 부모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이 단어는 ‘휘포타스’라는 단어인데 하나님이 정해진 질서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의 복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남편들이 우월감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야기합니다. 남자는 하나님이 직접 흙으로 만드셨고 여자는 그 갈비뼈로 만드셨기 때문에 열등하지 않냐고 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원재료가 다르지 않습니까? 흙이 더 고급입니까? 사람의 갈비뼈가 더 고급입니까? 모든 제품이 신제품이 좋은 것이지 옛날제품이 좋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사도는 새로운 질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수립되어야 할 온전한 가정의 모습을 이야기함으로써 너희들이 그런 삶으로서 복음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고 천국이 어떤 나라인가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을 형이상학적으로 본질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것은 영혼의 경향성 입니다. 즉 사랑은 타자와 관계를 맺고 이미 있는 관계는 심화시키려고 하는 마음과 정신의 경향입니다. 이런 영혼의 경향이 마음속에서 성향이 되는 것입니다. 현상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끊임없는 인간의 관계성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감정덩어리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심각한 오해입니다. 사랑은 오히려 이성과 감정 사이에 걸쳐있는 전 인격적이고 전 존재적인 정신의 작용인 것입니다.
동양철학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4단 7정론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이성에 속한 4단, 인 의 사단의 기능이 있고 일곱 가지 정의 기능이 있어서 이성적인 기능과 감정적인 기능이 조화를 이루면서 인간으로서의 다양한 삶을 영위해가는 것입니다. 성리학에서는 인,의,예,지를 얘기하지만 이것 자체를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이 인, 의, 예, 지에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인간의 마음속에는 네 가지 중요한 사단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측은지심(惻隱之心), 이것이 바로 잘 발동 될 때에 단이라고 하는 것은 끝자락을 의미하는 것인데 인간의 마음의 끝자락에서 그것이 불붙듯이 탁 터져서 실천으로 실행되었을 때 ‘인’..즉 사랑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수오지심(羞惡之心)은 부끄러운 것을 보고 수치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마음 끝에서 불붙어 실천이 될 때에 의를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양지심(辭讓之心)은 무언가 분에 넘치는 것을 거절할 수 있는 겸손함입니다. 이것을 이루게 되었을 때에 예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옳고 그름이 섞여있을 때 그것을 정확하게 가려내서 판단할 때에 거기에서 그 마음이 시비지심(是非之心)이고 이것이 덕을 이룰 때에 곧 지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성의 작용이 감정에 영향을 미쳐서 온전한 균형을 이룰 때에 진정한 사람의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을 본겁니다.
제가 이 왜 이 귀중한 시간에 동양철학 얘기를 하냐하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 아가페 사랑이 감정의 덩어리가 아니라 이렇게 이성과 감정 사이에 걸쳐있는 전존재적인 정신의 작용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부부사이에 결혼하기 전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합니다. 그때에는 서로 좋아하니까 결혼했지 죽어도 싫은데 결혼하는 예는 희귀합니다. 한창 연애에 빠져서 콩꺼풀이 씌웠을 때는 그 사랑은 하는 사랑이 아니라 되는 사랑입니다. 되는 사랑은 감정에 기초에 있기 때문에 물이 흘러가듯 흘러갑니다. 특별히 노력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결혼 한 지 십 오년이 지났는데 자매들이 남편들의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고 남편들이 멀리서 오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진다는 여성은 몇 사람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남자는 못 만났습니다.
수반 물리학이라는 학문이 있는데 우리 인간의 감정과 정서의 체계가 이 속에 분비되는 인체의 내적분비물과 관련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 수반 물리학에서는 인간의 사랑의 원인도 도파민이라는 물질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보는데 그 유효기간이 18개월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아내의 임기를 18개월로 하고 18개월마다 다른 사람과 살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사랑은 될 때도 있지만 대부분 결혼하고 나면 되는 경우도 있지만 해야할 때도 많다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둘이 어깨동무를 하고 지는 낙조를 보면서 바다를 감상하는 사랑이지만 결혼은 둘이서 작은 배를 타고 저녁노을이 지는 바다의 파도를 헤치며 어느 항구로 가야하는 삶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혼하기 전에 너무 어마어마한 기대를 가지고 결혼을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쿨 하게 때가 됐으니까 가자..그리고 살자..그렇게 결혼하는 게 오히려 행복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가페와 까리따스의 사랑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기의 죄인 됨을 깨닫고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자기같이 쓸모없는 인간도 무한히 사랑하시고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아가페사랑입니다. 이런 아가페 사랑을 받고 나면 그 아가페 닮은 사랑이 생겨납니다. 그것을 라틴어로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순결한 사랑, 지순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 것에 대한 반응으로써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생겨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인간과 교회와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도 함께 생겨나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전달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희랍어로는 아가페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오늘 ‘남편들아 네 아내들을 사랑해라’ 라고 할 때 아가페테..라고 명령어동사를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은 그런 사랑으로 네 아내를 사랑하라’ 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만 흙으로 지으셨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그 한사람에게서 태어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흙으로, 또 한사람을 흙으로 짓지 않고 한 사람을 흙으로 지어 그 코에 생기를 부어 사람을 만드신 후 그 몸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고, 그 이후부터는 그 두 사람이 한 몸이 됨으로 모든 인류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셔서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실 때에 아담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이것은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사람들에게 고유한 표현으로써 더 베스트.. 영어로 더 초이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살과 뼈 중에는 좀 아쉽지만 한줌 정도 떨어져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뼈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몸에는 눈곱만큼도 떨어져도 절명하는 그런 종류의 살과 뼈가 있습니다. 바로 여자가 남자에 대해서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그런 존재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싶었던 겁니다. 흔히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로라 하는 고백이 부부간에만 필요한 고백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인류가 서로를 향해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을 사람입니다. 자녀가 부모에 대해서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그리고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가인과 아벨도 서로를 향해 이는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했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모든 인류의 통합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의 완성은 사랑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그렇게 완전한 나라가 되기까지 미리 이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세계가 이런 아름다운 세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어둠이 없이는 별이 빛나지 않습니다. 빛나는 별에게 어둠은 기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사람들과의 사랑이 깨지고 망가지고 가정이 찢어졌기 때문에 이것이 슬프고 가슴 아픈 것이지만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가정이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는 아주 훌륭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사랑해야 될지를 에베소서 5장에서 이렇게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를 주심과 같이 너희 남편도 아내를 그렇게 사랑하라..’라고 말입니다. 이 기준에 만족 시킬 수 있는 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떻게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남녀 부부간의 사랑은 둘이 서로 즐겁게 살기위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주신 목적과 일치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를 주심 같이 그렇게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것은 교회를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주름 잡힌 것이나 티 없이 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구속을 위해서 희생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돌보시고 온전케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결합 중 가장 더러운 모습이 뭐냐 하면 서로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희생위에 군림하는 것, 남편을 이용하는 것, 어떤 방식으로든 이런 식의 부부의 삶은 아주 추악한 것입니다. 추악한 것이 머리끄덩이를 잡아땡기고 싸우고 이혼을 하는 것만 추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 추악한 것입니다. 결혼하고 나서 아내를 보면 부족한 것이 보입니다. 남편도 그런 게 보입니다. 거기에 소명을 느끼는 게 사랑입니다. 저 여자가 저렇게 모자라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붙여주셔서 저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도록 나를 남편으로 선택하셨구나..그리고 아내도 남편에 대하여 그렇게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그런 결점을 볼 때마다 미운 생각이 들고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가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무한히 교회를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가능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무한하고 완전한 사랑을 가진 인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혼생활 하다가 서로에 대해서 깊이 실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고 그런 시간은 꼭 필요합니다. 그런 시간이 없으면 서로를 우상으로 여기게 됩니다. 실망하는 일은 꼭 필요합니다. 그런 일은 여러분이 겪었으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참 감사한 것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런 사랑의 과정을 통해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서 내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예화) 결혼하고 34년이 되는데 마지막으로 말다툼을 한 게 한 20년 쯤 됐습니다. 우린 머리끄덩이를 잡거나 뭘 집어던지면서 싸운 적은 없습니다. 싸워봤자, ‘왜 이러냐 내 생각은 다른데 왜 고집을 부리냐..’ 정도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수 있냐 하면 아내의 아름다움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게 되면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솔직히 세상의 절세의 아름다운 아내일지라도 한번 성질이 부리면 얼굴이 악마처럼 보이는데 그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하게 된다면 그게 얼마쯤 가겠습니까? 미국배우가운데 탐크루즈의 옛날 아내 니콜키드만은 남자들이 쳐다보기만 해도 황홀해질 정도로 이쁜 여자지만 헤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아름다움만 가지고 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태어나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한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그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부부의 사랑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내를 아내의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 유효기간이 얼마나 가겠으며 그 남편의 멋있음 때문에 능력 있음 때문에 사랑한다면 늙어가면서 그 멋있음도 사라지고 은퇴하고 나면 능력도 끝나게 됩니다. 쓰레기처럼 관계가 아무것도 아닌 관계가 됩니다. 항상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되 그리스도 때문에 남편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 될 때에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악하고 나쁜 인간인데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놀랍게 사랑하셨는지 생각하면 그 은혜로 그것을 이기면서 아내를 사아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특별히 아내를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살아가는 동안에 그 결점과 모자라는 것들이 나의 희생과 섬김을 통해서 온전하게 되어갈 때 그 사람이 진정으로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아내가 정말 못되게 굴 때가 있습니다. 정말 못된 아내도 많습니다. 못된 남편도 많습니다. 그럴 때에 그것을 현실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아내가 못되게 굴 때에 정말 마음에 안들 때에 그때에 선물을 하는 것입니다. 영어는 저보다 여러분이 더 잘 아시겠지만 조크라는 단어와 가십은 차이가 있습니다. 조크는 그냥 웃기는 겁니다. 가십은 웃기는 건데 웃고 나면 인간으로 하여금 뭔가 생각하게 하는 것이 가십입니다. 그런데 어떤 가십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공감을 형성한다는 것은 사회가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가십이 있습니다.
(예화) 남편과 친구들과 함께 모두 만났습니다. 그 중에 어떤 친구가 ‘어이, 이보게 지난주가 자네가 아내와 결혼하는 이십주년이 되는 주였잖아..아내에게 선물은 했어? 라고 묻자 그 사람은 아주 당연하게 그럼, 큼지막한 다이아반지를 했어..라고 합니다. 친구들이 대단하다...라며 칭찬하자.. 한 친구가 ‘근당신 아내는 몇 년 전부터 이십 주년 선물로 짚차를 받고 싶다고 했었잖아. 왜 다이아를 선물했어?’라고 묻자, 그 남편이 하는말, ‘당연하지 어디서 짚차를 가짜로 구하겠냐’ 고 대답했답니다. 남자들이 또 모여서 얘기합니다. ‘다음 달이 결혼 십 주년 아니냐? 아내에게 무슨 선물을 할 생각이냐?’ 고 묻자 당사자인 남편은 ‘우리 아내는 가정에게 속박당하기 때문에 아내를 홀로 충분히 시간을 갖고 여행을 하도록 호주로 여행 보내주기로 했어..’라고 말하자 친구들이 대단하다며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또 친구가 ‘그럼 이 십 주년엔 뭐할건데?’라고 묻자, 남편이 ‘그때 데려와야지..’라고 얘기합니다.
이런 얘기들이 남자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고 남성들을 즐겁게 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아내가 남편들에게 많은 외로움과 거리감을 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극복하는 비결이 선물하는 것입니다.
(예화) 아침에 아내와 심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면 직장을 일찍 조퇴하고 선물을 사러 다니는 겁니다. 피천득 선생님은 선물에 대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선물은 자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좀 사치스럽고 귀한 것이라도 좋다.’ 제일 썰렁한 선물이 아내에게 선물했는데 고무장갑이나 수세미 같은 것입니다. 학교 다니는 아이들에게 학용품 선물하는 것, 목사에게 성경책 선물하는 것..그런 거 사지 말고 아내가 절대로 돈이 많아도 못살 선물을 사는 것입니다. 터벅터벅 선물 사러가면서 남편의 마음에서 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 인간한테 한번 욕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웬 선물’ 하면서 막 속에서 싸웁니다. 그런 맘속에서 싸우는 모든 시간에 선물을 사러 다니면서 숨을 후..하면서 자기수양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미운 것만큼 소중한 선물을 사고 뵈기 싫은 것만큼 예쁘게 포장을 합니다. 그리고 저녁때 들어갑니다. 한편, 아내는 대판하고 나서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 6대 4정도 자기가 잘못한 것 같자, 핸드폰으로 들고 사과할까도 생각하지만 포기하고 그대로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창문을 보면 남편이 들어옵니다. ‘남편이 들어오면 또 한바탕 쏘아붙이겠지..아니면 말도 안하겠지..’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이 문을 딱 열면서..‘여보..아침에는 정말 미안했어..내가 여느 때 같으면 당신에게 그렇게 했을 리가 없는데 정말 미안해..’ 하며 선물을 줍니다. 아내가 자신이 잘못했는데 남편이 정중하게 선물을 주면서 사과하고 선물을 풀고 보니까 자기가 너무 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내는 너무 면목이 없고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게 복수입니다. 복수는 원한을 남기는 복수가 있고 원한을 남기지 않는 복수가 있는데 원한을 남기지 않는 복수를 해야 합니다. 잔인하게 복수를 해야 합니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아, 오늘 내가 이겼구나..사랑으로 이겼구나..’ 그런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일이 어려울 때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는 겁니다.
17세기 위대한 청교도 존오웬은 자기의 책속에서 신자의 커다란 죄 가운데 하나가 구원을 일상적으로 생각하거나 한 번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고난과 내가 그 피로 용서를 받으신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매일매일 나 같은 인간을 왜 예수님이 구원하셨을까..왜 좋으신 예수님이 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 피 흘리셨을까? 이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고 매일아침 새롭게 다가와야 합니다.
(찬송)
우리 죄와 강팍한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어라 하시네
그렇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 자기를 모두 버리고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그 사랑으로 아내를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고 아끼면서 살아갈 때에 그것을 극복하며 사랑하기까지 느꼈던 모든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아내가 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해가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회복해가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상에서 빛으로 맛을 잃어서 무미건조한 세상에서 맛을 내는 소금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도록 여러분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