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강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2
녹취자: 장소연
이렇게 보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지 못한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육체의 양식이 모자라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지구상에서 수없이 봅니다. 또 어느 정도 굶주리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교육의 혜택이 거의 없어서 아주 미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특별히 남녀에 대한 불평등으로 인해서 여성들이 고통을 받는 현실 등을 수없이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인간다운 생존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이 현실은 무엇인가 라는 것 말입니다. (그림 설명) 그림에 나오는 것은 2012년도로 기억이 되는데 ‘부자와 남은 자들’(The rich and the rest)이라는 특집 기사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일 없이 어떻게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 이런 지속적인 구조로 나가는지를 보여주는데, 여기에서 보면 이 사람들은 미친 듯이 살아왔습니다. 도저히 이 사다리를 가지고서는 부자들의 사회로 올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현실이 되었는지를 분석한 기사입니다. 여기에서 대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입법 로비 등을 통해서 이미 가진 자, 즉 부자들이 자기의 이익을 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육입니다. 돈을 많이 들여서 자식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켜서 가난한 집안에서 교육받은 아이들이 이 교육의 품질에 있어서 도저히 따라올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돈의 위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질 높은 교육을 통해서 자식들은 또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다시 그 자식에게 그런 혜택을 주고 하면서 부가 대물림 되게 하여 사회 지배 계층들이 완전히 구조적으로 굳어지게 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점프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 어떤 기회가 거의 없고, 있다고 해도 수백만 명에 한명 나올까 말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은 이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국은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이 기도는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는 점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모든 사람들이 누리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왜 이렇게 굶주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은가 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의 예만 보더라도 생산되는 전체 음식물의 1/7이 낭비됩니다. 그 낭비되는 음식물이 1년에 약 25조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우리나라가 중진국 이상 선진국에서 음식물을 아주 많이 낭비하는 나라는 아닙니다. 미국 같은 나라는 훨씬 더 심합니다. 2006년을 기점으로 전 세계 인구가 65억을 넘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굶주립니다. 학자들의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의 경작을 할 수 있는 땅을 새로 개척하지 않고 있는 땅만을 모두 경작해도 120억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곡식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왜 굶주리는 사람이 있을까요? 농업 국가들이 엄청나게 발달한 데이터 분석 기술을 가지고 기후와 인구증가, 식량의 수요를 예측을 해서 많이 심지 않는 것입니다. 곡물 가격의 적정선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에 식량이 항상 넘치도록 생산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게다가 생산된 곡식이나 부의 80% 이상을 상위 10%가 누리고 살고, 나머지 20%의 부를 90%의 사람이 나누어서 삽니다. 그러니까 부의 편중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쪽에서는 엄청난 물질을 소비하면서 살고, 한쪽에서는 죽도 없어서 못 사는 그런 처지가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럽에서는 생산된 곡물의 57% 소비가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짐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1kg의 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짐승에게 9kg의 사료를 먹여야 되는데 이 사료가 바로 곡식이기 때문입니다. 옥수수 같은 것들은 대량 생산하여 대부분 짐승들의 사료로 사용됩니다. 이러면서 결국 인간은 점점 더 굶주리게 된 것입니다. 제유법적 표현으로의 이 ‘양식’은 인간 전 존재의 존엄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그것을 유지하면서 살게 하는 환경들을 하나님이 끊임없이 제공해 주시도록 간청하는 기도의 제목입니다. 이와 같은 사회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 기도를 더 간절하게 구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될 것이 ‘우리에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기도가 공동체적인 기도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차적으로는 가족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이것을 좀 더 확장시키면 하나님의 모든 자녀, 혹은 교회 공동체로, 또 좀 더 확장하면 온 인류애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류에게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굶주리지 않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일용할’ 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에 필요한 양입니다. 그렇지만 이 ‘일용할’이라고 하는 것은 꼭 하루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이 기도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할 존재이고, 그런 점에서 이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하루에 세 번씩 우리가 식탁을 대하면서 그 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는 존재이고, 이 모든 것들이 주께로부터 왔으니 내가 숨 쉬고 살아있고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는 이 모든 환경과 여건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면서 살도록 주님이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하는 이 기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별로 환영받는 기도의 제목이 아니지만 그 신학적인 의미를 알고 나면 이것이 단순히 먹는 문제만이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신을 위해, 나라를 위해, 그리고 이웃과 온 인류를 위해서 그들이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도와 달라는 절실한 눈물의 기도로 이어질 수 있는 제목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