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강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1
녹취자: 장소연
예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위해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신 세 개의 기도 제목 중 마지막 기도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지이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겠습니까? 하나님의 완전한 하늘나라에서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합니다. 이 땅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삶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깊이 읽는 주기도문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 공부로서 주님 자신을 위한 기도 제목 세 가지에 대한 공부가 끝났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몇 주에 걸쳐서 제 3부라고 할 수 있는 ‘우리를 위한 기도 제목’을 공부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를 위한 간구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 그 다음에 ‘죄를 사해 달라는 기도’,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는 기도’,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첫 번째 기도인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이 기도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필요를 주목하게 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제 1부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것이라면, 2부는 하나님 자신을 위한 기도 제목이고, 3부는 우리를 위한 기도 제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기도 제목의 첫 번째가 바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할 때 도대체 이 양식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그리고 제유법적인 표현인 이 양식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공부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양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주 다양한 견해가 있었습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를 회심에 이르도록 도운 유명한 설교가요, 교부인 암브로시우스(Ambrosius)는 이 양식이 성찬의 떡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부 키프리아누스(Cyprianus)라고 하는 3세기의 인물은 이것이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소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그분의 거룩하심과 몸 안에 거하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라고 영적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도 역시 이것을 그리스도 자신으로 해석을 했는데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하늘로부터 온 떡이요,’ 요즘 우리말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밥이요, 주식, 양식이요 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영원히 계시기를 구하는 것이고, 그분과의 연합 속에서 살기를 바라는 영적인 기도다.’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교부 오리게네스( Origenes) 같은 사람도 이것을 영적인 양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특별히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의 참된 인성이 자라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영적 양식이라고 보았습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독특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그도 역시 이것을 육신의 양식으로 보지 않고 영적인 양식으로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지키고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계명으로 본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렇게 해석했던 근거는 이렇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육적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모순이 되기에 그런 의미로 지시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둘째는 이 일용할 양식을 성찬의 떡이라고 해석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반박했는데 이유는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시고’ 라고 하면 그 성찬을 매일매일 하게 해 달라는 것인데 실제로 그것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지키지도 못할 것을 기도하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셨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은 결국 매일매일 묵상하고 실천해야 하는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곧 ‘하나님, 우리가 매일매일 실천하고 살 테니까 하늘의 양식인 계명을 우리에게 주십시오.’라고 해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Chrysostomus)은 이것을 문자 그대로 보아서 육적인 양식으로 보았습니다. 일용할 양식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하루를 살기에 충분한 양의 양식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먹고 마시는 딱 필요한 그것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와 같은 사람이 이렇게 해석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는데, 이 일용할 양식 자체를 딱 하루를 살기에 충분한 만큼의 음식이라고 보았습니다. 교부 히에로니무스(Eusebius Hieronymus) 같은 사람은 어거스틴 시대 사람인데 영적이고 육적인 양식 모두를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가장 좋은 해석이 종교개혁 시대 때 나오기 시작하는데,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 삶을 위한 양식과 필수품에 속하는 모든 것이다. 곧 음식과 의복과 신발, 집, 정원, 경작지, 가축, 돈, 재산, 올곧은 배우자와 아이들, 착한 식솔들, 강직하고 신실한 통치자들, 좋은 정부와 날씨와 평화와 건강과 품격과 명예, 좋은 친구, 신실한 이웃과 같은 것들 말이다.” 요약하자면 이것은 인간다운 삶의 조건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런 말을 또 덧붙입니다. “그러나 귀금속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 갔을 때 사람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환경, 이런 것들까지 모두 이 양식 속에 들어간다고 본 것입니다. 존 칼빈도 마르틴 루터의 해석을 상당 부분 따릅니다. “여기에는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도록 간구할 뿐만 아니라 현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받기 때문이다.” 그 양식 속에는 문화적인 혜택과 같은 것들도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쾌락을 위한 것들은 들어가지 않습니다. 저같이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잘 볶아져서 그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커피도 일용할 양식에 들어가지 않을까요? 또 공부도 하니까 적당한 양의 책도 일용할 양식에 들어가지 않을까요? 그렇게 보았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양식’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복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인간다운 삶을 위한 조건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도 이런 문제를 해석함에 있어서 굉장히 폭 넓은 견해를 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면 그것은 항상 더 높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런 것 없이 주시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차와 같은 기호품이 좋은 실례인데, 그것을 마시고 뭘 더 한다든지 하는 목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먹고, 마시고, 혹은 느끼고 하면서 생각이나 정신이 쾌활하게 되어서 기분이 좋은 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의 양식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은 그 욕망이 아주 극대화되어서 많은 재화를 낭비하고 거기에 탐닉해 버린다거나 그 반대로 극단적으로 욕망을 절제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아씨시의 프란시스 같은 경우에는 일단 음식이 나오면 재를 뿌렸답니다. 모든 음식의 맛을 없애기 위해서 그랬다는데, 그런 것들은 하나님이 양식을 주신 것에 적절하지 않은 사용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제유법(提喩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문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무력으로 사람들을 짓밟는 것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제유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기도문에 나오는 ‘양식’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양식은 우리의 정신과 영혼, 육체에까지 영향을 끼쳐서 인간다운 삶을 사는 데 있어서 억압을 받지 않는,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가치 같은 것들이 짓밟히지 않는 모든 삶의 조건들을 양식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할 때 우리가 밥만 먹으면 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인 나라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균등한 기회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적인 환경, 법치적인 정치적인 여건, 이 모든 것들도 양식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신적인 것까지 채워질 때에 인간이 꾸겨지지 않은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모든 필요들을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존엄한 존재입니다. 한 사람이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표는 사람을 대할 때에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깊이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깊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에 대한 하나의 예의입니다.
세상 나라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 지위나 재산이나 용모 등으로 평가합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 이 사회가 얼마나 외적인 것으로써 사람을 평가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어떤 한 사람의 진정한 사람됨 보다는 그가 가지고 있는 외적인 것에 너무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들은 껍질일 뿐이기에 벗겨내고 그 속에 한 인간 자체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받았기 때문에 존엄한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심지어는 쓰레기 같이 죄를 지으면서 살아온 사람이라도 멸시하지 말아야 할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존엄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과 교육 속에서 살아가도록 이바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간의 사명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제유법적인 표현으로서의 이 양식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아우르는 인간 존재 전체의 인간다운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모든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어떻게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그런 존재답게 살 수 있도록 영육 간에 우리의 모든 것을 돌보아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기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