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2011-201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1-201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주기도문2 (2011.11.06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3 (2011.11.13 주일오전설교)
1. 살아계신 하나님(눅11:2) 2011.10.30 주일오전 1
2. 하늘에 계신 하나님(마6:9) 2011.11.6 주일오전 10
주기도문4 (2011.11.20 주일오전설교)
3. 하나님 우리 아버지(마6:9) 2011.11.13 주일오전 17
주기도문5 (2011.11.27 주일오전설교)
4.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마6:9) 2011.11.20 주일오전 26
주기도문6 (2011.12.4 주일오전설교)
5. 나라가 임하옵시며 1(마6:9-10) 2011.11.27 주일오전 34
6. 나라가 임하옵시며 2(마6:9-10) 2011.12.4 주일오전 44
주기도문7 (2011.12.11 주일오전설교)
7. 뜻이 이루어지이다(마6:10) 2011.12.11 주일오전 56
주기도문8 (2012.01.01 주일오전설교)
8.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1(눅11:3) 2012.1.1 주일오전 64
주기도문9 (2012.01.08 주일오전설교)
9.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2(눅11:3) 2012.1.8 주일오전 76
10.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눅11:4) 2012.1.15 주일오전 84
주기도문10 (2012.1.15 주일오전설교)
11.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 2(눅11:4) 2012.1.29 주일오전 94
주기도문11 (2012.01.29 주일오전설교)
12. 시험에 들지 말게 하소서(마6:13) 2012.2.5 주일오전 104
주기도문12 (2012.02.05 주일오전설교)
13. 악에서 구하옵소서(마6:13) 2012.2.12 주일오전 111
14. 하나님께 영광을(마6:13) 2012.2.19 주일오전 122
주기도문13 (2012.02.12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 128
주기도문2 (2011.11.06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3 (2011.11.13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4 (2011.11.20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5 (2011.11.27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6 (2011.12.4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7 (2011.12.11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8 (2012.01.01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9 (2012.01.08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10 (2012.1.15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11 (2012.01.29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12 (2012.02.05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13 (2012.02.12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14 (2012.02.19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 시리즈 1 2011. 10. 30 주일오전예배
살아계신 하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눅 11:2)
I. 본문해설
II.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A. 신이 없다고 믿는 세대
- 사상적 무신론
- 실천적 무신론
B. 존재하시는 하나님
- 세계에 가득한 하나님 존재의 증거
1. 사물의 존재방식들
- 제한적, 한정적, 충만적...
2. 충만하신 하나님
- 시간과 공간보다 크신 하나님
- 세계 아름다움의 원인: 자연+도덕
- 요한네스케플러
III. 살아계신 하나님
A. 자연적 신지식의 한계
- 지적 설계자, 자연신론적 회심자
- 핑계불가: 신존재, 율법
- 비인격체: 사랑을 가르치지 않음
B. 살아계신 하나님
- 인격, 사랑하시는 하나님
- 지성과 의지로써 관계를 맺으심
- 섭리, 간섭하시는 하나님
IV. 결 론
주기도문 시리즈 2 2011. 11. 06 주일오전예배
하늘에 계신 하나님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I. 본문해설
II. 하늘에 계신 하나님
A. 유대인의 하늘개념
- 하늘: 엔토우라노이스(복수)
- 어느 하늘에도 계심
B. 하늘에 계시다는 의미
1. 구별된 존재의 하나님
2. 거룩하신 하나님
- 존재적 초월성
- 도덕적 완전성
3. 통치하시는 하나님
IV. 결 론
주기도문 시리즈 3 2011. 11. 13 주일오전예배
하나님 우리 아버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I. 본문해설
II. 하나님-아버지
A. 아버지의 4중 호칭
- 내재적: 삼위
- 외재적: 창조, 신정, 양자
B. 하나님의 ‘아버지’ 호칭
1. 유대인의 호칭관습
2. 예수님의 아버지 호칭
3.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치심
III. “우리 아버지”
A. 잘못된 아버지 관념
B. 구속을 통한 아버지
1. 창조의 아버지를 능가함
2. 범죄를 사랑으로 갚으심
3. 가족되게 하신 예수님
4. 육적핏줄: 영적지체
IV. 결 론: 자녀로 살아감
주기도문 시리즈 4 2011. 11. 20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I. 본문해설
II. 하나님과 이름
A. 하나님의 이름
B. 성경의 이름신앙
1. 불변하시는 하나님
2. 가변적인 그 이름
3. 그 이름의 영광
III. 거룩히 여김을 받으심
A. 거룩히 여김의 두 요소
1. 무한한 위엄 앞에 겸비함
2. 도덕적 완전함 앞에 비천함
B. 완전한 의존과 사랑을 바람
C. 이 땅에서 그 이름을 기뻐함
IV. 결 론: 그 이름을 위하여
주기도문 시리즈 5 2011. 11. 27 주일오전예배
나라가 임하옵시며 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I. 본문해설
II.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
A. 하나님 나라의 개념
1. 바실레이아-말쿳샤마임
2. 하나님 나라의 핵심
- 왕권
- 하나님과 관련
- 메시야와 관련
- 영원한 인자와 관련
B. 하나님 나라의 세 차원
1. 이미온 나라: 예수님의 오심
2. 성취될 나라: 신적통치의 실현
3. 영원한 나라: 완성된 영원나라
III. 결 론: 신적통치를 갈망함
주기도문 시리즈 6 2011. 12. 04 주일오전예배
나라가 임하옵시며 2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I. 들어가는 말
II.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A.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1. 다른 사람
2. 다른 질서
3. 다른 사랑
B.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1. 구약의 경륜: 율법→복음
2. 신약의 경륜: 복음→율법
C. 구속과 하나님의 통치
III. 은혜로 통치하시는 나라
A. 하나님의 통치: 율법과 은혜
1. 불신자의 통치
2. 신자들의 통치
B. 성령과 은혜의 통치
IV.결 론: 빛으로 부르신 백성들
주기도문 시리즈 7 2011. 12. 11 주일오전예배
뜻이 이루어지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I. 본문해설
-보충적 탄원, 예수님 생애와 연결
II. 뜻(뗄레마)의 의미
-하나님의 기쁨: 시40:8
-하나님의 의지:시143:10
-은혜로운목적:사62:2, 히10:7
III. 그리스도와 하나님 뜻의 성취
A. 대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
-아버지 원대로: 눅22:42
-인류 구속의 우주적 계획
-그 뜻에 자기를 복종시키심
-정사, 부활, 승천, 성령강림, 연합
B. 잃은 자를 구원하심
-하나도 잃지 않음: 요6:39
-죄인들의 구원과 자비의 나타남
-새로운 나라의 도래징표: 사랑
-창조의 목적을 계승하는 구원
IV.신자의 삶: 그 뜻의 성취를 위함
V. 결론
주기도문 시리즈 8 2012. 01. 01 주일오전예배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
I. 본문해설
II. ‘양식’을 구하는 기도
-‘그 양식’(알토스)
A.'양식‘이란 무엇인가?
1. 성찬의 떡
2. 영적인 떡, 그리스도
3. 음식의 떡
4. 인간다운 삶의 조건들
B. '양식‘, 제유법적 표현
1. 원래 식물인 떡의 의미(출16.만나)
2. 영혼+육체로 이뤄진 인간
3. 양자 모두 하나님 형상발현 요함
4. 둘 다 신적 돌봄 대상(신8.해석)
III. ‘오늘날 우리에게’
A. ‘날마다’-‘오늘날’
1. 날마다(에피우시온)
- 생명에 필수적인
- 당일 필요한
- 다가오는날, 이튿날(행7:26)
2. 출16장이 배경임
- 하나님께 대한 적적의존(영육)
- 우리의 가난을 인식함
- 염려로부터의 해방
B.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
IV. 결론
주기도문 시리즈 9 2012. 01. 08 주일오전예배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2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눅11:3)
I. 본문해설
II. ‘우리에게’-공동체의 기도
A. 공동체적 기도의 지평
1. 일차적 지평: 그리스도의 지체
2. 궁극적 지평: 이 세상의 이웃들
B. 풍족히 주시는 하나님
1.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자각함
- 삶의 모든 필요에 있어 주 의지함
- 모든 신적 공급을 목적 삼지 않음
uti와frui, 공급목적을 기억함
- 탐욕과 방탕으로부터 벗어남
2. 노동을 통한 응답
- 우리 떡과 남의 떡(주는 자가 복)
- 하나님께서 우리노동을 통해서
- 아버지의 사랑으로 주심
C.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길
- 염려, 소명을 가로막는 대적
- 인격적 관계의 결핍에서 옴
III. 결론
주기도문 시리즈 10 2012. 01. 15 주일오전예배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 1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눅11:4)
I. 본문해설
- 육체를 위한 간구: 양식
- 영혼을 위한 간구: 용서, 시험, 악
II.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A. 두 본문의 차이
1. 마태:완결형-유대독자:부채
2. 누가:현재형-희랍독자:죄
B. 주기도문의 주체
1. 용서받은 제자들
- 천국시민의 자격에 못 미침
- 은혜로 받아주신 자들의 기도
2. 유대인들과 다른 기도
- 유대인: 신 인간의 보상개념
- 제자들: 용서 구할 때의 자세
C. 죄는 무한한 빚임
1. 의무 불이행과 심판
2. 죄는 무한한 빚임
- “우리의 확실한 소유는 죄뿐”
- 죄의 대상이 무한히 높으심
- 아무것도 갚을 능력, 의지 없음
- 죄의 본질: 반감과 대적; 신폐위
D. 신자와 하나님의 용서
1. 이미 받은 용서: 영원한 용서
2. 반복되는 용서: 경험적 용서
- 하나님의 두 보심: 단순과 현견
-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는 방법
- 신적평화의 소중함을 알게 함
3. 용서를 통해 사랑, 의존 알게 함
III. 결론: 두 양식을 주심
주기도문 시리즈 11 2012. 01. 29 주일오전예배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 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눅11:4)
I. 용서란 무엇인가?
- 사함, 관계
II. 죄사함과 용서
A. 절대적 용서: 하나님
B. 상대적 용서: 인간
1. 소극적면 - 사면
2. 적극적면 - 사랑
C. 용서의 요건과 오류
- 자신이 피해를 입음
- 법의 판결을 구하는 경우
- 하나님보다 먼저 자기를 용서
III. 용서에 대한 경륜
- communication, 단절, 교통애
A. 하나님 사랑의 회귀
- agape, eros, caritas → agape
- 용서이유, 용서방해: 죄(사랑)
B. 용서의 실천
- 용서 받은 죄인임을 알게 함
- 희생없이 용서 없음: X고난, 사랑
- 은혜의 필요로써 절대 의존하게
IV. 용서, 영혼의 자유
- 맺힌것을 풀어야 영혼이 산다
- 용서 통해 먼저 자신이 사랑받음
- 그리스도의 모본을 생각함
V. 결론
주기도문 시리즈 12 2012. 02. 05 주일오전예배
시험에 들지 말게 하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6:13)
I. 본문해설
II. '시험'이란 무엇인가?
A. 시험(페이라스모스)
- 동사 38회, 명사 21회
- 마귀, 종교지도자, 하나님
- 인간, 마음의 미혹
B. 복음서에서 '시험'
1. 마귀가 시험의 주체
- 예수님 시험(마4:1)
- 제자들 시험(막26:1)
2. 바리새인등이 주체
- 예수님 시험(마19:3)
- 제자들 시험(행20:19)
III. '시험에 들지말게'
A. 시험-복음 위한 환란과 유혹
1. 신자의 삶: 영적전투
- 시험 피하는 기도가 아님
- 시험 안에서의 보호 구함
B. '시험 들게 마시고'
1. 에이세넹케스: 에이스페로
2. 마귀의 시험과 신자의 이끌림
- 물리치신 예수님(마16:23)
- 굴복한 제자들
3. 준비된 마음: 요13:2
4. 기도에 태만: 마26:41
C. 탄원에 마음을 묶음
- 탄원으로 필요를 알게 하심
- 탄원은 자신을 위한 것임
IV. 결론
주기도문 시리즈 13 2012. 02. 12 주일오전예배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6:13)
I. 본문해설
II. '악'이란 무엇인가?
A. 악(포네로스)의 용례
1. 구약에서의 ‘악’
2. 신약에서의 용례
- 의미: 육체허약(마6:23), 비열한...악한사람(눅6:35),
마귀(요일2:13), 악한것(눅6:45)
- 복음서에서
B. '악'의 판단기준
1. 선악의 기준
- 창조의 목적
- 하나님 생각과 의지: 지혜+사랑
2. 성경의 기준: 계명
- 믿어야할 규칙↔불신앙
- 살아야할 교훈↔불순종
III. '죄'(sin)와 ‘악’(evil)
- 뿌리... 나무열매
- 경향성... 구체적실행
- 마음밑... 마음속, 행동
IV. 시험과 ‘악’으로 이끌림
A. 시험은 내면에 작용함
- 생각: 혼란
- 의지: 부패
B. 시험과 유혹이 따로 없음
- 창조적시험 vs 파괴적시험?
- 객관적시험.. 주관적적용
C. 은혜의 도우심이 필요함
V. 결론
주기도문 시리즈 14 2012. 02. 19 주일오전예배
하나님께 영광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6:13)
I. 본문해설
II. 주기도문의 송영
A. 사본상의 증거
- 초기 사본에 생략되어 있음
- 시내산, 바티칸, 베자사본 등 생략
B. 후대의 첨가임
- 기독교 이전 유대주의 문헌 병행구
- 초대교회 기독교인들 사용한듯
- 칼빈, 벵겔등은 지지, 어거스틴은 x
- KJV, NASB등 지지
III. 아버지께 영원히 있음
A. 그 나라(바실레이아)
- 왕국
- 신적통치
- 창조 질서를 세움
B. 그 권세(뒤나미스)
- 그 나라를 성취할 능력
- 영적인 힘을 가리킴
-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사모함
C. 영광
- 영광을 받으실 가치 있는 유일자
- 모든 만물의 원인과 목적이심
- 그 분이 우리 아버지이심
IV. 결론
주기도문 128
주기도문2 (2011.11.06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3 (2011.11.13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4 (2011.11.20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5 (2011.11.27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6 (2011.12.4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7 (2011.12.11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8 (2012.01.01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9 (2012.01.08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10 (2012.1.15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11 (2012.01.29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12 (2012.02.05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13 (2012.02.12 주일오전설교)
주기도문14 (2012.02.19 주일오전설교)
1.살아계신 하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눅 1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님이 한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상당한 시간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기도가 끝났을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기도가 배움을 통해서 온전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가 우리가 알고 있는 주기도문입니다. 우리는 이 주기도문을 예배나 모임을 끝나는데 하나의 형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기도문을 주신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예수 이레 최대의 순교자가 주기도문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평소에 하셨던 기도의 패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로 이 패턴을 따라서 기도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생애를 바라보는 하나의 렌즈입니다. 즉, 이 주기도문은 평소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패턴이었고 그 기도의 패턴은 평소의 예수님이 사셨던 삶의 패턴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패턴을 주기도문 속에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저의 오랜 신앙의 경험을 통해 말하자면 정말 훌륭한 신자들만이 이 패턴을 따라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일 먼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마는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보다 더 간절히 추구하죠.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사람으로 변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영광이 첫 번째의 기도제목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과 기도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삶은 기도를 능가할 수가 없고, 기도한 만큼만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의 그 사람됨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가 기도할 때 어떠한 사람이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하나님을 향해 열렬한 사람이면 열렬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할 때에 열렬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삶 속에서, 도처에서 멸시를 받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마음이 아팠던 사람들만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눈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패턴을 가르쳐 주시기전 먼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들이 먼저 호명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호격입니다. 나는 주기도문 시리즈를 오늘 처음 시작하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이 호격을 3주에 걸쳐 설교할 것입니다. 오늘은 “계신”이라는 이 구절을 설교할 것이고 다음 주는 하늘에 계시다는 뜻이 무엇인지 설교할 것이고, 세 번째 주는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설교한 후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가르쳐 준 간청의 제목들을 설교해 나갈 것입니다.
II.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A. 신이 없다고 믿는 세대
먼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그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분은 분명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은 신이 없다고 믿는 세대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모든 사상에 하나님은 없다고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명백한 증거를 찾았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있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서 하나님에 관한 증거를 지워버렸던 것입니다. 얼마 전 영국에 갔을 때 영국 2층 버스에 이렇게 써 붙여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There is probably no God. Don't worry. Enjoy your life” 아마도 하나님은 없을 걸요.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 인생을 즐기십시오. 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그 사람들에게 걱정거리가 될까요? 그 광고를 내보내겠다고 할 때 순식간에 우리나라 돈으로 2억 6천만 원이 모금되었다고 합니다. 회의라고 하는 것은 믿으려고 하는데 왠지 증거가 부족해서 안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앙은 증거가 있는데도 안 믿겠다는 고집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죄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무신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미 오늘날의 과학은 하나님 없는 무신론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에 대해 배워도 학교에서 그 하나님을 지워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이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성경뿐만 아니라 과학도, 거듭난 과학을 다시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방금 회심한 여러분의 자녀의 두 손에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과학책을 들려줘야 한다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없는 무신론의 편견에서 벗어나 온 땅과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를 읽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상적인 무신론만 오늘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적인 무신론은 더욱 무섭게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이제는 모든 도덕도 다 지워버렸습니다. 각자 원하는 바가 자기 도덕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제 절대적인 가치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 사람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행복이야말로 이 모든 우주의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신처럼 떠받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없이 이 세대가 가는 발자국입니다. 이런 속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담대하게 고백하며 사는 불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만이 무신론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또한 무신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일날 마다 와서 예배는 드립니다. 그리고 그들도 하나님 앞에 찬송을 합니다. 얼마간의 헌금도 합니다. 그러나 일주일동안의 삶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천적으로 무신론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이미 교회도 이렇게 무신론적인 사람들의 생각과 실천으로 감염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신론적인 세상에 살다가 교회에 들어와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지도 못한 체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세상에서 무신론의 삶을 살았는데 이번에는 교회 안에서 무신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뭐가 달라졌습니까? 신학자 존 오웬의 설명에 의하면 그들이 생활하고 있는 무대만 달라졌을 뿐이지 여기서도 무신론이고 저기서도 무신론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전 그 하나님이 분명하게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야 말로 모든 아름다운 기도의 첫 번째 조건이 됩니다.
B. 존재하시는 하나님
성경은 인간이 그 사실을 믿든지 말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구약의 시작일 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시작이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구차하게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그는 간단하게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계실까 계시지 않을까 궁금해 하는 그 인간 자체의 존재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세계 안에는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슨이라는 사람이 『눈먼 시계공』이라는 책을 썼습니다마는 우리는 눈먼 도킨슨이라는 책을 쓰고 싶을 정도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이 살아계신 많은 증거들을 부당한 방법으로 다루는지 우리는 그의 생각이, 재주가 놀라울 따름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는 세계에 가득 차 있고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든지 이러한 만물 안에 가득찬 신성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하는 민족이 없었습니다. 각자 자기의 세계관으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과 같은 동일한 하나님을 인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아주 뽑아버린 민족과 나라는 없었던 것입니다.
1. 사물의 존재방식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과학이라는 미신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자체를 편견을 가지고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명백한 증거들을 매우 부당한 방법으로 다룸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소위 과학이라고 하는 인간의 학문을 가지고 하나님의 존재를 탐색한 후에 하나님은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물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잘못된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을 측정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 제가 전철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셔서 정말 한 6개월 동안 은혜롭게 전도를 했습니다. 밤 11시쯤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내려오다가 열차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것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나에게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당신 하나님이 있다고 그러는데 당신 하나님 봤어?”그러고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상황이라면 뭐라고 이야기 하겠습니까? 왜 대답을 안 합니까? 뭐라고 말하겠어요? 못 봤다고 말하면 전하는 것이 헛된 것입니다. 그래서 “봤다”라고 말했죠. 그때 봤다는 의미는 이런 꽃이나 풀을 봤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 가운데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가르쳤던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이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 신학자는 사물의 있음과 없음을 판단하는 세 개의 규범들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제한적으로 사물을 판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컵의 뚜껑처럼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부피와 특정한 길이, 폭, 그리고 손으로 만져지는 사물을 가지고 어떤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물질입니다. 여기까지는 컵이고 여기서부터는 컵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만큼만 컵입니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사물이 있다, 없다를 재는 것입니다. 흙, 돌, 나무, 책상, 꽃 이런 것들은 이렇게 잴 수 있는 사물입니다. 그러나 한정적으로 측정해야 하는 사물도 있습니다. 영혼 같은 것이 그런 것입니다. 나의 영혼은 내 안에 있죠. 나를 내버려 두고 출장가거나 여행가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도 내 영혼은 내 안에 있었고 나이가 들어서 몸집이 커졌어도 영혼은 내 안에 있습니다. 영혼은 내 안에만 있지 나를 내버려 두고 여러분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해부학적으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 몸을 칼로 가른들 아무리 내 몸을 뒤져도 그 안에서 내 영혼을 콩팥이나 간, 위나 혓바닥처럼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천사도 그렇게 존재하고 여러분의 영혼도 그렇게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제한적인 의미에서 존재하시는 분도 아니고 한정적인 의미에서도 존재하는 분이 아니에요. 그래서 튜레틴은 하나님의 존재의 방식을 충만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충만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모든 물질이 하나님을 떠날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은 어느 물질 속에도 베어 계신 분이 아니고, 또 하나님은 이 모든 만물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물질과 또 다른 물질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이 물질이 이 물질에 가까이 있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이 물질에 가까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과학의 증거를 가지고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치 수술실로 들어가 우리의 배를 가르고 장갑을 낀 체 우리의 장기를 헤집으면서 영혼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은 영혼이 없는 동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시간과 공간보다도 크신 분이고 그것을 능가하시는 분입니다. 어떠한 시간과 공간도 하나님을 홀로 가두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 공간을 능가하고, 그 시간을 능가하시는 분이며, 하나님에게는 우리에게 무한히 느껴지는 시간과 공간이라도 하나님에게는 무한한 점과 같은 것입니다. 세계를 한번 보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찬양)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자랄 수 있습니다.
2. 충만하신 하나님
신앙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나니까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보아도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의 원인은 하나님이 거기에 충만히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정신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 우주 만물 속에 초월하시는 분으로, 또 내재하시는 분으로 물질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득히 존재하십니다. 세계 안에 있는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탁월한 질서는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십시오. 우리 지구와 태양이 속해있는 우리 은하계는 약 2000억 개의 별들로 이루어진 은하계이고 이 온 우주는 그러한 은하계가 약 1천억 개 이상 있는 공간이라고 추측합니다. 그 2000억 개의 별 중 단 하나의 별이 바로 태양입니다. 그리고 태양 주위를 9개의 별들이 돌고 있고, 다시 167개의 더 작은 별들이 9개의 위성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의 항성에 우리 태양계와 같은 공식을 적용한다면 우리 은하계 안에만 3조 2천 7백개의 별들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은하계가 1천억 개가 넘게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놀라운 이 세계를 하나님이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습니다.
요한네스케플러라는 사람은 독일 태생의 과학자요 철학자였고 공교롭게도 개혁파 정통주의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개혁파 정통주의의 전성기가 끝나는 시점까지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우주의 조화”라고 하는 책을 썼고 그 책 속에서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은 독특한 시도를 했습니다. 지구와 함께 돌고 있는 행성들을 주기를 찾아서 오선지에 비율을 따라 그렸고, 그렇게 음표를 만든 다음 악기를 연주해 보았더니 최상의 하모니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양으로부터 세 번째로 있는 위성이고, 그리고 하나를 건너면 목성이 존재합니다. 어느 과학자가 목성이 없었더라면 지구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첫 번째 나온 결과는 얼마 못가서 지구는 산산이 파괴된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목성이 지구를 암탉처럼 감싸고돌면서 우주에서 날아오는 수많은 운석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입니다. 약 20년 전 어마어마하게 큰 운석이 목성에 충돌했고 그 장면이 허블 망원경에 잡혔습니다. 불꽃의 높이만 1950km였습니다. 만약에 그런 돌이 하나만 지구에 맞으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만약에 목성이 없다고 하고 목성을 빼버리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해 보았더니 태양 주위를 여러 번 돈 다음 그 궤도가 점점 찌그러지면서 이 지구는 우주 바깥으로 튕겨나가 미아가 되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태양, 수성, 화성, 지구 일렬로 늘어서 있는 이 모든 항성과 위성들이 말할 수 없는 질서와 조화 속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이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를 연출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누구도 이렇게 만든 존재가 없이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 세계에 두신 아름다움은 질서의 아름다움입니다. 그 질서 속에서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고 지금도 이 창조 모든 만물들을 유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를 아름답게 뿜어내고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만큼 찬란한 빛은 아니지만 인간이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충분한 빛을 뿜어내지만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죄로 눈먼 소경이 되었기 때문에 명백한 하나님 존재의 증거를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는 아름다운 증거는 자연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세계 속에서도 한줄기 강한 빛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도덕인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가 없다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면 평안을 느끼고, 부도덕하게 살면 고뇌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그들의 양심 속에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가 율법이 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명백한 증거를 사람들은 거절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네스케플러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아주 감동적이니 귀 기울여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위대하십니다. 주님의 탁월하심은 놀라우며 주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감각으로 인식하든지 무슨 언어로 창조를 말하든지 간에 하늘들이 그 분을 찬양하며 해와 달과 행성들이 그 분을 노래합니다. 하늘의 조화들이 그 분을 찬양하여 드러난 그 조화를 아는 자들이 찬양합니다. 내 영혼아, 그대 또한 살아있는 날 동안 창조주 주님을 찬양하라. 만물이 그 분으로 비롯되며 그 분으로 말미암아 그 분 안에 있기 때문이니라. 만물은 인식할 수 있고, 지성으로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양쪽 모두에 전적으로 무지하며 우리가 아는 것들 중 아주 사소한 부분조차 여전히 저 너머에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세세 무궁토록 돌립니다”라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에 가득하신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에 겨우 하나님을 느낄 수 있고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을 전혀 느낄 수 없다면 여러분은 좋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의 모든 삶 속에서, 어디에서든지 그 하나님을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우리의 찬송의 제목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자연의 세계, 인간의 지혜로 만들어 낸 이 모든 학문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도덕의 현상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발견하며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III. 살아계신 하나님
A. 자연적 신지식의 한계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 만을 가지고는 이 주기도문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올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기도하지 않는 많은 유신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적인 신지식의 한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며칠 전 어느 신문에 유럽의 한 과학자의 글이 실렸습니다. 이 사람은 이제까지 철저하게 무신론자로 살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과학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주를 열심히 탐구하였습니다. 그러다 그는 유신론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발견한 과학적인 사실들 사이에 있는 탁월한 일치와 조화를 생각해 볼 때에 누군가 이 우주를 지적으로 설계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이런 세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과학적인 사실들이 텍스트가 되었습니다. 그 텍스트를 부지런히 연구했더니 텍스트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텍스트를 능가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내가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신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과학을 더 과학적이게 만든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고백했다고 해서 당신들은 내가 회개하고 예수장이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도 없죠.
최근 알랭 드 보통이라고 하는 이름도 이상한 프랑스 사람이 여러 권의 책을 썼습니다. 저도 그 사람 책을 몇 권 읽었습니다마는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신은 없다. 그런데 없다고 치고 살면 너무 힘들다. 그러니까 없다고 생각하든, 있다고 생각하든 그거는 각자 마음대로 하고 그러나 우리는 있다고 치고 살자. 그게 훨씬 더 좋다.” 그래서 이 사람은 신이 없다고 확신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지라고 선전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성경을 통하지 않고 자연의 세계를 통해, 인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증거를 발견하는 한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한때 플라톤 철학에 깊이 몰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니교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깊이 회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길 때까지는 그의 마음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달았고, 자기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분한 마음을, 하나님을 잘못 알았던 분한 마음을 자기의 고백록 속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 책들 속에는 이러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저 책 안에는 경건의 모양과 고백의 눈물, 당신의 희생, 상한 영혼, 통회하고 겸비한 마음이 있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구원도, 당신의 신부로 택함을 받은 교회도, 성령의 보증도, 우리를 위한 속죄의 잔도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거기엔 아무도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며 나의 구원이 오직 그에게서 나오는 도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이요, 나의 구원이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노래하지 않습니다. 거기서는 아무도 우리를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저들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분께로부터 배우기를 경멸하였기 때문이니 당신은 이러한 것들을 지혜롭게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 같은 자들에게는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래하였습니다. 그가 뽄뛰지아누스라는 사람이 들려주는 성 안토니우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후, 한적한 곳에 나아가 회개하기 시작할 때 그는 눈물의 강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찬양)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하나님 앞에 자기의 교만한 마음을 쏟아놓고 물같이 마음이 녹아본 사람들은 모두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안 사람들이 아닙니다. 인간의 경험 속에서 들은 하나님을 안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 속에서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법칙의 하나님이 아니라 법칙을 능가하는 사랑의 하나님, 우리 같은 죄인을 구하려 자기의 외아들을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쓸 수 없는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을 경험하고, 그 앞에서 자기가 티끌 같은 존재인지를 알고 교만을 버렸던 사람, 그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불결하고 불완전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던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복이 모든 우주의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와 우주 만물들을 휘감고 당신 자신 속으로 돌아가는 하나님의 회기적인 사랑 안에서 자신이 가장 그 질서를 따라 삶으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B. 살아계신 하나님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묻는 인간은 누구일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아무도 만족할 만한 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 모든 존재와 가치의 질서의 네트워크 속에서만 이 인간이 누구인지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복잡한 미국의 우주선에서 부품 하나를 떼어놓고 여러분에게 보여주면 이것이 무엇인지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인간은 전체를 위해 부속품처럼 만들어진 그런 존재도 아닙니다. 인간은 이유도 없이, 근거도 없이 우주 공간에 내동댕이쳐진 의미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냥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인격을 가지고 우리를 대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까지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단지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인격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당신 안으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살아계시고 각위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하여 각위는 서로에게 완전한 사랑을 받으시고, 또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 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사랑을 생명과 함께 이 모든 창조 세계에 보내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비천한 인간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시면서 그들의 아버지라고 일컬음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그 탁월하신 하나님, 영원과 영원에 잇대어 존재하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위대하신 존재 앞에 우리는 없는 것과 같것만 오늘 들풀처럼 있다가 사라질 이러한 허무한 인생들인데도 하나님이 그들과 관계를 맺으십니다.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그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타락해서 창조의 목적을 떠나 비참하게 사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아직도 이 복음이 믿어지지 않는데 무엇 때문인지 우리의 마음에는 그 복음이 믿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마다 마치 하나님이 자신만을 사랑하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많은 사랑을 받는 다는 소식을 끊임없이 들어도 우리는 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이 사랑이 조각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모두 주시는 위대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회심하기 전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모르고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천국도 몰랐고, 지옥도 믿지 않았습니다. 고집대로 살다가 죽을 이 세상이 우리의 전부이고, 이 세상에 들어붙어 이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다가 짐승처럼 죽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본질상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의 어두움을 찢으시고 당신의 찬란한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찬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세상이 있어야만 하나님이 되시는 분도 아니었고 우리가 존재해야지만 비로소 하나님 되시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져 죽어있는 우리들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당신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것을 믿게 하시기 위하여 많은 죄를 지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화목시키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존재가 믿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믿어졌고, 살아계신 것이 믿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같은 인간을 당신 아들보다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내 마음속에 믿어졌던 것입니다.
IV. 결 론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속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벌레 같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신 것,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게 해 주신 것, 그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생각하며 살게 해 주신 것,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만입이 다 있어도 감사할 수 없는 찬송의 제목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과거를 돌아보면 기도를 많이 하던 때도 있었고 기도를 거의 안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아이 목사님, 다 아시잖아요. 기도를 많이 했을 때에는 좀 시간 여유가 많은 때였고, 기도를 안 하던 때에는 우리가 바빴기 때문입니다.” 대답이 맞나요? 우리의 경험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문제는 뭐냐 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이 느껴질 때 나 같은 죄인을 살려 그 분을 아바 아버지라고 불러 주신 것이 뜨거운 감격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바빠도 많이 기도했어요. 그러나 이 하나님과의 친밀함, 이것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라질 때 우리가 많이 한가해도 거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위대한 주기도문을 해설하기 전 여러분의 마음에 영적인 부흥이 오기를 바랍니다. 이제껏 여러분은 세상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여태까지 여러분은 자신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이제는 마음의 눈을 들어 거룩하고 위대하시고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우리 하나님을 주목합시다. 그 분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우리의 마음속에 다시 생각합시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그 분께 기도합시다. 그리고 기도한 것처럼 삽시다. 아멘
2.하늘에 계신 하나님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를 가르쳐 주시기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먼저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호칭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누구든지 단지 신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으로서는 기도할 수 없고 그 하나님이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으로서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고 여러분에게 설교하였습니다.
II. 하늘에 계신 하나님
A. 유대인의 하늘개념
오늘은 바로 그 하나님을 수식하고 있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이 구절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많은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호칭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뜻이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인의 하늘 개념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하늘이라는 단수로 나오지만 희랍어 성경에서는 ‘호 엔 호 오우라노스’(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ός)라고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직역을 하자면 ‘하늘들 안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의미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이 하늘을 삼중의 하늘로 생각하였습니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파란 하늘이 있고, 그 위에는 영적인 권세자들이,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두 번째 하늘이 있고, 그리고 세 번째에는 어떠한 악도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이 계신 그 보좌가 있는 세 번째 하늘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마태가 이 부분을 기록하면서 하늘들 안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표현이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높으셔서 세 번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지만 새들이 날아다니는 첫 번째 하늘,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두 번째 악의 하늘도 주님의 임재와 통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하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의 만물, 땅 위에 있는 모든 만물들을 초월하여 계시는 그 하나님이심을 기도할 때마다 명심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의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이 말의 유대교적 표현이 바로 하늘 영광입니다. 이처럼 하늘과 하나님은 동일시되었고,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들이 각자 자신의 나라의 기원이 하늘과 관계가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왕과 황제는 자신을 하늘의 자리에 두고 싶어 했고, 그래서 ‘천자’라고 불리웠던 것입니다. 천은 하늘이고 자는 아들이지만 사실 자신을 천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자신이 이 모든 자기 아닌 다른 인간들과 구별되고 오히려 하나님과 한 식구라고 하는 동질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금세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그 앞에 기도하는 우리 인간은 땅에 있다고 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우리에게 먼저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모든 창조 세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고, 인간도 그 범주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자, 어떤 조각가가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이 아주 탁월한 예술의 기회로서 이제껏 누구도 만들어보지 못한 아주 훌륭한 조각품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고 칩시다. 그렇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 조각품이 조각가가 되거나 조각가의 일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20년 내로 컴퓨터와 맞먹을 정도로 어쩌면 그 이상으로 각광을 받을 미래 산업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봇입니다. 아마도 그때 시절이 되면 아마도 지금은 남자와 남자가 결혼을 하는 동성애가 문제가 되지만 이제는 기계와의 결혼이 사회 문제가 되는 시대가 올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로봇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과학자가 탁월한 기술을 개발하여 이 로봇을 인간과 꼭 같이 만들어서 인간과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도록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래도 그가 그 로봇을 만든 사람의 일부가 되거나 사람과 동등한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로봇이 유지되고, 소멸하는 모든 처분의 권한을 그 만든 사람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B. 하늘에 계시다는 의미
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 그리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하늘에 계시다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바로 이 질문에 비추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수많은 흔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에 편견과 그리고 고집에 사로잡히지만 않는다면 비록 죄인이지만 편견과 아집에 강력하게 사로잡히지만 않는다면 이성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과 선과 악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 이 두 가지는 또렷이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알아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면 성경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안 사람이라면 그 눈을 가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바라볼 때 거기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신 수많은 흔적들을 바라보는 것 없이는 피조물 중 어느 하나도 눈여겨 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은 아무리 하나님 존재의 양식을 많이 닮았다고 하더라도 무한하신 하나님을 완전하게 드러내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창조된 세계 안에 묻어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흔적들,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은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전하니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누가 전해주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아주 아름다운 증거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성경뿐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신성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기뻐하고,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의 성격들을 성경 계시의 빛으로 해석해서 올바른 지식으로 드러내어 누구든지 그 지식을 통해 온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신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임무인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어릴 적부터 교육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녀를 주셨을 때 우리는 한편으로 이 아이가 하나님을 올바로 알게끔 도와주고, 또 한편으로는 이 아이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올바로 알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깊이 회심하여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고 삶의 어느 분야에서든지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발견하고 싶어 하는 이 아이에게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과학책을 들려주어, 참되고 거듭난 과학책을 들려주어 하나님의 성경의 계시와 이 세상의 계시가 만약에 우리들이 올바르게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것이 하나로 위대하게 만나서 그래서 하나님의 성경 계시와 이 자연의 계시들이 웅장한 심포니를 이루며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웅장하게 들려준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1. 구별된 존재의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에 당신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 자연세계에 묻어있는 하나님의 흔적을 모두 합친다고 할지라도 하나의 흔적에는 비할 수 없으니 바로 그 위대한 흔적이 인간의 영혼과 정신 안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고 바로 이 형상은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뜻을 정할 수 있는 지성과 의지의 기능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당신을 닮은 존재로 만드신 인간 사이에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흔적을 가지고 연속성을 이루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속성은 마치 훌륭한 예술가가 자기의 조각품과의 관계에서 가지고 있는 연속성과 같은 것이고, 탁월한 로봇 과학자가 만든 로봇과 영혼을 가진 과학자 자신 사이에 있는 연속성과 같은 성질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과 세계 속에 아주 뚜렷한 흔적을 남기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 사이의 차이에는 범접할래야 범접할 수 없는 무한한 질적인 격차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탁월한 질적인 격차를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누가 자신들이 벗었다는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이 없는데도 두려워하며 부끄럽게 여겨 자신의 벗은 몸을 나무 이파리로 가리려고 했던 것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빽빽한 구름과 그리고 하나님의 천둥소리와 같은 음성으로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들려주신 율법 속에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 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관한 선언이 묻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그렇게 치열하게 자기의 백성들을 탄핵하고 그들에게 핍박을 받아 피 뿌리며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선택을 받은 백성답게 살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시인들이 위기와 고난을 만나고, 핍박과 시련을 당하고, 어두운 미래의 불안 속에서 고통을 받을 때에 매일 묵상하며 위로를 받았던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거룩하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속에는 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추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는 교훈과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인하여 녹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탄식하는 그런 간구의 노랫소리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고, 흠 없고 죄 없으신 전능하신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라도 그렇게 당신 자신이 아버지께 죽임을 당하여야만 우리들을 하나님 앞에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사랑이신 하나님이 아들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해서라도 죽임을 당하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게 만들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였을 때 사도들의 눈이 열렸고, 예수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신명을 바쳐서 가르치고자 했던 교훈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니 너희는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날에 될 위대한 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요한 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복음의 증거를 인하여 갇힌 바된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졌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 나라가 거룩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도처에 흩어져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는 무엇이겠는가 합니다. 원래 이 거룩하심은 피조물들에게는 티끌만큼도 없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 자신만이 완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당신의 이 거룩하심을 제한적으로 당신과 관계를 맺은 사람과 제도, 그리고 물건과 도구들에게까지 이 거룩하심을 분여해 주십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타락한 이후로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죄의 영향에서 피할 수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씻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 주실 때 우리는 바로 성도라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타락한 죄인들의 모임이 거룩할 리가 없지만 그들이 바로 살아계신 거룩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거룩하심의 영향아래 있기 때문에 교회를 거룩한 성도의 무리라고 불러도 좋은 것입니다.
설교자 앞에 놓여있는 이 나무로 된 물건은 아직 제작되지 않았을 때에 목공소에서 목재라고 불렸습니다마는 완성되고 여기 온 후에는 성구라도 불립니다. 용도가 폐기되어 고물상에 버려지면 폐품이 되겠지만 말입니다. 따라서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한도 안에서 하나님 때문에 분여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 거룩하심이 하나님 한 분의 거룩하심이지만 이 거룩하심을 당신과 관계를 맺은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도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에게도, 하나님이 사용하신 물건에게도,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분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거룩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 거룩하심은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첫째는 존재적 초월성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이 모든 피조물들과 질적으로 그리고 모든 비교에 있어서 서로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위대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주 이 끝부터 저 끝까지 인간의 알력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거리이고, 시간은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어 어느 시점까지 영속하여 흐르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과 공간의 흐름 안에서 태어나고, 변하고, 흘러가고 죽었습니다. 인간들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피조물들이 그러하였고 영원한 존재처럼 보이는 하늘에 있는 타오르는 별들도 그렇게 태어나고, 변하고, 흘러가고, 죽었습니다. 그 크기와 넓이, 그 길이와 그 시간은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무한량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초월적인 하나님 앞에서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과 같은 한 점에 불과한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이렇게 어느 한 순간 지성에 벼락을 맞는 것입니다. 지성에 벼락을 맞고 이제까지는 전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한 사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 이 세상에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피조물, 그것을 재고 평가하는 나의 지성을 넘어서는 무한히 광대하시고 위대하시고 엄위로우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들을 생각합니다. 그런 지성의 벼락을 맞고 자기 자신이 비로소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주관적으로 보였을 때는 자신이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그리고 자신이 무한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그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자신이 정말 티끌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찬양) 하늘에 가득한 영광의 하나님 온 땅에 충만한 존귀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 그 무한한 존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합해도 그 분 앞엔 티끌 같은 존재이고, 자신은 다시 그 티끌 같은 존재 앞에서 더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서 이 온 우주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최고의 가치를 가진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모든 우주의 중심이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그 존재의 크기와 위대함은 곧 가치의 크기와 위대함과 하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서 그 앞에서 티끌 같은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존재가 ‘후’ 하고 부시는 하나님의 바람 앞에서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말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떨며 그 분 앞에 엎드리는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시작인 것입니다.
(찬양)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렇다면서 하나님의 지극히 높고 위대하심 앞에 어린아이처럼 두려워 떨며 주 앞에 부복합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것이 거룩함의 첫 번째 요소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하면 자기중심으로 살지 못해요. 마음대로 고집하고 제 맘대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제 인생이 저 원하는 데로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도 해고시켜 버리려고 하는 그러한 인간의 마음은 그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못 만났음을 증거합니다. 두 번째 요소는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시지만,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고 당신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그것들을 돌보고 다스리고 이끄시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보이지 않으시는 존재이시지만 그 분이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신 분이신지를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이런 속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세계와의 관계에서도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영혼을 가진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가운데 당신의 속성을 충만하게 드러내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의 빛이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인 빛과 같아서 객관적으로 이 세계 속에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지성 안에 인식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창조하신 모든 만물중 인간과 관계를 맺으심으로 당신과 많은 속성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수많은 속성들이 있지만 그 중의 한 가지만 예로 들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닮은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사랑할 능력도 있고, 사랑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을 갖지 않아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사랑할 줄도 알고, 사랑을 받는 것이 좋은 줄도 압니다. 하나님을 몰랐을 때에는 자신이 가족과 이웃, 형제들을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그 사랑이 고귀하다는 것도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을 만납니다. 율법을 통해 자기가 얼마나 끔찍한 죄인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죄를 짓고 악을 행했기 때문에 영원한 파멸에 이르러도 항변할 것이 하나도 없는 인간이지만 차마 그 인간이 죄 가운데서 죽는 것을 보실 수 없어서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것이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부들부들 떨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분노를 쏟아 부은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없으신 몸으로 우리의 죄 값을 담당하시고 죽으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다시 살게 하시고자 했던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완전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에 비로소 참된 사랑의 빛이 찬란하게 그 사람 마음에 비취게 되고 이 때 그는 자기가 일생 최고의 빛이라고 믿고 살아왔던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고 바로 그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조잡하게 흉내 낸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동기에 있어서도 순결하지 않고 사랑을 움직이는 모든 힘에 있어서도 온전하지 않고 사랑이 설정한 목표에 있어서도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두 사랑을 비교하게 됩니다. 이때에 그는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고 자신은 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말 죄악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반응이 참회의 눈물입니다. 즉,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하고 더러운 얼룩으로 물든 자신의 도덕성을 보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분부를 따라 그물을 던져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을 때에 춤을 추며 기뻐하는 대신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내 곁을 떠나달라고 간청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빛 아래에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달은 데서 오는 도덕적인 자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여러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도덕적으로 불결하고 더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진실하게 참회해 본적이 없다면 신앙은 시작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무한한 도덕적인 격차를 느끼게 될 때에 인간은 앞에서 경험했던 존재적 초월성에서 오는 그 위대함과 광대함의 인식과 덧붙여서 바로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진노아래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에 인간은 이제껏 자기를 의지하며 살아왔던 모든 생각과 기대들을 포기하게 됩니다. 자기를 자신이 가장 잘 보호할 수 있고 자기를 자신이 가장 잘 이끌 수 있다는 인간의 교만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붙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그 완전하신 하나님이 미천하고 불결한 죄인들을 당신께 이끄시기 위해서 내미신 하나님의 화해의 손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고 그 거룩하고 무한히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티끌 같고 불결한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더럽히고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과는 배치되는 삶을 살았는지를 생각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돌이켜 회개한 모든 성도의 마음속에는 주님의 높고 크고 위대하심 앞에 자기가 티끌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자각과 그 분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나는 너무 더러운 인간이라는 사실을 미약할 뿐만 아니라 더럽기까지 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힘이 없다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3. 통치하시는 하나님
그러한 자각을 하나님을 높이면서 표현하는 그 정수가 예배에요. 예배. 그러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 하는 것은 예배드릴 때에 그 사람됨, 바로 그것이 그 사람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가소롭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에 우러나오는 사랑과 경건으로 경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이 건성의 삶이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지만 예배에 목숨을 건 사람이 되어야 해요. 이 세상에서 수많은 문제들을 여러분이 만나고 그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 문제의 해결을 이 세상에서 찾으려고 하지만 이 세상에서 문제의 해결의 열쇠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이 세상은 문제투성이가 되었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고민하는 문제들이 해결되어도 끝나고 나면 종류만 다르지 또 다른 문제들이 등장해요. 그런데 이렇게 등장하는 문제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죽는 날까지 계속 됩니다. 문제는 이 땅에서 일어나도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마음 깊은 곳에서 이 땅에서 수많은 문제들에 에워 쌓여 고통을 받을수록 여러분은 이 눈을 들어 위에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찬양) 주 예수 계신 곳에 기쁨 가득 누구와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배드림이 기쁨 됩니다.
그렇다면서 문제가 많을수록 고개를 들어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땅은 그렇게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다스리고,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기도 속에서 우러른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이 땅을 다스리시는 전능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충만하게 인식한다는 의미에요. 그렇게 이 세상과 나의 인생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주님이 행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 주권을 앙망하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간절히 어린아이가 그 아버지를 의지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여 매달릴 수가 있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거룩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언제든지 우리들이 마음으로 간구하면 귀 기울여 들으신다고 하는 이 사실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감격적인 복음의 사실입니까?
IV. 결 론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인생의 많은 문제들은 이 땅에서 생겨났지만 결국 그것이 문제인 이유는 여러분에게 하늘의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도록 그 분을 앙망하며 그 분을 사랑하며 그 분을 위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하나님 우리 아버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에 앞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도록 우리에게 지시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본질에 관계된 것이라면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이 말씀은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이 기도하는 우리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계신 분이신지를 기도할 때마다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II. 하나님-아버지
A. 아버지의 4중 호칭
성경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중의 호칭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삼위일체 안에서 성자가 성부를 아버지로 호칭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위격적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두 번째는 창조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원은 모든 만물과 함께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창조된 것들의 아버지입니다. 넓게 보면 창조된 모든 것들의 아버지이시고, 좁게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세 번째 아버지 되심은 신정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세상의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근원에 있어서 하나님이 인류의 아버지가 되시지만 하나님은 특별히 그 중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당신의 나라로 삼으십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불려지는데 이것은 매우 특별한 언약을 통해 신정 국가를 형성하는 아버지 되심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가 양자적 아버지 되심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 언약 백성들을 당신의 자녀 삼으시는 구속의 아버지 되심입니다. 이것을 양자적 아버지 되심이라고 부릅니다.
B. 하나님의 ‘아버지’ 호칭
이처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성경에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지만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실 때에 이 호칭은 이 창조와 신정을 역사적으로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양자로 삼으신 구속받은 백성들의 아버지로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유대인의 호칭관습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호칭하도록 예수님이 가르치셨는데 실제로 성경을 찾아보면 하나님을 개인이 내 아버지라고 부른 용례는 매우 적게 등장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개인이 하나님을 개인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호칭은 유대인에게서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이 보는 앞에 하나님께 대하여 개인적으로 나의 아버지께서, 나의 아버지를 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매우 생경스러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시편에 보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는 시인이 공동체적인 연합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호칭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실제로 철저한 개인의 아버지로 부르고 있는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개인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호칭은 매우 낯선 것이었다고 합니다.
2. 예수님의 아버지 호칭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그 우리는 예수님과 우리 모두를 포함하는 우리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렇게 해석을 해서 결국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형제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이 기도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동참하신다고 해석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비추어 볼 때에 설득력이 매우 약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을 비롯한 복음서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까지 함께 싸잡아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자고 호칭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실 때에 예수님 자신의 아버지와 제자들의 아버지를 나누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가르쳐 주신 것을 예수님을 포함하는 아버지 되심이라고 지칭해서는 안 됩니다. 즉,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섬기는 아버지가 다른 하나님이고, 우리가 섬기는 아버지가 또 다른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비록 사람의 몸을 입으셨으나 하나님과 가지셨던 관계의 독특함은 오늘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 아버지와 누리는 그 관계와는 다른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가지신 관계는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과 갖는 관계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라고 합니다.
3.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치심
자,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을 때 너희는 기도할 때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도록 이렇게 일인칭 복수로 가르쳐 주셨을까 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의 수준에 맞는 화법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호칭하신 것입니다. 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예를 들어 보십시오. 어린 자녀들에게 이제 엄마가 부탁을 합니다. “너 지금 삼촌 집에 가고 있는 건데. 삼촌을 만나면 이렇게 말해야 된다. 삼촌. 안녕하셨어요? 저 그 동안 삼촌 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오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삼촌은 엄마 동생입니다. 엄마는 삼촌을 만났을 때 “삼촌 안녕하세요. 보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렇게 말 안 해요. 왜냐하면 동생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얘기를 하면 이 아이가 못 알아들어. 그래서 아이와 똑같은 일체가 된 화법으로 아이가 할 말을 아이의 마음속에 넣어주는 것입니다. 이거를 신학 용어로 ‘아꼬모다치오’라고 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 눈높이가 되어서 말씀해 주시는 것, 이거를 ‘아꼬모다치오’라고 해요. 이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표현은 아코모다치오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아주 어린 아이처럼 보시면서 “얘들아 너희들이 기도할 때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부르면서 기도하거라”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이 충분히 이해가 되셨을 거라고 봅니다.
III. “우리 아버지”
여기에서 가르쳐 주신 ‘아버지여’라고 하는 이 구절은 희랍어로 ‘파테르’라는 단어입니다. 거기에서 파더가 오고 독일어로 파테르도 거기서 왔죠. 이 희랍어에서 파테르라고 하는 이 단어는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가족 관계들 속에서 통용되는 아버지의 호칭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이 파테르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아빠라고 번역을 해야 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좀 과격한 해석이고 왜 영어에서 비슷하겠죠. 파더 이렇게 부르지 않고 대디 이렇게 부르잖아요. 그것과 중간 정도라고 보시면 되요. 그러니까 이 파테르라는 표현은 아버님, 부친 이런 뜻이 아니라 아빠하고 우리가 부르는 아버지하고의 중간정도의 관계 그래서 외부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부르지 않는 그런 종류의 아버지의 호칭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을 보면서 우리는 한줄기 빛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이 호칭을 아코모다치오의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을 때에 그때에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 제자들이 기도 속에서 구현하여야 하는 관계가 가족 관계에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잘못된 아버지 관념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이 시대와는 현저하게 다른 시대에 살고 있고, 우리의 자녀들은 예전처럼 부모인 우리를 의존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 자체가 가져다주는 충분한 뉘앙스를 우리들이 전달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번 시대를 거꾸로 돌려 한번 이 시대의 문맥으로 이 시대까지 되돌려지지 않으면 그래도 한번 우리들의 농경사회, 혹은 초창기 우리들의 근대화로 우리의 가정을 옮겨가 봅시다. 자, 아버지는 힘과 지혜의 상징이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가 모르는 것도 알고 계시고 우리보다도 힘이 세셔서 밭을 일구고 땅을 개척하고 일을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부양하고 가족들의 생계는 아버지를 의존해요. 그것이 바로 고대의 사회입니다. 요즘은 아버지들이 설 곳이 없어요. 옛날 아버지의 권위는 25일이었어요. 월급날 누런 봉투를 가지고 집에 들어와서 모든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턱 두툼한 봉투를 턱 내놓으면서 ‘생활비요’ 하고 줄 때에 엄마가 두 손으로 그것을 받는 가운데 모든 아이들은 그 봉투를 의존해요. 왜? 결국은 엄마가 거기에서 얼마나 마음을 쓰느냐에 의해서 용돈의 액수가 결정이 되고, 엄마의 마음 씀씀이에 의해서 베풀어지는 그 주권적인 용돈의 시여도 사실은 원천적으로 아버지가 봉투를 가져왔기 때문에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권위는 막강했죠. 그 내미는, 25일 날 내미는 누런 봉투는 그것은 바로 생계가 아버지에게 달렸다는 것에 대한 아주 중대한 암시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아버지를 의존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제는 가서 일만 실컷 하고, 그리고 회사 사장하고 아내 사이에만 돈이 왔다 갔다 하죠. 저도 아직 교회에서 얼마를 생활비를 주는지 정확하게 잘 몰라요. 그런 게 지금은 이러한 아버지 가족 관계에서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 그런 의존의 감정들이 잘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마다 하늘에 계신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 전적인 타자이신 신적인 본질이신 그 분을 너희들이 부를 때에는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신 속에서 우리는 바로 그런 관계를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도할 때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라고 기도하게 하심으로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가족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자신이 구원할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리고 신약 시대의 성도들을 당신의 자녀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그려내고 있는 아버지의 개념은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그 단어 하나에 모두 담아서 보여줍니다. 아버지라는 이름 안에는 하나님으로서의 엄격함과 위엄이 있는 동시에 집을 나간 자식을 눈이 짓무르도록 동구 밖에서 기다리는 어머니의 심성을 동반한 아버지의 그림도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아버지에 대한 관념 때문에 하나님을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거의 없어서 아버지인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 본 적이 없어서 아버지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비뚤어진 폭력적인 아버지를 가지고 있어서 아버지로부터 수많은 상처를 입은 사람 아버지를 전혀 존경할 수 없고 공경할 수 없도록 망가진 인격과 삶으로 우리에게 잘못 찍혀진 아버지에 대한 인상들은 정당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관념들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 안에서 우리들이 누리는 가족 관계와 가족 안에서 누리는 이 가족관계는 떨어질 수 없도록 아주 밀접한 연관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가 들어온 이후로 제일 먼저 가족 관계가 깨뜨려지고 그리고 이 가족 관계가 깨뜨려졌기 때문에 참된 아버지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우리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욱더 현저하게 방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경험한 아버지에 대한 인상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성경의 계시를 통해 정확히 알고 우리의 아버지 됨이 전달하지 못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과 속성들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아버지에 대한 정당한 개념에 도달하게 됩니다.
B. 구속을 통한 아버지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말씀하셨고 기도 속에서도 예수님은 자주 아버지를 부르셨고, 아버지와 자신은 하나라고까지 요한복음 8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기도 속에서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호칭하셨을 때 그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아버지의 관념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요셉이 경건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또 비록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경건한 아버지로서 어린 예수를 정성껏 그리고 성심을 다해 양육하고 돌보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아버지를 가르쳐 주셨을 때 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요셉을 생각하며 아버지를 부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그것도 우리는 쉽게 인정할 수 있습니다. 영원 전부터 당신의 신적인 인격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셨던 그 아버지에 대한 자각, 그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후에도 우리와는 비교되지 않는 신적인 인격 사이의 교통, 성육신을 넘어서는 신적인 인격 사이의 본질적인 교통 속에서 터득한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인상을 가지고 우리에게 그 아버지를 부르도록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최대의 과제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아버지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최대의 과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무엇이고 온 땅과 만물위에 높으신 초월적인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계시며 그 관계의 본질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누리는지 이해 하나로 수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인간을 알 수 있고, 또 인간과 세계를 정당하게 아는 것만큼만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만큼만 인간과 세계에 대한 정당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식은 하나님은 물론 우리와 이 세계를 아는 모든 지식과 함께 회기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성장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안 사람은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를 안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창조의 아버지를 능가함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이처럼 창조의 아버지 되심을 통해 신정국가의 아버지 되심을 통해서도 이미 계시되었지만 이러한 계시는 이후에 나타날 양자적 아버지 되심을 향하는 한 시작이요 과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 자신을 주목하는 일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그의 아들 삼으시기 위해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알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정당하게 터득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한 사람만 창조하셨고, 두 번째 사람은 그 사람의 신체의 일부를 재료삼아 만드셨습니다. 이유는 두 사람이지만 사실은 한 몸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고 이후로 그 두 사람의 생식에 의해서 똑같은 원리로 인류는 증식되어 갔습니다. 처음 사람이 두 번째 사람을 만드는 원인이 되었고, 두 번째 사람을 여자로 창조하셔서 그에게 이끌어 가지고 오실 때에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 문학에서 최고의 사랑의 표현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 고백이 남편과 아내 사이의 고백인 동시에 또한 이후에 그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될 모든 인류가 서로를 바라보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고백 속에서 하나의 가족과 같은 영적인 정신적인 공동체인 이루는 사회를 꿈꾸며 하나님은 이 세상의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서로를 사랑하며 누리며 살아가는 그 완전한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과 같은 사랑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 자신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누리시는 그 완전한 사랑의 교통의 모상들을 이 창조세계 안에 있는 인간의 교제를 통해 보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사랑으로 교통하시고 그 사랑이 생명의 근원이 되신 것처럼 또한 이 땅에 있는 모든 인류가 남편과 아내와 가족들이 그렇게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인 관계가 되어서 사랑의 온전한 교통을 이루고 그 속에서 생명이 이어져 가기를 경륜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교통이 영적인 실제로서 천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이 땅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인류가 그런 완전한 사랑의 교통을 이루면서 이 두 사랑의 교통이 서로 영적으로 연결이 되고, 이 이루어진 영적인 사랑의 교통이 그들의 인격과 삶을 통해 바깥으로 뻗어나가면서 완전한 하나님의 마음을 지키고 이 창조 세계의 질서들을 유지하고 증진시키고, 관계를 맺게 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의 교통을 본뜬 그 모든 교통들이 보이는 이 세계 안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상에서는 이런 교통들이 영적인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늘나라를 구성하고 이 땅에서는 그러한 영적인 교통들이 가시적인 사물 사이에서도 나타나서 하나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로 또 하나는 보이는 이 지상의 세계로 두 나라가 연관을 이루면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2. 범죄를 사랑으로 갚으심
그런데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 계획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깨뜨려졌습니다. 인간의 범죄는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에 전면적으로 도전하였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여야 할 가족과 모든 인류는 서로의 행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짓밟고 억누르고 심지어는 살인하기까지에 이르는 미움과 불신의 관계를 낳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산산이 깨뜨려진 관계 속에서 창조의 세계는 예전에 드러내던 창조주 하나님 안에 있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아름다운 모상을 더 이상 드러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창조하신 세계는 아름다움대신 추함을 드러내게 되었고, 사랑과 생명의 교통보다는 오히려 미움과 다툼의 관계의 파괴와 그리고 또한 남아있는 사랑은 일그러지고 뒤뜰어진 자기 사랑으로 흉측하게 인간의 세계 속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사람은 하나님을 버렸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사람을 버리시지 않으셨으니 그리하여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도저히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그 아름다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돌아올 수 없는 인간을 긍휼히 여기사 구원을 약속하시고, 메시야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리고 당신 자신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사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형벌을 당신의 온 몸으로 감당하므로 주님의 진노를 풀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난 우리와 진노하시는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되셔서 그래서 다시금 주님의 사랑으로 이 타락한 인류가 하나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3. 가족 되게 하신 예수님
이 일을 하나님께서는 우주적으로 이루실 터인데 이 우주적으로 이 모든 일을 완성하고 성취하는 그 날에는 다시 인류가 진정한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모든 아내와 남편을 향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사랑하며 하나님을 함께 아버지로 부르는 그런 가족이 될 것입니다. 그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임시적으로 당신의 이러한 이상들을 종말론적으로 성취해 갈 집단들을 만드시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다시 구원하여 한 가족으로 만드시게 하기 전 먼저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예수 믿게 만드셔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한 가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 하나님 때문에 형제를 만나고 하나님 때문에 자매를 만납니다.
4. 육적핏줄: 영적지체
주님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영적인 한 가족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니 육적인 핏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보혈의 핏줄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된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이 어떻게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속하여 당신의 자녀를 삼으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동일한 사랑이 우리들 지체에 미친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온 땅과 만물위에 홀로 뛰어나셔서 절대적인 타자로서 우리와 유사하지도 않은 신적인 본질을 가지신 초월적이신 그 분이시지만 우리와 관계를 맺으심에 있어서는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큰 사랑으로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자비를 보여주시며 온 땅과 만물에 뛰어나신 초월하신 그 분이 사랑에 있어서는 우리의 아버지로 내려오셔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아버지가 전달해 줄 수 없는 완전한 사랑을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 안에서 체험하게 됩니다.
(찬양)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전달해 주지 못한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십자가를 통하여, 성령의 구속의 은혜를 통하여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 사랑이 우리를 향해 영원 전부터 계셨으며, 지금도 우리는 주님을 버릴 때가 있어도 주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비록 그 분은 하늘에 계시지만 이 땅에 있는 우리의 아버지들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더 많은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기에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라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 탁월한 사랑을 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눈앞에 창조의 세계가 숨김없이 드러났건만 그것들은 우리에게 그런 아버지가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들을 아무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이 없건만 우리의 지상 아버지는 하늘 아버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늘 아버지가 누구이신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자체가 보이지 않는 하늘 아버지의 가슴 저미는 사랑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두 육신의 눈으로 하늘 아버지를 본 적이 없어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나를 본 자는 하늘 아버지를 이미 보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나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거기 계셔서 말씀하시고, 언제나 우리에게 완전한 사랑을 베푸시며, 이 세상의 누구에게도 받아본 적이 없는 자비와 은혜를 우리에게 덧입히시는 하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았을 때에 아버지 없는 후레자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개념도 없었고 인생을 사는 이치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좌충우돌하며 살았습니다. 그때에 우리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짐승처럼 살았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들이었습니다.
(찬양)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 죽을 험한 세상이 왜 이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후레자식처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마음도 먹고 있지 못하던 우리를 찾아오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셨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고난을 보면서 우리는 자기 아들을 짓이겨 죽이시면서까지 집을 나간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벌레만도 못하고, 더럽고, 모욕스럽기 짝이 없는 죄인에게 아버지라고 일컬음을 받으시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으신 것처럼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에게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 피로 우리의 마음에 바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이제껏 후레자식으로 살아오던 삶을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에 살기로 다짐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들어와 눈뜨고 보니 나처럼 그 아버지의 사랑에 붙들려 주님의 집에 있는 많은 지체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이제는 그 하나님 아버지를 내 아버지라고 부를 이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형제의 아버지가 내 아버지이고, 내 아버지는 내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저 자매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우리는 내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고 불러도 조금도 시샘하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누려도, 누려도 끝없으신 하나님 아버지이시기에 이 세상 수많은 사람이 그 분을 아버지라고 불러도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는 그 사랑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충분히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 호칭 속에서도 우리를 향한 개별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기도가 나 개인의 기도가 아니라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의 모든 아들, 딸들과 함께 손잡고 드리는 기도이기에 그들의 기도가 나에게, 나의 기도가 그들의 기도에 성내전적으로 연합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의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들로 아버지께 올리셨던 그 대제사장의 기도에까지 연결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사셨을 그 기도와 간구의 뒤를 이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아무것도 공로 없는 우리들을 당신 자신이 자기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당신 곁에 불러 가족을 삼으시고 우리로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으니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당신을 아버지라고 불러 주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무슨 소외감이나 고독을 조작할까요? 아닙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IV. 결 론: 자녀로 살아감
그렇게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이 세상에서 당신을 지극히 공경하며 완전한 사랑 속에서 당신의 속성을 드러내면서 사신 것처럼 우리를 그 분을 본받아 그 교제 속에 가족처럼 살게 하시려고 바로 우리를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예배에 나오기까지 우리의 마음을 얽어 매였던 이 세상의 근심의 사슬, 걱정과 염려의 끈에 얽매여 있는 우리 자신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그 분이 바로 여러분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버지로서 자기를 온전히 버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감춘 것이 있어도 주님은 우리에게 아끼시는 것이 없고 여러분은 주님이 없었으면 할 때가 있었어도 우리 주님에게는 여러분이 없었으면 할 때가 없었으니 이 좋으신 아버지의 품 바깥에서 행복해지기를 구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끔찍한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눈을 듭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에 깊이 감격합니다.
(찬양)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 거룩하사
찬송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근심과 염려와 모든 불안은 이 좋으신 아버지를 등지며 살아가는 사람 앞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배양하던 삶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분을 향해 얼굴을 드시기 바랍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생애 중 단 한 번도 우리의 아버지라고 일컬음을 받으시는 것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으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종종 우리를 배신하고 버려도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셔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간절히 우리를 부르시며 당신의 식탁 앞으로 나아와 그 분의 말씀의 성찬에 참여하도록 그래서 그 분을 아빠라고 부르며 그 가족 속에서 살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 아버지 안에서 고통의 눈물을 씻기워 질 것이고 그 아버지 면전에서 여러분이 비록 추한 사람이 되었어도 정직하게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의를 힘입는 사람마다 새 가락지와 새 옷을 입혀 그를 위한 잔치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바로 여러분인 것입니다.
4.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드디어 예수님께서 첫 번째 기도제목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일곱 개의 기도제목이 등장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찬송이 마무리로 나타납니다. 이 일곱 개의 기도 제목 중 세 개의 기도 제목은 하나님 자신에 관련된 기도 제목이고, 나머지 네 개의 기도 제목은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을 위한 기도의 제목들입니다. 첫 번째 기도 제목은 여섯 개 나머지 기도 제목 속에 핏줄처럼 흐르는 기도제목이 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먼저 이 기도의 제목을 설교하기 전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II. 하나님과 이름
A.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 성경에 여러 가지로 등장합니다. 이 다양한 하나님의 이름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본질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범주는 하나님과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전자에 속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고, 이 이름은 하나님의 많은 이름 중 하나님의 본명과 같은 이름이기 때문에 지극히 거룩한 이름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실제로 부르지 않을 정도로 이 이름은 극도의 존경심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이름입니다. 나머지 이름들은 하나님과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을 비롯한 만물이 맺고 있는 관계를 적시하는 이름입니다. 엘로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 엘로힘은 하나님이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유일하신 신이시며, 크고 무한한 권능으로 이 세상 다스리신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에 비해서 주님이라고 번역된 구약 성경의 ‘아도나이’는 하나님이 자기가 창조하신 모든 만물과 인간에 대한 소유권과 지배권의 관계를 적시하는 이름입니다. 이 이외에도 하나님의 이름에 동사나 명사가 붙여져서 다양한 이름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여호와 이레, 여호와 샬롬, 여호와 라파, 여호와 닛시 등등의 이름들입니다. 이 이름은 각각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당신 자신이 어떠한 속성을 가지신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B. 성경의 이름신앙
1. 불변하시는 하나님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데 이 이름과 관련한 신앙도 함께 등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이름 신앙인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뛰어나고 높으셔서 그 무엇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거나 변화되지 않으시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런 하나님의 불변성을 비행기를 탑승할 때에 자주 경험합니다. 하나의 좋은 비유가 되겠죠. 외국에 가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청대같이 비가 쏟아지거나 혹은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펑펑 내립니다. 두터운 먹구름이 상공을 뒤덮고 있고 그리고 과연 이런 날 비행기가 뜰 수 있을까 의아한 마음으로 공항을 나갑니다. 어김없이 비행기는 계획대로 뜨고 이윽고 긴 활주로를 박차고 창공을 향해 오릅니다. 창대같이 쏟아지는 비 혹은 눈에 시야가 보이지 않지만 비행기는 하늘로 솟구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터운 어두운 구름 속으로 들어갑니다. 한치 앞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의 구름의 긴 터널을 지나고 나면 발아래 구름이 보이는 창공으로 비상하게 됩니다. 보통 우리들이 보는 구름들은 낮게 뜨면 1000m 미만부터 시작해서 대게 8km까지 뜨는 구름입니다. 뭉게구름이나 이런 것들보다는 양떼구름이 좀 더 높이 있지만 가장 높이 있는 구름은 깃털 구름 같은 것입니다. 깃털처럼 생긴 작은 구름들의 흔적들은 최소한 7km 내지 8km 상공에 뜬 구름들이고, 8km를 넘어 10km창공까지 올라가면 거기에는 구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구름 위에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봅니다. 아래에서는 해가 빛을 잃었느니, 구름이 끼었느니, 날이 어두우니 해가 비치지 않는 둥 이렇게 말하지만 그것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기상 현상일 뿐이고, 10km 위에는 찬란한 태양이 언제나 빛나는 푸른 하늘이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있고 없음, 인간의 태도 여하에 따라 하나님이 변하시거나 혹은 변화를 당하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거기 계셔서 당신 자신의 존재와 속성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실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가변적인 그 이름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존재는 그렇게 변함없으시는 불변함의 하나님이시지만 당신의 이름을 이 세상 사람들 사회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이 이름은 가변성을 가진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든지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 거기 계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짓밟히기도 하고 존귀히 들려지기도 하는 가변성이 있는 이름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의 가변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 철학적으로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가족들이 미국에 있는데 여러분은 한국에서 신앙생활 잘하고 아주 모범적인 삶을 산다면 미국에 있는 여러분의 가문의 이름이 한국에서 드높아질 것입니다. 고향을 늘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고향은 고향에 있지만 고향의 이름은 타향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타향에서 올바르게 덕성 있는 삶을 살지 않으면 고향은 고향에 있지만 고향의 이름은 타향에서 짓밟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 자신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 자신을 거의 동일시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과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은 완전히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힘입어 용기를 얻기도 하고, 적과 싸우기도 하고, 이길 수 없는 시련과 환난을 이기기도 하였으니 하나님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또한 그들의 마음에 위로를 주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로 이 이름과 언약적으로 묶여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위하여 살도록 창조된 사람도 아니고 자신들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선택된 백성들도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바로 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들 속에 드높여지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되어진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신의 결심문 속에서 말하였던 것처럼 “나 뿐만 아니라 나의 이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명제”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 세계에 대한 생각, 인간에 대한 생각과 성경이 말하는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를 충격적으로 보여주는 기본적인 명제가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바로 세상 사람들의 사상에 충격을 주기 위한 성경적 진리의 요체인 것입니다. 이 복음을 풀고, 해설하고 전개해 나갈 때에 이 세상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하나님과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 인간 자신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총체적인 지혜의 지평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인데 이것들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교리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을 알고, 그리고 당신이 인간에게 주신 모든 하늘의 자원과 이 땅의 자원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도록 이 세상 속에서 이바지하면서 살도록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의 존재가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높고 뛰어나셔서 아름다우신 것처럼 그 분의 존재에 알맞게 그 분의 이름 또한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뛰어나고 높아 실제로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에 의해 이해되는 그 분의 이름이 동일한 것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이처럼 높이고 그의 이름이 존중히 여김을 받도록 이바지하며 살 때에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가변적인 은총을 당신의 세계 안에 충만하게 드러내 보여주어 인간들이 더 커다란 행복을 누리며 복되신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이름 신앙입니다.
3. 그 이름의 영광
여러분은 구약에서 하나님께 여러 번 칭찬을 받았던 믿음의 사람 다윗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블레셋과 이스라엘 군대들이 대치하고 있는 전쟁터로 갔습니다. 참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들의 안부를 간곡히 묻는 아버지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칼과 칼이 맞부딪치고 전쟁하는 군인들의 함성 소리가 울려 퍼지는 전쟁터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막상 거기에 도착했을 때에 눈에 띈 광경은 의외의 광경이었습니다. 양쪽 나라의 군사들이 마주 대치해 있고, 꺽다리 같은 어느 거인이 나와서 소리소리 혼자 발악을 하고 있었는데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보니 하나님의 이름, 그의 이름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을 현저히 모욕하여 그 이름을 욕되게 하는 발언이었습니다. 그는 예정에 없이 그와 함께 겨루겠다고 무장을 하였고, 모든 무장이 어린 이 소년의 신체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벗어버리고 물맷돌을 들고 가뿐한 차림으로 골리앗과 맞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생을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거인 장군과 양이나 치던 어린 목자의 물맷돌을 돌리고 있는 이 모습 속에서 누가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였습니다. 물론 다윗은 자기가 믿음으로 싸우면 하나님이 반드시 자기를 이기게 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지만 그러나 그 보증이 있었기 때문에 골리앗과 마주했던 것은 아닙니다. 차라리 내 손에 죽어도 내가 살아있는 눈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받는 것은 차마 볼 수 없다는 마음으로 물매를 돌린 것입니다. 차기에 있을 대선을 염두에 두고 만용을 부린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서 우러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주님의 이름이 모욕 받고 있는 그 현실을 회피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골리앗의 망발에 가까운 소리를 들으며 침묵을 지켰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 아무도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었느냐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들 중 아무도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다윗 한 사람만이 주님을 사랑한 것이 분명하니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짓밟혀도 반응하지 않았고 이 사람은 한 마디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모욕에도 치를 떨며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터에 나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성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해 보십시오. 한 해 동안도 여러분을 먹이고, 각양 좋은 것들로 마시고 또 입히셨습니다. 여러분이 애쓴 거 같았어도 여러분은 씨 뿌리고 물을 주었을 뿐 그 모든 기업을 자라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온갖 영적인 시련 가운데서도 여러분을 지켜 보호해 주셨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건강을 유지하며 살도록 해 주셨고 인간다운 교육을 받으며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날마다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죄인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게 만들어 주셨고, 외로울 때 친구가 되어 주셨으며, 궁핍할 때 주님은 돕는 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런 모든 은혜는 말하자면 전쟁터에 나간 여러분에게 지급된 보급품들입니다. 후방에 있는 아녀자들이 밤을 새워가며 군복을 깁고 주먹밥을 만드는 것은 그것 먹고 배불리 따뜻하게 잘 지내라고 군인들을 위해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 그것들을 보급품으로 보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보내주시는 것도 바로 이렇게 보급품처럼 여러분에게 지급하여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땅에 창조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된 목적인 하나님의 이름의 드높은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은 잠시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을지 모르지만 여러분의 이름보다 더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이 햇빛같이 비치는 그날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았던 여러분의 삶은 수치 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이 세상 한 귀퉁이에서 가진 것 없고, 누리는 것 없어도 주님의 이름을 위해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헌신하며 살았던 이름 없는 성도의 그 섬김은 그 날에 찬란한 영광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기도문은 첫 장을 열자마자 우리에게 폭풍같이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삶의 목적, 존재의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존재의 이유,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과연 하나님의 이름, 그 분의 영광, 그 분의 이름의 드높은 명예가 여러분에게 있어서 정말로 절실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만약에 여러분이 그 분의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았다면 여러분이 자랑하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복과 누렸던 평안, 남들보다 더 뛰어난 세상의 영광도 여러분에게는 단지 부끄러울 뿐입니다. 많이 주신 사람들에게는 더 많이 구할 것이니 오늘 여러분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거룩히 여김을 받으심
A. 거룩히 여김의 두 요소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거룩히 여김의 두 요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무한하고 광대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분의 위엄과 크고 무한한 존재 앞에 자기가 티끌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겸비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을 모두 화장하여 남은 성분을 갈아서 비료 값으로 환산하면 980원어치라고 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의 근본은 자기 사랑이라고 제가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자기 사랑은 또 다른 원인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휘브리스라고 불리는 교만입니다. 그래서 모든 죄의 출발은 지성의 교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만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죄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교만이 모든 죄의 원인이 될까요? 아담과 하와의 타락의 기사는 웅변적으로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그것을 따서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죄가 물밀 듯 밀려들어 오게 만들었습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먹으면 안 된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라’고 당신의 의지를 표명하셨지만 하와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다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을 신뢰했습니다. 그러한 신뢰 이면에는 ‘하나님이 뭘 알겠어? 내 판단이 더 정확하지’라고 하는 존재의 교만이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내리는 판단과 자신이 내리는 판단이 충돌할 때 자신의 판단을 신뢰한 교만은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의 존재보다 우위에 있고, 하나님조차도 자기 자신 아래 굴복하여야 할 존재라고 하는 생각을 반영한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뒤집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면서 잠시 잠깐 후면 사라질 하찮은 자신의 존재와는 비교될 수 없는 시간과 영원을 걸쳐 계시고 그리고 나라는 인간은 겨우 여기에 이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지만 하나님은 이 공간 안에 무한히 뻗어계시는 분이기는 커녕 오히려 이 모든 공간을 초월하는 또 다른 의미의 공간으로, 그래서 우리의 공간으로 그 분의 공간을 재면 아무데도 안 계신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디도 안 계신 곳이 없는 것 같은 또 다른 의미의 공간 속에서 하나님은 이 모든 끝없는 우주를 하나의 점보다도 못한 존재로 만드시는 시간과 영원을 걸쳐 계시며 초월하시고 모든 장소에 안 계신 곳이 없으면서도 어느 장소에도 묶이지 아니하시는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그 위대한 크기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얼마 전 아주 감동적인 다큐멘터리를 두 번이나 연속해서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문학자들의 정확한 계산을 통해 예견되는 우주의 미래였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은하계는 약 2000억 개의 항성들로 이루어져 있고, 대충 추산을 하자면 3조 2천억 개가 넘는 작은 위성들까지 합해서 3조 5천억 개가 넘는 별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분단입니다. 그리고 그 모양은 길쭉한 타원형이면서 양쪽에 바람개비 같은 것이 달려있는 모습이고,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거리가 약 20만광 년 정도 되는 크기의 은하입니다. 그리고 그 2000억 개의 별들 중 하나가 태양입니다. 우리는 보면서 끊임없이 자전하면서 공전하면서 태양은 언제나 거기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이 3조개가 넘는 별들이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우주 공간을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더 재미있는 과학자들의 예측이 있습니다. 안드로메다라고 하는 우리 은하계에서 가까운 또 다른 은하가 있습니다. 이 은하의 발견은 아주 우연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망원경으로 우주를 천체를 감상하던 사람이 굉장히 보통별보다는 커다랗고 밝은 빛을 내는 굉장히 큰 크기의 별을 발견했습니다. 이상해서 그것을 계속 탐구한 결과 하나의 별이 아니라 그것은 수천 억 개의 별들이 뭉쳐진 은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밤하늘을 망원경으로 쳐다보니 이러한 은하들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신비가 열리는 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안드로메다라고 하는 은하가 이제 무서운 속도로 우주 공간을 질주하고 있는데 공교롭게 우리가 있는 이 은하계와 충돌을 해서 소위 밀코메다라고 하는 한 덩어리의 은하계가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다음 주에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약 200억년 후에 발생할 일이기는 합니다. 아마 이 은하가 부딪치게 되면 태양과 같은 것들이 태양끼리 부딪치고, 수성, 금성, 그리고 토성과 같은 이 위성들이 위성들끼리 부딪쳐 온 우주가 불꽃놀이의 장관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 안드로메다가 우리 은하계와 부딪치기 직전까지 오게 되면 놀라지 마십시오. 광속에 거의 가까운 속도로 수천 억 개의 별이 우리 공간을 날아오면서 우리 은하계와 충돌을 합니다. 그리고 그 날에 온 우주에는 장관의 불꽃놀이가 펼쳐질 것입니다.
저는 며칠 동안 그 장면을 상상하면서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세계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우리들이 사는 이 삶은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인가 라는 명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끝과 시작을 모를 무한한 우주의 공간, 끝없이 지속되는 영속의 시간에 한 점처럼 있는 이 우주, 이 세계, 그보다 더 짧은 하루살이만도 못한 우리 인간의 존재와 시간 그리고 공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 우리의 의미는 무엇인지 정신이 혼미해지게 되지만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말한바와 같이 ‘무한한 우주의 침묵은 나를 두렵게 한다’는 것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불면 날아가 없어질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두려움에 떨며 그 분의 위엄 앞에서 엎드리는 것, 이게 바로 주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한 두 사람에게뿐 아니라 이 모든 세계에 두루 나타나게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시는 것이고, 이 세계에 대한 그런 소원을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첫 번째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의 요소는 하나님의 무한한 완전 앞에서 자신이 비천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는 동안에는 자신이 제법 온전한 존재인지를 알고 제법 쓸 만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거룩하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난 후에는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으로 돌아가게 되고, 이렇게 볼 때에 자신은 존재에 있어서 티끌 같을 뿐만 아니라 그 티끌 같은 존재가 매우 도덕적으로 더러운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치 손에 달라붙은 거미를 털어버리고 그리고 손등에 묻은 똥을 깨끗이 씻어내듯이 그런 것과 함께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역겨워할 것처럼 자신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그따위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에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주님이 크고 자기는 미천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티끌 같은 인간과 무한한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시기 위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두 성품을 직시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이 지은 그 모든 죄를 율법의 요구대로 짊어지고 율법에 판단에 의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신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울러 당신이 그렇게 죽임을 당하시면서도 우리를 여전히 죄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에서 씻음을 받아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그리스도의 고난 앞에서 읽게 됩니다.
B. 완전한 의존과 사랑을 바람
이때에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의존과 사랑을 바라는 존재가 됩니다. 티끌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거의 없는 것과 같은 존재감에 포기를 경험하고 그 분이 지극히 영광스러우시고 완전하시기 때문에 자기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덕스러운 삶을 살아도 그것으로서 구원을 얻을 수 없고, 그것으로서 하나님께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분의 자비를 의지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소망도 없다는 사실을 절박하게 깨닫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며 사는 삶입니다.
C. 이 땅에서 그 이름을 기뻐함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편지에요.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의 삶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에 관한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에요.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 이런 편지를 씁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얍삽하고 그리고 야비한 삶을 살면 여러분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을 향해 이런 편지를 쓰는 겁니다. “여러분 제발 하나님을 믿지 마세요. 거기에는 얍삽하고 신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이고 그리고 정말 확신이 없는 삶을 산다면 여러분은 이런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계시지만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지는 않으십니다. 주님은 있지만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챙기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지극히 광대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가 티끌인 것을 알고 그 티끌인데도 그것은 아주 더러운 티끌이 되어서 주님의 자비와 사랑 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 살고 자기의 일에 골몰하기 때문에 이 결정적인 사실을 수시로 잊고 삽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리스도가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를 묵상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게 대한 신성 모독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눈을 들어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끝없는 광대하심 앞에서 자신은 티끌일 뿐이며 그 분의 완전하심 앞에서 자기를 어찌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저주받을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지극히 낮아지는 겸비함으로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고 그 분께 매달려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서 주님께서 그렇게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많은 영적인 은혜, 그리고 육적인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는 모든 일반 은총의 복들을 사용하여서 주님이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 그 분의 이름을 기뻐하며 이 땅에서 그 분의 이름을 기뻐하며, 그 분의 이름을 위하여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디선가 주님의 이름이 높이 여김을 받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 장소가 당장 내 가족이 아니라 땅 끝에서 들려온 소식이라도 그는 가슴이 뛰고 기쁜 마음으로 가슴이 벅차올라야 합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다는 소식이 들어오면 그 분의 이름이 높아짐을 위하여 이바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분의 이름이 짓밟힌 것이 마치 자신의 죄악이 되는 것처럼 가슴을 찢으며 비통해 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운명이어야 합니다.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인생의 의미는 목숨의 길이와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긴 인생을 살아도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산 적이 없다면 그는 처음부터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과 다름이 없습니다. 짧게 살아도 살아있는 그 날이 주님의 이름을 기뻐하고, 그 이름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모든 것을 그 이름의 영광에 드높임을 위하여 사용하며 살았다면 그는 결코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IV. 결 론: 그 이름을 위하여
나는 이 설교단에서 여러 차례 눈물로 여러분에게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무위도식하지 않는 삶은 팔다리를 버르적거리는 삶이 아니라 그 이름의 명예를 위하여 이바지하지 않으면서 사는 모든 삶이 무위도식하는 삶입니다. 지난 한 해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 목이 메입니다. 이 벌레 같은 인간, 주님을 거스르는 것을 마치 자신의 본분인 것처럼 주님의 계명에 어긋나게 살아온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죄들보다는 짧은 눈물의 참회를 더 기억하셨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주님께 끼쳐드린 불명예의 삶보다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손톱만한 헌신의 삶을 주님은 더 소중하게 여기셔서 우리를 인정해 주셨고, 우리를 이끌어 주셨기 때문에 거미줄 같은 믿음을 가지고라도 한 해 동안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의 사랑의 성품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계획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하든지 우리들이 주님이 주신 모든 하늘과 이 땅에 신령한 복을 아울러 사용하며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기를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쏟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사셨던 것처럼 그렇게 이 세상에서 살기를 기대하시면서 오늘도 용서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기회를 주시고, 우리를 책망하시되 아주 멸망하지 않게 하시고, 때리시고, 또 돌아서서는 어루만지시며 하나님의 어머니 같은 사랑을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거슬러 모욕하는 삶을 살았던 것은 불신자일 적에 살았던 삶으로도 충분합니다. 우리 앞에 있는 날들은 너무나 짧고 지나온 날들은 많이 흘러갔지만 주님이 누구신지를 몰랐기에 또 때로는 알았지만 그렇게 살 힘이 없었기에 우리 맘대로 살았습니다. 이제는 다시 한 번 새롭게 일어나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삶으로 여러분을 창조하고 구속하신 하나님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처럼 그 분을 사랑하고, 아무도 위하여 울어주지 않는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지구촌 어느 한 구석에서나마 흐느끼는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애통할 것이지만 주님이 위로해 주실 것이고, 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만 하나님이 이 세상이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그들을 배부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고난을 당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과 함께 주님의 보좌 앞에 둘러설 미래의 주역들입니다. 여러분이 이 주기도문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나라가 임하옵시며 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번째 간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한글어 번역은 이전의 어투를 사용한 것인데 ‘나라이’라는 말은 주격 조사로서 ‘나라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기도하여야 할 것이 있는데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으니 ‘그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렇다면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성경 전편에 흐르고 있는 매우 중요한 개념, 하나님의 나라와 마주하게 됩니다. 만약에 이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주기도문의 이 두 번째 간구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후 신약에 전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도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의 연관을 우리들이 만나게 됩니다.
A. 하나님 나라의 개념
1. 바실레이아-말쿳샤마임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봅시다.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 라고 하는 하나님의 그 나라라고 하는 희랍어의 표현은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님에 의해서 비로소 생겨난 개념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별도의 설명을 덧붙이시지 않아도 예수님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그들도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가리키는 지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라라고 하는 것은 나라가 나라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영토, 국민, 주권입니다. 즉, 나라가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만의 소유인 영토가 있어야 하고, 두 번째는 그 영토 안에 사람이 살고 있어야지 나라가 됩니다. 또 사람이 살고 있고, 나라가 경계가 있어도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나라 자신에게 있어야지만 비로소 그것을 국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이전 일제 시대 때 나라를 잃어버렸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땅 덩어리도 그냥 있고, 백성도 그냥 있었는데 주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사실은 나라를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세 개의 요건이 구비될 때에 국가라는 개념이 성립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이 바실레이아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나라도 똑같이 영역이 있고, 거기에 사람이 있고, 그것을 다스리는 통치하는 왕권이 있을 때에 그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이 표현은 구약 히브리어에서는 '말쿳샤마임'이라는 낱말로 나오는데 샤마임은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늘을 가리키고 말쿳은 왕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하늘의 왕권, 하늘의 왕국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은 왕권입니다. 영토가 있고 거기에 사람이 있지만 중요한 개념은 왕권입니다. 그 왕권이 확립되어 있을 때에 영토도 있고 국민도 있고 왕국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였습니다. 국민은 있었죠.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통치를 받았습니다. 왕권도 있었죠. 그러나 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거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2. 하나님 나라의 핵심
구약에서 이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인 왕권은 크게 세 가지와 관련하여 등장을 하게 되는데 첫째는 하나님 자신과 관련하여 등장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직접 왕권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그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왕권은 아주 실효적인 통치를 이루는 왕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왕권을 하나님이 실현하실 때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을 통해 이 일들을 이루셨는데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이 가지고 계신 왕권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행사하게 됩니다. 그들이 순종하고 그 분의 통치에 복종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복주시고 불순종하고 어기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인 왕권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나타난 모습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는 또 하나의 왕권과 관련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야와 관련하여 나타나는 왕권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고,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지만 이 나라는 불완전한 나라고 이후에 보다 하나님의 왕권을 직접 수여받은 강력한 통치자와 구원자가 나타날 터인데 그 분이 바로 메시야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이스라엘 나라는 이 메시야가 아닌 인간 왕들이 다스리던 나라와는 비교될 수 없는 평화와 권능과 영광의 나라라고 하는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이 메시야와 관련되어 언급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다니엘서 7장 13절에 인자와 같은 이가 등장하는데 이는 아주 메시야를 능가하는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신적존재로서 이 영원한 인자와 관련되는 하나님의 왕권입니다. 이 분이 메시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이 메시야가 지극히 영광스럽게 된 그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서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나라를 이 세상에 완성한다는 왕국의 개념과 연관 지어서 하나님의 나라의 왕권이 해석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나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은 아주 쉽게 이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왕권과 관련하여 구약에 개시되었을 때에 사실 그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신약의 영적 하나님의 나라와 연속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참된 신앙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직접 통치하고 다스리셨습니다. 그러다가 나라에 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이 가나안에서 통치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완전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 나라의 임금들은 순전한 임금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고, 제사장과 선지자도 마찬가지로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 중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곧게 전해주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제사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인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연약함에,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죄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왕국의 이상을 온전히 그 땅의 나라에 구현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불완전한 나라의 궁극적인 원인이 땅의 크기나 땅의 넓이나 백성의 크기, 그리고 왕들의 권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온전한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궁극적으로 죄로부터 구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주님은 이 두 가지 목적을 완성하실 메시야의 도래를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마자 약속된 것이었고, 그 약속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신정국가와 가나안 정복을 통해 구체적으로 발전해 왔던 것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메시아는 신약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그 메시야의 통치는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왕권을 가지고 각 사람들을 죄에서 구속하여 이제는 이 땅에 있는 넓이와 크기를 자랑하는 세상의 물리적인 영토의 나라가 아니라 어디에 흩어져 살든지 그들 마음속에 임하는 영적인 나라로서 영역을 삼으시고, 성령으로서 그들을 은혜로 통치하심으로서 당신의 주권을 삼으시고 그들 모두를 자기 나라 위하여 헌신하는 백성들로 삼으심으로 메시아의 왕국을 이루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승리하시고 이 세상 나라의 질서들을 완전히 새롭게 하셔서 이 땅의 하나님의 완벽한 통치가 이루어지게 하심으로서 영원한 세계에 들어갈 그런 나라의 전망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가르쳐 주고 싶어 했던 하나님의 나라의 그림자요, 전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역사 속에서 이렇게 구약이 가르쳐준 순수한 하나님 왕국의 사상, 메시야 왕국의 신학을 변절시켰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이 처한 역사적인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아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나라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나뉘어진 나라 중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여러분이 역사에서 배운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에 의하여 멸망당합니다. 그리고 남쪽에 있는 유다 왕국은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들이 이제 1940년대에 새로운 시온 국가를 건설하기 전까지 약 2500년이 넘는 세월동안을 전 세계에 흩어져 유리방황하며 살게 되는데 이들을 가리켜서 ‘디아스포라’ 곧 ‘흩어진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한은 땅을 차지하고 다시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상은 다윗 왕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 왕국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 나라의 역사에서 보면 작은 나라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상할 수 있는 자기의 역사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태평성대를 이루고 주변의 나라를 정복하고 작은 나라들이 다윗의 왕국에 복종하여 줄줄이 조공을 바치러 오던 그런 지역의 맹주였던 다윗 왕국의 시대를 그리워하고 그런 날들을 다시 오게 하실 것이라고 믿는 신앙 안에서 살았고 그 신앙이 오늘의 이스라엘을 건설하게 한 것입니다. 예전에 왕들은 결함과 부분적으로 무능력이 공존하는 왕이었지만 이제 이 주님이 보내실 메시야는 신은 아니고, 신에 가까운 존재로서 메시아가 와서 왕국을 건설하게 될 것이고, 아주 탁월한 지도자로서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하여 제 2의 다윗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하는 사상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기대는 디아스포라가 된 이후로부터 계속해서 이어져 왔고, 역사 속에 위대한 인물이 나타날 때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일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꿈꾸고 기다리는 메시야는 정치적인 메시야였고, 그것은 그들이 꿈꾸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메시아의 왕국이 이 세상의 강력한 나라였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배척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강력하게 환영도 받으셨습니다. 수만 명이 에워싸고 예수살렘 성을 입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찬송 했습니다. 호산나라고 하는 말은 정통 히브리어인데 ‘호쉬아나’ 라는 뜻입니다. ‘나’는 영어로 'please' '제발'이라는 뜻이고, ‘호쉬아’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제발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찬양을 드렸으니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순수한 찬양이 아니라 잘못된 메시야에 대한 그림과 오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왕국 그림 두 장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에게 갖다가 투영하는 그림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의하여 배반을 당하기 전 여러분은 뱃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수만 명을 먹이신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임금 삼기 위하여 추대하고자 하였고 예수님은 도망을 치셨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그 놀라운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예수님이면 로마나라 하나 정도는 기적의 능력으로 때려 높이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여 로마까지도 삼켜버린 위대한 제국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 신앙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설명이 명쾌하죠. 계속 들어보십시오. 신구약을 보는 눈이 열릴 겁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이 구약에서 제시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오게 하시고 싶으셨던 메시아의 왕국은 그런 나라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왕국은 신약에 이루어질 메시아 왕국의 껍질일 뿐이고, 그 껍질이 깨뜨려지고 거기에서 싹이 나고 그리고 거기에서 나무가 자람으로써 실현될 왕국은 이제 더 이상 영토에 깃발을 꽂고 이 세상 나라 왕국과 더불어 영토를 다투는 그렇게 세워진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자주 당신 자신을 인자라고 소개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그 분의 본래의 신분은 신자에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예수님께서는 공개석상에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제자들에게도 그 말씀을 잘 안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만약에 당신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하면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왕국 사상에 불을 던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이렇게 왕국을 다스릴 큰 이 세상의 인간적인 지도자로서 로마를 뒤엎고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되찾아주실 분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B. 하나님 나라의 세 차원
1. 이미온 나라: 예수님의 오심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세 차원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선 첫 번째는 이미 온 나라입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만약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분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물론 영토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마는 영토를 정복하는 방식이 전쟁을 해서 이 세상 나라를 굴복시키고 그 왕을 끌어내고 예수님이 왕관을 쓰시고 왕이 되는 그런 종류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가 바로 사람들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가 있는 그 나라인 것을 명백히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공적인 생애에 들어서시자마다 커다란 능력과 기적이 동반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시대가 임하였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던 나라는 메시야가 말을 타고 칼을 들고 나타나서 거대한 무리들의 대장이 되셔서 그래서 로마 군대와 싸워 가는 곳마다 다윗처럼 이겨 로마를 이 세상에서 몰아내고 그 나라까지 먹어버려 로마와 같은 더 큰 나라를 이스라엘로 건설하는 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왜곡된 메시아 왕국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칼 한 자루, 창 한 자루 없이 이 세상에 오셨고, 군대를 조직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셔서 그 분이 하신 일은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병든 자를 기적의 능력으로 고치시고, 그리고 귀신 들린 자를 내어 쫓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먹이심으로써 하나님이 도입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의 나라인 동시에 사랑의 나라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사단이 장악하고 있었던 나라는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단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인간을 굴복시킬 마지막 카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이 두려워 죄에 종노릇하고 있을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친히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의 생명을 약속하심으로서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여 하나님께로 데려가실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계획을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죽음을 통과하고 나면 누리게 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앙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와 함께 도입되었고, 도입된 그 나라는 힘 있게 하나님께 복종한 백성들을 사용하여 그 하나님의 왕국의 힘들을 놀라운 영적인 방법으로 정복해 나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진리의 복음과 약속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이었던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로마에게는 이 땅의 껍질을 지배하게 하셨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 마음속에 복음과 성령을 심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로마가 아닌 로마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 보이는 가이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고 모시는 백성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로마는 껍질만 소유했고, 진짜 그 내용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께서 이 보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왕국을 통치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온 것입니다.
2. 성취될 나라: 신적통치의 실현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또 한 차원이 성경에서 계시되고 있는데 이것은 성취될 나라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신적인 통치가 실현될 나라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에서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다고 되어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나라가 이제 당신이 도입했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이 지상의 생애를 마치시지만 이 나라가 결국은 이 세상에서 완성될 것을 전망하셨던 것입니다. 그 날은 바로 우리 모두가 부활하는 그날이 될 것이고, 그 전에 이 세상의 많은 나라와 민족에 복음이 전파되고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날이 있게 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이 모든 세상을 심판하시고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에 대적하고 불순종하던 자들을 지옥에 던지시고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완성될 터인데 그 나라가 바로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두 번째 차원인 것입니다. 이 나라는 아직 오지 않은 나라이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은 오직 않는 하나님의 나라 그 틈바구니 사이에 존재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입증되고, 교회적인 차원에서도 입증되고, 이 세상적인 차원에서도 입증이 됩니다. 첫째로 이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차원에서 입증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의 죄를 회개합니다. 우리가 거듭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신뢰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십니다. 신분으로는 진노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상태에서는 죄와 사망의 사슬에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묶여 있다가 거기에서 풀려나와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완전히 우리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됩니다. 사망이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이 우리 주위에 넘쳐나도, 때로는 연약하고 때로는 죄의 결과인 고통이 우리의 육체를 앗아가고 우리의 정신에까지 고통을 주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는 흔들림이 없고,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있죠.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시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진리의 빛은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이미 왔지만 그러나 완전히 성취된 나라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에 틀림이 없으나 하나님만 사랑할 때도 있는가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경향 때문에 이전에 이미 버렸어야 했던 자기를 향한 사랑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세하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만 은혜에서 멀어지면 또한 우리는 내 뜻대로 살아보고 싶어 합니다. 은혜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 하지만 부분적으로 죄의 유혹을 받을 때에는 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도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악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우리 안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입증됩니다.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졌고 그 분의 통치를 받고 그 분과 생명적으로 결합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결코 누구도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헤롯 이후로 이 땅에 이루어질 교회를 박멸하기 위해서 수많은 악한 정권들이 결탁하고 기독교를 핍박하였지만 보십시오. 기독교는 멸망하지 않고 교회는 완전히 파멸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나서 오늘 번성하고 있고, 마지막 날이 올수록 이 땅에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더욱 번영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견고한 하나님의 왕국으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질문할 것입니다. “목사님 그렇다면 사도행전 시대 때 그렇게 복음의 전성을 이루었던 일곱 교회를 비롯해서 많은 신약의 교회들이 지금은 이슬람 지역으로 떨어지고 그들은 그 장소에서 알라를 경배하고 있는데 역사적으로 교회가 멸망한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의 개념을 둘로 나누어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편 교회와 그리고 지역교회입니다. 지역 교회는 망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박해를 받아서 폐쇄되기도 합니다.
북한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북한에다 교회를 짓자고 모금운동을 하더군요. 저는 북한을 두 번을 방문하고 나서 그럴 필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가는 곳마다 두 가지 건물이 있는데 하나는 그들이 지어놓은 문화회관입니다. 북한 정권이 정치로부터 백성들의 눈을 돌리기 위하여 작은 마을마다 문화 회관을 세웠습니다. 거기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온갖 예술 행위들을 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공산당이 통치하는데 도움을 주는 한도 안에서 말입니다. 나라가 통일이 되고 난 후에 그것을 매입하여 교회로 쓰면 최고이고, 주민들이 늘 가던 곳이기 때문에 정말 좋습니다. 언젠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저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문화회관 옆에 농기구와 비료 같은 것들을 쌓아두는 제법 큰 크기의 잘 지어진 창고가 있었습니다. 그 창고를 돌아보니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아서 천장을 쳐다봤더니 처마머리 지붕 꼭대기 위에 조그만 기둥이 하나 있었는데 눈으로 보아도 그것은 위에 붙은 십자가를 잘라낸 흔적이었습니다. 그런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동리가 많이 있습니다. 최신식으로 지은 교회당도 좋지만 그것을 깨끗이 옛 모습대로 복원하고 수리해서 거기에서 만약에 통일 후 그 마을에 개척교회 예배를 드린다면 우리의 감격은 새로운 남한의 자재로 새로 지은 화려한 신식 예배당보다 더 큰 감동을 줄 것입니다.
이처럼 지상에 있는 교회는 없어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보편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교회의 영적인 연합인 보이지 않는 이 교회는 결코 무엇에 의해서도 멸망되지 않고 왔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틈바구니에 끼어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도 바로 이렇게 하나님께 복종하고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따라 사는 은혜로운 백성들이 있는가 하면 은혜에서 멀어지거나 혹은 사람의, 교인의 무리수에는 포함되었지만 사실은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닌 사람들이 섞여서 죄를 짓고 하나님의 교회의 질서에 반항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고 악을 행함으로써 교회 안에도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오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즉 그래서 이 세상 나라가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처에서 일어나는 교회 속에서의 나쁜 소식들은 그 교회 안에서 세상 나라가 이미 온 나라를 이기고 있는 죄의 승리의 증거입니다. 교회마다 울려 퍼지는 승리의 소식,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죄인들이 아무리 험한 인간이라도 그 교회 가면 새사람이 된다고 하더라고 하는 이 은혜로운 간증들은 그들 가운데 이미 온 나라가 아직 남아있는 세상 나라를 축출하고 이겨내고 있는 광경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세상에서도 입증됩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미 왔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도처에서 죄와 타협하고 미끄러지지만 또한 도처에서 충성스럽게 이 나라를 전파합니다. 가족들을 전도하여 예수 믿게 만들고 막살던 인간들이 변화되어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이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조선을 망조에 들게 한 커다란 것이 있었는데 관료들의 부패와 축첩 그리고 도박 이 세 가지였습니다. 이 도박, 그리고 도박과 함께하는 음주와 흡연, 이것이 수많은 젊은 남자들의 생명을 앗아갔고 1920년대 조선 남자들의 평균 수명이 40세가 안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나라가 완전히 병들어 있을 때에 이 나라를 고치는 신문화 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이 지금도 인터넷에 들어가서 1920년대의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를 들여다보면 논설에 강력하게 축첩제도와 조혼제도의 풍습을 규탄하는 글들을 지금도 찾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20년 전으로 시계를 거꾸로 돌려도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동력을 얻기 위해 어린 여자 아이를 며느리로 맞아들이고, 또 축첩은 양반의 권위의 상징이었고 체면이었습니다. 양반이 되었는데도 첩이 없으면 그 집안이 부실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남자는 이런 역사에 대해서 향수를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생각하십시오. 목사들이 모여 앉아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슬람에는 부인을 다섯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 법으로 허용이 되었습니다. 옆에 있는 어느 목사가 ‘야, 그거 참 좋겠다’. 그랬더니 옆에 있는 목사님이 얘기했습니다. ‘하나 데리고 사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다섯이라니 끔찍하다’. 그럴겁니다. 그런 축첩 문화가 사라지기 시작한 게 교회에서 시작된 겁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강력하게 탄핵하고 선교 초기에는 합의점을 찾았어요. 그래서 예수 믿기 전에 얻은 첩은 어쩔 수가 없다, 왜 그걸 다 짤라서 돌려보내면 집안이 붕괴가 되니까 물론 에스라서에서는 그런 사람들도 돌려보내는 기사가 나오지만 지혜롭게 잘 했어요. 그래서 예수 믿기 전까지 얻은 거는 기정사실이므로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후로는 안 된다. 그래서 이후에 첩을 얻으면 치리했어요. 출교시켜 버렸다구요. 그렇게 하고 이제 예수 믿은 사람으로서 그 시대의 풍속을 따라서 축첩을 하면 교회에서 출교시켜 버렸어요. 그렇게 징계를 했어요. 이것이 운동이 되면서 이러면서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이제 이 사회가 완전히 짧은 시간 내에 그렇게 짧은 시간내에 완전히 축첩제도를 종식시켜 버린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모여서 반장을 뽑는 선거도 교회에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여성들을 하찮게 알다가 여성들을 매우 중요한 존재라고 사회적인 인정을 받게 해 준 것도 교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슬람과 지금도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렇게 지금도 극도로 기독교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 줄 압니까? 북한이 왜 저렇게 기독교를 두려워하고 어떤 식으로든지 기독교가 자신의 나라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선교사들 중 총이나 칼을 들고 선교 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총 한 자루, 칼 한 자루 없어도 그들이 전하는 복음, 그 복음을 통해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향력이 창이나 혹은 칼, 대포보다도 더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사회를 완전히 뒤집어 놓아버리고 어느 부분을 고치면 기독교와 양립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본질 자체를 뜯어고쳐서 변화시키지 않는 한 기독교는 지칠 줄 모르는 용기와 담대함으로 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힘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를 그렇게 두려워합니다. 제가 최근에 만난 이란 쪽에서 선교하고 있는 전문가의 증언에 의하면 이란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사형입니다. 즉시 사형이래요. 그런데 지하의 교회가 3000개가 넘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여성들입니다. 한번 그 복음에 접촉되어서 빨려들면 완전히 매료가 되어서 목숨을 걸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제와 공개할 수 있는 일이지만 우리 선교팀이 모 이슬람 국가에 가서 단기 선교를 했을 때 아무도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마는 젊은이 두 사람이 밤중에 찾아와서 예수를 믿고 싶다고 알려지면 즉시 사형입니다. 이게 바로 강력하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역사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이미 온 나라와 그리고 성취될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서 그래서 우리들이 그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헌신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하나님 혼자 그 나라를 오게 하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완성하실 나라이지만 그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확장되는 이 세상의 나라는 인간의 순종과 헌신을 사용하셔서 확장해 가기로 다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열렬하게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고,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이 세상 나라의 그리스도의 복음이 속속들이 파고들어 그 정신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면서 살면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는 쬐끔해도 이 쬐끔한 교회가 큰 교회가 못했던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아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명예이고 행복이고 기쁨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영적으로 번영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지금 오늘 예수를 믿고 여기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 분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십니다. 떡이 필요하면, 음식이 필요하면 음식을 주시고, 우리에게 명예가 필요하면 명예를, 지위가 필요하면 지위를 주시고, 또 우리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하면 은혜를 주시고 어떤 뜻있는 일을 위하여 동역자를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동역자들을 붙여주십니다. 이 놀라운 일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이 모든 축복들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이번 주간에 3일 동안 캄보디아를 방문하고 캄보디아에서 선교사들을 위한 집회를 했습니다. 여직까지 모인 중에 최대의 수가 모였습니다. 220명이 호텔을 가득 매웠고 어린이들도 80여명이 모여서 벌써 많은 아이들이 회심했다고 하는 소식들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 땅을 보면서 가슴이 벅찼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예수에 그토록 열광을 하는데 가는 사람이 없어요. 가서 학생들을 끌어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만 하면 수학될 청년들, 그들을 얼마나 놀라운가? 그래서 제가 선교사들에게 나의 고민을 제안했습니다. 여기에서 한 번 우리가 예수 잘 믿는 사람은 모두 목사와 선교사만 만들려고 하는데 그러지 말고 이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예수 믿는 모든 대학생들을 한번 모아 놓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확고히 하자. 그래서 그들이 선교사와 목사만 되지 말고 과학자, 엔지니어, 컴퓨터 전문가, 정치가, 그리고 교수, 그리고 기업가 혹은 외국 업체의 직원들이 되게 해서 그들이 있는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는 그런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 이 젊은이들의 가슴에 성령과 복음의 불을 지르자고 말입니다. 이런 나라가, 이런 나라를 전 세계에 불을 던지며 이렇게 사람들의 가슴속에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헌신하고 이미 임한 나라가 확장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셨고 죽이지 않고 아직 살게 하시고,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헌신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반역입니다. 반역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불탔어요. 이 캄보디아에 불을 던지고, 중국에 불을 던지고, 이슬람 국가에 불을 던지고, 아직까지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있는 이 동남아의 많은 나라에게 불을 던지자고 말입니다.
3. 영원한 나라: 완성된 영원나라
하나님의 나라의 세 번째 마지막 차원이 이제 완성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결국은 이 세상 나라를 모두 완성하고 난 뒤에는 이제 죄와 그리고 사망이 지배하지 않는 악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순결한 나라가 될 것이고, 그때에는 자연에 맺혔던 저주도 모두 풀리게 되어서 이 자연은 창조당시의 영광스런 광휘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아름답고 영원한 나라가 충만하게 이루어진 가운데 이 나라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 주님의 영광과 위엄을 송축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차원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이 기도는 결국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결국은 우리의 성화를 완성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죽을 때에 완성하지 못한 우리의 성화를 하나님이 단번에 성취하셔서 우리를 낙원으로 데려가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때까지 우리가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전망하며 아직까지도 그분께 복종하지 않고 있는 이 세상의 나라를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온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며 사는 것, 여기에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III. 결 론: 신적통치를 갈망함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땅 끝까지 단 한 뼘의 땅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고, 그리스도의 왕권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은 나라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의 혀가 굳어지고, 우리의 핏줄의 피가 식어지고, 우리의 심장의 고동이 멎을 때까지 우리를 구원하여 새 생명을 주고 새로운 소망가운데 살게 한 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으로 전파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모든 전력을 가다듬어 이 일 하나에 매진해야 합니다. 교회가 분쟁과 다툼을 일삼고 그들 가운데 시기와 멸시를 일삼아 분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쟁을 위하여 쓰도록 공급하신 하나님의 자원들을 아군들을 죽이고 죽는데 사용하는 반역의 행위인 것입니다. 이것은 처단되어야 할 불신앙의 행위이고 어떤 식으로든지 이것은 정당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생명과 자원,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자원과 이 물질적인 모든 자원들을 모두 사용하여서 이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야 합니다. 나는 이번에도 캄보디아를 가면서 물어보았습니다. 한 대학생이 생활의 염려 없이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서 필요한 액수의 돈이 얼마냐 그랬더니 한 달에 15만원이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했어요. 캄보디아의 젊은이들을 한 1000명만 장학생을 선발해서 그래서 장학금을 지급하고 그들이 염려 없이 신앙과 자신들의 학문에 전념하며 예수를 알아가게 만들 수 있다면 20년 뒤에 캄보디아는 그 사람들에 의해서 변화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것들은 바로 이렇게 신적 통치를 갈망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하여 헌신하며 살도록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자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 나라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야 할지 우리에게 보여주셨으니 그 분은 그렇게 자신의 생명과 소유를 모두 바쳐 자기로 말미암아 도입될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당신 자신을, 신명을 바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전망과 기대를 가지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크고 작은 갈등들은 바로 이 전쟁에서 탈영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갈등입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분투하며 살 때에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의 마음은 하늘나라가 이루어질 것이고, 여러분은 하나님을 뵙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6.나라가 임하옵시며 2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녹취자: 장소연
I. 들어가는 말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도입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 나라가 이 세상에서 온전히 완성될 때까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세상 나라 틈바구니 사이에 끼어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도입하시고, 도입된 그 나라가 확장되어 가게끔 하시는 방법은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지 않고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이 기도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II.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A.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1. 구약의 경륜: 율법→복음
그렇다면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각각 이 일을 구약과 신약의 경륜을 통해 나타내셨다는 사실을 잠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의 경륜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다음 그들에게 율법을 주십니다. 이 율법은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주신 것도 아니었고, 또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위로서 그 율법을 준행함으로써 구원을 얻으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이 이미 구원받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그 표준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은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표준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저히 그 율법대로 살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모든 이 율법을 따라서 살 수 없는 자신들에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베풀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로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고 구원하신 뜻들을 이루어 가도록 자신들에게 임하게 하실 매우 특별한 구속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메시야의 필요성과 함께 이해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2. 신약의 경륜: 복음→율법
이에 비해서 신약 시대의 경륜은 먼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보여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사심으로써 보여주었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고난당하시는 모든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구원해 놓은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율법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셨으니 결국 이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구원받은 우리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뜻인가를 보여주는 한 좌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는 율법을 통해 복음을 보이시고, 신약에서는 복음을 통해 율법을 보이심으로서 이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어떻게 이 세상 나라의 백성들과 구별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백성들인지를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B.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의 날카로운 대조를 신약 성경에서 읽어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침략하고자 하는 이방인들과의 대조를 보았지만 신약 시대에는 이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고 아직 그 나라가 온전히 이 땅에 실현되지 못하도록 반항하고 있는 이 세상 나라 사이의 날카로운 대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먼저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상 나라의 사람은 세상 사람이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은 하나님 사람입니다. 세상 나라는 이 하나님의 나라와 다릅니다. 이 세상 나라는 국경과 국경이 맞닿고 이루어지는 그렇게 나뉘어진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국경선은 물리적인 국경선이 아니라 영적인 국경선입니다. 수많은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사이에 걸쳐있습니다. 이 모습은 세상에서 뿐만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분명합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가 곧바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나라 백성답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답지 않은 사람들은 사실은 물리적으로는 교회에 속했으나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천국을 비유하시기를 ‘어부가 그물을 던져 고기를 낚는 것과 같으니’ 하신 비유에서도 분명해 집니다. 어부가 넓게 그물을 쳐서 고기를 낚습니다. 그 고기들을 일단은 배 위에 끌어 올립니다. 그러나 모든 고기를 가져가는 것은 아닙니다. 먹을 수 있고 쓸 수 있는 고기들은 따로 갈라놓고 먹지 못하는 고기는 다시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그물은 교회이고 그 그물에 낚인 고기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알곡과 가라지를 가르듯이 온전히 어부가 필요한 고기와 필요하지 않은 고기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질서의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에는 세상의 임금들이 주인이었고 황제들이 주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질서를 짰고 그리고 그 질서를 따라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 질서에 거스리는 자는 반역으로 처단하였고 더 많은 땅과 백성들을 얻고 더 많은 군사를 일으키고 더 많은 권력을 소유함으로 자기의 질서를 이 온 세상에 확장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셔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는 이제 이런 왕들과 그리고 황제들이 다스리는 시대가 지나가고 난 뒤에는 각자가 모두 가치의 중심이고 존재의 중심이 된 나라입니다. 각 사람들은 이제 각자 자신이 이 온 우주와 세상의 중심이 된 것처럼 그렇게 중심을 세우고 질서들을 만들어 갑니다. 사람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돈을 벌고,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은 그 자원들이 바로 이런 질서들을 더 넓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돈과 권력으로 사람들을 굴복시키면 그들이 자기의 뜻을 따라 자기의 마음에 드는 질서에 순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세상 나라는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 나라도 평화를 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도 평화를 원하지만 세상 나라에는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모두 이런 질서를 세우기 때문에 어디에선가 이 질서들은 서로 충돌하게 됩니다. 사람들 사이에 개인적으로 이런 충돌이 있게 되면 다툼과 시기와 분쟁이 되고 나라 사이에 이런 충돌이 있게 되면 전쟁으로 비화됩니다. 이에 비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자신이 중심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분에게 복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질서들이 펼쳐지고 그 질서에 사람들이 순종하고 복종하며 이루어진 단 하나의 파문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입니다. 신앙을 잃어버리고 은혜가 떨어진 사람들이 잠시 자기 자신이 또 다시 주인이 되어서 자기 사랑의 질서를 세우지만 은혜를 받고 나면 곧바로 깨뜨려져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 사랑의 질서로 돌아오게 됩니다. 크고 작은 많은 질서들을 세우려고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보다 더 강력한 진동할 수 없는 질서가 있어서 그것들이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복종시켜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로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는 다른 사랑을 가진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는 자기 사랑을 끊임없이 확장한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확장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확장된 나라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사랑에 부합한 나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때에는 결코 예수 믿지 않습니다. 예수를 진실하게 믿게 된 모든 사람들은 필요해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자기의 혼자 힘으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은 후 그들은 이제 어느 한 순간 자신의 이 모든 불행과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이 바로 너의 그 죄 때문에 대신 형벌을 당하신 것이며 하나님이 그 아들을 너를 대신해 형벌을 당하게 하신 것은 너를 구원하여 자기의 자녀 삼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깨달으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이 회개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동반합니다. 예수를 믿으려고 나올 때에는 자기 행복 때문에 예수 믿으러 나왔는데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난 후에는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삶과 죽음 너머에 있는 모든 희망이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흘리신 보혈의 피는 바로 하나님이 죄인인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이래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예전에는 나를 사랑했지만 나를 향한 사랑의 마지막 결과가 죄의 비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다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난 사람들은 반드시 그 영혼과 마음이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예전에는 자기가 좋아서 자기를 사랑했지만 마음의 구조자체가 자기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망가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마치 장애가 있어서 걸을 수 없는 사람들의 다리를 온전하게 해주고, 장애가 있어서 손을 뻗어 물건을 잡을 수 없는 손을 수술을 해서 고쳐주신 것처럼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된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사람들이고, 이들은 그래서 다른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동기는 세상 나라에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 사랑이 삶의 동기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선행을 행하게 됩니다. 이 선행은 인도주의자들이 만들어 낸 그런 개념의 선행이 아닙니다. 이 선행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받아들이고 그 성품에 어울리게끔 살아가려고 하는데서 비롯되는 선행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선행은 선행을 행한 사람을 빛나게 만들지만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선행은 사람이 아니라 그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왕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주목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종류의 선행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의 선행은 이 세상 나라에도 종종 있는 선행과는 다음 네 가지 점에서 구분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선행은 하나님 사랑의 원리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을 주목하게 하기 위하여 나오는 그런 선행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버리고 포기하고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나오는 선행입니다. 사랑은 목표의 합치를 가지고 옵니다. 만약에 부모가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면 자식이 행복해지는 것이 곧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거듭난 백성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행하기를 원하는 바로 그런 행동들, 그런 행실들을 하려고 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의 선행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앙의 원리에서 솟아나는 선행입니다. 이 신앙의 원리는 신뢰의 원리입니다. 예전에는 나를 믿었고 세상을 신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마지막이 비참한 멸망과 죄였습니다. 그리고 고통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이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뢰를 버리고 자기를 믿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제 그는 자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자기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비록 자신이 다 알지 못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명령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신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과 함께 하나님의 이러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게시하고 있는 책입니다. 바로 그것을 준행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선행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그 분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그 분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의 선행의 원리의 세 번째는 바로 하나님의 계시된 의지에 순종하는 선행이라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내기 위해서, 내 인생관이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나의 신념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 의지에 복종하기 위하여 이렇게 저렇게 선한 행실에 힘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인생관이 될 수도 있죠.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별도의 인생관이 필요 없습니다. 인생관은 너무 자기중심적입니다. 엊그제도 어느 잡지사에서 나보고 목회 철학, 인생관을 묻기에 나는 그런 게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는 자신이 그런 것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되는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하는 뜻을 깨닫고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면 기꺼이 복종할 수 있는 마음, 거기로부터 우러나오는 선행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의 선행이라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참된 신앙을 찾고자 하는 운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구원이 사람의 공로로 획득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오직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훌륭한 진리의 발견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그렇게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선행으로부터 공로가 축척되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주어지는 일반적인 은총으로서의 구원이기 때문에 그 은혜에 대한 더 큰 감격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완전히 거저주신 이 구원의 은혜에 감읍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철저히 선행이 힘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종이 자유인이 될 수가 있는데 율법에 의하면 이제 그를 풀어주게끔 되어 있는데 그 종이 주인에게 와서 “제가 주인이 저를 풀어주신들 내가 어디에 가서 주인님과 함께 있는 것보다 더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종신토록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하면 데리고 가서 기둥에다 귀를 뚫고 그리고 영영 그 집안의 종이 됩니다. 이렇게 될 때에는 사실은 종이 아니라 자유인인데 스스로 종이 되어서 비록 신분은 노예이지만 주인의 가족처럼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거에요. 그 사람이 그 집안에 대해서 헌신적인 종이 되겠어요? 아니면 세경을 받으면서 일하는 종들이, 머슴이 더 충실한 머슴이 되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 종교 개혁자들이 오직 은혜로써, 오직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는다는 이 교리를 발견한 것은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고, 그것에 대한 감격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선행을 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보다도 더 큰 감격으로 하나님 앞에 선행을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런 종교개혁의 정신을 세속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다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올바르게 살고 선행을 행하고 윤리적으로 살라고 외치면 저 설교자는 율법주의자라고 그렇게 비난을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율법주의가 무엇입니까? 성경이 어떤 의미에선 우리 모두 율법주의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너무나 감격하기 때문에 율법대로 살기로 스스로 결심한 사람들이 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모든 사람들은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한 바로 그 율법의 계명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사람들은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얻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후에 삶에 있어서는 율법과는 상관이 없는 삶이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구원은 방종하게 사는 면허증이 됩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채플 시간이 뜨거웠어요. 세상에서 유명한 목사님들은 아니었지만 매일 예배를 드렸는데 10번 예배를 드리면 한 7번은 은혜에 넘쳤어요. 거의 매시간이 그랬어요. 그래서 투박하지만 복음이 있었고, 그 설교를 듣고 학생들이 열렬하게 채플실이 떠나갈 듯 열렬하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직장에 일이 있어서 카메라를 학교까지 가져오게 되었어요. 월급 한 10만원 받던 시절에 30만 원짜리 카메라였으니까 꽤 비싼 고가의 물건이었죠. 채플시간에 그거를 놓고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눈물을 씻고 강의실로 돌아왔는데 카메라를 채플실에 두고 왔어요. 정확히 7분 만에 채플실로 돌아갔어요. 누가 가지고 갔어요. 그때는 생각했어요. ‘은혜를 받는 것과 윤리적인 생활은 아무 상관이 없구나’ 그게 우리들이 반성해야 될 점입니다. 이게 나만의 경험이 아니라 미국을 갔더니 어느 신학교의 학생이 그래요. 여러 나라 학생들이 이 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는데 그래도 한국 학생들이 제일 기도를 많이 한 대요. 근데 한국 학생들이 제일 부정직하대요. 2시간 아르바이트 하고 4시간이라고 써내고, 1시간 아르바이트 하고 3시간이라고 써내고 이거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거침없이 반복적으로 할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삶으로 입증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에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고 열렬히 기도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양심을 따라서 올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내가 비록 몸은 이 세상 나라 사람들과 함께 있지만 정말 사랑하는 가치는 이 세상에 있는 가치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입증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고 어떤 은혜를 받고 있는지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삶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삶이 좀 온전해져야 됩니다. 삶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공을 들이기 위해서 그것이 불편하고 힘들게 느껴진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충분한 통치를 받고 있지 않은 모습입니다.
세상 나라 사람과 하나님의 나라 사람은 각각 다른 사랑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선행을 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세상 나라 사람들과는 다른 동기에서 선행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비윤리적인 삶을 살 것인가. 기도를 안 하고 윤리적인 삶을 살 것인가 이러한 선택이 우리의 앞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기도를 열심히 하고 은혜를 받고 뜨거운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렇게만 하면 나머지 삶은 아무래도 상관없고, 혹은 저절로 선행이 따라 온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기를 양심을 따라 살고 선한 일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복종시키며 시민으로서 훈련해 가야 합니다. 화란의 신학자 아브람 카이퍼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 모든 곳에 부어져야 된다. 스며들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을 우리의 삶 모든 부분에 스며들게 해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부어 주신다”고 말입니다. 혹시 허공을 쳐도 기도를 해도 허공을 치는 것 같고 예배를 드려도 남의 집 잔치에 온 것 같고, 성경을 공부해도 역사책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에 그것은 뭘 의미하냐 하면 같은 방식으로 여러분이 똑같은 일을 많이 해도 결코 은혜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개혁이 없이 그냥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이 은혜 주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마음의 진액을 짜서 삶을 살아요. 혹시 기도가 잘 안 될 때에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하면 기도의 샘이 터져요. 기도가 안 될 때 자기가 맡겨진 일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려고 하고 마음을 거기에 쏟으면 일을 하면서 어느 순간 기도의 문이 열리고 기도가 터져요. 삶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는데 기도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될 리가 있겠습니까?
C. 구속과 하나님의 통치
이렇게 이런 선행은 사실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길어 올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구속입니다, 구속.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과 하나님의 통치에요. 하나님은 제일 먼저 신약 시대에 도입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 제일 먼저 이 나라를 박해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중생이 곧 거듭남입니다. 중생이 영혼의 거듭남이라면 회심은 죄에 대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는 이 중생의 첫 번째 의식 속에서의 움직임입니다. 이렇게 중생과 회심을 주셔서 한 사람 안에 수립되었던 자기중심의 왕국을 무너뜨려 새 나라를 먼저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게 새사람입니다. 예수 믿고 새사람 된다는 것은 노인네가 예수 믿고 젊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의 영혼과 본성이 새로운 사람이 되어 예전에는 살지 않았던 방식의 삶을 살게 된다는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중생은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은 완전히 다른 물건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의미도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은 달라요. 육체의 죽음은 의학적으로 인간의 생명의 기능이 모두 멈추면 죽은 것입니다. 멈췄는데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으면 그건 죽은 게 아닙니다. 어떻게 의학적인 조치를 취해도 살아날 수 없을 때 죽은 겁니다. 잠시 숨이 멈춘 것은 죽은 게 아니에요. 충격을 가하면 다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육체는 죽으면 아무 동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그런 식으로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혼은 불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죽지 않아요. 사라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영혼의 죽음의 의미는 육체의 죽음의 의미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은 죽어있는데도 많은 행실들을 만들어 내요. 그것을 성경이 죽은 영혼의 행실, 혹은 죽은 행실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생명과 사랑이 끊어진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몇 달 동안 잘 버티다가 몸이 너무 까부라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우리 교회 집사님이 하는 병원을 찾아갑니다. 웬만하면 안 갈려고 하는데 도저히 죽겠을 때 갑니다. 가면 링거를 놔 줍니다. 링거를 놀 때에는 항상 거기에다 수면제를 넣어서 밤에 잠을 잘 못자니까 한 두 시간이나 길면 세 시간 정도 푹 자게끔 약을 넣어줍니다. 그렇다면 가서 다 기운이 하나도 없고 밥맛도 없는데 가서 병실에 누워서 링거를 맞고 맞자마자 잠이 들죠. 그래서 한 세 시간 정도 끝나고 나면 잠이 깨지고, 잠이 깨지면 이 링거도 다 들어갑니다. 그리고 눈을 떠요. 그럼 신기하게 아까처럼 그렇게 죽을 정도는 아니고 기운이 좀 나요. 밥을 잔뜩 먹어 배가 불러도 그런 기운이 나지 않을 텐데 링거를 맞고는 힘이 나죠. 왜냐하면 잠자는 사이에 혈관 속으로 양분이 주입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내 몸과 세포 속에 모두 녹아들어서 나에게 에너지를 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처럼 중생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주입하시는 그런 통로에요. 그것을 주셔서 하나님이 그것을 안 주셨다면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것들을 인간의 정신과 영혼이 해낼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하늘의 자원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원한이 맺히고 사람과 원수 맺을 때 그때에 인간의 힘으로 그 미움과 원한을 돌이킬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평소에 자신이 없었던 큰 힘이 솟아날 때가 두 번이 있는데 누군가를 미워할 때와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할 때 에너지가 솟아오릅니다. 죽을 것같이 어려워도 원한 맺힌 사람의 얼굴을 생각하고 한번 이를 악물면 힘이 솟죠. 왜? ‘저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을 보기 전에는 내가 눈을 감을 수 없지.’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거는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내려오는 천상의 자원이 아니에요. 이거는 악의 세계에서 비롯되는 지하자원입니다. 그런 자원은 공급받을수록 자기 자신이 악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나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성경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은혜를 부어주시고 우리에게 감화를 주셔요. 그렇다면 놀랍게 내가 그렇게 원한이 맺힌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셔요. 그리고 그렇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이 속에서 생겨나요. 정말 놀라워요. 이렇게 세상이 알 수 없는 아주 신기한 방법으로 중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성화의 은혜를 부어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아니면 행할 수 없는 놀라운 힘들을 공급받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은혜들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선한 의지를 갖게 하시고 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은 아주 신비한 방법으로 우리에게는 없었던 영적인 에너지를 주는 것입니다. 신기하죠. 그죠? 노란 물인데 어린애 오줌 같은 그런 색깔의 물인데 그렇게 핏줄에다가 꼽고 한숨자고 나면 흘러 들어와요. 신기한 방법으로 어떻게 내게 힘을 주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어쨌든 에너지가 생겨나요. 그리고 힘이 생겨서 다시 또 일하고 살아갈 수 있는 원기를 잠시 공급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약물이 작용하는지는 알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도 그렇게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심지어 우리의 육체까지도 움직여서 충만할 때에는 놀랍게 웬만큼 연약했던 육체도 강한 힘을 얻고 일어나게 되요. 이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구속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이 생명과 은혜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됩니다.
III. 은혜로 통치하시는 나라
A. 하나님의 통치: 율법과 은혜
그래서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로 통치하시는 나라에요. 하나님의 통치는 율법과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의 불신자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이 율법으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율법을 두 군데다 새기셨는데 돌멩이에다가 새기시고 사람의 마음속에도 새기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이 율법이 새겨져 있습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까 어느 여대생 둘이서 지하철 앞에서 가방을 하나 주웠어요. 열어보니까 2450만원이 들어있더래요, 현찰이. 별로 놀래지도 않네요. 뭐 늘 쓰시던 돈이니까. 2450만원이 들어있더래요. 그러니 잠시 황홀했다고 그래요, 둘이서. 열어보면서 “야, 우리 이거 가지고 원 없이 세계 여행 한번 할까?” 그 자매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지 불신자들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불신자일 가능성이 더 많지 않겠어요. 근데 어쨌든 결국은 잠시 그런 꿈을 꾸다가 다시 가방을 닫고 정답게 둘이 가방을 들고 경찰서로 가서 맡겼답니다. 그래서 신고를 했다고 신문에 났어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그런 게 신문에 안 나오는 세상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입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제가 아프리카 쪽으로 진군에 진군을 계속해서 파죽지세로 미개한 나라들을 정복해 갔을 때의 일이었어요. 어느 작은 나라에 들어서니까 그 고을 최고 우두머리가 나왔고, 이제 알렉산더 대왕을 극진히 모셨어요. 대왕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신하 하나가 고했어요. “왕께 급히 하소연하는 백성이 있어서 왕을 뵙고자 합니다.” “들어오라고 그래라.” 둘이서 싸우고 있는데 재판을 하는 중이었어요. 가운데는 커다란 금덩어리가 하나 있었어요. 그랬더니 한 사람이 그랬어요. “폐하, 제가 이 옆에 사람으로부터 돈을 주고 밭을 샀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농사를 지내기 위해서 쟁기를 갈다보니까 이 금덩어리가 나왔습니다. 나는 땅을 샀지 땅 속에 있는 금은 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거는 땅의 전 주인인 이 친구가 가져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친구는 한사코 이것을 안 가져가겠다고 해서 제가 괴롭습니다.” 이 사람 이야기는 “폐하, 저자의 이야기를 믿지 마십시오. 제가 땅을 팔았을 때에는 어찌 흙만 팔았겠습니까? 거기에 있는 돌멩이도 팔고 거기에 뭐가 묻혀 있든지 모두 돈을 주고 판 것이니 거기에서 금이 나왔든, 돌이 나왔든 저 사람의 것인데 저 사람은 왜 이 금덩어리가 내 것이라고 우기는지 제가 정말 괴롭습니다. 우리를 판결하여 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입이 딱 벌어진 사람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제였어요. “이 무슨 이런 나라가 있나?” 그랬어요. 알렉산더 대제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나라를 정복한 것은 헬라문화를 모르고 사는 백성들은 흑암에 있는 어둡고 불행한 미개인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발달한 헬라의 철학과 문화와 사상을 전파하여 사람들을 개명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자신이 소명을 가지고 한 일이었어요. 그 광경을 보면서 알렉산더 대제가 물었어요. “왕이여, 아니 이 나라 백성들이 이런 식으로 다툽니까?” 왕이 말했어요. “이런 일들이 너무나 자주 있어서 제가 너무 힘이 듭니다. 폐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이런 경우에 서로 자기의 것이라고 다투는데” 그랬더니 이 왕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폐하, 거기에도 비가 내리나이까?” 무슨 소리인지 이해 못하겠어요? 거기에도 비가 내리나이까? 햇빛과 비를 머금으며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의 나라입니까? 그 뜻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얼굴이 붉어져서 그 나라는 점령하지 않고 피해갔다는 역사 속에 진짜 나오는 일화에요.
왜, 그 자매 그 두 사람으로 하여금 맨 처음에 먹었던 생각대로 그냥 뜯어가지고 1250만원씩 나눠서 한번 원 없이 세계 여행, 그 돈 가지고 세계 여행 다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비슷하게라도 한번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지 않고 파출소로 그 돈을 들고 가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율법과 양심에 의한 통치에요. 그래서 이 세상이 망가져도 그렇게 개판까지는 되지 않는 기본적인 골격을 유지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신자들은 그렇게 다루지 않으셔요. 이 신자들은 하나님이 은혜로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양심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은혜를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로 이 신자들을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로 하여금 사랑의 방향을 바꾸도록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었어도 여전히 자기 사랑이 남아있죠.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으면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유혹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진리의 말씀이 그들의 어두운 눈을 밝게 비쳐줄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때 그들은 고백합니다.
(찬양) 이제 어둠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고백을 하게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신자들을 통치합니다. 하나님은 물론 여러분이 잘못하면 혼내셔요. 사업한다고 돈에 빠져서 하나님 돌아보지도 않는 사람들, 항상 하나님은 그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 가지고 시험하셔요. 흔들어 놓으시죠.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지 마지막으로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진정한 힘은 징계에서 나오지 않아요. 깨닫는 마음 그리고 그의 마음을 녹이시는 하나님의 은혜,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온전한 사람이 있겠어요? 누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어요?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으며 자기 안에 일어나는 세상 나라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서 세워져 가는 이 기쁨 속에서 그래서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B. 성령과 은혜의 통치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과 은혜의 통치를 생각하게 됩니다. 성령은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과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통로에요. 그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성령이 강한 은혜로 우리에게 생명과 사랑을 부어주실 때 우리는 그런 생명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이길 수 없는 환경들을 극복하고, 참을 수 없는 일들을 참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그 생명의 능력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은혜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다면서 하나님 사랑하고 순종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줄로 우리를 묶으시면 이 세상의 창이나 칼로 우리를 협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힘이 있어서 주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게 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심으로 이 세상의 견고하던 나라를 무너뜨려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큰 용처럼 있던 이 든든하던 사단의 등뼈를 부서뜨려 버린 사건이었다고 말입니다. 예전에는 뛰어다니던 그 악마가, 마귀가 이제는 엎드려져서 벌벌 기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승리는 명백하게 우리 편입니다. 이미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목소리로 일본 왕이 항복을 선언하였죠. 그날 그 방송을 청취하던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대한 독립 만세, 광복 만세를 외치고 이제 36년 동안의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났어요. 근데 아직 그 소식을 알지 못하는 저 시골에서는 칼 찬 순사만 봐도 두려워 벌벌 떨고 숨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있었어요. 바로 이 신약의 교회는 이미 이렇게 사단이 항복 선언한 세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새롭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가 수립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외침으로써 그들을 악한 마귀의 권세에서 끌어내어 빛의 나라로 이미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 속으로 들어오게 하도록 부름 받은 집단이 바로 교회에요, 교회. 그게 교회에요. 그래서 교회는 비유를 하자면 아직까지도 나라가 망했는데도 퇴각하지 않고 있는 이 일본 앞잡이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파송 받은 진압군 사령관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면 일본군과 같은 마귀의 군대를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온 진압군의 사령관이 예수 그리스도라면 우리는 그 분을 따르는 군사들입니다. 그것을 실현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전쟁은 기울었어요. 그래서 전진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의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거침없이 파죽지세로 마치 숲을 불도저로 밀듯이 그렇게 무너지면서 확장되게 돼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불순종과 죄들이 그러한 장중한 진군을 가로 막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너무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이 일들을 위해서 헌신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교회에요. 교회의 성도의 무리들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자신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어떤지를 교회의 생활을 통해서 먼저 보여주어야 하고 그리고 이것이 확장되어서 각자의 가정 속에서, 삶 속에서 실현되어 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교회에서 종종 돈이 어쨌느니, 뭐가 어쨌느니 하면서 분쟁을 일으키고 소송이 일어나고 하는 이 부끄러운 모습들은 결국은 각 사람 성도들 마음속에, 교회에 있는 모든 일군들의 마음속에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혹은 망가져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이러한 빛의 열매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나라의 한 모형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가 어떻게 행복하고 복된 나라인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나라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를 보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도록 빛으로 부르신 백성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가 어찌 우리 교회 안에서, 우리 가정 안에서만 이루어지겠습니까? 사회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중 단 한 뼘도 하나님의 땅이 아닌 곳은 없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예수님이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땅은 없어요. 그래서 그들에게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야 되고 이것이 바로 선교에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전체 어느 곳에서나 그 나라가 임하게 되기를 포함하여 하나님 앞에 주기도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이런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소식만 기쁜 것이 아니라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로 사람들이 돌아온다는 소식 때문에 기뻐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땅에 있는 많은 나라 방방곡곡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고 그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 나아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성령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 소식 자체는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충만하게 실현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그 소식을 보며 기뻐합니다. 교회가 크다고 큰일 하는 것 아닙니다. 조선의 땅에 처음 복음을 들고 왔던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는 교인 50여명 모이는 시골의 작디작은 아주 쬐그만 교회였어요. 그러나 조선이라는 한 나라의 선교의 문을 여는 역할을 했어요.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는 숫자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온전히 이루어진 하나님의 통치로 임하는 나라에요. 그래서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제대로 된 신자가 되고, 주님의 나라의 통치를 온전히 받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사람들이 되어 갈 때에 그때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두 번째 기도의 제목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기도하는 이 기도가 진솔한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도 이 기도의 제목과 초점이 같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도 여러분에게 눈물로 호소하는 것이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구원해 주신 것은 바로 이렇게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기 위하여 티끌만큼이라도 이바지하며 헌신하며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이 가지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 영혼과 육체를 포함해서 인생의 생명, 심지어는 물질과 여러분의 건강, 젊음까지 모든 것들이 주님께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주님께 빚진 것들입니다. 주님은 이것들을 주님의 이름의 영광과 그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사용하라고 여러분에게 아주 주신 게 아니라 맡겨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오늘 주기도문은 여러분에게 우렁찬 목소리로 그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건강도 있고, 젊음도 있고, 돈도 있고, 시간도 있고, 재능도 있고, 권력도 있는데 그것을 자기의 사랑의 질서를 확장하는 일에 사용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든지 고의로 하나님의 나라에 반역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돌이키지 않고 그런 삶을 살아가면 그는 결코 구원받은 사람일 수가 없어요. 왜? 그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내가 눈물로 여러분에게 호소하는데 여러분 자신만을 위해서는 절대로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없어요. 그리고 만약에 거기서 끝까지 행복을 느낀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아니에요. 백성이었던 적도 없을지 몰라요. 그러니까 폭풍처럼 이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너희 나라는 어디에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너희 나라는 어디에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바로 이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데 적절하게 이바지 하도록 헌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호위호식하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구두쇠 같은 사람들, 자신의 재능으로 배를 불리는데 사용하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추호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 작은 재능이라고 주님을 위해 바칠라치면 온갖 생색을 다 내는 사람들은 천국 백성 아닙니다.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박수갈채를 보내는 여러분의 보물과 재산, 그리고 사회적인 지위와 권력, 젊음, 외모, 힘, 자랑, 명예 이런 것들은 세상 나라에 속했기 때문에 죽으면 세상나라도 여러분을 잘라버립니다. 죽음과 함께 모두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진동할 수 없는 영원한 나라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수고하고 땀을 흘리고 그 나라를 위하여 사는 그런 비전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IV.결 론: 빛으로 부르신 백성들
만약에 여러분이 남다른 재능이 있다면 그 재능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게 할지 헌신해 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이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을 들여 헌신하시고 재능이 있다면 그 재능을 들여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있는 게 물질이라면 아까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허비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채워주십니다. 만약에 그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목숨만 살아 있다면 기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돈 없어도, 재능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두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 우리의 입술의 혀가 굳어지기 전, 우리의 심장의 박동이 멎고 우리의 핏줄에 흐르는 우리의 피가 식어지기 전까지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은 한 가지,
(찬양)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그래서 여기 살아도 저 멀리 캄보디아에서, 중국에서, 태국에서, 필리핀에서, 카자흐스탄에서, 레바논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간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한국에서 가슴이 떨리고 그리고 심장이 벅차오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의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바지 하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백성들에게 어울리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오늘도 찾아내셔서 사랑하시고,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고, 고난 받을 때 하나님이 놀라운 승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7.뜻이 이루어지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탄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기도였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의 설명과 같이 이 기도는 앞에 나온 그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의 보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탄원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이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수식어구 하나를 덧붙이셨을까요?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라고 하는 이 수식어구를 덧붙이신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상기할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맨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지상 세계와 천상의 세계를 아울러 창조하셨습니다. 이 두 세계는 각각 다른 세계이지만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이 모든 세계 안에서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천상의 세계는 영원한 사물들과 영적인 사물들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지상의 세계는 이 모든 우주를 포함하는 것인데 이 모든 우주는, 이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는 사물들을 통해 드러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만약 영혼을 가진 인간이 지상 세계에 창조되지 않았더라면 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는 관계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지상 세계에 살면서도 천상의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셔서 이 두 세계를 함께 이해하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천상의 세계는 천사를 통해 다스리시고 지상의 세계는 인간을 통해 하나님의 대리자 삼으셔서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한때는 천상의 세계에도 하나님께 반역하는 무리들이 있었지만 곧 소탕되었고 이제 그 하늘나라는 하나님 아버지가 명령하시면 의도하신 그 뜻이 아무런 장애도 없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버지의 뜻이 누구의 반역도 없이 성취되는 것처럼 이 지상 나라에서도 그렇게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되었거나 그 다음에 당연히 되리라고 믿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기도하지 않습니다. 지구상에 공기가 날아가지 않게 기도하는 사람 없을 것이고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매일 매일 호흡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호흡기 질환을 가진 사람 이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현실적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안 이루지는 적이 많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우리를 또 복잡한 변론으로 데려 갑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안 이루어진다면 주님의 뜻이 매일매일 꺾이시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그렇게 꺾인다면 그 분을 어떻게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계와 인간의 자율과 하나님의 의지라는 복잡하고 아주 정치한 담론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밝히는 것은 오늘 설교의 목적도 아니고 또 오늘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의도하고 있는 바도 아닙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분명한 사실은 어떤 하나님의 뜻은 어떤 일이 있어도 성취되도록 뜻하시는 것이 있지만, 어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게끔 허락하는 하나님의 교훈적인 뜻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이 땅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들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탄원하도록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예고합니다.
II. 뜻(뗄레마)의 의미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뜻 희랍어로 ‘뗄레마’(θέλημα)라고 하는 이 단어,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이 ‘뗄레마’라는 단어는 ‘벨로’라고 하는 ‘의지하다’라는 동사에서 온 명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 언제나 단수로 사용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뗄레마 이 뜻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구약 성경에서 이 하나님의 뜻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시편 40편 8절을 보면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습니다’ 라고 시인이 노래합니다. 여기에서 주의 뜻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뜻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고 싶어 하는 시인의 충만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용례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시편 143편 10절에 보면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오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옵소서’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의 행하고자 하는 그 의지가 어떤 것인지 나에게 가르쳐 주면 내가 하나님의 그 의지에 부합하도록 나도 내 의지를 행사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뜻의 마지막 세 번째 의미는 은혜로운 목적입니다. 이사야 25장 1절에서 선지자는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렇다면서 그는 말합니다.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습니다’라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자기의 백성들의 행복과 명예를 위하여 미리 정해놓으신 은혜로운 궁극적 목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뜻이라고 하는 이 말은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의미,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하나님의 뜻이 기쁨이요, 의지요, 목적이라면 포괄적으로 말해서 이 단수인 하나님의 이 뜻은 성경 전체를 흐르면서 포괄적인 의미에서 무엇으로 어떤 의미를 가진 용어로 집약이 될 수 있겠는지를 우리들이 살펴봐야지만 예수님의 이 기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뜬금없이 이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천지가 창조된 이후로부터 이 세계에 이루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계셨고, 그리고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상당부분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뜻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이 세 번째 기도를 가르쳐 주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이 뜻을 살펴보십시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은 천상과 지상의 세계를 창조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두 세계에 충만하게 드러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지상 세계에는 특별히 인간을 창조하셔서 만물을 조직하고 움직임으로써 노동을 보태어 하나님이 주신 이 세계가 보다 더 찬란한 영광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드러내도록 의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목적은 좌절되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깨뜨리고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제일 먼저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고, 자연 세계와의 관계가 깨졌고, 함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사랑으로 엮어져 가족처럼 살아가야할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졌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깨져서 자기 자신 속에 자기 자신이 찢어지는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분열은 여러분이 불신자일 때에 한편으로는 양심의 법을 따라 살고자 하고, 한편으로는 자기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양심을 거스르는 행동을 해온 것으로서도 입증이 됩니다. 이 흔적들은 신자가 된 후에도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 진리를 깨달을 때에는 아버지 앞에 주님 뜻을 살기 원하지만 그러나 은혜가 식고 욕심에 이끌리게 되면 여러분은 자기의 욕심에 따라 살려고 애를 쓰면서 자기 자신이 여지없이 찢어지는 자기의 분열을 경험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던 세계는 죄와 사망으로 뒤덮였고, 인간과 세계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없이는 원래 그들이 창조된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렇게 당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뜻대로 돌아갈 수 없는 이 세계를 고치고자 당신의 뜻을 이 세상에 보이셨으니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을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려놓고 인간을 그 목적에 이바지하는 본래의 의도대로 회복시키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III. 그리스도와 하나님 뜻의 성취
A. 대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대속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쏟으며 아버지 앞에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그러나 만약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내가 이 잔을 마시겠나이다. 나의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는데 이 잔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 중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서 왕되시는 그날에 예수님 옆에 앉을 수 있도록 높은 지위를 달라는 요청을 받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가 마시려는 그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높아짐과 세상 나라에서의 높아짐을 혼동하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죽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죽으시려고 하는 의도와 목적이 없었더라면 굳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제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었고, 두 번째는 고난을 터득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고, 마지막 세 번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죽으시려고 죽을 수 있는 인간의 육체를 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 기도에서 요청하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가장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인류 구속의 우주적인 계획을 위해서는 당신이 죽으셔야 했으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이 기도는 이미 당신의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바라본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이 세상의 인간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구원의 근거를 마련하는 그것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뜻을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복종시킴으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 33년 동안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그리고 무지한 자를 가르치신 이 사랑의 섬김, 그 끝은 복종이었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사셨고, 사신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리어졌으며, 올리우신 그 분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성령을 이 세상에 강림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 성령은 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묶고 연합되게 하셨고, 머리이신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 한 몸인 교회를 이루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죽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지 않으셨다면 그 분이 보여주신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인간의 도리, 무용지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신 것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을 보기만 하고 인간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생애 전체가 두루마리에 기록된 아버지의 뜻을,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생애였고, 그 뜻을 이룬 핵심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시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는 하나님을 떠나서 망가지고 타락한 이 절망적인 세계에 유일한 희망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무 종교도 한 사람을 이렇게 치명적으로 중요한 사람으로 거론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마호메트를 떠받들지만 마호메트가 없이 이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시조가 부처라고 하지만 붓다 없이도 얼마든지 불교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모든 진리와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한 사람의 인격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참 사람이고 참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제 것까지 지체되었던 인류 구원을 위한 우주적인 계획을 도입하는 수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대속하심으로 막혔던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열리고 그 물은 밀물처럼 노도처럼 번져 이 모든 세상을 잠기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B. 잃은 자를 구원하심
그리스도께서 이 하나님의 뜻과 관계를 맺는 것은 또 하나 있는데 잃은 자의 구원입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서 그 분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 단 하나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 중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고백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최고의 관심사는 이 땅에 와서 새롭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이제 당신 자신이 기적의 능력을 행하고 군대들을 모집하고 반란군들을 소집해서 특공대를 규합하고 결사대를 만들어서 로마를 거꾸러뜨리고 제 2의 다윗 왕국을 이 세상에 세우시는 것에 예수님의 관심이 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당신을 통해 정말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영적인 나라의 모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세상에 오셔서 보여준 최고의 관심사가 가이사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33년 동안 살면서 이 세상 나라를 얕잡아 보거나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마는 당신이 언제나 소속된 나라가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고 세상 나라에서는 당신이 선지자 취급을 받고, 때로는 노숙자 취급을 받고, 때로는 죄수 취급을 받아도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당신이 왕이심을 증거 하셨던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나라의 번영을 통해 구원을 생각해 보는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애쓰신 예수님의 생애가 보여주는 바였습니다. 무지한 자에게 진리를 가르쳐 깨닫게 해 주시고, 또 병든 자들을 기적의 능력으로 고쳐주심으로써 예전 시대와는 다른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의 시대가 임하였다는 것을 증거로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종처럼 섬기심으로써 사랑하는 자기의 양떼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살 깊은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 내는 이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동안 하신 일이었고, 이 일은 바로 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던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이 정말 우리에게 주셔서 누리고 싶어 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은 우리를 현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은 갈수록 물질적으로 번영하고 예전의 사람들이 상상도 못했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시드니까지 30분에 날아가는 비행기를 연구하고 있다고 하니 언젠가 우리는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 다녀온 후 점심은 돌아와서 집에서 먹고 있을지 모릅니다. 인간의 수명은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길어져서 아마 120세 이상을 살게 되는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먼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하고,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온갖 물질적인 풍요함을 누려서 우리의 삶이 편리해 진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죄가 우리의 인생에 가져다 준 그 문제는 문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스티브 잡스라는 사람은 한 세기를 풍미했던 경영가요, 그리고 새로운 탐구자였습니다. 거의 도산에 가까운 지경에 간 애플을 기적적으로 살려놓았고 어마어마한 부를 축척하였습니다. 그는 짧은 생애를 살면서 약 10조원의 유산을 유족에게 남기고 죽었다고 합니다. 불행하게도 암에 걸렸습니다. 아마 그는 만약에 돈을 지불하고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보다 좋은 병원, 유능한 의사, 친절한 간호원, 그리고 훌륭한 시설의 의료 환경, 좋은 약 이런 정도였지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까지 자기를 건져낼 수는 없었습니다. 이게 이 세상에 있는 물질과 문명이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 깨어진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버드 대학에서 어떤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지를 수많은 사람들을 임상으로 조사했습니다. 도달한 마지막 결론은 졸업생들 중 행복한 삶을 영위했던 사람은 뛰어난 정치가가 된 사람이나 사업을 해서 거대한 부를 모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결론 내기를 행복하고 건강한 삶의 비결은 관계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로 그 관계가 인간의 죄에 의해서 파괴된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나라가 이 땅에 도래했다라고 하는 가장 중요한 징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였습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왕국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바로 그 문 앞에서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를 발견합니다. 거기에서 바로 자신이 나를 임금 삼으며 살아왔던 그 모든 과거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흠 없으신 분 이시면서도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공의였다는 사실도 동시에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죄의 심각성과 무서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고 다시 당신의 사랑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문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나라에 들어가서는 이제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사람들의 사랑의 질서로 이루어진 그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IV.신자의 삶: 그 뜻의 성취를 위함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강력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완전히 성취된 나라는 아닙니다. 이미 그 나라는 힘 있게 이루어졌고 곳곳에서 이 세상을 이제까지 지배하던 죄와 마귀의 권세에 더 이상 복종하며 살지 않겠노라고 감연히 일어서서 모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모인 표가 바로 교회 마당 앞에 붙어있는 붉은 십자가입니다. 그들은 이제 이 세상 나라에 여전히 있으나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기로 다짐한 사람들이고 자기를 사랑하고 우상을 섬기는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하여 자기를 기꺼이 헌신하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그 나라는 이미 왔고, 누구도 그 나라의 번영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도망하지 못한 악의 세력들은 도처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이미 왔으나 아직 임하지 아니 하였고, 세상 나라는 이미 망하였으나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은 긴장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우리는 신자의 삶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신자의 삶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셨던 그 뜻의 성취를 위한 삶이라고 합니다.
어떤 일들은 하나님이 추호의 인간의 도움 없이 당신 혼자 하십니다. 인류의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구속의 기초를 놓으시는 십자가의 죽음은 당신 홀로 지불하여야 하는 희생이지 우리가 거기에 보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빨리 이 세상에 성취되고 이루어질 지는 당신 혼자 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머리이시며 당신의 몸으로 성령 안에서 연합되는 그리스도의 이 지체들과 함께 한 몸을 이루며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성령의 은혜를 주심으로써 예수를 사랑하고 머리이신 예수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고 섬기는 성도들의 희생과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오게 하시기도 하고 늦추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참 교회의 무리들이 전심으로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께 순종하고 온전히 그 분을 위해 이 세상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며 죄와 더불어 싸우고 이 세상 나라와 더불어 싸우며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고 그 일이 힘 있게 이루어지는 복음의 번영을 위하여 수고한다면 그 나라는 앞당겨질 것입니다. 열렬히 기도하고 눈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린다면 그 나라는 더 많은 사람들로 채워지게 될 것이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더 속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는 길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을 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구령의 사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구령의 사명, 하나님을 멀리 떠나 스스로 아버지께 돌아올 수 없는 인간을 향한 타오르는 구령의 열정, 전도와 선교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첫 번째 긴급조치인 것입니다. 전도만 할 뿐이 아닙니다. 전도하고 예수 믿게 된 다음에는 그들을 더욱더 뜨거운 사랑으로 돌보고 가르쳐 그의 전 포괄적인 영역 속에서 자기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뜻에 성취를 위해 이바지하며 살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하나님은 혼자 하지 않으시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함께 이 일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성취해 가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이 땅에 교회가 너무 많은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우리 남한에서 매 주일 고정적으로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사람은 470만 밖에 안 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것도 가톨릭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교사 리바이벌을 쓰면서 그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루에 두 번씩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한 번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감사해서 펑펑 울고, 한번은 아직도 이 사랑을 모르는 불쌍한 영혼들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많이 변화될까 하고 적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 신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이 악해서 하나님께로 안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 사상이 너무 강력하게 역사해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안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신자들이 그 뜻을 이루는 그 일에 충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찬양) 이 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 하소서.
간절히 나 같은 죄인 살려주시기 위해 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자기를 아낌없이 십자가에서 산산이 찢으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 앞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감격하고 이 사랑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이 나의 잘못 때문이라고 자각하며 복음을 전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짐승 같은 삶을 버리고 단정한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생활을 해 나갈 것이고,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으로 교회를 빛내드릴 것입니다.
V.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 세 번째 주님이 가르쳐 주신 탄원을 가지고 우리에게 폭풍과 같은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너는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고 묻는 질문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모든 것들을 하사하셨습니다. 물질이 없으면 물질을 주셨고, 영혼이 곤고할 때에는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강물 같은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더 살고 싶지만 삶 저편으로 떠나 죽음의 강물에 자신을 떠내려 보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낭비하고 있는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입니다.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내일을 오늘은 우리가 오늘이라고 부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살게 하시고,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고, 형언할 수 없는 은혜를 그리고 자격도 없는 인간에게 분에 넘치는 응답들로 우리들을 채워주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로 하여금 너희의 살아있는 것을 통해 이 세상에 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어 달라고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자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의 목자로서 간절히 호소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간절히 호소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삶이라도 이 세상에 휘장이 드리워지는 그 날에 그의 인생이 아버지의 뜻의 성취와 관계가 없다면 세상과 함께 불타 없어질 지푸라기와 같은 인생입니다. 그러나 오늘 비록 나에게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없고, 모든 사람 우러러 볼 권력이 없고, 남들을 능가하는 탁월한 재능이 없어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한 모퉁이에서 주님께 구속 받은 교회의 한 구석에서 주님을 섬기며 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이 세상에 편만하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봉사하면서 산다면 그는 지극히 작은 자 같으나 하나님 앞에는 이 모든 세계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무명한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작은 자 같으나 큰 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만 하늘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주위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발견할 때마다 기뻐합니다. 한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왔다는 소식, 심지어는 가보지도 못하고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일어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그는 그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아버지의 뜻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가라고 오늘도 주님은 여러분 가까이 계셔서 지키고 생명을 연장시키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고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수고할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해가 저물어가는 이 12월에 살아온 우리의 인생의 날들을 돌아보며 우리의 살아온 인생의 날들 중 보람되게 살았어야 할 얼마나 많은 인생의 부분들이 하나님이 뜻이 이루어지는데 이바지하여야 할 소명대로 사는 대신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거치는 돌로 살았던가 하는 것을 기억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기를 온전히 우리를 위해 주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셨던 것처럼 우리도 아버지를 위해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어 성취하는 그 뜻의 성취의 도구가 되도록 오늘도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의 나라와 의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폭풍처럼 다가오는 ‘너희의 인생은 과연 나의 뜻을 이루는 도구였느냐’고 묻는 이 질문 앞에서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8.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1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눅 1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하여야 할 우선적인 기도의 제목 세 가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성취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것을 1부라고 한다면 네 번째 기도부터는 2부로 접어듭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필요로 하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 앞에 간구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필요하도록, 간구하도록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 주시는 것은 바로 이하의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충족될 때에 처음 1부에서 가르쳐 주신 신자의 존재의 대의라고 할 수 있는 세 가지 기도제목을 위하여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II. ‘양식’을 구하는 기도
2부로 시작하는 첫 번째 기도 제목이 바로 양식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이 양식이라고 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알토스’[ἄρτος] 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이 알토스라는 말은 빵입니다. 유대인들이 주식으로 먹던 그 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떡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 소위 등가 번역을 하게 된다면 이 알토스라는 단어는 1차적으로는 빵이고 등가 번역을 하면 우리에게는 밥이 됩니다. 주식이니까요.
A.'양식‘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양식을 구하는 기도, 알토스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양식이 무엇일까? 이것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어 왔습니다.
1. 성찬의 떡
그 중에 제일 첫 번째가 이 양식은 성찬에 제공되는 떡을 의미한다는 해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기도의 내용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일용할 식량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잖아요. 그런데 이 첫 번째 성찬의 떡이라는 해석에 따르게 되면 이것은 교회의 공동체의 회원으로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이 그 떡을 떼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의 의미는 ‘우리에게 날마다 성찬의 떡을 먹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되면 ‘우리가 항상 교회의 흠 없는 한 회원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성례의 은혜를 받게 해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가 됩니다.
2. 영적인 떡, 그리스도
이것보다는 초대 교회 때부터 광범위하게 환영을 받던 두 번째 해석이 있습니다. 그 해석은 바로 이 떡을 물리적인 떡이 아니라 영적인 떡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명백한 근거가 있다고 주장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나는 하늘로부터 온 떡이요,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는 또 완전히 첫 번째의 경우와는 또 다른 기도의 내용이 되죠. 우리에게 날마다 영적인 떡인 그리스도를 주셔서 우리는 주님을 먹고,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게 해 주시옵소서 라는 정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적인 일체를 간구한 내용이 됩니다. 사실 이 해석이 초대 교회 때부터 중세 초기에까지 광범위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테르툴리아누스, 끼쁘리아누스, 그리고 오리겐, 그리고 제로옴이라고 불리우는 히에로니무스라고 하는 교부에 의해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3. 음식의 떡
그래서 오히려 세 번째의 견해는 오히려 역사적으로 소수였어요. 그 세 번째 견해를 여러분이 대부분 취하고 있는 견해에요. 그래서 이 떡을 음식으로서의 그 떡을 가리킬 뿐이다 라고 해석을 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소수였어요. 그렇게 되게 되면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날마다 하루 쓸 식량을 주시옵소서. 이틀 치도 아니에요. 이 해석은 특별히 13세기에 로마 가톨릭 안에서 대대적인 개혁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12세기에 아씨씨의 프란시스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았고 이들의 공통점은 철저한 청빈과 금욕,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따르려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탁발 수도사들이 바로 이 부류에 속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우리는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하고 저축을 한다든지 미래를 위해서 무엇을 쌓아놓는 모든 것들은 복음의 교훈으로부터 이탈한 생활의 원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실제로 저는 전도사 때 함께 신앙 생활하던 지체 중에 한 사람이 이러한 식으로 주기도문을 해석을 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직장을 다니는데 절대로 돈을 모으지 않아요. 매달 타는 데로 다 쓰는 것입니다. 물론 그거를 허튼 데만 쓰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돕고 사역자들도 도와주고 그래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돈을 잘 꾸러 다녀, 그러고 잘 못 갚아. 그러니까 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양식이 만약에 문자적으로 정말 알토스, 빵 혹은 떡을 의미한다면 포도주는 어디 갔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 포도주는 오늘 우리로 등가 번역하면 물입니다. 왜냐하면 이 물이 질이 안 좋은 물을 지하수에서 길어서 먹으면 다리가 붓고 풍토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포도주를 그렇게 광범위하게 먹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유럽 사람들은 포도주를 광범위하게 먹는데 낭만적이어서라기보다는 유럽지방의 물이 전부다 석회석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물을 끓이면 밑에 석회가 허옇게 내려앉아요. 그게 나중에 체내에 다 쌓이면서 몸에 이상 증세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중년이 넘으면 다리가 퉁퉁 붓고 그런 물을 먹은 이제 그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해요. 그래서 포도주를 그렇게 광범위하게 애용합니다. 가장 완전한 음료거든요. 그거 어디 갔어요? 한 가지 더해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빵하고 포도주만 먹은 게 아니라 그 밀가루를 구운 빵에 양고기를 싸서 먹었어요. 고기는 또 어디 갔어요? 그래서 뭘 또 찍어먹어야 하잖아요. 소스는 어디 갔어요? 그래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바로 이 음식 떡은 물리적인 그 떡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인간다운 삶의 조건들
더 좋은 네 번째 해석이 가장 어울려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라는 종교 개혁가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설했어요. ‘여기에 양식은 단지 식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양식뿐만 아니라 영혼의 양식인 진리의 말씀, 인간다운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교육의 기회, 그리고 정신을 고양할 수 있는 학문과 문화의 누림, 이 모든 것을 총칭하여 양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단, 귀금속은 안 된다.’ 귀금속은 일용할 양식에 안 들어가요. 그러니까 그 일용할 양식의 범위는 시대와 역사가 흐름에 따라서 조금씩, 조금씩 변천하겠죠. 그죠? 30년 전에는 차량이라고 하는 것, 자가용이라고 하는 것은 일용할 양식의 범주에 들지 않았어요. 지금의 경우에는 차량은 일용할 양식에 들겠죠. 그러나 백수인 경우에는 차량이 일용할 양식일 수가 없어요. 차량이 일용할 양식이라도 아주 고급스러운 외제차, 이것은 일용할 양식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종교 개혁자 이전에 천 년 전의 사람인데도 아주 훌륭한 해석을 내놓았어요. 뭐라고 했냐하면 ‘복된 삶을 영위하는데 이바지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때 여기에서 복된 삶이라고 하는 ‘베네에세’ 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창조하신 사람답게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B. '양식‘, 제유법적 표현
그래서 결국은 이 양식이라고 하는 것이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제유법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문학에서 제유법은 무엇입니까? 대표적인 제유법이 이것입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펜하고 칼하고 경기장에서 싸우겠다는 뜻이 아니라 펜은 글, 표현, 문학, 작품, 표현의 자유, 표현의 능력 이 모든 것을 지칭하는 말이고, 칼은 폭압, 압제, 무력, 폭력 이것을 의미합니다. 그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강하다라고 하는 것을 제유법적으로 표현할 때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고 표현합니다.
1. 원래 식물인 떡의 의미
자, 이것을 이렇게 해석을 해 놓고 보면 이제 가닥이 잡히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해석들을 오해한 나머지 그리스도인은 저축해서는 안 되고 그리고 벌면 그것을 소비해야 하는데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식물이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들이 청빈주의자 그리고 금욕주의자들, 수도사들 사이에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어요.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금욕주의적인 생각에 이 주기도문을 맞춘 것이지 이 주기도문이 원래 그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라고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것을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양식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하셨을 때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림은 의심할 여지없이 출애굽기 16장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는 뭐가 나오죠? 만나의 사건이 나와요. 만나는 원래 그 의미가 이것이 무엇이냐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서 광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음식과 여러 가지들을 가지고 나왔지만 그것은 곧 소진되었고 그들은 먹을 것이 당장 직면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이동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농사도 지을 수 없고 목축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파란 풀밭 사이로 걸어가는 행군의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적으면 200만 명, 많았으면 300만 명이 넘었을 사람들의 식사를 해결하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조상들도 먹어본 적이 없고, 그 후에도 사람들이 누려본 적이 없는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이들의 식량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만나였습니다. 이 만나가 이른 새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가면 하얗게 서리처럼 내려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바가지에 거두어들이는데 꼭 하루 먹을 것만 거둘 수 있었어요. 이틀 치를 거두면 그리고 남기면 썩거나 벌레가 나서 다음날 먹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매일 그 만나를 거두어서 그것으로 요리를 해서 먹었는데 아주 맛이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이 만나를 먹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육체를 보호해 주신 것이 그걸로 끝나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이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 이 알토스도 그야말로 빵만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신명기 8장으로 넘어가면 모세가 이 16장에 있었던 만나의 사건을 해석을 해줍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너희에게 조상도 알지 못하던 만나로 너희를 먹이셨는데 너희에게 이 만나를 주신 것은 사실 너희로 하여금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만나라는 방법으로 너희에게 양식을 공급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만나의 사건은 육신의 떡으로서의 만나는 영혼의 양식으로 진리의 말씀인, 영혼의 양식으로서의 진리인 그 궁극적인 만나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함으로써 이 양식이 인간 존재 총제적인 존재에게 공급되는 필요불가결한 양식이라는 사실을 확장해서 보여준 것입니다.
2. 영혼+육체로 이뤄진 인간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이 영혼과 육체로 창조하셨습니다. 영혼도 하나님의 완전한 피조물이고 육체도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완전한 피조물입니다. 둘 다 실체이기는 한데 그런데 둘 다가 완전한 실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육체가 없는 영혼이 실체이지만 개혁신학자들은 완전한 실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영혼이 없는 육체도 실체이지만 완전한 실체라고 보지를 않았어요. 영혼은 형상, 육체는 질료여서 이 형상이 질료를 찾아가고, 질료는 형상을 구해서 이 영혼과 육체가 조화로운 결합을 이루고 있을 때 우리가 이것을 인간이라고 부르고 인간이야말로 완전한 실제이고 실체가 됩니다. 그렇게 됐을 때 그것이 완전한 존재가 된다고 보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영혼의 질료형상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할 때에는 이 육체와 영혼, 모두에 하나님의 형상이 투영되어야 됩니다. 물론 고유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작용과 닮았어요. 그래서 생각하는 지성과 결정하는 이 의지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육체의 특징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영혼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우선적인 담지자는 인간의 영혼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고귀함 이런 것들은 육체는 상관없이 영혼에만 투영되면 충분한 것이 아니라 육체도 아울러 그러한 영혼의 존귀함과 고결함을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아주 소득이 낮은 아프리카나 혹은 동남아에 열악한 환경을 가진 나라들을 방문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아주 비참하고 그것이 우리가 약 30년 내지, 40년 전, 40년 내지, 50년 전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아주 적은 식물 하나를 위해서 혹독하게 노동을 해야 하거나 고통을 받죠. 그런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고결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의 육체도 안전과 평안을 누리는 가운데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들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성경적인 삶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분 많은 질문들이 이 속에서 솟아날 것입니다. 우선 예상되는 질문 중 하나는 “목사님, 그렇다면 사도들이나 복음을 위해 고난 받던 개혁자들이나 많은 사람들은 옥에 갇히기도 하고, 투옥되기도 하고, 불에 지저지기도 하고, 굶주리기도 하고 사도 바울에 의하면 만물의 찢기와 같이 여김을 받는 적이 있는데 그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그런 고통을 가한 사람들은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와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걸 대적하는 인간들과 싸우면서 어쩔 수 없이 한시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시련이고 고난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정상적인 삶이라든지, 그 자체가 고난 자체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람 때문에 그 모든 악한 자의 고난을 이겨서 하나님의 형상이 육체에 의해서 발현되지 못하도록 억압과 고문과 끔찍한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그런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는 훌륭하고 덕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의롭게 살고 믿으려는 사람들을 그렇게 핍박하고, 고문하고, 찌르고, 죽이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심각한 파괴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도전인 것입니다.
또 하나 이런 질문을 하겠죠. 여러분이. 만약에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육체적으로도 기본적인 안락함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세상에는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그리고 한 조각의 빵을 위하여 하루 종일 일하면서도 그 떡을 얻지 못하고 1년에도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이 굶주림에 죽어가는 이 현실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안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문제가 됩니다. 비근한 예를 들어볼까요? 북한이 끔찍하게 고통을 받고 있고, 고난의 행군이라는 1994년도에는 1년 동안 200만 명이 굶어죽었을 것이라고 평가해요. 지금 북한에서 1년에 식량이 모자란다고 난리인데 정확하게 150만 톤이 모자랍니다. 신기하게 비료를 50만 톤 주면 식량이 50만 톤 증가해요. 그러니까 뭘 줘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정확하게 남한에서 남는 쌀이 150만 톤입니다. 착오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전 세계에 모든 인류가 적절하게 먹고 소비할 수 있을 만큼 양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탐욕이 이 분배를 굳게 만들고 욕망이 이 식량의 보급 형태를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명절이면 맛있게 먹는 소고기 1kg을 생산하기 위해서 이 소는 저개발 국가에 사람들이 식량으로 쓸 수 있는 옥수수와 같은 곡물을 12kg을 먹어야지만 1kg의 고기가 생산됩니다. 그러니까 다른 종류의 식품을 얻기 위해서 많은 양의 곡식들을 사료로 사용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이 곡식들이 전 세계에 골고루 배분되지 못하게 합니다.
유럽을 다녀봐도 정말 부자라는 느낌을 받지는 않아요. 그런데 미국을 갈 때마다 정말 부자다 라는 느낌을 받아요. 물론 그해가 미국이 호황을 구가하던 해긴 해였습니다 마는 아침을 안 합니다, 주부들이. 그리고 세수하고 엄마, 아빠, 애들 작은 가족은 3명, 많은 가족은 7명씩 차를 타고 모두 식당으로 모입니다, 아침에. 한 7시쯤 되었을까요? 모여요. 아침 뷔페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 아침 뷔페라는 게 꼭 우리 한국에서 보는 특급호텔의 저녁 뷔페같이 풍성해요. 싱싱한 과일, 좋은 고기, 맛있는 음식들이 막 즐비해요. 그런데 정말 아까워요. 이만한 케잌 떠다가 구퉁이 찍찍 먹다가 그냥 쓰레기통에 들어가고, 손바닥 두 개 넓이는 될 만한 스테이크 구퉁이 찍찍찍찍 먹다가 쓰레기통에 들어가요. 수박, 커다란 수박을 한 8등분 정도로 나누었는데 구퉁이 티스푼으로 몇 개 파 먹다가 그냥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요. 빵 무제한으로 줘요. 이만한 거. 그냥 먹다가 그냥 버려요. 샐러드 한 사발 주는 거 구퉁이 조금 먹다가 다 버려요.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국도 캐터링이 아주 발달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바비큐 파티를 하고 싶습니다. 송아지 반 마리 원합니다.’ 그렇다면 차에다가 바비큐를 다 해가지고 데펴만 주면서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해가지고 와요. 그렇다면 풀밭에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둥그런 식탁을 쫙 피고 그 위에다가 이제 테이블보를 딱 얹고 헝겊으로 된 것입니다, 물론. 그리고 거기에 스푼 그 다음에 포크, 나이프, 접시 다 배열을 해요. 그리고 먹어요. 사람들이 음식을 떠다가 진청으로 먹고 흘리고 이러다가 그저 갖고 온 음식의 30나 40% 먹다가 그냥 숟가락 다 놔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직원들이 뚜루루 와 가지고 그 테이블을 치우는 게 아니라 그 테이블에 있는 보자기를 묶어요. 그렇다면 그 속에 접시, 그릇, 칼, 스푼, 포크, 먹다 남은 음식 다 한꺼번에 싸요. 쓰레기통에 버려요.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인건비가 하도 비싸서 사람을 사서 그것을 분류해가지고 씻고 소독을 하고 다시 쓰느니 차라리 중국제 사다가 새 거 쓰는 게 돈이 덜 들어간데요. 그렇게 하면서 소비되는 그 음식이 말로 할 수 없어요. 우리나라가 10조 정도 소비한다고 하니까 미국은 뭐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의 금액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한 쪽에서 굶주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니에요.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처음서부터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만들어 주셨고, 이 육체와 영혼 모두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발현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에선가 만약에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심각하게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 굶주림 때문에 그 육체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됩니다. 그럴 경우에는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한 줄의 복음을 전할 수 없을 지라도 사정에 의해서 뭐 이슬람이라든지 그렇다면 못 전하잖아요. 전할지라도 그들이 비록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이교도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양식을 제공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을 유지하면서 살게 하는 그것이 우리의 심각한 의무에요.
3. 둘 다 신적 돌봄 대상
결국은 이 육체든지, 이 영혼이든지 간에 모두 하나님의 돌봄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을 때 이 양식은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고 그리고 우리를 만드셨잖아요?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 그 나라의 시련, 아버지의 뜻의 성취를 위하여 살아가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자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건강도 필요하고, 또 아무리 힘쎄도 무식하면 그 나라를 위해 살 수 없어요. 적당한, 적당한이 아니라 탁월한 지식이 필요해요. 또 지식과 건강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에 계속 복종하며 살 수 있게 하는 하나님 사랑과 은혜가 우리 안에 없다면 그렇게 살 수 없어요. 우리는 기계처럼 하나님이 태엽만 감아놓으면 하나님을 위해서 쉼 없이 그렇게 일할 수 있는 그런 도구가 아니에요. 외로울 때도 있습니다. 친구가 필요해요. 사회적인 요구도 있고, 육체적인 요구도 있고, 영적인 요구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필요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전부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이 됩니다. 그러니까 누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 구절은 그저 하루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식물, 그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III. ‘오늘날 우리에게’
그렇다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기도를 공동체적으로 올리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날마다 마태복음의 표현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에게’ 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우리는 아주 일차적으로 적용하면 우리의 가족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들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부격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교회와 관련될 때에는 양자적인 아버지 되심이지만 세계의 모든 인류를 향할 때에는 창조주로서의 아버지 되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아버지 되심이 크게 네 개가 나와요. 첫째 아버지 되심은 이 세상 창조된 모든 인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왔다는 점에서 창조의 아버지, 두 번째는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성부는 성자의 아버지가 되시는 삼위일체 내적인 부격인 아버지 되심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 신정 국가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양자적 아버지 되심인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류는 첫 번째 의미에서 아버지의 자식들이고, 우리 하나님의 자녀는 네 번째 의미에서 아버지의 자식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공동체적으로 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지체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양식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실제로 우리 자신이 이바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이교도들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A. ‘날마다’-‘오늘날’
1. 날마다(에피우시온)
그렇다면서 오늘 성경은 이러한 양식을 날마다 오늘, 이렇게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렇게 날마다 혹은 오늘 양식을 달라고 하는 그 양식을 꾸미는 수식어에요. 그것을 마태복음, 누가복음 모두에서 일용할 양식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희랍어로 '에피우시온'이라는 단어인데 이 번역은 매우 어려운 번역이고 역사적으로 이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주 치열한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이 논쟁은 매우 재미있는데 이 논쟁을 설명하는 것은 오늘 2012년 첫 주일 설교에는 그 목적과 부합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것을 간략하게나마 이 '에피우시온'이라고 하는 ‘일용할’이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에 대해서 어떤 해석들이 있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우선 첫 번째 해석이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는데 이것은 '에피우시온'이라는 단어를 ‘에피’라고 하는 ‘무엇 무엇에 관해서’ 라는 전치사와 ‘웃시온’ 이 단어는 웃시아라는 희랍어의 본질을 뜻하는 단어의 합성어라고 생각을 하고 이것을 어떻게 번역하냐 하면 생명적으로 필수적인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이런 식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의미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죠. 그래서 ‘하나님 우리에게 날마다 생존을 위한 것만큼만 양식을 주십시오’ 라는 기도가 됩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이 첫 번째 해석보다는 두 번째 해석을 선택했는데 그것은 ‘당일 필요한’ 이라는 의미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도 이 두 번째 해석을 따라서 ‘일용할’ 혹은 ‘데일리’라는 번역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보다 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얻고 있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 세 번째 해석은 바로 ‘에피우시온’이라는 이 단어가 ‘에피웃사’에서 온 것으로 보고 내리는 해석입니다. ‘에피웃사’라는 희랍어 단어는 ‘잇달아 일어나는, 연달아 발생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뭘 의미하냐하면 오늘날 우리에게 날마다 연달아 발생하는 날을 위하여 그러니까 날이 생략됐다고 보는 것입니다. 연달아 발생하는 날을 위한 양식을 주십시오. 그래서 많은 유대인 학자들이 이 '에피웃시온'이라는 단어를 ‘마할’이라는 히브리어 즉, 내일이라는 말로 번역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입증하듯이 사도행전 7장 26절에는 이 ‘에피웃사’라고 하는 단어를 ‘이튿날’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에피우시온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이제 ‘이어지는 날들에 꼭 있어야 하는 그 양식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십시오’ 라는 의미가 됩니다.
2. 출16장이 배경임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다시 출애굽기 16장으로 돌아가는 게 최선의 상책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이 알토스를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그림은 구약의 언약 백성들을 먹이시던 만나의 내리심을 예수님의 마음속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자,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식으로 만나를 공급받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마다 각기 습성이 틀리죠. 어떤 친구는 새벽잠이 없어요.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친구는 잠이 많아요. 한 10시쯤까지 퍼질러 자다가 간신히 일어났어요. 어떤 친구는 야행성이야. 그래서 밤새도록 비디오 보다가 물론 구약에 비디오를 봤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밤새도록 놀다가 2시쯤 기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가지를 들고 만나를 구하러 들판으로 나아가니까 어느 시간이든지 만나가 눈처럼 내리고 있었어요? 아닙니다. 만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가 퍼지기 전에 갔어야 됐어요. 왜? 해가 퍼지면 다 이슬처럼 사라지면서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들이 만나를 구하러 간 시간은 새벽 미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으면 너무 깜깜해서 못 알아 볼 테니까 살짝 아침 햇살이 비출까 말까 할 때 가가지고 녹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먼저 만나를 딱 자기 하루 쓸 것 만큼만 거둬오는 것이었죠. 그렇다면 그들이 갔을 때에 만나가 내리고 있는 중이 아니라 항상 가면 이미 만나가 하얗게 내려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만나는 사람들이 그 들판에 나오기 전에 아무도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이 마치 이슬이나 서리를 내리시는 것처럼 그렇게 새벽 아직 먼동이 트기 전에 하나님이 이 땅에 만나를 깔아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양식은 언제 쓰는 것입니다? 그렇죠. 해가 퍼지면 사라질 테니까 해가 퍼지고 그 다음날 다시 만나를 내릴 때까지 쓸 수 있도록 미리 거두는 것이니까 이 에피오신을 ‘잇따라 오는 그 날에 필요한’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기가 막힌 일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그냥 ‘일용할’이라고 고집을 하게 되면 만나의 사건에서 해석이 안 되는 어려운 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안식일 전날입니다. 왜냐하면 안식일 전날은 안식일은 만나가 내리지 않아서 그거를 구하러 가봤자 소용이 없었죠. 그리고 안식일 전날에 만나가 내릴 때 사람들은 두 배로 이틀 치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날의 양식이 아니라 아주 명백하게 그 다음날의 양식이 됩니다. 그래서 에피옷시온이라는 이 단어를 ‘잇달아 오는 날’ 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구약의 배경에서도 알맞고 이 희랍어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에도 알맞고 역사적으로 이것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을 보더라도 가장 알맞은 해석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줍니까? 미래를 위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소명을 따라 살도록 준비하고 예비하는 그것은 정죄 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여기 보니까 자매들 많이 있는데 믿음으로 살다가 시집갈 때 빈손으로 가면 엄마 고생이야. 형제들도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숙을 해서 열심히 벌면 미래에 내가 한번 오늘 하루만 하나님 위해 살다가 죽는 게 아니라 일평생 주님을 위해 살아야 되잖아요. 그렇다면 그 미래를 위해서 자신이 지적으로도 준비되고, 영적으로도 준비되고, 인격적으로도 준비되고 물론 이거는 지금 당장 쓸 거 아니에요. 준비되고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물질적으로도 모든 것들이 준비가 되어서 언제든지 주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 내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 영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혹은 물질적으로나 모자라서 그 일에 적합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 이 얘기에요. 그렇다고 돈 없는 사람을 구박하는 하는 것은 아니에요. 시집 못 간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돈 없다고 구박까지 받으면 너무 힘들잖아요. 그건 아니에요. 그러나 그렇게 마치 모든 물질을 모으고 미래를 위하여 예비하는 것 자체를 불신앙으로 못 박는 것은 이 성경 구절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는 얘기죠.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뭐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맘몬을 의지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매일매일 의지하며 의존의 정신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보다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께 간구할 필요가 없는 이런 탐욕의 상태, 이것이 하나님 앞에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 상태를 보여줘요.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까지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그런 존재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사람다운 교양을 갖추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게 하는 그 믿음, 누구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입니다. 나는 내 맘대로 인생을 살고 싶은데 그래도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착한 의지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여러분이 입고 있는 옷은 몸을 편안하게 해 주는 그 옷은 어디로부터 왔나요? 친구 집에 갔더니 아주 옛날 일입니다. 결혼하고 얼마 안됐는데 아이가 쬐끔해. 한 세 살 됐을까? 엄마가 밥을 주는 것입니다. 세 살인가 그쯤 됐는데 아기한테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 밥 누가 주는 거지?” 그러니까 얘가 “하나님” 그렇다면서 받아먹더라구요. 근데 그건 정확한 교육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 아빠의 노동을 통해서 혹은 하나님이 우리 엄마의 봉사를 통해서 이렇게 이야기해야 해요. 그러니까 이 옷이 어디서 왔나요? 그랬을 때 “하나님” 하나님이 방직공장 사장입니다? 우리 중 누가 하늘로부터 소포 받은 사람 있으면 한번 손 들어봐요. 난 아직도 그런 선물 못 받았어요. 하나님이 우리 가족들의 노동을 통해서 혹은 만약에 이게 어느 지체가 나한테 준 선물이라면 그 지체의 노동을 통해서 얻은 수고로 그 소득으로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천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거지만 누군가를 통해서 주신 도구적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영광 돌릴 뿐만 아니라 그 도구가 되었던 사람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품으면서 사는 것이 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모든 것을 다 헤아리고 나면 결국은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요. 가난하다는 것은 가진 것이 적다는 뜻인데 사실은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말도 해당이 안 됩니다. 모든 것을 마지막 생명까지라도 결국은 나쁜 것 빼놓고 우리의 생명에 이바지 하는 모든 좋은 것은 그분께로 받아서 우리가 빚지고 그 분의 덕을 입으며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티끌 같은 존재이고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매일 하나님 앞에 구하는 기도 생활 속에서 인식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과 모순이 되잖아요. 하늘 아버지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신다. 그래놓고 우리 보고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잊어버릴까봐 깨우치기 위해서 기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병적인 성경 해석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잊어버릴까봐, 우리를 깨우치시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매일 무릎을 꿇고 하나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이 양식은 한 덩어리의 밥, 빵 한 그릇의 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해 주신 계획대로 살아가게 하는 모든 자원이옵나이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자매들에게 있어서 로션 정도는 일용할 양식이 아닐까요? 루즈 정도도. 눈썹 그리개 정도도. 워낙 원판을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에게는 그 범위가 더 늘어나지 않을까? 그러나 일 억 원짜리 마사지는 일용할 양식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그런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한편으로는 우리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물 한 모금, 떡 한 덩어리도 그 분을 의지해서 살며 공급받아야 하는 정말 티끌 같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또 한 편으로는 구하라 하신 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간구하고 믿음으로 간절히 하나님께 달라고 청구할 뿐이지 우리는 염려하고 근심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먹고 입는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양식, 우리의 교육받을 기회, 문화적인 누림, 그리고 우리와 함께 나눌 친구들, 이외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공급들을 하나님이 아시고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것들을 공급해 주신다고 합니다.
여러분, 배가 고픈 것은 세끼 매끼 참는 거는 한 끼 정도는 참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외로울 때는 어떻게 해요? 물론 기도하면 되죠. 그리고 말씀 보면 되죠.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정말 마음을 터놓을 친구, 하나님의 은혜를 공유할 벗이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기도하시면 되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셔요. 자존감이 뚝 떨어져서 짓밟힌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죠. 여러 가지 비난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비난이 일리가 아주 없지는 않아요. 아무리 내편을 들어도 나는 정말 희망이 없고,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절망적인 생각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때에 어떻게 해요? 그때 바로 이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 제 마음은 많이 찌그러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이 너무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겨져서 잘 살고자 하는 힘이 없습니다. 주님은 나의 방패, 내 영광, 내 머리를 드시는 자시옵나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신기한 방법으로 우리의 자존감을 다시 회복시켜 주세요. 그런 것입니다. 얼마나 어머니 같은 하나님 아버지셔요? 세심하게 돌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에 현재와 미래에 대한 모든 염려는 사실 물질의 부족이나 공급의 모자람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과 맺고 있는 인격적인 신뢰의 관계가 약하거나 와해됐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깊이 신뢰하고 있으면 염려가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녹이지 않아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궁극적인 소명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자면 그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단 하나의 대적이 있습니다. 그게 정욕이나 유혹, 뭐 커다란 배교 이런 게 아니에요. 그런 거라면 우리가 능히 대적할지도 모르죠. 그럼 뭐죠? 염려에요. 염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충고하셨죠.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하늘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물질의 있고 없고 지식의 많고 적음이 근심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참된 평안과 근심의 이 차이는 오늘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와의 인격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먹이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그 사랑과 신뢰의 고백 속에서 모든 염려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나보다 내게 좋은 것이 뭔지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이 내게 최선의 것을 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실 것이라는 신뢰 속에서 어머니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어린 아이처럼 우리의 인생의 길을 우리의 인생의 고유의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의 값어치와 고귀함은 그가 살아온 인생의 길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에요. 긴 인생을 살아도 거의 쓸모없는 사람이 있고 짧은 인생을 살고 죽었어도 고결한 인생을 산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당부하셨던 예수님의 교훈의 의미인 것입니다.
B.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
결국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은 결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용감하고 씩씩하게 자신과 함께 스스로 동행하면서 사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가장 가슴아파하는 교만한 삶이고 패망의 앞잡이의 길을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을 향하여 싸울 때에는 담대했으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처럼 의존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인간으로 만드셨고, 그래서 두 다리는 땅에 딛고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한 삶의 자원들을 공급받아요. 그러나 그에게는 해석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것들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자원을 주셨을 때 언제나 이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땅의 것을 향하지 않고 땅의 것으로 말미암아 하늘을 향하여 살도록 눈을 들게 만들어 주는 도구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높이 향하여 바라보고 전능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의존합니다. 티끌같이 무한히 뻗어있는 우주 공간에 티끌 같은 한 점 그 행성에 살면서 우리는 길어야 80 혹은 70의 생애를 살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는 가운데 잠시 있는 티끌 같은 존재이고 들풀 같은 존재들이지만 하나님 때문에 영원불멸하는 존재인 것을 자각하면서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잇대어 살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아서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공급해 주실지라도 언제나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시선을 높여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하늘을 향하여 바라보며 거기에서 나오는 또 다른 양식을 앙망하게 됩니다.
(찬양) 하늘의 양식을 생명의 만나를 맘이 빈자에게 내리어 주소서
IV. 결론
낮고 천한 우리지만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채우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한 해가 새롭게 펼쳐졌습니다. 자기 의존하며 원망과 불신앙 속에 한 해를 더럽히시렵니까? 아니면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주님과 함께 충만한 공급의 삶을 사시렵니까? 이제는 여러분이 삶으로 하나님 앞에 대답해야 할 시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2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눅 1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이 본문을 설교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양식이라고 하는 이 단어가 히브리 사람들이 주식으로 삼는 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제유법적인 표현으로서 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가기 위해서 필요한 영혼과 육체와 정신의 모든 필요한 것들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어지는 날들의 필요한 양식이며 출애굽기 16장에 나오는 만나의 사건을 통해서 이것을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이 기도 속에서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II. ‘우리에게’-공동체의 기도
A. 공동체적 기도의 지평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에게 주옵소서’라고 하는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라는 말이 갖는 공동체적 기도의 성격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공동체적 기도의 지평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셨어도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굶주리고 있다면 이 기도가 아직 응답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1. 일차적 지평: 그리스도의 지체
이 기도는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올리는 개인적인 기도이고, 가족이 공동체로 올리는 기도입니다. 그렇지만 이 기도는 구체적으로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들에게서 일차적인 지평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이 주기도문은 그리스도께서 가깝게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좀 더 멀게는 이어지는 신약의 교회의 성도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하는 이 기도 속에서 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우리가 몸담은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굶주리는 사람이 없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 가도록 하나님이 은혜 주시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또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유를 그들에게 나눠 줌으로써 그들도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으며 하나님 앞에 살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먼저 믿는 지체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진리이고 나아가서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보편 교회에 적용되어야 할 기도의 제목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루살렘 교회가 커다란 궁핍에 처했을 때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부조한 이야기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고 그리스도인들이 굶주리게 되었을 때에 사도바울은 이방의 교회들이 헌신하게 하였고, 거액의 연보를 전달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방인 선교의 아버지로 부름을 받았고, 바울의 지시를 따라서 헌금한 이방교회의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의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는 뜻이고, 또 궁핍에 빠진 형제들을 돕는 것이 복음의 정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착한 일을 하되 특별히 믿음의 자녀들에게, 형제들에게 할지니라고 우리를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돌아보되 교회에 속한 지체들, 나아가서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 교회에 속한 굶주리고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이 기도를 드리며 함께 돌아보아야 합니다.
2. 궁극적 지평: 이 세상의 이웃들
그러나 궁극적인 지평에 있어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이웃들이 바로 이 기도에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해 주신 양자적 아버지 되심과 함께 자기의 형상을 닮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돌보고 기르시는 창조주 아버지이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불신자들, 심지어는 이교도들까지도 이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고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유지해 가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함께 이웃들을 생각하며 이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우리는 정치인도 아니고, 또 군사전문가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상과 같은 복음의 정신으로 볼 때에 굶주리고 있는 북한을 돕는 것은 시급한 일입니다. 94년도에만 소위 고난의 행군의 때에 200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습니다. 우리가 돕는 것은 북한에 있는 정치 지도자들 몇 사람의 태도 때문에 돕고 말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양식이 주민들에게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들이 누구든지 그 양식을 먹고 허기를 면할 수 있다면 우리는 부지런히 도와야 하고 그래서 북한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우리가 구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디 북한뿐이겠습니까? 저는 며칠 전에 신문 기사를 통해서 해마다 이 세계에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2억 5천 만 명이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눈을 의심하면서 읽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네 살인 아이 네 명중 다섯 살에 만나는 아이가 세 명 밖에 안 된다고 하니 20% 이상의 아이들이 굶주림으로 4살과 5살 사이에 죽는 것입니다. 굶주림은 영양의 결핍을 가져오고 저항력을 떨어뜨려 질병에 쉽게 노출되게 합니다. 15달러가 없어서 에이즈에 걸린 아이들이 치료를 받으러 가지를 못하고 죽어간다고 하는 소식은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모자라게끔 양식을 주시고 부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부를 주시지만 인간의 탐욕과 그리고 잘못 때문에 부의 배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는 잘 모르고 더욱이 군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마는 미국이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했을 때에 매일 약 1조원의 전비를 사용하였습니다. 1년 동안 약 500조원의 돈을 쓰겠다고 의회에 특별 예산을 청구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군사나 정치는 잘 모르지만 ‘저것은 참 아니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에 미국이 그렇게 막대한 돈을 제 3세계에 굶주리고 이 땅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미국을 존경하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체적인 지평 속에서 가깝게는 우리 교회 안에서, 멀리는 이 땅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이 이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지 않으면 안 됩니다.
B. 풍족히 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가르쳐 주신 기도에 접하면서 이미 모든 것을 풍족히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내게 양식을 주지 않으셔서 굶주림 속에 죽어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였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의지를 반하여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치시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족히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풍족하게 주시는데도 탐욕과 방탕으로 말미암아 이런 식량의 공급들을 굳게 만듭니다. 대규모의 농업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은 첨단 장비와 그리고 정보 체계를 가지고 가격이 떨어지면 곡물 생산을 줄이거나 경작을 포기하고 또 가격이 올라갈 것으로 예상이 되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가지고 전 세계의 곡물들을 매점매석하여 가격을 조작합니다. 처음에는 적은 돈으로 곡물을 구입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비싼 값으로 구입할 수밖에 없게 되고 여기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식량의 조달의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인간의 탐욕 때문에 곡물은 균등하게 배분되지 않습니다. 1kg의 고기를 얻기 위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12kg의 곡물이 가축들에게 투여되어야 하고, 우리나라와 같이 목초지가 없는 곳에서는 짐승의 사료 중 90%가 사람이 먹고 기근을 면할 수 있는 곡물들이 사료의 재료로 사용됩니다. 이러한 인간의 음식에 대한 탐욕들이 점점 더 식량의 공급들을 어렵게 만들고 그리하여 이 땅의 기근으로 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자각함
이 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자각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풍족히 가지고 계시고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삶의 모든 필요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임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셔서 후히 누리게 하시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도 넘치도록 주셔서 우리들이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모든 조건들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을 즐기고 누리는 것이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에게 사용하여야 할 사물과 누려야할 사물을 구별하여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용하여야 할 사물들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사람다운 삶을 살아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사물들입니다. 연필은 글을 쓰는 목적에 기여하고, 책은 지식을 습득하고자 하는 목적에 이바지 합니다. 붓은 그림을 그리는 일에 도움이 되고, 빗자루는 청소하는 일에 쓰려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인간도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뜻에 맞게끔 사용하시려고 그 기능을 잘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공급해 주시죠. 이것들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누리고 사랑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용하여야 할 사물들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이 사용하여야 할 사물들은 누려야 할 사물을 위해서 쓰여지도록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누려야할 사물은 하나님 한 분 뿐이고,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그 일에 합당하게 쓰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과 우리의 필요한 모든 사물들을 주시고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분단되어 있고 많은 군인들이 희생하며 나라를 지킵니다. 그래서 국민은 세금을 거두어 그 군인들을 위해서 상당한 돈을 사용합니다. 그 돈은 단지 총칼을 사는 데만 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돈은 총과 칼을 살뿐 아니라 군인들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공급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들이 타고 다니는 차, 그들이 먹는 음식, 그리고 그들이 마시는 음료, 그들이 입을 옷, 이런 것들을 공급하는데 사용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열심히 나라를 위해 봉사한 뒤에는 병이 나면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의료 시설을 제공하고 그 뿐 아니라 여름이면 온 가족이 휴가를 갈 수 있도록 군인들을 위한 휴양지와 리조트 시설을 별도로 세금으로 만듭니다. 심지어는 군인들을 위한 골프장까지도 짓고 그것을 유지하며 관리합니다. 모두 국민의 세금으로 합니다. 이것은 그 자체를 즐기도록 국민들이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봉사해 주는 것이 그가 유사시에 나라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켜 보호해 주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만약에 군인으로서 본분을 잊고 국민에 의해 이렇게 제공된 편의 시설에 안락하게 사는 것이 군인 생활의 목적 자체가 된다면 그는 용서받을 수 없는 군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만 주시는 모든 것은 그것에 탐닉하고 그것을 최종적으로 누리며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탐욕과 방탕으로 주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쓸데없이 낭비함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헐벗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 일용할 양식을 두고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을 경험하며 교회 역사를 지내왔습니다. 하나는 극단적 금욕주의이고, 또 하나는 극단적인 방탕주의 입니다. 역사의 예를 한 번 들어보죠. 4C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극도의 금욕과 절제 속에서 살았습니다. 금욕주의적인 사상을 따른 이 사람들은 복음의 정신으로 그런 행동을 했다기보다는 그리스 철학과 신비주의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육체를 비롯한 모든 물질은 열등하고 정신과 영혼은 고등하기 때문에 육체를 학대하고 천하게 취급함으로써 영혼은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 고양된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그런 사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음에 있어서 그 속에서 맛을 느끼고 행복해 하는 것 자체를 죄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조리한다는 개념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말로 맛대가리 없게끔 음식을 만드는 것이 경건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죠. 그래서 그들은 많은 민간에서 쓰는 향신료나 양념들을 거부하고 소금 정도를 사용했습니다. 음식을 입에 넣고 어떤 맛을 느끼는 것 자체를 죄악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일부러 거친 음식을 먹고 음식에서 어떤 맛난 맛이 나는 것은 인간의 영혼과 정신을 호리는 것이기 때문에 피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육식과 같은 것들은 그런 의도에서 멀리 하였던 것입니다. 이 문제는 사실 아주 미묘한 것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 보니까 어느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상품으로 내놓았는데 6명이 함께 식사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1500만원에 판다고 광고를 낸 거를 보았습니다. 별로 놀라시지도 않네요. 도대체 그 1500만 원짜리 식사는 뭘로 이루어져 있을까? 아무리 비싼 음식이라도 입속에서 그것들을 씹고 국물이 나오고 혀끝에 그 맛들이 느껴지는 시간은 길어야 15초 입니다. 뱃속에 들어가면 그 음식이 싸구려이든지 비싼 음식이든지 어차피 뱃속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몇 초 동안의 쾌락을 위해서 인간들은 막대한 돈을 먹는 일에 소비하고 거기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주 미묘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만약에 모든 음식의 맛이 다 똑같다고 한다면 아마 사람들은 음식에 신경 쓰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건강을 해치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음식의 적당한 맛들을 주셨고 그래서 기력이 떨어질 때에는 보통 음식은 섭취하고 싶지 않지만 조금 맛난 음식을 섭취하면 이 입안을 즐겁게 하고 감각을 깨우면서 삶의 새로운 의욕을 주고 그리고 우리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영양분을 빨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한쪽 극단, 음식에서 맛을 느끼는 것 자체를 죄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가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하나의 비성경적인 음식에 대한 태도는 그 맛이 호리는 그 감각에 취하여 무작정 자기 마음을 풀어버리고 방탕과 탐욕으로 흐르게 됩니다. 옛날 중국 역사에 보면 돈 많은 집 사람들은 돼지 새끼를 낳아서 첫 아이를 낳은 젊은 여자의 집에 보냈습니다. 여자에게는 두 젖이 있고 하나는 아이에게 먹이고 하나는 그 돼지에게 먹여서 적당한 크기로 자란 다음 그 돼지를 잡아서 그 주인이 먹었던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잔인하리만치 인간은 음식의 맛을 탐하게 되고 그렇다면서 인간은 몸을 위해 사용하여야 할 음식, 그것을 먹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거시는 기대를 따라 살아야할 본분을 망각하고 음식 그 자체가 주는 맛에 취하여 거기에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고백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자와 함께한 잠자리는 한 번에 결단하고 끊을 수 있는 것이지만, 음식은 그렇게 결단하고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몸의 건강을 위하여 음식을 먹어야 하고 적당히 맛을 즐겨야 한다는 생각과 또 한편으로는 식생활의 방탕에 흐르지 않으려면 이것을 절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양립하는데 이 경계가 애매하고 모호합니다. 그리고 나는 차라리 이 경계가 애매한 것이 즐거워 식욕의 노예가 되어가기도 하였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해 주소서”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극단적인 식생활의 방탕, 그 사이에서 어디엔가 우리의 위치를 정하는 것이 복음적인 경건일진대 그것이 어느 지점일까요?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요한 칼빈 선생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다가 맛을 느끼게 되면 그러한 맛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자. 그리고 그 분께 감사하자. 그러니까 어떤 음식에서 맛을 느끼는 것을 죄악시 했던 금욕주의를 버리고 어떤 음식에 맛난 맛이 나면 우리는 그것을 즐기고 정말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이렇게 맛난 음식을 주신 하나님, 그런 맛을 이 세상의 물질들 속에 주셔서 그것을 요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 뜻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지나치지는 말자. 지나치지는 말자. 그래서 그 음식에 입맛의 노예가 되는 것처럼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해 놓으신 그 거룩한 뜻과 어긋나는 것이다”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는 이제 이 극단적인 금욕과 극단적인 방탕 사이에서 이 음식이 우리의 몸을 위하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위하시는 이 질서를 깨닫게 됩니다.
2. 노동을 통한 응답
둘째로 우리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을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기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밀레의 만종이라는 작품을 기억할 것입니다. 부부가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한 후 농기구와 그리고 식물들이 들어있는 삼태기를 아래에 내려놓고 함께 경건하게 마주보며 두 손을 모으고 노을이 비춰지는 들판을 배경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그 광경 말입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이 기도가 열심히 노동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가장 간절하게 울려 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주석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언제나 주시지만 우리의 떡으로 주실 때도 있고, 남의 떡으로 주실 때도 있다고 그렇게 주석하였습니다. 남의 떡으로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교회 안에 이웃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 어디에서든지 일평생 다른 사람의 도움이 아니면 자기의 힘으로 도저히 자립해서 양식을 얻을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위해 국가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충분히 우리의 양식을 나누어 주어 그들도 굶주림에 빠지지 않도록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양식을 해결 받았어도 아직도 이 양식을 해결하지 못한 우리의 지체들과 이웃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민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 가진 그 무엇을 나누어 주는 것은 그 자체가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하지, 어마어마한 결단을 요하는 매우 특별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결핍한 세상 한복판을 흘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육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원들을 나누어 줌으로 그들도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누리며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 궁핍한 세상에 두신 존재의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 생활화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살고자 하는 노예적인 유전자가 이 속에 배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조금 돕고는 오래도록 그 일을 기억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경건의 모습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기억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것이 되게 하되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은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노동의 능력이 있으면서 노동을 통해서 오는 고통을 싫어함으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습관화 되는 것은 이 주기도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의 도움을 통해 얻게 되는 1년 치의 기름진 음식보다는 나의 노동으로 얻은 한 조각의 거친 식사가 훨씬 아름다운 식사이고 사람이 먹기에 적합한 식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마는 전도사 때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한 3년 동안을 교회 안에서 살았습니다. 열린 교회를 세우고도 제가 10년 동안 교회 안에서 생활한 것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목사가 되고 난 후에야 문제가 안 되었지만 전도사 때는 정말 가난했습니다. 교회에서는 한 달에 7만원의 사례비를 주었고 6개월마다 내는 등록금은 45만원이었는데 교회에서 10만원이라도 학비를 보조 받았으면 내가 성을 갈겠습니다. 그 교회 있으면서 절대로 나는 이런 교회를 하지 말아야지 여러 번 다짐했습니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까 8년 동안을 봉사하다가 나왔는데 10원 한 푼도 퇴직금을 주지 않은 교회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거지들이 수시로 도와달라고 교회를 찾아와요. 목사님 사택으로 가는 게 아니라. 전도사가 돈이 있어야죠. 그래서 많이 주는 사람은 500원, 적게 주는 사람은 300원을 주었어요. 교회에서 천 원짜리라도 이만큼 좀 갖다놓고 교회 사무원도 없었어요. 그리고 오는 사람 1000원씩 주라고 그렇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왜 그런지 안줘요. 그래서 우리 살림살이에서 500원도 주고, 300원도 줬더니 그때 어느 거지가 300원인가 500원을 줬더니 땅바닥에다가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했어요. 그랬더니 그 거지 하는 말이 “누굴 거지인줄 아냐”고. 속으로 그랬어요. ‘나도 당신보다 별로 잘 사는 게 없는데’ 정말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할 때 이런 의미입니다. 노동을 위하여 땀을 흘리는 사람이 이 기도를 가장 진실하게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이 정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준 일용할 양식을 통해 공급을 받으며 일용할 양식으로 해결하는 것보다 우리의 노동을 통해 이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좋다고 믿는 이유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충분히 노동의 여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신 일용할 양식으로 자신의 양식으로 삼으며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진심으로 노동하고 양식을 받고 그 양식 중 남은 일부를 이웃에게 나눠 줄 수 있는 그 사람이 훨씬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 남는 양식들은 끊임없이 교회 안에서, 가정에서 넘쳐 교회로, 교회 안에서 쓸데가 없어서 넘쳐 다른 보편 교회로, 다른 보편 교회에서도 쓸데가 없이 더 넘쳐서 이방 사람들에게로, 가난한 굶어 죽어가는 아프리카와 다른 대륙의 사람들에게로 그렇게 전달되어 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할 수만 있으면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사랑으로 그 양식을 주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 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없이 받는 밥상은 그저 그런 밥상일 것이지만 어려운 속에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얻은 노동의 소득, 그것으로서 차려진 한 끼의 식탁은 우리로 하여금 눈물이 앞을 가리고 감격에 목이 메이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많이 주신 사람이 많이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적은 것을 받았지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을 매우 좋아하고 기뻐하며 사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평생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말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양식을 우리의 부지런한 노동으로 해결할 뿐 아니라 또 이 양식을 궁핍한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도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봉사하게 되는 그 안에서 우리는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C.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선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일용할 양식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주기도문의 네 번째 기도는 우리로부터 염려로 벗어나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데 그 부르심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대적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육신의 필요를 위하여 염려합니다. 우리가 물질이 부족하고 가진 것이 없다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라는 이 인격적인 관계의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끼며 그 영적인 평화 안에서 그 분과 은혜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주님이 주시는 뜻을 따라 이 세상 어디에선가 이 세상을 창조한 목적을 위하여 더 좋은 세상이 되도록 노동할 것이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충족히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양식의 부족 때문에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버려두시진 않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며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III. 결론
지난 한 해에 우리는 염려와 근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태웠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해 주실 때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우리의 마음을 더럽혀 신앙생활하기 힘들었습니다. 금년에는 하나님을 정말 잘 믿고, 그 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실 때에는 주신 그 은혜 때문에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무엇인가 모자라고 부족할 때에는 그것 때문에 주님을 더 의지해서 하나님과 보다 깊은 사랑의 관계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용할 모든 양식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 생활 해 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0.우리의 죄를 사하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눅 11: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님께서는 다섯 번째 간청의 제목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네 번째 간청의 제목은 육체를 위한 간구였는데, 양식 한 가지가 등장을 합니다. 우리가 읽은 4절은 영혼을 위한 간구인데 여기에서는 용서와 시험에 들게 하지 말게 해 달라는 기도와 악에서 구출해 달라 는 세 가지나 필요한 요구사항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의 육체도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영혼은 더 많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영혼다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는 이 기도를 간청의 제목으로 가르치셨습니다.
II.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A. 두 본문의 차이
우선 여기에서 우리들이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두 본문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즉, 마태복음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한 것처럼’ 이렇게 완료형으로 등장하고 누가복음에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있사오니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옵소서’ 현재형으로 등장을 합니다. 시제에 민감한 우리들은 이 두 복음서의 기도문의 차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할 때 응답되는 것은 이미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저 지금 용서하는 태도로 살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마태복음은 예상되는 독자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상되는 독자가 유대인들이 아닌 헬라 사람들이었습니다. 원래 이 주기도문은 아람어로 예수님에 의해 가르쳐졌습니다. 그리고 그 아람어를 희랍어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아람어와 히브리어는 희랍어나 오늘날 현대 영어와 같지 않아서 현재, 미래, 과거 이런 종류의 시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제대신 시상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시간과는 상관이 없이 말하는 시점에서 연상되는 동작이 완료된 것이면 완결, 그리고 완료되지 않은 것이면 미완결형을 사용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완료도 완결, 과거도 완결, 그리고 미래 완료도 완결형입니다. 과거 진행형도 아람어와 히브리어에서는 미완결형을 사용을 합니다. 그래서 이 마태는 아람어를 히브리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그리스어로 즉, 희랍어로 옮기면서 이렇게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한 것처럼’ 이라는 시제를 사용을 한 것입니다. 누가는 희랍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희랍어의 양식을 따라서 설명했기 때문에 이렇게 현재의 형태로 기록이 되었으니 이 시제의 문제는 사실은 원래의 이 성경의 기록으로 보면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보다도 두 복음서 기도문의 차이에 대해서 시선을 끄는 대목은 ‘죄 지은’, 그 다음에 ‘우리의 죄도’ 라고 하는 이 제목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오페이레마타’’[ὀφείλημα] 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원래 ‘빚진’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하오니 우리가 당신께 대해 빚진 것도 탕감하여 주소서’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구약시대 때부터 이 죄를 빚으로 생각하는 개념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죄를 빚으로 표현하는 그러한 어법에 훨씬 더 큰 호소력을 느꼈기에 마태는 그것을 이렇게 ‘빚을 지다’라는 두 번의 단어로 사용을 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누가는 비유대인들을 향해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만약 마태처럼 이런 식으로 기록을 하면 많은 독자들이 ‘죄의 문제는 하나님께 갚기만 하면 되는 거구나’하는 경제적인 거래 관계로 생각할 위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말티아스’[ἁμαρτία]라고 하는 죄라는 단어를 들여오고, 사람에 대하여 죄를 용서해 준다는 개념은 마태와 똑같이 ‘오페이론티’[ὀφείλω]라는 단어를 사용을 합니다. 이 모든 차이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 이 두 기도문 사이에 신학적인 논쟁이 될 정도의 차이점은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 생활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기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할 때에 이 문장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용서 받는 것은 이미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했기 때문이냐 아니면 하고 있기 때문이냐 하는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의 성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과거든 현재이든 계속 용서해 주면서 살고 있사오니 우리가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오니 주님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B. 주기도문의 주체
1. 용서받은 제자들
그렇다면 이 주기도문을 드리도록 예상한 1차적인 주체는 누구였겠습니까? 이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이 다섯 번째의 간청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기도를 드리도록 예수님께서 맨 처음 이 기도문을 주신 주체는 이미 용서받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받아들여진 제자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마는 마태복음에서는 이 주기도문에 대한 가르침이 나오기 전 꽤 긴 5장부터 7장까지 계속되는 산상수훈이 등장합니다. 바로 이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과 그 나라의 백성인 제자들의 정체성, 그 나라의 백성으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의 윤리에 대하여 가르친 내용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예수님께로부터 받을 때에 제자들은 주기도문만 받은 것이 아니라 이 주기도문이 바로 산상수훈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 그의 백성의 자격, 그 백성의 윤리적인 생활을 모두 염두에 두고 이 주기도문을 예수님께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기도문은 결국 천국 백성으로서 아직 완전히 그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에 살면서 하나님 앞에 올리는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제자들은 이 세상 나라에 속해 있으면서도 또한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있고 완전히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바라보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 시민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성경이 가르쳐 주었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두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근심하는 사람이어도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나라와 의의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어야 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같이 자신들도 온전한 사람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탐욕을 멀리하고 정결하게 사는 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주기도문을 받드는 제자들이 그런 사람입니까? 한때는 그런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인격의 품질에 대해서 예수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애통하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어야 했고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은 그런 사람이 못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올릴 그때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시고 아버지의 뜻이 여기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그 기도를 드리면서 사실은 자신들은 그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답지 못하다는 것을 늘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가 매일매일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모자라는 사람을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주신 은혜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 앞에 주님의 용서를 먼저 빌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간청의 제목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줬다라고 하는 것이 기도의 주된 청구의 제목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 받게 해 달라는 기도가 주된 간청의 내용입니다. 그것이 필요한 줄을 너무나 잘 알아서 용서 받았으나 지금도 또한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허물 많은 제자들에게 주신 주기도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었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답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볼 때에,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밖에는 자신들에게 해결책이 없다고 하는 의존의 기도였습니다.
2. 유대인들과 다른 기도
이러한 기도의 방식은 당시 유대인들이 드리던 기도와는 완전히 다른 기도였습니다. 유대인의 기도의 개념은 신인보상 개념을 가진 기도였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이만큼 착한 일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내가 한 것만큼 갚아주셔야 할 의무를 가지신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사람이 누구냐 하면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세리와 함께 올라갔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무엇을 먼저 말했습니까? 은혜와 용서, 사랑 이런 것을 구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자기가 한 일을 상기시켜 드리고 하나님의 의무를 일깨워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게 은혜를 입을 만합니다. 너는 참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실만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하나님께 드린 것에 대한 하나님의 갚음입니다’ 라는 기도를 올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기도를 드리던 유대인의 관습에서 보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수행하는 제자들의 의식과 방식은 충격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의 기도가 변질되고 타락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언약신학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약관계는 계약 관계라고 부르는데 구약에서 이 계약관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일방적인 관계이기도 하지만 쌍방적인 관계를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 계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약속을 토대로 합니다. 실제로 구약에는 이런 묘사도 나오지 않습니까?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보면 내가 가난한 사람을 구제했으면 하나님이 그것을 부채로 여기시고 나에게 갚으신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인 비유이지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빚을 지실 수 있습니까? 사경회 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의탁된 것이고 심지어는 우리 자신의 생명까지도 그 주인이 우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기심에 넘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구제하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런 마음의 성향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을 주님은 복 주신다고 하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상업적으로 해석을 해서 하나님의 이 언약 신학을 마치 상인들이 빚지고 빚을 갚는 것과 같은 관계로 전락시켜 버린 해석입니다. 또 한 가지 요인은 유대교의 가르침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외경에 보면 이렇게 하나님께 선을 행한 것을 기초로 자기를 의롭게 여기면서 당당히 그 의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들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보편적 기도관이었습니다. 그런 기도를 올리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이 기도의 모습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예수를 따라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헌신하고 때로는 핍박을 받고 물질도 바칩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두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정말 천국 시민답지 못한 인간이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자기가 받아들여질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기도합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그렇다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행한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자기를 구원해 주신 그 놀라운 은혜가 이게 꿈인 것처럼 새롭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백성답지 않은 자신을 그 백성으로 인쳐주시고, 그렇게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이것이 바로 Gospel Spirituality '복음적 영성'입니다. '복음적 영성'입니다. 이게 바로 주기도문을 받드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C. 죄는 무한한 빚임
2부 예배 시간에 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가 야단을 쳤습니다. 제발 그렇게 예배 생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게 도대체 뭐하는 겁니까? 그게 죄냐 아니냐는 문제를 따지기 전에 그런 정신 상태를 가지고는 신자로서 살 수가 없습니다. 조지 스윈록이라는 청교도가 예배시간에 조는 사람은 몸은 예배당에 나왔으나 마음은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인간이라고 나무랐습니다. 옛날에 글공부를 하던 서생들은 화살촉을 들고 졸리우면 허벅지를 찌르면서 공부를 하고 글을 읽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이 세상에서 글 배우고 출세하는 것만 못합니까? 그렇게 신앙생활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적 경건, 복음적 영성은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자녀라 불러 주셨지만 그리스도의 노예로 자처합니다. 자기를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라 불러 주셨지만 스스로는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었노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주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기도를 실감하기 위해서는 이 죄가 무한한 빚이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민주화가 되어서 세상의 법이 좋아졌습니다. 악덕 채권자도 있지만 악덕 채무자도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교회를 하기 전까지는 남의 빚을 안 갚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근데 실제로 목회를 하면서 돈을 빌려주고 고통 받는 지체들, 그 다음에 돈을 꾸어서 고통 받는 지체들 모두 다 이렇게 상담도 하고 목회를 하다 보니까 돈을 많이 떼어 먹었는데도 별로 벌을 안 받더라고요. 그게 현대 사회입니다. 사람을 상하게만 하지 않았으면 일부러 사기만 치지 않았으면 빚 많이 지고 떼어먹어도 별로 책임을 안집니다. 나는 그랬어요. 저 정도면 구속 안 되냐 그랬는데 법을 하는 사람들이 웃으면서 저에게 가르쳐요. 그 정도를 가지고 구속을 시키면 대한 국민 중 대부분이 감옥소에 있을 거라고 해요. 세상이 그렇게 좋아졌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빚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들이 실감이 안나요. 그러나 여러분 TV에 가끔 소개되는 악덕채권자한테 고통 받는 서민들 이야기 나옵니다. 무서웁디다. 신체 포기 각서를 쓰라고 그런 다네요. 사실 그런 각서는 법률적으로 성립을 안 해요. 인륜에 반하는 거기 때문에 그런 건 100장을 써도 지킬 필요가 없어요. 근데 그 신체 포기각서라는 게 뭐예요? 내가 빚을 못 갚으니 이때까지 못 갚으면 간을 빼든지 콩팥을 뜯든지 내 몸은 내게 아닙니다. 하나님한테도 그런 각서를 쓴 적이 없는데 빚쟁이한테 그 각서를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대 사채 쓰면 안 돼요. 차라리 많은 사람들 이야기가 사채를 쓰느니 파산을 하는 게 낫다고 얘기해요. 그 악덕 업자들이 납치하고, 심지어는 폭행하고 감금하고 그렇게 비인간적으로 어떻게? 돈을 받을 때까지 잔인하게 사람을 피를 말려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 빚이 갚지 않고는 아무 해결할 길이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당시에는 더더욱 그랬어요. 이 당시에는 빚을 못 갚으면 가족들이 함께 노예로 팔려가거나 도저히 빚을 못 갚으면 자기 몸으로 갚았어요. 어떻게요? 자기가 그냥 그 집에 노예로 들어가 버리고 빚을 탕감을 받는 것입니다. 가족들을 구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럼 언제 그 노예에서 해방될지는 기약도 없습니다. 거기 가서 장가를 들어서 애를 낳아도 노예에요. 그게 바로 빚이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사경회 마지막 날도 말씀을 드렸고 주기도문을 강해한 지난번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우리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게 내 것이라고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거기에서 모든 시험이 일어납니다.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다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잠시 맡겨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 단 하나도, 사실은 기원이 나에게서부터 온 나 자신이 온전히 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단 하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스스로 일으켜서 나 자신의 소유가 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딱 한 개가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렇게 말했어요. “이 세상 모든 사물 중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으니 그것은 죄다.” 훌륭하십니다. 그거는 여러분 것입니다. 다른 사람 것이 아니라 여러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들어서 여러분이 꽉 쥐고 있고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고 붙들고 있는 그거, 그게 여러분 것입니다. 문제는 아무리 우리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랑스럽지 않으니까 문제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제가 모태 신앙을 가지고 태어나서 우리 부모들 모두 예수 믿고 이제껏 살았는데 우리가 뭔 죄를 그렇게 지었겠습니까? 나쁜 놈들은 감옥소에 있고 안 들어간 인간들은 세상에 있지만 우리는 그런 정도로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또 뭐라고 그러냐면 “아무래도 제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가 깊이 타락한다면 극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새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이 문제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아주 중요한 이야기들이 나와야 되는 대목입니다. 매우 어려운 도덕 철학적인 문제를 아주 쉽게 풀어드릴 테니까 들어보십시오. 우리의 어떤 도덕 행위는 행위 그 자체에 의해서도 죄가 있다 없다 크다 적다가 판결이 됩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동일한 사람을 쓰다듬어 준 것과 때린 것과 칼로 찌른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없어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쓰다듬어 준 거는 죄가 안돼요. 그게 여성일 경우에는 문제가 되요. 성범죄예요. 쓰다듬어 준 것은 문제가 안 돼요. 때린 것은 폭력등 처벌에 관한 범률 위반 혐의에요. 근데 찔렀어요. 안 죽었어요. 살인 미수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도덕적인 행동은 그 자체 안에 있는 크기로서 죄의 크기가 결정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이 행위가 관련된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남의 의자에 한번 앉았다 일어나는 게 법적 책임을 질 정도로 무거운 죄입니까? 그래요? 안 그래요? 근데 그렇게 털썩 앉아본 의자가 황제의 의자였고, 마침 청소하다가 잠깐 앉았는데 황제가 봤어요. 그럼 어떻게 되죠? 사형입니다. 사형입니다. 황제 의자보다 더 비싼 의자가 있는데 옆집 사람이 만든 의자야. 그래서 거기에 앉았어요. 사형 아닙니다. 사형 아닙니다. 그런데 황제가 들어왔는데 목에다 칼을 겨눴어. 그런데 실패하고 붙잡혔어요. 그건 뭐죠? 처벌을 어떻게 해야 되요? 황제를 죽이려고 하다가 실패했다 이거에요. 벌이 뭐냐 얘기에요. 사형입니다. 그것도. 물론 9족을 멸하는데 사형입니다. 그렇다면 황제의 의자에 한번 앉아본 것도 사형이고 황제보고 이 자식 그러고 욕한 것도 사형이고, 황제의 목에다가 칼을 겨눈 것도 사형입니다. 동네 아저씨한테 그런 거는 안 그런데 왜 황제한테 그랬을 때에는 다 사형이냐 이것입니다. 왜 다 사형이냐 이것입니다. 왜 똑같으냐 얘기에요. 이유가 뭐 때문입니다. 황제가 워낙 높고 위대하기 때문에 그 의자에 앉은 거나 이 자식이라고 그런 거나, 칼을 목에 겨눈 거나 그 자체로 보면 죄의 크기가 있지만 황제가 워낙 위엄하기 때문에 그 차이는 문제가 안 됩니다. 모두 다 무한한 죄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거기에 대입해 보라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입해 보라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죄의 크기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의미가 있죠. 왜? 우리가 작은 죄를 지었을 때는 양심의 가책이 적어요. 그런데 큰 죄를 지었을 때는 양심의 가책이 커요. 작은 죄는 돌이키지 않을 수 있는데 큰 죄는 돌이키지 않으면 고통이 계속돼요. 이런 점에서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이거는 작은 죄이든지, 큰 죄이든지 그 자체가 하나님을 우습게보고 대드는 거기 때문에 그것은 무한한 죄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황제의 의자에 이렇게 앉아본 사람이 청소부가 아니라 황제의 의자를 지금 만들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형을 당할까요? 안 당할까요? 황제의 의자를 이제 막 만들고 있는 중에 한번 괜찮은지 앉아보고 계속 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형 당해요? 안 당해요? 왜냐하면 의미가 목수의 마음에는 황제의 자리를 탐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청소부가 거기에 앉았을 때에는 ‘내가 황제라면 좋을 텐데’ 라는 마음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무한한 죄의 크기가 되어서 사형을 당합니다. 이게 아주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쉽게 여러분에게 이해를 시켜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놓고 보면 이 죄의 크기는 그렇게 무한해 지는 거라는 이것입니다. 사람이 큰 탱크로리에다 똥을 푸고 지나가는 그 차속에 있는 똥이나 그 똥을 잘 걸러서 분무기에 넣고 하늘에 곱게 뿌린 알갱이나 크기는 달라도 그 본질은 모두 똑같애요. 똥입니다, 똥. 똑같은 냄새가 난다 이 얘기에요. 우리의 죄의 본질도 크기와는 상관없이 그것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반감이고, 하나님을 향한 대적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걸 죄라고 생각하고 판결을 내리시고 우리에게 형벌을 주신다는 그 사실 자체를 싫어하고 그런 하나님을 그 보좌에서 끌어내리려고 하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질문으로 돌아가 보면 어떤 사람이 큰 죄악 중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주님을 만났으면 죄가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준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빛이 자기로 하여금 죄의 본질을 깨닫고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준 것이지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깨달음이 그를 하나님 만나게 해 준 거지 죄가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준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문제는 뭐죠? 죄가 많다고 해서 거룩을 많이 느끼는 게 아니라 작은 죄를 가지고 있어도 거룩을 느끼면 하나님의 용서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절절한 깨달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진짜 예배 시간에 하나님 잘못했다고 눈물 흘리는 사람은 별로 죄인이 아닌 사람들만 그래요. 진짜 회개해야 할 못된 인간들은 눈물 한 방울, 피 한 방울 안 나옵니다. 옛날에는 했겠지. 요즘엔 안 나와요. 그게 죄인의 마음입니다. 죄의 크기가 우리를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의 빛이 비취면 그 죄의 크기는 문제가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뼛속까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죄는 이렇게 무한한 빚을 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님 앞에 갚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제자들이 주기도문을 받들 때 정말 하나님이 자기들과 같은 인간을 불쌍하게 여겨주시는 그 용서의 은혜가 없이는 감히 무엇을 주십시오,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적인 경건, 복음적인 영성입니다.
D. 신자와 하나님의 용서
1. 이미 받은 용서: 영원한 용서
여기에서 우리는 신자와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고 할 때에 매일 주기도문을 드리며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것이 우리의 처지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용서받은 것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영원한 용서와 경험적 용서를 구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과 만물을 보실 때 시간의 구애됨이 없이 만물을 한 번에 원인과 결과의 연결로서 보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보심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어떤 사람이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는 것은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현재, 미래에 지을 모든 죄까지 하나님이 한 번에 보시고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용서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회개한 것이 우리의 죄를 모두 회개한 것도 아니고 또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미래는 우리에게 속한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무슨 죄를 지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미리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모든 죄를 한 번에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것으로 인간과의 관계가 끝나고 구원이 이루어진다면 인간은 그렇기 때문에 더 담대하게 죄를 지을 것입니다. 왜요? 이미 죄를 짓기 전에 용서해 주셨으니까 죄의 유혹이 오면 이것도 이미 하나님이 용서해 주신 것이라고 그 기회를 활용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그 순간 뼈저리게 자기의 죄를 회개할 그 심정이 일평생 변함없이 유지된다면 거의 죄를 짓지 않겠지만 이 세상 누구도 그 감격을 영원히 같은 정도도 평생 간직하며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강하고 충만해지는 적이 있고 쇠약해 지는 적이 있듯이 용서에 대한 감각도 그렇게 변하기 때문에 더욱이 인간은 그 안에 신자이지만 죄의 요소를 가지고 있고 세상도 죄에 속한 세상이기 때문에 은혜 많이 받은 사람도 죄 짓는다는 것입니다.
똑같아요. 폭력을 행사하던 사람은 은혜 떨어지면 신자되었어도 다시 폭력을 쓰고, 돈 사랑하던 사람들은 신앙 식으면 다시 돈이 최고입니다. 막말하고 거칠게 행동하던 사람들은 은혜가 있는 동안에는 이길 수 있지만 은혜가 사라지면 그렇게 야비한 언어로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에 매일매일 붙들려 사는 신앙생활이 아니면 성도도 짐승처럼 살게 되는 거라는 얘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방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미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지만 시간 속에서 살아가요. 이미 용서하신 죄인데 시간 속에서 때가 되면 인간이 자기 의지로 죄를 지어요. 그렇다면 놀랍게 죄를 짓기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는데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하시지 않는 것처럼 두려움과 공포,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진 감정이 인간에게 확 밀려와서 그 시간에 경험이 됩니다. 죄짓기 이틀 전, 삼일 전에 그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죄를 지은 즉시 그것들이 경험이 됩니다. 그때의 고통은 하나님이 예전에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하는 이 복음적 사실이 도움이 안 될 정도로 죄의 무게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게 고통을 하게 됩니다. 이번에 저축은행 사건 때문에 세 사람이 자살을 했더라구요. 뭐 그 사람들은 다 그 사람들의 또 이야기가 있겠지만 어쨌든지 간에 법을 어기니까 그 속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시간 속에서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마치 전엔 안 그러다가 그 순간에 처음 그 죄를 아신 것처럼 화내시고, 책망하시고, 불쾌하시고,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으십니다. 이거는 하나님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경험되게 하심으로서 도덕적인 동기를 하나님이 북돋우시는 것입니다. ‘아 그렇게 하면 안되겠구나’. 그래서 죄를 지어봤는데 너무 끔찍한 고통을 겪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다른 기회가 와도 그 다음엔 은혜가 식었는데도 감히 그 죄를 지을 용기를 못내는 것입니다. 그때 너무나 큰 고통을 생각하면서.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이 용서는, 구원에 이르는 용서는 단 한번 영원하게 주어지는 영원한 용서 한번입니다.
2. 반복되는 용서: 경험적 용서
그런데 이 용서는 경험적 용서는 죄를 지을 때마다 혹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가 불결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 때마다 용서를 구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경험 속에서 그 영원한 용서가 경험적으로 반복되게 하심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부합하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번 은혜를 받았다고 교만해져서 미끄러지는 사람이 아니라 매일매일 그 하나님 말씀에 붙들려서 사는 신자가 되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과의 평화, 그 분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는 안정과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들은 죄를 지음으로 받을지도 모르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보다 하나님과의 그 평화와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을 더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 평화의 소중함을 알고, 성결하게 살아가도록 힘쓰고, 거룩의 빛 앞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적마다 천국 시민으로서의 삶의 부합하지 않는 자신을 깨달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참회하며 용서를 빌게 됩니다. 이러한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3. 용서를 통해 사랑, 의존 알게 함
성경에는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고 또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탁월한 영적인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죄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안 사람입니다. 공급해 주시는 양식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지만 죄의 용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20C에 위대한 칼빈주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벤자민 브랭클리지 웟필드라는 학자는 시편 51편을 설교하면서 다윗은 자기의 의지로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은 그 죄를 통해서 회개하고 용서받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셨다. 마치 이 놀라운 사랑의 깨달음은 죄가 없었더라면 깨달을 수 없었을 것 같은 그런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가 매일 매일 우리의 영혼을 위한 양식으로서 죄의 용서를 구하며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 조금 부족한 것이 많아도 회개의 눈물이 마르지 않는 성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박수와 갈채를 받지만 회개하지 않는 헌신된 교인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입니다.
III. 결론: 두 양식을 주심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는 매일 일용할 양식을 내리시고,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는 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기초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 죄인을 향한 주님의 자비의 아름다움을 알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적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의 미천한 종교 생활을 보게 됩니다. 윤리적으로 많은 흠과 우리 안에 있는 탐욕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기도가 여러분에게 낯선 기도입니까? 익숙해진 기도입니까? 은혜를 받고 주님의 사랑에 감격했을 때 여러분은 이 예배당에서 경건하게 살면서도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면서도 나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아버지께 참회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기도가 여러분 마음속에 살아있습니까? 정말 주님의 은혜를 필요로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의 크기 앞에 비하면 우리가 주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이 헌신과 봉사의 삶이 티끌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느껴집니까? 매일매일 주님이 내리시는 그 하나님의 양식을 통해서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처럼 매일매일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 어찌할 수 없는 비천한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이 여러분의 마음을 찌르고 있는 건지 묻는 것입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우리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부족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당신 앞에 나와 모든 자비가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 그 십자가의 사랑만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적합하지 않은 우리가 의지하며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무한한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 안에서 살지 않으시렵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11.우리의 죄를 사하소서 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눅 11:4)
녹취자: 장소연
I. 용서란 무엇인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 라는 이 간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하는 이 기도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용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용서는 자신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악을 행했을 때 그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면 그에게 커다란 손해가 미칠 터인데 그것을 탕감해 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이 용서는 단지 자신에게 다른 사람이 행한 잘못에는 분명히 응당한 벌이 뒤따라야 하는데 그것을 탕감해 주는 그 자체가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이 용서를 통하여 반드시 이루고자 하신 그 일들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사랑이 우리 모든 사람들 속에 흘러가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최초의 청취자는 예수 그리스도께 신앙을 고백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주기도문의 가르침이 불신자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신자들을 향해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들을 우리는 주목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제일 먼저 신앙을 갖기 위하여 통과하는 하나의 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원히 형벌 받을 끔찍한 죄에서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이전에 죄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죄 사함을 통해 용서받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라고 하는 목사님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에는 죄인 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이미 용서받은 죄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의로운 자녀라고 불러준다고 해서 우리가 이미 그렇게 된 것처럼 우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겸손히 우리 자신이 다만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이 모든 것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라 모두 우리의 의와는 상관이 없이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해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은혜라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II. 죄사함과 용서
A. 절대적 용서: 하나님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와 함께 용서와 죄 사함이라는 두 가지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 사함과 용서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각하게 됩니다. 제일 먼저 죄 사함이나 용서나 모두 용서입니다. 또 동시에 죄 사함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절대적인 용서와 상대적인 용서로 풀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용서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 대해서만 하실 수 있는 용서입니다. 이 절대적인 용서는 누구를 의지하는 사랑 때문에 베푸는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사랑 때문에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런 의미의 용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적으로 사랑이란 끊임없이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성향입니다. 올바른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성향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기심은 자기 자신으로만 관심사가 오그라들지만 사랑은 자신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향하게 됩니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한 결과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타자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 사랑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누구도 의지하지 않으시고 당신 안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성향으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 사람들은 이미 버리고 흉악한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은 올바르게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오래전 저는 교도소를 방문하였을 때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희대의 살인극을 벌이고 사형선고를 받았던 그 죄수가 갇혀있는 교도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 청년은 사형되었지만 사형되기 전 자신의 모든 장기를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기증하고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사형 직전에 전도자들의 복음 전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서 그는 자신이 예수를 믿고 가장 좋아하는 찬송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 놀라워’라는 찬송이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사람으로서는 포기될 수밖에 없는 인간조차도 찾아오셔서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은 모든 죄를 사해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의 사랑의 성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용서입니다.
B. 상대적 용서: 인간
그러나 상대적인 용서는 인간이 인간을 향해 베푸는 용서입니다. 이 용서는 먼저 자기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절대적인 용서가 아니라 상대적인 용서이며, 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때에 모든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심으로써 다시 그 죄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어떠한 복수도 생각하지 않으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은 누군가를 용서하고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면 이기심이 생겨나고 이전에 용서했던 것을 다시 용서하지 않게 된다는 면에서 인간의 용서는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 용서는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저 사람이 지은 죄를 용서해 주는 사면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폭행을 가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정당하게 법의 책임을 물어서 그의 신체에 혹은 재산상에 고통을 가할 수 있습니다. 심하면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미친 물질적인 손해 때문에 저 사람에게 응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법의 힘을 빌릴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이 직접 그 심판을 실행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법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때에 정당하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그를 징벌하는 것을 정당방위라는 이름으로 광범위하게 인정합니다. 이럴 수 있는 사람이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사면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소극적인 측면입니다. 그러나 만약 용서가 그것이 전부라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닙니다. 그런 용서는 복수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지 진정으로 용서하겠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의 적극적인 면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랑의 성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이 어떤 의미의 용서인지를 생각하면 이 모든 것들이 분명해 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제일 먼저 복음과 율법으로 우리의 마음에 죄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정직하게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눈물 흘리며 참회하는 우리에게 ‘됐다. 이제 그 정도면 됐다. 내가 너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마. 그러나 나는 너를 다시 보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그랬다면 그것이 바로 용서일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단지 복수하기 않겠다 라는 의미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우리의 죄를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새로운 사랑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당신과 새로운 영적인 관계를 맺게 해 주셨고, 그 속에서 이 세상의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와 관계를 갖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의 또 다른 국면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용서의 완성이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용서하도록 부르신 것은 바로 그런 용서를 통해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우리가 관계를 맺고 우리 속에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가 우리의 이기심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단절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C. 용서의 요건과 오류
그렇다면 여기에서 용서의 요건과 오류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용서해 줄 수 있는 권한을 받았기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라고 기도하도록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 인간의 죄와 악은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시고 그리고 한 인간이 악을 행했을 때 악을 행한 일차적인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악을 행한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반드시 책임을 묻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종종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악한 감정으로 죄를 지었을 때 우리가 손해를 입혔다면 손해를 입은 당사자도 그가 자신에게 지은 죄에 대해서 일정부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여러분 고대의 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조선 시대에도 아직 국가라는 제도가 제대로 서지 않았는데 이미 법이 존재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중해야 하는 중요한 인간으로서 두려움과 사랑 속에서 존중받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죄를 당신 자신이 책임을 물으실 뿐 아니라 그 죄 때문에 인간에게 손해를 입혔을 경우 손해를 입은 사람도 그 죄에 대하여 용서해 주거나 징벌할 수 있는 상당한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이 사상은 성경에서 매우 강하여 때로는 사람이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도 그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고 강조할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욥이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게 하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나 혹은 아브라함이 기도해 줄 때에 비로소 아비멜렉을 용서해 주겠다고 하신 것들은 바로 이러한 예에 속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만약에 어떤 사람을 용서해 주기 위해서는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지은 죄는 거의 용서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지은 죄는 아주 쉽게 용서하거나 혹은 용서하도록 종용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오지랖이 넓은 것입니다. 자기에게 죄를 지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그 사람을 용서할 권리도 없습니다. 그 사람을 용서할 권리는 오직 하나님과 그리고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오늘날 법에서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자기에게 가해한 사람을 처벌하기 원치 않는다고 탄원하면 그의 양형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법의 근거도 바로 이런 성경의 사상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해 주려면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지만 자신이 그가 행한 악으로 말미암아 손해를 입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상을 기초로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경우에라도 법정에 호소하는 것은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법정에 호소하든지 호소하지 않든지 간에 법정에 호소할 때, 법정에 호소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행위 뒤에 자기와 소송에 관련된 사람에 대한 극도의 미움, 그리고 그를 반드시 벌 받게 하고자 하는 강한 심판의 욕구 같은 것들이 소송의 동기가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회의 정의의 개념에 비추어서 법원의 판결을 받는 것이 이후에 일어날 여러 가지 많은 분쟁들을 종식시키고 혹은 나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의 이익이 이 고난과 관련하여 걸려 있기 때문에 법률적인 판단을 구하고 그것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자 할 때에는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어제 뉴스에 보니까 대학에서 기성회비를 받은 게 모두 불법이었다고 하네요. 학생과 졸업생들이 돌려달라고 소송을 하면 10조원을 토해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소송은 용서하는 문제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최근에도 교회에 인근 주민이 토지 문제를 가지고 교회에 부당한 요구를 하였습니다. 장로님을 보내고 집사님을 보내고 여러 번 협의를 했지만 협의가 잘되지를 않았어요. 급기야 그 분이 변호사를 비롯해서 많은 전문가들을 데리고 교회를 찾았어요. 그리고 저를 대면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듣고 20분 동안 제가 이치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깨끗이 정리를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요구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양자 사이에 합의점이 없습니다.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당신들의 해석에 의하면 당신들의 주장이 맞고, 우리의 해석에 의하면 우리 주장이 맞는데 이것은 교회의 커다란 재산권이 걸린 문제이니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 모든 사람을 모아놓고 회의를 해도 이것은 결론이 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 법정에서 만납니다. 만약에 법이 그것이 옳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면 우리는 기꺼이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법이 그렇지 않다 라고 말하면 우리는 해드릴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오히려 이웃과의 복잡한 관계들을 올바르게 정의시키는데 유용한 것입니다. 어떠한 악감정도 없습니다. “혹시 교회에서 어떤 보상을 바라십니까?” 그래서 제가 아주 단호하게 이야기 했어요. “우리 교회는 그 점에 있어서 깨끗하고 정직한 교회입니다. 법으로 해주게 되어 있다면 우리가 왜 보상을 요구하겠으며 법으로 해 줄 수가 없다면 아무리 많은 보상을 해 준들 우리가 왜 응하여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10원도 원하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눈길을 끈 것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누군가에게 악을 행했으면 밀실에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그것으로서 하나님이 이미 나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나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는 태도가 가장 비난거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죄를 지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고 하나님께 혼자만 지은 죄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그 회개를 통하여 우린 깨끗케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의 죄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손해와 악을 끼쳤습니다. 그렇다면 죄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여 손해를 끼쳤으면 하나님에 대해서 책임을 질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먼저 자기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편한 것입니까? 이러저러한 죄를 짓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 현저한 희생을 불러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고해성사 몇 마디로 죄를 완전히 용서받고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는 한 두 번의 회개로 깨끗한 양심이 되고 이제 누구에게도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것입니까?
저에게 많은 잘못을 한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직 한 번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용서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종종 저한테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 용서하셨다고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용서하셨겠죠. 그리고 나도 용서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용서했기 때문에 너 같은 인간에게는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는 진정으로 회개한 태도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얄팍한 복음에 대한 이해로 그리스도인들이 후한무치한 사람들로 낙인찍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용서에 대한 진지한 견해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도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없습니다. 용서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은 죄를 우습게 알기 때문이고, 죄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은 용서도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III. 용서에 대한 경륜
A. 하나님 사랑의 회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당신의 자녀들이 매일 매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라고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매일매일 이 용서의 의무를 생각나게 하시고, 또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용서에 대한 우주적인 경륜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시고 특별히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사랑으로 교통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인간들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안 우리들이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며 온전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뜻이었습니다.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죄는 제일 먼저 이러한 사랑의 관계를 단절시켰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 사람들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상대방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그를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자신이 완성되는 기쁨을 누렸지만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사람들은 사랑의 대상을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방향을 돌려놓았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사랑받기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오히려 하나님께 사랑받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을 받으시고 하나님은 또 인간을 사랑하시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는 이 사랑의 단절은 심각한 관계의 파괴를 가져왔고 이렇게 관계가 철저히 파괴됨으로 말미암아서 이제 인간은 타자보다는 자신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는 자신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비참한 상태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할 줄 모르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도록 망가져 버린 인간을 향하여 놀라운 용서의 경륜을 베풀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회기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끊임없이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성향의 표현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행복을 그도 누리기를 바라는 사람이 바로 사람의 사랑이듯이 하나님은 자기 안에 있는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 하나하나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자기 사랑에 사로잡힌 인간은 결국은 잘못된 사랑을 하는 비참한 결과를 끊임없이 자신의 삶에서 열매로 거두어들입니다. 육체로 심었기 때문에 그 육체에서 썩어질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며, 죄를 위해서 심었기 때문에 그 죄에서 죽음을 끊임없이 거두게 됩니다. 햇빛을 등지고 걸어가는 사람 앞에 커다란 그림자를 사라지게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를 사랑한 결과는 끔찍한 고통으로 나타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한없이 자기를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종종 방탕하여 욕망을 따라 살고자 하나 무한대의 자유를 그에게 부여할 때 한없이 그 자유를 누리며 행복해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바깥에 인간에게는 결코 영원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순간 하나님을 버리고 방종한 체 자기 마음대로 살아온 그 결과가 너무나 비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신의 잘못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서 자기의 죄를 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자기를 진정으로 용서해 주시고 이제 자기의 불순종한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모든 죄와 그 죄의 비참한 결과로부터 하나님께서 자기를 건져내 주시고 구원해 주실 그때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사랑했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정말 자신이 사랑할 분이 하나님 한분이라는 사실을 바로 용서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자기의 많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 모든 심판의 형벌로부터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용서해 주신 즉시 예전에는 알지도 못했고 보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그에게 부어 주셔서 그 분의 인격 안에서 사랑하도록, 사랑을 받는 놀라운 교통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 사랑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사람의 마음속에 또 다른 사랑을 만들어 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이 사람 자신의 사랑인 것처럼 이 안에서 그를 움직이며 역사하는 사랑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서 아가페와 구별하여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끊임없이 사랑합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은 사랑이 흐르는 이 모든 우주적인 질서 안에서 최종적인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에게 들어와 이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야 할 존재이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사랑이 자기를 통해 이웃과 형제들을 휘돌아서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으시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행복해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서 우리는 용서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용서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다른 이웃에게 흘러갈 수 없기 때문이고 만약에 이렇게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들도 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는 사실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흐르는 시냇물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흘러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자기와 같이 아무 쓸모없는 불결하기 짝이 없는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모욕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셨던 것처럼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와 관계 맺는 것을 기뻐하며 그를 사랑함으로써 나와 관계를 맺지 못했더라면 누리지 못하였을 어떤 것을 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그 분에게 공급해 주시는 삶을 살 때에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더 이상 자기의 그런 사랑을 사람들에게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작정했을 때 비상하리만치 정확하게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사랑도 함께 끊어지게 됩니다.
B. 용서의 실천
여기에서 우리는 용서의 실천을 배우게 됩니다. 여러분은 며칠 전까지 정말 기도가 잘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정서가 마음에 있었는데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고 어떤 사람을 향해 마음을 세웠습니다. 표독스러우리만치 그를 미워하고 악한 감정을 품고 심지어는 복수를 꿈꾸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기도할 수도 없고, 예배할 수도 없고, 이전에 여러분의 마음을 채웠던 하나님의 사랑도 간곳없게 되었던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비로소 용서를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복수를 꿈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수가 좌절될 때 외부의 환경에 의해서 그에게 복수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차라리 복수하지 않고 그와 함께 이 세상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그만 남겨놓고 자신의 목숨을 끊는 상황도 발생하는 이유가 이 용서의 실천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종종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안에서도 어떤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손해를 입으면 집요하리만치 용서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악한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다른 사람을 향해 품는 용서할 줄 모르는 악한 감정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칼을 갈아 자신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악한 감정을 품고 복수를 꿈꾸는 자신의 영혼을 끊임없이 자해합니다. 그에게는 십자가의 사랑도 사라질 것이며 자기와 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각도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의 기쁨과 영광에 대한 감각도 잊쳐질 것이고, 그래서 그는 푸석푸석한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힘겨운 신앙생활을 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가 드리는 모든 예배는 가증스러운 것이 될 것이며, 그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에 대해서 어떠한 용서를 빌어도 사죄의 확신이 밀려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죄의 용서를 통해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언제나 이 사실을 잊지 말도록 우리에게 촉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려고 할 때에 그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 지불하신 그 큰 희생과 고통의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우리 교회를 다니던 자매 하나가 있었는데 언제 하루는 남편이 와서 그러더래요. 대게 경제권은 여자들이 꽉 쥐고 있잖아요. 남자들은 아무 권한이 없어요. 불쌍해요. 주님밖에 의지할 데가 없어요. 그러더니 그러더래요. 그게 벌써 15년 전이니까 꽤 큰돈이었죠. “여보 30만원만 줘”. “그 큰돈을 당신이 뭐하게?” 그러니까 “우리 친구 아무개 있잖아?” “그래” “걔가 이혼하거든” “근데?” “위자료를 줘야 되는데 친구들이 30만원씩 걷어서 너무 불쌍해서 보태주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부인이 “아, 여보 그러셨어요? 금방 통장에 넣어 드릴게요” 그랬겠어요? 아니면 “여보 그게 말이 돼?” 그랬겠어요? 전자예요? 후자예요? 당연하지. 아니 둘이 너무 사랑해서 결혼을 하는데 보태준다면 말이 되지만 아니 “당신 친구가 이혼하는데 당신이 왜 그 위자료를 보태주냐.” 그러고 펄펄 뛰었대요. 그랬더니 “여보 그거 다 결정돼서 친구들이 도와주기로 했는데 나만 안 도와주면 내가 뭐가 되겠어?” 남편이 사정합니다. 씩씩거리고 말도 안하고 화가 났는데 그때 그 자매가 교리반에 들어왔었거든. 교리반에 그 공부할 숙제가 속죄였어요. 속죄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이 자매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나님이 예수님 보러 너 이 세상에 내려가서 나한테 죄를 지은 저 끔찍한 인간들을 대속하여야 할 텐데. 네가 대신 가서 죽어라” 그럴 때 예수님은 자기보다 훨씬 더 황당했을 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그럴 가치가 있는 인간이냐는 이것입니다. 왜 살아야지 이혼을 해. 그리고 능력도 없으면서 이혼을 해. 능력을 갖춘 다음에 이혼을 해야지. 능력이 없어 친구들보고 돈을 모아가지고 그걸 이혼을 하는데 그게 말이 되느냐 이것입니다. 그렇다면서 이 말이 되지 않는 대속의 행위가 이 자매에게 은혜가 됩니다. 그날 펑펑 울고 회개하고 그리고 말도 되지 않는 돈을 남편 손에 들려줬다는 이야기예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희생이 없는 용서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웃이 남에게 지은 죄를 잘 용서해주는 이유는 바로 그거에요. 자기가 희생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남한테는 그렇게 쉽게 용서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게 됩니다. 신학교에 있을 때 일이었어요. 교무실에서 막 싸워요. 사람들이. 그래서 신학교에서 그럴 일이 없는데 더 놀라운 건 싸우는 사람 다 목사야. 막 싸워. 왜 그러나 그랬더니 어떤 강사가 차를 세웠는데 학생이 와서 북하고 긁어버렸어요. 그래서 인제 이 사람이 그런 것입니다. 도대체 그 자기가 여기에 차를 세워놨는데 무엇 때문에 이 차를 긁고 갔느냐고 이제 투덜거리면서 자기 차를 좀 봐주지 강의하러 왔는데 그렇게 내두고 더 나쁜 거는 뭐예요? 신학생도 나쁜 사람이지 북 긁어놓고 어디론가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막 씩씩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사람 같으면 “아, 교수님. 그러셨어요? 정말 저희가 잘 봐드려야 되는데 죄송하네요. 가신 다음에라도 누군가가 와서 차를 부딪쳤다고 그러는 사람이 있으면 저희가 연락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끝나잖아요. 이 사람은 화가 나가지고 차를 박고 도망을 갔냐고 그러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목사가 그런 거쯤 용서해 주지. 그런 걸 가지고 여기에서 사랑도 없이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면 되냐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범인도 누군지 몰라서 짜증나 죽겠는데 옆에 있는 직원 그러니까 그 사람도 목사였어요. 둘이서 막 싸우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목사가 사랑이 있어야지 말이지. 용서해 줘야지 말이지. 그 차 좀 찌그러졌다고 말이지. 그렇게 말이지 차 박치기 한 사람 말이지. 그렇게 욕을 하고 그렇다면 되겠느냐”고 그러고.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우리가 용서할 권한이 없어요. 자기가 정말 그렇게 너그러우면 “교수님 마음이 많이 상하셨군요. 저희가 지켜드렸어야 되는데 못 지켜드렸으니 제가 고쳐드리겠습니다.” 그건 말이 되지만 그래서 지금도 그 싸우던 광경이 눈에 선해요.
IV. 용서, 영혼의 자유
희생 없이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용서는 영혼의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제일 먼저 그 용서의 혜택을 받는 사람은 자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이 아니라 먼저 자신이 가장 큰 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죄를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죄를 지었을 때 그 죄에 대하여 진심으로 용서해 줌으로써 그는 제일 먼저 아직 그 사람과 화해하지 않았는데도, 가서 용서에 따른 혜택을 그에게 베풀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은 용서하는 그 마음을 보시고 하늘의 문을 열어 주십니다. 기도가 그친 그 마음에 다시 기도의 은혜를 부어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친 그 마음에 문을 열어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죄 지은 자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는 이유는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매일 매일 자신의 힘으로는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리지 않고는 절대로 이 용서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중의 양식을 하나님께로 필요로 하게 되는데 육신의 양식과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양식입니다. 이 양식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호소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고, 주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 받으면서 우리는 또한 이웃에게 용서를 빌게 되고 이렇게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용서를 받으면서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진심으로 사랑할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자가 서로 자기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주는 그 희생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희생이었는지를 배우게 하십니다. 주님께 용서받은 것은 일만 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을 받은 것이고 그리고 내가 이웃을 용서해 주는 것은 나한테 한 달란트 지은 사람들의 잘못들을 탕감해 주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맺힌 것을 풀어야지만 우리의 영혼이 살도록 끊임없이 경륜해 주셨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에 불을 지르면 기도가 열렬해질 것이고, 그리고 총기가 생기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깨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경험을 많이 쌓고 지혜로워지면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이니 주님의 사랑이 부어질 때에 총명은 빛나게 되고 그리고 그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차고 의지는 선한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미워하는 것,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영혼 속에 비추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무서운 기도를 매일 드리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마시옵소서라고 하는 기도를 거꾸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V. 결론
그러므로 신앙의 깊이는 용서의 깊이를 아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이 일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리스도의 모본을 생각해야 합니다. 선한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쓸모없고 더러운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무한한 고통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빌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도록 빌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기 위해 희생하고 고통을 치룰 그때마다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그 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때문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끊임없는 용서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극도의 이기심과 포악함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직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의 방식이어야 하고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죄 용서받은 자녀로 이 세상에 살게 하신 것임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12.시험에 들지 말게 하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드디어 우리는 주기도문의 여섯 번째 탄원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하는 이 기도는 두 개의 탄원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의 탄원으로 묶어서 소극적인 면과 또 적극적인 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두 번에 걸쳐서 여섯 번째 탄원을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여섯 번째 탄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 이 탄원이 우리에게 주는 당혹감이 있습니다. 앞에 나온 다섯 개의 탄원은 모두 긍정의 탄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섯 번째 탄원은 부정의 탄원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고 하는 이 기도문을 외우다 보면 두 가지 의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하나는 마치 이 기도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모든 원인이 하나님께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마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시기 위해서 힘을 쓰시는 분인 것처럼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 설교에서 살펴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주기도문의 여섯 번째 탄원은 이런 종류의 상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기도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II. '시험'이란 무엇인가?
A. 시험(페이라스모스)
우리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시험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성경에 입각해서 규명을 해야지만 적절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오늘 성경 본문에 시험이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희랍어로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ς) 라고 하는 단어인데 동사로는 ‘페이라조’라는 단어입니다. 문자 그대로 ‘무엇인가를 시험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동사와 명사를 합쳐서 신약 성경의 약 60회 정도 사용이 되었는데 그 용례를 펼쳐놓고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시험이라는 의미와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시험이라는 의미가 현저히 용법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여기에서 말하는 이 시험의 주체는 대게 네 가지로 신약 성경에서 등장을 하는데 동사, 혹은 명사의 주체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어가 마귀입니다. 마귀. 그리고 두 번째로 바리새인을 비롯한 악한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하나님도 등장하지만 인간, 혹은 미혹 받은 인간의 마음도 이 시험의 주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B. 복음서에서 '시험'
신약 성경 전체에 나와 있는 이 시험에 대한 용례도 중요하지만 특별히 복음서에서 기록된 시험, 혹은 시험을 하다, 시험을 받다 라고 하는 이 용어의 큰 주체가 세 가지로 집중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첫 번째가 마귀가 이 시험의 주체가 되는 용례에요. 마태복음 4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귀는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합니다. 이 시험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을 위한 복음 사역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그런 종류의 시험으로 예수님께 도전하였습니다. 또 다른 용례는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이 시험의 주체가 되는 것인데 마태복음 19장 3절에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이렇게 시험하였습니다. ‘어떤 연고로든지 남자가 아내를 버리는 것이 가능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예수님께 어떤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 예수님이 평소에 가르쳤던 사랑의 원리에 위배가 되고, 버릴 수 없다고 하면 여자를 버릴 때에는 이혼 증서를 써주고 허락을 한 모세의 가르침에 모순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을 곤경에 처하기 위한 악한 의도로 질문을 한 것을 가리켜 ‘시험하다’ 라고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이 시험의 주체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주 적은 용례이지만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시험에 들게 되는 주체 혹은 원인으로 묘사가 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41절에 보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던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깨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땀이 피가 되어 흐르기까지 진액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고 제자들은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당부를 지키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도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인간의 연약함이 시험의 주체, 혹은 원인이 되는 것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관점에 따라서 이 세 번째 인간의 연약함은 어떻게 보면 넓은 의미에서 제자들의 경우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이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을 가르치셨고, 그리고 마귀는 제자들을 밀 까부르듯 까부르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예수님이 경고하셨기 때문에 결국 제자들이 깨어 기도하지 못했기에 예수님을 모두 버렸고, 그리고 급기야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면서까지 세 번이나 부인하는 단계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보면 역시 이 복음서에서의 시험은 마귀나 혹은 마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악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곤경에 처할 목적으로 도전했던 그런 종류의 시험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III. '시험에 들지말게'
A. 시험-복음 위한 환란과 유혹
이렇게 놓고 보면 여기에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이 기도가 물론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신앙적으로 미끄러지고 침체에 빠지는 이런 종류의 개인적인 시험을 완전히 배제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주된 강조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라고 하는 이 기도에서의 시험은 다른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환란이나 시련, 혹은 유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험은 주기도문의 첫 번째 나오는 기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고, 또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는 간절한 소명을 느끼며 그런 세상이 되기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주치게 되는 복음을 위한 환란과 시련, 이런 것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 신자의 삶: 영적전투
이것은 전쟁으로 말하자면 왕국의 소명을 따라서 이 세상에서 마귀와 세상 나라와 전쟁을 하다가 탈영해서 벙커에 숨어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그 전쟁터에서 생사고락을 그리스도와 함께하며 치열하게 전투하는 군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올리는 기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신앙에서 미끄러지는 개인적으로 타락에 빠지는 것들, 유혹받고 침륜에 빠지는 상태에서 기도하는 그런 종류의 기도와는 거리가 있는 전투적인 기도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파악해야 합니다.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전투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고 말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팔레’(πάλη)라고 하는 희랍어는 씨름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정확한 번역은 격투기입니다. 로마시대 때에 사람들이 노예들을 시켜서 가죽에다가 금속을 박고 밴드처럼 감은 다음에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피 흘리면서 서로 싸우는 그런 격투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원형 경기장에 모여 앉아서 그 광경을 보면서 피 흘려 죽어가는 그 처절한 팔레 경기를 지켜보던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사도바울이 우리의 씨름은 바로 이런 영적인 전쟁이다. 이것이 이 세상 나라와 싸우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정체라고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기도는 어떻게 보면 좀 불합리하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 땅에서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 헌신적으로 산다면, 또 어떤 사람들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이 세상 나라를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로 변하도록 그렇게 헌신하며 산다면, 많은 사람들이 어둠의 일을 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사는 시대에 뜻 없는 것에 무릎을 꿇지 않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헌신하면서 산다면 그 사람의 삶이 시련이나 핍박, 환란이 없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그런 기도는 주님도 들어주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든, 교회의 역사를 보든, 혹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삶을 보든지 간에 이런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소명을 따라서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삶은 이 세상 안락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만약에 ‘하나님 우리가 시험을 당했습니다. 하나님 정신 차리고 우리를 돌보아 주시옵소서’ 이렇게 보고를 해야지만 우리가 시험을 당하게 됐는지를 겨우 아시는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이미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벌써 우리가 시험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고 언제 어떠한 시련과 환란을 만나게 될지 모르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전쟁으로서의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이렇게 시험을 만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이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시험을 피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시험 안에서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하는 기도라고 해설을 하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해, 그리고 아버지의 그 뜻의 성취를 위해서 헌신하면서 산다면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는 마귀가 우두머리가 된 이 세상과 끊임없이 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름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전투입니다. 휴전이나 혹은 어떠한 타협도 없고 어느 한쪽이 완전히 파멸해야 끝나는 그런 종류의 싸움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리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사단은 머리가 깨졌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 세상에서 세상 나라의 임금 노릇을 하던 사단은 허리가 부러졌습니다. 이제 예전처럼 힘을 쓰지 못하고 설설 기어 다니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원리를 따라서 복음적으로 거룩한 경건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은 신자라고 하더라도 유혹하여 넘어뜨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아주 쓸모없거나 혹은 하나님의 나라를 오히려 방해하는 사람 정도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아직까지 사단에게 남아있습니다. 마음이 미끄러지고 은혜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두드려 유혹을 하거나 심히 사명감을 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작은 환란을 당할 때에 예수를 버리고 도망치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은 사단에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소명을 따라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전투적인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선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어야지만 비로소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를 알게 되고 진리의 빛을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이어야지만 비로소 이 세상이 얼마나 비진리로 가득 차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복음을 위한 환란과 시련, 이런 것들이 바로 오늘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을 만난다고 하는 것과 시험에 든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시험을 만나는 것은 왕국의 소명을 받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고 격려하였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복음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이런 종류의 시험, 복음으로 말미암는 박해, 핍박, 신앙으로 말미암는 환란 같은 것들은 여러분이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사셨던 것처럼 당신의 제자들도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나라가 이 세상에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헌신적으로 그 나라를 위하여 살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짓밟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당신의 기도였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였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매일 드리기를 원하시는 기도의 제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B. '시험 들게 마시고'
1. 에이세넹케스: 에이스페로
그렇다면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라고 하는 이 기도는 무엇일까요? 들어간다라는 이 말은 희랍어로 ‘에이세넹케스’라는 단어인데 ‘에이스페로’(εἰσφέρω)의 변형입니다. ‘에이스’는 속으로라는 뜻이고 ‘페로’는 짊어지다 라고 하니 여기에서 영어의 Bring이라는 해석이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다보면 이 악한 세상과 대적하여 환란과 시련, 핍박을 만나는 일이 없을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만나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말씀의 능력으로 적절히 이기면서 산다면 우리의 그 헌신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뜻들이 성취될 것이지만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바로 그런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에 우리가 미끄러져서 그래서 죄악 속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시련과 환란을 만나는 것은 피할 수 없을지라도 그 속에서 우리들이 미끄러져서 죄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온전히 순결하게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께 올리는 탄원인 것입니다.
2. 마귀의 시험과 신자의 이끌림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칭찬을 하며 그 고백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때에는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그 유명한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하는 고백을 한 바로 직후였습니다. 이때 비로소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때 놀란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라고 말렸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3)고 예수님이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보았다기보다는 무의식중에 베드로를 움직여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지 말고 구속의 대업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여 구속의 역사를 오지 못하게 한 마귀의 궤계가 뒤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보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시험이 있었으나 이렇게 물리치시자 그 시험은 떠나갔고 예수님은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육신의 연약함으로 기도보다는 졸음을 택했습니다. 그리하여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을 갔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불충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3. 준비된 마음: 요13:2
이 사단의 시험은 사단이 원하는 바대로 마음이 악하게 준비된 사람들에게는 매우 강한 능력으로 임하지만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토대로 항의합니다. “가룟 유다도 어떤 의미에서 피해자다. 만약에 사단이 예수를 팔 생각을 넣어주지 않았더라면 과연 가룟 유다가 배신자가 됐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치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단도 성령도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는데 모두 각각 준비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만 역사합니다. 그래서 사단이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들어와 예수를 팔 생각을 넣어주었을 때는 이미 그 이전에 가룟 유다의 마음이 돈에 대한 욕심과 예수님을 능히 배반할 수 있는 부패한 마음으로 충분히 숙성되었을 때에 마귀가 그 생각을 넣어줬고, 넣어주자마자 이것은 마귀의 생각이 아니라 가룟 유다가 매우 기뻐하는 자신의 생각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마의 생각을 가룟 유다의 악한 의지로 받아들여 자기의 것으로 삼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든지 가룟 유다는 피해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기쁘게 그 일을 선택한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면 후회할 이유도 없었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시험도 악으로 빠지도록 준비된 사람들의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이니 오히려 이 기도는 그것을 막으실 분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 기도에 태만: 마26:41
기도에 태만했던 제자들은 결국 잠들어 시험에 들게 되었고 이후로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배반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에 우리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드리는 이 간절한 탄원은 하나님께 우리의 시험의 상태를 알려드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탄원에 우리의 마음을 묶기 위해서 섭리 속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C. 탄원에 마음을 묶음
다시 말해서 이미 하나님이 우리의 시험의 상태를 알고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환란과 시련을 만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그런 시험을 만났을 때 미끄러져서 더 커다란 죄에 빠져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더럽히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시기 위해서 주기도문 속에 이것을 매일 하나님 앞에 탄원하도록 규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 여섯 번째 탄원을 올릴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할 때 환란과 시련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그 시간에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미끄러져 죄에 빠져 아주 부패하고 더러운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가르침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탄원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며 이 탄원을 하나님 앞에 올림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두려움도 사라지고 어떤 교만함도 멀리하게 되어 주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며 이 믿음의 길을 가게끔 우리 자신을 채찍질하게 됩니다.
마틴 루터가 고백했던 바와 같이 사도시대 이후 최대의 순교자는 주기도문입니다. 이 주기도문은 예배 끝날 때에 장식으로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목사 없을 때 모임 마치는 신호로 사용하라고 이 주기도문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기도라고 하는 것은 삶이 기도하는 내용과 일치할 때 거기에서 치열한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열렬한 기도는 치열한 삶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발이 부르트도록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기도할 때 뜨거운 눈물이 흐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진리의 빛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그 진리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기쁨을 알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 진리의 빛이 찬란하게 비취도록 기도할 때에 가장 간절한 기도가 나오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그 일을 위하여 쓰고 싶어집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연약한 지체들을 사랑으로 돌보며 물질로 봉사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 굶주리고 불쌍하고 병든 이웃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 마음에 눈물이 고이게 됩니다. 한 사람의 기도는 삶을 능가할 수가 없고, 한 사람의 삶은 기도를 넘어설 수가 없으니 삶은 기도 속에, 기도는 삶 안에 갇히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바로 그 사람됨을 능가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요즘 거의 기도할 수 없다면 거의 주기도문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 제목이 열렬해지고 아주 많이 있다면 여러분은 삶의 많은 방면에서 열렬하게 주님을 위하여 살고 있는 중입니다. 만약에 이런 삶이 없는데 열렬한 기도가 되면 어떻게 하냐고요? 가짜 불길이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꺼지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이 기도는 우리에게 폭풍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우리에게 정당한 시험이 있습니까?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본질적으로 영적인 전쟁터에 있기 때문에 수시로 복음 때문에 환란, 시련, 고난, 위기를 만나고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이 시험을 만나는 것은 우리에게 피할 수 없지만 이 시험 속에서 우리들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보호해 달라고 간절히 탄원을 드릴 수 있는 삶의 현장이 있느냐고 이 주기도문 여섯 번째 탄원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주님께서는 죄를 지으실 수 없는 분이었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왕국을 위하여 살면서 시험을 만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에 빠질 가능성도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기도를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 매일 드리셨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죄에는 빠질 염려가 없으신 분이었지만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전능하신 신성을 인성 안에 감추신 분이었기 때문에 매순간 건강을 붙드시는 주님의 도움이 필요했고, 배고픔과 추위를 이기는데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했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도 우리의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기도를 간절히 올리셨던 분으로서 우리에게 이 기도를 탄원으로 드리도록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IV. 결론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기도 앞에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매일 매일 환란도 있고, 시련도 있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누르는 깊은 근심, 거룩한 근심도 우리에게 있는지 이 주기도문의 여섯 번째 탄원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기 때문에 당신의 나라를 위하여 신실하게 싸우는 모든 사람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아갈 때 때로는 위기를 만나고 때로는 동료들에 의하여 홀로 버려진 것 같은 고독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지푸라기와 같이 불면 날아갈 아주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단은 무한히 강하고 세상 무한히 크고 나는 그 앞에 홀로 서 있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두려움이 들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시험을 만나는 것은 피할 수 없으나 시험에 들지 않도록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손으로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며 치열하게 주기도문의 삶을 살면서도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육체는 순전하게 보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한 빛으로 나타나도록 그렇게 주님의 소명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3.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한 후에는 여섯 번째 간구의 마지막으로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를 첨가하도록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여기에 나오는 이 시험이 바로 일상적으로 우리들이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타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만나게 되는 모든 시련과 환란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시험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시험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으면 반드시 악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험에서 악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II. '악'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눈길을 끄는 단어는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라고 할 때에 악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도대체 이 악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이것은 아마 선과 악이라는 인류 이래 계속 되어온 거대한 담론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는 이 주기도문의 마지막 간구를 이해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되는 한도 안에서 이 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A. 악(포네로스)의 용례
이 ‘악’은 희랍어 성경에 ‘포네로스’(πονηρός)라고 하는 단어로 등장을 하는데 이 용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약에서 이 악은 악한 사단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대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 혹은 알면서도 고의로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는 사람들 속에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어떤 계명과 율법을 위반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도덕적인 판단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훨씬 다양한 용례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6장 23절에서는 육체가 허약한 것도 ‘포네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비열한 사람 혹은 악한 사람을 누가복음 6장 35절에서 바로 이 ‘포네로스’ 로 묘사했습니다. 요한 1서 2장 13절에서는 이 ‘포네로스’를 마귀를 가리키는 것으로 지칭하였고, 누가복음 6장 45절에서는 악한 것, 나쁜 것, 나쁨 이런 것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악이라고 하는 단어를 성경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미루어 보면 무엇인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판단 앞에 비열하고 그 판단에 부적합한 판정을 받은 어떤 상태나 바람직하지 못한 사람, 사물들, 성격 등등을 의미하게 됩니다.
B. '악'의 판단기준
1. 선악의 기준
그렇다면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규명하기 위해서 악이라고 내리는 그 악의 판단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원래 악이라고 하는 것은 선과 대조를 이룸으로써 악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마치 빛을 아는 사람만이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또 어두움을 안 사람이 어두움만 아는 것으로 어두움의 정체를 알 수 없고 빛을 경험해야만 어두움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악을 가리켜 말하기를 ‘선이 결핍된 상태가 바로 악이다’ 라고 규정함으로써 하나님이 이 모든 악의 원인이 된다고 하는 철학자들의 고집스러운 비판에 맞섰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과연 선과 악이라고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기준점이 있어야 되는데 과연 이 기준이 있을까 라고 회의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과 악에 대한 기준점은 반드시 있다고 그런 규범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선과 악의 기준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절대적인 진리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선과 악을 판단할 기준이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자기에게 행복하게 해 주고 도움을 주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라고 말할 거고,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지 선과 악이라고 하는 것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도 우리들이 없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 알빈 플란틴가라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세상이 악하냐고 묻는 사람들에 대해서 악의 존재를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라고 역으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풀어 말하자면 악이 왜 존재하는가 라고 하는 의심스러운 질문은 왜 반드시 선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물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반드시 이 세상은 선해야 된다 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성적인 생각이 아니라 종교적인 생각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 선악의 기준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늘 변하는 사람에게 이 기준이 있는 것이냐, 불변하는 하나님께 기준이 있는 것이냐에 따라서 각각 달라지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베트남 사회 과학원에 있는 박사급 연구원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의 전파가 한국 근대화에 끼친 영향을 조사하기 위해서 왔고 그 중에 한 교회를 들렀는데 우리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여러 가지를 보여주고 또 성탄절 행사도 함께 참관하고 갔습니다. 식사 자리에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5년 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당신네 나라의 전쟁에 끼어들어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고통스럽게 한 것에 대해서 한국사람 중 한 사람으로서 용서를 구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약 35년 전 맹호부대 아저씨들이 군인 옷을 입고, 그리고 배를 타고 월남으로 전쟁하러 갈 때에 어린 마음에 정말 세계 평화가 저 아저씨들 없으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치약도 사서 보내고 비스킷도 사서 보내고 정성껏 위문편지를 써서 보냈어요. 세월이 흐르고 보니까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들어서 꽃다운 청춘 5000명이 그 남의 나라 땅에서 죽어갔고 더 많은 사람들을 거기에서 전쟁 중에 죽이거나 혹은 학살했습니다. 그때에는 우리들이 그것이 정말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 보니까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불변하는 가치라면 지금 그 5000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을 죽인 베트남하고 왜 무역을 하고 외교를 맺고 관광을 가고 그렇게 합니까?
이처럼 인간 속에서 사람을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선악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이럴 때에는 이렇고, 저럴 때에는 저렇고 수시로 변합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용주의의 정신이고 세속 주의적인 사고방식이고, 하나님이나 절대적인 진리 같은 것들은 없고 한 시대에 살고 있는 사회의 사람들이 서로 계약을 맺듯이 이러이러한 일들은 하지 말자라고 하면 그것이 선악의 판단 기준이 된다고 하는 것이 상대주의적인 진리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이 선악의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고 믿지 않습니다.
2. 성경의 기준: 계명
그렇다면 성경으로 볼 때에는 이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왜 창조하셨는가 하는 목적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눈을 들어 사면을 두루 보면 예배당에 풍경을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여러 가지 많은 물건들이 눈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모두 사람이 만든 것이고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만든 사람의 의도와 목적이 있고 그것을 설치한 사람은 그것들이 어떻게 이 예배당의 고유한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려를 가지고 그 물건들을 여기에 설치하거나 혹은 시설한 것입니다. 여러분 위에 밝게 빛나는 등은 어두움을 피하고 사물을 볼 수 있도록 기능하기 위하여 매단 것이고, 시계는 시간을 알리기 위하여 그리고 여기에 있는 마이크와 앰프 시설은 작은 크기의 목소리를 명료하고 큰 소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채택되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카메라는 영상을 촬영하고 저장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장비이겠죠. 사람이 만든 모든 물건이 각기 목적과 의도를 따라서 만들어졌다면 바로 그러한 의도와 목적을 창출해 낼 수 있는 인간을 하나님이 아무 목적도 없이 창조 하셨다거나 또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을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냥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셨다고 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주장이 될 것입니다.
19C에서 20C까지 살았던 영국의 사상가 체스터 턴이라고 하는 사람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은 마치 난파된, 침몰한 난파선에 실린 보물과 같다고 말입니다. 언제적 배인지도 모르는 배가 바다 깊이 침몰했고 거기에서 수많은 보물들이 쏟아져 바다 바닥에 굴러다녔습니다. 잠수부들이 우연히 그것을 발견하여 하나씩, 둘씩 끌어내기 시작했고 그 유물들은 땅 위로 끌어 올려 졌습니다. 이게 어느 시대인지도 모르고, 이 물건이 어떤 것들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무엇에 쓰는 용도인지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을 놓고 그 시대와는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그 물건이 생겨났고 혹은 만들어진 시대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것들은 맞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전혀 맞지 않아서 이 물건들이 도대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만들어졌고, 이것은 사회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물건들을 원래 그 물건들이 만들어진 시대의 시장 바닥에다가 갖다가 쏟아놓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해석하지 못할 물건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그것을 만든 사람도 살아있고 사용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 시대의 유행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바로 이렇게 이 물건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신앙과 그리고 하나님의 성경 계시의 망 위에서 이것들이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신앙을 버렸습니다. 성경 계시에는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그래서 만물이 눈에 보이는 한도 안에서는 무엇인지 알지만 그러나 이것이 본래 어디서부터 왔는지 그리고 이것들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사물들인지에 대하여 올바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와 무한한 사랑 속에서 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 시간과 공간이 하나님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또한 동시에 하나님이 이 시간과 공간에 어떤 물질이나 영혼이 존재하는 것 같은 방식으로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없이도 충분하신 분이었고, 하나님이 필요했기 때문에 세상을 만드신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게 넘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영원한 지혜 속에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교통하게 하시고 그리고 인간들을 창조하셔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인간들끼리 관계를 맺고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이 세상을 가꾸고 돌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생각 안에 있는 관념들을 시간과 공간 속에 투사하심으로써 당신 속에 있는 이 이데아들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드러내셔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아름다운 영광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영원 세계 속에서도 함께 보실 수 있도록 하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복잡한 말들을 우리의 신앙 고백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 학문, 지혜 이런 것들을 가꿈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을 드러내고 그 분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아름다운 영광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럴 정도의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창조주 하나님과 이 세계와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도 현저히 지성의 크기가 모자라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과 창조하신 세계, 그리고 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인간과의 관계를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지만 겨우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다면 머리 나쁜 사람들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산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힘겨운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명백히 계명을 주심으로써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계명을 따라 살기만 하면 이런 깊은 철학적인 이치를 몰라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며 살아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자신은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이 계명은 성경에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믿어야 할 규칙들과 살아야 할 교훈들입니다. 믿어야 할 규칙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에 대한 내용이고, 이 계명에 순종하지 않을 때 이것을 불신앙이라고 말하고 그리고 이것을 바로 성경은 악이라고 말합니다. 살아야 할 교훈은 우리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된다고 하는 것,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행하지 말아야 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는데 이것대로 따르지 않는 것을 불순종이라고 말하고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리키는 악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악은 하나님이 주신 많은 계명들의 기준이 되어서 그 계명대로 믿거나 계명대로 살지 않는 것이 악인데 이 모든 계명들이 뿌리를 더듬어 가면 마지막에 하나의 뿌리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창조의 목적이라고 하는 뿌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들을 고려하고 보면 여기에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에 이 악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고, 타락해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구원해 주신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III. '죄'(sin)와 ‘악’(evil)
여기에서 우리는 악과 죄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죄와 악은 너무 밀접하기 때문에 우리 말 성경에서는 ‘죄악’이라고 아주 아름답게 번역을 했습니다. 죄가 만약에 뿌리라면 이 악은 그 뿌리에서 나온 줄기, 가지, 열매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 죄는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경향성이며, 성향이고 악은 그 경향성과 성향이 흘러나와서 마음 안에서 혹은 마음 바깥에서 실제적으로 실행이 된 것을 악이라고 말합니다. 죄는 경향성으로서 마음의 밑바닥에 존재하지만 악은 구체적인 것으로서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밖으로 나온 인간의 악한 행동에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죄악이라고 하는 이 두 낱말을 함께 합쳐 놓으면 죄는 악의 뿌리를 보여주고, 악은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종종 야외에 가면 활 쏘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동호회를 결성해서 휴일이면 활을 쏘는 것을 종종 봅니다. 렌즈가 달린 과학적인 양궁이 아니라 그냥 눈짐작으로 화살을 쏘는 국궁을 특별히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약 250m 정도 떨어진 곳에 과녁이 있고 궁사들은 그 과녁을 향하여 조심스레 시위를 당기고 그리고 화살을 날립니다. 그 화살이 동전 크기보다 좀 더 큰 과녁 중앙에 명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궁사들이 피나는 연습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피나는 연습을 통해서 화살을 날려 보내고 그리고 화살을 거기에 맞춥니다. 그것은 고도의 훈련과 기술, 그리고 활쏘기에 대한 장시간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과녁 아닌 딴 데를 쏘기 위해서는 연습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데나 미친 듯이 쏘면 그렇다면 그게 바로 과녁을 빗나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게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시고 나 같은 사람을 만드시고 구원해 주신 그 계획과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입니다. 그것이 선입니다.
자 우리는 물질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고 돼지처럼 혼자 먹고 호위호식하고 그 돈으로 오히려 타락하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들은 악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정직하게 노력해서 번 돈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구제하고 선교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미래의 목회자들을 위하여 투자하는 행동은 우리들이 선한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을 만드시고 자기를 지으신 그 목적에 이바지 하지 때문입니다.
요즘 구역 공부하느라고 고생이 많으시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불평도 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분들은 정말 열심히 한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 길고 긴 드라마는 어쩜 주인공 엑스트라 이름까지 외우고 가계에 흐르는 족보까지 모두 외우면서도 어렵지 않다고 하면서 그것은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조금 어려운 게 나오면 진리가 왜 이렇게 어렵냐고 투덜거리는 것은 선한 행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외우면서 좀 어려운 내용이 나오면 마음이 뿌듯해지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나를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대접을 해주는구나, 내가 어디 가서 이런 대접을 받으랴 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어려운 것들을 공부하면서 자신이 정말 무지한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공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선한 행동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세계를 창조하고 사람을 지으시고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에 이바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 더 해볼까요? 그렇게 설교를 해도 아직도 여전히 무위도식하면서 교회 생활하는 사람이 있지요. 남이 희생해 놓은 모든 희생위에서 잠깐 예배를 드리고 그림처럼 사라지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른 아침서부터 교회에 나와서 청소를 한다, 어린 영혼들을 가르친다, 병원을 심방한다, 교도소를 방문한다, 가난한 이웃들을 구제한다, 이렇게 애쓰고 힘쓰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선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비록 작은 크기의 선행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선한 행동이라고 가리키는 것입니다.
수학 문제가 나왔을 때 정답은 하나밖에 없지만 오답은 수없이 많아요. 그래서 틀리기 위해서는 연습할 필요가 없어요. 맞추기 위해서 연습하기만 하면 되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은 훌륭하고 그것은 선입니다. 거기에서 빗나가는 모든 것들은 다 악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자 생각해 보십시오. 맨 처음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자 이제 인간은 거꾸로 순서를 더듬어 올라갑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을 사용합니다. 그 만물들을 가지고 사랑하는 이웃들을 섬기고 가족들을 섬기며 사랑합니다. 그 가족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경배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질서에요. 그런데 이런 질서를 뒤집어 버려요. 그래서 하나님을 내가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내 꿈을 이루고 나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뒷돈 대주는 분으로 하나님을 전락시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대신 자기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서 짓밟고 이용하고 그리고 정복해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하나님, 사람, 세상 모든 만물 이 질서를 뒤집어서 나, 나를 신의 자리에 놓고,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 만물을 그 다음에 놓고, 모든 인간들을 그 다음에 놓고, 다른 인간들을 더 밑에다 놓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뒤집어 놓고 뒤집힌 질서를 사랑해요. 이게 바로 악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속에서 말하기를 “악이란 잘못된 질서에 대한 사랑이다”. 잘못된 질서에 대한 사랑, 그것이 바로 악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모든 비극과 고통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뜨려지고 기도 속에서 회개하고, 말씀 속에서 새 힘을 얻고, 성령 안에서 충만함을 입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들이 끊임없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이 세계를 지으신 목적에 부합하는 사람들로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가 애쓰는 것입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돌이켜서는 커다란 회개는 급격히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감동을 받고 훌쩍거리면서 우는 것은 미세 조종을 하면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요즘 신앙생활은 장난입니다. 오락처럼 신앙생활을 합니다. 무엇인가 인간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고 그리고 나는 바로 가장 좋은 길을 예수 안에서 발견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악에 대해서 이런 그림들을 그리면서 오늘 본문을 대해 본다면 우리는 이 마지막 기도가 그렇게 간단한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기도문을 6개 혹은 7개의 간청으로 이루어진 일자형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 주기도문은 제 1번부터 6번 혹은 7번까지 되어 있는 일자형의 기도가 아니에요. 이것은 이렇게 원통으로 되어있는 목걸이 모양의 기도예요. 그래서 이 마지막 기도인 ‘다만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는 이 기도는 첫 번째 기도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복음 전파를 위하여 시련을 피할 수 없이 당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주님의 보호를 받아 정결하게 되지 못하고 시험을 당하여 악에 떨어지게 되면 첫 번째 기도는 무효가 됩니다. 우리가 악에 빠지게 되면 그 자체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라는 그 기도에 정면적으로 배치가 되는 삶입니다.
IV. 시험과 ‘악’으로 이끌림
A. 시험은 내면에 작용함
여기에서 우리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와 ‘악에서 건져 주옵소서’라고 하는 기도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시험과 악으로의 이끌림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들이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시험은 먼저 내면에 작용한다 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시험은 객관적으로는 복음 전파를 위하여 피할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 환란과 시련을 의미하지만 주관적으로 적용되는 이 시험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에 부적합하게 된 모든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마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시험을 만약에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에 부적합한 모든 상태를 가리킨다면 도대체 우리 중 시험에 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선은 많은 사람이 그 선을 버린다고 해서 악이 될 수가 없고, 악은 모든 사람들이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선으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죄의 유혹을 받고 이 세상의 시련 속에서 시험에 들기 때문에 이렇게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에 적합한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소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없다고는 말할 수 없고, 우리 중에도 아주 훌륭하게 경건을 실천함으로써 언제든지 즉각적으로 주님께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혹시 지금은 여러분이 그렇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과거에 이런 경험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방황하다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감격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달은 다음에는 이제 그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기쁨과 그리고 바램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의 순간이고, 회심이 새로워진 순간이기도 합니다.
(찬양) 고집대로 영 죽을 험한 세상이 왜 이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만약에 이 찬송에서 말하는 세상이 정말 세상 전체가 다 더럽다고 여기는 찬송이라면 이 찬송은 틀렸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다 더러운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아름답고 선한 것이었는데 거기에 묻은 더러운 오염과 인간의 죄와 악 때문에 더럽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세탁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이 그것을 깨끗케 하도록 우리를 정결자로 이 세상에 부르신 것입니다.
요즘은 살기 좋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차에도 웬만하면 다 내비게이션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운전을 할 때에 내비게이션이 가르쳐 준 길로만 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경로를 벗어날 때도 있죠. 그렇다면 즉시 우리는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파악을 하고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모든 상태라고 정의를 내리게 되면 우리는 정말 겸손해지게 됩니다. 나름 성령 충만하다고 말해도, 나름 어떤 사람은 자기를 스스로 가르쳐 순종대장이라고 하는데 담대하신 분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순종 대장이라고 불러도 항상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시험을 규정하고 보면 남들이 박수치는 상태에서도 사실 우리는 이 시험에서 우리를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겸비한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주관적인 시험은 먼저 인간의 내면에 작용하게 됩니다. 영혼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 시험은 죄의 영향으로서 제일 먼저 생각을 혼란하게 만들고, 우리의 감정을 부패하게 만들고, 우리의 의지를 충동적이 되게끔 만듭니다. 우리가 은혜아래 있을 때에는 감정이 부패해도 ‘우리가 이러면 안 돼’ 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의지가 무엇을 하려고 충동을 해도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자 라고 타일러서 복종을 시켜요. 시험에 들고 마음이 미끄러지게 되면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는데 감정이 부패해지고 타락하고, 의지가 충동적이게 되면 의지를 통제하던 우리의 지성이 의지에게 복종을 해서 의지가 ‘나는 이 일을 하고 싶으니 네 머릿속에서 나의 이 행동을 합리화 하거라’ 하면 지성이 노력을 해서 어떻게든지 합리화 시켜서 그렇게도 좋게끔 허락을 내려요. 이게 시험이 내면에 작용하는 방식입니다.
B. 시험과 유혹이 따로 없음
그러니까 시험과 유혹이 따로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 시리즈를 설교하면서도 언급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창조적인 시험과 파괴적인 시험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창조적인 시험은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려고 내리는 시험이고 이 시험을 통과할 때는 복을 받지만 파괴적인 시험은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고 목적 자체가 복 줄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저주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시험은 이겨봐야 축복은 없고 본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창조적인 시험의 대표적인 예를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받았던 그 시험을 예로 듭니다. 그러나 여러분 결론을 내놓고 답을 찾는 것이지, 만약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시험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온 시험이고 그래서 창조적인 시험이라고 분류할 수 있을까요? 엄격하게 말해 보십시오. 이삭은 아브라함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고유한 의미에서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으니 그것이 뭐라구요? (죄) 그것만 여러분 것입니다. 나머지는 다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맡기신 자식을 주신이 찾아가시겠다고 그럴 때 시험이 되었던 그 사람이 이미 시험에 든 사람이 아닐까요?
파괴적인 시험의 대명사로 보디발의 유혹을 받았던 요셉을 예로 듭니다. 자, 마귀로부터 시험이 온 것일까요? 그렇다면 보디발의 아내가 매우 섭섭하게 생각하겠죠. 마귀가 시험을 한 것이 아니라 바람난 여자가 청년을 유혹한 겁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이 기독교 강요에서 ‘우리가 시험에 들거나 혹은 죄를 지을 때에 마귀에게 의하여 이 일을 하고 있다’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책임 있는 도덕적인 존재로서의 위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여자의 시험이 백번 양보해서 마귀로부터 온 시험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그 시험을 이겼더니 요셉은 감옥에 쳐 넣어졌지만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국무총리가 될 수 없었으니 그 파괴적인 시험이 이 요셉을 오히려 국무총리로 만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 시험은 객관적인 것이지만 이 시험을 당했을 때에 우리가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이 시험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선으로 이끌릴 수 있고, 혹은 이 시험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악으로 이끌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이 주기도문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제자들은 예수 따르기 위해서 배와 그물을 버렸던 사람들이고, 생업을 포기한 사람들이고, 그리고 가족들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런 탁월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과 그 분의 뜻과 그 나라를 위하여 살려고 할 때에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시련과 환란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환란이요, 얼마나 영광스러운 고난입니까? 그러나 그 환란과 시련이 아주 하나님을 위한 시련이고, 고난이기 때문에 저절로 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비록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살다가 시험을 만나도 하나님이 그들을 특별히 지켜주시지 않으면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하다가도 시험에 떨어져 악에 흐를 수 있었고, 또 요셉과 같은 경우는 바람난 유부녀가 이 총각을 악마적인 생각으로 유혹했고 그래서 이 사람이 당하게 되는 이 시험은 어떤 의미에서도 영광스럽고 어딘가 가서 그런 시험을 당했다는 것 자체를 자랑할 만한 훌륭한 자랑거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유혹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고 악에 빠지지 않게 되었을 때 그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를 오히려 애굽의 국무총리로 삼으시는 당신의 경륜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부터 시험 안에 창조를 가져오거나 파괴를 가져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신앙으로 그 시험을 직면하느냐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는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시다가 시험 당하시는 분들 계시죠. 특별히 개척 교회에서 돈도 바치고, 물질도 바치고, 시간도 바치고 열렬하게 터줏대감처럼 봉사하다가 안 좋은 일을 만나서 덜컥 시험에 들고 그래서 그 다음서부터는 트라우마가 생겨가지고 이게 교회에 가서 깊이 교회에 개입해서 열심히 섬기다 보면 또 이런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 라고 하는 두려움 때문에 어느 교회 가서든지 남의 교회처럼 다니는 사람들 있죠. 이거 회개 하셔야 됩니다, 회개. 회개하셔야 돼요. 그렇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은 순수하게 주님을 섬겼는데 시험을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거기까지는 틀림이 없습니다. 맞았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하는데 거기부터 틀린 겁니다. 거기서부터 해석이 잘못된 것입니다. 물질도 드리고 건강도 드리고 재능도 드리고 시간도 드려서 섬겼고, 그랬는데 시험을 만나게 됐다 거기까지는 맞아요. 그러나 만약에 그때에 이 주기도문의 정신으로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그 뜻의 성취를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기도하며 잘 인내하고 견뎠더라면 시험을 만나기는 했으나 악에 떨어지지는 않았겠죠. 그런데 그렇게 못했어요. 그래서 악에 떨어졌고, 영혼의 커다란 손해를 입고 교회에 앙심을 품거나 목회자나 교인들을 향해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것을 털어버리지 못해요. 그게 결국은 뭐냐 하면 영혼의 족쇄가 됩니다. 그래서 이 주기도문하고는 상관없는 삶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서야 됩니다.
악과 시험의 관계를 시험과 악의 관계를 그림처럼 설명하라면 이렇게 묘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해 전에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눈물도 나고 한편으로는 분노하게 되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아직도 밀렵꾼들이 많아요. 그래서 덫을 놔요. 그런데 이 짐승을 잡는 덫은 먹이를 놓고 짐승이 그 먹이를 향해 이동하노라면 발이 덫에 탁 걸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거를 탁 누르면 나뭇잎에 감추어져 있던 톱니처럼 생긴 이 덫이 탁하고 튀어 오르면서 이거를 스프링으로 발목을 딱 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덫은 나무에 묶여져 있죠. 제가 보기에는 그저 한 살이나 될까 말까해 보이는 어린 멧돼지가 그 덫에 걸렸어요. 얼마나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쳤는지 개 줄처럼 묶어 놓은 그 나무의 껍질이 하얗게 벗겨졌어요. 그리고는 도망가려고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이게 계속 스프링으로 옥죄어 와가지고 거의 이 다리가 절단될 지경으로 파고들어서 피가 낭자하게 흘렀어요. 그리고 결국은 죽었고, 결국은 얼었는데 마지막으로 비춰주는데 눈물이 한참 흘렀는데 그 눈물까지 얼어버렸어요. 그렇게 하면서라도 그 고기를 먹어야 되는지에 대해서 나는 정말 묻고 싶어요. 한번 그 사람을 거기에다 한번 한 시간만 그렇게 놔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해요. 그 덫을 밟는 것이 시험이라면 거기에 탁 찍혀서 피가 흐르는 것은 악입니다. 이렇게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험에 들되, 우리가 그렇게 악에 빠지지 않도록 주님의 각별한 보호를 간청하도록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C. 은혜의 도우심이 필요함
여기에서 우리는 주기도문 전체에 흐르고 있는 중심적인 사상이 이 마지막 간구에도 배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로 필요한 우리의 위치,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들의 연약한 처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거룩히 여김을 받으심을 위해 기도할 때 그 기도는 얼마나 장엄합니까?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부르짖을 때는 용사가 된 기분이겠죠.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하는 이 기도에는 마치 치열한 전쟁터에 완전 무장을 하고 말을 달려 나가는 아주 힘찬 장군의 모습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기도문 마지막의 간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구출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 어디서든지 넘어져서 길을 잃어버릴 수 있고, 어디서든지 넘어져 상처받을 수 있는 한 마리의 아주 어린 양의 그림이 떠오르게 됩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V. 결론
그렇게 연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이 여섯 번째의 탄원에 대한 해석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촉구합니다. 살아온 많은 날들 중 만약에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열심히 섬기다가 시험을, 시련을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게 되었을 때 이 기도를 간절히 드렸더라면 혹시 미끄러졌어도 즉시 일어나 다시 살려는 용기를 가지고 이 악에 엎드려 있게 마시고 나를 이 악에서 건져달라고 간절히 빌었더라면 아마 여러분의 인생은 얼마나 더 아름다운 인생이 되었을까요? 낭비한 수많은 날들은 주님을 섬기는데 사용되었을 것이고, 방황하던 수많은 인생의 시간들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일에 이바지하는 시간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들로 살아가려고 하면 시련도 만나고, 환란도 만나고, 고난도 만납니다. 이것을 피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과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만날지라도 여기에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영광만 드러내고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고 혹시 우리의 신앙생활이 나태하여 악에 미끄러질 때마다 거기로부터 우리를 건져달라고 간절히 매달려야만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마지막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약속을 동시에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습니까? 더욱이 주님은 이제 부활하사 주님의 보좌 우편에 계셔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이 모든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고 계시니 주님이 죄는 없으시지만 우리와 함께 시험을 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시험에 있는 사람들을 능히 도우시고 붙드실 줄을 믿으며 우리는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시험 속에서 악에 빠지고, 시험 속에서 미끄러져 허비했던 우리의 인생의 날들을 안타까워하면서 우리 인생의 남은 날들만이라도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 은혜에 굳게 붙들려 주기도문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간구하면서 힘차게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4.하나님께 영광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여섯 번째 간구를 끝으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끝이 납니다. 그리고 오늘 주기도문의 송영이라고 불리우는 한 구절이 괄호 속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하는 이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엄밀한 의미에서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주기도문에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주기도문이 낭독되어 오면서 역사적으로 이 송영 부분이 첨가되어서 교회에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소위 주기도문의 송영이라고 불리우는 이 부분을 배경을 좀 해설하고 그 의미를 설명하고 적용함으로써 열네 번에 걸친 주기도문 시리즈를 종결하려고 합니다.
II. 주기도문의 송영
A. 사본상의 증거
이 주기도문의 송영이라고 불리는 이 마지막 부분은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같은 본문에도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본 상에 증거를 보자면 비교적 초기 사본에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고,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 베자 사본이라고 불리우는 권위 있는 희랍어 성경의 사본들에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B. 후대의 첨가임
그래서 거의 모든 학자들은 예외 없이 이 주기도문의 송영 부분이 원래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고 후대에 첨가된 것임에 대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많은 성경들이 그래서 이 주기도문의 송영 부분을 번역에서 생략을 했습니다. 그러나 1611년에 번역된 권위 있는 흠정역 킹제임스 버전과 NASB등 영어 성경책은 이 구절을 비록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내용이 아니지만 상당히 권위 있는 것으로 여기고 지지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의 학자들에 따라서도 이 주기도문의 송영 부분을 주기도문에 넣는 것이 좋을까, 그렇지 않을까에 대해 의견이 갈려져 왔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송영 부분을 주기도문에 넣자고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좀 소수였고, 많은 학자들은 이 부분을 주기도문에 넣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송영을 넣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믿었고 그러나 칼빈과 벵갈같은 학자들은 이 주기도문의 송영 부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넣는 것이 적합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이 이미 이 주기도문의 송영 부분을 주기도문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십이사도의 교훈들을 모아 놓았다고 여기는 디다케라고 하는 외경은 2C의 작품인데 여기에 이미 이 주기도문의 송영 부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훨씬 오래전에 이 주기도문의 송영 부분이 주기도문과 함께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유대주의와도 관련이 있는데 이미 기독교 이전의 유대주의 문헌에도 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하는 이 송영의 어구들이 자주 등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유대주의 문헌에 나오는 송영들이 역대상 29장 11절에 나오는 ‘주님께는 광대하심과 권세, 영광, 승리, 위엄이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이 구절이 모태가 되어서 이 송영이 이 모든 것에 삽입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유대주의에서는 모든 이 기도문들이 송영으로 끝나는 예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송영이 없는 기도문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기도에 있어서 이 송영은 필수적이었고, 많은 경우에 이 송영은 앞의 기도문을 누군가가 선창을 하면 마지막에 그 기도문에 대한 응답으로서 모든 교인들이 회중으로서 한꺼번에 응답을 하는 예전적인 용도로 사용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주기도문을 누군가 외우고 나면 모든 성도들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고 끝을 내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서라고 하는 학자는 ‘유대인들에 있어서 기도가 간구로 끝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 뒤에 붙은 이 송영은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준 기도문은 아니지만 주기도문을 우리가 받아서 낭송할 때에는 아주 적합한 요소다’라고 자기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이러한 견해를 따라서 저는 비록 이 괄호 안에 들어있는 송영 부분이 권위에 있어서는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지만 이 주기도문을 우리들이 예배와 신앙생활 속에서 활용할 때에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리는 탄원자로서 마지막에 자기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신앙고백을 송영으로서 바치는 것이 주기도문의 아름다운 특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이 송영 부분을 주기도문에 포함하여 예전 적으로 낭송하는 것에 대해서 지지하는 바입니다.
이 한글 번역을 놓고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찬송가 말고 이전에 우리가 쓰던 찬송가가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 경에 교단들이 함께 회의를 해서 만들었습니다. 찬송가를 보면 찬송가 앞에 주기도문에 대한 번역이 실려 있고 마지막에는 항상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라는 번역이 나옵니다. 이것을 두고 각 교단의 대표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다가 어느 교단에서 요번에는“우리 ‘대개’ 자를 뺍시다” 그랬어요. 그랬더니 “왜요?” 그러고 반론이 일었습니다. 그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온전히 하나님께 있어야지 대충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그러고 웃지 못 할 반론이 제기되자 이제 총신에 있는 어느 해박한 교수 한 분이 거기에서 ‘대개’라고 하는 뜻은 조상들이 쓴 한자어인데 큰 대 자에다가 덮을 개를 사용했는데 한자어의 의미로 그 대개는 일의 원천으로 미루어 보건대 라는 아주 복잡한 뜻입니다. 그래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일의 원천으로 미루어 보건데 나라의 권세와 영광은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렇게 됩니다. 그 복잡한 번역이 어디에서 나왔냐 하면 희랍어 ‘호티’를 번역한 겁니다. ‘호티’는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왜냐하면, 이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번역을 하자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왜냐하면 그 나라와 그 권세와 그 영광이 아버지께만 영원히 있기 때문이옵나이다 아멘’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개’가 아직까지 찬송가에 살아있게 되었다. 이번 찬송가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렇게 살아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대개’를 빼버렸네요. 그래서 오해를 한거 같아요. 그 ‘대개’가 대충이 아니라 ‘왜냐하면’이라는 희랍어 호티를 옛날 한자말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울 때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옵나이다. 아멘’ 하면 아주 은혜로운 주기도문이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주기도문의 이 송영 부분이 권위에 있어서는 주기도문 본문과 같지 않지만 그 주기도문을 예전 적으로 우리가 사용함에 있어서 이 송영 부분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는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옵나이다 라고 하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III. 아버지께 영원히 있음
A. 그 나라(바실레이아)
제일 먼저 우리는 이 본문을 해석하기 전에 먼저 이 주기도문의 구조를 다시 한 번 더듬고 그리고 이 송영과의 관계를 규명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구하고 그 나라의 도래, 그 뜻의 성취를 간구하였습니다. 수직적인 기도를 드리고 난 후에는 수평적으로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리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 그리고 또 나아가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앞에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또 악에서 우리를 건져달라고 기도하는 이 수평적인 모든 기도를 드리는 것은 구조적으로 그 나라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인데 어떤 의미에서는 그 왕국이 이미 왔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 왕국은 아직 완전하게 성취되지 않은 왕국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자녀들, 주기도문을 외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한편으로는 그 왕국의 속한 백성이면서 동시에 아직은 완전히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지 않은 세상 나라와 맞서 싸우는 그러한 구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는 기도로부터 시작을 해서 마지막으로 우리를 악에 빠지지 말라는 기도까지 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졌다면 이런 기도가 성취되었으니 이미 성취된 것이 간구의 제목이 되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기도문 전체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그 통치 아래에 살아가고 있으나 아직은 그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이 세상 나라와의 긴장 관계 속에서 투쟁하며 충성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전투적인 삶을 회화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쩌면 이기고, 어쩌면 질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마지막 송영이 우리에게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악에서 구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그것은 정말로 악에 빠지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절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송영 구절이 웅변적으로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옵나이다. 잠시 개인적으로는 이 세상 나라와의 싸움에서 지는 것 같고, 신앙의 세계가 불신앙의 세계에 의하여 도전받는 것 같고, 인간의 불의에 의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가 훼방을 받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왔고 그 나라는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에 영원하신 그 아버지가 그 나라를 반드시 도래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신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인데 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과 질서를 따라 세워지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미 그런 일들이 개인에게 일어났고 교회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아직까지도 이 하나님의 통치와 신적인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최전선에서 바로 이 세상 나라를 정복하여 그 하나님의 왕국으로 바꿀 소명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셨고, 그리고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 지체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를 위하여 살아갈 터인데 이 나라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 도입되었고, 영원히 있는 그 나라가 일시적으로 이 세상에 침투하고 이 침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보증이기 때문에 이 보증으로서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 안에 예수 믿을 때에 성령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 나라가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싸움은 비록 힘겨운 싸움 같으나 이미 이겨놓은 싸움을 성취해 가는 과정의 싸움이고, 이 세상 나라의 마귀와 권세 잡은 자들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일시적인 악으로 대적하고 우리를 꺾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는 매일매일 개별적인 삶에 있어서 전투적인 삶을 살면서도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모든 싸움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이기시고 그리고 이 세상의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권세로 임하게 하신 하나님의 왕국이 이미 도래하였고, 그리고 그 나라는 영원히 이 세상에서 완성될 것이라고 하는 확고한 신념 속에서 이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관 주의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잠시는 실패하는 것 같고, 지는 것 같지만 그러나 반드시 그 나라는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믿고, 이 세상 나라의 무질서들과 더불어 투쟁하고 싸우노라면 반드시 우리의 힘으로 완성하지 못하는 그 나라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이 세상에 완성될 것이라는 최후의 승리를 믿으며 오늘도 우리는 믿음으로 이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B. 그 권세(뒤나미스)
두 번째로 이런 기도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올리는 이유는 권세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옵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뒤나미스’라고 나오는 이 권세는 능력과 혹은 힘을 가리키고 폭발적인 위대한 권세를 가리킵니다. 다이너마이트라고 하는 영어의 단어가 바로 뒤나미스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능력 혹은 이 권세는 목적이 없는 힘이나 권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미 도입하신 그 나라를 이 세상에서 성취할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나라는 이 세상의 임금들이 꽃으로 꾸며 쓴 황금의 면류관으로서 오는 그런 종류의 권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들의 의지와 지성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 꺾어지게 함으로써 사랑으로 주님께 돌아오는 까리따스의 나라를 오게 하는 그 능력을 가리키기 때문에 이것은 영적인 권능이요, 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나라를 이 세상의 창과 칼, 그리고 이 세상 나라의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복음의 은혜를 가지고 사람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함으로 이 세상에 잘못된 질서들과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에 어긋나는 질서들에 항거하며 살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밀려오는 이슬람 세력에 대해서 많은 두려움과 경계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선교 전문가들의 이야기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 볼 때에 이 이슬람의 권세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마어마한 능력으로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란 선교에 깊이 개입하고 있는 어느 전문자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지금 현재 이란은 어느 정도 기독교를 박해하느냐 하면 예수를 믿거나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이 들리면 즉결 처형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코를 자르기도 하고 귀를 떼내기도 하고 그리고 투옥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하에 있는 교회가 3200개로 추정이 된답니다. 실제로 이제 와서 공개하는 일입니다마는 우리 교회 선교팀들이 이슬람 국가를 가서 아웃리치를 했습니다. 복음은 전할 수가 없습니다. 전하지 못하게 되어 있죠. 그리고 아주 은근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전하였죠. 예수를 믿으면 부족에서 쫓겨나고 즉시 사형에 처해지는데도 두 명의 젊은이가 밤중에 찾아와서 예수를 믿고 싶다고 고백을 한 일이 있습니다. 기독교에는 그런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강한 매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들이나 이슬람 국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끔찍이도 유독 모든 종교들 중에 기독교에 대해서 경계하고 박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공산주의 국가에 불교가 들어갔다고 해서 체제를 위협하지 않습니다. 힌두교 국가에 도교가 들어갔다고 해서 체제를 뒤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에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갈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이슬람 국가에 복음이 들어갈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사회주의 국가에 복음이 들어갈 때 이데올로기 속에 억압받고 그리고 압제 당하던 인간의 존재의 고귀함에 대해 일깨우는 계몽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 1910년대까지만 해도 축첩이 유행하고 권세 있는 사람들이 축첩을 하는 것은 자신의 명예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축첩을 폐지하게 된 것이 기독교의 힘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1920년대 이후에 들어서 교회는 축첩하는 사람들을 치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불과 몇 십 년이 지나지 않아서 이 땅에서 조혼과 축첩의 풍습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도 기독교의 위대한 힘입니다. 권세 있는 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이런 모든 권력들이 민주적인 투표와 그리고 회의 절차에 의해서 선거가 도입되고 이렇게 된 것이 교회가 일군을 뽑는 제도에서 이 사회가 배웠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민주주의의 학습장이 바로 교회였고, 교회의 정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쳐 주는 훌륭한 교실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두려운 것입니다. 인도라는 나라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갈 때 전통적으로 계속되어 오던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는 운동들이 일어났고 사회주의 국가에 이런 것들이 들어갈 때 유물론을 부정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슬람 국가에 이런 일들이 들어가면 여자를 그렇게 학대하고 핍박하고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이 모든 사회적인 폭압들에 대해서 복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후폭풍이 두려운 것이고, 지하의 교회가 3200개나 있어서 그 중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몰래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다름이 아닌 바로 그러한 시대와 사회를 저항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하나님께서 독특한 성령 안에서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능력과 그 은혜가 권세가 되어서 이 세상에 무력과 폭압으로 세운 질서들을 부수고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아버지께서 홀로 가지고 계시고 어느 때에든지, 어느 장소에서든지 당신에게 이런 권세를 받기를 사모하는 모든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 능력을 주셔서 선교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동터에 얼어붙은 땅을 녹이는 놀라운 말씀의 능력이 바로 이 영적인 권세에서 나왔고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굳게 가두어 잠근 그 마음의 빗장들을 무너뜨려 버리고 부숴버려서 복음의 물줄기가 그들의 심령 속에 터지게 하는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이 바로 이런 성령의 능력과 권세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모든 교회위에 하나님이 이 위대한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잠시는 선이 패배한 것 같고, 잠시는 신앙이 진 것 같고, 불신앙이 이긴 것 같고 악이 승리한 것 같은 때를 만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잠시입니다. 잠시 그런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그 권세가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 나라와 함께 오는 그 권세 아래 잠시 흥황 했던 악들이 다시 무너지고 패배하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대한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패배한 선은 승리한 악보다 위대하다”라고 말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패배했는데 왜 위대합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록 지금은 악의 세력에 의하여 선이 잠시 패배하였지만 그러나 결국은 주님의 그 권세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에 이런 모든 것들이 규정대로 이루어질 것이요. 그리고 그때에는 잠시 진선이 진정으로 승리를 위한 싸움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될 것이지만 잠시 악으로 말미암아 승리를 거두었던 사람들은 결국은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에서 잠시 이긴 승리이기 때문에 그 승리가 마지막 날에 더 큰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뒤나 미스’ 그 능력이 아버지께만 영원히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우리가 우리의 삶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께 맞추고 이 주기도문의 삶을 살면 잠시는 꺾어지는 것 같으나 반드시 그 권세가 우리와 함께 하므로 당신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임을 믿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C. 영광
마지막으로 영광입니다. ‘독사’라고 하는 이 희랍어의 영광은 바로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가치가 있는 유일한 존재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이 모든 만물이 존재하게 된 원인이며 이 모든 만물이 회개하여 돌아가게 될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영원한 당신의 영광을 이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피조 세계 속에 펼쳐 보이시기 위하여 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무한한 우주의 세계, 지금도 폭발하며 팽창하고 있는 이 끝없는 우주의 세계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영광이시기 때문에 그 충만한 신성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이 모든 자연 세계와 이 우주 안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신앙으로 볼 때에 하나님의 영광의 코드가 들에 핀 작은 꽃 한 송이에서부터 우주에 떠 있는 그 수많은 별들에 이르기까지 한없이 가득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영광이시기 때문에 이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셨고, 또한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세상이기 때문에 모든 창조물들은 이렇게 자기를 창조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이 모든 만물의 존재하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위대한 불꽃처럼 당신의 영광을 이 세계에 충만하게 하시고 그리하여 인간의 선행과 하나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모본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주님의 나라를 거역하는 인간의 악과 불순종까지 모두 사용하여 당신의 위대한 영광을 드러내는 불꽃처럼 쓰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의 창조의 영광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목격하고 또 이 하나님의 영광은 만물이 존재하게 된 원인인 동시에 만물이 존재하고 돌아갈 목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도 도처에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인류의 구속의 사건을 통하여 당신의 충만한 영광을 아름답게 드러내고 계십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방의 땅에서 나타나는 복음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의 정수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시대 말에 나타날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의 도래에 비하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는 찬란한 영광이 온누리를 뒤덮을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온누리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모자라 불의하게 사는 자들이 없을 것이고, 그 사랑이 모자라 악을 행하는 자들이 없을 것이니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이 땅에 오게 하시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사셨던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마지막 열매로서의 영광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아버지께 영원히 있고, 이미 도래하기로 작정된 나라이고, 무엇도 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이 땅에 임하는 것을 가로막을 자가 없습니다.
IV. 결론
우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주기도문을 버리고 주기도문과 상관없는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그 나라는 올 것이고, 그 권세는 임할 것이며 영광은 충만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기도문의 삶을 잃어버리고 이 주기도문과 반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들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어둠속을 걷고 있는 빛의 자녀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들은 갈등과 두려움과 어두움에 가득찬 삶을 살 것이고 환란과 시련을 만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바지하는 것이 없는 방종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이 세상 나라의 기쁨에도 온전히 참여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신앙이 없어 버림받고 세상 나라에서는 세상을 버렸기 때문에 또한 버림받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목적에 정면으로 위배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 모든 그 위대한 나라, 그 끝없는 권세, 그 한없는 영광이 바로 하나님께 영원히 있을 것인데 그 하나님이 바로 오늘 우리의 아버지라고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와 그 권세와 영광을 생각하면서는 우리는 티끌 같은 피조물이라는 생각 때문에 위대하신 하나님 위엄 앞에 무릎을 꿇고 두려워 떠는 자들이 되지만 아버지라는 이 신앙 고백 앞에서 우리는 알 수 없는 힘으로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의 소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져 아버지의 뜻이 성취됨으로 그 안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그 안에서 한없이 행복한 존재들이 되는 이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소명된 것입니다. 우리의 혈관에 피가 흐르고 우리의 입술의 혀가 굳어지기 전까지 우리는 이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며 이러한 삶을 알지 못하는 모든 창조의 목적을 떠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이 주기도문에 담긴 위대한 경륜들을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말로, 그리고 우리의 복음의 전파로, 우리의 윤리적인 삶으로 사람들에게 빛처럼 드러내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씻어 다시 이 세상에 빛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강해는 열네 번의 설교로 끝을 맺었지만 주기도문의 삶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마지막 주님의 품에 안기는 날까지 이 주기도문을 따라 사는 충성스런 주님의 자녀들이 되셔야 합니다.
주기도문 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