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주기도문 8, 9과)
녹취자 : 장주은
제가 2년 전에 『주기도문』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460페이지 정도 썼는데 그 중에 한 챕터를 여러분과 공부하려고 합니다. 지금 시간이 없어서 거두절미하고 하나님을 위한 간구, 우리를 위한 간구가 있고 마지막에 송영이 있는데 우리를 위한 간구, 지금 나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하는데 희랍어 성경에는 ‘알토스’라고 나옵니다. ‘빵’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제유법적인 표현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재물을 모으는 것이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산다고 하는데 그것은 적절한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나중에 모자라면 누구한테 빌립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은 식생활을 위한 것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모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조건들,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빵과 포도주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포도주는 왜 빠졌는가. 그러면서 여기에는 교육, 건강, 예술, 모든 것을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 포함된다. 그러나 사치품은 포함되지 않는다.’ 저는 좀 생각이 적극적이어서 약간의 사치품도 포함된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목걸이 같은 것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매달아서 기분이 좋으니까 그렇다고 대출받아서 사면 안 됩니다.
그 정도 하고 여기서는 이제 후에 나오는 두 번째 시간은 ‘우리에게’ 라는 제목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공동체적인 기도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나만 양식이 해결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해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먹고 마시는 빵이 아니라 참 그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으며 그리고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갖추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심지어는 그가 너무 미개해서 먹고 마시는 것 이외에 더 이상 자기에게 필요가 없다고 하면 우리는 그 필요를 일깨워 주어서 교육도 받고 문화도 누리고 심지어는 예술도 누릴 수 있는 그 무엇을 가르쳐 주고 그것을 보장해 주는 기도를 우리가 함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첫 번째는 공동체적인 기도, 일차적 지평은 그리스도 안의 지체들입니다. 그래서 먼저 교회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역을, 또 다른 나라를, 보편 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상태를 우리들이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것이 궁극적인 지평으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가 바로 이러한 일용할 양식을 누리면서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넘어가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제가 북한을 두 번 방문했는데 거기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요즘은 좀 나아졌다고 하는데. 93년도 고난의 행군 때 그냥 통계가 200만 명 정도 굶어죽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300만 명이 넘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냥 굶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여기에서 정보를 접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먹고 살지 못해서 강을 건너면서 중국에 가서 인권이 유린당하는 그 상황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어디서 출발 하냐 하면 먹고 사는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먹고 살고 에이브라함 매슬로우의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 욕구의 단계에서 기본적인 것만 충족이 되어도 그런 비극은 안 일어납니다. 강을 건너면서 완전히 보호받을 수 없는 신분의 사람들이 되고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고 짓밟힙니다. 거기서 먹고 사는 문제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교육을 받고 문화를 누리고 참 인간다운 존엄성을 향유할 수 있는 그런 틀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도록 만들려고 기독교가 하기 때문에 기독교를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두려움은 어마어마합니다. 특히 무슬림이나 중국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기독교를 무서워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일용할 양식을 해석할 때에 확장해서 해석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혁명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밥을 먹을 때만 하나님 굶주린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라고 하면 안 되고 우리가 교양과 학문을 누리면서 그 빛 아래 살 때 이런 빛이 차단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경찰이나 나라의 법의 보호에 의해서 우리의 신변의 안전이 보장될 때 이런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는 것이 주기도문을 부여받은 공동체의 소명입니다.
자, 2005년 기준으로 유엔 신년 농업 기구에서 굶어죽는 10세 미만의 아동이 5주에 한명입니다.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정상적인 사람으로 자라기가 힘듭니다. 비타민 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한 사람들이 1/3명. 전 세계의 1/7 정도 되는 사람들이 만성 영양실조에 걸려있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전 세계의 부의 80%를 세계 인구 10%가 소비하고 나머지 20%를 가지고 90%가 나누는 것입니다. 영국도 풍족하지만 미국은 더 풍족합니다. 이걸 어떻게 할까 라는 생각이 아침부터 뷔페를 와서 아침에 책 읽는 뷔페에 가면 한국에서 먹는 저녁식사 뷔페 같습니다. 한번 씩 찔러보고 다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같은 작은 나라가 전 세계에서 쓰레기 배출 시스템이 가장 완벽한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음식물 쓰레기로 낭비되는 돈이 1년에 25조입니다. 미국은 얼마나 될까요? 상상이 안 됩니다. 한쪽에서는 이렇게 해야 살아갑니다.
이라크 전쟁을 했습니다. 유가 상승으로 인상된 기름 값이 약 1500억 달러가 소요됐고 전쟁 부상자들의 치료와 재활에 2500억 달러가 소요될 예정이고 전쟁으로서 손실된 전투력 회복에 약 1000억 달러, 한 해 평균 2000억 달러, 그러니까 한 해 평균 200조원 내지 250조원의 청구서를 수십 년 동안 바꾸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어마어마한, 지금도 기업에 이라크 전쟁하면서 첫 번째 의회에 제출한 예산 요청서가 우리나라 돈으로 약 500조였고, 하루에 1조씩 전비를 썼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미국은 전쟁을 수용해야 했지만 그러나 어마어마한 세계의 부가 이런 전쟁에 소모되는 것입니다.
1년에 군비가 2000년 기준으로 7800억 달러입니다. 미국 연방정부 예산이 우리나라 돈으로 2만조 원 정도 됩니다. 그 중에서 군비에 쓰는 것이 현재 1000조 쯤 됩니다. 국방비 2위부터 8위까지 모두 합한 국방비보다 더 많은 국방비를 미국이 쓰고 있습니다. 전 세계 국방비 50%를 쓰고 있습니다. 이 돈이 어느 정도냐 하면 가장 가난한 49개국의 부채를 완전 탕감해 줄 수 있습니다. 전 세계 빈민촌이 퇴치되고 에이즈 치료요법과 예방주사를 보급할 수 있고, 이 중에 하나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양실조와 기아를 퇴치, 빈곤층을 보호하고 난민들을 정착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입니다. 우리는 정치가도 아니고 군사전략가도 아니지만 어쨌든지 간에 뭔가 부가 인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부가 전 세계의 사람들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데 안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다운 삶을 살게 하는데 어마어마하게 돈이 드냐,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적은 액수의 돈이 듭니다. 그럼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총생산이 지금 부족한 것 아닙니까. 근데 사실은 부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풍족히 주셨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 세계가 가지고 있는 농업 시세를 풀가동 하면 1년에 120조의 인구가 먹고 쓸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신년 파동이 일어나는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전 세계 인구를 500억 예상하고 밀을 다 뿌려도 먹고살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냐. 정교하게 예측을 해서 식량 가격이 어떻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보면서 농사짓는 양을 자신이 조절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어마어마하게 곡식을 사서 저장합니다. 커다란 항구에 가보면 유통시스템이 있는데 그것이 액체로 되어있는 기름 같은 것을 보관하는 창고, 그레인을 보관하는 창고, 물건을 하적해서 보관하는 창고, 이런 것들이 되어있습니다. 거기에 고깔 같은 통에 곡식을 잔뜩 넣어서 보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값이 오르기를 기대합니다. 매점매석을 통해서. 이런 식으로 해서 국제의 곡물 가격을 조작하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끔 이런 것들을 투기자본 세력들이 들어와서 합니다. 그래서 투자 상품 중에서 곡물투자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정상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어마어마한 자본을 들여와서 매점매석을 하거나 가격조정을 하거나 하면서 이 쌀값, 밀 값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조정하는 것입니다. 다 싣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가 뭐냐 하면 결국은 이러한 것들을 기도를 하나님이 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공기를 계속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원래 있는 거니까 감사할 줄 모릅니다. 숨 쉬게 된 것을 감사하게 된 사람들은 폐질환을 앓아본 사람들이 아니면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한국에만 공기가 있는 줄 알았는데 영국에도 공기가 있어서, 할렐루야, 이런 사람 별로 없습니다.
양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타락하면서 탐욕들이 움직이면서 양식들이 수시로 한쪽으로 이동하면서 한쪽은 굶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같은데 어마어마한 구호단체들이 갖다 퍼붓는데 골고루 잘 배분이 안 되고 집권자들 혹은 권력자들이 그것을 받아서 팔아서 현금으로 바꿔서 착복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갖다 곡물을 부어도 그 곡물을 다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퍼부었는데 결국은 계속해서 아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부패한 정권이 있는 상황 속에서는 국제적인 구호도 힘을 못쓰는 것입니다.
또 어떤 문제가 나오냐 하면 사람들이 고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지금 식량난의 주원인이 무엇이냐 하면 식량이 적게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식량난의 주범이 가축입니다. 1kg의 고기를 얻기 위해서 12kg의 곡물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부유한 나라의 사람들이 육류를 과도히 소비하기 위해서 그 수요를 대기 위해서 전 세계에 골고루 배포되어야 할 식량이 소, 돼지, 이런 것들이 먹어치웁니다. 결국은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될 것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 이제는 일용할 양식과 관련한 세 가지 해석을 하게 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먹고 살면 되는 것인가. 생존을 위한 음식이라면 이렇게 식당이 다양할 이유도 없고 고민할 필요도 없고 생존을 위해서 약을 먹는 기분으로 그냥 밥을 먹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질 수 있는가. 극단적 금욕주의, 극단적 방탕주의는 성경적인 입장이 아닙니다.
극단적 금욕주의는 음식에서 누리는 즐거움 자체를 정죄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아시시의 프란시스입니다. 이 사람은 식탁이 나오면 먼저 그 식탁 위에 재를 뿌립니다. 모든 음식의 맛을 재로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과연 정말 올바른 태도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굉장히 지지받던 때도 있습니다.
극단적 금욕주의에서는 그래서 이런 것들을 굉장히 죄악시 했습니다. 옛날에 사람들이 음식을 두고 평가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라틴어인데 ‘민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무 많이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에 대한 탐심이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양적인 탐심과 맛에 대한 탐욕입니다. 이것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막 먹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계속 불어나서 살은 고기를 부르고 기름은 지방을 부릅니다. 불어난 몸집은 더 많은 양의 음식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 스스로 절제를 못할 때 이것이 심각한 비만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너무 많이 먹는 것을 ‘민스’라고 합니다. 이런 별명을 다 만들었습니다.
‘아르덴떼르’ 이것은 막 큰 입으로 탐욕스럽게 퍼먹는 것입니다. 누가 안 빼앗아 가니 천천히 먹으면 되는데 미친 듯이 퍼 담아 쑤셔 넣는 것입니다. ‘흡입’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흡입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폭풍자를 써서 폭풍흡입을 하는 것입니다.
‘프로푸로페레’ 이것은 식사 시간이 되어서 밥을 먹어야 하는데 배고프다고 보채서 식사 시간되기 전에 점심을 10시 반쯤 먹는 것입니다. 그럼 당연히 저녁은 4시 반 쯤 먹어야 합니다. 당연히 밤에는 간식을 먹어야 합니다. 밤참을 먹어야 합니다. 배가 빵빵해져서 잠이 드는 것입니다.
‘라우테’ 이것은 맛에 대한 탐심입니다. 비싼 것만 먹는 것입니다. 홍콩에서 아는 사업가 한 사람이 왔는데 한국에 와서, 친합니다. 그래서 이제 좋은 식당에 가서 밥을 사줬습니다. 내 형편에는 자주 가지 못하는 식당입니다. 이 양반이 꼭 음식 값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짜리냐고. 나는 한껏 내가 굉장히 마음을 썼다 그래서 그렇게 가격을 얘기해주면 너무 싼 것입니다. 넷이 앉아서 밥을 먹는데 홍콩에서는 이것을 다 줘도 한 사람도 못 먹는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내가 식사대접 한 것이 초라해 졌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얘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여태까지 먹어본 꽤 비싼 식사가 일본에서 있었는데 열 명이서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3만 불이 나왔답니다. 1인당 3천불. 그렇게 먹은 것을 뭐라고 합니까? 라우테.
한 십여 년 전에 중국에서 없애버렸습니다. 한 식당에서 1인당 4680만 원짜리 식사가 있었습니다. 1인당 4만 불. 무엇이냐 했더니 아홉 가지 코스로 되어있는데 첫 번째 요리가 녹차 한잔과 샤우마이, 만두 두 개가 나오는데 그게 250만원에서 시작했답니다. 마지막에 깜짝 놀랄만한 배 요리가 나오는데 그 요리가 잉어 120마리로 만든 요리라고 합니다. 어떻게 1인분을 120마리나 넣었냐 하니까 잉어의 수염을 떼서 240개를 배즙에 요리를 한 것이라고 합니다. 잉어는 그대로 살아서 돌아다니는데.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한 사람 앞에 5천만 원짜리인데 독일사람 12명이 와서 회식을 했답니다. 6억. 이런 것을 라우테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수입이 얼마 까지가 라우테냐, 그것은 이제 본인이 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스투디오제’ 스터디가 여기서 나옵니다. 연구하는 것입니다. 저거 딱 가지고 맛있어 보이는 것만 골라서 먹는 것입니다. 해당이 많이 됩니다.
어거스틴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거스틴도 음식에 대해서는 상당히 금욕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고백록 제 5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먹고 마시는 목적은 건강에 있지만 위험스러운 낙이 시녀처럼 뒤따르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탐식의 낙이 끌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건강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자 할 때에도 실제로는 그 음식의 낙이 동기의 목덜미를 잡습니다. 맛과 낙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건강에 유익한 음식이 대체로 유쾌한 맛은 없지요’ 일평생 그렇게 아까 얘기했던 민스, 아르덴떼르, 프로페레, 프리프로페레, 스투디오제, 이런 욕망과 싸우는 투쟁을 고백록에서 그리고 있습니다.
교부 에바그리우스도 탐심이야말로 모든 사악한 마음의 자양분이며 지상의 활동을 오염시키는 주범이다. 그래서 음식에 대한 즐거움을 영구히 포기할 것을 권합니다.
극단적 방탕주의가 있습니다. 이것은 반대입니다. 사실 이런 것들을 강조하면서 수도사들이 이런 것들을 강조했지만 실제로 그 당시 로마 교회에서 중세시대의 사람들은 오히려 극단적 방탕주의였습니다.
요리사 레이몽 올리베 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게스트로미니 역사에 대해 쓰면서 프랑스 식탁에 대해서 썼는데 가장이 초대하는 만찬에는 네다섯 명이고 가장의 부인, 가족, 친척이 함께했다. 5시에 시작되어서 8시에 끝난다. 가족들이 물러가고 여자, 악사, 소년들을 불러들인다. U자형의 중앙에 다양한 요리로 장식한 테이블이 옮겨진다. 접시를 여러 번 쌓아 만들었는데 한 차례 먹고 나면 새로운 요리를 실은 테이블이 운반된다.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2부는 식사를 하면서 파티가 바뀌게 된다. 식사가 끝날 쯤에 여자들이 옷을 벗기 시작한다. 박카스 앞에 건배하며 아프로디테에게 경배한다. 이것은 고대 로마 시대의 식탁을 그린 장면입니다. 그래서 하몽하몽 같은 영화에 보면 식생활이 성과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는가 알 수 있고 17세기 18세기 그림을 보면 이렇게 식탁 같은 것들이 나타나면서 실제로 유곽에서 몸을 파는 여자들이 벌거벗은 채로 등장합니다. 식탁에 있는 그림이 아니라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음식에 대한 방탕과 성적인 무절제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취덕 이라고 하는 제가 좋아하는 집입니다. 북경에 있는 생긴지 100년이 넘는 유명한 북경오리 전문점입니다. 제가 한 15년 전에 갔을 때 1억 마리가 팔렸다고 하는데 1억이라는 숫자가 사람이 평생 세도 못 세는 숫자인거 아시죠. 청나라 때부터 팔기 시작했습니다. 이 전취덕에 얽힌 어두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오리를 이 사람들이 껍질만 먹거든요. 그런데 양질의 오리를 만들기 위해서 요만한 오리 병아리를 움직일 수 없는 곳에서 기르는 것입니다. 운동을 못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살 사이의 지방, 지방 사이의 살, 이렇게 섞이는 것입니다. 운동을 못하니까 비만이 걸려서. 그렇게 해서 아주 살 사이사이의 지방이 배어있는 맛있는 고기를 만들어서 죽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냐 하면 음식의 맛을 극단적으로 즐기려는 방탕주의에는 반드시 비인간적인 것이 들어옵니다. 우리 옛날에 어렸을 때 개를 잡을 때 목매달아서 죽이거나 그러진 않고 때려서 죽였습니다. 아드레날린이 막 고통을 받으면서 쏟아져 나와서 살 사이사이에 스며들면서 고기를 맛있게 한다고 하는 속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이제 거위 간이라든지 이런 것들, 원숭이 골이라든지, 그런 것들 속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성경적인 입장은 무엇이냐 하면 이런 양쪽 극단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음식의 음탕함을 악인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묘사합니다. 에드워즈가 경건한 사람이 레자루션이라고 하는 자신의 결심문 속에서 먹고 마시는, 결심문을 한 100여개 썼는데 그 중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8개가 나왔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가장 엄격한 절제를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최선을 다해 행동했는지에 대해 묻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자기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후회를 굉장히 많이 합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공감하시죠?
‘막상 과식을 하게 되면 3분도 못되어서 잘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도 충분한 음식을 섭취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식탐과 감정이 예전 그대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일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밀레의 만족입니다. 이것은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이런 것입니다. 음식에 만약에 맛을 다 제거해 버리면 음식의 맛을 하나님이 다양하게 주시고 요리의 지혜를 주신 이유는 그것을 익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음식을 먹게 하여 우리의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음식도 먹어야 하지만 때로는 냉정하게 내 몸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내 몸에 필요한 것을 내가 좋아하게 만들고 내 몸에 좋지 않은 것을 내가 스스로 싫어하는 성향을 갖도록 자기를 훈련시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칼빈은 이런 음식의 맛을 즐기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자기를 잃어버릴 정도로 그런 탐욕에 빠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한국에서 텔레비전을 보기가 싫습니다. 틀면 맨날 노래하는 것 아니면 요리 만들어서 먹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남자가 기본적으로 요리를 해서 여자를 즐겁게 해줄 수 없으면 결혼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아 물론 워낙 능력이 뛰어나면 괜찮지만. 굉장히 중요한 조건입니다. 예전에 남자가 뭘 하는 것을 시시하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굉장한 매력으로 인식됩니다.
결국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할 때에 그것은 노동을 통한 기도의 응답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노동의 능력을 잃어버리거나 전쟁과 기근과 같은 재난으로 인해서 도저히 자기의 먹을 양식을 스스로 공급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지만 가장 좋은 도움은 그들 스스로 사회적인 여건을 개선해서 자기가 노동함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원들을 이 땅에서 얻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하고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게 하고 그런 세상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가는 과정입니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영혼의 활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노동을 하면서 그 자체 안에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복지의 문제 같은 것도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이 과도하게 이런 복지를 의존하면서 노동의 동기를 상실하게 되면 사람을 정신적으로 폐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굉장히 선별적으로 국가가 생각하고 정책들을 추진해야 합니다. 사회가 아주 무기력하게 됩니다.
그런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은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하루에 세 번씩 식탁을 받을 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내게 주어진 음식이구나, 라는 감사를 하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용할 양식에 대한 염려,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하나님께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적게는 우리 가족, 교회, 이 세상에 있는 교회, 모든 인류에게 이런 일용할 양식이 주어져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 가는 존엄성을 갖춘 존재로 대접받도록 그런 사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들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보다 더 큰 보편교회와 세계 전체를 향한 염려, 그런 배려 속에서 살아가는 것,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선교적인 마인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