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
“당신들을 나를 헤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
인간은 누구든지 편안하고 좋은 환경을 원하지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시련 속에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는 불신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사랑받고 싶어 하고 선대 받고 싶어 하고 돌봄을 받고 싶어 하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그가 모든 것이 편안한 환경에서 행복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사람은 우리에게 알려지기는 정말 훌륭한 신앙의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고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강력하게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람이 둘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요셉이었고, 한 사람은 다윗 이었습니다. 요셉은 어떻게 보면 다윗과 유사한 점이 참 많았습니다. 고난을 참 많이 당한 것도 그랬고, 신앙으로 산 것도 그랬고, 그리고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도 또 그랬습니다. 아무튼 이 요셉은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산 사람이었고, 다윗은 그래도 생애를 보면서 한두 번 혹은 두세 번 결정적인 그 끔찍한 죄들을 저지르게 되지만 그러나 이 요셉에게서는 거의 그런 것들을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온전한 삶을 살았다고 기록에 나옵니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요셉은 아주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어서 당시에 애굽의 국무총리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낸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앙으로 살아서 하나님 앞에 큰 축복을 받은 사람 할 때에 대표적으로 떠올리는 사람이 아브라함과 함께 이 요셉을 떠올리지 않습니까. 이렇게 우리에게 신앙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하나님에게 큰 축복을 받고 하나님을 믿고 높은 지위도 얻게 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내막을 보면 이 요셉의 살아온 길은 그야말로 가시밭길과 같은 그런 생애였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집에 태어나서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형들의 시기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게 형들의 시기를 받으면서 자라다가 결국은 여러분들이 아는 대로 시기심이 극도에 달한 형들이 이 요셉을 애굽의 장사꾼에게 팔아버립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팔려 와서 그래서 보디발이라고 하는 요즘으로 말하면 경호실장이나 당시의 수비대장 정도 되는 그런 사람의 집에서 이제 종으로 애굽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그는 정말 피나는 가시밭길과 같은 인생길을 걸어왔습니다. 채색 옷을 입고 그래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을 아버지의 집에서 사랑받는 아들로서의 안일했던 삶은 끝나고 그리고 치열하게 고달픈 애굽에서의 종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 이후로 그렇게 종 생활을 하다가 잘했습니다. 집안의 모든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그만 사랑해서는 안 될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였습니다. 그 유혹을 뿌리치고 뛰쳐나온 잘못으로 그는 옥 속에 갇히게 되고 거기에서도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었지만 도움을 받지 못하고 다시 긴 세월을 보내고 드디어 바로 앞에 서서 그래서 공직에 취임하게 되고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애굽의 국무총리로서의 그 화려한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넘어왔지만 그 요셉의 생애는 정말 가시밭길과 같은 생애였습니다. 얼마나 가시밭길과 같은 생애를 걸어왔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가시밭길과 같은 고단한 생애를 걸어왔는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후에도 그 고통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처음 낳았을 때에 그 아이의 이름을 므낫세 라고 지었는데 그 뜻은 ‘잊고 싶다’는 의미였습니다.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그렇게 고난으로 가득 찬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물론 요셉이 그 고난의 길에 혼자 걸어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받은 고난만 큰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받은 위로도 참 컸습니다. 그러나 하여튼 잊고 싶은 날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그렇습니다. 얼마 안 되는 인생길을 걸어왔지만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고생하며 산 날도 있었지만 하나님과 함께 고생하며 사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생스러웠던 날들에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위로도 있었고, 또 그 고난의 검은 그림자가 배경에 있었기 때문에 거미줄만한 신앙이 하나님 앞에 빛났고, 그 검은 시련의 고통을 배경으로 하나님의 섭리의 씨줄과 날줄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도 참 회상하기가 싫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렇게 그 장소에 가면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옛날에 전도사로 있던 그 때에 생활하던 동네의 어귀에만 들어서도 그렇게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그 쪼들리는 경제적인 환경 속에서 그렇게 고생하며 다니던 신학교에 들어가도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거기에서 만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오늘날 나를 만들었지만 그러나 하여튼 그 벌써 20년 25년 지난 일 인데도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그 가시밭길과 같은 고통들이 떠오릅니다. 저는 그래서 이 요셉이 아들을 낳았을 때에 그 아이의 이름을 므낫세 라고 지었던 것에 대해서 정말 성경을 읽으면서 무릎을 쳤습니다. “어 정말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이 요셉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요셉의 생애를 보더라도 이 가시밭길과 같은 헤치면서 왔기 때문에 백합과 같이 그 향기로운 신앙의 그 향기를 풍길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이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은 그냥 우리에게 원망과 상처만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고난을 잘 견디면 그 고난은 마치 그 향기로운 백합화에 있어서 가시밭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가시밭에 찔리면서 백합화가 향기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처음에 “가시밭에 백합화가 무슨 상관이 있나?”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꽃의 향기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시에 찔리는 것과 같은 그런 공격이 있게 되면 더 많은 향기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면 여러분 허브 알죠. 냄새를 맡을 때는 항상 때려야합니다. 탁탁 치면 항기가 쫙 올라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정말 향기로운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를 고난의 계곡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정말 순결하고 아름다운 성도들은 그 고난 속에서 씻겨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시련 속에서 닦여진 사람입니다. 흐르는 시냇물이 돌에 부딪히지 않고는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의 인격에도 아름다운 노랫가락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뭐냐면 그러면 도대체 이 요셉은 어떻게 자신에게 당하는 고난을 어떻게 감당했기에 그렇게 그 고난이 그를 향기롭게 만들고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첫 째는 이 사람이 고난 속에서 이렇게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뭐냐면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확신이 없이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때에 믿음이 생기는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고는 믿음이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요셉은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래서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환경이 이 사람은 이렇게 만든 측면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사랑을 받았다기보다는 야곱의 편협한 성격이 요셉을 편애하게 만들었죠. 그렇게 살았더라면 그 형제들로부터 원망과 미움을 한 몸에 받고, 시기 속에서 살다가 불화한 가정에서 필부로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엄마 아빠 곁을 떠났습니다. 이제 이 애굽에는 아무 살붙이도 없었고, 그리고 누가 자기를 도와줄 사도도 없었습니다. 그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겹치면 겹칠수록 이 요셉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도 쌓여갔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맨 처음 끌려가서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 때나 옥 속에 갇혔을 때에나 혹은 바로의 집에 지극히 높은 자가 되어서 왕 이외에 누구도 자신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없어서 왕을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릴 때에도 이 사람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돈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하고 지위가 높기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해도 좋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일생을 살아온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떠한 환경에 있든지 간에 그 하나님을 그렇게 전심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사는 그런 사람이 될 때에 그 사람이 바로 고난 속에서 향기로운 신앙의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주님이 높여주시는 사람으로 그 고난의 파도도 활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궁금한 것은 도대체 그 믿음이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라고 했지만 구체적으로 그 믿음이 하나님의 무엇을 믿는 믿음이었는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섭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있고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으면 반드시 심판을 받고 그리고 지옥에 가게 됩니다. 시험해볼 필요가 없이 객관적인 사실이고 하나님의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숨김없이 성경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계시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 살아보지 않아도 성경을 읽으면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잘 깨달으면 세상을 사는 이치, 인생을 사는 이치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은 섭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요셉이 왜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에까지 끌려와 종노릇을 하게끔 하나님이 내버려두셨을까? 거기까지만 관찰하면 아무런 설명이 안 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그렇게 미움을 받을 정도로 잘못한 것도 없고, 그리고 끌려왔으면 끌려와서 이 애굽이라고 하는 먼 나라에까지 끌려와서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또 잘 봉사를 해서 그 집안의 총무가 되었는데 왜 그 여자가 자기를 좋아했는지 그리고 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는데 감옥에 가야 되는지 이것은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정한 뜻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살아봐야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구도 미리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겠다.” 아니면 “내가 너를 참 크고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 그런 것은 하나님이 미리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는 것을 보여주었잖아요. 형들이 곡식 단이 자기의 곡식 단에 절하는 것을 보여주셨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형들도 알 수 없었고, 요셉도 분명하게 알 수 없습니다. 희미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렇게 희미하게만 보여주실까? 아미 툭 터놓고 “야, 네가 이렇게 끌려가면 이렇게 되거든, 종살이 하고 마당이나 쓸 터인데 그러다가 네가 계속 승진할거야. 총무가 될 거거든, 그 때에 이상한 여가 하나가 와서 너를 유혹할 터인데 너는 믿음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감옥에 가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모년 모월 모시에 네가 국무총리가 된다.” 왜 이렇게 안 가르쳐 주실까요? 그러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사는지 아니면 마지막 좋은 결과를 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모든 것을 이렇게 버선목을 뒤집듯이 모두 눈에 보이고 아는 것들을 믿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잘 모르지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들고 그분의 신실하심 때문에 가끔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도 전적으로 믿는 그런 종류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성경이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런 섭리를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애굽에 노예로 끌려왔을 때도 이것이 끝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니까 하나님을 의뢰할 수 있었고, 감옥에 들어가도 이것이 끝이 아니다. 라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을 점점 더 온전히 의뢰하는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어떠한 결과가 왔습니까? 이 요셉의 고백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당신들의 그 악을 선으로 갚으셨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일들을 만나게 하셨는데 그 만나는 모든 일들이 믿음으로 사는 요셉에게 항상 달콤하고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죠? 믿음으로 사는 사람도 아픈 것은 아픈 것입니다. 다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것을 감사함으로 이길 뿐이지 아픈 것은 아픈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도 자기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도 고난을 받는 일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살면서 요셉에게 많은 괴로움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형들이 준 것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고통을 그런데 하나님이 그 고통을 사용하셔서 결국은 섭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고통을 사용하셔서 이 요셉으로 하여금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인 이 섭리가 찬란하게 드러나게 하는데 기여하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저는 뭐 그런 것 잘 하지 못합니다만, 당구 하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가끔 보면 공을 이렇게 놓고 막대기로 치지 않습니까. 여기에 있는 공을 맞추고 싶은데 공을 이쪽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저쪽으로 보냅니다. 탁 보내니까 저쪽 모서리를 맞고 튕겨 나온 공이 여기를 맞게 되듯이 마찬가지로 형들이 요셉을 팔았을 때 그것은 요셉에게 있어서 피눈물 나는 고통이었고, 정말 죽을 것 같은 위협이었지만 죽음에 가까운 고통이었지만 형들이 그렇게 자기를 판 뒤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살아오는 동안에 이 요셉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점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셉의 마음속에는 그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섭리가 한 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 생겨나니까 형들을 용서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왜? 개인적으로 자기를 팔았을 때 같으면 그 형들을 갈아 마셔도 시원하지 않았을 터인데 그런데 이 요셉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신앙으로 살아오는 동안에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씩 드러나게 되는데 그 섭리 속에서 이 요셉은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형들이 나를 팔았고, 그리고 그것은 형들이 잘못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잘못을 사용하셔서 그래서 나에게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선한 것으로 갚으셨구나.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 살렸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가족도 살리고 그 긴 흉년 속에서 온 천하의 모든 사람들을 애굽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부지하게 만들어주셨던 사실을 요셉을 여기에서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시냇물처럼 좁던 마음이 넓은 마음이 되어서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지난 한 해도 우리를 지켜주시고 날마다 보호해주셨지만 금년에도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금년 한 해에는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고 행복한 일만 일어나게 해 달라고 우리서로에게 축복하고 빌지만 그러나 금년에도 우리는 어려운 일도 좀 있을 것이고 고통스러운 일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이것을 사용하셔서 섭리 가운데 이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지금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더 아름다운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서 이것들을 사용하신다면 우리는 마다 그것을 달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