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편 107편은 106편과 함께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에 하나님이 베푸셨던 구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광야와 같은 바벨론 포로 생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한 것에 대한 심판과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속량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언약의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광야와 같았던 고통 받던 생활 속에서 겪은 모든 경험들을 회고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송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읽은 이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많은 고통이 그들의 죄와 불순종 때문이었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II. 신자들이 고통 받을 때
신자들이 이 세상을 지나면서 고통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이 세상의 불완전함 때문에 그리고 또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서 믿음의 위대한 조상들의 훌륭한 신앙에 대해 말하면서 성경은 그들이 이 세상을 지날 때에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칭함을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떠나온 육신의 고향보다도 더 그리워하는 영혼의 본향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약 시대의 위대한 믿음의 증인들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큰 축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만 미래에만 있을 바라보기만 했던 영혼의 본향을 신약 시대에서는 이미 그것을 일부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의 은혜를 통해 이미 그 천국의 실제가 우리 속에 침투해 들어왔고 그것들을 우리들은 누리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A. 신자들의 고통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런 고통들이 우리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를 너무나 잘 경험합니다. 오늘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와 같은 포로 생활 속에서 고통을 받았던 이유가 그들의 불순종과 죄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못 박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고통을 받고 시련을 당하게 된 것이 불순종과 죄 때문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할 때 얼핏 우리를 살펴본 다음에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우리는 욥처럼 고난을 받는다고 손쉽게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설령 하나님이 보실 때에 우리에게 일체의 잘못이 없고 애매히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 고난 속에서 주님 앞에 엎드려져 이 모든 고난이 나의 잘못 때문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본다면 그 고난도 우리에게 무엇인가 주는 교훈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마땅히 우리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이 고난은 나의 순결함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라고 떳떳하게 주님 앞에 고백을 했다가 주님이 “아니다. 이 고난은 너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신앙의 자세를 바르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사는 행복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사는 거룩함입니다. 우리의 행복과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 참다운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룩함의 펼침이 행복이고 그 다음에 행복을 다시 접으면 그것이 거룩함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해도 전혀 잘못된 말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의 신앙은 고통을 당할 때에 그 고통에 대한 자세가 어떠냐에 따라서 신앙의 유무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고통을 당할 때에 그것을 괴로워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보일 수 있는 우리의 반응의 전부라고 하면 그것은 동물적인 반응이지 신앙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피하려 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짐승도 하는 것이고, 하물며 미말의 작은 벌레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인간의 놀라운 특징은 고통 속에서 그 고통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의미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고 신자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샤르트르라는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는 개미 인생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길거리를 걸어가면서 같은 눈높이 속에서 살면 인간들이 대단해 보이고 인간사가 엄청난 일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높은 빌딩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거기에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모습이 참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까만 점 같은 머리들이 이리 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이고 그 깨알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사연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 깨알 같은 개미 인간들이 때로는 서로 미워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상처주고 상처를 받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다가 어느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만약에 우리가 보다 높은 하늘에서 이 세상의 인간사를 내려다본다면 그 의미는 이 땅에서 바라보는 의미와 얼마나 달라 보일지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살아있다는 인간의 인생의 의미는 죽음의 빛으로 비추어 볼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무엇인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상가집에서 얻는 교훈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을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이 누구이고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자기도 알게 되는 경우가 아주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딪치는 인생사의 의미를 그 인생살이 속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자신을 탈출해 그래서 자신이 마치 남인 것처럼 객관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보면서 우리는 그 고통의 의미를 아로 새기게 될 때에 그 고통에도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사물들의 질서가 내 원하는 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깊은 고통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심하고 크면 클수록 우리는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이 세상에서 다시 뜨고 싶지 않은 절망감 속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인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차피 불완전한 이 세상에 살고 있고 그리고 이 세상이 우리가 마지막에 도달하게 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적절히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영원한 하늘나라의 본향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하신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날은 바다가 평안해서 배가 덜 흔들리고 어떤 날은 풍랑과 폭풍이 불어서 배가 뒤집힐 듯이 요동하는 차이는 있지만 흔들림이 없이 우리의 인생을 항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우리 인간이 평온한 중에 있을 때는 역경을 당할까봐 두려워하고 역경을 당할 때는 그 역경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니 산다는 것이 시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시련과 고난이 일어날 때 그리고 고통이 발생할 때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고통스러운 풍랑을 통해서 자기 사랑의 끈끈이에 묶여 있어서 자신을 자신 바깥에서 볼 수 없었던 우리들이 자신을 이탈하여 바깥에서 자신의 존재를 바라보며 우리의 인생은 올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삶은 올바른 인생의 길을 항해하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볼 기회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것들을 통해서만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빠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와 은혜를 찬송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고통의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을 통해서 그 의미를 물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의 태도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과 꼭 같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에 수많은 고통을 만났습니다. 속에 근심, 밖에 걱정, 저녁에 눈 감으면 아침에는 뜨고 싶지 않은 시련을 당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인생에서 내가 너무나 순결하게 살았기 때문에 당한 고난은 거의 없다고 확신합니다. 대부분이 나의 부족, 나의 불순종, 나의 죄 때문이었고 때에 따라서는 나의 죄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큰 시련을 당할 때도 있긴 하지만 그러나 캐고 들어가 보면 그것은 모두 나 자신의 불완전함과 순수하지 못함 때문에 당하게 된 당연한 고통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고통을 당할 때에 거기서 건져주신 것도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찬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 여러분은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그 고통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성숙하게 반응하면서 정말 하나님이 나를 향해 품고 계시는 거룩한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B. 신자들의 부르짖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고통을 당할 때에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간절히 마음을 쏟아 기도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기도할 때 마음을 쏟아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불러 일으켜지는 열정이 아니라 우리가 고민하고 생각하는 바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바가 일치할 때 거기에서 우리의 마음에 불붙는 열정이 있고 성령의 역사가 있고 우리의 마음에 쏟아 부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이 고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맞출 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보이는 방법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계시를 통해서 보이시고 하나는 섭리를 통해서 보이십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가신 의지의 공표입니다. “나의 뜻은 이러이러하다.”라고 하는 것을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먼저 선포하고 표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하고 함으로써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더 탁월한 이해를 갖게 되고 계시에 충만한 분량에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로만 당신의 뜻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섭리로서 당신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계시는 명백하게 공표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지만 섭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미리 보여주시지를 않고 마치 두루마리를 하나하나 펼치면서 한 폭의 커다란 그림이 무엇인지를 마지막에 다 펼쳤을 때에 알게 되듯이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의 인생길을 걸어가고 난 후에야 먼 후일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는 공표된 하나님의 의지이고 섭리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이 펼치듯이 하나하나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는 그런 나쁜 일을 당할 만큼 그렇게 많이 잘못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형들의 시기심으로 인해서 팔렸고, 그래서 그는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끌려갔고 거기서도 하나님께 하듯이 주인의 집에 충성했지만 모함을 받아서 왕의 죄수들이 갇히는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과정들이 왜 이렇게 겹쳐서 불행이 일어나는지를 우리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생애를 다 읽고 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요셉의 그 불행한 고통의 상황 속에서는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큰 뜻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요셉과 같은 지혜로운 사람을 애굽에 보내어 그 7년 후에 있을 흉년의 때에 온 세상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함이었고, 또 거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어 구원의 씨를 만들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굳게 붙들어야 할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이 고통을 사용하셔서 선을 우리에게 베푸시고 마지막 그 결과도 선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앞이 보이지 않는 우리의 인생의 길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확신하며 그런 믿음을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 때에 결과도 선하게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살 것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산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오늘의 일의 결과가 나중에 어떻게 나타날지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이요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가질 때에 고통 중에서 만나는 괴로움은 우리의 절망의 원인이 되기보다는 기도해야 할 이유가 되어서 승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굳어져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았을 우리의 마음을 때리실 때에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고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간절한 심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 부르짖는 대상이 여호와라고 말합니다. 이 여호와는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적인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단지 하늘에 계시고 높고 위대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을 당신과 언약 관계 속으로 불러들여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신 우리 하나님 여호와시라는 사실을 믿으며 그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르짖다’라고 번역된 ‘자아크’(q['z)라는 히브리 동사는 어려움 속에서 뭔가 구조를 바라는 간절한 외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넉넉하게 살고 고통이 없을 때에 모든 일들은 형통하고 우리의 마음은 갈갈이 찢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산산이 조각나 사물의 모든 표상들이 마치 다 깨진 거울에 사물을 비췄을 때 그 사물이 무엇인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듯이 뭔가 마음에 비치긴 비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당할 때에 우리는 물길을 따라 빠르게 흐르는 시냇물처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흐르게 되고 그 속에서 은혜의 작용들은 일어나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서 우리의 조각났던 마음들이 하나로 모아지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왜 나를 이 고통가운데 두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심을 따라서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을 마음을 갖게 되고 이 모든 나의 고통의 나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망가진 나를 고쳐주시기 전에는 내 인생에 어떠한 형통함도 없다는 것에 대해서 깊은 인식을 갖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범죄하며 살아왔던 자신에 대해서 후회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III. 말씀으로 구원하심
A. 말씀을 보내심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들이 간절히 부르짖게 만들어 주십니다. 믿음은 이렇게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실 때 기도로 승화시켜 간곡히 부르짖게 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말씀으로 구원하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 도다”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보내셨다’ 히브리어 성경에 ‘샬라흐 데바로’(יִשְׁלַח דְּבָרֹו)라고 되어 있는데 ‘샬라흐’(שָׁלַח)라는 단어는 심부름꾼을 파송하는 것, 사자를 대신 보내는 것, 혹은 심지어 활에다가 화살을 먹여 시위를 잡아당겨 쏘는 것도 ‘샬라흐’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것처럼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듯이 파송하셔서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할 때에 믿음이 없는 우리는 빨리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부르짖는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었던 우리의 불순종과 죄의 뿌리를 고치려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시련을 만날 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보다도 더 급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공동체 전체에게 말씀하시기도 하고 또 나 개인에게도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에 하나님이 굳어졌던 우리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에 고통을 주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 받는 시련 속에서 약해진 마음을 가질 때에 우리의 부드러운 지성의 말을 건네시고 우리의 마음을 바꿀 수 있도록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 그 자체에 신비한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을 때에 우리가 반성하고 우리 자신의 마음을 고쳐먹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당할 때에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마음이 되도록 우리를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 중에 열렬히 기도하는 것보다 급한 것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지성의 깨달음을 가지고 내가 고통을 받을 때에 고통 받는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음주 운전을 하고 가던 어떤 사람이 백미러를 통해서 보니까 경찰이 계속 오토바이를 타고 따라오면서 사이렌을 불더랍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그 경찰이 자기를 붙들면 이제 크게 처벌을 받겠다고 생각을 하고 비포장 지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사정없이 엑셀을 밟았더니 계기판이 180km까지 올라가더랍니다. ‘야 정말 차가 좋구나. 비포장도로에서 180km를 달리다니.’ 그런데 옆에 쳐다보니까 이 교통순경이 얼마나 빨리 따라왔는지 180km 달리는 자기 차 옆에 계속 따라오면서 사이렌을 울리더랍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진흙에 빠져서 바퀴가 헛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고통을 당할 때에 열렬히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기도가 아니면 진실로 열렬해질 수 없고, 순간적으로 열렬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래 지속될 수 없고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는 그런 종류의 열렬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기도보다 급한 것은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말씀을 맞이하고 그 말씀에 빛으로 비추어서 내가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고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이 올 때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 앞에 단을 쌓았고 고난을 당할 때에 그들은 성경으로 돌아갔고, 폭풍과 같은 시련의 시기를 지날 때에 그 모든 것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으로부터 공급받았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에서도 시인이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고난당한 것이 나에게는 유익입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었는데 이제는 주님의 율례를 지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비추어 보고 그 말씀 속에서 고난당하고 있는 자신의 인생의 이 고통의 의미, 이 고통당하는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들은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었고, 그래서 그 올바른 기도는 그들을 인생의 깊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내는 동력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고통 받는 인생의 상황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맞이하여 구출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오늘 성경은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신 후에 하나님이 우리를 고통에서 건져주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랬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단수로 나오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고통들이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매”라고 나옵니다. “위험한 지경에서 건져내시고”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들의 고통들로부터 구원해 내시고 라고 말합니다.
B. 고통에서 건지심
세상에 있는 자원은 고통의 현상을 일시적으로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심각한 회의를 품었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복이 없을까? 주위에 사람들을 보면 어디에 가든지 인덕이라는 게 있어서 귀인들이 나타나 그를 돕고 은혜를 입게 하고 그래서 복된 삶을 살아가는데 왜 나는 이렇게 박복해서 어디를 가든지 늘 가시 같은 인간들이 있고 때로는 온 사면을 둘러봐도 전부 가시가 되어서 자신을 찌르는가, 아무리 자신의 이성으로 생각해 봐도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사람들이 자기만 미워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우리의 인생살이는 메아리와 같아서 사실 그런 사람들의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한 생각이 맞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아주 나쁜 사람들이 있어서 나의 선의를 곡해하고 오해해서 나에게 악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쩌다가 한 번이지 어떻게 가는 곳마다, 옮기는 직장마다, 하는 사업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런 사람을 만나겠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인가 망가진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 세상의 자원을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까칠해서 사람들에게 늘 가시와 같은 것을 당하는데 어느 날 출세를 해서 두 계급, 세 계급 승진을 했습니다. 그러면 가시가 없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돌아서서는 죽일 놈이라고 욕할지 모르지만 그 앞에서는 순종할 것입니다. 도움이 되니까 그렇습니다.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고, 지위가 너무 높고, 엄청난 권력을 지니고 있고, 무시할 수 없는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 그러면 고통을 경감시켜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망가진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를 믿어서 권사님이 되셨는데 한 때 영화배우로 잘 나가던 아주 예쁜 여배우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정말 미모의 탤런트로서 결혼을 했습니다. 부잣집에 시집갔습니다. 얼마 안 살고 깨지고 이혼했습니다. 자기의 이혼을 회고하면서 얘기하기를 망가진 사람 두 사람이 만났는데 어떻게 잘 살 수가 있겠느냐. 그분이 한참 배우로서 잘 나갈 때 누군가 그 사람에게 가서 당신 망가진 인간이야 라고 하면 동의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말씀의 빛으로 옛날의 자신을 비추어 보니까 정말 망가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그런 이웃을 끊임없이 만나고 박복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그 어떤 원인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자기에게 악을 행하거나 까칠하게 대하는 사람을 매번 혼내서 기를 살려주시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고통을 당하면서라도 “네 자신을 들여다보라. 망가진 네가 보이지 않느냐, 그러니 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침을 받아 새사람이 되거라.”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들이 불순종하고 망가진 채 인생을 살 때 만나게 되는 수많은 고통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놀라운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데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는데 그런 삶을 안살아. 그런데도 내버려 두면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최근에 어떤 사람이 글을 썼는데 고아였습니다. 결국 일평생 고아로 살다가 마지막에는 훌륭하게 자수성가해서 이제 고아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가 쓴 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렸을 때 가장 부러운 것이 아빠한테 혼나는 아이들이었답니다. 한번만 나를 그렇게 회초리질을 하면서 혼을 내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게 바로 아버지 없이 고아로 유리하며 살던 어린 시절에 대한 상처로 가득 찬 기억이었습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망가진 채로 막 살아도 하나님이 그냥 행복하게 내버려 두시면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한 길로 인도하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으시니까 여러분이 불순종할 때 하나님이 고통을 주시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잘못된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아픔을 겪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들이 믿었던 지난날들을 모두 돌아보면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고백했던 그때가 사실은 가장 행복했던 때입니다.
그래서 보면 이 세상의 단체와 교회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단체는 다 자기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나 같은 사람이 여기에 있는 것이 이 교회 전체에 누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는 것보다 더 뛰어난 덕목이 뭐냐 하면 겸손함입니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이 교회에 접붙여져 한 몸으로 있는 것 자체가 이 교회 전체에 끊임없이 누를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있을 때에 비로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한 지체가 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교회가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면서 그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으면서 하나님 앞에 한 걸음, 한 걸음 온전한 존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낮아지는 겸비한 마음이 없을 때에 교회는 끊임없는 분쟁에 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말씀을 통해서 구원하시는 역사는 근본을 고치는 역사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인간의 본성을 갖도록 우리의 옛 본성을 고쳐서 새 인생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거나 뼈아픈 시련을 당할 때에 이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죄를 짓고 불순종했다고 할지라도 죄에 대해서는 진노하시지만 당신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자녀들의 잘못에 대해서 복수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를 뱃속으로 낳아준 부모도 때로는 화가 나면 자기 분에 못 이겨서 아이들을 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커다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전에라도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새끼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피조물입니다. 그 아이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그런 식으로 폭행할 수 있는 권리를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학교에 있는 선생님들이 막 자기 분에 못 이겨서 개 패듯이 패는데 요즘에는 어림없지만 우리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그것은 정말 비인간적인 거고 맞은 학생들이 받은 손해보다 더 큰 손해를 입게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끊임없는 인간성의 파괴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십니다.
IV. 적용과 결론
그가 우리를 아프게 때리시는 것은 우리를 어루만지시기 위함이고 우리가 미워서라기보다도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의 마음을 고쳐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기회입니다. 신자의 성숙함은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의 의미를 물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교회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온 우리의 인생길 전체가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려고 하고 주님의 은혜로부터 놓임을 받으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당신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드시고 우리가 불순종하고 주님을 멀리 떠날 때조차도 하나님은 가까이 계셔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당신의 뜻을 따르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붙들고 인도해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하시렵니까? 여러분은 고통을 당하고 있고 간절히 그 고통에서 헤어나기를 원하나 그 고통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은 알지 못합니다. 알았다고 하더라도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이제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은혜를 받고 그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나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드는 것 이외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붙들고 인생의 고통의 시련의 늪에서 벗어나 주님을 찬송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