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히 하나님을 찾으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녹취자: 원수연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경험하고 또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그 삶이 참 허전하겠지요. 요즘 앞의 내 인생을 계획하기 보다는 돌아온 날들을 회상하는 시간들이 많은데, 회상을 하면서 가끔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혹시 누군가가 “네가 지금 누구든지 지금 네가 되게 한 것이 무엇이었느냐?”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네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 되었다’라는 의미도 아니고 그렇다고 ‘못 되었다’는 의미도 아니고 더욱이, ‘네가 유명한 사람이 되었느냐?’ 아니면 ‘사람들 앞에 어떤 업적을 이루었느냐?’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 자신이 자기의 중심에게 묻는 말입니다. 내가 지금, 지금의 내가 된 것이 무엇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미 대답을 했습니다. 뭐라고 대답을 했습니까? 자기가 자기가 된 것이 뭐라고 대답을 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라’ 물론 문맥이 거기서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대적하던 그런 못된 사람에서 변해서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가 된 것을 염두에 두면서 ‘나의 나 된 것은’이라고 말했지만 말입니다.
그러고 가만히 회상을 해보니까 영세까지는 없진 않았겠지만 한살부터 아홉 살까지를 제외해놓고, ‘열 살부터 이십 대될 때까지는 무엇이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을까’라고 생각해보면 ‘고통과 번민’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린 아이부터 끊임없이 고뇌했습니다. 그것이 나의 정신적인 자질의 우수함이나 이런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다른 고통 속에 있으면서 삶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도대체 인생의 본질이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눈물로 묻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때부터 사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목회자가 될 것을 하나님이 훈련시키셨을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십대에는 그 많은 인생의, 정확하게 말하면 인생에 대한 번민, 그것이 나를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십대 때에는 어땠을까. 이십대 때에는 회심하기 전과 후로 나누어지는데 회심한 후에는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고 그냥 믿음을 가지려고 애썼던 것 같습니다. 회심하기 전에는 사상을 찾아서 몸부림을 쳤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을 모두 싸잡아서 보면 이십대 때는 무엇인가를 ‘갈망’했습니다. 십대 때 번민을 했다면 이십대 때는 치열하게 그 답을 찾고자 갈망하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삼십대 때는 이미 신학공부를 시작을 했고 이십대 후반부터. ‘기도’라고 규정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사십대 때에 기도를 안 한 것도 아니고 오십대 때 기도를 안 하고 삼십대만 한 것은 아니지만 삼십대에는 특별히 기도에 아주 많이 헌신했던 것 같습니다. 보통 한 세 시간에서 네 시간을 매일 기도하기를 아주 오래, 교수가 된 후에도 계속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십대에는 ‘번민’, 이십대에는 ‘추구’, 삼십대에는 ‘기도’였다면 사십대 때 나를 늘 주님과 만나서 동행하고 이렇게 만들어주었던 것은 ‘사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늘 말씀드리지만 사역 자체에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어떤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역을 하면서 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만나면서 하나님께 사십대 때에도 다른 사람 못지않게 기도를 많이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사역이 펼쳐지면서 사역을 하면서 매순간 나의 기도가 응답되고 어떤 때는 내가 기도하지 못했을 때에도 하나님이 나의 사역의 길을 인도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순간순간 삼십대 때에 조용히 기도하면서 맛보았던 하나님과의 동행에 못지않은 정말 가슴 시린 감격들을 사역 속에서 참 많이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오십대에 들어서서는, 이것도 똑같죠. 사십대 때 내가 공부를 안 했다거나 삼십대 때 놀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나 치열하게 공부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오십대 때 기도를 안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오십대 때에는 ‘지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삼십대 때에는 내가 강단에 엎드려서 혹은 연구실에 엎드려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면, 오십대 때에는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오십대 때에 기도원을 아마 가장 많이 다닌 나의 주기였는데 기도원에 가서 기도도 했지만 산책을 하면서 그 지성을 압도하도록 밀려오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선하심, 이것 때문에 휫필드가 이야기했듯이 별빛이 초롱거리는 것 같아서 금요일에 밤을 잠을 이루지 못하고 토요일에 내려오는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학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이 기도하던 시절에 미처 알지 못했던, 사역에서 은혜를 받던 때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그런 하나님의 친밀함, 그리고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 이런 것들을 깊이 경험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십대에나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 오십대 걸어오도록 어느 때에도 오류와 나의 불순종, 혹은 나의 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모든 것들을 누르고 이기면서 오늘의 내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그 십대부터 오십대까지를 쭉 통틀어보면 결국은 그렇게 기도하도록 채찍질한 것, 그 다음에 사역을 하도록 마음을 다잡은 것, 학문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도록 자신을 채찍질했던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요약해보면 만남입니다. 만남. 하나님과의 만남, 사람과의 만남. 눈에 보이는 여러분들 같은 사람들과의 만남, 이미 죽고 없는 사람들과 책에서 만나는 만남.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끊임없이 만남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결국은 빚어져가는 존재이고 그 만남이 정말 의미 있고 올바를 때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자신의 주체됨을 되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인생이 정말 복된 인생입니다.
결국 인간에 있어서 어떤 에너지가 고갈된다고 하는 것은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남을 감당할 에너지가 없다. 그래서 사람이 신앙적으로 정신적으로 에너지가 고갈되면 굴속에 숨어서 곰처럼 조용히 불 끄고 자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떤 때에는 그렇게 모든 것에 물러가 고요히 침잠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너무너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레크리에이션이 활기찬 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과 같은 관계이어야지 그냥 그 레크리에이션이 좋아서 미쳐서 생활이 안 될 정도로 뒤집히는 것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직장 다닐 때 낚시를 어마어마하게 좋아하던 직원들이 몇 있었습니다. 광적인 정도입니다. 토요일이면 아예 다 보따리를 싸 가지고 직장에 와서, 그 땐 별로 차도 없었던 시절인데, 그러고 낚시하러 시외버스 타고 가서 밤늦게 아니면 월요일 새벽에 도착을 하는 겁니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휴일이면 미제물건 시장 다니면서 스위스에서 나온 칼, 고기 배따는 칼, 그런 거 사러 다니고 서로 자랑하고. 그래서 심한 거 아니냐 그랬더니 자기 친구 중에 진짜 낚시에 심각하게 빠진 사람을 이야기하는데 낚시하러 2박 3일로 떠났는데 너무 재밌으니까 보름동안 낚시질을 하고 안 나온 겁니다. 회사에서 짤렸습니다. 짤렸다는 통보를 전보를 통해서 받았는데도 일주일 더 낚시를 하고 그러고 와서 회사를 정리하고 새 길을 찾은 겁니다. 이런 것들은 레크리에이션과 우리의 삶의 관계가 바뀐 겁니다. 똑같이 우리는 그런 것들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결국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만남에 의해서 빚어져 가는 겁니다. 자신을 찾는 것도 혼자서 자신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누군가를 보면서 찾는 겁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실력도 없고 재능도 없으면서 자기가 창작을 하겠다 그러는데 그거 아닙니다. 모방을 하는 겁니다. 모방을. 정말 가슴이 저리도록 존경할 만한 설교자를 찾아서 가서 배울 수는 없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모방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모방이 정말 정신까지 모방하는 거면 절대로 그의 꼭두각시가 될 수 없습니다. 왜? 그 사람 인격 안에 담긴 정신이 시간이 흐르면 아주 독특한 고유성을 나타내면서 흐르게 마련입니다. 변해가는 겁니다.
옛날에 화종부 목사가 내수동 교회에서 가끔 설교를 하면 우리 모두 듣고 나서 그랬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가 왔구나.” 어쩜 그렇게 똑같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더라구요. 이제 누구도 화종부 목사 보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겁니다. 끊임없이 만남을 통해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불행한 사람은 자랑할 만남이 없는 사람입니다. “신학의 세계 속에서 이런 사람을 만났어. 가슴이 저리도록 이 사람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그런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사람들이 과거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현실에 코 박고 사니까 그렇게 자기를 움직일만한 위대한 사람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가 없는 겁니다.
세미나를 한창 하고 있을 때 영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리처드 백스터가 목회하던 교회입니다. 금년이 리처드 백스터 400주년인데 내가 와서 400주년 기념주일에 설교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영광이죠. 이 촌에 사는 사람한테. 그래서 그 목사는 내가 전혀 모르는 영국 목사인데 어떻게 레터를 보냈나 그랬더니 ‘Work of Nam Joom Kim’, 우리 김재모 목사님 공로가 큽니다. 김재모 목사님이 번역해 준 그 책이 그 목사 손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보고 이 분을 좀 모셨으면 좋겠다 그러고 온 겁니다. 보니까 시간이 안 되서 못 간다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두 번째 제안을 했는데 2월 말쯤 사순절 기간에 키더민스터에 모든 교회들이 모여서 매주 사순절 콘퍼런스를 하는데 그 때 와서 뭔가를 발표해주고 주일날 자기네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해주면 좋겠다고 그랬습니다. 그것은 정식으로 초청장을 보내면 내가 가겠다 답신을 해주었습니다.
여러 해 전에 리처드 백스터 교회에 갔는데 원래 영국 처치 오브 잉글랜드로 넘어간 교회는 굉장히 큰 교회고 바로 그 교회 앞에 백스터 목사님이 하얀 석고상으로 서 있는 그 장면이 그 교회 앞에 서 있는 겁니다. 굉장히 존경받던 목회자였습니다. 고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청교도 추방령에 의해서 목사님이 쫓겨나니까 그 지체들이, 리처드 백스터 목사님의 영적인 후예들이 나가서 교회를 개척합니다. 그 길 건너편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그게 그렇게 긴 세월이 흐른 겁니다. 그런데 그 곳 장로하고 만나서 리처드 백스터 목사님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네 교인들이 모른답니다. 영국 청교도도 모르고 백스터도 잘 모른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그런 걸 알고 꾸역꾸역 한국 사람들이 찾아올 때 교인들은 기이하게 여긴다는 겁니다. 우리 목사님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었나,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결국은 뭐냐면 뭔가를 회고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자랑할 만남이 없는 사람, 그런데 이것은 자랑할 만남이라고 해서 귀인을 만나서 수많은 은택을 입은 것만이 만남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누구를 만나서 엄청나게 고생했고 절대 저 사람 같은 사람하고는 상종하지 말아야 되겠다, 그걸 배웠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만나고 싶은 좋은 사이로 헤어졌다, 이런 것도 우리 인생을 빚어가는 아주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하고 아무 상관없는 그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하냐 그럴지 모르지만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적인 삶을 말씀하시면서 바리새인이나 유대인들과는 대조되는 삶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은밀히 하나님을 찾으라’ 구제하면서 그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그렇게 구제해서 좋은 평판을 얻으려고 하고, 그 다음에 기도하는 것도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그렇게 길 어귀에서 손을 높이 들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말입니다. 친구들이 모였는데 결혼한 여자들이 모여서 과시하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다이아반지를 끼고 머리를 쓰다듬는다든지 명품 백을 다른 사람들은 다 무릎 위에 올려놓는데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든지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자기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남편으로부터 사람대접을 못 받는 사람들입니다.
내적인 하나님과의 깊은 만족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실은 이 구제와 기도의 교훈을 통해서 복음적 신앙생활에 있어서 정말 치명적으로 중요한 그 무엇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주시면서 유대인들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도록 충고하시는 겁니다. 그게 뭐냐면 허한 세월, 허한 삶이 끊임없는 과시를 낳는 것입니다. 허한 삶이 끊임없는 과시를 낳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공부도 똑같습니다. 공부를 잘 못하고 학문의 기초가 부실한 사람은 언제나 과시를 합니다. 논문이나 글을 쭉 읽어봐도 이게 과시인지 과시가 아닌지가 나타납니다. 그게 뭐냐면 잠재적으로 자기가 다른 학자들에게 얕잡아 보인다는 의식들이 계속 남아있어서 어느 아는 한 가지가 나올 때 그 아는 것을 훨씬 더 과장해서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러고 돌아서서 자기 마음도 굉장히 허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이 바로 구제와 기도에 얽힌 유대인들의 관습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산상수훈 속에서 말씀하시는데 그 맨 처음 첫 포문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육적 이스라엘에서는 잘못된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에 의해서 전혀 덕 있는 것이라고 칠 수 없는 그러한 기준이 산상수훈의 첫 뚜껑을 여는 첫 머리에 올라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정말 생소하게 예수님이 도입하신 것이었느냐,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모세에게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을 때 매번마다 강조한 게 뭐냐면 ‘마음’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라’ 그것도 모자라서 ‘마음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 마음으로 이 율법을 지켜야 되느니라’ 그게 사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고마루스라는 신학자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의도와 관련된 것이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 율법의 요구를 준행해도 동기가 정말 이것을 명령하신 하나님을 위해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다른 동기에서, 자기의 이익과 관련해서, 더욱이 자기의 평판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행하는 것일 경우에는 그것은 참다운 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과시적 구제와는 달리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과시적인 기도와는 달리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시면서 ‘은밀히’라는 말씀을 사용하십니다. ‘은밀히’. 은밀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비밀스럽다는 것입니다. 감추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기도와 연관시키는 것입니다.
골방은 집안에서 잘 안 보이는 장소입니다. 거기를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리고 문까지 닫고 기도하라는 이야기는, 아주 심하면 사람들이 너를 찾을 수 없게 그리고 발견되지 않게끔 그렇게 비밀스러운 곳에서 비밀스럽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비밀스럽게 기도하라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기도에 있어서 모든 동기와 전개, 그리고 기도에 있어서 기대하는 모든 바가 오로지 그 은밀한 기도 속에서 너를 대면해주시는 하나님인 것으로 만족하라. 그 얘기입니다. 하나님인 것으로 만족하라. 그래서 그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위대한 부흥이 책상에서 선교의 계획을 따라 부흥이 일어난 적은 없습니다. 대부분 그 하나님의 뜻과 먼 현실을, 저미는 가슴을 부여안고 무릎을 꿇으며 신음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부싯돌이 되기 시작해서 거기에 불이 붙으면서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전개되는 대책 없는 난관이나 무질서, 그리고 사역을 하면서 여러분들이 힘이 없고 감당할 능력이 없는 모든 것, 이런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그 시작점이 바로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리고 주님 앞에 홀로 은밀한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해결의 길을 찾아주시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특히 부교역자 생활할 때 그런 걸 많이 느끼는데 아이들이 참 신앙생활을 안 합니다. 어떤 때는 팔이 아프도록 편지를 쓰고 전화도 하고 때로는 심방을 합니다. 그런데 성과가 썩 만족치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멈춥니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놀랍게 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주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시는데 그 과정이 흐트러진 자신의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참된 자기에게로 모아지는 과정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우리 모두에게 권고하는 게 뭐냐면 집회로 모여서 은혜를 받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평소에, 어느 특정한 때에 하나님을 찾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것이 어디에서든지 간에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는 개인기도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은밀한 곳에서 간절히 매달릴 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팔복의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