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녹취자: 양현정
시인은 종종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노래를 했습니다. 그리고 예외 없이 그 아름다움을 통해서 자기가 누구이고 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면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받은 사랑을 찬송했습니다. 그러한 찬송이 있기 전에 시인이 늘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 때문에 세계가 아름답고 세계는 비록 인간의 범죄와 타락에 의해서 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세계에서는 인간 사회와 같은 추함 보다는 하나님이 원래 정하신 질서가 빛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연에 대한 감탄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하고 마지막에는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한 피조물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노래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그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자기 안에 혹은 자기 공동체 안에 이스라엘 안에 묶이지 않고 그것이 두루 퍼져서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과 모든 것들을 향하여 펼져지는 세계를 지녔던 것입니다.
1절을 통해서 우리들이 한 번 배우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이름의 아름다움. 시인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말하자면 제품에 붙어 있는 ‘레떼르’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의 사물들 특히 인간들 위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작품이라고 하는 표를 붙여 놓으셨습니다. 파는 상품에 붙은 표야 우리들이 상표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상표라기 보다는 저자의 표시입니다. 내가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는 표시입니다. 시인이 그런 하나님의 이름을 온 세계 안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세계 안에 자연 속에 나쁜 것이 있다면 우리들이 자연악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작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이 타락하고 자연의 세계에 도입된 악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최근에 어느 한 시인이 시집을 냈는데 언제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꽤 알려진 분이었는데 그 분이 시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래 보아야 아름답다, 너도 그렇다.’ 우리들이 사람을 잘 알고 나면 나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얼핏 보니까 도둑놈, 나쁜 놈, 인간도 아니야. 그러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사람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 사랑으로 마음이 이끌리니까 창조한 모든 세계에 붙어 있는 하나님의 표를 보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표를 보면서 시인은 감격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그 이름이 온 땅에 아름다우시구나.’ 이름이 아름답다는 것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 존재가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름을 보면서 그 이름이 어떤 소재에 새겨졌나, 무슨 색인가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름의 원 주인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이 시인이 보기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전달해 주는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눈꼽만큼도 그런 아름다움에 대한 관상이 없을까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참 아름답다 그런 것을 못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크게 세 가지의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못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나 한 사람만 세상에 지어놓으신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포함해서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자기가 눈뜨고 살아 있는 것이 너무나 신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을 주신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매일 죽음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들어가는 문에서 겪는 고통만을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냥 목욕탕을 들어가기 위해 옷을 벗는다든지 헬스클럽에 운동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절차에 불과한 것입니다. 영원히 계속 되는 고통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야지만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잠깐 동안의 두려움과 고통을 겪으면서 그 문을 열고 우리는 죽음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더 많은 날들을 살아야 됩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지식이 너무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름다움을 못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들에 대한 아름다움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도 한 번 이야기 했지만 어떤 사람이 산을 산책하는데 지질학에 뛰어난 지식이 있다면 단층과 흙, 바위 색깔들을 보면서 감상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진귀한 것이 나타나면 아마 산을 오르기로 한 모든 일정을 그만두더라도 바위에까지 가서 만져보고 표본을 채집하려 할 것입니다. 지식이 있으니까 그것은 생물학이나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산을 산책하면서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고 예술을 하는 사람은 그 아름다운 광경을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지식도 없는 사람은 삼겹살이나 구워 먹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우리들이 매일 매일 배워야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자연 만물에 대해서 일일이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모든 사물들과 연결되어 있고 그 사물들은 각각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지식을 연결하면 사물들은 각각 지식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 지식을 모두 연결할 때 마지막에는 그 지식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붙드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침마다 눈을 뜨는 것이 우리에게는 새로운 탄생,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너무 신기한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슬픔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왜 나의 삶이 내가 원하는 질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삶 속에서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도처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 자신의 불행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코박고 아무 관심도 가지지 않으니까 힘겹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뒤편에 보면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 하시나이까” 그리고 이 말씀이 히브리서에도 인용이 됩니다. 여기에는 많은 해석상의 논란들이 있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사람을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이 시인이 인간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십니까.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하십니까” 권고라는 말은 ‘파카드’라는 단어인데 ‘찾아오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이관대 찾아오시나이까” 뒤에 인자를 두고 그리스도냐 일반 사람이냐를 두고 논쟁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넓게 보면 그리스도이시고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처럼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의 모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결국 우리와 그리스도는 하나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튼 그 모든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의 아름다움을 찬송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그런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 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지진이 나고 때로는 해일이 밀려오고 가뭄이 들고 하지만 그것들에 비해서는 그것들로 취소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온 땅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름성경학교 때 아쉬운 것이 그것입니다. 옛날에는 여름성경학교 때 되면 온 들판을 뛰어다니며 여름 성경학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풀이나 꽃을 따다가 접어서 말리는 것도 하고 나가서 풍경을 그리기도 하고 그런데 이제 잿빛 하늘에 회색빛 빌딩밖에 없으니 그런 감각적인 교육이 많이 죽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를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아름다움의 백미가 무엇이냐 하면 인간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이런 의미에서의 생각은 하나님이 오직 인간에게만 하시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랑과 염려로 생각하는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가 도저히 당신께 돌아갈 수 없을 때 주께서 친히 찾아오실 만한 정도의 관계,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여기에서 제일 먼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위대한 존재이고 생각하실 만한 존재이고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러분들은 그 사람들 중에서도 인류가 아니라 그 인류 중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으니 얼마나 존귀한 자인가, 또 사명을 느끼고 하나님을 위해 섬길 자리를 부여받았으니 얼마나 존귀한 자녀인가 그것을 깊이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 얼마나 존귀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언젠가도 얘기했습니다만 기독교의 진정한 영성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모에 상관없이 그를 하나님의 한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방법입니다. 그리고 하다못해 누구에게 말을 한 마디 건네고 커피를 한 잔 건네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혹은 따뜻하게 권면할 때에도 그의 소유나 외모, 나이, 피부색깔, 인종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존귀한 존재인지를 알아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생각하는 대상이시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찾아와 주시는 그런 존귀한 자라는 사실을 가슴에 깊이 새기며 하나님 앞에 옷깃을 여미는 사람이 사람 앞에서도 옷깃을 여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영혼을 돌보는 사역이 얼마나 존귀한 사역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아름다움을 자연 만물로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에 있는 당신을 닮은 형상을 가진 인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온 세상을 덮으셨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위로와 용기를 갖습니다. 그리고 잠시 있다 사라질 이 세상에 대한 멸시와 소명을 함께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가치가 없다고 멸시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어찌하든지 내가 펼치면서 살아야 된다는 소명을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세계와 사람과 그리고 자신 속에서 배워갑니다. 그것을 누가 가르쳐 줍니까. 내가 도저히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 볼 수 없는 사람은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의 세계에 가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습니다. 성경이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때로는 고통을 받고 시련을 겪으며 살아도 사실은 주님의 아름다움이 자기를 포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 보면서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 때문에 때로는 고난을 이기고 역경을 이기고 사람들에게서 오는 추함을 최종적인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여전히 그것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을 그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아름다움에 심취하는 사람 이외에는 행복한 사람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