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
녹취자: 조원정
주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주님이라는 말하고 동의어입니다. 굳이 이름이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는 하나님은 아무데도 안 계시고 보이는 분은 아니지만 주님의 이름은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 살면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보이고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이름이 짓밟히는 것이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보이는 세상 속에서 이름의 영광에 대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태도는 곧 하나님에 대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름 그 자체가 이름을 가진 주체가 되는 사물을 이미 포합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주님의 이름을 안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안다고 하는 것과 꼭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킬 때는 야훼라고 하지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계시한 이름이기도 해서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하나님이시라는 뜻도 됩니다.
우리가 뭔가 결핍할 때에는 야훼 이레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로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지십니다. 성품은 대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비참한 자들에게는 그들을 사용하셔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주고 악한 자들에게는 정의롭게 심판하심으로서 하나님이 공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거스르는 자에게는 그를 언약관계 안에서 끝까지 참으심으로서 주님의 인내를 보여주십니다.
오늘 이 시인이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성품을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맨눈으로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풍부하게 계시되어 있는 보고가 성경입니다. 여러분이 음악을 좋아합니다. 음악에 대한 아무 지식 없이 음악을 들으면 가장 훌륭한 음악도 경우에 따라서는 소음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 음악이 왜 그런지를 잘 이해하고 나서 음악을 들으면 몰랐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교향곡에서 불협화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예전에는 소음처럼 들렸는데 그게 그런 의미를 가진 것이라는 것을 생각을 할 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아는 것만큼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주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일하는 것보다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을 그렇게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삶의 과정들을 이렇게 돌아보면 자기가 압니다. 나의 인생에서 언제 언제는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셨던 것 같고, 제게도 그런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안 기뻐하시냐? 그것은 각자 자기가 물을 질문이고 현재 말고 과거에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던 때, 그때가 마음속에 성장이 됩니다. 그때 특징이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입니다.
아무데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할 때 그때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재능, 업적, 이런 것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들 중에 일들로서 하나님께 엄청 놀라게 하고 감동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 모든 세계를 있으라 하는 말 한마디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 교만하고 까불고 이런 사람들 있습니다. 그것은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그렇게 까불고 교만하고 육적이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사랑이 있다면 우리가 정말 가엾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 짐승이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주님을 아는 사람은 주님을 의지합니까? 성경에 보니까 주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버린다고 하는 단어가 히브리 말로 아자브라는 단어입니다.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고 떠나지 아니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버림받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사오년 전인데 어버이 주일날 설교를 했습니다. 본관 비서실에 앉아 있는데 본관에서 결재도 하고 그럽니다. 웬 늙은 아저씨 한분이 미리 약속도 없이 비서가 말리는 데도 문을 어깨로 밀고 비서실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왜 그러시냐고 이러시면 안 된다고 하면서 마침 제가 소파에 혼자 있었습니다. 앞에 딱 않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통곡하고 우는 것입니다.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목사님 제가 이 교회에 등록하지 얼만 안 되고 출석하고 있는 교인입니다. 나이는 65세이고 보니까 할아버지입니다. 나도 할아버지입니다. 막 우는 것입니다. 자기 엄마 아버지가 자기를 버린 것입니다. 일주일 만에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육십 넘어서 안 것입니다. 그렇게 통곡하며 우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기를 친척 집에 맡긴 걸로 교육을 받고 들어 왔는데 나중에 진상을 파악하고 나니 버린 것입니다. 65세면 벌써 할아버지가 다 된 나이이고 옛날 우리 할아버지 때 같으면 증손자를 볼 나이입니다. 그런데 나이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버림받았다고 하는 커다란 충격과 아픔이 일주일 때부터 시작이 되어서 65세가 될 때까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때 할아버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양반이 90세까지 살아도 저것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생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이 얘기하면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편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며 찾아보면 압도적인 용례가 다윗의 시에 나옵니다. 다윗은 그것을 아버지로부터 경험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버리다시피 한 것입니다. 장인도 자기를 버렸고 자기 첫 번째 마누라도 자기를 버렸습니다. 버림받은 자의 일생을 산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시인에게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성품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계속 말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그렇지만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실 것입니다. 고백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사실, 그게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오죽했으면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을 때 그분의 이름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는데 임마누엘이었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것도 언제까지인가 하면 영원히 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돌아와서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함께 하겠다. 결국 주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자기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어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연합되시고 영원히 함께한다는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시인에게 이것이 그렇게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세상이 끊임없이 우리를 버려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큰 행복이고 기쁨인가 하며 어떠한 처지에서도 그것을 생각하고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