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4.22 주일오후예배
얼굴을 보이시는 하나님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시22:24)
녹취자: 김인철
이 22편은 다윗의 탄원시입니다. 특별히 학자들은 이 22편이 다윗의 탄원시중에서도 메시아적 탄원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22편에 나오는 탄원의 시는 선지자로서의 다윗의 개인적인 탄원일 뿐만 아니라 미래의 메시아가 육신을 입으시고 이땅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실 때 그의 마음에 있는 탄원을 예언적으로 대변하는 탄원시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여기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실제로 예수님의 옷을 로마의 병정들이 제비 뽑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시편 22편에도 보면 내 겉옷을 나누며 내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러면서 다윗의 시 속에 이미 메시아가 당하시는 고난이 문자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 탄원시는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예언적인 의미에서 메시아에 대한 고난을 바라보는 시 이기도 하지만 또 일차적으로는 다윗이 실제의 삶속에서 당하게 된 그 고난속에서 하나님께 올렸던 탄원의 내용들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우리는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무슨 이유때문인지는 모르지만 22편 전편에 보면 얼마나 사람들에게 짓밟혔는지 고백하기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비방거리가 되었고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짓밟히는 깊은 멸시속에서 이 시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속에서 수 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이고 멸시를 당하고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환경들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대적들이 에워싸고 있고 그것을 무엇이라 표현했는가 하면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 쌓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 바산은 사마리아 지방입니다. 소를 기르는 산지였습니다. 그래서 기름진 목초지에서 많은 황소들을 생산해 냈는데 힘이 엄청나게 쎕니다. 그래서 부강국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버리고 묘하게 잘 살아서 살이 찐 귀부인들을 가르켜서 바산의 황소라고 선지자가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맥락속에서 바산의 아주 힘이 센 소들이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소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고 그리고 둘러 싸면서 윽박지르며 자신을 도전하고 있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속에서 이 시인은 사면초가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시인이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면서 그 깊은 시련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비하신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춥고 배고프고 곤고한 사람들을 싫어 합니다. 누구에게 연락이 왔다 할 때에도 곤고하지 않고 이렇게 만나면 대등하게 이야기 하거나 도움을 받을 만한 그런 부담 없는 사람을 원하지 연락을 받았는데 나에게 기댈 것이 너무 뻔하다 그런데 나는 애정도 없는데 나에게 자꾸 기대어서 무엇이나 얻어 가려고 하고 그리고 곤고한 사람들 고난 받는 사람들은 대게 남에 대한 배려가 없고 자기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남을 돌아 볼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상대해서 곤고하지 않았더라면 나 같은 사람에게 연락 할 일이 없었던 사람들이 나에게 연락해서 나에게 치대고 할 때 사람들이 싫어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곤고할때에는 누구에게도 나타나지 않고 그냥 숨어 버리거나 은닉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다 지나가야지 연락이 오지 어려울때에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서 절대 연락 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곤고한 사람들을 싫어 합니다.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 다 보면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가족들이 사랑이 없고 아니면 교회가 이렇게 사랑이 없고 내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데 관심도 안 가져주고 그렇게 말 하는 사람 자신도 그렇게 남에게 관심 가진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우리가 살면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기대어서 실망하고 좌절하는 이런 삶의 태도를 버려야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다 나의 이웃과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지체들은 내가 기대고 빚지기 위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정신적으로든지 영적으로든지 육적으로든지 많은 것들을 하나님이 주시면 그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이바지하고 베풀기 위해서 나에게 이웃들이 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것은 경건에 아주 커다란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오. 외국 사람들은 우리나라 보면서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시집 장가 갈 때 방 값이 얼마나 비싼지 모릅니다. 상상도 못합니다. 어떻게 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사람들이 정치인들이 민심을 잃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사이에 얼마나 집세가 올랐는지 제가 1988년도에 교수가 되었는데 그때 여기 관양동에 45평 아파트 전세가 2,500만원 이었습니다. 사는 것은 4,500만원 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2,000만원 가지고는 단칸방도 못 얻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힘든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국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방값이 그렇게 비싸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어마어마한 방값을 부모가 해 준다는 것을 더 이해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그것을 얻어 가면서 이렇게 생각 해 보십시오. 부모님에게 기대지 말고 나 혼자 힘으로 살아야지 이렇게 갖는 사람은 무엇을 주어도 너무 감사하고 분에 넘치는 것입니다. 동기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인생 내가 살아 가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동기간이 조금만 도와 주어도 그렇게 고맙고 감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생각이 너무 크고 기대는 생각이면 우리 노인네들 둘이서 사는데 둘이서 죽을때까지 먹어 봐야 1억원만 쓰면 될텐데 10억이나 재산이 남았는데 그것 뭘하려고... 나 주려고 계속 통장을 만지작 거리고 계실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산을 조금 물려주면 볶혀 죽고 안 물려 주면 맞아 죽고 다 물려 주면 굶어죽는다고 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녀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없이 부모에게 학대를 당하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하는데 이것이 경건에 도움이 안됩니다. 그래서 항상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성경에도 이야기 하는데 자기의 먹을 것을 자기의 손으로 수고하여 열매를 거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의미를 생각할 때 자신이 힘에 넘치도록 일하고 수입을 올리고 이렇게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여유를 가져서 남는 자원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이러면서 사는 것에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참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해도 인간의 사회 속에는 적자생존의 법칙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디에서인가 패배가 있는 것입니다. 패배한 사람들 승리한 사람들이 경쟁할 때에는 경쟁상대 이었지만 쓰러진 다음에는 도움의 상대로 생각하고 손을 내밀고 일으켜 세워 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야기 하는 4.0 자본주의, 5.0자본주의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얼마나 돈으로 뿌려서 국민들을 잘 살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안 도와 주어도 됩니다. 도움 받는 것을 이상한 세상으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심지어는 강남에서 아파트를 몇채씩 가지고 있는 사람이 농사 보조금 까지 받고 했다는데 그것은 가진 사람으로서 너무 부끄러운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일을 했다면 공유와 공평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 한번 해 볼까요? 지금 교역자들이 전부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확실하게 도전을 받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교회 교역자 부목사님들이 아이들을 유치원, 유아원에 보내는데 구청에는 아버지가 무직자로 등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금을 하나도 안 내니까 무직자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세민의 혜택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은 옳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영세민 입니까? 교회에서 생활비를 쓸 만큼 주는데 넉넉한 돈은 아니지만 우리들 보다 더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진짜 영세민은 거기에 못 들어 가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에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금을 내니까 온갖 혜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이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보금자리 주택도 월급이 있어서 안되고 자녀 혜택도 안 된다 하는 것입니다. 너무 힘들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서 우리들이 치르는 희생이라고 생각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덕을 보았습니다. 부목사님들 전세금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것입니다. 은행에서 제안이 왔습니다. 열린교회 교역자들 대출해 줄테니 이야기 하라고... 그래서 7,000만원까지 대출을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굉장히 싸게 4..9%인가...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세금을 내니까 소득이 증명 되니까 은행에서 안심하고 돈을 대출해 주고 저에게도 매일 옵니다. 돈을 빌려 준다고... 두군데 세군데에서 계속 옵니다. 학교까지 있으니까 1억까지 빌려 줄테니까 빌려 가라고... 그것을 빌려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에게 그렇게 하면 마음속에서 원망과 미움, 질시 이런것들이 계속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우리 마음의 괘적입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지 그런 마음을 품고 사는데 우리의 삶이 복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대게 마음의 원망이 가득 찬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묵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찬송)
눈을 들어 영광에 주를 보라 소리 높여 주를 찬양하라
이런 원망하고 누군가를 탓하고 하는 마음들은 우리의 기도로 하여금 하늘 나라에 오르지 못하게 다리를 붙드는 무거운 추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은 곤고한 자를 싫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곤고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때로는 시련과 고난을 만나게 하시는데 이것이 이 세상을 의지하는 마음을 끊고 하나님 자신을 영혼으로 응시하라고 하는 싸인 입니다. 끊고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싸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항상 반대 상황에서 나타납니다. 마치 어두워야지만 빛이 또렷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반대 상황에서 나타납니다. 옛날에 등대는 등대마다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밥중이면 올라 가서 불을 켰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 충전을 해서 일주일동안 쓸수 있게 전기를 넣어서 그것은 전기가 나가든지 상관 없이 돌아 가는데 틀어 놓으면 어두운 시간에 맞혀 놓으면 센서에 의해서 불이 들어오면서 켜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어떻게 했는가 하면 밤이나 낮이나 계속 불이 켜져서 돌아 가는 것입니다. 낮에는 안 보입니다. 밤에 어두움이 내리면 이제 밝게 반짝이는 불빛이 보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죄가 있으니까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누군가 오류에 빠졌으니까 진리가 무엇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 줄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미워 하니까 미워 하는 사람이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버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있으니까 그 속에서 친밀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해 보니까 희망을 갖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설교한 것처럼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에게는 불행해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장애 때문에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이 실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곤고한 일을 만나고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 그리고 우리가 온갖 시련을 당할 때 사실은 그런 환경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당신의 자비를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반복해서 이야기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좋을 것을 통해서만 좋은 것을 하나님이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나 많은 경우에 좋은 것이 아니라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렇게 곤고하고 원수들에게 에워 싸이고 그리고 내 속옷까지 원수들이 제비를 뽑으며 나의 모든 것을 약탈해 가는 그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이 당신의 자비 하심을 나에게 나타내 보이실 기회입니다 라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찬송)
너는 어느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 볼지라
그러면 모든 환란을 만난 사람, 모든 곤고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이어 주는 고리가 무엇인가 하면 기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가 울부 짖을 때에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시련과 고난을 만날 때 우리의 관심사는 환경을 바꾸는 것입니다. 시련을 바꾸어서 행복으로 고난을 바꾸어서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역경을 바꾸어서 순경을 만드는 것이 말하자면 우리의 관심사 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은 그 속에서 우리들이 우리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바꾸시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지 아니 하시며 성도에게 하나님의 얼굴은 은총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왕 앞에 끌려 나가서 이제 거의 죽을 것 같은 위기에 놓였는데 왕이 뜻 밖에도 죄인은 고개를 들라 이것은 용서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당장 끌고 가서 목을 쳐라 라고 했을 것입니다. 죄인은 고개를 들라 임금의 용안을 바라 보고 거기에 용서와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물질적인 시련이나 혹은 건강이나 모든 어려움들이 올때 그 속에서 하나님께 울부 짖을 수 있는 마음의 결단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나의 인생은 주께 맡겼기 때문에 내 인생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길어 없어 보여도 주님께 기도하면 없어 보이는 길도 보여 주실 것이며 존재 하지 않는 그 길도 하나님이 열어 주실 것이다 그런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믿는 바 였던 것입니다. 마음을 모아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서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마음을 모아 간절히 기도할 때 이렇게 마음을 모아 하나님께 매달려 본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련은 오히려 그에게 커다란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사 전체는 하나님을 떠나려는 인간과 당신 사랑에 묶어 두려고 하는 하나님과의 갈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말 자기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행복과 번영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시련과 고통도 주셔서 그래서 그런 시련과 위가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도속에서 당신께 울부짖게 하고 그 속에서 마음을 모아 주님을 찿음으로 흩으러졌던 심령이 하나님을 향해 다시 모아지게 만들어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 당신이 우리 삶의 초점이 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고쳐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속에 있었든지 하나님은 그 반대 상황속에서 당신의 위대한 속성을 나타내어 보이시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가 있으면 용서 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시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오류속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다면 진리의 빛이 비출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가져야 하고 내가 오늘날 나의 삶의 상황속에서 절망하게 하시는 것은 나로 하여금 이전에 발견해 보지 못했던 놀라운 희망을 주시기 위하여 나에게 이런 절망과 좌절을 주시는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좋은 것들로 여러분들에게 가져 다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