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기쁨의 하나님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43: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어서 시인은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이르게 되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역경과 시련은 대게 신앙적인 시험을 동반합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깨어있는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환경의 의미를 해석하고, 그것에 대해서 자신의 마음과 영혼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헤아려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시인은 큰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음으로써 다시 그 은혜를 회복하게 되었고, 이 시인은 이 일을 위해서 진리를 통해 시온에 이르기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II. 큰 기쁨의 하나님
A. 큰 기쁨의 하나님
먼저 시인은 자신이 이렇게 진리를 통해 시온에 이름으로써 뵙고자 하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그 성품을 노래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큰 기쁨의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이 히브리어 원문에는 ‘엘슈마하트 길리’라고 되어 있는데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내 기쁨, 곧 즐거움의 하나님”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또 “나의 기쁨의 하나님”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인간과 기쁨의 추구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기쁘기 위해서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성향이 다르고 가지고 있는 인생관이 달라도 행복해지기를 원해서 그런 인생관을 붙들고 사는 거지 불행하기 위해서 그런 인생관을 붙들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종종 인간에게는 비장의 아름다움을 관심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것을 비장미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종종 기쁘고 즐거운 영화도 좋아하지만 슬프고 애잔한 영화나 연극을 보며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인생살이의 아픔과 비극을 통해서 인생의 또 다른 면을 감상하는 즐거움이지 자신이 그 주인공과 꼭 같은 삶을 실제로 살아가라고 할 때 그것을 즐겨할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기쁨을 얼마나 누리느냐의 차이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올바른 기쁨을 찾아서 사는 것이 인간의 참된 행복의 척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만족에서 오는 것입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사람들은 자기를 시련하고 자기만족에서 기쁨을 얻는 것으로써 행복해 하지만 덕스러운 사람들은 남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의 행복과 함께 나의 행복을 나누면서 만족을 얻음으로 기뻐하는 것이 덕스러운 사람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인류는 이렇게 인간의 기쁨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찾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찾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신 후 그를 이끌어 나오실 때에 했던 아담의 고백,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이 고백은 아마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과 꼭 같은 기쁨이었고 만족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배필을 보며 행복하였던 이 기쁨은 관계에서 오는 기쁨이었지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는 기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의 불행은 바로 이 기쁨을 자기만족에서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래 이 우주를 모두 회귀하라고 주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와서 모든 인류의 마음을 휘돌아 마지막으로 당신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그러한 회귀적이고 이행하는 사랑으로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이 기쁨을 이렇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 안에서 주신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함께 나눔으로서 기쁨에 참여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는 곳에서 기쁨을 찾게 된 것이 인간의 불행입니다.
한 8-9일간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동안 일부러 한국에서 일어난 뉴스를 접하지를 않았습니다. 잠시 마음을 접고 그저 출장간 일에 몰두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돌아와 보니 역시 그 일주일동안에 비극적인 사건이 터졌습니다. 젊은 한 병사가 군대에서 구타를 당해서 결국은 절명한 사건이었습니다. 나는 그 신문 기사를 꼼꼼히 읽어보면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자식을 그렇게 졸지에 잃어버린 어머니는 바로 자식이 맞아 죽기 며칠 전 자식의 군대에 면회를 갈 예정이었습니다. 통화를 했는데 왜 그런지 아들이 아주 극렬하게 엄마 여기 면회 오지 말라고 간곡히 말려서 못 간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다시는 자기 같은 불행한 자식들이 이 땅에 없도록 눈물로 편지를 낭독하는 그 엄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거지같은 나라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육군 참모 총장이 사표를 냈다고 하는데 나는 법정에 세워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살인죄로 가해자들과 직속상관을 단죄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군대 제도가 있고 젊은 사람으로 군대를 갔다 와서 진짜 사나이가 된다는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지만 전부다 쓰레기 같은 이론들입니다. 진짜 사나이는 그렇게 해서 사나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폭력과 더러운 부조리가 만연하고 순수한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2년 동안 온갖 더러운 악과 부조리, 모순들을 습득하고 나와서 이 사회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 대해서 분노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연히 맞서서 이 모든 부조리와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런 군대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런 군대는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사는 세상에 이런 쓰레기 같은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얻어맞아서 절명한 병사를 의무병이 와서 신체 상태를 확인하고 폭력을 가했다고 하니 이것은 명백히 살인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죽기 직전까지 때리고자 하는 그야말로 가해 의도가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염려하며 의학적인 검증을 거쳐 구타를 했다고 하는 것은 죽지만 않는다면 구타를 계속하고자 했으니 역설적으로 그것은 살인의 의도인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사건을 임관한지 2주밖에 안 되는 중위가 수사를 했다고 하니 처음부터 이것은 덮어버리고자 하는 군대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런 쓰레기 같이 더러운 군대를 가지고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한동안 신문을 보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왜 우리는 하필이면 이런 나라에 태어나서 이런 모순 속에서 살아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줄줄이 법정에 세워서 단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직시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생깁니까? 미친 군인들이 군대에서 잘못된 기쁨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후임 병사를 갈취하고 폭력을 행사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구타함으로써 그들은 기뻤던 것입니다. 외진 곳에서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또 다른 인간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죽어가는 군대가 세금을 가지고 첨단 무기를 구입한들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그런 군대로는 절대로 전쟁할 수 없습니다. 이 모두 잘못된 기쁨을 찾는데서 오는 가학적인 행복의 추구가 불러온 불행인 것입니다. 그러나 참 기쁨은 그런 곳에서 오지 않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맞아서 죽는 일은 아주 흔한 일입니다. 이 끔찍한 일들의 전모가 이제 조금씩 밝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군대가 되어서 군 복무를 기피하고 도망 다니는 사람들을 어떻게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으며 자식을 군대 보내지 않기 위해서 온갖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는 부모를 어떻게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군대를 기피하고 도망 다니는 것이 군대에 가서 맞아죽는 것보다는 훨씬 훌륭한 삶이라고 확신합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살고 있는 나라는 이렇게 쓰레기 같은 나라일까요? 우리는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우리의 분노를 표출해야 합니다.
2. 기쁨의 근원 하나님
모두 참된 기쁨이 아닌 거짓된 기쁨을 구하기 때문에 이런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참된 기쁨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올바른 관계를 심화시키는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그래서 오늘 시인이 말하고 있는 나의 기쁨이라고 하는 이 표현은 기쁨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 기쁨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께 그 사람들을 기쁨의 하나님께로 데려가 그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그런 행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치도 없는 것들을 위해 치열한 경쟁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기쁨, 환희, 희열, 감동, 설레임, 이런 것들을 거의 잊어버린 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우리 모두가 그 기쁨 안에서 살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기쁨의 삶을 가르쳤고, 사도 바울도 그 깊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이 모든 것을 능가하게 하는 기쁨의 원천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결국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 기쁨의 표현이고 찬송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라고 말입니다. 신자가 이러이러해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는 이러이러한 일들을 감당해야 한다고 하는 명백한 의무는 거룩한 것이고 그래서 훌륭합니다. 그러나 의무감 하나로 하나님 자녀의 삶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의무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함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의무를 기쁨으로 감당하며 살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이 희열과 그리고 즐거움입니다.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오는 즐거움, 그 은혜에서 오는 행복과 그 기쁨이 결국은 우리의 삶을 영위해 가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가장 이상적인 삶은 송영으로서의 삶입니다. 즉, 내 마음속에 기쁨이 넘쳐서 그것을 찬송으로 표현한 것이 송영의 삶입니다. 이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께 큰 기쁨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께 수금으로 찬양을 올렸던 것처럼 마음속에 넘치는 기쁨과 은혜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찬송을 부르듯이 영위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신자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직시할 때에 너무나 너무나 필요한 인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어도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는 의미는 우리를 모든 고통에서 건져내 우리 마음대로 되는 금시발복의 인생을 살게 하신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다만 예전과 꼭 같은 삶이 우리에게 펼쳐진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우리가 그 삶을 통해 가는 삶의 목적이 다르고 그 삶을 이어가게 하는 우리의 자원이 예전과는 다른 것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계곡을 휘돌아 흘러오는 시냇물을 보십시오. 계곡을 휘돌아 흐르는 시냇물은 이 돌, 저 바위에 부딪치며 계곡을 휘달려 내려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비명 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프게 부딪쳐 산 아래 내려온 웅덩이에는 시퍼런 물이 되어 고이지만 내려오는 동안에 부딪치는 모든 부딪침이 그들에게는 비명소리가 아니라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되어 우리의 귀에 들립니다. 물이 흐르지 않는 계곡, 정말 시시합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삶이 팍팍하고 곤고할 때 삶이 내 맘대로 안되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기쁨이 넘치면 때로는 우리가 물이 되어 계곡과 같은 이 세상을 흘러가며 여기 부딪치고 저기 부딪쳐서 마지막에는 멍이 들어도 언제나 그 모든 시련은 우리에게 찬송이 됩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 큰 기쁨의 하나님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III.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감
A. 하나님을 대면하는 곳
그러면 어떻게 이 큰 기쁨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시인은 말합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기 위해 그는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갈 믿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으로”라고 되어 있는 히브리어 성경의 본문은 우리의 번역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과의 종교적인 언약을 지키면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누릴 것이지만 그 언약을 파기하고 불순종한다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는 사망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는 맨 처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기쁨을 얻고 서로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데서 누리던 기쁨에서 이탈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기쁨을 통해 행복해지고자 애썼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선악과를 먹었고 이로써 그들은 돌이키기 힘든 커다란 죄에 자신들만 빠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함께 빠뜨렸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배반한 인류에 대해서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제일 첫 번째는 육체적인 생명을 연장하신 것입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을 때에 이 선고 안에는 육체적인 죽음과 함께 영혼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것은 즉각적으로 집행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창조의 의미가 실종될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영혼은 즉시 죽음에 이르게 하셨으나 육체는 그 생명을 연장시켜 죽음에 이르기 전에 씨앗을 퍼트려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의 계획을 무효화시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 속에서 비록 영혼은 죽었으나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 앞에서 그 육체의 생명을 가지고 인류는 번성해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 즉시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를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은 타락한 아담의 자손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왔습니다. 특히 언약을 받은 백성들에게 이것들은 종자 씨처럼 간직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 동침하여 잉태한 첫 아이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었는지 기억나십니까? 가인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그가 우리를 구속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노아가 태어났을 때 부모는 그 이름을 노아라고 붙였고 그것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우리가 안식을 얻으리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메시야가 우리를 이 모든 죄에서 구원해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게 해서 안식과 쉼을 줄 것이라는 기대는 역사 속에 면면히 계승되었고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행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제사를 통한 한시적인 만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제사 제도는 인간의 타락과 함께 즉시 도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은 이 제사를 통해 한시적으로나마 죄인인 인간들의 죄를 씻어 교통해 주셨고 그 교통의 시간들을 통해 자원을 적절히 주심으로 완전히 단절되지 않은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도록 은총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 제도와 메시야의 약속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고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 제사장의 중보를 받으며 드리는 이 제단에서의 헌제는 메시아를 바라보는 신앙 속에서 이루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제단에 대한 신앙도 메시아에 대한 신앙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B. 그리스도의 중보가 있는 곳
여기에서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겠다는 시인의 고백은 따라서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이외에 하나님은 그 어떤 구원받을만한 이름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고, 모든 사람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쁨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우리에게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희미하던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사상은 이제 신약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능력을 은혜를 굳게 믿는 신앙으로 구체화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창조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구속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심이고 구속받은 후에도 모든 하늘의 좋은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신앙심으로 붙들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을 통해 우리에게 직접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 기쁨을 아들에게 주시고 아들에게 주어진 이 기쁨은 신부인 교회에게 부여되고 우리는 모두 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쁨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그 기쁨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떠한 시련과 고통을 만나도 그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고 그의 선하심과 궁극적인 승리를 굳게 믿으며 시시때때로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 우리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찬양)
뼈아픈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주께서 그때도 함께 하사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오늘 시인의 이 고통은 범죄에 대한 징계로 주어진 시련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초기에 저는 이 42편이 그리고 43편이 모두 다윗의 시라고 확신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학자들의 설득을 들으면서 아마 이 시는 다윗의 시가 아니라 고라의 자손의 시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20년 전부터입니다. 최근에 와서는 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 속에는 4절에 나오는 것처럼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가 나옵니다. 이것은 다윗의 시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후렴구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42편과 43편을 이해하는데 근본적인 문제를 가져다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 시의 저자를 다윗으로 본다면 지금 압살롬에게 반역을 받아 요단강 건너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을 때에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바로 이전에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을 때에 하나님이 주신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양보해서 이 시를 고라의 자손의 시라고 한다고 할지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어찌 그 나라가 악한 자의 손에 넘어가고 법궤를 빼앗기게 된 것이 다윗 한 사람의 죄 때문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죄를 개인적으로도 다루시지만 공동체적으로도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공동체의 죄는 너의 죄와 나의 죄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입증하는 좋은 성경 구절이 에스라 10장 1절과 2절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전에 엎드려, 문에 엎드려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자신은 그 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에스라에게 경건한 이 학사에게 이스라엘의 죄는 곧 자신의 죄였던 것입니다. 정작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물 흘리지 않았지만 그 죄와 상관이 없는 에스라가 그렇게 심한 탄식으로 가슴 아파 하나님 앞에 통회하였던 것은 그 죄를 공동체적으로 자신의 죄라고 인식하는 깊은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시인 고라의 자손의 중 한 사람이 당하고 있는 이 끔찍한 고난과 고통도 역시 죄를 통한 하나님의 징계로 주어진 시련이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성경의 해석에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때를 오히려 신앙으로 승화시켜서 하나님 앞에 자신과 나라의 죄를 돌아보고 정결해짐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더 큰 기쁨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하고 있는 시인의 신앙을 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감으로써 기쁨의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비록 그가 범죄하고 나라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중보를 의지할 때에 그 신앙으로서 하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그들에게 기쁨을 주실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뿌리신 그 핏길을 자기 의의 신발을 벗어 버리고 찢으신 휘장을 지나 보좌에 이를 때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끔 완전하고 영원한 중보를 주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까요?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바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온 몸으로 감당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매달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너희가 하나님과 화목하냐고 묻는 그리스도의 질문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교훈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이 약해졌을 때, 우리가 불순종할 때, 성령을 슬프시게 할 때에 종종 우리를 낯설게 대하시고 거리감이 느껴지시게 만들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가셨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가슴 아픈 거리감과 낯선 경험들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저지른 불순종과 잘못의 심각성과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허전하고 외로운 지를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당신과의 관계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한 고통스러운 환경과 시련으로 가득 찬 여건들을 주목하는 대신 복잡하고 끝없는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응시하는 대신 우리는 눈을 들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분이 그 임마누엘의 샘에서 이루신 구속의 공로를 의지해 우리가 기쁨의 하나님께로 돌아갈 가능성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이렇게 어렵게 시간을 내어서 전 교인 수련회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렇게 기쁨의 삶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상실했기 때문에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없는 여러분에게 그런 기쁨과 은혜를 회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이렇게 십자가를 바라보고 당신의 은혜를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굳게 붙들고 예수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