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버림 받았다구요?(사49:14-15) 2001.8.1 수요예배 1
2. 곤고한 자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시9:12下) 2001.8.8 수요예배 13
3. 얼굴을 가리신 것은 잠시입니다(사54:8) 2001.8.22 수요예배 28
4. 섬기는 자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①(히6:10) 2001.8.29 수요예배 36
5. 섬기는 자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②(히6:10) 2001.9.5 수요예배 47
6. 하나님을 찾는자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시77:7-10上) 2001.9.12 수요예배 58
7. 당신께 피하는 자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①(시31:19) 2001.9.26 수요예배 68
8. 당신께 피하는 자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②(시31:20) 2001.10.3 수요예배 78
1.버림 받았다구요?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4-15 )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서 수요예배 시간마다 생각해볼 주제는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그 시리즈를 오늘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사야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저 어림잡아서 주전 700년대 중반기쯤부터 시작해서 주전 680년경까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대충 그 정도 기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미 이 사람이 오늘 이 예언을 하고 있을 때쯤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한 후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49장이 42, 43, 49, 50, 52 이렇게 이어지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나오는데 그 중에서 이 49장은 문맥으로 볼 때 이사야 선지자가 말년에 쓴 작품이라는 것이 공통적인 학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이 사람이 이 49장을 써내려갔을 때에는 벌써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역사적으로 앗시리아 입니다. 이것이 722년에 망했으니까 벌써 망한지 한3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갔을 때였고 그리고 이제 유다 나라도 서서히 기울면서 이제 586년 멸망의 때를 한 100년 정도 바라보고 있었던 그런 시점이었습니다. 그 시점에서 이제 이 이사야 선지자는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미 망했거니와 남왕국 유다가 멸망할 것을 예고하면서 그 때 그 사람들이 멸망당하면서 너무나 많은 고통과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버린 가운데에 살면서 겪게 될 고통과 시련을 이야기하고 그리고 그 때쯤 되어서 사람들 속에는 불신앙이 편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이제 그리스도에 의해서 파괴되는 이 세상의 나라와 메시아와 고난과 구속의 은혜를 통해서 새롭게 모이는 이 황폐했던 교회에 다시 영적인 이스라엘이 교회로 세워지게 되는 그런 왕국의 회복을 전망하면서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여기에서 선지자는 유다백성들의 미래에 있을 불신앙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신앙이 어떻게 표현되었나 하니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시온은 유다의 하나의 애칭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첫 번째로 다루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입니다. 그 불신앙은 바로“하나님은 나를 버리셨고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잊어버리셨다.”입니다. 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들이 버림을 받았다.” “하나님은 더 이상 나에게 은혜를 배푸시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될까요? 오늘 여기에 예견되고 있는 유다백성들의 불신앙 “여호와는 우리를 버리셨고 이제우리를 우리를 잊어버리셨다”고 하는 불신앙은 다만 유다백성들의 패역한 가슴에서만 볼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전히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오늘 아침에도 기도하고 있는 여러분들도 이런 불신앙을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가지고 있을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라고 하는 마음의 작용은 항상 우리에게 사랑과는 정 반대되는 경험을 갖게 만들어줍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안심하고 위로와 평안을 얻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랑하기 때문에 불안해 하기도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시편을 넘겨보시면 신실하고 경건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실 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토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잊으셨는가? 이제 그 은혜는 다하였는가? 내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나 주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도라고 하는 이러한 탄식들을 시인들의 경험 속에서 많이 읽을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신앙이 없고 영적으로 매우 저급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중에 대부분 아주 뛰어난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경험하고 누구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수시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자신이 영영 끊어진 것과 같은 그런 좌절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영영 버림 받은 것과 같은 좌절을 느꼈습니다. 시편에서만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서로 들어가서 에스겔서나 혹은 예레미야서나 이런 걸출한 선지자들의 신앙의 경험을 보더라도 그들은 수시로 이런 침체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런 침체에 빠졌을 때 이런 사람들의 가슴을 확 휩싸고 오는 아주 중요한 생각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 다했는가.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이 나에게 응답하시지 않는가? 하나님은 나로부터 아주 멀리 계시도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들은 구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도 얼마든지 나옵니다. 특별히 사도바울은 자신의 로마서 속에서 혹은 그의 이어지는 서신서속에서 다른 사도들보다도 훨씬 더 개인적으로 내면의 세계 속에서 경험되고 있는 체험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서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체험들을 잘 면밀하게 살펴보면 역시 이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작용들이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었던 작용들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늘을 차고 비상하는 독수리와 같은 신앙으로 우리에게 마치 하늘에 속한 사람인 것처럼 신앙에 대해서 말하는 때가 있지만 때로는 우리 가운데 가장 연약한 형제중의 한 사람으로 주저앉아서 우리와 함께 흐느끼면서 자신 속에 있는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자기와의 싸움, 그 연약함을 고백할 때도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면으로도 우리가 이런 것들을 신앙이라고 보기는 어렵죠. 어쨌든 불신앙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떠나셨는가 하는 이런 불신앙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오늘 이 예고되고 있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맥락에서 보는 두 가지 관찰이 오늘 우리의 영적인 삶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디로부터 오느냐하면 크게 두 가지로 집을 수 있는데 하나는 고통의 문제입니다. 고통이 너무나 오래도록 계속되면 이런 낙심이 우리들 가운데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고통 그 자체가 우리에게 낙심을 가져다 주지는 않지만 계속되는 고통이 우리에게 밀려닥칠 때 그것들이 신앙으로 잘 소화되어서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영혼 속에 어떤 정제된 자양분들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그 고통은 곧바로 우리에게 이런 의심, 좌절, 영적침체를 가져옵니다. 좀 어렵죠. 좀더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지난주일 설교시간에 저는 결핍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라는 내용을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거기에서 제가 설교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고통받을 때에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다.’그래서 우리가 어떤 고통을 당합니다. 시련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 시련과 고통은 그가 성화된 신자이든지 아직 미성숙한 신자이든지 간에 똑같이 고난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고난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지나고나보니까 그 때가 아름다운 추억이었다는 것은 다 지난다음 이야기이지. 가난하고 밥을 굶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만원만, 만원만!”하고 꾸러 다니고 그러는데 뭐 아름다운 추억입니까? 그 고생을 안 하고 세월이 지나 가고 나니까 그 때 먹던 라면도 맛있었고 그 때 얻어먹던 밥도 맛있었고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 당시로서는 모두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이 있는데 다행히 신앙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고통에 대해서 고통은 아주 쓰라리고 아픈데 그 고통과 고난, 혹은 결핍과 시련이 다가올 때 신앙으로 이것을 싸요. 만두를 싸듯이 신앙으로 이 고통을 싸요. 그래서 신앙으로 그것을 녹여요. 녹이면 그 속에서 정제된 물이 흘러나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고통의 의미를 새기면서 그것을 자신의 마음과 영혼 속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통을 통해서 깨닫게 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경험입니다.
이것들이 자기의 영혼 속에 흘러들어가게 되면 고통은 쓰고 괴롭지만 그 고통 속에서 얻어진 것은 한없이 자신의 영혼에 유익을 주고 심령을 부요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면서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햐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의 기능이 살아있을 때에는 고통보다 신앙이 클 때에는 그 시련이 커도 말하자면 신앙으로 그 시련을 녹이면서 그러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다양한 체험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하니까 그 가난 때문에 주님을 만나고 병드니까 고통 때문에 주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외로우니까 그 외로운 것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아요. 그러면서 그 고통의 의미를 가슴에 새기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의 자양분들로 자신의 영혼을 비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을 때에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신앙이 없을 때 혹은 신앙은 매우 작은데 고통이 너무나 클 경우에 그럴 경우에는 지속되는 고통이 그로 하여금 약간 느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근본적인 의심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볼 때 두 가지 경향성이 공존합니다. 하나는 어떡하든지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가져보려는 본성과 또 하나는 어떡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희망을 포기하려는 본성입니다. 양자가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 앞에서 고통을 당할 때 신앙이 고통보다 커서 그 고통을 감싸 안고 고통을 녹여내면서 무엇인가 영혼에 자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면 지속되는 고통은 그 가슴속에 있는 약간의 하나님의 경험이 준 확신까지도 털어버리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통이 없으면 그러면 하나님을 잘 믿느냐? 그것은 또 별개의 문제입니다. 어쨌든 신앙이 어린 사람에게 있어서 고통이 바로 이런 문제들을 가져다줍니다.
신앙이 깊다고 하더라도 이런 고통이 오래도록 지속되게 되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시험을 이기는 길”이라는 시리즈를 설교하면서도 그런 말씀을 드렸는데 시련과 시험, 그리고 그 시험과 악은 백지장 한 장 차이입니다. 시험에 들면 대게는 악에 빠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시험에 빠지면 악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이 끊어진지 오래되었을 때 그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고 하는 불신앙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영적인 상태에 들어간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 하는 그런 신앙의 태도를 가진 적이 많이 있었는데 그러다가 그들이 갑자기 하나님을 향한 태도가 돌변해서 “주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는 그의 손에 기르는 양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우리처럼 사랑하는 민족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다”라는 그런 감격이 그렇게 냉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격렬한 찬송과 함께 감격으로 터쳐 나오던 그런 신앙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죠? 그것이 언제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그들을 위해 큰일을 베푸셨을 때 그들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찬송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그 큰일을 행하셔서 건져내실 때, 홍해를 지나게 하실 때, 혹은 큰 나라와 나라의 싸움에서 비상한 승리를 안겨주셨을 때, 하나님의 커다란 재난에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건져주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들려주시고 거기에 깊은 감화를 받아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을 때,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였을 때에 이런 때에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높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것이 무엇이냐? 왜 그러면 그렇게 커다란 기적이 일어나고 전쟁에서의 승리, 교회를 핍박하고 대적하는 대적들에 대한 그 혁혁한 승리, 이런 것들을 경험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주 가까이 계시며 그리고 자기들 편이시며 자기를 위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함으로 오랫동안 누적되었던 이런 불신앙,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고 우리가 이제 하나님을 떠났도다.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멀리 계시도다. 이런 불신앙을 일시에 떨쳐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께 대한 은혜의 경험의 회복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옛날에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할지라도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하여튼 왕창 뒤집어지고 하여튼 회개하다가 토설하다가 아주 토하고 졸도할 정도로 회개를 하고, 성령의 강력한 체험을 통해서 며칠 밤 며칠 낮을 울고불고 대굴대굴 구르는 그런 회심도 필요하지만 그런 회심이 한번 있다고 해서 여러분들의 생활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게 만들어주는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런 생애적인 하나님과의 만남도 중요하고 개인적으로 그런 강력한 부흥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경험들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내가 뒤집어져서 대굴대굴 구르면서 피를 토하면서 회개하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내 주여 손 내미사
내 영혼을 어루만져주소서
이런 은혜의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애를 움직이는 강력한 부흥은 이렇게 매일매일 하나님의 살아계신 그 은혜를 경험하는 가운데서 빛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균형을 잘 갖추어야합니다. 극단에 빠지면 안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렇게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왕창 뒤집어지는 생애적인 그런 어떤 개인적인 부흥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될수 없다. 이렇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또 하나는 반대로 그런 것은 필요없다. 매일매일 이런 작은 은혜의 경험이면 충분하다. 그것도 안됩니다. 두가지가 다 있어야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어서 진짜 김영옥씨가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는 대학교 3학년때 우주를 보았다고 그러더라고요. 그것이 뭐냐하면 기독교에서 이야기한다면 개인적인 부흥( ? )“우주를 보았다.” 그 우주를 얼마나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우주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만남의 큰 부흥을 통해서 자기의 영혼속에 지워지지 않는 그런 깊은 십자가의 중심성, 복음 진리의 중심성이 가슴에 새겨지는 일대변혁이 필요합니다. 더더군나다 오늘날 같이 복음으로부터 거리가 먼 기독교적인 가르침이 유행하고 있는 때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성경에 흐르고 있는 중심적인 사상에 대한 풍부한 체험을 하고 그리고는 나아가서 그것가지고 충분하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으 은혜의 경험속에서 살아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매일매일 기도하고 매일매일 작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읽으면서 조금이라도 은혜받는 것, 그것을 그렇게 가소롭고 아주 우습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끝혀지기 시작하면 여러분도 똑같이 과거에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여러분들이 고통과 위기속에서 여호와는 우리를 버리셨고 그는 우리를 잊으셨도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주위에서 사역을 해서 제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중에서도 그렇고 아닌중에서도 그렇지만 정말 부인할수 없이 정말 놀랍고 강력하게 주님을 만났는데도 정말 의심할수 없습니다. 그는 진짜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그랬는데도 세월이 많이 흐른후에 전혀 그런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만도 못하게 그렇게 패역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알고있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고 그렇게 오랬동안 참고 인내하다가 어느 한순간에 완전히 나사가 풀린 망아지처럼 그냥 짐승처럼 막 살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애들이 경필대회에서 우승할려고 연필심에 침 발라서 깨끗하게 글씨쓰다가 막판에 막 집어던지고 나오는 것 처럼 말이죠.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알고있습니다. 왜그러는지 아세요.? 어떤 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은혜 받아야 소용없다. 그러는데 그 은혜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자신의 영혼의 지축을 흔드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을 했으면 더더욱 경건하게 더더욱 매일매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면서 그렇게 살아야지. 한20년전에 받은 은혜나 욹어먹으면서 그러면서 “아, 그 때 참 좋았지” 요즘은? “안좋지” 뻔하지. 그렇게 살아가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생애적으로 지축을 뒤흔드는 그런 신앙의 체험 이전에 매일매일 하나님이 만져주시는 그런 은혜속에서 살기를 힘써야합니다. 아침마다 새벽에 기도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텃치를 느끼고 부족하나마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희미하나마 주의 진리를 깨닫고 어떻게 살라고 하는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을 붙들고 부족하지만 그 뜻대로 살려고 애를쓰고 예배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정말 하나님 은혜를 새롭게 하고 변화받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합니다. 우리 교회에 문서선교부가 있지않습니까. 한달에 한번씩 저보다 외상값 갚으라고 날아옵니다. 사람들은 자꾸 나보고 테입좀 달라고 그러는데 내가 다 사서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내 설교니까 자기가 공장에서 막 만들어서 나눠주나 보다 그러는데 그래서 어떤때는 외상값이 한달에 50-60만원 올라가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좀 약아져서 그렇게 안합니다. 그리고 꼭 읽을 사람만 주고 읽을 사람중에서도 능력이 있는 사람은 사서 들으라고 적극 권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날아옵니다. 그러니 뭐 오래간만에 옛날에 알던 성도들을 만나면 처음에는 그냥 반가운 나머지 어떻게 그냥 가겠느냐고. 테입한세트하고 책 한보따리하고 싸서 줍니다. 그중에서 듣는 사람도 있고 안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이, 처음 만나서 반갑다고 사주고 그렇게 해서 이제 그 때 그 때 값아야되는데 안 값으니까 50만원 60만원 어떤때는 70만원까지 올라갑니다. 마지막에 가서 값으라고 자꾸 그러죠. 그러면 가서 그거 값는 날은 진짜 가난해지는 날입니다. 그리고나서 그 때 결심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현찰로 사야지 조금씩이라도 값아야지. 나중에 너무 부담스러워서 안되겠다. 처음에는 조금씩입니다. 만원 이만원 삼만원 그런데 그것이 한달 쌓이고나니까 50만원 60만원됩니다. 마지막에는 만원짜리 이만큼 가지고 가서 값을 때는 웬지 아깝습니다. 괜히 줬다. 그리고 하다가는 값죠. 값고나면 시원하죠. 마찬가지입니다. 커다란 자신의 삶에 있어서 방향이 틀어진 커다란 죄는 일상적인 회개를 가지고 안될 것입니다. 그렇죠. 특별한 회개가 필요하죠. 그러나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지으면서 살아가는 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소원함, 영혼의 무감각 이런 것들은 매일매일 청산하고 매일매일 털어버려야합니다. 그 털어버리는길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든지 크든지간에 비상하게 하늘을 가르고 내 영혼을 쪼개며 들어오는 그 부흥에 방불한 신앙의 경험은 하나님께 주권이 속해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매일 기대하면서 살수는 없을지라도 매일매일 기도하면서 신실하게 자기를 찾는자들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우리들이 의뢰하면서 하나님 앞에 더 아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래에 왜 이렇게 하나님이 그들과 특별히 함께 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이 이제 자기들을 버리셨고, 그리고 자기들을 잊어버리셨다. 그렇게 불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이 그들속에서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예전에 그렇게 성경을 배우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알았지만 이제는 그 하나님을 느낄수가 없게되니까 그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은총을 배푸실 것이라고 하는 모든 기대가 사라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유다 백성들의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매일의 은혜생활을 잘 해야합니다. 이번에 수련회 가서 한번 은혜받고 그리고 내년 수련회까지 살 생각하지 말고 왜 그렇게 살아요. 그것이 아니고 수련회의 의미는 어떤데있느냐하면 이제 은혜를 받고 이 신앙의 언덕을 올라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배풀어주시면 다시 힘차게 올라갑니다. 그렇죠. 그리고 이제는 도저히 더 이상 그 언덕을 올라갈수 없을 정도로 지친 사람들을 이 수련회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로 하여금 벗은신발끈을 다시 매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이제 마른 목을 축이게 하시고 내려놓았던 짐을 다시 지고 갈길을 가도록 친절하게 그를 격려하고 위로하시면서 바로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그렇기 때문에 이 매일매일의 은혜생활을 잘해야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우리의 패역이 어떻게 고쳐져요. 심판의 피묻는 칼을 들이대도. 그 패역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손에 나는 사마귀처럼 잘라버릴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부분이 된 것입니다. 비결은 무엇입니까. 오래도록 죄가운데 생활하는 동안에 패역이 우리속에 우리의 일부분이 되었던 것처럼 그것들이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우리도록 오래도록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해야합니다. 서서히 서서히 서서히 빠져나갑니다. 은혜 안에 살아야합니다. 그래야지만 우리에게 진정으로 위기가 올 때, 우리에게 진정으로 시련이 닥칠때에 시련을 능가하는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시다. 그렇게 고백할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이런 유다백성들의 불신앙을 말하면서 실상을 말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혹은 자기 배속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있는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 우리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영역을 가지고 설명하시면 우리들이 이해할수 없으니까 우리들이 경험하는 영역을 가지고 사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인가 깊이 우리에게 진리를 전달해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교육적인 배려입니다. 하나님이 잊어버리셨다. 우리를 버리셨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변증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다. 그러시면서 여자가 어찌, 그 여자는 어미겠죠. 젖먹는 아이, 아이중에서도 ”울” “울라흐” 그녀의 젖먹이인데 울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그것은 아이중에서도 아직 젖을 떼지않은 아이를 말합니다. 그런 아이를 어떻게 버리겠으며 그리고 자기 뱃속으로 난 자식을 어떻게 잊겠느냐. 그런데 사실 성경에 보면 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열왕기하에 보면 사마리아가 앗수르에게 함락당했을 때 먹다 먹다 먹을것이 없으니까 여자들이 자기 애들을 교대로 삶아먹었습니다. 실화입니다. 그리고 요세푸스라고 하는 유대인 역사가의 역사기록에 보면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에워쌓일때도 그 때도 아이들을 삶아먹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일본사람들이 대동아전쟁 일으켰을 때 그 때에 패전하고 동남아에서 도망치면서 벌인 살인적인 만행들은 저 친구들은 정신차려야합니다. 저는 신문을 보면 참 한심합니다. 돈말 벌었죠. 어떻게 그렇게 생각이 없는지. 그런데 그 사람들이 쓴 것을 보면 말이죠. 간호원으로 대동아 전쟁에 참여했던 일본 여자가 전쟁이 끝난다음에 참회록을 쓴것입니다. 그런데 그 참회록이 뭐냐하면 도망을 나왔는데 먹을 것이 없는거에요. 7명인가 몇 명이 도망을 나오다가 마지막에 제일 힘없이 누가 쓰러지면 그 사람을 찔러서 인육을 먹으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참회록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젖먹는 어린 아이를 그 태에서 난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이 인간에게 남아있는 본성이요. 하나님의 성품의 그림자이지만 그러나 역사를 보면 안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나쁜 여자들이 있단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단서를 붙이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잊을지라도 나 여호와는 안잊는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함에 있어서 가장 근사치를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젖먹이를 끌어안고 있는 엄마의 마음 자기의 배속으로 낳은 자식을 애지중지하는 그 애미의 마음인데 그 말씀을 하시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역사적으로 이 인간같지 않은 이 기본적인 하나님이 주신 이 심성도 못가지고 있는 짐승과 같은 제자식을 가마솥에 넣고 저집 자식을 삶아먹고 오늘은 내집 자식을 삶아먹는 그런 짐승같은 인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면서 또 실족할까봐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혹시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 여호와는 그렇지 않다. 그러면서 이제 애미의 자식 사랑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그 뜨겁고 열열한 마음을 하나님이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가지인데 하나는 뭐냐하면 잊지못함입니다. 오매불망 잊지못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이납니다. 전두환씨가 대통령할때인가 한참 북쪽에 있는 이산가족들을 만나게 해주는 그런 일들이 여의도에서 벌어져서 온 나라가 온통 울음바다로 뒤흔들리고 난리를 쳤지않습니까. 뭐 어떤 아나운서가 제안을해서 아이디어가 히트를 쳐서 그래서 아주 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밀었는데 그렇게 해서 만난 사람들이 모두 행복했느냐. 그것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차라리 헤어진채로 살면 서로 그리워하다가 아름답게 죽었을 터인데 만나서 싸우고 소송까지 하고 그런 사람도 있었다고합니다. 어쨌든지간에 그것은 별개의 문제고 바로 그 때인데 6.25때인데 엄마가 아이를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아이를 딸하나 하고 아들 하나인데 만났습니다. 만나서 부모와 자식이라는 것이 확인이 되었는데 그 태오에 차이가 그렇게 커요. 딱 확인되었을 때 아들은 하나도 울지않아요. 엄마는 펑펑울어요. 아들은 대뜸하는 말이 “엄마 어떻게 엄마로서 그럴수가 있어요? 왜 우리를 버렸어요.” 그 얘기였습니다. 눈물로 하나도 안나고 그런데 이 엄마 얘기는 구차하게 변명을 했죠. 그러면서도 하는 이야기가 화상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데 “나를 용서해다오. 내가 너희를 버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너희와 헤어진 이후로 이렇게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하루도 너희를 잊어본적이 없다.” 그러면서 펑펑울고 “그리고 너희를 버린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한쪽은 생각을 하면서 그리움속에서 살고 한쪽은 생각하면서 원망속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애미와 새끼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바로 잊지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엄마가 더군다나 그 아이가 헤어졌을 때 이 젖을 물고 있는 아이라고 하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엄마를 떠나서는 살수가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이 언제나 부모없이 살수없지만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졸업하고 시집장가 가면 혼자도 잘살지 않습니까. 물론 사는 것이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그런데 이 젖을 물고 있는 아이는 누가 자신에게 젖을 물려주겠습니까. 그 난리통에 그런데 젖을 물고 있다는 것은 그 아이의 생명이 아직까지도 어미와 결탁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떨어졌는데 그것을 잊을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혼모들의 수기에보니까 미혼모들을 보호해주는 시설들이 있지않습니까 거기에서 미혼모로서 아이를 낳으면 절대 안보여준대요. 왜그러느냐하면 보면 그 인상이 찍혀져서 이 어머니로서의 모성이 작동해서 이 아이가 그리워서 마음에 병이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보게합니다. 아예 각서를 쓴다고해요. 그리고 낳으면 일체 안보여주고 갈라놓아서 젖도 못먹이게 하고 아이를 영아상태에서 돌봐서 입양기관으로 보내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못하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식은 그 어미를 잊어도 가끔생각이나죠. 그렇죠. 어미는 자식을 잊지못하십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으니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서넛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첫째는 보니까 매일 골골해서 병원에만 달고다니고 잠도 못자게 하여튼 어릴때서부터 오밤중에 일어나서 병원으로 뛰고 119를 부르게 만들고 하여튼 인생고달프게 만든 자식입니다. 첫째놈이. 둘째는 학교가니까 공부도 못해요. 매일가서 쳐져요. 셋째는 공부도 좀 하고 병원에도 안가고 튼튼하기는 한데 매일보면 애들에게 맞고 들어와서 속을썩이는 것입니다. 그런 자식을 셋을가진 부모다 있다고칩시다. 그러면 잃어버렸을 때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렇죠. 셋다 잃어버렸는데 아! 첫째는 매일 고달프게 잠도 못자고 119 부르게 하더니 아이고 잃어버렸으니까 그것 잘되었네. 둘째는 아, 그것 뭐 공부도 못하고 매일 왕따나 당하고 이제 해방이다. 셋째, 그래 셋째는 내 인생의 곤고함의 궁극적인 원인이었어 하나님이 이제 나에게 족쇠를 풀어주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겠느냐고요. 계모라면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팥쥐엄마라면 그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젖먹이때부터 그 자식을 기르고 배가 아파서 그자식을 낳아서 그가 어떻게 자라고 어떻게 넘어지고 어떻게 걸어오면서 이제껏까지 살아왔는지를 아는 그 부모는 자식을 그렇게 말할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잃어버리고나면 아, 그자식은 학교에 가서도 왕따를 당하고 버림을 받은 자식인데 아, 그 자식은 몸이 약해서 내가 꼭 돌보아주지 않으면 건강을 지탱할수 업는 자식인데. 아, 그자식은 공부도 못하고 쳐지는 자식인데 내가 끌어안고 일평생 살아야하는 자식인데 오히려 이 보모의 마음에는 그 자식들이 가지고 있는 결점들 때문에 자기를 더 필요로하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을 잊지못하고 더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엄마의 마음이고 아빠의 마음입니다. 뭘아세요. 시집 장가도 안가보고 말이죠. 알기는 뭘알아요. 자식 때문에 눈에 피눈물이 흘러봐야만 그 때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압니다. 아, 이것이 사랑이구나.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잊지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의 마음에 그 이름이 기억된바 된 사람입니다. 뒷편에 나가보면 하나님이 그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신다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잊지못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이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고 어떻게 패역한 길을 걸어가고 어떻게 실족한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도움을 포기한 상태에 있든지간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낙심하고 하나님을 등진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산넘고 물을 건너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처럼 그렇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은 바로 잊지못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외 아들의 피를 값주고 사셔서 그래서 자기의 것들로 삼으신 자기의 사람들을 하나하나를 잊지못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살면 잘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 잊혀질수 없는 존재들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잘못살면 잘 못살기 때문에 잊혀지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잊지못함의 정신이 이것이 바로 영혼을 섬기고 돌보는 사람들, 그리고 교회속에 배어야할 정신들입니다. 한 20년전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부흥사가 제가 섬기던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시는데 그 때는 전도사였나. 그랬습니다. 20년 약간 안되었습니다. 아주 널리 알려지신 분인데 그분이 그 설교를 하시는데 어린 마음에 참 경악했습니다. 뭐냐하면 교회는 주차장을 꼭 만들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20년전에는 그 이야기가 굉장히 썰렁한 이야기였습니다. 골목이고 뭐고 길이 많았는데 제가 다니던 교회가 150명 모이던 교회였는데 자가용이 2대쯤 됐습니다. 물론 변두리이기는 했지만 뭐 전화도 20대나 될까했습니다. 뭐 교회 전화부를 만들필요가 없었습니다. 워낙 전화가 없으니까 그런데 그 양반은 주차장 이야기를 부흥회 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썰렁하다 뭐 아무데나 대면 주차장인데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뭐냐하면 주차장을 만드는데 돈이 들어가지만 그러나 자가용 타고 와서 그 때 만원이면 굉장히 큰 돈이었습니다. 주일 헌금이 1000원이면 꾀 큰 돈이었습니다. 열사람이 와서 교회에 복다거려도 한사람이 와서 만원 헌금하고 가면 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악할 노릇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말아야 할 것은 뭐냐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영혼을 섬기도록 이렇게 교회를 세워주신 것은 바로 그런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계승하게 하기 위해서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떡하라는 거냐하면 그 사람 한사람 한 사람을 교회에 얼마나 유익이 되느냐를 보면서 생각하지 말고 그리고 그 사람 한사람 한사람을 하나님 앞에 고귀한 가치가 있는 영혼으로 보면서 대해야합니다. (그래서 예를들면 어떤 사람이 교회에 안나온다. 실족했다. 그러더라 아니면 신앙이 침체에 들었다. 그러더라. 그럴경우에는 똑같은 논리입니다. 그 사람이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헌금도 하고 아주 열열하게 봉사도 잘하던 사람이면 그렇게 봉사를 잘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너무나 그리워서 교회가 잊지못하고 그리고 그것을 못해서 부실하게 산 사람이면 아이고 저것 우리 교회에서 돌보아주지 않으면 갈대도 없을탠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를 잊지못해하는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계승한 목양의 태도이고 교회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떡하든지 그런 사람들을 돌아보게 하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빛가운데 살도록 품어안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한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갖고 계시면서 한사람 한사람을 잊지못하시는 것입니다. 잊지못하시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세요.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을 잊지못하시고 계시다라고 하는 것을 당신 자신이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잊지못하신다는 얘기는 결국은 무엇을 잊지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 존재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나누었던 관계를 잊지못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를 들자면 아, 그 사람 잊을수없어. 그 얘기는 무슨이야기입니까. 초상화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와 함께 살았을 때 나누었던 관계에 대한 그리움이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일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못하실 때 하나님의 그 우리를 향해서 잊지못하시는 그 애정의 마음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시금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올수 있도록 우리를 촉발시키시고 우리를 자극하시고 우리속에 무엇인가 신앙적인 갈망들을 불어넣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생각을 돌려서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관계에 대해서 회상하도록 만들고 그래서 주님의 품안에서 거했던 그런 진실한 영혼의 안식과 쉼과 행복이 있는 삶을 그리워하고 갈망하도록 그렇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찾아 나서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결국은 어느 한순간에 오랫동안 침체속에서 하나님을 거의 잊으면서 살아가고 있다가 마음속에 또한 하나님도 나를 잊으셨겠지 라고 생각하다가 어느 한순간에 주님을 만나고 깊이 돌이켜서 그 행복한 사랑의 관계로 돌아서고나면 그 때 즉시 깨닫게 되는 것이 뭐냐하면 나는 그 동안 하나님을 잊었지만 주님을 결코 나를 잊지않으시고 찾아오셨구나. 그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매달 나오는 열린신문 보면 나오는 간증이 바로 똑같은 간증입니다. 한번도 못만났었는데 처음 만났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 뭐냐하면 하나님을 새카맣게 잊고 살았었는데 그래서 하나님도 나를 잊으셨지 생각했는데 아주 정교하게 나를 찾아오셔서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 자리를 준비하셨고 그리고 그 예정된 길로 나는 걸어가서 주님을 만났다.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잊지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제 지금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다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돌아올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주시고 기회도 만들어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것이라고 하는 기대들을 갖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진 상태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원인이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을 묻고싶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끊어진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삶을 에워싸고 밀려드는 고통이 너무나 크고 중압감이 너무나 커서 그래서 견디기 괴로워서 힘들었던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이제는 멀어졌고 주님이 이제는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체들이 지금 있을것입니다. 왜 없겠습니까. 세상이 이렇게 험한데 왜 그런 영혼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오늘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잊지못하시기 때문에 찾으십니다. 수시로 여러분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니까 뜻을 세우세요. 하나님의 은혜는 대체로 엉겁결에 받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뜻을 세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합니다. 그래서 뜻을 세우세요. “내가 이번에 꼭 정말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 그리고 주님이 나를 잊지않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은 나도 하나님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뜻을세우세요. 그리고 지금부터 기도하세요.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그 수련회에 참석해서 은혜 받지 못하게 하는 모든 환경과 도전장을 내고 싸우세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세요. 그리고 하나님 만나기를 결단하고 거기에 가서 정말 여러분들을 만나주시도록 간구하세요. 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버리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께 등돌리고 살아갈 때 하나님이 더 고통스러우시겠어요. 우리가 더 고통스럽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등돌리고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 재미에 빠져서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그 결핍의 고통을 모를때가 많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자기의 사랑하는 딸이 등돌리고 패역한 길로 걸어가며 자기와의 관계를 뒤로할 때 그 때부터 하나님의 마음은 정말 아픔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그리스도 예수의 아픔도 시작되는 것입니다. 뜻을 세우고 그렇게 잊지못하고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각나게 해주시는 또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뭐냐하면 긍휼입니다. 첫째가 잊지못함이라면 두 번째가 긍휼입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 성경에보면 ( ? )이라고 하는 단어로 나오는데 분사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라함이라는 단어가 슬픔을 동반한 사랑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슬픔을 동반한 애정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사랑해서 그를 생각할때에 슬픔이 동반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호감을 갖는다는 이야기 하고 그 사람을 생각할 때에 그 슬픔을 동반한 사랑을 느낀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 정도가 다릅니다. 호감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초기적 증상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슬픔을 동반한 사랑을 느낀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사랑이 아주 깊어져서 그 사람의 존재자체가 뼈속까지 사무치는 그리움이 된 상태입니다. 핏기가 가신 얼굴만 봐도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깊어진 사랑입니다. 그렇죠. 피곤한 모습만 봐도 가슴이 쓰리면서 눈물이 핑도는 것, 깊어진 사랑입니다. 몇숟가락 밥을 뜨다가 입맛이 없어서 숟가락을 놓는것만 봐도 눈물이 핑도는 그런 것, 늘 그런 사랑을 하고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바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메라힘의 사랑입니다. 슬픔을 동반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긍휼이라는 말로 묘사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느끼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무나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슬픔으로 불붙는 사랑입니다. 너무나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슬픔으로 불붙는 애정,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관데 우리가 주님 앞에 한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주님을 거스리기 좋아하고 불순종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살고 우리가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을 훌훌 털어버리고 우리가 평화로울때는 평화롭고 잘 나가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처럼 교만하게 행동하면서 사실상 불신자처럼 살아온 것이 우리의 삶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조금 감사하고 하나님 앞에 드린 그 티끌같은 희생에 대해서는 가슴벅찬 자기 의를 느끼는 그런 뻔뻔스러운 존재들이 바로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정말 하나님의 슬픔을 동반한 불붙는 사랑을 받을만한 그런 자격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우리가 정말 주님에게 그렇게 요긴한 존재입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교회에 주님의 나라에 그렇게 꼭필요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해서 그래서 주님께 그렇게 소용되는 아주 중요한 인물들이냐는 것입니다. 그것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근거없는 애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가 곤고할 때 그분이 더 아파하시고 우리가 진리의 길을 떠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렸을 때 그분이 더 슬퍼하시고 우리가 불순종의 길을 걸어서 사악한 길을 걸어가며 가시에 찔리며 피투성이가 될 때 그분이 더 아파하시면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당신의 손으로 우리를 때리시고도 그 때린 것이 가슴아파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 흘리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 그것이 바로 메로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에 불붙는 하나님의 애정이란 말입니다. 그런 애정, 그런 사랑을 가지고 기다리시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않는 사람들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뒤로접고 돌아가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받은 영혼의 유익이 무엇이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주님은 우리를 버렸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잊으셨도다. 이런 것들로 이제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께로 돌아갈 의무조차도 포기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감으로 얻는 영혼의 유익이 무엇이있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행복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렇게 떠나서 그렇게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말하면서 살아감으로서 영혼에 얻을수 있는 위로가 티끌만큼이라도 있느냐는 것입니다. 더 혼란스럽고 더 차갑고 그리고 더 궁핍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않습니까. 이제 우리가 이런 식의 시험을 끝낼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가까이 하는 것 이외에는 내게 복이 없습니다. 이런 고백에 도달해야 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사라져도 내게 있는 소유, 내게 있는 명예, 그리고 내가 보장받은 장래 이런 것 없어도 내게 진짜 필요한 것은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의 가슴에 새겨진 저를 향한 사랑처럼 제 마음에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새겨지고 그래서 주님 없이 살수없다는 신앙의 고백속에서 주님 자신을 기업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그 행복이 내게없이는 내 생애의 어떤 부와 어떤 재물과 어떤 영화, 어떤 성공도 내게 더 이상 만족이 될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그 고백을 하나님이 듣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나까 결단을 하세요. 이제 정말 바람에 나부끼는 벼껍질같은 생활 이제 그만두고 파도를 따라서 떠밀려 다니는 거품과 같은 생활 이제 청산하고 이제는 택하세요. 이제는 정말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서 더 이상 의미가 없고 신앙은 내게 있어서 아무 뜻이 없다고 고백을 하고 고무신 거꾸로 신든지, 그럴수 있을 정도로 담대하지못하면 주님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영혼의 실체, 하나님의 그 은혜의 빛 앞에 살지못하면서 어둡고 칙칙한 길에 헤매는 우리의 영혼의 곤고함을 헤아리는 돌이켜서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이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언제까지 여러분들의 영혼을 그렇게 팽개쳐서 버림받게끔 만들겠습니까. 이제 결단을 내세요. 불과 10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결단을 하세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이제 왔으니
내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세요. 그리고 그대로 고백하세요. 주님을 멀리 떠나있었고 주님을 거스리며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교만하게 살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없이 살수 없었노라고 고백하세요. 그리고 무조건적인 그 하나님의 슬픔을 동반한 그 넘치는 애정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서 내게 부어달라고 한번만 용서해주시고 내게 은혜를 달라고 그러면 이제 주님 안에서 빛가운데 살면서 잘 살겠노라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매달리세요. 하나님이 왜 여러분들을 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왜 여러분들을 버리시겠습니까. 더욱이 그렇게 자기를 찾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곤고한 자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피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나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시 9:12下)
지난주 수요일부터 우리는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시편은 다윗의 시로 되어있습니다. 언제 이 시를 썼는지 우리들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다윗은 이 시에서 원수와 대적들로 인해서 깊이 고통 받는 가운데서 경건하게 부르짖는 사람들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과거를 담담히 기술해 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구절은 “하나님이 잊지 아니하신다.”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다시 말하면 가난한 가운데 부르짖는 사람들을 잊지 아니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사실 이 말은 어패가 있습니다. 그렇죠. 하나님이 당신이 택하신 사람들을 잊으시는 경우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들이 잊었다가 생각나고 생각났다가 잊혀지는 그런 존재들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몇 명인지를 잊어버린 경우가 있습니까? 아이들이 많으면 부르다 이름을 틀리게 부르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렇죠. 큰아이 이름으로 둘째를 부르고, 둘째 이름으로 셋째를 부르고, 일곱째 이름으로 여섯째를 부르고 그러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부모는 자기의 자녀를 잊는 법이 없습니다.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잘할 때만 그 아이가 잊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집을 멀리 떠나 군대에 가 있는 동안에도 그 아이는 잊혀지지 않습니다. 멀리 외국에 유학을 가 있는 동안에도 잊혀지지 않고 오히려 존재 자체가 가지의 눈앞에서 사라지면 더 절실하게 생각나는 것이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잊혀졌다” “잊혀지지 않았다” “기억하신다” “안 기억하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적어 내려간 것입니다. 그렇죠. 하나님은 이사야43장에서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주님이 복음 안에서 우리를 낳았기 때문에 우리를 기억 못하신다든지 잊어버리신다든지 그런 이야기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주님이 이러한 나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라는 이 시인의 고백은 신앙에 있어서 아주 중대한 진리를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시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고무신 거꾸로신고 세상에 나아가도 하나님은 잊으시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기억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러브스토리는 곧 웨이팅스토리입니다. 사랑의 이야기는 모두 기다리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전체에 보면 사도바울이 왜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이것이 성경 전체의 진리의 요약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그 기다리시는 사랑, 오래 참으시면서 기다리시는 그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 구체화 되고 나서부터 결국은 성경전체의 스토리는 기다리시는 하니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을 기다림 속에서 구체화시키는 그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죠.
사랑은 열정으로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는 기다리심으로서 그 사랑이 진실하다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면에서 볼 때에 성경전체는 기다리시는 하나님, 즉 잊지 않으시니까 기다리시는 이야기입니다. 기다린다는 이야기는 잊지 않으신다는 이야기이며 기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들로 전체가 역어져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으시는 것만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충분할까요? 충분하지 않을까요? 충분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고 이렇게 기억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도 느낄 수 있어야합니다. 제가 그래서 그런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죠. 그래서 우리들이 깊이 회개하고나면 예전에 “내가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 같다.“라고 생각할 그 때에도 하나님이 나를 참 사랑하시는데 내가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주님의 그 사랑을 내가 느낄 수 없었다고 하는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씀을 드렸죠.
똑같은 것입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인 우리들을 잊으실 리가 없죠.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면 “아, 하나님이 나를 잊지 않으셨구나.” 그것이 우리에게 느껴질 필요가 있고 경험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잊혀졌다.”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셨다” 그렇게 생각될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구원의 행동도 느껴지지 않았을 때에 그 때에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잊혀졌는가. 그 은혜는 다하였는가.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영영 버림을 받았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아니하셨도다. 우리를 기억하셨도다.” 이런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잊지 않으시는 그 사실을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새카맣게 잊고 살아갑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새카맣게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그 기억이 확 새로워지면서 “야! 하나님이 나를 잊지 않으셨구나.”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 말은 곧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라고 하는 이야기와 동의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고 계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으셨다.”라는 신앙의 고백은 항상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의 행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얘기 듣고보니까 여러분 성경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 아, 진짜 그렇구나.” 언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아니하셨다.” 고백이 언제 나왔는가? 하나님의 크고 작은 강력한 구원의 행동들이 있고난 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잊고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소속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정신적이고 신앙적인 연합을 한없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뭐냐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아니하셨다고 하는 이 새로운 일깨움,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단지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인 우리들을 잊고 계시지 않다.” 라고 하는 교리적인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고 계시는 놀라운 은혜의 증거, 그리고 그 놀라운 은혜의 역사, 이것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아주 깊이 깨닫고 아는 것이 요긴한 것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로 하나님이 부르짖는 자를 잊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님께로부터 잊혀지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게 되느냐하면 기도할 때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부르짖다” 히브리말로 “카라”라고 하는 것은 “소리를 높여서”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문자 그대로 간절히 부르짖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에 있는 강력한 소원 때문에 억누를 수 없는 열렬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며 부르짖는 것을 가리켜서 여기에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억누를 수 없는 어떤 마음의 소원으로 열렬히 하나님을 찾는 것, 그것이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을 때에 그 때에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라고 하는 놀라운 은총의 증거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는 놀라운 깨달음의 역사를 가져다주지만 그러나 그런 자극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의 몫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그 책임을 하나님께 물을 수가 없습니다.
기도가 잘되고 난 다음에는 내 마음을 움직여서 부르짖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덕분이라고 고백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주님을 찾지 않았던 모든 잘못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부르짖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았던 우리 자신의 태만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생활이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시인의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셨다.”라고 할 때에 이 부르짖음은 느낌으로 일상적인 부르짖음이 아닙니다. 시편에 보면 일상적이지 않은 기도를 이런 식으로 부르짖음이라는 말로 표현을 많이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매일매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해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일상적인 경건의 생활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일상적인 경건의 생활 속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는 개인적인 성경읽기와 개인적인 예배가 있고 그리고 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그런 개인적인 기도생활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어떤 특별한 위기에 처해서 그래서 자기들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행동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라. 특별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요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특별히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할 때에 우리의 마음이 그 때에 더 특별히 하나님 앞에 정화되고 그리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너지기 쉬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묶는 그런 촉진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길 앞에 항상 넘기 쉬운 언덕만을 우리에게 두신 것이 아니라. 때로는 밧줄을 걸고 구슬땀을 흘리며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길을 뒤로한 채 암벽을 오르는 것 같은 그러한 시련의 절벽을 우리 인생 앞에 두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언덕을 넘고 행길을 걸어갈 때에는 평범한 기도로 갈 수 있지만 그러나 앞에 커다란 암벽이 있고 그리고 도처에서 원수들이 추격하는 소리가 들릴 때에는 우리는 특별한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인생의 골짜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시편을 읽어보면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추구하였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거기에 나온 모든 아름다운 기사들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님을 찾고 추구했던 기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어떻게 해서 원수들에게 에워싸인 절대절명의 위에의 상황에서 기대할 수 없었던 여호와의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되었습니까? 대적들에게 둘러싸여서 아무 소망 없이 침체된 영혼으로 절망의 구덩이를 헤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변하여 원수를 밞고 승리하는 아름다운 찬송의 소리로 메아리치도록 상황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놀랍게 변화시켰을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그 위기 속에서 하나님 앞에 특별히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부르짖음은 그들에게 특별한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가져왔고 그 특별한 구원의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기를 잊지 않으신다.”라고 하는 놀라운 신앙의 인식들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하나님과 매우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며 그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는 자신들의 신분이 너무 고귀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눈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기업이 되고 그 하나님이 자기의 아버지가 된다는 그 관계자체가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그들이 마음껏 하나님을 자랑하고 주님의 자녀의 명분을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보화보다도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며 어두운 인생의 길을 불꽃처럼 살다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그것이 필요합니다.
정말 요즘 느끼는 것인데 다시 태어나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좀 이상하지만 만약에 하나님께서 다시 태어날 기회를 허락하신다면 난 여전히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안 그렇죠? 토종닭이나 그런데 정말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여러분들이 알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굉장히 힘든 멍에입니다. 그것은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존재한다면 사람으로 존재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느냐하면 이 얼마 안 되는 인생이지만 살아온 길을 이렇게 보면 밋밋하지가 않습니다. 꼭 우리나라 같습니다. 그래서 중국 같은 곳은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다 달려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기차를 타고 동쪽 창에서 해가 떠서 계속 달리는데 서쪽 창으로 해가 진데요. 얼마나 재미가 없겠습니까? 구라파 사람들은 웅장한 자연이라고 굉장히 자랑하는데 나는 거기에서 도저히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넓지만 땅이 얼마 안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기에만 복닥거리고 모여 산다고 하는데 그거 얼마나 좋아요? 그렇죠.
차를 타고 가면 5분가면 산이 나오고 10분가면 들판이 나오는가 하면 다시 2분만 가면 개울이 나와요. 1분만 가면 다시 계곡이 나오고 계곡이 나오는가 하면 다시 10분만 가면 벼랑이 나오고 그러니까 한 계곡을 돌고 한산을 넘으면 무엇이 나올지 모릅니다. 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우리들이 살아온 인생의 길이 그렇습니다. 평범한 길이 없고 밋밋한 길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가슴을 졸이면서 폭풍우 흑암 속을 지나가기도 하고 혹은 잔잔한 바다 위를 지나가기도 하고 말이죠.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다이나믹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고나면 그러면 항상 잔잔한 물가로 푸른 초장으로 그렇게 다니는 신앙생활만 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죄가 있어서 고난을 당하기도 하지만 죄가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적어도 이 험한 세상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정복하고 빛의 사자가 되어서 어두운 세상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도구로 쓰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렇게 매가리 없이 기르셔서 어디에다 쓰시겠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매일 푸른 풀밭에 앉아서 꽃 뜯어서 소꿉장난이나 하고 물가에 앉아서 담방담방 물장구치면서 튜부 놀이나 해서 어떻게 어두운 세상을 정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때로는 폭풍의 흑암 속을 지나게 하시고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차마 우리를 잊으셨다. 하고 생각될 그 때에 폭풍우 흑암 속에서 우리로 부르짖게 만드셔서 그 하나님과의 우리와의 보이지 않는 관계가 보이는 인생의 시련보다 훨씬 끈끈하다고 하는 것을 경험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토종닭으로 태어나면 이런 재미가 없겠습니까. 사람이니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진 인간이니까. 이러면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르짖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주님이 자기들을 잊지 않으신다는 것, 즉 하나님이 그 어려움 속에서 특정한 구원의 행동을 자기들에게 보이심으로서 자기들을 향한 사랑을 나타내신다고 하는 경험을 시인이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잘 믿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별로 이렇게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왜 그냥 살면 됩니다. 뭐 염려할 것이 있습니까? 죄를 지었으면 회개하면 될 것이고, 죄도 없는데 고난이 오면 주님께 특별히 부르짖으라고 하는 표시이고 우리를 잘 연단된 사람으로 세워서 우리를 아주 소중한데 쓰시려고 하는 그런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니까 감사하면서 감당하면 되고, 병에 걸리면 하나님 의지하고 간절히 기도하면 됩니다. 나을 병이면 나을 것이고, 죽을병이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의 꿈과 우리의 모든 소망을 어디에다 두었느냐에 의해서 인생이 불안해지기도 하고 평안해지기도 합니다. 내 꿈과 소원과 모든 기대를 하나님께 두고 그리고 그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사람, 특별한 어려움 속에서 주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볼수 있는 사람, 그래서 어려움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흑암 속에서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빛이신 자기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소중한 사람입니다. 감사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보세요. 하나님이 자기를 잊지 않으시는 이 감격적인 구원의 경험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부르짖을 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일어납니다.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걱정과 근심과 생각과 염려들, 이런 많은 것들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소진하고 탈진하죠. 그렇죠. 신경을 많이 쓰고 근심하면 입맛도 사라지고 체중도 줄고 눈도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심하면 귀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변도 제대로 안나옵니다.
이렇게 우리의 근심과 염려 걱정, 이런 것들은 우리의 전부를 요합니다. 그래서 말이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신앙을 말씀하시면서 세상의 유혹다음으로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뭐냐면 세상의 염려입니다. 세상의 근심과 염려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굳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재로 우리들이 환란과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서 오늘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주님이 나를 잊지 아니하셨습니다.”라는 감격적인 고백을 필요로 하는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때 근심과 염려로 인해서 쏟아버리는 이 정신적인 정력, 영적인 힘의 10분의 1만 이 기도에 모아도 아마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과 어려움이 닥칠 때 사단이 제일먼저 하는 일이 뭐냐면 우리를 기도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쟌 플라벨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성도가 자기의 마음을 지키기 어려운 위험한 때가 언제냐 하면 시련이 찾아올 때입니다. 그 때에 성도가 마음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유형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시련이 찾아올 때 성도의 마음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으로 가득 차고 주님에 대한 묵상으로 가득 차서 주님을 향한 친밀한 교제를 누리던 그 마음의 작용이 사라지고 모든 영적인 힘과 정신적인 정욕을 쏟아서 세상의 염려와 근심에 쏟아 부으니까 그러니까 급격하게 마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시련이든지 시험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비록 자기를 죄가 없지만 그 사람을 연단하기 위해서 오는 시험이라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시험자체가 어디에서 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시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험이 왔을 때 자기의 마음을 염려와 근심에 내어버려 주면 그다음에는 오늘 이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르짖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사단은 제일먼저 무엇을 이용해서든지 하여튼 성도로 하여금 특별한 위기의 상황에서 기도할 수 없도록 그의 마음을 결박하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런데 이 고전적인 수법은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변하지를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단의 궤계를 정확하게 파악한 사람들은 그러한 사단의 궤계가 너무 유치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그런 사단의 술책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늘 기도의 영을 빼앗기고 있으면서도 왜 그런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나 새롭고 무서운 시험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커다란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서 여러분도 깜짝 놀라리만치 여러분 자신이 변해가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까? 있죠. 그렇죠. 자기 자신도 “내가 어쩜 이렇게 변했을까.” “어, 이렇게 변했을까.” 그렇게 느낀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진짜 황당한 사람들 많습니다. 왜 철야기도 하고 그 다음날 점 보러가요? 통계에 의하면 점집에 드나드는 사람들 가운데 크리스챤들이 상당수랍니다.
그런데 참 너무 답답합니다. 그 신문에 오늘의 운세 보는 것도 죄입니다. 그것 뭐 그렇게 궁금해요. 양, 소, 뱀, 이런 것 나오는 것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보지도 말아야합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점 좀 봐 달라.” 그랬더니 점쟁이가 그러더래요. “점 꾀가 안나온다. 그러더니 너 예수쟁이지?” 그러더래요. “그렇다” 그러니까 “ 야, 여기는 왜 오냐?” 그러더래요. 그래서 “하도 궁금해서 왔다.” 그러니까 하는 이야기가 “야, 여기 와봐야 소용없어. 왜냐하면 어차피 니네 예수쟁이들은 팔자대로 안살아.” 그러더래요. 그러면 무엇대로 사나요? 하나님과의 관계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점쟁이가 예수만 믿었으면 상당히 진리로 가까이 다가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습니다. 상당히 가까이 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창피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거기 가는 것은 다 왜 그렇습니까? 시련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힘을 잃어버리니까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련과 어려움이 올수록 성도들이 더더욱 기도할 수 있는 자신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그것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자기를 관리해 나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성도의 성숙함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잘 통제하고 다스리는지에 의해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숙함의 표지입니다.
보십시오. 시인은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잊지 아니하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있는 특별한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그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아, 하나님의 은혜는 이제 다 했는가? 주님은 이제 나를 잊으셨나봐.” 그렇게 여러분들의 마음에 다가오는 그런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그런 문제가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잊지 않으셨다고 하는 구원의 행동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사람들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성도가 어떤 위기 속에 있고 한 사람의 성도가 아무리 절망적인 영혼의 상태 속에 있다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다해서 부르짖을 수만 있다면 그는 그 부르짖음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시련과 고통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부르짖을 때 부르짖는 그 기도자는 약하지만 그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전능하신 팔로 부르짖는 그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자기의 위대한 구원의 행동을 보여주실 때에 그 때에 그 구원의 위대한 행동은 우리의 인생의 역사를 바꾸어 넣고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을 놀랍게 바꾸어놓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을 할수 있도록 우리를 바꾸고 우리를 고치고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놀라운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도 두 번째로 얻게 되는 교훈은 여러분 자신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르짖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기도가 필요할 때에 즉시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뭐냐면 기도가 정말 필요할 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순발력 있게 “이제 이 상황, 이 어려움이 나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니 내가 기도해야 되겠다.” 이렇게 결심만 하면 순발력이 작동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수 있게 된다면 문제가 없는데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를 않기 때문에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에게는 따라서 어떠한 계기가 필요합니다. 그렇죠. 그래서 우리들이 수련회도 갖고 사경회도 갖고 그러는 것입니다. 사경회를 하고 수련회를 할 때에 제가 가지고 있는 아주 가장 다급한 목표는 뭐냐면 물론 궁극적인 목표는 여러분들이 좋은 성도가 되는 것이지만 다급한 목표는 뭐냐면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소망을 가지고 막혔던 기도의 문들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그러면 다시 탈출의 길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주 잘 드는 비유가 있죠. 그렇죠. (캄캄한 동굴에 갇혀서 갈 바를 모르고 방황할 때에 바늘구멍만한 그 틈새로 아주 가느다란 빛이 들어와도 사람들은 그 많은 어두움이 있는 쪽보다는 실낱같은 빛이 들어오는 쪽으로 발길을 옮기고 그 바늘구멍만한 빛줄기에 모든 희망을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비록 작기는 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밝은 바깥세상으로 가는 유일한 출구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문이 열릴 때에도 우리들이 똑같이 이런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여러분들이 이렇게 간절히 부르짖을 수 있는 기도의 영을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계기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늘 신앙생활을 잘하고 자신의 영혼을 관리해온 사람들은 이런 순발력이 아직도 남아있겠지만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감각 없이 살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려움이 많은 사람들은 이런 순발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특별한 계기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련회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온 마음으로 느끼고 그래서 오랫동안 죄와 불순종으로 굳어졌던 마음의 각질들을 벗겨내고 그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어디선가 화산이 폭발해서 용암이 분출하는 광경을 여러분들이 한번 TV에서 보신 적이 있죠? 굉장하죠. 어마어마하죠. 그렇죠. 그런데 그런 화산의 폭발이 있기 전에 먼저 막 산에 지진이 나고 산이 뒤흔들리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폭발하는 강도가 약하면 그런 소리만 나다가 그냥 잠자고 그냥 다시 몇 백년이 흘러가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그렇게 속에서 용암이 소리를 지르면서 폭발을 일으키다가 아주 딱딱한 땅의 껍질을 딱 깨뜨리면서 하늘 높이 불꽃을 뿜으면서 어마어마한 바위녹인 물들을 쏟아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죠. 무엇인가 여러분들의 마음에 강력한 움직임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런 껍질처럼 쌓여있던 각질들을 뚫고 기도가 쏟아져 나오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계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꼭 여러분들이 이 집회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으세요. 가장 좋은 것은 처음서부터 입원한 마음으로 참석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하나님 안 만나주시면 수련회가 끝나도 나는 못 내려가겠습니다.” 그런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참석할 수 없으면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이 각자의 사정을 아시니까 어느 것이 피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아시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들의 영혼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합니다.
여러분들의 심령이 움직여서 부르짖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여러분 역시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는가?”라고 절망하는 상황에서 이 시인처럼 언젠가는 “과연 하나님이 아를 잊지 아니하셨도다.” 고백할 수 있도록 그 구원의 행동을 보도록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한번 여러분들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 부르짖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기를 “가난한자“라 그랬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가난한자“ 히브리말로 ”에비온“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런데 이 ”가난한자“란 누구냐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시편에서 특별히 시인 다윗이 ”가난하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는 가난한 사람은 누구일까? 저는 이 시편에서 이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가난한자“ ”가난한 사람“ 여기에 대한 생각은 거의 정확하게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이라고 말씀하신 그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믿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성경은 이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여러 가지 국가적인 민족적인 배려가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사람을 향해서 ‘경제적으로 가난하다‘ 그럴 때에 그 사람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그런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의하면 만약에 이것이 밭이라고 하면 밭에 씨를 쫙 뿌려서 곡식을 잘 가꾸지 않습니까. 추수합니다. 그러면 귀퉁이에 이만큼을 베지 않고 내버려둡니다. 남겨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러면 그것은 새가 와서 먹고 들짐승들이 와서 먹고 지나가는 그야말로 가난한 행인들이 그것을 털어서 양식으로 삼는 것입니다. 나무위에 감이나 이런 것들이 두루두루 매달리면 그것도 깡충 뛰어서 따고, 사다리타고 올라가서 따고, 그래도 안 되면 돌맹이 던져서 따고 그래서 다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항상 끝에 일부분을 남겨놓습니다. 그러면 새들이 와서 잘 익은 과실에 부리를 대고 그것을 빨아먹으면서 연명합니다. 그리고 또 벌레들이 와서 먹고 그리고 진짜 먹을 것이 없는 나그네들이 와서 그 가지를 흔들어서 그 남은 열매를 따가지고 가서 먹게끔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난한자를 향한 배려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자”라고 할 때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은혜가 아니면 살수가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을 말합니다. 경제적으로 다른 사람의 은총이 아니면, 자비가 아니면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나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여기에서는 상당히 신앙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좀 나누어서 설명하면 우선 첫째는 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살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복이 있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부르짖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행동을 경험하고 “주님이 나를 잊지 아니했습니다.”라고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는데 그 때에 시인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느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신은 살수가 없다.”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심적인 상태, 그것이 바로 가난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바로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가난함을 경험했습니다.
신자가 마음속으로 느끼는 이 가난함,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내가 살수 없다.”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이 마음은 심지어는 죄를 지은 사람도 하나님을 만나게 만들어주고 오랫동안 불순종한 사람이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아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은혜를 회복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르짖는 기도가 모두 응답됩니까? 아니죠. 그렇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든 기도가 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한 부르짖음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행동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그렇게 부르짖는 우리의 심적인 상태가 제일먼저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절대의존적인 마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신자의 마음속에는 오직 주님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전부이시니까.
내가 이전에 아무리 많이 잘못하고 불순종의 길을 가서 내 죄악이 하늘을 찌른다고 할지라도 또 지금 내게 놓여있는 상황이 아무리 곤고하고 어려워서 수많은 사람의 도움과 물질의 도움을 가지고도 해결이 되지 않는 극한 상황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초월해있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하시면 하시고 안하시면 안하시지 하나님이 하시기 쉬운 일과 어려운 일이 하나님께는 없습니다. ( ? )하나님이 의지를 가지고 계신가 아닌가가 중요하지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하시면 하시고 안하시면 안하시지 어려워서 못하시는 것은 없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 하나를 떨어뜨리는 것이 하나님에게 어려운 것이겠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에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렇게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에게는 쉬운 일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값없는 은총이 아니면 내가 생존할 수 없다고 하는 절대의존적인 마음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자극하는 가장 훌륭한 무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이렇게 가난해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그 존프라벨이라는 청교도가 성도가 자신의 마음을 잘 간수하지 못하는 가장 어려운 환경을 무엇이라고 지적했느냐하면 풍요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섭리가 미소를 지어서 그래서 환경이 모두 그의 편인 것 같이 형통할 때 그 때에 성도가 가장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간직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탄한 길을 너무 구하지 마세요. 하나님도 그렇게 해주시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이 우리 인간이라는 상품이 변질되지 않는 증거가 있어야지 잘 생각해보세요.
방금 시장에서 펄펄뛰는 생선을 그냥 칼로 끊어서 싹 씻어서 소금을 뿌려서 랩에다 싸서 포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토막 난 생선이 이야기하기를 “아줌마! 나 그냥 따뜻한데 보관 좀 해줘 여태까지 얼음 속에 있었더니 추워 실온에 보관해줘.” 그런다고요. 그런데 그래서 실온에 보관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날 아침에 곰팡이가 확 슬고 썩은 생선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요. 추운데 집어넣어야합니다. 냉장고 냉동실에, 냉동실이 너무 잔인해보이면 냉장실에 집어넣습니다. 오들오들 떨게 만들어야지만 그 다음날 아침에 그 생선을 맛있게 구워서 혹은 튀겨서 혹은 졸여서 그것은 여러분 자유입니다. 이렇게 해서 먹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영원히 형통한 길만 계속 주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는데 우리가 감당을 못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니 저는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저 자신도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자기를 믿는 것이라고 했죠. 모든 실패의 지름길은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안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폭풍의 흑암 속을 헤치면서 오게 하셨으니까 요만큼이나마 살지. 그렇죠. 고속도로 같은데 그냥 굴러가게 내버려뒀으면 지금쯤 아마 여기에 발견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디론가 가서 냄새나는 존재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것보세요. 우리는 신앙의 와중에서 피 흘리는 시련의 길을 용감하게 싸워서 신앙을 지킨 사람이 평안할 때 순식간에 그 신앙을 모두 잃어버리는 경우를 많이 발견합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배가 고파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제사장 이외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으면서 그렇게 가난한 자들과 함께 고통 받으면서 지낼 때에는 잘 지켰던 신앙의 정절을 왕이 되고나서 부족한 것이 없을 때에 잃어버렸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시련은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매일 있으면 또 그렇죠. 하여튼 이번 시련은 물러가야 되겠죠. 그렇죠. 요번 시련은 일단 물러가고 그리고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들을 해주시기를 그렇게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하시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적절하게 우리를 다루십니다. 그 속에서 우리들이 이제껏 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 때에 그런 어려움들을 만났을 때에 우리의 “마음의 가난함”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이르는 첩경이고 그런 어려움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강팍해지면 패망으로 이르는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에서 이 가난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시련이 오래갑니까.? “주님이 이제 나를 잊으셨나.” 이렇게 타령이 나오리만치 고난이 깊어졌습니까.?
그러면 제가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희망이 없다고 하는 그런 고백의 벼랑에 한번 서보았느냐고요. 하나님이 자기가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기도해도 쉽게 물러나지 않는 고난에 그들을 두실 때에는 그들로 하여금 고백의 벼랑에 서게 하기 위해서 벼랑 끝에 서서 “하나님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난 아무 희망도 없습니다. 내 인생과 그리고 내 모든 소망은 오로지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되어보았느냐고요. 그 끝에서 부르짖는 그 기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보이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벼랑 끝에 자기가 선 것을 깊이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놀랍도록 돌아서는 그런 은혜로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것이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두 번째 가난한 마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이 가난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희망도 없다.”라고 하는 고백인데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길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그 은혜밖에는 자기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그런 하나님의 은혜밖에 희망이 없다는 고백을 실재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나타내 보이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그가 자기의 고통을 인해서 울고불고 고통스러워하고 때로는 열렬하게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마음을 갖지 않은 사람일 경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행동을 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것 있지 않습니까? 똑같이 고난 속에서 기도하는데 신자가 그리고 똑같이 열렬합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사람은 자기가 죽은 가운데 열렬합니다.
그런데 같은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의 열렬함은 자기가 살아있는 육신적인 열렬함이 섞여있습니다. 그 속에. 마치 이런 어려움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꺾고야말겠다.” “아멘을 세게 하면 하나님이 승복을 하시려나.” 그런 것들을 사람들이 잘 부추깁니다. “밀어붙여.” 뭘 밀어붙여요. “기도로 밀어붙여.” 뭘 기도로 밀어붙여.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무엇인가 자신에게 있는 무엇인가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의 변화가 필요한 것을 인식하면서 그러면서 진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지 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이 내 상황에 대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나는 그것을 믿을 것이며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하는 그런 마음의 자세를 갖춘 사람이 아니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은 이미 자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밖에는 의지할 데가 없다는 사실을 안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을 법으로 알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 자신의 모든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해결하는 첩경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굳게 믿는 사람이 바로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난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죠. 심령이 가난하게 되고 그리고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에 그 때 여러분들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태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함으로 믿게 되었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다가왔을 때 여러분들은 그 말씀에 대해서 정직하게 반응하며 그러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여러분들을 움직여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무엇인가 바른 결단을 하게 만들었을 때 여러분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속에 계속 영향을 끼쳐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한번이나 두 번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순종의 생활을 해나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 주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여러분들이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던 것들조차도 버려둘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 가장 큰 소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는 것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은 여러분들을 변화시키셔서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가장 훌륭한 방편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믿었을 때 여러분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모함으로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했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수련회에서는 한번 여러분들이 이제껏 까지 고집해 왔던 여러분의 사고방식을 접고 그리고 정말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진정한 구주이시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무엇이든지간에 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나를 향한 구원의 행동의 표지로 보고 내가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뜻을 꺾고 주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를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받아들이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고백을 가지고 참석해서 은혜를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의 치료를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환자가 이제 죽을병에 걸리면 의사의 치료를 받으러갑니다. 죽을병에 안 걸려도 의사에게 치료를 받지 않습니까? 치료를 받을 때 어떻습니까. 의사가 그 진찰실에서 왕입니다. “옷 벗어.” 그러면 옷 다 벗습니다. “바지 내려.” 그러면 남지들도 바지를 다 내립니다. “드러누워.” 그러면 드러눕고 “엎드려.” 그러면 엎드리고 “엉덩이 들어.” 그러면 엉덩이 듭니다. “이쪽으로 드러누워.” 그러면 이쪽으로 드러눕고 “저쪽으로 드러누워.” 그러면 저쪽으로 드러눕습니다. 시키는 대로 다합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를 수술하기 위해서 고치기 위해서 저는 별로 수술을 받아본 적이 없지만 어쨌든 불빛이 환한데서 전신 마취 시키기도 하고 부분마취 시키기도 합니다. 부분마취 시키면 자기 살을 찢는 소리가 ‘샥샥’하고 납니다. 가위로 살을 자르는 소리도 납니다. ‘서걱서걱’, 가죽 자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칼 세트도 준비 되어 있고 그 때에 환자가 어떻게 합니까? 누워있는데 의사가 이런 칼을 가지고 수술하려고 하는데 환자가 “아, 칼이 그게 뭐예요? 좀 예쁜 것 없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예쁜 것으로 잘라야지.” 그렇게 합니까.? “이게 뭐예요? 좀 잘 자르지.” 그러면서 의사에게 대드는 사람 있습니까? “누가 그런 약 쓰라고 했어? 파란 약 쓰라 그랬지.” 그러는 사람이 있느냐고요.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는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치료될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신뢰하고 거기에 자기를 맡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집회를 하게 되면 칭찬받으려고 모이는 것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책망을 받으려고 모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이 뭐냐면 우리의 안팎에 그 동안에 우리들이 열심히 사노라고 살았지만 때로는 우리 안에 내제하는 치명적인 부패한 성향 때문에 혹은 우리 자신의 말씀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이해 때문에 혹은 바르게 이해해도 우리들이 순종하지 않는 생활의 반복적인 실천 때문에 무엇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들어오게 되었을 때 그 때에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렇죠.
성경은 우리에게 죄인들의 상태를 병자로 많이 표현하지 않습니까. 병든 사람으로, 치명적인 병든 사람으로 많이 표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오신 목적에 대해서도 말씀하실 때 “인자가 온 것은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왔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지만 병든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하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죄 가운데 살아가는 그 상태를 질병의 상태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고치는 것입니다. 고칠 때에 그냥 가만히 누워서 “무엇이든지 주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볼 때 내게 옳지 않은 것은 제거하시고 나를 고쳐주시옵소서.” 라고 하고 하나님의 그 치료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의 궁극적인 불행은 망가진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가지고 사람들과의 관계에 질병이 생기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용납할 수 없는 결함이 생겨났을 때에 그것들이 이상현상을 일으켜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 우리의 인생전체를 병들게 만들고 그리고 우리의 그런 질병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도 감염시키면서 충분히 내가 고쳐졌더라면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관계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을 등지고 심지어는 목자조차도 등지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그것이 망가진 우리 자신이 하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이 망가지지 않은 채로 이 세상에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다 아무도 온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차피 온전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다 그 인간이 그 인간이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면 누구든지 조금씩 병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육체에 조금씩 결함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죠. 다 있어도 심하게 병든 사람과 약간 병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지금도 병원에 가면 3년 4년 5년째 의식도 없이 빨대 꼽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 사람도 망가진 사람이고 병자이고 저 같은 사람도 망가졌죠. 엊그제는 병원에 갔더니 이비인후과는 제가 당골로 갑니다. 의사가 입을 벌리라 그래서 입을 쫙 벌렸습니다. 그랬더니 “아” 그러래요. 그래서 “아” 그랬습니다.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더니 “자기가 이비인후과 의사를 하고 선생님처럼 편도가 큰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래요. 그러더니 신기록이래요. 어떻게 그렇게 클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녀석을 뭐하러 그렇게 달고 다닙니까? 빨리 잘라버리지.”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결단을 못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요. 저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부었습니다. 그리고 한 평균 두 달에 한번정도는 병원에 가야합니다. 그것을 벌써 이렇게 긴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빨대 꼽고 병원에 누워 있는 그 사람하고 나하고는 천지차이입니다. 나는 그래도 살았지 않습니까? 먹기도 하고 말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일도하고 그러면서 가끔 아파서 드러눕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자기하고 나하고 똑 같냐고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하나님의 치료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은 비교적 영적으로 그래도 아직까지 힘이 남아서 목발을 짚고 다니는 것처럼 간신히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에 명맥을 이어갈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질병이 치료받지 않고 점점 깊어지면 나중에는 정말 여러분들이 목발도 내려놓고 병원에서 드러누워서 빨대를 꼽고 식물인간과 같은 영혼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기회 있을 때마다 특별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수술대에 누워서 여러분들을 진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그 치료의 행위 앞에 굴복하고 그리고 마음껏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고치셔서 그래서 여러분들을 새로운 사람으로 쓰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정말 기억해야합니다.
한번은 오래되었습니다. 한 15년 전이었습니다. 택시를 밤에 탔는데 막 달려요. 택시 운전수들 밤에 막 달리는 것 유명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달리는지 그렇게 빨리 안가도 되는데, 쌩쌩 달려요. 그러더니 한강다리 한복판에 왔는데 “차가 왜 이러지? ” 그래요. 한 20년 쯤 되었나요. 그런데 서요.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바퀴가 이상하데요.” 그러더니 가서 들어다보더니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트렁크를 열더니 갑자기 공구를 꺼내요. 그래서 빵구 났나? 그랬더니 빵구는 아니에요.
막 돌리고 난리를 치더니 거기 와서 자기 운전석에 와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땀을 쭉 닦는 것이었습니다. “아, 오늘 진짜 죽을 뻔했네.” “손님 운 좋은 줄 아십시오.” 그래서 그것이 무슨 소린가 했더니 바퀴소리가 이상해서 가보니까 볼트 두 개가 거의 풀어졌데요. 그래서 참 걸려도 어쩌다가 그런 택시가 걸려서 볼트두개인가 세 개가 거의 풀어졌데요. 요즘은 차가 좋아서 하도 궁금해서 물어보았더니 메카니즘이 바뀌어서 이제 달리면 이것이 자동적으로 조여진데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옛날이니까 이것이 풀어진 것입니다.
그랬다면 또 신문에 날뻔 했습니다. 왼쪽 바퀴하나 날아가고 중앙선 침범해서 그래서 장가도 못가고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니까 대게 그렇게들 안하지 않습니까? 조금 이상이 생기면 어떻게 하죠? 당장 공장에 들어가면 띄워서 정비를 하고 또 끌고 다니고 또 정비하고 끌고 다니고 그래도 안전한 차는 아닙니다. 그러나 수시로 그렇게 정비를 하면서 끌고 다녀야합니다.
하물며 여러분들의 인생을 움직이는 것은 여러분들의 영혼이고 여러분들의 영적인 상태는 여러분들의 삶을 움직이는 사령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치료되지 않을 만큼 여러분들은 건강합니까? 벌써 여러분 핸들이 말을 안 듣죠. 그렇죠. 주일날이면 교회가야 하는데 다른 데로 가지 않습니까? 핸들이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리고 브레이크를 밟는데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듣고 계속 갑니다. 보세요. 벌써 심각한 증후들이 여러분들의 인생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때 하나님의 치료의 행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한번 내 인생의 가던 길을 멈추고 3일 더 빨리 간다고 해서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한번 여러분들이 가던 인생의 길을 멈추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여러분들을 치료하고 고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보고 그리고 무엇이든지 여러분들을 고치려고 할 때에 기쁨으로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행동을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고치심으로서 주님의 쓰심에 더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신앙을 가진 마음이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을 때 이 시인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행동을 통해서 자기를 잊지 않으시는 위대한 증거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간증이 여러분들의 간증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얼굴을 가리신 것은 잠시입니다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사54:8)
수요일마다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시편9편 12절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하게 되어서 낮아진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신다고 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그 유명한 이사야53장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의 장 바로 뒤편에 오고 있습니다. 이미 40장부터 이사야서의 제 이부가 시작되는데 여기에서는 전반부에 있던 하나님의 진노에대한 예고가 끝나고 여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부터 돌아오는 귀한의 이야기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영광스러운 영적인 회복에관한 이야기들을 담고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영광스러운 회복은 일차적으로는 포로귀환을 통해서 성취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제 이 이스라엘 백성이 궁극적으로 상징하는 교회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시대를 통해서 이 예언이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앞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당했던 징벌의 곤고함과 그리고 견디기 힘든 고통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가지고 계신 본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계신 진짜 마음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너희를 잊지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잠시 남편에게 사랑을 받았다가 버림을 받았던 여인이 다시 남편의 사랑속으로 들어오는 그런 이야기들을 이사야 선지자는 언급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가 읽은 바로 이 성경구절 8절이 나오는 것입니다. 7절과 8절은 한짝을 이루면서 함께 되어있는데 오늘 편으상 8절만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절과8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 )이야기한 모든 비유의 결론부분입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이사야서 전체가 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평현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하고 8절에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이것이 짝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그것이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이것이 짝입니다. 짝은 짝인데 7절에 나오는것과 8절의 짝이 7절의 내용을 점진적으로 더 설명해주면서 8절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이것의 구체적인 설명이 뭐냐하면 넘치는 진노 때문에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다. 이것이고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하면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하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진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노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건강을 앗아가시거나 혹은 잘나가던 사업이 기울거나 가족들간에 불행한 일이 생기거나,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다시 볼수없도록 데려가시거나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라고 할 때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은 우리들이 사랑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하나님이 빼앗아 가시는 것, 그래서 우리 자신이 물리적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는 것을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진노를 극하게 발하실 때 격렬하게 발하실 때 그 진노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효과를 가져올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강력한 진노는 이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 ? ) 것들을 빼앗기게 만들고 혹은 집착하던 것들을 잃어버리게 만들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물질적으로 고통을 주시기도 하시고 우리를 훈련시키고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커다란 어려움을 당하게 하기도하십니다. 그런것들을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은 보다도 본질적인 진노의 한표현일뿐입니다. 보다더 본질적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표현되는 것일뿐이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그를 징벌하셔서 손보시지 않으면 안될 정도가 될 때에는 이미 우리들의 영적인 감각들이 많이 마비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인것보다는 오히려 물리적인 것들에 더 많이 영향을 받고 그리고 영적인 것 보다는 물리적인 것에 의해서 더 많이 자극을 받게됩니다. 그렇죠. 그리고 영적인 것들에 대한 감각은 오히려 떨어지고 육적인 것들에 대한 감각은 늘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무슨뜻이냐하면 신앙적으로 많이 깨어있고 영적으로 살아있을 때에는 그래도 없으면 없는대로 살지. 또 뭐 돈을 좀 잃어버릴 일이 생겨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되지 이렇게 생각을 하고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사명을 주셨는데 내가 이런 사명을 감당하지 못해서 어떡하나, 또 내가 요즘 하나님 앞에 기도생활 하지 못해서 어떡하나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못해서 어떡하나. 내가 명색이 누구누구인데 이렇게 주님을 섬겨서야 어떡할까. 이런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예민해지고 육적인 것들에 대해서 둔감해지는데 반대로 진노하셔서 그 사람을 치시지 않을 정도가 되면 이미 그가 굉장히 많이 그 마음자체가 육적인 사람으로 변해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는데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거나 말거나, 교회가 되거나 말거나, 사명이 무엇인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 신문 들여다보다다 주식값이 떨어지면 한숨을 치쉬고 내리쉬고, 그리고 사소한 것들에 목숨을 건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영적으로 깊이 침체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실수 없을 정도가되면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매우 무디어집니다. 그리고 영적인 상태는 매우 후퇴하는 것입니다. 육적인 것들에 대해서 예민해지고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 둔감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 그럴 때 생각하는 것들이 대게 뭐냐하면 내가 육신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을 빼앗기는 것, 그리고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것, 그래서 고생을 실컷하는 것, 안락한 생활을 잃어버리는 것,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적인 진노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 본질적인 진노는뭐냐? 오늘 여기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향해서 그 얼굴을 가리시는 것, 그것입니다. 성경에보면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신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신다. 그런 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얼굴빛,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선택되지 않은 백성들, 범죄한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얼굴빛을 그들에게 비취시는 것이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주의 자녀들에게 얼굴빛을 비추시는 것은 하나님의 탁월하고 특이한 은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얼굴빛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비추실때에는 자기의 백성들을 기뻐하실 때. 두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아주 대견해 하고 기뻐하실 때. 또 하나는 뭐냐하면 대견스럽지는 않지만 불쌍히 여기실 때 하나님께서 그 얼굴빛을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나오는 후자입니다.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하나님의 진노“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이 얼굴빛을 가리시는 것, 그것이 우리 개인적으로 적용된다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쉽세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서 얼굴빛을 비추시면 자기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얼굴빛을 비추어 주신다고 하는 것을 거의 감지하지 못하는예는 거의 없습니다. 성경의 용례를 보면 여호와께서 얼굴빛을 비추실때에는 그 백성들이 자신을 향해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추신다고라고 하는 것을 그 백성들이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 얼굴빛을 비추신다.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은혜, 즉 감지할수도 있고 감지할수 없는 일반적인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은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그리고 그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핵심은 뭐냐하면 영적교제입니다. 그 교제는 혼자하는 것이 아니지않습니까. 그래서 말이죠. 성경을 읽을 때 여러분들이 성경공부 배우러다닌다고 하지말고 성경공부 잘못배우면 큰일납니다. 그러니까 제대로된 사람에게 제대로 배워야지 아무대나 가서 성경배우면 안됩니다. 성경을 배우는데 성경을 전체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단어들을 깊이 배우는 것 이것이 성경에 대한 눈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예를들자면 사랑, 구속, 은혜, 선택, 하나님의 백성, 의, 진노, 이런 중요한 단어들이 있지않습니까. 그래서 한번씩은 제가 그런 단어들이 나오면 거의 1시간가까이 설명을 하지 않습니까. 매번 나올때마다 하지는 못하지만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깊이 배워야합니다. 그러면 성경을 읽어나갈 때 그런 단어들을 통해서 거기에 담긴 풍부한 뜻들을 알게됨으로서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깊이가 있게끔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보면 하나님의 얼굴빛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성경에. 시편에서 시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할 때 쓰는 극상급의 표현이 무엇인지아세요. ”주는 주의 백성들에게 얼굴빛을 비추소서“ 또 축복기도 할 때도 ”여호와는 내게 너를 향해 얼굴빛을 비추시고“ 이런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최상급의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 얼굴빛을 비추신다할 때 그것은 신앙이 있으면 알게되고 신앙이 없으면 잘 모르고 알수도 있고 모를수도 있고 느낄수도 있고, 안느낄수도 있는 그런 일반적인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출때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보여줄수 있는 최고의 진노는 뭐냐하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서 그 얼굴을 가리우심으로 그 얼굴빛을 비추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추시지 않으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사사기를 보면 이런 사실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사기를 보면 네가지 싸이클의 지속적인 반복입니다.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축복해주시고 그러면 번영하죠. 그러면 타락합니다. 타락하면 하나님이 징벌하시고 징벌하시면 회개하는 계속적인 반복의 역사가 사사기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크게 범죄합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이방족속을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 쑥대밭을 만드십니다. 그래서 커다란 전쟁이 일어나고 그렇게 되어서 약한 나라에게 짓밟혀서 겨우 식민지 백성에 다름없는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했던 이유는 무엇때문이냐하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막보면서 범죄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그랬느냐? 케들어가보면 ( ? )없습니다. 더케들어가보면 뭐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속에 수련회 마지막날 이야기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무엇이라고 했느냐하면 하나님과 그의 행하신 위대한 일을 알지못하므로 백성들은 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했다. 그것이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에게 함께 하셔서 행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다 잊어버리니까 그 사람들이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의 무신론 시대에 가까울 정도로 그렇게 사사시대가 어둡게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왜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는가 궁극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그 백성을 향해서 얼굴빛을 비추시지를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범죄를 해서 그 백성들이 두들겨 맞고 포로고 끌려가고 하는 그런 것은 하나님의 진노지만 그러나 그것은 보다 본질적인 진노의 결과에 불과한 것입니다. 깊이 파고들어가보면 하나님의 핵심적인 진노는 뭐냐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어떤 이유로 인해서 영적인 교제가 끊어지고 사라진것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얼굴빛을 더 이상 부치시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바로 하나님이 얼굴빛을 감추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노입니다. 이어서 내가 진노하였음으로 네게 얼굴빛을 가리웠으나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맛보아야했던 가장 커다란 진노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이렇게 우리들이 두들겨맞고 깨뜨려지고 해서 사업이 망하고 불행한 상황이 계속되고 가슴아픈 그러한 상황들이 연출되고 할 때에 ”아, 이제 하나님의 진노가 시작되었구나“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면뭐냐. 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주님의 자녀,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 그 구속의 은총을 힘입어서 주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과의 사이에 정말 아름다운 영적인 교통이 없다. 주님의 그 얼굴빛으로부터 비추는 특별한 은혜가 내게서 없다. 신앙생활은 그저 꾸역꾸역 하기 싫어도 그저 이제껏 계속되어온 성실성을 바탕으로 꾸려나가고 내게 맡겨준 사명은 그저 일이니까 그저 해나갈뿐이라고 하는 이런 것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한없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그와의 영적인 아름다운 교감이 없이 살아가는 그 백성들의 모습은 그것은 곧 그들에게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앗아가지 않아도 잃어버릴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그들이 지금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이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 하나님이 언제나 자기를 특별히 여기시고 그 얼굴빛을 비추셔서 내가 하나님의 선택받고 사랑받는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신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 이런 것들을 알게하시고 또 보게 하시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시는데 그런것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아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고통스러운 상황이 벌어지도록 만들지 않으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는 상관이 없는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지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유다 백성들이 결국은 포로로 끌려가면서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이 모두 망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끌려가면서 나라가 망했습니다. 나라가 이미 그렇게 망하기 전에 그것은 하나의 하나님의 행동개시일뿐이고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은 거듭되는 예레미야 선지자나 이런 선지자들의 아름다운 아주 소중한 신앙의 경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고 주님을 향해서 돌이킬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행동개시를 하셔서 그들이 포로로 끌려갈 때에는 그들이 그것을 진노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적인 진노는 훨씬 그 이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오늘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최대의 본질적인 진노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그 얼굴빛을 가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최고의 축복이 무엇이냐라고 물을때에 하나님께서 이것도 주고 저것도 주셔서 이 세상에서 실컷누리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의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여기시고 우리와 특별한 교통을 누리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아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해주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커다란 축복입니다. 이렇게 말할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님을 잘 믿는다고 해서 그 모든 사람을 재벌로 만드시는 것도 아니고 또 모든 사람을 다 이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신실하면서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을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운데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입으면서도 지금 남모르게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해야 하는 사람도 있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알 수 있습니다. 뭐냐하면 내가 지금은 비록 고난을 당하고 가난하고 그리고 나를 많이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이 외톨박이 처럼 살아가도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는다.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진정한 축복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우리로 부요하게도 하고 또 가난하게 하시려니와 그러나 나의 진정한 축복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얼굴빛 앞에서 살아간다. 그것, 주님이 내 맘에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어서 그래서 나와 주님 사이에 아름다운 교통이 있고 아름다운 신앙의 교통과 이런 것들이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살아간다. 그런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 행복 이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늘 있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축복입니다. 이것은 두 개다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도 보다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얼굴빛을 가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축복도 보다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그 얼굴빛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잘 입고 잘 먹으면서 사는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물질이나 혹은 이 세상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들보다도 오히려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 이러한 영적인 진정한 축복을 그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그러한 영혼의 진정한 축복, 보다 본질적인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오히려 이 세상사람들이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 명예나 재물이나 이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 아낌없이 쏟아놓을수 있는 허비할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진정으로 주님과의 교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얼굴빛 아내서 사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보면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시는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여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많은 여인이라고 되어 있는 그 여인말입니다. 300데나리온의 향유였습니다. 근로자의 1년치 월급이었으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한 많이 나가면 3000만원 적게나가면 한1500만원 정도의 그런 가치를 지닌 향유였습니다. 그것을 모두 예수님의 한끼 식사에 부어버렸습니다. 무엇때문이었습니까? 그렇게 부으면 예수님이 10배나 복주시리라고 믿는 마음, 십일조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부어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몰랐을 때에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제일 소중했는데 죄인을 용납하시고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나니까 그다음에 그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나같이 죄많은 여인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누리면서 살수있다라고 하는 것, 그것이 그것을 아낌없이 예수님께 쏟아붓도록 만들어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참다운 축복들을 모두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주워 모아도 그를 진정으로 부요하게 진정으로 그를 축복받은 사람으로 만들 수 없는 것들을 끌어모으고 집착하고 붙들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성경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가장큰 진노는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그 얼굴빛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기도할수 있어야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시는 모든 것을 가져가실지라도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 꼭가져야 할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참 사랑입니다. 그 얼굴로 비취는 그 얼굴빛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비추는 얼굴빛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꼭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할 바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하면 첫 번째가 진노를 보여준다면 두 번째는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줍니다. 긍휼을 보여주는데 그 긍휼은 어떻게 나타나느냐하면 내가 진노함으로 잠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기에서 두 단어가 서로 대칭을 이루는데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우시는 진노로 말할 때에는 잠시라는 말이 기록되어있고 하나님의 긍휼의 의미에는 자비를 말할 때에는 영원한 이란 말이 붙어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향해서 얼굴빛을 가리시는 적이 있는데 그것은 잠시라는 것입니다. 즉 무슨뜻이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서 궁극적으로 가지고계신 간절한 마음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이 이렇게 깊이 얼굴빛을 비추어 주시면서 함께 교통하면서 사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간절한 소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소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영적인 깊은 침체가운데 있다가 다시 영적으로 회복될때에 그 때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적인 회복을 위해서 막 몸부림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막 몸보림칠 때 어떤 때는 하나님은 묵묵부답하신데 나 혼자 몸부림치는 것같은 착각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느낌이지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큰 행복은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교통하시면서 사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서 얼굴빛을 비추심으로서 특별한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 그래서 그 백성들이 당신을 통해서 특별히 비추는 그 은혜의 빛 아래서 하나님 자신 때문에 말할수 없이 행복해 하는 것, 그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을 깊이 공경하는 그러한 얼굴빛이 비추는 그러한 특별한 은혜의 삶을 우리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더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들이 바르고 의롭게 잘 살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충만할 때에 일반적으로 이런 은혜의 빛을 비추어주시지만 도저히 그 백성이 그렇게 살수없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런 얼굴빛을 비췸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대도 그들을 뉘우치게 하셔서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의롭게 살지도 못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특별하게 살지도 못한 그 백성들에게 매우 탁원하고 특별한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 은혜속으로 돌아오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하나 깨달을수 있는 사실은 뭐냐하면 혹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잘못함으로 주님이 우리들을 다루시기 위해서 우리를 훈련시키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의 얼굴빛이 가리워진 것 처럼 그렇게 우리를 다루시기도합니다. 늘 뵈올수 있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그치고 주님께로 들려오는 아름답고 그 명징한 음성들이 사라져갑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비취는 참된 은혜의 빛 그리고 신령한 은혜의 정서가 매마르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작은 죄를 지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실로 혹독할 정도로 긴 세월동안 이 어둠속에서 신음하게 만드시는구나 하고 우리 죄 보다도 더 크게 우리를 다루시고 우리를 향해서 얼굴빛을 비추시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그러한 자신의 영적인 상태 때문에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느낌이고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너무나 간절히 당신 자신이 우리와 더불어 교통하고 하나님의 그 참다운 은혜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그런 진실한 소원,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회개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부어지게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됩니다. 마치 이제 시집 장가 가서 아이낳고 눈물을 많이 쏟아보면 엄마 아빠 마음을 알게되듯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됩니다. 그러니까 은총이 이루어지고나면 우리의 죄에 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굴빛을 가리신 것이 정말 잠시였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회복의 소망을 갖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긍휼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그 긍휼이 무엇이냐?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인데 이 긍휼을 논리를 초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긍휼이 필요할 때 대부분 그들이 상처입은 상태에서 깊이 고통하고 아파하는데 그 상처와 고통이 결국은 어디에서 당한 것입니까? 자기가 하나님을 거스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당하게된 고생, 당하게된 고통, 당하게된 아픔이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를 불쌍하게 여기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당한 것이니까. 그런 상처와 고통,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대들과 주님뜻대로 안살기 때문에 당한 고통이니까 자기는 자기 고통만 생각하지만 그렇게 상처를 많이 입도록 하나님을 거스려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얼마나 많이 고통을 당하셨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논리를 뛰어넘는 것이 긍휼입니다. 나에게 고통과 그리고 배신을 안겨주기 위해서 상처를 입었을지라도 그것은 잊고 그리고 그가 저렇게 아픈상태속에서 시달리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고통스러운 상황일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이 논리를 뛰어넘는 사랑, 이런 것들이 바로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긍휼의 출발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자비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슬픔어린 사랑입니다. 자비라는 말이 기가막힌 번역입니다. 슬픔어린 사랑입니다. ‘자‘ 자애롭다는 말이죠.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비’는 슬프다는 것입니다. 너무 사랑해서 슬프도록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항상 슬픔이 공존합니다. 사랑하지 않았을 때는 잘 못먹든 바짝 마르든 어디가서 넘어져서 코가 깨지든 아프던 냉혹한데 사랑하게 되면 늘 그 사람의 상태,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의 놓여있는 형편에 따라서 자신도 아프고 고통스럽고 하는 것들을 함께 교감하면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항상 슬픔이 같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얼굴빛을 가리우고 나라를 다 잃어버리고 포로로 끌려갈 그런 상황이 되는 모든 비극들이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불의하게 살아서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하나님께 범죄해서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스스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얼굴빛을 거절함으로 당하게된 고통이었거든요. 그런대도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의 원인을 파고들어가시기 보다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그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 그 자체를 보시면서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인해서 슬퍼하시면서 무엇인가 그들을 그 고통속에서 건져주시고자 하는 의지를 하나님이 가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의 행동인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를 설교하면서 아주 제가 생생하게 묘사를 한적이 있었는데 비행기를 타보면 이런 것들이 아주 선명하게 들어납니다. 뭐냐하면 막 비행기가 뜨냐 못뜨냐 할정도로 구름이 가득끼고 바람이 많이 불고 비가옵니다. 비가 오는 것은 비행기가 뜨는데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데 바람이 부는 것은 문제가됩니다. 무서운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리고 막 앞을 볼수없을 정도로 비가내려요. 캄캄해지면서 대낮에도 자동차들이 라이트를 켜고 다녀야할 정도로 그렇게 캄캄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요란하게 번개가 때리고 그리고 컴컴한 하늘을 가르면서 한줄기의 빛이 사선을 그으면서 언덕아래로 떨어지고 나무들이 부서지는 소리가납니다. 낙뢰입니다. 쾅, 하는 소리가납니다. 어떤때는 얼마나 큰지 자다가 깜짝 놀랄정도로 그렇게 낙뢰가 치고 비가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겠다. 그래서 비행기가 뜹니다. 그러면 단번에 비행기가 하늘을 향해 차고 올라갑니다. 그러면서 1000, 2000, 3000-7000 막 8000 심하면 10000미터까지 올라갑니다. 10킬로 꼭대기까지 올라갑니다. 10킬로까지도 필요없도 6000미터까지만 올라가면 거기에는 비도 없고 어두움도 없습니다. 그냥 아래 검은 구름도 없습니다. 왜 구름은 아래있고 태양은 위에서 비추니까. 언제나 비행기를 타고 그러니까 비행기가 구름을 통과하고 구름밑에 있을 때는 어두운 구름이 있지만 그 구름을 뚫고 올라가서 파란 하늘이 있는 7천8천미터의 창공에 올라가면 까만구름 없습니다.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있을수가 없습니다. 구름 위에서 빛이 비취니까 밤을 제외하고는 해가 없는 적이 없죠. 밤에는 어차피 구름도 안보니이까. 낮인데 항상 해가 있으니까 그 찬란한 해가 구름 위에서 해가 비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먹루름도 없고 천둥도 없고 번개도 없습니다. 다 그것은 아래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위로 올라가면 그냥 양떼들이 다니는 것과 같은 구름이 저 아래에 찬란한 햇볕을 받으면서 펼쳐져있고 하늘은 항상 파랗습니다. 밤을 제외하고는 항상 파랗습니다. 그리고 창공을 가르면서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 위에는 태양이 항상 있습니다. 그런데 밑에 사람들은 “오늘은 해가 없네.“ “해가 안나네“ 우리 흔히 그런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아유, 오늘은 도대체 해가 안나네“ 빨래를 널면서 ”해가 좀 나야할터인데“ 해 항상 있습니다. 없는때가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입까 구름이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우리가 구름이 걷히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고 믿고 구름이 가리고나면 하나님이 이제 우리를 버리셨나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막 번개가 때리고 낙뢰가 터져서 그래서 산기슭의 나무들이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나가는 광경을 보면 ”아, 하나님이 우리를 진노하시는구나” 산에 나무들이 꺽이면서 급류를 타고 흘러 내려가는 소용돌이 치는 광경을 보면서 "아, 정말 하나님이 이 땅을 향해서 진노를 퍼부으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이제 태양은 없구나“ 그런데 사실 구름을 뚫고 올라가면 태양은 언제가 거기 있었느니라. 항상 거기 있었습니다. 밑에서 느끼는 것은 현상일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나봐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나봐 이제는 주님이 나를 더 돌아보시지 않아봐”라고 하는 이러한 무수한 고백들은 다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태도에 의해서 발생하는 상황들을 보면서 느끼는 다양한 기복일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가 거기 계셔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굴빛을 너희에게서 가리시고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로부터 떠났다.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히 잊으셨나보다 너희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너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보여주신 본질적인 진노일뿐이요. 그러나 사실 그 본질적인 진노의 껍질을 깨고보면 거기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은총, 자기의 택한 백성들을 향해서 그치지 않는 마름이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긍휼이 있다. 그것이 바로 너희에게 다시 얼굴빛을 비추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은총의 근거가된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러분들이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셨나보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이렇게 몸부림쳐봐야. 이제는 내게는 희망이 없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멀리 떠났어 주님의 은혜로 돌아가고 그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빛 아래에서 살기에는 내가 너무나 멀리 하나님을 떠나있어“ 그렇게 말하죠. 그러나 그것이 정말 사실입니까. 여러분들이 느끼는 그러한 판단들이 정말 구름아래서 느끼고 있는 다양한 현상에 대한 생각일까요. 아니면 구름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서 태양빛을 받는 그 위치에서 본 본질적인 생각일까?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향해서 많이 변했지만 나는 언제나 동일하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또한 내일도 영원히 변함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시대가 변한다고 해서 주님을 찾는 방법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 마음의 진실한 자세와 태도 하나님이 그를 열납하시면서 보시는 것이 시대가 흐름에 빠라서 그 본질적인 것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래서 우리들이 느끼고 있는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구나. 이제는 주님이 나를 잊으셨나봐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께로 내가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멀리 떠나와 있어“ 이렇게 느끼는 모든 것들이 구름 아래서의 느낌입니까. 아니면 구름 위에서의 찬란한 태양빛을 받으면 느끼는 느낌입니까. 오늘 선지자는 우리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느끼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는 느낌일뿐이가 본질적으로는 잠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얼굴을 가리우시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잠시일뿐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긍휼, 주님의 은총, 그리고 하나님의 다함이 없는 진실한 사랑,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늘 이 시간에도 한가지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합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한 자기의 자녀,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자기의 백성들을 결코 잊지아니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나를 잊으시것 같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잊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이 나를 향해 얼굴빛을 가리셨다면 그것은 잠시일뿐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사람을 향해서 다시금 영원한 자비로 말미암는 긍휼을 보여주셔서 주님 앞에서 살게하실 것이다. 이런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때에 주님께서 관연 여러분들을 잊지아시는 하나님이심을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4.섬기는 자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①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6:10)
이 히브리서는 주후 한60년경에쯤 씌여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 히브리서 저자가 누구냐? 그것이 궁금한데 바울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고 아닐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의 많은 청교도들은 이 저작이 바울의 작품이라고 하는 것을 거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심정적으로 이 히브리서는 바울의 저작일 것이다. 이렇게 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여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하나는 정통 히브리인이 아니면 이 히브리서는 쓸수가 없습니다. 제목이 히브리서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속에 제사제도에 대한 정통한 지식, 그리고 더더군다나 그 제사제도를 통해서 추출해내는 복음에 대한 해박한 지식, 이것이 그당시의 문맥에서 그 사람 말고 이정도로 이것을 해석해 낼 사람이 있었더라면 아마 다른 곳에서 그런 영향을 보였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별명은 신약의 레위기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그러는 것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래서 줄여서 그냥 히브리서가 된 것입니다. 받는 수신자가 히브리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배경이 뭐냐하면 주후 한 60년경에 쓰여졌다고 보는데 저술의 목적 자체가 아주 분명합니다. 뭐냐하면 전도를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들이 복음을 전파박고 개종을 해서 유대교에서 개종해서 크리스챤이 되었습니다. 크리스챤이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도 맛보았고 그리고 복음도 깨닫고 회개도 경험하고 했는데 그런데 유대인들의 조직적인 박해 특별히 박해중에서도 사상적인 박해, 그러니까 유대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주님을 만났는데 아직까지도 신앙적인 지식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아주 날카로운 논리를 가지고 이 유대교 신자들이 와서 거꾸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야, 봐라 너희들이 그렇게 예수를 믿었지만 순간에 네가 실수로 믿었지만 그러나 사실 캐들어가보면 황당무개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쭉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학적인 견해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견해하고는 굉장히 달랐습니다. 오히려 지금으로 말한다면 카톨릭하고 상당히 가까습니다. 구원에 있어서도 역시 카톨릭하도고 많이 다르죠. 다르지만 그래도 가까운 쪽으로 이야기하자면 개신교 하고는 한참 멀고 카톨릭하고는 약간 멀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선 메시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점에서는 카톨릭 하도는 다르죠. 그렇지만 구원관이나 성경관 이런 것에 있어서 그 견해를 가지고 그대로 들어와서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평가를 받는다면 그 신학적인 입장은 아주 자유주의적인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 를들자면 성경관에 있어서도 모든 성경이 그 사람들은 신약은 안믿으니까 구약을 가지고 이야기 하더라도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고 하는 그런 사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사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책이다. 이런 자유로운 생각들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한참 다릅니다. 그런 사람들이었으니까 또 유대교는 순간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세월을 두고 포로기때무터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공부하는 종교로서 쌓여간 것입니다. 저작들이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런 체계적인 것을 가지고 사상적으로 공격할 때 크리스챤들이 아주 지적으로 정리가 안되었으니까 막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꾸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속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보면서 이것은 무엇인가 이들에게 아주 분명하게 이 기독교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그분만이 우리의 구세주이시고 그분과 연합된 성도의 삶, 이외에는 대안이 없는 것일까? 그것을 유대인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속에 있는 의문들 그리고 유대교에서 거꾸로 전도할 때 사용하는 논지들을 잘 파악해서 이것을 유대인으로서 깊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공감을 얻어내면서 그러면서 신약의 탁월한 복음의 메시지들을 끌어내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그 6장에서도 보면 앞부분에서 배교에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한번 말씀의 진리의 빛을 받고 그리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배교하는 사람들은 다시 돌이킬 길이 없다. 왜 이것도 많은 해석이 있습니다만은 지금 그것을 여기에서 다 해석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이것도 역시 유대인들을 겨냥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이야기하면 복음의 깊은 맛을 보고 그리고 하늘의 신령한 은사까지 맛보고 물론 이 사람이 완전히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완전히 거듭난 새 참 신자가된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굉장히 가까이 다가가는 그런 축복들을 맛본다음에 완전히 돌이켜서서 그래서 유대교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돌이킬 기회가 없다. 이것입니다. 참된 신자가 배교할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나중에 생각하고 그렇게 배교에 대해서 경고한 다음에 그다음에 사도는 한편으로는 배교하거나 배교했거나 할 위험성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아주 준엄하게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깊이 경고하고 그리고 이제 그 어려운 속에서 자기의 신앙을 지키면서 살아갈려고 하는 그 불쌍한 크리스챤들 말이죠. 그 사람들을 향해서 오늘 10절 말씀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들이 수요일마다 하고있는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시리즈를 우리들이 한시간 채워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많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핍박하고 어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있을 때에 이 사람들이 신앙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렇죠. 그러니나 순간순간 이 사람들의 삶은 불안하고 그리고 박해에 직면하고 외롭고 아주 힘겨운 싸움이 아닐수가 없습니다. 주위의 집안 식구들이 하나도 교회에 안다니는데 혼자 신앙생활하면서 교회에 다닌다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쉬운일이겠습니까. 뭐 여러모로 핍박이 오고 어려움이 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보면 배교한 사람이고 배신자입니다. 그런 어떤 감정까지 결합되었고 또 이렇게 회심해서 예수를 믿게되면 그 다음에 유대인들로서는 상상할수 없는 일들을 행하게 되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이방인들과 친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통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참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서 오는 박해가 얼마나 컷겠습니까. 그렇죠. 그들은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이었는데 그 때 이제 그 사람들을 사도바울이 히브리서의 저자가 격려하면서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다.” 제일먼저 하나님의 성품을 그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운 분으로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불의한 분이 아니시다.라고 하는 것, 그것은 뭐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되는 도덕적인 특성입니다. 그런데 불의하지 않으시다. 의롭다 불의하다.라고 하는 개념은 오늘 10절에서 말할려고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큰 개념인데 하나님이 의로우신 하나님이신데 무엇을 통해서 너희에게 의로움을 입증하셨느냐하면 그 하나님은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고 하는 그것을 잊지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말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는 크게 두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자기에게 대적하는 자들을 향해서 심판하시는 의로움, 심판함으로서 하나님의 의로움을 보이시고 한편으로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심으로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신분이시다. 결코 불의하신분이 아니시다. 만약에 불의한 분이라고 할것같으면 너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바르게 살아도 하나님이 행여 너희들이 사는 그 의로복 바른 삶, 그것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과 고통, 이런것들을 잊어버리실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결코 너희의 이런 것들을 잊지않으신다. 하면서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이제 이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어떤 상황에 쳐해있던지 간에 그 상황에서 위로와 안식, 위안과 용기를 얻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우리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고통당하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어려움속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묵상함으로서 환경이주는 모든 외로움을 훌륭하게 극복하고 오히려 환경에서 오는 외로움으로 하여금 외로움 때문에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가까이 하는대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마치 바람은 항해를 하는데에 방해가 되지만 그러나 적당하게 돛을 달고 바람을 안으면 그 바람 때문에 오히려 배가 더 빨리 가듯이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홀로 있는 외로움이나 고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깊이 묵상함으로서 그 외로움을 오히려 돛대삼아서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그분과의 깊은 사랑의 교제속으로 나아갈수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만 더해볼까요? 뭐가 있을까요? 이런 것입니다. 죄의식에 막 시달리고 나는 아무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자책감속에 시달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또 이런 사람들있죠. 열등감에 막 시달리는 사람들있죠. 이 열등감에 대해서도 언제한번 시리즈를 해야합니다. 정말입니다. 이것 아주 심각합니다. 거기에 빠진 사람들은 말이죠. 마귀에게 발목잡힌 사람들입니다. 열등감하면 제가 할말이 없죠. 저도 정말 그 열등감 때문에 살기 싫었던 사람입니다. 정말입니다. 하여튼 모든 것이 다 마음에 안들었으니까. 얼굴은 왜이렇게 생기고, 뭐 돈은없고, 하여튼 정말 학교 다닐때는 애들하고 신고 다니는 운동화 하나가지고도 열등감에 빠지고 그럴정도였으니까. 그런데 하여튼 아주 굉장히 않좋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보고 그런데 빠진 사람들 말이죠. 해결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으 해결이 안됩니다. 그것은 죽을 때 까지 거의 못벋습니다. 인생에대한 모든 삶의 희망을 포기하면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벗어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열등감을 느낄수없을 정도로 바닥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인생을 포기한 사람들에게는 열등감이 없습니다. 막가파에게는 열등감이 없습니다. 하여튼 문제에 시달리지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 때는 이미 열등감에서 거의 완전히 라고는 말할수 없지만 이렇게 내 삶을 괴롭힐정도로 시달리는 것은 이미 다 끝났습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그런데 이제 고린도전서전서 13장을 묵상하면서 그때 제가 설교쭉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 큰 빛을 하나 얻은게 뭐냐하면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그 시기는 열등감에 나는 것입니다. 거의 90%이상이 열등감에서 나온것입니다. 거기에서 그 13장을 읽으면서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그 때 설교했죠. 뭐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이 상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나 하나만을 향한 사랑인 것 같은 절대적인 사랑을 느끼기만 하면 거기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예를들어서 얼굴이 못생겨서 그 열등감에 빠졌다고합시다. 그러면 견적을 내서 성형수술을 했다고쳐요. 그러면 더 예쁜 사람이 없겠는가? 또 더 예쁜 사람이 없이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아휴 저 사람은 자연산인데 나는 인공이야.” 하고 괴로워할 것 아닙니까. “저 사람은 자연산이고 나는 압구정동산이야.” 그러면서 괴로워할 것 아닙니까. 사실아닙니까. 그것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도가도 끝이 없습니다. 왜 돈이 없어서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벌게되었다. 그러면 열등감에서 해방될 것 갔습니까. 아닙니다. 저 사람은 고상하게 벌고 나는 막벌었는데. 그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저 사람은 더많은데 나는 더없는데. 저 사람은 더 많으니까 안됩니다. 여자들이나 남자들이나 장신구같은데 거액의 돈을 투자하는 사람들있지 않습니까. 최근에 시계 하나에 620만원짜리가 있는데 주문해놓고 두달을 기다려야한답니다. 백화점에서. 그 사람들은 모두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입니다. 병입니다. 장신구나 이런것에 과다하게 투자하고 이러는 것은 이것도 하나의 질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통해서 근근히 자기 자신의 아이댄티티를 붙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치유책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시기를 굉장히 잘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절대 해결이 안됩니다. 진짜 악마와 같이 끝까지 쫓아다닙니다. 해결의 길은 뭐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받고있는 이 사랑이 다른 사람들을 나누어주다가 남아서 “에이 너도 좀 사랑해주지” 하고 던져주는 사랑이 아니라. 한 사람 한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그 사랑이 절대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개인적으로 깊이 체험할 때 그 때에 해방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대한 깊은 묵상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그것이 우리로하여금 이런데서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것입니다. 이런식의 논리적인 접근 방식이 뭐냐하면 사도바울이 아주 잘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곳곳에서 그분의 지문을 볼수가 있습니다. 천국가면 꼭 물어볼려고합니다, 그때 내가 알려줄테니까. 기다리세요. 천국에서 이메일로 보내줄테니까. 기다리세요. 그러니까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막 자신들과함께 고생스럽게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배신하고 도망가버리니까 다시 환대를 받고 잃었던 가정도 찾고 친구들도 찾고, 종족도 다시 찾고, 그리고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잃어버린 상태로 그냥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너 복음을 지키고 예수님을 끝까지 믿었으니까 뭐 당장 눈에 보이는 축복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그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그런식으로 계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부흥을 부어주실 때 선교의 놀라운 선교를 위해서는 부흥을 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큰 재난이 오거나 혹은 전쟁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대거죽기 전에도 부흥을 주십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부흥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놀라운 회심을 경험하게 한 다음에 모두 거두어서 하늘나라도 데려가십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그렇게 하나님의 섭리를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렇게 남아있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고난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데 그러는거에요. “아, 정말 하나님 우리가 이렇게 신앙을 지키면서 살려고 하는 것을 주님이 아시나? 어려움속에서도 정말 이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몸부림치는 것을 주님이 아실까? 주님이 우리를 잊어버리셨나? 이런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 사랑하는 크리스챤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분이 결코 너희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을 잊어버리실수가 없는 분이시다. 그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한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삶을 보고계시는 분이시다. 그런 묵상속에서 이제 커다란 영혼의 유익을 얻게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그런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려면 하나님에 대해서 뭘좀 알아야지. ”하나님.” 그러면 글자 세 개만 알지. 뭐 아는 것이 있어야지 그런데 뭐 명상을 해야 무슨 명상이 되겠습니까. 제가 얘기했죠. 푹삶아도 뭐가 있어야지. 멸치 두 마리 넣고 가마솥에 삶으면 뭐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주님을 알기를 힘써야합니다. 그것이 사실은 지난 여름수련회 주제였습니다. 그것을 안들은 사람들은 꼭들으세요. 들어서 남줍니까. 들으세요. 특별히 마지막날 저녁설교를 잘 들으세요. 2시간 45분동안 이어진 설교인데 잘들으세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모든 삶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한 사람들은 그 지식이 풍성하니까. 그 속에서 끊임없는 묵상할 재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도 굉장히 많은 지식이 있습니다. 경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묵상하면서 이런 어려운때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 이김으로서 다시 지식이 되어서 쌓이는 것입니다. 있는자는 있어서 점점 부하게 되고 없는 자는 점점 없어지면서 가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기를 힘써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런 교리를 여기에서 첫 번째로 배우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묵상이 신자의 삶에 근원이된다. 이런 교리를 여기에서 첫 번째로 배우게되는 것입니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알리라.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가야합니다.
두 번째. 그러면 하나님이 잊지않으시는 내용이뭐냐?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뭐냐하면 그 크리스챤들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성도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행위와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 어떤 관계에 있느냐? 이것도 히브리사람들이 잘쓰는 서술방식입니다. 뭐냐하면 여기에서 행위는 히랍어 성경에보면 복수로 되어있지를 않고 “그 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를 가르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 개의 일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앞에있는 행위는 그들이 살아가는 삶을 전체를 이야기 한것이고 두 번째 나오는 성도를 섬기는 삶은 그중에서 특별히 말하고싶은 구체적인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그 속에서 구체적인 것을 추출해서 이야기하는 방식이 히브리사람들이 글을쓰는 아주 전형적인 서술양식입니다. 여기에서 행위가 무엇이고 성도를 섬기는 것이 어떤것인가를 나누어서 설명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에서 행위라고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누어서 설명을 하자면 여기에서 행위라고 하는 것은 신앙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모든 경건한 실천들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억하고 계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것을 알고계셔야합니다. 그래야지 의롭죠. 그렇죠. 어렸을 때 자라면서 부모에게 매를 안맞은 사람이 거의 없죠. 저는 거의 안맞고 컷습니다만은 여러분 많이 맞으면서 크셨잖아요. 그런데 제일 서러울때가 언제입니까. 내가 잘못해서 맞을때에는 별로 그렇게 서럽지 않는데 어떤때 그렇게 서럽냐하면 요만큽 잘못했는데 이만큼 때릴 때. 그렇죠. 많이 서럽습니다. 조금 잘못했는데 너무 처벌이 가혹하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서럽습니다. 그것바다도 더 서러울때가 있죠. 그 때가 어떤때입니까. 동생하고 싸웠는데 사실은 자기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동생이 잘못했는데 엄마가 상황을 잘못판단해서 동생을 두둔하고 나를 때릴 때. 그 때 우리는 의심하게됩니다. "저 엄마 우리 엄마 맞아“ 진짜입니다. 이것은 아주 심오한 경험에서 나온것입니다. ”저엄마 우리 엄마 맞아“ 그리고 이제 지나간 날에 가족들이 나누었던 모든 대화들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저아이는 다리밑에서 주어왔다.“ ”봐라. 제 얼굴도 틀리지 않냐?“ 그런 것들이 쪼가리 쪼가리들이 쫙 논리적으로 연결이 되면서 관계에대한 의심까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린 아이들의 마음이지만 우리 인간 모두가 경험한 것의 축소판입니다. 지금 우리는 웃고있지만 그 당시 웃음이 나와요. 얼마나 심각합니까. 그러면 너무 서럽습니다. 그런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됩니까. 의롭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것을 알고있어야합니다. 그래야지 의로울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확하게 알아야지만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향해서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라고 할경우에는 결국은 우리들의 모든 행위를 다 기억하셔서 어떤 행위들이 상을받을만한 행위이고 어떤 행위들이 징벌을 받야할 행위인가, 하는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완벽하고도 완전히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됩니다. 그렇죠 어떤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될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안사는 사람, 어두움속에 감추어야 될것들이 많은 사람입니다. 부끄러운 행실속에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계시다는 자체가 너무 두려운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복음송가에 보니까 ”하나님이 안계셨으면 좋겠지.” 그런 찬송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못보셨으면 좋을때도 있지않니?” 이렇게 나가는 복음송가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지못하면 주님이 모드 것을 알고계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될까요.? 주님을 위해서 살려는 사람, 그리고 어떻게하든지 하나님을 향해서 진실된 행위가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분투하는 사람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모두 다 잘살겠습니까. 누가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모두다 잘 살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중심에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께로부터 숨어서 그렇게 죄가운데 사는 사람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애를 쓰지만 늘 넘어지면서 다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고 그리고 다시 회복하고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분투하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말이죠. 자기가 비록 늘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런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 알아주신다고 생각하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앞에 잊혀진 존재가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잊혀지지 않은 존재가 되고 싶습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요. 누가 어떤 시인이 그랬죠.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한 그리움이 되고 싶다.” 하나님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은 성도 모두의 마음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되고싶죠. 그렇죠. 하나님은 자기의 뜻대로 잘 사는 사람들만 기억하신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도 살아온 삶으로보면 쓰레기같은 사람들도 주님이 찾아오셔서 인격적으로 만나셔서 변화시켜주셔서 새 삶을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실패한 사람들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시고 침체에 빠졌던 사람들에게 회복의 소망을 주십니다. 죄가운데 빠졌던 사람들에게 용서의 희망을 주시고 그래서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는이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셔서 자기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일을 지금 이순간에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중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충분히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거나 사람들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돌아오라고 말할 때에 예수 잘믿고 분투하던 사람들에게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이제 아무 희망이 없다. 자기는 이제 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면목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에게 주님 안의 희망을 말하고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는 것아니에요. 그렇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행위가 하나님께 기억될만한 사람들이 되어야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죄가운데 살았고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오고자 해도 돌아올 힘이 없고 그리고 주님을 알만한 지식들이 현저히 모자라서 그렇게 하나님께 자신의 힘으로 돌아올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들에게 갱생의 삶의 기회를 주시기도합니다. 전적인 은혜로말이죠.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매일매일 찾으며 살 수 있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바쁘게 일과를 보내고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여기에 나와서 무엇인가 밤늦게까지 말씀을 들으면서라도 여러분들이 새로워지고 여러분들이 변화된 삶을 살고싶어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누가 그런 은혜를 주셨습니까. 주님이 주신 은혜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받은 은혜가 배교에 가까운 길을 걸어가면서 인생을 쓰레기처럼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 은혜에 부합한 삶을 살아야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은혜베풀지 않으신 사람들에게는 사실 적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많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많은 책임을 물으십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그런 은혜를 토대로 해서 그래서 전심으로 분투하는 삶을 살면서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든 행위들이 주님 앞에 기억되는 행위가 될 때에 여러분 자신도 하나님 앞에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요한계시록 2장에보면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시기 전에 그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옛날에 첫사랑을 가졌을 때에 그 에베소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회상하시면서 그들을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의 행위를 아노니”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금은 비록 첫사랑을 다 잃어버리고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아름다운 빛을 많이 상실했어도 주님의 마음에 에베소 교회가 늘 그리움이 되는 것이 뭐냐하면 그들에게는 행위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데서 비롯된 그 아름다운 신앙의 행위, 매순간순간의 삶을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고 한가지의 실천과 한가지의 행동을 통해서라도 그분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면서 살려고했던 그 아름다운 신앙의 실천들, 그 아름다운 믿음의 행위들, 그것들에 대한 기억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 에베소 교회가 지금은 비록 첫사랑의 빛을 잃어버렸지만 그러나 그것이 잊을수 없도록 만든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냥 대충대충 살아가는 삶과 매순간 하나님 앞에 잘 살고싶어 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짐승과 성자의 차이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지고 어떻게 그것을 다 회개할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문제는 무엇입니까. 너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만 호소할려고 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가페의 사랑이시고 자기의 외아들을 아무 공로없는 죄인을 위해서 주셨으니까.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 행위가 없이 막개기면서 살아도 주님이 나를 향한 사랑에 가슴에 불타고 잊지못하실거야. 그것 사랑받는 사람이 뭐 그렇게 거만해요. “나 사랑할거야” “해봐 귀않지만 내가 허락을하지”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수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늘 기억하신다고 하시는데 여러분 이런생각 해보신적 없습니까. 무엇인가 나의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되는 어떤 신앙의 고백을 내가 하면서도 그것이 공허하게 느껴져본적이 없습니까. 있죠.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없다면 거짓말입니다.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좀도 구체적으로 예를 들께요.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양심 한구석에서는 “아닐걸” 입술에서는 나오는데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은 다시 우리의 영혼속으로 들어가서 우리를 새롭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정말 곤고할 때 주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면서 진짜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찬송하고나면 그 은혜가 다시 우리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고백의 힘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 고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 ? )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입을 열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입으로 시인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입으로 시인함으로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해서 교리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것들을 토해놓는데 그 내용자체는 액면적으로 진리인데 이상하게 그것이 자신 속으로 거꾸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 그런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뭐냐하면 분리된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의 세계와 삶자체가 분리된 것입니다. 그런식의 고백은 아무리 해도 우리에게 새힘을 주지 못합니다. 자기는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지식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삶의 실천이 없는 그런 방종하는 삶을 살고 아니면 아무렇게나 풀어진 삶을 아무렇게나 살면서 그러면서 “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그래봐야 그것이 자신의 영혼에 새힘을 주시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잊지않으셨는데 나를 기억하시는데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새힘을 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하면 삶의 행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해야합니다. 오늘날 불경건하고 하나님 앞에 나태한 신앙이 누룩처럼 번져가는 이유는 뭐냐하면 이 행위를 너무나 천시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뭐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한 교리를 잘 가르쳤어야 되는데 행위와 믿음이 대적이 되는 관계인줄 알고 뭔가 행위에 대해서 강조하면 모두 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의무에 대해서 말하면 모두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냥 다 죽어가도 “그래도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실거야. 못사는데 어떻게 할수없지” 이렇게 해줘야지만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가 사랑을 느낄수가 없으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가르치면 안됩니다. 성경은 말이죠. 구원을 얻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있어서는 이 행위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모든 의미에서 이 행위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일단 구원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행위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서 막 사는 사람과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루하루를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실천하면서 살까? 하는 사람의 차이는 짐승과 성자의 차이입니다. 전자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고 후자의 사람은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다만 그렇게 살면서도 자기가 그렇게 잘 사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 자기를 굉장히 돋보이게 만들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주님의 도움없이도 구원을 얻을수 있다는 식의 이런 그릇된 확신을 가져다 준다면 그것은 더 나쁘지. 그렇지만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그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대요. 성경은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인물가운데 과거에 막살던 사람은 있지만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평가를 내리던 그 사람의 일생을 아무렇게나 막살던 사람이 있으면 한번 찾아보세요. 있는가. 그들은 과거에 막살았던 것을 뼈져리게 회개하면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선한 행위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전적 타락의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꺼떡하면 자기는 개판으로 살면서 뭐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에 그것은 살지 않았을 때에는 내가 그렇게 부패하니까 무엇을 의지해야합니까. 날믿지 말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다 살고난 후에는 그렇게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인대도 이만큼 살게하셨으니까 하나님이 찬송받으싶시오. 아니 이렇게 하는데 써야지 그 좋고 아름다운 교리를 주저앉는대가 쓰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칼빈이 흐느낄 이야기입니다. 행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보세요. 그 사람과 행위는 나뉘어지지를 않습니다. 선한 사람은 선한 행위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죠. 불의한 사람은 불의한 행위를 하는 사람입니다. 인격의 특질이 불의입니다. 선한 사람은 인격의 특징이 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 하나님 앞에 행위로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을 두 번째로 보다 구체화 시켜서 이야기 하는 것이 뭐냐하면 이들 가운데는 성도들을 섬기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섬기는 그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는데 과거에 섬기는 것과 그리도 또 지금도 섬기고 있는 일관성 있는 섬김입니다. 옛날에 조금 열심히 섬기다가 집어치우고 그다음에 자기 멋대로 가버리고 말이죠. 배교는 아니지만 배신입니다. 믿음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도를 향한 섬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잘 생각해보세요. 이 사람들이 사실 누구를 섬길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자기도 지금 신앙을 인해서 거의다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같은 처지아닙니까. 가족도 잃어버리고 동족도 잃어버리고 그리고 오히려 사랑하는 동족, 자기를 인정해 주던 동포와는 적대관계가 되었지 않습니까. 무엇을 인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해서 적대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도 거의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 누군가를 섬길수 있는 이런 여력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섬겼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진짜 성도가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이것은 외면적으로 보이는 어떤 힘이나 능력, 그가 가지고 있는 재력이나 이런 것 하고 그가 진짜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 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시간이 많고 아무리 힘이 좋고 아무리 재능이 많아도 주님의 은혜가 그를 감동시키지 못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하나님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자기것이지. 하나님이 감동시키지 않았는데 왜 헌금하겠습니까. 왜 자기 귀한 시간을 주님을 위해서 바치겠습니까. 왜 자기의 값비싸게 얻은 그 재능을 하나님과 그리고 성도들을 향해서 사용하겠느냐고요. 안합니다.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은 자신조차도 오히려 섬김을 받아야하는 처지에서 서로 성도를 열심히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들을 어떻게 섬겼느냐하면 사랑으로 히랍어 성경에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성도들을 섬긴 것이니다. 신령한 사람들의 결정적인 특징은 이적에 대한 체험이나 신비한 경험이 아니라. 신령한 사람의 결정적인 특징은 예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심오한 진리 깨달은 자도
울리는 징과 같네
사실입니다. 진짜입니다. 신령한 사람의 결정적인 특징이 바로 그런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천사의 말을 하고 그다음에 예언의 능이 있고 막 이런 것을 이야기 해도 거기에 참 아가페의 사랑이 깃들이 않았으면 그것은 좀 가치가 덜하다거나 사랑이 좀더 함양되어야 한다거나 그것이 아니라. 기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언이 왜 소용이 없겠습니까. 천사의 말을 하는데 왜 소용이 없겠습니까. 기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뭐냐하면 이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그 사람들에게 베풀만한 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자신들도 핍박과 박해속에서 시달리는 사람들이 었지않습니까. 여러분 로마시대에 크리스챤들이 카타콤에서 모인 것을 보지 않습니까. 동굴을 길게판 그곳에 모여서 숨어서 예배드리고 박해당하고 하는 광경을 보지 않습니까. 그 속에서 그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뭐냐하면 이 사람들이 진심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스러운 일이 성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진실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나아가서 세상에서 자기의 직업에서 정당하게 활동해서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이 사회에 무엇인가 도움을 주는 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나가서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도 더 훌륭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죠. 가서 어느 교회의 집회에 갔더니 그러더군요. “목사님 저는 돈버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무슨뜻입니까.” 그 양반은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는지 안수 집사님인데 수요예배도 안나온데요. “왜그러느냐” 그러니까 “일터가 곳 사명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수요예배 안나와서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일터가 사명의 자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사람 하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제가 기도를 할줄압니까. 성경을 읽을줄압니까“ 그 때부터 이상했습니다. 온삶이 사명의 터라고 하는 사람이 ”제가 기도를 할줄 압니까. 제가 성경을 읽을줄압니까. 제가 뭐 가르칠줄을 압니까.“ 그러더니 ”제가 할줄아는 것은 돈버는 것 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벌어서 그냥 바치는 것, 그것이 나는 주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썰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것말고 다른 것도 바칠것이 많다고 그것은 물론 바치지만 그것보다도 더 바칠것이 많다. 다른 것을 잘 생각해보세요.“ 보세요. 자신은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섬길것이 별로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주님의 사랑이 그들을 움직이니까. 그런데 그런 직업활동 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정말 하나님 앞에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행위가 뭐냐하면 성도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 성도의 필요를 채워서 그들의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우리들이 가르침으로 수종을 들고 육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우리들이 우리가 가진 물질로 그들을 구제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환경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우리에게 많은 능력은 없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이렇게 성도들을 섬겨서 우리로 말미암아 그들이 섬김을 받아서 그들혼자 하나님 앞에 사는 것보다 훨씬 양질의 신앙생활을 해 나가도록 돕는 그 섬김, 그것은 하나님 앞에 최고의 아름다운 섬김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진짜 하나님 앞에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옛날에 제가 교역자 생활을 하는데 교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 정말 대단했습니다. 열심히 섬겨요. 언젠가는 교회에서 밤거리를 돌면서 차를 타고 집에 오는데 저 골목 어느 한구석에 누가 쭈그리고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니까 교사였습니다. ”왜 그러고 서 있느냐“ 그랬더니 학생하나를 집에 돌아올때를 기다리면서 그 늦은밤에 그 추운 겨울에 섰다 앉았다. 쭈그리고 앉아서 그리고 서서 그 한영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목회자인 제 마음에 확하고 와 닫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그랬습니다. ”야, 하나님의 마음에 성도를 섬기기 위해서 자신을 버리면서 저렇게 희생한 사람들이 강팍한 사람에게도 저렇게 감동을 주는데 하나님의 마음에 얼마나 커다란 감동일까.“ 세상에 보십시오. 곤고하고 상처받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영혼들을 우리가 그렇게 잘 돌봅니까.? 사실은 잘 돌보지 않습니다. 그 때에 주님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자기의 사랑하는 양떼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영혼들, 누군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진실되게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그것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얼마든지 그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실수 있을터인데 누군가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사람이 없을 때 우리 주님의 마음 이해하실수 있겠습니까. 그 때 누군가가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고 그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 섬기고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기를 자기의 필요를 채우는 것보다 더 성실하게 해서 그들을 섬기려고 할 때에 주님의 마음에 얼마나 커다란 기쁨이될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 사람들의 그러한 섬김을 하나님이 잊지않으신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되기 이해서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혜가 있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작은 은혜받은 사람이 크게 섬기라고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은혜조금 받은 사람에게 왜 순교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우리가 받은바 은혜를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의 분량만큼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적어도 주님이 은혜를 주셨는대 우리가 게으르고 나태해서 주님의 은혜를 땅에 묻어버리는 것과 같은 불충함은 행하지 않기를 주님은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힘 닫는데까지 성도들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 삶, 그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섬김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뜻대로삽니까? 우리가 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행동합니까.? 우리가 언제나 곧은길만 걸어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주님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분량을 따라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신 것이 우리로 하여금 나보다 연약한 성도들을 섬기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는 사실을 가심을 새기면서 그러면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성도들을 섬기고 그 일이 작은일처럼 보여도 일은 작지만 그 일을 맡겨주신 주님이 크시기 때문에 그 일을 작다고 하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아니하고 자기의 부패한 본성과 그리고 자기를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하게하는 환경의 요동함과 더불어서 싸우면서 그러면서 성도들을 섬기도록 세워진 그 자리에서 은혜의 분량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눈물흘리면서 살아가는 그 성도들이 하나님의 마음에는 잊혀질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 많아도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든지 그들을 주목하실 것이며 그들이 어디에서 부르짖든지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실 것이며 그들이 어디에서 두 손을 벌려 주님의 도움을 구하시든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두팔을 내밀어서 그들에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정말 성도들을 섬기면서 그러면서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고 성도들을 섬기고 그 성도들이 잘되는 것이 그 자신에게 큰 기쁨과 은혜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성도들을 섬기고 사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 사람이라도 맡겨주신 그 일이 크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크게 보시고 그리고 그들을 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소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사명을 사소하게 여기면 여러분 자신도 아주 사소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부족해도 주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를 알고 그리고 거기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 이외에는 삶의 대안이 없고 거기에서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따라서 나보다 연약한 성도들을 섬기고 사랑하면서 사는 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실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내가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것을 잃어버리고 나면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잊지않고 계시는 놀라운 증거를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금방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되찾은적이 몇번이나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주님께 불순종하고 주님의 품을 멀리 떠난 다음에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분들 경험했죠. 한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속으로 들어가기는 어려운데도 미끄러지는 것은 너무나 쉬웠는데 다시 그 신앙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분들 너무나 잘알게 되셨죠. 하나님께로부터 미끄러지듯이 빠져나가서 세상으로 흘러들어갈 때 우리가 무슨 작심을 하고 하나님을 버립니까.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까. 그렇지 않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끄러지듯이 세상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올때는 생명을 건 결단이 필요한 것을 보더라도 얼마나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어려운가 하는 것을 여러분 알수있잖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복받은 사람들입니까. 많은 사람들 가운데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쓸모없는 사람인데도 주님이 고치셔서 그래도 쓸모있다고 생각하시면서 우리를 어느 자리에 세워주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크고 작은 일로 주님을 섬기듯이 성도를 섬길수 있도록 세워주셨습니다. 얼마나 고귀한 일입니까. 일은 작아도 그 일을 맡기신 주님이 크신 분이니까. 주님을 섬기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한 성도도 작지 않고 그 성도를 위해서 섬기는 그 섬김의 일도 결코 사소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마저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삶을 살지못하게 하는 내적인 부패성과 싸우고 그 자리를 떠나도록 유혹하는 수많은 유혹과 항거하며 그리고 우리를 그 믿음의 길에서 미끄러지도록 만드는 수많은 환경의 요동침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지키면서 섬길수록 귀한 주님, 섬길수록 소중한 성도들을 섬기면서 살아가기 위해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며 피를 흘리는 성도들의 그 분투하는 그 열심을 잊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잊지않으십니다. 그것을 늘 기억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들이 어두움속에 있을 때에도 귀를 기울이셔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절망속에서 내미는 여러분들의 팔을 붙드시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안식의 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기억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이 잊지않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우리 같이 기도합시다.
5. 섬기는 자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②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것과 이제도 섬긴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6:10 )
사도바울이라고 믿어지는 이 서신의 저자가 편지를 받는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가운데 하나님이 너희를 잊어버리지 아니하신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행위가 있는 믿음생활을 했고 그리고 성도를 섬기면서 살았고 또 지금도 섬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희들을 잊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를 잊어버리지 않으신다라고 하는 약속은 큰 위로가됩니다.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한번 여러분이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처음 직장생활 하던 때가 생각나는데 뭐 아무것도 아는 것도 없고 직업전선에 처음들어가서 발령장을 받고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저 구석에 앉아있는데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당당하게 움직이는지 몰라요. 그래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이야기합니다. “야, 저 사람은 어디에서 왔데. 신규야. 새로들어온 물건이야.” 별사람이 다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의지할것이 없을 때 높은 사람이 불러서 “자네 부친을 내가 잘 알지. 내가 자네를 기억하마, 내가 자네를 기억하지” 그말 한마디만 해주면 정말 천하를 얻은 것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해주신다. 라고 하는 것은 특히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말할수 없는 위로입니다. 그러니까 말끝마다 “주님이 다 하시지.” 이런 말을 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참 복된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안되죠. "주님이 다 아시면 큰일나지.“ 이러면서 살면 안되죠.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그렇게 말할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저도 인생을 이렇게 돌아보면 그런 묵상을 많이 하던 때는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가깝게 살던때입니다. “주님이 다 아시지. 내가 마음아파하고 섬기는 도상에서 쓰러질 것 같은 고통과 위기를 당하면서 괴로워할때에 묵상속에서 ”내가 너를 안다.“ 그런 그 하나님의 음성이 내 마음에 들릴 때 그 때 얼마나 위로가 되고 얼마나 감사한지 생각을 해보세요. 제가 옛날에 전도사로 섬기던 시절에 교사들이 은혜를 받고 토요일이면 모여서 영혼위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니까 주먹으로 이 가슴을 두드리는데 새벽에 일어나면 파랗게 멍이듭니다. 그런데 그 어느날 밤이었는데 간절히 기도하는데 그 하나님께서 아주 분명하게 마음속에 ”내가 안다. 내가 너희들의 마음을 안다.“ 그날 저만 그런 확신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중에 몇사람이 같은 확신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희 마음을 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삶의 초점이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은 물론 실수도 있죠. 넘어질때도 있죠. 쓰러질때도 있죠. 그렇지만 중심이 어떡하든지 거친 바다 험한산 피가 맺혀도 십자가 내가 지고 끝내 이기리. 이런 정신으로 어떡하든지 삶의 초점이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야된다. 여기에 맞추어져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이 주님께서 ”내가 너를 안다.” 이렇게 주님의 음성을 듣거나 아니면 주님의 그런 약속에 위로를 받을 때 그것은 뭐 말할수 없는 위안이 됩니다.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고난을 받는 것 같아도 상급에 대한 약속이요. 보호의 약속이요. 지금은 어두운 밤바다를 지나는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분명하게 등대의 불빛으로 그를 인도하겠다는 약속이요. 환란을 많이 당하고 시련을 당하나 마치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것처럼 “저들이 너를 치겠으나 그러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라.” 그런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뭐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위로가 되는 사람들을 위로하십니다. 눈을 들어 사면을 돌아보면 외치는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라있는 이 때에 이득이 되는 곳에서는 자신들이 모두 크리스챤이라고 말을해도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거나 손해를 보는 상황이 되면 결코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 박쥐와 같은 교인들로 가득찬 시대에 정말 어디서든지 주님의 명예를 위해서 주님이 맡겨주신 영혼들을 위해서 섬기면서 살고자 하는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을 보시면서 얼마나 위로를 받으시겠습니까. 그렇게 위로를 받으시는 바로 그렇게 당신을 위로해 주신 사람들을 위로해주십니다. 하나님이 그들 마음에 또한 위로가 되시는 것입니다. 아무 쓸모없이 그렇죠. 짐승처럼 떠돌아 다니면서 살아도 그분의 마음에는 잊혀지는 성도들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렇죠. 오히려 사람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부모의 마음에는 더 큰 애착과 사랑이 갈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를 잊어버리시지 않는 불붙는 사랑을 가지고 있어도 불행히도 그는 하나님의 그 불타는 사랑을 몰라줍니다.
그런데 마음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비록 연약하지만 어떡하든지 내 힘닫는 한도내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하겠다고 하는 이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은 주님이 얼마나 자기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사랑하시는지를 수시로 경험합니다. 나를 찾으시는 하나님, 나를 찾으시는 주님, 나를 잊지 않으시는 주님, 그리고 나 없이 사실수 없는 우리 주님, 항상 이런 주님이 자기를 잊지않으신다.라고 하는 현재적인 경험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뭐가 뭔지 뚜렷하게 알수없지만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편지를 쓸때에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핍박의 위험속에서도 이렇게 행위가 있는 믿음 그리고 성도들을 섬기는 믿음으로서 자신들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해야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먹고 마시는 날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두 부끄러움일 것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며 산 모든 날들, 손톱만큼 섬기고 주먹만큼 받는 수 많은 사람들로부터의 칭찬과 경하의 말들, 모든 것들은 주께서 마지막 서는 날에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섬기면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람을 섬기면서 사는 것, 이것이 얼마나 놀랍고 행복한 특권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 기억하셔야합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영혼, 그것이 목회자로서 영혼을 맡겨주셨든, 평신도로서 여러분들에게 영혼을 맡겨주셨든 그 영혼들이 여러명이 아니라. 단 한명을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셨든 교회에서는 임명하지 않았더라도 여러분들의 가족을 위해서 믿지않는 이웃들을 위해서 여러분에게 영혼을 맡겨주시지 않은적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든지 하나님께서 그런 영혼들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섬기며 사랑하고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을 다 살고난 후에 하나님 앞에 정말 값지고 정말 소중한 것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지 영혼을 섬기고 영혼을 사랑하며 산 그런 날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기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어떤분하고 대화를 나누었는데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충격도 아니지만 그런데 충격을 받는 나 자신이 참 충격적이지만 말이죠. 어느 교회에 전도를 아주 잘 하는 교인이 있었답니다. 그러니까 이제 방송국에서 그 출연을 해 달라고 말이죠. 와서 강의도 해주고 간증도 해 달라고. 그러면 얼씨구나 하고 가지 않겠습니까. 방송에 나온다는데. 우리는 또 방송타는 것을 대게 좋아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타고 싶으면 집에서 전화기 거꾸로 들고 노래도 부르겠습니까. 그렇죠. 어쨌든 방송타는 것을 거절했데요. 두 번세번 거절하니까 방송국에서 더 데리고 와야되겠다고. 연락을 하고 사람을 보내고 개인적으로 프로듀셔가 찾아와서 만났답니다. 그래서 “왜 못오겠다는 것이냐?“ ”당신들이 프로그램에 전도왕이라 그랬는데 내가 무슨 왕이냐. 꾼이지. 전도에 왕이 어디있느냐. 주님의 노예로서 돌아다니면서 주님 심부름으로 전도하러 다니는 것인데 당신들은 이름부터 벌써 틀렸다.“ 그러더래요. 그래서 ”아, 맞다고 그래도 나와달라.” 그랬더니 나는 나가지 않는다.“ ”그러면 안나와도 좋으니까 당신 어떻게 전도하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은 전도하느냐.“ 그러니까 ”그러면 당신이 안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전도 실습을 해봐도 괜찮겠느냐?“ 그러니까 ”그렇게 하라.“ 그러더래요. 그래서 거기에서 복음을 쫙 전하는데 그 자리에서 그 기독교 방송의 c.b.s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계통의 그 프로듀서가 눈물을 펑펑쏟으면서 무릎을 꿇고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내가 정말 주님을 영접한적이 없었다.“ ”그런 십자가의 사랑을 몰랐다.“ 보세요.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어디에다 던져두든지 모든 자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섬김의 정신,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의 부채의식. 이런 것들이 없어서 주님을 섬기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주님을 섬지기 못하며 살아가는 모든 이유를 환경에 찾습니다. 원래 그런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뭐 이만큼 섬겼으면 됐지.“ 항상 그런 것입니다. 공부 못하는 애들이 항상 그렇습니다. ”공부해라.“ 그러면 ”다했어요.“ 그리고 ”뭐도 해라.“ 그러니까 ”아, 뭐도 없는데 뭐 책상도 망가지고 연필도 없고. 지우개도 없고 숙제장이 없고 더 좋은 참고서를 사야하고“ 매일 이렇습니다. 그것이 환경을 핑계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잊지 않으시는 것은 확실히 의로우신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어떻게 잊어버리시겠습니까. 이런 이야기하면 너무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저는 가끔 담임목사지만 부교역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를합니다. 뭔가 일을 맡겨주면서 개인적으로 내가 이야기합니다. ”내가 그대에게 이 일을 맡기는데 잘해라. 그러면 내가 그 은혜를 잊지않으마“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고 계신 마음이 그 마음입니다. 우리를 격려하고 우리에게 도전하시고 심지어는 애처럽게 호소하셔서라도 우리가 당신의 영혼들을 섬기면서 살아갈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극것을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많은 성도들을 당신이 직접 섬기시거나 천사들을 보내서 섬기실려고 맘먹지 않으시고 당신을 이미 알고 당신의 사랑을 먼저받은 성도들을 통해서 섬기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안 섬기면 하나님도 성도들을 섬길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잊지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섬기면서 살아갈 때 얼마나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러나 기뻐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주님이 여러분들에 맡겨주신 영혼들을 잊지 않고 있는한 하나님도 여러분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여러분들을 찾아오셔서 영혼을 위해서 한 모든 수고와 섬김들을 갚아주실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지난주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그 섬김을 어떻게 했느냐. 그것을 어떻게 했느냐. ”그의 이름을 위하여 사랑으로 하였다.” 그랬습니다. 그렇죠. 사실 이 사람들이 성도들을 섬긴다. 그럴 때 사랑보다 중요한 것이 참 많지않습니까. 그렇죠. 사랑보다 중요한 것 많습니다. 참된 진리의 말씀을 바로 가르쳐주지 않으면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죠. 또 지혜롭지 않으면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죠. 하여튼 이처럼 사랑보다 더 본질적이고 소중해 보이는 것이 굉장히 많은데도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를 말씀하시면서 사랑을 한가지로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사랑으로 너희가 성도를 섬겼기 때문에 하나남이 너희를 잊어버리지 않으신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닫는 것은 뭐냐하면 ( ? ) 성도들을 섬기고 영혼들을 섬길때에 사랑으로 하지 않을수가 얼마든지 있을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께 대한 섬김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그리고 동기 자체가 하나님 앞에 순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러한 섬김에 복을주셔야할 이유가 없으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단지 외형적으로 성도들을 섬긴 것 때문에 주님께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들이 성도들을 섬길 때 그 근본적인 바탕의 마음이 성도들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었습니다. 인격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구별될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바탕이 되어서 진리도 그 사랑 때문에 가르쳤고 그들을 위해서 섬긴 것도 주님의 그 사랑이 동기가 되었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무엇을 희생해도 자기의 이름을 내가 위함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그들을 향한 사랑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모든 신령함의 근본적인 표지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이 어떤 신비한 경험이나 이상한 환상을 보는 것, 그리고 신령한 경험들을 하는 것, 그것이 신령함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신령함의 열매는 아주 진지한 사랑입니다. 주님을 닮은 사랑, 그것이 진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중에 가장 놀라운 기적은 한 인간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변화는, 진정한 기적은 인간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그래서 조나난 애드워즈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복들은 하나님의 일반 섭리라고 하는 그 관을 타고 흘러가지만 영적인 축복은 우리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우리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축복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탁월하고 뛰어난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을 보고 신비를 경험한 사람들의 신앙은 보증할수 없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의 영혼속에 영적인 축복을 주신 그 사람의 신앙은 보증할수 있습니다. 가치관이나 생각이 이렇게 바뀌어져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빙자하여 우리가 무엇을 누리고 사는 것, 그래서 그것을 자랑하고 그것을 받지못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정죄하는 그런 분위기는 결코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커다란 신비는 주님이 우리 안에 행하시는 영혼의 변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수 있는 가장 커다랗고 놀라운 축복은 영혼의 축복, 다른 축복들은 일반 섭리를 타고 흘러 들어옵니다. 그렇지만 영혼의 축복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속에 부여되는 축복입니다. 사랑이 바로 그렇게 그 사람의 영혼 안에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변화, 놀라운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늘 기억해야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영혼들을 섬기되 이런 사랑으로 섬길 때 잊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한 사람이 진실한 사랑의 인격을 가졌다. 할 때에 그것은 모든 신앙의 완성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진리가 아니고는 그가 진정한 사랑으로 접근할수 없기에 이미 그 사랑으로서 그는 진리 가까이 서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오랜동안 자기를 죽이는 자기 깨어짐의 자기 ( ? )와 극기의 과정이 없었더라면 그런 사랑을 가진 사람이 될수 없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주님의 사랑으로 넘치는 인격을 가졌을 때 그의 지난 신앙생활의 발자국은 자기를 찌르는 자기의 육적인 자아를 찌르는 그 피맺힌 발걸음입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는 그렇게 걸어온 발걸음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모든 신령함의 궁극적인 열매입니다. 수련회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만은 그 지식의 궁극적인 열매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거룩도 사랑 때문에 생기는 열매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데 왜 주님을 닮겠습니까.
주님을 닮으려고 애를쓰지 않는 사람이 왜 자기를 죽이겠습니까. 자기를 죽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속된 사람에게 거룩한 사람으로 변모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똑 같은 이야기를 사도바울은 훨씬 더 현대적으로 풀어서 이야기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니라.“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는 사람들이 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그들의 섬기면서 살아왔던 모든 날들이 결국은 사랑으로 섬기는 날들이었다. 이렇게 인정을 받을 때 그러한 주님의 인정을 받기까지 그들이 섬기면서 살아온 그 과정들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히랍어 성경에는 이것이 아가페라고 되어있습니다.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그 아가페” 그 아가페를 잊지 않으신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단지 일하는 것만으로는 이런 인정을 받을수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는데 자기는 결코 죽지않는 사람들 있죠. 예수 믿는 동기가 진정으로 주님을 아는 지식, 주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과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에서 비롯된 이 헌신, 이 섬김은 항상 자기 죽임을 동반합니다. 주님이 가장 소중하고 귀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이 싫어하는 것들을 나도 미워하고 주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것들을 나도 싫어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자기 안에 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덜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거룩도 어느 한순간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누구는 거룩의 은사를 받았다. 그러는데 순 거짓말입니다. 은사가 어디있습니까.
그러니까 어느날 눈뜨고 나니까 거룩해진 사람이 되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성경이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라. 그러면서 자기를 죽이라. 그러고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뭐하러 그렇게 복잡하게 삽니까.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다.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인격에 맺혀진 거룩은 부단한 자기 죽임과 자기 부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의지적으로 따르는 거룩한 성화의 결정체입니다. 사랑이 바로 그렇게 해서 획득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날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 사랑 없이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서 우리 속에서 무슨 사랑이 샘솟듯 솟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처절한 노력, 분투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점점 신령한 사람이 되어가고 점점 신령한 사람이 되어가는 그 결정체가 바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앞에서 우리 자신을 한번 비춰봅니다. 우리도 주님을 많이 섬기면서 사노라고 살았고 영혼을 섬기면서 산다고 살았지만 그러나 그렇게 섬기면서 살았다고 생각하는 많은 날 중에서 이런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았던 날들을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많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릇된 성취욕, 그다음에 거짓된 동기, 이런 것들에 붙잡혀서 섬기면서 사는 날들 빼고 모든 것들을 제하고나면 얼마나 소수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런 사랑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난과 박해가 가득찬 시대에 성도들을 섬기는 그 일에 자기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 그것을 기억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는 거룩의 실천으로 사랑의 인격의 열매를 맺으면서 영혼들을 섬기고 영혼들을 사랑하고 그 영혼들에게 마땅히 배풀어야 할것들, 그 영혼들에게 마땅히 주어야할 섬김과 의무들을 다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잊을수 없는 그들의 특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놓이든지 어디서든지 주님 때문에 섬기는 사람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받은바 그 사랑이 감화를 받아서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섬기는 사람들, 그들은 결코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자기가 할수 있는 일만을 찾아서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들의 중요한 섬김의 모든 동기는 주님의 의지입니다. 내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의지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고 내가 주님께로부터 바라는바가 무엇인가? 저는 하나님께서 은사를 따라서 우리를 사용하신다. 그랬는데 사실 그렇지 않은 것도 많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슨 말씀이냐하면 전도 참 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전도를 잘 못하는 나를 전도해야할 자리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도 저 사람이 훨씬 더 잘 가르치는데 하나님은 저 사람에게 가르칠 기회를 안주시고 못가르치는 나에게 기회를 주셔요. 나는 지금도 하여튼 중등부 사역은 참 어렵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제가 그것까지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중등부하고는 안맞는다. 차라리 주일학교로 내려가든지 아니면 대학부라 청년부로 가면 좋겠는데 그 중등부에 제능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사람들은 나보다 기도 안하는데도 많이 모아옵니다. 내가 보기에는 순 깡통이거든요. 그런데 뭐 애들이 그 사람만 좋데요. 뭐 달라붙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기도하고 말씀전해도 눈물 안흘리는데 그 설교같지도 않은 설교들으면서 훌쩍거리고 운다는 그런 소식을 들었을 때. 이것이 다 뒤집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집히는 것이 사실 뒤집혀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참 그런 것을 보면서 우리는 쉽게 생각하기를 그렇게 생각합니다. “담임 목사가 사람을 쓸줄 모르는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절대 그것이 아니더군요. 하나님이 거기에 세우셔서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무능하고 아무것도 아닌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철저히 보게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낮아질만큼 한없이 낮아지게 만듭니다. 그래 저 사람은 제능이 있고 나는 없어, 저 사람은 애들이 좋아하고 나는 싫어해, 저 사람은 놀다가 가서 설교해도 영양가도 없는 것을 애들이 들으면서 훌쩍훌쩍 우는데 나는 몇 시간을 준비하고 토요일날 가서 철야까지 하고 말씀을 전해도 애들이 놀고 장난쳐. 그러면 어떻게 되요. 더 하나님을 바라보게됩니다. 우리 자신이 죽는 길이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 사람은 원래 사랑이 많아서“ 원래가 어디 있습니까. 원래가 있다고 칩시다. 원래가 있다고 쳐요. 그렇지만 그 원래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엄마 아빠로부터 받은 자연적인 천성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특성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엄마 아빠가 다 맘이 좋은 집에서 만족하게 태어났습니다. 넉넉하게 떵떵거리고 살아서 인상쓰고 살일이 없어서 좋은 사람들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좋게 공부해서 좋게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와서 거듭나지 못했는데도 사람들이 제좀 보래. ”어쩜 저렇게 사람이 좋냐.” 그는 자기를 죽이고 희생하기 위해서 힘쓴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저같이 아주 못된 사람이 있습니다. 성질도 아주 고약하고 말이죠. 난폭하고 말이죠. 그 정도는 아니지만 하여튼 바탕이 되어먹지를 않았어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생끝날에 갔는데 그 사람하고 비교가 안되요. 그 사람은 아직도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조금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뭐냐하면 워낙 바탕이 그야말로 후지고 인생을 살아오면서 온갖풍상을 다겪어서 굽을대로 굽어서 주님을 만난 다음에 끊임없는 자기 죽음을 경험하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울고 말이죠.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으면서도 죽지않는 자기 자신을 인해서 애통하고 아파하면서 걸어온 모든 길이 펄펄 산 괴물과 같은 자기를 찌르면서 걸어온 피맺힌 길입니다. 그럴 때에 교리적으로 누가 받을 상급이 많겠습니까.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하면 사람좋은 사람이 자기를 많이 극복한 사람이 아니고 진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사랑 앞에 녹아져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대면하며 자기를 죽이는 마음으로 예수 죽인 것을 스스로 짊어진 마음으로 자기를 죽이면서 살아온 그 사람, 그것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언제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읽은 성경에도 이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성도를 섬겼는데 이런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사랑으로 섬기면서 살았다.라고 하는 것은 불우이웃 돕기의 정신으로 살았다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이들이 얼마나 주님 자신을 추구한 거룩하고 진실한 성도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서는 아무데서도 배울수가 없습니다. 거기로부터 배워서 거기로부터 깨닫고 거기로부터 감화와 변화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 사람들이 이렇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슴아파하며 기도하는 제목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정말 우리에게 가슴아파하는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까.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오랫동안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처럼 맺힌 기도의 제목들, 누르면 그 기도의 제목이 아파서 온몸에 통증이 느껴지는 그러한 기도의 제목들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여튼 자신의 전 존재를 건 사모하는 기도의 제목들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있다고 칠때에 정말 우리들이 정말 사랑이 없음을 인해서 가슴이 아파본적이 있습니까. 물질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다른 사람들에게 업수이 여김을 받는 것이 너무나 서러워서 눈물을 흘리며 물질의 축복을 구한적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뭔가 우리들이 애착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버렸을 때에 그것 때문에 아파서 주님의 위로를 구하며 운적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속에 주님을 닮은 사랑이 없다는 것 때문에 눈물흘려본적이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많이 사랑하셨는데 주님은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영혼들을 너무나 사랑하시는데 내게는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견딜수 없는 통증이 되어서 아파본적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강포하고 황폐한 신앙의 인격이 주님 사랑에 깊이 녹아들기 위해서 금식하며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을 본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소한 것들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시시한 것들에 우리의 인생을 걸고 별로 가치없는 것들에 우리의 신앙이 생명이 달린 것처럼 매달리는 그러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처럼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정말 복음의 밝은 빛가운데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안 사람들, 신앙의 아름다운 세계가 무엇인지를 안 모든 사람들은 진정으로 성도의 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지 무엇을 누리며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든지 하나님 앞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가 무엇이 동기가 되어서 어떤 삶을 하나님 앞에 살다 왔는가. 그것이 소중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사소한 것들에 목숨을 겁니다. 그리고는 정작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충성스럽게 살았는데 하나님의 장부에는 우리가 섬기면서 산 것이 별로 없을수가 있습니다. 먼저 열심히 사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에 맞춰서 사는 것입니다. 그 때에 열심히 사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들이 신령한 변화를 받기를 원하지만 정말 우리에게 이런 사랑의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의 가족들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을 위해 늘 기도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변화되지 않는 것이 그들이 강팍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한 영혼을 섬기는 성도들의 그 사람에 하나님의 축복은 없습니다. 언제나 모든 것이 우리의 사랑없음이라는 고백이 있어야합니다.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내가 받았고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충분히 알았다면 내가 이렇게 신령한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고 이제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껍질을 벋고 이제 은혜의 속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신령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표징이 필요합니다. 그 열매가 무엇이냐하면 사랑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이렇게 구하고 있습니까? 정말 구하고 있습니까? 내가 금이나 은을 주고 사랑을 살수 있다면, 내 높은 지위나 긴 수명을 주고도 사랑을 살수있다면 그래서 주님을 볼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으로 주님을 보이고 주님을 알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으로 주님을 알리고 주님이 누구인지 만져볼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으로 주님을 만져보게 할수 있는 도구가 될수 있다면 이것이 영혼을 섬기면서 사는 사람의 가장 커다란 특권입니다. 읽은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사람 이름도 잊어버리고 다 잊어버렸습니다만은 제가 설교를 위해서 예화를 잘 정리하고 그러는 사람이 아니니까. 예화) 어느 청교도의 일화입니다. 목회자들이 이렇게 모두 모였습니다. 그래서 “아무게 목사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그랬더니 “오! 주님“ 그렇게 하고 한참 기다린 후에 그 말 한마디가 터져 나오는데 모두 울음바다가 되었답니다. 모든 사람이 ”오! 주님“ 사람들이 그렇게 울겠습니까. 사람들이 그럴것입니다. ”뭐 불렀으면 기도가 나와야할 것 아닙니까.“ 그럴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겠죠. 그렇죠.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탄식, 그리고 우리 주님을 간절히 부르는 그 호칭, 그 한마디가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과 하나님을 향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마음을 대변하기에 충분했으니까 거기에 모인 그 사람들이 그렇게 흐느껴 울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으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내 안에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영혼을 향한 참 사랑이 없는 것을 인해서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그 자체가 주님의 마음에는 얼마나 커다란 고통일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랑이 여러분 속에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간절히 구하고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왔다고 고백한지가 오래되었는데도 여전히 이런 사랑이 없는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굉장히 부끄러워하고 괴로워 할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런 사랑으로 성도를 섬겼습니다. 그 사랑이라고 정관사를 붙인 것은 이미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그들에게 보여준 사랑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사랑은 각자가 선택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나타내 주신 그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맛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사랑을 따라서 살지못해도 그 책임이 적겠지만 이미 주님의 그큰 사랑이 무엇이고 주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애정이 무엇인지를 안 사람들은 그 사랑을 따라 살지못하는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책임질 일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 사랑과 그런 은혜를 따라서 사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런데 그 사랑이 무엇을 위한 사랑이라고 했습니까? 그의 이름을 위한 사랑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히랍어 성경에 보면 ”그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나오지 않고 ”에이스토 오노마 아우 투“ 이렇게 나오는데 직역을 하자면 ”그분의 이름 속으로 사랑“ 이것이 무슨이야기냐하면 사랑을 했는데 그 사랑이 움직이는 사랑입니다. 어느 한 초점을 향해서 그 사랑이 달려가는 사랑입니다. 그 초점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명예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려가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도를 섬기는 진실한 사랑은 자기가 받은 것이 많기 때문에 선심을 쓰듯이 어떤 지도자의 위치에서 우월한 위치에서 내가 너에게 어떤 나누어 준다라고 하는 이러한 사랑이 아닙니다. 이렇게 베푸는 사랑은 그 사랑을 모두 베풀고나면 누가 기억이납니까? 사랑을 베풀어준 그 사람이 기억이납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서 사도가 말하는 이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름 속으로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이 성도를 섬기며 베푼 그 모든 사람은 그 사랑을 베푼 그 사람들 자신을 이 성도들에게 기억나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도구로 하여서 자기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신 주님을 생각나게 하시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사랑의 완성은 자기를 감추는 것입니다. 사랑의 완성은 사랑의 대가조차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의 완성은 자기가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지불했던 희생을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부모나 동기간이 싸울 때 ”야, 내가 너를 위해서 해준 것 한번 생각해봐라. 내가 너희를 위해서 먹을 것을 먹었니. 입을 것을 입었니."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사실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분들만 그렇게 살았나. “내가 너를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한번 생각해봐라. 먹을 것을 먹었니. 너를 낳는라고 내가 얼마나 배가 아팠는데 내가 너를 위해서 이런 희생도 하고 저런 희생도 했는데” 그러면서 다 이야기 하는 때는 언제입니까. 엄마의 마음에서도 그 자식이 싫어질 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별로 마음에 안들 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자식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어쩔줄 모르는데 “얘야. 너 기억해라. 내가 너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 아니. 너 이렇게 자란 것은 다 내 덕분이다. 똑바로 기억해라” 그렇지 않습니다. 보기 싫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성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것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베풀어 준것도 잊어버립니다. 사실입니다. 다 잊어버립니다.
영혼을 섬기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뭐냐하면 다른 사람이 와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영혼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했는지 몰라요. 밤이면 철야기도했죠. 새벽에 가서 눈물로 기도하죠. 또 쌀이없다. 그러면 쌀을 사다주죠. 아프다 그러면 병원으로 뛰지요. 얼마나 그렇게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 사람은 기억도 안나요. ”내가 그랬나“ 사랑이 식어지고나면 ”내가 너에게 해준 것을 생각해봐. 이것도 해주고 이것도 해주었지“ 그런데 그 중에 아는 사람이, 생각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혼자만 그것을 장부책에 적어놓듯이 다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매마르면 그것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 이것은 사실은 주님을 위해서 한 것이 너무나 기억에 많이 나는데 그래도 이런 것 이야기 다하면 하늘에서 상급도 깍인다니까 그러니까 기왕에 좀 참자. 그리고 묻어두면서 아이고 제가 뭘 좀 잘한게 있지요.” 이것이 아닙니다. 진짜 기억이 안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7장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하늘나라를 상속한 사람들에게 너희가 내가 갇혔을 때에 찾아왔고 내가 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그랬더니 이 사람들은 황당한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했습니까. 생각도 안납니다.” 택함을 받지못한 사람들에게 “너희는 뭐도 안하고 뭐도 안하고” 그러니까 “우리가 언제 안했습니까.” 한 것이 다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뭐냐하면 주님의 이름과 관계된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 사랑을 베풀면서도 사랑을 베푸는 내가 사랑을 받는 저 성도들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것초자 두려워 하는 사람들, 저들로 나는 잊게하고 오직 주님만 생각나게 하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 그들속에 내가 무엇인가 중요한 은인인 것 처럼 기억되는 그러한 순간이 올 때에 두려워하는 것, 그런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내가 이 시간을 빌어서 부탁을 드리겠는데 제가 내일 부산에 어느 신학교에 집회를 내려갑니다. 서점하고 전화를 했는데 “목사님 그 학교에 목사님 팬이 많습니다.” 제발 그런 소리좀 하지마세요. 내가 무슨 오빠부대 거느리고 다니는 대중가요. 가수냐? 이제 그 정도쯤 되었으면 이제 사고나 말이 신령해져야지 팬의 유래가 무엇입지아세요? 펜레스틱입니다. “열광하는 꾼들이다.”입니다. 그것을 내가 언제 그런 사람들들 달고다녔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은혜받은 사람들의 입에서도 거침없이 나옵니다. 제발 하지마세요. 다른 사람에게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 가서든지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여기에서도 보세요. 아주 분명하게 나오죠. ( ? ) 성도들을 섬기는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주님에 대해서 열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알게된 하나님의 사랑을 인해서 궁극적으로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목적지가 있어서 계곡과 계곡이 가로막혀서 목적지를 가지 못해서 방황하던 사람이 한참을 아래로 걸어 내려가다가 다리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리고는 저기 보이는 목적지를 향해서 다리를 건너거 막 달려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거기에 도달하고 그리고 거기에 가서 막 자기가 도착한 것에 대해서 한없이 감격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다리에게 엎드려 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건거갔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잊어버렸습니다. 섬김을 받는 사람들이 그런 정신이어야 한다기 보다는 섬기는 사람들이 그런 정신이어야합니다. 섬김을 받는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잘 가르쳐주고 자기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는데 “넌 필요없어 주님이 필요하지.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죠. 가르치면서 섬기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나는 빛이 아니요. 다만 빛에 대해서 증거하러온 자라” 이런 고백을 할수있어야합니다. 이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도들을 많이 사랑하고 눈물이 있는 섬김으로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영혼들을 섬기고 성도들에게 종노릇하면서 그 성도들을 세우기 위해서 수고를 많이 하였지만 그러나 그들의 모든 수고와 희생을 통해서 자기 자신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기억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섬김을 하나님의 이름속으로 집어 넣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섬김을 통하여 그 성도들은 더많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많이 존경하고 그리고 더 많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고싶어하는 갈망을 가진 사람들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닮은 사람들이 예수 닮은 사람들은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오늘날 우리들에게 필요한 사랑아닙니까. 정말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예와 같은 섬김, 종과 같은 봉사를 통해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들리움을 받기를 원하시는 그러한 사람, 그러한 섬김을 당하며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히브리서 기자는 자기의 수신자인 핍박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삶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와 같이 이렇게 평안한 환경에서 부족할 것이 없이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난을 당했던 사람들이고 그리고 핍박의 시대에 위기를 맞으면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그 환경속에서 오히려 더 아름답게 사랑을 꽃피웠습니다. 마치 더러운 연못에 그 더러운 것을 인하여서 오히려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그런 사랑속에서 살았습니다. 고난과 핍박이 가득한 시대에 그런 시대는 아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때 보다도 더 많이 사랑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있습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죽도록 전도해도 예수를 안믿더래요. 절대 안믿기로 작정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다 하다 안되니까. 전도를 하다가 어느날 막 울었데요. 그랬더니 이 사람이 얘기를 하더래요. “믿겠다.” 그러더래요. “왜 그렇게 생각을 바꾸었느냐” 그랬더니 “나는 아직도 당신이 이야기 한 것은 새빨간 거짓말 같다. 예수가 돌아가시고 내가 구원을 받고, 다 거짓말 같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허무맹랑한 말에 넘어가겠느냐. 그런데 태어나서 나를 위해서 울어 준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 그러면 무엇인가 당신이 얘기한 것은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 속에 무엇인가 맞는 것이 있을 것 같다.” 그러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갈급한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그때처럼 핍박과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때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 때보다 훨씬 건조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제 사랑이 무엇인지를 점점 잊어가는 시대에 살고있습니다.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것에 정신과 마음을 모두 ( ? )라고 어디에서도 사랑의 숨결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고통스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이 매마른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그런 사랑을 갈망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것이 주님이 주시려고 하는 참 사랑으로부터는 거리가 멀다고 할지라도 누군가가 이런 참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에게 전해주고 그들이 자기 자신의 인생보다 소중하다는 사실을 이러한 사랑의 섬김을 통해서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의 섬김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수많은 영혼들이 누구때문입니까. 그렇게 많은 날동안 주님의 말씀을 들었어도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이 누구때문입니까. 말씀의 칼을 갈고 갈고 또 갈아서 날도 세우고 그리고 뾰족하게 갈았지만 그리도 그들의 심장을 비켜가는 것은 결국은 무엇입니까. 진리로 그들을 정복할수 없는 그것, 그 무엇이 그 진리와 함께 필요한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참된 사랑이. 인격적인 사랑이 그들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자기처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안 사람들만이 가질수 있는 독특한 눈빛으로 사랑할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섬김이 이 시대에는 그 무엇보다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하는 사람, 어두운 세상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이렇게 더 많이 눈물을 흘린다면 우리들이 강팍하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하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질 것입니다. 누가 복음을 전해도 듣지 않았던 사람들의 마음, 누가 전해도 듣지 않았던 영혼의 변화에관한 참다운 교리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새롭게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기다리고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랑을 베풀면서 하나님의 이름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그런 사랑을 베풀면서도 자기는 감추고 자기가 그런 사랑을 베풀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이라고 말할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보여줄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오늘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시대는 바야흐로 너무 어두워지고 사람들의 마음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완악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생각한 것보다 사람들의 마음에 다사리고 있는 의심과 불신들은 훨씬 강해졌습니다. 논리만으로 그들을 이길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힘과 무력이나 기적을 보여줌으로서 그들을 설복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단편적인 생각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속에 진정으로 결핍된 것은 기적이나 아니면 다른 것들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에게 이런 도구가 되어서 성도를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 이 시대에 당신에게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달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못살아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수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살아간 그 모든 날들이 주님을 섬기는 날들이 되게 하시고 그리서 결국은 우리의 인생이 마칠 그 때에 우리의 섬김이 다하는 그 때에 우리가 정말 우리의 일생을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온 사람이라고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마지막 죽는 그 순간까지 주님께 결코 잊혀질수 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더 많이 일어나기를 원하실 것이고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배웠던 그 사람들이 우리의 뒤를 따라서 우리를 붙잡으신 주님을 본받으며 우리처럼 그렇게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하나님을 찾는자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시77:7-10上)
시편이 주는 그 은혜의 풍성함은 그 고백이 개인적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차갑게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앙의 체험과 그리고 영적인 경험들을 토대로 진술한 고백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자의 마음이 어떤가 하는 것을 배워간다는 점에서 이 시편의 가치는 탁월합니다. 그 중에서 이77편은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든 신자들의 영적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여러 가지 진리들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인은 먼저 기도를 결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기도하게 하는 원동력을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결심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기를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렇게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라고 하는 확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지만 시인속에서는 무엇인가 예상치 못했던 마음의 커다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닌 무엇인가가가 마음속에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고 하는 그 확신의 흔들림이었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해서 시인은 이제 자신의 영혼의 문제들을 쭉 풀어가고 있습니다. 수요일마다 우리들이 살펴보는 터픽은 잊지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들이 이제 읽은 이 본문을 세부분으로 나누어서 이제 이 설교를 진행할까 합니다. 우선 첫째는 뭐냐하면 경건한 흔들림입니다. 이 시인은 말씀드린바와 같이 기도하기로 결심했고 또 기도하면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런 확신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시인의 어떤 회의가 나옵니다. 그렇죠. 하나님이 은혜베푸심을 잊으셨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인자하게 나를 대해주시는 것을 이제는 그만 두셨는가, 이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허락해 주시는 것을 이제는 다 거두어 버리셨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긍휼을 이제는 다 거두어 가시고 그리고 나를 차갑게 대하시는가” 그런 회의를 느끼면서 이 사람이 흔들리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믿음의 부족, 혹은 확신이 없는 불신앙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볼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회의입니다. 뭔가 이렇게 회의가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역설적인 이야기같지만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경건한 회의가 있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하면 이 시인이 지금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인자, 하나님의 허락하심, 하나님의 긍휼,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해서 더 이상 안베푸시고 이제 잊어버리셨나보다. 라고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그 이면에는 무엇이 있느냐하면 그것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신앙의 부족에서 오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나 의뢰심의 부족에서 오는 불신앙적인 의심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긍휼, 자비 이런 것들을 너무나 간절히 원하는 나머지 거기에서 오는 애착적인 회의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바르게 할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자신은 하나님이 앞에서 가지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 항상 어느정도의 회의가 있습니다. 정말 순전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신앙의 태도나 자세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회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정도만 살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항상 거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더 깊은 은혜의 세계속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워 떠는 그러한 경건한 흔들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여기에서 그러한 경건한 흔들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를 사랑해주시지 않는다고 가슴아파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의 많은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갈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더 온전하게 사랑해 볼려고 애를쓰는 사람들이 아니면 하나님이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해 주시지 못하는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하는 그러한 자책하는 고백이 있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언제나 기억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만족보다 우리에게 커다란 적은 없습니다. 시인이 보여주는 것은 경건한 흔들림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서 그런 흔들림을 경험해보신적이 있습니까. 사랑이 너무나 깊으면 병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그리고 주님이 나를 주님의 자녀로 부르셨을 때 주님이 나와 나누고 싶었던 그 관계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고 내가 실재로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누리고 있는 이 관계에 피상적인 것들을 비교하면서 더 온전한 하나님과의 친교속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런 경건한 흔들림을 경험할수 있습니다. “아, 이제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시려는가. 나는 정말 버림받은 것은 아닐까” 더욱이 이 시인은 옛날에 자기에게 은혜를 많이 베푸셨던 때를 기억할수록 소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더많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하나님에 나에게 이렇게 놀랍게 은혜를 베푸셨는데 지금은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예전과 같이 그런 사랑, 그런 긍휼을 그런 은혜, 기도할 때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응답들을 느끼지못한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정말 나를 버리셨는가. 이제 하나님이 더많이 내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가. 사랑의 표현은 후퇴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사랑의 표현은 항상 전진해야지만 만족을 느낄수 있는 것입니다. 후퇴해서는 만족을 느낄수 없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속성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들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고 있기 때문에 괴로워 하고 번뇌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더많은 은혜, 더많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이미 맛본것보다 더큰 기도의 응답, 그리고 그 기도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만은 사랑하시는 것같은 놀라운 독점적인 사랑, 그리고 자기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이런 것들을 지금 느낌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괴로워 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신앙적으로 경건하고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경건한 흔들림이라고 하는 이유는 뭐냐하면 이런 흔들림 그 밑바닥에 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 없이 살고 싶다라고 하는 불신앙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고 싶은데 지금 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그런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는 그런 회의이기 때문에 제가 이것을 경건한 흔들림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이런 흔들림이 있습니까.?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허우적 거려도 그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사랑할수 없게 하는 무엇인가 자신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는 그 무한한 한계들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것을 해결해주시지 않는 것 같은 것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흔들리는적은 없습니까? 이런 흔들림이 없다면 그에게는 영적인 성장도 있을수 없습니다. 신앙의 발전도 있을수 없습니다. 한 영혼이 어떻게 영적인 깊은 어두움속에서 벗어나게 되는가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맹목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믿는다고 해서 그가 영적인 어두움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죄인들을 용납해주시고 사랑하신다고 하는 교리에 찬동하는 만으로는 그가 영혼의 어두움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 영혼이 깊은 어두움속에서 벗어나기 전에 그의 마음에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견고하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됐지“하고 생각하던 신앙의 자신있는 마음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흔들리는 균열사이로 무엇인가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흔들림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로부터 아직도 멀리 있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떡하면 자신이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세계속으로 들어갈수 있을까에 대해서 깊이 고뇌하고 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인이 경험하고 있는바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늘 불안하고 흔들리는 그런 상황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영적으로는 얼마나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사람들인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이 시인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다하였는가. 이제 하나님이 그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이제 하나님의 인자가 다하였는가. 이제는 하나님이 긍휼을 걷우시려는가, 그러면서 그런 경건한 흔들림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우리들이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며 자신이 신앙생활에 만족하고 심지어는 하나님도 자기의 신앙생활에 만족하시는 것이 좋을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오만방자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는 얼마나 다른 것입니까. 오늘 이 시인이 경험하고 있는 이런 경건한 흔들림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야합니다. 형식과 타성에 굳어져서 난공불락과 같은 성을 이루면서 그것이 마치 우리의 신앙의 전부이고 그리고 자신이 마치 그런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 정상에 도달한 것 같은 그러한 태도들, 자만심들, 이런 것들은 우리를 결코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속으로 데려갈수 없습니다. 마음의 부요함은 영적인 가난함의 모든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러한 흔들림이 필요합니다. 오랜동안 우리를 흔들림이 없이 떠받들어 주었던 우리의 영적 상태에 대한 만족,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갈고 있다라고 하는 자부심, 그리고 이제껏 하나님 의지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을 향한 확신, 이런 것들이 이제는 좀 흔들려야 될 필요가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첫 번째로 이러한 경건한 흔들림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경건한 흔들림을 하나님 앞에 경험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견고해지기 전에 먼저 우리의 세계가 흔들릴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된 의미심장한 예언이 있습니다. “ 이 아이는 사람들의 폐함과 흥함을 위한 표적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먼저 깊이 흔들리고 패배하는 일이 있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서 치료하고 회복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누룩처럼 번져있는 자기 만족적인 신앙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누가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마음속에 사라지는 것을 인하여 어린아이처럼 떨려하고 있습니까. 누가 이제 하나님이 자기로부터 은혜를 거두시고 자비를 잊어버리실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 앞에 두려워서 어린 아이처럼 마치 전제산을 잃어버리거나 부모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두려워떨려 하나님 앞에 흔들림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그렇게 견고할수 있는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물어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흔들리는 자, 하나님 앞에 이렇게 자시의 세계를 부수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기대하면서 무엇인가 흔들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가까이에 계신분이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이 흔들림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흔들림의 원인은 간절한 목마름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향한 간절한 목마름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런 경건한 흔들림을 경험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집중된 추구는 항상 이처럼 우리안에 있는 기존적인 질서들을 흔들어놓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은 이처럼 우리 안에 있는 이미 구축된 세계들을 허물어뜨리려고 하는 그런 강력한 움직임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우리는 불경건한 사람이었다고 말할수 없고 돌이키기 힘들정도의 어마어마한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는 중이라고 말할권리도 없습니다. 시인이 지금 무엇인가 영적인 침체속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 한다고 할것같으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는 성도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더큰 자비하신 사랑을 누리고 싶어서 안타까워한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 시인이 바로 그렇게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였지만 그러나 오늘 하나님 앞에 매우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불신앙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지금 흔들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때문이냐하면 보다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싶은 것입니다. 보다도 탁월한 하나님의 친교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누렸던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깊은 경험들은 오늘 우리들이 다양하게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의 표징을 많이 보여주셔도 주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은혜의 정도에 있어서 예전에 경험을 능가하기 전에는 지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라고 하는 확신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사랑을 고백할때에도 그 고백이 뒤로 물러설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실 사랑의 고백을 기대함에 있어서도 그것은 뒤로 물러설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이 나를 만져주셨던 그 은혜로운 텃치, 우리의 영혼을 감싸고 우리를 당신과의 말할수 없이 행복한 친교속으로 데려가시는 하나님의 그 탁월한 간섭하심이 이전에 느꼈던 것보다 더많이. 조금이라고 더 깊이. 조금이라고 더 높이. 조금이라고 더 강렬하게 느끼지 않고는 주님이 나를 지금 사랑하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할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시인은 상당한 정도의 영적생활을 누리고 있어고 그러한 축복속에서 사는 사람이었지만 예전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셨던 일들을 기억하면서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은혜의 상태를 인해서 하나님 앞에 번뇌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 자신을 향한 간절한 추구와 갈망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흔들림을 경험하게 만드는 궁극적인 원인과 이유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인과 같은 어린아이와 같은 떨림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의 은혜의 상태를 바라보면서 어제보다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내가 멀어졌을지로 모른다고 노심초사하며 어린아이와 같이 바들바들떠는 그런 신령한 영적 긴장이 있습니까.? 날마다 날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길을 걸어가지만 그러나 나의 겉모습과는 상관이 없이 내가 이 거룩한 신앙의 길에서 사단의 송사를 받고 그리고 양심의 송사를 받고 육신에게 져서 뒤로 미끄러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오늘 이 순간도 하나님이 나를 붙잡으신 손을 놓으시면 안됩니다.라고 하는 바들바들 떠는 어린아이와 같은 경건한 긴장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제는 무관심과 그리고 냉담함이 교회안에 누룩처럼 번져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영혼의 연약함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울지않으려고합니다.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최대의 대치할수 없는 의무인 주님을 더욱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진전이 없는 것을인해서 안타까워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은 적당한 의무로 대치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보여주어야할 공의와 진실한 삶은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대치되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교회 안에는 빛잃은 성도들과 맛잃은 소금과 같은 신자들로 가득차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정말로 너무나 원하시는 것은 이런 시대가 될수록 영혼의 진실한 변화입니다. 제가 이번에 책을한권 정말 10개월만에 탈고를 했습니다. 뭐 바쁘기도했지만 제가 게을렇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억하실련지 모르겠는데 올해인가, 1월달에 신년사경회 우리가 한적있죠. 육적 그리스도인과 신령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그것을 이제 히브리서 5장 13절을 가지고 한 280페이지짜리 책을썼는데 그 책을 쓰면서 이제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글들을 쭉 대하면서 그 내용들을 좀더 탄탄하게 논리적인 근거들을 제시하고 읽었던 자료들을 제시하고 그랬는데 거기에서 깊이 감명받았던 것이 그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한가지 통찰이 오늘날 기복신앙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들에 대한 긴 논쟁을 싹 정리를 해버리더라고요. 그것이 뭐냐하면 칼빈도 마찬가지고 오앤이나 이런 청교도들도 마찬가지고 최고의 축복을 ( ? ) 봤습니다. 영적인 축복이 최고의 축복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의 베푸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최상의 축복이라고 본것입니다. 그렇게 본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주시는 복도 많지않습니까. 연약한 사람에게는 건강한 것도 복이고 그렇죠. 또 결혼적령기가 되어서 그래서 좋은 형제 자매를 만나서 짝을 이루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렇죠. 여러사람을 만나는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만나서 그것도 복입니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요. 물질적인 궁핍속에서 지내지 않고 적절하게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도 도울수 있는 물질적인 환경속에서 사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모든 것들은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축복일수 있는데 그것들이 영혼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합니다. 이말하면 “나는 안그런 것 같은데” 그러죠. 미미합니다. 그런 축복들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우리 영혼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 육신을 위해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축복들은 일반섭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의 의미가 우리의 영혼에 우리의 마음에 전달되면서 무엇인가 영혼에 흔적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그럴 것 아닙니까. (예를들자면 곤궁하게 살다가 물질적인 축복을 받으면 “아,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참 많이 베풀어주셨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야, 주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이럴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간접적으로 자신의 영혼에 무엇인가 영향을 주는 것아닙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이고 또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의 영혼에 진짜 영향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잘하고 풍성한 영적생활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인생을 향해서 환경을 도구로 해서 자신의 영혼에게 다가오시면서 무엇인가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많은 손길들을 의식할수 있으리만치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은 자기 앞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고 그것들의 해석을 통해서 깨닫고 자신의 영혼에 무엇인가 영향을 주도록 그렇게 하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이 안되있는 사람들이 단지 이 세상에서 축복을 받음으로서 그들의 영혼이 성결하고 진실해지고 거룩해 지고 그럴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저는 진짜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진짜 무릎을쳤습니다. “야, 그렇구나” 이것 한가지 사실만 오늘날 신자들이 잘깨달아 알아도 이 혼란한 상황속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수있을터인데 하고 말이죠. 영혼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축복이 그것이 가장 커다란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진리와 성령으로 그 사람에게 직접 다가오셔서 그래서 직접 그들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면서 지속적으로 이 거룩의 은혜를 주셔서 그 사람을 새롭게 빚으신 사람이 아니면 그들이 “예수 예수 믿는 증거 받은 증거 많도다.” 그러면서 아무리 찬송을 하고 박수를 치고 그리고 간증에 세우면 “저요. 저요” 하고 간증을 해도 그것이 그 사람을 거룩하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이 시인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이렇게 불안해 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이렇게 고뇌하면서 경건한 흔들림을 경험하며 아파하고 있는 것일까요. 시인이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시편 42편에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갈망하던 것과 똑같은 갈망의 이유 때문에 경건한 흔들림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이라는 이야기는 자신의 영혼을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영적 축복입니다. 그것을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에 의하면 이런 논리아닙니까. 자기가 지금 하나님 앞에 한없이 불안해 하고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때문이냐하면 여러 가지가 아니라 단 하나 때문입니다. 사업도 안되고, 자식들도 속썩이고, 남편도 속썩이고, 다양한 이유 때문에 지금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얼굴을 가리고 계신 것 같다라고 하는 그것 하나입니다. 그것 하나로 인해서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말은 많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이제는 잊으셨는가. 하나님이 인자를 더 이상 안베푸실려는가. 이제는 나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려는가. 이제는 허락하심을 잊으셨는가. 여라가지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궁극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경험을 한번 보세요. 제가 처음 회심하고 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 ? )생활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빠진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 앞에 너무 창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뭐가 창피하냐? 그냥 이렇게 하나님 없이 살아가다가 무슨일이 생기면 하나님 앞에 가서 막 매달리고 그리고 응답해주시면 조금있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리고 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서 매달리고 하는 그런 것이 내가 나를 생각해도 너무 유치하고 졸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차라리 신자다운 방법은 그런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찾든지 매일 시종일관 똑같이 하나님을 찾든지, 신자다울려면 그렇게 하고 신자다울려면 잘나갈 때 하나님 안찾았으면 어려울때도 혼자 어려움을 당하고 그래야지 그것이 남자다운 것이지 치사하고 챙피하게 말이지. 그런 생각이들었습니다. 그것을 그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심리를 아주 굉장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경험했습니다. 상당히 많은 여러분들이 고개를 끄덕이시는데 신자다와 질것이냐 남자다와질 것이냐. 또 어떤 성도들은 나는 여자인데 어떡할거냐. 그러는데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한번 심각하게 회의가 온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문제가 무엇이가.
그런데 말이죠. 문제는 뭐냐하면 이것입니다. 평안할때는 기도 할것이 없습니다. 기도제목을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데 잘나갈때에는 신앙적으로 어릴때에 잘나갈때에는 기도 할것이 없습니다. 뭘해요. 편안한데 하나님 앞에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도와주시기는커녕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시기만하면 괜찮을 것 같다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느냐하면 이 시인의 마음의 상태와는 정 반대의 상태의 신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이 자신의 영혼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을 잊고있기 때문에 환경이 넉넉하면 기도의 제목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추구점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신앙의 본질 그 자체를 하나님이 계속해서 자기에게 복주시고 이런 경험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거의 전부다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간증은 그래서 대부분 똑같습니다. 막힘들었는데 주님을 찾았더니 주님이 이렇게 저렇게 복을 주셨는데 다시 또 멀리 떠나서 타락했더니 하나님이 되게 혼내시고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왔더니 그다음에 다시 하나님이 다시 복을주셨더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추구점들을 아주 분명히 해야합니다. 여기에서는 이 시인이 지금 그런 이 세상의 여건이나 자기의 먹고사는 문제.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냐하면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가지고 지금 직접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는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이 시인은 지금 고통을 느끼고있는 것입니다. 굶주림 보다 더큰 것 사랑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목마름보다 더 큰 것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주님의 첫치를 느낄수 없는 것, 수많은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것 보다도 더 무서운 것 하나님이 나를 뜨겁게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이 제마음에 다가오지 않을 때. 그러면서 이 시인이 하나님을 향한 강렬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경건한 흔들림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러한 경건한 흔들림이 없는 것, 아주 야비한 자기 만족적인 신앙으로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궁극적인 원인은 그 밑바탕에는 무엇인가 하면 다른 것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 주님을 향한 더 간절한 추구,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어떡하면 내가 정말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 날마다 성화의 진전을 이루며 하나님과의 교제에도 풍성한 세계를 경험하면서 성장할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추구하는 이 목마름이 없기 때문에 경건한 흔들림들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혼에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시인은 여기에서 이런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추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이 시인에게 이런 경건한 흔들림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그런 목마름이 있는지 한번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없이도 넉넉히 살수있을 것 같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예배가 끝난후 교회당을 나섭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인해서 살수있을뿐이기 때문에 이 은혜를 유지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면 은혜를 받지못한 성도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그 예배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깊이 아파하고 그리고 일주일동안의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그런 진정한 참회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그 사모하는 마음들이 시인은 오늘 이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추구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르고 하나님의 사랑에 목마른 자가 되었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받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를 만족할 수가 없어서 더큰 하나님의 사랑, 더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인가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구체적인 응답이 없는 것을 인해서 그는 또한 회의에 빠지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진짜 버리셨는가. 바로 그 때에 이 시인의 마음속에 놀라운 생각이 하나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이것은 나의 연약함 때문이다. 즉 무엇이냐하면 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은 내가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경험을 초월해서 존재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경험을 초월해서 품고 계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회상하면서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그런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입으면서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있는데 내가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잠시 경험하지 못한다고해서 이런 식으로 회의에 빠지는 것은 옳지않다.라고 하는 신앙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이것보세요. 여러번 불에 연단되어서 두들긴 쇠가 강하듯이 이런 어떤 흔들림을 경험하고 경건한 회의를 느끼고 그 속에서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정답을 받고 다시 두들겨서 강해지고 강해지고 한 것은 어느 한 순간에 어린아이 처럼 단순하게 딱 믿고 그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앙보다는 훨씬더 강한것입니다. 단련된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시편73편에서도 경건한 시인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흥망함을 보면서 좌절하다가 나중에 다시 성소에 들어가면서 악인의 종말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게되지 않습니까. 그 때에 경험한 그의 단련된 강함속에서 신령한 세계에 대한 놀라운 경험들이 가슴에 밀려들어 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이처럼 간절한 사모함으로 주님 앞에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시한번 새로운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정말 나를 안돌아보시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은 나의 연약함 때문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 사람인지를 알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주님이 우리를 만져주시기만 하면 우리는 우리의 가진것뿐만 아니라. 인생전부도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제적인 은혜의 경험이 사라지고나면 그러한 고백과 서원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는 다시 자신의 삶의 주인이 자기라고 강력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바쳤던 지배권들을 다시 빼앗아 와서 그래서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시인이 그것을 무릎을 꿇으면서 이것은 나의 연약함 때문이라. 우리는 그런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든지 너무나 쉽게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은 아주 교묘하고 철저하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났으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은 아주 잠깐동안하고 회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이제 나를 안돌아 보시나보다. 나는 이제 희망이 없다. 나는 이제 하나님께로 부터도 버림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가볍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때에 박수를 칠 존재는 마귀밖에는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고 회개와 뉘우침, 진실함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할 확신을 못갖도록 강력하게 그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했으면 얼마나 추구했겠습니까.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고민하며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더큰 은혜, 더큰 사랑을 사모하며 고뇌했지만 그러나 그런 사랑을 많이 잊어버리면서 살아온 날들에 비해서 그가 몸부림 치면서 하나님을 찾았던 날들이 얼마나될까요. 우리가 1년씩, 2년씩 시종일관 하나님을 향해서 목마른 마음을 유지하면서 흐느끼는 눈물로 자신의 영혼 안에 행하실 일정한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서 매달린적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버린 길은 장구한 세월이고 주님을 다시 찾으라고 한 시간들은 아주 짧은 시간인데도 그런 몸부림과 간절한 하나님을 향한 추구가 너무나 길고 하나님이 자기를 돌아보시지 않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멀리 떠났던 사람들, 어떤 이유로든지 예전에 받았던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될수 있는 더 깊은 은혜의 세계속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시금 그런 영혼의 축복을 주실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금 자기를 간절히 찾게 만드셔서 주님을 추구하고 그 은혜를 갈망하는 가운데 자신을 에워싸고 있었던 수많은 순수하게 하나님을 찾아가지 못하게하는 이 껍질들을 하나님께서 벗겨내시는 것입니다. 그 타본적은 없지만 다큐멘터리 같은 것 보면 우주 공간에 갔던 우주선들이 대기권으로 진입하지 않습니까. 진입할 때에 어떻게됩니까. 공기와 진공상태에서 날아온 그 물체가 어마어마한 속도아니겠습니까. 그런 속도로 날아오는 것이 대기권으로 진입할때에 부딪히게 되는 저항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2천도가 넘는 그 불길에 우주선 전체가 휩싸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기권으로 불덩어리가 되어서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가다가 떨어지고 거기에서 구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해서 간절히 추구하는 관정에서 그 사람의 마음이 불타는 것과 같아서 그래서 그를 에워싸고 있었던 다양한 껍질들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수해집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적인 순수함이라기 보다는 성화의 과정을 거친 순수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그렇게 순수하게 되기까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수없이 부단하게 분투하면서 피흘리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 순수해질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부터 상당히 멀어져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뭔가 기도도 하고 회복을 위해서 애쓰고 하는데도 뭔가 이렇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이 무한한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는 것 같은 절망감을 경험할때가 있지않습니까.
그 때에 우리들의 해석은 뭐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나보다.“ 이 시인이 이야기 하는 것과 똑같은 회의에 빠지지만 그러나 실상은 뭐냐하면 그런 기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면서 묻었던 이 더러운 때들을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이 집중된 과정을 통해서만 벗겨낼 수 있습니다. 추구하지 않으면 영원히 그냥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영적 생명에 억눌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 벗어버리기까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추구가 있어야되는데 그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도 성화의 영역에 속하는 것인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믿음이라는 것도 이러한 긴 과정에서 하나님을 추구해가는 경로는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갖는 믿음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자신의 성화를 위해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희생도 치루지 않으려고 하고 어느 한순간에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얻어내기 위한 방법 때문에 믿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보다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창기나, 세리 이런 쓸모 없는 사람들이 그런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주어지는 값없는 구원을 받아들이기까지 그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죄악된 생활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하는 것 때문에 갈등하고 고민하면서 그러면서 주님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을 자신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깨닫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을 때에 그것이 진실한 믿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믿느냐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당시 자신의 욕구의 만족을 위해서 믿음을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그 믿음은 절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믿음일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 시인은 바로 그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서 그러면서 좀더 오래도록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것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영혼의 현실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할 수 없다고 하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나의 연약함 때문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어디에서든지 자기를 찾고 자기와 더 온전한 관계 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당신의 모든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고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여기에서 깊이 확신하면서 이것이 자신의 연약함 때문이지 내가 하나님을 의심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고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내게 은혜 베푸시기를 잊으셨겠는가.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인자를 더 이상 베풀지 아니하겠으며 구하는 나에게 허락하시지 않겠는가. 왜 하나님이 나에게 긍휼을 거두셨겠는가. 이렇게느끼는 모든 것은 나의 연약함 때문이다. 그 속에서 더 하나님을 찾고 추구해 가기로 결심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와 같이 두려워 떨며 더 온전한 신앙의 세계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연약한 자기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더더욱 추구하고 찾으면서 살아가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실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영혼에 베푸시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이 시인이 어떻게 몸부림 치는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찾고 추구하면서 살려고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커다란 대적은 ”이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구나. 이제 나에게 더 이상 미래가 없구나.“라고 하는 이런 신앙적인 절망입니다. 이것이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지탱하지 못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인의 고백과 같이 우리는 그 때에 아주 시급히 고백해야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어올 때 ”아, 이것은 나의 연약함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계시는 것과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영혼에 복을 주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더더욱 하나님을 찾고 자신의 영혼의 변화를 위한 추구에 매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7.당신께 피하는 자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①
“베푸신 은혜까 어찌 그리 큰지요.”(시31:19)
시편31편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시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설교시간에 계획적인 것도 아닌데 다윗을 많이 다루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요일마다 계속되고 있는 시리즈는 잊지아니하시는 하나님 시리즈입니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들이 본문을 다루어보려고 하는 19절이 31편속에 놓여있는데 공교롭게도 다윗의 시입니다. 이 시가 쓰여진 시기에 대해서 논란들이 많지만 저는 거의 확실히 이 시는 다윗의 생애의 말기에 쓰여졌다고 확신합니다. 특별히 다윗이 완전히 말기가 아니라.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당해서 고난을 많이 당하고 백성들이 자기를 떠나고 이반하는 그런 경험을 하고나서 얼마 안된 상황에서 이 시가 지어졌다고 보는 것이 성경에 나타난 다윗의 생애의 기록을 볼때에 31편을 갖다놓기에 가장 적절한 시점이라고 저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확신에 뭐 누구도 제가 하는그 주장에 모릎을 꿇을정도의 과학적인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세한 것은 천국에 가서 그양반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그러나 하여튼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생애의 연표를 볼때에 그것을 한번 여러분들이 시간이 나면 한번 해보세요.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다윗이 지은시를 다 끄집어놓고 퍼즐을 맞추는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를 쫙 연표를 그리면서 다윗의 생애에서 이 시가 어느칸에 집어넣으면 제일 어울릴까. 한번 해보세요. 다 집어넣을 수는 없어도 3분의1은 집어 넣을수 있습니다. 그렇게 볼때에 이 시는 틀림없이 다윗의 생애의 후기의 작품이다. 이렇게 믿어집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계신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중에 하나가 있다고 할것같으면 그것은 친밀한 교제속에서 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를 피로 값주고 사신 우리들이 귀하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탁월한 친교속에서 살게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은 사람을 깊이 사겨보지도 않고 선입견을 가지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사겨보기도 전에 그 사람을 깊이 알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 사람 한사람을 알기 때문에 주님이 구속하셨고 구속하셨기 때문에 또한 알게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하나님이 우리와 더불어 깊고 그리고 탁월한 친교속에서 그렇게 교제하며 살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그런데 언제든지 이러한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을 좌절시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당신의 품으로 더많이 부르시기 위해서 때로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게도 하시고 믿었던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게 하시거나 혹은 깊이 신뢰했던 사람에게 실망하게끔 만들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당신에게로 가까이 이끌 때도 있지만 때로는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사랑을 거두게 하심으로서 하나님 한분밖에는 의뢰할분이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도록 만드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오랜기간동안 은혜안에 살면서 좋으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탁월한 친교속에서 살게되었다고 할것같으면 그 사람의 가슴에는 손톱자국들이 많이 나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실망,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한 그런 아픔, 사람으로부터 고통을 당하고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접는 그 뼈아픈 고통의 흔적없이 이 세상 누구도 하나님만을 그렇게 깊이 사랑하고 그분과 나누는 친교만이 자신의 행복의 전부인 것 처럼 생각하며 살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이래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이런 친밀한 교제속에서 살기를 원하는 본성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친교속에서 받는 구속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등지고 불화하게 살면서도 이 세상에서 자기의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일에 훨씬더 익숙한 존재들로 바뀌어져 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적절하게 우리를 다루십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다 사람들에게 실망하거나 버림받거나 혹은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때가 있습니다. 사랑을 원수로갚는 그런 아주 무례한 사람들을 만날때가 있습니다. 그 아픔은 가난의 아픔보다 심합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아픔은 죽음을 가능하게 하는 아픔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가난해서 자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신문지상에 그렇게 보도가 되지만 반드시 거기에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절망이 반드시 거기 개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막다른 골목에서 자살도 하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고 그렇게 다루셨습니다. 다윗이 어린 나이에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었습니다. 승승장구하면서 그러면서 왕이 되었고 제국을 다스렸습니다. 물론 그의 인생의길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걸어온 길은 어렸을 때에는 아버지에게 깊이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이 기름부으러 왔을 때 그 때에 제일 마지막에 생각이 나서 그래도 한번 찾아본 아이가 다위이었습니다. 형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자기를 죽이려고 장인이 자객을 풀어서 추격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보면 의도적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그런 인생의 길을 걷게하셨기 때문에 다윗이 하나님밖에는 없다라고 하는 외줄타기의 신앙을 가졌는지모릅니다. 그줄을 놓으면 떨어진다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는 것, 그것을 외줄신앙이라고 제가 말하는 것입니다. 외줄을 타는 마음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놓을수 없이 그것을 붙들고 올라갔던 것입니다. 왕이 되기 전에도 이 다윗의 생애는 정말 처참할 정도로 박복한 인덕이 없는 정말 박복한 그런 생애를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버림을 받고 인정받지 못하거나 혹은 사랑받아야할 관계에서 실망하고 혹은 대적이 되어서 원수를 맺는 다윗이 스스로 고백하는 바와 같이 “나는 저를 사랑하였으나 저는 나를 미워하는도다” 그런 고백속에서 살아오면서 그는 정말 그모든 상처와 고통을 오직 해결할수 있는 곳은 오직 한군데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토로할 때 그 때에 자기를 따뜻하게 영접하고 받아주시는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긴 인생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인생말년에 당하게된 사람들로부터의 이 실망과 배신은 이것은 여태까지 왕이 되기전에 경험했던 것은 그 당시로서는 눈물을 뿌리면서 광야를 헤매고 이웃나라를 전전하면서 미친사람 흉내를 내면서 그렇게 고생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후일에 당하게 되는 그 뼈아픈 인간으로부터의 실망과 배신에 비하면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기의 아들이 애비를 죽이과 왕이 되겠다고 칼을 들었을 때, 그 때에 살고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반란군이 토벌되었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졌습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위하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그것은 자식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겠다라고 하는 부모의 죽음을 대신하는 사랑을 표시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인생 더 이상 살고싶지 않다.라고 하는 고백이기도 한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이 그뿐만이 아니죠. 다윗이 압살롬이 자기를 향해서 칼을들고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반역을 일으킨 것은 정말 뼈아프게 사랑하는 자식으로부터 받은 그 평생 잊혀지지 않을 골수에 맺일 그런 가슴아픈 배신이기도 하였지만 어디 그것만 하겠습니까. 아히도벨을 비롯한 많은 군인들, 신하들이 압살롬의 편에 섰습니다. 그들중에 상당수는 다윗과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나라를 세우고 개척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날들을 전쟁터에서 갑옷에 피마를 날이 없이 싸우며 생사고락을 같이 해오고 왕국의 세워짐과 함께 슬픔과 설움을 기쁨을 함께하면서 살아온 육신적인 형제와 다름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배신은 다윗으로 하여금 인생전체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도록 만들어주었을 것입니다. 저는 다윗과 같은 정도의 수준은 아니겠지만 종종그런 것은 경험합니다. 개인적으로 깊이 사랑하는 교인들이 무엇인가 교회가 마음에 안들어서 발길을 돌리고 교회를 떠나겠다는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때는 저 마당까지 쫓아내려가서 생각을 돌려보아라. 그리고 차에 시동을 걸고 떠나가는 것을 배웅하면서 그 때 이 마음을 느낌니다. 정말 하나님이 은혜로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함께 복음안에서 예수의 참 생명을 누리고 어둠속에서 벗어나서 진리의 빛가운데로 들어와 하나가 되었던 지체들, 사랑하는 사람들, 슬픔과 설움도 같이하면서 고난의 긴 길을 걸어오고 그랬는데 어느 한순간에 마음을 돌리고 차갑게 돌아설 때 그 때에 이 사람의 마음과 유사할 것입니다. 그 때마다 저는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이
예수 뿐일세
다윗이 그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이 자식이 자기를 향해서 칼을들고 애비를 죽이겠다고 덤벼들었을 때 느낀 그 고통과는 또다른 종류의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똑같은 매지만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맞는 매가 맛이 틀리고 집에 와서 엄마 아빠에게 맞는 매가 틀리고 뒷골목에서 폭력배에게 맞는 매가 맛이 틀리지 않습니까. 아니 웃을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순간인데 왜 웃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틀린것입니다.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자식은 자식을 향한 깊은 사랑을 배신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식을 그렇게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부하나 함께 있었던 그 나라를 함께 세운 그 동료들을 향한 사랑은 없었느냐. 그것은 아니거든요. 정말 다윗은 지도자로서 아랫사람들을 깊이 아끼고 사랑한 희생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 때에 그가 가졌던 자기의 동료들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또한번 할퀴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실망시키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깊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두가지 고통도 또 한가지 고통에 비하면 그것도 작은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백성들로부터 버림받은 그 배신, 얼마나 가슴아팠겠습니까. 다윗이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자기 자신의 교만의 죄로 말미암아서 수많은 백성들이 그 온역으로 죽어갈 때 다윗이 어떻게 괴로워하며 하나님 앞에 “저들이 무슨죄가 있습니까. 잘못한 것은 제가 아닙니까“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눈물로 부르짖던 그 모습 생각나죠. 설교한지 얼마 안되었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뭐냐하면 사랑의 마음이 그렇게 시킨것입니다. 옛날에 박정희 대통려이 시절에 어떤 사람이 그랬다면서요. 대모가 자꾸 일어나니까. ”각하 20만명만 바다에 넣으면 끝납니다.“ 얼마나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그 백성들을 다윗이 자기 피붙이처럼 그렇게 뜨겁게 사랑한 것입니다. 단순히 자기의 왕국에 세금을 내는 업자들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그들의 나라가 하나의 신앙공동체였습니다. 그러니까 백성인 동시에 지체였습니다. 그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영적인 사람인데 그러니까 죽어 나갈 때 그것은 백서이 죽어나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체들이 죽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 나단이 그 가난한자의 양을 빼앗은 그 포악한 사람의 이야기를 했을 때 자기를 향한 비유인지는 모르고 부들부들 떨면서 말이죠. ”그 일을 가만히 둘수없다.“라고 했던 것은 결국은 뭐냐하면 왕으로서 어떤 혹의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그가 비록 범죄한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자기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장군이요. 임금이었을뿐만 아니라. 그 백성의 진정한 목자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좀 백성이라는 두 글자를 생각하면 좀 눈물이 고이는 지도자들이 이땅에 태어나야합니다. 그래야지 이 민족이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보니까 백성들이 점점더 많이 압살롬의 편에 가입하고 다윗에게서 마음이 떠났습니다. 굉장히 많은수가 떠나갔고 그리고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서 도망갈 때 쯤에는 다윗을 향한 이 반대파가 노골적으로 다윗과 다윗의 일행을 터놓고 공개적으로 모욕할수 있을정도로 세력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 때에 일국의 왕이었던 지도자였던 그리고 그 백성의 진정으로 그 백성을 사랑하는 목자였던 이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거기에서 느끼는 그 느낌은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인생을 살고싶지않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누구로부터 위로를 받았을지 한번 생각해보시오. 걸어오는 길도 부모루부터도 별로 기대할것이 없었고 형들로부터도 그랬습니다. 아내로부터도 그랬고 그리고 자녀들로부터도 그랬습니다. 이제 그에게 참 위로가 있다면 자기의 자녀들과 그리고 또 함께 뜻을 같이하고 살아가는 사랑하는 동력자들, 그리고 자기를 진실한 목자로 믿고 따라주는 사랑하는 백성들, 그들로부터 그들과함께 한 마음이 되어서 누리는 그 친교로부터 얻는 그힘은 굉장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면서 수십년 히말라야 산맥과 같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목회한 선배 목사님들에 비하면 저는 아직까지도 장난이나 하는 것같은 그런 목회 경력밖에는 안되지만 그러나 그것밖에 안되도 어떤 때에는 정말 순간순간 살힘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같이 그렇게 낙담이 오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뭐냐하면 사랑하는 동역자들의 얼굴과 그리고 사랑하는 교인들의 모습들이었습니다. 오늘 이 다윗도 똑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들로부터 위로를 얻고 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그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왕국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 줄기찬 섬김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하나님이 그렇게도 다윗이 의뢰하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씩 하나씩 기가막히게 찾아내셔서 아주 처절하게 실망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아들로부터 사랑하는 동료들로부터 그리고 또 사랑하는 백성들로부터 철저히 배신을 당하게 만들고 따돌림을 당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런 일로 인해서 격게된 다윗의 말년에 그 고통은 이루 헤아릴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가슴을 낭자하는 것같은 그 처참한 고통이요. 견디기 힘든 그 아픔을 이 다윗이 당해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그렇게 버려두시지를 않으셨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처절하게 버림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다시한번 그 인생의 말년에 심령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셔서 그의 가슴속에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진리 하나를 칼로파듯이 각인시켜 버리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이냐하면 하나님 한분만이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유일한 피난처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다웃은 그모든 뼈아픈 과정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해 보여도 그 사랑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해보여도 사실 영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끼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이 진리는 다윗이 새롭게 깨달은 진리가 아니라. 이미 알고있었던 진리였고 그리고 이제껏 그것을 붙들고 살아온 진리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왕국이 번영하고 그리고 자신이 안락해지는 동안에 하나님을 향한 그런 청결한 사랑, 주님만 계시면 충분하다라고 하는 절대의존적인 하나님을 향한 마음, 그런것들이 서서히 사라지거나 혹은 불결해지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를 통해서 한번 강하게 그의 심령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철저하게 디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진짜 자기의 참된 소망이 오로지 하나님 밖에 없으며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 이외에 영속하는 것이라고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왕국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진정한 승리는 최후에 웃는자가 웃는자입니다. 젊었을 때에 주님 잘 믿고 열심히 살았던 것,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이 흘러가고 나이가 많이 든 노년에도 그 젊었을 때에 하나님을 향해 간직했던 그 진실하고 뜨거운 사랑이 오히려 더 성숙해져서 그래서 세월은 흘러서 흰머리가 나고 그리고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맺혀도 주님을 응시하는 그 눈은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에 더 불붙는 마음이 된 그런 사람들로 살다가 가는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에서의 진정한 승리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철저하게 깨닫게 된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두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첫째는 뭐냐하면 하나님은 피난처 되시는 그 은혜를 자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두려움은 뭐냐하면 노예적인 삶을 가져오는 공포의 두려움이 아닙니다. 이 두려움은 무엇이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종류의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두려움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모두 하나님의 향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비례합니다. 하나님을 많이 사랑해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만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기도의 길이 막히고 하나님과 어떤 친교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무시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를 않습니다. 누가복음18장에서 불의한 재판장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그런 사람이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가만히 우리들이 생각해보면 신기한 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무섭게 다루실 때, 막 사업을 망하게 하시고, 자식들을 병상에 눕히시고 막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몇바퀴씩 굴리시고 말이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무섭게 우리를 훌달구실 때 하나님을 무서워했느냐하면 아닙니다. 또 무서워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노예적인 두려웁니다. 그 때 하는 회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회개가 뭐냐하면 벌안받게 하기 위해서 비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율법적인 회개입니다.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언제 하나님을 두려워했느냐하면 주님을 많이 사랑할 때,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탁월하고 깊을 때,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딱 그렇게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충분히 나눌 때 말씀을 깨닫거나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느끼는 그 하나님의 위엄앞에서 느끼는 그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노예적으로 살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두려움을 우리가 느끼면서 우리가 즉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지만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백성이 아니다. 내가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탈학할 기회를 제공받으면서 살지만 그러나 이 길은 무서운 길이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정체성을 생각나게 만들어주는 종류의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앞에 경건한 두려움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습니까. 그런면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이 두려움은 굉장히 건설적인 두려움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많이 사랑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이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잊지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되어야됩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배신을 당해도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중요한 길입니다. 아무리 집안에 불이붙고 환란이 다가와도 탈출구가 있으면 염려하지 않습니다. 탈출구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피할수 있는 요세, 피할수 있는 바위, 하나님을 그런 피난처로 가진 사람들은 환난과 시련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잊지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실제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려보면 깊이 동의가 될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말이죠.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사람들로부터 쾅쾅 하고 상처를 받고 이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에 사람들로부터 그런 것들을 받으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우리의 마음이 대게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로부터 쾅쾅 자극을 받고 상처를 받게되면 둘중에 하나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더 많이 향하게 되는 신앙에 가난함을 가져다주든가. 진짜 하나님밖에 의지할분이 없구나. 이렇게 가든가. 아니면 그 반대가 되어서 그 우리의 마음이 아주 무디어지고 딱딱해져서 그래서 이런 상처가 없이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아갈때에 마음속에 유지하고 있던 그 영혼의 진실한 감각들을 점점점점 잃어버리게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무렇게나 살아버리려는 그런 마음으로 변질됩니다. 잘회생해 보세요. 그런 마음이듭니다. 신앙생활좀 잘 해볼려고 하는데 부부싸움을 대판거리로합니다. 그냥 이판사판 그러면서 둘이 싸웁니다. 둘이서 교회가다가도 대판거리고 싸우는수도 있지않습니까. 다해보셨겠지만 그러면서 성경찬송들고 ”교회 가지마 그러면 그래 집어치워“ 그러면서 들어옵니다.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받는 상처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말할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래도 말년에 그런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잊지않으시는 은혜를 깊이 경험할수 있었던 비결은 뭐냐하면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배신을 당했는데 그 때에 하나님을 향한 이 경건한 두려움들을 유지했습니다. 사람들과 아들로부터 배신을 당했을 때에도 시종일관 다윗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아히도벨을 비롯한 자기의 신뢰했던 부하들이 자기에게서 등을 돌렸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 사람들로부터 받은 그 상처가 너마나 큰 나머지 하나님을 향해 어떤 기대도 가질수 없을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접어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버림을 받을때에도 그는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므이가 돌을 던지면서 다윗의 일행을 욕했을 때에 ”저놈을 단칼에 목을뱁시다." 다윗이 “내버려 둬라. 하나님이 시켜서 그러는 것인줄 누가 알겠니 내버려둬라.” 그런 고백도 결국은 뭐냐하면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상처를 받으면서 우리들이 흔히반응하는 바와 같이 상처를 받으면 하나님이고 뭐고 순간적으로 신앙이 정지상태에 들어가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잊지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실제로 여러분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와르르 무너뜨릴수 있는 무기가 무었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것이 바로 사람들로부터 받는 상처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가다가 철물점에 들릴레요. 칼 한자루 사서 살인할려고 아무도 그럴 사람 없습니다. 이 앞에 나갔는데 젊은 남자 청년이 지나가는데 사창가 처녀가 소매를 잡아끌면은 줄줄줄줄 따라가서 범죄하겠습니까? 안합니다. 그런 일들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와르르 우리르 무너뜨리는 아주 강력한 경험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사람들로부터 받는 실망과 심령의 깊은 상처들입니다. 이것은 사전적인 예고없이 한방에 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때에 딱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마비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이성을 잠시 잃게되는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로부터 많은 버림을 당하고 배신을 당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않으시는데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않으시느냐하면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고 배신을 당해도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때, 그 때 잊지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은 뭐냐하면 누가 여러분들에게 상처를 주고 욕을할 때 하나님이 이 아픔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게 하실려고 하실까. 그렇게 넓혀놓고만 생각을 해도 당장 칼들고 쫓아가고 싶은 마음은 죽일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을까?” 그래서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안떨어지는데 하나님의 자녀인 내 마음에 이렇게 견디기 힘든 상처가 올 것을 아시면서도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을까? 자꾸 왜하셨을까? 저놈이 왜그랬을까? 그것말고 하나님이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을까? 그것이 바로 요셉이 가지고 있었던 인생관이었습니다. 형들은 나를 미워해서 팔았으나 그러나 이 요셉이 일생동안을 그 애굽에서 살면서 매일매일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그 생활에서 희망을 잃지않을수 있었던 것은 뭐냐하면 형들이 미워해서 나를 팔았으나 그러나 나를 여기에 보내신분은 하나님이시다. 그 섭리를 믿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형들을 용서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게 하셨을까? 그러면 그 사람만 보이지를 않고 커다란 하나님의 섭리의 구도에서 그 사람이 보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작은 요인이고 더큰 요인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배우게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관용과 넓은 마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입니다. 다윗은 시종일관 그것을 유지했습니다. “자식이 칼을들어” 그것은 율법에 의해서도 대신죽기는 왜 대신죽어요. 그런놈을 위해서 대신죽어요? 율법을 따른다고 할지라도 그런 놈을 돌로쳐서 죽여야되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의 인격의 성숙이 얼마나되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사람으로부터 허트당하고 무엇인가 이렇게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당할 때 그 사람만 눈에 꽉차면 우리의 신앙은 아직먼 것입니다. 순간적으로는 그렇게 치밀어 오를수있죠. “아 내가 그렇게 사랑했는데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아픔을 줄수있을까?” 그렇지만 잠깐 그런 생각이 스쳐갈수 있겠지만 “하나님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섭리중에 있는데 내가 이렇게 아파할줄 알면서 하나님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왜 이렇게 상처받게 만드십니까? 내가 그렇게 아꼈던 지체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묻는 것입니다. 그때에 진정으로 그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마음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은혜를 잊지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사람들은 다른말로하면 어떤 사람들이냐하면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자”입니다. “인생 앞에서”라는 말과 “주께 피하는”이란 말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것이 무슨뜻이냐? 인생 앞에서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향해서 기대를 걸고 사람을 기초로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그런 삶의 총체적인 방식입니다. “사람 앞에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사람들로부터 받는 배신이나. 실망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런 삶을 청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섬겨도 사람에게 매여서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섬기는 사람들을 사람을 인해서 실망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서부터 그 사람은 사람 앞에 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 앞에 선 사람들은 사람이 자기의 요구를 채워주지 못할 때 깊이 실망하고 상실감을 갖게됩니다. 배신감을 갖게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렇게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부하들, 자기의 피붙이처럼 사랑하는 백성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뼈아픈 아픔을 경험하게 만드심으로서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것은 뭐냐하면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의 마지막에 한번 강력한 영적인 쇠신을, 갱신을 하나님이 주셔서 그래서 다윗으로 하여금 정말 사람들을 의지하고 믿을수가 없고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고 믿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기쁜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자기에게 피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잊지않고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실망을 당하거나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품으로 피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밖에는 없구나.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더 큰 위로, 더많은 사랑, 더많은 은혜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시인은 하나님만이 정말 자신의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가장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을 때 조차도 자기를 잊지 않으시는 유일한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살 깊이, 뼈속 깊이 샛길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윗이 그런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를 아주 깊이 깊이 뼛속깊이 터득하면서 그러면서 주님의 참 사랑을 의지하고 하나님도 의뢰하며 살 마음을 갖는 가운데서 노년에 더욱더 순전한 신앙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뼈아픈 실패와 범죄들은 오히려 이러한 은혜의 작용으로 말미암아서 보다더 거룩하고 성숙한 하나님과의 관계로 그를 데리고 가는 징검다리처럼 사용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죄악과 범죄를 이렇게 활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활용할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그리고 이 시련을 통해서 사람 앞에서 사는 자신의 삶을 청산하고 정말 주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피난처요. 그리고 변함없이 자기가 의지해야할 유일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터득하고 믿을수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사람을 대해서나 하나님을 대해서나 “역시‘라고 말할수 있어야됩니다.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잘해주고 신의를 지키고 여러분들을 한없이 사랑해준 그 때에 그것이 사람의 본모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런 잠시의 시간이 흘러가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발뒤꿈치를 들고 여러분들이 깊이 믿었던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실망시킬 때 여러분들은 오히려 ”역시“ 할수있어야됩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 모습이었구나. 그리고 하나님께로 피합니다. 그 때에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흔들리지 않는사랑을 보면서 우리는 또한번 ”역시“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거기 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로구나. 이런 마음을 깊이 가지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는 그런 진실한 성도들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버림을 받았을 때 사람들로부터 깊이 실망했을 때 우리는 동시에 마치 하나님께로부터도 내동댕이 쳐진 것 같은 버림받은 인식을 갖기가 쉽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매인 사람이 아니라. 사람에게 매인 사람들인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은 항상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실망을 하거나 할 그 때에 더더욱 정말 주님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 많이 의지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성도들,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바로 그런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연약한 사람이었지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다른 것이 있었으니 그는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배신을 당하거나 상처를 입었을 때에 사람을 향해서 가슴아파하고 복수할 기회를 찾는 옹졸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오는 상처와 배신, 우정과 증오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변하지 않는 유일한 참 사랑이 하나님께 있으며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인생 앞에서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은혜 베푸시기를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세상으로부터 실망해서 환난을 당할때가 될라치면 그 때를 계기로 하여서 그는 더 깊이 하나님의 품속에 파묻히는 친교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살지못했던 자신의 불신앙을 떨어버리고 더더욱 하나님과 연합된 다박끄의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성숙해 갔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바로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순결하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한 사람의 신앙인이 정결하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 영혼의 온 시선을 하나님께 모으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려도 주님만 나를 기억하면 나는 충만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사람이 순결한 사람이 아닐까요. 그 사람이 순수한 사람이 아닐까요. 백만의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는것보다 무서운 것은 한분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받는 배신이나 상처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 그래서 시련이 오거나 환란이 오거나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을 때도 사람 바라보며 원망하고 거기에 울고 웃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두려워 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시는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해서 쌓아두신 그 은혜로 피하는 그런 사람들, 그러한 성도들이 되기를 하나님은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끝으로 한가지 덧붙이자면 시인이 놀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그 크기였습니다.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받을 때 사실 다윗은 어쩔수 없어서 하나님께로 피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고난을 당하거나 많은 어려움이 오면 내가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내게주실 기쁨이 이슬픔보다 훨씬 클 것이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때는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좀 시련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릴 때 이야기입니다. 너무 가슴아프고 쓰라리고 혹은 너무나 고통슬운 일을 당하면 때로는 자기 설움에 복받혀서 하나님 앞에 가서 우리의 슬픔을 토할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내가 사람을 인해서 이렇게 실망하고 사람을 인해서 이렇게 가슴이 아픕니다.“ 하나님 앞에 호소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의 마음이 여전히 아픈데 그것은 사실 무슨 죄에대한 깨달음이나 하나님이 은혜의 크기를 보면서 가슴아픈 것이아니라. 마치 다친 어린아이가 달려들어서 흐느낄품이 어머니의 품밖에 없는 것 처럼 그렇게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로 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 모든 것을 토로합니다. 토로를 시작하는 동안에는 인간을 향한 증오도 살아있고, 이렇게 되도록 나를 돌오아 주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적당히 뒤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더많이 기도하고 자기의 마음을 쏟아놓는 동안에 우리는 이러한 고통도 하나님의 섭리속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 내 사랑하는 자녀, 그리고 내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부하들, 내 동료들, 그리고 내 백성들이 나를 배신하는 것을 이 시인이 처절하게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그들로부터 받은 아픔이 변해서 커다란 하나님의 섭리의 맥락속에서 자기가 당하는 사람들 사이의 배신을 볼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울고 웃고, 서러워하고, 기대를 갖고 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고 덧없는 것인가 하는 것을 시인은 뼈져리게 체험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요동치며 변하는 인간의 사랑말고 언제나 거기 계서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탕자를 기다리시던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의 그 불변하는 사랑, 그 불변하는 은혜의 품, 자기에게 돌아오는 자를 언제든지 잊지아니하고 당신에게 안기는 사람들을 언제나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크기를 경험한 것입니다. 처음에 피할때는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께 피했는데 그 품에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그 위로가 너무나 큰것입니다. 마치 그런 것입니다. 인생의 폭우가 쏟아지는데 비 피할 곳을 찾아서 도망을 다니다가 어느 은신처 하나는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거기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이 계셔요. 비가 안오고 번개가 안치면 벌써 뛰어나갔을터인데 밖에 나가봐야. 비가 펑펑쏟아지니 갈대 있어야죠.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동안에 주님이 누구신지를 새롭게 알게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받는 이 상처와 배신, 실망, 이런 것들을 이렇게 놀랍게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작용해서 우리에게 사람으로부터 받는 그 사랑보다 훨씬 큰 것을 우리에게 느끼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맛본 그 은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더 크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크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아파서 하나님께로 피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픔을 종식시키셨을뿐만 아니라. 시인의 마음에 큰 기쁨과 위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구설의 다툼을 면하게 하시고 그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그것이 곧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당신께 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때에 여러분들은 비로서 사람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현격한 차이가 나는지를 뼈져리게 경험하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여러분들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당신께 피하는 자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②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춤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시31:20)
지난 시간에는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그리 큰지요.“ 19절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해설했습니다. 20절에서 시인은 구체적으로 인생 앞에서 하나님께 피하는 자를 위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어떻게 그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보이시는지를 시인은 경험적으로 고백하고있습니다. 말씀드린바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고 그리고 고통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아주 깊은 영향을줍니다. 그러나 여러분 특별히 안믿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특별히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에는이제 이 문제는 아주 명쾌하게 정리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이야기냐하면 우리는 흔히 생각할때에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상처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그 흔적이 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방적인 피해입니다. (예를들자면 의붓 어머니 밑에서 의붓자식이 되어서 학대를 받고 천대를 받는 것,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것은 불가항력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새장가를 든 것이 어떻게 자기 책임이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방적으로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내 책임이라고 볼수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아버지가 태어날때부터 기질이 방탕해요. 그래서 술먹고 가족들을 때리고 동생하고 애들이 울면서 밤중에 거리를 헤매고 그렀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책임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시집이가고 갔는데 남편의 성격이 이것이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늘 괴롭히면서 자기를 긁어요. 그래서 한없이 고통을 줍니다. 그것이 사실 자기 책임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피해를 본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뭐냐. 특별히 믿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가해를 해서 상처를 주고 고통을 준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는 그러한 상처를 많이 받았을 때에 그것을 유화할 수 있는 그것을 순화해서 그것이 자신에게 깊은 흔적을 남겨서 패역하고 굽은 삶을 살지않을수 있는 은혜의 장치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시인이 지난주에 보여준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따돌리고 자기를 핍박할때에 그것이 사람께로부터 내게 직접왔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다루는 커다란 섭리의 틀속에서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세우고 고치는 하나님의 아주 훌륭한 도구가 되고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그 때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로부터 고난이 오거나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그럴때에 하나님이 눈에 안보이면 반드시 그는 상처를 받고 그리고 상처는 아주 불타는 복수심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미움에 사로잡히게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깃들 수 없는 황폐한 사람으로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이치를 잘 깨달아 알고 사람 사이에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왜 이 일을 내게 허락하셨을까? 그러면서 상처를 받을 때는 하나님께로 피해서 상처보다 큰 하나님의 살아과 위로를 통해서 치료를 받아서 상처가 상처되지 않게 하고 그리고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용서하고 긍휼히 여겨서 그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사람으로 그렇게 서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 기대하시는바라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그런데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 놀라운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그렇게 인생앞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하나님께로 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것을 경험했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은밀한 곳에 감추시고 그래서 자기를 대적하는 악한 사람들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그리고 자기를 비밀히 장막에 감추셔서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신다.”하는 것을 시인이 경험적으로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본문을 하나씩 살펴보면 우선 여기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어떻게 시인을 인생 앞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하나님께로 도망친 이 시인을 어떻게 다루셨는가.할 때 은밀한 곳에 감추셔서 저희의 꾀를 면하게 하셨다. 이것이 첫 번째이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셔서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첫째 하나님께서 은밀한 곳에 감추셔서 저희들의 꾀를 벗어나게 하신다. 그러는데 여기에서 꾀는 뭐냐하면 다윗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악한 사람들의 간교한 도모입니다. 그런 많은 모략, 많은 지략, 시인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아주 간사한 괴계, 괴략, 이런 꾀들을 갖는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밀한 곳에 감추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은밀한 곳 하고 뒤에 나오는 “비밀히 장막에 감추신다.”라고 하는 이 두 단어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아주 결론부터 내리면 앞에 나오는 은밀한 곳에 감추신다라고 하는 것은 군대용어로 언폐가 아니라. 은폐입니다. 언폐는 무슨뜻입니까? 언폐는 단단한 물질에 숨어서 총알이 막 날아와도 총알이 자기를 맞출수가 없게 그렇게 숨는 것, 그것이 언폐입니다. 은폐는 뭐냐하면 총을쏘면 그냥 맞출수 있습니다. 그런데 식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나무가지로 잔득쌓인 수풀속에 숨는다든지, 아니면 나뭇잎 같은 것으로 위장해서 이렇게 서있어서 그래서 총을 쏘면 맞출수는 있지만 사람들이 식별할수 없기 때문에 총을 쏘을수 없게끔 자기를 감추는 것, 그것이 은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앞에 나오는 은밀히 감추시고는 은폐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시는 것은 언폐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은폐는 뭐냐하면 “싸타리“라는 단어가 쓰여졌는데 볼수없게끔 살짝 가리는 것입니다. 보자기 같은 것으로 덮어놓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기에 ”장막에 감추시고“ 그랬는데 사실 이것은 장막이 아니라. ”쑥카“라는 단어인데 여러분들이 이 단어를 본적이 있습니다. ”쑥곳“이라는 명사가 생각나죠. 진행입니다. 이것이 뭐냐하면 쑥카의 복수입니다. 쑥카는 뭐냐하면 작은 오두막집입니다. 그 작은 오두막집에 시인을 아주 비밀스럽게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은폐와 언폐가 모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군대을 이끌고 함께 싸우는 장수가 설마 오두막집에 있으리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오두막집에는 도망 다니는 군인이나 쫓아가는 병사들이 머무는곳이 아니라. 시골사람들이 생활하기 위해서 머무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쑥카에 하나님이 그를 숨기시는데 그것도 알게끔 숨기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시인이 거기로 숨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보호하시는 가운데 그 쑥카에 넣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쑥카의 문을 닫으시는 것입니다. 오두막집에, 커다란 수십평의 저택이 아니라. 방하나 부엌한 딱달린 그 쑥카, 거기에 시인을 넣으시고 하나님이 문을 닫으시는 것입니다. 그 시인 한 사람을 집어 넣고 문을 닫으면 거기에 몇 사람이 있습니까? 한사람이 있죠. 그런데 사실은 혼자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 눈에는 안보이는 것입니다. 목사님하고 전도사님하고 둘이 오토바이를 타고 붕 달려가다가 목사님이 헬멧을 안썼습니다. 그런데 교통 경찰이 붙잡았습니다. ”도로교통법 위반입니다.” 그러니까 “뭐가 위반입니까?” 그랬더니 “헬멧을 안쓰셨습니다. 얼마나 위험한데 헬멧을 착용하지 않고 다니십니까” 뒤에 있는 전도사님이 “경찰아저씨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셨는데 뭐가 염려겠습니까” 그러니까 경찰이 하는 말이 “승차 인원도 초과하셨군요” 둘이 타게 되어있는데 셋이 타니까. 이제 웃기시작하네. 아이고 그렇게 더뎌서 어떻게 하겠수. 아직도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눈을껌벅입니다. 집에 가다가 웃을 것입니다. 모르면 옆에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누가 같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합니다. 이 시의 묘사가 말이죠.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릅니다. 이 시편은 신앙의 보고입니다. 이것도 체험을 통해서 전해준것입니다. 그 오두막 쑥카에 탁 들어가고 하나님이 들어오게 하셔서 대적들이 따라오는데 시인의 그 옷자락을 잡아서 확당겨서 쑥카에 집어넣으시고 문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밖에서는 적군들의 소리가 들리는데 쑥카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의 절묘한 시련과 환희가 함께 공존하는 그런 곳을 두신것입니다. 뭐 다윗이 무슨 사건을 경험하면서 이 시를 썼는지를 우리는 다 알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윗의 생애를 이렇게 보는 가운데 아주 뚜렸하게 다윗이 “아 정말 주를 두려워 하는자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그리 큰지요” “주께서 저를 은밀한 곳에 숨기사 악인의 꾀를 벗어나게 하시고 구설의 다툼을 면하게 하시리라”고 하는 그러한 고백을 할만한 다윗의 때를 딱 찾았는데 두 개를 찾아냈습니다. 뭐 두 개말고 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 눈에 그래도 가장 강력하게 눈에뜨인 것이 두경우입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사무엘상 21장인데 거기에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하면 결국은 다윗이 사울하고 같이 있지를 못하고 결국은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과 입을 맞추고 그다음에 도망을 갑니다. 도망을 갔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전국에 지명 수배령이 내려서 자기가 어떻게 자기를 숨길수가 없습니다. 그 때에 이제 이 다윗이 결국은 그 본토에 있지를 못하고 이웃나라로 도망갑니다. 거기가 어디냐하면 가드왕 아기스에게 도망갑니다. 가드왕 아기스에게 도망을 갔는데 아, 거기에 딱 들어갔는데 거기에 있던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거물이다. 이 친구가 바로 그 불레셋과의 싸움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어서 백성들의 민심을 한몸에 모으고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라는 유행가가 생겨나게한 장본인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 생각에 “왕이여 거물급이 들어왔습니다” 이놈을 잡아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이 지혜로운 사람이지않습니까. 거기에서 막 침을 흘리면서 대문에 끄적끄적하면서 그러면서 미치광이 흉내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가드왕 아기스가 “이 나라에 미친 사람이 모자라서 이 병신같은 놈을 데리고 왔느냐 당장 쫓아내라” 그러면서 쫓아냅니다. 그리고 도망나옵니다. 그것이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는 아주 커다란 경험이 된 것입니다. 어떤 경험, 하나님이 자기를 감추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거기에서 침 몇방을 흘리고 바보신융을 했다고 해서 아니 일평생을 정치하고 싸움을 해오면서 사는 사람들, 스파이를 사용해서 전쟁을 하고 하는 사람들이 바보입니까. 다윗의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한것입니까. 하나님이 잠시 그를 살짜 덮어서 은밀하게 숨기셔서 하나님이 그를 은폐시키신 것입니다. 다윗이 그 정체를 몰라보도록 사람들이 속게끔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야, 내가 이러고도 살아야되나. 하는 그런 비참함이 있었을 것아닙니까. 그런데 시인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비참한 정말 적군의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가는 것같은 그런 치욕을 당하면서 그 가드왕 아기스의 위협에서 벗어나서 정처없이 도망을 나오면서 하나님이 그를 은밀히 숨겨주시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참 놀랍게 경험한 것입니다.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한번 생각해보세요.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귀합니까. 그리고 그 귀한 성도가 성도답게 살려고 할 때에 얼마나 귀합니까. 성도가 성도다와지기 위해서 잘 자랄때에 얼마나 그것이 소중한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소중하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악한 세력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눈뜨고 볼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런 성도들을 어떻게 하든지 넘어뜨리고 거꾸러 뜨려야합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러니까 일평생을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주님의 뜻대로 성도로서 살아갈려고 애를쓰면서 일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수많은 전쟁을 치루면서 천로역정의 길을 걸어온 그런 믿음씨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깊이 기억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운일을 만날 때 하나님이 은밀한 곳에 숨기시고 우리를 은폐시키시는 것입니다. 적군이 도저히 알아볼수 없도록 그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놀랍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를 피해 나가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때는 “아 치사하고 더럽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인생을 살아야하나.” 그랬을 것 같죠.? 아닙니다. 전혀아닙니다. 그렇게 사울의 손에서 벗어나 추격을 당하고 도망을 다니면서 가드왕 아기에게 가서 침을 흘리면서 미치광이 흉내를 내고 그러면서 그들 사이를 정신병자처럼 빠져나오는 그 하나님의 은폐하는 과정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가 그런 어려움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을 어떻게 노래했는지 아세요.? 길지만 그러나 제가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번 성경 찾을 필요도 없고 듣기만 하세요.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자는 복이 있도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의인의 외침에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이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죄를 받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그 수많은 악인들이 본국에서 자기를 둘러싸고 그것이 두려워서 타국으로 피했더니 타국에서 자기를 둘러쌓는데 거기에서 미치광이 흉내를 내고 도망나오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그를 은밀하게 그는 숨기시는 그래서 그들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사울의 꾀를 허사로 만들고 아기스왕의 신하들의 꾀를 허사로 만들어서 거기에서 빠져나오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빠져나오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를 당신 홀로계시는 쑤카에 받아들여서 그래서 문을 잠그시고 거기에서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를 잊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시는가 하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성품을 맛보고 그리고나서 말하기를 뭐냐하면 그 불같은 시련과 환난의 터널을 지났는데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받고 사실은 다윗은 사울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끝까지 사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는 선대하는 마음으로 무지하게 애를썼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그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도망다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감추시는 것입니다. 그가 3천의 군사를 풀어서 그를 추격했지만 그러나 그를 결국은 못잡았습니다. 하나님이 은폐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하게 만드셨습니다. 도망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뼈아픈 도망자의 그 과정을 통해서 시인은 왕궁에 있을 때보다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많이 못본것입니다. 하나님 홀로계신 그 오두막집에 시인을 잡아 넣으시고 문을 닫으신 후에 그 쑤카에서 하나님의 밀어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그 쑤카에 들어가서 밀어를 나누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이제껏 승승장구하면서 백성들의 그 칭찬하는 노래소리를 들으면서는 배울수 없었던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많이 맛보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우스운게 뭐냐하면 인간적으로 볼때에 하나님이 그를 악하게 다루시는 것같은 그 때에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많이 맛보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시인을 하나님이 그렇게 대접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잊지않으신 것입니다. 언제나 기억하신 것입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잊지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도 당신이 만난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 그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고 싶어했던 사람, 결점과 모자라는 점이 있었고 심지어는 악함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일생동안 하나님이 그를 잊지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명하여 불러서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다윗만의 경험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보면 이제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끊어지고 마음이 강팍해져서 정말 개판같이 인생을 살아요. 하나님이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렇죠. 어느 순간에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의 지루함과 고통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그런말 하지 않습니다. 감히. 하나님을 버린 사람이 대부분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나지 않습니까. 그 때 비로소 무엇을 깨닫느냐하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결코 한번도 하나님 앞에서 잊어버려진바 없었던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우리 모든 사람들이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돌아왔을 때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그 순간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감동을 받는 것이 무엇이냐하면 내가 아직도 하나님에게 잊혀진바되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러니까 인간적인면으로 볼때는 아주 악해보이는 상황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뼈져리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과연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할 바위시며 우리가 의지할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얼마든지 혼자 살수있다고 생각했던 그 육에 속한 씩씩함들이 변해서 마음이 상한자에게 가까이 계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돌아보시는 긍휼히 여기시는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번의 더 극적인 사건은 뭐냐하면 이제 다윗을 죽이려고 삼천명의 군사를 풀어서 다윗을 추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굴에 숨었는데 거기에 사울이 들어오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발을 가리러 들어온다.“ 그랬는데 발을 가리러 들어온다고 되어있는데 사무엘상 24장에보면 발을 가리러 들어온다. 그러는데 이것은 해석이 두가지입니다. 사사기에보면 그것이 변을 보는 광경입니다. 또하나는 이제 자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뭐라고 우리들이 명확하게 판단 내리기에는 좀 그렇습니다. 하여튼 자는 것이든지 정신없이 변을 보는 것이든지 무엇이든지간에 뭔가 사울은 지금 거기 다윗이 있으니까 잡기만하면 그냥 가는 것인데 그 때도 하나님이 그를 감추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사울을 하나님이 감추시지를 않고 다윗에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 때 거기에서 옷자라작을 베어서 옵니다. 그렇죠. 그리고나서 옷자락을 베어오면서도 다윗이 깊이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종의 옷을 내가 이렇게 베었다. 여기에서도 우리들이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그것이 꼭 주의 종들만이 아니라. 그것이 누구든지간에 넓은 의미에서 우리 모두다 기름부음받은 사람들아닙니까. 그런데 그가 누구든지간에 좀 모자라는 신자 심지어는 악한 신자가 있다고 할지라도 명백하게 그가 악한 사람이라는 것이 공공연하게 드러나기까지는 그러한 지체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지만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고 해서 다윗이 그를 함부로 대해도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은혜가 없는 사람은 막 대하고 은혜가 있는 사람들은 존중히 대해주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어쩔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하찮아도 하나님 앞에 하찮은 것이지 자기에게 하찮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것을 베어오면서 그렇게 마음 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이 이렇게 해서 나를 죽이려고 했지만 그러나 나는 당신을 이렇게 죽일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럴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이 사울에게 자기의 진심을 토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울이 펑펑울면서 “이 목소리가 내 아들 다윗의 목소리냐” “아버지여“라고 부르죠. 다윗이 그러면서 한없이 다윗이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도 보면 정말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울의 마음이 그는 이미 악신이 내린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자기를 통제할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하여튼 일시적이나마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받으면서 곤고하고 어려운 일을 당할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놀라운 위로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자기의 그 진심이 일순간이나 악신에 사로잡힌 이 사울에게 전달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면서 펑펑울면서 ”내 아들 다윗의 목소리냐 나는 너에게 악을행했지만 너는 나에게 선으로 갚았구나.” 그러면서 막 울면서 다윗앞에 뉘우치는 그 장면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입니다. 결국은 그 다윗이 그 집요한 사울의 추격을 받으면서도 결국은 그 손에 잡히지 않고 벗어난 것입니다. 오히려 그 때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가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극적인 것은 뭐냐하면 아기스왕에게서 도망쳤을 때 그 때 도망치면서 그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미친 흉내를 내면서 막 도망가는데 그가 어디로 도망을 갔는지 아세요. 아둘람굴로 도망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둘람 굴에서 누구를 만나느냐하면 빚진 사람, 상처받은 사람, 저는 사람, 다시말하면 그 시대에 다 버림받고 상처받은 아픈 사람들은 거기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400명이나 동지를 거기에서 만난 것입니다. ( ? ) 고통받는 사람인데 다윗을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다윗이 왕국을 세우는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이제 혼자구나. 나는 이제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아서 내가 이 미친짓을 하면서 내가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구나.” 그리고 도망을 갔는데 아둘람 굴에서 나라를 함께 건설할 뜻을 가진 그 시대에 상처받은 백성들을 만나게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다윗을 진심으로 기름부음받은자인지를 알고 그를 깊이 사랑하는 상처받은 양떼와 같은 백성들과 함께 만나서 하나님 안에서 교제를 누릴 때 그 위로가 얼마나 컷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번 우리 인생을 살아가고 신앙생활을 해나가다가 힘이 고갈되는 때가있죠. 영적인 관리를 잘못하거나 혹은 낙심할만한 일들을 만나면 힘이 고갈되는 같습니다. 그 때에 우리에게 확 원기왕성한 힘을 불어넣어주는 것은 뭐냐하면 물론 혼자 기도원 가는 것도 힘을 얻는것이겠지만 금식기도 하는것고 힘을 얻는것이겠지만 믿음의 형제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들을 만나게하시고 우리를 부르셔서 이제껏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들을 사용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쭉나누면서 들을 때 그 때에 다시한번 우리가 하나님께 잊혀진 사람들이 아니며 주님이 우리를 기억하고 계시다.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일군 삼으신 주 크신 능력주시어 언제든지 주 뜻대로 사용하여 주소서.”라는 그 간증과 고백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데 다윗이 정말 혈혈단신이었습니다. 누구도 함께 해주는 사람이 없이 그렇게 생명의 위기를 느끼면서 도망을 다니고 남의 나라에까지 가서 미친짓을 하면서 탈출해오는 그 때에 그 굴속에서 상처받은 사람, 그러나 다윗을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인줄 알고 그와함께 나라를 세울 뜻을 가진 그런 어린양과 같은 백성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교제를 누리는 것입니다. 요나단과함께 나누던 그 아름다운 교제가 끊어진 이후로 아마 첫 번째 만족스러운 교제였을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생 앞에서 가슴아픈 일을 당할때에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놀랄운 은혜, 사람들의 눈에 띄지않도록 은폐하시고 사람들이 활을쏘고 그리고 사람들을 창을 던져도 능히 뚫을수 없는 그 오두막집에 그를 감추시고 그리고 문을 닫고 그리고 거기에서 밖에는 원수들이 시인의 생명을 찾는 그 노력이 살벌한 그 때에 오히려 그 황량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은 이루 비할데없이 아름다운 교제를 하나님께서는 시인에게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와함께 교제를 나누시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끔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슴아픈 상처는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속으로 들어가서 평탄한 길을 걸어왔을 때에는 도저히 알수 없었던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는 아주 훌륭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의 인생의 외로움과 사람으로부터의 배신이나 홀로 있는 것 같은 동떨어진 느낌, 이모든 것들을 그런식으로 하나님 앞에서 해석할 수 있는 신앙의 시야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성화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남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함께 가장 커다란 명제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부지런히 자기의 죄성과함께 더불어 싸우고 그리고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부인하면서 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려고 하는 것도 결국은 그 두가지면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또 이웃을 그렇게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그런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성화의 특면에서 보면. 그런데 이것입니다. 뭐냐하면 이 사랑, 관용, 자비, 용서, 긍휼. 이런 것들을 성화의 삶에 있어서 근본을 이루는 중요한 덕목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가 자기의 내면의 세계속에 그럴수 있는 그 힘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이것이 사람을 너무 좋아하면 “좋은걸 어떡해” 그렇지 않습니까. 똑같습니다. 어찌할수 없는 힘이지않습니까. 이 사람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어쩔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똑같은게 뭐냐하면 “미운걸 어떡해” 그러니까 사랑의 감정과 미움의 감정은 자기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감정입니다. “그냥 좋아.” “왜 좋지“ ”몰라, 그냥 좋아“ 그래서 줘도 줘도 아깝지 않고 그냥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속에 그렇게 용서할수 있는 그 무엇, 자기를 심지어는 해치고자 하는 사람들도 관용할수 있는 그 무엇, 그 무엇이 우리 안에 있어야지만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니까 시인의 이 고백에서 보면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람앞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사람 앞에서 배신을 당하거나 이럴 때 하나님께로 피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오히려 기회삼아서 당신의 선하심이 어떠한가, 당신의 그 은혜가 어떠한가. 그리고 인생 앞에서 하나님께로 피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교묘하게 감추시고 그리고 어떻게 그를 쑤카의 오두막집에 숨기셔서 당신과함께 은밀한 일월의 시간을 갖게 만드시는지를 깊이 경험하고나면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도 용서할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배신하고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오히려 사랑하고 용서할수 있는 마음의 여유, 그리고 베풀수 있는 그 무엇이 자기속에 있게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시는데 사용하는 아주 흔한 하나님의 방법이 뭐냐하면 사람에게 실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밖에 의지할분이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정말 이렇게 깨닫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가만히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정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고정되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주심 이외에는 아무것도 희망이 없다라고 생각할 그 때에 그 중에서 상당히 많은 시기를 하나님께로만 우리의 마음이 집중되고 고정될때에는 반드시 거기에는 세상에 대한 실망이나 사람에 대한 실망이 아주 중요한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풍랑을 인해서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그런 마음을 갖게됩니다. 그러면에서 볼때에 하나님께서 시인으로 하여금 인생 앞에서 하나님께로 피할수 있는 수시로 그런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기회를 주신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고난당한 사람들이 모두 정결해 질터이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앙입니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거나 실망했을 때에 하나님이 생각나는 사람, 사람에게 낙심했을 때에 오히려 하나님과 은밀한 시간을 갖던 오두막집에 그 하나님과 함께 인생의 폭풍을 피하던 그때, 그 때가 생각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기로 피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람 앞에서 낙심하거나 배신을 당하거나 사람 앞에서 상처를 받거나 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아주 훌륭한 선물일수 있습니다. 어떻게되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큰섭리의 관점에서 그렇게 사람에게 낙심하고 실망할 때 ”아, 이것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이구나“
온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하나님께로 피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추격하는 수많은 대적에서 우리를 은폐시키시고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과의 은밀한 만남이 있는 오두막집에 엄폐시키셔서 거기에서 누구도 우리를 해칠수 없도록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의 그 폭풍의 때,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아서 거꾸러질 것 같은 그 인생의 위기에 오히려 하나님은 사람에게 낙심한 것을 하나님을 향한 기대로 바꾸시고 사람의 악함에 대해서 실망한 것을 인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두루 채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믿고 따르고 의지할분이 하나님 한분이시라는 사실과 그리고 인생의 어떠한 역경과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생사간에 고난과 위기가운데서 혹은 역경과 순경가운데서 어느 때에든지 우리들이 의지하고 따를분이 우리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한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의지할이는 오직 우리를 잊지아니 하시는 하나님 한분밖에는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