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살자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은혜의 말씀(행20:32上) 2001.1.21 주일오전 1
2. 견고케 하는 말씀(행20:32中) 2001.1.28 주일오전 11
3. 거룩과 기업(행20:32下) 2001.2.4 주일오전 22
4. 말씀에 붙들린 삶①:약한 자들을 위한 수고(행20:35上) 2001.2.11 주일오전 37
5. 말씀에 붙들린 삶②:아낌없이 베푸는 삶(행20:35下) 2001.2.18 주일오전 49
1.은혜의 말씀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32上)
사도행전 20장은 언제 읽어도 우리에게 거룩한 감동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읽은 이 부분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전도하기 위해서 갈 때에 이미 지체들을 통해서 거기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것이 예고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순교의 예고를 앞에 둔채 그는 밀레도에 있어서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청했습니다. 그 장로들은 아마 지금으로 말하자면 목사쯤 될 것입니다. 그들을 불러서 이제 유언적인 설교로 그들에게 작별을 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아시아에서 에베소에 온 이후로 어떤 삶을 살면서 어떻게 복음을 증거했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겸손과 눈물과 고난을 참는 그 아픔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리낌 없이 모두 전했고 그리고 이제 자신은 핍박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셀렘을 향해서 올라가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그 길에는 결박과 환난,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아직 어렸습니다. 이제 세 살박이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사도 바울이 마지막 이 교회를 떠나려는 하는 시점에서 벌써 이 사도 바울에게는 자신이 떠나고 나면 이 교회가 당할 두 가지의 어려움을 알았습니다. 하나는 밖에서 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밖에서 오는 것은 큰 핍박과 시련이며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거짓 교훈을 가진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와서 이제껏 복음을 듣고 변화를 받은 그 사람들의 신앙을 유혹하는 일이었습니다. 속에는 거짓된 교훈, 밖에는 핍박이 이 어린 교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이들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명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말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아마 사도 바울에게는 이 사람들이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이들에게 훨씬 유익이 되리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제 그 성도들에게 매여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더 큰 사명이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기로 결단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목자 없이, 물론 거기에 장로들이 있어서 돌보지만 그러나 진정한 그들의 신앙의 아버지라고 하는 목자된 사도 바울이 없이 이 교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안으로는 이단의 위협이 있고 밖으로는 시련과 핍박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힘겹게 자신의 사명의 고지를 향해서 이들로부터 발길을 돌리면서 남긴 유언적 설교의 정점이 오늘 32절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가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너희들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두 주에 나누어서 이 부분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선 앞부분입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랬습니다. 여기에 주는 희랍어 성경에 “하나님”으로 되어 있고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이라”고 그럴 때 “주 그리고 그의 은혜의 그 말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and” 우리말로 “그리고”로 이어지는 이 부분은 두 가지의 사실을 함께 나열하는 데도 쓰여지지만 여기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앞에 나온 내용을 더 자세히 설명할 때 쓰여지는 영어로 그 “and”입니다. “그리고”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대로 번역을 하자면 “지금 내가 너희를 그 하나님 곧 그 분의 은혜의 말씀께 맡기노니”라고 번역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따로 계시고 또 말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너희를 맡긴다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게 너희를 맡기는 것이다. 이런 논리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이제는 더 이상 이들을 돌볼 수가 없어서 자신의 사명을 향해 발길을 옮겨놓을 때 사도 바울이 유일하게 그들에게 걸고 있는 기대는 이미 이루어 놓은 교회의 큰 조직이나 또 그들을 돌보고 있는 사람이나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를 향한 존경심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자기는 떠나도 그들이 여전히 자기에게 목양을 받을 때처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은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3년동안 이들과 있으면서 눈물과 수고로 온 힘을 기울였던 사역은 그들에게 진리를 증거하는 사역이었습니다. 때로는 진리를 그대로 증거하는 데에는 생명을 담보로 하는 위협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위협에 굴하지 않고 주님이 보시기에 그들에게 꼭 가르치고 전해야 하는 말씀은 개인적으로든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든지 꺼림낌없이 신앙의 양심을 따라서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진리로 조직된 교훈을 그들에게 체계적으로 가르쳤고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그는 최선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가르쳤지만 차가운 교사로 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해준 입만 살아 있는 선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온 몸과 온 삶을 교제로 삼아서 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청해 오고 이제 이들과 작별하면서 3년동안 그들과 목양했던 수많은 추억들이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노사도의 마음을 휘감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임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전파한 것이었습니다.
무슨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동행들의 쓸 것을 조달하며 그렇게 온 몸과 삶을 교제로 해서 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들에게 서서 설교할 수 없고 그들에게 더 이상 가까히 다가가서 그들을 위로하며 진리의 말씀으로 그들을 가르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 사람을 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자신의 사랑하는 양떼이지만 이들보다도 더 사랑하는 대상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부름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제 목을 끌어안고 우는 사랑하는 교인들을 버려두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을 가르칠 수 없고 설교할 수 없는데 속에는 이단의 위험, 밖에는 핍박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한가지의 강력한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저들을 붙잡아주시면 자신은 없어도 저들이 굳게 서고, 그리고 거룩케 하심을 입어온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기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혀산다”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 사로잡혀서 산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강력하게 사로잡혀서 사는 것입니다.
(예화:어느 형제가 이메일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예전에 지하실 교회를 생각하면서 그 때는 목사 님과 가까이 하면서 상담도 하고 일년에 한번씩 심방도 하시면서 가까이 했는데 지금은 교 회가 커져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게 느껴진다는 말에 마음이 쓰리신데 그 형제만 그때 가 그리운 것이 아니라 목사님도 그때가 그리우신데, 심방을 할 때도 꼼꼼히 살펴서 때론 한 집에 네 번까지 심방을 할 정도였고, 서너 시간의 심방이 걸릴 때도 있었는데 심방 자체 를 신년 개인 사경회라고 생각할 정도여서 심방을 하면서 변화가 되어 새사람이 된 일도 경 험할 정도인데 그것이 150명 정도이었을 때였고 제일 행복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럼 마 음이 사라진다는 이야기)
(예화: 이번 사경회 때 점심을 대접을 받으셨는데 대접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기에게 그렇게 대접할 기회가 생긴 것에 기뻐하는 모습을 모며 성도가 많아지므로 말미 암아 목사님과 성도간의 간격이 넓어지는 것을 생각하며 재미있고 졸깃졸깃한 목회는 이 게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이야기)
그러면서도 내가 그 형제에게 답장을 써준 것이 이런 내용입니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가장 이상적인 것은 그렇게 사는 것인데 그래서 목회자와 그런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늘 오고갈 수 있고 그리고 그 자녀들까지도 다 헤아릴 수 있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그런 것들을 양보하는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빛가운데로 돌아와서 교회의 지붕 아래서 주님을 기뻐하며 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젠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주님 말씀따라 생활하며 주님안에 하나되어
내 맘에 주님이 오시기를 간절히 원하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예전에 우리들이 주님을 몰랐을 때에 경험했던 그 비참한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섬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으로 빚으셔서 친히 만드신 그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제하며 섬기며 살므로서 행복한 사람 되게 하시려고 기대하신 그 사람들이 주님을 모르기 때문에, 혹은 주님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아는 지식이 현저하게 부족하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은 그런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그들 위에 놓여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이런 교회의 성장은 성장도 아닙니다.
어느 시절에 교인이 이렇게 불어나서 그 수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심어 주님의 계절이 오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힘이 없고 그리고 고통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두 사랑하시는 영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내게는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이 있어서 저들도 인도하여 나와 함께 있게 하여야 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참된 진리의 말씀, 그리고 누군가가 그들을 뜨거운 눈물로 위해서 기도하고 사랑해주지 않으면 주님을 몰랐을 때에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우리의 삶 그 이상을 이어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교회가 되는 것이 우리의 꿈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목회자에게 어떻게 보면 불행한 일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큰 교회’ 그러면 모세보다 큰 교회를 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남전도 회원만 60만명이었는데 그것도 장년만 그랬습니다. 마지막에 고생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편한가, 좋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눈을 들어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지러진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빛가운데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분을 아는 지식을 주신 것은 생명이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지식이 없거나 현저히 결핍되어서 생명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섬겨 주님의 사람들로 세우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만족을 누리며 그저 행복을 느끼게 하려고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고난도 받기 위함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물론 할 수만 있으면 그렇게 한 150명 살아가는 삶이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억지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에 이제 여러분들의 마음 깊이 다짐하고 새겨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자리를 목회자 앞에서 비껴서서 나보다 더 연약하고 곤고하고 그리고 주님을 알지 못하는 지체들에게 목회자가 다가가서 섬길 수 있도록 그렇게 길을 내어주는 성숙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수록 여러분들이 기억하여야 하는 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당부했던 이 교훈을 가슴에 새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여러분들이 교회가 커질수록 목회자와 개인적인 접촉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이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야 하는 필요성은 증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에 강력하게 사로잡혀서 그 말씀이 여러분들을 강하게 주장하여 그 말씀이 여러분들을 붙들고 있는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할 필요성이 교회가 커질수록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런 순서입니다.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는 흔히 목회자가 모든 것을 고갈하고 그리고 말씀도 계속 약화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점점 체력도 떨어지고 연로해지게 되면 영역과 체력도 상당히 상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예전과 같이 않게 되기가 쉽상입니다.
그런 곳에서 개인적으로 섬기기는 힘들어지고 교인들은 늘어날 때 그때에 유일한 대안이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그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강력하게 사로잡힌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끊임없이 그들을 자신 스스로가 아니라 자신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 그 선포를 통해서 친밀하게 된 하나님의 성경 말씀에 그들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그런 삶이 없이는 내가 진정으로 승리할 수 없다라고 하는 확신을 갖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안을 삼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강력하게 사로잡아서 그래서 그 말씀대로 살게 하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무시로 하게 하는 그런 신령한 신자가 되는 것이 대안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능히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사로잡혀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성도들이 뜨겁게 사랑하고 자기를 향해 쏟아부어지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일들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의 인격으로 느끼고 우리의 온 영혼으로 그 분의 살아계심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까? 낙망과 위기 가운데 처했을 때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시련과 고난 속에서 어떻게 지혜를 발견하며 위기 속에서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하고 넘어설 수 있는 담대한 힘과 권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그들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와 능력을 통해서 그들이 그런 것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위로와 사랑을 경험하고 그 말씀 속에서 용기와 지혜, 결단과 담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한번도 만져본 적이 없고 끌어안아 본 적이 없지만 그러나 그 사랑을 생생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사는 삶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이 가장 가까히 다가오셔서 그에게 사랑을 베푸셔도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서 자기의 성품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난 여러분들이 가장 이상적인 신앙생활은, 그래서 가끔 깜짝깜짝 놀랍니다. 편지들이 많이 오고 그러는데 얼마나 견고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이름만 알 뿐이지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런데 같이 한번 만난 적도 없고 저녁을 한번 사준 적도 없는데도 얼마나 견고하게 잘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그 말씀인데 “은혜의 말씀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혜’라고 하는 말은 객관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값없는 은총입니다. 그리고 주관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늘 느끼고 사랑하고 교제하고 그렇게 살아가게 하는 그런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한 따뜻하고 거룩하고 신령한 사랑의 정서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래동안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 해서 아주 마음이 건조합니다. 그래서 모든지 은혜가 되는 것이 없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옵니다.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합니다.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깨달음이 옵니다. 그리고 나니까 가슴에 깊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나니까 한 두시간 전에 건조한 마음이 정말 따뜻해지면서 진짜 그 하나님을 느끼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아까 1부 예배시간에 성찬을 하는데 많은 성도들이 그 성찬을 받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없으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알아도 그 말씀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데로 다 삽니까?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데로 다 행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할 수 있는 힘이 아울러 존재할 때에 그런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이 충분히 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제는 그 말씀이 어떻게 주셔야 하는가 하면 나는 떠나지만 그 말씀은 내가 너희들에게 다 가르쳐주었는데 이미 너희 머리와 마음 속에 있는 그 말씀이 끊임없이 은혜로 역사하여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주를 위해서 살게 한다면 나 없어도 너희들이 훌륭하게 나에게 목양을 받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교인들이 사도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막 웁니다. 왜 그렇게 우는 것입니까? 다시 못 볼 것이기에, 다시 못보면 어떻습니까? 왜 그렇게 우는 것입니까? 오랜동안 사귀었던 인간의 정 때문에, 물론 그것으로 울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교회의 큰 살림살이는 누가 맡아서 하나. 이제 어떻게 지위를 받고 이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 나가나. 누가 이런 행정을 맡아서 감당할 것인가. 그래서 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사명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보내면서 더더욱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사도의 이런 고백을 들으면서 목을 끌어안고 크게 슬퍼서 우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은혜를 끼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화: 선배 목사님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시는데 어느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당신이 두달동안 교회를 비우고 외국에 갔다가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도 교회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자랑하듯이 말씀하셔서 참 성숙한 교회구나 생각하시는데 옆에 계신 더 원로하신 목사님이 그 분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 오죽 목회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면 담임 목사가 있으나 없으 나 별다른 반응이 없을 수가 있는가 하시며, 교인들은 담임 목사가 없으면 교인들의 출석에 변동이 생기고 또 교인들의 마음에 허전한 생각을 갖기도 하는데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라고 핀잔을 주시기에 그때 아!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을 받았다는 이야 기)
사도 바울이 떠날 때에 이들이 이렇게 목을 끌어안고 막 우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도 바울이 와서 말씀을 전해줄 때는 언제나 차가운 교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해주며 항상 그들 가운데 식었던 가슴에 불을 붙여주었습니다. 은혜를 받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냉냉한 가슴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켜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지만 그 뜻대로 살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살 수 있는 은혜를 받게끔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목을 끌어안고 지금 슬퍼하고 아파하며 통곡하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배우고 습득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을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이런 하나님 밖에 없다고 하는 이 사랑과 은혜의 체험이 계속해서 우리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너희들에게 이미 가르쳐준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너희 속에 역사해서 너희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분이 주님 밖에 없고 너희들을 위해 자기를 버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으 본분이라는 사실을 너희들이 늘 경험하면서 산다면 곧 하나님이 너희를 붙들어주신 것이다는 신앙의 고백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 속에서 삽시다. 이렇게 일 년에 네 차례씩 힘든 사경회를 여는 것은 바로 이렇게 은혜 속에서 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려고 이 은혜 속에서 살게 하려고 이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단지 형통한 가운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신자가 은혜 안에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자신 속에 불일 듯 일어나는 하나님께 대한 따뜻한 인격적인 사랑,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에서 이루신 위대한 구원의 사건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하든지 그 분의 기쁨으로 삼고 싶다라고 하는 그런 기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마음입니다. 주님이 살아계셔서 내 마음에 기쁨이 되는 삶, 이것이 은혜 가운데 있는 삶이고 무엇이든지 주께서 분부하는 것이라면 나도 그것을 행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그 착한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 그 인격적인 진실한 신앙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곧 이것이 은혜 안에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잊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마음으로 느낄 수 없고 주님의 사랑을 다 배웠지만 털끝만큼도 그 사랑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은혜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이런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랑스러우신 주님 앞에서 달콤한 하나님의 그 은혜를 누리며 항상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 내 마음이 주님의 마음이 되고,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완전한 친교의 완전하고도 아름다운 그 친교 속에서 살아가는 그런 신앙생활, 그런 생활이 바로 하나님께 사로잡힌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들이 금년 한해 이 세상에서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전망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혹은 해가 지났는데도 해결되지 않는 고난과 어려움이 여러분들에게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이렇게 가슴 따뜻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왜 은혜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뭐가 있습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 하십니까
응답주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은혜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주님께 기도하고, 곤고하면 곤고하다고 기도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위기가 닥치면 위기가 왔다고 기도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견딜 수 없을 때는 못 견디겠다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은혜의 마음을 통해서 응답을 주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으로 우리를 다스려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그 분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끔 고난이 오면 어떻습니까? 풍랑이 오면 어떻습니까? 폭풍우가 일면 어떻습니까? 거기서 주님의 손을 어린아이처럼 콱 잡고 놓지 않기만 하면 잠시 우리에게 폭풍이 깃들지만 잠시 우리의 인생이 흑암이 깃들지만 영원히 그 흑암이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영원히 그 폭풍이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빛가운데로 나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는 그 뜨거운 사랑의 교제를 나눌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화: 전도사 시절에 중등부를 맡아서 사역을 하실 때 변하지 않는 영혼들을 위해 토요일이면 교 회에 가시면서 힘든 마음에 그때마다 즐겨부르던 찬송을 부르고 가시면 그 영혼들이 불쌍 하고 사랑스러웠는데 그것이 은혜의 마음이 불러일으켜져 서 하나님 거스르며 살아가는 그 들에 대한 긍휼에 대한 마음이 생기며 하나님의 어루만지시는 위로가 느껴져서 새힘을 받 는다는 이야기)
그것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우리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그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착한 자녀라고 하는 것은 그냥 칼로 깍아놓은 듯이 그냥 정도를 걸어가는 피도 눈물도 없는 법대로 인생만을 가르키는 것은 아닙니다. 대쪽을 가르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참된 자녀들에게는 항상 주님에 관해서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그 사랑 때문에 감격하는 눈물이 잘 살 때는 이렇게 잘 살게 해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감사하고 못 살 때는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나 큰데도 이렇게 밖에 못사는 것에 대한 죄송스러움 때문에 녹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런 은혜를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서 늘 유지하면서 사는 성도들이 될 때에 그런 성도들의 삶이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진실하고 그리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는 지금 거룩하게 되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은혜를 금년에 늘 유지하며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지 강퍅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다 동의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리는 삶을 산다면 진짜 행복한 삶이겠다. 그리고 그 은혜의 역사가 마음 속에 끊임없이 일어난 가운데 그 말씀에 붙잡힌 삶을 살면 참 너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모든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그리스도인이든지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기 전에 먼저 자신이 그 말씀을 붙잡으려고 몸부림치던 시기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은 분명히 주님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상태이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는 반드시 그가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려고 했던 그 몸부림이 언제든지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씀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고 그 은혜의 감화를 받지 않고는 정말 진실한 성도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사모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잊지말아야 할 것은 그렇게 붙들리기만 사모해서는 안 되고 그 전에 먼저 자신이 말씀이 자기를 붙들기 전에 자신이 말씀을 붙들려고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유아실에 자모들이 있지만, 난 진짜 너무 너무 여러분들이 마음이 아픕니다. 왜 아픈지 아십니까?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이 자식을 자꾸 주시는데 낳아서 잘 길러야지 그것도 하나님의 일인데, 어느 자매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의 기업이 왜 이렇게 고달퍼요? 하나도 기업이 안 기뻐요” 사실입니다. 안 기쁘기는 왜 안 기쁘겠습니까. 속썩일 때나 안 기쁘지 재롱을 떨면 얼마나 기쁩니까? 그런데 나는 어린아이를 가진 자매들 가운데 정말 충만한 은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많이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야단친다고 생각하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 자신들이 아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렵다고 하는 그것으로 모든 것을 다 뒤덮어버리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무신론자입니다. 그러면 뭐 자식을 기르지 말라는 것인가. 누가 기르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소원은 여러분들이 다 4-5명씩 낳는 것이 소원입니다. 왜 그래서 자식을 낳아서 온 세상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웃지 말고 이게 옛날에 우리 경건한 조상들이 가지고 있었던 선교관 중에 하나입니다. 악한 사람들의 자녀보다 우리가 더 많이 낳아서, 그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제대로 길러야지 돌팔이 같이 기르면 오히려 다른 짓이나 합니다. 그런게 좋습니다. 나도 둘밖에 없는 것이 지금 너무나 섭섭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말씀을 강하게 붙들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아이 없이 한가하게 교회당을 왔다갔다 하며 신앙생활하는 사람들보다 상황이 어려우니까 더 분투해야 합니다.
(예화: 잘 아는 어느 자매는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 이유는 아이가 깨어있는 동안에는 힘들 게 아이를 보며 귀저귀를 갈아주면서 큐티를 할 정도인데 아이가 자는 동안에 자신의 휴 식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시간을 가장 생산적인 일이라는 사실 을 발견하고 말씀에 가까이 하는데 주위에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령충만한 삶을 산다고 인 정해준다는 이야기)
그래서 내가 청년 자매들에게 너희들이 시집가기 전에 길길히 뛰고 난리를 쳐도 난 너희들의 신앙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 사정은 다 이해가 갑니다. 남자들이 고달프게 직장생활을 합니다. ‘목사님, 몰라서 그렇지’ 모르기는 왜 모릅니까? 다 알고 있습니다. ‘직장생활이 얼마나 고달픈지 아십니까?’ 누구는 왕년에 안 해봤습니까? 고달픕니다. 장사하는 것은 고달프지 않고, 그러면 목사는 안 고달픈지 아십니까? 다 고달픕니다. 어제도 밤새도록 앓았습니다. 고달픕니다. 그렇지만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드면서 살면 새힘을 얻고 그것을 놓치면서 살면 은혜 안에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씀에 사로잡혀서 그 은혜의 감화 속에서 살아가는 최선의 기독교인의 삶인데 그런 경험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그 경험의 축복을 받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되겠다 라는 그런 강력한 의지 속에서 산 것입니다. ‘목사님도 한번 낳아보세요. 얼마나 힘든지’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영원히 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으니까.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예외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말씀이 그를 사로잡기 전에 먼저 말씀을 붙들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희생없이 자기부인 없이 어떻게 진리를 붙드는 삶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그 진리를 붙들고 진리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될 때에 하나님이 그를 충만한 은혜 안에 살아가게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먼저 그렇게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생활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견고케 하는 말씀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32中)
지난 주간에는 제가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말씀 생활을 계속해야 할지에 대해서 몇 주에 걸쳐서 여러분들에게 전하겠노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본문이 20장입니다. 우선 지난 설교를 잠깐 말씀을 드리고 오늘 설교를 계속하겠습니다. 이 20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순교의 위협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밀레도에서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불러다가 자기가 말하자면 유언적인 설교를 하는 광경입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날로부터 이때까지 특별히 에베소 교회를 돌본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자신은 이제 사명이 기다리고 있는 에루살렘으로 가야되는데 거기서 결박과 환난이 자기를 기다리지만 은혜의 복음 증거를 하는 일을 마쳐야하기 때문에 자신은 가야겠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도는 이제 자신이 두고가는 이 교회가 두 가지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하나는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에 커다란 위협과 또 하나는 내부로부터 일어나는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된 교훈, 그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홀연히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사명이라고 하며 에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누가 사도 바울의 그 섬김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떠나가도 물론 그들에게는 장로들도 있었고 또 바울의 본을 따라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목양을 하려고 하는 일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누가 바울이 아시아에 있는 교회의 교인들, 특별히 에베소에 있는 이 교회 교인들에게 미친 영적인 영향력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모두 사도 바울이 직접 전도해서 주님을 전혀 모르던 사람 한사람 한사람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게 하여 하나씩 하나씩 피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품에 안겨준 그런 손때 묻은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누구 사람에게 그들의 미래를 교회 장래를 부탁하는 대신에 주님, 곧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그 교인들을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중심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산다는 것이 곧 하나님께 붙잡혀 산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를 모든 환난과 시련 핍박은 물론이거니와 거짓된 가르침의 유혹으로부터도 우리를 지켜준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다음 이제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갖는 또 하나의 바울의 기대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견고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성도가 어떻게 견고한 삶을 삵게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견고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다르기에 앞서서 소위 이야기하는 성화에 있어서 견인의 교리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견고하게 인내한다”라고 하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한번 구원한 성도들을 굳게 붙들어주시고 그들의 구원을 결코 취소하지 않으신다라고 하는 하나님이 구원하신 성도들을 보존하신다라고 하는 교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받은 것이 자신의 영혼에 상태에 달려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구원은 일회적이며 그 구원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구원입니다. 사람은 늘 식언하고 약속을 어기지만 진실하신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을 진실하게 시행하시기 때문에 한번 한 구원의 약속을 하나님께서는 저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상태에 관계없이 우리를 구원받은 백성으로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키십니다. 이것이 견인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하나님편으로만 적용되는 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한번 이룩한 구원을 취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는 것이 견인의 교리이지만 이 견인의 교리는 동시에 모든 성도들을 격려하여 하나님만 붙들고 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주님이 변함없이 우리를 붙드신다는 사실 때문에 안심하고 방종하는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 견인의 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변함없이 붙드시고 한번 얻은 성도들의 구원은 불변한다라고 하는 견인의 교리에 접하면서 지각이 있는 모든 성도들은 주님만 붙들면서 살아야 할 내면의 필요성들을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많이 증거받을수록 주님만 사랑하며 살아지 되겠다는 결심이 생겨나듯이 이 견인의 교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주님 안에서 견고한 신앙생활이 될 수 있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견고함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즉 습관적으로 꾸준히 교회에 출석하는 것, 이런 것은 견고함이 아닙니다. 또 이런 것도 견고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신앙 이외에 다른 어떤 해택들 때문에 한 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견고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한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기 때문에, 혹은 이 나이에 내가 교회를 옮겨서 어디 가서 이만한 대접을 받으랴 이런 것, 내 친구들이 여기 다 있는데 이런 것, 여기 울이 부모님과 일가 친척들이 모두 나오는데 이런 동기에 의해서 한 교회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을 우리는 견고한 신앙생활이라고 부르지를 않는 것입니다.
(예화: 예전에 콘크리트가 부족하던 시대에는 나무를 사용해서 전보대를 만들었는데 나무에 타마 구 기름을 발라서 땅에 박아 콘크리트를 덮어 전보대로 사용한 이야기)
그렇게 박혀있는 나무도 나무입니다. 애들이 와서 거기서 술레잡기도 하고 다방구도 하고 야구도 하고 별 것을 다 하며 그 전보대가 친구입니다. 거기서 부딪치고 거기서 말타기도 하고 화가 나면 발로 차기도 하고 몽둥이를 갖고 와서 때리기도 하고 그렇게 해도 그 전보대 나무는 그저 묵묵히 거무죽죽한 얼굴로 흔들리지 않고 서있습니다. 견고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가지고 우리들이 견고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에 영역에서 견고함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견고함입니다.
조용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저 높은 언덕에 아름드리 소나무 하나가 늠름하게 서 있습니다. 몇 백 년 전부터 그 자리를 지켰는지 알 수도 없지만 수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우아한 기품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며 홀로 서 있습니다. 그 언덕에는 바람이 많이 붑니다. 훅 눈보라도 치고 혹은 폭풍도 붑니다. 혹은 눈보라와 비가 없어도 매서운 바람이 불어서 비닐 하우스도 날리고 그저 가로수도 쓰러트리고 심지어는 초가집 지붕까지 날려버립니다. 그래도 아름드리 그 소나무는 흔들리지 않고 서 있습니다. 그까짓 바람 아무리 요동치며 불어도 그저 나무 가지 몇 개 정도 꺽어놓을 뿐이지 본체는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자기 키보다 두배 세배는 더 멀리 뿌리가 뻗어나가면 온 산을 휘감고 바위를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광풍과 바람도 그 나무를 꺽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 나무는 그 비바람을 맞으면서 줄기 가지가 무성하고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도 그 뿌리는 뻗어나갑니다. 이것이 견고함입니다.
타고난 성실성과 끊을 수 없는 인간관계를 기초로 그저 소잡아먹은 귀신처럼 꾸준히 교회에 나와서 앉아있는 것, 이것이 견고한 신앙 생활이 아닙니다. 생명이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신앙에 대해서 각각 경험과 체험이 있습니다. 그것 없이 어떻게 그렇게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 생활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기도를 하며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 그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어느 한순간에 어깨를 들먹이면서 울어야 했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사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손 좀 보시는 두려움에 대한 경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다양한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어도 사람들이 이렇게 뿌리깊은 나무와 같이 성장이 없는 견고한 신앙 생활을 이어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경험들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아주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런 모든 경험말고 또 다른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보면 소위 이야기하는 냄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좀 받으면 주를 위해서 순교도 불사할 것처럼 펄펄 뛰다가 몇 달이 지나면 교회도 안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여러분들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런 것들을 하나의 성격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물론 그런 것도 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학교는 그렇게 개근을 잘하던 사람이 교회는 왜 개근을 안 합니까? 그러니까 성격이나 평소의 생활 습관이 신앙 생활에 미치는 영향도 있지만 그러나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의 영역은 순전히 육체로서의 삶이 가능한 영역이고 교회에 들어온 신앙의 영역 속에 있는 크리스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삶이 영적 생활이 기반이 되지 않으면 이어갈 수 없는 분야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개인적인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견고한 가운데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인가? 거기에 대한 대답을 오늘 성경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어떤 말씀인가 하면 “그 말씀이 능히 너희를 든든히 세우사” 그랬습니다. 그 말씀은 곧 지난 주에 설교한 은혜의 말씀, 차가운 지식에 그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의 영혼까지 감화와 감동을 받게 하여 새롭게 하시는 그런 은혜의 말씀, 성령의 은혜로 역사하시는 진리의 참된 말씀, 그 말씀이 성도들을 견고하게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고 나면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너희들을 붙들어주실 것이라는 그런 것에 기대를 건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기대를 건 것은 물론 누군가가 대신 와서 사도 바울처럼 설교할 것이고, 사도 바울처럼 심방하고, 사도 바울처럼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을 진정으로 붙들어주는 것은 자신의 사역의 시기에도 그러했듯이 다른 누군가의 사역의 때에도 그러할진대 곧 그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 심겨지는 하나님의 그 말씀이 그들을 견고한 가운데 성장하게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를 비우고 죽음에 도시를 향해 순교의 순간을 위해 올라가는 사도 바울에게는 유일한 대안이었습니다. 그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체험하고 무슨 경험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성장하는 가운데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일 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보조적인 것들입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들입니다.
세미나에 갔는데 누가 저에게 공개적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이 무엇인가 하면, 그런 편지도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똑같은 질문인데 당신의 책을 보니까 신앙의 경험이 풍부하게 느껴지는데 당신이 경험한 신앙의 체험 중에 가장 놀라운 경험이 어떤 경험인가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사실 그런 것은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 이야기를 해주겠어요. 그런 것을 뭐 거기서 떠벌리겠어요. 그런데 그것을 공개적으로 물어봅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많은 것을 경험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들이 경험한 것을 내가 다 경험했을 수도 있다. 방언도 받아보았고, 무슨 이상도 본 적이 있고, 기도 응답의 경험도 있고,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적도 있고, 그리고 엄히 꾸짖으시는 하나님의 두려운 성품을 느낄 때도 있었고 뭐 다 있다. 그렇지만 그런 모든 것들은 신앙 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순간순간 나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삶에 방향 전체를 바꾸어 놓을 수는 없었다.다시 말하면 방언을 받고도 여전히 담배를 피고 이상을 보고도 여전히 세상 사랑이 있었다. 지금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다시 말하면 그런 다양한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하면서도 아주 오랜 동안 여전히 육신의 속한 그리스도인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경험보다도 가장 내게 있어서 나를 설교자로 만들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분을 자랑할 수 있도록 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체험이 내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그리고 나의 삶을 바꾸어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들도 능히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이다.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강한 것들, 그런 것들이 자신이 느끼기에는 굉장히 커다란 것과 같아도 그것은 결코 그를 견고하게 세워줄 수가 없습니다. 그를 견고하게 세워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그에게 전 인격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이런 은혜로운 작용들이 계속될 때에 그를 성장이 있는 견고한 신앙 생활을 하게 해줍니다.
여러분들은 종종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니 세상에 은혜 받은 이야기를 하면 혼자 입에 거품을 물고 자랑하는 사람의 인격은 그렇게 개떡같아. 그러는데 그러면서 신앙 자체를 자조하는 그런 분위기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이치를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기도 응답에 대한 한두번의 경험, 하나님의 어떤 놀라운 사랑 때문에 어깨를 들먹이며 한두번 우는 그런 경험 그런 것들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필요하기는 합니다. 필요하기는 한데 말씀을 떠나서 단편적으로 그런 것들을 경험하는 것들이 그의 인생을 본질적으로 바꾸어놓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으로 성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자리에,
이렇게 비유를 하겠습니다. 기가막힌 비유가 하나 생각났습니다. 기름이 확 타오르면서 불기둥이 하늘을 향해서 쏘아올라가면 그 가장자리에 수많은 불꽃들이 떨어집니다. 그렇게 떨어지는 것들은 가운데 하늘을 향해서 치솟는 그렇게 쏘아올리는 기름과 함께 타오르는 그 불기둥 때문에 떨어지는 것들입니다. 쪼가리 것들입니다.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경험들이 중심에 하나님의 진리에 말씀에 불기둥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의 말씀이 우리의 전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결과로서 이런 것들이 경험될 때에 우리들의 신앙이 성장이 있는 견고함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것들은 없고 그저 쪼가리 쪼가리 흩어지는 그런 경험들이 우리를 결코 신령한 사람들을 만들지 못하고 견고한 사람들을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 심리적으로 이게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은 많은 것을 경험할수록 경험한 것에 대해서 많이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것입니다. 눈이라는 말이 우리 나라에는 몇 가지가 안 됩니다. 함박눈, 싸락눈, 진눈깨비 그런 것밖에, 누가 흰눈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눈이 희지 검은눈이 있는가, 한 세 개 그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북그에 있는 에스키모들은 눈을 가르키는 단어가 약 80가지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일년동안에 며칠만 눈을 보며 삽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저 봄 여름 가을 할 것 없이 늘 겨울입니다. 실제 그곳은 80종의 눈이 내리고 한국에는 3종류의 눈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종류를 따지면 우리가 더 많습니다. 북극에서는 진눈깨비는 안 올 것입니다 추우니까. 그런데 눈이 내리는데 그 눈속에서 늘 눈을 경험하며 사니까 같은 눈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80가지의 단어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험을 많이 하면 그 많이 경험한 것들이 많은 말을 만들어 내는 측면이 있는데 또 반대도 있습니다. 경험을 하고 싶은데 경험을 못했기 때문에 늘 그쪽에 대한 말들이 많아지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음식을 많이 먹고 배부른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먹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먹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배고픈 사람, 금식하면 먹고 싶은 음식이 많이 생각납니다.
(예화: 아는 형제가 금식을 하며 노트에다가 무엇을 쓰기에 묵상을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금식이 끝나면 먹을 음식의 종류를 80가지나 적었다는 이야기)
그것은 어떻습니까? 한쪽은 많이 경험되니까 말이 많고, 한쪽은 거의 없으니까 없기 때문에 그 말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늘 입을 열면 자신이 신령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왜 주님이 얼마나 바쁘신 분인데, 그의 신령함에 대해 거의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무슨 자신이 늘 하나님과 독대하면서 대면하며 말하는 관계에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어제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데’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생각이 난 것이지, ‘오늘 아침에 기도 중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니까 거역할 생각을 하지 말고 아멘만 하라는 것인데 그런 건방진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불가항력적으로 너무나 선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하지 않는 것이 그 분께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할 수만 있으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신앙 생활에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성경을 읽다가 깨닫고 생각이 났는데’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알 사람들은 다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은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런 신앙의 표현을 즐겨서 사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가 메마른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 자신의 허한 것을 감추기 위해서 과장된 체험 속에서 자신이 사는 것처럼 스스로를 과장하는데 그런 과장이 습관화 되다 보면 진짜 자신이 그런 수준이 높은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비옥한 영적인 생활을 해나가는 것 같은 그런 교만과 외식에 빠지기가 쉽상입니다. 저는 그런 아주 구역질나는 외식을 소위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강력한 감화와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이 있는 견고함을 맛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필요성을 느끼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성경 속에서 아주 작은 것을 깨달아서는 한없이 부풀리는 이런 것들도 모두 외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신앙 생활에서 잡다한 경험들, 이런 것들만 있고 불길처럼 타오르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대한 경험이 그의 성화 생활에 중심이 되지 못할 때 이런 외식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배교한 그리스도인 다음으로- 물론 진실한 신자가 배교할 수 없지만 -불쌍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외식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들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진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참된 신앙 생활과 외식’이란 시리즈를 꼭 여러분들이 들어보기를 부탁드립니다. 마태복음 6장 1-18까지의 시리즈를 꼭 들으시를 바랍니다.
그런데 다시 이제 돌아가서 견고한 신앙 생활은 반드시 강력한 은혜의 말씀에 작용이 자신의 신앙 생활에 중심이 되는 신앙 생활, 이것이 바로 견고한 신앙 생활의 조건입니다. 그런 신앙 생활은 반드시 성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감화가 있는 말씀이 자신의 성화 생활에 중심에 오는 사람들은 인격적으로 주님을 계속 닮아가는 진보가 있습니다. 성질이 아주 사납고 포악한 사람들이 온유한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말이 많고 사람들을 말로 잘 씹으면서 상처를 주던 사람들이 아주 사람들을 싸안고 감싸는 사람들로 변합니다. 경솔하던 사람이 신중하게 그리고 복지부동하던 사람들이 아주 부지런히 주를 섬기는 진실한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말씀의 감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섬기고 봉사할 그런 마음들로 바뀌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함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에 정말 진보가 있는가, 성장이 있는가? 그 성장이 없이는 견고함도 없습니다. 나무가 자라지 않고 어떻게 견고해질 수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쉽게 이야기를 해서 여기에서 이 견고함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적인 어떤 깡다귀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말씀이 우리의 전인격에 강력히 영향을 미쳐서 인격 그 자체가 삶과 함께 주님 안에 생명적인 연합을 누리며 뿌리를 내리는 흔들릴 수 없는 이런 신앙, 이것이 바로 견고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그럼 하나님의 그 은혜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의 전인격에 영향을 미쳐서 우리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는 신앙 생활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세 가지로 나누어서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지성에 영향을 주므로서 우리를 견고하게 만듭니다. 겨울이면 생각이 납니다.
(예화: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시골에 있는 집에 불이 난 이야기)
무슨 말씀을 드리려는지 영리한 여러분들은 금방 알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를 동반하여 강력히 우리에게 그 진리를 전달해줄 때 우리의 지식이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것이 전에는 간단한 이야기처럼 생각이 되었는데 ‘이것이 정말 놀라운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잠시 동안 방심한 불 평생두고 후회한다’ 그것이 불이 나서 재산을 다 털어먹은 사람들은 그 포스터를 볼 때마다 가슴에 새겨지지 않겠어요, 그것입니다. 은혜를 동반한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력은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는 지식들을 우리의 인격 속에 새롭게 아로새겨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까짓 것 뭐 아는데, 그 아는 것이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아주 뼈저리게 경험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견고한 신앙 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우리들이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그런 지식들을 하나님께서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의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아로새겨 주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그 은혜의 말씀이 우리를 견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 은혜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를 견고하게 하는가 하면 우리의 정서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침으로서 우리를 견고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째든 한 때는 안 그랬는지 몰라도 마음이 컬컬합니다. 컬컬하다는 이야기는 근심, 걱정, 유혹, 염려 이런 잡다한 것들이 들어와서 신령한 기쁨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예배드리러 나왔을 때, 그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는 예배에 대해서 별로 기대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저 바라는 마음은 설교좀 짧게 해서 얼른 끝나고 집에 들어가서 푹 쉬는 것이 꿈입니다. 구역 예배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은혜가 떨어지면 피곤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늘 피곤합니다. 모르는 것도 많고, 그래서 은혜가 떨어진 사람이 잘 쓰는 말이 ‘피곤해, 모르겠어’ 두 단어를 잘 씁니다. 그러니까 주일이면 가서 뒤집어쓰고 자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왔는데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깊이 은혜를 받게 하니까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나같이 이렇게 수시로 변덕이 심한 인간들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들으면서 깊은 감화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가 강력하게 감동을 받고 우리의 정서가 신령한 은혜에 불붙게 되면 우리의 전신이 오그라들면서 우리의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그런 우리의 정서에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가 미쳐서 그런 잡다한 우리의 더러운 정서를 신령한 정서로 바꾸어놓으실 때에 그런 작용들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성장하고 성장하면서 우리가 뿌리가 견고한 신앙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한 두달은 그만 두고 일년이 넘어도 그 쏟아지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크게 감동을 받아서 진짜 살 끝까지 떨려본 적이 없는 사람, 혹은 하나님의 그런 사랑에도 불구하고 나의 많은 죄가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나를 멀어지게 했다라는 어떤 후회의 마음을 동반한 회개의 정서 속에서 아파해보지 않은 사람, 이런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신령한 정서가 거의 경험되지 못한 사람이 99% 이상 거의 죽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그런 경험 하나에 그 사람의 신앙에 모든 건강함이 달려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그때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전도사 때 이해를 못하는 청년 이야기를 했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 눈물을 막 흘리며 찬송을 부르고, 기도할 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기도하고 설교를 들을 때 자고, 설교가 끝나고 기도할 때 다시 우는 그 사람이 아직까지도 왜 그런지 해명이 안 되었습니다. 그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해 놓고는 반드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 있다라고 하는 중요한 증거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은혜로운 정서입니다. 신령한 말씀의 경험은 반드시 우리에게 은혜로운 정서를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주님의 그 따뜻한 은혜를 늘 느낄 수 있는 이런 정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정서가 바탕에 깔려있을 때 순발력이 있습니다. 이게 하나의 어떤 은혜의 순발력인데 다시 말하면 무슨 뜻인가 하면 계속해서 바쁘게 정신없이 일하다가도 손을 모으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대해서 묵상하면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죽 흐르는 것입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죽 흐르는 것입니다. 참 신기합니다. 영혼들이 이런 은혜 속에서 그들이 계속 성장해가면 놀랍습니다. 수련회 가서 막 오락회 하고 그러면서 좋아서 대굴대굴 구르고 말타기를 하면서 재미있게 놀다가도 찬송 한 장만 부르면 아주 순식간에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을 수있는 분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순발력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순발력이 빠릅니다. 그런데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게 느립니다. 이게 잘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돌아오게 하려고 확 꺾으면 뚝 하고 부러집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느립니다. 그런데 그 순발력이 우리에게 너무너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순간순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만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아니라 빼앗깁니다. 뺏길 때에 즉시 그 순발력이 우리 안에서 발동될 때 그때 다시 ‘주님 없이 살 수 없네’ 하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막 그런 순발력을 우리들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강력하게 은혜로 역사할 때 반드시 우리의 마음을 내버려두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것들로 콱 차있던 우리의 마음을 쓸어내고 거기에 주님의 사랑하는 은혜로운 정서를 가득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반복되면서 신앙의 뿌리가 뻗어가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이해하기가 더딘 여러분들을 위해서 아주 피부에 와닿는 비유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남녀가 있는데 어떤 한 남자가 여성을 보고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 전체를 서로에게 위탁할 때는 한번의 번뜩하고 와닿는 ‘멋있다!’ 이 경험 가지고 이런 자신의 생애 전체를 위탁할 수 있다면 정신병자입니다. 그것은 부단한 관계의 경험을 통해서 그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사랑을 한번 맛보았다고 해서 그것으로서 충분한가. 그것 하나를 가지고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거는가. 건다라는 것이 이게 무슨 내 인생이 무슨 시계도 아닌데 한번 맡기면 못 찾아오는가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아무리 ‘내 인생을 주께 드립니다’라고 고백했어도 가서 다른 짓을 하면 도로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이야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내 인생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그것은 자기 하고 싶어서 하는 고백이지 그 고백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한순간의 격렬하게 타오르는 사랑의 정서, 한번의 경험으로 그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고백을 했어도 계속해서 자신 속에는 부패한 성품들이 잔존하고 있기 때문에 또 자기를 위해서 살고 싶고, 하나님 앞에 다 바쳤으면서도 그래도 내 것을 챙기고 싶고 ‘다 바치면 나는 뭐 먹고 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수시로 들 때에 우리들을 견고하게 해주는 중요한 말씀의 효능이 무엇인가 하면 시시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서를 깡그리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하나님의 그 강력한 말씀에 감화를 받으면서 어느 한순간에 세상에 붙은 더러운 욕심들이 깡그리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피흘려 죽으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과 내가 그 분의 목매이는 사랑을 떠나서 살 수 없는 피조물이라고 하는 그것이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못박혀 죽으신 그 십자가를 보면서 세상에 붙었던 헛된 욕심들을 다 털어내는 이런 작용들이 수시로 반복되어야 합니다. 더 깊이 있게 그런 반복되는 정서의 새로워진 경험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무엇이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의지를 새롭게 하시므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견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옳아도 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면 현실적으로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그렇게 할 수가 없으면 안 하는 것이고 안 하면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은 할 수 없는 사람들을 그 믿음을 통해서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찬송가에서 울어도 못하네 그 다음에 또 뭐지요. 그것은 아는데 울어도 못하네. 그리고 또 힘써도 못하네. 또 참아도 못하네. 그런데 뭐만 하면 되는가 하면 믿으면 하겠네. 그러니까 도저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울어도 할 수가 없고 그리고 참아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그것을 하게 끔 하나님이 강력하게 그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옛 생활의 습관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언제 느꼈는가 하면 회심하고 나서 제가 4년 동안 담배를 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회심하고도 ‘이 좋은 담배를 내가 왜 끊어’ 내가 그랬습니다. 성경에 그런 말도 안 나오는데, 그런데 사실 몇 번 시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늘 불가능했습니다. 직장 다니면서 사람들이 담배값 하고 라이타를 가지고 와서 다 맡기면서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선배들인데 야! 내가 담배피면 네 새끼다. 그 사람은 내 새끼가 여러번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새끼가 나하고 아무리 약조를 해도 안 되니까 자기네끼리 우리들이 서로 담배를 피다가 걸리면 내기를 하자. 그리고 담배를 다 버렸는데 한 사람이 도저히 못참고 옥상 굴뚝 뒤에 숨어서 담배를 피려고 그러는데 나보고 담배 피면 네 새끼다고 한 그 사람이 둘이서 담배를 물고 같이 만났습니다.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해롭다는 것도 알고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아는데 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도 서 너 번을 했는데 늘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번에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땠는가 하면 분명하게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가상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가 없이는 우리는 전진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그 안에서 돌 뿐이지 우리는 전진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지의 놀라운 변화를 누가 주시는가 하면 하나님이 말씀의 감화를 통해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그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만들어주십니다. 헌신할 수 없는 부분들을 헌신할 수 있게 만들어주십니다.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게 놀라운 의지의 변화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은혜가 지속되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상황보다는 그 상황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의지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서 비관적이 아니라 미래의 전망에도 항상 주 안에서 낙관적입니다. 시련이 많지만 그러나 말씀의 은혜로 내가 이것을 극복하면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라는 그런 신앙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우리의 전인격에 영향을 주는 것이 일생에 한 두번 일어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말씀의 강력한 은혜를 받으면서 여러분들이 육적인 그리스도인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영역으로 옮아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 생각난 비유인데, 기차가 선로 위에 있어야 하는데 땅바닥에 있습니다. 그것을 불 때면서 기관차를 끌고 간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불 때봐야 점점 시궁창으로 들어가지 필요한 것은 렉카를 끌고 오든지 어떻게 해서 기관차를 들어서 선로 위에다가 올려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올려놓는 것만으로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은혜로운 신앙 생활을 계속해서 나아가고 견고함 속에서 성장하는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말씀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의 지성과 우리의 정서와 우리의 의지를 전체적으로 새롭게 하셔서 전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이런 일들이 일생에 한 두번이 아니라, 위기 때 한 두번이 아니라 자주자주 반복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시간마다 시시때때로 반복이 되어서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슴에 아로새기고 그리고 쓰레기 같은 정서들을 쏟아내고 신령한 정서로 가득 차고 그리고 예전에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는 이런 전인적인 변화에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뿌리를 내리고 점점 견고한 신앙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 이층을 올리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기존에 있는 기초공사와 기둥들을 점검하고야 이층을 올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이층을 지어도 감당할 수 있는 기초인가, 또 감당할 수 없는 기초인가.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나중에 건축 전문가들이 다 점검하고 보니까 5층인가 올라가고 위에는 물탱크가 수천톤이 올라가 있었는데 사용된 철골이 2층 연립주택을 지으면 딱 맞는 철골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보십시오. 일에만 욕심내지 말고 높아지려는 욕망 갖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뭐가 엄청난 일을 해서 한번 뒤흔들어 놓아야겠다는 그런 그 욕망이라고 하는 것이 튼튼한 영적 생활에 견고한 기초가 없이는 모두 허영입니다. 또 다른 욕망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허영입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허영입니다. 그래서 기초 자체가 탄탄해서 그 속에서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연합을 통해서 성장하고 견고하게 서가는 분량만큼 위에 섬김과 그 모든 것들이 쌓여갈 때에 그때에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건축해 나아가는 것이 그게 여기서 세운다는 뜻입니다. 건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으면 어느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해를 새롭게 시작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도리에 대해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 각자에게 금년 한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확실히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 속에서 정서와 지성과 의지가 새롭게 되는 근본적인 변화를 늘 경험하면서 사는 은혜 안에 사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떠한 난관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 생활 속에서 견고해져 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그래서 세상의 유혹과 비바람이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영적인 커다란 나무들로 자라가는 한해가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거룩과 기업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32下)
3년이나 눈물로 가르치며 사랑하던 에베소 교회를, 그리고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을 떠나면서 사도 바울은 유언합니다. 그들 앞에는 밖으로 오는 핍박과 안에서 일어나는 시험으로 인해서 위기가 닥쳐올 것을 이미 읽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없는 이 에베소 교회와 아시아의 교회들을 향해서 대안으로서 주님 곧 은혜의 말씀께 그들을 부탁합니다. 그들을 맡깁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대를 두 가지로 펼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 은혜의 말씀이 자신이 사라져도 그들을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와,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그들에게 주시면 그들이 거룩케 하심을 입은 무리들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두 가지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그 앞부분을 말씀을 드렸고 오늘 이 시간에는 그 뒷부분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즉 “그 말씀이 너희로 능히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무리들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단어 하나를 만납니다. 그것은 바로 “기업”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한글 성경을 가지신 분들은 이 기업이 주식회사를 가르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 주식회사 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기업입니다. 이 기업은 우리는 잘 쓰지 않는 말입니다만 “유업”이라는 뜻입니다. 유업, 혹은 유산, 상속 그런 의미를 가진 기업이니까 주식회사 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 기업이라는 말은 사도행전이나 신약성경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 아니라 이미 구약 초창기부터 계속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성경 속에서 계속 전해 내려온 단어이기 때문에 성경 전체의 빛을 받으면서 이 기업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 말인가를 확정한 후에야 오늘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기업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이 분명하게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래 이 기업은 재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재산 중에서도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 혹은 부모로부터 법적으로 상속된 재산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는,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가 자신이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고입니다.
그렇게 얻은 그 소유들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죽으면서 그 기업을 자식들에게 물려줍니다. 그래서 큰아들, 작은아들 이렇게 각자 나누어서 기업을 물려줍니다. 그러면 자식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기업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자신들이 열심히 살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서 자신의 기업을 누리다가 자손들에게 다시 물려주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처음에 성경이 기업이라고 할 때에는 초창기에는 이렇게 재산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보다시피 성경에서는 자기의 자녀를 기업이라고 고백을 하는 경건한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주님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그 자식이 주어졌다는 것과 그리고 그 자식을 향해서 부모인 자기 자신이 독점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점에서 그런 식의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열심히 내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도 내게만 주신 기업이라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일차적으로는 이 기업은 곧 재산, 물질, 소유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구약에서 기업에 대한 개념이 혁명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가나안 땅과 관련되어서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시면서 그 땅에 대한 약속들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이제 가나안 정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 기업은 단순히 소유하는 재산을 의미하는 것에서 이제 더 깊은 의미를 가지면서 땅을 가르키는 말로서 이 기업이 사용됩니다.
이 기업이 왜 땅을 가르키는 말이 되는가 하면, 이 땅은 당시 농경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생산해내는 원동력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살고 그리고 그 땅에서 먹고 그 땅에서 마십니다. 그래서 땅은 곧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땅이 이제 아주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것 중에서 아주 가장 영광스럽고 고유한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땅에 대한 약속이 구체화 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휘하에 가나안을 정복하면서부터입니다. 그 전까지 광야의 생활이 있었고 그 전에는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으니가 기업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유리하는 목축하는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그 조상들은 모두가 다 자기 자신이 나그네라고 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을 앞두고, 아직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제비를 뽑습니다. 그리고 이제 각 지파에게 그 지도상의 각 지파의 땅들이 정해집니다. 그것이 기업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셨는데 아직은 얻지 못한 땅입니다. 그리고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서 전쟁을 통해서 모든 족속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파가 땅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레위 지파만 제외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 지파들이 땅을 차지하고 그 차지한 땅은 다시 제비를 뽑아서 종족별로 나누어지고 다시 씨족별로 나누어지고 가족별로 다시 나누어져서 이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을 가지고 살아가는 백성들이 됩니다. 그것이 이제 기업입니다. “기업” 그러면 아예 땅이라고 하는 것이 구약에서 가나안 정복 이후로 딱 고착화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은 빼앗겨도 안 되고 빼앗아도 안 됩니다. 그리고 또 빼앗길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게 끔 하나님께서 율법을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이미 그것은 기업을 누리기 전에 광야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기업을 주고 나면 인간들이 어떻게 이 기업을 중심으로 욕망과 욕망이 충돌될지를 아셨기 때문에 교통정리를 다 해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지계표 사상입니다.
성경에 보면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지계표가 무엇인가 하면 땅의 경계를 가리키는 표석입니다. 그것을 옮긴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내 것이 아닌 땅을 차지하거나 내 것이었던 땅을 빼앗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못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살다가 보면 부득이 하게 자기의 땅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경제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안식년이 되면 그 돈을 가지고 가서 부득이한 상황으로 땅을 넘겨주었던 그 사람에게 가서 이 땅이 내 땅이니 돌려주십시오 하면 반드시 돌려주어야 합니다. 또 그렇게 자기의 땅을 무를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에는 이제 칠칠의 사십구, 희년이 다가오게 되면 오십 년째 되는 희년이 다가오게 되면 그러면 그때에는 무상으로 노예되었던 자들에게는 모두 돌아가고 땅을 차지했던 사람은 그 땅을 모두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그런 은혜의 해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업을 그런 식으로 존중하면서 산다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신앙에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는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그래서 후기 선지자의 시대로 들어오게 되면 선지자들이 아주 혹독하게 신랄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을 공격하는데 그 공격의 주된 대상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경제 생활이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안식년이 되었는데 땅의 주인이 돈을 가지고 가서 물러달라고 그러는데 내가 이것을 왜 너에게 물려주나. 이러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곧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누구기에 내가 너에게 땅을 물려주나 이런 이야기와 똑같은 것입니다. 희년도 무시되는 것입니다. 노예로 잡아 놓았던 사람, 혹은 땅을 차지했던 사람들을 돌려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탐욕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자신들의 하나님되신다라고 하는 마지막 신앙 고백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혹독한 심판이 경고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단순히 하나의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함께 고려하면서 그 문맥을 인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업사상을,
이게 어느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치명적으로 중요한 신앙의 보루였는가 하면 북왕국 왕가에 오무리 왕가에 아합이라고 하는 그 임금이 있었습니다. 아주 가장 못된 임금에 대명사로 꼽을 때 떠오르는 사람 중에 하나가 여로보함과 아합인데 아합은 하여튼 이세벨과 혼인을 하면서 바알 종교를 온 땅에 퍼트려서 그 땅을 더럽힌 그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세벨은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 시집온 여자인데 바알 종교를 이 가나안 땅에 퍼트려야겠다고 하는 아주 헌신된 선교적인 열정을 안고 시집온 여자입니다. 그 사람과 결혼을 합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동양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역사상 아주 특별한 영국이나 이런 특별히 민주주의가 발달한 그런 나라들을 제외하고는 왕이 있는 모든 나라는 가산제 전제국가의 개념이었습니다. 역사에서 “가산제 전제국가”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왕을 처치하고 왕에 등극하게 되면 그 순간 보좌에 앉는 순간 온 땅이 우리집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왕인 내집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산제입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그것을 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상이었는데 이스라엘은 왕이 있어도 전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왕을 비롯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세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성경으로 보면 그 사람들은 모두 나그네일 뿐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 원 주인, 기업의 원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그 기업을 맡기셨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고민이 이해가 가는 것입니다. 나봇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포도원이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가지고 있었는데 포도송이가 탐스럽게 열리고 아름다웠던 모양입니다. 그것이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가산제 전제 국가의 개념에서는 그것이 자기 것인데 저리가라고 하며 자기가 오늘부터 내 것이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 자기 것인데 그런데 아합이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저것이 너무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문맥을 알지 못하면 그 아합의 고민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너무 갖고 싶은데 그 신앙이 없는 막대먹은 임금에게도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그것을 침범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자기가 알고 있었습니다. 내 기업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에 그 백성과 왕의 관계는 동양에서의 왕과 백성들의 관계,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주 자존감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왕과 백성의 그런 관계입니다. 아주 독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세벨이 여보, 왜그래 그러니까 나봇의 포도가 너무 예뻐 그래 그리고 가서 때려죽이고 뺏은 것입니다. 왜 이세벨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강력한 심판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도 그 죄가 한몫을 담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지계표를 옮긴 것이 말입니다. 그것이 기업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다음에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무엇인가 하면 그 땅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라고 하는 이 사람들의 신앙에 하여튼 천지개벽 할만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땅을 이방 민족에게 몽땅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장 여러분, 무슨 이야기가 됩니까? ‘이 땅이 우리의 기업이라’ 이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땅을 다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기업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업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이야긴가 하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기업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자신들은 그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 입증되는 것인데 이 기업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바벨론이 뺏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벨론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것을 뺏아서 주신 것입니다. 역사 해석이, 그러면 이제 이 사람들이 깊은 신앙적인 고민입니다.
그래서 다니엘과 같이 이렇게 포로로 끌려갈 때, 예레미야나 에스겔이나 이제 포로 시대에 그리고 또 그 후에 포로 시대를 예언하는 이사야나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그 백성들에게 전달해주면서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혼란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엄청나게, 그것이 정리가 금방 되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포로로 끌려간다고 선포를 하는데 “그래도 내가 긍휼을 입지 않으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그런데 그것이 신학적으로 막 엄청난 혼동이 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생각을 해보십시오. 땅을 통해서 그 땅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고 그 기업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데 이 땅이 송두리 채 날라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리하는 백성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유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그들의 치하에 들어가서 아주 비참한 종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성경의 역사가 끝나고 소위 이야기하는 신약과 구약 사이의 중간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벌써 말기에서부터 어떤 신앙적인 혼란이 오기 시작하는가 하면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인가. 이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의문이 들어오게 되는가 하면 그러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인가,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는 이제 하나님의 기업이 없는가. 그런데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아는 것입니다. 땅은 다 빼앗기고 하나님이 심판하셨는데도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그리고 일꾼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고 포로로 끌려가기 전에 이미 벌써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올 것과 하나님의 나라의 왕국의 회복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이 사라졌으니까 이제는 기업이 우리에게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사상적인 정돈을 하게 되는데 중간사 시대 속으로 들어가면서 심지어는 어떤 사상이 나오는가 하면 우리의 기업은 땅이 아니라 율법이다는 사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벌써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자꾸 변화를 경험하는가. 이것은 그 시대마다 제멋대로 해석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업이라고 하는 땅, 이 씨앗을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이 마지막에 보여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영적 왕국의 백성들에 대한 궁극적인 기업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향해서 이렇게 생각들이 발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그것을 어려운 말로 “계시의 전진적 발전이라” 이렇게 부릅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씨앗인데 씨앗도 완전합니다. 싹이 납니다. 씨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싹이 난 것이 줄기 가지가 뻗으면서 나무가 됩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게 하면서 더 큰 나무로 자랍니다. 나중에는 거기에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립니다. 그렇게 발전합니다. 땅이 만약에 씨앗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재산이 씨앗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땅은 싹이고 그 후에 신약의 진정한 기업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그 사상은 열매가 주렁주렁 맺은 다 자란 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기업이라고 하는 것이 물리적인 땅이 아니라 뭐가 신앙 생활에 어떤 영적인 측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것이면서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아주 본질적인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땅이 그렇게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하는 사상을 토대로 해서 궁극적인 기업을 향해서 이렇게 계시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답부터 말씀드리자면 결국 신약으로 넘어오면서는 신약에 나오는 기업 사상은 철저하게 그 기업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기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게 될 천국의 영광도 기업으로 묘사되고 그 행복도 기업으로 묘사되고 또 어느 곳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될 부활도 기업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또 지금 현재적으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교제의 삶도 기업으로 묘사가 됩니다. 그런데 어째든지 간에 이 모든 것들의 한복판에는 누가 계시는가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방황 끝에 땅 안에서 그 땅에서 안식을 누렸던 것은 후에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백성들이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신약이 시작이 되면서 땅에 대해서 주목할만한 기업에 대해서 주목할만한 예수님의 언급이 나옵니다. 그것은 팔복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실제로 들었는데 어느 분이 이 부분을 설교하면서 온유한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땅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증거를 대면서 온유하게 살라고 하는 것들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전혀 핵심을 비껴간 것입니다. 지금 집 한 채 없어도 온유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불법하게 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퍅한 사람들이 온유한 사람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것을 기억해보십시오. 한창 강남에 땅바람이 불 때 눈이 벌개서 거기에 미쳐서 돈놀이 하면서 땅을 사려고 몸부림치던 사람들 가운데 온유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이야긴가 하면 단어가 하나 나온다고 해서 이것을 전부다 평준화해서 그렇게 이해를 하면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계시는 계속해서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그렇게 엉뚱하게 하면 성경의 복음 그 자체가 설 땅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뛰어난 온유한 사람 가운데 한사람이 스데반이 아닙니까? 돌로 자기를 쳐죽이려는 무리들 앞에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빌고 그들을 미워하지도 않은채 신령한 세계를 내다보면서 천사와 같이 빛난 얼굴로 죽었습니다. 무슨 땅을 차지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가장 갖고 싶어했던 성품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었습니까? 온유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그 사랑의 장, 여러분, 그 설교 시리즈를 오늘도 소개를 하겠습니다만 꼭 사십시오. 돈이 없으면 옷을 팔아서라도 사십시오. 그런데 거기에서도 가만히 보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배우게 된 그 사랑의 개념이 결국은 온유함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가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사모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그렇게 놀랍게 성화에 진전을 이루었다고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무슨 땅을 차지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온유에 대해서 그렇게 강조했던 사도 베드로가 이 땅에 마지막 얻은 기업은 십자가에서 거꾸로 매달리는 것밖에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그 말씀,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를 갖다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뭐 지루할 정도로 밤새도록 대라고 그래도 댈 수가 있지만 하나만 더 이야기를 하자면 구약에서 온유한 사람의 대명사가 누구입니까? 모세입니다. 모세가 무슨 땅을 얻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죽었고 그 시체는 치워졌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하는 그것을 그런 식으로 물리적인 땅을 내가 차지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부분은 찰스 스펄젼이 해석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땅을 정복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땅을 정복한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는 것은, 여기서 그 온유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우게 된 성품입니다. 그런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땅을 정복해나가는 거룩한 감화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스데반은 땅을 한평 얻지 못하고 죽었지만 지금 스데반에 대해서 증언하는 제 마음이 스데반에 의해서 점령되고 있습니다. 모세는 땅 한평 얻지 못하고 죽었지만 모세는 여전히 살아서 이 세상을 정복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땅을 정복해간다는 것입니다. 수만 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몇 번만 주인이 바뀌면 그 주인이 누군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복음에 사로잡힌 그 분의 성품을 닮은 온유한 신앙의 인격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이 죽어도 이 땅을 정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땅을 유업으로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기업이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들이 이해가 보다 명확해졌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긴가 하면 “거룩해 하심을 입은 무리들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즉 여기에서 이 기업은 결국 두 가지로 나뉘어서 설명이 되는데 하나는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기업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이미 누리고 있는 기업에 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누리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천국의 생활도 여기에 포함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약속으로 이미 주어져있습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기업입니다. 그러나 그 기업은 미래에 속한 것만이 아니라 지금 또한 우리들이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기업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예전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을 때에는 소유할 수 없었던 것들을 소유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주님을 모르면서 살아갈 때에 고통받을 때에는 그저 신음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픔이 다가오면 사람을 원망하고 불행이 닥쳐오면 자신의 삶의 상황을 저주하며 몸부림치는 일 이외에는 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서는 고통이 오면 기도할 수 있고, 불행히 다가오면 그 불행 속에서 나를 행복으로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전에는 인생을 살다가 갈 길을 모르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훈수는 둘 수 있어도 책임질 수 없는 사람들에 무책임한 답변에 귀를 기울이면서 사는 것밖에는 길이 없었는데 이제는 인생을 살다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 지도를 구하고 말씀을 기다릴 수 있는 그런 특권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인 우리들이 현재적으로 누리고 있는 기업의 최대 행복은 바로 오늘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과 나누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특별한 그 풍부한 교제를 통해서 아주 분명하게 빛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 누리지 못했던,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완전한 교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이 기업은 누가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수도 없고 또 빼앗겨서도 되지 않는 생명을 걸어서라도 우리들이 지켜야 할 기업입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아주 이 신약적인 기업의 사상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특별히 현재적인 기업에 관한 사상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지금 여기서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 자신, 그것이 성도에게 가장 귀한 기업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업을 있게 하실 것이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 순교를 위해서 그들을 모두 버려두고 떠나는데 전망은 어둡습니다. 밖에서는 시련과 박해가 들어올 것이고, 교회 안에서는 거짓된 가르침들이 신실한 신자들을 괴롭힐 외후내한의 상황이 예상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그런 기업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없어도 그들이 그런 기업을 누리게 될 것을 아주 강력하게 전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참 기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 최고의 기업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과 관계를 올바르게 가지면서 살아갈 때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많은 기업들을 주시고 그리고 우리들을 축복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치관이 분명치 않아서 허랑방탕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전에 파괴적이고 낭비적이고 절망적인 인생에 변하여 생산적이고 도전적이고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여하는 그런 행복한 인생이 되리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굳게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기업은 주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들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주님 그 자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 자신과의 친교로 말미암은 행복, 어떤 삶의 불행한 상황에서도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경험, 내 안에 있는 신앙의 실제, 이것보다도 더 큰 기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아빠가 사준 고급 운동화, 멋있는 잠바, 비싼 게임기 그런 것들을 통해서 겨우 우리가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을 그 아이가 자기 친구들에게 입증하려고 한다면 그 광경을 볼 때 얼마나 우리가 슬프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아버지 되심이 그런 식으로만 입증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기업이 되신다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가장 커다란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시편 73편에서 “하늘에서는 주밖에 내가 사모할 자가 누구리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고 고백한 그 시인의 고백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입니까?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나무와 같은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나와 동행하시고 내가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 함께하셔서 나에게 그 관계를 느끼게 해주시는 동행하시는 그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고 하나님은 그런 동행하는 관계 속에서 당신의 사랑에 감격하며 살아가는 우리 때문에 행복한 그런 관계가 기업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시라는 사상도 나오는데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사상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아름다운 기업 사상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모든 즐거움이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 모든 행복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없이 존재하실 수 없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그런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기업된 관계, 그 관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서 못박으시면서 이루고 싶으셨던 그런 관계입니다. 이제 기업 사상이 이해가 가십니까? 그런 기업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가장 커다란 축복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속에서 그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며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어도 주님이 없는 사람들은 기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뜬구름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들이 그들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훅’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시면 모두 날아가버릴 재물과 명예와 평판들이 어떻게 그들을 지켜줄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성도들은 하나님 자신이 기업이 되십니다. 식언하지 아니하시고 불변하시고 진실하시며 신실하신 그 하나님 자신이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며 그들을 행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두 번째로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다면 이 행복은 하나님이 모든 신자들에게 약속하신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은 자기의 모든 백성들에게 이런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기업이 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기업이 되시고 성령님 자신이 우리에게 소유가 되시는 이런 축복들을 모두 믿는 자녀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 자신 때문에 행복에 겨워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소수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그 대답을 오늘 성경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기업을 주시리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사도가 뭘 덧붙이는가 하면 “거룩함을 입은 모든 자들 가운데” 희랍어 성경에는 이것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하면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완료입니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우리말로 하자면 “거룩케 되어져 온 무리들 가운데”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거룩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몇가지를 설명할 수 있는데 핵심을 이야기한다고 할 것 같으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거룩은 “도덕적인 완전성”입니다. 그러니까 그 도덕적인 완전함의 표본을 누가 보여주셨는가 하면 하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도덕적인 완전함이라고 그래서 윤리적으로 살아야지 된다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러면 이해가 분명히 될 것입니다. 이제 신앙 생활을 하면서 신앙의 성장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과 함께 신앙이 성장이 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죄인들을 이렇게 사랑하시는 분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깨닫고 나면 즉시 무엇이 오는가 하면 그 하나님처럼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은 욕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을 꺼지지 않도록 잘 지키고 계속 은혜를 받으면 아주 포악하고 잔인한 사람이 변해서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날 이야기하는 이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 간다는 것과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이가 하면 이렇게 오늘날에 이야기하는 도덕주의, 윤리주의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관계가 없이 어떤 율법적인 의무를 제시하므로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안 하는 게 인간이냐’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공중도덕도 안 지키는 게 그게 인간이냐’ 아니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게 그게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것은 인간도 아니다’ ‘그런 짓을 하고 어디에 가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있느냐’ 그러면서 이런 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 이것이 토대가 되어지지 않은 도덕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윤리주의요 도덕주의라고 한다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도덕은 윤리의 추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에 대한 추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결과물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갑니까?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시라고 할 때에 중요한 그 개념 중에 하나가 도덕적인 완전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이런 성품들이 있는데 그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으면서 그 분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을 닮아가고 싶어서 자신이 그 분을 닮아가고 싶어하는 것, 그것이 거룩의 추구이고, 진정한 도덕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을 닮아가기 때문에 변화된 인격과 삶을 통해서 맺혀지는 부산물이 도덕적인 삶입니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것이 거룩이라고 할 것 같으면 우선 중간에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기업이시고 이처럼 하나님이 큰 기쁨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서에서 선지자가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감람나무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어도 자기는 그렇게 기뻐할 것이라고 하는데 누구 때문인가 하면 하나님 자신 때문에 그렇게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초월하는 기쁨과 행복이 그에게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하나님되시고 나는 그 하나님의 자녀다. 그 백성이다. 그와 누리는 이 관계가 복종적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내가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과 은총을 받으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기업 되심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그 약속이 주어졌음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가 그렇게 말할 때 대답은 그들이 거룩해져 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막 살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들로 변화되어 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아주 중요한 주제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거룩입니다. 결국은 성화라는 주제를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단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만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했다고 해서 모두 행복합니까? 자식을 낳았다고 모두 그 자식이 행복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적절한 조건들이 주어질 때에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도 자기가 태어난 것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계속해서 거룩해져 가지 않으면 하나님 자신의 기업 때문에 그 신령한 축복들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시기는 했는데 현재적으로 내가 그것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서 수동태가 되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내가 거룩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거룩하게 해옴을 당한 그 무리들 가운데서 하나님 자신이 기업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인격, 그리고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어 자라가는데 있어서 주도권을 누가 쥐고 계시는가 하면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였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능동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니라 그렇게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그 변화의 주도권을 누가 쥐고 계시는가 하면 성령님이 쥐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거룩해지지 않은 것은 다 그 분의 책임이네. 그것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하면 주도권을 성령님이 쥐고 계시지만 그러나 그렇게 우리를 거룩하게 주도하시는 성령님에 대해서 복종하고 자신도 그렇게 거룩하게 되어지기를 갈망해야 하는 우리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반응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성령의 목적은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아주 더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저 예배당에 왔습니다. ‘빨리 예배드리고 그저 속히 가고 싶다. 가서 좀 휴일날 누워서 잠이라도 자야지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아니면 처음서부터 ‘오늘 오후 예배는 오지 말아야지’ 하고 뜻을 세우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빨리 끝나서 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오는 것입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 생활에 일환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자극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 맞아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시고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데 나는 왜 하나도 안 행복한가’ 그리고 설교를 계속 듣고 보니까 ‘아! 내가 거룩이 없었구나. 내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은 사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한 삶이 없기 때문에 친밀하신 그 하나님을 내가 느낄 수 없기 때문이구나’ 그리고 그것이 가슴에 헤집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누가 하시는가 하면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성령이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기업 되심을 경험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핍절한 삶을 종식시키려고 하실 때 협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강력한 생각이 들어와서 성령이 주도권을 쥐실 때 그것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왜 지우지를 않고 들어오게 끔 계속 내버려두면 어떻게 됩니까? 나도 바뀌어야 되고 내 삶에도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살아온 나의 삶의 기반과 나의 삶의 모든 방식들을 다 허물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입니까?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괴로운 아픔 가운데 거룩해져 가기보다는 그냥 살아오던 삶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양심을 스스로 달래는 것입니다. ‘뭐 이정도만 살아도 되지 않아’ 그러면서 달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거룩한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 생활에서 행복한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그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자신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을 너무나 잘 아는데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떠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살아보나마나 마지막에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너무나 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거룩함이 없는 것에 하나님의 기업 되심, 그런 행복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과거의 신앙 생활을 한번 회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의 경험을 회상해볼 때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행복했던 날들이 얼마나 됩니까? 그리고 그 날들이 있었다고 칩시다. 그 때 특징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이 전부인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닮고 싶은 그때였습니다. 그때 이외에는 행복한 때가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셨는데 그 주님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 것은 우리에게 거룩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여러분들이 삶이 곤고하고 위기에 몰린 그 상황에서 그때는 하나님 더 붙들고 하나님을 더 의지해야 하는데 그런데 어! 내 안에 하나님이 없네. 내 삶에서 이제 하나님은 나를 더 이상 돕지 않으시는구나. 내 인생에 있어서 이제 하나님이 안 계시는구나. 사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뭐가 없는 것입니까? 거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업 되심의 실체를 경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법칙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틀에 박히고 아주 딱딱하고 건조한 교회에 출석하는 생활, 남들의 평판에나 귀를 귀울이는 그런 진실성이 없는 신앙 생활을 통해서는 여러분들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이 비밀을 몰랐습니다. 이상하게 한순간에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사랑과 감격이 사라지고 나니까 내 삶이 너무 곤고한 것입니다. 오히려 술먹고 돌아 다니며 내 멋대로 살 때가 훨씬 더 인생을 살기 편했습니다. 예수 안에 안식이 있다고 그래놓고 안식이 없었습니다. 찬송가에 보면 그 수많은 ‘주님 안에는 기쁨이 있어요. 하나님 안에는 행복이 있어요’ 그게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보니 결국 무엇 때문인가 하면 구원의 감격은 있었는데 그 후에 즉시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내 신앙의 인격이, 그리고 내 삶이 성별되어서 그래서 주님의 거룩을 본받는 사람으로서 내가 살아가야 된다라는 이 길에 들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제가 그런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제가 찾은 그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세상의 길에서 방황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위로를 해보지만 그러나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있는 것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것을 덧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거룩해 하심을 입은 모든 무리들 가운데....” 희랍어 성경에 보면 정관사가 나옵니다. “거룩해 하심을 입어온 모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기업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정말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었을 때 그때 여러분들이 한번 행복했었는가 생각해보십시오.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었을 때, 혹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었을 때 그래도 행복했다라고 하는 것들이 회상되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수 없는 행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생활을 끊임없이 그리워했습니다. 애굽에서의 전 생활을 그리워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뭐만 그리워한 것인가 하면 고기가마 옆에서 먹던 것, 정욕에 좋은 마늘을 먹던 것, 왜를 먹던 것, 부추 같은 것 이런 강장식품을 먹던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고기국을 먹었으면 고기는 누가 먹었습니까? 애굽 사람들이 먹었습니다. 자기들은 국물을 먹고, 그렇지 않습니까? 마늘을 먹었다고 하면 웅담은 누가 먹었습니까? 그 고기국을 먹는 그때를 (?)놓고 비교를 하면 안 됩니다. 뭘 비교를 해야지 됩니까? 오후에 고기를 삶에서 애굽 사람들에게 다 퍼주고 그 고기국물 그것을 얻어먹기까지 하루 종일 어떻게 했습니까? 채찍에 맞으면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터지고 그리고 벽돌을 굽고 집을 짓고 하면서 수없이 자기의 동료가 그 하루 동안에도 노역 속에서 죽어가는 데에 그 잠깐 동안에 맛보던 행복입니다.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은 다시 거기에 가서 노예 생활을 하겠다는, 그 피투성이가 되는 학대받는 생활을 그리워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입니까? 가는 즉시 고기 가마 옆에 쭉 옹기종기 앉아서 밥을 말아먹을 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환상이지 진짜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면 세상에서 알콩달콩한 기쁨만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잠시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거나 아니면 자신의 영혼이 곤고한 가운데 살아가는 주님을 믿기 전에 회심하기 직전에 경험했던 그 고통은 함께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을 함께 가져가라면 가져가겠는가 안 가져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절대로 대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과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가치가 행복에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도, 심지어는 십자가도 자신의 행복에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인 개념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가치가 행복이 아니라 거룩입니다. 왜 거룩이 있는 그 곳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구원한 백성들을 향해서 거시는 간절한 기대,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고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그 기대가 뭔지 아십니까?
온몸과 영혼이 주 오실 그 날에 흠없기 원하노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향하신 하나님 뜻이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우리가 다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고 경건하게 살고 정결하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면 하나님 자신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해줍니까? 성령님이 하시는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거룩케 하심을 입은 무리들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의 주어는 무엇입니까?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입니다.” “주와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두 가지의 일을 하시는데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고, 너희를 능히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가치, 집을 팔고 땅을 팔아도 바꿀 수 없는 우리의 그 소중한 그 재산이 무엇인가 하면 여전히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고 하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변화될 수가 있다는 것, 그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해주신다는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아주 커다란 재산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하지 않고는 그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느낄 수 없고 그 하나님 자신을 자신의 기업으로 누리면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 친밀하신 사랑과 은혜를 누구에게 보여주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 탁월한 아름다운 성품을 누구에게 보여주셔서 하나님을 향해서 냉담했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인격적인 사랑 때문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는 놀라운 일들이 어떤 사람들에게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 말씀을 통해서 그 일들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어제도 교리반 12기를 거의 6개월 동안에 마무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모두 서로 6개월동안 받은 은혜를 간증하는 가운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신앙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우리를 움직여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날마다 성령의 역사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갈 때 그때에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풍부한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기업이 되시는 행복들을 느끼게 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이 사도가 자신조차 떠나가고 남겨지는 이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특별히 그들에게 가르치도록 부름을 받은 장로들을 향해서 간곡히 권하는 것입니다. 내가 떠나가도 너희들을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주실 수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지키신다는 것은 곧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를 지킨다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들 가운데 없으면 하나님이 너희들 가운데 계시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이 아무리 열심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사실상 여러분들은 무신론자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진실하게 살아가라. 뭐가 있어야지 진실하지. 깊이 묵상해보라. 아니 뭐가 있어야지 묵상을 하지. 멸치 두 마리를 넣고 한 솥의 물을 잡고 푹 고아보십시오. 뭐가 나오겠는가. 멸치 두 마리를 넣고 한다라의 물을 넣고 정성껏 푹 고아보십시오. 맹물입니다. 거기에 사골이라도 한채 집어넣고 고아야지 푹 고을 때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뭘 깊이 묵상하고 뭘 깊이 고민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리, 우리를 거룩케 하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데 무엇을 가지고 깊이 있는 삶을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실하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누구이고 어느 길로 돌아가야 할지를 알고 또 가르침을 받을 때 그 고뇌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방향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그 고뇌는 희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사로잡힌 그 삶,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거룩에 이를 수가 있고 그렇게 거룩하게 산 사람들만이 하나님 자신이 자기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행복이 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그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자신 때문에 얼마나 행복과 기쁨을 노래했습니까? 그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이 없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여러분 속에 와 계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기업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행복, 그 분이 우리의 유일한 기업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과 결탁된 일치된 삶을 살아가면서 행복하게 해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의 기업의 중심에는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입니다. 죄악된 세상을 방황하면서 어디가 길인지도 모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래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는 자신의 죄 때문에 그런 길을 스스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그 실패한 인간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유업되심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 비참한 인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깨트려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의 길을 여시고 그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 흐르는, 서로가 서로를 향해 기업된 이 아름다운 관계를 다시 복원하시려고 우리의 많은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우리들이 충만하게 느끼면서 하나님 때문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던 때에는 항상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그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축복과 그 분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행복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넘어온 것입니다. 아무 공로없이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라고 하는 그 고백이 거기에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금년에 여러분들의 개개인의 삶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년과 같이 고통스러운 때가 있는가 하면 다행스러울 때가 있고 숙명이 있는가 하면 역경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아주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온갖 시험이 우리를 뒤흔들고 우리를 삼키려고 하는 우는 사자와 같은 악한 세력들이 우리의 삶을 위협해온다고 할지라도 오직 한가지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서 하나님 자신을 기업으로 누리면서 살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그 분의 위로를 느낄 수 있는 바탕 될 것이며 시련이 그 분의 전능하심을 경험하게 하는 훌륭한 장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금년 한해도 이렇게 진실한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 자신과 동행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4.말씀에 붙들린 삶①:약한 자들을 위한 수고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上)
사도는 순교의 길을 가면서 목숨처럼 사랑했던 자기의 교인들에게 자기가 없어지고 난 다음에 어떻게 그들이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없어진 그 이후에도 여전히 그들을 붙들어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자신이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가고 나면 그들을 장로들이 목양할 터이지만 그러나 사도는 그들은 모두 도구일 뿐이고 그 교인들을 맡아주실 분은 주님 곧 은혜의 말씀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두 가지를 할 것이었는데 하나는 견고하게 그들을 붙들어주시는 것과 또 하나는 거룩케 하심을 입은 무리들 가운데서 그들이 기업을 누리면서 살게 되리라는 기대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업은 다름이 아니라 곧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이 32절 전체 여기까지가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사랑하는 교인에게 진리로 조직된 교훈인 것을 가르쳐준 것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오늘 33절 이하 35절까지 이 마지막은 사랑으로 조직된 교훈입니다. 즉, 진리로 조직된 교훈과 사랑으로 조직된 교훈을 에베소 교회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유언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다시 한번 자신이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살아왔던 삶의 방식에 대해서 말합니다. 내가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나와 내 일행의 쓸 것을 당하여 이 손으로 그 쓸 것을 다 공급하고 그리고 살았다. 이것은 자기 자랑이 아닙니다. 자신의 청빈한 삶을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사도가 여기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요 선교사요 목회자로서 이 고백을 하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순수한 동기를 계속 유지하면서 그들 가운데 섬겨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므로서 그들이 자신의 모본을 따라서 주님을 섬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처럼 3년이 넘는 동안 순수한 복음 전파에 동기를 유지하고 이렇게 사랑하는 교인들을 섬길 수 있게 만들었던 그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붙들려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복음을 인해서 먹고 입은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단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해주기를 원하는 동기에서 행한 청빈한 삶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순수한 동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섬겼으니 그들도 자신의 본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도가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시종일관 동일한 이 순수한 동기를 유지하면서 사랑하는 성도들을 섬길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붙들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은혜의 말씀이 우리를 붙들 때 우리는 비로소 순수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요새 무공해라고 그러면 꺼벅 죽습니다. 이제 무공해는 사라졌습니다. 인간들이 환경을 너무 오염시켜서 이제 무공해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맛있는 것, 큰 것, 싼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무공해를 원합니다. 그리고 무공해라고 그러면 값이 아무리 비싸도 사먹습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무공해 식품을 사모하는 것처럼 무공해 신앙을 사랑한다면 아마 훨씬 이 세상은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도 놀랍게 변할 것입니다.
(예화: 8년 전에 강남에 있는 교회에 가셔서 말씀을 전하시는 가운데 무공해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하시고 오셨는데, 그 후에 그 교회에 있는 여집사님이 전화를 해서 무공해 그리스도인이 되 라고는 하셨지만 어떻게 무공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비결은 안 가르쳐 주셨다고 묻기 에 무공해 말씀을 먹으라고 대답하셨다는 이야 기)
여러분, 무공해 콩나물, 우리 박제국 집사님이 무공해 콩나물을 기르려고 애를 쓰시는데 무공해 콩나물이 어떻게 자라는지 난 잘 모르지만 어렸을 때 콩나물 공장 옆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냥 콩나물에다가 깨끗한 물만 부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럼 무공해 콩나물입니다. 뭘 많이 보태야지만 무공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적으로 생겨난 대로 그르면 됩니다. 소에다가 사료를 먹이는 것입니까? 소는 옛날부터 풀을 먹고 자라는 것이고 호랑이는 고기를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랑이가 풀을 먹고 자라면 그것이 호랑이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냥 그대로 순수한 것을 먹으면 그러면 순수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는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무공해 말씀은 어디에 가서 먹습니까?” 당신이 찾아보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순수함을 유지하며 변함없이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은혜의 말씀에 깊이 붙들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에 익숙해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힌 채로 살아가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진짜 저를 포함해서 정말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좀 진실한 신앙을 보고 싶습니다. 거품이 가득찬 가식에 찬 신앙이 아니라 좀 진실한 신앙, 정직한 신앙, 그리고 가식과 외식을 벗어던진 진실하고 그런 깨끗한 신앙을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가식으로 가득찬 신자가 되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짓과 허위로 가득차고 잘난체 하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하고 깨끗하고 순수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 소원하고 바라는 바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참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이 정말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강력한 은혜에 붙잡힐 때에만 그런 순수한 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화: 주님을 믿고 얼마 안 되어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담임 목사님이 주일 학 교 어린이들을 맡아달라는 말씀에 자신의 부족함에 어떻게 영혼들을 섬길 수가 있을까 하 며 한 주간을 두렵고 떨린 마음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이야기)
그것이 곧 무엇인가 하면 순수입니다. 그것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왜 우리 속에 있는 이 악하고 태만한 성품이 처음에 가르칠 때는 두렵고 떨림으로 가르쳤는데 나중에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공과책을 읽으면서 갑니다. 이것은 이런 이야기구나, 벌써 몇 년째 울거먹은 이야긴데 하고 가서 애들에게 들어보라고 하면서 원고도 없이 너무 잘합니다. 그런데 정말 꼭 필요한 그 순수함이 너무나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순수함을 유지하면서 우리들이 주님을 섬기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오직 하나 이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깊이 사로잡히는 것,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에는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보다도 예수를 많이 믿은 사람도, 오래도록 예수님을 믿고 그리고 하나님 많이 섬기는 사람들이 사실 더 더러워지기가 쉽습니다. 많이 쓴 그릇이 찌그러지지, 쓰지 않은 그릇이 왜 찌그러지겠습니까? 그러니까 많이 쓴 그릇에 때가 끼는 것처럼 하나님이 많이 사용하시면 그렇게 불결해지고 순수함을 잃어버리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순수함을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처음 믿은 사람보다 더 많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자기 자신이 깨어지는 경험들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깨트려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이외에는 우리를 정결하게 하고 깨끗하게 할 자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우리들이 늘 조심하고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런 것입니다. 말씀의 지식은 계속 쌓여가는데 자기 깨트려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자기 깨트려짐의 필요는 하나님을 많이 섬기고 오래도록 믿어온 사람일수록 자기 깨트려짐의 필요성은 더 증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자기 깨트려짐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의 신앙의 순수함, 처음 그 신앙의 순수함을 잃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만 이런 자기 깨트려짐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가 아름다울 때 언제입니까? 여러분, 생각에 언제입니까? 훌륭한 설교로 수많은 사람을 울릴 때도 아름답지만 아무도 없는 교회당에 홀로 앉아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깨트려질 때 목사도 아니고 설교자도 아니고 큰 능력을 받은 사람도 아니고 성경말씀을 해박하게 알고 있는 지식의 대가도 아닙니다. 약점과 결점 투성이 있는 하나님 앞에 한 마리의 연약한 양으로서 자기 자신이 깨트려질 때, 그때가 위대한 강단에 섰을 때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목회자가 그렇다면 성도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 갈채를 받고 높임을 받을 때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정말 오래도록 주님을 믿고 그리고 일평생을 주님만을 위해서 살아왔는 데도 여전히 자기 깨어짐의 삶이 있을 때 그것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누가 저에게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이 세상에서 만난 장로님 가운데 가장 훌륭한 분이 누구입니까?”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 대답은 내가 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한가지 경험은 있습니다. 그것은 언젠가 한번 어느 교회에 수련회에 갔는데 나이가 70이 다 된 장로님이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그렇게 젊고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들은 대다수가 멀뚱멀뚱하고 있는데 그 머리가 히끗히끗한 노인네가 맨 뒷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한없이 통곡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죽인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그것이 순수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그 은혜의 말씀이 그 사람을 붙잡았기 때문에 이렇게 시종일관 순수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사람이 얼마나 훌륭한 인생을 살았는지는 업적에 위해서만 평가되는 것은 아닙니다. 난 한사람의 인생의 그 아름다움과 순수의 여분은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까지 그가 성령으로 시작한 것을 육체로 마치지 아니하고 주님의 그 은혜의 세계, 하나님의 그 은혜의 말씀 앞에서 자기 깨어짐이 있는 산 신앙을 가지고 산 사람이라면 그는 순수한 신앙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생을 살아온 사람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빕니다.
이어서 사도는 이제 자기의 본을 받아서 너희도 이런 삶을 살아라 그렇게 말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가페의 삶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그 교회 교인들에게 두 가지를 깊이 당부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진리에 붙잡힌 삶,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힌 삶을 그들에게 바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자들을 돕고....” 그랬는데 여기서 “약한 자”라고 하는 것은 희랍어 상으로 보면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힘이 없어서 연약한 사람, 혹은 병든 사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지식이 매우 결핍되어 있는 사람도 약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믿음이 굳세지 못해서 영적으로 어린 사람도 약한 사람으로 표현됩니다.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미입니다. 연약하다는 말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하셨던 중요한 세 가지 삼중 사역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시는 일이었고, 둘째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혹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을 가르치시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연약한 자들을 굳세게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병든 자들은 고치고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믿음을 주시고 가난한 자들도 연약한 자들로 묘사되었는데 그들에게 쓸 것을 주시고 먹여주시고 지적으로 매우 연약하여 부족한 사람들에게 잘 일러주어서 그들을 지식쪽으로 굳세게 하는 일들도 예수님께서 하시던 섬김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살았던 그 순수한 삶, 그러면서 자신이 행했던 모든 섬김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전수받은 것이오 따라서 자기가 떠나고 없는 때에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전수하고 싶어 하는 이 섬김도 역시 자신이 전수해주기는 하지만 원래 그것을 전수해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생활 이상에 아무 것도 없는 그런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할 때에는 사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사명은 무슨 사명, “사명” 그러면 그것은 교회에서 주는 생활비로 살아가는 목사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자신들은 그 사명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제일 하기 좋은 말이, ‘아니 뭐 우리들도 이렇게 말씀대로 그렇게까지 살아야 됩니까?’ 그 사람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목사에게 준 말씀도 아니고 선교사에게 준 말씀도 아니라 교회에서 월급을 받고 살아가는 생활비를 받는 일꾼을 향해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는 사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납니다. 그리고 이제 그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은혜를 받으면서 주님의 그 말씀에 소중함을 깨닫고 그 진리에 깊이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감동을 받는 그 순간은 마치 캄캄한 어두움 속으로 들어오는 한줄기 빛을 보는 경험과 같아서 그래서 더 많은 빛을 보고 싶어하는 갈망들이 생겨나서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전에 희미하게 보이거나 혹은 전혀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이제는 선명하게 보게 됩니다.
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셔야 되었는지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죽음이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하며 그 사랑의 감격하는 일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큰 사랑,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자기와 같이 쓸모없는 자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아가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놀라운 변화가 한 가지 일어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명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이 사명은 꼭 목회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는 것만이 사명이 아니라 자기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독특한 임무가 자신에게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은혜의 말씀이 붙잡히기 전까지는 그저 아무렇게나 살았습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죄악된 세상을 방황할 때에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죽을 험한 세상이
왜 이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예전에 먹고 마시던 이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지 모릅니다. 천국과 지옥도 몰랐습니다. 하루하루의 인생에 즐거움과 행복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를 위해서 죽으신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 그 사랑을 증거해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깊이 감동을 받습니다. 어둡던 눈이 뜨여지고 캄캄한 그 어두운 마음 속에 찬란한 복음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때 비로소 자기가 왜 창조되었는지 왜 하나님이 이 문제가 많은 가정에서 고통이 많은 이 시대에 여기에 태어나 살게 하셨는지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자기가 아니면 누구가 대신해줄 수 없는 커다란 임무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명감입니다.
가족들에게 눈을 뜨고 나니까 그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불쌍한 가족들에게 이 사랑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주님을 모르면서 어둠 속에 살아가고 있을 때에 자기가 경험했던 깊은 고통과 아픔을 상기하면서 주님을 깊이 만나지 못했을 때에는 느낄 수 없었던 강한 의무감을 사람들을 향해서 느끼는 것입니다. ‘저 연약한 영혼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저 고통하는 지체를 위해서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 현저히 부족해서 어떤 변화된 삶을 기대할 수도 없는 저 사람들에게 내가 무엇을 베풀어줄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마음 속에 아주 강한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수고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이 도움을 주라고 주님이 자기를 여기에 아직 살게 하시고 있다라고 하는 인생에 대한 생각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최고의 보람은 바로 이런 사명을 위해서 쓰임을 받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임무감은 고통스러운 임무감이 아니라 즐겁고 기쁜 의무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임무를 완수하고 수행하므로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자들을 돕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연약한 사람이었을 때, 지금도 연약하지만 지금보다 현저하게 더 연약했을 때 여러분 주위에는 여러분을 섬기려고 하는 주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신앙적으로 연약한 사람이었을 때 목회자를 얼마나 무시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말씀을 들고 와서 여러분들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하찮게 취급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도와주고 여러분들에게 뭔가 베풀어주기 위해서 굽신거리는 사람들 앞에 얼마나 거들먹 거렸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려운 것입니다. 연약한 자를 돕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왜 이 세상에서 그렇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까? 만약에 그 분이 왕궁에 있는 사람들과 교분을 가지고 고위 성직자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면서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사셨더라면 세상이 그 분을 그렇게 멸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분이 만약에 왕족 중에 한분으로 태어나셨다면, 그리고 평민들이 접할 수 없는 고귀한 삶을 살았더라면 사람들에게 그렇게 멸시를 받으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 멸시를 받으십니까?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찌 쓰셨는가
채찍에 피흘리시니 누가 죄값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멸시를 받으신 것은 바로 길잃은 양처럼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아무 도와줄 사람이 없는 무력해진 연약한 인간들을 위해서 사신 생애였기 때문에 그 분이 그렇게 멸시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왕족들이 아니라 귀족들이 아니라 권세있는 자들이 아니라 잃어버린 양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곁에는 늘 지적으로 연약한 사람, 육신적으로 병든 사람,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허약한 사람, 손을 붙들어 일으켜 세워주지 않으면 홀로 설 수 없는 피골이 상접한 그런 연약한 사람들로 둘러 쌓인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바로 그렇게 연약한 우리들을 눈물과 땀과 피로 섬기시면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부요한 자들에게는 멸시를 받으셨고 세상에 존귀한 자들에게는 하찮게 여김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연약한 자들을 섬기던 그 섬김은 지금도 그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안 우리들을 통해서 계승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인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에 사로잡힌 영성입니다. 그리고 참된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힌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치열한 삶의 현장에 잇대인 영성이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엔조이하는 영성이 아닙니다. 여기 저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줏어듣고 그리고 그것들을 지적으로 줏어모아서 하나님의 지식이 심히 허약한 사람들에게 마치 자비와 은전을 베풀 듯이 하나씩 거드름을 피면서 나누어주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신비한 신앙의 세계를 많이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삼층천에까지 다녀온 신령한 경험을 한 사람이었고 그가 경험한 신령한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것을 말했다가는 듣는 사람들이 수많은 억측을 가질 정도로 그런 신비한 은혜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신비주위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신비한 경험의 영성은 단지 신비한 경험 자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에 잇대어 있는 영성이기 때문입니다. 삶과 분리된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는 영적인 삶,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피흘리기까지 분투하기를 가로막는 경건이라는 밀폐된 공간 안에 머물러있는 신앙 생활, 이런 모든 것은 거짓입니다.
주님이 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왜 짐승과 같은 우리들을 깨닫게 하셔서 광할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지로 데려가십니까?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말씀에 동산에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 사랑과 은혜의 말씀에 맛보게 하시고 우리의 경험을 풍부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단지 그 은혜의 말씀을 즐기게 하시고 그 은혜의 말씀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서 우월감을 갖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그 은혜의 말씀의 세계속으로 데려가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큰 은혜의 말씀에 감화를 받고 그 말씀을 통해서 흘러들어오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품의 달콤함에 잠길 때 그때 벌써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행복할 때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으로부터 들려오는 아름다운 속삭임을 들을 때보다도 행복한 때가 언제였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주시기가지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시고 우리 또한 그 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안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성도들 속에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주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주시고 그 말씀으로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때라고 하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주님의 큰 은혜의 말씀, 사랑의 말씀에 맛을 알고 그 진리를 통해 주님의 인격과 만나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면 계속해서 그 은혜의 세계 속에 머물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전부이기를 원합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들이 둘 사이에 뜨거운 인격적인 사랑을 경험할 때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고 싶어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은혜의 교감을 말씀의 은혜를 통해 누리게 될 때에 그런 소원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진정으로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힌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같이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의 경험하기는 쉽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행복합니다. 마치 요한에게 천사가 하나님의 말씀의 두루마리를주면서 이것을 먹으라 할 때에 그것을 씹었더니 입에서 너무 달콤했습니다. 그러나 배속으로 내려가니 쑥처럼 썼던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맛보고 감화를 받고 그 사랑의 감격하고 나같은 죄인을 버리지 않고 아직까지도 고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성품에 접할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단지 눈물을 흘리면 됩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이 그 은혜와 함께 들어온 사명을 따라서 살기 위해서는 피흘리는 삶이 필요합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깊이 경험하면서도 치열한 삶의 현장에 아가페의 사랑으로 헌신하며 살기를 거절하는 그는 새로운 형태의 신비주의자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껏 우리의 신앙 생활이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찰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신앙의 세계와 삶의 세계가 한결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강력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끼면서 죄와 슬픔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성결하게 진실되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서 영혼을 섬기고 약한 자들을 붙들어주는 심부름꾼으로서 충성스럽게 사는 것이 그 말씀의 은혜에 부합하는 삶이라고 하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여러분들이 이런 황당한 경험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어느 날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살다가 하나님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눈물을 펑펑 쏟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날도 그랬습니다. 다음 주에도 또 그랬습니다. 그 다음 주에도 또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생각합니다. 이런 놀라운 말씀의 기쁨과 하나님의 말씀의 감동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간 뒤에 아주 놀라운 자신을 발견하며 황당해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주위 사람들은 자기가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감동을 받고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혔던 것 같은 경험을 여전히 하고 있는데 자신은 이상하게 마음이 싸늘하게 식고 처음 경험했던 그 말씀에 강력한 은혜에 경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쁜 사람들은 그때에 이런 강력한 말씀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목사가 설교 거리가 다 떨어졌기 때문에 매일 똑같은 이야기를 하니까 감동이 사라졌으니까 저 사람이 책임을 져야지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덜 나쁜 사람들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랬더니 옆에서 누가 하는 말이 죄는 은혜를 죽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의 은혜와 감동을 받은 이후로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나 생각했더니 옛날에는 많이 지었는데 은혜를 받은 다음부터는 그렇게 괄목할 만한 큰 죄를 진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혼돈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왜그럴까? 실제로 저는 이런 장애에 걸려서 허우적거린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 분들은 본인 스스로가 신앙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경우에 십중팔구는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이 문제 때문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새롭게 말씀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실천하는 순종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어떤 때에는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A라는 문제에 대해서 강력하게 도전하실 수가 있고 어떤 때에는 B라는 문제에 대해서 다소 약하게 도전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것이든지 간에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뜻이라고 생각하고 깨달음이 오고 나면 그 다음에는 즉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지식, 마음을 다 동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보여주신 그 뜻에 순종하며 살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실천을 하면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더 주시려니와 혹시 완벽하게 실천을 못하고 할려고 몸부림치다가 주저앉는다고 할지라도 일단은 실천하는 순종으로 가야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펑펑 우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감격이 육개월을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견고해질 수 없고 그들은 결코 거룩해 하심을 입은 자들 가운데 기업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 속에서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은혜의 말씀으로 강하게 감화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나도 너희들을 이렇게 감동시킬 수 있다라고 시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와 같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신령한 은혜의 말씀으로 감화시켜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려고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강력한 감화를 통해서 주님의 진리의 말씀이 없었을 때에는 고칠 수 없었던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고치고 그래서 우리들이 예전의 살지 않았던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사명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의 삶을 오늘 이 성경에서 뭐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연약한 자들을 돕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빚졌으면 그러면 그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은혜를 받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로서 고백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연약한 자들을 돕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계실 때 사셨던 삶입니다.
오늘 아침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우리 예수님이 아직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아니하시고 우리들 가운데 아직 살아계시다면 주님이 어떠한 삶을 사셨을까요? 우리 주님이 아직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아니하시고 우리들 가운데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을 섬기셨다면 어떤 삶을 사셨을까요?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이상한 지팡이를 들고 무슨 도사처럼 그렇게 살지 않으셨을까요? 평범하게 그 시대의 사람들 가운데 한사람의 모습으로 사셨을 것입니다. 머리도 그렇게 기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성경에 나와 있는 데로 사셨을 것입니다.
지식이 없어서 매우 연약한 자들에게 힘닿는 데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가지고 그분 자신이 진리를 가르쳤을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사셨을 것입니다.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주린 자는 먹이시고,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 아파하는 자들은 싸매시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며 사셨을 것입니다. 바로 그 삶을 우리보고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는 바로 우리에게 이런 삶을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계승하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계승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더 크고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붙들려 산다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붙들려 주님의 그 은혜가 없었더라면 살 수 없는 아가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서 우리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주님의 이런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도 만약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가 바로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메시아임을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면 나도 지금 그들과 다름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에게 이런 특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나에게 주님이 사랑하시는 연약한 사람임을 알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한사람의 굳센 성도, 그 사람의 발 밑에는 수많은 진실한 성도들의 섬김의 눈물과 피가 배어 있습니다. 우리는 홀로 선 사람들이 아닙니다. 홀로 자라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내가 눈물흘릴 수 없을 정도로 강퍅해졌을 때도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내 이름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려준 섬김이 있었기 때문에 주 앞에 진멸되지 아니하고 오늘도 살아서 좋은 날을 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입고 우리가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도 복이 있다”고 하신 그 말씀을 사도가 상기시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붙잡히지 않았을 때는 그저 우리 자신이 행복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보람이오 가치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우리가 사로잡힌 이후에는 이제 우리를 움직이는 진정한 삶의 동기가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사람입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그 사랑에 아직 감동받지 못한 사람들, 감동을 받았어도 진실한 삶으로 나아가기까지 견고해지지 못한 연약한 지체들, 그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뿌리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은혜의 말씀으로 붙잡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은혜가 비록 적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고통받는 내 주위에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평화를 전하고 사랑을 전하는 도구로서 섬기며 살려고 할 때에 우리들에게 주신 그 은혜의 말씀의 깨달음은 증폭되고 더 많이 하나님께서 진리의 빛가운데 살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만약에 우리 주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내려오신다면 그때처럼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주님의 백성들은 많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도 압도적으로 주님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부르지만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로 신앙 생활을 대신하고 있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약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이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섬김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질병에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성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깊이 붙잡힌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주님이 우셨던 그 사람들을 위해서 울고 주님이 죽으셨던 그 사람들을 위해서 죽는 그것이 바로 그런 삶이오 그런 영성입니다.
보십시오. 그동안 우리는 (?)적인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적은 무리들이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우리가 주님의 도구가 되어 세우는 이 교회가 이 땅에 계속 서 있을 수가 있을까, 두려운과 떨림 속에서 교회를 시작한지가 어그제 같은데 일곱 개의 성산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들이 그 역사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900여명이 넘는 많은 성도들이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한걸음만 밖으로 나가면 우리가 얼마나 소수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아직까지도 주님은 교회밖에서 통곡 중이십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은 너무나 많고 밭은 희어지게 되었는데 추수할 일꾼들이 너무나 적습니다. 주님이 거두시는 마지막 때는 가까워 왔는데 밖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가는데 일꾼들은 너무 적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주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붙잡힌 적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이러한 통곡의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그렇게 주님 없이 죽어가는 수많은 추수되기 위해서 낫을 기다리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형편은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제가 꽃도 좋아하고 나무도 좋아합니다. 제 방에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방입니다. 그래서 꽃이든지 나무든지 사다 놓으면 두달이면 죽습니다. 애써 보지만 죽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양재동에 가서 나무를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 갖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가 얼마나 잘 자라는지 모릅니다. 부쩍부쩍 컸습니다. 그리고 잎파리도 어쩜 그렇게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렇게 나무가 쑥쑥 자랍니다. 물을 며칠 안 주었더니 잎사귀가 마르는 것 같아서 물을 잔뜩 주고 그리고 이제 잎파리가 몇 개나 되는지 세어봤습니다. 그런데 가지마다 물이 쭉 올라와서 잎파리들이 시퍼렇게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잎파리도 어쩜 그렇게 반짝반짝 합니다. 너무나 좋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 문을 열고 들어오면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이 그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가지를 하나씩 만지다가 보니까 손가락만한 가지 하나가 옆으로 올랐왔는데 다른 가지에는 전부다 잎파리가 매달렸는데 그 가지는 이상하게 잎파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만져보니까 바짝 말랐는데 툭 치니까 우지직 꺽어졌습니다. 손으로 만져보니까 그냥 부서졌습니다. 그래서 그 가지를 손에 들고 생각했습니다. 나무 전체가 이렇게 물을 먹고 쑥쑥 자라고 시퍼런 잎을 내고 그리고 그 나무 가지마다 다시 자라면 잎파리에 새싹들이 맺혔는데 어떻게 너는 이런가, 꺽어져서 부스러지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지상에 교회가 은혜롭다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만 모두 은혜를 받습니까, 신앙이 좋다고 그러는데 모두 신앙이 좋은가요, 말씀이 살아있다는 교회가 있다는데 모두 살아있는 그 말씀을 먹습니까, 인격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교회가 있다고 하는데 모두 인격적입니까, 주님을 닮아가기를 원하는 교회가 있어도 모두 닮아갑니까, 모두 강합니까, 모두 훌륭합니까, 모두 아름답습니까, 모두 열매를 맺습니까? 아닙니다. 지상에는 그런 교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 맞다. 물론 눈을 들어서 보면 여기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받는 성도, 저기에도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지체, 저기에도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섬기는 아름다운 지체, 저기도 변화받는 가정이 있지만 그러나 그 무성한 가지섶을 헤치면서 가만히 보면 신음하는 마른 가지들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교회는 북적대는 군중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교회가 아니라 그렇게 섶을 헤치면서 연약한 지체,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도 이상하게 병적으로 소외된 지체들 하나하나 더듬고 그리고 그들을 위해 주님의 사랑으로 울고 그들을 위해 아파하고 그들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그리고 그들을 무조건 사랑해주는 그것이 참다운 영성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바로 주님이 하시려고 하신 그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은혜로 이렇게 연약한 자들을 돌보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족들도 여러분 자신이 더 깊이 낮아지고 엎드려져서 주께 하듯이 섬기고 그리고 연약한 지체들을 못났다고 타박하는 대신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그 속에서 바로 그런 지체를 위해서 못박혀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하고 내게 이런 놀라운 말씀에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을 섬기면서 수고하고 고난받게 하시려고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그런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우리의 진실된 섬김으로 이어지고 그 섬기기 위해서 분투하며 애쓴 과정에서 이 신앙의 아름다운 비밀들을 터득해가는 교회가, 그런 신앙의 사람이 진정으로 은혜의 말씀에 붙잡힌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말씀에 붙들린 삶②: 아낌없이 베푸는 삶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下)
눈물이 가득 배인 이 유언적 설교 끝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님의 한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신약을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 구절은 논란이 되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서 어디를 뒤져 보아도 이런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마 사도 바울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이 하신 복음서의 말씀의 정신을 뭉둥그려서 이런 말을 만들어냈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나와 있는 “친히”라고 하신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뭔가 뭉둥그려서 자기가 만들어낸 말이라기 보다는 분명히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온 어떤 말씀이라는 확신과 보증을 가지고 인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약 학자들은 틀림없이 아마 사도 바울이 이 설교를 할 때 쯤에는 기록, 혹은 구전을 통해서 내려오는 예수님의 어록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록이 아마 교회를 교화하고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는데 사도들에 의해서 자주 인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것이 많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까 틀림없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인용된 말씀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남겨놓으신 말씀가운데 일부일 것이고 그렇다면 이런 추측의 가능성도 우리들이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어록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는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모두 사라졌고 분명한 사실 하나는 성령의 감동된 성경의 기록자가 이 사도 바울의 설교를 여기에 기록하면서 예수님이 남기신 말씀이 여기에서 살아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므로서 이제 자신의 유언적인 설교를 마치고 있습니다.
여기 짧게 인용된 예수님의 어록과 그리고 사도 바울의 마치는 말에서 우리는 크게 세 가지의 진리를 오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힌 자의 삶은 기억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곧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있다”하신 사도 바울의 말은 당시 많은 사람들도 알고 있는 예수님의 어록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자기는 비록 이 교회를 버려두고 순교의 길을 떠나지만 이제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보십시오. 은혜의 말씀에 붙들린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은혜의 말씀에 붙잡히지 않은 사람들보다 많은 성경의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붙들려서 오래도록 살아가노라면 그렇게 말씀에 붙들려 살지 못하는 사람보다 세월이 흐르면 풍부한 성경의 지식, 비할데 없이 정확한 진리를 아는 지식들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만, 일시적으로는 은혜의 말씀에 붙들린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절대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보다 가장 많이 성경을 알고 있다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붙들린 사람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신앙 인격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권위있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상기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특별히 구약을 읽으면서 “기억하라”는 명령이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특별히 선지서는 물론이거니와 모세가 남긴 오경 가운데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거듭된 당부인 신명기에는 “잊지말라, 기억하라”고 하는 이 명령이 지루할 정도로 수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늘 새로운 정보만을 찾아가는 지식의 여행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깨달아서 우리가 아는 신앙 지식에 지평을 계속 확장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이미 알고는 있지만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는 진리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기억하므로서 새롭게 상기시키고 불이 들어오게 할 사실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셔야 합니다. 머리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예전에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게 만들었던 그 진리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하고 그 기억을 되살려서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힘쓰는 것이 이것이 성도의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붙잡힌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좀 나을시스트(?)같은 그 생각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저는 마음이 답답해 오면 읽는 책들이 거의 고정되어 있습니다. 기도에 관해서는 이엠 바운즈나, 토레이나 이런 분들의 글을 수없이 읽었습니다. 어떤 부분들은 거의 외울 정도로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끊임없이 다시 감동을 줍니다. 한번 읽었기 때문에 감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번 읽었기 때문에 더 깊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책이나 이런 것들은 기도에 있어서 끊임없이 기억해야 할 진리의 모습들을 담고 있습니다. 영혼에 대한 열정이 식어질때면 오스왈드 스미스의 책같은 것들을 읽으면 구령의 열정이 다시 생깁니다. 그 책에 있는 지식의 내용이 제 머리 속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책보다 더 뛰어난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어도 다시 읽으면서 그 다음에는 알고 있는 이 지식에 다시금 불이 들어오면서 그렇게 살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됩니다.
설교자로서 마음이 식어지는 것 같으면 유명한 설교자들이 기록한 설교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읽습니다. 심지어는 제가 쓴 책들을 다시 읽으면 마음 속에 다시 감동이 살아나고 내가 이미 기록한 데로 살고 싶다라고 하는 신령한 욕망이 마음 속에서 솟구칩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억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힘이오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 그래서 기억할 때마다 새롭게 새롭게 감동을 받으며 그것으로서 거룩한 삶의 원동력으로 삼는 것, 이것이 은혜의 말씀에 붙들린 자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자기의 교인들에게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한번 듣고 잊어버리는 말씀이 아니라 설교도 다시 듣고 성경도 다시 읽고 책도 다시 읽고 이미 받았던 신앙의 은혜들도 다시 나누고 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굳게 붙들린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험악한 세상을 이기면서 하늘의 신령한 힘을 공급받으며 살아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사셔서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복이 있다”라고 할 때의 이 “복”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복이 무엇인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이 속한 그리스도인, 혹은 거듭나지 못한 자연적인 사람과 신령한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간 사람의 차이는 행복에 대한 관점에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복은 희랍어로 “마까리오스”라고 하는 복인데 이것은 성도들이 받는 복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인 세상의 축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받는 행복을 말합니다. 이 마까리오스가 히브리어로 돌아가면 “에쉐르”라는 복이 되는데 그 에쉐르는 바로 시편 1편에 “복되도다 이러한 사람이여” 그리고 나오는 그 복과 일치하는 복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복은 지극히 현세적이고 육신적이며 감각적이고 이기적입니다. 그들은 고통과 행복이 함께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언제나 육신적으로 최고의 만족한 상태에 있고 근심과 염려가 없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령한 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복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애통하는 자가 어떻게 복이 있을 수 있습니까? 강한 자에게 짓밟히며 살아가는 온유한 사람이 어떻게 복될 수 있습니까?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으며 의를 위해 핍박을 받고 고통을 받아 죽음의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복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악한 말을 듣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그렇게 고생을 하면 나중에 행복해질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복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주 안에서 그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보상도 주어질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그들이 복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그런 가난함, 그런 애통함, 그런 온유함, 그런 주리고 목마름, 그런 박해받는 것, 많은 사람들에게 악한 말을 듣는 이 모든 것 가운데서도 그들이 행복하고 복될 수 있는 이유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 복이 신령한 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복 한가운데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붙들려 산 사람들은 결코 개 돼지처럼 배부르고 만족하면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는 그런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경험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행복하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배불리 먹고 넉넉한 재물과 좋은 평판을 얻으면서 세상의 복을 누리던 때, 그때가 여러분들이 가장 행복하던 때가 아니라는 사실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경건한 믿음의 백성들이 그토록 하나님 앞에 받고 싶어하고 누리고 싶어했던 그 복은 바로 그런 의미의 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복은 하나님 자신이 느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무엇인가 흘러나온 그런 것으로 가득찬 상태, 그것이 복이었습니다. 마치 도덕적인 삶이 거룩함의 결과인 것 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 그 하나님께 흠뻑 사랑을 받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복 주시고 보호하시는 그런 의미의 축복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진정한 마까리오스의 복이지 하나님과의 관계는 상관없이 육신적으로만 만족에 상태를 누리는 것,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점점 마약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데 아마 점점 더 심해지리라고 생각됩니다. 이제는 여자 고등학교 화장실에서도 주사기들이 발견된다고 하니까 심각한 상황에 도달한 것입니다. 마약을 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저는 경험해보지 않았습니다만 그렇게 마약을 하고 최고로 만족한 상태가 되어서 혼절한 사람처럼 헤매는 그 사람을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올 때 그는 세상적인 행복의 관념과도 작별한 사람입니다. 이제 그는 단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누리고 소유하므로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물론 여전히 그에게는 소유가 필요합니다. 일용할 양식도 필요하고 품위를 유지하게 해주는 물질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지만 그러나 사람도 필요합니다. 따뜻한 가족의 관계도,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과의 관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아온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하는 옛 사상과는 작별한 사람들입니다.
(예화: 벧엘 성서를 쓰신 젊은 목사님이 일약 교계에 스타가 되어 큰 교회에서 좋은 대우로 모시 며 아름다운 집을 지어 성경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았는데, 그 목사님이 집 옆에 헛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시는데 그 이유는 그 분이 어린시절에 너무 가난해서 목동 생활을 하시며 헛간에서 지내다가 주님을 만나 뒤늦게 사역자의 길을 가게 되시고 자신의 형편이 많이 나아졌어도 늘 예전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목동 시절에 헛간에서 주님과 가까 웠던 은혜의 생활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헛간을 지었다는 이야기)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제는 얼마나 일이 많아졌는지 새벽기도 후에 내려가면 일들이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습니다. 월요일에는 어떤 때는 4시 반에도 세수를 하고 7시에도 세수를 합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정말 옛날보다 행복한가 교회가 커지고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고 넉넉해진다고 해서 정말 행복한가’ 그리스도인의 참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외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우리들이 그런 것 있잖아요. 어떻게 비유하면 좋을까요. 이런 비유가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어림도 없습니다. 제가 여러 해 전에 어느 국민학교를 갔는데 선생님이 ‘야, 너 이것좀 가지고 오너라’ 그러니까 그애가 ‘싫어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참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옛날에는 선생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시켜주면 걸레라도 빨아오라고 시키면 가슴이 두근두근 했습니다. 날보고 이 걸레를 빨아오라니, 선생님의 거룩한 책상을 닦는 이 걸레를 날보고 빨아오라니. 그것이 늘 마음에 감동이 되었는데 그런 선생님이 특별히 나에게 뭘 조금 주셨다. 가난한 그 때 옥수수로 만든 그 빵을 주면서 ‘너 이것을 하나 더 먹어라’ 그러면 그것을 통해서 빵 반쪽 때문에 너무 신나는게 아니라 그것이 없어도 사는데 그것을 나를 특별히 주실 때 선생님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다른 애들은 알 수 없는 특별한 관계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아주 비유가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이 다 쓸데없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좋습니다. 너무 좋고 기쁜 것은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관계를 생각나게 하는 한도 안에서 행복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우리의 사역에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같은 사람들을 들어서 사용하시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고 하나님 보내주신 영혼들을 한명이라도 잘 돌보아야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역도 귀하고 우리의 축복도 귀하고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이 소중한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없이 우리에게 온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축복의 한 가운데에 계시기 때문에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그것을 볼 적마다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곤고하고 어려운 시절에 우리를 구해주셔서 이만큼 먹고 살게 해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번영 한복판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의 건강 그 한복판에 하나님의 복주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의 성취 그 한가운데 주님이 인정해주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것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성도의 진정한 복입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눈에 보이는 그런 소유나 눈에 보이는 보상과 하나님 자신의 존재가 충돌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전자를 버리고 후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취하는 사람들이 될 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는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붙들린 성도들은 이처럼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없는 성취와 번영보다는 주님이 있는 실패를 오히려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애통하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복되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가난의 이유가 주님 때문입니다. 그 애통함의 이유가 우리 하나님 때문입니다. 강한 자에게 짓밟히는 것같이 살아가는 그 온유함의 한복판에 우리 주님이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복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붙들린 사람들이 찾고 추구하며 살아가야 할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물질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욕망, 성공의 집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종살이하는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귀담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행복의 이유이고 하나님의 말씀 은혜의 진리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신령한 의미에서 행복을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순간에 사라지는 이 세상의 삶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잇대이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사람들 같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이 하나님 때문에 누렸던 행복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없는 육신의 번영보다는 주님과 함께 하는 고난을 더 복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래서 만져지고 붙잡히고 실제로 소유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뛰어나게 가치있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사람, 그런 사람이 정말 하나님 앞에 복된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의 진리에 굳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바로 이처럼 행복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분투하나 그러나 그것들이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직업을 가졌으면 그 직업을 열심히 감당하고 사업을 하건 직장을 다니건 자녀를 기르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지상에서 무엇을 하다가 왔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섬기다가 왔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깊이 공경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떼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산 모든 사람들이 장수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때로는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게 하셔서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변화무쌍한 이 세상보다 훨씬 더 의지할만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을 신실하게 신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런 행복을 말씀을 붙들고 주님을 공경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신령한 의미에서의 행복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하는 이 신념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약한 자 같으나 강한 자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신령한 복을 찾아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또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유언적인 설교를 여기에 남기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있게 인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이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사도 바울은 지상에 존재했던 성도들 가운데 최고의 모델일 것이고 그리스도를 가장 근접하게 닮은 삶을 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연약한 한 사람에 불과했을 것이지만 동시에 그는 우리들 가운데 뛰어난 성도로서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해박하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리의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더더욱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기보다는 자기의 왜곡된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신념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하나는 신학적인 편견이고 하나는 심리적인 편견이었습니다. 신학적인 편견은 나사렛에서 태어나서 십자가에 매달린 그 청년이 메시아일 리가 없다는 편견이었고 심리적인 편견은 유대인들 이외에는 나머지는 다 쓰레기다라는 인종적인 편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탐구하고 그것을 가르키는 것이 자신의 업이오 임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붙들려 산 사람이 아니라 신념에 붙들려 산 사람이었고 그 신념은 틀린 신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 분이 그의 마음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그 마음 가운데 오셔서 계속 살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그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은혜의 진리로 그를 지배하게 되자 그는 예전에 살았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집과 편견은 부서지고 주님의 삶을 흉내내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삶은 사랑이라는 말로 집약이 되었고 그 사랑은 구체적으로 자기를 다 주신 삶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기 위해서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셔야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 영광을 포기하셔야 했습니다. 자기가 만든 세상에 오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던 것도 결국은 주시기 위해서 받으신 고난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신 본분이 이 세상에서 왕노릇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버리셔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이 가지시고 더 많이 누리실수록 사람들은 머리를 조아렸을 것이고 경배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로마의 황제의 가문에서 황태자로 태어나셨다면 창 칼을 들고 어린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사람들이 혈안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가진 자들이 대접을 받고 더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영광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몸소 보여주신 생애는 자기를 주심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업된 삶을 택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여 그 칠흙같은 유대교의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아낌없이 주시는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랑을 통해서만이 아니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한없이 하나님 앞에 감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모든 자기를 버리면서 살게 하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희생적인 삶이 하나님의 은혜의 빚진 자라고 하는 자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신학생들을 위한 헌금을 했습니다만 아직까지도 가난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물질로 말미암은 고통도 있고 가난도 있고 굶주림도 있습니다. 제가 전도사 생활을 할 때 하여튼 참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 속에는 항상 자신에 대한 경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고생한 사람들의 결점이 무엇인가 하면 다른 사람들도 다 자기처럼 고생을 해야지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모시고 있던 목사님은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신도 고생을 억수로 많이 했기 때문에 그 분이 표현을 잘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악의가 있는 표현은 아닌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애야, 전도사 때는 학대를 좀 받아야지만 사람이 된단다.” 그런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 저 자신이 많이 경계합니다.
(예화: 겨울이 오면 생각나는 일이 있는데, 사모님이 해산을 하면서 진통을 겪다가 결국은 수술을 받게 되셨는데 어느 집사님이 4만원의 돈을 주셔서 수술을 했다는 이야기)
만약에 그때 내가 누구에게 몇 만원을 꾸었다가 갚았다면 기억도 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은혜의 빚, 사랑의 빚이라고 하는 것은 법률상의 빚보다도 우리에게 호소하는 힘이 훨씬 큽니다. 그래서 늘 빚진 마음입니다. 어제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빚진 마음, 어떻게 좀 갚아야 할텐데, 돈을 들고 가서 주면 받을 리가 없고 어떻게 해야지 되나. 그리고 생각이 납니다. 곤고하고 힘들던 시절에 그 돈 4만원이 15년이 지났는데도 그때의 그 은혜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것이 은혜의 빛이 주는 힘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 자기는 떠나가고 홀로 남겨지는 이 에베소의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받는 자보다는 주는 자의 삶을 살라고 간곡히 부탁할 때에 그런 부채의식을 예수님께 느낀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오늘이 만약에 우리의 생애에 마지막이라고 할 것같으면 가장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좋은 차도 못 타보고 여기서 죽는 구나, 큰 아파트에 한번 살아보지도 못하고 여기서 죽는구나, 이 미모에 시집도 한번 못 가보고 죽는구나. 그것이 아닙니다. 세월이 흘러가고 나이가 들고 육신의 기력이 떨어지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주님께 진 사랑의 빚은 많은데 갚은 날이 별로 없습니다. 살아온 생애가 전부다 이렇게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건만 주님을 위해서 살은 날들이 너무나 적고 은혜는 크게 받았는데 갚은 것은 거의 흔적도 없는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은혜의 빚이, 그 사랑이 빚이 오늘도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물론 그 빚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좀더 주님을 위해서 살고 몸부림친다고 해서 충분히 갚아질 수 있는 그 빚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빚,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사람들은 그냥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대충 살다가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기심으로 똘돌 뭉쳐진 사악한 인간, 남을 위해서 자기의 유익을 손톱만큼 포기하는 것이 손가락을 자르는 것보다도 고통스럽다고 느껴지는 이 철저한 자기 사랑으로 뭉쳐진 아집 덩어리와 같은 우리들이 자기를 버려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고 자기를 허비해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까지 그런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할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분께로부터 진 빚이 얼마나 큰지를 우리 자신들이 자각하지 않는 한 그런 삶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성경에서 기록된 데로 중년에 우리를 데리고 가지 마시고 좀더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하시기를 원하고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에 할 수 있으면 건강하게 살아있기를 우리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빚 때문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빚이 너무 많습니다. 받기만 했지 갚은 적이 별로 없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은혜의 빚을 졌지만 갚은 날이 별로 없고 또 주를 위해 열심히 산 날들이 조금은 있지만 그것도 순수한 동기에서 살았는가 물으면 남는 것이 별로 안 되고 또 그 남는 것이 정말 최선을 다한 삶이냐고 물으면 정말 남는 것이 얼마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겉보기에는 통나무 같아도 다 깎아내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이쑤시개 만큼도 남을까 말까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닙니까?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 첫날부터 마지막 순교가 기다리고 있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발걸음을 옮기기까지 어떻게 살아온 것을 그들이 다 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공중 앞에서나 개인 앞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가르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한 회개와 믿음을 전파하며 그리고 지금은 순교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누가 시켰습니까? 무엇이 시켰습니까? 누가 그에게 그런 인내의 삶을 살라고 명령했고 누가 그에게 그렇게 자기를 죽이는 겸비한 삶을 살아서 영혼들을 섬기라고 누가 명령했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지시하거나 명령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주께로부터 진 은혜의 빚, 자기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죽으신 그 십자가의 사랑의 빚이 그로 하여금 이런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살 삶, 그렇게 살므로서 증인되었던 그 사람이 자신의 생애를 움직였던 우리 주님의 친히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하셨다고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생애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신 생애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주신 은혜에 빚진 삶을 살아가는 중입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이 은혜의 부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우리는 더 많이 은혜를 받기를 원하고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랑에 빚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애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빚덩어리, 하나님의 사랑의 빚덩어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붙들린 사람들은 끊임없이 일생을 다 드려도 갚을 수 없는 은혜의 빚, 일생을 다 바쳐도 청산할 수 없는 이 사랑의 빚,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노력을 통해 그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주님께로부터 그렇게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의 형상을 가진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그렇게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주는 삶을 사는 그것이 자신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로 주시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사람을 섬기게 하시기 위함임을 기억하십시오. 부요한 자들은 물질로 가난한 자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은혜의 빚을 갚는 길입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병든 자들을 위해 섬겨야 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지식이 모자라는 사람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종처럼 섬겨야 합니다. 시간이 있는 사람은 시간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섬겨야 합니다. 주님께로부터 더 많은 깨달음을 받은 사람들은 무지한 사람들이 마치 자신이 주님인 것처럼 생각하며 그들을 하찮게 여기거나 우습게 여기지 말고 겸비하게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물질을 받은 사람들이 적선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배신입니다. 자신에게 도움을 받는 그 가난한 지체는 우리 주님이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축복은 세상이 주는 축복은 그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위에 지배하고 군림하기 위해서 주는 복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은 이렇게 약한 자들을 위해 짐을 지고 곤고한 자를 위해 고통을 나누는 이런 섬김을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눈을 들어서 도처를 보십시오. 어디든지 주님은 계십니다. 다들 오르고 싶어하는 영광의 자리에는 주님이 없지만 내려가기 싫어하는 낮고 천한 자리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연약한 지체들이 있는 그곳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는 혼자 서기에는 너무나 연약한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형상을 나누어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내가 저 사람보다 더 잘 사는 것, 주님의 은혜의 빚이오, 내가 저 사람보다 밝은 진리의 빛가운데 사는 것, 하나님의 사랑의 빚입니다. 저에게는 없는 건강 내게 주시고, 저에게는 섬길 기회가 없는 기회를 내게 주신 것도 은혜의 빚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바로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렇게 베풀고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세워주신 것을 감사하며 자기를 허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끊임없이 은혜의 말씀에 붙들려서 살아가는 삶의 비결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의 실천적인 삶과 어떻게 신비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여러분들이 파악하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말씀에 대한 지식은 허공에 매달린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렇게 끊임없이 주님이 신비한 은혜의 세계 속에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사랑, 그 빚을 부채의식을 가지고 연약한 자들을 섬김에 있어서 자신이 주는 위치에 서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섬기고 자기를 허비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오 주님이 자신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가 진정한 성도요.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번 눈을 들어서 우리 주위를 돌아봅시다. 우리 섬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힌 성도들의 삶은 이처럼 서로 흐르게 만들어주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높은 자들을 낮아지게 하고 낮아진 자들을 높아지게 합니다. 부한 자들을 가난하게 하고 가난한 자들을 부하게 합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섬겨 그들을 지식을 가진 사람들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갑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도성인신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감화,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시고 사람되신 그리스도의 도성인신의 은혜가 우리 마음 속에 끊임없이 역사할 때 복음의 진리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 경험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를 허비하며 약한 자들을 위해서 주의 형상을 가진 곤고한 영혼들을 위해서 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더 큰 은혜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가 삶으로, 삶이 은혜로 흘러들어서 삶과 거룩한 영적 생활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그렇게 주님이 이 땅에 계속 계셨더라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연약한 자들을 위해 살고 싶어하셨던 그 삶을 우리들이 살아 드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유지하며 사는 비결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살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