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201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7월 11일
목 차
1.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창 1:1) 2013.1.13 주일오전 1
2. 주는 나의 하나님(시 118:28) 2013.1.20 주일오전 11
3. 우리를 사람으로 지으심은(엡 2:10) 2013.1.27 주일오전 22
4. 선하신 하나님(시 34:8) 2013.2.3 주일오전 37
5.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롬 3:23-24) 2013.2.17 주일오전 47
6. 그리스도의 지체로 삼으심(엡 4:15-16) 2013.2.24 주일오전 58
7. 교회의 지체로서 자라감(엡 4:14-15) 2013.3.3 주일오전 73
8. 은혜로 승리하는 삶(히 4:16) 2013.3.10 주일오전 88
9. 은혜의 목적을 따라 살아감(빌 1:29) 2013.3.17 주일오전 98
10. 미끄러진 자를 돌이키심(호 5:15-6:1) 2013.4.7 주일오전 107
11. 구원의 은혜를 전파함(벧전 2:9) 2013.4.14 주일오전 116
12. 내가 사랑하는 하늘나라(계21:3-4) 2013.6.16 주일오전 127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1 (2013.01.13 주일오전)
1.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창세기 1장 1절은 구약 성경의 시작일 뿐 아니라, 성경 계시 전체의 시작이고, 이 모든 세계의 시초와 인류 역사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는 이 위대한 선언과 함께 우리는 이 안에서 최소한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과 이 모든 세계가 그 분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 만들어진 이 모든 세계는 그 분의 뜻을 따라 창조되었고, 운행되어진다는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에게 설득하는 대신 성경 맨 앞머리에 하나님과 창조의 세계의 존재 원인을 제시함으로써 나머지 모든 성경의 계시의 기초로 삼습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열광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도 창세기 1장 1절이라고 하는 기초가 없으면 허공에 뜬 계시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수많은 문제에 에워싸이며 이제껏 생존해 왔고, 지금도 인류는 끝없는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수많은 질문의 궁극적 귀착점은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는 질문 속에 그러면 인간은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이 숨어있기 때문이고, 피할 수 없이 인간이 갖는 문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지만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고, 그 행복이 의미 있는 행복일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현실적인 답이 이 두 가지 질문으로부터 추출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기원을 아는 일이 필요했고, 이 두 가지 지식 없이는 어떻게 인생을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의 기술인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지성이 철이 들면서부터 집요하게 철학적인 사유를 통해서 인간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진정으로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해 왔고, 사상과 모든 학문들은 바로 이런 관심사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라고 하는 것에 대한 아주 분명한 답이 없었기 때문에 이 모든 논구들은 항상 파편적일 수밖에 없고, 그리고 불분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II.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신가
많은 문제가 인간들 속에 일어나지만 그 궁극적인 해답은 하나님께 있지 인간에게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십니까?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뒷집 아저씨처럼 생각하고 농담에도 들먹이면서 웃음거리의 소재를 삼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보면 매우 불경한 일이고, 돌로 쳐 죽임을 당해 마땅한 죄였습니다.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면서 늘 이 세상에서 필요한 무엇을 하나님께 늘 구하며 또 응답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그냥 그런 수준에서 우리의 인생의 뒤치다꺼리를 감당해주시는 분, 마음씨 좋은 친정어머니나 혹은 장가 왔지만 본가에 나를 사랑하고 눈에 넣어도 안 아파하는 마음씨 좋은 우리 아버지쯤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공정한 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전에 먼저 그 분이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한 정당한 호칭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A. 하나님에 관한 두 질문
하나님은 그러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에 관한 두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신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은 초월절인 타자성입니다. 즉 하나님은 높고 위대하시며 모든 만물과 이 세계를 초월해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높고 지극한 위엄과 영광, 그리고 그 탁월하심 앞에서 그것을 인식하게 되면 인간은 아주 자신이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자신을 이 우주의 중심으로 삼으며 살아왔던 삶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모욕적인 삶이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신가 하고 물을 때에 이 하나님은 온 세상 모든 만물을 지으셨지만 그 모든 만물보다 지극히 초월하시고 위대하셔서 티끌만큼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의 존재를 그 하나님께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정도의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해서 인간이 하는 많은 일을 대신할 수 있는 로봇을 발명한다고 칩시다. 그 로봇이 아무리 신제품에 신제품을 거듭하고 기술이 개발이 되어 인간과 흡사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어느 순간까지 도달하게 되면 그 기계를 만든 기술자와 동급이 되는 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발달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것은 이것을 개발하고 만들어낸 제작자를 점점 더 높은 분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세계에서 어떤 위대함을 발견하고 특히 인간에게서 아주 어떤 천재적인 위대성을 발견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발견해서 인간을 높이 평가하는 것만큼 그러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분이심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존재의 위대성 앞에서 인간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인간은 경외심에 두려움으로 떨게 되고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처분을 맡여야 하는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부복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첫 번째 반로인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은 누구인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묻는 질문이고, 이것은 결국 피조물들과의 내재적인 관계성을 묻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불변하고 모든 사물위에 초월하신 분이시지만 그래서 이 물질 세계 속에 섞일 수 없는 분이시지만 이 모든 세계와 함께 관계를 맺고 특히 인간과 함께 관계를 맺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속성들이 찬란하게 드러나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진 인격적인 존재인지를 보여주십니다. 비참에 처한 자에게는 긍휼하신 당신의 성품을 보이시고, 그리고 고통 받는 자에게는 위로의 성품을 보이시고, 악을 행하고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정의로운 성품을 보여주십니다. 유한한 사물인 인간에게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고, 끊임없이 변덕스러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사물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관계에 따라서 찬란한 태양빛과 같은 하나님의 존재는 다양한 속성으로 나타나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B. 거룩하신 하나님
성경은 이 하나님에 관한 두 질문을 모두 하나로 통합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제시합니다. 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존재적인 초월성과 도덕적인 완전성입니다. 그래서 이 존재적인 초월성 앞에 서게 될 때 우리 인간은 아주 티끌에 불과하고 인간은 불면은 날아가 버릴 검불에 불과한 아주 가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두려움 속에 주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없이는 살 수 없는 은총을 입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며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것이 신앙에 있어서 경건의 두 번째 요소인 것입니다.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그것이 바로 거룩하심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온 땅과 모든 만물위에 지극히 탁월하셔서 모든 피조물 아무 곳에도 피조물처럼 계시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떠날 수 없는 그 분 안에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특별하신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바로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III. 드넓은 우주와 하나님
A. 우주의 크기를 생각함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작은 땅 덩어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과 공중, 우주 모두를 아우르는 가장 넓은 의미의 피조세계의 표현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오늘 천지라고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드넓은 우주에서 한번 그 우주의 크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우리 인간은 이 무한대로 큰 이 우주의 엄청난 크기 앞에 얼마만한 존재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학자들에게는 우주의 크기를 재는 몇 가지 독특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우주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거리가 약 150억 광년 정도 된다고 봅니다. 1광년은 빛이 1년을 달려간 거리이고, 달까지 걸리는 시간은 1.2초, 1년을 빛이 달려갔을 때 총 거리는 10조km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쉽게 들어오지 않는 숫자입니다. 이런 빛이 150억년을 달려가야 할 거리이니 수학적으로 계산을 하면 1500억조km의 거리인데 이것을 우리가 무슨 수로 머릿속에서 상상을 해 내겠습니까?
이 우주는 어마어마한 크기 못지않게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공간입니다. 매초마다 어마어마한 폭발을 통해 이 우주는 2000km씩 확장되고 있다고 하니 우주 말고 또 밖에 무엇이 있기에 확장 된다는 것이며 그렇게 확장되면 도대체 줄어드는 그것은 무엇이고, 그것이 공간이 아니라면 도대체 우주 밖은 어디이며 그것은 또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아무도 이 모든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해답을 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우리의 눈을 돌려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로 돌아와 봅시다. 인류도 한때에는 이 지구가 세계의 전부라고 믿던 때가 있었습니다마는 그러나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이미 이 세계가 이 모든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주전 3세기 에스토네스라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 시대의 사람입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우연히 망루의 그림자의 길이에 대한 보고가 같은 시간에 지역마다 다르다는 사실에 착안을 해서 그것을 가지고 실험도구를 만들어본 결과 놀랍게도 지구는 둥글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약 2300년 전의 일입니다. 고대로부터 있었던 많은 항해, 대항해의 이 모든 역사들은 바로 이때의 발견을 추측으로 하여 항해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있고, 태양계는 우리 은하계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 은하계는 약 천억 개 내지 이천억 개의 항성들로 이루어져 있고, 칼 세이건의 설명에 의하면 행성까지 포함하면 약 4조개의 별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바로 우리 은하계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 여러분 마음을 부풀게 했던 은하수에 대한 이야기는 그 은하계 안에 있는 별들의 한 집단이 밀도가 매우 높아서 마치 우유를 쏟아놓은 것처럼 흐르기 때문에 그것을 은하수라고 부른 것입니다.
타원형의 쟁반처럼 생긴 우리 은하계는 네 개의 팔이 달린 로봇처럼 움직이고 있고, 그 중에서 중심부에서 왼쪽으로 약 26000광년 떨어진 곳에 태양이라는 별이 있는데 이 태양은 은하계 안에 있는 항성 중 아주 작은 크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천문학자들은 태양을 난쟁이 항성이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그 태양에 여덟 개내지 아홉 개의 행성들이 돌고 있고, 그 중의 세 번째 별이 지구입니다. 4조개의 별들로 이루어진 우리 은하계는 그 거대한 크기 이쪽 끝에서 저쪽 위에까지가 약 10만 광년, 위에서 아래 두께가 900광년 되는 별들의 무리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별의 군단이 25000년마다 한 번씩 원형으로 회전을 하고, 그리고 초속 220km 어떤 학자들은 640km라고 주장하는데 200km에서 600km 속도로 초속 우주공간을 이 4조개의 별들이 날라가는 것입니다. 그 별들의 위치를 이동하지 않고 그대로 평행을 긋듯이 4조개의 별들이 초속 220km에서 640km 속도로 우주공간을 비행해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은하계가 모여 있는 것을 은하단이라고 하고, 이 우주는 이런 은하계가 약 1천억 개 이상 있는 곳이 우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우주 공간은 별들로 가득 차 있구나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이 태양계가 500원 동전 안에 들어간다면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이 대구에 있다고 하니까 사실 우주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밤하늘에 흔히 보는 북두칠성의 국자 모양을 기억할 것입니다. 네 번째 별과 다섯 번째 별 사이의 간격은 700만 광년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거리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별들이 이렇게 천억 개 내지 이천 억 개 행성까지 4조개나 되는 별들이 벌떼처럼 춤을 추면서 우주 공간을 날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온 우주가 물질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주는 이 물질 대 공간의 비율이 1조분의 1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흩어진 모든 별들을 다 모아서 한 공간에 집결시키면 나머지 빈 우주 공간이 999999999라면 물질이 있는 공간은 1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는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고 여기에서 색은 현상을 의미하고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사물을 가리키고, 공은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색즉시공”이다. 무엇인가 있는가 하고 보이면 그것은 사실은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양자역학으로 내려가 봅시다. 양자역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원자를 발견하면서 전율합니다. 그 원자는 하나의 입자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핵 이외에 주변의 공간이 거의 텅 비어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자 핵 하나가 농구공이라면 거기 가장 가까이 돌고 있는 전자가 800m 바깥에 있다고 하니까 사실 그 원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인데 바로 그 텅 빈 공간 안에서 우연과 필연, 시간과 영원, 그리고 한정된 공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편재성들이 함께 만납니다. 짧은 시간에 설명할 수 없지만 영국의 써레이유니버시티의 진알 타지릴리라는 이름을 가진 과학자는 설명하기를 만약에 원자 안에 있는 빈 공간을 모두 없애고, 60억 인류를 축소하면 작은 사과 하나에 모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만약에 이런 방식으로 원자를 축소하여 이 우주의 모든 물질을 모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작은 크기에 불과할 것이니 사실 이 세계에 아무것이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이 모든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경이스러운 것이라고 노래했고, 고트프리히 라이프니찌는 자신의 글 속에서 “왜 이 세계에는 세계가 존재하는가?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이 세계에 있는가? 이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경외스러운 신비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무한히 전개되는 우주를 바라보면 이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신 능력과 지혜, 영광을 미루어 짐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자신의 책 속에서 무한한 우주의 침묵은 자기를 두렵게 한다고 말했고, 인류를 모두 파멸시키기 위해서 우주는 무장할 필요가 없고, 한 방울의 수증기면 충분하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우리 은하 가까이에 안드로메다 은하가 있는데 20억년에는 이 두 은하가 함께 만날 것이라고 합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은하 충돌을 통해서 두 개의 은하가 하나로 합쳐져 안드로메다와 밀키웨이가 아니라 밀코메다가 된다는 가설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두 은하가 만나도 별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별과 하나의 별 사이가 최소한 몇 년에서 몇 백 년을 떨어진 거리이기 때문에 수조 개의 별들이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부딪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과학자들은 다르게 설명합니다. 그것들은 만나면 대 폭발을 일으킬 것이고, 그리고 그것들은 중력 작용의 변동을 가져와서 별들이 서로 잡아당기고 끌어당기면서 마치 달려오고 있던 두 남녀가 갑자기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그렇게 회전하게 될 것이고, 이 중력들이 재편되면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날 것인데 이때가 아마 지구의 종말이 아니겠느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20억년 후의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설령 두 은하가 부딪쳐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그것은 안방에서 먼지 두 개가 부딪친 것 같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우리 지구가 속해있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입니까? 이런 어마어마한 우주의 그 수천 억 개 은하 중 하나, 그 은하 중 수많은 성단 중 하나, 그 수많은 성단 중 태양계 하나, 그 태양계 중에서도 수백 개의 별들 가운데 겨우 세 번째 지구, 그것도 아시아, 그것도 토끼만한 나라, 그것도 가운데 두 토막이 나서 북쪽도 아니고 남쪽, 그것도 서울에서 못 살고 밀려나서 평촌, 거기의 변두리의 한 곳에 오늘 모여서 우리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장소만이 아니라 아이슈타인이 말했던 것처럼 시간과 공간은 직물처럼 엮어져 있어서 이 모든 공간은 중력에 의해서 휘고, 공간이 휘면 시간도 영향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공간에 대한 이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무한한 세계에 대한 사유는 시간과 영원의 세계로 우리들을 인도합니다. 파리와 하루살이가 놀다가 헤어지면서 파리에게 말했답니다. “내일 만나.” 하루살이는 집에 가면서 내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다가 수명이 다했습니다. 왜? 하루살이니까. 파리는 8일을 살기 때문에 파리라고 합니다. 파리와 매미가 놀다가 헤어지면서 매미는 말했습니다. “다음 주에 만나.” 파리는 집에 돌아가서 그 다음 주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기 시작했고,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 의미를 못 깨달았습니다. 매미는 10년 동안을 애벌레로 준비했다가 한 달 동안 화려하게 살고 죽음저편으로 물러가는 것이 매미의 일생입니다. 매미와 참새가 놀다가 참새는 말했습니다. “다음 달에 만나” 매미는 돌아가서 일생을 걸고 다음 달의 의미를 탐구하다가 결국은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간이 모두 탄복할 정도로 오래 산다고 해봐야 100세, 더 양보 한 번 더하면 110세쯤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110세를 살았다고 칩시다. 어제 결혼 예식장에 주례를 서러 갔더니 화장실에 갔더니 금연이라고 써 놨는데 뭐라고 썼냐하면 “99세 이하 금연”이라고 써 붙여놨습니다. 99세 이하는 애들이니까 담배피지 말라 그 뜻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몇 번 더 양보해서 살았다 하더라도 하루살이로 보면 24시간 20분쯤 산 셈이 될 것이고, 파리로 본다면 8.5일을 산 셈이 될 것이며, 그리고 매미로 본다면 30.1 일을 산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억겁을 흐르는 이 무한한 우주의 공간과 그리고 침묵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주는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주의 시간에 흐름을 기준으로 보면 여러분이 100년을 살다 죽는 것이나 입속에 가득한 세균을 한 모금의 가글로 토해놓을 때 죽는 그 세균의 수명의 길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하고 끝없는 이 우주를 하나님이 여러 번 실험하고 도전한 끝에 겨우겨우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 한 마디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고, 지금도 이 모든 세계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오늘 간구하면서 이렇게 응석부리고 저렇게 떼를 쓰면서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하나님이 바로 그렇게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한번 기도를 멈추고 우리의 바쁜 생활을 멈추고 눈을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가득 찬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그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이 분이 바로 우리가 예배드릴 때에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어둠 속에 헤맬 때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B. 지성의 한계를 생각함
여기서 우리는 우리 인간 지성의 한계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한계 때문에 많은 인간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이 모든 세계가 그 분으로부터 창조된 것을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성은 이 세계에 익숙해질수록 익숙해진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존재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적이 더 많아 많이 배운 자의 무지, 혹은 많이 배운 자의 재앙이라고 하는 말이 여기에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극진히 사랑했고, 남편도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잘 알고 감격했습니다.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늘 “내 아내는 나밖에 몰라. 나를 너무 사랑해. 내 아내의 마음속에는 내 아내는 오직 나를 향한 사랑 밖에는 없어” 라고 노래를 하며 살던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부인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이 남편이 자기를 향한 아내의 사랑을 찾기 위해서 아내를 해부해서 장기를 들척거리고, 심장을 더듬고, 그리고 허파를 뒤적이면서 “나를 향한 아내의 사랑이 어디에 있었나?” 라고 묻는다면 누가 그러한 탐구에 동의하겠습니까? 사랑은 콩팥이나 쓸개, 간이나 염통, 허파처럼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은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소위 이야기하는 텔레파시라고 하는 사랑의 감정의 역할도 양자역학 안에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신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는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으나 물질을 찾는 방법으로는 정신을 찾을 수 없는데 하나님은 이 정신도 능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 물건을 찾던 방식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렇게 찾으려고 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중대한 모독입니다. 여러분이 한 남자를 뜨겁게 사랑하다 죽었는데 여러분을 사랑하던 남자가 여러분을 의심해서 배를 가르고 그리고 창자를 뒤적거리며 “네 사랑이 어디 있느냐?”고 찾는다면 모욕감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죽어서도.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찾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블레이즈 파스칼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이성에는 두 가지 이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머리의 이성이고, 또 하나는 이 머리의 지식을 초월하는 마음의 이성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의 지성과 이것을 초월한 지성을 만나게 하는 이런 인간의 마음에 또 다른 이성의 존재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 나와 있는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을 비롯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 분의 성품을 탐구하려고 하지 않고 그 분의 성품에 대해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그 분 앞에 맡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드넓은 우주와 무한한 인간의 심리의 크기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왕과 황제들의 모든 위엄을 합쳐도 그 분 발아래 때만도 못하게 될 그런 위엄과 탁월한 영광의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시고, 여러분이 바로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분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십시오. 주님은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 한 가운데 내려오셔서 여러분의 모든 삶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사립학교에 들어 가야될 지, 공립학교에 가야될 지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답을 가지고 계시고, 여러분이 독신으로 살아야 할지, 시집을 가야할지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분명한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일생을 섬기며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살아야 할지, 네가 알아서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은 경륜 속에서 여러분에게 부여된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만나는 수많은 이웃들과의 작은 만남들, 그 안에서 누리는 희로애락의 기쁨과 슬픔과 눈물 그리고 한숨까지도 알고 계시고, 여러분이 당하는 고통과 괴로움, 홀로 어두움 속에서 우는 외로움까지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고 응답하고 여러분을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두 가지가 모순처럼 보이지만 지극히 높고 온 땅과 만물위에 초월하신 무한히 광대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여러분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못 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여러분과 함께 피붙이처럼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관심을 여러분에 대해 갖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IV. 가장 큰 의무: 하나님을 앎
그러므로 여러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인생의 대부분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께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피해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을 알지 않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복음의 때,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어디든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접촉할 수 있는 때, 여러분처럼 교회 생활을 하면서 눈을 뜨면 어디든지 진리의 책들이 있고, 들을 수 있는 말씀들이 있고, 사랑하는 형제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진리의 도움이 있는 이곳에서는 더더욱 여러분은 핑계 댈 수 없고 여기에서 하나님을 아는 무지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입은 피해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을 알기를 거절하고 어둠속에 살기로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어쩔 수 없이 주님을 알지 못했던 미개한 시대의 사람들보다 일천 배나 더 많은 지식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일단 인정하게 되면 이것은 순수한 객관적인 사실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세계와 내가 그 분에게로부터 왔고, 그 분이 나를 여기에 있게 할 때에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그 목적을 따라 내가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하는 도덕적인 판단을 도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는 순수한 객관적인 사실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의 존재와의 관계를 추궁하게 되고, 그리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존재가 자신의 존재에 주는 의미가 무엇이고, 그리고 너를 창조한 그 계획과 목적에 따라 사느냐고 하는 선악에 대한 질문을 추궁받기 때문입니다.
체스터 턴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 세상은 난파선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난파된 보물섬과 같다”고 말입니다. 수백 년 전에 혹은 수천 년 전에 난파된 보물선을 발견합니다. 그 보물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며 뻘 속에, 흙속에, 바다 속에 나뒹굴어져 있습니다. 이 모든 사물들을, 유물들을 끌어 올린 후에 이제 역사가들과 그리고 과학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이 사물들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찾으며 서로 연결을 지어서 지금은 사라져 죽고 없는 수백 년 전 수천 년 전 사람들의 생활과 풍습, 문명과 기술의 발전 정도를 추측하여 사라져버린 그 세계를 우리의 마음속에서 복원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들의 파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 하나를 찾을 때에는 무엇인지를 모르지만 또 다른 유물들을 찾고, 서로 연결을 짓고 그리고 그것을 성경의 진리로 해석할 때에는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우렁찬 증거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말하기 때문에 전하는 자가 없고, 외치는 자가 없으나 들리는 소리가 온 우주에 가득 찹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사실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위대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와 깊이 관계를 맺으시고, 특별히 인간 모든 세계를 돌보고 그리고 경륜하시고 어떤 목적을 향하여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파편처럼 흩어진 세계의 수많은 당신 아는 지식을 해석할 수 있는 최고의 등불을 교회에 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성경 진리이고 목회 사역인 것입니다.
V. 적용과 결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코 박고 살기 때문에 1년이 지나도록 하늘 한번 쳐다보지 않는 경우가 많고, 도시에서는 이미 매연에 오염이 되어서 하늘을 보아도 별 볼일이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땅에 코 박고 매일매일 문제에 시달려 살아갑니다. 우리들을 오늘 애태워하고 괴로워하고, 힘들어 하고, 꼭 이루어 싶어 하고 욕망에 들뜨는 대부분의 모든 일들이 무엇을 먹고, 마시고,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에 직결되어 있고,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짧은 시간동안에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리고 남보다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이 가져다 준 문제들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 세상을 마름하고 이 무한한 우주 공간속에 한 티끌이 되어 사라질 그때에도 그것은 영원을 향해 의미 있는 고민이고 갈등일까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잇대어 살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 수없이 많지만 문제를 문제로 느끼는 이유는 대부분 영원한 세계에 대한 무관심과 자기만을 위한 이기심에서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많은 것들에 대한 답들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 땅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지만 어느 것도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마침표를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궁극적인 해답은 하나님께 있고 영원한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대학에 있을 때 영문과 교수들 중의 신앙이 돈독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신학과 선생님이 책을 써서 한권씩 주면 다 읽고 나서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우리 문학은 수없이 질문만 던질 뿐 해답은 문학 안에서 발견이 안 됩니다. 그래서 문학은 물음표이고, 신학은 마침표입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은 마침표 일뿐만 아니라 느낌표입니다. 그래서 대답을 발견할 때에 질문이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이 세계를 창조하신 위대하신 하나님, 우리의 경륜을 당신 손바닥 안에 두신 그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여러분 일생의 회개해야 할 가장 큰 잘못은 하나님 알기를 게을리 한 태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새해로 접어들며 여러분에게 무슨 말씀으로 새해를 시작할까를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때 도달한 결론은 우리가 아무리 인생의 많은 문제를 해결한다고 할지라도 돌아갈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다면 그 해결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매일 그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이 이렇게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높으시고 이 모든 이 광대한 우주를 당신의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고, 당신의 생각 한 가지로 운행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인생은 얼마나 더 충분히 그 분의 수중 안에 있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가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초월하시는 하나님과 맺은 관계가 여러분을 행복하게 합니다. 주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자리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온 땅과 모든 만물과 세계 위에 초월하신 위대한 그 분이 어떻게 미물만도 못한 우리와 함께 관계를 맺으시고 그 분이 우리 같은 인간의 사랑을 받으시는 사랑하시는 그런 인격적인 관계가 될 수 있을까요?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2 (2013.01.20 주일설교)
2.주는 나의 하나님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시편 118:2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높고 뛰어나신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높고 위대하시고 이 모든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처럼 하나님이 계시기만 하다면 그 분이 우리 인간과 특별히 관계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티끌과 같은 미물인 우리들이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높고 위대하신 그 높으신 하나님을 어떻게 관계하고, 그 분과 우리의 인생을 함께 살아가느냐가 기독교 신앙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II. 나의 하나님 되신 여호와
A. 하나님 의존하도록 창조됨
오늘 성경은 시인의 입을 빌어 “주는 나의 하나님이요 내가 주께 감사 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도 지난 주 우리들이 살펴본 바와 같이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졌을 터이지만 마치 오늘은 그 하나님이 자신의 가족인 것처럼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고, 그리고 그 분께 감사하겠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연결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모든 만물위에 뛰어난 초월적인 하나님은 비천한 인간으로 하여금 관계를 맺게 해 주는 것은 다름이 아닌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온 땅과 만물위에 높으신 하나님을 가족처럼 나의 하나님 되신 여호와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 분 앞에 부복하게 하고, 그 분의 거룩하고 완전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 중 인간은 최고의 걸작품이고, 어느 신학자가 말한 바처럼 인간 창조는 다른 모든 창조 세계의 면류관의 창조입니다. 인간이 있음으로 이 모든 세계는 빛나고, 인간이 있음으로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 안에서 창조주로서 우리 인간들에게 인정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물들을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질서대로 다스리고 가꿀 수 있는 피조물도 오직 인간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인간은 인간의 위대함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자율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했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찾는 길인 것처럼 오해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을 의존하여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 의존하도록 창조하셔서 인간이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 때에 가장 행복하고 하나님이 그 인간을 지으신 목적도 실현되게끔 만드셨던 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피조물들 위에 뛰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고, 마음이 있고, 그 인간의 마음을 통해 작용하는 영혼의 기능인 지성이 있고, 의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비록 몸으로는 동물과 같이 땅에 속한 피조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피조물과는 달리 천적인 성품을 부여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알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인간을 모든 피조물로부터 구별하는 탁월한 능력인 이 알고 사랑하는 힘은 그것이 하나님을 알고 올바르게 사용될 때는 그것 때문에 인간이 영광스러워지고, 행복해지고 존귀하게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교만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때에는 그 인간의 탁월한 기능 때문에 인간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보다 힘이 세고 빠르고 더 잘 보고 냄새 맡는 동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불면증에 걸린 돼지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어릴 적 상처를 간직하고 비참한 존재가 되었다는 닭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동물들은 그렇게 자기와 연관 지어서 이 세계 사물들을 성찰하고 자신을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위대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능력을 잘못 사용하게 될 때 그 능력이 올바르게 무엇인가에 의해서 지도되지 않을 때에 인간은 상상할 수 없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도 부끄럽게도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잘 살게 된 것이 물질적으로는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우리의 영혼까지 행복하게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탁월한 능력을 인간이 가지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끔 창조된 인간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더 의지하여 존재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높고 위대하신 분이지만 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간은 탁월하기 때문에 행복할 수도 있고, 탁월하기 때문에 매우 불행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21살에 회심하기 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때에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를 부러워했고, 그리고 도랑 옆에 피어난 풀들을 부러워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저것들로 태어났더라면 이렇게 치열하게 고뇌하고 정신적으로 고통은 받지 아니하였을 텐데 하는 마음에서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B. 하나님과의 무한한 간격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간격이 있습니다. 피조물을 아무리 보태어 그 피조물을 쌓아 올린다고 할지라도 창조주와 비교될 수 없고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무한한 존재의 격차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도 하찮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끔 성도들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화장터에서 화장을 합니다. 사람의 시체가 화구 속으로 들어가면 정확하게 1시간 30분 있다가 뼈가 되어서 나옵니다. 틈새로 열린 작은 창으로 화장터 관리인이 유족에게 묻습니다. “그냥 유골로 받으시겠습니까? 갈아서 드릴까요?” 그리고 잠시 후 기계에 그 뼈를 넣고 한 10여초 동안 갈고 나면 한 사발의 먼지가 되어서 유족에게 전달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한 10년 전에 아마도 터키였던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박물관을 들어갔는데 터키인지 어느 나라인지는 생각은 잘 안 나는데 박물관인 것은 기억이 납니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2500년 전에 죽은 사람인데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웅크리고 있는 사람인데 미이라도 아니고, 썩은 것도 아니고, 어떤 창이나 칼에 맞아 죽은 사람인데 습기가 하나도 없는 모래에 묻혀서 2500년을 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짝 마른 북어처럼 사람이 인상 쓰는 것까지 고대로 남아서 습기만 완전히 제거된 가운데 북어처럼 말라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학자들이 정확하게 그 사람의 나이와 죽은 시기, 사인까지 모두 밝혀놓았습니다. 그것을 유리관에 넣어서 전시해 두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아, 이게 인간의 모습이구나.”
이런 인간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은 영원하고 인간은 한시적이고 하나님은 무한하고, 인간은 유한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위에 초월하시고 인간은 그 만물 속에 섞여서 태어나고, 흘러가고, 죽고, 소멸하는 존재입니다. 이 존재적인 격차보다도 더 심각하고 커다란 차이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로 말미암는 영적인 단절입니다. 하나님은 순결하고 거룩한 영이시고, 인간은 그 모든 것들 피조물들 중에 유일하게 죄를 지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불결하고 더러운 존재가 되었고,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불결한 죄인 사이에 있는 격차는 조물주와 피조물의 존재의 격차만큼이나 큰 것이었습니다.
원래 인간은 육체는 흙으로부터 영혼은 하늘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육신을 위한 자원은 땅으로부터 물질로 공급 받고, 영혼을 위한 자원은 하늘로부터 공급받으며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빚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영원한 죄로 말미암는 영적 단절 때문에 인간에게 주어지는 고유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은 끊어졌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위대하기 때문에 더더욱 비참한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성경에서 부르실 때에 양떼로 부르셨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양떼로 부르셨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들까지도 우리 바깥에 있는 나의 양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모든 인류를 양떼로 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의 동물들은 각각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 기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이나 아니면 유연한 몸, 강력한 뿔, 빠른 다리, 그리고 커다란 몸집 이런 것들은 적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 주는 훌륭한 조건입니다. 언젠가 한번 미국에 집회를 갔을 때 동네로 접어드는데 형언할 수 없는 역겨운 냄새가 났습니다. 그래서 차 문을 닫으면서 이게 무슨 냄새냐고 그랬더니 목사님이 동네에 스컹크가 여러 마리 살고 있어서 방귀를 뀐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역겹기만 한데 스컹크가 방귀를 뀌면 그 옆에 있는 들쥐나 이런 것들은 졸도 한다고 합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이제 졸도까지는 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물들은 각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기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없습니다. 빠른 다리도 아니고, 날카로운 이빨은 더더욱 없고, 그리고 상대방을 받아서 찌를 수 있는 뿔도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말려 있는데 여러분이 목욕탕에서 만드는 것 같은 것이 있지만 자기 보호에 도움이 안 되고 그거 왜 거기 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어떤 사람은 그래서 이 양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인간 가까이에서 인간의 돌봄을 받으면서 살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은 산양이 있지 않습니까? 야생 산양. 그래서 멸종 위기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산양이 멸종 위기입니다.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맹수들이 보기에 그것은 도시락입니다. 이동형 도시락. 그래서 결국은 다 거의 멸종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 동물의 종류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완전히 멸종되어 없습니다. 그런 것을 바로 하나님이 양떼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모든 동물들에 뛰어난 탁월성 때문에 하나님으로 독립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 탁월성 때문에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단절은 죄로 말미암아 도입된 것이었고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궁극적인 비참의 최종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역사 속에서 인간이 추구해왔던 예술, 학문, 다양한 종교와 철학, 사상, 종교 심지어는 미신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도입된 영적인 단절을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들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아무 희망도 없는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의 공로를 토대로 복음으로 인간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C. 복음으로 인간을 부르심
복음은 문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그냥 들어서 기분 좋은 나의 직접적인 삶과는 상관이 없는 남에 관한 기쁜 소식이 아니라 오늘 나의 행복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는 나의 이익이 함께 결합된 그런 의미에서의 복음입니다.
36년 동안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식민지로 지냈습니다.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일본은 패망했고, 결국은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의 일본의 지배권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지배권은 끝났습니다. 그때에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함께 얼싸안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고, 그리고 해방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제 이 기쁜 소식은 시작이 되었고, 사람들은 이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산골에서 라디오를 들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더듬더듬 읽어나가는 일본 천왕의 항복 선언을 듣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시골 방방곡곡으로 달려가 이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소식을 들은 모든 시골 사람들은 더 이상 일본 군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고, 칼 찬 순사가 지나가도 숨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분 좋은 소식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과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기쁜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이 기쁜 소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이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이 소식이었습니다. 복음은 길게 얘기할 수도 있고 짧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길게 얘기하면 수십만 권의 책으로도 다 복음을 요약할 수 없습니다마는 짧게 이야기하고, 가장 짧게 이야기하면 세 단어를 남길 수 있습니다. “Jesus died for us” 네 단어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예수 우리 위해 죽으셨다”라는 세 단어로 요약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왜 기쁜 소식이 될까요? 인간이 죄를 범한 이후로 이 모든 세계는 마귀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고, 마귀는 이 세상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하고 세상 나라를 세웠고, 자기 스스로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들의 마음을 자기에게 복종시켜 본질상 진노의 자녀답게 살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셨고, 이로 말미암아 마귀에게 들려져 있던 최대의 지배 카드인 죽음을 무효화 시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죽으심으로 다시 사신 것처럼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고 하는 소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식이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사단의 나라는 파괴되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길들이 활짝 열렸고, 이미 그렇게 이 세상의 죄의 감옥들을 뛰쳐나가 자유로운 세상으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아직 죄의 감옥 속에 갇혀 있고, 그들에게 누군가 기쁜 소식을 전해 주기만 하면 그들도 우리처럼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우리들이 지었기 때문에 우리가 죽어야 할 터인데 예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죽은 것은 당신이 담당하시고 다시 사는 것은 우리에게 은택으로 입히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주님이 주신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죽음을 통해 용서 받는다면 우리 모두 죽어야 했건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한 대표자로서 우리를 위해 대표적 죽음을 죽으심으로써 우리 모든 사람을 또한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대표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분이시면서도 티끌 같은 미물인 우리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고, 거기에서 우리를 향한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원인 것입니다.
III. 인격적 승복이 있는 신앙
이 모든 위대한 사실들은 공중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마음속에 들어와 이해됨으로써 여러분이 이 사실을 깨닫고,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온 땅과 모든 만물 위에 지극히 높고 뛰어나신 하나님은 우리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으로 존재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우리보다 높고 뛰어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서는 우리와 관계를 맺으셔서 마치 그 분이 우리의 친 아버지인 것처럼 우리가 그 분의 지극히 사랑받는 자녀인 것처럼 그렇게 가족 관계로 지내기를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높고 뛰어나신 이 모든 능력으로 우주를 창조하셔서 거대한 세계를 만드시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랑의 관계를 기초로 우리의 가장 작은 일에까지 관심을 가지십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나야 될 것인가, 말아야 될 것인가는 물론이거니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자녀들을 낳아 사립학교를 보낼지, 공립학교를 보낼지, 한국에서 공부를 시킬지, 유학을 시킬지, 아니면 여러분의 자녀를 집에서 가르칠지, 과외를 시킬지, 몇 살쯤 시집을 갈지, 누구를 만나서 장가를 갈지, 전세로 살림을 시작을 할까, 무리 하더라도 집을 사서 대출을 받아 시작을 할까 에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오늘 잠시 고생하는 감기기운에도 하나님은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고, 마음의 지극히 작은 움직임 때문에 누군가를 싫어하고 좋아하는 마음에까지도 깊은 관계를 가지고 계셔서 때로는 기뻐하시고, 마음 아파하시며 여러분을 이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참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소유한 사람이라면 이 두 가지 사이의 균형을 언제나 유지해야 합니다. 지극히 높고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분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분이라고 생각해도 안 되고 그 분은 나의 신음 소리에도 응답하시는 아버지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이 그렇게 위대하신 분인 줄을 매일매일 잊어버리는 태도도 잘못된 태도인 것입니다.
A. 무지 속에 노예적 복종이 아님
이 기독교 신앙은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앙은 무지 속에서 이루어지는 노예적인 복종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혹은 엄마로부터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성장과정을 보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지나친 권위주의, 때로는 폭언과 폭력, 이런 것들로 어린 마음에 멍이 드는 적이 있습니다. 결혼을 해서도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폭력적인 남편을 만나서 욕설과 구타로 그렇게 사람대접을 못 받는 아내들도 있는가 하면 요즘에 와서는 아내에게 쥐어뜯기고 맞고 사는 남편도 많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법원에서는 한 부부의 이혼을 허락을 했는데 황혼에 이른 부부였습니다. 그 판결의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비인격적으로 구타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 혼인은 계속할 의무가 남편에게 없다고 이혼시켜 버렸습니다. 젊은 시절에 상처받은 것을 이런 식으로 남편에게 복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노예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 노예적인 복종의 대표적인 예가 미신입니다. 미신은 그 미신을 믿는 사람의 지성이나 인격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무당들이 교리반 가르친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습니까? 푸닥거리하는 선무당이 자기가 섬기는 신의 성품에 대해서 설명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진실한 마음으로 신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은 충분하다 라고 말하는 미신 추종자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관심 없습니다. 그것들은 더러운 귀신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접근하는 미신 추종자들의 관심사도 그 신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심술 사나운 신을 잘 달래고, 심지어는 아첨을 하고, 가능하다면 속이기까지 해서라도 신의 심술을 막고 신으로부터 무엇인가 유익한 것을 얻어내어 지상적인 행복을 구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노예적인 복종의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신의 비유를 상하지 않기 위해서 전전긍긍하고 복종하지만 이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복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릎을 꿇지 않겠다고 하는 여러분의 정강이를 군화발로 차서 부러뜨려서 무릎을 꿇게끔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절하지 않겠다는 여러분 머리끄댕이를 끌어 당겨서 땅에다 처박으면서 이마에 피를 내면서 그리고 뒤통수를 군화발로 짓밟으면서 나한테 절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런 식으로 소개되는 것, 그런 식으로 예배되는 것 자체에 대해서 커다란 모욕감을 느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에 없는 경배보다는 차라리 진실한 회의가 오히려 그분에게는 더 솔직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두 가지로 구성이 되는데 첫째는 지성의 설복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이성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성이 신앙을 갖는데 방해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이성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부패하지 않은 이성이 있겠습니까? 물론 넓은 의미에서 보면 죄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으니 어느 것인들 부패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이성이 하나님이 주시는 건전한 양심의 빛과 그리고 이 지성의 힘에 의해서 사용될 때에는 어느 정도는 신뢰할 만한 이성이고, 그것들이 이러한 영혼의 밝음으로부터 멀어져 양심에 화인을 맞은 상태에서 부패하게 되면 이 이성은 왜곡되어서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물의 원인과 결과를 해석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의 세계에서 상식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의 내용들은 상식과 이성으로 받아들이고, 그러나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언제나 상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진리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진리인데 하나님 자신이 모든 만물과 온 땅 위에 초월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을 증거하기 위한 진리도 인간의 이성을 초월할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 진리를 기각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 나의 지성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겸손하게 주님 앞에 엎드려 이해할 수 없지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기초해서 그 분의 인격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는 기능이 아니라 이성과 함께 지성 안에 있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많은 믿음을 가질수록 그는 지성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B. 참된 기독교는 인격적 신앙임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진리의 말씀으로 다가오셔서 우리 인간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고, 그 지성에 당신 자신의 존재와 성품을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을 설득시키십니다. 한편으로는 이성으로, 한편으로는 오성에 속하는 믿음으로 우리를 설득해서 결국은 예전에 내가 알았던 세계가 아주 폭이 좁은 세계이고, 지금 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된 세계가 지극히 넓은 세계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예전에 내가 무지하고 어리석었다는 고백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때에 진리의 찬란한 빛이 인간의 어두운 영혼을 째고 들어올 때 그때에 찬란한 진리의 빛이 우리의 마음 구석구석에 비취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 밖에 있는 모든 사물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아름다운 밤하늘이면 그냥 시커먼 밤하늘이라고 믿었고, 여름철에 산림이 우거진 숲속에 들어가면 삼겹살 구워먹을 생각밖에 나지 않았는데 이제 이렇게 하나님의 진리가 나의 지성을 밝히고 나니까 이 온 세계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어느 한 곳에도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과 아름다운 사랑이 묻어나지 않는 곳이 없고, 그래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송하고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지성을 설득하시는데 이런 하나님의 아름다운 증거들이 모든 세계 속에서 펼쳐져 있고, 학문 속에도 펼쳐져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양자 역학을 좀 배우면서 정말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이 신학에서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면 인간이 전도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정하신 필연이 우리에게 어떻게 우연이 되느냐 하는 신학에서 이런 논쟁들이 양자 역학을 공부하면 유치원 애들 장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모순이 존재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두 개의 모순 사이에는 어떤 충돌도 없습니다. 다른 차원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 모든 다른 차원들 때문에 생기는 모순,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고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을 설득시키시는데 하나님의 아름다운 증거들이 많이 있지만 이 성경은 그 모든 아름다움에 대한 증언의 엑기스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고 아름다우심을 놀랍게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없이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을 통달하는 것보다는 이 모든 학문 없이 성경 한 권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더 놀라운 증거를 갖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성의 설복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성경과 학문을 통해 배워가며 삶 속에서 그 분이 얼마나 인격적인 분이신지를 체험해 감으로써 우리들은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자신도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지혜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을 향해 곧추 서서 그렇게 이 머리를 들고 불과 15도 내지 20도만 올리면 자기 머리위에 있는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존재는 인간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은 갈대와 같이 존재론적으로 연약한 인간이지만 생각하는 갈대입니다. 그것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사색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이 머리를 주신 것입니다. 중심을 잡으라고 여기에다가 매달아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끊임없는 배움을 요청하는 것이고, 그것을 하지 않는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교회에 와서 등록하고 출석은 하지만, 새 가족 공부도 안하겠다, 성장반도 못하겠다, 심방도 오지 말라, 뭐 배우는 것은 관심이 없다 이러는 사람들이 소수 있다는 이야기를 교육자들로부터 전해 듣는데 내가 오늘 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식으로 교회 생활하는 것은 하나님을 현저하게 깔보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기 하수인 것처럼 여기면서 교회 다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압니까? 제가 보기에 여러분은 눈멀고 지팡이 들고 개 데리고 절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개는 끈이 풀어져 도망가 버렸고, 지팡이는 놓쳐버렸고, 그리고 날은 더 어두워졌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한 걸음, 한 걸음 벼랑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붕대를 벗겨 여러분에게 새로운 시력을 회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 생활 하는 사람들이 인격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을까요?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것은 왠지 이 예배라도 참석 안하면 다음 한 주간 동안에 뭔 불행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떨쳐버릴 수 없는 심리적인 찝찝함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무슨 기대가 있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모독이고, 그리고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깔보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당장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그리고 새가족반 들어가서 열심히 배우고, 성장반 들어가서는 여러분이 더 열심히 공부하고 배워서 하나님으로부터 지성의 설복을 당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서 인격적인 신앙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을 몇 시간만 비인격적으로 대하면 여러분은 분노가 하늘을 찌를 것이고, 혹시 능력이 없어서 복수를 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자기 안에서 자아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과 모욕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기 싫은 것은 하나님께도 하지 마시라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지성의 설복과 함께 의지의 감화입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인간 영혼의 두 개의 작용이 있는데 하나는 지성의 작용이고, 하나는 이 의지의 작용입니다. 이 의지는 감성에 속하는 작용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인간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존재이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거슬러 살려고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려고만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그 의지를 돌이키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도록 까지 의지를 돌이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의지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도록 굽어지는 것은 자기가 하는 것이지만 돌이키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굽어진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이 부러지도록 꺾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화를 시켜서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의지로 변화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말씀과 함께 주어지고 이 은혜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더 탁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인간은 의지의 깊은 감화를 받고, 그래서 나를 주인 삼은 삶을 버리고 나 자신은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 앞에 티끌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 하나님을 사랑할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온 우주의 중심이 자기라고 믿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중심이고 자신은 그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야 할 그런 호수 위에 이는 원형의 파문과 같은 물 분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지성의 설복과 의지의 감화를 통해서 우리는 무지 속에서 노예적인 복종의 삶으로서 신앙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는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알고, 내가 하나님을 압니다. 물론 하나님이 나를 아는 것은 숨김없이 모든 것이 드러난 앎이지만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부분적인 앎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고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나 같은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이해하며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복된 삶일까요? 그는 하나님 없이 무지 속에서 황제와 같은 삶을 일천 년 동안 이 지상에서 계속하는 것보다는 단 하루라도 진리의 빛 아래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평범한 사람의 삶을 원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티끌만도 못한 우리 인간에 비하면 하나님은 지극히 높고 소중하신 분이시지만 들풀에 맺힌 이슬처럼 살아갈 인간의 존재를 하나님은 그 존재의 가치보다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시고 그 관계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박애의 정신에 의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약점을 알고도 우리를 용납하십니다. 사람들은 그 약점 때문에 우리를 짓밟고 억누르지만 주님은 오히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마치 당신의 약점이신 것처럼 긍휼히 여기며 당신의 사랑의 품안에서 치유 받고, 돌봄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소를 사육하는 어느 농가에서 새끼를 낳았는데 발 세 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얘는 발이 세 개 밖에 없어서 그러니 이게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발 하나가 있는데 그거는 쬐그매서 여기 겨드랑이에 매달려 있는데 그거로는 발을 짚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놈이 땅에다가 어깨를 대고 세 발로 배밀이를 하면서 가서 뭘 주워 먹는데 네 발 달린 친구들이 항상 괄시합니다. 오면 뒷발로 막 차 버리는 것입니다. 젖 먹지 말라고 그러고, 그 다음에 사료 먹지 말라고 차는 것입니다. 항상 저 구석에 혼자 앉아서 지냈습니다. 친구들이 다 먹고 사료가 흩어져서 남으면 그때에 기어가서 그것을 먹는 거예요. 주인이 그 송아지를 보고 너무 불쌍하니까 걔를 위한 방은 따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젖 먹을 때가 되면 얘를 그리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 엄마 젖소를 데려다가 그 방으로 집어넣어서 그러니까 독방에서 모녀가 해후를 해서 젖을 먹게, 근데 그 엄마소도 걔를 괄시하더랍니다. 그러면 주인이 막 소를 때리면서 그러지 말라고 해서 젖을 먹여서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말이 굉장히 감동적이었습니다. 항상 주인이 그 아이에게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료도 더 많이 주려고 하고, 우유도 더 많이 주려고 그러고, 그리고 따뜻한 자리 편안하게 해 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주인아주머니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우리는 이거 안 팔아요.”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끝까지 데리고 있어야죠.” 마지막 말이 “불쌍하잖아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는 우리의 약점이 있을 때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생각해도 하나님이 오히려 우리를 그렇게 긍휼히 여기시면서 그러면서 우리를 돌보시는 것입니다.
(찬양)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IV. 적용과 결론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이 아니면 하나님의 이런 가슴 저미는 사랑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맑고 밝은 날만 있다고 나는 사탕발림하지 않겠습니다. 진실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에게도 시련이 오고, 고난도 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큰 뜻을 품었기 때문에 평탄하게 걸어갈 수 있는 인생의 길을 가시밭길과 같은 인생의 길로 바꾸어 걸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평탄한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없는 삶일 뿐이지만 그러나 고난의 길을 걸어가도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견디기 힘든 시련과 고난이 올 때에도 그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양떼로 부르셨고,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영혼의 목자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순결하고 아름다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하나님을 진심으로 알고 충심으로 사랑할 때 그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의지할만한 분이고,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높고 뛰어나 초월적인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내 곁에 계셔서 아니 지금 내 안에 나보다 내게 가까이 계셔서 나를 이끄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라고 고백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시며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동행 하는 친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3 (2013.01.27 주일오전)
3.우리를 사람으로 지으심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하심이니라”(엡 2: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저는 지난시간에 우리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남으로써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시고 지극히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어 우리의 인생을 지도하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는 오늘 이 시간에는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무엇 하려고 사람으로 창조하셨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에베소서에 실려 있는 본문이고, 이 서신서는 사도바울이 로마에 첫 번째로 투옥되어 있던 61년 봄과 63년 사이에 쓰여 졌습니다. 2년 남짓한 이 시간동안 그는 옥 속에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네 권의 서신을 기록하였고, 그래서 이 서신서들을 옥중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62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에베소서는 골로새서와 함께 그리스도와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기록하고 있는 쌍둥이 서신입니다. 이 편지를 쓰고 사도바울은 약 5~6년 후에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1장에서는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신령한 복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2장에서는 구원의 은혜를, 그리고 4장과 5장에서는 교회의 비밀을, 마지막 6장에서는 신자의 전투적인 삶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III. 세계를 창조하심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왜 우리를 사람으로 지으셨는지, 우리를 사람으로 창조하신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두주 전 설교인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숙고 속으로 데려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모든 세계뿐 아니라 우리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세계까지 창조하셨으니 하나님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지만 당신이 이 세계가 없으면 무엇인가 불편하고 모자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상 창조의 교리를 비웃는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변론하였습니다. “만약 이 세계가 하나님께 필요했다면 주님은 부족한 것이 있으신 분이었으니 완전하신 하나님이실 수가 없고, 필요하지 않았는데도 세계를 창조하셨으면 헛된 일을 했기 때문에 그 분은 하나님이실 수가 없다”라는 논리였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가지고 숙고하던 중 여러 해 전에 번개처럼 머리에 이 모든 변론을 잠재울 수 있는 탁월한 비유 하나가 떠오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비유입니다.
우리라고 불러서 죄송합니다마는 우리는 일반적으로 별 특별한 게 없는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냥 태어나서 평범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인류 역사에는 천재성과 함께 탁월한 예술혼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물론 우리도 예술성에 있어서 각각 차이가 있지만 그거야 동네 안에서의 차이이지 세계적인 차이는 아닙니다. 이런 세계 역사 속에서 드물게 천재성과 함께 예술혼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을 하는데 이 사람들은 화폭에다가 그림을 그림으로 자기의 예술혼을 드러내고, 어떤 사람들은 불후에 남을 명곡을 작곡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류가 아끼는 위대한 조각 작품들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자기가 그린 그림이 필요해서 만들었을까요? 그 사람들이 탁월한 곡을 작곡하지 않으면 뭔가 모자라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를 보통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탁월한 음악을 작곡한 것일까요? 자신의 존재를 보태어 기댐으로써 겨우 보통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탁월한 조각 작품들을 남긴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천재들하고는 비유하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겠지만 저는 책을 씁니다. 몇 권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들에 의하면 60권이라는 사람도 있고, 70권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책을 썼지만 나는 그 책 없어도 김남준 목사이고, 김 남준입니다. 누군가 나에게서 그 책을 모두 빼앗아 가서 내 서재에 내가 쓴 책이 한 권도 안 남는다고 하더라도 나의 나된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일평생 제가 쓴 책 없이도 나는 살 수 있습니다. 내 존재는 내가 쓴 책에 기대지 않는 것처럼 위대한 예술가들은 자기가 만들어온 작품들에 기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천재성을 가진 위대한 예술가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충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예술혼에서 다른 사람들이 내놓지 못하는 작품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이 뭔가 충족하지 못한 분이시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충족한 분이시라는 것을 오히려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창조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완전하신 분이시고, 당신 자신이 다함이 없는 행복이시라면 무엇 때문에 인간을 만들어서 하나님 보다 훨씬 못한 그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느냐, 이것은 하나님이 무엇인가 완전성을 결여하고 계신 것이 아니냐 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변론도 잠재울 수 있는 비유를 알고 있습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이 있는데 자기 혼자 등 따뜻하고, 배부르고, 예쁜 옷 입으면 충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여기서 오늘 편안히 잠들고 있습니다. 행복합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한 사람은 인류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어떤 사람들이 굶주리고 고통을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계속 눈물이 나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인간으로서 완전성을 가진 사람입니까? 그래서 그들을 돕고야 마는 사랑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말로 그렇지 못하고 만족하는 사람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필요가 없었을지라도 사랑 자체가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 성향이기 때문에 그 완전성 안에서 인간이 창조되고 하나님이 인간과 사귐을 갖고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게 하신 것 때문에 하나님이 비난을 받으셔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에 마지막 면류관처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타락한 인류를 다시 살리실 때에는 인간을 제일 먼저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지만 맨 처음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는 인간을 맨 마지막에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보다 순서적으로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이 인간에 의해 지배되고 다스려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상태 속에 인간을 두시려고 모든 것을 창조하신 마지막에 사람을 지으셨던 것입니다.
IV. 인간을 창조하심
A. 만물의 존재 목적을 통합함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세계를 창조한 목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보다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는 동물들이 많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매우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창조하신 목적이 다른 피조물에 비해 특별하고 탁월했기 때문에 그는 특별하고 탁월한 존재로 창조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 모든 세계에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주시지 않는 탁월한 능력이 필요할 줄 아셨습니다. 그 능력을 가지고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옆으로는 인간을 알고, 아래로는 이 모든 창조된 세계를 알아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의 존재의 목적을 통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은 개별 목적과 전체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별 목적은 사물 하나하나가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자기만의 목적이고, 전체 목적은 이 모든 것들이 네트워크를 이루며 보다 높은 하나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을 가리켜서 전체 목적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최근 언론의 발표를 보니까 매년 국방부에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 사회에서 구입하는 물건들의 숫자가 90만 종류라고 보도되었습니다. 그 90만 종에는 외국으로부터 수입해 오는 한 대에 수천억짜리 전투기부터 시작해서 비행장에 눈이 쌓였을 때 쓰는 중국산 빗자루까지 90만종의 수많은 물건들이 있습니다. 이 90만종의 물건들은 각각 90만개의 개별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 똑같은 목적인데 두 개의 물건이 들어오는 법은 없습니다. 총은 사람을 살상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권총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죽이기 위한 목적이고, 심지어 5~600m 떨어진 곳에서도 사람을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저격용 장총은 원거리에서 발각되지 않고 요인을 암살하기 위한 총입니다. 기관총은 그것과 상관없이 짧은 시간에 다량의 인명을 살상함으로 전쟁의 승기를 잡기 위한 총기입니다. 이처럼 90만 가지의 물건은 90만 가지의 개별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군인들은 이 90만 가지를 모두 사용해서 한 가지 전체의 목적을 완수합니다. 외적으로부터 국가의 영토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유사시에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국민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 90만 가지의 개별적인 목적은 이 한가지의 전체 목적을 위해 이바지할 수 있을 때에 인정받는 사물이 되고, 그것은 구입할 가치가 있는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평생 두고 잊어버리지 않으면 좋을 한 가지 이야기를 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건축자였고, 인간은 건축하신 그 하나님의 창조 의도를 알고 모든 만물들의 질서를 통합해서 한 가지 목적, 경배를 위하여 잘 사용될 수 있도록 경배를 위한 건축가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위한 건축자, 인간은 경배를 위한 건축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일평생 잊어버리지 말도록 여러분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 여러분 건물을 짓습니다. 그 건물을 짓는 학문을 우리는 건축학이라고 말하고, 이 건축학은 영어로 Architecture 라고 합니다. 이 영어 단어는 두 개의 희랍어의 결합에서 왔는데 아르케라고 하는 단어와 테크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아르케는 원리, 근본, 원천 이런 뜻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테크네는 기술, 기예라는 말로서 영어의 테크닉이 바로 여기에서 왔습니다. 그러면 건축을 아르케테크네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 이렇게 건물을 짓습니다. 건물을 지으려면 제일 먼저 땅을 팝니다. 땅을 파는 사람들은 땅만 파는 전문가들입니다. 어떤 땅이 잘 파지고 어떻게 땅을 파야지만 주변 건물에 손해를 안 끼치고 좋은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땅파기인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땅 파는 사람들이 자기 테크네를 이용해서 땅을 파고 가면 그 다음에는 기초를 놓을 줄 아는 사람들이 기초 놓는 테크네를 가지고 건물의 기초를 놓습니다. 다음 사람들이 와서 기둥을 세우고 벽을 세우며 건축의 골조를 만들고 그러고 나면 그 다음 사람들이 나무로 작업하여 실내 공간을 아름답게 꾸밉니다. 창틀을 만들 줄 아는 테크네를 가진 사람들이 창문을 만들고 가면 그 다음 이 모든 것을 색칠하여 미려하게 만드는 도장의 테크네를 가진 사람들이 칠을 하고 지나갑니다. 전기를 만질 줄 아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모이는 목적에 따라 조명을 설치하고, 모든 사람이 구석구석에서 이렇게 설교를 정확하게 들을 수 있도록 방송설비의 테크네를 가진 사람들이 시설을 하고 감으로써 공사가 완결되는 것입니다. 각각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테크네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고, 각자 자기 테크네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건물을 짓는 현장에는 이 건물을 짓고자 하는 모든 의도를 완전히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 사람이 그 수십 개의 테크네들을 어떻게 엮어서 건물을 짓는 사람의 의도를 실현할 수 있을지를 아는 다른 모든 테크네에 속하지 않는 제 삼의 테크네를 필요로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여러 개의 테크네를 통합하여 하나의 건물의 목적을 완성하는 아르케 테크네 아키텍쳐인 것입니다.
우리는 각각 사람들이고, 사람은 각각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학생은 공부하는 사람이고, 사업가는 돈을 버는 사람입니다. 운동선수는 경기를 하는 사람이고, 군인은 전쟁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 그러면 모든 것이 명료합니다. 그러면 좋은 학생 누굴까요? 공부를 잘하는 테크네를 가지고 있는 학생이 훌륭한 학생입니다. 사업가는 돈을 잘 버는 테크네를 가지고 있으면 탁월한 사업가가 됩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은 탁월하게 전투를 잘하면 훌륭한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운동 경기에서 어떻게 승리하는지를 알고 그대로 할 수 있으면 그는 최고의 운동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자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공부하는 사람, 운동하는 사람, 전투하는 사람, 사업하는 사람이라고 사람을 규정하였을 때에는 누가 탁월한지를 재는 게 기준이 뚜렷하고 아주 간단합니다. 그런데 앞에 수식어를 다 떼버립니다. 왜? 공부하는 사람도 사람이니까 공부를 하고, 전투하는 사람도 사람이니까 전투를 합니다. 사업하는 사람도 사람이니까 사업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뭘 하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그냥 사람으로서 누가 훌륭한 사람이냐 라고 할 때에는 이 대답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돈을 버는 테크네가 있으면 부자가 될 것입니다. 돈만 버는 테크네가 있는 게 연애할 줄 아는 테크네가 있습니다. 그러면 혼기가 늦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 테크네를 사용을 해서 자기에게 맞는 사람을 고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은 돈을 벌 수 있는 테크네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도 벌었습니다. 그리고 사업을 할 수 있는 테크네도 가지고 있어서 사업도 잘하고 그래서 모든 테크네에 뛰어나서 아주 뛰어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이것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돈 버는 테크네, 공부하는 테크네, 연애하는 테크네 이 모든 것을 사용해서 인생이라고 하는 집을 전체적으로 지을 수 있는 아키텍처의 테크네를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학교에서 공부를 해서 체득할 수 있는 테크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 테크네를 가르쳐 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어떻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대로 인간으로 지으신 그 의도대로 살아서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자신도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목표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목표는 천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람다운 삶을 살게 함으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그의 인생을 통해 구현하며 행복하게 살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그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가는 귀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를 위한 건축자이시고, 인간은 창조된 모든 것들을 사용하여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 건축자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
하나님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시지만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에게는 정복하고 미지의 땅을 개척할 수 있는 능력과 도전 정신을 주셨고, 여자들은 이런 새로운 정복과 개척 보다는 이미 획득된 영토를 잘 가꾸고 돌보아서 생명과 사랑으로 풍성하게 하는 일에 더 큰 이바지를 할 수 있도록 성향을 부여받았던 것입니다. 더 큰 집, 더 으리으리한 집 이런 것들은 대부분 남자의 욕망이고, 여자들은 그런 것보다는 앞뜰에 무슨 꽃을 심고, 무슨 풀을 심고, 그리고 집안에는 무슨 가구를 들여놓고 어떠한 식탁에 앉아서 가족들이 함께 차를 마시고, 교제할까 하는 질서와 그리고 그 풍성한 생명의 나타남에 관심이 있습니다. 물론 복부인들은 예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인간을 매우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거의 하나님에 버금가는 능력을 주시지 않고는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이 거셨던 기대대로 인간이 살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이 매우 완전한 존재로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아주 탁월한 존재로 창조하셨고, 또 그 부름 받은 지위 자체가 매우 고귀하기 때문에 그를 존엄한 존재로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깊이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의해서 밖으로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을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존귀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법은 그것을 명시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가진 재산과 지위, 그가 가진 용모, 이런 것들에 의해서 그 사람의 높고 귀함이 각각 다르게 매겨집니다. 신앙의 깊이는 이 모든 눈에 보이는 잠세적인 것들을 뛰어넘어 인간 그 자체가 어떤 형편에 처해있든지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 자녀든 혹은 포악한 그런 불신자이든지 간에 그가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을 가진 사람임을 직시하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 신앙의 깊이를 드러내는 대목인 것입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여러분들이 훈련해야 하고, 이 세상의 시루에 휩쓸리지 않고 가장 비천해 보이는 사람도 그 안에서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존엄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매우 탁월한 능력과 지위를 주셨습니다. 천상 세계는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셨지만 지상의 세계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천사도 인간을 호령하지 못하도록 높은 지위를 주셔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이 세계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끔 정복하고 통치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단어는 가끔 의미의 차이가 없는 동일 의미의 이어적인 반복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내포하고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자연의 세계 속에서 만물의 법칙들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이고, 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었던 원의의 자질이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 원의는 산산이 부서져 거의 흔적이 없이 사라졌지만 자연적인 능력은 거의 손상을 입지 않고 남아서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과 물질문명에 위대한 진보를 이루어 냈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은 이 원의의 자질이 무엇인지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의로움과 지식, 그리고 거룩함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하기 전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던 그 영혼의 탁월한 특성이 하나님의 법대로 그 앞에 올바른 의로움과 하나님을 아는 충만한 지식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모든 피조물과 구별된 의로움이었던 것입니다. 타락과 함께 이것은 거의 모두 파괴되어 버렸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순간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 안에 회복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처음 타락하기 전 인간 안에 있던 것과 같이 완전한 형태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회복된 형태이기 때문에 일생을 살면서 성화의 길을 가 이 의로움과 지식과 거룩함에 있어서 온전한 존재가 되어감으로써 참으로 탁월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자연적인 능력과 그리고 이 탁월한 영적인 자질로서 위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 그 분을 알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 속에 있는 물질의 법칙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의 법칙들을 발견하여 이것들을 체계화하고 연결함으로써 학문의 진보를 이루고 이것을 토대로 물질문명을 이루어갈 능력을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더욱이 인간 속에 있는 이 모든 영혼과 마음의 작용까지 깨달아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질서를 구현함으로써 문명과 문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이 두 가지를 발전시킴으로써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이 세계의 원 저자시라는 것, 지금도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그 찬란한 영광과 사실들을 세계에 드러내고, 자신은 그 드러나는 하나님의 목적을 보면서 행복한 존재가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예화) 저는 작년 12월 유럽으로 출장을 가면서 EBS에서 제작한 자본주의 5부작을 가는 길에 모두 시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있던 터에 지난주에 우리 청년 일군들 MT에 가고 오면서 SBS에서 창사 특집으로 제작한 최후의 제국이라는 시리즈를 두 편을 시청하였습니다. 그 제목이 “Last Capitalism”인데 그 제목의 의미는 이 자본주의가 인류의 물질문명을 폭발적으로 발전시킨 훌륭한 사고의 체계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무너져야 하는 마지막 제국일지도 모른다는 의미에서 제목을 그렇게 붙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잠깐 소개하는 것이 오늘 이 주제를 설교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리라고 믿기에 잠시 소개를 드립니다. 카메라는 제일 먼저 상하이의 한 산후 조리원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자매들이 아이를 낳고 집에서 누가 해산관을 해줄 수 없기 때문에 들어가는 곳이 산후 조리원이고, 거기에서 도우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건강을 회복하고 오는 곳을 우리들이 산후 조리원이라고 합니다. 한 달에 200만원부터 시작을 해서 2000만 원짜리까지 있다고 했는데, 그 2000만 원짜리는 두 사람의 도우미가 고정적으로 배치되고, 100평의 펜트하우스에서 그래서 온갖 서비스를 받으면서 한두 달 동안 몸을 푸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돌보아주는 것은 물론 목욕까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씻겨주고 심지어 앞에 있는 꽃밭에 원하는 꽃은 무엇이든지 말만하면 그날 안에 시장에서 사다가 심어준다고 하니 원예사까지 딸린 산후 조리원입니다.
2000만원도 어마어마한 가격이라 하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5000만 원짜리 산후 조리원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5000만 원짜리 산후 조리원은 수백 평으로 된 저택의 공간에 다섯 명이 넘는 도우미들이 분야별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돌보아주고 목욕시켜 주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를 이렇게 피부 관리 해 주고 그리고 트레이닝까지 시켜줘서 몸매를 회복하게 하는 도우미부터 잔심부름을 해주는 도우미까지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이 그렇게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한 달에 5000만원이라고 합니다. 중국에서 괜찮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기업에 취직한 청년들이 50만원을 받으니까 매일 석 달 치 월급을 지급하면서 그 산후 조리원에 있는데 거기 들어올 사람들은 그 5000만원은 아무것도 아닌 부자들이었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아이를 낳고 산후 조리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갓난아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병원에 위탁해서 젖을 짜게 하고, 그 젖을 성분 분석해서 누구의 젖이 영양가가 높고 유량이 풍부한가를 측정해서 그를 선택하여 산후 조리원에 함께 기거하게 하고, 자기 아이의 젖을 먹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아이를 남의 젖을 먹이면 자기 젖은 뭐하려고 가지고 있는 거냐? 그거는 이제 원래의 아름다운 가슴으로 복구시키기 위해서 자기 젖은 짜서 버리고 트레이너들이 맛사지를 하고 운동을 시켜서 젊은 그 몸매로 돌아가게 해 주기 위해서 아이를 떼어놓는 것입니다. 아이와 완전히 떨어진 상태에서 필요하면 가끔 가서 보고 이 자매는 어머니로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여가를 즐기기를 두 달 내지 석 달하고 퇴원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화려한 생활을 하는 부자들 바로 그 건물 아래에서는 하루 1000원이면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데 그 식사비용이 없어서 굶주린 채 골목 여기저기 웅크리고 있는 소위 농민공들, 농촌에서 도시 노동자로서 일하기 위해 올라온 2억 명의 눈물 나는 생활을 함께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카메라는 다시 미국으로 옮겨집니다. 우리는 서브 프라임 사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고, 이것은 그저 아마 미국 사람들을 굉장히 불편하게 만든 힘든 경기 침체였다고만 막연하게 이해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실상을 듣고 보니 이것은 우리나라도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사회적 사건이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두 부부가 부자는 아니어도 그저 괜찮은 집에서 세를 내고 살면서 한 네 명의 아이들과 함께 여섯 식구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벌면서 아내도 벌고 남편인 자신도 벌면서 중산층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은행에서 부추기기 시작했습니다. 당신들이 내는 렌트비를 우리 은행에 주면 이 집을 당신 집이 되게끔 대출을 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를 사는 것은 미국이든 우리나라든 서러울 때가 많습니다. “못 박지 마시오, 잔디 제때에 안 깎으면 쫓아내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미국 사람도 스스럼없이 합니다. 집 없는 설움에 힘들어 왔기 때문에 손해 볼 것이 없다는 마음으로 은행에 가서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그 집을 인수했는데 이때는 주택 값이 최고점에 도달했을 때였습니다. 서브 프라임 사태가 터졌고, 그리고 미국 경제에 검은 먹구름이 드리워졌습니다. 문제는 당장 집에서 나가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브 프라임 사태가 나타났어도 제때 할부금을 갚으면 그들의 생활에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내가 해고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수입은 60%로 줄었고, 남편 혼자 벌어서 살기가 바득한데 덜컥 남편도 6개월 후에 해고 통지를 받은 것입니다. 경기가 좋을 때에는 다른 직업을 구하면 됐는데 이제는 자기가 들어갈 만한 사업체들은 모두 사람을 고용해 주지 않는 불경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렌트비를 낼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할부금을 갚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해 전 미국에 갔을 때 성공한 사업가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분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목사님 한국 사람들은 미국을 너무 모릅니다.” IMF가 났을 그때에 미국한테 기업을 막 팔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팔면 한국은 큰일 납니다. 미국의 자본주의는 무시무시한 자본주의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주의입니다.” 그것 때문에 미국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무시무시한 자본주의는 이 불쌍한 가정에 적용되었고 그들은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이러한 위기를 겪으며 집을 잃어버린 Homeless들이 되어 버렸는데 그들을 위해서 정부에서 마련한 집은 없습니다. 이렇게 집을 잃은 사람들 중에서 그래도 좋은 형편에 있는 사람들은 모텔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한 달에 800불에서 1200불정도 내면 작은 방을 하나 빌려주고 여기에 6식구 내지 7식구가 살고 그리고 화장실을 주방으로 대충 만들어서 빵도 버터에 발라먹고 그리고 마카로니도 끓여먹는 이런 비참한 생활을 하는데 이 사람들은 그들 중에서 굉장히 형편이 좋은 사람들이고,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최소한 한 달에 1500불의 수입을 얻고 있는 사람들이 그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집이 없으니까 자동차에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자동차에서 자고 밖에 나와서 밥을 먹고 그리고 자동차에서 다시 잠을 자고 이렇게 하면서 일거리도 없이 이제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자동차가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형편이 좋은 사람들이고 그마저 빼앗기고 차압당하고 없는 사람들은 다리 밑에 홍수가 지면 물이 쏟아져 흘러가는 그 콘크리트로 된 하수도에 텐트를 치고 그리고 구역별로 가족 단위로 나뉘어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들 위에는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다운타운이 펼쳐졌습니다. 결국 이 사람들의 가난의 문제를 국가가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 음식점이나 식료품 가게, 그리고 빵집에서 유통기간이 막 끝나기 몇 시간 전의 물건을 일정한 도시에 버리는 대신 거기다 갖다가 놓으면 자원 봉사자들이 와서 나누어 주는데 이 빵으로 연명하는 사람이 3700만 명, 매일 3700만 명이 이 빵을 받아가지고 가서 한 끼라도 먹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학생 다섯 명 중 한명은 아침을 못 먹고 학교에 나오는 학생입니다.
2012년 10월 둘째 주에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에 특집 기사가 실렸는데 부자와 가난은 어떻게 미국에서 대물림되는가 하는 주제였습니다. 그 특집에서 기고자는 미국의 자본주의의 맹점을 지적하면서 미국의 부자들은 제일 먼저 입법부에 로비를 하고 실력을 행사해서 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개정하거나 제정하여 혹은 유지해서 막대한 수입을 챙기고 두 번째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최상의 교육을 시킴으로써 그 자녀들이 우수한 학생들이 되어 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그들끼리 끊임없이 인맥을 형성하게 하여 그 부를 공유하면서 자기네 세계를 구축해 나가도록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는 돈이 돈을 버는 사회에서 돈 가지고 돈을 벌면서 부자들의 아성을 유지해 가기 때문에 절대로 개천에서는 용이 날 수 없는 체제라는 것을 고발하였습니다.
미국의 부 44%를 1%의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고, 중국은 41%의 부를 오직 1% 인구가 독차지 하고 있는 부의 불균형을 이루어 냈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의 자본주의는 서로 경쟁을 해서 승자를 만들고, 그 승자와 함께 이룩한 사회 발전의 열매들을 패배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다시 재기할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승리한 사람들은 그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을 밟아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너무 불쌍하면 짓밟힌 채 빵을 먹고 목숨은 연명하게 해 주는데 절대로 다시 일어나서 자신의 상대가 되게 끔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지하도에서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을 이민자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정통 미국인들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자신이 대학에 나왔다는 사실을 소개하면서 자신도 5년 전만해도 이렇게 비참한 노숙자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이제는 이 사회가 너무 두렵고 무섭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결국 아이들은 아주 발달한 물질문명 속에 살아도 그 치열한 경쟁과 빈부의 격차, 그리고 절대로 오를 수 없도록 아성처럼 쌓아 올려진 이 분배 구조 속에서 신음하면서 가난을 대물림 해 가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결국 그러면 이 자본주의는 인간이 마지막으로 도달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회의 모습은 아니다. 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폭발적인 발전과 기여도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극단화될 때에 결국은 얼마나 비참한 세상이 되는가? 결국 자본주의는 승자들만을 위한 자본주의가 되고, 패배한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영광의 그늘 아래 가려서 짓밟히는 비참한 피지배자의 삶을 살도록 강요받는 체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여기에서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라는 사실에 동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작진들은 그러면 이러한 사회의 체제 방식과 다른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대안이 어디 있을까를 연구를 했는데 소문에 듣자하니 태평양 한 가운데 작은 섬이 있는데 한 300명의 인구를 가진 작은 마을인데 3000년째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는 정보를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그 다음에는 배를 타고 그래서 그 솔로몬 제도의 수도에 속한 섬에 도착을 했고, 거기서 자기들이 가야할 섬을 물어보니까 지프에서도 나오지 않은 아주 작은 섬이고 얼마나 가는지도 몰랐습니다. 돛단배 밖에는 없고, 거기에 5마력짜리 엔진을 달고 이제 나침판도 없이 별자리를 보며 자기가 항해사라는 사람에게 몸을 맡겨서 배를 탔는데 하루쯤 가면 도착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 거지같은 배를 타고 13일 동안 항해한 끝에 도착을 했습니다. 크기는 전체 크기가 1km가 채 안 되는 작은 섬이었고, 300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원시인은 아니고 나름대로 학교도 있고 거기서 산수도 가르치고, 언어도 가르치는 그러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들이 도착 했을 때 300명의 모든 주민이 나와서 춤을 추며 환영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오셨군요. 오셨군요. 온다고 편지를 보내셨는데 정말 이 먼 길을 오셨군요. 그 먼 나라 한국에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서 오셨다니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노래를 부르는데 악기 하나 없는 그곳에서 울려 퍼지는 합창 소리가 환상의 하모니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세 살 먹은 아이까지 그래서 잠시 이 제작진들 8명쯤 되는데 이것은 아마 관광객을 위한 예비된 프로그램인가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까 3000년 동안 한 번도 관광객이 온 적이 없답니다. 이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 일행은 그 300명을 모두 한 사람씩 포옹하고 코를 맞추며 인사를 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거기에 머무르면서 그들이 무엇 때문에 행복한지, 어떻게 아이들이 이렇게 아무 물질문명이 없는 세상에 살면서도 이렇게 행복하고 해맑을 수 있는지를 취재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행복한 가정을 가진 애들이 아니라 불우가정 천지였습니다. 왜? 네 집에 한 사람씩 엄마, 아빠가 없습니다. 엄마가 없거나 아빠가 바다에 배타고 나가서 죽었거나 그러니까 네 가정에 한 가정이 결손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이 아이들은 거의 모두 바로 옆집에 자동적으로 입양이 됩니다. 그런데 입양이 되어서 가도 원래의 그 집에 살던 아이들과 추호의 차별대우 없이 형제처럼 어울리면서 삽니다. 왜? 입양되기 전에 뒷집 아저씨는 우리 삼촌 같았고, 옆집 아저씨는 큰 아버지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입양 되어서 한 새 가정에서 아버지가 평소에 아버지 같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일체의 공동체의 삶을 살면서 미국의 얘기를 들려주었더니 그곳의 지도자가 하는 이야기가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아이가 굶는 것은 우리 모두의 가슴 아픈 일이고, 우리는 아이들의 복지를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태풍에 집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나오면 추장은 그들을 자기네 집에서 기거하게 하고 날이 맑으면 이제 온 동네 젊은이들을 불러 집을 짓도록 자기가 현장을 지휘합니다. 모두 집이 지어지면 그 집에 그 가족을 입주 시키고 입주를 축하하는 잔치를 300명이 모두 모여서 함께 잔치를 합니다. 그러니까 하루걸러 한 번씩 잔치입니다. 수없이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햄버거 하나 손에 들지 않았는데도 이 아이들이 발가벗은 모습으로 야자나무를 오르는 웃는 해맑은 미소가 자본주의 국가 아이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해맑고 그늘이 없는 표정입니다.
더 놀라운 일은 한달 동안 취재를 마치고 그들이 그 섬을 떠나던 날 일어났습니다. 이제 그들을 송별을 해주겠다고 그래서 음식을 몇 개 놓고 파티를 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문화였는데 헤어지기 얼마 남겨놓지 않고 마지막으로 온 동네 사람들이 모래 바닥에 동그랗게 앉아서 석별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제작진들은 그 원 한가운데 여덟 명 정도 들어가 있었고, 거기서 석별의 노래는 구슬펐고, 노래를 부르면서 거짓말 같은 충격적인 광경이 전개되었습니다. 세 살, 네 살 된 어린 아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눈물이 맺히는 흐느낌이 아니라 자기 부모가 죽은 것처럼 통곡하면서 울고 어떤 사람은 땅을 치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예상도 못했던 이 광경 앞에 이 제작진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모르는 황당한 상황이 되어서 땅만 쳐다보면서 계속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때에 정말 몇 십 년 만에 그 먼 곳에서 한국 사람이 와서 한 달 동안 살아갈 때에 그들을 가족처럼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헤어져서 다시 못 만날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을 하게 되니까 이들의 이별의 슬픔이 그들의 마음을 에이면서 통곡과 눈물을 자아내서 마치 거대한 장례식장을 연출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왜 드리는지 아십니까? 만약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이 건설하고 싶으셨던 인류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를 여러분들에게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들도 죄인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목적을 충분히 실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더러운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 끔찍한 탐욕과 그리고 인간의 굽어진 욕망으로 얼룩진 이 더러운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이러한 체제를 벗어버리고 욕심을 줄이기만 해도 놀라울 정도의 평화와 행복이 인간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일반 은총의 차원에서도 입증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도 한 300명쯤 모두 모집을 해서 전 재산을 정리해서 그래서 버려진 섬 하나 구입하여 거기 가서 단체복 입고 그렇게 살까요? 물론 그것도 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아마 거기서 그렇게 살면 하나님 우러르고 예배하면서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깨끗하게 살다가 죄 덜 짓고 죽을지 모릅니다. 두고 가는 이 세상은 더 비참해질 텐데 그렇게 팽개치고 저만 살겠다고 도망 치는 게 과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예수님이 제일 큰 실수를 하신 것입니다. 저 높고 높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죄인들이 우글거리는 이 더러운 세상에 사람의 몸 입고 구유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무 생각 없이 우리들이 이 비참한 세상에서 우리도 한 푼 더 벌고 이기기 위해서 경쟁에서 남을 짓밟아 이기기 위해서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하겠는가 이것 역시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이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정정당당하게 경쟁하여 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존 오웬도 자본주의 문맥은 아니지만 유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원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분깃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강제로 빼앗을 수는 없으니까 경쟁하고 실력으로 승부해서 차지해야 한다. 그들의 손에 돌아갔더라면 탐욕과 죄악으로 물들 이 땅을 우리가 손에 넣어서 재분배하여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이 물질들을 우리에게 주신 본래의 목적을 구현하면서 살아야 된다.”라고 말입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똑같이 적용하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를 저한테 들으면서 “그래 맞아. 공부는 해서 뭐해” 하고 학생이 연필을 놓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 맞어. 시집은 가서 뭐해? 장가는 들어서 뭐해?” 그러고 손 놓으면 이거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모든 사람이 실의 속에서 손을 놓게 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이루어질까요? 그래서 당당하고 실력으로 승부해서 이 경쟁 사회 속에서 이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들은 탐욕이 승리를 쟁취하게 만들었지만 여러분들은 탐욕이 아니라 까리따스의 사랑이 승리를 쟁취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할께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멘. 그게 바로 성경적인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원의의 자질 안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께 사랑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날마다 진리와 성령으로 정화된 영혼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데 이바지하면서 사는 것, 그래서 나라는 인간 하나가 태어나 이 땅에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될 수 없는 어떤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나의 생애 때문에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 일을 오늘 성경에서 선한 일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인간이 우리가 구원받기도 전, 예수가 오시기도 전, 인간이 타락하기도 전부터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예비하신 것이고, 이제 그렇게 살 수 없었던 우리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구속하셔서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께 대한 무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제품 사용설명서를 읽지 않고 물건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두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철물점에서 드라이버 두 개를 사가지고 왔는데 설명서를 읽어보지 않아서 가지고 오면서도 무엇에 쓰는 물건이고 하고 집에 와서 식탁 위에 놓았습니다. 이튿날 집에 식탁에 음식이 차려졌을 때 드라이버 두 개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김치를 몇 점 먹었다고 해서 이변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제품이 독성을 가진 약품일 경우에는 언제 누가 얼마만큼의 약을 복용하느냐에 따라서 죽을 수도 있고, 살 수 있기 때문에 이때에 이 사용 설명서를 참고하지 않는 것은 유서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은 인생 사용설명서를 얼마나 읽어보았습니까? 과연 인생 사용 설명서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이라도 알고 있습니까? 기독교는 모든 인간에게 바로 어떻게 사업해서 돈을 벌 수 있는지, 어떻게 미용을 해서 예쁜 여자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공부하면 우등생이 될 수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가르쳐 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우선적인 관심사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관심사는 운동 잘하는 운동선수, 공부 잘하는 학생, 전쟁 잘하는 군인이 아니라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 이것이 성경의 관심사이고 이 인간 사용 설명서가 바로 기독교의 진리의 내용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올바로 영위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진리의 빛에 대한 숙고, 구원이 필요한 우리의 비참한 존재에 대한 숙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놀라운 은혜의 숙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의 빛 아래에서 우리가 누군인지를 알게 되고,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사용 설명서를 읽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아무리 발달한 물질문명을 구가하며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의 양태가 결혼하고, 시집가고, 부자가 되고 사업에 성공하고 아마 여러분들 중에는 20년 후에 전화해도 만나기 어려운 사이가 될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왜? 한쪽으로 너무 부자가 되고 고위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런 양태가 끊임없이 바뀐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피할 수 없는 근원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들이 적절하게 답을 갖지 않으면 우리는 공부 잘하는 사람, 예쁜 사람, 사업에 성공한 사람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탁월한 사람이 되어 행복하게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II. 피할 수 없는 근원적 질문
어떤 권사님이 꿈을 꿨답니다. 사후의 세계가 있더랍니다. 예뻐 보이지 않는 천사 앞에 서게 되었는데 그 천사가 엄중하게 묻더랍니다. “너는 누구냐?” “저는 김 광자입니다. 나이는 68세이고 아무개 교회의 권사입니다.” 그랬더니 그 천사가 말하더랍니다. “그 이름은 세상에서 너를 찾을 때 부르는 거고 나는 너의 이름을 물어본 게 아니라 너의 종교를 물어본 게 아니라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다시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자랐고, 기독교인이고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였으며 두 아들과 세 딸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랬더니 그거는 가족관계고 “나는 니가 누구냐고 묻는 거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그랬더니 이 권사님이 꿈속에 울부짖으면서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제발 누가 내가 누군지를 가르쳐 주세요”하고 울부짖다가 꿈을 깼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갓 태어나서 갓난아이일 적에는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엄마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그 엄마 품에서 젖 물고, 그리고 엄마 손가락 붙들고 하늘 쳐다볼 때에 큰 엄마 얼굴이 보름달처럼 뜨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욕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라면서 이 아이가 이제 유아기를 넘어서고 자라게 되면 놀이에 빠지게 됩니다. 갓난아이일 적에는 엄마 얼굴, 엄마 젖가슴이 최고의 인생의 목적인 줄 알았던 아이의 사고에 변혁이 온 것입니다. 장난감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그리고 놀이에 몰두하고, 놀이를 재밌게 놀면서 지내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목적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다 유치원을 지나 초등학교 다닐 때쯤 되면 친구 사귀는 재미에 빠지게 되고 이제 집에서 구박받는 것은 참을 수 있는데 친구들에게 왕따 당하는 것은 너무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그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대학도 들어가고 이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게 되면 젊은 시절의 육욕을 따라 쾌락에 빠지는 것, 죄를 짓는 쾌락이 아니더라도 젊음을 발산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치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제 결혼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이성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가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상대방보다 더 뛰어난 존재가 되고자 몸부림치는데 이때가 되면 성공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처럼 삽니다. 그러다가 한 40대 초반이나 중반쯤 지나면 이렇게 몸부림 쳐봐야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 자기가 이루고자 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꿈들을 자기의 자식들에게 투사시켜서 그래서 그들이 자기의 꿈을 뒤이어 이루게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고, 이때가 바로 기러기 아빠가 양산되고 소위 이야기하는 에듀푸어, 돈을 벌어서 과외비 대느라고 거지같이 살아가는 부모가 되는 시기가 바로 이때입니다. 그때는 그것이 인생의 최고의 목표인줄을 알고 삽니다. 그것만 성공하면 행복할 수 있을 것처럼 삽니다. 그러다가 이제 자녀들이 대학도 다 나오고, 각자 능력을 따라서 공부를 마치게 되면 이제 결혼이 가깝고 그때 비로소 성공이고 높은 지위이고 다 필요 없고, 실속 있는 것이 최고다 재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돈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고 노후를 위해 보험을 들듯이 재산을 그렇게 증식시키고, 재산을 움켜쥐는 것이 말하자면 중요한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은 자식들 하나씩, 둘씩 보내면서 그 재산이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면서 이제 나눠주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유산을 일부 나누어 주면 볶여서 죽고, 그 다음에 전부 나눠주면 굶어죽습니다. 간이 커서 안 나눠주면 맞아 죽습니다. 결국은 자식들도 이제 각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그 부담에서 많이 뜯기긴 뜯겼지만 그러나 살아남았습니다. 마치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처럼 이제 양쪽에 참치를 잡아갖고 오다가 다 뜯기고 뼈하고, 머리, 꼬리만 남긴 시체 같은 참치를 메고 돌아오는 어부처럼 말입니다. 그래도 살아남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재산도 별 볼일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 젊었을 때는 너 어느 대학 나왔니? 1류다 2류다 그러지만 50넘어가면 학력 평준화입니다. 왜? 고졸이나 대졸이나 1류나 2류나 깜박깜박 잊어버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다음에 70정도 넘으면 이제는 경제 평준화입니다. 왜? 아니 젊었을 때에는 빈부격차에 따라서 무엇인가 살아가는 삶의 양태가 현저하게 달랐지만 이제 70 넘어서 삶의 양태가 뭐가 다르겠습니까? 70넘어서 할머니 된 사람이 돈 많은 할머니라고 에버랜드 가서 롤러코스터를 타겠습니까? 와이키키에 가서 빨간 비키니를 입겠어요? 돈 없는 노인네는 학고방에서, 돈 많은 노인네는 45평 아파트에서 된장찌개나 퍼먹으면서 노년을 보내니까 경제 평준화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것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손주들이 막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직장 가야 되니까 얘 좀 봐 주세요 하면 처음엔 죽기보다 싫었는데 아, 요것들이 곰실곰실하면서 자라는 것을 보니까 너무 행복한 것입니다. 엄마, 아빠는 쳐다도 안 봐. 그리고 조그만 애들이 막 뛰어오면서 할머니, 우리 할아버지 하면서 품에 안길 때 마치 얘네들하고 이렇게 행복하게 지내는 게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처럼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유효기간은 초등학교 6학년까지입니다. 6학년 끝나고 나면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 찾지도 않고 할머니가 1층에 내려오면 애들은 2층으로 올라가고, 할아버지 2층으로 올라가면 애들은 1층으로 내려옵니다. 왜? 이제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에 비로소 이제 자기가 인생의 구간 구간 마다 이게 인생의 목표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목표가 아니라 어느 시기 동안에 착시 현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의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 전체를 걸 정도로 항구적인 가치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70 넘어서 이제 고독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뭘 위해서 살아왔나 하는 회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고, 우리의 인생의 사용 설명서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확고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우리는 바람처럼 사라져 가는 것들이 영원한 것인 것처럼 붙잡으려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고, 가치가 없는 헛된 것들을 쫓으며 일생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이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은 원래 가지고 있었어야 했는데 우리들이 잠시 착각을 일으켰고, 어리석었기 때문에 버린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가난한 시골에서 부모님과 함께 속박 받으며 사는 것이 싫어서 그래서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도시로 올라옵니다. 그리고는 성공하기 전에는 다시 시시한 시골 촌구석에 돌아오나 봐라 그리고 갑니다. 도시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 매몰되어서 자기도 무엇인가 뜻을 이루어 보겠다고 미친 듯이 살아갑니다. 그러다 결국은 이렇게 저렇게 패배하게 되고, 모두 패배한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승리하였다고 할지라도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남의 것을 아무리 빼앗아도 채워질 수 없는 인생의 본질적인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것은 내게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경쟁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때에 그리움처럼 밀려오는 회한이 바로 고향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그리고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던 것처럼 그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을 때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풍족함과 두 번째는 아버지와의 관계였습니다. 그 풍족함은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 풍족함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와의 관계로 돌아가면 이러한 결핍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방이 그 관계 안에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고, 아버지가 그를 다시 아들로 맞아 주었을 때 타향에서 잃어버렸던 모든 것들을 아버지와 함께 그는 되찾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탕자의 귀로입니다.
V. 적용과 결론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일체의 진지함을 요구하고 숙고를 요청합니다. 장난스럽게 그렇게 예수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 신앙을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무엇에 쓰시려고 여러분들을 사람으로 만드셨을까요? 하나님이 무엇에 쓰시려고 여러분들을 이조시대도 아니고 23세기도 아닌 바로 이때에 이 나라에 태어나 우리를 이 교회에서 서로 만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으로 지으셨습니다. 우리를 사람으로 지으신 것은 선한 일을 위하여 힘쓰기 위함이니 이 선한 일은 바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 우리를 지으신 그 의도를 충분히 구현하면서 사는 삶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람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탕자의 피곤한 길에서 자신의 인생의 모든 이 불만족과 이 모든 비참함과 이 모든 비극의 궁극적인 원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깨닫고, 복된 회심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이 아름다운 복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이렇게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의도를 올바로 알고 그 하나님을 경배하며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정정당당하게 경쟁하여 승리자가 되고, 그래서 얻은 모든 이 세상의 자원들을 예수 이 땅에 계셨더라면 나눠 주셨던 것처럼, 쓸 것처럼 그렇게 베풀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단 한 뼘의 땅만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목적대로 돌아가도록 이바지하면서 사는 그 안에서 여러분들은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으며, 여러분들은 잠시 이 세상에 살다가 태어나 흘러가고 늙고 소멸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지만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잇대어 살 수 있는 지복의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창조하셨고, 여러분들이 주님을 버리고 타락하였기에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셨고, 구원하셨기에 여러분들을 여기에 모으셔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오늘도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들을 담금질 하시는 것입니다. 이 창조의 뜻대로 살아가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께 기쁨이 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기쁨 때문에 여러분도 기뻐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4 (2013.02.03 주일설교)
4.선하신 하나님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34: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블레셋의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다윗은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각이 되었습니다. 그 싸움은 기적적인 승리였습니다. 이후로 민심은 다윗을 향하게 되었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 왕은 그를 몹시 시기하였습니다. 살해 위협까지 느낀 다윗은 급기야 이스라엘을 탈출하여 블레셋 땅 가드에 이르게 되었고, 그곳에서 은신하였습니다. 신하들이, 그곳 신하들이 다윗이 바로 그 사울을 능가하는 새로운 지도자임을 알아보았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다윗은 대문에 그적거리며 침을 질질 흘려 수염에 바르면서 미치광이 흉내를 내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위기에서 탈출하였습니다.
이 시편 34편은 바로 그러한 다윗의 고난의 때에 지은 시입니다. 수염은 당시 남자의 존귀의 상징이었는데 여기에까지 침을 바른 것은 남자로서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미치광이 짓을 해서 겨우 목숨을 건졌는데도 그 고통 속에서 시인의 마음속에서는 자기에게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벅차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어떠한 형편에 놓이든지 두 가지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그 난관에서 벗어나올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나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고 어느 처지에 있든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면 내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선을 이루는데 사용할 것이라고 하는 확신 말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경과 시련을 당할 때에라도 우리의 지성이 언제나 살아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에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다면 주님은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II. 선하신 하나님
A. 하나님 자신이 선이심
성경이 우리에게 변개할 수 없으리만치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선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이 선이라고 하는 단어가 처음 쓰인 곳이 창세기 1장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세계를 모두 창조하신 후 하나님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심히 좋았더라” 할 때에 이 ‘좋다’가 히브리말로 ‘토브(b/f)’입니다. 그래서 이 피조물을 보고 하나님이 좋다 라고 하신 것은 당신의 의도한 대로 창조되어 당신이 원하는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0년 전에 다 부서져 가는 공장 건물을 여기에서 리모델링을 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제가 진두지휘를 하게 되어서 배우면서 건축 일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창조의 기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고통 속에서 맛보았습니다. 마음속에 이런 예배당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그림을 그리지만 실제로 공사가 완료되었을 때 어떤 모양이 될지는 짐작만 할 뿐 모릅니다. 그때에 모든 공사가 끝났을 때에 내가 원하던 의도대로 그대로 되었을 때 이 속에서 창작의 기쁨이 넘칩니다. “야 이게 그대로 됐구나.” 그때에 혼자 하는 말이 “야, 참 좋다” 할 때 그것이 ‘토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선하시다 라는 표현을 쓸 때에는 하나님 자신이 그 모든 선한 것에 원천이라는 의미이고, 피조물에 대해서 저것이 선하다 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이 그것들을 지으신 목적에 맞게끔 잘 존재하거나 작용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종종 자신의 계획과 실제의 행동이 모순될 때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몸의 신진대사가 젊었을 때 같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이 섭취하는 열량을 충분히 태워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덜 먹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제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생각합니다. 얼굴도 그렇게 잘생긴 편이 아닌데, 이렇게 배는 나오고 원하지 않는 부위에 살들이 이렇게 많이 붙었을까? 그리고 마음속으로 날씬한 여성들을 생각하면서 자매들이 다이어트를 결심을 합니다. “안 먹을 거야, 운동할 거야, 그리고 날씬해 질 거야. 예뻐질 거야.” 그 계획은 건강을 위해서나 외모를 위해서나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맛있어. 맛있어도 너무 맛있어.” 그래서 밤마다 치킨을 먹어. 이것은 계획은 선하지만 실제 행동은 이 선한 계획에 모순이 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상충되는 모순의 행동은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실 수가 없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고 조금 반감이 느껴졌던 명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라는 명제 말입니다.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보고는 이기적으로 살지 말라고 하시면서 당신은 왜 그렇게 이기적이실까?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서 이것이 얼마나 유치한 생각인지를 이성적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이 서로 모순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기심이 많다 라고 할 때에는 그 이기심이 최대한 발현되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어 있습니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욕망은 이기심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공기를 많이 흡입하고 싶은 마음, 이기심이라고 얘기 안합니다. “마셔. 얼마든지 마셔” 그래서 이기심이 발현되면 누군가가 피해를 입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장 이기적이실 때 하나님 아닌 모든 피조물들은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여러분이 사는 것을 이렇게 바라보십니다. 그런데 진짜 못됐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그러면서 나쁜 짓은 골라하고 이기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야? 어, 왜 저래? 어, 정말 이해할 수 없어.” 그 사람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표현대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이기심이 발동했습니다. “내 명예를 이런 상태로 놔두어서는 안 되겠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예수를 믿게 만들어서, 혹은 제대로 믿게 만들어서, 회개하게 만들어서 여러분을 변화시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타이르시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징계를 통해서라도 회개하게 하셔서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사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 가는 곳마다 “저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야? 믿어도 너무 잘 믿는구만. 훌륭해.” 이래서 주님의 이기심이 충족되었을 때 여러분이 뭐 손해나는 게 있습니까? 이해됩니까? 명쾌하게 이해되는 표정을 해야지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이기심은 이타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정으로 당신을 위하실 때에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는 이타적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선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인간이 겪는 악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경험되는 악과 고통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이렇게 비판합니다. 신이 있다면 세상이 왜 이렇게 고통스럽고 악하냐 묻습니다. 세상이 고통스럽고 무질서하기 때문에 신은 없다는 증거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왜 세상은 꼭 당신 생각하기에 질서가 있고 모든 사람이 행복해야 하느냐? 왜 이 세상이 반드시 행복하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 라고 하는 세상이 되어야지만 정상이다 라고 생각하는 그 기준은 어디에서 가져온 것이냐? 그래서 알빈 플란틴가라고 하는 기독교 철학자는 말하기를 선과 악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신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신이 없으면 선악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데 어떻게 선과 악의 대조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고, 이 상태가 선하다, 악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B. 인간이 겪는 악과 고통
인간은 하나님이 선하심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악을 겪고, 고통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성경은 이 악과 고통의 원 저자가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 저자가 아닌 것이 하나님의 의지에 거슬러서 이 세상에 도입된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못 막아 주신 것인데 그러면 과연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능력이 있는데도 못 막아 주었다면 그 하나님은 무능한 하나님이고,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는데도 안 막아주셨다면 그 하나님은 완전히 선하신 하나님은 아니지 않는가 라는 반론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은 하나님이 선하지 않거나, 완전한 능력을 갖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악하게 되기를 원하시지는 않지만 인간을 그렇게 위대하게 창조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담과 하와 자신 뿐 아니라 태어날 모든 인류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집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의 관계도 파괴되었고,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방황하는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선악과 하나를 따먹은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묻고 싶습니다. 만약에 그 선악과를 개가 따 먹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닙니다. 개는 언약의 당사자도 아니거니와 선악과의 의미 자체를 모르는 피조물이었기 때문에 따 먹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 처음 온 사람이 자기도 먹는 줄 알고 성찬을 받았다가 “애게 요만한 떡을 먹어서 뭐해? 안 먹어.” 이렇게 말했다면 죄가 아닙니다. 근데 성찬의 의미를 모두 안 신자가 그 떡을 받아서 땅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로 밟아버렸다면 그것은 중대한 범죄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가 갖는 성내전적 성격입니다. 단순한 과일이었지만 과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금하신 명령이 거기에 의미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 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길 때에 자기와 하나님은 물론 모든 인간, 이 모든 세계가 어두운 심판과 재앙의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얼마나 위대한 존재로 여기셨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 한 사람이 불순종할 때에 그렇게 엄청난 재앙을 이 세상에 내리셨다면 반대로 그 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것을 얼마나 위대한 것으로 여겼는지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습니다. 만약에 이 창조된 세계가 완전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셨고, 그래서 당신이 행하신 일도 완전하였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무한히 완전한 분이었고, 하나님이 만드신 이 모든 피조 세계를 제한된 범위 안에서 완전한 것들로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하게 창조된 인간과 함께 아주 아름다운 질서를 영적인 세계와 물질의 세계 속에서 동시에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하기는 했지만 불완전한 존재였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의지로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재앙이 임하였고, 그래서 결국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악과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고 선하신 분인데 왜 이 악과 고통을 이 세상에 허락을 하실까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 대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고 선하신 분이지만, 인간을 그렇게 위대한 존재로 여기셨기 때문에 인간이 한 행동이 그 결과로서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을 허락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고통과 악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그 악과 고통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신 증거를 이 세상에 나타내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죄의 어두움과 고통의 흑암은 불꽃처럼 하늘을 향해 타오르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사랑을 보여주는 배경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대게 세 가지 통로를 통해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첫째는 악한 인간들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됩니다. 악한 인간들이 하나님 없이 행복해지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결국 누군가에게는 고통을 주어야 하고, 누군가에게는 손해를 안겨주어야 하는데 이렇게 하나님과 상관없는 행복을 찾으려는 인간들이 끊임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혹은 하나님이 있다고 할지라도 마음에까지 하나님을 두기는 싫어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 세상은 고통에 물들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자기의 죄로 인해서 인간들은 악을 당하게 됩니다. 인간이 당하는 대부분의 고통은 자신의 오류, 그리고 자신의 불순종, 자신의 죄의 대가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창조의 목적을 떠나 살면서 고통을 당할 때에 인간은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은 안 계신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창조의 목적을 떠나 살 때에 인간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선하신 분이시라는 웅변적인 증거입니다.
어렸을 때에 부모님이 안 계셨으면, 선생님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봤으면 하고 생각하던 시절이 우리 모두에게 한번쯤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행할 일을 행하지 않거나 본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에 부모님은 우리를 벌주시고, 선생님은 우리를 꾸짖습니다. 그때 우리는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고통을 느끼게 되고 이것은 나쁜 것이라는, 내가 원하는 상태가 아니라는 느낌을 갖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잘못하고 있을 때에 부모님이 나를 때리고, 선생님이 나를 벌주시는 것은 그분들 마음 안에 우리가 올바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의지가 얼마나 큰 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가 악을 행하고 고통을 당할 때에 우리가 괴롭고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를 선으로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은 선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악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훌륭하게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는 자연적인 질서 때문에 인간은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인간은 불멸하도록 완전한 존재로 창조되었고,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태어남과 성장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늙음이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완전성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최고도로 도달할 때까지 성장하고 그 상태에서 영원히 불멸하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자연의 세계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고, 여기에서 수많은 질병과 재앙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완전하고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과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세상이 결국 하나님이 원 저자는 아니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악과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선하신 분으로 살아 계시다는 사실 객관적인 그 사실 자체로만은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III. 하나님의 선을 경험하라
A. 있는 선과 경험한 선
그래서 오늘 시인은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쓴 시입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도 믿고 있었고,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이 그들의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에게 촉구하였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맛보라 그리고 볼지어다”라고 히브리어 성경에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 하나만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여야 할 필요성을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객관적인 선하심은 주관적으로 신앙 안에서 우리에게 경험될 때에 바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뛰어나신 위대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티끌과 같은 나 같은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고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존재하는 선과 경험하는 선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온 땅과 만물위에 초월하시고 우리가 그 사실을 믿든지 안 믿든지 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맑은 하늘 아래 졸다 깬 개들 몇 마리가 하늘을 향해 짖어댄다고 태양이 빛을 잃겠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이 살아 계신이 안 계시니 혹은 하나님이 좋으니, 나쁘니 떠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태양처럼 언제나 변함없이 거기 계셔서 당신의 선하심을 이 모든 피조물에게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 때에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먹여주시고 입혀주신 것이 아닙니다. 모질게 하나님 대적하고 주님께 반항할 때에도 주님이 주신 밥 먹고 힘냈고, 물마시고 기운을 차려서 주님을 거스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계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경험되어질 것을 요청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향한 인간의 태도를 고치게 하시고 당신의 위대한 선하심 안으로 불러들여서 그들도 하나님의 이기심 안에서 행복한 사람들이 되게 하시는 것이 오늘도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인간은 고통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인도 인간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비참한 처지에서 오히려 자신의 처지는 비참하였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되었고, 자신이 비참하였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붙들고 계신 위대한 섭리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거스르며 사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당하게 하셨고, 인간은 그 고통스러운 무질서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 품 안에서 그분의 선하심 안에 평안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본문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는 구절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에게 피하는 자의 행복들이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복이라고 하는 단어는 ‘에쉐르(rv,a,)’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세속적인 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언약 백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축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 오늘 이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했습니다.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치광이가 돼서 쫓겨나올 때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도망자의 신세였고, 그리고 자신의 손에는 떡 한 덩이, 포도주 한 병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받는 복을 충만히 경험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선하심이 자신의 영혼을 어루만졌기 때문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미치광이가 되어서 남자의 존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수염에 침을 바르고 미치광이처럼 다리를 그적거리며 겨우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는데도,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는데도 이 시인의 마음속에는 이 세상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거룩한 행복으로 가득차 올랐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쉐르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고통 받는 여러분이 저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다고 즉시 돈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즉시 여러분에게 건강을 주시거나, 즉시 많은 친구를 주시거나, 즉시 좋은데 시집 장가가도록 만들어 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마는 일상적으로 그 일이 곧 그 일을 불러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에쉐르의 축복은 주십니다.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위로와 사랑, 우리는 끊어진 줄 알았던 하나님과의 그 사랑의 관계가 여전히 지속된다는 놀라운 증거를 보여주심으로 죄악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소외에서 우리를 교제로 불러주시고, 어둠의 오류 속에서 빛의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즉각적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슬픔대신 기쁨의 화관을 쓰게 하시고, 남루한 옷을 벗겨 잔치에 나아갈 새 옷을 입혀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제까지는 기도할 수 없었지만 오늘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시고, 어제까지는 절망을 벗 삼아 슬픔 속에 잠들었지만 오늘은 기쁨 속에서 새 아침을 맞이하게 해 주십니다. 즉각적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에쉐르의 축복입니다.
B.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피함
우리의 마음은 아주 미묘하면서도 갈피갈피 우리도 미처 알 수 없는 죄와 완고함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잘 마블링 된 살코기 사이사이에 스며있는 지방분처럼 우리의 악과 완고함이 갈피갈피에 숨겨져 있어서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모두 모릅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해주시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교만해져서 멀어지고, 고통을 만나게 되면 그것 때문에 마음이 무너져서 하나님을 찾지 않으려고 합니다. 형통하게 해주시면 잘되기 때문에 마음이 굳어지고, 고통을 만나게 되면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돌멩이처럼 굳어집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때려주십니다. 형통하던 사람들에게 주님은 그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기 위해 고통과 시련을 주시기도 합니다. 교만하여 형통함에 살져 지방질이 낀 우리의 마음은 쓰라린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고 그 가운에 우리의 마음 갈피갈피에 깔려있던 마블링이 잘된 고기에 기름 같은 죄의 성분들이, 완고함들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고통 속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희망을 주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달래 주저앉았던 우리의 마음을 일으켜 세워주시기도 합니다.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격려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전체보다도 고귀한 우리의 마음을 시험과 악에서 건져 내시고 오히려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 도망칠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선하신 하나님을 떠난 것이 얼마나 커다란 잘못이었는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 고통 속에서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평화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비로소 우리의 인생을 움직이고 있는 이 모든 눈에 보이는 질서 뒤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아프도록 때리시던 주님의 손이 사실은 나를 사랑하시는 손길이었고, 그렇게 나를 아프게 찌르던 마음의 가책이 사실은 우리의 마음에 안식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의 목소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백하게 됩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우리는 흔히 이 다윗이 정말 위대한 인물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본받고 싶은 사람이라고 기억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성경에서 다윗처럼 고통을 많이 받은 사람이 없고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산 사람이 없습니다. 어려서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특별히 아버지의 지독한 편애로 외톨이가 되었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을 이을 왕을 이새의 아들 중의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새의 집에 이르렀을 때에 이새는 자기의 모든 잘난 아들들을 사무엘 선지자에게 데려왔습니다.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매번 그 사람은 내가 기름 부으라고 명령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아들이 왔다 갔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으시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아한 사무엘이 너에게 아들이 이것뿐이냐 할 때에 아차 하고 겨우 겨우 생각났던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형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형들은 다윗을 미워했고, 무시했습니다. 오죽 했으면 다윗이 가정의 그 쓰라린 상처를 안고 이렇게 고백을 했겠습니까?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서 결혼했지만 그는 신앙의 동지가 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자기의 이 독특한 영광스러운 신앙의 세계에 눈뜨지 못한 여자였습니다. 결국 자신의 곁을 떠났고, 다윗을 죽이면 자기 딸이 과부가 되는데도 집요하게 그의 생명을 사울은 노렸습니다. 끝까지 사울을 선대하고 하나님이 버렸을 때도 그를 기름 부은 사람이라고 존중하였지만 마지막까지 자기의 목숨을 노리다가 사울은 죽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사울에게서 기대했을 이 다윗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이었겠습니까?
자기의 이 고뇌하는 신앙을 자식들은 하나도 물려받지 않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이 강간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알고 보니 그 강간범은 자기 뱃속으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들들끼리 이 사건을 계기로 피의 칼부림이 일어나고 자식들이 서로를 찔러 죽이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말년을 보내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허허로운 마음 어디 한 군데 기댈 곳 없는 외톨박이와 같은 인생을 살다가 단 한 번 시선에 마음을 빼앗긴 여인을 만났는데 이는 하나님이 매우 싫어하시는 관계였고, 그래서 그는 짧은 기간 동안 기쁨을 맛보았으나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을 고통 속에 보내며 눈물로 침상을 띄웠습니다. 이 사건들 중 단 하나만 일어났어도 여러분은 밤중에 잠들며 이른 아침에 눈 뜨지 않기를 바랄 것입니다.
이 모든 상처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다 겪은 이 시인이 80여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그 많은 시편 중 압도적인 주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라는 찬송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시편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할지어다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진리는 곧 하나님의 신실함이었고, 그것은 하늘을 뻗어 궁창에까지 미치는 우주적인 것이었습니다.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악과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증거이고,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당신의 선 안으로 돌아와 안식하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의 수단인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영혼의 침체에 빠질 때면 우리의 수많은 죄악들이 생각이 나고 오늘 내가 당하는 이 고통이 주님의 진노의 심판 때문이 아닐까 하고 근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가 행한 죄 때문에 화가 나서 우리에게 복수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탕자를 멀리 떠나보냈던 아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은 아버지의 명예와 재산에 중대한 손해를 입혔고, 그래서 아버지는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손해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은 손해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쉽게 잊혀집니다. 그리고 언제나 나에게 손해를 입힌 그의 잘못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떠나서 혼자 살아가고 있을 그가 당하는 고통으로 마음 아파하게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고 재산을 잃어버렸는데도 그것에 대한 상실감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이 먼 나라로 가서 방탕할까봐 굶주리고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할 까봐 혹은 악한 사람들에게 해를 당할까봐 노심초사하며 눈이 짓무르도록 동구 밖에서 매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남루한 차림으로 그 아들이 나타났을 때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이 행한 모든 것을 잊어버렸고, 오직 그 아들이 사랑하는 아들로 살아왔다는 것과 지금 그가 불쌍하다는 사실에 마음이 터졌던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가 어디에 가서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과 같은 분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부모는 종종 우리를 버리기도 하였습니다마는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거절하신 적이 없고, 오히려 부모가 버린 우리를 영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께로 돌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로 말미암아 입은 손해와 그 고통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다시 당신의 선한 품으로 돌아온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때 우리가 선하신 주님을 버리고 얻으려고 했던 더 좋은 선한 것들은 알고 보니 선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당신의 품을 멀리 떠난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켜 당신에게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술 먹는 사람들이 종종 술을 마시기 전 찝찔한 안주로 입을 가시는 것은 그 맛 자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그렇게 입을 약간 맛없게 함으로써 이후에 들어오게 될 술 맛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느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하신 당신과 함께 동행 하며 사는 행복이 얼마나 큰 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의 의지대로 행하도록 잠시 허락을 하십니다. 우리의 선택의 결과로 악을 당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멀어진 후에야 비로소 주님과 나눴던 행복, 그 사랑, 그 은총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지를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다음에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키도록 그 사랑 안에 살면서 딴 길로 가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때로는 우리의 의지적인 선택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한번 해 보도록 하나님은 손해를 보시면서도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고통 받는 현재의 상황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폐할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온 땅과 모든 만물 위에 계셔서 초월적이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동시에 무한히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언제든지 우리가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알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이 세계를 목적 있게 지으셨다면 사람도 그 목적을 이루기에 합당하도록 창조하셨을 것이고, 그 많은 사람들이 목적이 있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나도 하나님이 목적이 있으셔서 사람으로 여기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알고 하나님께 돌아가 그 분과 함께 동행 하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충만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인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핏빛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심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선하심을 떠나지 말고, 그 사랑 안에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좇아 그 분께 순종하고, 이 지구 한 모퉁이에서나마 나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그 목적을 따라 살아서 내가 태어나지 않는 것보다는 티끌만큼이라도 좋은 세상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사는 것,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창조되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주님을 멀리 떠나 거리감이 느껴지고, 주님이 여러분에게 고통을 주고 계시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이 바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에 대한 놀라운 증거입니다. 쓰라리고 아프면 아플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강력하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이렇게 여러분을 선하신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초청 앞에서 더 이상 반항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5 (2013.02.17 주일오전)
5.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3-2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이 그렇게 선하신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 세상에는 그렇게 많은 고통과 슬픔들이 넘쳐나고 있을까요? 성경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II.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은 세 가지 상태로 구분이 됩니다. 시기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나 아직 죄가 들어오지 않은 타락하기 전의 인간입니다. 이 사람들은 올곧고, 하나님 앞에 올바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시기 위해서 부여하신 모든 좋은 특질들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타락하고 난 후의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 아래 있는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그래서 하나님이 선하심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고, 모든 사람이 사망 아래 있었지만 하나님이 특별히 구원해 주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 죄의 모든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죄의 비참함을 극복하고 살 수 있는 은혜를 하늘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실로 구원 얻은 사람들입니다.
III.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함
A. 이 구절의 의미
로마서는 1장, 2장, 3장 20절까지 모두 우울하게 끝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멀리 떠났고,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어서 그래서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어떤 상태인지에 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들이 이 구절을 대하면서 흔히 생각하는 그림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저기에 있는데 인간이 그 영광으로 부지런히 다가가려고 하는데 인간이 능력이 없어서 그 영광에 도달하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하는 이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원문의 의미를 보면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르지 못하다”라고 하는 이 희랍어 “히스테룬 타이(ὑστεροῦνται)”라고 하는 이 단어인데 이것을 영어 성경 NIV나 킹 제임스 버전에서 “fall short” “모자라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왜? 어차피 인간은 타락하지 않았어도 그 하나님의 영광까지 이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광이 아니라 인간에게 부여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영화롭게 창조했는데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을 잃어버려서 하나님이 주신 그 영광이 모자라게 되었고, 이럼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불가능하게 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영광이 무엇이냐 이것을 성경은 세 가지로 이야기 하는데 의와 거룩함과 진리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혼의 높은 기능에 해당되는 특징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과 진리를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하셨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하여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부여 받음으로써 비로소 동물과는 다른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을 가꾸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간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모두 상실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아담 이후로 태어난 모든 사람, 그리스로 예수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이 죄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피조물인 아담과 창조주인 당신 사이를 구분 짓기 위하여 동산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직역을 하면 그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를 향하여는 결코 그 과실을 먹지 말도록 이 아담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시고, 먹지 않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무한한 생명과 사랑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셔서 존귀한 인간의 신분을 가지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끔 영광스러운 지위를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범죄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담을 왜 하나님이 범죄하게 내버려 두셨느냐고 말하는데 그런 질문은 하는 게 아닙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위대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당신을 안 믿겠다고 결정을 하면 당신이 그것을 허용해 주실 정도로 인간을 아주 높은 존재로 인정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당신께 불순종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못하게끔 기계적으로 인간을 막아 세우는 그럴 수 있는 피조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선악과를 만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이 범죄는 하나님에 대한 주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고, 그 죄의 크기는 무한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제 인간에게 주셨던 이 의와 거룩함과 진리, 곧 인간에게 부여하셨던 하나님의 영광을 당신 자신에게로 거두시고 인간은 이 영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충만한 생명을 공급받으면서 영혼과 육체 사이에 규정된 아름다운 원리를 따라서 살아갈 때 그 인간이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B. 하나님과의 교통의 단절
그런데 그런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것은 근원적인 뿌리였고, 이로 말미암아서 인간과의 관계도 단절이 되었습니다. 맨 처음 하나님이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노래했습니다마는 타락하고 난 뒤에는 이 사람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듯한 발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도 깨져서 이제는 정복하고 다스려야 될 자연이 극복하고 도피하여 스스로 생명을 보존해야 할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서 오히려 그 자연을 비굴하게도 신처럼 섬기는 신세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교통의 단절은 인간의 영혼에 어두움을 도입했습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의하여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어두움에 삼킨바 되었고, 죄의 강력한 경향성이 이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 보니까 어떤 사람을 살해했는데 살해의 동기가 살해당한 그 사람이 살해자의 형에게 마약을 권하여 중독되게 하고, 그래서 형이 폐인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 복수로 마약을 가르쳐 준 그 사람을 살인했다고 나옵니다. 수사가 끝나봐야 결과가 나오겠지만 어쨌든 이 경향성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도 어려서 담배를 피웠기 때문에 담배를 피는 사람들의 이 습관적인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담배 피는 흡연자들 사이에는 담배를 끊는 사람은 살인도 할 사람이다 라고 합니다.
직장 다닐 때에 실제로 두 사람이 와서 내 앞에 담뱃갑과 라이터를 내 놓으면서 “다시 담배를 피면 니 아들이다” 두 사람이 모두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며칠 후 옥상 굴뚝 밑에서 서로 담배를 몰래 피다가 만났습니다. 이게 얼마나 중독성이 심한지 거의 인간을 이 담배 없이 살 수 없게 만듭니다. 마약은 그 중독의 200배라고 하니까 거의 못 끊는다고 봐야 됩니다. 이러한 지독한 경향성이 인간 속에 운명처럼 파고들어서 한편으로는 원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끌려 그 죄 속에 빠져 들어가는 이런 영혼의 경향성을 이 타락과 함께 인간이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만약에 이런 종이라면 그 영혼은 다양하게 작용을 합니다. 소리도 내고 반짝 반짝하는 빛도 빛납니다. 이런 영혼의 중요한 기능이 세 가지가 있는데 지성과 감정과 의지입니다. 이 영혼이 이렇게 망가졌기 때문에 망가진 결과가 지성 속에 나타나는데 로마서 1장 21절에 의하면 이것은 눈멂으로 나타났고, 이래서 인간은 아주 교만하게 되었고, 그리고 이 눈이 멂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지성은 허망한 것들을 아주 높은 가치가 있는 것처럼 찾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24절에는 바로 이러한 영혼의 망가진 상태가 감정 안에서는 육욕으로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정욕에 들뜬 삶을 살게 되고 이 정욕에 즐거움을 따라가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29절에서는 의지의 비참한 상태를 설명하는데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고, 이제는 지성의 지시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완고하고 거역하면서 살아가는 이 비참한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모든 생명과 사랑으로부터 소외되고, 그리고 인간은 비참한 삶을 영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하였을 때에 인간의 모든 정신과 영혼이 다 파괴되게끔 내버려 두셨더라면 인간은 짐승과 추호도 다름이 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비록 인간이 타락했지만 이성의 기능, 이것들은 여전히 남겨두셔서 덜 손상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 속에서 법칙들을 발견하고 학문을 탐구하고 하는 일들이 어느 정도 가능하도록 허락해 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눈멀고 육욕에 시달리고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비참한 상태가 되었는데도 인간은 이렇게 놀라운 물질문명을 구가하며 이 시대의 시대를 이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멀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그래서 이 인간은 물질문명들을 발전시킬 수는 있지만 이것을 어떻게 사용해야지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자기를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신 의도에 맞게끔 살아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자신도 행복할 줄은 알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장난감도 별로 없던 어린 시절에는 아이들을 곤충들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그 중에 가을에 우리들이 흔히 발견하는 커다란 귀뚜라미 하나를 잡아 놓습니다. 그리고는 귀뚜라미 머리 위에 난 두 개의 기다란 더듬이를 불로 태워버리거나 아니면 손톱깎이로 깎아버립니다. 그리고 그 귀뚜라미를 가만히 놓으면 이 귀뚜라미가 한 참 동안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귀뚜라미는 더듬이가 눈이 되어서 그 긴 더듬이를 좌우로 움직이면서 장애물을 찾고 앞으로 전진을 하는데 그것 있는 줄 알고 계속 움직여 보는데 아무 감각도 오지 않는 것입니다. 한 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가만히 있습니다. 왜? 인간으로 말하면 눈을 가려버린 것입니다. 눈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가려버려서 외부와의 정보의 유입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타락하고 난 다음에 인간의 상태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속에서 죄가 충동하고 의지가 완고해져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그 자신에게는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선하신 하나님과 만나서 살 수 있는 추호의 가능성도 없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두 가지, 그렇게 더러워진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정결해지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서 이 세상에 무엇인가 자기의 노동을 통해 창조적인 그 무언가를 더하고 그래서 이 세계가 자기가 태어나지 않았던 것보다는 하나님 앞에 더 의미 있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이바지 하며 살아야 했는데 그것 자체가 인간에게 불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짐승처럼 살다가 죽은 것은 아닙니다. 비록 그들에게 복음이 없었고 성령의 계시가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곰곰이 사물의 이치를 생각하며 인간의 본래의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묻는 사람들은 비교적 이렇게 눈멀고, 육욕에 시달리고, 의지가 충동되는 극단적인 비참함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신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자기를 어떤 목적으로 창조하셨고, 그래서 자신이 죄 때문에 그 목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모든 사실을 가르쳐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선하신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그 하나님을 힘입어 살 수도 없는 절대적으로 절망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처지에 있는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셨는데 이게 율법 이외의 한 의가 나타나셨으니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차별 없는 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로 오신 이유였습니다.
IV.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A. 구속의 의미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입니다. 이 의가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래 주셨던 그 영광입니다. 이것을 인간이 잃어버렸고, 이 의의 상실과 함께 거룩함과 진리도 잃어버렸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교통할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가 되었는데 하나님이 이 의를 인간에게 다시 돌려주신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모든 도덕과 종교, 철학과 사상, 학문과 예술, 심지어는 인간의 극단적인 타락까지도 바로 이 의를 회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비참한 몸부림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참된 도리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 나름대로 그것이 구원인줄 알고 찾았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영광을 상실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었을 그때에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은 속량 혹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었던 것입니다. 이 구속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성경은 속량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몸값을 남이 대신 지불하고 그 사람을 풀어주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것은 로마 시대의 노예제도를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에는 노예를 사고팔았습니다. 합법적이었습니다. 자, 노예 시장을 생각해 보십시다. 많은 사람들이 노예를 팔기 위해서 노예 시장에 끌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노예를 사려는 사람들도 그 시장에 함께 나왔습니다. 한 가족이 팔려나왔습니다. 노예 소유주가 더 이상 이 노예가 필요가 없어서 혹은 돈이 급해서 이 노예들을 팔라고 시장에 내놓은 것입니다. 아빠, 엄마, 아이들까지 모두 다섯 명의 노예가 이제 경매에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사갈 사람이 이 다섯을 모두 함께 사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아마 팔려는 사람은 한꺼번에 모두 팔아서 한 번에 목돈을 가지고 돌아가기를 원하겠지만 끝까지 사는 사람이 없으면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애들은 애들대로 팔려가거나 혹은 팔린 사람들은 팔고, 안 팔린 사람들은 데리고 자기 집에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가족이 이제 뿔뿔이 흩어지고 언제 만날지 기약할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 노예들을 채찍질하고 노예들은 그 채찍을 맞으면서 껑충껑충 뛰면서 이 물건이 싱싱하고 튼튼한 물건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과시하면서 가격을 높였습니다. 그때에 그 울고 있는 노예들을 보면서 돈 많은 사람이 마차를 타고 지나가다 동정심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인에게 말합니다. “너 가서 저 노예 다섯이 얼마인가 물어보고 오너라.” 가서 알아보고 그리고 돌아와 보고를 하면 주인이 증서에다가 어음을 써주거나 현찰을 주고 그리고 그 노예를 사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려가서 깨끗이 씻기고 옷을 입힌 다음 이제 한 집안에서 살게 된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하던 사람들에게 뜻밖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주인이 그들을 모두 부르더니 하얀 종이를 꺼내서 증서를 쓰기 시작합니다. 노예 해방 증서입니다. “내가 이 사람을 어디에서 얼마주고 샀는데 이제 내 권한으로 이들을 풀어주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유인이 되었다” 라고 하는 증서입니다.
당시 노예에는 스티그마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모든 노예를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노예가 자꾸 도망을 치니까 사오면 노예의 이마나 좀 자비심 있는 주인은 팔뚝이나 혹은 이 등에다가 쇳덩어리를 불에 달구어서 지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뉘 집 노예라고 하는 표시를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7장에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 할 때의 그 흔적입니다. 그렇게 해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 사람에게 증서를 써서 놓아주는 것입니다. 이 행위가 바로 속량입니다. 그러니까 이 주인은 아무 이익 없이 자비심 하나 때문에 이 다섯 명을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막대한 돈을 그 노예 상인에게 지불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속량의 의미이고, 구속의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아름다운 조화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고, 이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셔야 합니다. 왜?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고, 만약에 인간이 죄를 지었는데도 죄에 합당한 심판을 행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 자신에게 모순이 되는 일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그런 자기모순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인간을 당신의 공의를 따라 심판하셔서 모든 인간을 즉석에서 죽여 버리셨으면 이 창조하신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전적으로 수포로 돌아가니까 인간은 그렇게 죽여도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은 스스로 모순된 분이 되시는 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놀랍게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하나님이 모두 죽이셔야 됐는데 하나님이 영혼은 죽이시되 육체는 생명을 유보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메시야를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 하나님이 제사 제도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제사를 드릴 때에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용서하시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일시적으로나마 그들에게 부여되도록 만드십니다. 다시 죄를 지으시면 닫히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한시적으로 당신의 백성들과 교제하십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자주 사용되는 부사가 있습니다. 그것이 “영원히”, “단번에”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제사 제도가 일시적이고 반복적이었던 것에 비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통은 영원히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자기의 아들에게 대신 담당하여 형벌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그 대가로 인간들을 속량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확고하셨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일생동안 유대교를 통하여 진리를 찾고, 당시의 희랍의 철학에 도통했던 사람인데 그 모든 지혜의 근원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수렴되어 있음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에서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조화를 이루어 인간의 속량이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이 기독교에서 십자가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이고,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자가 없을 뿐 아니라 이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이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의 진수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몰라도 이 십자가만을 안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것과 자기가 죄인인 것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것과 그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는 살리신 것,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나머지 모든 것을 알고도 이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보다 하나님 앞에 더 잘 살 수가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B. 무엇으로부터의 구속인가?
1. 율법으로부터의 구속(갈3:13)
그러면 무엇으로부터의 구속일까요? 다시 말하면 무엇으로부터 속량일까요? 첫째로 율법으로부터의 속량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죄에 대한 형벌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선언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한 율법의 저주 아래 우리가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그 죗값을 지불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율법을 따르면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사 의식이 필요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영원히 단번에 죽으심으로 이 제사 의식이 그림자 역할을 하였던 실체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든지 이러한 희생의 제사 없이, 짐승을 대신 죽이지 않고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룩한 보좌 앞에 나아갈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죄인인 것과 2000년 전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죽음이 자기의 죄를 위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마다 모두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고 용서를 받아 그 분의 보좌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찬양)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자기의 의의 신발을 벗어 버리고 맨발로 찢어진 휘장 사이로 난 보혈의 핏길을 걸어 주님의 보좌에 나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용납해 주시고, 다시 교통해 주시는 구속을 힘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리석게도 이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오로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의지하여 이 율법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주님의 보좌에 이를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율법을 통해 오히려 구원받은 우리들이 이제는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할이지, 주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배우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2. 죄로부터의 구속
둘째로는 죄로부터의 구속입니다. 즉, 결국 우리의 모든 이 비참함과 이 모든 비극은 결국은 근본적인 원인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이 죄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바로 하나님이 주신 그 영광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우리들이 매일 매일 진리와 성령 안에서 성화되어 감으로 하나님을 닮은 영광을 회복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이것을 위해 목회를 허락하시고, 이것을 위해 여러분이 목양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이 죄로부터의 속량, 혹은 구속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신분의 자유입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신분이 죄의 자녀요, 그리고 마귀의 자식이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고, 하나님의 형벌 아래에 있는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죄인의 신분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 왕 같은 제사장,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들로 하나님이 신분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상태를 구속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음으로 원하지 않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가서 도저히 자신이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올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사귀던 우연히 학교 다니지 않는 친구를 사귀었는데 이 친구가 전직 조폭이었습니다. 그리고 학교 다니는 우리를 부러워하면서 가끔 만나서 교제도 하고, 그랬는데 그때 자기의 살았던 삶에 대해서 고백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그 암흑세계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제 조폭들에게 눈에 뜨이기 위해서는 싸움을 잘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주 순종적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조폭의 눈에 들게 되면 그 조폭의 일원이 그를 데려다가 중간 보스에게 소개를 하고, 몇 가지 테스트를 통해서 이 아이가 쓸만하다고 생각이 되면 조폭으로 받아들여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받아들여 주면 일정한 돈을 주고, 그러나 넉넉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부정기적입니다. 월급으로 주는 게 아니니까. 사건을 하나 해서 돈을 불법으로 취득하게 되면 그 중의 일부를 떼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나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얘기해 주었습니다. 심한 조폭에서는 죽이기까지 하는데 자기가 몸담고 있던 데에서 나오는 것도 너무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이렇게 살아서는 아무 희망이 없겠다 라고 했더니 생각을 하고, 그리고 정식으로 제가 이제 여기에서 떠나고 싶습니다 라고 이야기 했더니 두 가지 의식을 거치더랍니다. 첫째가 뭐냐 하면 주먹을 손을 내밀어서 이 둘째 마디에 있는 이 살을 손톱깎이로 다 자르더랍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커다란 마대자루에 집어넣고 묶은 다음에 그 다음에 조직원들이 모두 몽둥이를 가지고 죽도록 패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 자루를 끌러 주면서 마지막으로 악수를 하면서 “다시 여기 돌아오지 마라. 돌아오면 넌 죽는다.” 그게 말하자면 풀려난 것입니다. 그런 조폭 중에서도 약간 저급 조폭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로 풀어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극단적인 두려움과 공포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그 속에 자유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있던 사람입니다. 마음과 영혼의 상태가 이미 그렇게 심하게 얽어 매여 있기 때문에 스스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인데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게 죄로부터의 구속입니다.
3. 죄의 결과로부터의 구속
마지막 세 번째는 죄의 결과로부터 구속입니다. 죄는 원인이고, 그 원인은 결과를 항상 가져옵니다. 요새 독감들 걸려서 고생하는 분들 많은데 독감에 걸리면 눈이 충혈 되고, 눈물이 나고, 목이 붓고, 그리고 가래가 끓고, 두통이 터질 듯 나고 그리고 열이 39도 40도까지 올라가고, 그리고 뼈마디가 쑤시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감기라는 바이러스 균이 들어가서 일으키는 증상들입니다. 이럴 때에 물론 열을 내리는 것은 필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감기 바이러스 자체를 퇴치해야 됩니다. 그러면 잠시 후면 증상도 함께 가라앉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증상은 감기 바이러스가 나가도 계속해서 남는 경우도 있습니다. 감기가 아니라 다른 질병의 바이러스가 죽어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성경적으로 보면 죄의 결과입니다.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서 이런 모든 이상 증상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죄로 말미암는 비참입니다. 몇 주 전에 저는 여러분에게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최후의 제국 이야기들을 했더니 가는 곳마다 성도들이 그거 열심히 보느라고 그리고 자기끼리 이야기하고 토론도 하고 그럽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왜 그렇게 망가졌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돈이 그렇게 망가뜨렸다고 하는데 돈이 망가뜨린 게 아니라, 제도가 망가뜨린 게 아니라 인간의 탐욕과 죄악이 망가뜨린 것입니다. 인간이 살면서 결국은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사니까 경쟁이라는 것은 있을 수밖에 없고 경쟁을 통해서 사회가 발전한다고 하는 어느 정도는 입증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경쟁에서 진 사람들을 아주 죽으라고 밟아버리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세계가 그렇게 극단적인 비극으로, 비참으로 몰려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죄가 남겨놓은 결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할까 하고 아무리 고민해도 그 악한 현상들 자체에는 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안에 무엇인가 있어야 되는 참된 것들이 없고, 없어야 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 죄의 비참한 결과로부터도 구속하십니다. 마지막 날에 죄의 결과인 이 질병과 결핍으로부터 고통을 받던 육체를 완전하게 부활시키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믿고 올바른 정신으로 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그래도 먹고 살만하게 해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C.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느 목사님이 방탕하게 살다가 나중에 의사가 되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는 말이 자기가 그래도 밥술이나 먹게 된 것은 예수 믿고 나서입니다. 무슨 뜻이냐 그랬더니 예수 믿기 전에는 방탕하게 술 먹고 허랑방탕하고 그러니까 사업이고 뭐고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인간의 도리를 알고 나니까 이웃에 대해서 선의를 베풀고, 올바른 삶을 살게 되었더니 예전에 나에게 손해를 끼치던 사람들이 덕을 베푸는 사람들이 되었고, 이렇게 하면서 신용을 쌓아가면서 사업에도 성공하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죄만을 치료하시는 분이 아니라 죄의 결과로부터도 우리를 구속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나서 가난하던 사람들이 형편이 나아지게 되었다든지, 병들었다 고침을 받게 되었다든지, 나쁜 습관을 버리게 되었다든지, 깨어졌던 부부관계가 회복되어졌다든지 하는 이 모든 것들은 바로 하나님이 죄의 비참한 결과로 말미암아 망가진 인간을 회복하고 구속해 가시는 과정이란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보탤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또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도 믿은 게 공로가 아닙니까? 그래서 하도 답답해서 지난 수요일 날 예화를 하나 생각을 해냈습니다. 여러분이 명절이 되어서 표를 구할 줄 알고 기다리고 있다가 그만 시기를 놓쳤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집에는 꼭 가야 되겠는데 표가 없습니다. 그래서 혹시 기차역에 나가보면 남은 거라도 있을까 하고 갔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온 사람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기차에 탄 사람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1/4도 안됩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중요한 일이 생겨서 이제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애들 둘을 데리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저기 기차에서 내리더니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줌마 어디 가요?” 그러니까 “아, 저 부산까지 내려가는데 이렇게 꼭 내려가야 하는데 기차표가 없어서 이런다고 내가” “그래요? 그러면 내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내려가게 되었는데 이 기차표 3장을 당신이 가지고 가시오.” 그리고 기차표를 줬더니 기차가 막 떠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 그래서 달라가서 기차를 타고 이 여자가 갔습니다. 집에 고향에 도착을 했습니다. 식구들이 표를 못 구했다고 하더니 어떻게 내려 왔냐? 그랬더니 막 뛰었더니 기차를 탔다. 이렇게 말할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정말 마음씨 좋은 아저씨 한 분이 저기서 기차표를 가지고 빨리 이리로 오라고 내가 일이 생겨서 못 가게 됐으니까 당신 가라고 주어서 진짜 돈도 안 받고 주신 그 아저씨의 은총 때문에 내가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입니다.
신학대학원 다니던 3학년 때이었는데 우리 아들이 최루탄이 날아와 가지고 학교 옆인가 막 그냥 엄청나게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병원에 서울역에 있는 병원까지 가야 되는데 그 아주 교통이 애매합니다. 그런데 아이를 데리고 우리 부부가 이러고 서 있는데 좋은 승용차가 하나가 지나가더니 멈추더니 “어디까지 갑니까?” 그럽니다. “어디 갑니까?” 그래서 “아이 데리고 병원에 가는 길입니다.” “가는 데가 어디입니까?” 그래요. 그 분도 굉장히 과묵하신 분입니다. 서울역이라고 그러니까 “타십시오.” 그냥 그 말만합니다. 근데 이게 매일 거기서 그 시간에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버스 기다리고 있으면 딱 그 차가 오는 것입니다. 몇 번을 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거기를 좋은 차를 타고 오겠냐고 말할 때 아이 데리고 거기 서 있는 공로로 차를 타게 되었다 이렇게 말할 정신병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물론 우리가 믿었습니다. 믿었지만 그 믿을 수 있는 힘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우리가 물론 믿었지만 믿을 수 있는 힘도 하나님이 주셨고, 결국은 이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이고 그리고 우리가 추호도 보탤 것이 없는 그리스도를 통한 이 완전한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존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자기가 뭔가 교만해지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다가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면 자신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인간인가?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얼마나 나쁜 짓을 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러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V. 결론
그래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속량을 받은 우리들을 다시 좋으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게 하셔서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으신 하나님을 좋으신 분이라고 알지 못했던 우리들을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좋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멀리 떠났을 때 우리가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까지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악하게 살아가는 이 비참한 인간들에게 다시 좋으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놀라운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아야 할 이유, 구원받은 우리가 이 구원의 은혜를 찬송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구속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6 (2013.02.24 주일오전)
6.그리스도의 지체로 삼으심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에베소서 4:15-1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도는 3장에서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대해서 말한 후 4장에 들어서면서 교회에 대해서 먼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신 구원은 창조의 위대한 목적을 계승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생명과 사랑, 특별히 진리의 빛을 잃어버린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이 구원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자원을 하늘로부터 공급을 받고, 그래서 이 구원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 세계가 창조된 뜻과 인간으로 내가 태어난 계획을 생각하게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계획을 따라 사는 가운데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우리 자신도 그 안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이번 주와 다음 주 두 주에 걸쳐서 이렇게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이 교회와 어떻게 연관이 되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이바지하게 되는 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써 그리스도의 지체로 삼으심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구원에 관한 대중적인 이해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모든 기독교 교리가 중요하지만 구원론은 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구원론 안에서 하나님에 관한 교리와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 인간에 관한 교리, 종말에 관한 교리, 모든 교리들이 이 안에서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관한 교리만 올바르게 알 수 있어도 기본적으로 신앙의 올바른 토대는 마련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구원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이 교회에 다닌 분들은 조금 낫습니다마는 최근에 이 교회로 이동하여서 신앙 생활하는 분들은 반드시 구원에 관한 교리를 여러분 스스로 공부하여야 합니다. 매년 가르쳐 줄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 스스로 공부하여야 합니다. 특별히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책을 구입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고3 수험공부 하듯이 꼼꼼히 읽고 묵상하고, 그리고 질문하면서 여러분이 구원론을 마스터해야 합니다. 저는 그 책의 저자입니다. 27번을 정확히 읽었습니다. 28번째 읽다가 멈추었습니다. 여러분은 독자니까 저자가 그렇게 많이 읽었으면 여러분은 스스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잠시 책 선전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구원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이 세상 방황하다 개인적으로 예수님 만나서 개인적으로 회개하고 개인적으로 믿었더니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모두 극단적인 개인주의적인 구원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아마도 이것은 사회적으로 서구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의 영향을 받은바 큽니다. 성경은 이런 식으로 우리의 구원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보다 원대한 계획 속에서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이러한 구원에 대한 일천한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 극단으로 달음질치는 신앙생활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내세주의와 극단주의적인 현세주의가 그것입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보니까 그 은혜의 세계가 너무 달콤하고 사랑스러워서 이제 이 육적인 세계는 모두 이 영적인 세계의 즐거움을 누리는데 방해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는 기쁘고, 감사하고 교회에 봉사할 때는 보람이 있지만 세상에 나아가는 것은 모두 세속적인 일이요, 허무한 일에 굴복하는 것이요, 세상에 나아가서 잘 살아봐야 죄 덜 짓는 것이 목표라고 하는 극단적인 내세주의 혹은 타계주의 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극단적인 현세주의는 보다 더 광범위하게 누룩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니 이 세상에서 나는 무엇을 하든지 예수 이름을 의지하면 번영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 현세주의적인 신앙관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더욱이 즉각적인 구원을 중심으로 그것이 구원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교개혁의 유장한 교리인 이신칭의의 교리를 다르게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한번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기 때문에 감사해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생각에는 하나님도 한번 구원하신 다음에는 스스로도 어찌하실 수 없는 일수불퇴의 사실이니 그러니 구원을 얻은 다음에 오히려 그 구원을 육체의 방종을 위한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구원관에서는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해져 가는 성화의 분투 같은 것들은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로 판단을 받게 되고, 쉽고 편안한 길로 걸어가는 신앙생활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구원에 관한 천박한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돌팔이 신앙관을 갖게 만들어 주고, 그래서 이후에 배우는 모든 기독교적인 가르침이 올바로 세워질 수 있는 토대 자체를 갖지 못한 체 신앙을 하도록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구원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측면들이 어떤 것인가를 견고히 하고 그 위에 우리의 다른 교리들을 세워갈 때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 생활이 될 것입니다.
II. 우리의 구원의 영적인 측면
A. 구원의 교회론적 의미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의 구원의 영적인 측면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짧은 설교로 이 두 절을 모두 해설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이 성경 구절은 우리의 구원의 영적인 측면들을 해설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교회의 구원론적인 의미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들이 홀로 돌아다니다가, 홀로 예수를 만나, 홀로 구원을 받고, 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적인 뿌리가 없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자의적인 구원관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구원은 교회론 적인 구원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구원이 있기 전 먼저 하나님에게는 교회를 세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있었고, 우리의 구원은 바로 이 교회론 적인 구원의 시련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먼저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그는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또 한 줌의 흙을 취하여 여자를 빚으신 것이 아니라 남자의 몸의 일부를 취하여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 구절을 토대로 남성 우월주의적인 해석을 시도합니다. 남자는 하나님이 흙으로 직접 만드셨고,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에서 취하여졌으니 여자는 남성에게 종속되게 하신 것이 창조의 섭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만드셨다는 것은 갈비뼈로 만든 여자나 흙으로 만든 남자나 마찬가지입니다. 흙은 원재료에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을 거친 남자의 갈비뼈보다는 열등한 소재입니다. 그리고 신제품이 낫겠지 옛날 제품이 낫겠습니까? 오히려 여성은 하나님의 창조를 한번 거친 그 물질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훨씬 더 완성도가 높은 최신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그 많은 흙이 널브러져 있는데 그 흙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여 갈비뼈를 뽑아 여자를 창조하셨을까요? 남자를 지배하도록 머리통의 뼈가 아니라 짓밟히도록 발뒤꿈치의 뼈가 아니라 보호를 받도록 남자의 품 가까운 곳에서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너희는 하나의 몸이요, 살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후로 모든 인류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결합을 통해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모든 인류가 친근하고 소원한 관계에 상관없이 모든 인류가 서로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최상의 고백을 하며 서로 사랑을 나누는 한 가족인 공동체가 되게 하시는 것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왔고, 인간은 타락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물밀 듯이 죄가 들어왔고, 온 땅을 뒤덮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인간과의 관계도, 창조 세계와의 관계도 모두 깨어져 버렸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은 당신과의 언약을 파기한 인간을 즉각적으로 심판하여 멸망시키는 것이 당연하였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형벌을 집행해 버리면 인간이 없는 이 허망한 창조세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준엄한 심판을 조금도 거두시지 않고 언약대로 그대로 이행을 하시면서도 인간의 죽음을 유예하시고 그리고 인간에게 메시야를 약속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랑과 공의의 조화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즉시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인류를 타락하게 하였던 죄의 원흉인 사단의 파멸을 이미 예고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고 난 후 처음 낳은 아이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가인은 ‘구속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담과 하와는 처음부터 이 여자의 후손에 대한 메시야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태어나는 아이가 자신들을 이 끔찍한 죄에서 구원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구원의 여망을 굳게 붙잡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존 칼빈은 자신의 ‘기독교강요’에서 비록 아담과 하와가 죄의 원흉이고 인류 타락의 근원이었지만 그들은 그 죄악 가운데서도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주어질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믿는 신앙으로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이러한 구원의 여망은 여자의 후손에 대한 희망과 함께 면면히 이어져 왔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그 유명한 노아 홍수의 주인공이었던 노아의 이름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 이름 속에도 메시야에 대한 대망은 나타나 있습니다. 노아라고 하는 그 이름이 쉼 혹은 안식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으면서 이 아이가 여자의 후손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구원으로 말미암는 안식으로 지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자의 후손에 대한 소망이 면면히 이어져 갔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죄는 없으셨으나 아버지 없이 여자의 몸에서 여자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님은 새로운 인류를 재창조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옛 인류는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였고, 새로운 인류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여 새롭게 창조될 인류인데 이미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처음 창조되었으니 이 새 창조는 재창조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지옥으로 던져질 것이요, 나머지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국엔 이 모든 인류를 재창조된 인류로 만드셔서 잠시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멈춘 것 같았던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한 계획을 계속 진행해 나갈 것입니다. 그때가 이를 때까지 하나님은 먼저 그렇게 새로운 인류의 완성을 위한 종자씨를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머리와 지체로 이루어져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 삼으시고, 이 모든 지체들을 그 예수의 머리에 접붙인 몸으로 만드심으로 이제 이 충만한 인류의 재창조를 성취해 가시는 종자씨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은 부활 사건 이후입니다. 빌립보서는 말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만물을 그 발아래 무릎 꿇게 하시고 주라 시인하게 하셨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고 승천하심으로써 영적으로 이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이루시고자 하는 원대한 계획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린 아이들이 아직 글자도 모르고 그림도 그릴 줄 모르는 아이들이 점선으로 되어 있는 그림책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점선을 이으면 혹은 숫자로 기록된 점을 이으면 결국은 어떤 모양이 되어서 나오는 그런 그림책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영원 전부터 당신의 구원하고자 하는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당신의 교회를 이루실 원대한 그림을 가지고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믿게 되는 이 모든 과정은 우연인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우연히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작정을 성취해 가는 그 현실의 과정이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은 과정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교회를 이루려는 계획, 그 안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을 성취해 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에 접붙인 바 되어서 그래서 예수의 생명이 온 몸에 흘러 그 흐른 생명과 사랑이 우리에게까지 스며들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죄와 타락 때문에 끊어졌던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우리에게 다시 흘려보내기 위하여 우리의 영혼을 고치시는 과정이고, 이것을 통하여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결코 받을 수 없는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자원을 하늘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는 영적인 통로를 열리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B. 그리스도와 연합: 원리+실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자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며, 구원받을 때에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지는 것이니 처음부터 신자의 구원은 교회론 적인 구원론에 입각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은 두 가지인데 신비하다는 사실과 영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신비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험해 본 사람들은 모두 알지만 구원받고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 신비를 이해할 수가 없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어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표현으로서는 그 실체를 전달할 수 없을 정도로 초월적인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자, 예를 들어 봅시다. 예전에도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았고, 때로는 시련과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괴롭고 아플 때에는 그냥 아프고 괴로운 것밖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시련과 고난을 만납니다. 때로는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혹은 그것과는 상관없이 불완전한 이 세상의 구조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이때 우리 주님께 나아가기로 다짐 합니다. 그 분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우리의 마음의 고통을 토해 놓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루만지셔서 우리의 마음을 물같이 녹이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시련과 고통밖에는 느끼는 것이 없고, 절망과 낙심 밖에는 당한 것이 없었는데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주님 앞에 기도할 때 이상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령한 손이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찬양)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껴졌던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 깊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어루만지시며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신비한 위로를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적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이 당신과의 연합 안에서 우리가 주님께 빌면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섭리적인 복들은 익숙해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주신 것도 없어지는 것이지만, 우리의 영혼에 내리시는 이 복은 우리의 영혼에 당신의 성품을 접촉하게 하시는 탁월하고 초월적인 경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시련 속에 갈 길을 모를 때에는 우리의 영혼을 일깨워 지혜를 주십니다. 낙심하고 좌절 했을 때에 다른 방식으로 봄으로 주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전수되게 만들기도 하십니다. 이 놀라운 신비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원리적인 연합과 실제적인 연합으로 나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다음에는 결코 이 접붙여진 상태가 취소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이성적으로 불합리한 것인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졌지만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거나 태만히 하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다시 열심을 내고 주님을 의지하면 붙는다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붙어있을 때에 예수님이 오시면 괜찮지만 잠시 떨어졌는데 그때 예수님이 와버리면 그러면 그동안에 계속 붙어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이게 얼마나 모순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에는 후회함이 없고, 우리를 불러서 당신의 자녀 삼으신 데에는 하나님의 미숙한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지식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견인의 교리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오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깊이 생각하여야 할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원리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지만 그것으로서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유익은 사는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신앙의 본질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향해 살아있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최고의 가치는 바르게 사랑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신앙이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님이 기뻐하시도록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여러분이 사랑할 때에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셨고, 사랑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답게 행동할 때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 있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여러분은 예수의 생명에 접붙여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원리적인 연합만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위대한 계획을 따라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실제적인 연합입니다. 이 원리적인 연합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것이지만 실제적인 연합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죄로부터 자신을 거룩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이 실제적인 연합은 촉진됩니다. 그래서 예수와 온전히 하나 된 가운데 믿음 생활을 하게 되고, 여기에서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하는 담대한 신앙의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원리적으로 연합되었어도 우리가 홀로 예수께 연합된 것이 아니라 교회라고 하는 거대한 지체의 몸에 연합되어서 우리는 원리적인 연합을 누립니다. 실제적으로 연합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나 홀로 예수와 연합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 접붙임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이 충만하게 부어짐으로써 이 실제적인 연합이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교회론 적인 구원론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살아도 함께, 죽어도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하는 구원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구원은 교회와 완성되는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III. 교회와 함께 완성되는 구원
A. 구원의 세 측면: 과거+현재+미래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단순하게 단면적으로 말하지 않고 입체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최소한 구원의 세 가지 측면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과거적인 측면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입니다. 이미 과거에 완결된 사건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그 순간 우리의 영혼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적인 통로가 열리게 되었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것은 폐기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바 되었고, 어두움의 나라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긴바 되었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한번 결정된 이 구원의 운명은 영원히 불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실행에 후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받은 이 과거의 구원이 얼마나 견고한가를 생각하며 변함이 없는 이 견고한 구원이 신실하신 반석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찬미의 제사를 올려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이것 못지않게 현재적 측면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과거의 구원에 만족하는 고백이 아니라 지금 자기 속에서 충만하게 실현된 완전한 구원의 상태를 누리고 있는 감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예수는 내 안에 충만하게 사셔서 나를 장악하시고, 나의 마음에 모든 주권을 행사하시고 나는 그 분께 온전히 복종함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지복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화의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죄 죽임이 온전히 이루어진 이 땅의 성도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구원에 기초하고는 있지만 과거의 구원이 저절로 현재의 구원을 가져다준 것은 아닙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모든 사람들이 내 안에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 사셨다고 현재적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현재적인 구원은 그래서 끊임없이 성화의 삶을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려고 애쓰는 분투하는 삶 속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온전히 살아난 영적인 부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현재적인 구원을 이루기 위해 사도 바울은 자신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을 했고,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자신은 버림을 받을까봐 두려워한다고 말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나는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했던 이유도 바로 과거의 구원이 아니라 이 현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영적인 긴장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렇게 매일매일 죄를 죽이고, 은혜 안에서 살려고 하는 분투하는 경건의 몸부림과 순종의 삶, 지성으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료하게 깨닫고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지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우리의 의지를 주님께 온전히 묶어 순종하고자 하는 매일 매일의 분투의 삶을 사는 것만큼 이렇게 내 안에 그리스도가 충만히 사셔서 현재적인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 과거의 구원을 토대로 현재적인 온전한 구원을 이루면서 살아갈 때 우리에게 주신 이 모든 육적이고 영적인 자원을 사용하여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하나님의 계획에 온전히 이바지하는 삶을 살 수 있고, 그것은 곧 하나님이 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에 올바로 헌신하며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교회를 통하여 여러분을 목양하고 돌보심으로 진리와 성령 안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로 자라게 되기를 하나님이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또 다른 측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미래적 측면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 2절에서 사도바울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이 위대한 구원을 현실적으로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늘로부터 썩지 아니할 몸을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화의 노력을 통해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화된 만큼 이 미래적 구원에 대한 소망에 불타게 됩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언젠가 하나님이 주실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덧입게 되어 이 모든 죄의 요소들이 이 세상과 우리의 몸속에서 완전히 제거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져 그 지복을 누리게 되는 이 완전한 구원이 임하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모두 과정에 있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구원의 측면이 모두 입체적으로 아울러질 때에 이것이 바로 진정한 구원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개념을 놓고 본다면 오늘 개인적으로 돌아다니다가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 사랑 홀로 받고 이 사랑을 자기 육체의 번영의 기회로 삼으려고 하는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설 자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예수가 내 안에 현실적으로 충만히 살아계시고, 하늘로부터 썩지 않을 몸을 덧입기를 기다리는 이 모든 미래적인 구원까지 이 모든 구원의 계획은 우주적인 몸의 일부인 신자로서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이 모든 우주적인 교회를 성취하고자 하는 그 원대한 구원의 계획 속에 있는 세부 실행계획들입니다.
B. 우주적 몸의 일부인 신자
구원에 관한 극단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그리고 이기주의적인, 개인주의적인 해석은 도를 넘어서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해석까지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적 사랑에 대한 해석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홀로 돌아다니다가 예수 믿게 되었고, 하나님은 나를 만세 전부터 사랑하셔서 그 사랑을 내게 직접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돌팔이 구원관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원래 혼자 있는 사람에게는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타자와 관계를 맺는데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홀로 인 사람에게는 이 사랑이 의미가 없고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도 사랑이셨습니다. 대상이 없으시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이실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삼위일체가 해결해 줍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셨기 때문에 이 삼위의 존재 양식 안에서 이 삼위는 서로를 사랑하며 그 완전성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는 온전한 사랑의 일치를 이룸으로써 삼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스스로 사랑의 하나님이 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랑을 자기의 아들이신 성자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삼위일체 안에서도 이미 받은 사랑이었지만 어디든지 안 계신 곳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 안에 계시면서도 또 영으로 육신을 입어 이 세상에 내려오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고 하는 하늘 음성이 그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한량없이 부음 받으셨고, 아들에게 주신 이 놀라운 사랑은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부어졌습니다. 신부인 교회에게 부어진 이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은 교회에 접붙여져 있는 우리 모두에게 흘러들어 오늘 우리들이 받는 은혜가 된 것이고, 사랑이 된 것이고, 우리의 놀라운 축복이 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고, 혼자일 수도 없고, 혼자가 될 가능성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교회론이, 이 구원론이 여러분에게 생소해 보이는 것은 여러분이 얼마나 빈약한 토대에서 이 기독교 신앙을 쌓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놀라운 사랑을 당신의 아들에게 부어주셨고, 사랑하는 아들을 통해 아들의 신부인 교회에게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교회에 이런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셨을까요? 칼빈주의 예정론을 믿는 장로교회일까요? 알미니우스주의를 추종하는 감리교회나 성결교회일까요? 신유와 중생을 강조하는 순복음 교회에 부어졌을까요? 아니면 물로 뿌리는 간단한 세례가 아니라 풍덩 사람을 들어가게 하는 침례교회 위에 이 놀라운 사랑이 주어졌을까요? 각자는 자기 교파에만 이 사랑이 주어졌다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교파에는 부스러기들이 흘러갔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할까요?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 지혜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아, 목사님. 그러면 장로교니 감리교니 교리니 뭐니 하는 것 다 쓸데없는 거군요. 결국은 하나님이 모든 교회에 이 사랑을 부어주셨으면 그저 아무나 지 좋은 대로 믿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우리가 고백해 온 신앙의 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믿는 교파의 이 신앙 고백의 뿌리가 가장 성경에 가까운 기독교 신앙을 실현할 수 있는 올바른 길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와 견해를 달리 하는 지체들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보다는 내가 믿는 교리가 성경적인 신앙을 구축하기에 적합한 교리라고 믿지만 하나님이 나와는 견해를 달리하는 그 교회들도 사랑하시고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게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 중에는 그것을 부인하면 결코 기독교가 될 수 없는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에 관하여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은 이단이거나 더 심하면 이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신앙의 고백이 달라도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의 한 몸을 이룹니다. 이 교회는 보이는 교회가 아닙니다. 시간적으로는 인류 태초부터 시작해 종말까지 이르게 될 모든 성도들의 연합이며, 그리고 장소적으로는 이 모든 세계를 포괄하는 모든 구원받은 무리들의 연합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입니다. 우주적인 보편 교회는 그러므로 관념 속에 있는 영적인 교회이지 실제로 눈에 볼 수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모든 사람이 항상 이 모든 육체의 감각을 초월하여 초월적인 정신으로 이 우주적인 보편 교회를 생각하면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연약함을 극복하게 하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개별적인 지역교회를 하나님이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분은 그 수많은 지역교회 중 하나인 이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교회가 다가 아니고 보이는 것은 일부이고,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 모두의 영혼이 보이지 않는 우주적인 보편 교회에 접붙여져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고, 그 한 몸의 머리가 그리스도시고,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우주적인 보편 교회의 구체화된 실체로서 특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고 있는 교회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C. 유기체로서의 교회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보편 교회에 대한 사랑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나와는 비록 신앙의 고백이 달라도 그들 모두를 마음 중심 깊은 곳에서 형제라고 부를 수 있기 전까지는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지체됨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이 구체적인 개별 교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도록 하나님이 우리의 성도들을 각 지역 교회에 속하게 만드셨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라는 신학자를 비롯해서 아직까지도 한국 교회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일본의 무교회주의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주 역사가 깊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에 의해서 전파되었던 정적주의와 그리고 무교회주의, 그래서 오늘날도 이러한 무교회적인 사상을 신봉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이 이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교회가 중요하다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모든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은 개별적인 지역 교회를 이 세상에 주셨고, 우리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보편 교회에 속한 회원 됨을 보이는 개별적 지역 교회 안에서 구현하며 살아가게 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이 모든 노력들, 현재적인 구원에 대한 성취가 성내전적으로 교회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온전케 하는데 이바지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과 어두움의 권세들에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사람과 제도와 사회의 모습을 띄고 나타나 우리의 신앙의 현실 속에서 도전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들대로 있고, 그것들은 다시 실체에 영향을 미쳐 보이는 이 세계 안에서 영적 전투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보여주었던 그리스도인의 현실적인 삶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세계가 이러하기 때문에 우주적인 보편교회가 영적인 세계에 속해 있지만 그것들은 보이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교회가 우리의 영혼이라면 보이는 이 교회는 우리의 육체입니다. 이 속에 그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이 온전히 들어와 영혼과 육체가 온전히 하나가 될 때에 그때에 정말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의 영적인 특성을 무시하고 교회를 무조건 외적인 제도로만 본 과거의 로마 가톨릭은 결국 이것은 영혼이 없는 몸을 추구하는 교회론 이었다면 무교회주의 자들은 육체가 없는 영혼만을 추구하는 일그러진 교회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냥 예수의 몸인 교회에 매달려 있는 무용지물의 살덩어리가 아닙니다. 넘쳐나는 뱃살, 필요가 없는 지방질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도 원하지 않게 혹이 계속 자라서 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얼마나 가슴 벅찬 말입니까? 우리같이 하나님의 속만 썩여 드리고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는 비천한 인간들을 우주적인 이 보편교회를 위해 이바지하도록 부르셨고, 그래서 우리가 무엇으로 섬기는 이것이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하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 복되게 합니다. 사랑스럽게 합니다. 주님의 교회 같도록 더 거룩해지게 하는데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도구로 이바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이 개별적인 지역교회 안에서 구체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신 것은 단지 그의 생명과 은혜만을 공급받는 수동적인 몸의 일부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 생명과 그 은혜와 사랑을 충만히 공급함으로써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어 몸을 위하여 봉사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이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같은 이치에 대해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하여 나의 육체 속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충분히 대가를 지불하고 죽으셨는데 무슨 남은 고난이 있느냐고 물으시겠지만 이런 내 안에 예수가 충만히 살게 하시는 현재적인 구원을 당신의 교회의 지체들 속에 이룩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을 이 교회 속에 남겨두셨습니다. 이 고난은 우리의 과거적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고난이 아니라 당신의 고난에 우리도 함께 참여하여 협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를 더 거룩하고 아름다운 교회답게 만들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시간이 없지만 가끔 지나가다가 텔레비전을 켜면 드라마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저 한 토막 보고 끊어졌기 때문에 앞뒤로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한 장면이 되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한 남자 청년이 어떤 여자 자매한테 아주 푹 빠졌습니다. 수없이 프러포즈를 했습니다. 그런데 정성껏 초콜릿을 만들어서 밸런타인데이 때에 갖다 바칩니다. 밸런타인데이가 아니죠. 보통 밸런타인데이는 여자가 하는 거라면서요? 그래서 초콜릿을 만들어 가지고 프러포즈를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트 모양으로 꽃을 만들어 놓고 그리고 이제 “나는 너를 사랑해” 그러고 바쳤습니다. 근데 이 여자가 그거를 받더니 모든 사람이 다 박수를 치면서 “받아줘. 받아줘” 막 이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그 예쁘게 만들어 온 초콜릿을 만인이 보는 앞에 땅바닥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밟아버렸습니다. 하트 모양의 초콜릿이 깨졌을 때 이 남자의 마음도 함께 깨졌습니다. 자기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되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언젠가 이 자매가 프러포즈했던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는 성형 수술 하기 전이었고, 못생겼을 때였고 거기에다가 틀니 교정한다고 여기에다가 철조망까지 잔뜩 치고 나타납니다. 그래 가지고 “나 너 좋아해” 그러고 수줍게 초콜릿을 주었을 때 그것도 하트 모양이었는데 확 뿌리치면서 던져버렸습니다. 그때 이 자매의 마음도 함께 깨어 졌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 얘기를 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똑같은 여자가 왔는데 왜 옛날에는 초콜릿을 던져버리고, 이번에는 그렇게 목 매어 꿈에도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예뻐졌으니까. 간단한 것입니다. 예뻐졌으니까. 예뻐졌으니까.
그리스도인은 예뻐지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것이 성형수술이라고 적용을 하지는 마십시오. 물론 꼭 필요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뭐 정신적인 것을 풀어주기 위해서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그렇게까지 해야 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뻐지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라 그 분은 머리이시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고난 속에서 사랑을 배우고, 거짓된 것을 분별하며 참된 것을 하여 예수의 아름다우심을 향하여 끊임없이 예뻐짐의 진보를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고난을 남기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그 은혜를 받고 나면 교회의 아픈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은혜 못 받은 사람들은 교회에 나쁜 부분이 보이는데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은 그것이 나쁜 부분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아픈 부분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픈 부분을 고치는 섬기는 도구가 되기를 자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에게 진리의 빛을 주셨기 때문에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하나님이 나에게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가시 같은 사람들을 품에 안고 하나님이 나에게 재능을 주셨기 때문에 재능 없는 사람들을 섬기고, 하나님이 나에게 물질을 주셨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면서 그들의 구겨진 삶을 펴지게 하는 도구로 자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날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교회를 위한 고난에 동참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아주 놀라운 신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봉사하며 눈물을 흘리고 창조의 목적으로 우리의 지체들을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헌신할 때 고난이 넘치고 고통이 뒤따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왜?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우리를 참여하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그 고난 받는 거기에 예수님도 함께 계십니다.
주일학교 전도사를 하기 전에 집사였습니다. 그때는 세상에 아무것도 관심이 없고 교회밖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침이면 일찍 나오면 아이들이 올망졸망한 애들이 가방을 메고 기다립니다. 그러면 하나하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주고, 아이들을 손잡고 학교까지 바래다주고 학교에서는 전철타고 직장으로 출근하고 퇴근하고 올 시간이면 아이들이 교회에 와서 성경 읽고 있었습니다. 성경 공부 가르쳐 주고 그리고 기도하고 돌려보내고, 돈 생기면 자장면 사주고 그러면서 보냈습니다. 애들이 나의 애인이고, 애들이 나의 친구고, 애들이 나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정말 잘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온전히 헌신할 때에는 하나님이 항상 우리를 달콤하게만 만드시지 않으십니다. 항상 거기에는 쓰라린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의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을 때에는 항상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마음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언제나 기도하러 나아갈 때는 내가 진 짐이 무겁고 내 고통이 커서 하나님께 피했는데 주님께 피하여 나의 원통한 사정을 토해 놓을라치면 언제나 하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를 보여주십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가시면서도 자기를 못 박는 사람들이 받을 형벌을 안타까워하시며 그들의 용서를 비시는 예수님, 이 땅에 계실 때 수고와 멸시를 다 당하면서 가난의 친구가 되고 고통의 이유가 되고, 슬픔의 친척이 되어서 그렇게 사셨던 주님의 생애가 떠오릅니다. 그러면 내가 당하는 이 모든 고통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고난으로 투사되고, 그러면서 2000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실제화 되어서 나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내가 그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그러면서 나의 사랑하는 지체들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고, 나는 그들을 위해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고백이 마음속에서 흘러나올 때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던 예수의 충만함이 내 안에 느껴집니다.
(찬양)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깊이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물을 닦고 일어나면 마음의 어두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밝은 빛이 깃들게 됩니다.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견딜 수 없는 고난을 견딜힘이 생겨나고, 시련 속에서도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등지지 않을 수 있는 결단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나는 여러 달 동안 여러분에게 무위도식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교회가 얼마나 일손이 딸리면 목사님이 저렇게 안타깝게 외칠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무위도식해도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이니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굴러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무위도식하는 그 사람에게는 너무 불행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너무 불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택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신 것은 그냥 매달려 있어서 생명과 사랑을 받기만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고사리 같은 손을 통해 이 우주적인 거대한 보편 교회에 이바지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자녀들,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무위도식할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교회에서 무위도식하고 있다면 이것은 이중적인 폭력입니다. 교회를 향한 폭력이고, 여러분 자신의 영혼에 대한 폭력인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여러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자랄 수 있을지 한번 정상적인 영적 성장이 가능할 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중 대부분은 이 교회가 첫 번째 교회가 아니라 언젠가는 다른 교회의 지체들이었는데 이 교회에 온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민이나 멀리 이사 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교회로 온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깊은 상처를 받고 도피하여 여기로 온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난 여러분의 결정을 가볍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죽도록 고통스러운 날들을 거쳤고, 온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고 응답을 받아서 이 교회에 오신 분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사랑의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다시 옛날에 있던 교회로 돌아가는 것은 여러분의 분량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여러분이 떠나온 교회와 맺힌 것이 있다면 그것을 버려두는 것은 주님을 매우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 했지만 그렇게 상처를 받고 떠나온 것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낸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의 잘못, 성도들의 잘못이 있을 수도 있고 일방적인 잘못이 아니라 여러분의 오해와 미숙함이 결합이 되어서 상처가 증폭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떠나 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일까요? 그 교회에 여러분은 다시 육체로서는 찾아가지 않지만 매일 주님의 보좌에서 그 교회와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다시 돌아가는 것은 여러분의 분깃이 아닐지 모르지만 맺힌 것이 있다면 풀어야 합니다. 용서할 지체들이 있다면 용서를 하고, 용서 받아야 할 일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십시오. 손해를 입힌 것이 있다면 여러분은 용서해 주되 여러분은 자신을 용서하지 말고 배상할 의무가 남아있다면 그들에게 배상해 주십시오. 그리고 일체의 사랑으로 모든 교회와 목회자, 사랑하는 성도들을 용납하고 이 땅에 맺힌 모든 것을 풀고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그렇게 하시는 여러분에게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쓰레기처럼 굴러다니던 짐승같이 막돼먹은 우리들을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우리를 불러 우주적인 보편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셨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조차도 가누지 못하는 허약한 인간을 예수의 몸의 지체로 삼으셔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유익을 끼치게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어디에 쓰시려고 불구와 같이 이 미력하고 비천한 죄인을 당신의 교회를 온전케 하는 도구로 부르셨다니 그저 우리의 마음이 먹먹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 눈을 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 구원의 위대한 계획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어떻게 아름답게 나타나는지를 명심하십시오.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죄에 쓰러지고, 때로는 마귀에게 조롱을 받을지라도 잊지 마십시오. 그대들은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그분의 지체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여러분을 통해 어설프게나마 섬기는 그 섬김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그 작은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를 완성하시고 이 개별적인 지역 교회를 완성하심으로써 여러분의 구원을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구원의 도리를 올바로 깨닫고 정말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사는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7 (2013.03.03 주일오전)
7.교회의 지체로서 자라감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에베소서 4:14-1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교회의 몸의 일부로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이 있기 전 하나님에게는 먼저 교회를 세우시려는 경륜이 있었고, 그 경륜의 실행 속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런 교회를 세우시는 경륜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창조목적을 이탈한 이 모든 인류 세계를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재창조의 계획과 함께 맞물려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실현되는 한 과정에서 우리들이 구원을 받지만 일단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 되고 나면 우리도 성장한 분량에 따라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세우는데 이바지하게 된다는 것을 사도는 에베소서 4장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 최대의 신비한 경륜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 구원을 얻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성장하여야 합니다. 이 성장은 외적인 성장이 아니라 신자의 내적인 영적 성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커다란 한 집에 세 들어 사는 이웃이 있었습니다. 젊은 부부였는데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림처럼 예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그 아이를 귀여워했습니다. 그 아이가 돌쯤 다가올 때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만한 나이면 아이들이 이제 뒤뚱뒤뚱 걷기 시작하고 엄마 아빠를 불러야 할 나이인데 이 아이는 돌이 되었는데도 걷지 못할 뿐 아니라 앉지도 못하고, 목을 가누지 못하였습니다. 발달에 장애가 있는 아이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를 낳았으면 그 아이가 계속 성장을 해서 어른과 같이 장성함으로써 그가 다른 사람의 삶에 이바지하고 자신의 삶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우리 모든 부모들은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해 주셨지만 처음 구원받았을 때 여러분은 영적인 갓난아이입니다. 이제 그 갓난아이를 젖먹이고, 기저귀 갈아서 점점 더 성장하도록 하나님이 돌보아 주십니다. 이런 성장은 우리에게 의무이고,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행복은 영적인 성장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영적인 성장이 필수적입니다.
II. 신자의 영적성장
A. 지식과 판단
그러면 신자가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은 이것을 두 가지 국면에서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식과 판단입니다.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라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는 지식이 아직 충분하지 않고, 판단력이 어른스러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이 지식과 판단에 결함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미숙한 어린 신자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미약한 지식과 미숙한 판단, 이것은 우리의 사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신앙이 어린 신자들은 사는 것이 탁월할 수가 없습니다.
이 지식과 판단은 13절에 의하면 믿는 것과 아는 것에 의해서 증진 되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믿는 것과 아는 것에 있어서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이 하나가 된다 라고 하는 말은 자신이 믿고 아는 내용에 있어서 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에는 하나님을 많이 아는 사람, 적게 아는 사람, 다양한 층 차의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은 온 교회가 당신을 아는 지식에서 성장하여 모두 온전한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고 이때에 교회는 성숙한 지식과 판단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두 가지가 필요한데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진리를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아멘하고 잘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지식의 기초가 놓이게 되고 확신의 기초가 생기게 됩니다. 그 위에 지식을 더하여 구체적으로 성경의 내용을 배우고 교리를 습득해 갈 때에 그때에 이 세계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인생을 어떤 시야에서 전망할 수 있는지 세계관과 인생관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이 세계관과 인생관이 그 사람에게 깊이 받아들여지고 심기게 되면 그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를 너무 감정적으로 혹은 종교적인 한 행태에 국한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닌다, 혹은 무엇인가 교회에서 경험했다, 혹은 은혜를 받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인 표지중의 하나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중심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고 하는 의미는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사람이 내적으로는 영혼이 거듭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의 정신적으로는 예전에는 동의할 수 없었던 세계와 인생에 대한 어떤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은 바로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는 관점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 사상으로 들어선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사상에 따라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해석은 달라지고, 결과적으로 어떻게 이 세상에서 무슨 목적을 가지고 어떠한 태도로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입장도 나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매주 예배를 드리러 나오지만 일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기독교라고 하는 이 사상의 체계에 대해서 진지한 태도로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공부라고 할 수 있는 교리공부 그리고 새가족반, 성장반 조차도 들어오지 않고 이런 저런 핑계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 신앙생활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집은 모든 인간이 거주하는 처소를 일컫는 통칭 명사입니다. 집이라는 단어는 하나이지만 집의 형태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냥 막대기 두 개 세우고, 천막을 치고 가재도구를 들여놓고 살아도 집은 집입니다. 천막에 가마니 양쪽에 걸고, 그리고 휘장을 쳐서 바람을 막아도 집은 집입니다. 나무로, 판자로 지어도 집이고, 이렇게 튼튼하게 철골을 올려서 집을 지어도 집입니다. 그러나 견디는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다리에는 홍수가 나면 집이 통째로 떠내려가고 자신도 떠내려갈 수 있습니다. 판자로 만든 집, 천막으로 친 집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주저 앉아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독교의 집속에서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상당수는 예수를 믿은 지 3년, 5년 혹은 10년 혹은 모태신앙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여러분 중의 상당수는 하나님의l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대하고 기독교의 체계가 무엇인지를 공부하기를 2종 보통 운전면허 시험 보는 것만큼도 공부를 안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처지에서 말하기를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 예수를 믿는 것이 무슨 지식의 축척인가 하고 묻습니다. 축척은 무슨 얼어 죽을 축척입니까? 그것도 꽤 많아야지 쌓아 올릴 것이 있지 바닥에 흐르지도 않는 지식이 축척은 무슨 지식의 축척입니까? 양심에 찔리지 않습니까? 내 몸뚱아리를 싣고 거리를 달릴 운전을 위해서는 일주일, 이주일 심지어 한 달, 많이 하는 사람들은 6개월씩 학원을 끊고 밤낮으로 다닙니다. 그리고도 떨어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고, 그 중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인생을 얹고, 여러분의 가족과 이웃의 인생까지 얹고 달릴 이 신앙의 기차를 위해서는 여러분의 그 신앙을 어떻게 가져야 할지에 대해서는 운전면허만큼도 공부를 안 하고, 그리고 여러분이 기독교적인 관점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종교의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도 믿을 수 있는 종교가 있는데 그것을 미신이라고 말합니다. 건전한 종교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직관을 통해 얻는 지식이든지, 혹은 학문을 통해 얻는 지식이든지, 둘 다를 겸비한 지식이든지 건전한 종교는 언제나 지식을 요구하는데 이는 그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가지고 인생을 살게 하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서 깊이 뉘우치고 여러분이 이 지식과 판단에 있어서 무지한 것, 오래 예수를 믿었는데도 성장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고 여러분의 영적인 성장이 없는 발육 부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넘쳐나는 그 수많은 정보와 지식 중 여러분을 빛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 올바로 살게 하는 지식은 얼마나 미약한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인생을 여러분은 자신을 위해서 허비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욕되게 하면서도 반성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식과 판단에서 자라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지런히 성경의 진리를 믿고 배우고, 그리고 그 지식을 터득하고 기독교 사상의 체계가 무엇인지를 익숙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여러분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이 세계와 여러분의 인생을 보며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살았을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확신과 굳건함
두 번째 요소 성장의 요소가 등장을 하는데 이것은 바로 확신과 굳건함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소외될까봐 옳지 않은 줄 알면서 혹은 모르면서 세상의 풍조에 생각 없이 휩쓸립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요동하여 신앙의 발을 붙일 곳이 없습니다. 주일날 들은 말씀은 마치 모래성을 쌓는 바닷가의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을 때에는 뭐가 좀 쌓이는 것 같은데 파도가 밀려오면 모두 씻겨 내려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같이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숙한 신앙의 표입니다.
최근에도 이단들이 극성을 부려 정통 교회를 위협하였습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이단의 꼬임에 넘어가서 많은 신자들이 오히려 이단에 가서 열성적인 전도 대원들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었는데도 그 교단의 교리에 빠지는가 하면 집사와 장로, 권사 같은 사람들도 교인들을 데리고 넘어가고, 어느 교회에서는 부목사가 한 교구를 데리고 이단으로 갔다고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 사모님이 교인들을 데리고 가정도 버리고 이단으로 가버리는가 하면 아예 어느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가 이단적인 가르침에 현혹이 되어 교회 전체를 갖다가 이단의 무릎에 바쳤다고 하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들이 비록 사회의 직분으로서는 어른이요, 교회의 직분으로서는 장로고, 권사고, 담임목사고, 목회자의 사모였지만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이렇게 쉽게 유혹에 떠밀리고 이 세상에 거짓된 이단에 쉽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매우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 14절에서 말하였습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였습니다. 당시 이 편지를 받던 디모데가 누구였습니까? 새 신자였습니까? 아닙니다. 목회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목회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이 사람도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를 가지고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기를 힘쓰라고 강력히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성장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어렸을 때는 은혜가 있으면 선교사가 될 것처럼 요동을 쳐도 은혜가 사라지면 불신자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장한 신자는 은혜가 약간 식어도 자신의 삶의 모습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삶의 성숙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성장하여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C.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음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말하자면 신자의 영적인 성장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설교 속에서 형상, 이마고 혹은 이미지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이 형상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해 드림으로써 이후에도 성경을 공부하는데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형상이라고 하는 말은 어떤 사람의 영혼과 정신 속에 있는 지속적인 특징입니다. 이것이 바로 형상입니다. 이 형상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 형상에 부합하는 존재가 되고, 그 형상에서 그가 살아가는 모든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형상에 꼭 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인간의 심성을 들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늘 덜렁덜렁 대는 경향성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엇인가 늘 잊어버리고 덜렁거립니다. 삶이 건망증과 착각의 연속입니다.
저도 한때는 이렇게 건망증이 심하고 그러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하루는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을 하고 집에서 빨리 오라고 계속 전화가 와서 당시 기억 11시 12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내려와서 차를 탁 탔습니다. 그런데 누가 운전대를 빼 가지고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도 기가 막혀서 세상에 도둑이 이런 도둑이 있을까 요즘이 어느 세상인데 운전대를 통째로 빼가지고 도망을 가나 그리고 가만히 보니까 뒷좌석에 앉았습니다. 경향이 건망증이 심한 사람은 항상 이렇게 뭔가 자꾸 빠뜨리고 착각하기 연속입니다.
이 형상은 이보다는 훨씬 높은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는 사람을 빚어 육체를 만들고,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 영혼을 창조하여 그를 산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삶을 살아가기를 하나님이 원하실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그 영혼 안에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형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 형상은 글자 자체가 이러한 형상 모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시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의도되는 인간으로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영적이고 정신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에 그것을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는 이 모든 세계를 바라보고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면서 미래를 예측하고 현실을 분석할 수 있는 학문을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목적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하나님의 형상은 산산이 부서져버렸습니다. 사물의 원인과 결과를 유추하는 것은 어느 정도 그 기능이 남아있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목적이 있는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탐지력은 완전히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좁은 의미에서는 누구도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가장 악한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고, 그리고 존엄성이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인정되어야 하는 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형상이 온전하였을 때에 그의 영광은 얼마나 크고 높을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채 인류들은 계속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인간도 인간이 이 하나님의 참 형상을 가지고 있을 때 어떤 인격을 가진 존재가 되고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인가를 누구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분은 인격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신 분이지만 인성을 취하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되셨습니다. 아담에게 처음 주셨던 그 형상 결코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형상을 가진 단 한 사람이 태어났는데 이 분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바로 그 분이 인간이 참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했을 때 어떤 사람이 되는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를 우리에게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소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분의 생애에 대한 기록과 인격에 대한 증언들이 남아있는 것이 바로 신약 성경이고, 이 신약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이 가진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배우고, 한편으로는 인간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사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성품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볼 수 있게 해 주셨고, 참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주신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지, 어떤 인간이 되어야지 마땅한가 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예수교라고 말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 그만큼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이 세계에 관한 모든 계시의 총체이고, 핵심이고 누구든지 그 렌즈를 통하지 않고는 이 세계와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몰라도 예수를 알면 기독교인이 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알아도 예수를 모르면 기독교인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 우리가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으로 돌아가고,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가 다시 창조의 목적을 위하여 이바지하는 세계가 되게 하시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예수의 몸인 교회에 접붙인바 될 때에 완전히 망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이 놀랍게 회복됩니다. 이 회복은 얼마나 놀라운 회복인지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하게 할 정도의 괄목할 만한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한 것은 아닙니다. 완전히 회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끊임없이, 끊임없이 진리의 새로운 빛을 받아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끊임없이 새롭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 가면서 그는 점점, 점점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죽었던 영혼을 살려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신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지만 구원받은 이후에 어떻게 살아가고 하나님을 믿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많이 닮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조금 닮다가 죽기도 합니다. 많이 닮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보람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다가 죽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불안과 소요, 그리고 기쁨을 오가면서 불만족스럽게 살다가 인생을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여러분이 세속적으로는 해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닮으면 부자가 되게 해주고,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되게 해 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거의 없는 짐승 같은 사람이 정계의 거물이 될 수도 있고, 이 세상의 부를 주물럭거리는 거부가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닮은 사람이 가난하게 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닮은 사람은 가난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고, 부자여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다가 두 번째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우리들이 모두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되지 않은 부분들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회복시키심으로 우리 모두를 찬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로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향한 경륜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최고의 소명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많이 닮아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격언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The presence is the best proclamation.”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최상의 선포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로 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의 현존이 최대의 선포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들은 의로운 사람이 옆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자신이 불의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올바로 살면서 그 옆에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해도 고난을 받는 사람이 나지만 하나님은 나를 인정하고 계시다 라고 하는 확신을 느끼게 되는데 도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온전히 드러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곧 그리스도의 형상이고, 그리스도의 형상은 곧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가장 커다란 세상을 향한 섬김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 최고의 섬김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의미이고, 불꽃처럼 산다는 말의 뜻입니다.
III. 영적으로 성장하는 길
A. 참된 생활을 함으로써
그러면 우리 모두 이렇게 영적으로 성장하여야 하겠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길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것을 두 가지로 간략하게 말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말입니다. 첫째는 참된 생활을 함으로써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끔 이런 경우를 보았을 것입니다. 저 할머니는 나보다 성경도 조금 알고, 교리도 못 배웠는데 그런데 왠지 저 분이 하나님과 매우 가까이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영적인 성장, 특히 참된 생활을 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참된 것을 하여’ 라고 번역되어 있는 이 단어는 희랍어로 ‘알레듀온테스(αληθευοντεσ)’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알레데이아(αληθεια)’라는 명사와 관련이 있는데 ‘알레데이아’는 진리라는 뜻이고 ‘없다, 아니다’라는 부정어 ‘아’와 ‘데이아’가 합성된 것입니다. ‘데이아’라는 희랍어 단어에서 영어의 theory, 이론이라는 단어가 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데이아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레데이아’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감추어진’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알레데이아’ 하면 감추어질 수 없이 드러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생활을 하여’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참된 것을 하여 그랬는데 이것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참된 생활을 하여 혹은 진리의 생활을 영위하여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참된 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6년 그리고 중고등학교 6년 약 12년 동안에 우리 세대는 교훈 혹은 급훈 혹은 종종 가훈 속에서 ‘참’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초등학교 교육 받을 때만 해도 최고의 가치는 참이었습니다. 참. 그래서 교장 선생님이 조회 때마다 “참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특별히 그 교장 선생님은 아침 일찍이 학교에 나오셔서 당신이 하얀 장갑을 끼고 유리 조각이나 휴지를 주우셨습니다. 그러다 우리를 만나면 인사를 받으시면서 때로는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참 되거라. 참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세대는 그 단어를 거의 쓰지 않고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어린이 날 때나 혹은 명절에 어른들은 세뱃돈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참 되거라. 참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흔적들이 스승의 날 노래에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있습니다. “참 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의 은혜는 끝이 없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참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혹시 여러분이 자녀가 있다면 자녀에게 “아이야, 엄마는 네가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보다 참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라고 머리를 쓰다듬어줘 본 적이 있습니까? 아이가 없으면 조카라도 말입니다. 해본 적이 없으면 오늘 한번 집에 가서 해보십시오. 아이들은 머리만 쓰다듬는 거 제일 싫어합니다. 돈을 좀 주면서 머리를 쓰다듬으십시오. 그리고 “참 되거라,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이 네가 공부 잘하는 거보다 더 중요하단다. 참 되거라.” 그러면 틀림없이 그 아이들이 “엄마, 혹은 이모, 고모, 아빠 참된 게 뭐예요?” 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대답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참됨’은 곧 진실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참됨 그것은 진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진실은 무엇입니까? 정직하고 솔직하여 진리에 부합된 상태입니다. 정직하고 솔직해지는 것은 진실해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고, 그것 없이는 누구도 진실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으면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 도둑이 진실해졌답니다. 그래서 고백을 합니다. “나 도둑이야. 일평생 강도짓 했어. 그래서 꼬와?” 이게 진실한 게 아닙니다. 솔직하고 정직하기는 한데 진리라는 요소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습니까? “나 강도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때리고 돈을 뺏거나 훔쳤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후회가 됩니다. 그것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내가 돈을 뺏은 사람 중에는 자기의 피를 팔아서 돈을 가지고 오는 사람 그 돈 까지 뺏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정말 못된 인간이었습니다. 나에게 피해를 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빕니다.” 이럴 경우에는 이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올바르면서도 진실이 없을 수 있고, 죄인이면서도 진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정 반대로 도덕적으로 올바르면서도 진실이 있을 수도 있고, 죄를 짓고 악하면서도 진실이 없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는 죄를 지었습니다. 양심은 소리치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별일 없이 임금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선지자가 진리의 말씀을 들고 선명하게 그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회개하였습니다.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많은 시간동안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하나님이 그의 회개를 들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아 다 나를 떠나가라 여호와께서 나의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라고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실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열납해 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에게는 올바른 삶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실하지 않았습니다. 세리는 정말 죄만 지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 기도할 때에 진리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거기에 자기를 비추어보니 한참 멀리 떠난 삶이었습니다. 가슴을 두드리며 회개하기 시작했고, 용서를 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진실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이 하나님께 인정받은 그 의가 바리새인의 그 의보다 훨씬 나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입니다. 참됨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부합한 정신과 마음의 상태가 진리, 진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이 진리의 빛이 없이는 진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참 되거라, 참됨, 진실이라는 단어가 모두 사라진 이유는 어디에도 이 궁극적인 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상대주의 때문에 참됨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고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점에서 이 세상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존재들입니다. 한 사람의 삶 속에 진리를 아는 지식이 있으나 거기에 부합하는 삶이 없다면 그 기독교인의 삶은 허위요, 거짓일 것입니다. 복종하고 순종하는 삶은 있어도 진리가 없다면 그것은 맹목에 가까운 삶이 될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맹목이 통하는 곳은 미신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한두 번쯤은 미신에 빠져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될까요? 일생동안을 시종일관 그 미신을 따라 산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무지한 삶이 될 것이고, 자신은 물론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 중 누구도 행복하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성경을 믿고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올바르게 배우는 것은 성도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에 접붙인바 되는 그 순간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한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여러분은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짐승이 되기를 자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언젠가 제사를 지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제사를 지내는 가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제물 앞에는 위패가 있습니다. 위패에 “아무 아무개 학생부군”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벼슬을 하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 붙이는 호칭입니다. 학생입니다. 학생이 뭐냐 하면 공부하는 우리가 얘기하는 그 학생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공부만 하고 실제로 벼슬은 못하고 죽었다 그 뜻입니다. 그래서 위패가 놓였을 때 “학생부군” 그러면 그냥 좋게 말하면 야인으로서 산 것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별 볼일 없이 살다가 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 하나님 몰랐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배우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일평생 자신을 학생이라고 자처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진리가 없이 산 사람들도 진리를 찾기 위해서 학생이 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여겼다면 진리를 알고 진리의 숲속으로 들어와 그리스도인이 된 여러분은 얼마나 더 많이 공부해야 할지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가끔 저의 설교를 어렵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생각하는 게 다르니까. 그러나 자신이 진리에 대해서 너무 아는 게 없다고 하는 반성도 곁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는 아무 생각과 배움이 없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식을 낳아서 많이 먹어라,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그리고 아무 교육도 안 시킨다면 그 아이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요? 아마 여러분이 그런 부모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 참된 것을 한다는 것은 진리를 아는 일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성경을 믿고 이 진리를 배워서 기독교의 사상의 체계가 무엇인지를 공부하는 것이 죽는 그 순간까지 학생으로서 계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저희 교회에 여러 나라의 대사를 지내시고 우리 교회의 협동 장로님으로 계시다가 한 8년 전에 돌아가신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일하셨고 훌륭하신 분이셨는데 그만 암에 걸리셨고, 병원에서 그 마지막 치료를 잘못하는 바람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 병원에 문병을 갔습니다. 그래서 내가 손을 꼭 잡고 말씀 드렸습니다. “장로님 일어나셔서 다시 한 번 저와 함께 성찬 예식을 집례 하셔야죠.” 그때에 죽음을 바로 앞에 논 그분이 아주 생생하게 마지막 남긴 이야기가 기억이 납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목사님. 제가 빨리 건강을 회복해야지만 읽다가 다 못 읽은 자기 깨어짐이라는 책도 마저 읽을 텐데요.” 항상 아침이면 퓨리탄 라이브러리에 나오셔서 항상 책을 읽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꼼꼼히 읽은 기독교강요 영어 원서를 도서관에 기증하고 죽으셨습니다.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의 삶.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르망을 타고 열심히 집회를 다닐 때의 일이었습니다. 네비게이션도 없던 시대고 핸드폰도 없었으니까 이리로 집회를 오라고 주최 측에서 팩스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툭 찢어가지고 막 갔습니다. 길을 한참 갔는데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창문을 열고 약도를 들고 계속 두리번거리는데 놓쳤습니다. 그러니까 바람이 확 불어서 공중으로 약도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저 멀리. 큰일 났습니다. 전화 번호 하나도 남겨놓지 않고 그 팩스 종이에 다 들어가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갓길에 차를 세우고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데 차가 막 쌩쌩 달리는 그 길을 가는데 이거는 계속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를 가서 간신히 그것을 주워서 그래서 다시 차를 타고 집회 장소를 찾아갔습니다. 왜?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돌아올 때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돌아왔습니다. 왜? 이제 목적지를 찾았으니까.
여러분, 이렇게 예수 믿다 죽으면 천당에 가서도 날 만나면 내가 성경 읽어라, 성경 공부해라, 잔소리 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성경 공부도 없고 교사도 없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경험했던 방법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리들이 우리에게 밝히 드러나고,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아주 놀라운 계시의 증거들을 얻게 되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성경을 많이 알았던 사람도 그 나라에서 가장 지성적으로 탁월하지 않은 사람만 못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성경을 잃고 우리들이 진리의 말씀에 착념하는 것도 잠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이니 메뚜기도 한철이라 했으니 부지런히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성경을 한 절을 읽고 깊이 묵상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성경을 하루에 뭉텅 뭉텅 읽는 것, 최소 10장, 바람직하기는 20장이나 30장 정도씩 대량으로 읽어가면서 빠른 시간 내에 성경의 한 책 안에 있는 통일된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얻는 것은 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놓는 일입니다. 이런 지식들이 되어 있을 때에 설교를 듣고 교리적인 공부를 해도 잘 쌓이는 거지 이것이 없으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리를 알지 않고는 참된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끊임없이 이 진리를 탐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조금 알고도 조금 알았지만 온전히 조금 안 진리에 합치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성도는 진리를 많이 알고 거의 거기에 합치 시킬 의지는 없이 예수 믿는 사람보다 훨씬 빠르게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전자의 사람이 고속버스를 타고 달려가는 거라면 후자의 사람은 세발자전거를 타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그냥 지식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지식은 우리가 보다 높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입니다. 그러면 그 진리를 알고 거기에 자기를 합치시키려는 노력이 있을 때에 우리들이 영적으로 성장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많이 닮은 사람들이 되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많이 닮은 사람들이 될수록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입니다. 예배 때마다 선포되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기까지만 읽습니다. 뒤에 뭐라고 나오냐 하면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고 나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그러시더니 그거를 다 벗기고 그 다음에 멍에를 덜컥 씌워 주시는데 이 멍에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소가 밭갈 때 등에다가 이렇게 걸고 있는 그 굵은 통나무를 말합니다. 소를 보면 밭간 소 보면 이 등이 털이 없어 다 벗겨지고 굳은살이 두껍게 있고, 평생 이것을, 멍에를 메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거 아닙니까? “그 멍에 질 바에야 그냥 계속 무거운 짐 지고 사는 게 낫지” 그런데 이것은 문화적인 맥락이 있습니다. 당시 로마 시대 때 그 말씀을 하시면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비유입니다. 도제 사회에서 있었던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집을 잘 짓는다든지, 그림을 잘 그리는 장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학교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그 선생님에게 가서 물도 떠다 주고 그 다음에 밥도 해주고, 마당도 쓸고 그러면서 한번 제자 삼아달라고 그러면 선생님이 쳐다도 안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 필요 없다. 가라. 가라. 그러는데도 그냥 무조건 달라붙어서 “그냥 한번만 봐 주십시오.” 하고 따라 다니다 보면 몇 개월 지나면 애가 그래도 괜찮은 것 같으면 그러면 “야, 너 붓 좀 빨아 와라. 아니면 연장 좀 가져와라.” 그러면서 심부름을 시킵니다. 그러면서 이제 어느 날 제자로 받아줍니다. 그때에 스승이 하는 말이 “이제 너와 나는 같은 멍에를 메는 거다.” 거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고 하는 이 말씀은 뭐냐 하면 이제 예수님이 당신에게 가까이 오는 사람의 모든 무거운 짐을 벗기고 그리고 당신의 제자로 삼아서 당신이 도제가 기술을 가르쳐 주듯이 어떻게 행복하고 진정한 인간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겠다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니까 진짜 멍에를 메워준다는 그 뜻이 아닙니다.
물론 진리를 합치시키는 삶은 힘든 삶입니다. 왜?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 싶은 데로 살면 세상에 편합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우리의 굴레가 되고 멍에가 되는 걸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진리를 가르쳐 줄 테니 진리에 너의 생활을 합치시켜라 이런 생활을 영위해 감으로써 너는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장하는 것만큼 슬픔과 고통이 많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다 이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진리를 합치 시키는 삶이 있을 때에 영적으로 계속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트까지 가지고 와서 열심히 설교를 듣고 웃고 울면서 필기를 하고 좋아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삶을 거기에 합치시키는 진지한 삶의 헌신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 지적인 호기심은 얼마 안 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을 피폐하게 하는 잘못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엔조이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지식적이고 정신적인 즐거움을 위해서 소모품처럼 사용하는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더 굳어지게 하고, 견고해지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뜨려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원래의 합치되어 있으면 합치 시킨다는 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았을 때는 진리와 우리 마음이 같이 가다가 항상 찢어집니다. 그때 진리의 말씀이 주어지면 “아, 이것은 아니구나.” 하고 합치시키고, 합치시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완전히 합치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끊임없이 합치시키고, 합치시키고, 합치시키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이 있을 때에 영적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생활을 함으로써 어린 아이인 영적인 상태에서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사랑 안에서 삶으로써
마지막으로 사랑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사랑 안에서” “엔 아가페”라고 나옵니다. 이 아가페라는 단어는 훨씬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도 아가페,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 사랑도 아가페, 우리가 받아서 감격하고 있는 것도 아가페, 감격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가페, 그 사랑 때문에 나의 형제, 자매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그 사랑도 아가페, 하나의 아가페의 사랑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질서가 통합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이 사랑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 사랑의 근원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서 자가 발전되는 사랑은 육욕적인 자기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가지고는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제가 사실 드라마를 그렇게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영화는 좀 봐도, 그런데 요새 드라마 하나에 깊이 빠져 있어서 어떻게 하든지 종영까지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생활이 불규칙하니까 어떤 때 보다 못 보다 합니다. 그러면 재방까지 찾아볼 정도니까 아마 이거는 제가 목사가 된 이후 처음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야왕”입니다. SBS 드라마. 사실 현실성은 좀 떨어지지만 공감은 됩니다.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아, 결국은 인간이 저렇게 해서 욕망 때문에 불행해지는 구나.” 하는 것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개를 모두 끄떡거리시는 분들은 별로 경건 생활을 덜하시는 분들이고 경건하신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잠깐 설명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기까지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내가 결혼은 아직 안했지만 아내가 대학에를 가고 싶답니다. 그래서 이 남편이 뼈 빠지게 돈을 벌어서 대학을 가르쳐 줬더니 유학을 가고 싶답니다. 그 아기도 어린데 놔두고 미국 유학을 갔습니다. 이 남자가 유흥업소에 나가서 정말 눈물 날 정도로 수치스러운 일까지 하면서 돈을 벌어서 유학비를 대주었는데 아내는 미국에서 바람이 났습니다. 그리고 돈 많은 재벌 집 아들하고 연애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결혼을 했습니다. 딸은 엄마가 돌보지 않아서 결국은 죽었고, 그리고 자신의 이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남편이 지극히 불안한 요소였기 때문에 사람을 시켜서 죽여 버렸습니다. 죽였는데 놀랍게도 그 죽은 사람이 쌍둥이 형을 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죽인 것입니다. 이 동생은 형으로 그대로 변신을 해서 변호사 행세를 하면서 살아가고 이런 속임수는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복수에 대한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주까지의 스토리입니다. 결론이 어떻게 되느냐면 결론을 제가 압니다. 말하지 말라고요? 말해야죠. 결론을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보여 주고 12년 전 그러고 이제 드라마가 시작을 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 난 이해가 안갑니다. 그래서 재미가 없습니다. 결국은 이 여자의 욕망과 야망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사악한 욕망이 계속해서 결국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청와대에 입성시킵니다. 그리고 영부인이 됩니다. 그런데 수백억 원을 상대방에게 주어서 후보를 매수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대통령이 됩니다. 이게 정치 문제화 되어서 특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특검으로 이 사람이 임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 특검의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영장을 가지고 와서 금고를 수색하던 그날 결국 이 여자는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그 남자 품에서 죽어가면서 남기는 말이 “나는 우리의 스토리가 어떻게 끝날지 궁금했어. 결국은 이렇게 끝나는군.” 하며 죽는 것이 아마 끝일 것입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욕망이고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가 발전할 수 있는 이 사랑으로 가지고는 우리가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에 자가 발전하지 않는 우리 바깥에서 생겨난 그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져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1740년 영국 캠버스랭이라고 하는 곳에서 큰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모여서 기도회를 하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노인이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백발의 노신사였습니다. 누군가 했더니 그 지방에서 아주 유명한 신학교에서 일평생을 경건하게 기독교 교리를 가르쳐 온 원로 교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고백을 합니다. “나는 일평생 그리스도의 속죄의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를 속죄하시는 그 분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예전에는 단지 가르쳤으나 지금의 나는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구속하신 예수를 만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이 감화가 은혜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이 은혜를 직통적으로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담는 도구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 은혜를 전달해 주십니다. 그 대표적인 게 하나님의 말씀, 기도, 성찬, 예배, 혹은 경건한 성도들과의 교제, 성경 공부, 무위도식하지 않고 마음을 실어서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원리를 따라서 이 은혜의 수단에 부지런히 참여할 때에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조금 혹은 많이 혹은 생애적으로 혹은 우리를 이성적으로 설득하는 방법을 통해서 때로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의 심령에 당신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흠뻑 부어지면 이 속에서 강력한 사랑이 불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은 그 사랑에 불붙을 때에는 평소에 이 사람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의지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큰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 영혼에 아름다움이 있고, 한 인간의 가치가 그가 지닌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려있다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똑같이 예수를 믿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고, 똑같이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실제로 누가 행복한 삶을 사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거의 사랑하지 않는 사람, 언제든지 주님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행복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해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을 준비가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돈도 없고 가난하게 사는데 뭐가 행복할까?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그런 관점에서 보니까 자신이 저 사람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정말 사라지지 않는 진정한 진리를 기준으로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형상을 닮기까지 성장하도록 부르신 것은 당신만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우리도 가장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부르신 것입니다. 이런 모든 영적인 성장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허공에서 혼자 광야를 헤매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목양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존재하게 하신 이유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위함입니다. 예배와 하나님을 향한 모든 마음의 헌신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교회는 또한 세상을 위해 존재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위한 복음의 전파, 선교, 그들을 돕고 구제하는 모든 자비로운 행위들이 교회를 세워 놓으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IV. 교회 안에서 목양을 통하여
세 번째로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셨는데 그렇게 성도들을 성장하게 하셔서 교회를 온전하게 하심으로 그 교인들이 그 교회의 도움을 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맨 처음 민둥산에 묘목을 심을 때에는 그래도 그 묘목이 산의 도움을 받습니다. 산에 뿌리가 박혀 있으니까 목숨을 부지하고 살고 있고, 산을 돌보는 산지기 아저씨도 가끔 올라와서 물을 주고, 비료를 주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산의 모든 도움을 받으면서 남의 도움에 의지해서 나무는 자라게 됩니다. 10년, 20년 자라면서 그 나무들은 길같이 뻗고, 하늘 높이 솟아오릅니다. 뿌리는 땅 밑으로 계속 뻗어 뿌리들이 뿌리와 함께 어우러지면서 온 산을 휘감아 폭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숲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일단 그 산이 나무들이 성장하여 숲을 이루게 되면 이번에는 나무가 산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산이 나무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하늘 높이 뻗어 오른 그 나무에서 이제 줄기 가지가 자라고, 꽃이 피게 되고, 바람에 날려 이 씨앗들이 여기저기 떨어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작은 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하고, 생태계가 형성이 되기 시작하고, 비가 오면 언제나 토사에 휩쓸러 가 버리던 산자락들이 강력하게 움켜진 이 나무 뿌리에 의하여 장악되고 물이 저장되었다가 가뭄이면 이 물 서서히 흘려보내는 저장고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모래밖에 쌓여있지 않았던 민둥산이 생명으로 가득찬 세계가 됩니다.
마찬 가지로 맨 처음 갓 태어난 신자는 젖병부터 기저귀까지 모두 교회의 신세를 지는 정말 전적으로 교회에 의탁한 신자 같지만 이 사람이 예수의 생명과 사랑을 먹고 충만하게 자라 지식과 판단력에 있어서 확신과 굳건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더 온전히 닮아가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버린다면 그러면 그 다음에는 이 사람이 교회를 정말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그에게 있기 때문에 무지한 사람들은 그 도움을 받아 슬기롭게 되고, 돈 없는 사람들은 그가 가진 것들을 나누어 줌으로써 가난을 면하게 합니다. 재능이 없는 사람은 재능이 있는 이 사람을 통해서 도움을 받음으로 필요한 것을 채워 모자란 것이 없이 넉넉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윤택하게 하는데 이바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교회를 돕고 교회는 다시 그것을 통해서 그를 돕고, 그래서 그로 하여금 교회와 함께 이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공동체적으로 함께 닮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갓 태어난 당신의 자녀들을 교회라고 하는 어머니의 품에 젖을 물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품 안에서 자라가게 하시고 성장하면서 이 아이는 일방적으로 교회에 빚지는 아이가 아니라 성장하면서 이 교회를 섬기는 아이가 됩니다. 아픔과 기쁨을 다른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겪으며 자라갑니다. 진리의 말씀을 믿고, 성경의 지식을 배우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그는 점차, 점차 예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되어 가고, 그가 어디에 있든지 누구와 함께 살든지, 어디서든지 그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교회를 세우신 목적에 이바지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이바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그 안에서 그는 위로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옆으로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고 교통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이 세상에 사람으로 보내신 그 목적을 실현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노래할 것이고 혈관에 피가 흐르는 동안 그리고 그 입술의 혀가 아직까지도 움직일 수 있는 동안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계획과 가슴 저미는 십자가의 사랑을 전파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살아 있음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어느 한 구석이 펴지고 운명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그리스도 예수의 품으로 그 영혼이 추수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복된 생활입니까?
(찬양)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추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V. 결론
여러분 모두 이렇게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사랑스러운 지체들로 자라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8 (2013.03.10 주일오전)
8.은혜로 승리하는 삶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몸에 접붙인바 되어서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리스도인답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앞으로 이루어질 보다 완전한 미래의 구원을 위하여 분투하며 살아감으로써 우리가 이미 받은 구원의 진실성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입증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2장에서 구원의 위대함에 대해 설명한 다음, 3장과 4장에서 구원의 결과로서 누리는 안식에 대하여 길게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았으나 안식에 이르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일으키고 홍해를 건너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전히 바로의 손 안에서 벗어났을 때 그것이 구원의 끝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해방시키신 것은 단지 애굽을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가나안 땅 쪽에서 홍해를 막 건너고 광야로 들어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서신서를 쓴 저자일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그는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분투하며 사는 것, 그래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에 이를 자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본분이요 증거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안식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구원받은 사람들이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안식은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하는데 하나는 육체적인 안식입니다. 희랍어로 ‘사바티스모스(σαββατισμός)’라고 하는 이 단어는 안식이라고 번역되는데, 특히 육체적인 안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고단한 모든 일을 끝내고 육체가 쉼을 얻게 된다는 면에서 이 세상에서 노동의 쓰라린 고통들은 사라지는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과 함께 성경은 또 다른 안식을 이야기하는데 ‘카타파우시스(κατάπαυσις)’라는 단어도 안식으로 번역되는데 이 안식은 영적인 안식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승리가 확보된 그날에 하나님께서 이 안식을 우리에게 주실 것인데 하나님의 나라에서나 맛보게 될 영원한 안식을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미 누리도록 모형, 맛보기를 보여주십니다. 주일날 노동을 쉬고 이렇게 안식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가 쉼을 얻을 미래의 표를 보여주는 것이고, 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의 심령이 자유로워질 때 고단한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마음의 안식을 얻게 됩니다. 영적인 안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리를 굳게 붙들고 살아가자”고 우리에게 격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분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길일뿐 아니라 우리가 버리고 온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각자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분투하며 살아갈 때 이것은 우리 혼자 사는 삶이 아니라 모든 지체들이 함께 영적으로 연결된 예수의 몸으로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끊임없이 도우시기 때문에 교회를 향한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우리도 또한 하나님의 도움을 입어 이런 광야와 같은 세상을 은혜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II. 교회의 머리 - 대제사장 예수
A. 유기체적 교회의 머리되심
그것을 성경에서는 교회의 머리이신 대제사장 예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기체적인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에 대해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 구원을 얻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 자체가 공동체적인 구원이고 교회와 함께하는 구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신자로서 우리들이 온전케 되어가는 모든 거룩함의 과정은 그리스도의 교회 전체가 온전케 되어가는 과정과 밀접한 유기적인 관계가 있다는 사실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은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이고, 아들은 그 사랑을 당신의 신부인 교회에게 베풀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진 지체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도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처럼 신자들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더불어 한 몸을 이루시고 유기체로서 모든 하나님의 몸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머리로서 통치하십니다. 우리의 머리가 우리 모든 생각과 모든 육체의 행동을 지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유기체적인 특성은 세 가지로 나타나게 되는데, 첫째는 생명에 있어서 유기체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그리스도에게 부어지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당신의 교회에게 접붙여진 신자들에게 부어짐으로써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인 지체로서 하나님이 주신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죽음을 이기는 생명입니다. 수시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을 파고 들어오는 죽음의 기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놓으려 하고 모든 생명으로부터 멀어져 소멸하여 죽어가는 우리의 모든 삶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위대하고 놀라운 힘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3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죽음의 기운이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절망과 자살 그리고 인간관계의 파괴, 극단적인 타락 같은 것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절망적인 죽음의 질병들을 예수의 생명은 극복하게 만듭니다. 자살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사람들이 은혜 안에 있으면 연약함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놀라운 동기가 됩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지닌 사람들은 자신이 절망하는 지점에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약한 것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강하면 교만할 텐데 약하기 때문에 겸손하고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 의지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생명을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유기체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전에는 내 마음대로 살았던 사람인데 예수의 은혜 안에 있게 되면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됩니다. 하나님만 없으면 무엇이든지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면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의 생명이 그의 마음을 주장함으로 이 세상에 있는 것들보다 예수께 사랑을 받는 것을 더욱 소중하게 여김으로 그가 든든하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안에 살아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고 은혜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여서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지 몰랐을 텐데 교회를 통하여 이렇게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 봉사합니다. 이렇게 이웃을 위하여 헌신함으로써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이루셨을 봉사의 활동들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섬김이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은혜를 주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복음에 살도록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의 유기체적인 몸이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리고 통치와 봉사에 함께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려고 하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는 도우십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넉넉히 모든 시련과 어려움들을 이기며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우리가 아니라 이 세상의 악한 자들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반역하는 사람들 때문에 이미 임하였으나 이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이 세상에는 아직도 악이 많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지만 우리가 모든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 우리 속에 죄가 남겨져 있고, 이것들은 조금만 은혜가 떨어지고 말씀으로부터 멀어질라치면 이것들이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를 죄 가운데로 이끌고 갑니다. 이렇게 안팎의 원수들로 에워싸인 시련 속에서 어떻게 보면 우리는 불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을 승리하게 하시는 놀라운 지혜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감추셨습니다.
B. 우리를 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 중 하나는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모르는 것이 있으셨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으로써 예수님은 모르는 게 없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인간의 육신으로는 인간의 한계 안에 자기를 가두심으로써 육신을 입은 예수님은 모르시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것도 있었습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꼭 같이 시련과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인간들이 얼마나 절실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를 온몸으로 체험하심으로 말미암아 성육신 안에서 온전히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인간들의 승리의 비결을 몸소 체득하심으로 그의 헌신을 더욱 빛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우리와 꼭 같이 시험을 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수 있고, 그래서 우리를 우리 편에서 도우시는 분이라고 우리에게 강력하게 가르치고 있으십니다. 죄는 없으신 분이시지만 우리와 꼭 같이 시험을 당하고 우리와 꼭 같은 연약함에 에워싸여 있는 예수님이셨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한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아시고, 당신의 도움 없이는 비록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승리할 수 없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위로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더욱 생생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 분이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이동할 때에 하나님을 섬기던 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성막이라고 부릅니다. 성막은 성막 뜰과 성막으로 나뉘어지는데 이 성막은 직사각형으로 된 약 18평 크기의 천막이었습니다. 18평 크기의 천막은 다시 두 칸으로 나누어지고, 앞에 있는 한 칸은 12평쯤 되었고, 뒤에 있는 한 칸은 6평쯤 되었습니다. 앞에 있는 큰 칸막이를 성소라고 불렀고, 여기에는 제사장들이 가서 죄인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경배 올리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제사장은 숫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방에는 제사장들도 들어갈 수 없었는데 오직 대제사장만 1년에 한 차례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가 거기서 하는 일은 한 가지,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용서를 비는 제사를 올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을 유지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종종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연약한 인간 중에 취하여 졌기 때문에 그가 그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하나님께 징벌을 받으면 죽을 수 있었습니다. 혹시 자연사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의 시체를 꺼내러 누구도 그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대제사장들이 치마처럼 생긴 옷에 방울을 여러 개 달고, 등에는 밧줄을 묶었습니다. 그래서 딸랑딸랑하고 움직이는 소리가 나면 대제사장이 거기서 살아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이라는 표시였습니다. 혹시 그가 쓰러지면 등에 묶은 밧줄로 잡아당겨 지성소에서 끌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대제사장의 직무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대제사장의 직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죽으실 때에 일어났던 그것은 놀라운 기적 하나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전에 있던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된 사건이었습니다. 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휘장은 아주 두꺼운 천이었고, 이것은 아주 질기게 직조되어서 양쪽에 황소를 매달고 채찍질해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순간 위로부터 아래로 기적적으로 이 천이 찢어졌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가 아니라 마지막 죽으시는 그 순간에 말입니다.
이것은 구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로 막았던 휘장이 찢어졌으니 이제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구분이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에 이제 대제사장은 필요 없고 제사장들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인데 성경은 우리 예수 믿고 자녀 된 사람을 바로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족속으로 불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인간 대제사장이나 사람 제사장의 도움이 필요 없이 우리가 직접 제사장이 되어서 성소에까지 이를 수 있고,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을 그리스도께서 찢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힘입어 곧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보좌에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새롭고 산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시련과 역경을 만나도 능히 이길 수 있는 이유요 근거입니다. 주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역경에 처한 우리들을 돕고, 시련과 고난 속에 있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고, 사망의 위협 속에서도 우리들이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은혜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입니다.
III. 은혜로 살아가게 하심
A. 은혜란 무엇인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이 쓰는 단어일수록 그게 무슨 말인지를 잘 모르고 사용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도 많이 쓰다가 보면 몰라도 아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단어중 하나가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은혜란 무엇입니까? 무엇을 은혜라고 이야기할까요? 성경은 일률적으로 은혜라는 말을 한 가지 의미로 사용하지를 않습니다. 성경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은혜를 사용하는데 첫째는 객관적인 은혜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런 것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에게 분에 넘치도록 베푸시는 하나님의 기쁘신 혜택입니다. 이런 의미는 우리가 이런 말을 할 때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먹고 살고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모두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객관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구원의 길 자체를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그럴 경우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도 바울도 따라가던 신앙의 습관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구원은 그렇게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낸바 되었으니” 그때 그 은혜는 구원의 길 자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나타낸바 되셨으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보다 더 훨씬 더 많이 사용되는 용례인데 주관적인 은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다음과 같은 표현에 깃들여 있습니다. “은혜가 떨어지셨군요. 은혜를 많이 받으시더니 정말 열심히 봉사하시는 군요. 아무개는 은혜를 많이 받았나봐. 기도를 참 열렬히 해. 예배 시간에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주관적인 자기의 마음속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데 이게 뭐냐 하면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은혜는 우리의 지성과 우리의 감정에도 영향을 많이 줍니다. 그래서 은혜를 잘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잘 깨달아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합니다. 열린 교회에 와서 설교가 어렵습니다. 어렵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관심이 없을 경우에는 이것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요즘 비행기를 타보면 그저 사람만 실어 나르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비행기는 참 잘해 놓았습니다. 앞에 모두 텔레비전이 있어서 툭툭 치면 영화도 나오고, 티비도 나오고 하는데 거기에 꼭 하나 있는데 게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절 보고 무식하고 머리 나쁘다고 그럴 사람이야 많지 않겠지만 나는 한 번도 비행기 안에서 그 게임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해보고 싶어서 들어갔는데 너무 어렵습니다. 어려워도 너무 어렵습니다. 왜? 내가 무지하고 무식해서가 아니라 그게 나의 평소에 관심사가 아니니까 나의 관심사하고 그것하고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한없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잘 이해하는 비결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러면 이 지성이 맑아지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놀랍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우리의 정서가 풍부해집니다. 마치 누군가를 사랑할 때 설레임과 감동, 기쁨, 눈물, 희망 이런 것들이 막 솟아나듯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그렇게 하나님을 위한 눈물, 기쁨 이런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 시간에 돌부처처럼 앉았다가 조용히 돌부처로 돌아가는 것은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기쁘고, 슬프고, 가슴 아프고, 원통하고 한 이런 감정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은혜 받기 전에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사랑의 감동으로 생겨나는 힘입니다. 인간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두 경우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할 때와 누군가를 죽이도록 미워할 때 그때 초인적인 힘이 이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참 전쟁기의 궁핍한 때를 지났고 질병에 시달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근대화의 과정을 지나왔습니다. 그때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그런데 요즘은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나이 먹은 아내는 세다” 이렇게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의 힘으로 어머니는 강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원한을 독하게 품으면 잘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큰 힘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그것은 선한 힘이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면 그것은 악이 가져다주는 힘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는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기쁨과 감동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은혜 받지 못했을 때에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들을 감당할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B. 때를 따라 은혜를 주심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구원받게 해주셨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완전히 사라지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주어졌으나 또 다시 하나님이 풍성하게 이러한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때를 따라 은혜를 주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는 말이 좀 모호한데 원래 의미는 “필요한 때에 도와주시는 은혜를 발견하기 위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는 때가 없는 적은 결코 없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때가 있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인내하고 승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시험을 당하거나 유혹을 당할 때 나 혼자 내버려 두시면 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이런 특별한 은혜의 때를 만났을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도우시는 분이니 그 은혜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 기록자는 여기에서 왜 ‘담대히’라는 말을 썼을까요? 이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항상 성령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또 성령 충만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에워싼 삶의 상황들은 우리에게 낙심하라고 말하고 너는 희망이 없다고 말하고 이제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과 능력보다는 너를 에워싸고 있는 상황과 환경이 훨씬 더 엄중하기 때문에 너는 여기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우리에게 압박을 합니다. 이때에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을 떨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은혜는 나를 에워싼 모든 환경의 어려움을 능가하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그 분의 보좌 앞에 나아가 엎드리고 이길 수 있는 은혜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값없이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실 때에 아무렇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주시는 수단들을 사용해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수단들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래방에서 노래나 부르고 술이나 먹다가 성령의 불세례를 받았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렇게 안합니다.
어느 신학자가 이것을 아주 기가 막히게 묘사를 했습니다. 어떻게 비유를 들었냐 하면 우리 시골에서 장작을 팹니다. 장작을 패면 장작이 이렇게 원통으로 길게 되어 있으면 항상 우리는 세워 놓고 가운데를 쪼갭니다. 나무의 결이 그렇게 때문입니다. 반으로 쪼개지면 그 다음에 이것을 엎어놓고 머리를 쳐서 위에서부터 쪼갭니다. 동양만 그런게 아니라 서양도 그렇고 어느 나라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도끼의 날을 날카롭게 세워서 통나무처럼 된 나무를 그냥 정성껏 두드려서 떡국처럼 자르려면 자를 수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뭐 힘들긴 하겠지만 그저 몇 달 동안 한다고 치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르는 나무꾼은 없습니다.
나무의 결을 따라서 장작을 쪼개는 것처럼 우리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는 역사는 이런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은 당신이 은혜를 주시지만, 당신이 은혜를 주시는 수단에 접근하고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당신의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통로 혹은 수단이 어떤 것들입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 진리의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깨닫는 것,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 혹은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 열심히 봉사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 중엔 아직까지도 바쁘거나 태만해서 안 가신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150명 내지 250명씩 1년에 한 번씩 아웃리치를 갑니다. 해외 아웃리치를 가고 1200명씩 국내 아웃리치를 갑니다. 본인들이 다 스스로 헌신해서 갑니다. 아마 그 돈으로 비수기에 여행을 하면 멀리가서 즐겁게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험한 음식을 먹고, 거친데서 잡니다. 아웃리치를 한번 갔다 오고 나면 며칠 동안 쉬지 않을 수 없는 몸이 되지만 그렇게 봉사할 때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해외나 시골의 열악한 환경에 가서 전도하다가 온 성도들은 교회에 대한 불평이 사라지고 감사합니다. 와 보니까 내 집이 참 좋습니다. 그리고 살아갑니다. 조그만 불편은 능히 견딜 수 있는 아량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에 접근해 있을 때, 은혜의 수단들을 순종하면서 믿음으로 참여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시시때때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IV. 은혜로 승리하게 하심
이런 은혜로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하며 하나님과 평화를 이룩하게 하였던 대제사장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시기 위하여 당신이 구원하고자 하는 모든 백성들의 죄를 위한 화목의 제물이 되셨고, 스스로 대제사장으로 제물이 되어 당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의 공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에 나아가 이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는 하늘의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도록 허락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시련과 역경, 어려움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섬기며 시련과 고난을 당하고, 주님의 일을 하다가 우리들이 핍박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만납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범죄하고 불순종하여 미끄러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가 차단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도록 열어두신 그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길은 영원하고 누구도 폐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시련이 큰 것 같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 같은 위기의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영혼이 피곤해지고 곤고해졌을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과 공로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모두 용서하시고 당신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와 진실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살 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찢어진 휘장을 지나 아버지의 은혜로운 보좌가 있는 핏길을 걸어갑니다. 인간의 의의 신발을 벗어버리고 그 핏길을 맨발로 걸어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되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만납니다.
여러분은 축도의 고전적인 형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라고 하는 고전적인 축도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성부 하나님이 먼저이고, 성자 예수님이 두 번째이고, 성령 하나님이 세 번째 인데 성경에서 이 질서가 흐트러지는 적이 없는데 유독 축도에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먼저 나오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지만 우리는 그 좋은 것에 접근할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이렇게 범죄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진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해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 앞에 용서받아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게 하는 중보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축도의 고전적인 형태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보다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이 중보적인 은혜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찬양)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그리스도 예수의 찢으신 몸으로 갈라진 그 휘장을 지나 그리스도의 뿌리신 피로 얼룩진 핏길을 걸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는 모든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V. 결론
곤고하십니까?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까? 위기를 만났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는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케 놓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있고, 아들의 고난 때문에 중보를 기억하셔서 우리들을 용납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힘과 능력을 공급해주시고, 그 무한한 능력과 공급하시는 힘 때문에 하나님 없었더라면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이 세상을, 나를, 마귀를 넉넉히 이기며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주시는 것입니다. 은혜 없이 살았던 때에 인생의 일기장을 접고 이제 보좌에서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은혜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써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9 (2013.03.17 주일오전)
9.은혜의 목적을 따라 살아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함이라”(빌 1:2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저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 은혜를 아무렇게나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신 은혜의 방편들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들이 그렇게 은혜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와 근거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II. 은혜와 하나님의 계획
A. 은혜의 양면성
제일 먼저 우리들이 생각해 볼 것은 은혜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이라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고, 그것도 매우 특별한 은혜를 특별한 방식으로 덧입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은혜의 양면성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받는 수혜자의 입장에서는 이 은혜가 거저 받은 것이고, 값없이 주어진 것이지만 은혜를 베푸는 자의 입장에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베푸는 것이요, 거저 주기는 하였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대가를 요구하고 보상을 조건으로 하는 은혜라면 그것은 은혜일 수가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아서 양육하고, 교육하고, 마지막에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루기까지 베푸는 모든 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은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부모의 마음속에는 자녀를 향한 기대와 계획이 많이 있기 때문에 계획이 그래서 종종 어떤 때에는 자신의 인생의 계획이 자녀의 인생의 계획에 합치되어 버릴 정도로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은혜를 베풀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B. 은혜와 소명
하나님의 은혜는 받을수록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값없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계획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은혜와 소명의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이라고 말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그 은혜는 예수를 위해 주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만약에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 위해 살게 하기 위해서 주신 은혜라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가 될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예수를 위해서 사는 것을 조건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몫이고, 은혜에 대해 계획을 설계하신 것도 하나님의 몫이고, 그 은혜를 따라서 살지 않느냐 혹은 사느냐 하는 순종의 문제는 또한 우리에게 속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런 은혜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길에서 미끄러져 은혜를 주신 목적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을 보시며 마음 아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대가를 바라고 주신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 안에는 계획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계획이 있었을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은혜로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자에게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 사랑하게 하면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만 영광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진정한 행복이고, 이 둘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처럼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를 위한 은혜
그러면 이런 은혜가 없으면 절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해 놓으신 목적, 자기를 사람으로 지으신 의도를 따라서 살 수 없는 인간들인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그들이 비로소 그 목적과 의도를 따라 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은혜라고 하는 뜻인데 그러면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한 은혜일까요?
우선 우리들이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이 은혜의 용도는 은혜가 주어진 통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영적인 은혜, 우리를 하나님 사랑으로 감동시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하며 살게 하는 이 놀라운 영적인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집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베풀어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부어주신 은혜이고, 이 은혜가 교회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 전가되고, 그 교회에 우리가 영적으로 접붙여져 있기 때문에 신부가 누리는 그 은혜의 특권에 우리들이 참여함으로써 우리도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당신의 은혜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의 몸에 부어주셔서 그 몸의 지체된 우리들이 그것을 누리게 하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 은혜를 힘입어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 자기만족 위한 은혜 아님
그리고 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어도 이 은혜를 따라 사는 삶이 우리에게 언제나 현실적으로 달콤하고 즐겁고 기쁜 것만은 아닙니다. 언제나 거기에는 희생과 고난이 따랐기 때문에 죄 없으신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때로는 울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이루신 고난은 모두 성취하신 고난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속죄의 고난,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하여 율법의 요구대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하나님의 형벌적인 고난은 이미 다 치루셨고, 구원의 기초를 완전히, 영원히, 단번에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는 추호도 거기에다 더 보탤 것이 없고, 우리는 더 이상 어떤 것으로도 그 구원의 은혜에 추가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고난은 예수 홀로 담당하셔야 할 고난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원하시지도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다른 고난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남겨두신 고난입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나의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고난은 구원의 공로가 되는 고난이 아니라 예수를 믿었어도 끊임없이 세상에 이끌릴 수밖에 없고, 옛 성품에 질 수밖에 없고, 죄에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이런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예수께 달라붙어 있어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하여 남은 고난이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를 우리가 함께 참여하여 온전케 하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와의 연합 속에서 지불하게 하시기 원하는 그런 의미의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주께서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이 모든 세상을 심판하시고, 구원받은 무리들을 올려 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불완전한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완성하실 그날까지 누군가는 당하여야 하는 고난이기 때문에 남아있는 고난 혹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지신 그 고난은 당신 육체의 몸으로 짊어지신 고난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남겨두신 이 고난은 영적인 몸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하여 예수가 함께 연합됨으로 짊어지시는 고난이고, 이 고난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접붙여진 상태에서 함께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 아픈 것을 나의 아픈 것으로 여기고, 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고, 그의 부족한 것을 나의 모자라는 것으로 여기고, 나를 희생하고 바쳐서 그것을 온전케 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이 은혜의 용도대로 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소명대로 사는 줄로 여기시고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만한 은혜의 생명력, 놀라운 은혜의 기운을 유지하며 살아가던 비범한 생명의 사람들은 모두 교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디에서든지 그리스도의 영적인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몸을 드리고 희생하여 자기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케 함으로 자신도 주 앞에 온전케 되려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은 능히 순종하고 이 모든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하늘로부터 그들에게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와 열렬한 하나님을 향한 헌신, 충천하는 화염과 같은 그들의 충성스러운 봉사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불같은 은혜가 가능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은혜 주신 의도대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고갈함이 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1년이 넘도록 무위도식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중 아직까지도 이것이 한 사람의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오늘 여러분은 돌이키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무위도식하는 삶은 여러분을 구원해 놓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를 행복하게 하는 삶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 구원 받은 이후에 여러분에게 주신 사랑의 감화를 어디에 쓰시려고 합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기는 있는 것입니까? 왜 무위도식하는 것입니까? 교회가 일손이 모자라서 여러분에게 봉사를 간구한다고 간청한다고 믿지 마십시오. 그런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지만 그 은혜의 목적대로 그 은혜를 따라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핍절해지고, 파리해진 여러분의 영혼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수단들은 녹슬었고, 하나님의 섬김의 통로는 사라져 버렸고, 그래서 여러분은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야 할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고난이 없습니다. 은혜가 필요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도 그것은 언제나 입술에서 맴도는 수식어구로 끝나고, 가슴을 울리며 여러분 속에 터쳐 나오는 영혼의 부르짖음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은 또한 이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교회의 구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결국은 이 세상의 구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방황하는 자들을 돌보아 주셨습니다마는 그들이 그런 혜택을 받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이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런 봉사로 불쌍한 백성들을 섬기신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성육신 하게 하여 이 세상에서 내려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가 이 세상에 계셨으면 그 아버지가 사랑으로서 자기의 자녀들에게 해 주셨을 그 일을 대신 사람의 몸을 입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 세상이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탄식하듯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많은 양들이 우리 바깥에 있다. 내가 그들도 인도하여 너희와 함께 있게 하여야 하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고, 이때에 예수님이 매일 올리던 간절한 기도는 제자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또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영혼들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울음 섞인 음성으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청하여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 달라고 하라.” 왜? 그렇게 추수할 일군들이 와서 이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한 영혼들을 구원하지 않으면 저들이 쓰러져 죽어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부탁하셨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성령 부어 사도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으면 살아가셨을 그 섬김과 삶이 있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 은혜를 은혜의 용도대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값없이 하나님이 한없이 이 은혜를 부어주실 것이지만 이 용도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그 마음도 부패하고, 은혜도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는 영적인 전투와 같은 삶의 현장을 위한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자기만족을 위한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로 말미암는 자신의 만족을 스스로 엔조이하고, 그 안에서 머물도록 주신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은 이제 구원에 있어서 나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의 감화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행할 수 없는 일을 행하며 순종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사랑하며 순종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영성은 신비한 체험이나 종교적인 환상에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탁월한 신학 지식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한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영성은 이러한 은혜를 많이 받고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었던 눈물로 가득 찬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찬 그 사랑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본받고, 그의 섬김을 본받아 예수께서 가셨던 그 길을 2000년 후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현실 속에서 성취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광은 큰 건물이나 모이는 어마어마한 회중, 참석하는 성도들의 사회적인 지위 고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의 영광은 그 교회에 그리스도로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이 가득 찬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디에 내다 놓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예수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 어디에 있든지 예수의 편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교회의 가장 커다란 영광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신들의 면류관이 바로 자기의 양떼들이라고 고백을 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도 교회의 가장 훌륭한 영광이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많이 닮은 사람들을 많이 길러 내어서 이 세상 곳곳에 어디서든지 그리스도의 편지로, 예수의 향기로 살아가게 하는 것임을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기 안에 충만하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섬김의 삶, 그리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고, 어리석은 자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치고, 미련한 자들에게 지혜를 주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종노릇 하게 하기 위해 주신 것임을 깨닫고 그들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그 사람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은혜를 주신 이유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소명을 은혜 안에 담아두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소명이고 신자는 이것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III. 구원의 소명과 신자의 고난
A. 은혜의 결과인 믿음
성경은 믿음조차도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입니다. 믿게 하시는 은혜가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 작용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믿을 수 있었고, 그래서 이 믿음도 우리가 믿은 것이 공로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는 우리보다 도덕적으로 좀 더 올바르고 좋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까지도 구원해 주지 않으시고 우리는 구원받게 해 주셨는지 아마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답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이 믿은 것이 우리의 공로인 것처럼 자랑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손일뿐이고, 이 믿음을 너무나 크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은혜가 보이지를 않는 법입니다. 믿었는데도 믿은 것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로라고 고백할 수 있을 그때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 이 구원의 은혜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믿을 뿐만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 우리가 믿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지만 심리적으로 믿는 거기에 멈춘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르는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니듯이 믿는 모든 것이 믿음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종류의 믿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일시적인 믿음이 등장합니다. 돌밭에 씨가 뿌려졌습니다. 그것은 마음이었고, 씨는 천국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는 즉시 반응했고, 기쁨으로 그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싹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햇볕이 따갑게 내려 쬐었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뿌리가 뻗어갈 수 없었고,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어떤 씨는 가시떨기 사이에 뿌려졌습니다. 습기도 있고, 양분도 있어서 뿌리는 내렸습니다. 죽지는 않았습니다. 잎과 가지, 줄기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가시나무 떨기에 막혔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 재리의 유혹에 파묻혀 잎과 가지, 줄기는 나왔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생명이 있다 없다 와는 상관이 없이 이것은 모두 일시적인 믿음이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으로 가르쳐 주고 싶은 믿음은 이런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야고보서 2장 19절에서 야고보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한 하나님을 믿느냐 정신없이 말하거니와 귀신들도 이것을 믿고 떠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식의 역사적인 믿음은 귀신들에게도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은 단지 이런 식의 심리적인 믿음, 결실하지 못하는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 믿음이 단지 심리적인 믿음에만 머물고 일시적인 믿음이 아니라 이것이 결국은 확고하게 예수의 인격 속에 뿌리박힌 믿음이라는 것을 그 분의 생애를 본받는 고난 속에서 꽃 피우고 열매를 맺을 때 그 믿음이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도록 주신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랑으로 고난을 받는 믿음입니다.
B. 사랑으로 고난을 받음
2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 “생활하라”라고 하는 이 단어는 번역하기 매우 어려운 난해한 단어입니다. 희랍어로 “폴리튜에스데(πολιτεύεσθε)”라고 하는 단어인데 여기에서 영어 단어 Politic, 정치, 정치학, 경찰, Police 그리고 도시를 상징하는 Police도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원래는 이 폴리스는 마케도니아가 그리스를 모두 통일하기 전 그리스가 도시 국가에 있을 때에 작은 마을 단위의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을 쓸 때에 거기에 나오는 그 신국할 때 그 국, 그 나라가 바로 키비따스((Civitas)인데 이 도시가 정확하게 번역하면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이 도성이 바로 Police 개념입니다.
자, 이것은 약간의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가 아직 작은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을 때에 폴리스의 형태를 취했고 그리고 그들은 높은 산들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각기 독립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폴리스는 인구 약 1만 명, 큰 폴리스는 10만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 폴리스는 우리의 역사 경험으로 말하자면 한 동네에서 수백 년씩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씨족 사회 같은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각각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았고, 오늘날처럼 잘 정비된 성문법전이 아니라 관습법과 같은 불문율에 의해서 나라가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모두 지인들로 이루어진 인간관계를 기초로 하는 소단위 공동체 생활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눈에 보이는 법률보다는 실제로 사람들의 인식 속에 통용되고 있는 가치관과 규범을 따라서 생활하도록 태어날 때부터 요구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폴리튜에스데” 라고 하는 이 단어는 바로 그렇게 규범을 가지고 가치관과 질서를 가지고 있는 씨족 사회에 태어나서 그 속에 있는 관습과 규범을 따라 살아서 모든 사람들에게 거기에 살기에 어울리는 구성원이라고 하는 평가를 받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역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정치하라. 혹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규범과 질서를 따라서 행동하라” 등등 여러 말로 옮길 수 있는데 어쨌든 개념은 바로 그런 씨족 사회에 태어나서 개념이 있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정받도록 살아가는 것, 그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보면 예수님의 말씀 중 가난한 자를 도우라는 이 한 가지를 실천하라 혹은 기도하라는 것 한 가지를 순종하라 이러면 쉬울 텐데 그게 아니라 삶의 모든 방면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로마가 엄청난 판도를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소원이 로마에 한번 가보는 것이었습니다. 로마는 지금 가 봐도 입이 딱 벌어지고 기가 막히는데 그 2000년 전의 사람들이 그 로마에 들어섰을 때에 그 압도하는 이 문화적인 충격과 위압감은 아마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 로마를 보았을 때 한동안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떻게 그 2000년 혹은 2500년 전에 저런 문명을 읽을 수가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로마가 한창 잘 살 때에는 그 로마의 성 안에는 아침마다 빵 차가 다녔답니다. 굶주리는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그 빵 차에서 빵을 얻어가서 이 대제국 로마가 로마 수도 안에서 굶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황제의 수치다 이래서 이것을 먹여 살린 것입니다. 그러니 그 호사스러움이 엄청나지 않았겠습니까? 그 로마를 보고 싶은데 로마로 가는 길은 한없이 먼 길이고, 평생 오매불망해도 못 가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이제 로마가 이런 나라다 라고 하는 것을 전시장처럼 보여주는 도시를 만들고 싶어서 만든 도시가 빌립보였습니다. 그래서 빌립보를 로마 정도는 아니지만 그 축소판처럼 만들어서 못 가는 사람이 대신 거기에 와서 맛이라도 보라고, 미국에 디즈니랜드 가기 너무 힘든 사람들은 과천 대공원에 가서 맛이라도 좀 보듯이 그렇게 만든 곳이 빌립보였습니다. 그러면 그 빌립보가 로마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든 것처럼 빌립보 시민들에게는 긍지가 있었답니다. 우리는 로마를 생각나게 하는 샘플 도시다 그러니까 우리도 로마 사람처럼 품위 있게 행동해야지 이런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아주 기가 막히게 사용해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림처럼 그려 넣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빌립보가 로마를 생각나게 하는 도시라고 말하지만 교회는 저 하늘나라를 생각나게 하는 도시다. 너희들이 빌립보 사람들이라고 로마 사람처럼 품위 있게 행동해야지 라고 말하지만 너희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백성이 누구인지를 맛 보여주기 위한 백성들이다. 그러니 그 천국 시민으로서 복음의 통치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 이게 바로 “생활하라” 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배 시간에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주먹을 꼭 쥐어 보십시오. 월요일부터 어려운 일이 생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왜? 이 세상은 복음의 질서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들이 살기 편한 환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합당하지 않은 세상이고 그래서 이것은 복음의 질서와는 어긋나는 잘못된 질서와의 투쟁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로마의 옥에 투옥되어 사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가 도둑질을 했습니까? 살인을 했습니까?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고 괴로움을 주었나요? 아닙니다. 복음을 전했을 뿐이고, 설교했을 뿐이고, 전도했을 뿐이고 불쌍한 영혼들을 올바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이끌어 주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사도 바울은 헌신했지만 투옥되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 나라가 그런 질서를 원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은 매우 커다란 희생을 요하는 일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올 때 우리들이 죽기까지 결단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시밭길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고난은 이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에 완전히 복종하기 전까지는 언제까지나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이 모든 것을 이기도록 만들어 줍니다. 왜냐하면 이 은혜는 사랑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예수를 위해 참고, 이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견디고, 이 사랑 때문에 지체들을 위해서 인내하면서 고난과 슬픔을 견디고 이기며 뒤로 물러서지 않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기쁨의 서신으로 불리는 책입니다. 기뻐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최소한 18번 이상 등장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 형장에 이슬로 사라질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죄수가 밖에 있는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너희는 기뻐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이 은혜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사는 이 현실은 녹녹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찌를 듯이 다가오는 고난과 견디기 힘든 고통, 그리고 나 자신도 이길 수 없는 나 자신의 한계들이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난과 시련이 끝없는 것 같지만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기쁨도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오늘 우리들이 겪는 슬픔이나 고통보다 더 극도의 슬픔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하나님 찬송하면서 기쁨으로 살던 때가 있었는데 이것은 환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해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해 준 것이었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이지만 계획이 그 안에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계획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소명을 이루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더 많은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를 구해도 응답이 없습니까? 은혜를 간구해도 하나님께로부터 은혜가 주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삶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정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계획을 따라 그 자리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열고 당신의 충만한 은혜를 빈들에 마른 풀 같은 여러분에게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누구든지 은혜의 소명을 따라 살고 싶어 하고, 그렇게 순종하고자 열렬히 은혜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후히 주시고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오늘도 여러분에게 이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을 의지해서 모든 고난과 시련들을 이기고 은혜의 목적으로 반드시 살아서 여러분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께 보람을 안겨드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10 (2013.04.07 주일오전)
10.미끄러진 자를 돌이키심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5:15-6: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안에서 주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 산다면 가장 좋은 것일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종종 우리가 경험하는 신앙의 미끄러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신자가 미끄러질 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돌이키시는 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종종 우리가 신앙에서 미끄러져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 못할 때에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게 해 주시는 우리 주님을 여러분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오늘 이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호세아 본문은 구약 성경 호세아에 나오는 5장 마지막 절부터 6장 첫 절입니다. 호세아는 주전 8세기 후반의 선지자로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비록 그는 북왕국에서 예언활동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으나 그의 마음의 고향은 종교적인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유다 나라에 있었습니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여로보암 2세 때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여로보암 2세는 세속적으로 영면한 군주였고, 그래서 산업이 발달하고 무역이 활발하고 국방이 튼튼하였습니다.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하고 있던 여로보암 2세 때였지만 그것은 세속적 영역에서 그러했지 신앙적 영역에서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당시 이스라엘을 말하여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하였습니다. 빈대떡을 부칠 때에 뜨거운 불 위에 올려놓고 뒤집지를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래는 새카맣게 타고 위에는 익지를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먹을 수 없는 떡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호세아가 선지자로 부름받기 전직이 빵을 굽던 사람일 것이다 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세속적으로는 번철에 붙은 떡처럼 그렇게 뜨거워서 다 타버렸고,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아예 익지 않은 날탱이가 되어 버린 그래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 앞에 받을 수 없는, 받으심직하지 않은 그런 전병같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부르셔서 북 왕국 이스라엘 뿐 아니라 남왕국 유다에까지 이스라엘 백성, 선택된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이십니다. 호세아는 그 유명한 불행한 결혼 생활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디블라임의 딸 고멜에게 장가를 가라고 지시가 내렸습니다. 아마도 디블라임의 딸 고멜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름난 음란한 여자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거룩한 선지자에게 이런 음란한 여자에게 장가를 들라고 명령하실 리가 없다는 점에서 이 결혼생활은 하나의 환상이고 실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혹은 비유이지 실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이 호세아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통해 소위 행동 예언이라는 양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예언은 말로 하는 예언이지만 호세아의 이 결혼생활은 행동으로 하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핵심은 혼인 언약과 용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리고 고멜은 진심으로 호세아를 버렸습니다. 이런 불행한 결혼 생활이 결국은 하나의 그림이 되어서 호세아 선지자에게는 변함없이 타는 듯한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하게 해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런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방탕하게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호세아의 결혼생활을 통해 회화적으로 보여주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II. 기다리시는 하나님
A. 죄를 뉘우치기까지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행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너희들이 그렇게 번영하고 행복한 것 같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너희들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유다도 자기 상처를 깨닫고 결국은 고통을 받게 되는 날이 온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은 번영 속에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불순종하지만 하나님은 당장 그들을 복수하시거나 징벌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사실 이 말씀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계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친밀한 교제를 거두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멀리 떠나신 것처럼 단절을 주시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시는 대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호세아 선지자가 자기를 버리고 외간 남자에게 가버린 고멜을 추격하는 대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언제든지 돌아오면 다시 아내로 맞아줄 것처럼 기다리고 있는 이 호세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다리시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 하나님이 죄를 뉘우치기까지 기다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자기의 죄를 뉘우칠 때까지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문제는 호세아 4장 6절에 의하면 지식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데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른 나라 백성들과는 다른 정신과 생활로서 우리 하나님을 따라가며 살도록 만들어 주는 원천이었던 것입니다. 그 지식을 버린 것은 곧 하나님 사랑을 버린 것이었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경외심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너를 버려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많이 사랑하시고, 번영을 주셨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우상을 숭배했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들은 우상 앞에 자신들의 번영을 빌었고, 자신들의 이 모든 풍족함은 우상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손에 건지셔서 광야를 인도하여 가나안에 정착하게 하셨고, 또 모든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실 수 있는 만복의 근원이신데 왜 그들은 하나님께 비는 대신 우상에게 빌었을까요? 왜 하나님께 복을 받기를 원하는 대신 우상에게 도움을 받기를 원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기를 자처하였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탐욕 속에서 이 세상의 번영을 추구하였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는 것은 우상에게 부터 복을 받는 것에 비해 너무 복잡했기 때문입니다. 왜? 우상에게는 제물을 갖다 바치고 열심히 제사를 드려 우상을 섬기면 우상이 복을 주지만, 그래서 일종의 거래관계이지만 하나님 앞에 복을 받기 위해서는 진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 했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했고, 하나님의 모든 율법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포기해야 했고, 자기 욕심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상은 그런 것들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다 누리고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살면서도 외면적으로 우상을 숭배하기만 하면 우상은 만족했습니다. “이것이 진심이냐? 네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했느냐? 나만 사랑하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묻지만 우상은 그렇게 묻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우상은 사실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으로 말미암아 잘되기를 원하는 자신의 욕망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버리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그렇게 순결한 선지자의 마음으로 아내를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으로 사랑했건만 그 남편의 품을 만족하지 못하고 음란하게도 남편을 떠나 외간 남자의 품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 없고 돈 떨어지면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에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애를 베가지고 오는 그 여자의 아이의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이스르엘’ 이것은 무엇입니까? 아합이 저주를 받고 죽은 그 장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호세아의 결혼 생활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보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로루하마’ 이것은 이제는 더 이상 긍휼이 없다는 뜻입니다. ‘로암미’ 그는 나의 백성이 아니다. 자식을 낳아 올적마다 그의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호세아의 마음속에는 이 고멜을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이 있었고, 이것은 고멜의 어떤 아름다움 때문에 생겨나는 사랑이 아니라 호세아의 뼛속까지 박힌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에서 나오는 그러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오면 호세아 선지자는 받아 주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실한 뉘우침과 회개가 아니었지만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아내를 향한 사랑 때문에 용서하고 받아주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용납해 오신 하나님 아버지 사랑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속에서 자기의 죄를 스스로 뉘우칠 때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못하면 즉시 우리를 때리실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 스스로 선택한 불순종과 잘못 때문에 도래하게 되는 쓰디쓴 열매를 우리들이 맛보고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기쁨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의 죄를 뉘우칠 때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기다림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B. 주의 얼굴 구하기까지
주님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4편 6절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주의 얼굴빛을 간절히 구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모양을 가지신 분이 아니시니 어찌 형체가 있겠으며 형체가 없는데 어찌 얼굴과 코나 귀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어린 아이와 같은 우리들에게 말귀를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묘사하는 하나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악인에게 향하실 때 징계를 내리시고,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향하실 때에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최고의 특권은 주님의 얼굴 빛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면 주님 앞에서 사는 행복이 얼마나 큰 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삶이 진리에서 멀어지고 마음이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모든 행복과 기쁨을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하려는 하나님의 자녀의 고유한 마음을 상실하게 됩니다. 결국 인간은 어차피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이 거의 본능이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아보고자 몸부림을 치게 되고,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얻고자 하는 마음과 생활이 더욱 진지해지면 진지해질수록 참된 하나님의 행복과 기쁨으로부터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부터는 하나님 앞에 주님의 얼굴 안에서 발견되는 그 행복과 같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먹을 것을 손에 들고 즐겁게 놀던 아이가 엄마가 생각이 나자 모든 것을 버리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이 파래지기까지 엄마를 찾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을 멀리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가까이 계시고, 어떤 때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시지만 우리가 그 분을 가까이 만나기 위해서는 그 분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여야 합니다. 시편 42편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내가 주를 찾기에 갈급하리이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기를 원하는 성도의 간절한 기도인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할 때에 우리는 미끄러졌어도 다시 기다리시던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C. 고난을 사용하심
오늘 성경은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좋은 쪽으로 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주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악한 마음을 갖는 것은 연습이 필요 없고, 또 교육이 필요 없지만 선한 마음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고통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멀리 떠난 자신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그 고난의 아픔 속에서 결국은 자기를 도울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무엇을 다 얻는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이 고통 속에서 건져줄 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그는 절대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III. 돌이키시는 하나님
A. 회개를 결단케 하심
이렇게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은 그 고난 속에서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오늘 이 돌이키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임이라”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를 결단하게 하십니다. 예전에는 우상을 섬겼고, 자기 욕망을 따라 살 때에는 자기 행복밖에는 몰랐는데 이제 이렇게 회개를 결단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자 그는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생겨납니다. 나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자녀 모두가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고,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모두 함께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절실한 인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회개를 결단하고 예전에 자기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우상을 숭배하며 번영을 꿈꾸었던 욕망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우리 여호와 하나님 한분을 위해서 자신이 창조되었고, 또 구속받아 선택된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를 결단하게 하는 동기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이 여러분을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을 향하고 있습니까? 자기 아들을 내어주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면서까지 여러분을 구해주신 하나님의 그 구원의 은총이 여러분의 삶을 위한 동기요, 또 목적이 되고 있습니까? 나 하나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올바로 사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절대 절명의 요구가 우리의 마음속에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해 돌이킨 훌륭한 표인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준행하고 그 뜻대로만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우리는 원하지 않아도 종종 미끄러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어둡고 긴 침체가 올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영혼의 깊은 침체의 밤을 지날 때에 우리는 많은 고통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만이 나의 진정한 행복이요, 그리고 하나님만이 나를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를 돌아봄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께로 돌아오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침체와 고통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두 가지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희망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식으로도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고 우리를 저주하거나 증오하시는 분일 수 없고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언제나 그렇게 미끄러진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어떠한 침체와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돌아갈 길을 찾을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함
1. 고통에 대한 새 해석
이렇게 돌이키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영혼의 각성은 인생의 고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져다줍니다. 즉, 고통을 받을 때에 모든 인간은 그 고통을 피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이 고통에서 벗어나 보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해결이 되면 고통이 멈출 테니까 스스로 만족하는 것으로 끝나고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갑니다.
그러나 해결이 안 됩니다. 이때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이 현실을 보면서 절망하고, 절망은 항상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동반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더욱 더 완악해져 하나님께 대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통을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된 것이 “나의 모든 고통이 나의 잘못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믿음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회개의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 마음을 향하고 주님을 의지하게 되면 자신이 당하는 어떠한 고통도 하나님이 나에게 잘못한 것에 대해 복수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괴로움과 고통을 통해 나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징계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이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깨닫게 되면서 자신을 아프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 징계가 사실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핏빛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이러한 죄의 고통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용서의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복음적 사실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린다
2. 모든 것을 잃고 하나님을 얻음
때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형언할 수 없는 큰 불행을 당한 것에 대해서도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렇게 큰 불행을 당하고도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하느냐고 물으면 “불행은 가슴 아픈 것이었지만 제게 주신 깨달음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차가 고속도로에서 뒤집히면서 그러면서 언덕 아래로 튕겨 나가서 굴러서 같이 타고 있던 네 사람 중 두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중상을 입고 자신은 살았습니다. 자신도 여러 날 동안 혼수상태에서 간신히 깨어났습니다. 그러고는 진짜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비행기가 떨어졌습니다. 600m 상공에서 떨어졌는데 다 죽고 혼자 살았습니다. 그리고는 예전의 방종했던 삶을 접고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삽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깨달았다는 것이 뭐냐 하면 뭐 그렇게 심오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너무 평범한 설교 속에서 매일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커다란 과외비를 치르기에는 너무 평범한 사실입니다. 성경만 열면 하나님이 우리 사랑하신다는 이야기가 매 장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렇게 예배 시간에 나와서 조용히 예배를 드리면서 갈 때 “아, 그렇구나. 진리가 그것이었구나. 아,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고 그렇게 살아야 되는구나.” 깨닫고 돌아가는 그것을 그 사람들은 가족들 몇 사람 죽고 나서, 불구가 되고 나서 겨우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의 간증에 그렇게 입을 벌리고 침을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이렇게 깨닫는 게 여러분이 훨씬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밝은 진리의 빛 아래에서 물론 우리 모두 온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조금씩이라도 온전하게 되어 가려고 애를 쓰면서 그러면서 잘못 했을 때에는 주님의 용서를 구하고 잘했을 때에는 잘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영광을 돌리고 이렇게 하면서 매일매일 살아가는 그것이 복된 생활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신의 행복을 하나님 바깥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나의 행복이 남의 불행이 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났던 탕자가 다시 돌아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돼지를 치는 목부가 되었고, 쥐엄 열매라도 돼지우리 속에서 먹고 싶었는데 그마저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자신의 비참한 이 가난한 형편을 생각하며 아버지의 부유한 집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는 혼자 되뇌었습니다. ‘내가 이제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런데 내 아버지의 집에는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이제 내가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그리고 나를 아들로 여기지 말고 품꾼중 하나로 여겨 달라고 아버지께 아뢰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가야겠다.’라고 마음을 먹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오늘 곤고하십니까? 그리고 고통을 받으십니까? 평안과 기쁨이 사라졌습니까?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시는 간절한 사랑의 음성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 경우도 하나님이 칼로 찌르시거나 채찍으로 후려치셔서 그것만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언제나 종종 고난과 아픔은 우리를 각성시킬 수는 있지만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불행과 고통이 아니라 그 불행과 고통 속에서 내미시는 우리 주님의 피 묻은 손입니다.
(찬양)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이여
길이 참 어둡고 무섭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와
부모는 집을 떠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거기 있어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을 멀리 떠나 미끄러져 있을 때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여러분이 깨닫고 돌이켜 당신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당신의 뼈에 새기셨습니다.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으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고통을 당할 때에 그 고통 받는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는 더 큰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도 오늘도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어루만져 얼음같이 차가운 여러분의 마음을 녹이시고, 동토와 같이 얼어붙은 땅 여러분의 심령을 두드려 봄날이 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러분이 우리 주님께 돌아가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여러분을 품고 사랑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주님 굳게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11 (2013.04.14 주일오전)
11.구원의 은혜를 전파함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도 베드로가 흩어진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쓴 것은 주후 64년에서 68년 사이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이때에는 그 유명한 로마의 네로황제의 치하였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대대적인 핍박은 시작되었고, 로마에서 뿐만 아니라 흩어진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요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일찍이 하나님 앞에 용기가 없어서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실패의 과거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자신과 똑같이 믿음이 없어 핍박 가운데 낙심하고 좌절하여 실패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려고 이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는 뱃사람이고, 무식한 사람의 대명사로 여겨졌는데 신약 성경 중 가장 유려한 희랍어 문체를 보이는 것이 베드로 전서와 후서입니다. 힘 있는 이 필체는 핍박 가운데서 기뻐하도록, 환란 가운데서도 이 믿음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아주는 그런 편지가 되었습니다.
II.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
A. 택하신 족속: 선택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사도는 먼저 자기의 수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지만 그 목적에 부흥하는 삶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성을 네 가지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이고 소유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택하신 족속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심으로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시조를 삼으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원래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집에서 태어난 한 자녀일 뿐이었고, 여호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는 그 시대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 택하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어떤 좋은 장점이나 훌륭한 공로 때문에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상을 섬기는 동네에서 태어난 그런 이름 없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로 하여금 한 가정을, 한 민족을, 한 국가를 이루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얼마나 약한 자를 택하여 당신의 강한 나라를 이루시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선택에 관한 사상은 이제 신약 시대에 와서는 더욱더 찬란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같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들을 하나님이 구원해 주기로 선택하신 이것이 우리의 의로움이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우리는 왜 이 사람도 아니고, 이 사람도 아니고 내가 선택되었는가에 대해서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 가도 어쩌면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택하신 이 은혜로운 선택의 기초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지 우리의 공로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점이나 혹은 유익 때문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입니까? 이렇게 자기를 무한한 은혜로 선택해 주신 값없이 불러주신 이 은택에 대하여 감격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겠습니까?
B. 왕 같은 제사장: 사명
택하신 족속이 이런 은혜로운 선택을 말하는 것이라면 왕 같은 제사장은 하나님의 자녀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드려주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불결해진 죄인들이 어떻게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지를 말해주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지정해 놓으신 제사 제도를 통하여 그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는 모든 사람이 아무렇게나 드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제사장이 있어야 제사를 드릴 수 있고,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은 따라서 제사장의 중보 없이는 하나님께 열납 되는 제사를 드릴 수 없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사장은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였습니다.
이러한 제사장이 개인이 아니라 국가 단위로 제시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사장의 나라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나라들이 있습니다. 크기와 이념이 각각 다른 수많은 나라들이 있는데 이들은 각각 이 세상에서 상이한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영광의 밝고 흐림과는 상관없이 그들 자력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덕을 입어서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을 모든 나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구원의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제사장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세계 역사에 놓고 본다면 이스라엘은 한 줄의 기록할 가치도 별로 없는 변방의 아주 작은 나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의 역사적인 관점에서 그렇지 신학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작은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 속에 인류의 구원을 위한 계시를 담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제사장의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이 제사장의 나라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먼저 충분히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의 보호아래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무도 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하나님의 법에 맞게끔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삶을 살지 못하고 주님을 경외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도 너희를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고 경고하셨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최고의 경고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육적인 왕국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두 종결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그림자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제 영적인 이스라엘을 세우시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왕국이고,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그 왕국의 표상입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에 의하여 이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제는 제사장이 필요 없이 단번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길을 그리스도를 통해 공급받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모든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제사장이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제사장과 같은 중보는 필요 없지만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원받지 못한 그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통로가 된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우리가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왕 같은”이라는 말이 덧붙여진 것은 그 신분이 얼마나 고귀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모든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는 로열패밀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한 가족을 이루는 왕 같은 제사장은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상 끝날까지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선교적인 사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C. 거룩한 나라: 구별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표현이 이처럼 사명을 보여준다면 거룩한 나라는 구별과 통치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나라를 이루게 하셨고 후에는 왕을 허락하셔서 겉보기에는 이 세상 나라와 꼭 같은 나라의 형태를 갖추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거룩한 나라였습니다. 세상 나라와 똑같은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그들의 실질적인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왕도 백성들 앞에서는 왕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미천한 종이라고 고백하고 자신과 모든 백성들이 함께 그 분의 어린 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목자이신 그 분의 인도에 따라가는 양떼들이 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구별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교회도 신자들이 이 세상 나라에 속해있으나 그러나 동시에 거룩한 나라에 속해있고, 거룩한 나라에 속해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은 이 세상 나라의 백성의 정체성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았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교회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다는 점에서 그들은 거룩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그들이 이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가치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할 구별된 족속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D. 소유된 백성: 사랑
거룩한 나라가 구별과 통치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누는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소유된”이라고 하는 이 표현, “나의 소유, 나의 것,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라고 하는 이 모든 구약의 표현들이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소중함과 기뻐함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물건의 가치는 그것을 주고 산 대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인데 학교에서 공부를 가르쳤는데 어느 학생이 수업시간에 “교수님” 하면서 선물을 하나 내밀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에 출장 갔는데 교수님 생각이 나서 하나 샀습니다.” 그래서 줬습니다. 그래서 가지고 집에 왔습니다. 열어보니까 뭐 먹을 거나 그런 거나 사다주지, 보니까 볼펜입니다. 나는 볼펜에 막 여러 가지 모양에 별로 그렇게 관심이 없고 그냥 그저 모나미 투명 볼펜 하나면 만족을 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뭐 큰 선물인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날 주더니 겨우, 큰 사업을 한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까짓 거 주나” 그러면서 서랍에 툭 넣어놓고 한 2년 동안 쳐다도 안 보았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비행기를 탔는데 그거하고 똑같은 상품이 그 쇼핑 가이드에 있는 것입니다. 보니까 그때 돈으로 18만 원짜리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한 23년 전이니까 상상할 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그때 18만원이면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돌아와서 다시 그것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게 그렇게 비싼 거구나” 그러고 다시 한 번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만 쳐다보면 이게 구원받은 신자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잘 안 듭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보면 우리 지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사셨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유된 백성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도 하나님은 당신이 가장 아끼시는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소중한 백성과 사랑을 나누는 관계 속에 있는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께 소유된 그 백성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라면 이런 높은 정체성들은 모두 우리 자신의 장점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덧입혀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짜입니다. 대가를 요구하면서 베푸는 것은 공짜가 아닙니다. 그것은 뇌물이거나 아니면 정당한 노동의 품삯입니다. 은혜는 아무런 보답을 바라거나 혹은 보상이 아닌 아무 조건도 붙이지 않고 주는 그것이 은혜입니다.
III. 구원의 덕을 전파함
A. “기이한 빛”에 들어감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는 이처럼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거저 베풀어 주시는 것이지만 그 은혜에는 반드시 계획이 있습니다. 그 계획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우리들을 이렇게 선택하시고 사명을 주시고 구별해 통치하시고 사랑하실까요? 이것을 오늘 성경은 구원의 덕을 선포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왜냐하면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첫째는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것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에서 이 빛이라고 하는 단어는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계속 나오고, 어느 성경도 이 빛에 대한 언급이 없는 성경은 없을 정도입니다. 이 빛은 매우 신비한 피조물입니다. 이 빛은 자신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면서 근데 물리학에서 이 빛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가지고 한참 헷갈렸고 아직도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입자냐 파동이냐를 가지고 오랜 세월 논쟁을 벌였고, 이 빛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직도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앨버트 아이슈타인은 말하기를 “이 빛은 단순히 자연적인 물질이 아니라 철학적인 사물이다”라고 까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빛은 단순히 객관적인 사물인 것 같으면서도 또한 단순한 사물이 아니어서 빛 자신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면서 그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만들어주는 독특한 사물입니다. 그래서 이 빛은 존재와 인식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이 마치 진리가 그러한 것처럼 독특한 양식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빛에 대해서 세 가지 용례를 말합니다. 첫째는 자연적인 빛입니다. “하나님은 그 햇빛을 선한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악한 사람들에게도 비추시나니” 할 때의 이 빛은 그저 아무 뜻이 없는 그냥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그 햇빛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도덕적인 의미로도 이 빛이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착한 행실로 모든 사람들 앞에 비추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할 때 이것은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윤리적인 정신과 마음의 빛입니다. 어떤 사람이 워낙 올바른 삶을 살면 그 사람이 죽은 후에도 그 빛은 남아서 우리에게 감화를 주고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행하지 말아야 할지를 알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도덕적인 빛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는 신학적인 빛입니다. 이것은 곧 진리 혹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가르치는 빛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 1서에서 빛으로 묘사되었고, 빛이 비추되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하였고, 빛이 왔으나 사람들이 그 빛을 영접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 사람들이 어두움의 일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진리,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으니 이 빛은 곧 진리의 빛, 생명을 주는 빛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가리켜 빛이라고 하신 이 비유는 예수님이 만드신 비유가 아니라 이미 구약 속에 풍부하게 나오는 빛입니다. 성막 안에 비취던 그 등장 불빛도 결국은 물리적인 빛이었지만 그 신학적인 빛을 예표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편에서는 이렇게 시편 기자가 노래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내 길의 빛이요 내 발의 등이니이다”라고 말입니다. 길을 환하게 비추는 그 빛일 뿐 아니라 매순간 결정하며 걸어가게 하는 모든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올바른 판단을 제공한다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따라서 이 어둠 속에서 영혼이 어둡고 지성이 완전히 눈멀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판단하지 못한 무지몽매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빛의 일보다는 어둠의 일을 좋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원은 바로 이 캄캄한 어둠속에서 기이한 빛이 처음 들어온 것이고 구원받은 자의 특권은 바로 지속적으로 이 진리의 빛 안에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과 그리고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 바를 가르쳐 주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진리를 성경 그리고 성경의 진리를 연구하는 학문의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으니 이러한 성경과 학문을 통하여 우리는 그 빛을 더욱더 풍부하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고, 우리의 장점이나 우리의 아름다움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 기이한 빛을 전파하며 사는 것을 사명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어두움의 자식이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 역사하는 마귀의 자식이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심판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어두운 영혼에 밝은 빛이 비추고 우리의 캄캄한 지성을 찢으며 찬란한 진리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이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진리의 빛은 복잡하고 많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짧고 간단한 복음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 역사상 수많은 철학가와 사상가들이 이 세계가 어디로부터 왔고, 인간은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지 진정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를 탐구해왔지만 도달할 수 없었던 핵심 정답이었습니다. 그 핵심적인 정답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우리에게 전해졌고, 이것이 우리의 영혼에 기이한 빛으로 다가왔을 때 우리는 그 찬란한 빛 앞에 압도되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학문과 사상과 철학이 가르쳐 주지 못한 구원의 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이 빛이 들어왔고 그래서 우리는 그 빛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마는 우리가 이 빛을 전파해 주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은 아직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 빛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 빛을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설명한다고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에 그 이유 때문에 소통을 포기한다면 신자의 복음전파의 사명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과연 내가 내 영혼에 비친 이 복음의 광채, 나의 영혼에 자유를 가져다 준 이 찬란한 진리의 빛을 저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믿어지게 하는 것은 오직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지만 어떻게 예수 믿기 전에 나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논리로 저 사람들에게 이 빛을 소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삶이 되어야지만 이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선교적인 삶에 부합하는 태도입니다. 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전파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의 자녀 된 고귀한 명분과 혜택을 주신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전파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 덕이라는 단어가 꽤 많이 나옵니다. 덕스럽게 행하라, 덕을 세워라, 혹은 덕 있는 사람 등등 말입니다. 이 덕은 크게 두 가지 의미인데 하나는 어떤 행한 인간의 일에 대한 도덕적인 평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때에는 미덕이라고 부르고, 그 뜻에 부합하지 않을 때에는 악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보다도 더 보편적인 용례는 영혼의 올바른 힘입니다. 이것이 바로 덕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영혼과 정신의 올바른 힘, 이것을 곧 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자, 어떤 사람은 불의한 일이 있을 때에 그냥 타협하고 참고 넘어가는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못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마음과 정신 안에 자신뿐만 아니라 이 모든 세계가 올바르게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강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영혼의 힘입니다. 모든 욕구가 힘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악하고 타락한 욕구는 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올바른 힘, 이것을 덕이라고 제가 정의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긍휼히 여기는 성향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위에 있는 사람이 고통을 받고 궁핍하고 괴로움을 당해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 하고 살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도와주지 않으면 못 배기고 함께 눈물을 흘려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는 먼 나라에서 누군가가 가난과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는다고 하면 그들이 너무 가엾어서 무엇인가로도 그들을 위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성향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의 힘이 아니라 영혼과 정신의 힘입니다. 긍휼이라고 하는 영혼의 올바른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덕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랑의 원인은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이 사랑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굴이 예쁘면 사람들이 한눈에 자꾸 반합니다. 정신에 뭔가 아름다운 것이 있으면 한눈에 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대화하고 사귀는 가운데 저 사람 속에 그 몰골은 흉악하지만 그 속에 뭔가 문자속이 기특하기도 하고 그리고 뭔가 남에게는 없는 아름다운 것이 그 정신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에 그 사람에게 계속 그렇게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그림같이 예쁜 형제가 진짜 정말 외모로는 그 사람 짝이 될 수 없는 자매와 만나는 적이 있습니다. 반대도 물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자기가 잘 생겼기 때문에 누구와 만나도 2세는 예쁘게 생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 사람은 비록 얼굴은 못 생겼지만 그 사람이 그 용모에 이끌리는 것보다도 더 강한 이끌림을 갖게 만들어 주는 어떤 아름다운 장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실제 있었는지 콩꺼풀이 씌워서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 그것은 문제가 안 되고 그랬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요? 하나님이 보실 때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일부라도 남아 있으면 성경이 죄인들을 그렇게 절망적으로 묘사했을 리가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완전하고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눈이 굉장히 높으십니다. 누구를 봐도 진짜 거룩하고 훌륭하구나 이렇게 생각하실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앞에 그의 시선을 감당할 만큼 의롭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은 사랑 받는 자들에게 원인이 있어서 생겨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사랑의 성향이 아무 가치가 없는 인간인데도 그들을 한없이 불쌍히 여기게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영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죄인들을 향해서 긍휼과 은총으로 깊이 사랑하시는 그 성향, 이것을 ‘박애(베네볼렌띠아)’라고 부릅니다. 이 박애는 저 사람의 어떤 좋은 점 때문에 내가 마음이 동해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의 성향이 사랑하도록 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박애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박애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박애적인 사랑이 그 인간을 향해 넘쳐났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 가장 중요한 표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런 영혼의 위대한 덕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의 삶은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 입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 나의 나 된 것이 나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덕에 대한 그 끝없는 자랑과 찬송, 이것이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래서 이 덕을 아직까지도 모르고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박애적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 이 말씀이 하나님의 놀라운 덕의 표현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는 것, 이것을 남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그 은혜에 감격하고 그 사랑에 감격하며 말하는 그 간증의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교는 단순한 사상의 전파가 아닙니다. 자기가 만나 예수 그리스도,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 자기가 체험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1인칭의 언어로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진정한 의미의 선교입니다.
존 뉴턴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다가 영국에 팔아먹는 소문난 악독한 노예 상인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구원의 은혜가 너무 감격해서 이 속에서 막 시상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떠오른 그 가사가 “Amazing Grace”입니다. 이것을 어디다 적으려고 하는데 가진 게 없어서 주머니를 뒤져 보니까 화투조각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투 뒤편에다가 적어 놓은 게 “Amazing Grace”입니다. 평생 신실한 목회자로 살았습니다. 결혼을 다섯 번을 했습니다. 부인이 결혼하면 몇 년 살다 죽고, 또 죽고, 또 죽고, 이런 고통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치매기가 오기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염려했습니다. 그때 자기를 향해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의식이 흐려진다고 하더라도 두 가지 사실 곧, 내가 하나님 앞에 절망적인 죄인이었다는 것과 하나님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심으로 나를 구원하셨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에 대한 절실한 기억들을 가슴에 아로 새기는 것으로만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사랑으로 하나님의 이 아름다운 덕을 내 자신이 체험하고 이것을 가고 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간증하고 전파하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아멘
C. 전파하는 선교적 삶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전파하는 선교적인 삶을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덕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이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파하는 삶은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고, 누구도 이렇게 자기를 구원한 그리스도 예수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기까지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충분히 고백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뿐 아니라 사랑하는 모든 이웃들이 모두 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알고,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감으로 절망과 좌절을 딛고, 하나님 앞에 복되게 살도록 그 절실한 소원을 품고 살아가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름이면 한번은 국내 아웃리치를, 그리고 한번은 해외 아웃리치를 나갑니다. 해외 아웃리치는 좀 돈이 많이 듭니다. 최소한 100만원은 가져야 되니까. 그럼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라 본인이 자비량해서 가는 것입니다. 작년에 150명이 그래도 해외에 그 바쁜 휴가를 내서 세계 방방곡곡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올해는 200명이 목표입니다. 그런데 국내 아웃리치는 작년에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1500명 쯤 갔습니다. 올해도 이제 5월 달에 가는데 주일을 끼고 갑니다. 주일에 가면 여기는 텅 빕니다. 헌금도 안 들어옵니다. 교회 살림살이에 중대한 지장이 됩니다. 그래도 아웃리치를 계속 가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적인 삶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5월 달에 나는 여기서 혼자 예배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나 혼자. 다 가고. 제발 남지 말고.
여러분이 언제까지 이렇게 두 눈으로 똑똑히 떠서 설교자인 저를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희미해집니다. 그리고 눈이 멀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걸어 다닐 수 있을지 알지만 교회에 이렇게 노인이 되어서 부축을 받으며 지팡이를 짚고 혹은 휠체어에 오는 노인들을 보지 않으십니까? 그 분들도 젊었을 때에는 여러분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날이 옵니다. 메뚜기는 한 철이라는 뜻입니다. 그 정해진 시간 안에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지 세월이 지나고 나면 마음에 소원이 있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무위도식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아웃리치를 가서 복음을 전해 보면 성과가 나타날 때도 있지만 별로 성과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사람을 예수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분부하신 대로 충실하게 우리를 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의 덕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한번 제가 아웃리치를 따라 갔는데 전도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강퍅해서 가서 그냥 막 끈적지게 달라붙어서 별명이 찐득이였습니다. 그러니까 바가지로 물을 끼얹고, 빗자루를 집어 던지고, 어떤 할머니는 욕을 하면서 부삽으로 흙을 퍼서 막 재수 없다고 예수 귀신 들린 것들 다 저리로 가라고 그러지만 그래도 살살거리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다가가서 팔짱을 끼고 할머니, 어머니 뭐 하면서 김 메면 같이 김 메주고 그 다음에 어깨도 주물러 주고, 어깨 주물러 주면 가만히 있습니다. 누가 그 시골에서 어깨를 주물러 주겠습니까? 다 노인네들인데. 시원하니까 가만히 있습니다. 그리고 어깨 주무르면서 계속 복음을 전파하는데 조그만 주무르면 또 일어나서 다른데 가야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생각해 낸 게 침뜸 전도법이었습니다. 눕혀놓고 배를 걷고 거기다가 뜸을 몇 개 놓고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움직이면 안 됩니다. “할머니 움직이면 안돼요.” 그러면 한 10분 동안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다 지혜를 주셔서 더 생각해 낸 게 뭐냐 하면 링거 전도법입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들이 링거를 많이 사가지고, 영양제를 사 가지고 가서 그 할머니들, 할아버지들이 대게 영양이 부족합니다. 링거를 놔줍니다. 그거 싫다는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디 가서 맞는데. 그것은 두 시간 반 동안 못 움직입니다. 머리맡에서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강해를 해도 못 움직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니까 그 중의 한 노인이 청년들에게 “너희들은 못된 것들이야.” “왜요?” “못됐지. 이 좋은 예수님을 왜 이제야 전해주니?”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그러면서 한없이 우시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가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도 고무신에다가 새끼를 묶고 그리고 기어서까지 교회에 오시던 분입니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이 세상에는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고 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오면 모든 지체들이 겸손해집니다. 왜? 내가 예수를 믿은 게 너무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해도 안 믿어지는 예수를 하나님은 어떻게 내 마음속에 믿어지게 해 주셨을까?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리고 교회에서 불평이 모두 사라집니다. 왜? 이렇게 완벽하게 제공해 주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2층에 올라가면 책이 수천 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옆으로 내려오면 테이프와 무슨 CD와 모든 책들이 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무 말씀을 보다가 배고프면 옆에 가면 열린 공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커피가 맛이 없다고 그래서 이번에 기계까지 바꿔서 사람들이 커피만 달라고 합니다. 이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를 만들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전파하는 삶을 살라고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섭리 속에서 여러분을 위해서 봉사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위해 봉사해야 되겠습니까? 그런 것을 모릅니다. 그러다 그 시골에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교회 오기 위해서 1시간씩 걸어서 새벽 기도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감격을 하는 것입니다. “아, 정말 나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주님 앞에 감사하게 됩니다.
I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1년 365일 산 중에서 “아, 오늘은 정말 예수만 위해서 살았구나.” 며칠이나 될까요? 일생 산 날 중에서 금주는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그 주가 몇 주나 될까요? 여러분이 오늘 무위도식하면서 흘려보내고 있는 이 헛된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입니다. 그들에게는 허락이 안 되는데 여러분에게는 허락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몰랐던 때에는 몰랐으니까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무위도식하면 안 됩니다. 무위도식할 때 가장 손해 보는 사람은 여러분 자신의 영혼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섬기고 봉사해야 됩니다. 무엇이든지. 정말 찾을 수 없으면 저를 찾아오십시오.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많습니다.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구원의 덕을 전파하기 위해서 쓰레기 같은 우리들을 불러 당신의 자녀 삼으시고, 우리에게 없는 은혜를 주시고 선한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거룩한 소원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복음의 진리의 빛 가운데 거하며 충만한 사람으로 주님을 섬기며 보람 있는 인생을 살아서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2.내가 사랑하는 하늘나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이 시리즈를 11번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이 은혜를 전파하며 사는 것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성도는 하나님이 구원해주신 그 목적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일평생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시련도 있을 것이고, 고난도 있을 것입니다. 분투하며 살고 그 마지막은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마지막 삶입니다.
II. 죽음 이후의 인간
오늘 성경 본문에 보면 사도 요한이 밧모라고 하는 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 예수께로부터 받은 위대한 미래의 계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하늘나라의 그림입니다. 살아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순간에 어느 순간 홀연히 변화하여 영광스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주님의 재림의 날이 오기 전에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이든 불신자이든지 때가 되면 죽을 터인데 죽고 나면 육체는 이 세상에 남겨두고 영혼은 옮겨지게 됩니다. 신자는 천국으로 가고 불신자는 지옥으로 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성경은 천국을 가리키는 두 단어와 지옥을 가리키는 두 단어를 싣고 있습니다. 낙원과 천국이라는 단어와 음부와 지옥이라는 단어가 그것입니다. 낙원은 때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음부는 고통 받는 곳이라고 묘사됩니다.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신자의 영혼은 죽는 즉시 낙원에 이르게 되고, 불신자의 영혼은 죽는 즉시 음부에 이르러 심판의 날까지 대기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믿는 자는 낙원에 있었던 영혼과 땅에 있는 육체가 결합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믿지 않는 영혼들은 음부에 있던 영혼과 땅에 있는 육체가 결합하여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고 나서 영원한 부활 그 사이의 기간을 중간시기라고 하는데 바로 이때에는 신자의 영혼이 육체와 만나지 못한 상태로 낙원에 있는 것입니다.
낙원과 천국이 혹은 음부와 지옥이 어떤 관계에 있을까라고 하는 것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제한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기초로 한다면 낙원은 어떤 식으로든지 천국과 연관된 곳이고 음부는 지옥과 연관된 곳으로서 낙원에서도 비록 우리의 육체를 입지 못한 영혼이지만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고, 음부는 거기에서도 역시 영혼으로 지옥의 고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 이후의 인간의 상태입니다.
신자는 모두 불신자와 함께 죽지만 그 죽음의 의미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불신자에게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이지만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하나님이 보다 행복한 상태로 그 사람들을 이끌어 가시기 위한 성화의 과정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온전한 사람이 되고자 애를 써도 온전할 수 없었던 그 사람이 죽음과 함께 성화를 하나님이 완성을 시키셔서 영광스러운 나라에 들어가기에 적합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님과 대면할 날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삶을 영위하여야 할 것이고 주님을 뵈올 때 온전해지기를 사모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마지막 날에 모든 육체를 부활시킴으로써 각각의 영혼과 만나게 하여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과 기쁨에 들어가게 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지옥과 심판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III. 완전한 하늘나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그때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하늘나라는 이 세상의 불완전한 나라와는 비교되지 않는 완전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고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이 짧은 묘사에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네 가지 중요한 특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로와 영생, 그리고 기쁨과 해방입니다.
A. 위로가 있는 나라
하늘나라는 첫째로 위로가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도 이 세상은 눈물의 골짜기요 서러운 나그네 길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태어날 때에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고 마지막 죽을 때에 눈물을 흘리며 수많은 사람들의 비통한 울음 속에서 정든 세상을 등지고 영혼 속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인생의 모든 항로 자체가 눈물을 뿌려온 길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살아간 발자취는 그가 뿌린 눈물의 흔적으로 점철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을 살다가 지나는 나그네와 같은 인간들의 여정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은 말하기를 “예수님이 그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성도이지만 우리들이 흘리는 눈물에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눈물이 있고, 그렇지 못한 눈물도 있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아파하며 흘리는 참회의 눈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며 흘리는 간절한 섬김의 눈물, 핍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려는 믿음의 눈물은 얼마나 고귀한 것입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이렇게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사명을 따라 살기 위해서 흘린 모든 섬김의 눈물을 그 나라에서 씻겨 주실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 주님을 위해 울며 인생길을 걸어왔던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고난과는 비교될 수 없는 큰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에 우리 주님이 그런 고결한 눈물만 씻겨 주신다면 주님을 위해 살지 못했던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받은 상처와 눈물, 두려움과 어두움 속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그리움 때문에 흘렸던 눈물들, 이 모든 눈물들조차도 우리 주님이 친히 씻겨주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도를 향한 우리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인 것입니다. 눈물 흘린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나라는 이 모든 슬픔이 끝나는 나라요, 그 곳에 들어간 모든 성도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기심으로 하나님은 그에게 넘치는 위로를 베풀어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렸을 적에 골목에서 동네 형들이나 혹은 친구들에게 얻어맞거나 억울한 일을 당해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다가 따돌림을 당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때 마음이 상하면 여러분은 누구에게로 달려갔습니까? 울면서 엄마를 찾아 달려가면 일하다 나온 어머니는 우리를 그 치마폭에 감싸고 역성을 들어준 후 우리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당신의 치맛자락으로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예전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따뜻이 안아주었고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환란과 시련, 견디기 힘든 고통, 우리의 죄와 부패성이 눈물을 흐르게 할 때에 이 세상이 주는 위로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람의 위로라는 것은 얼마나 하찮은 것입니까? 오늘은 내 마음에 위로가 되었던 사람들이 내일을 상처를 주고 오늘은 내 눈에 눈물을 닦아 주었던 사람이 내일은 내 가슴에 칼을 꽂는 배반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눈에 모든 눈물을 씻겨주시는 예수님은 변함없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은 우리의 눈물을 닦으시고 내일은 우리의 마음에 고통을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위로는 성도의 영원한 위로이고, 궁극적인 위로이며 최종적인 위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이 사는 동안 죄 많은 이 세상의 위로가 없는 것을 영원한 위로가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눈물이 많은 나그네 길을 지나고 있는 과객이며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나라는 우리 주 예수님의 위로가 있는 나라입니다. 인생을 주님을 위해 분투하며 살던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이런 위로의 나라를 예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B. 영생이 있는 나라
둘째로는 하나님의 하늘나라는 영생이 있는 나라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지극히 사랑하던 사람을 죽음 저편으로 건네 보낸 사람들은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경험합니다. 죽어간 자의 고통은 산 자의 눈물이 되어서 그들의 마음을 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부활의 몸으로 다시 입게 되기를 소망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우리의 소박한 꿈인데 태어날 때는 순서대로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순서와 상관없이 죽음으로 우리를 갈라놓습니다. 세상에 있는 동안에 우리가 아무리 성화되고 주님의 형상을 본받아 간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으로 말미암는 고통과 견디기 힘든 이별의 슬픔이 완전히 종식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다시는 죽음으로 인해 우리가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는 뼈저린 비극은 겪지 않습니다. 인생의 나루터에서 우리는 남겨두고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홀연히 죽음의 강을 건너야 하는 뼈아픈 일들이 이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언제나 곁에 있고 죽음이 다시는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는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감으로써 우리의 가슴에 못 박던 죽음의 모든 권세가 그 나라에서는 미칠 수 없고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었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곳에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죽음 때문에 다시 헤어질 위협과 두려움이 전혀 없이 영원히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함께 교제하며 사랑하는 성도들과 하늘 가족으로 살아가게 되는 곳이 바로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에서 흘린 많은 눈물 자국들을 남겨놓고 매순간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살려고 애쓴 모든 전투적인 삶으로 피 묻은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혀진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한량없이 누리며 거기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죄도, 이별도, 슬픔도, 죽음의 위협도 없는 그곳이 바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다 온 성도들을 예비하신 하늘나라입니다.
C. 기쁨이 있는 나라
셋째로 하늘나라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고” 단지 하늘나라는 애통과 슬픔이 없는 곳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는 기쁨의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기쁨, 희락,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환희, 감격,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살던 단어들입니다. 물론 주님을 의지하며 매일매일 살아가는 성도의 삶에 남모를 거룩한 기쁨도 있을 것이고 은혜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처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누렸던 영광스러운 기쁨의 날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에 와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큰 사랑에 감격하여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십자가의 은혜로 구속해 주신 사랑을 기뻐하던 때를 기억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기쁨과 사랑으로 넘쳤고 여러분의 삶은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이 이 세상에서 오래 계속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가득차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눈꽃처럼 살고 싶어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느 순간 죄악이 여러분을 삼키고 영혼이 갈 길을 잃어버리고 나면 그렇게 자신 있었던 여러분의 마음에 두려움이 깃들기 시작하고 기쁨대신 우울한 슬픔이 찾아들게 됩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는 기쁨은 이러한 것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정욕에 의하여 감해지지 않으면 악한 영들에 의하여 방해될 수 없는 완전한 기쁨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빛 앞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 다시는 애통하는 것이나 통곡하는 것이 없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찬란한 거룩한 기쁨이 가득 차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증대될 것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 때문에 오늘의 행복이 어제의 행복과 비교되지 않는 큰 크기의 행복이 될 것이며 이러한 일들이 무한히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며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앎은 더하여 갈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쁨도 계속될 것입니다. 어떠한 영혼의 지루함도 없는 기쁨 안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행복한 생활이 계속될 것인데 바로 그 나라가 하늘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가슴 벅찬 희락을 누리며 살아갈 나라를 우리가 어찌 그리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D. 해방이 있는 나라
넷째로 이 하늘나라에는 해방이 있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라고 묘사합니다. 아프고 연약한 것들은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속박이고 구속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영혼은 새처럼 하늘을 날게 되어 있는데 그 새처럼 날아가야 할 영혼이 육체의 질병과 연약함 때문에 갇혀 있다면 어찌 그것이 고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언제 이 세상에서 불러 가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가 오늘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은 곧 우리에게 주어진 날이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가운데서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우리를 태어나게 하실 때에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실 날도 작정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마치 초가 자신을 태워 불을 밝히며 그 크기가 줄어들 듯이 우리의 정해진 인생의 길이는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주님을 알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게으르고 싶지 않고 열심히 살고 싶습니다. 쓸데없는 것을 가슴에 품어 다시는 방황하지 않고 주님이 구원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목표를 따라 살고 싶은데 육체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속박합니다. 섬기면 몸이 아프고 섬기기 위해 간절히 매달리면 육체가 그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때 느끼는 영혼의 고통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육체의 속박은 강화되어 점점 더 연약함의 노예가 되어 갑니다. 힘이 있을 때에는 무지해서 하나님을 위해 못 살고, 지혜가 있을 때에는 마음이 그것을 원하지 않아서 못 살고, 이제는 지혜도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은혜도 있는데 육신이 연약하여 속박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하루, 하루 상한 갈대의 연약함으로 그리고 꺼져가는 심지의 연기를 내며 심지까지 꺾지 않으시고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긍휼을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인생의 날수를 우리는 알 수 없으며 정해진 날 동안 강건하게 살지, 연약하게 살지 알지 못합니다. 오늘 일체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살아도 언제 또 다시 질병과 아픈 것의 복병이 내 인생의 갈 길을 가로막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는 이러한 속박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아직 살게 해 주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진정한 꿈은 지금 살고 있는 이 불완전한 지상의 나라가 아니라 하늘나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지혜를 얻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자신을 가혹하게 채찍질하는 분투의 삶도 꼭 필요하지만 하루하루를 주님이 생명을 주셔서 살아가고 있다는 절대적인 의존의 신앙 안에서 사는 것이 놀라운 지혜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새날이 밝으면 단 하루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하루가 밝으면 그것을 신비하게 여기고 하루를 끝내고 잠들 때에는 이 날이 마치 최후의 날인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 말고 우리에게 또 다른 대안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상한 갈대처럼, 꺼져가는 심지처럼 멸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살아있는 것이 우리 인생들이 아니겠습니까?
(찬양)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시고 오늘 공중 날다가 떨어질 새들도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어버리지 않으실 것을 믿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러면서 우리의 진정한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IV. 그리스도께서 계신 나라
이렇게 하늘나라는 위로와 영생, 기쁨, 해방이 있어서 좋은 나라이지만 무엇보다도 하늘나라가 좋은 것은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가 그리스도께서 계신 나라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그 나라가 좋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장막은 육신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장막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광야에 쳐졌던 그 장막은 얼마나 초라한 것이었습니까? 장막의 내부에는 아주 화려한 것들이 가득했지만 그 겉모습은 물돼지 가죽의 천을 두른 초라한 텐트에 불과했습니다. 그 초라한 텐트가 솔로몬의 성전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완성이 되었습니까?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초라하게 말구유에 누이신 그 분은 천한 목수의 아들이셨습니다.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육신의 연약함까지 짊어지셨을 때에 그 분은 이 세상에 쳐진 낡고 초라한 텐트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비로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의 인성을 가지신 그 모습으로 찬란하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실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하늘에서 임재해 계시는 인성의 찬란한 영광은 이 세상의 육신의 영광과는 비교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종종 실제적으로 연합이 끊어지기도 하였지만 그 나라에서는 그 연합이 완전히 이루어지고 그 분의 찬란한 영광을 우리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날 동안 그토록 사랑하기를 원했고, 늘 사귀며 그 임재 안에 있기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죄와 이 세상의 유혹, 어찌할 수 없는 우리의 연약하고 부패한 본성 때문에 수시로 떨어져야 했던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을 이루며 그 임재 안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우리가 가장 사랑해야할 나라인 것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거하는 곳이 누추하고 초라해도 우리의 마음에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그것이 하늘나라 같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토록 대면하고 싶어 했고 함께 있고자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 분과 함께 거하는 그 천국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나라이겠습니까? 그리고 이 영광스러운 나라에 대한 소망 없이 이 세상이 전부인 줄을 알고 먹고 마시는 곳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입니까? 그날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셔서 너무나 행복한 그 하늘나라가 바로 천지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일생을 살아온 우리들을 위해 예비하신 그 쉼과 그리고 기쁨의 나라인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인간 타락 이후 성경의 최대의 약속, 곧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지상 최대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결국은 그 천국에서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확고하게 알게 될 것이며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고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그 형상을 본받은 우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탁월한 존재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돋아나는 아름다운 새싹들의 합창과 수많은 꽃들의 향연, 우거진 녹음의 우렁찬 함성 속에서 들리는 자연의 신비와 영광은 그 하늘나라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영광의 광채를 회복하게 될 그 상태에 비교한다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늘나라에서 인간뿐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심지어 발아래 구르는 돌 하나, 풀 한 포기까지도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이 충만한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 날에 우리는 이전 것은 모두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며 천군천사와 함께 우리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그 영원무궁한 나라에서 우리가 일평생 마음에 품었던 간절한 소망을 따라 좋으신 우리 하나님만을 섬기고 어린 양이 되셔서 우리를 그 피로 구속하사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송할 것입니다. 구속받은 이후로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함께 계셔서 우리를 고난 속에서 위로해 주셨던 성령께 한없는 찬송과 영광을 돌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비록 그 나라에서 우리의 지위가 높지 못하고 하늘나라 한 구석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수종든다 할지라도 그 하늘나라에서 이름 없는 종으로 사는 것이 죄와 슬픔으로 가득찬 이 세상 나라에서 황제의 면류관을 쓰며 사는 것보다 행복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누릴 행복이 얼마나 크고 아름답겠습니까? 이 땅에서는 고난과 시련을 끊임없이 당하며 살아야 했지만 그 나라에서는 주님을 위해 흘린 눈물을 그 분이 깨끗이 씻어줄 것이며 충성스럽게 주님을 위해 살았던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그에 합당한 상급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끊어지지 않은 사랑의 노래로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고 우리는 지복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보고 싶고 그리웠던 모든 사람을 거기에서 만나게 될 것이고 우리는 결코 이별의 슬픔 없이 영원히 함께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고난과 외로움, 견디기 힘든 핍박도 없는 거기에서 지상에서 부르다만 하늘 노래를 이어갈 것입니다.
V. 결론과 적용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불러주실 그 꿈과 같은 영광의 날이 언제일까요? 속히 그 날이 오기를 우리는 기다립니다. 그때까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대로 살아서는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고 죽어서는 아벨처럼 그 피로 말하는 신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 고단한 믿음의 싸움을 다 싸운 후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과 어깨를 마주하며 우리 주님을 노래하게 될 그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잠시 걷는 이 힘겨운 성화와 섬김의 길을 조금도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소망 속에 인내하며 이후에 다가올 영광스러운 기쁨이 지금 당하는 고난과 비교될 수 없음을 생각하며 우리 주님을 섬기며 순례의 길을 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영광스러운 날을 우리를 위해 예비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이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 날에 주님을 위해 살도록 우리에게 은혜와 힘을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