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 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9년 가을 말씀 사경회 저녁)
설교기간 | 2019년 10월 16일 – 10월 18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0년 02월 03일
목 차
설교 프레임
1. 포로 된 자를 부르심 (렘 2:14-17) 2019.10.16.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
2. 네가 목마르냐 (렘 2:18) 2019.10.17.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2
3. 고통의 뿌리를 알라 (렘 2:19) 2019.10.18.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20
<설교 프레임>
포로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1 2019. 10. 16 가을말씀사경회(첫째 날 저녁)
< 포로 된 자를 부르심 >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렘 2:14-17)
I. 본문해설
남북으로 분열된 왕국은 멸망의 길을 걸었다. 남왕국 유다의 멸망을 바라보며 선지자로 소명(召命)을 받았다.
선지자는 망국의 역사의 비탈길에서 고난을 받으며 말씀을 전했다.
이스라엘의 언약적 불성실과 죄에 대한 심판(審判)을 예고했다. 육적 이스라엘이 망하고 도입될 영적인 교회를 바라보았다.
II. 포로된 자를 부르심
A. 현재의 상태
1. 속박됨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렘 2:14)
“종”은 노예이고 “씨종”은 거기서 나서 그 집의 소유가 된 노예다.
이스라엘은 노예가 아니라 신부였다. “네 신혼 때의 사랑”(렘 2:2)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셨으나 이방 나라들의 침략으로 지금은 더 비참하게 속박(束縛) 받는 상태가 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 것은 거기서 자유로운 자들로 살게 하심이었다.
사랑의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word)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을 보여 주고자 하셨다.
그러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속박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하나님 없는 자유를 원했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는 사실 우상(偶像)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거기에 투영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말씀을 떠나자 욕망은 넘쳐났고 부도덕해졌으며 사회는 부패했다.
죄의 속박은 하나님 없는 행복을 찾는 데서 비롯된다. 하나님 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이 속박이다.
참으로 자유롭게 살라. 말씀에 은혜(恩惠)를 받으라.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라.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기뻐하라.
2. 황폐함
“어린 사자들이 그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질러 그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으며 그의 성읍들은 불타서 주민이 없게 되었으며”(렘 2:15)
번영하던 이스라엘은 황폐한 땅이 되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자 성읍(城邑)은 불탔고 주민이 없는 땅이 되었다.
“어린 사자들”(kepirim)은 “젊은 사자들”(young lions)을 의미한다. “강한 힘과 용기, 민첩함”을 보여 준다.
강력한 군사 제국들, 앗수르와 바벨론 그리고 애굽을 가리킨다.
“그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질러…”(렘 2:15). 이것은 먹잇감을 발견하고 공격(攻擊)하기 직전의 기세다.
“놉과 다바네스”는 각 적국인 애굽의 도시들을 가리킨다. “놉”(nop) 은 애굽의 초기 왕조의 수도였던 “멤피스”를 가리키고 “다바네스”(damanes) 역시 애굽의 나일강 동부에 위치한 큰 도시다.
주변 왕국들이 젊은 사자(獅子)처럼 힘이 세고 강력하여 서로 으르렁거리며 이스라엘을 눈앞에 먹잇감처럼 여기고 있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떠나면 서럽도록 약한 존재가 된다.
우리의 힘은 오직 우리를 붙드시는 주(主)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네 정수리(qodqod)를 상하게 하였으니”. 이 말은 남자의 위엄의 상징인 정수리의 머리털을 밀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이 애굽에 의해 당하게 된 커다란 수치(羞恥)를 보여준다. 한 때는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 해방되지 않았는가?
B. 궁극적인 원인
염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심으신 것은 선(善)하고 행복한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그러나 그들은 지금 이웃 나라들의 이빨과 발톱의 먹잇감이 되었다.
선택된 나라의 영광은 변하여 수치가 되었다. 무엇 때문인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렘 2:17)
1. 신앙의 길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나님”(God)이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분이심을 의미한다면 “여호와”(Yaweh)는 언약을 맺으신 분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실 뿐 아니라,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다.
자식처럼 하나님과 사랑과 친교를 나누며 가족으로 살게 하셨다.
기라성 같은 나라들과 왕들을 무찔러 승리(勝利)하게 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용사로 싸우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으므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들과 그들의 땅을 단번에 빼앗으니라”(수 10:42)
Hebrew본문 “그 길 안에서 너를 인도하실 때”에 하나님을 떠났다.
여기서 “길”은 하나님이 뜻하시는 삶의 행로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길 안에서 인도하신다. 그 길은 말씀으로 이미 보여 주셨다.
인생길을 걷다가 위기를 만날 때만 아니라 평소에도 말씀에 잠겨서 살아야 한다. 말씀에 젖은 삶이어야 한다.
그들은 말씀을 떠났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이미 행한 것을 죄(罪)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말씀을 떠나는 시작은 말씀의 달콤함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 (시 119:54-56)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 마음을 하나님 사랑의 줄로 매어 준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호 11:4 상)
말씀에 은혜(恩惠)를 받으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어떤 나쁜 사람도 말씀을 붙들면 변화된다. 어떤 좋은 사람도 말씀을 떠나면 나쁘게 되지 않겠는가?
2. 이는 스스로 자취한 것이다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렘 2:17)
이를 설의법으로 물으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임을 보여준다.
영광을 잃어버리고 노예가 되어버린 것도, 이방 나라에 멸망하게 된 것도, 수치를 당하게 된 것도 모두 그들 스스로 자취한 일이었다.
그들은 누구도 원망해서는 안 되었다. 하나님과의 사랑을 떠난 자신을 원망해야 했다. 이는 하나님의 징계(懲戒)였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자유롭게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의 사랑(love) 안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승리하며 살도록 부름 받았다. 고난 속에서 이기며 살라.
다시 영광스러운 백성이 되라. 다시 그 사랑과 은혜를 회복하라.
포로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2 2019. 10. 17 가을말씀사경회(둘째 날 저녁)
< 네가 목마르냐? >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렘 2:18)
I. 본문해설
염이스라엘은 속박되고, 황폐하게 되고 치욕을 당했다. 그것은 스스로 자취한 일이었다.
우리는 욕망으로 더 좋아하는 길을 위해 신앙을 떠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언제나 고통과 비참이다.
이스라엘이 이런 패망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 없이 생존하는 길을 찾고자 애쓴다.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II. 네가 목마르냐?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렘 2:18)
A. 목마른 이스라엘
그들은 목말랐다. 마치 마라 광야에서 사흘 길을 걷는 동안 물을 얻지 못해서 부르짖던 때처럼 말이다(출 15:22).
여기서 “물”(maim)은 일종의 은유다. 물은 음식과 함께 그것 없이는 인간이 살 수 없는 필수적 요소다.
따라서 “물”을 구했다는 것은 생존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시홀의 물”(me shihor)은 나일(Nile)강의 물을 가리킨다. 이는 그들이 생존하고자 애굽의 도움을 구했음을 보여준다.
“그 강물”은 아마도 유프라테스(Euphrates)강 물을 가리킨다. 이는 앗수르의 도움을 구걸한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은 자기의 힘으로는 살 수 없으리만치 패망하였다. 그래서 애굽과 앗수르에 생존을 구걸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살아야했다. 자존감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명예롭게 살도록 부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떠났을 때 그들은 남의 나라 도움을 기웃거리며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자유롭고 번영하고 존귀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길을 떠나면 자신의 인생을 지탱하지 못한다. 세상의 도움을 구걸하며 살게 될 것이다.
영혼의 목마름은 오직 하나님 사랑 안에서 삶으로써 해갈된다.
그러므로 미끄러지지 말라. 은혜에서 멀어졌다면 속히 돌아오라.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 사랑 안에 살아가라.
B. 물을 마시려고 떠남
이스라엘은 물을 구하려고 떠났다. 나일강이 있는 애굽으로, 유프라테스강이 있는 앗수르로 도움을 청하러 다녔다.
이스라엘의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신데 이방 나라에게 생존을 구하러 갔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적의 물을 주시지 않으셨는가?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 20:11)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다. 온 땅에 물을 보내시며 비옥하게 하신다. 하물며 당신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선하시겠는가?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시 65:9)
세상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안타까워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가…또 네가…어찌됨이냐” 탄식하신다(렘 2:18).
육체의 생존을 위해 이방 나라에 굽실거리는 태도도 마지않았다.
그러한 비굴한 방법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는 없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무엇을 하였는가? 눈에 보이는 왕국이 망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패망 속에서 깨달아야 했다. 자신들이 영적으로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는지를 살피며 생수와 같은 은혜를 구해야 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1-2)
영혼의 어둠과 비참은 가중되었다. 하나님이 징계하셨다. 나라의 생존을 위한 비굴한 방법은 성공하지 못했다.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보라. 많은 실패를 겪어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대신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지 않는가?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아끼시겠는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당신의 자녀를 고통 받게 하심은 그들을 당신과의 관계로 돌이키고자 하심이 아니겠는가?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사랑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 사랑을 배반하였다. 생존을 위해 적국들에게 구걸했으나 실패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성공을 기대하지 말라. 말씀을 사랑하고 거기서 은혜의 생수를 마시라.
지금도 살기 위해 세상에 구걸하며 사는 자녀들을 부르신다.
하나님 아닌 것에서 만족을 구하는 길에서 돌이키라. 회개하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라.
포로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3 2019. 10. 18 가을말씀사경회(셋째 날 저녁)
< 고통의 뿌리를 알라 >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2:19)
I. 본문해설
이스라엘은 황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징계(懲戒)는 남아 있었고 책망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한두 가지 악(惡)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의 관계의 본질적인 변화를 요구하셨기 때문이다.
II. 하나님의 징계하심
자녀의 인생에 대해 목적이 있기에 가르침(teaching)도 있다.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때 징계(懲戒)도 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렘 2:19)
“징계하다”(yasar)는 “훈련하다, 징벌하다, 훈계하다”라는 의미다.
“책망하다”(yakach)는 “판결하다, 논증하다, 고발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주어가 하나님이 아니라, “네 악”(惡)과 “반역”(反逆)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속박 받고, 황폐하게 되고, 수치스럽게 된 것은 그들 스스로 악을 행하고 반역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패망은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스스로 자취한 것이었다.
1. “악”(惡)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선”(善)의 반대로 “나쁨” 혹은 “좋지 않음”을 뜻한다. 창조된 모든 “선한 것”들은 그 “선함”(goodness)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
따라서 “선”(善)은 곧 하나님 자신이거나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대로 있는 상태”다. 자연악(自然惡)과 도덕악(道德惡)이 있다.
여기서는 도덕악을 가리킨다. 인간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른 것을 뜻한다. 모든 명령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目的)과 관련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 악을 행함으로써 죄를 짓게 된다(罪責). 이때 마음의 성향은 죄를 향하여 더욱 굳어진다(罪罰).
2. 반역(反逆)이란 무엇인가?
반역은 합법적 통치에 대한 도전이다. 여기서 “반역”(反逆)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에 항거하는 행동이다.
반역은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統治)에 반대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자기가 원하는 질서(秩序)를 펴는 것이다.
자기 욕망이 원하는 질서의 수립 계획이 면밀하고 광범위할수록 더욱더 용서받기 힘든 반역이 된다.
이스라엘이 그러했다. 그들은 일시적 반항심을 넘어서 이스라엘의 주인으로 지배하시는 말씀 중심의 삶의 체계에 도전하였다.
그들이 우상(偶像)을 섬긴 것도 바로 자신의 욕심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하나님 삼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에는 목적(目的)이 있다. 그것을 거스르고 배반하는 행동에도 당연히 목적이 있다. 하나님은 그 반역을 책망하신다.
III. 고통의 뿌리를 알라
이스라엘은 패망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영광(榮光)은 사라졌고 수치가 가득하게 되었다.
한때 하나님의 신부(新婦)이던 이스라엘이 “종”처럼 “씨종”처럼 되었다(렘 2:14). 왕국은 무너지고 나라가 황폐하게 되었다. 무엇 때문인가?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19)
A. 여호와를 버림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렘 2:19)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영원한 지혜와 사랑으로 창조하셨다.
이스라엘과 언약(言約)을 맺으셨다. 그것을 신실하게 지키셨다.
이스라엘을 아내처럼, 자식처럼 사랑하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좋은 것을 주셔서 누리게 하셨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罪)는 그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에게로 가버린 것이다.
땅과 자원이 남아있던 때는, 욕망을 따라 살면서 세상에서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고통(苦痛)이 시작되었다.
죄(罪)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담대함과 맹렬함과 광기(狂氣)다. 이는 각각 의지, 정서, 생각과 관련된다.
생각이 광기에 휩싸이게 되면 정서는 욕망(慾望)에 불붙게 되고 의지(意志)는 대담해져서 선악(善惡)의 경계를 넘나든다.
인간은 결핍과 시련을 겪을 때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그 모든 고통의 원인일지언정 뿌리는 아니다.
인간은 적극적으로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으로써 고통을 받는다.
B. 경외함이 없음
그들의 고통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적극적 원인은 “여호와를 버림”이었고, “경외함이 없음”은 소극적 원인이었다.
하나님은 징계하신다. 징계는 우리가 하나님의 친자녀임을 증거한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7)
“경외함이 없음”(lo pachdati elaik)의 직역은 “네게 경외함이 없다”인데, 여기서 “경외함”은 “두려움, 외경(畏敬), 공경심”이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단지 노예적 공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holiness)에 대한 인간의 마땅한 반응이다. 즉, 하나님의 엄위(嚴威)에 대한 두려움(fear)과 인격에 대한 사랑(love)의 감정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참된 표(標)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이다.
경건생활 없이 신앙생활이 불가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경건(敬虔)의 신비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라. 황폐한 심령에서 무슨 영적 생명이 자라겠는가?
경건은 경외심과 거룩한 삶이다. 이것을 버린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린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패망한 이스라엘의 고통의 뿌리였다.
IV. 적용과 결론
고통 받을 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라. 이것이 신앙이다.
결핍과 시련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이 아닌지 생각하라.
아직도 하나님은 사랑으로 기다리신다. 실패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길로 돌이키라. 생명과 사랑을 누리며 살라.
포로 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9.10.16._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
1. 포로 된 자를 부르심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어린 사자들이 그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질러 그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으며 그의 성읍들은 불타서 주민이 없게 되었으며 놉과 다바네스의 자손도 네 정수리를 상하였으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렘 2:14-17)
녹취자: 조성용
I. 본문해설
남북으로 분열된 왕국은 멸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멸망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유대왕국 망국의 역사의 비탈길에 서서 고난을 받으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겨우, 몇 명의 회심자만 얻었을 뿐,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말씀은 그 시대에 철저히 외면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한 말씀은 하나도 떨어지지 아니하였고, 역사 속에서 그의 생애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유대는 바벨론에 망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고, 나라는 황폐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성실함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심각하게 경고했습니다. 아니 심각하게 경고하는 것을 넘어 서서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넓게 보면 이것은 육적 이스라엘이 무너지고, 도입될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를 바라보는 사건들이었습니다.
II. 포로 된 자를 부르심
A. 현재의 상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포로 된 자에 대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보여줍니다. 제일 먼저 현재의 상태입니다.
1. 속박됨
이는 이스라엘이 속박되었음을 가르쳐줍니다.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고 합니다. 씨종은 종에게 태어나서 저절로 종이 된 노예의 후손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라고 말씀하심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노예처럼 그렇게 속박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노예가 아니라 신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2장 2절에서 ‘너와 내가 신혼이었을 때를 내가 기억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가나안을 정복하던 그 때였을 것입니다. ‘너는 나의 신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월은 흘러갔고, 그들은 노예가 되고 씨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종, 씨종의 의미는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포로 되고 속박된 상태가 노예의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운명적이라는 말입니다. 개선될 여지가 없는 완전한 속박에 묶여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습니다. 이는 그곳에서 자유로운 자로 살아가도록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고 말씀으로 살아가게 하시려고,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해내어 가나안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번영의 삶을 살기 시작하자 그들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 속박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일일이 제사를 지내도록 지시하시고, 그리고 행동 하나 하나까지 율법으로 판단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할 지침을 끊임없이 가르쳐 주실 때에 지겹기 시작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 없는 자유를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한 것이 우상숭배였습니다. 흔히 우상숭배가 사람들은 우상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상숭배는 우상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그곳에 투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을 섬기는 것은 우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빌어 자신의 욕망을 섬기기 위해 하는 짓입니다. 그래서 골 3장 5절에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하셨습니다. 제 1계명 “내 앞에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라”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나오는데 그 탐심이 다시 제 1계명으로 돌아가서 그것이 우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세상을 왜 그렇게 사랑합니까?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을 통해서 자기 사랑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좋아서 세상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을 즐거워하는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수단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들이 우상을 섬겼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는 우상을 그렇게 섬깁니까? 우상을 섬기는 미명하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육욕의 삶을 즐기고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죄의 속박은 하나님 없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회는 부패와 악이 만연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실 때,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주시기 위해 가나안 족속을 멸망하셨던 그런 마음이 드실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는 감히 꿈꾸지 못할 복을 주시고 그 땅을 차지하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살고 심지 않은 포도원에서 열매를 거두며 모든 것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제는 바로의 압제를 받지 않고 수많은 전쟁 고난도 받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굳센 삶을 살도록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의 줄로 묶으셨던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에 의한 찔림, 책망, 이러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속박을 받는 사람들이 진정 자유로운 사람들인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심을 발견하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 붙들림이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황폐함
그들에게는 황폐함이 엄습했습니다. 본문 15절은 “어린 사자들이 그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질러 그의 땅을 황폐하게 했으며 그의 성읍들을 불타서 주민들이 없이 되었으며”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자 성읍은 전쟁으로 불타고 주민이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어린 사자(young lions)는 케피림(kepirim)이라는 단어인데, 젊은 사자를 말합니다. 사자는 태어나서 보통 한 10-15년을 살고, 작은 것은 1.5m에서 큰 것은 3m가 넘는 것이 있고, 120킬로에서 300킬로 정도의 무게가 나간다고 합니다. 이 사자들은 15-20마리, 최대 30마리까지 군집 생활을 하기 때문에 이들을 이길만한 짐승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이들은 수컷들은 사냥을 하지 않고 대개 영역을 지켜줍니다. 물론 어떤 때에는 수컷이 사냥을 돕기도 하지만 대부분 암컷들이 사냥을 해 오고 수컷은 그들을 지켜주고 당연히 그들 중에 왕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 가장 뛰어난 큰 덩치를 갖은 사자입니다. 어린 사자는 자라서 한 무리를 다스리다가 나이를 먹어서는 소외가 되는데 아내 사자도 물고 뜯고 한답니다. 그러다 홀로 죽는 겁니다. 그러니 사자는 그야말로 젊었을 때에 반짝 빛을 비추고 그 역시 밀림에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젊은 사자는 강함과 민첩함의 상징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 군사 강국, 곧 앗수르와 바벨론 그리고 이집트 애굽을 말하는 것입니다.
15절에는 ‘그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지른다’고 했는데, 이는 먹잇감을 발견한 어린 사자가 공격하기 직전에 그를 억누르는 무서운 기세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둘러싼 강국들이 연약한 토끼 한 마리를 놓고 싸우는 것처럼 그렇게 울부짖으며 이스라엘을 삼키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한 마리의 연약한 토끼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16절에는 ‘놉과 다바네스의 자손도 네 정수리를 상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놉(Noph)과 다바네스(Tahpanhes)는 적국인 애굽의 도시를 가리킵니다. 놉은 애굽 초기에 왕조 수도였던 ‘멤피스’를 의미하고, 다바네스는 애굽 나일강 동부에 있는 큰 도시였습니다. 이렇게 도시 이름을 거명하는 것은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결집된 강한 힘들이 도시로 표현된 것이며, 지금 이스라엘의 운명을 흔들어 놓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주변 강국은 젊은 사자들처럼 힘이 세고 강력해서 이스라엘을 눈앞에 먹잇감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일단 하나님을 떠나고 나면 서럽도록 연약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얼마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즉시 깨닫는 자는 복된 사람이고, - 아니 그렇게 깨닫는 자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겠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님을 떠났는데도 자신이 떠난 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산다고 생각합니다.
한쪽으로는 우상을, 한쪽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며 그런 삶을 삽니다. 표리부동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믿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왕국은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고, 하나님은 본보기로 북왕국을 멸망시키셨습니다. 앗수르에게 철저히 망하여 이방으로 이스라엘이 끌려가고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잃어버린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시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마리아를 지나가기 싫어한 것도 이런 역사적인 사건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정신 차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배에 출석하니 남들이 보면 교회를 잘 다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교회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마음은 교회에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멀리 멀리 떠났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둠 속을 지나는 빛의 자녀였겠지요. 그런데 그는 진실로 하나님을 멀리 멀리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 사람을 고난을 겪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나가서 얼마나 서럽도록 속박된 노예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지 보여주시고 예전에 아름답던 자신의 삶이 황폐하게 무너짐을 보게 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 가십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는 돈을, 건강에 자만한 사람에게는 건강을, 명예에 배부른 사람에게 명예를 가져가심으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전에 자기에게 있었던 모든 것들이 자신과 관계하신 하나님이 보낸 것임을 그때 비로소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이유, 그리고 모든 좋은 것을 누리게 하시는 은혜는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네 정수리를 상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다음 해석이 가장 정확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수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qodqod입니다. 정수리의 골 혹은 정수리의 머리털을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상하게 하였다는 것은 정수리를 망가뜨렸다고도 해석되지만 정수리 머리털을 밀어버려서 수치스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정수리의 머리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조선시대에 사람들 보는 앞에서 상투를 잘려나가는 것과 같은 수치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삽니다. 그리고 자신의 양심을 달래려고 교회에 나오고 교인의 의무를 이행하는데, 결국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언젠가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명예, 성도의 명예, 가정의 가장인 명예, 내가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인 명예, 남편의 아내이고 아이들의 어머니인 명예,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나면, 하나님이 이러한 영광을 거두시고 그를 수치로 물들이십니다. 남자의 위엄의 상징인 정수리의 머리털을 밀어버렸다는 것은 인간으로 당할 수 있는 최고의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그래야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때,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은 물 같이 무너져 내렸고 이스라엘로 인해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번영한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떠날 때에 하나님은 그 영광을 수치로 바꾸셨습니다. 지금은 애굽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큰 수치를 당하고 있지만 그 옛날에는 그 애굽을 수치스럽게 한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었고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키고 말할 수 없는 수치를 애굽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그들은 황폐하게 되었고 모든 영광을 잃어버려 수치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B. 궁극적인 원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두신 이유는 선하고 행복한 나라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선진국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백성답게 사는지 보여주고, 그들과 관계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답게 살지 않은 이방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보이셔서 인간의 참된 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두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에 모세는 생을 마감하면서 유언과 같은 설교를 남겼습니다.
신명기 33장 29절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그는 너를 돕는 너의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가 그들의 높은 것을 밟으리로다.”라고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믿음으로 충만해졌고 이제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와 약속의 땅을 밟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용기가 충천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면 감당하지 못할 일이 없고 하나님은 방패가 되시고, 모든 하나님의 정복에 저항하는 것들을 부수시는 칼이 되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높아도 능히 밟아 점령하리라 확신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거 아십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믿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두렵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붙들려있으니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 외에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한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파도치고 요란하고 악인들은 곳곳에 횡행하고 심지어 자신을 향해 불화살이 날아와도 깜짝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영원히 갖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주셨으니, 또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잃을 수도 있고, 섭리 안에서 잃었으니 다시 주실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이 말을 남길 때, 아직 그들은 광야에 있었습니다. 가난했고 만나를 먹었습니다. 끊임없는 이동에 무슨 문명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너는 행복한 사람이라.” 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이스라엘이 그랬을 겁니다.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라.’ 그런데 그들은 지금은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다운 아름다움과 자태를 잃어 버렸습니다. 청교도들은 허둥대거나 안달복달하는 것도 죄라고 봤습니다. 그들은 설명하기를, 안달복달 하는 것은 뭔가 불안한 것이고, 불안한 것만큼 하나님을 덜 신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수많은 핍박에서 순교자가 속출했습니다. 국교도의 박해 아래서 교육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사회적 차별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질병 속에서 그들은 아주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분절했습니다. 수많은 요동치는 불안의 요소들의 한 복판을 지나며, 안달복달 하는 것을 죄라고 여겼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먹을 것 있고, 집이 있고, 금융재산이 있고, 건물에서 세가 나오고, 오피스텔에서 세가 나와서 안달복달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삶이 예측이 안 되고 감옥에 갇힌 형제가 내일 돌아올지 아니면 죽어서 돌아올지 아니면 살아서 올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안달복달 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박해가 가장 심했던 청교도 시대에 주로 등장한 단어가 ‘고요함’(calmness)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고요할 수 있는가 하는 연구가 수없이 이뤄집니다. 양심에서 오는 출렁임과 요동치는 사회에서 평온을 누리며 살 수 있는가? 모든 관용과 자비와 올바른 이성의 선택과 여유들이 마음의 안정 없이는 나오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고요함’의 깊이가 곧 신앙의 성숙도, 혹은 신앙의 깊이라고 보았습니다. 그에 비해 우린 너무 염려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이 시리즈 준비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쓸데없는 짓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왔구나.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만을 붙들며 안정된 삶을 살리라 하고 과감하게 나아갔어야 했는데...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된들 무슨 큰 상관이 있었을까?’싶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는 이러한 안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지만 돈이 있고 나라가 위세가 남아 있을 때에는 여전히 교만이 꺾이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섬기며 가끔 올리는 제사로 그들을 호도하면서 이중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국력이 기울어 일제에 합병된 우리나라의 마지막처럼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여러 열강이 한반도를 노리고 있다 보니 아관파천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으며, 우리나라는 이 대적에게 부탁해서 저 대적을 막고, 저 대적에게 부탁해서 이 대적을 막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전쟁으로 모든 것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상황을 이스라엘에도 적용해 보십시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이렇게 선택된 나라의 영광스러움이 수치로 변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을 예레미야 2장 17절은 아주 간단히 정의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1. 신앙의 길을 떠났기 때문
하나님(God)이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신이심을 기억한다면, ‘야훼’(Yaweh)라는 단어는 이스라엘과 언약 맺으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고, 굳이 ‘하나님 여호와’라고 부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시고, 모든 신들을 헛것으로 여기시며 모든 만물 초월하여 그 위에 계시면서도 그 만물을 당신 안에 가지고 계시는 높고 높은 그분, 그분이 특별히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셔서 그를 애인처럼 사랑하시고 신부처럼 사랑하시는 독점적 사랑을 베푸시는 연인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연인으로서의 사랑을 함께 가지고 있는 백성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셨을 뿐 아니라 인도하셨고 보호하셨습니다. 지극한 사랑 안에서 살 수 있는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아까운 것이 없으셨습니다. 모든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땅을 주셨고, 나라의 권세를 주셨고, 모든 부를 주셨고, 그리고 모든 나라들 중 가장 명망 있고 가장 위대한 나라로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기라성 같은 나라를 왕들을 무찔러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이스라엘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대신하여 싸워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이긴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고백합니다. 10장 42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으므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들과 그들의 땅을 단번에 빼앗으시니라.”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을까요? 쓰레기 같은 그들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을 왜 그들이 떠났을까요?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렘2:17). 하나님은 우리가 안전하게 걸어갈 만한 곳,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길을 잘 아셔서 우리를 그 길로 데려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우리가 가야 할 길과 길이 아닌 길을 분별하게 합니다. 커다란 패망, 큰 실패, 아주 뛰어난 불명예, 그리고 뜻밖에 재앙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농담처럼 듣지 마십시오. 신약의 하나님이라고 해서 창살에 갇혀서 눈물만 흘리며 여러분들이 타락하고 잘못된 길을 걸어가도 돌아오라고 애처롭게 부탁만 하며 우는 어머니와 같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죄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다시 경고하시고, 경고해도 듣지 않는 자는 치셔서라도 그를 깨우쳐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아서 그대로 망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보면서 저러다가는 망하겠구나, 라고 깨닫도록 최소한 그런 용도라도 사용하십니다.
오늘날과 같이 말랑말랑하고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세대에게 오늘 이 설교가 지성을 거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고 멀리 멀리 떠난 사람들을 오래도록 참으시고, 안타깝게 부르시며, 동구 밖에서 아버지처럼 고대하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자식들을 때리시고 징계하시고 뉘우치도록 만드시며 죄를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고 말합니다. 두려워하십시오. 어느 때까지 인생의 벼랑 끝에 내몰리고, 집안에 산산이 부서지고, 명예를 잃어버리고, 여러분의 목숨이 위태로워져야만 돌이키시렵니까? 내가 그동안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이라는 우상을 섬기며 살았고, 성도이며 신자인데도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살았던 죄의 기운과 마귀의 새끼가 여전히 살아있구나 하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하면 대단히 무서운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이 마지막 경고일 수 있습니다.
‘길’은 은유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뜻하시는 인간 행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이렇게 믿거라이고, 둘째는 이렇게 살거라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전자가 신앙에 대한 규칙이라면, 후자는 생활에 관한 교훈입니다. 올바로 믿어야만 사람다운 삶이 나옵니다. 교회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이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답지 못함을 끊임없이 아파하며 성도다운 삶을 살려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성도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부르셨으나 성도답지 못한 것이 여전히 남아서 그것을 따라가다가는 이스라엘처럼 속박당하고 수치를 당할 것이기에, 하나님은 매일 매일 말씀을 주셔서 여러분의 양심을 깨어 뉘우치게 하시고 마음에 감동하셔서 하나님 사랑을 후회치 않게 하십니다. 왜요? 신앙의 길을 떠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감당할 수 없는 난관을 만나거나 크게 어려운 낭패를 당했을 때에 함부로 ‘나는 욥의 고난을 당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대부분 여러분들이 한 일이 있기에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무슨 역경을 겪고 어려움을 당하든지 나는 깨끗합니다. 나는 순결합니다. 어떤 인간들이 나를 이렇게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주가 아시듯이 나는 순전한 피해자입니다.’라는 기도가 하나님께 올라가겠습니까? 그 기도가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일까요? 쓰레기 같은 기도입니다. 오히려 이것이 더 어울리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내 죄, 나의 잘못된 삶 때문입니다.’라고 가슴이 찢어지도록 기도하는데 주님이 어깨를 두드리면서 ‘울지 말아라. 사실 너 때문이 아니란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게 맞지 않습니까? 위기 속에서 불평을 거두어야 합니다. 빈말이라도 좋으니 -저의 경험에 의하면- 맨 처음에는 ‘하나님, 다 저의 죄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그 빈말을 반복하다 보면 진심이 됩니다. 어느 은퇴하신 목사님이 그러셨습니다. “충성은 일관된 아부다. 변하지 않는 아부다.” 한두 번 충성하면 아부가 되지만, 영원히 아부하면 충성이 된다는 겁니다. 역설적이지만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동기가 선하고 충성되는데 뿌리가 없어서 몇 번 하다가 맙니다. 여러분에게 사경회를 하면서 하늘의 이야기 하다가 끝내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불평을 버리고, 염려를 버리고, 심지어 남편이 문제를, 사춘기 아들의 문제를, 아내의 문제를 모두 다 ‘저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그 모든 것이 내가 신앙의 길을 떠났기에 생기는 것이라고, 그러니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놀라운 해결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인생길을 걷다가 위기를 만나야만 말씀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그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썩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의 위기를 치료하는 힘이 있지만 위기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약은 아팠을 때 먹습니다. 그러나 밥은 아플 때만 먹는 것은 아닙니다. 밥은 건강하건 아플 때건 항상 먹습니다. 어렸을 때 고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고기를 잘 안 사주셨습니다. 그런데 지독한 독감에 걸리면 고깃국을 꼭 끓여 오시는 겁니다. 그때의 고깃국은 마치 톱밥을 씹는 것 같습니다. 미각이 전혀 안 느껴집니다. 평소 입맛이 좋을 때 고기를 좀 사주시지 꼭 맛을 느끼지 못할 때에만 사주셨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이와 같습니다. 위기를 만납니다. 시련을 만나면 무서운 마음도 듭니다. 이러다가 정말 많이 두들겨 맞는 건 아닌가 하며 생사를 오가는 느낌이 듭니다. 양심이 요동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보기 시작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서 기도도 나오고 그럽니다. 그러다 사태가 해결되면 또 말씀도 보지 않고 그 다음 위기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삶입니까?
저는 모든 것을 다 잘 먹었습니다. 먹는 것 때문에 성도들을 힘들 게 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너무 이상한 것 빼고는 다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럴 줄 알았는데 이제는 먹고 싶은 의욕이 없어졌습니다. 게다가 많이 먹을 수도 없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할 수만 있다면 삼시세끼를 맛있게 먹을 수 있고, 간식도 잘 챙겨먹고, 나물부터 고기를 반찬까지, 또 한식부터 러시아 요리까지 모든 것을 넘나들며 먹을 수 있는 것이 최고가 아니겠습니까? 식도락에 빠져서 거기에 미치면 좋은 것은 아닌데 음식 맛을 느끼고 정신이 깨어남을 느끼는 것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건강을 위한 매우 좋은 감각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수시로 먹고 싶은 것이 반짝 반짝 난다는 것은 매우 좋은 것입니다. 물론 먹고 싶은 것은 너무 많은데 돈이 없으면 좀 힘들겠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신앙의 길을 떠났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손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여기에서 그려지는 성도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따르겠나이다.”라는 모습이 아닙니까? 자신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성도의 모습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있었는데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왜 말씀을 떠났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못하게 하고 이미 행한 것을 죄라고 끊임없이 말해주니까 싫었던 것입니다.
어느 식당에 새가 한 마리 있습니다. 어떤 한 아줌마가 들어오면 ‘너 못생겼다.’라고 맨날 지야기 합니다. 아줌마가 화가 나서 주인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이 집 단골인데, 앵무새 교육 제대로 시켜세요.” 그러고는 나가는데 앵무새가 또 그러더래요. ‘말하지 않아도 알지?’ 왜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말씀을 떠납니까? 자기가 생각해도 흉하게 변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흉하게 변했다고 들이대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멩이를 들어서 박살내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은 신앙의 미끄러짐은 죄를 지음으로써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의 달콤함을 떠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는 사람은 사람이 좀 고약한 구석이 있어도 기대가 됩니다. 말씀을 깨닫고 괴로워하니까, 말씀을 거울삼아 괴로워하니까 희망이 있습니다. 잘못한 것을 아파하고 자신을 고치고 싶어하며 그런 자신과 이별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돌아서서 또 그렇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언젠가 고쳐질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데 ‘네 모습을 보라. 추해졌지. 말씀을 떠났구나.’라고 경고하는 말씀을 향해 돌멩이로 거울을 깨뜨리듯 깨버린다면 그 사람은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는 주위의 성도들을 보세요. 예배를 드리는데 눈을 떠서 사람들을 쳐다보니까 자기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모두들 눈물 흘리고 아멘 아멘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그시 입술 깨물며 무엇인가를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 눈에는 그런 자들이 아주 특별한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아주 특별한 상태로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신앙의 평범한 상태여야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것은 그 말씀의 달콤함을 떠남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갑자기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닙니다. 무관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54-46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 가슴 아련하게 다가오지 않아요? 시인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가 주인된 곳에서가 아니라 나그네 된 집에서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돈 많고 수행원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구걸해서 마구간이라도 잠을 청해야 하는 처량한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서럽습니다. 갈 길이 멉니다. 고향을 떠났습니다. 친척과 동료의 보호가 없습니다. 어떤 위험을 당할는지 알지 못합니다. 폭력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서러움을 당하면서 사는 동안에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때문에 서러운 나그네의 길을 참고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 노래가 바로 하나님의 율례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체적 제사와 삶의 규칙들이 그에게 노래가 된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을 지키며 살게 해주신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울려 퍼지는 노래가 되어서 외로운 인생길에도 쓰러지지 않고 걸어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그네의 인생길에서는 돈이 최고일 수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집보다 더 좋은 숙박시설에서 쉴 수 있습니다. 안방보다 더 화려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진정한 소유는 이것입니다. “내가 주의 법도를 이 나그네의 집에서 지킨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 그 말씀을 통해서 내가 가는 길을 매순간 수정하면 사는 것입니다. 내가 신뢰하던 생각들을 말씀에 비춰 수정하고,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흉악한 내 얼굴의 일그러짐과 감정들을 말씀 안에서 지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자신을 즐거워하고, 나그네 같은 인생길에서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위로를 경험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저에게 신앙생활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그곳을 떠나고 나면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은 없습니다. 지구상에 가장 아름다운 곳을 보아도 더 아름다운 곳이 또 나옵니다. ‘그날은 정말 힘들었어. 돈도 떨어지고 별도 보이지 않는 밤에 밖에서 얼어 죽는 줄 알았어.’했는데 그런 일이 또 옵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오길 바랄 뿐입니다. 목적과 이유가 있는 시험이길 바라는 것입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도 지나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지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끝인 줄 알았는데 그곳에서 우리를 안위해주시고 말씀의 지팡이와 진리의 막대기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끄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인도의 길에서 떠나지 않고 묶어줍니다. 그 사랑의 줄로 매어줍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호 11:4 상).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이가 걷기 시작하면 줄을 내어주고 걸음마를 시켰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줄입니다. 송아지가 자랐을 때 그 코를 뚫어서 코뚜레를 해서 말을 듣게 하는데, 그것이 짐승의 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끄셨습니다. 엄마와 아이, 가족과 아이 사이에 이뤄지는 사랑의 관계,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순간이 이 말에서 그려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부모가 매달아준 줄을 잡고 걸음마를 배운 기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고난을 당했으나 근본적으로 우리를 사랑해서 당신의 길을 걷게 하시기 위함이구나’라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 사랑의 줄을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2. 스스로 자취한 것임
끊임없이 짐승 같은 일을 하는데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의 줄로 이끈다고 말하는 그런 뻔뻔함은 어디서 나옵니까? 이 모든 용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쓰는 용어이지 아무나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 오만 방자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어깃장을 놓으면서 사실상 반역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이 용어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을 올리면 그 자체로 그의 죄가 가중될 것입니다. 차라리 ‘여호와의 칼이 내 목이 있나이다’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아요? 말씀에 은혜를 받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분과 이러한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요? 나는 지금 돈이 없나이다.” 그러자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자식 놈이 속 썩입니다.”라고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답합니다. “제가 큰 돈을 벌고 싶어요.”라고 하는데 성경은 “신실하라.”고 합니다. 수백번 성경과 마주 앉아도 대화가 안 됩니다. 가슴에 와 닿지요? 그런 사람은 성경이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인 그 사람에게 하고픈 말입니다. 그러니까 맨날 성경 공부하지만 적용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의 장단에 적용을 맞춰줄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서 끊임없이 엇박을 내는 것이에요. 위성이 지구 주위를 두 세 시간에 한 번씩 도는데 그 위성 중에 지구랑 만나는 위성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처럼 그렇게 쳇바퀴 돌듯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만남이 이뤄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나쁜 사람도 말씀을 붙들면 변화됩니다. 어떤 좋은 사람도 말씀을 떠나면 반드시 나쁜 사람이 됩니다.
결국 궁극적인 원인은 신앙의 길을 떠났기 때문이고 이는 스스로 그렇게 자초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인생의 문제 해결 받으려면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저 때문입니다.”라는 신앙을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합니다.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이 말은 “너는 자유인인데 속박되었고, 번영인데 영광이 아니라 수치가 오는 것은 네가 스스로 가져온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애굽이 훌륭해서 정수리를 밀게 된 것이 아닙니다. 가슴에 새기세요.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는 불평을 똑같이 말하면서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사람의 가슴에 와 닿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누구도 원망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을 떠난 자신만이 마지막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아직도 자기가 잘했다고, 피해자일 뿐이라고 우기면서 하나님 은혜 없이 그늘에서 살아갈 겁니까? 한 번 밖에 없는 소중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다가 살겠습니까? 그러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III. 적용과 결론
궁극적인 원인은 말씀을 떠나고 우리가 자취한 것입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 살도록, 승리하며 살도록, 우리보다 더 큰 대적을 밟고 이기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고난이 있겠지요. 그러나 고난이 깊으면 하나님의 은혜도 깊습니다. 반드시 이기며 살도록 하실 것입니다. 다시 수치심을 버리고 영광스러운 백성이 되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포로 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9.10.17._가을말씀사경회 저녁 2)
포로 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9.10.17._가을말씀사경회 저녁 2)
2. 네가 목마르냐?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렘 2:18)
녹취자: 조성용
I. 본문해설
이스라엘은 패망하였습니다. 속박되고 황폐하게 되고 정수리의 머리를 밀게 되는 수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스스로 자취한 일이었습니다. 나라가 강하거나 다른 요인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이 스스로 그렇게 패망하기를 자초하였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욕망으로 더 좋아하는 것을 찾았고, 그렇게 세상의 맛을 알게 되자 하나님의 말씀이 싫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고 이미 한 것을 잘못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삶입니다. 한때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에는 좋았지만 모든 것을 주시니 다른 것을 향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이 형식적이 되고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하면서 커다란 실패를 경험한 후에야 자기가 잘못된 자리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자유를 찾아 떠났지만 속박을 받게 되고 번영을 위해 떠났으나 황폐하게 되고 교만하여 자기가 높은 줄 알았으나 결국 수치스럽게 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살 소망이 없을 그 때에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패망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러한 패망 속에서도 자기들이 살 방법이 없을지 생각했고 이로 인해 시련을 당하고 있는데도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임을 모르는 어리석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목이 말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제목을 ‘네가 목마르냐’라고 잡아 보았습니다.
II. 네가 목마르냐?
A. 목마른 이스라엘
말씀은 먼저, 목마른 이스라엘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목이 말랐습니다. 마치 출애굽기에서 수르 광야로 3일 길을 걸으며 먹을 것을 찾지 못하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부르짖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처럼 목마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서 말하는 물을 얻기 위해서 애굽과 앗수르로 갔다는 것은 그런 마실 물이 아니라 일종의 은유입니다.
사람은 물 없이 음식 없이 살 수 없으니 여기에서 물과 음식은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의 필수 조건을 말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이 죽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라가 완전히 파멸에 이르러 모든 백성들의 목숨과 왕족들의 목숨이 사라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을 한 것입니다.
‘시홀의 물’(me shihor)이란 나일강의 물을 가리킵니다. 당연히 나일강은 애굽의 강이고 그들이 시홀의 물을 구하러 애굽으로 간다는 것은 나라의 생존을 위해 애굽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외교라고 말하기 어려운 비참한 상태가 되어서 사정을 구하고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강물은 유프라테스 강물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 난외주에도 그렇게 나옵니다. 당시 유프라테스 강은 앗수르의 강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프라테스 강물을 마시기 위해서 갔다는 것 역시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해 앗수르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갔음을 보여줍니다. 일관성이 있습니다. 애굽이든 앗수르든 바벨론이든 상관없이 그저 자신들을 살려줄 수 있고 생존케 해준다면 거지처럼 구걸해서라도 나라의 목숨을 갈구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적국의 앞잡이 하는 자들이 생기며 번영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살 수 없으리만치 패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이 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살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나라였습니다. 속박 받는 대신에 완전한 자유를 누려야 하고, 황폐해지는 대신에 영육 간에 번영해야 했으며, 수치스러운 대신에 명예롭게 서야 할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영광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겨우 남의 나라의 도움을 기웃거리며 구걸하는 행위에 나라의 운명을 맡겨야 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바라보는 예레미야 선지자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예언을 했으나 그의 설교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죄는 차곡차곡 쌓였고 나중에 나라의 멸망이라는 무서운 삯으로 돌아왔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2:13).
물을 얻으러 어디론가 떠납니까?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신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남의 나라의 좋아 보이는 능력과 영광도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진열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생수의 근원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올바른 관계를 떠난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 우상을 사랑했습니다.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애굽과 앗수르를 비굴하게 오가며 도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목숨을 부지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품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그 진리의 말씀으로 마음을 매일 씻으며 그 진리에 붙어 있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품위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으므로 쓸데없는 부귀영화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로 그들을 유혹할 수 없고 권세를 부릴 수 없으니 그들을 벌벌 떨게 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큰 최고의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는 한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살기도 죽기도 할 것이니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품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렸는데, 어디에서 물을 구하겠습니까? 그리고 물을 혹시 구한다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을 당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생수의 근원에 잇대어 매일 그 물이 흘러나오며 사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삶입니다.
벌써 20여년이 넘은 일입니다. 책을 한권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문을 썼습니다. 서문을 쓸 때에는 어딘가 자연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썼는데 이 일을 위해 치악산에 갔습니다. 여러 날 가뭄이 들어서 나라 전체가 난리였습니다. 초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소방차가 거리에 물을 뿌릴 때였습니다. 그런데 치악산에 들어가서 깜짝 놀랄 광경을 보았습니다. 어른 키의 세 네길 쯤 되는 길이로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으니 물이 충분히 저장되어 있었고, 가뭄의 때에 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산 골짜기에 잇대어 있었던 밭은 끊임없이 산이 공급해주는 물을 받으며 질 좋은 식량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자녀는 그렇게 살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당연히 생수의 샘이 없어진 것이지요.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웅덩이를 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물을 저축해서 하나님께로 공급되는 것처럼 활용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엾게도 그 웅덩이는 물을 가두어 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육체를 탐하고 물질의 욕망을 가져도 그것은 물을 가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매일 매일 은혜를 공급받으며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살다가보면 이상하게 갈급해지는 때가 옵니다. 기도생활을 하는데도 마음이 건조해지는 때가 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기도하고, 힘들면 힘든 대로 하나님이 힘을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어둠 속에서 갈 길을 모르면 두 손을 모으고 이제껏 자신에게 어떤 사랑을 보이사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다시 은혜를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께 잇대어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시시때때로 우리 영혼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왜 없겠습니까? 감각을 가지며 사는 그리스도인도 악인으로부터 해를 당하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으시기도 하시나 어떤 때에는 당하게 하심으로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를 슬기롭게 하십니다. 바로 그 때에 우리는 비로소 순간순간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갈급한 영혼이 채워지고 건조한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촉촉해집니다. 어려운 일을 위해 간구할 때 하나님이 공급해주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잇대어 살고 있음을 느낍니다. 내게는 없으나 주님이 소유하고 계신 사랑과 생명은 언제나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받아서 누릴 수 있는 것이니,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 좋은 것을 버렸을까요? 왜요? 그것보다 좋은 것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로써 그들의 죄는 가중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마지막까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딱 둘 뿐입니다. 하나님 아니면 자기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였는데 그분과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하고자 합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이제 자기 자신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믿으면 충분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영적인 것부터 육적인 것까지 후히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나를 믿습니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저축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웅덩이를 파고 물도 아닌 것을 그곳에 저장하면서 자기를 지켜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웅덩이는 물을 담을 수 없는 터진 웅덩이입니다. 터진 웅덩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원들을 새어나가게 함으로써 하나님 없이는 우리 삶은 실패하는 삶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실패한 삶을 반복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입증 받음에도 불구하고 또 선택하고 선택하는 것입니까?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살 수 없고 마음으로 보는 것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더욱이 우리의 육체를 가진 것은 지상의 자원이기 때문에 우리의 감각으로 모두 만져지는 것이지만 영혼의 자산은 우리의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 육신의 눈은 육신에 커다란 질병이 생기지 않는 한 보는데, 마음의 눈은 진리의 빛으로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으니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의 길을 떠나면 인생의 길을 지탱할 수 없게 됩니다. 왜? 매일 매일 살아가는 힘이 바로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하늘로부터 오는 그 힘으로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자기를 미워하고, 악을 행하는 자를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하여 자신은 하나님의 평안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마음의 등불, 곧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마음의 진리의 등불이 꺼지고 그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육체뿐입니다. 영혼의 목마름은 오직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그분께 붙어 있는 것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은혜에서 미끄러졌다면 속히 회개하고 돌아오십시오. 다시 회복케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앗수르로 애굽으로 비참하게 다니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B. 물을 마시려고 떠남
이스라엘은 물을 구하려고 나일강이 있는 애굽으로, 유프라테스강이 있는 앗수르로 갔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신데 이방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적의 물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 20:11). 이스라엘에 물이 없을 때, 모세를 통해 하나님은 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이 생수는 생명이십니다. 온 땅에 물을 보내시며 비옥하게 하십니다. 하물며 당신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선하시겠습니까? 시편 64편 9절을 그림처럼 보시기 바랍니다.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시 65:9).
메마른 땅입니다. 하나님이 물을 주십니다. 광야 사이로 강을 내시고 하나님이 그 물을 흘러가게 하십니다. 아무 쓸모없던 황무지에 놀랍게 꽃이 피고, 풀들이 돋아나기 시작하고, 수초가 자라고 물고기가 살며, 새들이 깃들고, 땅에 솟아난 물이 작은 개울을 이뤄 강에 자신의 물을 보탭니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아름다운 수로를 통해 쓸모없이 버려진 황무지의 땅이 아름다운 곡식의 열매로 가득한 생명의 들판이 되는 것입니다.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가정을 돌아봐도 아무도 생수를 흘려보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은 원망의 말을 쏟아놓습니다. ‘나는 왜 이런 가정에 태어났을까?’ ‘누구누구는 경건한 남편을 맞이했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사는걸까?’ ‘누구누구는 신앙이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랐는데 나는 너무 비참하구나.’ ‘누구누구는 그릇된 길로 가도 아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으로 자라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다는데 내 자식은 왜 저럴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여러분들을 만나 주신 것은 여러분들을 통해 그 생수를 흘려보내고자 하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차피 개척을 하거나 개간을 하여 황무지를 옥토로 만드는 일을 누군가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물을 보내시고 여러분은 그 물이 받아 비옥한 땅을 끊임없이 가꾸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황무지에 단비를 내리시고 아름다운 수확을 주셔서 황폐한 땅이 아름다운 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네가 … 또 네가 … 어찌됨이냐”(렘 2:18)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은 그렇게 살면 안 되는 사람들이었고, 그렇게 살지 않고도 번영을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영광스럽게 살 수 있는 길이 수없이 많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비굴한 생존을 위해 이방 나라를 굽신 거리는 태도도 이스라엘을 구하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들의 생존을 위해 이방에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의 나라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는 이렇게 애쓰는 이들이 영혼을 위해서는 무엇을 했을까요? 눈에 보이는 왕국이 파멸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나라를 잃어버리고 수치를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방 나라가 번영해서도 아닙니다. 이웃이 더 강해서도 아닙니다. 과거 애굽의 치하에서도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 탈출한 이스라엘이 아닙니까? 이 모든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마음 먹으시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치고 때리셔서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도록 이방나라에게 철저히 짓밟혀 파멸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머무는 그 땅은 사람이 살지 않는 죽은 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를 하나님이 기뻐하셨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이렇게 되었을 때 ‘너무 잘된 일이다. 너희들이 나를 버린 복수이다. 이제 너희가 마지막에 완벽히 진멸되는 일만 남았다’고 하셨겠습니까?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눈에 보이는 왕국이 망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에 보면 예루살렘이 패망한 직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사무쳤습니다. 영광스러운 나라가 이방의 말발굽에 짓밟혔고 아름다운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을 하러 다녔는지 아십니까? 감추었던 보물을 찾아 예루살렘 성을 다녔다는 것입니다.
큰 실패 속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 말고 다른 길이 있다면 가십시오. 고통은 가중되고 징계는 더 커질 것이며, 여러분의 삶은 더욱 황패해질 것입니다. 마지막에 눈 뜨고 살아 있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런 철저한 패배 속에서 죽음을 생각할지언정 하나님은 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는 것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리면 너무 쉬운 것입니다. 진심으로 마음을 깨뜨리고 이렇게 기도하면 됩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모두 마음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를 가엾게 여기시고 용서해주십시오.’ 그렇게 빌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애굽을 찾고 또 다른 앗수르를 찾으며 아주 비굴한 방법으로 생존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면 그것도 막으십니다. 결국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들은 패망 속에서 깨달아야 했습니다. 자신들이 이렇게 나라가 패망하게 된 것은 영적으로 얼마나 커다란 비참에 속한 것인지를 믿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생수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의 마음을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 42:1-2). 팔레스타인의 사슴들이 발정기가 되면 수컷 사슴들은 암컷을 두고 엄청난 결투를 벌입니다. 큰 뿔을 이용하여 목숨을 건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사슴의 신체의 변화가 타는 듯한 목마름입니다. 짝을 찾아 나섰다가 목이 말라 물을 찾기 시작합니다. 저기서 신기루가 나타납니다. 헛것이 보입니다. 미친 듯이 최대의 속력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렸는데 막상 가보면 저 멀리 가 있습니다. 그렇다 보면 사슴은 본능적으로 쓰러져 앞발로 땅을 파다가 죽습니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말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은혜를 사모했던 사람인데 지금 그 은혜에 목 말라 하는지를 어릴 때부터 봐왔던 한 가지 기억, 곧 물을 찾아 뛰어가다 죽어간 광야의 사슴에 비유한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는 것입니다. 3일씩, 일주일씩 금식하며 하나님 나를 만나주셔서 생수에 잇대어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금식까지는 아니더라도 날짜를 작정하고 매일 예배당에 찾아와 나를 만나 달라고 은혜를 부어주시라고 간구한 적이 있습니까? 주를 떠났기에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상황이니 나를 붙들어 달라고 매달려 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많은 실패를 겪으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대신 세상적인 지혜로 해결해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들이 모두 죄로 쌓였고 하나님을 떠나 강퍅해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당신의 자녀들입니다. 그렇게 곤고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스스로 떠나 자기 마음대로 걸어갔고, 바보같이 웅덩이를 파고 하나님 아닌 것으로 보화 삼기로 했기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을 원망하면서 또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부들부들 떱니다. 그런 자들에게 마지막 기다리는 것은 파멸뿐입니다. 왜 이성 없는 짐승처럼 살다가 죽어야 합니까?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그렇게 살도록 그리스도께서 길을 열어 주셨는데, 왜 무지몽매한 삶을 살다가 불행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환경을 흔들어 놓으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세상 것에 단단히 붙어 있기 때문에 한번 마음을 흔들어서 혹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변할까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과 고난을 당하며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하는 사람이, 그래서 아무 것도 되는 것도 없이 인생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사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떠나 또 다시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곳에 서 있고, 유프라테스 강의 물을 마시려고 앗수르 길에 서 있는 것입니까?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문제 해결의 완벽한 방법이 거기에는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보다 훨씬 시련이 많고 가난했지만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지 않았습니까?
저는 21살 때 회심을 하고 20여명 교회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었지만 깜짝 놀란 것은 극심한 가난 속에서 어떻게 저런 놀라운 기쁨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인가였습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에 지어진 쪽방, 다 쓰러져 가는 판자집에서 살면서 밤늦게까지 풀빵을 팔고 통금 전 세벽 4시 경에 새벽종소리 듣고 깨어나서 추운 겨울에 쉐터 하나, 목도리 하나 묶고 새벽기도에 나왔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철학책을 읽고 문학 전집을 읽으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정도는 아니잖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 자녀들이 당신을 사랑하는 관계로 돌아와 모든 행복을 누리기 원하십니다. 물을 마시려고 딴 길로 가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 돌아오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 사랑을 배반하였습니다. 적국들에게 구걸했으나 실패하고 멸망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성공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패망에 이르는 앞잡이입니다.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거기에서 은혜의 생수를 마시십시오. 거기에서 은혜의 자녀를 부르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나님 아닌 데서 인간의 해결을 찾는 여러분들은 주께로 돌아와 회개하십시오. 그곳에서는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돌아와 더 없이 큰 은혜 아래 살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염려에 관하여(2019.09.29._주일오전 3)
3. 고통의 뿌리를 알라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19)
녹취자: 조성용
I. 본문해설
이스라엘은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징계는 남아 있었고 하나님의 책망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한두 가지 악행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의 관계의 본질적인 변화를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II. 하나님의 징계하심
먼저 하나님의 징계하심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에도 우리는 그 아이들을 징계 합니다. 목적이 있으니 가르침이 있는 것이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때에 당연히 우리는 그 아이를 징계합니다. 우리는 흔히 아이들을 사랑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어린 아이 시절에 그들을 도무지 징계를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식당에 가보면 분수없이 날뛰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른들의 모임을 망치고 피해를 주기도 하는데 이런 것은 부모가 집에서 교육을 잘 못 시켜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혼이 나는 것은 부모에게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쉬운 길입니다. 징계 없이 자라면 아이들은 온몸으로 터질 듯한 고통을 당하면서 혹은 사회에 버림을 받거나 소외를 받으면서 깨닫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 그것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징계라고 해서 몽둥이로 때리라는 의미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린아이 시절에 선악의 분별이 없을 때,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는 모든 것이 징계입니다. 빈방에서 생각의 시간을 가지거나 반성문을 쓰게 하거나 잘못했다고 말하게 하는 것 등이 모두 징계입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고백할 수 있도록 징계를 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십니다. 복수하시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였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렘2:19). ‘징계하다’(yasar)는 말은 ‘훈련하다, 징벌하다, 훈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책망하다’(yakach)는 말은 “판결하다, 논증하다, 고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놀라운 것은 ‘징계하다’와 ‘책망하다’의 주어가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의 악, 그들의 반역’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이스라엘이 속박 받고 황폐하게 되고 수치스럽게 된 것은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악을 행하고 반역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 모든 부끄러움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버림으로서 자초한 것입니다. 징계는 단순한 훈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뿌리를 뽑을 정도로 징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악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징계를 발하셔서 나라가 망하고 성읍이 진노를 받기까지 하셨을까요?
A. 악(惡)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악은 ’선의 반대‘입니다. 선이 없는 만큼 ’나쁨‘, 혹은 ’좋지 않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원래 선했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기에 당신의 이 선하심 때문에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도 선했습니다. 좋은 사람은 좋은 일을, 나쁜 사람은 나쁜 일을 합니다. 좋은 사람은 가끔 나쁜 일을 해도 좋은 사람임을 드러내고, 나쁜 사람은 어쩌다 좋은 일을 해도 결국은 그가 나쁜 사람임을 자신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입증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만물들을 선하게 창조하셨고, 당연히 인간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악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나님의 사람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인데 실수로 악한 것이 섞이게 창조하셨다면 그런 분이 어찌 하나님이실 수 있으며, 당신이 의도하여 선과 악을 섞으셨다면 그런 분이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이실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악의 기원의 문제를 가지고 그는 지성의 먼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 없이 떠난 지성의 먼 여행이 올바른 길로 들어설 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철학적 종교였던 마니교 이단에 빠졌습니다. 마니교의 설명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악과 선은 원래부터 따로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물질이 있었고, 선과 함께 악이 있었으며, 그 두 본성이 인간 마음 안에도 있었으니 인간이 선을 행할 때에는 선한 본성이 움직인 것이요, 악을 행할 때에는 악한 본성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교리를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설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악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 같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도 원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악에 끌려 나쁜 일을 행하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마니교의 교리로 모두 설명될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악을 행하는 것, 내 마음에 악이 있는 것은 영원히 내 속에 있는 악에게 나도 피해를 입은 것이니 내가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교리는 정말 신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죄를 짓고 악을 행해도 어찌할 수 없는 나의 악한 본성이 한 일이니 나는 책임 질 일이 없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정말 사악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악는 언제나 자신을 괴롭혔고 마음에 원하지 않는 것을 하는 듯 하면서도 결국은 마음에 이끌려서 악을 행하는 자신을 보면서 수많은 모순 속에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세상의 악의 기원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160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와 세계 철학계는 악의 기원에 관한 어거스틴의 말에 여전히 빚을 지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 이론은 빛이 바래지 않고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선한 세상에 악이 왜 들어왔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악은 무엇일까요? 어거스틴은 아주 간단히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악을 선택함으로 세상에 악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로 하나님의 금지된 법을 어김으로써 들어오게 되었고 그것은 온 인류를 죄 안에 가두고 끊임없이 악을 행하도록 하였으니 이로써 세상에 엄청난 악이 있게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결국 어거스틴에 의하면 악은 하나님의 선이 없는 상태입니다. 악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에 기생해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하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마치 곰팡이처럼 숙주가 있어서 거기에서 양분을 먹으면서 본체를 훼손하면서 자기를 만드는 것이 악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악은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인상 깊은 예화를 들었습니다. ‘우리 몸에 상처가 있다고 하자. 그 상처는 실체인가? 약을 바르고 치료한 후에 그 상처는 어디론가 이동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처가 아물었을 때에 그 상처는 사라져버린다. 몸이 복구되고 나면 상처는 씻은 듯이 낫고 사라져버린다. 이처럼 악은 선의 기생해서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는 것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의 건강한 몸이 선이라면 그 몸에 기생해서 상처를 내는 것이 악입니다. 상처가 점점 커서 경우에 따라서는 그 상처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위력을 떨치지만 그것은 건강함의 결핍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건강함이 회복되면 그 상처는 사라지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악은 선의 결핍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악은 하나님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악을 행함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에 악이 있음으로 세상이 악하게 되었다는 것이 성경적인 기독교의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것들을 세상에 들어오게 하셨을까요? 그것이 들어오면 세상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것을 아시면서도 왜 고통을 허락하셨을까요? 악의 열매는 비참함과 고통인데 왜 그것을 겪게 하셨을까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위대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지 않으셔도 인간이 선택하면 그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닮은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으나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그것을 함부로 사용함으로써 악을 도입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에 대한 설명입니다. 둘째, 인간은 스스로 자유의지로 악이 들어오게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보다 더 뛰어난 지혜를 사용하셔서 인간의 악으로 물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펼쳐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인간이 미처 알지 못했을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과 찬란한 사랑의 빛을 인간이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에 마음이 녹는 듯한 사랑, 눈물이 쏟아지면서 뼈 속 깊이 밀려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은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인간이 결코 누릴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죄를 범하고 악이 들어왔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밤하늘 삼아서 당신의 구원의 계획을 불꽃처럼 쏘아 올리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악을 이 세상에 들어오게 허락하신 놀라운 증거입니다.
따라서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거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있는 상태입니다. 선이 하나님 자신이거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있는 것이라면 악은 그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거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있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질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구분할 때에 자연악(自然惡)과 도덕악(道德惡)을 말합니다.
자연악은 자연의 원래의 질서가 깨져서 도입되는 인간에게 해를 주는 어떤 나쁜 것입니다. 얼마 전에 닥친 태풍이 그렇습니다. 자연의 질서가 깨어지면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러한 태풍으로 수십 명이 생명을 잃고 집들이 무너지고 가옥이 파괴되어 이재민으로 고생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악이 도입되지 않았다면 자연은 완전한 질서 속에서 움직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도덕악입니다.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스스로 원해서 ‘죄’를 선택하는 것에서 오는 악입니다. 이것을 ‘도덕악’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도덕들이 무너지면서 도입되는 악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명령은 아래에 있는 명령은 위의 명령을 향하고 그것은 더 높은 명령을 따름으로써 하나의 목적에 수렴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이 세상에 충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모든 자들에게 상을 주시고 반역하는 자들에게 벌을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찌하든지 당신의 형상을 닮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다른 사람의 지성에 설득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외에 사랑하던 다른 것들을 포기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바꾸어주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선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궁극적 목적에 이바지하고 악은 그것을 훼손하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외모가 아름답다고 할 때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적절한 체구, 팔다리 비율, 눈썹과 눈썹의 비율 등 수십 개의 요소가 충족될 때에 미남 미녀라고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눈꺼풀이 콩깍지가 쓰여서 누군가를 미인이라고 생각하게 되니 그래서 결혼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추녀 추남의 조건은 없습니다. 질서에서 벗어난 모든 것이 추함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조건에 벗어난 자들이기에 소수의 미인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에 이바지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한히 감사해야 합니다. 돋보임의 배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공감하는 웃음소리가 가득하네요.
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사람, 선한 세상, 선한 사회가 되려면 요건이 아주 복잡합니다. 그 규칙에 딱 맞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좋은 사회, 좋은 나라, 좋은 사람, 좋은 백성, 좋은 학교 등등이 됩니다. 그런데 나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별로 애쓸 것이 없습니다. 그냥 개판으로 국정을 운영하면 됩니다. 마음에 내키는 대로 살면 노력하지 않아도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고 난 이후에는 악으로 흐르는 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되기에 그 길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한 길로 가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이 악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입니다.
B. 반역(反逆)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반역이란 무엇입니까? 합법적 통치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것의 조건은 그 통치가 합법적이어야 합니다. 독재정치에 반하는 것은 반역이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가 지나고 나면 사람들이 오히려 칭송하고 그들 때문에 민주화가 이뤄졌다고 공로를 치하할 것입니다. 불법적인 정부에 대해서는 복종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에 대해 우리는 항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항거는 반역이 아니라 나쁜 나라를 좋은 나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나라의 재앙은 국민이 고분고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라의 희망을 꺾는 일입니다. 백성들이 거세어서 여기저기서 옳은 목소리를 내고 이것이 옳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결코 굴복하지 않고 두 눈을 부릅뜨고 살아가는 나라가 희망이 있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합법적 통치에 대한 도전이 반역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합법적인 통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세계에 대한 합법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반항, 반역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에 항거하는 행동은 반역이었습니다. 반역은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에 반대하는 것이었고, 적극적으로는 자기가 원하는 질서를 수립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 봅시다.) 공무원이 정당하게 공무를 집행하려고 나오는데 욱 하는 마음에 그를 때려서 이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러나 공무집행방해와 폭행죄는 성립하지만 반역죄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300명이 조직적으로 지위체계를 갖추고 나와서 길거리에서 만나는 공무원마다 칼로 찔러 죽게 했다면 그것은 충분히 반국가단체를 모의한 것입니다. 그것이 정권탈취에 있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한 반역이 됩니다. 그래서 반역이란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에 반대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자기가 원하는 질서를 펼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질서는 합법적 통치의 질서와는 완전히 다른 질서입니다.
자기의 욕망이 원하는 질서의 수립계획이 면밀하고 우연적이지 않고 광범위하고 치밀하면 치밀할수록 그 반역은 용서받기 어려운 반역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그러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명령에 투덜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반항심에 하나님께 한 번 불순정하다가 후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을 지배한 말씀 중심의 삶의 체계에 근본적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우상에 투영한 자기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겠다는 의지의 담대한 표명입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반역입니다. 반역을 내버려두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반역에 대해 관용하는 나라도 없습니다. 반역을 하면 3족을 멸하고 9족을 멸하고 그와 조금만이라도 피가 섞였으면 모두 몰살시켜 죽여 버렸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반역의 씨앗을 잘라버리려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가 자신의 통치를 확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인죄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반국가단체 조직입니다. 그래서 역모를 일으키고 반란을 일으키고 국가 전복을 하려는 궤계를 행하고 실행하면 용서 받을 길이 없습니다. 무서운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그러한 형국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사랑의 하나님이라도 그들의 반역을 두고 보시면서 당신의 왕국이 무너지고 당신의 자녀가 악에 사로잡히는 것을 지켜만 보셔야 했습니까? 막으셔야 했습니까? 그러면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 징계를 정당화합니다. ‘나라가 망하고 자유인이 속박당하고 아름다운 도읍이 황폐해지고 주민이 살던 성읍이 불탄 도시로 변할지라도, 이렇게 그 징계는 무섭고 뚜렷하지만 너희의 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이 선지자의 의도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진짜 징계 받는 자의 특징은 자기가 징계 받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힘써서 부인합니다. 하나님이 큰 목적이 있어서 나를 연단하시니 나는 욥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평소 살던 삶이 있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얼마나 순전하게 살았길래 고난과 시련 앞에서 나는 순전한 욥처럼 시련을 당한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이 정말 욥에게 맞는 것이었습니까? 대체로 맞았을 뿐입니다. 결국 그도 끝없이 뿌리내린 악을 시련 속에서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고 때리시는데 이것이 자신이 의로운 삶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변명하면서 양심을 속이니, 하나님 앞에 죄인이 의인의 흉내를 내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까 고난은 끊임없이 계속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진 채 영적으로 방황하는 것입니다. 한번이라도 자신의 고난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이것이 나의 순수하지 못한 마음의 병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가? 무엇 때문에 이러한 시련을 주시는 것인가?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음성을 듣고 예수님께로 돌이키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III. 고통의 뿌리를 알라
선지자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고통의 뿌리를 알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패망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영광은 사라졌고 수치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한때 하나님의 신부이던, 그래서 하나님과 신혼의 때를 지내던 이스라엘이 ‘종’처럼 ‘씨종’처럼 되었습니다(렘 2:14). 그의 운명은 속박 받는 것이었고, 남의 왕국에 소유가 되어 종으로 살아가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19).
너무 묘한 것은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을 길게 설명합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말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전쟁의 문맥에서 하나님에 관한 묘사입니다. 하나님을 수많은 군대들을 거느리고 그 위에서 그들을 지휘하고 전쟁을 위해 통솔하시는 용사로서의 하나님을 보여주십니다. 총사령관의 하나님을 보여주십니다. 왜 선지자가 하나님에 관한 이런 묘사를 이 메시지에 덧붙였을까요? 왜 이스라엘이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과 같은 신흥강국에 패망하면서 여기저기 다니며 목숨 구걸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을만한 군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군대가 없으면 나라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백성들을 안녕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군대, 누구의 침략에도 쉽게 굴하지 않고 타격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갖는 것이 국가의 생존 조건입니다. 역사는 언제나 이성의 이치에 맞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역사가 꼬이면 몇 사람 지도자의 마음에 ‘미친 기운’이 들어갑니다. 역사가 E. H. 카는 “역사는 필연도 우연도 아니고 몇 사람의 지도자의 인격에 의존해 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히틀러와 같은 성품을 가진 지도자가 안 나타났다면 이차대전이 안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군대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군대가 없어서 짓밟히고 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당신을 소개하기를, “이 말씀을 하는 나는 만군의 여호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그 만군의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만군은 천사의 군대를 가리킵니다. 천사의 군대(야훼 쩨바오트)를 거느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을 때에는 그들보다 훨씬 강국들을 물리치고 이방의 침공에서부터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우리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를 이긴 것처럼 말입니다. 수나라는 결국 고구려 때문에 망합니다. 고구려는 대단한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고통의 뿌리를 알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고통의 뿌리를 이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져서, 이웃나라가 너무 강해서, 불운이 겹쳐서 등.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고통의 뿌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고통의 뿌리를 두 가지로 알려주십니다. 첫째는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이고, 둘째는 경외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A. 여호와를 버림
첫째는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렘 2:19). 하나님의 두 성함 중 하나만 등장해도 될 텐데 나란히 올려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신을 가리키고, ‘여호와’는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독점적 사랑의 하나님을 지시합니다. 하나님이 여호와로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고 사랑의 관계를 수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충실하게 지키셨고 이스라엘도 그것을 성실하게 지켰습니다. 이스라엘을 아내처럼 자식처럼 사랑하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주셔서 그들로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는 바로 그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에게로 가버린 것입니다. 왜 우상을 섬길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지 왜 우상을 섬겼을까요? 우상은 나라도 지켜주지 못하고 번영도 주지 못하는데 왜 섬겼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대신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세상이 말린 적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상에 푹 빠진 이유는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못하게 하시고 우상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신을 섬기는 것과 세상 욕망이 양립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도 땅의 자원이 남아 있을 때에는 욕망을 따라 살면서 세상이 주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모두 사라지고, 나라도 망했고 황폐화되었으며 이미 고통은 시작되어 버렸습니다.
죄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대담함, 맹렬함, 광기(狂氣)입니다. 이는 각각 의지, 정서, 생각과 관련이 됩니다.
첫째는 대담함입니다. 처음 작은 죄를 짓기 힘들지 한두 번 시도하면 대담함이 정도를 더해서 평범한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담대함을 가지고 죄를 짓게 됩니다.
둘째, 맹렬함입니다. 죄는 한번 불이 붙으면 부스스 꺼지는 법이 없습니다. 조건을 잘 갖추고 상태가 맞아떨어지면 절대로 꺼지지 않습니다. 도화선의 심지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몇 미터씩 도화선을 갖추고 불을 붙이면 바람이 좀 불어도 괜찮습니다. 옆에서 큰 소리가 울려도 문제가 없습니다. 어두울 때나 밝을 때나 도화선은 치열하게 타들어갑니다. 마지막 폭약에 연결되어서 거대한 폭파를 일으키면서 도화선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에 한번 불붙은 죄도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간섭이 없다면 맹렬하게 타오릅니다.
셋째, 광기입니다. 죄에는 광기가 있습니다. ‘미쳤다’라는 것은 힘이 세다거나 어떤 특별한 취미를 가진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행동과 행동 사이의 이성적 연결을 찾을 수 없을 때에 미쳤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그럴 수 없는데 끔찍한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감옥 속에서 미제 사건을 줄줄이 털어놓음으로써 경찰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여성을 상대로 끔찍한 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하고자 추호의 뉘우침도 없이 지냈습니다. 동료 죄수들이 왜 죽였냐고 물으니 ‘너무 예뻐서’라고 반복하며 말했다고 합니다.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에게는 추호의 죄의식도 찾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사이코패스입니다. 이것이 죄의 미친 기운입니다. 이런 죄의 광기라고 하는 것이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든 사람에게 죄가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역사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작은 죄도 분량은 적으나 담대함, 맹렬함, 광기라는 이런 죄의 특성을 가지고 우리 삶을 이끕니다. 그리고 죄의 지배가 광범위하면 할수록, 그리고 강력하면 할수록 만족하지 않고 타오르는 불길처럼, 작은 죄는 더 큰 죄를, 그 죄는 보다 더 큰 죄로 불태우면서 우리 삶을 이끕니다. 미친 기운으로 압도해서 광기에 의해서 삶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적절한 방법으로 그것들을 막으십니다. 그렇기에 이 사회가 이 정도로 유지되고 안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끝까지 이 미친세 가지 기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더 이상 그 사람을 이 세상에 두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여기고 심판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거두어가기도 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은 있는 자들의 행복을 보호하고 안녕 속에서 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모든 해석을 합리화합니다. 반성과 깨달음이 없으니 당연히 자기를 부인할 리도 없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니 깨뜨려질 이유도 없습니다. 깨뜨려질 이유가 없으니 이런 죄의 광기가 사라지겠습니까? 반면 은혜 아래 사는 사람들일수록 논리적입니다. 이성적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자신의 외아들까지 주셨는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 사는 삶은 그렇게 날 위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합당한 삶인가?’라는 끊임없는 반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야단치는 사람이 없어도 눈물을 흘리고 혼내는 선생님이 없어도 가슴 아파하는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통치는 이 세상의 불완전한 법들이 통치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통치입니다.
인간은 결핍과 시련을 겪을 때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의 원인일 수는 있으나 궁극적 뿌리는 아닙니다. 모든 고통의 궁극적 뿌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뼈저린 패망의 길을 걸었고, 나라가 산산히 부서지는 끔찍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외교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끊임없이 보따리를 싸서 애굽으로 앗수르로 오가며 목숨을 구걸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고통의 궁극적 뿌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고통 받는 뿌리는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빛나는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되십시오. 버렸다면 깊이 회개하고 내 인생에 이러한 끊임없는 고통과 시련이 하나님의 징계가 아닌지를 돌아보고 깊이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새 삶을 주실 것입니다.
B. 경외함이 없음
둘째는 경외함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고통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 적극적인 원인은 “여호와를 버린 것‘이었고, 소극적인 원인은 ’경외함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삶을 살게 하고 싶었는지가 아주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여호와를 버린 것‘과 ’경외함이 없는 것‘을 뒤집어 보면 아주 정확합니다.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의 반대는 하나님의 얻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슨 물건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버리다’는 것은 ‘떠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거기 계신 곳에 두고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버린다고 합니다. 부모를 버린다고 할 때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버림받는 분이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어린아이를 대하듯 하나님이 우리에게 묘사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떠난 것의 반대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그분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미움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고, 원망 때문에 떠났으며, 욕심 때문에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친밀하기 때문에, 기뻐하기 때문에,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붙어 있는 삶을 원하십니다.
그러면 누군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을 떠났습니까? 평일에도 이렇게 회식도 마다하고 교회에 와서 앉아 있는데 우리가 언제 주님을 버렸습니까?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곤고합니까??” 이것은 소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다툼을 다루는 “리브 패턴”(히브리말로 다툼, 혹은 논쟁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식입니다. “너희는 나를 버렸다.” “우리가 언제 여호와를 버렸나이까? 우리가 언제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지 않았나이까? 언제 절기를 지키지 않았나이까?” “너희들이 마음으로 나를 진심으로 공경하지 않았다.” “제물도 드리고 소도 바치고 모든 것을 드렸나이다. 나는 그런 것을 받은 적이 없다.” “분명히 드렸는데요.” “나는 받은 적이 없다.” “아니 왜요?” “마음 중심으로 바쳐지지 않는 모든 제물은 안 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 계속해서 이런 논쟁이 오가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온 마음과 몸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요? 놀러가는 것이라고요? 아니에요. 놀러가는 것을 좋아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같이 그와 같이 가니까 그렇습니다. 장소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같이 있으면 그저 좋은 것입니다. 같이 있기를 싫어하고 버리면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팔짱을 꽉 끼고 아무 데도 안 가려고 하는 연인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뒤집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외함이 없음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경외함은 하나님이 무서워서 엎드러지면서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가까이 가고 싶은 것입니다. 제 설명입니다. 다시 말해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 이 두 개가 결합된 것이 하나님 앞에 경외입니다. 이는 공포가 아닙니다. 이것이 없었기에 이스라엘은 징계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터지지 않은 곳이 없었고, 영광이 수치로 바뀌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7). 오히려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친자임을 증거 하십니다.
제가 중등부 전도사를 할 때 아이들이 정말 입에도 담을 수 없는 나쁜 짓을 했습니다. 요즘 같아서는 큰일 납니다. 담임목사님께 보고를 드리고 대걸레로 엉덩이를 때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너희에게 이것이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나는 너희의 진짜 전도사이기에 너희는 혼나야 한다.” 그리고 제가 먼저 엎드렸습니다. “너희를 잘못 가르쳤으니 나를 먼저 때려라.” 그랬더니 진짜 때리더라고요. 그것도 아주 세게. 그 다음에는 “너희들이 맞아라.” 그리고 엄중하게 다뤘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이 신앙이 있어서 모두 울며 회개하며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담임목사님 자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께서 힘들어 하셨지만 예쁘게 봐주셨습니다.
경외함이 없음의 직역은 “너에게 경외함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노예적인 공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인간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두려움과 인격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경외함입니다. 저는 이런 교수님을 뵌 적이 있어요. 가까이 가고는 싶은데 그분 앞에 있으면 한없이 어려워요. 그러나 떠나고 싶지는 않아요. 그것이 일종의 존경심입니다. 그 존경에는 사랑이 묻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 의해서 짓밟히지 않는 공경, 공경에 의해서 사라지지 않는 애틋한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이 경외의 감정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가 살아갈 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자녀 됨의 참된 표는 바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입니다. 경건생활 없이 신앙생활이 불가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경건의 신비에 대해서 한 번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나의 살아온 이 오늘 하루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반성함으로써 거기서 신비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내가 힘들었던 것들에 대해서 위로해주시고 격려해 주시는가하면 그때는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았는데 네가 잘못했노라 하는 하나님의 책망을 듣기도 합니다. 이 경건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사람들 앞에 댕댕거리다가도 하나님 앞에서 혼자 머리 숙이며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고, 잘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순종하겠다고 하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인도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감격의 눈물을 흐리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있겠습니까?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또 우리는 그런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결국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오늘 당하는 고통의 뿌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한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 있습니다. 거기에 모든 안정감과 휴식과 만족이 있습니다. 세상이 파도처럼 흔들릴 때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함이 있습니다. 그것을 잃어버리고 무엇으로 살려고 하십니까? 그것을 떠나 무슨 어마 어마한 것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친 듯이 탐욕을 부리고, 돈을 모으고, 권력을 빼앗고 난리를 부르다가도 의사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몇 달 안 남으셨네요. 암입니다. 말기입니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하루에도 수천 명이 듣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의 뿌리가 과연 돈이나 명예나 이 세상의 뜬구름 같은 권세들이 뿌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들은 양상일 뿐입니다. 그것들이 의미 없고 하찮다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때 주셔서 그분의 나라를 구하는데 이바지 하며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뿐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근본을 바꿔 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헛된 삶을 사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당연히 경건을 잃어버린 것이나 사실 메스미디어 영향이 너무나 큽니다.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적절히 통제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인간성을 형성하지 않도록 상당히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디스플레이어의 기술이 10년 전의 화질과 지금의 화질은 비교가 안 됩니다. 색깔과 그림은 환상적입니다. 이번에 삼성에서 1억 3천만화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옛날에 보던 핸드폰은 벽에 붙은 아이들이 물감으로 그린 포스터라면 이제 미래의 휴대폰은 3D로 공간을 오가는 것이 될 겁니다. 얼마나 엄청난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오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게임 하나를 만드는데도 눈이 부시도록 만들어냅니다. 게임 제작 회사에서 배경음악을 러시아 악단을 사서 만들고 있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 것들 속에 사람들이 매몰되면서 감각적인 곳에 미친 듯이 빠져듭니다. 그래서 빛을 쫓는 나방 같은 존재가 되어서 생각을 안 하고 삽니다. 그러니 성경 보는 일이 얼마나 재미없겠습니까? 3D, 혹은 VR 같은 것들 속에서 살다가 성경책을 읽으니 한 장도 안 넘어갔는데 그 앞장이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 뒷장과 논리적으로 연결을 시키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 안에 흐르는 신학을 발견하고 교리적 일관성을 찾아내며, 그것을 삶을 적용하면서 자신의 삶을 분석하고 세상을 평가하는 일들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어마어마한 수고를 요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이런 일에 아예 훈련 자체가 안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요구하는 것은 똥이나 싸고 배대기나 치는 어린아이에게 100m 달리기를 하라고 출발선상에 세워놓는 것과 똑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설교가 어렵다는 이야기하지 말고 자기가 얼마나 아무 것도 모르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머리를 주신 것은 중심을 잡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생각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생각하라고 지음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공부하는 일에 열심을 내십시오. 그 일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 기쁨을 기도로, 찬송으로, 섬김으로 드러내며 사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빠졌던 어리석은 죄악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고통을 받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운이 나빠서 세상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신앙입니다. 결핍과 시련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이 아닌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들을 때리실지언정 버리시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사랑으로 기다리십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길로 돌아가십시오. 생명과 사랑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