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하기까지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 (살후 3:1~2)
오늘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주고 있는 이 말씀 한절 가지고 우리 은혜를 좀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옥중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옥에 갇혔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 데살로니가 교회가운데서 놀랍게 역사해서 그 지방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믿음 안에 살아가게 만들었던 것처럼 또한 사도 바울이 옥 속에 갇혀서도 기대하는 바는 함께 복음 사역을 위해 부름을 받아 애쓰는 모든 종들을 통해서 이처럼 주의 말씀이 달음질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왜 하필이면 복음이 달음질한다고 표현을 했을까요?
우선 첫째는 이 달음질을 한다라고 하는 의미는 장애물을 뚫고 나아가는 힘 있는 운동의 표시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당시는 로마 시대였기 때문에 아마 많은 운동경기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달음박질하는 사람들이 좌우나 뒤를 돌아다보지 아니하고 오로지 목표지점을 향하여 달음박질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복음이 복음 고유의 목적을 위해서 이렇게 놀랍게 역사하는 일들이 일어났으면 좋겠다하는 소원을 바울이 옥 속에서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달음박질하는 사람들의 힘 있는 달음박질은 달음박질하지 하고 서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밀치게 만들고 그래서 달음박질하며 달려오는 사람들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들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내어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복음이 이렇게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기를 간절히 원한 것이 바울의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이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같은 옥 속에서 쓴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이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시위대와 그리고 그 바깥에서 그리스도예수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는 소식 때문에 옥 속에 갇혔어도 사도바울은 기뻐하고 또 기뻐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가장 커다란 기도제목은 바로 이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달음박질하고 교회 속에서도 주님의 복음이 달음박질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도시에도 주님의 복음이 달음박질해서 이제껏 까지 복음을 듣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복음이 들리고 들어도 그 복음을 말 이상의 것으로 듣지 못했던 사라들에게도 성령의 지극히 큰 능력과 권능으로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가 체험되기를 우리는 갈망하고 또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배 중에 우리들이 모였을 때 가장 간절한 소원은 바로 이런 소원 하나님의 복음이 예배 중에 모인 모든 성도들의 마음속에 달음박질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뭐라고 분명하게 반응하지 않고는 그 자리에 앉아 있을수 없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우리들은 바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교회의 소망은 오로지 이런 하나님의 깨끗하고 피 묻은 선명한 복음이 우리에게 퍼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인간의 혈기나 인간의 자랑이나 사람의 지혜로가 아니라 성령의 지극히 큰 능력과 거역할 수 없는 권세로써 주님의 그 깨끗하고 피 묻은 복음이 우렁차게 하나님의 교회에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마치고 내려올 때 사람들이 저의 설교를 듣고 못마땅해 하거나 혹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할 때 마음이 아픈 것이 아니라 아무 반응이 없을 때 얼마나 하나님의 복음이 가냘프게 울려 퍼졌으면 그렇게 긴 시간 하나님의 복음이 울려 퍼졌는데도 그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이 기도의 제목은 바로 자신과 그리고 동역자들의 사역 속에서 그러한 불행이 없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오늘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믿음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복음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받는 증거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멸망하는 증거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쁨의 이유가 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절망의 이유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실망하는 이유가 되지만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소망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을 우리들이 소망하고 바라지만 그러나 복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어떠하든지 누구에게든지 거절 받지 않는 그러한 복음을 만들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넣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교회 속에 가득 차 습니다.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이미 세상은 복음이 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신앙이 없는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미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진정으로 신앙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좋아하는 사람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갈 때에 사람들은 더 빨리 이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교만한 이야기인줄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교회에 오는 많은 사람들은 우리 교회가 자기들이 다니던 교회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옵니다. 최근에도 저는 몇몇 지체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기 제일 힘들었을 때가 언제냐고 물었을 때 몇몇 지체들은 공통적으로 대답했습니다. 교회 와서 시간이 흘러가면서 여기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자기는 신앙생활 하기가 너무 힘들었데요. 보세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참으로 변화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역설적으로 또 신앙생활이 하기 힘들었던 때가 언제냐 물으니까 맨 처음에 왔을 때 이 사람들은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느꼈을 때 신앙생활 하기 굉장히 힘들었대요. 낙심이 들고 내가 마치 학교에 공부를 따라가듯이 내가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대요. 그러나 후자에서의 낙심은 자기를 겸손하게 하는 낙심이지만 전자에서의 낙심은 자기를 좌절시키는 낙심이에요. 보세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여러분들은 하게 될 겁니다.
자, 그러면 어떡해야 합니까?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진리의 말씀을 고수하고 그리고 우리들이 마땅히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의 그런 순수한 신앙을 붙들고 살아가려고 애를 쓸 때 많은 사람들은 아마 우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기가 너무 힘겹다고 말할 텐데 그런 사람들은 내버려 둬야지 옳습니까? 그들까지도 건져내고 또 그들까지도 신앙생활 잘하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그 대안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어떻게 우리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거룩한 성도의 삶 시대와의 영합을 배격하고 그리고 정말 신앙의 참된 본질을 찾아가려고 하는 그러한 철저한 노력 속에서 어떻게 우리들이 그러한 것들을 이루어 갈 수 있겠는가, 그 대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영혼 속에 달음박질치는 거예요.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것 이 위에는 참된 위안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가장 간절한 마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불붙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불을 던지러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점에서 바울이 했던 이 기도가 우리의 가슴속에 간절히 깊이 사명감으로 와 닿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 모인 가운데 달음박질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거역할 수 없는 말씀의 권세가 그들의 오만한 자아를 짓밟고 지나가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밖에 몰랐던 그 사악한 욕심과 세상적인 야망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 짓밟히고 유린되는 역사가 일어나 옛사람이 부서지고 그리고 자기만 잘났다고 생각하면서 서로 쌓아 올렸던 모든 가증한 편견과 형식적인 신앙들이 무너진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무너진 그 터 위에 새롭게 자기를 건축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에게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갈등, 근심, 염려, 쓸데없는 것들에 사랑, 관심 이런 것들로 온통 마음이 소란스러워서 도무지 기도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향해서 뭔가 가난한 마음을 가질 수도 없을 때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를 거꾸러뜨리시는 것입니다. 그때 잃어버렸던 삶의 초점은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고 무기력한 삶들은 용기와 그리고 생명을 회복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삶에 대해서 아무런 기대도 없던 사람들이 이제 분명한 기대를 갖게 되고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자기를 바로 이 삶의 자리에 세워주신 것으로 인해서 이 전에는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이유가 되었는데 이제 은혜를 받고 보니까 바로 그러한 삶의 환경을 주셨기 때문에 주님을 더 간절히 붙들고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주일을 지날 때마다 요즘에 와서 좀 힘듭니다. 그 힘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욕구가 점점 높아져야 되는데 설교자는 조금 은혜 끼치고 나서 만족하고 듣는 사람들은 그저 아 좋다 그리고 만족하고 그런 삶을 우리들이 교회 속에서 계속 살아갈 때에 거기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 희망도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은혜롭지요.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지체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하고 좋지요. 그러나 정말 비유를 하자면 말이죠. 비유를 하자면 그래요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아놓고 놀다 가잖아요. 그거는 만조 때에 파도가 밀려와도 씻겨 내려가 그러나 그 앞에 높이 쌓여있는 방파제를 허물어 버리는 데에는 그런 정도의 파도 가지곤 되지 않아요. 해일이 일어나야 되요 해일이 그래서 그냥 집채만 한 바위가 집채 가지고는 상대가 안 됩니다. 부산에 내려갔을 때 뱃사공이 설명을 해주는데 말이죠. 60몇 년도에 사하라 태풍이 일어났을 때 해일이 일어났는데 어떤 정도로 일어났는지 아냐고 그러면서 보여주는데 높은 산이 하나있어 섬인데 저걸 넘었습니다. 뭐가? 파도가... 그게 자기 평생에 본 그 동산을 넘은 유일한 파도예요. 그 광경이 얼마나 장엄했겠는지 생각을 해봐요. 우리에겐 이러한 역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확 밀려와서 잡다한 인간의 사상 멍청한 생각 그리고 하나님 앞에 똑바로 걸어가던 그 길을 바로 걸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꾀부림 이러한 모든 것들을 단숨에 다 쓸어버려서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말씀의 위대한 능력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온 땅을 뒤덮는 놀라운 역사가 어떻게 일어납니까? 노래하고 찬양하면 그런 때가 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거역할 수 없는 말씀의 권세가 가득하게 임할 때 그 때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의 능력 앞에 거꾸러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이 그를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그를 도와주고 그에게 충고하고 그에게 가르쳐주고 살아갈 수 없었던 그런 삶을 그런 말씀의 부흥이 그의 영혼 속에 일어나게 될 때에 그때에 그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을 변화되어 갑니다. 그렇게 때문에 지금 이 상황에서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그리고 목회자인 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우선 여러분 자신이 영혼 속에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더 뜨거운 사모함 더 큰 말씀의 놀라운 권능이 여러분들에게 임하기를 나는 너무나 바랍니다.
오늘 새벽에 아침 시간에 기도하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일들이 하나 있습니다. 그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은 말씀만 막 읽게 되는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는 것 자기가 예전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거꾸러 진 것이 여러 번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 그 이유는 교만입니다. 이제 충분히 거꾸러졌기 때문에 이제는 다시 말씀 앞에 내가 무릎을 꿇어야 할 정도로 그렇게 형편없는 수준의 사람이 될 리는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니까 옛날에 하나님의 말씀의 축복을 그렇게 많이 받았어도 요즘은 하나님의 말씀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교만함을 생각할 때에 저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말 불쌍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직까지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변명할 기회가 있지만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변명할 기회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 위에 교만해져서 이제는 자신이 무슨 하나님의 말씀에 통달한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겸비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그가 얼마나 썩어가고 있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똑바로 해야 합니다. 내가 많은 성경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와 내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enjoy한다는 말과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서 건져내어 주셔서 빛 가운데로 불러들이시고 진리아래서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들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왜? 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어느 순간에 가서 맥이 푸리는 것처럼 모두 나사 빠진 사람이 되어 버리는지 아세요? 하나님이 왜 은혜를 주셨는지를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신 것은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 주신 거예요. 그러면 자기를 부인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날마다 알아가야 되요. 의무가 필요하지만 의무감 하나 만으로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의무감도 필요하지만 의무 이상의 그 무엇이 우리의 신앙에 힘을 주어야 합니다. 그때야 우리들은 진정한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게 이렇게 매일매일 커다란 세상에 쾌락이나 즐거움이 없어도 오늘 하루도 피곤한 육체를 가지고 잠들면서도 아 감사하다 오늘도 주님을 섬겼구나, 그리고 또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은 매 순간순간 주님을 의지하면서 주님을 위해 살려고 애를 썼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일은 더 잘살겠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기뻐야 돼요. 거기에서 즐거움을 느껴야 된다고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늘 이렇게 착한 마음 선한 결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기 위해서는결국 매 순간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역사해서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놀라운 그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해요. 나는 너무너무 슬퍼요. 한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생명이 걸린것처럼 받아들이다가 어느 순간에는 감상하는 사람으로 변해버리는 사람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분노합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이 마음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한 교인들과 자기의 말씀 사역에 만족해하는 목회자가 모여서 만드는 교회는 돼지우리예요.
존 오웬 목사는 왕실 목사였습니다. 왕에게 설교하고 그에게 신앙을 가르쳐 주는 청교도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하여튼 십대 때는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지 죽을 지경에까지 도달했다고 하니까 진짜 천재적인 거예요. 그 사람이 시간만 나면은 당시 같은 시대 사람이던 존 번연의 설교를 들으러 다녔습니다. 존 번연은 안수도 받지 않은 평신도였습니다. 직업은 뭐였는지 압니까? 솥이나 냄비를 때우러 다니는 땜장이였습니다. 당시로서는 부랑무식한 사람이었죠. 그 고매한 박사가 늘 기회만 있으면 그 사람의 설교를 들으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때 하루는 왕이 불러서 물었습니다. 오웬 박사 당신의 최고의지성인이고 박사까지 된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무식한 땜장이의 설교를 들으러 다닙니까? 그때 존 오웬은 아주 명쾌하게 말했습니다. “폐하 제가 만약 번연과 같이 그렇게 능력 있게 설교해서 사람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면 여기 바울의 표현대로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에 번연처럼 그렇게 사람들 가운데 달음질치게 할 수만 있다면 폐하 저는 이 학위보다도 더 많은 박사를 버릴 수 있습니다.” 그 번연이 하루는 설교를 하고 단을 내려오는데 어느 교인이 아서 번연의 손을 잡으며 얘기했습니다. “선생님 아 정말 놀랍습니다. 어쩜 그렇게 설교를 잘하십니까?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번연이 뭐라는지 아십니까? “예, 저도 잘 압니다.” 자기가 설교 해놓고 어떻게 그렇게 얘기할 수가 있어요. “저도 잘 압니다. 왜냐하면 당신과 악수하기 직전에 설교단을 내려올 때 마귀가 나한테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러면 안 되요. 저는 말씀으로 철저하게 교인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믿어지는 몇몇 교회에 가서 집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나타나는 가장 가슴 아픈 특징이 자기들은 모르지만 제 눈에는 보였습니다. 그리고서는 우리 교회가 빠질 위험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줄 압니까? 말씀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에는 부흥 강사 구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몇몇이 돌아가면서 설교 합니다. 왜? 교인들이 워낙 듣는 수준이 있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이 와가지고 뻥까는 이야기 해봐야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습니까? 들은 거나 안 들은 거나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감탄하게 하시려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너희는 이렇게 믿어야 한다. 그리고 이걸 잘못했다, 그리고 이 길로 가야된다, 그걸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근데 따라가지 않는 표지판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대로 행하지 않는 안내판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소변금지 써놨는데 그 밑에서 오줌 누면 그 표지판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말이에요. 여기는 절벽입니다라고 써놨는데 표지판 부수고 그 길로 쭉 가는데 표지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이거예요.” 하나님은 너무 슬퍼하십니다. 이러한 일들을...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경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그런 아주 커다란 위험이고 그리고 매우 잘못된 행동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매순간순간마다 바가지 하나 들고 빈들로 나아가며 만나를 구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 오늘도 우리는 하늘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양식과 우리를 변화시켜주시기 위해서 만져 주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의 자비로운 손길 때로는 격렬하게 우리를 뒤흔드는 그 하나님의 손길 없이는 그 말씀이 우리가운데 달음질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 우리가 저절로 거룩한 성도가 될 것이라고 우리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예배에 나온다면 11시 15분 예배인데 11시 25분에 덜렁덜렁 몸만 못나온다 얘기예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교회처럼 모이는 사람들 속에서 말씀이 자기가운데 달음질하기를 사모하는 그런 기대를 읽을 수 있느냐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화시킬 자들을 변화시키십니다. 정말 놀랍더라고요. 하나님이 말씀으로 역사하시는데 기가 막히게 빗겨가요. 하나 은혜주시고 건너뛰고 뒤에 받고 옆에 사람 성령 받고 건너뛰고 그 옆에 사람 성령 받고 족집게로 뽑아내시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거저 역사하지 않으세요. 준비된 사람들의 마음속에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겸비해야져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주 훌륭한 목회자를 여러분들 가졌습니까? 제가 아니라는데요. 덩그렁 하게 교회당 이거 하나밖에는 우리가 가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겸비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매어 달라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고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우리들이 이 말씀의 역사가 여기서 멈추도록 우리들이 물러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더 크고 분명한 역사로 이전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새롭고 큰일을 우리 앞에 목격하여 우리들이 이곳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이곳이 두려운 곳이라고 고백할 수 그런 성도들이 되어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